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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외국인 귀화절차 정비하자/설동훈 전북대 사회학 교수

    한국은 이민사회다. 외국인 체류와 귀화 통계를 보면, 이 말이 결코 무리한 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법무부의 출입국관리 통계연보에 의하면,2005년 말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72만 2102명으로, 총인구의 1.5%에 달했다. 그중 최다수 집단은 이주노동자로서,34만 5911명이 국내의 부족한 일자리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주노동자는 최장 3년을 주기로 교체 순환되므로 개개인의 면면은 계속 바뀌지만, 그 집단자체는 한국 경제가 발전하는 한 영속할 것이다. 또한 2005년 국내 체류 외국인 중에는 ‘국민의 배우자’가 7만 4176명 있었다. 같은 해, 국내 전체 결혼건수의 13.6%인 4만 3121건이 국제결혼이었다. 서울에서만 1만 1507명의 한국인이 외국인을 배우자로 맞이하였다. 그해 결혼한 농어촌 총각의 35.9%는 베트남·중국·필리핀 등 외국여성과 결혼했다.2005년 귀화자 수는 1만 2299명이었고,‘국적회복자’ 수가 4675명이었다. 귀화자의 대다수는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해온 외국출신 여성들이었다. 영주자도 1만 1239명 있었다. 영주자는 대부분 타이완 국적 화교이지만, 결혼이민자도 일부 있다. 결혼이민자의 대다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귀화하지만, 극히 일부는 본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영주권만 취득하여 생활하고 있다. 이민사회는 이미 도래하였지만, 이민제도는 아직 정비되지 못한 실정이다. 이민 업무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은 법무부의 한 국(局)에 불과하고, 영주권과 국적 등 시민권 제도도 체계화되어 있지 못하다. 현행 국적법과 출입국관리법에 의하면, 외국인이 합법적으로 ‘5년 이상 계속하여 대한민국에 주소가 있을’ 경우 한국 국적 또는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은 특별혜택을 받으므로 ‘2년 이상 체류’로 대기 기간이 훨씬 짧아진다.2005년 9월까지는 결혼이민자도 5년 이상 체류해야만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었으나, 정부는 결혼이민자의 경우 2년만 체류하면 간이귀화를 통해 국적을 받을 수 있음을 고려하여, 영주권 취득을 위한 대기기간도 동일하게 단축·조정하였다. 그 결과, 국적과 영주권 취득을 위한 대기기간은 완전히 동등해졌다. 그런데 이민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외국인이 영주권을 취득한 후 일정 기간이 지난 경우만 귀화 문호를 개방함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도 그러한 방식으로 시민권 제도를 고쳐야 한다. 현행법령은 영주권자에게 국민과 동등한 경제적·사회적 권리는 물론이고, 지방선거권·주민투표권·주민소환권 등 주민자치권까지 보장하고 있다. 즉, 영주권을 소지한 외국인이 ‘주민’으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향유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가 정비되어 있으므로, 귀화를 받아들일 때 좀더 엄격한 요건을 적용하는 것은 ‘외국인 차별’과는 별개의 사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외국인이 귀화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인본주의 등 한국사회의 기본적 가치를 따르는 것을 전제로 한다. 프랑스에서는 2003년부터 자국에 귀화를 신청한 이민자에게 자유·평등·박애로 대표되는 사회 규범과 가치 준수, 프랑스어 사용, 남녀평등,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 등 ‘공화국 정신’을 존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환영과 통합에 관한 계약서’(Contrat d’Accueil et d’Integration)에 서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미국 국토안보부 시민권·이민서비스국(USCIS)에서는 2006년 12월 시민권 취득 시험에서 ‘미국의 역사’ 부분을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민의 시대’에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가져야 할 기본적 가치와 이념 및 지식을 체계화하여 귀화자들과 공유하여야 한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 교수
