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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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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국 일 수도서 굶어죽은 모자

    ◎“마지막 식사끝내” 일지/죽은지 3주만에 발견 【도쿄 AP 연합】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인 도쿄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굶어 죽은지 3주만에 발견됐다. 경찰 대변인은 지난달 27일 도쿄의 도시마구의 아파트에서 주민의 신고로 세라 노리코(77)와 그녀의 아들 도시오(41)의 사체를 발견했으며 부검결과 두사람은 영양실조로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경찰 대변인은 지난 3월31일자 세라 노리코의 일기에 「우리는 마지막 식사를 마쳤다.내일 먹을 것은 없다.아들과 함께 죽도록 내버려 달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밝혔다.
  • 신부전증 박재삼씨 15번째 시집 「다시 그리움으로」

    ◎노년의 허망함 아름다운 시로 노래/「노망」·「아득한 청산…」등 와병전 쓴 작품 모음/후배문인들 병원비 모금·시집 구매 줄이어 〈죽도록 부지런히 쓴다면/시를 쓰는 것은/돈과는 거리가 멀고/그러면서 그 짧은 행간에/짜릿한 공감을 심는 일은/늘 아득하기만 하네//그러나 청산은 아무 일도 안하고/늘 그 자리에 놓여 있건만/햇빛 하나는 잘 받아/그 이마가 빛나는/이 사실이 부럽네〉(「아득한 청산을 보며」전문) 신작시집 「다시 그리움으로」(실천문학사간)에 실린 이 시엔 박재삼시인(63)의 초상이 여러겹으로 어른거린다.커다란 설움의 못에서 올올이 아름다운 서정시를 길어낸 시인은 안정된 생활보다는 사람과 술을 더 좋아한 영락없는 나그네였다.시만 써서는 도저히 생활이 안되는 현실에서 그는 시를 평생의 주업으로 택했다.「현대문학」과 「대한일보」등을 떠돌며 잠깐씩 밥벌이도 했지만 돈과는 늘 거리가 먼 삶이었다.지난해 가을 신부전증이 덮쳤을때도 가난은 그를 꼼짝없이 쓰러뜨릴 판이었다. 박시인이 자리보전에 들어간지 어느덧 반년.몇차례의 위독한 혼수를 겪으며 금방이라도 훨훨 세상을 등질것 같았던 시인은 그러나 지금 빠른 회복세로 돌아서 있다.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인 한명을 잃을 수 없다는 동료·후배 문인들이 병원비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에 발벗고 나선것.서벌·노향림시인이 주도,초반 아는 이들끼리의 성의표시로 시작한 모금은 뜻밖에 범문단차원으로 번졌다.두달여간 문인 3백여명이 참여,3천여만원이 모였다.주도한 측에서도 『박시인의 인덕이 이정도인줄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때맞춰 열다섯번째 시집이 되는 「다시 그리움으로」도 나왔다.박시인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고자 하는 문인들의 예약구매로 박시인이 쓰러지기 직전까지 썼던 시편들을 묶은 이 시집은 발간도 되기전 2천여권이 팔려나갔다. 이번 시집엔 늙어가고 잊혀지는 허망한 심사를 토로한 짧고 간결한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그러나 주제야 어찌 변했건 「서정주이래 가장 아름다운 토종 서정시인」의 정감어린 감성은 작품곳곳에 묻어난다. 〈가만 있거라 보자./자네가 누구시더라./말은 그렇게 해놓고도/한동네에 살면서 그 노인은/언뜻 떠오르지 않아서 답답하던/그때의 내 젊은 혈기였는데./이제는 그것이 어느새/세월이 흘러흘러/내게로 왔다네.//가령/방에서 마루로 나올 때는/무얼 하러 나왔건만/뜰에 환히 라일락꽃이 핀 것에/그만 정신이 팔려/잊고 마는 이 로망을 어쩌지.〉(「로망」전문) 지난 24일 박시인의 묵동집에선 3차 모금기금 전달식이 조촐히 열렸다.최근엔 하루에 한 차례씩 마당산보도 할 정도로 호전됐다는 박시인은 좀 기운없어 보이긴 했지만 오랜만에 맑은 눈빛으로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았다.그들은 『별것아닌 일로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며 씩 웃는 박시인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손정숙 기자〉
  • 섬 거주 부재자투표 선관위서 순회투표

    중앙선관위는 21일 15대 총선에서 외딴 섬에 거주하는 부재자 선거인의 투표편의를 위해 부재자 투표기간(4월4∼6일)에 선관위가 직접 섬을 방문,투표토록 하는 순회투표를 실시한다. 대상 섬은 ▲인천=팔미도(중구) ▲경기=풍도,육도(안산) ▲전북=상왕등도,하왕등도(부안) ▲전남=금일읍 원도,장도,횡제도,금당면 허우도,생일면 덕우도(완도),조도면 슬도,독거도,혈도,탄항도,맹골도,곽도,죽도,옥도(진도) 등이다.
  • 밀입국 조선족 1백5명 적발/여수 해경

    【여수=남기창 기자】 5일 하오 2시쯤 전남 여천군 삼산면 손죽도 북서방 1·5마일 영해상에서 조선족 1백5명을 태우고 밀입국하려던 중국 선적 60t급 연어운호가 여수해경에 적발됐다. 해경은 수산청과 불법어로에 대한 합동단속 과정에서 중국인 선원 2명을 포함해 조선족 남자 92명·여자 13명 등 1백7명이 타고 있던 이 배를 적발해 이날 하오 8시30분쯤 여수항으로 예인,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이들을 넘겼다.
  • 일 지도도 독도 한국땅 표기/조선총독부 발행… 죽도로 기록

