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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급생활자 대출한도 대폭 높여/국민은

    ◎새달부터/무보증 가계자금 5백만원까지 봉급생활자는 4월부터 보증인없이 5백만원까지의 가계자금을 신용으로 대출받을수 있다. 국민은행은 21일 지금까지 3백만원인 봉급생활자의 가계자금 신용대출 한도를 5백만원으로 늘리고 직위와 직급에 따른 신용대출 한도도 올려 오는 4월1일부터 시행키로 했다. 이에 따라 봉급생활자의 경우 그동안 신용대출을 받으려면 본인은 물론 보증인 1명의 인감증명등 관계서류를 첨부해야 했으나 앞으로는 본인의 신분증명서류와 인감 아닌 도장만으로도 5백만원까지 신용대출을 받을수 있게 됐다.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는 봉급생활자에는 7급공무원·준위·경위·소방위·3년이상 재직교사·일반기업체및 정부투자기관대리·평기자 등이 포함된다. 이밖에도 60세이상의 노부모를 모신 세대주와 제조업체 5년이상 근무근로자·국민은행의 상호부금이나 적금을 3분의1이상 낸 예금주에게도 보증인없이 5백만원이 대출된다. 또 봉급 생활자가 아니더라도 기술사·건축사·약사·도선사 등 국가공인자격을 취득한 사람에게는 1천만원까지 신용대출을 해주기로 했다. 국민은행은 이와 함께 봉급생활자의 직업과 직위에 따른 무보증신용대출의 한도도 단계별로 올렸다. 인상내용은 △5급공무원·소령·경정·주임교사·경력5년이상기자등 C등급은 종전 5백만원에서 7백만원 △4급공무원·판검사·중령·총경·교감·언론사 부장등 B등급은 종전 7백만원에서 1천만원 △3급공무원·준장·경무관·교수·교장·언론사 이사대우등 A등급은 종전 1천만원에서 1천5백만원 △1급공무원·국회의원·소장·은행전무·언론사 부사장급이상등 특A급은 종전과 같이 2천만원이다. 이밖에 은행거래실적과 직업에 따라 개인신용을 평가,60점이돼야 5백만원을 신용대출해주던 것을 50점으로 낮추는등 대출금액별 평점도 각10∼5점씩 하향조정했다. 현재 신용대출은 연12.5%의 금리에 대출기간은 1∼5년까지이다. 국민은행측은 지난 90년 2월부터 시행한 무보증대출의 실적이 현재 23만구좌 3천5백억원에 이르고 있으나 연체율이 일반대출의 0.72%보다 낮은 0.46%에 머물러 이같이 신용대출폭을 넓히게 됐다고 밝혔다.
  • 비핵화 검증방안 논의/핵통제위 오늘 첫 회의

    남북한은 19일 상오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제1차회의를 열어 한반도의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한다. 한편 양측은 18일 하오 전화통지문을 교환,핵통제공동위 위원장등 구성인원명단을 서로 통보했다. ▲남측=위원장 공로명(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장)부위원장 심기문(외무장관 특별보좌관)위원 정대규(통일원 자문위원) 변종규(대통령비서실 안보비서관) 이부직(국방부 군비통제관실 육군준장) 이승구(과학기술처 심의관)홍석범(총리실 심의관) ▲북측=위원장 최우진(외교부 순회대사)부위원장 박광원(인민군소장)위원 김경춘(원자력공업부국장) 장장천(외교부 연구원)김수길(〃 〃)최영관(인민군 대좌) 김만길(조평통 서기국참사)
  • 「3개 분과위」 남북한위원 명단

    남북한은 6일 전화통지문을 교환,「남북 합의서」에 규정된 고위급회담 정치·군사·교류협력등 3개 분과위원회의 명단을 각각 통보했다. ▷정치분과위◁ ▲남측 △위원장 이동복 국무총리특별보좌관 △위원 민병석 대통령비서실외교안보비서관 김달술 통일원자문위원 최규학 총리실심의관 강근탁 외무부〃 신광옥 법무부〃 신정국 방부소장 ▲북측 △위원장 백남준 조평통서기국장 △위원 김완수 외교부순회대사 조상호 조국전선중앙위서기국부국장 최성익 조평통서기국부장 정영춘〃〃 참사 심태진 정무원사무국상급심의원 조성대 조선중앙방송위처장 ▷군사분과위◁ ▲남측 △위원장 박용옥 국방부정책실군비통제관 △위원 김희상 대통령비서실외교안보비서관(준장) 임대순 통일원자문위원 이영호 국방부군비통제관실(육군대령) 김영진 국방부북한정보부정보운영과장(해군대령) 조상훈 외무부심의관 채준석 국방부판단관 ▲북측 △위원장 김영철 인민무력부부국장(준장급) △위원 박웅수 인민군소장(준장급) 박성진〃대좌(대령급) 이길청〃〃 김민현〃〃 박림수〃〃 원동연 조평통서기국부장 ▷교류협력분과위◁ ▲남측 △위원장 임동원 통일원차관 △위원 김인호 경제기획원대외경제조정실장 송영대 통일원자문위원 박운서 대통령비서실경제비서관 유득환 상공부차관보 신현웅 문화부문화정책국장 박수창 총리실심의관 ▲북측 △위원장 김정우 대외경제사업부부부장 △위원 김채성 정무원사무국부장 손종철 무역경제연구소부소장 김이순 문화예술부국장 류창석 국가계획위원회부국장 정덕기 조평통서기국부장 김승국 로동청년사부주필
  • 총리회담 남한측대표 교체/한갑수차관 대신 박용옥준장

    ◎정 총리,북한에 통보 정원식국무총리는 6일 북한 연형묵총리에게 전화통지문을 보내 고위급회담 남측 대표단 7명 가운데 한갑수경제기획원차관을 박용옥 국방부군비통제관(준장)으로 교체했다고 통보했다. 이와관련,정부의 한 당국자는 『북측이 우리측의 송응섭대표(합참1차장·대장)보다 격이 낮은 김영철인민무력부 부국장(준장급)을 군사분과위 북측 위원장에 임명,통보해옴에 따라 우리측도 이에 맞춰 군사분과위 위원장 직급을 당초 계획보다 하향조정케 됐으며 이 과정에서 한차관을 대표에서 제외케 됐다』고 밝혔다.
  • 중장 1명등 장성 32명 배출/장교 10여만 길러낸 ROTC

    ◎72개 대서 연 3천∼4천명 임관/“군번은 아우가 빨라”… 쌍둥이장교 탄생/현역상사 4명의 아들들 소위계급장 ○…지난 61년에 창설된 ROTC(학군사관후보생)제도는 63년에 제1기생을 배출한 이후 해마다 3천∼4천명의 초급장교를 임관시켜 지금까지 모두 10만여명의 장교를 양성했다. ROTC 출신 초급장교들은 대부분 2년4개월의 의무복무기간을 마치면 전역하나 10%정도는 장기복무를 지원,직업군인의 길을 걷는다. 그간 ROTC 출신장교 중에서는 중장 1명,소장 8명,준장 23명 등 장성 32명이 배출됐다. 창설 당시 전국 16개 종합대학에만 설치됐으나 현재는 72개 대학으로 늘어났다. ○…올해 임관식에는 성균관대 출신의 쌍둥이 육군소위가 탄생,화제가되고 있다. 김상철소위(23·문과대 문헌정보과 졸) 김현철소위(23·농대 농업경제과 졸)가 주인공. 이들은 69년 8월20일 5분 간격으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로 대학입학부터 ROTC를 지원,졸업·임관식까지 함께한 뒤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형 김상철소위는 『대학에서 성적은 아우보다 앞섰으나 군사훈련성적으로 정해진 군번은 아우가 앞섰다』며 『아우가 더 훌륭한 선임장교』라고 말했다. ○…이날 임관식에는 현역 육군상사들의 아들 4명이 소위로 임관,아버지 보다 계급이 높은 군인이 태어났다. 김영일소위(22·경희대 영문과)는 『어린시절 아버지가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자랑스러워 ROTC를 지원했다』며 아버지 김유근상사(51·비호부대 선임하사)에게 거수경례로 임관신고를 했다. ○…서봉룡소위(23·명지대 생물과)는 아버지 서웅경씨(48)도 ROTC 6기로 임관한 예비역 장교여서 2대에 걸친 ROTC장교 부자가 됐다.
  • 동학연구 반평생… 「갑오혁명사」 펴내(지역문화를 가꾼다)