  • 탈북자 신변보호 의무화 ‘北送금지노력’ 입법 추진

    국군포로 가족이 강제로 북송된 사건으로 정부의 북한 이탈주민 보호대책이 비판받고 있는 가운데 탈북자 강제송환 금지와 신변보호 등을 위한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명문화하는 입법이 추진된다. 지난해 강제 북송된 탈북자가 5000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자 ‘북한자유이주민의 인권을 위한 국제의원연맹’(IPCNKR) 상임공동대표인 황우여 의원은 21일 ‘북한 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2월 임시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개정안은 탈북자의 체류국 내에서의 강제송환 금지, 신변보호, 인권신장 및 국내입국 등을 위한 국가의 외교적 노력 의무를 규정하고, 외국에 체류하는 탈북자들이 직접 방문 외에 서신, 전화 또는 대리인을 통해서도 보호신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미국 내 50여개 북한 인권 관련 운동의 연합체인 북한자유연대(NKFC)의 남신우 공동부회장은 19일(현지시간) 워싱턴 소재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올림픽 전에 탈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탈북자를 색출해 강제북송하고 있는데 작년에 5000명 이상이 갔다(북송됐다).”고 주장했다. 이종락 김미경기자 jrlee@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1) 구 천주교 포천성당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1) 구 천주교 포천성당

    문화유산의 멋과 의미는 후대에 가공되지 않은 본래의 모습에서 외려 오롯하게 살아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심하게 훼손된 채, 혹은 아주 작은 부분만 옛 모습대로 남아 있지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화려했던 옛날을 들쳐보게 만드는 그리스 곳곳의 폐허화된 유적이며 유물들은 그래서 더 빛이 난다. 옛 것을 지금의 기준으로 다듬어 되살려내는 복원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남겨진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들여다 보면서 곱씹는 역사의 교훈과 재미가 쏠쏠한 것이다. 경기도 북부지역의 유일한 등록문화재인 구(舊)천주교 포천성당(경기도 포천시 신읍동·등록문화재 제271호).1950년대 중반 군부대에 의해 지어져 역사는 그다지 오래지 않지만 훼손된 뒤 복원의 손길을 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붉은 성가정 성당 옆 회색빛 벽체 만나다 포천시내의 신읍동에서 서편 왕방산 쪽으로 방향을 잡아 좁은 길을 오르다보면 산 중턱의 예쁘장한 성가정 성당을 만나게 된다. 현대식 건물의 성당 경내에 들어서면 사제관 앞 언덕을 둔중하게 두른 거대한 축대 위의 흉물스러운(?) 또 다른 건물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쏠린다. 마치 폭격을 맞은 듯 지붕은 온데간데 없고 벽체만 을씨년스럽게 서있어 그야말로 폐허를 연상케 한다. 바로 이곳이 구 천주교 포천성당이다. 동쪽 종탑 아래에 ‘성가브리엘성당’이라 새겨진 아치형 출입문에서 휑뎅그렁하게 매달린 종을 올려다보며 안으로 들어서면, 안인지 바깥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하늘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군데군데 부서져 떨어져나간 틈새를 시멘트로 메운 화강암 벽체가 서있기조차도 버거워 보인다. 그럼에도 서쪽 정면의 감실이며 감실 앞에 두켜로 만들어진 제단은 이곳이 한때 간단치 않은 신앙의 중심 공간이었음을 말없이 보여준다. ●대지 기증 받아 공병대대가 5개월간 공사 한국의 성당들은 대부분 신자와 신자들의 신앙공간인 공소를 중심으로 해서 세워지곤 했다. 그런데 이 성당은 거꾸로 성당이 먼저 세워진 뒤 신자들이 모여들고 본당이 설정된 특이한 역사를 갖고 있다.6·25전란의 험한 세상에서도 살아 남은 교회들은 당시 천주교 신자들에게 ‘하느님이 보호하는 굳건한 성’이란 인식을 심기에 충분했다. 