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주적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새우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실명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뇌물죄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 대장
    2026-03-0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399
  • [특별기고] 3·1정신과 국민통합/박유철 국가보훈처장

    “어쩌다 우리 국운이 이토록 비색하여 그 같은 왜놈들한테 나라를 빼앗겼는고. 강토를 빼앗더니, 농사지은 식량도 다 빼앗고, 학병으로 조선의 자식도 다 빼앗고, 이제는 설까지 일본 설을 쇠라하니 정신의 골수를 뽑겠다는 수작 아닌가.” 소설 ‘혼불’의 일부다. 일본은 우리 민족이 국권을 잃고 암흑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민족의 정신을 말살시키고, 정기를 끊기 위해 온갖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 질곡의 세월을 헤치고 광복을 맞은 지 올해로 60년이 된다.30년을 한 세대로 친다면,2세대가 지나 제3세대를 맞는 시점이다. 이러한 역사의 길고 긴 여정 속에서 3월이 오면, 연록의 봄바람은 시공을 넘고 불어와 우리들 가슴 속에 선열들이 외쳤던 독립만세 함성의 애국혼을 불어넣어 준다. 3월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86주년이 되는 날이다.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세계 만방에 천명한 선열들의 불굴의 자주독립 정신은 우리 민족의 민족혼으로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죽음보다 참기 어려운 민족적 굴욕감과 생명보다 소중한 자유에의 열망으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떨쳐 일어난 3·1운동의 자주, 자유, 평화정신은 불변의 가치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정신적 가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은 미래의 수확을 가져오는 씨앗”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난 역사는 오늘을 사는 거울이 되며, 용기와 힘의 원천이 된다 하겠다. 우리는 3·1정신을 통해 당면한 과제를 극복하고 선진 한국으로 가는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 이래 자유와 평화를 거저 얻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올해는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로서는 매우 의미 있는 해다. 8·15광복을 맞았던 을유년으로부터 60년이 되는 해이자, 을사늑약 100년이 되는 해이며, 한·일 국교정상화로부터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6·25전쟁이 일어난 지 55년이 되는 해로, 선열들이 고군분투한 근현대사의 역사는 교훈이 되어 우리가 오늘날 세계적인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자산이 되고 있다. 선열들이 신명을 바쳐 찾은 조국, 우리는 광복 이후 지난 60여년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산업 근대화를 이루고 민주화의 노력을 통해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을 이룩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다. 밖으로는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남북 화해와 북핵문제의 평화적인 해결과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지역, 계층, 세대간의 혼돈을 넘어 분열에서 화해로, 갈등에서 통합을 이루어 동북아시대 세계 무대에 우뚝 선 대한민국을 이룩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이러한 중차대한 시기에,‘애국심’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원초적인 힘이고, 조국 번영에 가장 중요한 초석이 되기에 선열들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국민 통합의 원동력으로 삼아 나아가야 하겠다. 정부에서는 광복 60주년이 되는 올해 독립유공자 발굴 포상을 위해 사료발굴단을 운영하여 대대적인 포상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 특히 이번 3·1절을 기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포상하게 됨으로써 민족 화합의 장을 열게 되었다 하겠다. 또한 올해를 보훈선양 활성화 원년으로 삼아 국가를 위해 헌신하거나 공헌하신 분들에 대해 사회적 예우풍토 조성과 국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확산하여 국가 발전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다. 86주년 3·1절을 맞아 올해야말로 3·1정신을 교훈으로 삼아 새로운 각오로 온 국민이 화합 단결하여 국운융성과 함께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초석을 다질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으고 사명 의식을 다져 보는 3월이 되었으면 한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부시, 또 말실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가진 미·러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러시아를 ‘군주제’로 표현했다가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해프닝을 빚었다. 그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를 ‘석유수출국기구(OPEC)’로 부르는가 하면 ‘1월(January)’을 ‘6월(June)’이라고 말하는 등 잦은 말실수로 유명하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의)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취한 결정들과 관련해 한 얘기들이 만족스러웠느냐.”는 질문에 “중요한 것은 푸틴 대통령이 얘기한 군주제에 관한 발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푸틴이 러시아 민주주의에 대해 한 말은 “러시아가 전체주의 시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전체주의’를 ‘군주제’로 혼동한 셈이다. 푸틴은 앞서 한 기자가 “러시아와 미국의 체제는 네덜란드 같은 나라와 비교할 때 완전히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다.”며 질문하자 “네덜란드는 어쨌든 군주제다.”라고만 했었다. 부시 대통령은 ‘군주제’라는 표현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자 “어쨌든 이해했죠?”라며 멋쩍게 웃었고 “여행 말미이다 보니…. 아무튼 그(푸틴)는 민주주의에 대해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나는 그것에 감사한다.”고 강조했다. 부시는 말실수에 앞서 푸틴을 “내 친구” “블라디미르”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했고 “그는 민주화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지난 4년 동안 지내본 바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열린세상] 北·中동맹 강화에 대비해야/정종욱 아주대 교수·前 주중대사