    ◎정읍문화원장 최현식씨/전북 곳곳 40년간 답사… 사과·증언 수집/“내고장 역사 알아야” 향토사강좌 개설 정읍문화원장 최현식씨(69)는 동학혁명의 발상지인 정읍을 지키며 반평생을 동학혁명 연구에 몰두해온 사람이다. 전북지역에서 동학연구의 1인자로 꼽히는 최씨가 지난해 3월 문화원장을 맡으면서 마련하고 있는 향토사 강좌 「갑오동학혁명」이 전북지역 주민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고 있어 그의 집념이 헛된 것이 아님을 입증시키고 있다. 한달에 1∼2회 정읍문화원에서 열리는 한 시간짜리 이 강좌에 노인·부녀자·학생 등 각양각색의 주민들이 한 회에 50명이상 찾아들어 지금까지 수백명이 강의를 경청했다.주변 고등학교나 직장·사회단체에서는 출장강의까지 요청해 와 10여곳에서 강연을 펼치기도 했다.구수한 입담에 사랑방 얘기하듯 풀어나가는 최씨의 강좌는 지난 40여년간 발로 뛰며 수집한 기록과 고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명강의로 정평이 나있다. 『내 고장의 역사를 모르면서 애향심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훈계조로 강의를시작하는 그는 동학의 발생원인과 전개과정,녹두장군 전봉준의 전투상황,일군에 의한 패퇴·체포·처형 등의 순서로 동학혁명군의 행적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나간다.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을 표방한 전봉준장군이 「민족주체사상을 역설한 혁명가」라고 정의하는 최씨는 일부 학계에서 동학혁명을 농민전쟁으로 격하시키는데 대해서는 크게 분개한다. 『동학교도가 주가 된 동학혁명은 봉건압제의 수탁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농민대중에게 정치적 의식을 깨우치게 했고 불합리한 봉건체제의 낡은 권위를 뒤흔들어 국민생활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역사적 대사건』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봉건조선의 폐쇄성,일제의 민족탄압등에 의해 동학혁명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데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민중적 시각에 의한 과대평가와 반대의 비하경향이 혼존해 그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일제하에서는 비도로 몰려 쉬쉬했고 해방후 한동안은 동학란으로 몰리는 형편이었으니 연구가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그렇기 때문에 동학의 현장에 사는 우리 주민들이 누구보다 동학혁명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게 그의 큰 바람일 뿐이다. 전북 고창출신인 최씨가 정읍을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된 것은 6·25사변때 피난이 계기가 됐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바로 고창에서 태어났으나 청년시절 이후 정읍을 터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기이한 인연을 갖고 있는 최씨는 청년시절 어느날 「전봉준실기」(장봉선 지음)를 접하고나서부터 동학에 대한 의문과 관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지난 60∼70년대 서울신문 정읍주재기자,전북일보지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동안 언론계에도 몸담았으나 동학연구에 대한 집념때문에 다른 일은 포기했다. 서울 명동 산업은행자리에 있었던 국립도서관을 수도 없이 들락거렸고,호남뿐 아니라 동학에 관한 기록 한두군데라도 비치는 지역이 있으면 지방 곳곳을 뒤져 동학의 흔적을 찾았다. 근대사의 격란중에 지방마다 토박이를 쉽게 찾기 힘들었지만 후손들을 수소문해가며 동학혁명의 주요인물 5백∼6백명의 인적사항을 캐냈다. 이를 자료로 하여지난 80년 국판 3백50쪽 분량의 저서 「갑오동학혁명사」를 발간했는데 그에게는 이 책이 가장 소중한 재산이자 업적인 셈이다. 『지난 60∼70년대 동학연구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가리고 다녔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힘들지만 그 의욕만큼은 못버리겠다』며 『내후년이면 동학혁명이 1백주년을 맞는데 내 노력이 동학에 대한 바른 평가가 정립되는데 큰 몫을 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했다.
  • 군,「폭탄주」·「놓털카」 추방운동/병영화제 2제

    ◎“부대사고 70%가 과음탓” 분석… “위하여” 구호 재고론도/육본 인사참모부,새생활음주법 마련 군내부 사고의 70%가 잘못된 음주풍토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는 분석에 따라 사고방지와 대민신뢰증진 차원에서 건전한 음주문화 정착캠페인이 군에서 펼쳐지고 있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는 최근 「건전한 음주풍토 확립방안」을 마련,과거 10여년간 유행해온 「폭탄주」와 「벌주」「공동운명주」등 변칙주를 추방하고 술잔돌리지 않기와 2차 안하기 등의 새생활 음주법을 실천,과음으로 인한 사고를 없애자고 제의했다. 군이 지적한 대표적인 잘못된 음주관행은 ▲술잔을 놓거나 털지도 말고 소리도 내지말라는 「놓털카」와 단숨에 술잔을 비우는 건배▲맥주와 양주를 적당량섞은 폭탄주와 벌주·공동운명주 등 변칙주▲술잔 좌우돌리기▲큰잔돌리기▲2차·3차를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행위 등이다. 잘못된 관행으로 회식은 곧 과음이 되고 폭음·만취행위로 연결되어 결국 건강을 해치고 가계에 압박을 주며 각종 질병을 유발할 뿐 아니라 모든 문제발생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군의 한 관계자는 이같은 그릇된 음주문화가 군에 정착되게 된 것은 일본의 하사관 문화와 미국의 저질사병 문화가 잘못 유입,정착된 결과라고 분석하고 21세기를 맞는 우리 군은 새로운 파티문화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방부와 합참의 고위관계자들도 『이제는 술이 장병들의 사기진작이나 단결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죽자살자 식으로 마셔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축배와 건배제의는 각자 주량에 맞게 본인 재량에 맡겨야 할것』이라고 말했다. 군관계자들은 건전한 음주문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대장부이며 못마시는 사람은 졸장부」라는 왜곡된 의식을 불식해야 하며 건배를 할때 「위하여」같은 구호도 재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원재활용 군장병도 나섰다/쓰레기 분리수거로 폐품모아 입원병사 돕기/선봉부대 환경보호작전 군장병과 군인가족들이 쓰레기분리수거운동에 앞장서 지역사회의 모범이 되고 있다. 육군선봉부대 1천5백여 장병과 군인가족들은 지난해 6월부터환경보전과 폐기물재활용을 위해서는 군이 쓰레기 분리수거에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영내에서 나오는 각종 쓰레기를 재활용이 가능한 것과 쓸수 없는 것으로 나눠 수거하기 시작했다. 한국자원재생공사에서 지원해준 재활용품 보관용기 8세트를 막사마다 비치하고 내무반과 행정반·PX등에는 자체 제작한 소형 분리수거함을 설치했다.이후 장병들은 빈병·깡통·폐지등 재활용이 가능하지만 전에는 일반 쓰레기와 섞어 버리던 것을 따로 모았다. 1백여가구가 사는 이웃 군인아파트와 관사에도 분리수거함 3세트를 비치,군인 가족들도 장병들과 호흡을 같이했다. 장병 정신교육과 주민 반상회를 통해 자원 재활용과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홍보했다. 장병들과 군인가족들이 적극 호응,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와 일반쓰레기가 구분돼 처리하는데 비용과 시간이 줄어들었다. 재활용품을 판 돈은 각 내무반장명의로 통장을 만들어 저축해 두었다가 입원한 동료 병사들에게 위문을 가거나 모범 사병을 돕는데 썼다. 군인가족들은 재활용 쓰레기를 처분한 돈으로 환경미화원에게 장갑과 내의를 사주거나 소년소녀가장을 돕고 있다. 부대장 박호장준장은 『국민 각자가 환경오염의 원인자이며 피해자라는 인식아래 하나뿐인 우리강토를 살리자고 출발한 분리수거가 환경오염을 줄이고 근검절약하는 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창훈병장(24)은 『처음에는 분리수거가 귀찮았으나 점차 재활용의 귀중함과 환경오염의 심각함을 깨닫게되면서 이제는 몸에 배게 됐다』고 말했다. 3군 사령부는 이날 하오 선봉부대 정신교육관에서 환경처와 경기도청·군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군부대 쓰레기 분리수거 시범대회」를 갖고 앞으로 전부대로 쓰레기 분리수거제를 확산시킬 방침이다.
  • 이청준장편 「인간인」(이달의 소설)

