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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항등 미군시설 추가반환 모색/한­미 SOFA 합동회의 분석

    ◎민사소송 기간 단축·식물 검역강화논의/관심높은 「형사관할권」은 의제 채택못해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합동위원회 제1백76차 회의가 28일 하오 외무부 회의실에서 열렸다.이번 회의는 최근 전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미군의 범죄로 인해 우리사회에 SOFA를 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 시점에서 열린 양국간의 공식회의여서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점이 감안돼 이날 회의에 들어가면서 우리측 대표인 임성준 외무부 미주국장은 『주한미군 연루사건이 빈번히 발생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지적한뒤 『한국정부가 SOFA의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주지시켰다.임국장은 또 『이러한 개정이 한미간의 안보동맹 관계를 더욱 강화시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미국측 대표인 로널드 아이버슨 주한미군 부사령관은 이해를 표시했다. 이날 회의의 각 분과위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된 주요 내용은 ▲민사소송 신속처리 ▲식물검역 제도화 ▲미군시설 추가 해제 및 지정 ▲새로운 과제 검토등이었다. 민사청구권분과위에서는 주한미군에의해 발생한 대민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 제기하는 민사청구 소송의 처리 기일이 너무 길다고 지적,이를 단축할 수 있는 방안을 협의한다는 과제를 새롭게 채택했다. 또 민사청구권에 대한 세부 규정을 정할 수 있도록 보충협정을 체결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식물검역임시분과위에서는 미군이 본토로부터 수입하는 과일,농산물을 통해 병충해가 유입되는 사례가 최근 빈번히 적발됨에 따라 이를 방지하기 위해 상설적인 식물검역분과위를 설치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또 시설분과위에서는 부산항의 자성대 부두안에 있는 미군시설을 한국업체가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하는등 18개 건의사항을 승인했으며,부산을 비롯한 각 지역의 항만내 미군시설의 추가 반환등 25건을 새로운 과제로 채택했다.시설분과위는 또 대구의 미군부대 내에 적용되는 상수도 할인율을 낮추는등 4개의 건의사항도 수용했다. 그러나 미군 범죄와 관련,논란의 쟁점이 됐던 우리정부의 미군에 대한 형사관할권 예외규정 철폐등 형사관할권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는 검토하고 있으나,이날 회의에서는 새로운 의제로 채택되지 않았다. 이날 회의에 우리측에서는 임국장을 비롯한 외무부 관계자와 법무·국방·농림수산부·재정경제원·관세청 당국자가 참석했으며,미국측에서는 아이버슨 부사령관과 각 담당관,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 한·미행협 연내 개정 추진/정부,미에 통보

    ◎「군민관계 분과위」 설치 합의 정부는 28일 주한미군의 법적 지위를 규정한 한미주둔군협정(SOFA)의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미국측에 공식 통보했다. 이날 외무부 회의실에서 열린 SOFA 합동위원회의에서 우리측 대표인 임성준 외무부 미주국장은 『최근 SOFA의 몇가지 규정이 국내법을 침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면서 『관계부처간의 검토를 마친뒤 하반기중 한국정부의 개정 방향을 미국측에 제시할 것』이라고 미국측에 전달했다. 임국장은 또 『불합리한 SOFA 규정의 개정은 한·미 안보동맹관계를 보다 강화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미국측 대표인 로날드 아이버슨 주한미군 부사령관은 『SOFA 개정에 관한 공식 요청은 외교경로를 통해 우리측에 전달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 양측은 최근 주한미군 관련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데 대해 우려를 표시하고,한국민과 주한미군과의 이해를 증진키 위해 「군민관계임시분과위」를 상설화 하기로 합의했다. 양측은또 주한미군의 대민 피해에 따라 제기되는 민사청구 소송절차가 국내의 민사소송 절차보다 평균 2배이상의 처리 기간이 소요된다는 지적에 따라,신속한 처리방안을 협의하기로 했다.
  • 정전협정 파기 위협/박재범 정치부 기자(오늘의 눈)

    대북 쌀제공협상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든 지난 22일.북한측은 최근들어 거의 매주마다 가져온 판문점 참모급(일직장교)회담에서 뜻밖의 발언을 했다. 『25일을 기해 정전협정 파기선언을 하겠다』 북한군 인민대표부 유영철 상좌(중령)는 카운터파트인 유엔군사령부 흘러리중령에게 『유엔측은 지난해 미군헬기 조종사 송환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방북한 미국 허바드특사가 약속한 북·미간 장성접촉을 계속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한뒤 『앞으로 더이상 장성접촉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말한 끝에 이같이 밝혔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한·미 양국은 6·25발발 45주년이자 전쟁발발시 처럼 일요일인 25일,북한이 어떤 상징성을 확보하기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긴장상태에 들어갔다. 유엔사와 국방부는 또한 대북경수로 제공문제가 어느정도 매듭지어지고 대북 쌀지원논의가 한창인 시점에 북측이 과연 무엇을 획책하는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정보수집 및 분석능력을 총동원,해답찾기에 나섰다. 마침내 북측이 예고했던 25일.유엔사와국방부 관계자들은 대부분 휴일임에도 정상출근,하루종일 북측의 움직임을 주시했으나 북한은 별다른 변화없이 「조용하게」 지나갔다. 다만 북한은 이날 관영 중앙통신으로 보도된 노동신문사설을 통해 『정전체제가 마비상태에 있다』고 주장하고 『한반도에서 무력증강과 전쟁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이 절실하다』고 강조한 것이 전부였다. 북한 정부기관지 민주조선도 이날 『한반도평화는 미국에도 이롭다』면서 평화협정체결을 촉구했다. 유엔사와 국방부는 이같은 북한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북한의 「정전협정 파기 예고선언」이 평화협정체결과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종전 전략을 되풀이하면서 강도를 다소 높인 「엄포」라고 결론지었다.이와함께 최근 쌀지원 수용등에 반발한 강경파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라는 의견도 대두됐다.그러나 이번 북측 태도를 지켜본 관계자들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한가지였다.역시 북한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 미군정의 공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4)