    ◎서지학자 이종학씨 「일 교과서부도」 공개 일제 치하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지도에도 독도가 한국땅으로 명시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서지학자 이종학씨(70)는 24일 191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일본지리교과서부도」속의 지도에 독도가 죽도라는 이름으로 조선령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씨가 이날 공개한 「일본지리교과서부도」의 「중부조선」편에는 일본해로 표기된 북위 38도선 아래 동해상에 죽도가 표기되어있다.일본은 1905년 일방적으로 독도를 일본령에 편입시키면서 독도를 죽도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는 독도를 한국땅으로 인정한 셈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이씨는 또한 1905년 일본에서 발행된 관보와 신문들을 공개하고 『일본은 1905년 2월22일자 시마네현보를 통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했다고 고시했지만 그이후 일본에서 발행된 1백여개의 관보와 신문들은 모두 독도를 리안코르도로 표기,한국땅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해 2월22일 이후 발행된 산음신문과 대판조일신문등 신문들이 독도를 리안코르도로 썼으며 5월29일과 30일 발행된 관보는 러·일전쟁중 일본 연합함대사령관이 보내온 승전소식을 싣고 있는데 여기서도 독도를 이처럼 표기했다는 것이다.리안코르도는 1849년 프랑스함대가 독도를 지나가면서 붙인 이름으로 당시 제3국에선 모두 독도를 이처럼 표기했다.
  • 「독도는 한국땅」 논문 일 교수들 수차례 발표

    【도쿄 연합】 일본정부가 독도는 일본영토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일본 학자들도 앞서 여러차례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21일 확인됐다. 특히 호리 가즈오(굴화생) 교토대교수는 지난 87년 발간된 일본의 한국사 연구잡지 「조선사 연구논문집」에 기고한 「1905년 일본의 죽도편입」이라는 논문에서 일본정부의 독도 영유권주장은 제국주의침략과정에서 구체화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 재미 일본어연구가 박병식씨 서울신문 뉴스넷 보고 기고

    ◎“독도는 어원으로도 한국 땅”/조선인들,울릉도·독도 포함해 우산국으로 불러/일본의 죽도(다케시마)는 우산국 이두음의 일본식 발음 독도를 부르는 일본식 이름 「다케시마(죽도)」는 우리말에서 비롯됐으며,따라서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태도는 근본적으로 허구임을 지적한 주장이 나왔다.현재 미국에서 한일고대사를 연구하는 박병식씨(66)는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전송되는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에서 독도 관련 보도를 접한후 21일 서울신문 도쿄특파원실에 보낸 기고문에서 다케시마가 독도의 조선시대 표기 가운데 하나인 「무릉」에서 나왔음을 설명했다.박씨는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나와 한일고대사를 연구하다 지난 8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그곳에서 「야마토언어와 고대조선어」,「일본어의 비극」등 일본어 어원을 활용해 한일고대관계를 밝힌 논문·책 20여종을 냈다.그의 기고문을 간추려 소개한다. 일본인들은 17세기 초 독도를 「마쓰시마(송도)」로 불렀고 나중에는 「다케시마(죽도)」라고 불러왔다.바윗덩어리나 다름없는 섬,소나무나 대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 섬을 일본인들이 소나무섬(송도)또는 대나무섬(죽도)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일본인이 독도를 다케시마나 마쓰시마로 부른 까닭을 어원으로 따져보면 그들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허구임이 드러난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은 섬이다.그래서 울릉도에 속한 섬쯤으로 여겨졌고,조선 중기 「독도」라는 이름을 따로 갖기까지는 울릉도가 곧 독도 이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삼국사기」에 나오는 울릉도의 첫이름은 「우산국」으로 우리말을 한자로 표현한 이두이다.우산국의 「우」는 「우/오」라는 우리말 발음을,「산」은 「마/무(뫼의 옛말)」라는 뜻을 각각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또 울릉도의 「울」은 「우/오」,능은 「리/라」를 의미한다.곧 「우산」은 「우마」,「울릉」은 「우리/우라」라는 말을 한자로 쓴 데 지나지 않는다.우리 옛말에서 「우/오」는 「위(상)」또는 「크다(대)」는 의미이고,「마」는 「뫼(산)」를 뜻한다.또 「리/라」는 「신성함」을 나타냈다.따라서 「우마(우산)」는 「(바다에 우뚝 선)큰산 같은 섬」,「우리/우라(울릉)」는 「크고(또는 높고)신성한 섬」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일본 「대일본지명사서」에도 『울릉도를 조선사람이 「우마」라고 불렀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 섬의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등 조선 중기이후 역사책·지도에서 「무릉」이라고도 표기됐다.「무」는 「무(마)」,「릉」은 「리/라」이니 「무릉」도 결국 「무리/무라=신성한 산」이란 의미로 「우산」 「울릉」과 별차이가 없다.이 「무릉」에서 일본이름 「마쓰(송)」와 「다케(죽)」가 나왔다.「무리(무릉)」란 발음은 일본으로 건너가 「마르」,다시 「마쓰」로 바뀌었다.「마쓰」를 일본 한자로 표기한 것이 「송」이다. 「무릉」은 또한번 재주를 넘는다.이번에는 일본인들이 한자음대로 읽어 「다케루」라 한 것이다.「다케루」는 「다케」로 발음이 줄었고,이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죽(다케)」다.정리하면 「마쓰시마」의 「마쓰」는 「무릉=무리」란 우리말 발음에서,「다케시마」의 「다케」는 한자말 「무릉」을 저들 한자음대로읽은데서 나온 이름으로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나무 한그루 변변히 없는 섬 독도가 한때는 「마쓰시마(송도)」로,지금은 「다케시마(죽도)」로 불린 원인을 일본인들이 안다면 지금처럼 억지주장을 되풀이하지는 못할 것이다.이름으로 봐도 독도는 엄연한 우리땅이다.
  • 한·일 합방전 일 국정교과서 독도를 한국영토로 표기

    ◎「소학지이용신지도」서 확인 【삿포로 연합】 일본 정부는 한·일합방 이전인 지난 1904년부터 문부성이 발행,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국정교과서에서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표기한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삿포로 시내에 자리잡고 있는 가이타쿠무라(개탁촌) 구내의 당시 중학교 교사내에 전시된 교과서 「소학지이용신지도」에서 확인됐다. 한국을 「한국(조선)」이라고 표기하고 중국은 「청국」이라고 표기한 이 지도는 한국지도 부분에서 강릉에서 가까운 북위 37·9도,동경 1백29.5도 지점에 「죽도」라는 이름으로 독도를 표시하고 한국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이 지도는 독도의 위치를 터무니 없이 부정확하게 표시해 당시 일본 당국이 독도에 관심이 없었으며 위치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한국영토를 구분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영토는 검은색으로 표시한 이 지도는 울릉도는 「울릉도」로 표기하고 독도보다 훨씬 동쪽에 그려넣었으며 역시 한국영토로 표시했다. 동해는 「일본해」로 표기한 이 지도는 「대마도」를 일본영토로 표시하고 대마도와 부산 사이를 「조선해협」으로 표기하고 있다.
  • 일 사학자 “독도는 한국 땅”/89년 작고 미촌수수