    ◎역사·권력의 억압 탈피,자유 희구/해방전후∼80년5월까지의 인간사 두권으로 완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살면서 가끔은 부닥치게 되는 질문이다.질문은 늘 질문으로 끝나기 십상일 뿐 그 답 찾기란 흡사 맹구우목 아니겠는가.천 길 바다속의 눈먼 거북이가 천년에 한 번씩 수면위로 떠오르다가,그 중에 우연히 몸을 얹어 쉴 만한 나무토막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그게 바로 깨달음이렸다. 중견작가 이청준씨의 장편 「인간인」은 그 깨달음이란 화두와 그것의 비극성을 다룬 역작이다.88년 출간된 장편 「아리아리강강」을 고쳐 1부 「아리아리랑」으로 하고,2부 「강강술래」를 완결편으로 하여 펴낸 이 소설은 『인간사의 무명과 참담스런 배이』를,역설적이게도 『현묘한 섭리』로 풀어보고자 한 지혜의 소설이라 하겠다.1부에서 작가는 해방 전후를 시대 배경으로 하여 풍운아 남도섭의 운명을 권력의 역학관계 속에서 풀어보이고 있다.「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의 드라마틱한 역전과 재역전이 탐정소설 구조 안에서 시종 긴장감을 자아낸다. 힘을 가진 자로 부상하기 위해 밀첩으로 쫓는 자가 되었던 도섭,하지만 해방이 되자 다시 쫓기는 몸이 되고,한순간 회복하지만 거듭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는 그의 삶의 족적은 타락한 역사의 순환논리를 암시한다.한번도 정당한 선택을 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혹은 한번도 자신의 본 마음을 명찰하지 않았던 운명에게 채워진 윤회의 덫이었던 것이다.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옥죄어지는 게 그 덫의 속성이니,출구없는 방에 갇힌 악연의 운명을 상징한다 하겠다. 2부에 이르면,그 윤회의 덫 혹은 덫의 바큇살을 끊어내려는 작가의식을 엿볼 수 있다.70년대 말에서 80년 5월까지를 배경으로 하여 역시 숨어사는 사람들과 그들을 쫓는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가 그것이다.대개 반민주적 상황에 저항하던 사람들이거나 사회구조적인 모순으로 인해 개인적 한의 마디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숨어산다.그들이 갇혀 있는 한 윤회의 덫은 강고하다.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5월 광주로 함께 출정하게 함으로써,작가는 그 덫을 벗기려 한다.여기서 작가는 단순히 출정하는 모습을 박진감있게 보여주기보다는,한의 사람들 사이에서 잉태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대심리를 통해서 그 덫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이렇게 볼 때 『순정한 어둠의 장막을 헤치며 일출처럼 눈부신 한 아이의 모습이 그를 향해 환하게 걸어오고 있었다』는 마지막 문장은 여러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결국 이청준씨의 『인간인』은 역사와 권력과 인간의 함수관계 속에서 인간의 운명을 묘파하면서 그 운명으로부터의 자유를 희구한 소설이라 하겠다.역사와 권력의 소용돌이는 인간에게 늘 억압의 굴레를 덮씌웠고,하여 굴레 속의 인간의 한의 존재였다.이럴 때 인간의 삶은 무엇이며,지금 나는 누구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작가는 「의미심장하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 사정수석 김유후씨/총무수석 김재열씨/청와대,임명

    노태우대통령은 1일 청와대사정수석비서관(차관급)에 김유후 광주고검검사장을(사진 오른쪽),총무수석비서관에 김재렬 전남성대골프장사장을 각각 임명했다. 김영일전사정수석은 경남 김해에,임재길전총무수석은 충남 연기에 각각 민자당공천자로 결정돼 사표를 제출했다. ◇김사정수석 약력 ▲서울출신·51세 ▲서울대 법대졸 ▲고시 사법과 15회 합격 ▲법무부 기획관리실장·법무실장·검찰국장 ▲부산지점장·광주고검장 ◇김총무수석 약력 ▲경북 달성출신·60세 ▲육군포병학교졸 ▲28사단 포병사령관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수부장 ▲준장예편 ▲한국해외개발공사감사 ▲남성대골프장 사장
  • 김재열 총무수석/소탈한 성품의 예비역 준장(얼굴)

    포병간부후보생 13기 출신의 예비역 준장.소탈한 성품이면서도 업무처리는 치밀하고 깔끔하다는 것이 주위의 평. 전역후 한국해외개발공사감사를 역임한 뒤 남성대골프장 사장으로 6년간 재임.노태우대통령과는 동향으로 지난 67년 육군대학에 함께 입교,첫 인연을 맺었고 골프장사장 재직중 자주 만났다고. 테니스와 골프가 수준급.부인 조정옥여사(54)와의 사이에 1남3녀.
  • 수확 적은 아키바레/장려품종에서 제외

    국내쌀 가운데 밥맛이 좋은 것으로 평가돼 일반미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추청」(아키바레)벼가 농가에 장려하는 볍씨품종에서 제외됐다. 농림수산부는 23일 하오 과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실에서 이병석차관 주재로 관계관과 대학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종자협의회를 열고 「추청」벼가 이제는 다른 신품종에 비해 밥맛이 떨어지고 단위당 수확량이 적으며 병충해에 약해 장려품종에서 제외하고 준장려품종으로 격하시키기로 결정했다.
  • 국방부 대변인 윤창로준장

    국방부는 7일 신임 대변인에 교육정훈국 차장 윤창로 준장을 임명했다.
  • 국방부대변인 윤창로준장 내정

    국방부 대변인에 교육정훈국차장 윤창로준장이 내정된 것으로 28일 알려졌다. 손풍삼대변인은 일신상의 이유로 28일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 군수뇌 후속 인사