    ◎자국입장 살리며 한국군정 수립에 큰 기여/기득권층 흡수… 일제잔재 청산의 걸림돌로 미군정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공식출범하는 것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1945년 9월9일 미군정이 시작된지 3년여만에 군정이 종식된 것이다.미군정은 이보다 앞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으로부터 경찰과 해안경비대,국경수비대의 지휘권을 포함한 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하고 있는 모든 직무에 대한 이양요청을 받았다.주한미군사령관은 8월11일 이에 동의하고 이양절차를 신속히 밟기 시작했다. ○좌우익대립 평정 공헌 그러나 미군의 완전철수는 다음해인 1949년 6월29일에 이루어졌다.5백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겼으나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이렇듯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미군정 3년여는 이 땅에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그렇다면 해방공간에서의 미군정의 공과는 무엇일까.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한국현대사,이른바 해방정국사를 푸는 중요한 키 노트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평가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다만 자국의 입장을 최대한 살리는 범위에서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을 추진한 미군정은 결국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를 수립시켰다는 잠정적 결론을 도출해내기에는 별 무리가 없다.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미군정은 이승만을 전면에 부상시킬 의도를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그래서 5·10선거 직전까지도 김규식에 기대를 걸었다.그리고 실제 국회의원 선거(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이승만을 낙선시키려는 공작도 했다. 어떻든 미군정은 이승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규식이 정계은퇴 의사를 분명히 하는 바람에 싫든 좋든 간에 이승만의 등장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이승만과 경선하기 위해 밀었던 전 미군정 경무국장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을 취소시켰다.이에따라 5·10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한 이승만은 확고한 정치적 발판을 굳히고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이 등장한 마당에서 미국이 그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동서대립의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그만한 인물을 찾기도 실상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미군정이 좌우익 대립을 어느 정도 평정한 것은 군정의 공헌쪽에다 비중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이렇듯 혼미한 해방공간에서 45년 12월 경찰이 창설된데 이어 46년 1월에는 국방경비대가 창군되었다.미군정의 병력과 경찰력의 확보는 정치세력,특히 좌익의 극단적 움직임과 연관성을 갖는다. ○한민당계 인사 큰 혜택 군에는 광복군 출신을 비롯,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들이 포진했다.이 가운데 일본군 출신들이 두각을 드러내 군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해버렸다.경찰의 경우도 조선총독부 시절의 인물들이 그대로 끼어들었다.이는 미군정이 일제치하의 경찰을 좌익색출에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실제로 경찰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폭동,3·1절 좌우충돌,3월 총파업,4·3사태를 진압하는데 공헌했다.또 일본군 출신을 주축으로 한 군 역시 46∼50년까지 발생한 반란사건 진압과 토벌의 주력이 되었다. 미군정은 정부수립까지 가는 험난한 길을 걷는데 일제시대 기득권층을 그대로 흡수한 측면이 없지 않다.이는 정부수립 후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했다.해방 원년 일본인 관리들이 물러난 자리에 7만5천여명의 한국인을 앉혔다.그 과정에 미군정의 인사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어 영어에 능통한 한국인과 일제하의 관료를 우대했는데,한민당계의 인사들이 큰 혜택을 입었다.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원할 무렵에는 안재홍과 같은 인물이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한민당계에 밀렸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일본이 침략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모든 악법을 19 45년 10월9일 법령11호에 따라 폐기해버렸다.여기에는 정치범처벌법,예방검속법,치안유지법,출판법,정치범보호관찰령,경찰의 사법권 등이 포함되었다.미군정은 이 악법들의 폐지 이유를 「한국인들에게 정의의 정치와 법률상의 균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미군정은 소련의 한반도 적화정책의 징후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자유를 안겨주었다.초기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용인한 것은 물론 출판언론의 자유도 열어주었다. 패전국 일본이 남겨놓은 재산은 기업의 경우 전체의 90%,토지는 전 국토의 12·5%나 되었다.이 재산은 일제가 36년 동안 착취한 것이어서 국민들의 관심도 컸다.이른바 적산으로 분류한 이들 재산을 법령 제33호에 따라 우선 군정청 소유로 했다.적산을 한국인들에게 매각하지 않겠다는 조항도 명문화했는데,이는 뒷날 한국에 세워질 정부에 맡긴다는 방침이었다.특히 토지의 경우는 여론조사에 붙였다.그러나 대다수의 의견이 정부수립 이후의 처리를 희망했다. 토지(농지)문제는 특히 북한으로부터 공격적 선전자료가 되었다.북한은 소련의 조정에 의해 1946년 초 토지개혁을 단행한 터여서 미군정을 호되게 비판했다.하지만 미군정은 적산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재정재산협정에 따라 한국에 넘겨주었다.미군정은 다만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농지 소작인이 수확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규정하는 법령 제9호를 해방 원년에 제정했을 뿐이다.특히 미국의 입장은 재산처분에 관한 한 무리수는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행정권의 민정이양을 위해 남조선과도정부를잠정적으로 만들었다.1946년 3월 법령 제64호를 적용하여 군정청기구의 국을 부로 바꾸고 군정체계를 확립했다.각 부처장으로 한국인을 채용하여 한미 양부처장제를 실시한 것도 이무렵이다.이해 9월 군정장관 A L 러치는 특별발표에서 행정권 이양의사를 밝혔다.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고문자격으로 부결권만 행사하는 가운데 두 나라 국어를 사용한 종래의 모든 문서가 한국어로 단일화되었다. ○적산 한국정부에 이양 남조선과도정부가 한국의 정부수립을 대처한 미군정의 조치였다면 1946년 12월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주주의 예행이라 할 수 있다.입법의원은 김규식을 의장으로 한 관선 45명,민선 45명으로 구성되었다.민선의원의 경우 인구비례에 따라 각 도에 정원을 배정했다.이 민선의원들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그래서 입법의원은 국민대표기구이자 입법기구로서 초보적이나마 현대적 의회였다. 이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을 수용한 측면이 있다.다시 말하면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초기부터 지원하는 대신 이를 과도입법의원과 연결시켰던 것이다.어떻든 입법의원은 입법기구로서 남조선과도정부 및 그로부터 분리 독립한 법원과 더불어 3권분립 관계를 이루어냈다.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웨드마이어중장 연설」 벽보/트루먼의 특사 “공가주의 투쟁 자제” 역설/“권리쟁탈의 욕망 제일 큰 문제” 지적/「조선의 인권·재산권 보장」 방침 천명 1947년8월 미군정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미 대통령(H S 트루먼)의 특사 A C 웨드마이어 중장(1897∼1990년)의 연설요지를 실은 벽보가 발견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서울 중랑구 중화2동 김보영씨(67)로부터 제공받은 이 벽보는 한국에 대한 당시 미국 정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벽보는 서두에 「현 세계의 여러가지 문제중에 권리쟁탈의 욕망이 제일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이는 아마도 동서냉전체제 아래서의 갈등을 비유한 것으로 풀이된다.그가 1947년 8월26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10여일 한국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이 벽보는 9월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그가 한국에 머물 무렵은 제2차 미소공동위가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선동하는 군중대회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욕망을 없애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밝히면서 「이 욕망을 군사적이 아니고 화가나 문학가의 붓으로,또 바이올리니스트의 활로 없애면 얼마나 아름답겠느냐」고 아주 낭만적인 표현을 썼다.그리고 「욕망을 없애거나 줄이면 더 좋은 목적을 쉽게 실현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말로 공산주의 투쟁의 자제를 당부했다. 이 벽보에는 「조선이 완전 자유독립국가를 만들도록 인권과 재산권 보장,자유기업을 장려하겠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의 재산권보장 발언은 미군정이 토지개혁을 장차 수립될 한국정부에 넘겨주겠다는 확고한 방침으로 나타났다.패전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적산도 처분하지 않고 뒷날 한국정부에 이양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웨드마이어 장군의 조선여행중의 연설」요지를 전제로 한 이 벽보의 크기는 가로 28.5㎝,세로 50.5㎝.그는 한국을 방문한뒤 냉혹한 판단으로 일관한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썼다.오하마 태생의 육군중장이었던 그의 보고서는 미국 대한정책의 골격이 되었다.
  • 미 대사관 전직원 검거에 주력