    평양을 방문한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에게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은 조건만 충족되면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고 한 말을 놓고 해석이 혼란스럽다. 북한이 곧 6자회담에 복귀할 것이라는 낙관적 해석이 있는가 하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비관적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어쩌면 현재 북한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를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간과하고 있지나 않은지 우려된다. 필자는 금년에 들어와서 북한의 대미전략, 특히 체제보장의 기본전략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은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이나 국제적 고립이 모두 자신을 압살하려는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부시의 재선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전략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금년 1월 부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폭정의 전초기지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북한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다. 부시가 선언한 폭정과의 전쟁은 북한이 추구해온 체제보장이 단순히 미국의 적대 정책 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북한 체제가 보다 민주적인 체제로 전환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북한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부시 행정부 인사가 미국의 대북정책의 목표가 북한의 체제전복이 아닌 체제전환이라고 했지만 북한에는 체제전복보다 체제전환이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이다. 작년 중순부터 6자회담의 재개를 미룬 채 대선 이후의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 가능성을 지켜보던 북한이 부시가 북한의 체제전환을 요구하자 이제 미국으로부터 어떤 보장이 주어진다고 해도 이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지금의 북한에는 또 하나의 고민이 있다. 권력승계가 바로 그것이다. 북한이 후계자 선정을 더 이상 미루기는 어렵다. 김정일의 경우라면 벌써 2년 전에 후계자가 옹립되었어야 한다. 감히 후계자로 거론되는 김정일의 아들들은 20대 초반이다. 이들 중 누구를 내정해도 지금부터 권력기반을 다지고 최고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 가까운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김정일의 경우는 32살 때 후계자가 되어 52살 때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20년 동안 기반을 다진 셈이다. 그동안 누가 북한의 체제를 보장해 줄 수 있을지가 바로 김정일의 고민이다. 북한의 체제보장을 해줄 수 있는 국가는 중국밖에 없다. 두 나라의 체제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은 적어도 체제문제를 거론하지는 않는다. 타국에 대한 내정불간섭은 중국의 오랜 외교원칙이다. 중국 자신이 미국의 인권정책으로 골치를 앓고 있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은 동병상련의 처지라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은 북한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우방이다. 식량 등 생활필수품이 거의 중국에서 들어오고 있고 원유와 특수 물품 역시 중국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교역량만 해도 작년의 경우 약 14억달러에 달했다. 전략적으로는 중국 의존도가 훨씬 더 높다. 그래서 중국과 동맹관계를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왕자루이 부장을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만나주고 중국의 입장을 배려하는 말을 한 것도 이런 작업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금년 상반기 후진타오 주석의 북한 방문을 주목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금년 가을 APEC 참석차 한국을 방문하는 후진타오 주석이 한국방문에 앞서 북한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방문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양국 관계를 새로운 동맹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적어도 북한 측은 그렇게 원할 것이다. 또한 북한으로서는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까지도 자신의 동맹권에 포함시켜 한반도 북쪽에 새로운 삼각동맹체제를 만들어 그 속에서 자신의 체제에 대한 장기적 보장을 얻으려 할 것이다. 냉전으로의 회귀는 아니라 해도 이것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갖는 함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것이 하나의 시나리오에 지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러지 않을 경우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정종욱 아주대 교수·前 주중대사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주체적 근대화운동은 함수관계 ‘정감록’과 나의 만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을 꺾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화두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를 풀려고 나는 서양의 종교사, 중국의 태평천국, 백련교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암중모색을 하던 중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주체적 근대화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게 됐다.“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다양한 농촌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의 경우에서 보듯 신종교는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뭉뚱그려 말하면,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은 동학·증산교 및 원불교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신종교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들 신종교는 성리학에 대항한 새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대안의 구실도 할 만했다.19세기 말부터 이들 신종교는 민중의 입장에서 ‘제생의세’(생명을 살리고 병든 세상을 치료)와 ‘해원상생’(원한을 풀어 서로를 살림)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평민 지식인들이 주도한 운동이란 점에서 한국사상사의 큰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종교들이 기성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기독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새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사회세력들은 신종교를 일괄 매도하는 경향이 심했다. 그들은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했다. 비유컨대, 수입상품을 팔아먹으려고 토산품에 대해 흑색선전을 펴는 격이었다. 간혹 일부 신종교 단체들이 물의를 일으켰다 해도, 그것으로 신종교 전체를 매도해서 될 일인가. 참고로 말하면 일제시기 신종교 단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수십 배 신도 수가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냉혹한 비판자의 편향된 시각에서 신종교 단체들을 홀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수십년 전 수백만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종교는 ‘정감록’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 때문에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신종교를 말하게 되고, 신종교를 논의하면 당연히 정감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정감록이 신종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은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신종교마다 일치하지 않아 여러 형태로 구별된다. 나는 편의상 그 형태를 청림교형·보천교형·원불교형 등 3가지로 구분해 부르겠다. 이들의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자주적 근대화운동의 상관관계라는 큰 주제에 접근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전통적 정감록 신앙에 근접한 청림교형 신종교 단체들 가운데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정감록 신앙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는 것을 나는 청림교(靑林敎)형이라 한다. 엄밀히 말해, 청림교가 늘 그랬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단지 1932년에 발생한 이른바 청림교 사건에서 드러난 그 교단의 모습에서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취 없이 사라진 청림교지만 본래 1920년 동학에서 갈라져 나올 때만 해도 그 세가 만만치 않았다. 교당이 만주와 지린에까지 세워져 한때 신도 수가 30만명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청림교는 항일운동에도 열심이어서 일제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마침 1932년 2월 말에 터진 청림교 사건이 결정적인 탄압의 구실이 됐다.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던 정감록과 신종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사건의 내용을 개관해 보자.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정감록’을 빙자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는 신종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언론에 밝혀진 사건의 상당 부분은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봐야 한다. ●자하도 진인이 보내온 만병통치약 1932년 2월27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청림교주 태두섭을 비롯한 30명을 긴급체포했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에게 금품을 갈취해 사복을 채운 혐의로 붙들려온 이 교단의 간부 11명에게는 결국 실형이 선고됐다. 청림교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계룡산에 신국가 건설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정감록’에 약속된 대로 곧 진인이 나와 국권을 손에 쥘 것이다. 진인은 이미 청림교 간부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단계에 있는데 남해 자하도라는 무인도에 숨어 있는 칠성관이 바로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이다. 누구든지 청림교를 제대로 믿기만 하면 이 다음에 크게 벼슬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도 아무 걱정하지 마라. 청림교에는 자하도에서 몰래 가져온 신약이 있다. 이 약만 복용하면 만병이 통치되고 불로장생한다.” 청림교에서 말한 자하도와 칠성관은 물론 가공의 섬, 가공의 인물이었다. 다만 ‘정감록’에 남해의 어느 섬에서 진인이 나와 계룡산에 도읍한다고 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서 많은 정감록 신봉자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본다. 청림교측은 진인의 실체를 칠성관으로 파악하고 있던 데다가 진인이 머무는 남해의 섬을 자하도로 정확히(?) 밝혔고, 또 그 진인과 이미 왕래를 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바람에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청림교측은 진인이 직접 조제했다는 선약(仙藥)을 시판하기도 했다.‘정감록’에는 진인이 약을 만든다는 말이 전혀 없다. 그렇긴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러 나올 진인이라면 그 정도 능력쯤이야 있을 법하다고 믿었다. 진인이란 용어가 본래 도교적인 데다 도교는 장생술(長生術)을 추구하므로 진인과 선약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밀접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뤄 볼 때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청림교측이 파는 선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일 식민지 경찰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었다면, 청림교 간부들은 이런 ‘황당한’ 거짓말로 ‘어리석은’ 농민들을 속여 사기행각을 거듭했던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제가 발표한 청림교 사건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 사건은 청림교를 탄압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고, 수사 과정에 혹독한 고문이 있었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보도 가운데도 일경의 왜곡과 조작이 섞여 있을 수가 있다.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 어쨌거나 청림교 간부들의 언동에는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던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인 모습이 재발견된다. 계룡산 천도설의 주인공인 진인의 능력을 빌미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방법 말이다. 비슷한 일이 18세기 정조 때도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진인이 해도에서 몰래 군대를 기르고 있다며 군인들이 입을 군복을 마련한다는 빌미로 금품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해도에 있는 진인에게 물어 미래의 운세를 봐주겠다며 의뢰인에게서 복채를 챙기기도 했다. 묘향산 등지에 머무는 진인에게 부탁해 액막이를 하겠다며 제수용품조로 거금을 제공받은 이도 있었다. 청림교 사건에 투영된 신종교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이 단계의 신종교는 아직 기성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만큼 뚜렷이 정제된 이념을 갖지 못했다. 그 단체의 수장은 스스로를 진인이나 새 세상을 건설할 주역으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을 내세워 교단의 조직을 보강하고 운용자금을 거두는 정도다. 이들 신종교는 그저 ‘정감록’을 시세에 맞춰 풀이해 현세적 이익을 도모하는 정감록 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제시기 계룡산에 난립해 있던 신종교 단체는 대체로 그 수준이었다. 각지로부터 계룡산에 이주해온 정감록 신봉자들 중에는 일인교단(一人敎團)에 머문 경우도 많았다. 계룡산을 처음 찾았던 1980년대 후반에도 나는 이런 형태의 정감록 신자들을 많이 보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천지개벽을 바라본 보천교형 그와 다른 차원에서 정감록의 계룡천도설을 수용한 신종교 단체들도 있었다. 정연한 교리체계를 갖추고 국가나 민족의 입장을 내세운 경우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보천교(普天敎)를 손꼽는다. 지금은 그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일제시기 보천교는 위세당당한 신종교였다. 보천교는 1911년 증산교에서 독립됐다. 창립자는 차경석(車京石·본명은 輪洪)으로 그는 증산교와 동학의 교리를 녹여내 나름대로 새 세상을 준비했다.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교리로 정했고 경천(敬天)·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을 4대강령으로 삼아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했다. 한데 이 신종교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교주 차경석이 ‘정감록’을 적극 원용한 점이다. 그는 천지운도(天地運度·새 세상)를 열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진인을 자처했다. 새날이 오면 한국은 세계 종주국가가 된다던 차경석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말 보천교는 동아시아가 한세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지만, 보천교의 본래 모습은 그렇게 친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했고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했다.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끝난 뒤 허탈감에 빠져 있던 민중은 이런 보천교의 민족적인 성격에 호응해 교세가 급속히 팽창했다.1920년대 중반은 보천교의 전성기로 간부 수가 55만명을 헤아렸고 신도는 6백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곧이듣기는 어렵지만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독교 신자 총수 32만 3574명과 비교해 볼 때 보천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보천교는 기독교의 20배쯤 되는 신도 수를 자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감록’을 인용해 대한독립이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므로 일제는 보천교의 일거수일투족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세가 워낙 큰 데다 교주 차경석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이어서 감히 교단 해체를 명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유하면 당시 보천교는 구한말 동학이 누렸던 민중종교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당국이 보천교의 활동을 방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설에 따르면 일경에 체포돼 곤욕을 치른 보천교 신도가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반국가적 ‘음모단체’로 규정해 놓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보천교의 ‘음모’는 대한독립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고 그 핵심이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이었다.‘정감록’에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초포에 배가 다닐 때 세상일을 알 수 있다(鷄龍白石 草浦行舟 世事可知).”는 구절이 항상 문제였다.‘세상일을 알’ 거란 문구를 보천교측은 교주 차경석의 등극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마침 1924년은 육십갑자가 새로 시작되는 갑자년이라 보천교 신도들은 그 해를 신국가 출범 시기로 보았다. 이른바 지상낙원인 후천세계(後天世界)가 시작될 갑자 원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종교적 카리스마가 막강했던 차경석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은 동양을 지배할 권력자라는 의미로 그를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비웃음을 담아 그렇게 부른 경우도 적지 않았을 테지만. 1929년 낙성된 보천교의 본부 건물 십일전(十一殿)은 보천교의 교세를 반영한다. 전북 정읍에 건립된 이 건물은 지붕을 덮은 기와가 황금빛을 뿜었으며, 경복궁 근정전보다 무려 2배나 컸다.1924년 등극설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에 보천교측에선 바로 그 십일전에서 기사년(己巳年·1929년) 기사월(己巳月) 기사일(己巳日)에 교주 차경석이 천자로 즉위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기(己)와 사(巳)는 글자의 생김이 서로 비슷한데, 두 글자는 10간과 12지의 중간으로 최상의 양기를 상징한다. 특히 뱀을 뜻하는 巳는 용(辰)과 더불어 성인(聖人) 즉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이라면 보통 임금이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 만큼 지도력이 강한 왕이 등장할 시점으로 해석된다. 이 소문으로 수백만 보천교도들은 대한독립의 임박을 믿었고, 그러자 식민지 당국자들은 행여 큰 소요라도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왕이 되지 못한 채 1936년 병으로 죽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소식을 환영했고 보천교 분쇄공작에 나섰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보천교는 사분오열돼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죽은 뒤에도 보천교 신도의 상당 수는 여전히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에 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신왕조의 수도로 예언된 계룡산에는 후천개벽의 기운이 넘친다. 머지않아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할 정진인은 차경석의 손자 정동영이 틀림없다.” 일부 신도들은 이런 말을 퍼뜨리며, 차경석의 어머니가 이웃의 정모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해 차경석을 낳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성은 정씨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1930년대 후반 총독부 관변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사보고서를 읽어 보면, 당시 차경석의 손자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었다. 그 점에 대해 신도들의 설명은 달랐다.“차천자의 손자 정동영은 깊은 산속에 숨어 밤낮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이제 정동영이 다시 나타난다. 새 세상에선 정동영을 받드는 사람들이 신양반이 돼 요직을 차지한다.” 성폭행설까지 조작해 자기네 교주의 성까지 바꾼 것은 억지스럽고, 교주가 ‘천자’에 즉위한다고 했던 점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의 주장엔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있다. 그들은 정감록 신앙을 대한독립, 지상천국인 후천세계의 관념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제에 저항할 원동력을 제공했고, 단순히 항간에 떠도는 예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탈바꿈시켰다. 비록 엉성하긴 했지만 큰 변화였다. 한편 원불교에선 계룡산을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살펴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양 대법관후보 인사청문회