    ◎국방부 정보본부장 이양호중장/기무사령관 서완수중장/육군참모차장 김진선중장/수방사령관 안병호중장 정부는 9일 국방부 정보본부장에 이양호공군중장(합참제3차장),국군기무사령관에 서완수중장(육사19기·특전사령관),육군참모차장에 김진선중장(육사19기·수방사령관),수도방위사령관에 안병호중장(육사20기·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특전사령관에 김형선중장(육사19기),을 임명했다. 정부는 또 국방부의 획득개발국장 최경근소장(갑종151기)과 합참의 최준식(육사19기)박광영소장(육사19기)등 3명을 중장으로 승진 군단장으로,김경일준장등 9명을 소장으로 승진시켜 사단장으로 각각 발령했다.
  • 한반도 긴장완화 4강 다각협력 절실

    ◎「탈냉전시대와 한반도」 국방연 국제학술회의 지상 중계 한국국방연구원(원장 송선용)이 주최하는 제4차 국제국방학술회의가 4일 한·미·영·일·소등 5개국 국방문제전문가와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방연구원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탈냉전시대의 한미관계」라는 주제로 오는 8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회의에서는 소연방체제의 붕괴로 인한 세계의 전략환경변화와 한반도 주변정세,한미 안보관계,통일한국의 안보정책등을 주요의제로 연구논문발표와 토론 순으로 진행된다. 세르게이 로고프 소련 과학원정치군사연구부장은 소련정세및 전략환경의 변화와 관련,『소련의 공동노력으로 군축은 큰 진전을 볼 수 있으며 전술핵무기의 대폭감축이 이루어질 경우 현재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의 75∼80%를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방부의 박용옥준장은 『한반도의 평화추구는 남북당사자의 단계적 노력및 주변 4대강국의 적극적 격려및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과학원 세르게이 로고프 부장과 국방부 박용옥준장의 논문을 요약한다. ◎한반도 평화추구 방안/박용옥 국방부 준장/미·소·중·일 참여, 새 안보기구 모색을/교류확대·불가침선언뒤 군비통제 단계로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남북한의 군비통제,통일문제는 남북한의 상호불신으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태평화 속단은 잘못 한국은 남북한 관계개선,상대방의 정치·사회체제 존중을 위한 상호신뢰구축의 토대에서 전쟁위협의 제거와 동질성 회복을 위한 다방면의 교류 및 협력을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의 반공정책철폐를 위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주한미군의 철수와 핵무기철거,남북한 군감축등이 우선적으로 실시되어야 하며 팀스피리트훈련 중지와 북한방문인사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으며 불가침선언이 남북고위회담의 의제로 채택되기를 원한다. 한국은 북한의 제안을 적화통일노력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북한은 한국이 개방을 유도,체제를 붕괴하여 독일식 통일을 시도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통일은 한국이 북한을 정복,흡수통합하는 방식이어서는 안되며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한의 노력과 주변강대국의 적극지원하에 모색되어야 한다.유럽에서의 미소관계개선은 한반도에 그 영향이 파급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동북아시아의 정세변화를 예견하는 것은 잘못이다. 남북한이 취할 수 있는 평화추구방안으로는 상호체제인정 관계를 확립하고 불가침선언의 동시채택 및 교류와 협력의 증대를 모색하고 최종적으로 군비통제,정전협정의 전환,핵위협으로부터 한반도의 보호등이 모색될 수 있다. ○4강의 교차승인 필요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한신뢰구축과 평화공존에는 주변 4대강국의 다각적 협력이 필요하다. ○핵사찰 거부에 큰 불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한국의 대중국 국교정상화 및 북한의 대미국 및 일본과의 외교관계개선을 통한 긴장완화,남북한의 경제교류협력,4대강국에 의한 군사적 신뢰구축과 지역긴장완화추구를 위한 노력 및 집단안보체제를 통한 지역평화 모색등이 있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 안전협정서명 및 핵사찰수락조치를 이행해야 명실상부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평화추구는 남북당사자간의 단계적 노력과 주변4대강국의 적극적 격려및 지원이 있어야 한다. ◎소 정세와 전략환경 변화/세르게이 로고프 소 과학원 정치군사연부장/소 연방 와해땐 동북아 불안정 초래/일 군사력도 위험요소… 군비 통제 불능땐 재난 2차대전이후부터 90년까지 세계는 미소로 대표되는 양극체제로 유지되었다.미소 양국의 군비통제노력과 91년 소련내부의 변혁은 양극체제의 와해를 가져왔다.소련의 장래는 ▲핵무기가 중앙통제하에 놓여있는 느슨한 연방형태 ▲독립공화국들의 경제·정치 연맹국 ▲소연방의 완전한 붕괴중의 하나일 것이다.현재 소련정세에서 신생독립국들의 러시아계 거주자들에 대한 배타적인 정책으로 러시아민족주의가 대두될 조짐이 있는데 이는 러시아 공화국및 기타 공화국에 위협적인 요소이다.소연방의 급격한 와해는 군비통제과정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공화국내 분규와 소요사태는 체제의 급격한 와해시에 발생할 문제들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소연방의 경제적혼란·정치적소요및 인종분규는 동유럽·동북아시아 등에 부정적 파급효과를줄것이다. ○새 다극체제 예측 불허 새로운 다극체제는 ▲소련의 와해에 따른 결과 예측의 곤란 ▲일본과 독일의 경제력과 군사력간의 불균형및 향후 방향 ▲동서대립이 남북충돌의 형태로 대체되는 위협등으로 도전을 받고 있다. ○미 소 핵 80%감축 가능 많은 지역분쟁이 냉전의 종식이후에도 존속하고 있다.이런 분쟁은 미소대립시절의 이념적충돌과는 거의 무관한 제3세계의 민족·종교·영토문제에 그 원인을 두고 있다.걸프전의 승리로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세계정세의 주요관심사항에 새로운 균형을 바탕으로 한 모든 주요국가들간의 신국제안보체제의 창설이 요구되는 시점이다.많은 서방전문가들이 통제된 소연방의 군사위협이 개별공화국의 불안정하고 비숙련되고 독재적인 지도자에 의한 위협으로 대체될지 모른다고 믿는 것 같다. 미국및 기타 주요국가들은 소련 군사력의 분산과 소연방의 사회경제적 붕괴방지를 위해 신생독립공화국과의 외교수립시 공화국독립의 인정과 소연방이 체결한 국제협약에따르는 의무의 수락을 전제조건으로 해야한다. 미소의 공동노력으로 군축은 큰 진전을 볼 수 있을 것이며 특히 전술핵무기의 대폭 감축으로 현재 보유핵무기의 75∼80%정도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념의 시대는 지났고 미소의 경제적이해는 더이상 상충하지 않고 있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 하