    【도쿄=강석진특파원】 일본의 역사학자 가지무라 히데키(미촌수수)씨가 역사문헌 등을 바탕으로 독도는 한국땅임을 입증하는 장문의 논문을 지난 77년 일본의 조선연구소가 발행한 「조선연구」에 게재한 사실이 13일 밝혀졌다. 지난 89년 사망한 가지무라씨는 「다케시마(죽도)=독도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독도는 국제법상 영토판단의 기준으로 볼 때 그 인지의 역사와 실효적 경영의 역사 양면에서 분명히 한국령』이라고 말했다.
  • 「독도망언」은 식민주의 오만(특별기고)

    최근 일본 정부의 수상과 외상은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망발을 감행했다.그리고 독도가 자신의 영토임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사실임을 강변하고 있다.이와 같은 강변이 전혀 근거가 없는 망언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독도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연고를 다시금 확인해보고,그 국제법적 문제점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 ○역사적 연고 확실 독도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연고는 확실한 것이다.원래 독도는 울릉도에 딸린 섬이다.울릉도는 이미 6세기초 신라시대때부터 한반도의 역사에 편입되기 시작했다.그러나 독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15세기에 편찬된 「고려사」의 지리지의 울진현에 관한 설명에서 시작된다.이 기록 이후부터 우리나라의 고문헌 내지 고지도에서 독도는 울릉도와 확연히 구별되어 우산도 삼봉도 자산도 가지도 등으로 기록되어 왔다.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지명이 변동되는 사실은 항용 있어온 일이며,독도의 명칭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예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울릉도 주민들은 바위섬인 이곳을 「돌섬」 또는 돌(석)의 방언에 따라서 「독섬」으로 불러왔다. 여기에서 독도라는 오늘날의 명칭이 유래됐다.1900년 구한국 정부에서 지방관제를 개칭하여 이 곳에 군을 설치하고,그 관할 구역으로 울릉도 전도와 「석도」를 명시했다.이 석도는 「돌섬」의 한자 표기였다.그리고 오늘날 일반적으로 불리는 독도는 「독섬」이라는 방언 명칭에서 각기 그 음과 뜻을 취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이와 같은 과정을 살펴보면 독도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연고권은 확고부동한 것이며,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일본의 시마네현은 1905년 2월에 고시 40호를 통해서 독도를 다케시마(죽도)로 명명하고 자신의 관할구역으로 비밀스럽게 편입시켰다.이 편입 조처는 일본 내각이 1905년 1월에 단행한 독도에 대한 영토 편입 결정을 따른 것이었다.대한제국 정부는 이와 같은 사실을 1906년 4월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었다.이에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그해 5월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그렇지만 당시는 이미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접수된 이후이므로 독도문제에 관한 일본과의 외교적 교섭은 불가능했다.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는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독도에 대한 고유한 권리를 천명하는 데에 그쳤다. ○이르조선영토 표기 1905년 이전에는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일본도 인정해 왔다.일본의 대표적 지리학자였던 하야시(임자평)가 1785년에 제작했던 「삼국통람도설」에는 독도를 조선의 소유로 표시했다.일본이 개항한 이후 명치 연간에 육군성에서 제작한 군사지도에서도 독도는 조선의 영토로 분명히 표기되어 있다.한편 1877년 일본 명치 정부의 최고 각료의견기관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여기에서 제시된 몇몇 사례 이외에도 1905년 이전 일본에서 독도가 조선의 소유임을 인정했던 기록들을 더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이처럼 일본의 조야에서는 독도에 대한 조선의 역사적 연고권을 인정해왔다. 한편 일본 정부는 독도가 자신의 영토라는 사실이 『국제법적으로도 명확한 사실』이라고 강변하고 있다.그들이 이와 같은 억지 주장을 내세우는 근거는 이른바 국제법상의 영토 획득 방식인 무주지에 대한 선점의 법리에 있다.그러나 독도는 결코 무주지가 아니라 엄연히 조선왕조의 영토 중 일부였고,종전에는 일본 자신도 이를 인정해 왔었다.울릉도 및 그 부속도서에 대한 신라시대 이래의 역사적 연고권은 분명한 사실이다.백보 양보한다 하더라도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이미 1900년에 독도를 자신의 영토에 분명히 편입시켰다.그러므로 독도에 대한 시마네현의 고시는 무주지에 대한 선점이 될 수 없으며,제국주의적 영토 약탈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일본이 1905년 이곳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었다.즉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일본은 러시아와의 해전을 앞두고 동해 일원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비로소 제기하게 되었다.그러므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설정은 그들의 제국주의 침략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반성없는 일 태도 일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청산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그리고 이는 지난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방자한 자세임에 틀림없다.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망발에 대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 그릇됨을 바로잡도록 해야 한다.독도는 엄연히 우리의 땅이기 때문이다.
  • 일 교과서 「한국왜곡」여전/고교일본사­22항목중 9개항목만 시정