    ◎부정비자 수사… 한국계 제니퍼김 출금 요청 미국 입국비자 부정발급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경찰청 외사과는 25일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일하다 최근 해고당한 한국계 미국인 제니퍼 김씨(여)가 이번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고 신병확보에 나섰다. 경찰은 미국 대사관을 통해 김씨가 주한미군과 결혼,미국 국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번주 초 한미행정협정(SOFA)에 따라 주한미군사령부에 신원확인과 함께 출국정지를 요청할 계획이다. 미국 대사관의 고용원으로 일했던 김씨는 이달 초 미국 국무부가 주한 미국 대사관을 상대로 실시한 비자발급에 대한 감사에서 70여장의 비자를 영사의 허가없이 발급한 사실이 드러났다.
  • 미군 재판권 포기 조항/검찰서 삭제 의견 제출

    검찰은 24일 미군 당국의 요청이 있을 때 원칙적으로 주한미군등에 대한 형사재판권을 포기토록 돼 있는 문제조항을 삭제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한미행정협정(SOFA) 개정의견서를 마련,법무부에 제출키로 했다. 법무부는 이를 토대로 최종 개정안을 마련해 미국측과 개정협의를 벌일 방침이다.
  • 대한민국의 출범(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3)

    ◎첫 행정부 11부·4처로 구성… 총리에 이범석/국호·헌법전문에 상해임정 법통 승계 명확히 1948년 8월15일 상오10시쯤 중앙청(현 국립중앙박물관)앞 광장에 마련된 정부수립 선포식장.7월24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이 모습을 나타내자 세종로와 태평로를 꽉 메운 독립국가의 백성들은 손에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단상에는 이대통령 부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신익희 국회의장,김병로 대법원장이,왼쪽엔 맥아더 태평양지구연합군사령관,하지 주한미군사령관,외국사절들이 나란히 자리잡았다. ○「한」·「태한」 등도 거론 이대통령은 『이 정부가 변함없이 민주주의에 기초를 둔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하겠다』는 말로 경축사를 끝맺었다.일제의 강점으로 끊겼던 민족국가의 맥이 되살아나는 한편 이땅에 민주주의 정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새로 출발하는 대한민국의 성격을 제헌국회 의원들이 어떻게 규정하고 있었을까.이는 국호를 제정한 과정에서 잘 나타나 있다.헌법 기초위원회는 6월7일 나라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잠정 결정하고 이를 본회의에 넘겼다.본회의 토론에서 몇몇 의원들이 그 의의와 근거를 물었고 일부는 「한」,또는 「태한」으로 하자거나 국민 총의를 모아 참신한 새이름을 짓자는 의견들을 냈다. 이에 대해 헌법기초위원회 서상일 위원장등은 『「대한」이란 국호는 청일전쟁 당시 이미 사용했으며 일제에 의해 빼앗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켰다.이와 함께 「3·1운동」을 계기로 상해에서 수립한 임시정부에서도 그 이름을 썼다는 점을 강조했다.국회는 7월1일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최종 결정했다.상해임정에서 쓴 「대한민국」을 국호로 인정하고,헌법 전문에도 상해임정을 이어받는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새 국가는 그 법통을 명확히 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또 행정·입법·사법의 3권분립을 확실히 해 민주주의의 기틀을 세웠다.첫 행정부는 11부,4처,66국으로 짜여졌다.이대통령은 국무총리에 처음 이윤영을 내정하고 국회에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부되자 이범석으로 교체해 인준을 받는다.이어 8월 1∼7일에 걸쳐 장관과 처장들을 임명했다.입법부에서는 이승만의 뒤를 이어 신익희가 국회의장이 됐으며,부의장은 김동원과 김약수가 선출됐다.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은 김병로가 맡았다. 11부의 장관과,4처의 처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내무 윤치영 ▲외무 장택상 ▲국방 이범석 ▲재무 김도연 ▲법무 이인 ▲문교 안호상 ▲농림 조봉암 ▲상공 임영신 ▲사회 전진한 ▲교통 민희식 ▲체신 윤석구 ▲총무 김병연 ▲공보 김동성 ▲법제 유진오 ▲기획 이교선 그러나 조각 결과는 제헌국회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한민당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조각 과정에서 소외된 한민당은 8월8일 『본당은 시시비비주의로 임할 것이며 정부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야당 세력임을 자처했다.따라서 한국 정치에 여·야 개념이 이때 비로소 발생했으며 한민당 계열은 이후 야당의 뿌리로 자리잡는다. 대한민국 수립에 앞서 미 군정의 정권이양도 순조롭게 진행됐다.먼저 「5·10 선거」실시 열흘만에 군정은 입법기구 노릇을 하던「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문닫았다.이어 6월1일에는 군정재판을 폐지함으로써 입법·사법 두 기능을 마감했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에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 다른 나라들로부터 정통·합법국가임을 인정받는 것이었다.아직 출범하지 않은 정부에 대해 필리핀이 7월4일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사실상」승인한다.8월13일에는 미국과 자유중국도 정부를 「사실상」승인했고 특히 미국은 무초를 외교대표로 임명했다. ○유엔총회 압도적 지지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유엔의 승인이었다.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5·10 선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데다 유엔에서 주도권을 쥔 미국이 새 정부를 강력히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엔에서의 승인」이 사실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그럼에도 새 정부는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위해 외교적 총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그해의 유엔총회는 9월21일 파리에서 막을 올렸다.이 자리에는 한국임시위원단의 보고서가 제출됐다.위원단은 「5·10선거」를 『전체 한국민의 3분의2를점하는 선거민들이 자유롭고 정당하게 의사표시를 했다』고 밝혔다.선거결과 구성된 제헌국회의 입법활동과 정부형성 과정도 자세히 소개했다.보고서는 『미군사령부가 한국정부에 이미 정권을 이양했으며 한국정부는 정상적인 정부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총회의 끝 무렵인 12월7일부터 한국문제가 정식의제로 다뤄졌다.12일 총회는 투표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에 있어 유일한 그러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찬성 41,반대 6,기권 1이라는 압도적인 지지였다.이 결의문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역에 걸친 전국적 정부라는 선언을 조심스럽게 피하긴 했으나,대한민국 정부가 실질상 한반도에 있어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함축한 것이었다.더욱이 국제적 뒷받침이 거의 없었던 북한정권에 비해 대한민국 정부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확실하고 충분한 국제정치적 근거가 됐다. 유엔총회의 승인으로 자유우방 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잇따라 수립됐다.1949년 1월1일 미국이 대한민국 정부를 정식 승인한 것을 시작으로 4일에는 자유중국이,18일 영국,2월5일 프랑스,3월3일 필리핀이 뒤를 따랐다.1950년 「6·25」가 일어날 때까지 수교국가는 30개국 가까이로 늘어났다.이에 견줘 북한정권을 인정한 나라는 소련권에 한정됐다.더욱이 「6·25」가 발발하자 유엔군 참전의 명문을 제공하는등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은 한국의 국제관계에 초석이 되었다. ◎영 소장 「미 한국승인 성명서」/미 “대한민국은 유엔결의로 세운 합법정부”/“카이로선언 연장선상서 탄생” 천명/이 대통령,즉각 “무쵸파견 환영” 답신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대한민국 출범을 3일 앞둔 1948년 8월12일(한국시간 13일)미국 국무부가 새 한국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이를 승인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영국 런던의 공기록보존소에서 찾아냈다.이 성명서는 비록 장문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당시의 미국측 입장이 잘 요약돼 있다. 이 성명서에서 미국은 먼저 한국정부 수립이 1943년 12월 미국·영국·중국등 3국이 합의한 카이로선언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했다.또카이로선언의 원칙은 포츠담선언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재확인됐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소련과의 협상 끝에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미 정부는 1947년 11월14일 유엔총회 결정에 의해,정당한 과정을 통해 수립된 새 정부를 한국의 합법정부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이와 함께 대한민국 정부 및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 협상할 대통령 특사로서 로드 아일랜드 출신인 존 무초(John J Muccio)를 파견하겠다는 내용을 공표한 이 성명은 무초가 초대 주한 미대사를 맡게 될 것임을 일찍 명시해 놓았다. 그리고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 성명에 대한 답신을 통해 미국이 대통령 특사로 무초를 파견하겠다는 계획에 대해 즉각 찬성한 답신 내용도 런던에서 발굴했다.8월17일 미국에 보낸 답신에서 이승만대통령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한·미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조치』라고 치하했다.
  • 이유없는 미군 습격 급증/주한미군사령부 성명/16명은 성폭행 당해