그런 때문인지 1950년대엔 유난히 석조건물이 많이 들어섰는데 의정부 제2성당(1953년), 돈암동성당(1955년), 횡성성당(1956년), 홍천성당(1957년), 제기동성당(1957년)이 모두 그런 성당들이다. 특히 군부대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석조건물이 적지 않았는데 이 포천성당은 군부대가 직접 세운것 가운데 남아 있는 유일한 성당이다. 6·25전쟁의 포화가 멈춘 1955년 당시 육군 6군단 군단장이었던 이한림 장군이 성당을 지은 주인공. 할머니의 인도로 독실한 신자가 되었던 이 장군은 당시 신앙처가 없던 포천에 성당터를 물색하던 중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이곳을 낙점했다고 한다. 폐허의 성당 앞에 서면 지금도 포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포천의 유지로부터 기증받은 1000여평의 대지 위에 5개월간의 공사 끝에 55평짜리 석조성당과 20평의 사제관으로 지었는데 공사는 모두 이 장군의 지시를 받아 공병대대가 맡았다. 종탑 아래 아치형 벽체에 새겨진 ‘성가브리엘성당’의 이름은 이 장군의 세례명을 땄다고 한다. ●사업실패자가 촛불 켜고 잠들어 지붕 소실 1955년 11월말 완공되었을 때의 모습은 나무 마루바닥에, 인근 덕정리에서 날라온 화강암 벽체와 종탑을 세우고 함석지붕을 인 준고딕식 조적조 성당이었다. 나중에 나무바닥을 걷어내고 시멘트와 모래를 섞은 돌 바닥으로 바꾸었으며 지붕도 동판 기와로 교체했다.1990년 사업에 실패한 전직 경찰 출신이 성당안 제의실에서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가 불을 내는 바람에 벽체만 남긴 채 지붕이며 제대, 성물이 모두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불이 난 뒤 지역 신자들이 건물 붕괴를 우려해 성당을 헐어 새로 짓자고 했지만 문화재의 가치가 크다고 판단한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와 포천성당 신부, 학자들이 고집을 부려 마침내 지난해 등록문화재 목록에 올랐다. 비록 성당안 구조물은 모두 소실됐지만 서쪽 벽에 뚜렷하게 남은 감실과 제의 때 신부들이 감실을 오르내리던 계단은 신자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제대가 놓여 있던 제단이 두개의 층으로 구분된 것도 흥미롭다. 성당이 처음 지어졌을 때 신부들이 신자들에게 등을 돌린 채 미사를 집전하던 제단에 더해 나중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신자들을 바라보고 집전하기 위해 새로 만든 제단이 붙어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지난해 등록문화재 올라 본당이 설정된 것은 성당이 지어진 이듬해인 1956년. 이후 지난 2004년 의정부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될 때까지 의정부 지역을 비롯해 송우리성당, 일동성당, 운천성당, 가산성당 등 경기 북부지역의 5개 본당을 관할하는 중심본당으로 성장했다. 구 성당 아래의 본당인 성가정 성당은 지난 1992년 별도의 건물로 새로 지은 것이다. 춘천교구와 성당측은 구 성당의 외벽 등 지금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보수공사를 거쳐 주민들과 미사며 문화행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고 있다. 구 성당을 문화재에 등재하는데 앞장섰던 단국대 김정신 교수(건축학)는 “군의 원조를 받거나 군이 직접 지은 종교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희귀유산인데다 도시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근대사의 흔적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보존가치가 크다.”며 “외관을 그대로 보존한 채 전시회나 야외미사, 휴식처 등 소규모의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kimus@seoul.co.kr ■ 홍인, 신유박해때 고향 포천서 순교… 지역 천주교 ‘뿌리’ 구 천주교 포천성당이 지어질 때만 해도 이렇다 할 신앙공간이 없었지만 포천 지역은 원래 믿음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이 포천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 바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홍인(레오·1758∼1802)으로, 지금도 천주교사에 굵은 선으로 남아 있다. 