    양 대법관후보 인사청문회

    양승태 대법관 후보자는 22일 국회 인사청문특위에 출석해 사법개혁에 대해 “개혁이 기존 질서를 뒤엎고 전혀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현재 제도 중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통찰력과 혜안으로 걸러 제도개선의 의지가 얼마나 강하냐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 후보자는 사형제 폐지와 관련해 “개인적으로 폐지됐으면 좋겠지만, 국민 전체의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있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와 관련해 그는 “헌법상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 언급이 적절치 않지만, 사면권을 너무 자주 광범위하게 행사하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는 또한 ‘유죄협상제도(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의 도입과 관련해 “미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라며 “도입할 때 기초사안이 얼마나 미국과 비슷하냐를 확인하고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양 대법관 후보자에게 “사법부가 유일하게 자기 반성하지 않는 곳인데 반성·조사를 촉구할 의향이 있느냐.”,“민주적이지 않은 법원과 헌법재판소”라고 발언하는 등 사법부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반면 한나라당은 “너무 덥지 않으냐.”등 양 후보자를 위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헌법재판소는 법제도 열린우리당 양승조 의원은 “한 여당 의원은 발언은 하지 않았지만, 군사 정권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기관이라고 헌재를 지칭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양 후보자는 “우리 헌법은 88년 개정되면서 헌재 제도를 새로 채택했고,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고 우회해 나갔다. ●대법원의 구성 양 후보자는 열린우리당 이은영 의원이 대법원의 기능과 13명 대법관 중 여성이 1명이라고 지적하자 “후보로 오를 연배에 해당하는 법조인으로서 여성의 수가 워낙 적기 때문이고, 금년 신규 임용되는 법관의 50%가 여자”라며 반박했다. ●국정원 과거사 진상규명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은 국정원이 과거사 진상규명으로 선정한 7개 사건 중 4건이 대법원 확정판결난 사건임을 지적하며 법치주의 원칙임을 지적하자 양 후보는 “케네디 암살 사건을 몇번이나 재조사한 적이 있다.”면서 “밖에서 재조사해 재심청구할 수 있지만 (과거의)재판절차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여야 모두 “합격점” 청문회를 마친 뒤 열린우리당은 “특별한 하자가 없었다.”(최재천 의원),“얕은 생각을 가지고 튀는 판결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최용규 의원),“대법관으로서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이은영 의원) 등으로 평가했다. 한나라당은 “대체로 무난하다.”(장윤석 의원),“너무 무난한 것이 오히려 흠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주성영 의원),“경험이 풍부하고 균형감각이 뛰어나다.”(김성조 의원) 등의 반응을 보였다. 따라서 양 후보자 임명동의안은 오는 25일 국회 본회의에서 무난히 통과될 전망이다. 문소영 박지연기자 symun@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다시 교단에 서는 양성우 시인 7시간 격정 토로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다시 교단에 서는 양성우 시인 7시간 격정 토로