    주한미군사령부는 15일 최근 잇따르고 있는 미군 및 군속등 미군관련자에 대한 한국인의 각종 폭행과 관련,『지난달 19일 서울 충무로 지하철 사건 이후 이유없이 주한 외국인에 대한 습격이 급증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주한미군은 이날 「주한미군과 미국인들이 관련된 사건에 대한 최근 소식」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한국인들의) 외국인(미군 및 군속)에 대한 이유없는 습격은 16건의 강간,수 건의 강간미수,가택침입 및 강도,다수의 절도 및 최소한 10건의 폭행사건이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
  • 제헌국회(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2)

    ◎내각­대통령책임제 공방… 대통령제로 결말/여·순 발란 등 소용돌이속 국가보안법 통과 우리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호칭이 등장한 것은 19 48년 7월 12일이다.국가의 기본골격인 헌법이 이날자로 제정되면서 대한민국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그 헌법은 5·10 선거에 의해 개원한 국회가 제정했는데 초대 국회를 제헌국회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있다. ○과도입법의원 맹활약 제헌국회는 1948년 5월 31일 개원되었다.제헌국회는 물론 민주주의 방식의 첫 대의기구다.미군정 아래서 개원되었던 절반의 대의기구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염두에 두면 사정은 약간 달라질 수 있다.그러나 제헌국회는 과도입법의원의원선거를 통해 민주주의 예행을 거친 국민들이 확실하게 뽑은 1백98명의 선량들이 참여한 국민의 대의기구였다.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15명이 국회에 진출,제헌국회개원에 깊숙이 간여했다.그들의 경험이 그만큼 존중되었던 것이다.특히 경기도 광주에서 경선 상대가 없이 무투표 당선된 신익희의 역할이 컸다.그는 미군정과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국회소집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데 전면에 나섰다.국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회운영에 관한 규칙법안이 이 위원회에 위임되었다. 이 운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제헌국회는 5월 31일 역사적 개원을 맞았다.제1차 본회의는 당시 최고령자였던 임시의장 이승만의 사회로 열렸다.국회의장단 선거에서 1백88표라는 압도적 표수로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했다.부의장에는 신익희(76표)와 김동원(77표)이 선출되었다.이날 서울 시내에는 경축 꽃전차가 거리를 누비는 가운데 하오2시 제헌국회 개원식이 베풀어졌다. 국회에는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다.이 위원회는 먼저 헌법학자 유진오등 10명을 전문위원으로 선임했다.유진오 전문위원은 내각책임제 및 양원제,3권분립을 중심으로 한 안을 내놓았다.그리고 법전편찬위원회(위원장 김병노)가 작성한 헌법초안을 비롯,임시정부헌장,과도입법의원 제정의 약헌,구미 각국의 헌법을 참고로 기초에 착수했다. 내각책임제안은 곧 바로 이승만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12일 양원제를 단원제로 하는 등 약간의 수정을 가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이의없이 채택했다.이승만은 마침내 분노하고 말았다.6월15일 기초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내각책임제가 비민주적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책임제로 번안해줄 것을 요구했다.그러면서 측근을 시켜 국회가 내각책임제를 계속 밀고나가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은근히 위협해왔다. 그래서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그를 제외시킨 정치문제논의는 무의미할 정도로 당시 정치상황에서 이승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했던 것이다.유일한 정당이었던 한민당이 먼저 굽히고 들어갔다.이로써 6월22일 제17차 기초위원회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안은 대통령책임제헌법안으로 번안하기에 이른다.이어 6월 23일 제17차 국회본회의에 대통령책임제 헌법안이 상정되어 20일간에 걸쳐 17차례의 토론을 벌였다. ○헌법안 20일간 격론 대통령책임제헌법은 1948년 7월 12일 제정한 것으로 되어있다.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명의의 헌법 전문은 단기 4281년 7월 12일이라고 분명히 적었다.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12일 자정을 약간 넘긴 0시28분에 제3독회를 마쳤다.그렇게 해서 대한민국헌법이 제정되었다.기초과정부터 풍파를 일으킨 제헌국회의 헌법제정은 파란만장한 헌정사의 장래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정부조직법은 7월 16일 제31차 본회의에서 제정되었다.17일 공포된 헌법절차에 따라 7월 20일 제37차 본회의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8월 3일 제37차 본회의는 이범석에 대한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은 가결시켰다.그리고 이승만의 대통령선출에 따라 신익희가 의장으로 선출되는 동시에 김약수가 부의장이 되었다.이어 8월 5일 제40차 본회의에서 김병로 대법원장 임명 요청을 동의함으로써 정부수립을 위한 기본조치를 매듭지었다. 제헌국회에서 원내 세력판도의 윤곽이 드러난 시기는 의장단 선거를 전후해서다.이승만의 의장피선은 초당적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었지만 2명의 국회부의장 선출에서는 그 색깔이 드러났다.신익희와 김동원의 부의장 피선은 원내세력을 국민회와 한민당이 주도했다는사실을 보여주고 있다.이 때부터 각 정파 및 무소속의원들은 지연·인연을 따라 독자적 원내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급진적 이론파였던 성인회를 비롯,동인회,청구회가 연합하여 이른바 소장파 그룹을 만들었다.이 그룹은 한민당·이정회와 정립하면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이는 10월 13일 긴급동의로 제출한 미군철수 결의안과 한미간의 여러 협정에 극력 반대하는 것등으로 나타났다.특히 미군철수 결의안은 북한 최고 인민위원회가 미·소 정부에 두 나라 군대 철퇴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낸 직후에 나왔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남한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1948년 10월부터는 국군에 침투했던 남로당 세포조직에 의한 무장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10월 2일 제주도군 경비1대대의 반란,10월 20일 제40연대의 여수·순천 반란,11월 20일 대구 제60연대 무장반란이 그것이다.엄청난 사상자를 낸 가운데 곧 진압되었지만,그 잔여세력들은 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다.유격전은 북한의 강동정치학원 정치·군사훈련을 받은 요원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농개법 등 획기적 조치 그래서 국회는 11월 21일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화하는 준엄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당시 상황에서 국가 보안법 제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이에 앞서 9월 7일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1949년 2월 3일에는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이들 법률의 내용과 집행을 둘러싸고 상당한 혼란과 대립도 뒤따랐다.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은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이다.국회안에서 소장파 그룹을 형성했던 노일환,김약수,김옥주등 13명의 의원들이 1949년 5월 20일부터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실로 중대한 사태가 아닐 수 없는 제헌국회의 얼룩이었다. ◎하버드대 소장 「사찰요람」/「국회 남노당 프락치사건」 북노당도 개입/당시 부의장 김약수 「배후 조종자」 분류/전 북노당 고위간부 “남북 합작” 증언 1949년 5월 20일 제헌국회의원 노일환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진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을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접근한 경우도 없지않다.그러나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입수한 새로운 자료들과 증언을 통해 이 사건 배후에는 남조선 노동당(남로당)뿐 아니라 북조선 노동당(북로당)까지 개입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 하버드대 옌친연구소에서 입수한 사찰요람에 따르면 당시 국회 부의장으로 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김약수는 「이 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분류했다.이 문서는 그가 1947년 조선공화당을 조직,서기와 선전부장이라는 당직을 맡았던 사실도 들추어냈다.그리고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발굴한 주한미군 정보처(G­2)의 주간정보보고서는 제헌국회 개원초기 이들이 들어가 있던 무소속구락부를 반우파적 집단으로 평가했다. 이어 주간정보보고서는 무소속구락부가 앞으로 좌익성향 구성원들의 집합처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미 군정의 예측은 어느 정도 적중되어 국회활동을 통해 미군철수 결의안을 긴급동의로 제출하는 등 북한의 주장을 동조하고 나섰다.국회 프락치 사건에연루한 이들은 주로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조사되어 모두 3차례에 걸쳐 13명이 붙잡혀 들어갔다. 그러나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만난 전 북로당 고위간부의 증언에서 북로당도 깊이 개입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이 증언에 따르면 북로당원 성시백(김삼룡·이주하와 함께 6·25가 일어난 1950년 6월 27일 서울에서 처형되었음)이 관련되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남로당과 북로당의 공작이 횡적으로 들어갔는데 그에게 포섭된 인물은 황윤호(진양출신),김옥주(함양출신),강욱중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 카투사 상위 10%선 국군 어학요원 배치/육군 9월부터