한양에서 포천으로 이주해 온 명망있는 집안 출신인 홍인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부친에게서 천주교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포천에서 자라난 홍인은 1794년말 중국에서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아 입교했다. 이후 당숙인 홍익만, 황사영 등과 교류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종의 책 뭉치가 든 상자를 집안에 숨겨 두었다가 발각돼 44세의 나이에 고향 포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함께 체포된 부친은 한양으로 압송된 뒤 참수됐다. 그 즈음 홍인과 부친의 순교 소식은 전국에 퍼졌으며 다른 지방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신앙공동체를 일구기 시작해 1900년대초 포천읍 선단리 해룡마을에 공소가 세워졌다. 이후 1930년대 개성본당,1931∼1935년 행주본당의 관할에 들었으며 1935년부터 덕정리 본당(현 의정부2동 본당) 관할지역에 속했다. 이한림 장군이 포천성당을 세운 이듬해인 1956년 본당이 설정되면서 경기북부와 강원도 일부지역을 관할하는 중심성당으로 우뚝 선 것이다. 신앙심이 유별났던 이한림 장군이 포천지역에 성당을 건립할 뜻을 세운 것도 이같은 포천지역의 신앙 내력을 잘 알았던 때문일 것이다. 성당 건립부지를 선뜻 내놓은 지역 유지도 물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눈을 통해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이 매주 목요일 연중기획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편집자 주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돼지´에게 무릎을 꿇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안추원의 비극을 책임질 것인가? 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한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선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린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베이징에 입성한다.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선양의 거주민들에게 베이징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이징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안추원은 절망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2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성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 영의정까지 올라 안추원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오판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안추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비극’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오늘날.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돌아본다. 꼭 10년전 ‘IMF 외환위기’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0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필자 한명기 교수는 ▲1962년생 ▲1985년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졸업 ▲1997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박사) ▲1998∼2001년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현재 명지대 사학과 교수.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논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광해군’(2000) 외 다수 ●청태종 송덕비(위 사진)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