    ‘내일일까, 모레일까, 눈물 맺힌 30년 세월∼’. 누군가 말했다, 기다림은 차라리 고통이라고. 그렇게 30년을 지냈다. 이제 돌아가려 한다. 그곳은 어머니의 품이다. 태어나 뒹굴었다. 함께 울고 웃었다.‘품’을 떠난 뒤 강산이 세번 변했다. 파란과 곡절, 무수한 격동의 그림자를 관통했다. 돌이켜봐도 손바닥만한 가슴으로 꽁꽁 부둥켜안아야 했던 세월이었다. ●75년 시 ‘겨울공화국’으로 광주중앙여고 파면 2월 초였다. 그날따라 눈이 펑펑 쏟아졌다. 한 시인이 학교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게 덮인 눈, 서산대사가 걸어갔듯이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그렸다. 시계바늘을 30년 전으로 돌렸다. 농성하던 3학년 학생들이 거울처럼 투영됐다.‘겨울공화국’이 뇌리에 생생하게 스친다.‘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영화 ‘일 포스티노’의 마지막 대사.‘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며 읊었다. 시인 양성우(62). 요즘처럼 설렌 적이 있을까.30년만에 찾아온 ‘아주 특별한 귀향’을 맞이하고 있다.1975년 2월12일 ‘겨울공화국’이란 저항시를 낭독, 광주중앙여고에서 파면당했다. 이후 온몸으로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투옥·고문·도피의 세월을 보냈다. 최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광주중앙여고측에 양씨에 대한 복직권고 결정을 통보했다. 학교 측도 복직 절차에 들어갔다. 늦어도 한달 이내에 다시 교단에 설 것으로 보인다. 서울 마포에 위치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서 양씨를 만나 7시간 동안 ‘격정’의 인터뷰를 했다. 그는 먼저 1월말 학교측에서 연락이 와서 2월초 광주에 내려가 재단(금호·아시아나)이사장과 교장, 그리고 행정실무자 등을 만났다고 했다. 다들 흔쾌하게 양씨의 복직의사를 받아들였다고 귀띔했다. 특히 30년전 같이 근무했던 동료 교사들이 아직도 있어 무척 반가웠다고 부연했다. 또 이같은 사실이 언론 등에 보도되자 당시 제자들로부터 많은 축하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며 밝게 웃었다. 광주중앙여고의 ‘총각 시인 선생님’이었던 그는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학생들로부터 ‘오빠’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장남이 해직기자였던 당시 교장은 양씨를 파면할 때 “(아들 생각으로)내가 차라리 감옥에 가고싶은 심정.”이라며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학생·학부모 선동 이유 사찰로 유폐 양씨는 그해 4월15일 학교측으로부터 파면통고를 받자마자 중앙정보부(중정) 광주지부로 연행됐다. 중정 요원들은 학생들과 학부모를 선동했다는 이유를 들이댔다. 장시간 조사를 받은 양씨는 구례군 지리산 ‘천은사’로 유폐된다. 경찰 2명이 보초를 세워 출입을 통제했다. 이같은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자 면회객들이 줄을 이었다. 광주중앙여고 학생은 물론 서울의 대학생들까지 단체로 면회를 왔다. 양씨는 그해 연말 시인 고은씨한테 ‘사람 많은 곳에서 숨어 지내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고은씨는 곧장 천은사로 내려와 한밤중에 양씨와 함께 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서울에 온 양씨는 흑석동 중앙대 정문 입구에 2평짜리 쪽방을 얻었다. 쪽방 벽면 너머는 다방이었다. 때문에 날마다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들어야만 했다. 또 다방은 동료문인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황석영·이문구·고은·이시영씨 등이 찾아와 문학을 얘기하고 군사독재를 비판했다. 중앙대 문창과 학생들도 단골로 찾아왔다. 그러던 하루는 한양대 이영희 교수가 불렀다. 중국문제연구소에서 촉탁직원으로 일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춥고 배고팠던 양씨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연구소 소속 교수들의 논문을 모아 책을 발간하는 일이었다. 양씨는 이 무렵 장편시집인 ‘노예수첩’을 썼다. 이는 당시 재야권 인사들에게 수천부씩 복사되어 언더그라운드 페이퍼로 읽혀졌다. 얼마후인 1976년 남산(중정)의 4국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재야권에 음성적으로 떠돌던 ‘노예수첩’이 일본의 ‘세계(世界)지’에 게재된 것. ●한달간 고문 국제 간첩단으로 몰려 한달간 고문 끝에 양씨는 ‘양성우 국제간첩단 사건’의 장본인으로 발표된다. 양씨와 만났던 미국인 캐서린 엘리자베스(여성민권운동가)와 폴 슈나이스(독일인 목사), 일본의 다카사키 소지 교수 등이 입국금지됐다. 양씨는 곧 재판에 회부됐다. 죄목은 ‘국가모독죄’와 ‘긴급조치9호 위반’이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그는 6개월간 재판을 받는다. 이때 옥중에서 박정희 정권타도에 앞장섰다는 죄목이 더 추가됐다. 결국 5년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면회는 절대금지였다. 때문에 변호를 맡은 홍성우 변호사와 고은씨 등 지인들은 옥중결혼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마침 양씨는 수감되기 전 정정순(현재의 부인)씨와 사귀고 있었다. 반대할 것으로 예상됐던 정씨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혼인신고서를 작성했고 유일하게 면회를 할 수 있는 직계 가족이 됐다. 양씨는 농섞인 말로 “결혼 얘기만 나오면 지금도 ‘깨갱’할 수밖에 없다.”며 웃었다.“집사람은 그 일로 고향인 광주집에서 쫓겨났다.”면서 (부인이)처녀의 몸으로 옥바라지한 경험담을 ‘때가 오면 그대여’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출간했다고 귀띔했다. 결혼식은 출소 후 이문구씨의 사회와 박형규 목사의 주례로 올렸다. 양씨는 수감 중 찬 감옥방에서 지내느라 하반신에 악성종양을 얻어 영등포시립병원에서 수술대에 누웠다. 이때 이문구·조태일·박태순씨 등 문인들이 단체로 몰려와 “저항시인 양성우를 석방하라.”며 연일 데모를 벌였다. 탄원도 계속됐다. 양씨는 2년6개월 만에 출소했다. 수감생활 중 성경책의 여백에 못으로 꾹꾹 눌러 옥중시집 ‘북치는 앉은뱅이’를 썼다. 5·18 때에는 지명 수배돼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시인 신경림씨의 도움으로 가끔 서울에 올라와 세종문화회관 뒤쪽 ‘항아리집’에서 동료들과 비밀리에 만났다. 모이는 사람은 주로 염무웅·백낙청·이호철씨 등이었다. 항아리집 여종업원들은 프랑스의 물랭루즈처럼 운동권 인사들에게 음성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고 양씨는 회고했다. “고은·조태일씨, 그리고 이영희 교수 등도 저를 돕다가 옥살이를 했지요.5·18후에는 문단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됩니다. 또한 자유실천문학인협의회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꾸는 등 민주화 운동에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지요.” ●87년 잠시 정치권 외도 그는 6월항쟁 때 이한열군이 사망하자 ‘꽃상여 타고 그대 잘가라’는 추모시를 써 민주화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이후 87년 대선 때 “법과 제도를 민주적으로 고치기 위해선 현실적인 행위가 필요하다.”는 주위의 끈질긴 권유로 정치무대로 잠시 외도한다.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철길’이라는 소설로 ‘학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때 4·19시위를 주도하는 등 일찍부터 민주화 운동에 가담해 파란많은 인생역정의 길을 걸었다. 요즘 시작(詩作)에 전념하고 있다는 그는 “정년이 1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역사에 떠밀려간 30년의 세월을 매듭짓고 싶다.”면서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좋은 보약이 되는 얘기를 많이 해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올 하반기에 신작 시집을 출간한다. 그의 시 가운데 ‘혼자 떠나는 새’ 등 10여편은 이미 가곡으로 불려지고 있다. ■ 그가 걸어온 길 ▲1943년 전남 함평 출생. ▲60년 조선대부속고등학교 2학년 재학중 4·19시위 주도 ▲61년 민통련 호남지역 고등학생 총연맹 회장으로 활동.5·16 직후 광주교도소 수감 ▲62년 학다리고등학교 편입. 학원문학상 소설당선 ▲63년 전남대 국문과 입학 ▲70년 ‘시인’에 ‘발상법’과 ‘증언’으로 등단. ▲71년 전남대 국문과 졸업 ▲71∼72년 학다리고 교사 ▲72∼75년 광주중앙여고 교사.‘겨울공화국’ 사건으로 교사직 파면 ▲76년 대한성서공회 문장위원 ▲77년 ‘노예수첩’으로 투옥 ▲79년 8월 가석방 ▲84년 자유실천문학인협의회 대표 ▲85년 서울민통련 중앙위원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대변인 ▲88년 제13대 국회의원(평민·서울 양천구) ▲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 시집 발상법, 신하여 신하여, 겨울공화국, 북치는 앉은뱅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넋이라도 있고 없고, 노예수첩 등 km@seoul.co.kr
  • 네루 자서전/자와하를랄 네루 지음

    사람들은 흔히 인도 국민의 영웅 네루를 간디에 견줘 이야기하곤 한다. 간디가 종교적 이상주의자였다면, 네루는 사회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직시한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그런 만큼 네루는 종교적 교의나 이상에 치우치지 않았고, 스탈린식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도그마에 빠지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의 탐욕에도 물들지 않았다. 네루는 간디의 실천력과 대중투쟁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평생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간디의 노선엔 항상 비판적이었다. 간디가 투쟁에 있어서 종교·정신적인 면을 끊임없이 강조한 것과 달리 네루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이끌렸다. 인도가 안고 있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선 사회주의적인 강령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근 출간된 ‘네루 자서전’(자와하를랄 네루 지음, 정민걸ㆍ김정수 옮김, 간디서원 펴냄)은 인도 초대 총리 네루의 개인적 삶과 함께 1930년대 격변하는 인도의 정치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북인도 카슈미르 출신의 부유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난 네루는 1916년 간디를 만나 비폭력불복종운동에 뛰어들어 인도국민회의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인 정치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네루는 반영독립투쟁으로 아홉 차례나 체포돼 9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 책은 네루가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 감옥에서 쓴 것이다. 네루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도 있다는 온갖 사이비 교설이 난무하는 국제관계 속에서도 ‘정당한’ 수단을 고집했다. 국제정치에 탁월한 감각을 지닌 네루는 인도를 동서 양 진영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통일주의, 비종교주의라고 하는 네루의 4대 정책기조는 인도 정치의 근간이 됐다. 독립국가 인도의 이미지는 곧 네루의 이미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인도는 우리와 다른 무엇으로 어떻게 독립을 일궈냈을까. 이 책은 자주적으로 독립을 이룩하지 못한 우리에게 묵직한 교훈을 안겨준다.2만 95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열린세상] 근본주의적 단식의 문제점/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지율 스님의 단식은 사회적 동의를 확보하지 못한 국가 환경정책에 거듭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장기화된 단식에 나는 매우 갑갑했다. 이 갑갑함은 나만 느낀 것은 아닌 듯하다. 오죽하면 단식을 하겠느냐며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도 점점 그 단식의 방식에 갑갑해하고 불안해했다.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단식을 통한 문제 해결 방식에는 답답해했다. 환경영향평가를 요식 행위로만 여기면서 사회적 설득을 게을리 한 정부의 무책임과 무능력은 비판받아야 한다. 이 점에 다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은 승려 지율의 큰 성과다. 그러나 그의 단식은 생태운동의 순전한 성과이며 승리일까? 이 물음은 매우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공적 언론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그의 단식에만 온통 관심을 쏟았다. 가만히 보면 환경분쟁의 해결 방안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그의 단식에 관심을 쏟는 왜곡된 현상 자체가 이 이상한 일의 이면이었다. 한 승려의 항쟁이 가져온 승리는 그 안에 갑갑함과 불안을 내포하고 있었다. 왜 승려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국가적 분쟁을 해결하려고 나서야 한단 말인가? 물론 이 경우 그의 목숨은 단순히 개인의 목숨이 아니라 생명가치를 교리 차원에서 옹호하고 있는 불교계의 목숨을 상징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교계가 범 교단의 차원에서 행동에 나선 것은 아니었고, 그렇게 하기도 어려웠다. 심지어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나섰다고 해도 항거는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연약한 여자 승려 홀로 극단적인 단식에 나섰기 때문에 항거는 관심을 끌었고, 정부는 굴복했다. 그 단식은 한국 생태운동의 성과이지만 동시에 함정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것은 시민들의 광범위한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 게 아니라, 한 승려의 도박에 가까운 단식을 통해 얻어진 성과이기 때문이다.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식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지만, 사람들은 꼭 그 단식에 동의해서 열광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방식의 극단성에 홀린 듯하다. 나는 여기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과격한 저항 자체를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사회적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한 정부 정책에는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다.80년대 이후 유럽 녹색당 계열의 운동가들도 상당히 격렬하게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나 교통 정책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행위가 생태 운동단체의 내부적 동의와 합의에 따른 집단적 저항행위였던 것과 비교하면, 승려 지율의 저항방식은 개인 중심의 시위일 뿐 아니라 과도하게 근본주의적 성향을 띤다. 왜 생태운동은 합리적이고 시민참여적인 방식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종교적 근본주의 방식에 의존한 채 뒤뚱거리는가? 이 물음은 환경운동단체에도 화살이 돼 날아간다. 왜 환경운동은 시민들의 저변적인 참여와 연대를 확산시키지 못하고, 명망가적 개인과 사제들의 극단적 투쟁에 엉거주춤 기대고 있는가? 왜 민주주의는 정부 단체와 시민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합의하는 과정에 이르지 못한 채, 비참여정부와 종교적 근본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가? 물론 종교단체는 생태운동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해야 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지나치게 교리 자체의 순수성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교리의 이념성에서 출발했더라도 시민 사회의 세속적이고 사회적인 동의로 확대되고 확산돼야 한다. 또 명망가적 사제의 영향력에 너무 의존하는 대신, 자발적인 시민들의 민주적인 연대로 녹아들어가야 한다. 사법 만능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지만, 일단 민주적 절차에 의한 재판에서 결정이 나면 승복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그와 달리 근본주의적 단식은 이런 민주적 저항 방식과 충돌하기 십상이고, 자칫하면 도박이 될 위험이 있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도박적 개발주의와 자본주의가 고질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태적 저항조차 도박적 근본주의로 가야 할까. 그 경우 갈등과 도박의 악순환만 초래될 것이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 [코드로 읽는책] 지금, 여기의 유학/김성기·최영진등 지음