    ◎혹한속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 돌파/평양서 재편성… 「인해전술」과 싸우며 남하/51년 7월 대대장으로… 금성·금화서 공방전/저격능선 「고지쟁탈」 전투중 미 유학 명령 1950년 10월28일 하오 6시45분.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벌써 어둠이 깔렸다. 제7연대 제1중대는 5대의 트럭에 분승,주둔지인 압록강변을 떠나 초산읍으로 철수했다. 다음날인 29일 새벽 5시쯤 제1대대 수색대를 태운 군용차 한 대가 초산읍에서 다시 남쪽을 향하여 떠났다. 제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북한공산군의 출몰이 염려되는 구용동 남쪽 고개를 수색·점령·확보하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다. 그날 아침 6시30분쯤 제7연대 제1대대는 군용트럭을 타고 초산읍을 출발,남쪽으로 내려가 고장에서 연대본부와 합류했다. 이때 중공군은 고장 남쪽에 있는 풍장 일대에서 아군이 남하하는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제2대대와 제3대대는 이들 중공군을 일제히 공격,돌파작전을 개시했다. 우리 공군 전폭기들이 중공군 진지를 강타하면서 제7연대의 돌파작전을 근접지원해주었다. 중공군은 남으로 좀 밀려나는 듯했으나 그들의 두꺼운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달이 없는 어두운 밤이 됐다. 지형은 폭이 50∼1백50m 가량 되는 좁은 계곡이 길게 남북으로 놓여 있고 계곡 양쪽의 산줄기들은 가파르고 높았다. 이날 밤 12시 정각,중공군은 야간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의 야간전투는 혀를 찰 만큼 아주 능숙했다. 얼마 안가서 제7연대의 전방부대가 무너지고,전방에서 흩어진 연대병력은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달아나고 있었다. 후방으로 멀리 떨어져서 재편성을 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방에서는 이미 다른 중공군 부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숨 돌릴 새없이 달려들었다. 재차 흩어져서 다시 더 먼 후방으로 달려가 보아도 그곳에서도 전황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 제7연대는 중공군 제40군예하 1개 사단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중공군은 우선 병력면에서도 우리 제7연대의 약 3배나 됐다. 군용트럭 수백 대와 사단포병 야포 6문,대전차포,기타보급품을 버린 채 제7연대는 낭림산맥의 지맥인 유령산맥 깊은 산중으로 이리저리 흩어져 들어갔다. 중공군은 이 분산병력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악착같이 우리 부대를 추격하며 남쪽으로 통하는 길목을 모두 차단하고 있었다. 중공군과의 싸움에 들어가기 전 필자의 지휘하에 있던 병력은 제1중대원 약 1백60명,배속된 중기관총반원 약 10명,귀순 동화된 북한공산군 포로 남녀 약 25명,간호학생 2명,한국청년단원 약 10명 등 모두 2백명이 넘었으며 이 중 여자 등 비무장인원을 제외한 전투가능 인원은 약 1백85명 정도였다. 필자는 이 전투가능병력 중에서 약 60명을 잃은 채 잔여인원을 이끌고 유령산맥으로 들어갔다. 높은 산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곳은 벌써 깊은 겨울이어서 뜯어 먹을 풀조차 없었다. 중공군을 만나면 싸우기도 하고 피해 달아나기도 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포위망을 계속해서 뚫어봐도 눈에 보이는 것은 중공군뿐이고 아군은 도대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중공군과 만나 교전이 이루어질때마다 아군의 병력은 자꾸 줄어만 들었다. 중공군 6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는 데서 우리 제7연대의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당시 제7연대에는 8명의 영관급 장교가 있었는데 이 중 6명의 손실이 있었다.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제1대대 부대대장 조현묵 소령,연대정보주임 김재강 소령 등 4명은 포로가 됐고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은 전사했으며 연대작전주임 조윤재 소령은 무참히 학살당했다. 포위망을 뚫고 용케도 살아나온 사람은 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나 김용배 중령은 그후 전사했다. 더욱이 장병들의 손실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내가 덕천지방 동쪽 송정리에서 대동강을 건너 남중리의 적군과 최후의 교전을 갖고 포위망을 뚫은 뒤 제6사단 사령부에 도착,사단장 장도영 준장에게 신고를 한 것은 그해 11월9일 오후 3시경이었다. 나는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와 사단장에게 첫번째로 신고식을 갖는 장교가 된 것이다. 군악이 울려 퍼졌다. 군인 20명을 3렬 횡대로 하여 세워놓고 마지막에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2명을 세웠다. 중대장인 나는 3렬횡대의 6보 앞 중앙에 섰다. 나는 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신고했다. 『경례! 바로! 제7연대 제1중대장,이대용 대위는 적포위망을 돌파하고 사병 20명,민간인 간호학생 2명을 지휘하여 1950년 11월9일 사단사령부에 도착했기에 이에 삼가 신고합니다. 경례! 바로!』 사단장의 위로와 격려사가 있었다. 군예대 여자 가수가 나의 목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어주었다. 사단사령부에서 할당해주는 민중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박태숙·정정훈양에게 하사관 1명을 딸려 서울로 떠나 보냈다. 깨끗이 보호하고 온 처녀들이 도중에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든든한 하사관을 경호원으로 배정,서울까지 가게 한 것이다. 11월22일까지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김용배 중령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고 후방에서 신병들과 육군종합학교 출신 신임 소위들이 보충돼 제7연대는 11월25일 재편성을 했다. 병력숫자로는 제7연대가 제대로 모습을 갖춘 셈이었다. 재편성이 끝나기가 바쁘게 제7연대는 덕천 남쪽 북창으로 이동하여 중공군과 대결하게 됐다. 북창과 가창 사이에 있는 미럭고개에서 큰 접전이 벌어졌으나 신병들인 아군이 중공군의 공격을 견뎌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공군의 진격은 계속되었고 우리 제7연대는 평양 상원 서흥 시변리 삭녕 전곡을 거쳐 다시 38선에 배치되었다. 북한공산군이 남침한 1950년도 저물어 갔다. 그해 12월31일 밤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린 제7연대 제1중대는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서울 북방 창동에 배치되었다. 해를 넘겨 1951년 1월6일 경기도 광주를 거쳐 백암리로 가는 도중에 나는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대대장 대리로 제1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영하의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듯이 불어댔다. 1·4후퇴라고 일컬어지는 설상의 피란민대열이 남으로 남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도 각종 보급품들이 달리고 장티푸스까지 만연하자 지칠 대로 지친 모양이다. 중공군은 양지리 북쪽에서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제7연대는 그동안 중공군과 싸우면서도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엔 대단한 적군으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도 별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불패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그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약 2개월간 제1대대를 지휘하고 나서 대대장이 새로 부임함에 따라 부대대장 직책을 수행하게 되었다. 용문산지구 전투,춘천지구 전투,구만리지구 전투,풍산리지구 전투,백암리지구 전투를 끝으로 나는 그해 7월9일 제7연대를 떠나 제2사단 제32연대 제1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10월27일에는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금화지구 파조봉­이실골 전투,금성지구 전투를 하면서 제32연대 제3대대는 금성 바로 앞산인 424고지까지 1개 소대를 진출시켰다. 여기서 중공군과 매일같이 폭격전과 수색전으로 투덕거리며 한겨울을 보냈다. 미군과 교대하고 금화 쪽으로 빠져나왔다. 제32연대는 제3대대는 금화 동북방에 있는 저격능선에 배치됐고 한국군에도 임시계급제도가 도입되어 일선 보병대대장들에게는 1952년 3월부터 모두 육군중령 계급이 부여됐다. 저격능선은 지형상 항상 긴장상태에서 적과 공방임무를 수행해야 했달. 그러던 중 나는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2년여의 전진을 씻고 부산항에서 미국행 군용수송선을 탄 것이 1952년 9월2일이다. 이때의 군복은 카키색 군복이고 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6·25가 일어났을 때,내가 춘천도서관으로 가던 때의 군복도 카키색 군복,모자도 카키색 군모였다. 카키색 군복으로 맞이한 나의 6·25는 카키색 군복으로 막을 내렸다.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내가 겪은 6·25」중