    ◎지리부도­독도를 자국령 죽도로 표기 일본의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일본사와 세계사 교과서 가운데 한국관련 항목이 상당부분 왜곡돼 있다. 일본의 초·중·고교에서 쓰는 지리부도는 모두 독도를 다케시마(죽도)로 표기하고 빨간색 점선을 그어 일본 영토로 그리고 있다. 11일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일본 고교생들이 가장 많이 쓰는 야마가와(산천)출판사의 「일본사」 신 교과서를,지난 82년 역사왜곡 사건 직후 사용됐던 구 교과서와 비교한 결과 총 22개 항목 중 3·1운동,황국신민화 정책,한국전쟁 등 9개 항목에서만 긍정적 변화를 보여 시정률이 41%에 불과했다. 일본 교과서는 대부분 한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누락시키고 임나일본부설에 기초한 고대사 서술 등 전체적인 내용에 오류가 많다.특히 고려와 조선이 각각 원과 명·청의 속국임을 강조하는 등 한국사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정적이다. 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동해」와 「대한해협」을 무시하고 「일본해」와 「쓰시마(대마)해협」으로 각각 적고 쓰시마섬을 중심으로 서쪽은「서수도」로,동쪽은 「동수도」로 나눠 대한해협을 마치 일본영해처럼 표기했다.
  • 일의 「영유권 망발」을 반박한다/신용하서울대교수·사회학

    ◎“서기 512년부터 독도는 우리땅”/일의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에 불과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옛 우산국의 땅이었다.서기 512년에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됨으로써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로 확정된 것이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에 실려있다.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 군정편에도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땅이라고 정의돼 있다. 태종 16∼17년(서기 1416∼17년)사이에 왜구의 침략과 노략질 때문에 태종은 울릉도에 공도정책을 실시했다.공도정책도 당시에는 영토관리 정책의 하나로 태종은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 영토였기 때문에 이같은 정책을 편 것이다. 성종 12년(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중종 26년(1531년)에 편찬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도 울릉도와 우산도를 조선왕조의 영토로 규정하고 지리적 설명을 싣고 있다. 일본측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에서 최초로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문헌에 기록된 것은 1667년에 재등풍선이 편찬한 은주시청합기가 처음이다.여기에도 울릉도와 독도(송도와 죽도로 표기)가 일본영토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17세기 말에 대마도주는 공도정책을 악용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는 활동을 시작했다.울산어부 안용복등이 일본에 건너가 구속되면서까지 투쟁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명백히 한 것도 이때였다. 후에 일본의 덕천막부 관백(왕이 아닌 통치자)이 1696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재확인 함으로써 대마도주가 일으킨 영유권 분쟁은 해결되었다. 그 결과 덕천막부 시대에 일본·조선·중국의 구분을 그린 대표적 지도인 일본학자 임자평의 「삼국접양지도」(1785년 간행)와 18세기 일본지도 「총회도」에는 울릉도와 독도(우산도) 두 섬이 조선 영토임이 색깔까지 칠해서 명백히 표시됐을 뿐 아니라 독도(우산도)의 위에는 일본말로 「조선의 것으로」라는 문자까지 적혀있다. 근대국가가 성립된 뒤 일본 내무성은 1876년 각 현에 영토의 지도를 그려 올리고 지적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그때 일본 시마네(도근)현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해서 지도를 그리고 지적을 조사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일본내무성은 6개월간 조사한 뒤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이며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이에 따라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 「조선동해안도」와 육군성 참모국이 만든 「조선전도」등 당시 모든 일본의 지도에 독도가 한국영토로 표기돼 있다. 그뒤 개항 후 조선왕조는 공도정책을 폐지하고 울릉도에 대한 주민이주 정책을 실시하였다.1900년에는 대한제국정부 칙령 제41호로 울릉도를 군으로 개편한 뒤 군수를 임명하고 울릉군의 관할구역을 울릉도,죽도,석도라고 규정하였다.독도를 의역하여 「석도」라고 표기한 것은 독도가 바위만의 돌섬이라는 뜻이다. 1904년 2월8일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울릉도와 독도에 러시아군함을 감시하는 해군망루를 설치하려고 했다.이 무렵 중정양삼랑이라는 일본 어업가가 한국정부에 한국영토인 독도에서 물개를 잡을 것을 허용해 달라는 청원서를 내는데,일본정부가 중간에서 대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정부는 이 기회에 독도를 일본영토로 침탈하고 독도에 해군망루를 설치하기위해 중정에게 독도가 무주지이므로 일본영토에 편입시켜 물개잡이 독점권을 허가해 달라고 신청하도록 청원내용을 바꾸게 했다. 그리고 일본정부는 1905년 1월28일 내각회의에서 슬그머니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시켰다. 한국정부와 한국민들은 이러한 내용을 1년 뒤에야 알았고 강제로 체결된 「을사5조약」 때문에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제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됐던 때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더 이상 항거할 능력이 없었다. 그 뒤 일제가 패망하고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SCAPIN(연합국 최고 상부지령)677호로 독도가 일본영토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선언하고 이를 한국에 반환했다. 이같은 역사적 진실에 비춰 독도는 서기 512년부터 한국의 불가분의 고유영토이며 한국정부가 일관되게 주권을 행사해온 것이 명백하다. 국제법적으로 볼때 무주지 선점에 의한 일본영토 편입이라는 주장도 1905년 1월 당시 무주지가 아니라 엄연히 대한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어불성설이다. 독도는 국제법을 위반한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민 모르게 슬그머니도둑질했다가 들켜서 뒤늦게 한국에 반환한 것일 뿐이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나 국제법상으로 한국의 영토임이 명명백백한 독도에 대해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논리의 연장에 불과한 것으로 우리 정부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국민들도 일본의 독도침탈 의도에 경각심을 더욱 높여야 한다.
  • 한·일 독도 영유권분쟁 약사