    사회·경제적 위기론이 불거질 때마다 유학은 뭇매를 맞기 일쑤다.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혈연, 지연에 의한 유착의 뿌리라느니, 성차별적 폐단의 주범으로서 타파되어야 한다느니, 자본주의적 경쟁원리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 유물이라느니 등등. 조선 왕조 500년간 사회질서 유지의 근간이자 구성원들의 정신과 일상을 지배했던 유학의 위상은 이제 ‘호주제 철폐 반대’ 피켓을 든 갓 쓴 유림만큼이나 초라하다. 유학은 진정 폐기처분돼야 할까? 막스 베버의 주장처럼 유교적 관습은 동양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만 한 것일까?‘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며 이미 반쯤 죽은 유학을 확인사살할 정도로 유학은 반사회적, 반진보적인 것인가? ‘지금, 여기의 유학’(김성기·최영진 등 지음, 성균관대출판부 펴냄)은 이처럼 팽배해 있는 유학에 대한 일방적 불신을 넘어 보다 객관적 시선으로 유교의 긍정과 부정의 이중성을 모색한 책이다. 경제위기의 주범이면서 경제발전의 동인이고, 비민주적 봉건윤리인 동시에 민권·정의 등 현대 민주주의와 양립 가능한 정치학이며, 여성을 억압하는 질곡인 동시에 양성 동반자적 윤리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폐기처분을 넘어 유학의 태생적 본질을 이해하고,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한다면, 오히려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 서구자본주의를 보완할 이론적 단초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이 책을 쓴,11명의 동양사상 연구자들이 이 시대에 ‘아직도 유학을 탐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 비판받는 유교에서 이들은 공자·맹자의 민본사상을 끄집어내고, 민본사상과 도덕성이 없는 군주를 추방하거나 베어도 무방하다는 맹자를 통해 시민의식과 민주주의의 본질을 본다. 나아가 무한질주중인 자본주의가 천민자본주의로 내려앉지 않도록 경계하는 도덕성을 추출해낸다. 이들은 또 현대신학에서 초월적 존재가 퇴색되고 있는 시대를 맞아 유교에서 대안적 종교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유일신으로서의 초월적 존재 대신 자아수양을 통한 초월적 삶을 가꾸며 종교적 성찰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학과 기독교란 두 기둥을 버팀목 삼아 발전해온 서구문명이 20세기 이후 과학의 일방독주속에 비틀거리는 현실 진단에서 온 것이다. 이들은 또 여성 비하 사상으로만 일축되어온 유교사상 내에서 한가닥 페미니즘적 요소를 보고자 하며, 동아시아 예술 속에 담긴 유가사상, 서양의 근대지식인들이 이해한 유교의 모습도 꼼꼼히 뜯어본다.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지배·흡수논리로 비판받는 신자유주의의 병리현상 치유를 위해 꼭 필요한 공존의 논리를 유학이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에 기초한 공자의 인(仁)사상, 개체적 존재론에 바탕을 두어 항상 갈등의 여지를 품고 있는 서양철학과 달리 인간 관계론에 중심을 둔 동양적 패러다임이 그것이다. 유학은 기술발달이나 정보화의 속도를 증폭시킬 수는 없지만, 기술개발과 정보와의 물결에서 표류할 수 있는 개인과 그러한 개인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내다보고 있다.1만 4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클릭 이슈] 정립회관 검거농성 231일만에 해제

    [클릭 이슈] 정립회관 검거농성 231일만에 해제

    관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노동조합과 이용자들이 231일 동안 점거 농성을 벌여 온 정립회관 사태가 일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정립회관의 이사회인 한국소아마비협회와 정립회관 노조 및 이용자, 장애인 인권단체로 이루어진 ‘정립회관 민주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5일 관할 광진구청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농성 해제 합의서에 서명했다. ●관장 퇴진·징계완화 중재안 합의 합의서는 ▲시설 정상화 이후 적절한 시기에 이완수(66) 관장 퇴진 ▲해고 및 정직 처분을 받은 노조원 8명 가운데 7명의 징계 완화 ▲점거사태 이후 쌍방의 민·형사상 고소고발 취하 및 추가 고소·징계 금지 등 3개 항으로 되어 있다. 공대위는 지난 7일 점거농성을 해제했고, 노조는 오는 21일 업무에 복귀하기로 했다. 정립회관에서 갈등이 불거진 것은 지난해 6월. 이사회는 11년 동안 재임한 이관장의 정년퇴임을 열흘 남짓 앞두고 ‘65세 정년제’ 규정을 ‘임기제’로 바꿔 이 관장의 2년 연임을 결정했다. 연임이 결정되자 시설 이용자들과 노조는 크게 반발하면서 6월22일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폭력 시비도 잇따랐다. 공대위는 이사회측이 지난해 7월22일 등 4차례에 걸쳐 폭력을 휘둘렀다고 주장했다. 이사회측은 “불법 점거로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라며 반박했다. 잇따른 폭력사태로 쌍방의 고소 및 고발도 40건이 넘었다. 서울시와 광진구청이 중재에 나선 것도 사태가 지나치게 악화됐기 때문이다. ●노·사·이용자 발전특위 논란 합의 이후의 쟁점은 이 관장의 퇴진약속 이행과 민주적 운영구조 수립 문제로 압축된다. 퇴진약속은 구청이 책임있는 중재를 약속한 만큼 공대위도 일단 낙관적으로 관망하고 있다. 하지만 공대위가 내걸었던 3대 요구사항 가운데 ‘노·사·이용자가 참여하는 정립발전특위의 구성’은 합의에서 빠져 앞으로도 논란을 빚을 전망이다. 공대위 박경석 위원장은 “정상화를 위해 서로 노력한다는 자세에서 수용했지만, 막판 합의문에서 빠진 정립특위 구성 문제는 계속 요구할 것”이라면서 “사회복지법인의 사유화를 구조적으로 막을 수 있도록 사회복지법의 개정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사회 “운영비 20%충당… 경영권 못줘” 반면 이사회는 “특위를 통한 노조·이용자의 경영 참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실질적으로 20% 정도의 운영비를 충당하는 법인이 인사·경영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정립회관 사태는 한 시설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복지시설의 운영 시스템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리나라 사회복지시설은 국가보다는 개인·선교단체 등이 먼저 설립해 공익법인화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주도해야 할 사회복지서비스가 민간위탁 형태로 이루어지면서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는 것.7년 동안의 혼란 끝에 2003년에야 정상화된 에바다 복지회 사건이나 양지마을 사건, 형제복지회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럼에도 정립회관은 1990년 재단 운영비 문제로 장애인 단체가 사무실을 점거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사회기여도가 높은 복지시설로 평가받아왔다. 인권운동사랑방 박래군 상임활동가는 “정립회관은 비교적 건실하게 운영돼 온 시설이지만 이용자의 의사 반영 구조를 갖추지 않은 것이 결국 장기 농성 사태로까지 이어졌다.”면서 “관장이 주도하는 형식적 운영위원회에서 벗어나 공익적·민주적 의사결정구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말말말˙˙˙

    남한이 주적 표현 대신 사용하기로 한 ‘가장 핵심적인 적’이나 ‘실체적인 군사 위협’ 표현은 동족을 적대시한 ‘제2의 주적’ 개념이다.-북한의 내각기관지 민주조선이 “남한이 진심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고 6ㆍ15 공동선언의 순조로운 이행을 원한다면 표현이나 바꾸는 놀음을 걷어치워야 한다.”며-
  • 사우디 ‘40년만에 선거’