  • [탐사보도-법따로 현실따로 (2)] 보상 기준 불명확…시행처 재량권도 ‘고무줄’

    [탐사보도-법따로 현실따로 (2)] 보상 기준 불명확…시행처 재량권도 ‘고무줄’

    택지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토지보상이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상가 딱지는 불법적으로 거래되면서 부동산시장을 교란시키고 분쟁과 갈등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올해부터 토지보상금에 실거래가 기준으로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도록 바뀌면서 토지보상 지역에서 불법 매매가 성행할 것으로 우려된다. 상가 딱지는 1980년대 택지개발사업이나 주택건설사업을 추진하면서 생계대책을 세워 달라는 원주민 등의 요구로 만들어졌다. 생계대책용으로 제공되는 상가 딱지는 법적 근거가 없이 만들어지고 있어 원주민들에게 어느 정도 보상이 적정한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들이다. ■ 토지보상법 이것이 문제 서울사이버대 부동산학과 김용희 교수는 “상가 딱지는 골치 아픈 민원을 해결해 주기 위해 법적인 근거도 없이 남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남은경 부장은 “토지보상법에는 보상 및 이주대책과 관련한 명확한 근거나 기준이 없다.”고 지적했다. 대규모 택지를 개발하면서 지주·건물주·세입자 등에게 보상해 주는 근거는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토지보상법)’이다. 법에는 사업 시행처에 적당한 이주대책을 수립하고, 이주정착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규정은 없다. 택지개발을 추진하는 공기업 관계자는 “현금 보상이 커질수록 개발 이익의 특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결국 상가 딱지 같은 ‘당근’을 들이대야만 토지 수용이 원활해진다.”고 털어놨다. 협상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보너스 보상’이란 얘기다. 토공이나 주공은 내부 규칙에서 상가 딱지 제공을 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가 딱지는 택지개발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행정편의적인 성격이 짙다. 국토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상가 딱지는 택지개발 협상을 하기 위한 인센티브에 불과하다.”면서 “상가 딱지는 바람직한 보상형태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토지보상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법무법인 신일의 한 변호사는 “보상에 대한 명확한 근거나 기준이 없다 보니 시행처가 과도하게 재량권을 행사하고 있다.”면서 “협상에 호의적인 사람에게는 혜택을 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몰수에 가까운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지성의 고은아 변호사는 “판교의 경우 6∼8평씩 주는 상가 딱지는 입찰우선권에 불과한 매우 불완전한 권리이며, 이 권리를 공시할 방법이 없어 이중계약을 방지할 수도 없다.”면서 “명문으로 전매를 금지하고, 예외적으로 전매를 인정할 경우에도 사업 시행자의 승낙을 얻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인천영종·삼송지구 등에서 한꺼번에 11조원의 보상금이 풀린 것도 시행처와 주민들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협상의 산물이다. 토공과 주공 관계자는 “애초 고양 삼송지구를 제외하고는 지난해 하반기에 보상할 계획이었으나 올해부터 보상비에 양도세가 실거래가로 과세되자 주민들이 보상을 앞당겨 달라는 민원을 제기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공기업의 업무 편의주의와 주민들의 세금 회피가 결합하면서 대규모 부동자금이 풀렸고, 부동산시장 불안의 주요 원인이 된 셈이다. 올해에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9개 혁신도시 등에서 20조원의 보상금이 풀려,2∼3배 늘어난 세부담을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으려는 요구가 거세져 상가 딱지와 같은 보너스 보상과 이를 불법으로 매매하는 현상이 기승을 불릴 전망이다. 