    앞으로 주한미군한국군근무지원단(카투사)모집시험 때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나타낸 합격자들은 한국군 영어요원으로 선발돼 육군에서 복무하게 된다. 6일 육군에 따르면 최근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외국어에 능통한 고급인력의 확보가 절실해짐에 따라 카투사시험에서 상위 10%에 든 사람들은 한국군 어학병으로 뽑기로 했다. 육군은 이에 따라 오는 9월 치를 예정인 올 카투사시험부터 한국군어학병을 선발,상위 1백명을 한국군 영어요원으로 배치할 계획이다
  • 미군 헬기 불시착/인명피해 없어

    【화성=김병철 기자】 6일 하오12시7분쯤 경기도 화성군 마도면 청원4리 마도간척지 미군헬기 임시착륙장에서 주한 미공군 평택 K­55 소속 MH53J 미군 헬기가 엔진고장을 일으켜 비상착륙한 뒤 전소됐다. 사고당시 헬기에는 주한미군 특전요원 5명이 타고 있었으나 헬기가 착륙하자마자 밖으로 빠져나와 인명피해는 없었다.
  • 택시기사와 요금시비/미 군속 또 폭행

    주한미군의 한국인에 대한 범죄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미군속이 한국인 택시운전기사를 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물의를 빚고 있다. 1일 하오8시쯤 서울 남대문구 동자동 서울역앞에서 미8군 군속 플레밍 조셉씨(51·카투사영어교사)가 미군전용택시인 이른바 「아리랑택시」기사 유모씨(45)와 요금문제로 시비를 벌이다 유씨의 얼굴등을 마구 때려 상처를 입혔다. 유씨에 따르면 『용산 미8군 영내에서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온 조셉씨가 평소보다 2달러정도 요금이 더 나왔다며 시비를 걸어 이에 항의하자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옆구리를 차는 등 행패를 부렸다』고 주장했다. 조셉씨는 사건현장에 있던 시민들에게 붙잡혀 경찰에 인계됐다. 한편 서울남대문경찰서는 조셉씨를 폭력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입건,조사를 벌이고 있다.
  • 북한군 휴전선 월경/한국 정치이용 경고

    【워싱턴=이경형 특파원】 주한미군사령관인 게리 럭 장군은 최근 북한의 휴전선 월경문제로 야기된 남북한 긴장관계에 우려를 표시했으며 특히 한국군부지도자들에게 경고성명을 통해 이러한 월경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도록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29일 워싱턴타임스지가 보도했다.
  • 미군 헬기 2대/DMZ 월경 “위기일발”/지형훈련중 실수로

    ◎아군측 신호탄 발사로 회항 지난 27일 상오7시40분쯤 동부전선 군사분계선 상공에서 주한미군 항공여단소속 UH­60 헬기 2대가 실수로 북측지역으로 월경하기 직전 아군측 경계병의 신호탄 발사로 회항한 사실이 29일 밝혀졌다. 이 헬기는 이날 상오 지형숙지 훈련을 위해 비행금지구역을 통과,계곡을 따라 군사분계선 쪽으로 접근하던중 우리측 철책 뒤쪽 1백m 상공에서 되돌아왔다. 군사분계선 주변 지역에는 헬기의 월경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철책선 이남 30∼3백m 지점에 5백m간격으로 노란색의 대형 월경방지판이 설치돼 있다. 그러나 이 헬기들은 이 방지판을 지나쳐 계속 비행하던 중이었다. 이 헬기에는 B모준위등 3명의 미군이 탑승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고는 지난 연말 미군 헬기의 북한지역 월경사고로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생포됐던 이후 또 다시 월경 직전의 상황까지 되풀이됨으로써 미군 조종사들의 교육강화가 시급한 것으로 지적된다.
  • 주한미군 반입 식품류 검역 실시/한·미 원칙 합의