    왕이 통치하는 세계 최대의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에서 40여년만에 투표가 실시된다. 10일 수도 리야드 지역부터 시작되는 사우디 지방의원 선거에서는 전국 178개 지방의회의 의원 가운데 절반인 592명을 선출하게 된다. 나머지 절반은 왕이 지명한다. 리야드를 포함한 수도권 지역에서는 38개 지방의회에서 127명을 뽑는데 1818명이 입후보했다. 동부와 남부 지역은 3월3일, 서부와 북부 지역은 4월21일 각각 투표가 실시된다. 투표권은 21세 이상의 남성들에게 주어지며 여성들은 투표할 수 없다. 사우디인들이 투표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홍보가 부족해 리야드 지역 40만명의 유권자 가운데 37%인 14만 8000명만 유권자등록을 했다. 전체 유권자는 30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번 선거의 의미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린다. 여성의 투표 참여가 배제되고 지방의원의 절반만 선출하는 등 제대로 된 선거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사실상 사우디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적 선거가 실시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北 야포 1000여문 늘어

    주적(主敵) 표현이 빠진 2004년판 국방백서가 4일 발간됐다. 백서에서 주적 표현 삭제는 10년 만이고, 백서 발간 자체는 4년 만이다. 백서에 나타난 북한의 군사력 변화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170㎜ 자주포,240㎜ 방사포 등을 포함한 야포가 1만 3500여 문으로, 지난 1999년보다 1000문 가량 늘어난 점이다. 야포는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대량살상이 가능한 무기로, 해외에서 첨단 무기를 구입할 수 없는 어려운 경제 사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1998년 장거리 탄도 미사일인 대포동 1호(사거리 2500㎞)의 운반체(로켓) 발사 실험에 실패했으나,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현재 대포동 2호(사거리 6700㎞)를 개발 중인 것으로 정보당국은 추정 중이다. 반면 잠수함(정)과 전투기 전차 장갑차 수는 감소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서울광장] 고개숙인 민주노총 살길은/우득정 논설위원

    [서울광장] 고개숙인 민주노총 살길은/우득정 논설위원

    단병호 위원장 시절, 민주노총의 한 부위원장은 민심과 동떨어진 총파업 투쟁을 강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내부 선명성 경쟁을 꼽았다. 그는 민주노총을 달리는 자전거에 비유하면서 강경투쟁이라는 관성에서 이탈하려면 넘어지는 것, 즉 집행부 총사퇴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현 지도부가 투쟁 일변도의 초기 노동운동을 고수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민주노총도 시대흐름에 맞춰 변신하지 않으면 머잖아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로부터 5년 후, 그의 예언이 현실화되고 있다. 기아차 광주공장 채용비리가 불거지더니 상급단체인 민주노총마저 대의원대회 폭력사태로 창립 10년만에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노조의 생명이 도덕성과 민주성이라면 두가지 가치 모두에서 최악의 추태를 연출한 것이다. 기아차 비리는 구조적인 병폐임에도 노사의 공동책임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릴 수 있지만 민주노총의 ‘반민주적’ 폭력사태는 어떤 논리로도 변명이 안 된다.‘곪을 대로 곪은 것이 마침내 터졌다.’는 내부의 목소리처럼 총체적인 대수술을 단행하지 않으면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까.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민주노총 조직진단을 위해 각급 조직간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식조사 결과와 민주노총이 지난해 말 조직혁신위를 가동키로 하면서 내린 결론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의식조사에서 응답자의 63.6%는 ‘민주노총이 위기’라고 진단했다. 조합원들의 이해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전투구(泥田鬪狗)식 노선투쟁을 꼬집은 반응이다. 또 조직혁신위 가동의 당위론에서 제기했듯이 11%에 불과한 노조 조직률과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노조활동으로는 더이상 노동계급을 대표할 수 없다. 현장조직 약화로 대중투쟁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재정 압박, 조직 피로도 누적, 내부 민주주의를 둘러싼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민주노총과 산하 대기업 강성노조의 시계바늘을 조합원과 국민에게 맞춰야 한다. 그래야만 권력화된 ‘귀족노조’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그들만의 노동운동’에서 대중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라는 본연의 궤도를 되찾을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30여년 전 전태일 열사가 온몸을 불사르며 절규했던 노동정신이기도 하다. 민주노총은 강경파의 조직적인 방해로 세차례나 무산됐으나 이수호위원장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회적 협약 참여를 이행해야 한다. 노사정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 사용자와 머리를 맞대고 비정규직 차별시정 방안을 제시하고 노조 전임자문제와 복수노조 등 ‘노사관계로드맵’의 포장작업에도 동참해야 한다. 지금처럼 대화기구에는 참여하지 않은 채 링 주변만 맴돌며 야유를 보내고 으름장을 놓는 식의 전략으로는 실리도 못 챙길 뿐더러 대중의 지지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특히 기아차 사태에서 드러난 구조적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노조 회계의 투명성을 담보하는 방안도 하루속히 제시해야 한다고 본다.1997년 노동법 개정 이전처럼 행정기관이 감시·감독권을 보유하는 것은 노조의 자주성을 저해할 소지가 있어 바람직하지 않지만 노조가 자율적으로 제3의 회계기관으로부터 검증받고 그 결과를 공표하는 것은 시도해볼 만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사용자측으로부터 노조전임자 급여를 지원받는 관행도 손질할 필요가 있다. 기아차 비리와 민주노총 내부 환부가 한꺼번에 돌출된 것은 어찌보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자정능력 복원을 통해 시정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임시봉합은 민주노총, 나아가 노동계 전체를 사지로 몰고가는 길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사설] 국정원 과거규명 객관성 중요하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어제 ‘김대중 납치사건’ ‘KAL 858기 폭파사건’ 등 7건을 우선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 대상 사건은 대부분 현대사의 고비에서 발생해 정치·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고 그만큼이나 정보기관이 공작했다는 의혹을 받아온 사안이다. 따라서 이 의혹사건들의 진상을 밝혀냄으로써 권위주의 정권 당시의 반민주적이고 인권유린적인 폭력이 이땅에서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우려하는 부분은 과거사 진상규명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이유에서 ‘부일장학회(현 정수장학회) 강제헌납 사건’이 우선조사 대상에 포함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부일장학회 사건에 의혹의 소지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100건 가까운 조사대상 사건의 경중을 따져 볼 때 굳이 최우선으로 선택할 만하지는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실위원회는 결국 정수장학회 이사장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겨냥했다는 의혹을 떠안고 출발하는 부담을 지게 됐다. 우리는 과거사 진실규명이 관련 가해자를 색출해 단죄하는 데 목표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한다. 진상을 밝히는 목적은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가족의 한을 풀어주며 역사를 바로잡아 뒷날의 교훈으로 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진실위원회는 진상규명 작업을 하면서 객관성을 철저히 유지해야 할 것이다. 행여 정치색을 드러낸다면 진상을 파헤치더라도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리라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의혹사건에 관련된 인사들도 진상규명에 적극 협조해 과거의 그늘에서 스스로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 [사설] 이젠 호주제폐지 입법 서둘러라

    호주제가 드디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헌법재판소는 어제 호주제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시대흐름에 부합하는 판단으로서 환영한다. 호주제를 폐지하는 민법개정안의 처리를 미뤄왔던 정치권은 반성하기 바란다. 여야는 이미 합의한 2월 임시국회 호주제 폐지 처리는 물론 호적제를 대체할 새로운 신분등록제 입법도 서둘러야 한다. 세계적으로 예를 찾기 힘든 호주제는 진작 폐지됐어야 했다.1898년 일본 메이지민법을 따라 만든 제도로 2차대전 후 일본조차 양성평등에 어긋난다며 없앴다.1999년에는 유엔 인권위가 호주제폐지 권고를 했을 정도였으니 더이상 이를 고집하다가는 국제망신을 자초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정부가 2003년 뒤늦게나마 호주제폐지 민법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으나 정치권이 이제까지 입법을 미뤄온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헌재 결정으로 더이상의 논란은 무의미해졌다. 관련 입법을 빨리 끝냄으로써 제도변화에 따른 혼란을 막아야 한다. 헌재는 혼선을 감안해 호적법개정 전까지 호주제 효력을 한시적으로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현재 호적 관련 규정을 두고 있는 법령은 261개에 이른다. 호주제폐지의 정신을 살려 미래지향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정부의 민법개정안은 법통과 후 2년 뒤 호주제폐지라는 경과규정을 두고 있는데 시행을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법무부가 호적제 대안으로 제출한 ‘본인 기준 가족기록부안’도 개인정보 기재항목이 너무 많다. 국회 심의과정에서 1인1적부의 본 뜻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 호주제폐지는 민주적 가족문화의 정착을 넘어 모든 분야에서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전기가 되어야 한다. 남녀차별 철폐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자 보호에도 눈길을 돌려야 한다. 급속한 가족해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으나 선입견에서 비롯된 걱정이다. 여러 형태의 가족관계가 법내로 편입되면서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캠페인에 정부와 정치권이 앞장서 보라.
  • “정치과잉이 한국 민주주의 망쳐”