    ◎낙동강서 대반격… 두달 뒤 압록강 진격/“남북통일 축원” 강물 담은 수통 이 대통령에/국경 도착 이틀 만에 “중공군 침입”… 후퇴 명령 1950년 6월28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개시한 지 불과 4일 만에 수도 서울은 적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공산군은 빠른 속도로 남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무방비상태의 국군은 후퇴를 거듭해야만 했다. 서부전선의 아군 방어선을 조정하기 위해 중부전선의 제6사단을 남으로 철수시키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은 계속해서 하달되고 있었다. 내가 지휘하는 제7연대 제1중대는 홍천의 삼마치고개,원주의 신림고개에서 남진하는 북한 공산군을 맞아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의 장갑차 5대를 파괴하거나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저들의 뛰어난 화력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결국 7월4일에는 전국과 멀리 떨어진 충주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피란민들의 행렬은 홍수를 이루며 지나갔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렇게 탄식했다. 『군인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우리 연대 작전과에 있던 여자 타자수가 조금 전에 이 앞을 지나갔어.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어 정말 피란민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 그의 얼굴 표정은 군인의 국가에 대한 책임,국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충주농업학교 교실에서 하룻밤을 지낸 나는 7월5일 아침 일찍이 제1대대 제1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음성으로 이동했다. 기름고개를 향하여 북쪽으로 전진하던 중 마침 북쪽에서 내려오던 북한 공산군과 조우하게 됐다. 전투가 시작됐다. 아군의 사기는 그런대로 중천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기름고개를 넘어서자 적군이 줄지어 다가왔다. 우리 부대는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해 적 대부대를 깨끗이 섬멸하고 계속 전진했다. 이때 나는 적탄에 맞고 쓰러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몸 아홉군데에 총알이 박혔다. 중상중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났나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헐렁한 팬츠 하나만 걸친 채 담요에 둘둘 싸여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워낙 부상이 심해 결국 부산에 있는 제5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 4층에 있는 중환자실에 눕혀졌다. 대소변도 받아내는 형편이었다. 의정부가 고향이라는 간호장교 최 소위가 이를 맡아 해냈다. 입원 3일 만에 군의관 이경룡 대위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됐다. 내 몸에 박힌 직사 포탄조각을 여러 개 빼냈다. 수술 후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그때마다 간호장교 최 소위는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고맙기 그지없었다. 나이팅게일의 정신이 아무리 투철하다 해도 최 소위의 헌신은 참으로 감사했다. 먼훗날 그녀가 수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까닭없이 그리고 한없이 가슴에 와닿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내가 제5육군병원을 떠난 것은 입원한 지 달포가 더 지난 8월24일이었다. 다시 나는 제7연대 제1대대 후방지휘소로 갔다. 8월26일 저녁 제6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박격포탄이 비오듯 날아왔다. 신령역 부근에도 적의 박격포탄이 무수히 떨어졌다. 북한 공산당이 낙동강 교두보의 일각을 뚫고 화산 일대를 점령한 뒤 퍼붓는 포탄들이었다. 제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제7연대 제1대대를 연대에서 빼내 사단직할로 하여 화산의 적을 공격케 했다. 이때 나는 제7연대 제1중대장으로 복귀하여 화산지구 탈환임무를 맡았다. 제1중대장으로 복귀해보니 내가 병원에 있었던 50여 일 동안에 중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부상을 당할 때 함께 적군과 싸웠던 소대장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1소대장 한도선 중위는 내가 제1중대를 떠나자 나의 후임이 되어 중대를 지휘했으나 문경새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임으로 제2소대장 강구석 중위가 중대장이 되었으나 그는 곧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빠져나갔고 다시 그 후임으로 제3소대장 손종구 소위는 낙동강전투에서 가슴에 적탄을 맞고 후송 도중 숨을 거뒀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제1중대에 장교가 한 명도 없어서 중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가 중대장대행이 되어 부대를 지휘,전투를 했으나 또한 낙동강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제1중대장에 부임한 도진환소위는 내가 중대장으로 복귀하면서 제1소대장이 되었으나 며칠 후 화산전투에서 전사했다. 2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중에 제7연대 제1중대는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하고 1명의 중대장이 중상을 입는 손실을 가져왔다. 세계 전쟁 역사상 불과 2개월 동안에 4명의 중대장이 전사한 예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1개 중대에서 중대장들의 소모가 이렇게 격심했으나 사병들의 소모는 말할 수 없이 대단했다. 이는 또 한국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기간은 1950년 6월부터 그해 9월 중순까지의 기간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전사자 통계숫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화산 옛 성터 일대에서 숨박히는 격전 끝에 우리는 북진을 시작했다. 문경 원주 홍천 춘천 화천 김화 평강 복계 세포 회양 원산 양덕 성천 순천 개천 희천 회목동 고장 초산을 거쳐 압록강변 신도장마을에 우리 제1중대를 선두로 제7연대 제1대대가 도착한 것은 1950년 10월26일 하오 2시15분이었다. 만주에 연결된 뗏목다리 위에는 수백 명의 피란민들이 가득히 차 있었다. 이미 만주로 건너간 수백 명은 줄지어 중국 마을 통천구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초산읍에 본부를 두고 재편을 시도하던 북한 공산군 제8사단은 사단장 오백룡 지휘하에 주로 위원읍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모두 만주땅을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했다.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지시로 나는 남북통일을 축원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떴다. 그리고 제1대대에 배속되어 있는 57㎜ 대전차포 철갑탄으로 만주와 연결되어 있는 뗏목다리를 끊어버렸다. 강물에 군화를 적시고 손도 씻다가 하오 4시경 압록강에 먼저 도착한 제1중대를 제외하고 제1대대 전병력은 약 10리 서남쪽에 있는 초산읍으로 내려갔다. 나는 이장원 소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를 신도장분주소(경찰지서) 일대에 배치하여 위원읍으로 통하는 자동차도로를 차단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뗏목다리를 화력으로 엄호케 했다. 김덕출 소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는 제1소대 좌일선에 연결하여 강물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기슭에 길게 배치하고 박상호 상사가 지휘하는 제3소대는 제2소대에 연결되어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며 강 기슭에 배치했다. 중대 선임장교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서근석 소위의 화기소대 본부와 제1중대 본부는 제2소대지역내에 위치시켰다. 결국 제7연대 제1중대는 강건너 중국대륙을 바라보며 약 1천6백m에 달하는 거리에 늘어서서 국경 경비임무에 들어갔다. 1910년 8월29일. 격변하는 세계정세에는 눈을 감은 채 나라 안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권력싸움에 눈이 멀던 우리 조상들. 병들고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왜놈들에게 나라를 뺏기고 국경 경비의 권리를 그들에게 넘겨준 35년간,그 후 남북한 화합을 못 하고 이념의 갈등을 겪으면서 국토가 양단되어 5년,통틀어 40년의 세월을 한을 안은 채 고통 속에서 지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통의 족쇄가 풀리는 첫날이다. 남북을 통일한 배달의 남아들이 압록강 국경선에서 타국땅을 바라보며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가슴은 감격에 벅찰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국경선에서 또 하룻밤을 자고 나니10월28일이 되었다. 이날 하오 5시경 초산읍에 있는 제1대대 본부로부터 제1중대에 다음과 같은 청천벽력과 같은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온정일대에서 제2연대가 중국군에게 패하여 후퇴중에 있다. 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제1대대는 연대의 일부로서 온정으로 남하한다. 제1중대는 10월28일 하오 7시 초산읍에 집결하라』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상/「내가 겪은 6.25」