    ◎가을 SOFA 합동위서 각서 교환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이 해외에서 반입해 오는 식품류에 대해 오는 10월쯤부터 우리나라의 통관절차에 따라 검역을 실시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28일 외무부가 밝혔다.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양측은 이달초 한미행정협정(SOFA)합동위원회 식물검역 분과위원회를 열고 부정식품 근절차원에서 미군부대로 반입되는 과일·채소 등 식품류의 검역을 위한 법적근거를 마련하기로 합의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 당국자는 『현재 보사부 등 관계부처와 함께 검역대상 식품류의 분류작업을 벌이고 있다』면서 『한미 양국은 올 가을 SOFA 합동위원회를 열어 SOFA 제26조의 「보건과 위생」 관련조항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SOFA 제26조 본문은 「미국의 권리와 관련해 질병의 관리·예방 및 기타 공중보건,의료,위생 등 업무의 조정에 관한 공동관심사는 SOFA 합동위에서 해결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미측은 그러나 『한국의 통관절차가 문제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식품검역 조항의 적용을 지금까지 미뤄왔으며 이에 따라 주한 미군용 식품은 지금까지 우리정부의 검역절차를 거치지 않고 미 본토나 일본 등지에서 곧바로 미군부대로 반입돼 왔다. 미측은 『한국측의 「신속한」 통관만 보장된다면 검역절차를 밟지않을 이유가 없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 한·미 안보회의 정례화/외무·국방·주미대사 등 참석 격주 개최

    대북 경수로 공급을 둘러싼 협상이 난항을 거듭,한반도에 긴장조성 조짐이 보이고 있는 가운데 한미양국은 공로명 외무장관·이양호 국방장관·제임스 레이니 주한미대사 및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 등 4명이 참여하는 한미안보 4자회동을 격주로 개최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28일 밝혀졌다. 공·이 장관 등 4명은 지난 24일 첫 모임을 조찬형식으로 갖고 ▲최근 현안으로 대두된 주한미군범죄 방지 방안 ▲한미행정협정(SOFA) 개정 ▲한반도 안보상황 ▲정전체제 유지 등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등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해 나가자는데 인식을 같이했다는 것이다. 한미안보 4자회동은 80년대말 용산 미군기지 이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잠시 이뤄진 적이 있고 최근에는 북한핵문제로 인해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됐던 지난해 상반기 1차례 열린 바 있다.
  • 미군범죄 실태와 「한미 행협」 문제점 분석

    ◎미군 범죄/연 2천건 발생 “처벌이 없다”/재판권 행사 평균 2%… 독 53·일은 32%/폭력·절도·성폭행 하고도 오히려 당당/미 요청땐 「전속 관할권」 포기·구속수사도 못해 주한 미군들의 크고 작은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19일 서울 지하철 충무로역에서의 집단 폭행에 이어 20일 춘천 택시승객 폭행,22일 의정부 클럽 여 종업원 성폭행 사건 등이 터지며 미군 범죄에 대한 재판권 행사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도 지난 26일 이홍구 국무총리 주재로 장관 간담회를 갖고 미군 범죄의 재발방지와 범인의 처리 방안 등을 논의했다. ▷실태◁ 78세인 노모를 모시고 국민학교 4학년생 아들과 단칸 셋방에 사는 경기도 송탄시 강병관씨(42·상업)는 요즘 병원비 1천여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병상에서 시름에 잠겨 있다. 그는 지난 1월 21일 새벽 2시 쯤 경기도 오산 미군기지 앞에서 한 미군병사에 봉변을 당하고 차도에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다. 강씨는 집 부근에 사는 백인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가 이를 싸우는 것으로 오해한 흑인 병사 바비올데이씨(23)에게 멱살을 잡혀 차도로 떼밀리며 지나던 차에 머리를 부딪혔다. 대수술 끝에 목숨은 건졌지만 미군측은 단순한 교통사고라며 치료비 한 푼도 보상하지 않았다.바비올 데이씨를 검찰에 고발했지만 미군 병사는 단순 폭행죄로 입건되는 데 그쳤다. 회사원 윤모씨(25·여·서울 강서구 가양동)는 지난 1월 자신을 수십차례 성폭행한 미 8군 군속 토머스 테일러씨(24)를 강간 및 폭행죄로 경찰에 고발했다. 테일러가 찍은 나체 사진 등이 증거가 돼 그는 지난 2월 강간 및 폭행죄로 검찰에 송치됐지만 버젓이 서울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이른바 「한·미행정협정」을 적용받는 그는 형이 확정되기까지 구금되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인 윤씨는 혹시 보복이나 당하지 않을까 도리어 걱정하고 있다.한국 경찰이 한 일은 테일러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가 전부이다. 동두천시에 사는 조모씨(37·상업)는 요즘 자신의 승용차만 보면 짜증이 난다.지난 해 4월 새 차를 구입한지 1주일도 안돼 미군 트럭에 받혀 차체의 반 정도를 고쳐야 했다. 네거리에서 좌회전하던 조씨의 차를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미군 트럭이 받았으나 수차례의 경위조사를 거쳐 미군측으로부터 보상받은 것은 1년이 다 된 지난 3월이었다. 지난 해 주한 미군과 군속,또는 그들의 가족 등이 저지른 형사 범죄는 8백96건이다.93년의 8백2건에 비해 11.7%가 늘었다.그러나 형사입건되지 않은 도로교통법 위반 사건까지 합하면 모두 2천2백여건으로 하루 평균 6건이 넘는다.올 들어서도 지난 4월 말까지는 1백96명이 1백5건의 범죄를 저질렀다. 지난 해 미군 범죄의 죄목은 폭력,재물손괴,절도,강간 등의 순이다.범인은 군인이 81%이며 군속 8∼9%,장병 가족 6%의 순이다. ▷문제점◁ 범죄 그 자체보다 그 뒷처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이 큰 문제이다.민사 사건의 경우 철저하게 보상하고,형사 사건의 경우 응분의 처벌을 내려야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의 사법권이 범행을 저지른 미군에게는 제대로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그 이유는 지난 67년에 체결된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 때문이다. 미군들의 범죄에 대한 사법당국의 재판권 행사 비율은 지난 90년 0.9%에서 지난 해 2.5%로 다소 높아졌지만 평균 2%선을 밑돈다.미군이 주둔하는 독일의 53%,일본의 32%,필리핀의 21%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이른바 「한·미 행정협정」은 지난 67년 체결된 이래 91년 한차례 개정됐다. 본문,합의 의사록,양해사항으로 구성된 협정의 본문 첫 장에는 「양 국가간의 긴밀한 상호 이익의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그러나 일부 조항이 한국의 국가 형벌권을 침해하는 불평등 협정이다. 대표적인 불평등 조항은 합의 의사록의 22조 2항(한국의 전속 관할권 행사),본문의 5항(범죄 혐의자 수사 및 구속),7항(징역형 복역) 등이다.의사록 22조 2항은 미군의 행정벌이나 징계가 효과적이므로 미군 당국이 요청하면 한국의 전속 재판권을 포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본문 5항은 피의자가 미군 관할하에 있으면 재판절차가 끝날 때까지 미군당국이 구금한다고 되어 있고 7항은 미국측이 한국 법원에서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인 미군의 인도를 요구하면 한국측이 「호의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미군의 공무상 범죄는 우리 재판부가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합의 의사록 22조3항은 공무냐 아니냐의 판단을 미군이 하도록 돼 있다.따라서 미국측이 공무라고 판단하면 미군이 재판권을 갖게 되는 셈이다. 결국 미군 범죄로 피해를 입는 우리 국민은 육체적,재산적 피해는 물론 민족적 자부심까지 무너지는 참담한 느낌을 받게 된다. ▷대책◁ 미군 범죄의 대부분은 양국간의 가치관 차이,언어 장벽 때문에 빚어진다.한·미 두 나라 국민은 이같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대를 돈독히 할 수 있는 문화·예술 행사를 마련하는 등 서로 이해 증진에 힘써야 한다. 또 양국 관계도 과거 전시상태를 전제로 한 특수 관계나 일방적인 원조관계에서 벗어나 평등한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 행정 협정의 불평등 조항을 바로잡아야 한다.이 협정은 체결된지 23년만인 지난 91년 첫 개정 시도가 있었다.당시 미국은 한국 사법제도의 후진성을 들어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는데 소극적이었다. ◎“죄질나쁜 사건 재판권 적극행사”/한미유대 손상없게 냉철히 대응할때/「행정협정」 문제조항 개정 적극 뒷바침/정동기 법무부 검찰4과장(전문가진단) 최근 들어 일련의 미군관련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에 물의를 야기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이 사건들을 계기로 미군인범죄에 대한 이목이 집중되면서 한미행정협정의 개정논의가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현재 이러한 논의의 주류인 미군인범죄가 빈발하고 있는 것은 미군인범죄에 대한 형사재판권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고 있는데 기인하는 것이며,이는 근본적으로 한미행정협정에 불평등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일련의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경찰 등 우리 수사당국에서 사건경위나 피해상황 등을 중심으로 철저한 수사를 통하여 신속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있다.수사결과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 재판권행사 여부를 결정할 것이고,재판권행사 여부는 사안에 따른 구체적 타당성을 잃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될것이다.검찰과 경찰의 수사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엄정하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성급하고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자세로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재판권 행사가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미군인에 대한 재판권행사 비율은 91년에 1.7%였던 것이 금년에는 4월말 현재 4.4%로 크게 증가하였다.통계수치만 보면 일견 재판권행사가 극히 저조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그러나 이는 미군인범죄의 약65%가 경미한 교통사고이고 나머지도 단순폭행과 같은 경미한 범죄가 대부분이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범하였다면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따라 공소권이 없거나 무혐의 또는 기소유예 등으로 불기소처분될 사건들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사건을 제외하면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는 거의 대부분 재판권을 행사하고 있어 행사율이 결코 낮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행협대상자 중 미군인 이외의 군속이나 초청계약자에 대하여는 우리나라가 전적으로 재판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포함한다면 행협대상자의 약24%에 대하여 재판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참고로 필자가 입수한 통계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미군인범죄에 대한 재판권행사율이 0.1%,NATO의 경우 5.5%에 지나지 않아 외국에 비해서도 그 행사율이 결코 낮다고 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도 법무부는 재판권 행사여부를 신중히 검토하여 강력범죄는 물론 죄질이 나쁜 사건이나 국민의 법감정에 반하는 사건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 재판권을 행사해 나갈 것이다. 한편 한미행정협정은 1967년에 발효되어 1991년에 합의양해사항이 일부 개정된 바 있으나,이번 사건을 계기로 재판권포기에 관한 합의의사록이나 구금인도와 관련된 규정 등 일부조항에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이 점에 관하여는 정부내 관계부처간 협의를 통하여 한미행정협정의 운영문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한 바 있고,국민의 법감정과 주한미군의 주둔환경을 고려하여 적절한 대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일련의 사건들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기는 하나,주로 20세 전후의 젊은 미군인들과 관련하여발생한 우발적인 사건들로 인하여 국민 감정이 불필요하게 자극되어 전통적인 한미간의 유대관계가 손상되는 결과를 초래하여서는 아니될 것으로 생각된다.지금은 이러한 사건들을 냉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대하는 성숙된 모습이 필요한 때이다.
  • 미군 성희롱 항의서한/여성단체,럭 사령관에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성희롱문제를 걱정하는 시민모임」 등 여성단체는 27일 최근 잇따르고 있는 주한미군의 한국인 성폭행사건에 항의하는 서한을 게리 럭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냈다. 이들은 서한에서 『여성단체는 주한미군의 한국인 성희롱·성폭행등을 더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최근 발생한 사건의 진상을 조사,관련자를 엄중처벌할 것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주한미군범죄에 적절한 대책을 강구할 수 있도록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한·미행정협정을 조속히 개정할 것을 촉구했다.
  • 1948년 남북연석회의(새로쓰는 한국현대사:20)