국민은행 박합수 부동산팀장은 “부재지주들이 최고 세율 60%가 적용되는 대부분의 개발 예정지 땅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기존 세율(최고 36%)도 높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과연 보상비의 60%를 세금으로 내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양도세법에 공익사업에 대한 특례규정을 두지 않으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거나, 다양한 ‘보너스 보상’으로 어물쩍 해결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는 대규모 택지 개발에 따른 현금보상이 한꺼번에 부동산 투기의 ‘풍선효과’란 부작용을 가져오자 희망자에게는 현금 보상 외에 현물(개발 이후의 토지) 보상도 가능하도록 하는 토지보상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해 놓은 상태다. ■ 갈등소지 많은 토지보상 규정 손질 시급 토지보상을 둘러싼 끊이지 않는 갈등을 해결하고, 과도한 현금 보상 및 각종 ‘보너스 보상’ 문제를 해결하려면 토지보상법을 현실에 맞게 근본적으로 손질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부가 앞장 서서 난개발을 부추기는 현재의 무분별한 신도시 개발계획도 수정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한국법제연구원 사회문화법제연구팀 전재경 팀장은 토지보상법의 발상의 전환을 주문했다. 전 팀장은 “토지보상법은 국가가 강제로 토지를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정권 시절의 계획경제적 산물”이라면서 “팔 권리는 물론 팔지 않을 권리도 인정해 주는 시장원리에 맞는 새로운 법 체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서강대 김경환 교수는 “현물 보상과 ‘반값 아파트’ 등 줄줄이 쏟아진 대책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다.”면서 “소수의 지주들과 시행 공기업의 배만 불리고, 원주민의 생계대책에는 인색한 현행 보상체계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국토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생계대책용 상가딱지를 주는 방식보다는 지속적인 생활대책을 마련해 주는 게 필요하다.”면서 “외국에서는 일시적인 보상을 하지 않고 꾸준하게 모니터링과 추적을 해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업 시행자에게만 갈등관리 비용을 떠맡기지 말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도 대책이 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사이버대학 김용희 교수는 “개발계획을 발표하기 이전 시점으로 소급해서 보상비를 정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지구를 재지정하거나 수정하면 그때가서 다시 보상비를 책정한다.”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보상비는 많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보상비를 정하는 시점도 미리 명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남은경 부장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법을 고칠 게 아니라 보상 과정에서 일관되게 적용될 명확한 기준과 근거를 법률과 법령, 규칙에서 내놓아야 한다.”면서 “근본적으로는 개발 사업의 총량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국대학교 부동산학과 고성수 교수는 “정부가 추진중인 현물(토지)보상제는 실현 가능성보다는 현금 지금에 따른 풍선효과를 봉합하려는 측면이 강하다.”면서 “법 개정에 앞서 정확한 재정의 지출과 사회적인 편익을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토지보상 문제는 실험적인 아이디어 차원에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면서 “땜질식 처방이 아닌 근본적인 법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5년간 토지보상금 77조 부동산 값 상승 부추겨 ‘국토 균형발전’을 내세운 참여정부 들어 대규모 개발사업이 봇물처럼 터지면서 토지 보상금도 천문학적인 규모로 증가하고 있다. 9일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간 이미 37조 5469억원이 풀렸다. 