    “정치과잉 속 정치부재” 우리 정치의 문제점을 꼬집으라면 항상 등장하는 용어다. 사실에 입각한 정보와 합리적 사고가 먹히지 않다 보니 정치 스스로 존재가치를 잃어버린다. 지난해 초대형 정치이슈였던 대통령탄핵과 행정수도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결정에 대한)찬반을 떠나 정치와 행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정치를 행정의 한 요소로 환원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정치 광풍이 밀어닥친 것 같지만 내용상으로는 정치실종 사태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계간 당대비평 신년특별호에 실릴 ‘한국 민주주의의 열정과 과잉’에서 미 웰즐리대 캐서린 문 교수는 이런 관점에서 한국 정치를 비판했다. 문 교수는 이 글에서 민주주의는 자기반성에 임하는 정직함과 자제력, 누구든 잘못 알 수 있고 해답을 갖고 있지 않음을 가정하는 겸손, 의견이 다른 자들에게 호혜적인 손길을 내밀려는 의지와 같은 자유주의적 덕목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자유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사회에서 민주적 참여는 외려 민주주의 발전을 지체시킬 수 있다. 비약적인 민주주의 발전에도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자유주의적 덕목은 마지막 검토 때까지 심판을 보류하고, 타인의 판단을 성실하게 경청하는 것이기에 한국적 상황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정치 지도자들 대부분은 이용가능한 정보가운데 하나의 입장 주위에 말뚝을 둘러치고 자신의 의견만이 유일하게 옳은 것이라 선포하기 일쑤다. 여기에는 자신이 한 약속에 집착하는 문화가 개입된다. 이런 문화가 결국 민주주의를 저해한다는 문 교수는 “그 권력의 형식과 사용을 언제든 심문하려는 의지없이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고 글을 맺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데스크시각] 중국 부상과 민주화의 미래/이석우 국제부 차장

    “인도가 민주주의 한다고 해서 잘 삽니까. 그렇다고 빈부격차가 중국보다 작습니까.” 중국 공무원들과 민주화를 이야기할 때면 공식처럼 튀어나오는 표현 중 하나가 인도다. 다당제와 정치적 다원주의, 언론 자유 등 민주주의가 정착됐다고 한들 그런 인도가 중국보다 더 나은 게 뭐가 있느냐는 반문이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두자릿수 경제성장을 일궈온 중국 당국은 ‘정치는 일당독재, 경제는 자본주의’란 함께 가기 어려울 듯이 보이는 중국식 사회주의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 달콤한 성장의 과실 속에 시행착오가 예상되는 서툰 민주화보다는 공산당에 의존한 확실한 경제발전 지속이 더 낫다는 견해도 널리 확산돼 있다. 민주주의가 만능이 아님을 강조한 한 베이징대 교수의 저서,‘민주란 미신’이란 책자가 지난해 대학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 때문인지 중국은 민주정치체제를 바탕으로 한 인도식 발전모델을 깎아내리면서도 싱가포르식 권위주의 발전양식엔 높은 점수를 준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에 대해선 극찬을 아끼지 않던 여론주도층이 최근 한류를 견제하고 한국을 ‘일본기술을 베껴서 성장한 2류 국가’ 정도로 낮춰보려는 움직임도 민중운동을 통한 한국의 민주적 성취와 무관치 않다. 민주화를 억누르고 있는 중국에는 이웃나라의 선례가 부담스럽다. 중국도 촌민(村民)자치제 확대 등 느리지만 나름의 민주화실험을 진전시키고 있다. 다만 그들 표현대로 ‘궈칭’(國情), 즉 상황과 조건에 맞는 ‘우리식 민주화’를 추진하고 있다. 최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서구정치제도를 답습하지 않겠다고 강조한 것도 이를 재확인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권력에 대한 견제·감시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것은 부패 확산 때문이다. 부패는 그동안 개인적 일탈행위, 개개인의 잘못으로 치부돼 왔다. 그러다가 최근엔 견제되지 못한 권력 때문이란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구조적 결함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자오쯔양(趙紫陽)전 당총서기 장례식이 있던 지난달 29일. 식장 부근 그의 지지자들이 내건 현수막에도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다.”는 표현이 “자오의 정신 영원하라.”와 함께 나란히 눈에 띄었다.AP통신이 사진으로 포착한 이 모습은 민주화운동을 감싸던 그의 행동을 변호하면서 당국에 대한 민주화 개혁촉구를 담고 있다. 민주화 없인 도를 더해가는 부패와 사회부조리 척결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다. 자오에 대한 긍정은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운동의 재평가, 나아가 정치개혁의 수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당국의 고민이 있다. 과거 효율적으로 작동하던 중국식 체제들이 이제는 그 사이 몸집이 자라 맞지 않게 된 옷처럼 발전의 장애가 되고 있다는 지적 속에서도 ‘우리식대로’에 대한 고집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넓은 국토, 다양한 민족구성, 낮고 고르지 못한 민도와 지역에 따른 큰 경제발전 차이 등 중국적 특수성의 강조는 ‘우리 방식’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논리적 배경이다. 보편성을 무시한 특수성과 ‘궈칭’에 대한 강조는 때론 대외관계에도 투영된다.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로 새로 쓰는 동북공정이나 탈북자 처리도 한 예다. 자오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인 30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가한 황쥐(黃菊) 부총리는 “중국의 부상이 세계평화를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힘이 세지고 영향력이 커질수록 특수성과 ‘궈칭’보다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중이 더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 그렇게 됐을 때 중국의 부상을 위협으로 보지 않고 번영을 향한 동반상승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석우 국제부 차장 swlee@seoul.co.kr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세계3위 ‘자전거 대국’ 일본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세계3위 ‘자전거 대국’ 일본