    ◎고종이 「울릉군소속」 칙령 발표 1900년/일 시마네현,영토편입 첫 고시 1905년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시골 지방정부의 고시에 근거하고 있다.한반도가 사실상 일본의 지배아래 있던 1905년 시마네(도근)현은 독도를 『다케시마(죽도)라고 부르고,본 현의 소관아래 편입한다』고 발표했다.일본은 1906년 4월 이 사실을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외교권을 박탈당한 채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일본은 이어 1907년 각의에서 『독도가 주인없는 땅으로 어느 나라의 주권도 미치지않는다』며 독도의 일본 편입을 멋대로 결정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매년 적절한 시기를 골라 의회답변 형식을 빌려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90년대를 전후해서는 매년 8월쯤 우리 정부에 『독도가 일본영토이니,한국은 철수하라』는 구상서를 보내고 있다.또 매년 가을 순시선을 독도 근해에 파견,우리 영해를 침범하고 독도를 한바퀴 돌면서 사진을 찍어가는 행위를 되풀이 하고 있다. 그러나일본측의 터무니 없는 주장에 비해,정부는 독도가 법률적·역사적으로 우리 땅임을 증명해주는 충분한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 독도는 512년에 신라의 이사부가 정복한 우산국즉 지금의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1천5백년 가까이 우리 영토였다.울릉도 어민들은 독도 부근까지 나가 고기를 잡으면서 이 섬에 10일 정도 머물기도 했으므로 무인도였지만 주인은 있는 땅이었다.이러한 사실은 「고려사」「세종실록」「성종실록」등에서 입증된다.일본이 내세우는 시마네현 고시에 앞서 1900년 고종황제가 칙령 41호를 통해 독도를 울릉군의 부속도서로 강원도에 공식 편입시키기도 했다. 「근대사 자료연구협의회」가 지난 78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8천만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연구를 시작,84년 발간한 「독도연구」에 따르면 1694년 삼척 첨사가 조정 명령으로 울릉도 순시를 나가 독도를 발견했다는 기록을 발굴했다.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나 서지학자들의 노력으로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명기한 일본 정부 문서와 지도도 상당수 발굴됐다. 지난 83년에는 독도가한국령이라고 표기된 일본 해군성 수로국 발행 지도 원본(1857년 러시아 해군 제작,1876년 일 해군 재발행)이 서울대 규장각도서실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또 일본 정부는 이미 1945년 항복문서에서 강제로 빼앗은 영토를 포기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여기에는 물론 시마네현 고시에 의해 멋대로 편입시킨 독도도 포함된다.
  • 데이비드 램턴 양국 강경주의에 경고(해외 논단)

    ◎“미·중 관계 악화땐 신냉전시대 온다”/강경파들 상호 비난… 「대만해협 분쟁」으로 비화/중­대만 군비경쟁 갈수록 치열… 아태안보 위험 중국·대만간의 긴장증폭 못지않게 미·중관계의 악화가 우려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데이비드 램턴 미·중협회장은 최근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에 「양국의 강경주의자들이 새 냉전돌입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요지의 글을 기고했다.관계악화의 심대한 파장을 경고한 그의 글을 소개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종래와는 성격이 다른 냉전이 재발할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다.이 냉전은 하찮은 어떤 것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만약 이것이 현실화한다면 미국내의 예산논쟁이 불러일으킨 헛된 소모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함을 미국인은 알아야 한다. 중국의 강택민국가주석과 개혁주의자들은 미국 「패권주의자」에게 너무 무르게 대응하고 있다는 국내비판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다.미국 또한 공화당 대통령출마자 패트 부캐넌 같은 보수강경인사들은 클린턴행정부는물론 공화당 출마자 대부분이 중국에 관한 한 「미 대기업의 의사를 충실히 전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호되게 질책한다. 양국의 강경파는 서로에게 비난거리를 제공하면서 양국간에 마찰과 잘못된 인식을 산처럼 높이 쌓고 있다.일반대중 역시 상대방에 대해 나쁜 쪽으로 생각이 굳어진다.미국인은 대대적으로 보도된 중국 고아원의 「아이들을 일부러 죽도록 내버려두는 방」을 상상하곤 몸을 떠는가 하면 미국은 중국을 약하게 만들고 창피줄 방도만 궁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국인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이런 상호작용결과의 하나로 대만해협에서 분쟁위기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은 두번째 냉전을 우려케 하는데 이것은 첫 냉전과 여러 모로 다르다.우선 미국과 중국은 이전 미·소 때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상호의존적이다.미·중은 갈등을 서로 자제하면 득을 볼 요인을 갖고 있다. 둘째 첫 냉전의 2차대전이후 시기에서 연합국은 미국의 경제적 월등함과 소련 침략 및 핵무기위협의 강한 현실성에 밀려 미국의 뜻을 좇았다.지금은사정이 달라 전통적 우방들이 무조건 미국을 따르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더구나 아시아내 미국 우방들도 지난해 아시아국가간 교역이 5천억달러를 넘어선 점을 고려하면 이것저것을 재보고 태도를 결정할 것이다.마지막으로 정보혁명과 기술확산은 한 나라를 여러 나라로부터 격리시키고 제자리에 가둬둔다는 50년대의 「봉쇄」전략을 우습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차이점을 차치하고 중국과의 관계가 다시 냉각된다면 첫 냉전때 일반화된 사태가 재연될 것인데 일부는 이미 목전에서 일어나고 있다.예전에 미국은 소련의 한 분야에 제공한 혜택이 다른 분야에서의 태도변화로 연결되기를 꾀했다.소련에게 부여한 관세최혜국대우는 유태인 이민허용등과 연계되었으며 미국의 곡물판매,공산권개최 올림픽참여는 소련의 제3세계정책과 묶여졌다.그런데 이같은 연계는 생산적인 미·소관계를 불가능하게 했다.관계 자체가 현안들의 볼모로 잡혀 있어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중국에 대한 관세최혜국대우와 인권상황,대만 이등휘 총통의 방미와 미·중 군비통제회담 등이 연계되었다.연계정책은 갈등을 확대하며 공동의 이해기반구축을 불가능케 한다.억제력과 확실성이 첫 냉전 때의 표어였다.미·소는 상대방의 공격적 행태를 사전에 막기 위한 방안으로 위협을 활용했으며 억제력으로서 위협이 효과적이기 위해선 확실해야 한다.지금 억제력·위협·확실성의 개념이 미·중관계에 나타나고 있다. 대만은 중국의 무력행사를 억제하기 위해 더욱 더 많은 현대적 무기를 원하고 있고 중국은 대만의 독립노선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군사력의 현대화와 군사훈련 대규모화를 택한다.미국은 대만이 독립하는 것과 중국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각각 억제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미국의 이 자세를 대만·중국 모두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남중국해상의 전략적 항해요충지인 섬들을 중국해군이 독점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미국내에서는 이를 보다 확실성 있게 억제할 방안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작용과 반작용이 거듭되면서 첫 냉전의 군비경쟁이 이루어졌다.이 현상이 지금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중국은 최근 국방경비를 증액했고 러시아로부터 전투기등을 구매했으며 전략군사력을 현대화했다.대만 인근에서 미사일실험을 실시했으며 핵실험도 강행했고 상륙작전연습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대만은 무기구입에 한층 열을 올렸다.한편 대만해협에 군사비지출이 폭증하고 군비경쟁에 박차가 가해지며 미·중간에 적의가 커지는 걸 본 인근국가 사이에도 무기구입의 붐이 일고 있다. 상황이 새 냉전으로 발전된다면 아시아·태평양전역은 이전보다 훨씬 비싼 대가가 우려되는 안정보장위기에 놓일 것이다.지금 미국과 중국지도자들은 한발씩 물러나서 긍정적 관계의 전략적 효과를 인식,각자의 현안에 자제력을 발휘하고 잘못됐을 경우의 엄청난 대가를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
  • 백두산 산삼(압록강 2천리:13)