이는 국민의 정부 5년간 보상비 총액 29조 7222억원을 훌쩍 넘는 액수다. 더욱이 지난해 3조원이 넘게 지급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비롯해 고양 삼송지구, 인천 영종지구, 김포 신도시 등에 총 20조원이 풀렸다. 올해에도 대구, 전남, 전북 등의 9개 혁신도시 및 다양한 신도시 토지보상으로 20조원이 더 풀릴 예정이다. 결국 참여정부 5년간 77조원 이상의 ‘혈세’가 토지보상금으로 풀린다는 계산이다. 이는 올해 정부 예산 163조 4000억원의 절반 가까운 규모다. 보상비는 시중의 유동성 자금과 함께 부동산시장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4조원 이상이 풀리고 있는 인천 영종지구의 부동자금은 서울 강남이나 양천구, 인천 송도 웰카운티 등에 집중적으로 재투자되고 있으며, 인근 섬인 신도의 땅값도 50%까지 폭등했다. 한국금융연구원 강경훈 연구위원은 “저금리 정책과 국토균형발전에 수반된 잇따른 토지보상금이 유동성과잉에 일조했다.”면서 “특히 토지보상금은 부동산 투기나 투자로 고스란히 다시 흘러들어가 부동산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고 지적했다. 토지보상비에는 국가·지방자치단체·정부투자기관 등이 택지개발·도로·산업단지·철도·항만 등 공익사업을 위해 취득한 토지에 대한 대가가 모두 포함된다. 이 가운데 택지개발과 관련한 보상비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경원대 홍종학 교수는 “신도시 개발로 부동산 투기를 근절시킨 국가는 없다.”면서 “무분별한 택지개발사업은 투기 심리를 부추겨 부동산 가격 상승을 유발하고, 투기판의 ‘파이’를 키울 뿐”이라고 지적했다. 기획탐사부 이창구 강혜승 유지혜 박지윤기자 tamsa@seoul.co.kr ●3회에서는 불법인지도 모른 채 유행처럼 떠나고 있는 ‘초·중학생 불법 유학’ 문제를 다룹니다.
  • 평택기지 주민 이전원칙 동의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며 이주를 거부해 온 평택 대추리 잔류 주민들이 더 이상 기지 이전 및 관련 재협상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지 않기로 정부측과 합의했다. 이는 주민들이 평택 기지 이전 원칙에 사실상 동의한 것으로, 지연돼 온 미군기지 이전사업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정부(대표 김춘석 국무조정실 주한미군대책기획단 부단장)와 대추리 주민(대표 김택균)측은 2일 오전 평택시청에서 협상을 갖고 이 같은 내용에 합의했다. 양측은 향후 논의 과제와 관련, 주민 이주와 생계지원 등 주민 요구사항 및 정부 지원에 관한 사항으로 한다고 합의문에 명시했다.또 양측 대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논의 의제를 해결토록 최대한 노력하기로 했다. 아울러 정부와 주민 대표 3인씩으로 협상단을 구성, 대화를 계속하며, 다음 대화는 3일 오전 10시 갖기로 했다. 주한미군대책단 관계자는 “오늘 협상 서두에서 주민대표가 재협상 문제를 강력하게 꺼내 분위기가 경색됐지만 결국 향후 논의 의제는 주민 이주와 생계지원 쪽으로 압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제 미군 기지 이전이란 정치적 이슈가 아닌 주민 생계 관련 내용에만 전념해 협상을 할 수 있게 됐다.”며 “3일부터 거의 매일 협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양측 대화는 지난해 6월 이전 반대 팽성주민대책위 김지태 위원장 구속으로 중단된 지 7개월 만에 재개되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인도 가처분 소송을 제기,12월 승소함에 따라 4일 철거 시한을 앞두고 있었으며 1일 주민들이 전격 협의를 제의해 협상이 이루어졌다.정부는 협상 재개에 따라 강제 철거를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인사]