    ◎김구 도착전 개최… 북서 분위기 일방적 주도/명목뿐인 대표 내세워 각본대로 인공수립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용운(조사부 〃)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는 19 48년 4월 19일 하오6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막을 올렸다.김구는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아침 평양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군중의 저지에 부딪쳤다.그의 거처인 경교장 뜰에 새벽부터 몰려든 학생·청년들은 김구에게 『북행은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것일 뿐』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다. 김구는 몸소 베란다에 모습을 드러냈다.『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칠십여년(72살)이 되었다.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이대로 가면 조선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절절하게 호소했다.그러나 군중은 끝까지 김구의 평양행을 만류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뒷담을 넘어 북행길에 나섰다. ○김규식은 참석 망설여 김구의 북행에는 아들 김신과 비서 선우진이 동행했다.김구 일행은 자동차편으로 개성,여현(지금의 판문점)을 거쳐 밤늦게 평양에 닿았다.한편 김규식은 이틀 늦은 21일 서울을 떠나 다음 날 새벽 평양에서 합류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북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이들이 민족통일을 이루고,또 민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어렵게 평양행을 결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하지만 일부에서는 다른 요소들이 작용했다는 시각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구의 경우 당시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았다는 것이다.당시 그가 북행을 결심할 무렵 한국문제는 유엔 결의에 의해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쪽으로 굳어져 있었다.이는 이승만의 의도이기도 했다.이에따라 이승만은 그 세력을 급속히 넓혀간 반면 경쟁관계에 있던 김구는 궁지에 몰리는 판이었다.결국 김구는 남북협상을 하나의 정치적 돌파구로 여겨 모험을 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비해 김규식은 끝까지 연석회의 참석을 망설인 것으로 전해진다.그는 나름대로 남북협상의 한계를 예상했지만 자신이 그동안 주도해 온 남쪽에서의 좌우합작이라는 명분의연장선상에서 부득이 평양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김구가 도착하기 몇시간 전인 19일 하오6시에 남북연석회의는 시작됐다.개회사에 이어 김일성이 「북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하고 잇따라 박헌영·백남운·허 헌이 등단해 연설하는등 회의는 북쪽의 일방적인 주도 분위기로 이어졌다.마지막 날인 4월 23일 연석회의는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미·소)양군 철퇴 요청서」「전조선 동포에게 격함」등 여러가지 결정서·성명서가 채택됐다. 이 회의에서는 남북의 56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백95명이 참가했다고 공식 발표됐다.남쪽에서 참가한 단체는 41개,주요인사는 김구·조소앙·엄항섭·조완구(이상 한독당),김규식·여운형·원세훈(이상 민족자주연맹),그리고 홍명희 민주독립당 당수등 50여명으로 파악됐다. 연석회의에 이어 26∼30일에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남북 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이 때 비로소 김구·김규식은 북쪽의 김일성·김두봉과 합동으로,또는 개별적으로 여러차례 회합을 가졌다.이 네명이 실질적으로 합의한 사항은 30일 공동성명서 형태로 발표됐다.4개 항의 내용은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 ②외국군대 철거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확인 ③조선인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④남조선 단독선거 반대 등이다.특히 각 정당은 성명서 말미에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와 이 선거로 수립하려는 단독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지지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해주서 2차모임 갖자 남한 대표들은 북에 잔류를 희망한 홍명희 등 70명을 남겨두고 5월 4일 귀경했다.남북연석회의는 대단한 성과나 거둔 듯이 보였다.김구·김규식은 5월 6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단선 반대」입장을 재천명했다.5월 8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주도로 총파업이 단행됐고 각급 학교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의사에 상관없이 총선거는 무난히 치러졌다.「총선 거부」로 공식적인 정치의 장에서 밀려난 남한의 남북협상파들은 급격히 몰락한다.「5·10 선거」가 실시된 뒤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파 정치인이나 정당들은 「단독선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다시금 발표하지만 이미 메아리없는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말았다. 한편 평양에서는 5월 25∼26일 「남북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렸다.여기서 총선저지가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소집을 결정한다.6월 11일 북한측은 남쪽의 남북협상파 인사,정당에게 6월 23일 해주에서 제2차 회의를 갖자고 전격 제의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 등 초청을 받은 인사들은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첫째 그동안 남한정국이 변해 공개적으로 해주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비공식으로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는 남한 당국의 법률 제재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돼 있었다.결국 김구·김규식은 불참을 통고했으며 북조선노동당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대회를 평양에서 강행했다.이 회의는 남한에서의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통일정부로서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남로당 지하선거 실시이 해주회의에서는 김구·김규식을 이용해 「5·10선거」를 방해하려 한 북한의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자신들의 참여없이 이처럼 엄청난 결정을 내린데 대해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쪽의 남북협상파 정치인들은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하지만 이미 「쏘아버린 화살」꼴이 됐다. 이후 남북협상의 흐름은 철저히 북한측 의도대로 잡혀갔다.명목상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8월 21일 해주에서 열렸다.이 자리에는 남로당이 지하선거에서 선출된 이른바 「남한 대표」1천여명이 나왔다.거의가 남쪽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일부 정당인사가 구색용으로 들어있었다.이들은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울 때 남한 주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선전한 것은 물론이다. 남북협상의 기운은 이로써 실질적인 막을 내렸다.남북협상의 전과정을 돌아보면 남쪽의 정치인들이 북한측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김일성의 김구·김규식 초청­연석회의 개최­5·10선거 반대 결의­제2차 대회의인민공화국 수립 결정­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등의 계획된 수순을 밟아나갔던 것이다.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의 남북협상파들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기회는 한번도 얻어내지 못했다.모든 것은 북한쪽의 뜻대로 진행됐을 뿐이었다. ◎UNTCOK 보고서/김규식 등 남대표 불러 융숭한 대접/“남에 전기공급”약속후 1주뒤 끊어 북한은 1948년 4월 19∼25일까지 열린 평양 남북연석회의를 정치적 선전기회로 철저하게 활용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당시 주한미군사령부의 「평양 연락장교 보고서」(1948년 4월 16일)등의 여러 자료는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이 보고서는 남한의 방문자들에게 감명을 주려고 북한 당국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평양시내의 도로를 보수하고 연일 시민들을 동원,청소를 하는 한편 길가의 건물에 페인트를 발랐다고 보고했는데 당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평양방송 청취기록도 이를 뒷받침했다.UNTCOK 평양방송 청취기록은 「남한 대표들이국영공장 근로자들의 열성과 한 마을의 생활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었다.여기에는 「국영공장 휴게실에서 노동자의 피아노 반주에 놀랐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어 UNTCOK 기록을 보면 연석회의 일정이 끝난 4월 25일에는 40만명이 모인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참가한 뒤에 메이데이 기념 인민군 열병·분열행사도 참관한 것으로 되어있다.어떻든 남한 대표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4월 30일에는 대동강 쑥섬에서 낚시·보트놀이와 함께 어죽잔치를 즐긴 이들은 조만식의 남한 동행을 제의만 하고 적극 매달리지는 않았다.이 물놀이는 하오4시까지 계속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상적인 시찰여행과 대접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UNTCOK의 당시 분석이다.그래서 김규식은 김일성의 4월 25일 저녁초대 연설에서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고 북한을 극찬했다.김규식은 또 「우리 민족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련의 제의를 불가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식으로 미·소 양군 즉각철수안을 지지하고 나섰다.이같은 미·소 양군 즉시 철수론은 지극히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은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이 증명하고 있다. 한편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5월 6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는데,그 안에는 북한이 남한에 계속 전력을 공급키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 「정보개요」(1948년 5월)에 따르면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그날 저녁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으며 14일 실제 전력이 끊겼다.
  • 미군범죄 한·미 공동조사/정부,한미행협 단계적 개정 추진