    대다수 일본인들에게 자전거는 생활의 필수품이다. 출근 전용이나 보조용, 장보기용으로 애용된다. 휴일에는 온가족 나들이용으로도 사용된다. 최근에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기가 더 높아지고 있다. 국민 3명당 2대이상의 자전거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자전거가 많다 보니 각종 사고나 방치된 자전거가 많아 사회적 문제로도 부상하고 있다.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은 자전거 대국이다.2003년 8593만대로 중국(4억 6556만대·2002년), 미국(1억 2000만대·1998년)에 이어 세계 3위의 자전거 보유국이다(표 참조). 도쿄나 오사카, 나고야 등 대도시는 물론 작은 도시까지 자전거 이용자가 많다. 특히 집에서 전철역까지 출근보조용으로 애용하는 탓에 자전거 관련 산업도 발달했다. ●3명당 2대 보유… 의원들이 정착 앞장 7선의 중의원 의원 고스기 다카시 전 문부상은 자택에서 10㎞ 정도 떨어진 국회까지 자전거를 이용, 등원하는 일이 적지 않다. 아침 7시쯤 국회에 도착, 샤워를 한 뒤 8시쯤 자민당내의 부회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55년째 자전거를 애용하고 있다. 고스기 의원은 국회의원 회원만 107명인 ‘자전거활용추진의원연맹’ 회장이다. 연맹은 1999년 창립, 건전한 자전거문화를 만들고 문제해결을 위한 법률 정비 등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타니가키 사다카즈 재무상이 명예회장이고, 여야의 중·참의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회원은 빠르게 늘고 있다. 회원 중 상당수는 교통난 해소 등을 위해 5㎞ 이내, 혹은 10㎞ 이내를 이동할 때 거의 자전거를 이용하고, 그 이상은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다. ●자전거 통근자에 특별교통비 지급 50대인 이사카에게 자전거는 보물이다. 매일 아침 자전거로 도쿄도내 나카노구에서 직장이 있는 지요타구 사무실까지 30여분 걸려 자전거로 출근한다. 시내에서 약속이 있을 때도 자전거로 움직인다. 저녁 약속이 늦게까지 있어도 큰 문제가 없으면 자전거로 귀가한다.20년째 이런 생활이다. 최근엔 나고야, 니가타, 후쿠오카 등 자치단체들이 자전거 통근을 위한 장려정책을 실시, 콩나물 전철이나 자동차 정체를 피하려는 자전거 통근자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 사회경제생산성본부 주임연구원 고바야시 시게키의 설명이다. 나고야시는 통근거리 10㎞ 이내 직원 중 자전거 출근직원에게 특별교통비를 지급, 수백명의 직원이 차량출근을 포기하는 등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자전거 시민권 선언’이란 저서를 낸 고바야시 연구원은 “자전거를 이용한 통근은 상쾌하고 운동이 되기 때문에 각종 성인병 예방에도 매우 좋다.”며 “교통비도 절약하고, 환경도 지키는 일석삼조의 자전거 타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도심 회귀현상에 따른 직장 근처 거주자가 느는 것도 자전거 출근이 느는 요인이다. 이에 따라 나고야시 등 많은 직장에서는 직원들이 출근 뒤 가벼운 샤워를 하고 업무를 시작할 수 있게 샤워시설을 보강하는 등 자전거 이용 활성화대책을 강화하고 있다. ●자전거택시 등장… 관련산업 번성 일본은 2003년 기준 자전거 신규수요가 1122만대나 됐다. 관련 산업도 그에 따라 발달하고 있다. 전철역에는 자전거렌털 서비스 회사(하루 300엔 정도)가 등장했고, 자전거택시인 베로택시도 운행 중이다. 베로택시는 지역차가 있지만 첫 500m는 300엔이고, 추가 100m당 50엔이 더해진다. 최근 들어서는 전동보조 자전거도 인기다.2003년 기준 1년 생산대수가 20여만대로 언덕 지형에서는 자전거 운전자의 힘을 덜어주기 위해 동력으로 움직이도록 했다. 도쿄 등 대도시에선 경찰의 순찰용 자전거와 관련설비 산업도 번창하고 있다. 유아용 자전거의자, 자전거우산꽂이, 마일리지계산기, 벨, 발전기 등의 산업도 번창하고 있으며 자전거판매점도 전국에 2만 6113개(2002년 기준)일 정도로 번성하고 있다. 도쿄도내에만 자전거 소매점이 1876개나 되고, 오사카에서도 1737개소에 이른다. 소매점의 연간 자전거 판매액이 2083억엔(약 2조 830억원)일 정도로 시장규모도 크다. ●연간 600만~700만대 방치 일본은 자동차(2003년 7739만대·총무성 자료) 보다 자전거가 많은, 자전거 대국이지만 자전거 문화는 아직 문제점 투성이다. 특히 70년대 말 자전거기본법이 제정된 이후 자전거가 인도로도 통행할 수 있게 돼 각종 문제점이 쌓이고 있다. 차도로 달리면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위협하고 인도로 달리면 보행자가 싫어하는 상황이다. 현재 도쿄 등 상당수 지역에서 자전거 전용도로를 설치하거나 시범운용 중이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값싼 수입자전거가 늘어나면서 연간 600만∼700만대가 방치되고, 안전기준도 마련되지 않아 주행 중 고장으로 인한 사고도 많다. 방치된 자전거는 수거돼 대부분 폐기처리되고 일부가 수리, 재활용된다. 일본자전거산업진흥협회에 따르면 방치 자전거 중에서 14% 정도가 소매점 등에서 고친 후 판매됐다.17% 정도는 시·구청 등지서 수거해 경매하거나 폐기처분했고, 69% 정도는 쓰레기로 수거돼 분해 재활용되거나 매립됐다. 시마노 요시조 자전거협회 이사장은 “품질이 떨어지는 자전거가 유통되면서 방치 자전거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업계에서 자율적으로 자전거 안전기준 인증제도(BAA)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또 자전거가 차도를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법·제도를 정비하지 않은 것도 사회문제를 유발하는 요인이다. ■ 중고 연간 5만대 北에 수출 |도쿄 이춘규특파원|전기사정이 좋지 않은 북한에서는 일본에서 수입해간 중고자전거가 ‘가정용 발전기’로도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자전거산업진흥협회의 한 관계자는 “북한에서는 중국제와 함께 일본의 중고자동차가 인기가 높다.”면서 “가정에서는 성능이 좋은 자전거 발전기를 손이나 발로 돌려 전기를 생산,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자전거산업진흥협회 국제사업부 오에 타구지 주임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가 방치 자전거를 수거한 뒤, 일부를 1400엔(약 1만 4000원)에 업자들에게 경매한 뒤 업자가 이를 수리,400∼500엔의 중간이익을 붙여 북한 등에 1900엔 안팎에 수출하고 있다. 이렇게 북한에 수출되는 일본의 중고 자전거는 2003년 한해만 5만 3145대였다. 북한 외에도 캄보디아 31만 4000대, 홍콩 30만 9000대, 가나 7만 4000대, 기타 11만 6000대 등 86만 5000대가 수출됐다. 특히 북한에 대한 수출은 한차례 출렁인 뒤 증가세로 돌아섰다. 자전거산업진흥협회 통계에 따르면 1992년 대북한 자전거수출은 276대에 머물렀다. 북·일 수교협상이 시작된 직후다. 이후 급증추세에 있다.93년 395대,94년 1458대,95년 3000대였으나 96년에는 1만 492대가 된다. 이어 97년엔 2만 1000대,98년에는 4만 9000대가 수출된다. 하지만 99년 1만 9800대로,2000년에는 1만 4500대로 줄었다가 2001년 다시 2만 4000대로,2002년에는 3만 5000대로 늘어나고 있다. ■ 자전거 사고 ‘골치’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은 자전거가 많다보니 사고도 많다. 경상자, 중상자는 물론 사망자도 의외로 적지 않다는 점이 통계로 입증된다. 일본 경찰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도쿄 시내에서만 자전거사고 발생건수가 1만 3868건이었다. 그 중에서 사망자만 28명이었고, 중상자는 152명이었다. 일본 전국적으로도 자전거교통사고 사망자는 연간 1000명 안팎이다. 교통사고종합분석센터 자료에 따르면 2003년의 경우 자전거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973명이었다.2002년 991명,2001년 992명,2000년 984명이었고,1999년에는 1032명이나 됐다.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의 10%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사고건수도 2003년 2만 5779건,2002년 2만 5500건이었다. 중·경상자는 매년 1만 7000명 안팎에 달한다. 이처럼 자전거로 인한 각종 사고가 많이 발생하면서 일본 정부 당국은 사고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일본자전거협회 등 자전거관련 단체들이 나서 ‘안전 캠페인’을 강화하는 등 대책을 강구 중이다. 자전거협회 이마자와 사부로 전무는 정부 차원의 대책이 미흡,“협회가 자주적으로 세계 수준의 안전기준을 마련, 계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자전거 교통사고 안전교육은 민간차원에서 주로 이뤄진다. 자전거협회와 자전거산업진흥협회는 자체 ‘자전거안전기준’을 마련, 자전거 소매점과 인터넷 등을 통해 판매되는 자전거의 표본을 추출, 자체적으로 안전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그 결과 국산·수입품을 막론하고 결함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2003년 기준 일본의 전체 자전거수요 1122만대 중에서 국내 생산은 252만대에 그쳤고, 나머지 870만대는 수입품이었다. 그 중에서 중국산이 92.5%인 805만대이고, 타이완산이 6.8%인 59만대였다. 베트남이나 그밖의 제3국산은 극소수였다. 일본 자전거 수입량은 1992년 100만대를 돌파한 뒤 급격하게 늘고 있다. 반면 국내생산은 5년전 연산 500만대가 무너지며 계속 줄고 있다. taein@seoul.co.kr
  • [사설] ‘주적’ 표현 삭제 논란거리 아니다

    국방부가 다음달 4일 발간할 국방백서에서 주적(主敵) 표현을 삭제키로 한 것과 관련해 정치권에서 찬반논란이 일고 있다. 열린우리당측은 늦었지만 잘한 일이라고 환영한 반면, 한나라당측은 북한이 대남적화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시기상조라고 반대하고 있다. 어느 쪽의 주장이라고 해서 무시할 것은 아니나 안보환경의 변화라든가, 시대변화를 생각한다면 주적 표현은 사라질 때가 됐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더욱이 주적 표현을 ‘직접적이고 실체적인 군사위협’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한 것은 가능한 모든 위협에 대비한 포괄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전향적이라고 볼 수 있다. 주적 표현을 놓고 정치권이 찬반 논란을 벌이는 것은 소모적이고 어른스럽지 못하다. 주적 표현이 없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북한의 위협에 굴복했다거나, 군의 대비태세가 흐트러질 것이라는 시각은 근시안적이다. 실제 ‘주적인 북한의’라는 표현은 ‘북한의 재래식 무기, 대량 살상무기, 군사력의 전방배치 등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위협’으로 바뀐다. 주적 개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표현만 바뀌는 것이다. 북한뿐 아니라 어떤 국가든 대한민국을 침략하고 위협을 가한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적이다. 북한만 주적으로 남겨두자는 주장은 다른 위협은 적이 아니라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주적 표현을 고수한다고 남북관계가 경색된다든가, 표현을 없앴다고 안보공백이 우려된다는 주장은 단견일뿐더러 정치적 논란거리도 못 된다. 군대를 보유한 어느 나라에도 주적개념은 없다. 단지 자기네 나라를 침략하는 상대를 적으로 간주할 뿐이다. 주적 표현을 직접적인 군사위협으로 대체하는 것은 변화하는 국제안보환경에 대처하는 포괄적이고 전향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