    너도나도 「방산」… 사라지는 산삼/“한뿌리만 캐도 가난 벗는다”… 이젠 전설로/집안 「신개하홍삼」 한때 고려인삼과 버금/인삼값 폭락… 꽃사슴 사육으로 대체 『화승총 메고 다닌 사람티고 범 잡디않은 사람 없고,홍실 가디고 산판 헤맨 사람티고 산삼 못캔 사람 없디요.그만큼 딤승이 우글대고 삼이 많았다 이겁네다』 노인들은 산 이야기만 나오면 으레 신바람이났다.얼핏 허풍스러워 보이나 백두산 자락을 깔고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의 말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깔려있을 것이다.왜냐하면 「장백현지」와 같은 기록에도 백두산 산삼이 심심치 않게 나오기 때문이다.최근 기록을 보면 지난 1979∼85년까지 국가가 장백현에서 거두어들인 산삼은 1백9·6량(5천4백80g)으로 되어있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산삼을 백초 가운데 으뜸(백초지왕)으로쳤다.그리고 만리장성 동쪽을 말하는 관동의 세가지 보물의 하나로 꼽은 명산물이 백두산 산삼이었다.질병을 없애고 노화를 방지한다는 산삼 한뿌리만 캐면 가난뱅이도 금방 부자가 되었다.청나라 연호로 함풍연간(1851∼61년)에 어떤 촌민은 산삼 여덟뿌리를 캐서 황제에게 바쳐 오품지부의 벼슬을 얻었다고 한다. ○산삼 진상… 벼슬 얻기도 산삼 캐는 일을 방산이라고 부른다.옛날에는 전적으로 삼만을 캐러다니는 직업 방산자들이 있었다.이들은 산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산삼의 생장과정까지 지켜볼 정도로 산삼에 도통한 사람들이었다.그래서 산삼이 자라는 자생지를 훤히 꿰뚫었다.산삼은 여간한 사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처음 산삼을 발견하면 먼저 『봉추요』라고 소리를 친다.그러면 옆에서 『뭐요?』라고 묻는다.발견자는 몇잎이라고 일러주고 즉시 홍실로 뿌리 위쪽을 묶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집안시 양수향 황차촌에 사는 송창철(36)씨는 지금 향정부에서 민족사무조리로 일하는 조선족 청년이다.그런데 부친 송병계(62)노인때부터 산삼을 캐러 다닌 터여서 한때는 방산에 나섰던 경험이 있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방산에는 삼매경같은 무아의 경지가 뒤따르는 모양이다. 『초막에서 밤새 모기에 물리는 고초를 겪지만 날이 밝아 산천을 바라보노라면 신선이 된 기분이 듭데다.시원한 실개천에 세수를 하고 그 물에 밥을 디어먹고 산을 타디요.배고픈 줄도 모르고 산을 헤매다 늦게 점심요기를 할 요량으로 자리를 잡았댔습네다.그런데 바로 맞은편에 빨간 꽃이 보이더라 이 말입네다.그거이 산삼이었디요.밥 보자기를 밀쳐놓고 봉추라는 소리를 냅다 지를 수 밖에….횡재를 만나서리 늦은 점심도 아예 굶고 정성들여 캤디요.세잎 짜리였는데,장사꾼한테 4천원을 받았습네다』 그 깊고 넓은 백두산 자락에는 산삼의 열매를 따 먹는 새가 분명히 살고 있다는 것이다.부리 아래가 빨갛고 파란털을 가진 새다.이 새를 쫓아 가면 반드시 산삼을 만난다고 해서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방초새나 산삼새라고 부르는데,백두산 인근 사람들이 흉내낸 새소리는 「왕간가­이오­」다.북송때 백두산에 산삼을 캐러갔다가 굶어죽은 산동성 기수현 사람인 왕간가와 이오의 울음이라는 전설이있다. ○초막 짓고 산에서 생활 한대의 약학서인 「신농본초경」을 보면 산삼의 약효는 대단하다.그래서 백초지왕이라 했고다른 약재에 비해 값도 엄청 높아 여늬 사람들은 먹을 수가 없었다.옛날에는 장백현이나 집안현에서 산삼을 캐면 안동이나 영구 같은 도시에 내다 약재상들에게 팔았다.요즘은 사정이 달라 중국을 찾는 한국인이 단골이 되었다.그래도 값이 싸다면서 닥치는 대로 사는 바람에 판로 걱정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백두산 산삼이 도라지처럼 흔한 것은 아니다.점점 희귀해지고 있다.세월이 좀 더 흘러가면 백두산 산삼은 전설로만 남아있을지 모른다. 산삼씨앗을 따서 산에 뿌린 이산삼과 또 산삼씨를 뜰에 뿌려 재배한 원삼의 대를 이어 청나라 강희원년인 1662년에 압록강유역에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특히 집안시는 중국의 중요한 인삼재배지가 되었다. ○막차 탄 인삼농가 많아 오늘날 집안에서 가장 유명한 인삼은 「신개하홍삼」이다.그 질이나 약효가 고려인삼에 버금간다고 집안 사람들은 자랑하고 있다.광복 이듬해인 1946년 2만8천2백50장이었다가 1959년 집체화 시기에는 재배량이 11만2천1백8장으로 늘었다.그리고 1983년 개체화 시기로 넘어가면서는 더 늘어 57만1천1백12장이나 되었다.총 수확량은 74만2천2백88㎏으로 2천1백66만원어치를 생산했다. 그러나 요즘와서 인삼은 사양의 길에 접어들었다.양수향 황차촌에 사는 송명철(41)씨는 지난 19 88년부터 인삼을 재배했다.당시 1등품 인삼 1근에 37원8전을 홋가해서 인삼재배자들이 큰 돈을 벌 때였다.그래서 1만원을 대부받아 인삼재배를 시작했는데,재수 없는 사람 뒤로 넘어져도 코를 깨는 격이 되고 말았다.인삼값이 해마다 38%씩 내려가 4년동안 일만 죽도록 하고 대부금을 모두 날렸다. 『작년에 삼값이 얼마했는지 아십네까? 한근에 5원을 했으니 안망할 턱이 없디요.국가에서 안사니끼리 거간꾼들이 날도둑하듯 뜯어먹은 것입네다.개체사회에서 살라면 더 배와야디요.돈놓고 돈먹을 줄 알아야 농사도 짓는 세상이 됐지않나 합네다』 오랜 세월을 사회주의에 순치한 사람들인지라 시장경제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그저 국가가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일하고 입에 풀칠을 했던 사람들인 것이다.그런속에서도 시장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상황에따라 전업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벌고 있다.장백현 용강향 이도강촌의 김학준(60)씨는 시류를 잘 탄 농민이라 할 수 있다. 『인삼 경기가 좋다니까 너도나도 대들었디요.이러다는 인삼이 내리막질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입네다.그동안 내래 인삼농사로 수만원 벌어놓은 처지고 해서 인삼농사에서 손을 떼었디요.대신 꽃사슴 두 마리를 샀지 않았갔시요』 그는 1만원을 들여 꽃사슴 2마리를 사서 지금은 12마리로 늘렸다.지난해 수놈 5마리의 뿔을 잘라 녹용으로 팔아 본전 1만원은 이미 건졌다.압록강 연안에도 시장경제체제에 의한 경쟁사회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 성가대 출신그룹 「성노래」 화제