    ◎“수사권 전면인수엔 기술적 어려움”/22개경찰서,외사범 기동처리반 운영 정부는 26일 이홍구 국무총리 주재로 주한미군범죄와 관련한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미군범죄방지와 사건의 원만한 처리를 위해 용산·평택·의정부·동두천 등 미군주둔지역을 관할하는 전국 22개 경찰서에 외사범죄기동처리반을 운영하고 미군당국과의 합동순찰을 강화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와 함께 시·도지사및 시장·군수로하여금 관할지역의 미군부대장과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구축,유사한 사건의 발생을 예방하고 사건발생때 신속한 조치를 취하도록 할 방침이다. 회의에서는 최근 잇따라 발생한 주한미군범죄행위와 관련,주한미군당국과 긴밀한 협조 아래 철저한 수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명백하게 규명하고 결과에 따라 합당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또 「한·미 주둔군지위에 관한 협정(SOFA)」규정의 일부문제점에 대해서는 관계부처와 전문가들의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보완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는 김용태 내무·안우만 법무·이양호 국방부장관,이시영외무·이경재 공보처차관 등이 참석했다. 한편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이날 SOFA 개정문제와 관련,『우선 미군범죄자에 대해 한국정부와 유엔군사령부가 공동조사를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해 단계적으로 개정해 나갈 뜻을 시사했다. 이 당국자는 『우리의 유치시설이나 수사관의 외국어구사능력을 감안할 때 당장 미군범죄자에 대한 전면적 수사권을 넘겨받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면서 『따라서 이러한 조건이 갖춰지는 것을 봐가면서 행정협정을 고쳐나가는 게 바람직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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