    ◎“적 대규모 남침”… 휴일 아침 전령이 보고/도서관 가다 귀대… 한여름 방한화 신고 출전/빗속의 춘천방어전서 적 자주포 5문 노획/첫날 동기생 8명 전사… “무비유환” 한탄하며 퇴각 6·25전쟁이 일어난지 41년 37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동족상잔의 전쟁은 민족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토는 아직도 두 동강이 나 있고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분단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국군 제7보병연대 1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이대용 예비역 준장(66·육사 7기·현 한국해음주식회사 사장)이 말하는 당시의 처절했던 전황을 몇차례 나누어 싣는다. 이 장군은 월남전 당시 주월 공사로 근무중 끝까지 대사관을 지키다 월맹에 의해 5년간 억류됐다가 우리 정부의 끈질긴 교섭으로 1980년 석방,귀국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경 야음을 틈타 남침한 인민군의 총격으로 이내흥 중위는 춘천 북방 모진교 부근에서 전사했다. 이날 하룻동안 이 중위를 비롯,일선 중대장인 육사7기생 8명이 전사했고 다음날인 26일엔 10명이,27일엔 5명이 목숨을 잃어 불과 3일 동안에 23명의 장교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고 약 7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시작된 육사7기생 전사자수는 한국전쟁 3년1개월 동안 모두 1백27명이나 됐고 행방불명자(적군의 포위 속에서 전사한 것으로 간주됨) 수는 19명,부상자는 약 4백명에 달했다. 이는 동기생 5백64명에 비해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때의 내 나이는 25살이었다. 직책은 육군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이었다. 그날은 휴일이어서 나는 춘천시 죽림동에 있는 하숙집에서 조반을 들고는 춘천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읽을 참이었다. 카키색 군복 상하에,긴 고무장화를 신고 정모에 비닐 커버를 씌운 뒤 거울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하숙집 대문을 나설 때 비가 내리기에 우비를 꺼내 입고 봉의산 기슭에 있는 도서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지 「쿠쿠쿵 쿠쿠쿠쿵」하는 포사격소리가 들리더니 「따따따」하는 기관총 사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일요일에도 가끔 사격훈련을 하는 부대가 있기에 나는 이를 무심히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보냈다. 그래서 나는 앙드레 모로아가 쓴 책 내용을 머리에 되새기며 가던 길을 재촉해 걸었다. 내가 춘천시내 공회당 앞까지 걸어갔을 때 맞은 편에서 철모에 전투복 차림의 한 군인이 내 쪽을 향하여 뛰어오고 있었다. 제1중대 전령 안기수 하사였다. 그는 거수경례를 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인민군(북한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나에게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연대본부로 집합하라』는 제1대대장의 명령을 구두로 전달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지방도시에선 전화를 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춘천시민들의 가정에는 전화기가 한대도 없었다. 심지어 38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즉각 출동명령을 받고 부대 복귀를 해야 할 중대장들의 영외숙소에 조차도 군용전화가 한대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태고시대의 통신이랄 수 있는 연락병에 의한 연락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대장급 이상이 돼야만 그 집에 군용전화기 한대가 가설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중대장이나 소대장에게 연락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특히 장병들이 고이 잠자고 있는 새벽,그리고 사병들 대부분이 외박을 나가 있는 휴일의 연락은 더욱 그만큼 더디게 마련이었다. 6월25일. 북한공산군 이청송 소장이 지휘하는 제2보병사단은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돌파,춘천을 향하여 남침을 감행했다. 이로부터 4시간반이 경과한 뒤에야 1중대장인 나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다. 이날은 특히 일요일이라 많은 사병들이 외박을 나갔으며,연대본부 영내에 남아있는 몇명 안 되는 사병들도 잠이나 실컷 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정신상태는 이완될대로 이완될 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비상연락을 받는 장교들마저도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비상소집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맥빠지는 일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매번 연대의 비상소집명령에 따라 집합해 출동하려 하면 38선 가까이에 있는 부대로부터 「북한공산군이 다시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후퇴해 버렸다」는 연락이 오는 것이 통례였다. 그럴 때마다 비상소집된 장교들의 맥은 빠지게 마련이었다. 나는 이날도 또 싱겁게 끝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연대본부로 향했다. 연대본부 영문 앞에 다다랐을 때,소양로 쪽에서 확성기를 단 군용스리쿼터 한대가 달려오면서 『외출이나 외박을 나온 사병들은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소속부대로 돌아가라』는 가두방송을 했다. 그때 『이번엔 심상치 않구나』 하는 생각이 내머리를 스쳤다. 급히 연대 정문으로 들어서서는 제1대대장 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기습 돌파한 1개 사단 이상으로 추산되는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38선 남쪽에 배치된 우리 제7중대와 제9중대를 격파하고 남진을 계속,현재 춘천 북방에 있는 옥산포에 육박하고 있으며,제9중대장은 이미 전사하고 내평방면에 있는 제7중대는 통신이 끊겼다』는 상황설명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어 긴장된 목소리로 『얼마 안 있으면 우리 연대본부에도 북한공산군의 포탄이 쏟아질 것 같다』고설명했다. 나는 하숙방에 전투복 군화 철모 등을 두고 왔지만 이미 나에겐 그런 것들을 가지러 다시 하숙집까지 갔다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중대 보급계 박 중사를 불러 중대보급창고에 가서 재고품 중에서 내 몸에 맞는 전투복과 철모와 군화 등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가 가져온 것 중에 다른 것들은 모두 내몸에 맞았으나 군화는 너무 작아서 신을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가 다시 가지고 온 것은 겨울에 신는 방한화였다. 다행히 내 발에 맞아 한여름에 엄동설한용 방한화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신었다. 외박이나 외출을 나갔던 사병들이 속속 중대로 복귀하고 있었다. 황급히 출동준비를 하고 제1중대 인원을 점검하니 상오 9시20분 현재 40여 명이 미귀상태였다. 나는 중대 선임하사관에게 외박으로부터 돌아오는 사병들을 계속 전방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하고 중대병력을 지휘하여 춘천 북방에 있는 우두산 북단에 구축해 놓은 방어지지로 달렸다. 제1중대를 포함해 제1대대 병력이 우둔산 일대의 방어진지에 배치,완료된 것은 상오 11시경이었다. 정오가 좀 지나자 북한공산군의 선두부대는 자주포를 앞세우고 옥산포에 들어오고 있었다. 봉의산 뒤에 배치된 우리 사단초병은 아주 효과적으로 옥산포의 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좀 당황한듯 전진을 멈추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나의 제1중대 병력은 산발적으로 적과 교전했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더니 금방 날이 샌다. 6월26일 아침이 됐다. 내리던 비는 멎었다. 구름 속의 햇볕이 수라장의 싸움터를 비춰 주었다. 상오 8시경,제1대대는 우두산에서 일제히 뛰어내려 서쪽에 있는 옥산포로 달려들었다. 우리 사단포병은 정말로 절묘하고 무섭게 옥산포에 포탄을 퍼부어 우리 보병부대의 공격을 지원했다. 의외의 기습을 받은 옥산포의 북한공산군 자주포 부대와 보병부대는 북쪽으로 후퇴해버렸다. 우리 부대는 적군 자주포 5대를 노획했다. 이중 한대는 후퇴하는 북한공산군 스스로가 파괴한 것이고,다른 한대는 아군이 2.36인치 로켓포탄 위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가까운 거리에서 뒤쪽을 보고 사격,일부를 파괴시켰다. 그리고 나는 소제 권총한정을 노획하여 허리에 찼다. 옥산포는 지형이 평탄했다. 그래서 우세한 병력과 화력,기갑부대까지 있는 북한공산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래 머물러 있을 곳은 못되었다. 약 2시간쯤 뒤에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자주포 부대와 함께 옥산포로 밀려왔다. 우리 제1대대는 우두산 방어진지로 되돌아가야 했다. 다시 날이 저물자 제1대대 병력은 우두산 방어진지를 나와 소양강을 건너 봉의산 방어진지로 이동했다. 여기서 적을 저지하며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다음날인 6월27일 해질 무렵에,원창고개 방면으로 이동,원창고개에서 적과 교전했다. 6월28일 하오 4시경 결국 원창고개 방어진지를 떠나 홍천 북방에 있는 동산리로 향했다. 서울이 북한공산군 수중에 함락되고 인제 방면에서 홍천으로 진격중인 북한공산군 제7사단이 우리 제7연대의 후방을 차단할 위험이 있다고 본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공산군의 1개 사단 병력은 약 1만1천명이며 그들 사단이 갖고 있는 1백22㎜ 곡사포의 최대사거리는 1만2천야드인 데 비해,우리측 사단의 1백5㎜ 곡사포는 최대사거리가 8천야드에 불과했다. 병력은 물론,화력이나 기동력·기갑력에 있어 적군은 아군보다 아주 월등하게 우세했다. 우리는 이를 사전에 모르고 대비를 하지 못했었다. 무비가 유환을 가져온 셈이었다. 어쨌거나 나의 6·25 첫 전투였던 춘천지구 방어전투는,우리들에게 상당한 피를 흘리게 한 뒤 끝나 버렸다. □약력 □1925.11 황해도 김천 생 □1948.11 육군사관학교 제7기 졸업 □1950.6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 □1951.10 제32보병연대 제3대대장 □1953.3 미 육군보병학교 졸업 □1960.12 미 육군참모대학 졸업 □1961.8 제23보병연대장 □1963.9 주월남 한국대사관 무관 □1968.1 육군 준장 진급 □1968.1 주월남 한국대사관 공사 □1975.4 월남 공산정부에 의해 억류 □1980.4 석방 귀국 □현재 한국해음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
  • ROTC 출신 첫 중장 진급/정부,장성급 인사