    ◎미 남·여 4인조 「조데시」·「엑스케이프」 인기/젊은이들의 최대 관심거리 거침없이 표현/여성팬과 있을법한 사연 담담하게 들려줘 성에 대한 솔직한 담론을 펼치는 미국의 4인조그룹 「조데시」와 「엑스케이프」가 화제다.리듬 앤 블루스 장르를 무기로 혜성처럼 등장한 이들은 성을 공개적인 장소로 이끌어내 같이 얘기해보자고 노래하고 있다. 80년대 마돈나가 성적 매력을 물씬 풍기는 외모로 「아빠,내가 임신했다고 잔소리 마세요」「처녀처럼 행동할거야」 등의 노골적인 내용의 노래를 불러 기성세력으로부터 지탄을,젊은세대로부터 찬사를 한몸에 받은데 비해 조데시 등의 노래에는 충격이나 자극은 없다. 남성 4인조인 조데시의 새 앨범 「쇼,파티후,호텔」은 노래 전체가 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관성을 갖는다.공연이 끝난뒤 파티에서 만난 여성팬과 연애를 한다는 내용이다.인기 연예인들에게 있을 법한 얘기들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앨범 가운데 「당신을 죽도록 사랑해」에서는 『당신 손을 잡고 예식장으로 들어가고 싶어』라며 여느가수들과 달리 결혼제도를 찬양하고 있다.비평가들은 이들의 음악에 대해 노래 전체가 리듬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통기타의 연주가 특히 돋보인다며 격찬했다.그러나 성을 금기시하는 이들은 나체여성의 실루엣을 그린 앨범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토를 달았다. 또 여성 4인조 엑스케이프의 앨범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여성의 시각에서 성경험을 다루고 있다.엑스케이프는 낮시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토크쇼 「리키 레이크」에 나오는 여성들의 하소연들을 노래에 담아 전달하며 강간당한 여성이 어리석게도 다시 그 남자에게로 돌아가는 사연을 노래하면서 여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조데시와 엑스케이프는 겉으로 봐서 다른 가수들과 똑같다.특히 조데시는 귀고리에 앞가슴을 훤히 드러내 이웃집 불량소년 같은 인상을 준다.그러나 이들이 모두 교회 성가대출신들로 사회적인 문제점을 노래하고 싶어 가수로 나섰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보여준다.처음에는 종교적인 포크송을 부르려다가 아무래도 리듬 앤 블루스가 젊은이들로부터호응을 얻고 돈도 벌수 있을 것 같아 장르를 바꾸게 됐다. 아버지가 교회 목사인 조데시의 달빈은 섹스 투성이인 노래를 부른다고 집에서 따돌림을 받는 등 이들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하지만 종교적 사명을 갖고 젊은이들의 최대관심사이자 문제점인 성을 거침없이 토해내는 이들은 『우리는 대충 넘어갈 수 없어요.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노래해야 해요』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있다. 실제로 조데시는 최근의 인기에 힘입어 도시 젊은이들 사이에 콘돔을 착용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단체를 조직해 활발한 운동을 펴고 있다.
  • 일본에선…/유출 한국 문화재(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11)

    ◎약탈·밀반입 문화재 10만점 추산/고려 대장경 등 10점 「일 국보」 지정/알려지지 않은 개인 소장품 훨씬 더 많아/고려청자·회화 희귀품 많아… 반환이 과제 고려청자의 걸작품 청자투각당초문상자. 화려한 투각문양과 청록색의 이 명품은 수백년이 지난 오늘도 맑은 에메랄드처럼 빛나고 있다.그것을 만든 장인은 가고 없지만 고려청자의 예술은 오늘도 찬란하다.그러나 그 걸작품은 지금 한국에 없다.굴절된 한국의 현대사를 증언하듯 그 작품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국립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도쿄 국립박물관의 안내책자는 8만8천여점의 소장품 가운데 엄선한 26개 작품중에 청자투각당초문상자를 소개하고 있다.일본도 걸작품의 예술성을 아는 것일까.고려청자의 전성기였던 12세기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전세계적으로 4점밖에 남지 않은 상자형 청자중의 하나이다. ○3만여점은 공개 도쿄 국립 박물관에는 청자투각당초문상자 외에도 많은 한국문화재가 있다.문화재 수집가 오쿠라 다케노스케(소창무지조)가 기증한 「오쿠라 컬렉션」을 포함,2천여점의한국 예술품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그러나 도쿄박물관에 있는 문화재는 일본에 의해 약탈됐거나 불법유출된 한국문화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정부에 의해 파악된 해외유출 문화재는 세계 17개국에 6만4천여점이며 그중 가장 많은 3만여점이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공개된 것일 뿐 실제로는 10만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일본의 경우는 도쿄국립박물관,오사카(대판) 시립동양자기미술관,야마토(대화)문화관,도쿄에 있는 민예관 등 박물관에 있는 한국문화재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알려지지 않은 개인소장 문화재가 더 많다고 주일 문화원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역사연구에 중요 한국국제교류 재단은 해외에 있는 문화유산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 민예관에 있는 한국문화재의 도록을 「한국문화재」라는 제목으로 93년 12월에 발간한데 이어 95년1월에는 도쿄국립박물관,오사카 시립동양자기미술관,야마토문화관에 있는 한국문화재의 도록을 만들었다. 한국의 문화재들은 멀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일본의 식민통치 기간과 그 이후의 사회적 혼란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4백여년에 걸쳐 일본인들에 의해 약탈됐거나 일본으로 밀반출됐다.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중에는 국보급의 걸작품들도 적지 않다.일본정부는 고려판 「대장경」을 비롯,10점을 국보로 지정하는 등 1천2백70여점을 중요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 도쿄국립박물관에는 일제시대 때 대구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재를 전문수집했던 오쿠라씨가 죽은 후 지난 81년 기증된 「오쿠라 컬렉션」의 1천여점의 한국문화재가 전시돼 있다.오쿠라 컬렉션을 시대적으로 구분하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서부터 통일신라에 이르는 고고(고고)자료가 많으며 고려·조선시대의 미술작품,청자 등도 적지 않다. 오쿠라가 모았던 문화재들은 양이 많을 뿐만아니라 예술성에서도 뛰어난 작품이 많다고 민속학자 김광언교수(인하대)는 지적한다.그중에는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는 이정의 「니금죽도」,정선의 「산수도」,장승업의 「묘도」등이 있다.도자기도 신라·가야의 마형도기,수레형도기 등 50여점과 고려·조선시대 도기 1백30여점이 있다.명품이 많은 고려청자는 38점이며 조선백자도 많다. 오사카시립 동양미술관에도 1백여점의 도자기들이 있는데 국내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명품들도 많다고 윤용이교수(원광대)는 말한다.오사카미술관은 지난 92년11월 고려청자,조선분청사기 등을 포함한 일부유물을 보여주는 명품전을 열어 세계 도자기 애호가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야마토(대화)문예관에도 많은 한국문화재들이 소장돼 있으며 도쿄에 있는 민예관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가 제창한 민예이론에 따라 수집된 1천5백여점의 문화재들이 있다.일본의 유명사찰 등에도 한국문화재들이 소장돼 있으며 예술적 가치가 높은 조선초기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덴리(천이)대학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민간기업도 참여 한국은 일본에 있는 이러한 많은 문화재들을 되돌려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성과는 별로 없다.지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한·일간 문화재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그동안 돌아온 문화재는 2천7백77점에 지나지 않는다.지난해에는 일본의 하치우다 다다스씨(68·부동산업)로부터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등 3백82점을 기증받은 경우도 있으나 문화재를 돌려받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한국정부는 문화재 반환을 위해 일본정부와 접촉하기도 하지만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주일 문화원 관계자는 말한다.일본내 우익세력들이 개인소장가들의 문화재 반환을 막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문화재 반환은 세계적으로 어렵고 미묘한 문제이다.유네스코를 중심으로 문화재 반환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강대국들이 대부분 유출 문화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실효성이 별로 없다.이때문에 민간기업들이 문화재에 많은 관심을 갖고 해외 경매시장에서 사들이는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지적하는 문화재 전문가들도 많다.
  • 불량자재 납품/공장장 등 실형/부산 지법 선고

    부산지법 형사3부(재판장 최진갑 부장판사)는 8일 부산항 컨테이너부두 배후수송 고가차도 공사에 부실한 부품을 납품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동국산업(주) 포항공장장 박성복(48·서울 강남구 삼성동)피고인과 관리과장 박태형(39·경북 포항시 죽도2동)피고인에 대한 특정 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죄(사기) 선고공판에서 각각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 붕괴위험 호텔 자신휴업/포항 「만다린」

    ◎5층건물 78㎜ 기울고 균열 【포항=이동구 기자】 객실 42개의 5층 짜리 관광호텔(2급)이 심하게 기울고 벽면에 금이 가는 등 붕괴 위험이 높아져 자진 휴업했다. 포항시 북구 죽도2동 만다린호텔은 19일 『벽과 기둥 등 5∼6곳에 심한 균열이 생기고 5층 상단이 서쪽으로 78㎜정도가 기울어졌다』며 경북도에 휴업계를 냈다. 호텔측은 지난 93년 2월 4m쯤 떨어진 곳에서 지하 2층·지상12층,연건평 3천4백평의 대한생명빌딩 신축공사(시공자 신동아건설)가 시작되며 호텔 건물에 금이가고 기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기자회견장서 돈봉투/도의회 운영 위장수사

    【포항=이동구 기자】 포항시 단체장 출마 예상자인 경북도 의회 운영위원장 이동대(52·전 민자당 경북도지부 부위원장)씨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참석 기자들에게 금품을 살포,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씨는 지난 2일 포항시 북구 죽도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올 6월 치러지는 포항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기 위해 민자당을 탈당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면서 지역 일간지와 주간지 등 참석 기자 12명에게 보도자료와 함께 돈봉투를 돌렸다.기자들은 봉투를 이씨 선거 운동원에게 바로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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