    정부는 13일 육군 장성급 정기인사를 단행,박세환(ROTC 1기),이택형(육사 19기),배일성 소장(육사 19기) 등 소장 3명을 중장으로 승진 발령하고 차기준 준장(육사 21) 등 11명의 준장을 소장으로,배영복 대령(ROTC 3기) 등 대령 4명을 준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군단장 2명과 사단장 6명 등 일선 지휘관과 참모들에 대한 보직인사는 곧 단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번 인사의 특징은 ROTC 1기가 임관 30년 만에 최초로 중장에 진급한 것과 야전경험과 전문지식이 풍부한 인사가 발탁된 것이라고 말했다.
  • “감격속 현충일”… 황규만씨의 외길정성 결실

    ◎「그날의 전우이름」 40년 만에 찾았다/국립묘지 「김○○의 묘」 주인공은 “김수영씨”/서울신문 읽은 동기생이 명부 보내 실마리/“현대사의 비극” 기억하게 무명비는 그냥 두기로 40년을 찾아 헤맨 그 전우의 이름은 군번 117162의 육군소위 김수영이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5만여 순국영령들의 묘비 가운데 단 하나뿐인 무명용사비(서울신문 90년 6월25일자 11면 보도)의 주인공 이름이 드디어 밝혀진 것이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상오 국립묘지 동쪽 제2묘역에서는 김 소위의 아들 종태씨(40·춘천시 후평동 주공아파트 407동 308호)와 40년 전 전우인 예비역 육군준장 황규만씨(61·범양상선 부회장) 등이 오열하고 있었다. 황씨는 지난 50년 8월 경북 포항지구 전투 때 새로 전입한 지 5분 남짓 만에 전사한 김 소위를 현장에 매장하고 후퇴한 뒤 계속 군무에 쫓기다 14년 전 이름도 모르는 김 소위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케 하고는 유족들을 찾는 데 반평생을 바쳤었다. 황씨의 이처럼 안타까운 사연이 지난해 6·25를 맞아서 서울신문에 보도되자 전국 각지에서 김 소위의 가족임을 자처하는 전화가 수없이 걸려왔었다. 그때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조목조목 여러 정황을 캐물어 보곤했지만 하나같이 실제인물이 아니어서 실망만 거듭됐다. 그러던 지난해 11월초 김 소위와 시흥보병학교 갑종간부 1기 동기인 나보현 예비역 대령(62)이 동기생 명부를 보내왔다. 김 소위의 이름을 찾는 일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하고 있던 황씨는 다시 한가닥 희망을 걸고 1백46명의 명부를 뒤져가며 김 소위를 찾기 시작했다. 6·25 때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4명 가운데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50년 8월24일 전사한 것으로 돼 있는 김수영 단 한명뿐이었다. 산천이 4번이나 바뀌도록 목메게 찾던 바로 그 김 소위가 분명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전사일과 불과 3일 차이가 날 뿐 아니라 국립묘지에 알아본 결과 어디에도 김수영 소위의 묘비는 없었다. 김 소위가 틀림없다고 확신한 황씨는 곧바로 유족을 찾아 나섰다. 보훈처에 알아보니 춘천에 김 소위의 혈육인 딸 광성씨(44)와 아들 종태씨가,서울영등포에 누이들인 수덕씨(59)와 수봉씨(56)가 살고 있었다. 구청과 동사무소를 통해 이들 가족이 해방 후 함남 원산에서 월남한 사실을 확인한 황씨는 10여 일 만인 11월13일 마침내 유족들을 만났다. 김수영 소위는 해방 후 원산에서 월남,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50년 1월 갑종 1기생으로 시흥보병학교에 입학했다. 김 소위는 전쟁이 터지기 이틀 전인 6월23일 아들 종태씨가 태어나자 다음날 휴가 나와 잠깐 아들을 본 뒤 곧바로 전쟁터로 나가 그해 8월 포항 안강지구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4살되던 해 어머니가 재혼을 해 그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고모집에서 생활해온 종태씨는 해마다 현충일이면 할머니 손을 잡고 국립묘지 산마루에 서서 묘지를 찾는 사람들을 보며 서러움을 달래왔다고 했다. 김 소위의 가족들은 사흘 뒤 40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묘 앞에서 제사를 지냈고 또 지난달 말에는 황씨와 함께 포항 전사지에도 다녀왔다. 황씨의 40년에 걸친 전우애는 이날 두 번째로 아버지의 묘비를 찾은 종태씨가 황씨의 만류에도 불구,본사에 전해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됐다. 황씨와 유족들은 「김 소위의 묘」에 이름을 새겨 넣으려다 현재 그대로 이름없는 묘비로 남겨두기로 했다. 40년 동안 이름없이 세워져 있던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전쟁의 아픈 상흔을 기억하는 하나의 유물로 길이 남기기 위해서이다. 다만 묘비 아래 상석에 「김수영」이라는 이름과 유가족을 만난 날짜 등을 새겨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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