    ■ 건설교통부 △정책홍보관리실장 이재영△물류혁신본부장 강영일△기반시설〃 황해성△국토균형발전〃 전태봉△주거복지〃 서종대△생활교통〃 홍순만△건설선진화〃 박상규△서울지방국토관리청장 한기선■ 감사원 ◇3급 승진 △자치행정본부 제2팀장 金邦燮△건설물류감사국 제3과장 崔炳儁△〃 제4〃 朴石愚△행정안보감사국 총괄〃 朴始宗△심의실 법무지원담당관 鄭賢朝△文浩承◇4급 승진△특별조사본부 宋永召 崔丁云 金廣永△산업환경감사국 제5과 姜敏鎬△〃 제4과 金南現△행정안보감사국 〃 崔仁銖△심의실 법무지원담당관실 李永甲 金相富 李洙娟 南基哲△〃 심사1〃 朴昇濬△〃 심사2〃 曺承鉉△〃재심의〃 李相泰△기획홍보관리실 혁신인사〃 박성익△행정지원실 관리지원팀 鄭奎燮△감사교육원 감사교육과 羅濟芳△〃 회계교육과 姜聲德 金龍範■ 법무부 ◇보호관찰직 서기관 (승진)△법무부 보호국 관찰과 기획담당서기관 李又權△광주보호관찰소 순천지소장 申完燮(전보)△서울보호관찰소 남부지소장 金仁相△〃 행정지원팀장 李泰源■ 문화관광부 ◇팀장급 △장관 비서관 宣在奎△정책홍보관리실 성과관리팀장 安仙菊△문화정책국 문화정책〃 姜培馨△〃 국제문화협력〃 金暎洙△문화산업국 게임산업〃 李榮悅△체육국 생활체육〃 崔鍾學△국립중앙도서관 도서관정책과장 朴成基△〃 작은도서관진흥팀장 金聖和△문화중심도시조성추진기획단 정책기획팀장 朴亨東■ 통일부 ◇팀장급 전보 △혁신재정본부 남북협력기금팀장 元基善△정책홍보본부 정책총괄〃 白泰鉉△남북경제협력본부 남북경협1〃 裴光福△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 교육기획〃 柳鎭永■ 국가보훈처 ◇직제명칭변경에 따른 재발령 △보훈보상국장 李逢春△복지의료〃 張大燮△보훈보상국 단체협력과장 愼泫縡◇서기관 전보△정책홍보관리실 성과관리팀장 朴昌杓△국립영천호국원장 金洛陽△국립임실〃 趙春泰◇서기관 승진△감사담당관실 보훈상담센터장 姜錫夫△복지의료국 보훈대부채권〃 趙星來△혁신기획관실 李明賢△보훈선양국 기념사업과 朴魯振△복지의료국 의료지원과 金容孝△서울지방보훈청 관리과장 權寧鳳■ 국세청 △서울지방국세청 세원관리국장 金悳中△중부지방〃 조사2국장 王基賢■ 병무청 ◇고위공무원 승진·전보 △부산지방병무청장 宋斗杓◇고위공무원 임용△강원지방병무청장 金榮奎◇전보 (고위공무원)△광주전남지방병무청장 孫鍾海△전북지방〃 宋嚴鏞(팀장급)△병무민원상담소장 鄭瓚浩△경기북부병무지청장 李殷兆△강원영동〃 李相勳△감사팀장 金泰春△운영지원〃 文秉敏△행정법무〃 洪承美△선병자원〃 黃評淵△현역입영〃 任重爀△현역모집〃 李東煥△고객지원〃 趙永基△공개심사〃 金重謙△부산지방병무청 징병관 崔聖元△대전충남지방병무청 〃 金支煥◇부이사관 승진△성과관리팀장 鄭利植△서울지방병무청 징병관 金在化■ 문화재청 ◇과장급 승진 △동산문화재과장 宋珉宣△예능민속연구실장 金三基■ 서울시교육청 ◇승진 (지방교육행정사무관)△가락고 金載淑△개포고 金貞仁△경일고 鄭在憲△고척고 洪淳哲△구로고 高明植△도봉고 崔泰善△독산고 金元植△동작고 金炳安△면목고 車炳轍△서초고 金石一△수락고 嚴鍾範△양재고 韓順姬△언남고 李吉煥△여의도여고 姜永淑△자운고 金昌基△잠신고 高炅兌△중화고 李兩燮△창동고 姜東浩△혜화여고 鄭京洙△서울정민학교 李熙淵△총무과(서울시파견) 桂憲根(지방사서사무관)△마포평생학습관 자료봉사과장 閔貞淑△영등포〃 〃 李有子△동대문도서관 〃 金明善◇ △교육시설과 崔永植(지방전기사무관)△과학전시관 관리과장 金正煥(지방건축사무관)△중부 시설과장 金修吉■ 서울시 소방방재본부 △중부소방서장 박선권△동대문소방서장 이원규■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도시경영부장 조달호△산학연지원센터장 이종규△연구위원 홍석기△부연구위원 조종석■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교무부학장 金明煥△〃 학생부학장 趙文燮△정보화본부장·중앙전산원장 金明洙△행정대학원 부원장 洪準亨△치과대학 교무부학장·치의학대학원 교무부원장 曺炳薰△치과대학 학생부학장·치의학대학원 학생부원장 李在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사무국)△교육복지사업팀장 徐相國△정보사업〃 金秀洪△총무국장 金正浩△교권국장 辛正基△대외협력팀장 李雄基△정책개발연구실장 朴忠緖△교원연수실장 洪生杓(한국교육신문사)△편집국장 李樂鎭△출판사업국장 金淙植△교육문화사업국장 朴英玉△사업개발국장 姜秉求△인터넷사업팀장 林亨峻■ 한국수자원공사 △충청지역본부장 吳光鎭△전북〃 金泰善△전남〃 金世柱△경영혁신실장 尹輔焄△에너지사업팀장 白斗鉉△정보관리실장 邊斗均△수자원관리처장 廉耕澤△수도기획처장 李吉宰△수도개발처장 吳亨沅△수도사업처장 金完圭△기술관리실장 李完浩△조사기획처장 崔鴻圭△자원관리팀장 李道容△수도권지역본부 운영처장 鄭鎭達△충청지역본부 운영처장 李泰榮△전북지역본부 관리처장 洪性淵△〃 운영처장 韓濟郁△경남지역본부 관리처장 裵龍權△논산수도서비스센터장 申松云△성덕댐건설단장 梁海鎭△임하댐관리단장 李成雨△화북댐건설단장 鄭成永△수도권수도건설단장 金鎭洙△여수권관리단장 魏玉良△부항댐건설단장 閔炳守△태백권관리단장 朴弘圭△고양권관리단장 金勝孝△천안아산수도관리단장 閔俊植△대청댐관리단장 宋基根△운문수도관리단장 金容官△포항권관리단장 鄭鎭雄△안동댐관리단장 金興年△밀양댐관리단장 李永柱■ 대한주택건설협회 △상무이사 李馨■ 한국수력원자력 ◇전보 △영광원자력본부장 이심교△울진원자력본부장 박현택△관리처장 김흥대△경영기획처장 심기보△원자력교육원장 조철훈△발전처장 전용갑△사업처장 박기철△울진원자력본부 제1발전소장 장영균△원자력발전기술원장 노명섭 ◇승진△안전기술처장 이주상△고리원자력본부 제1발전소장 이용태△고리원자력본부 신고리 제2건설소장 이승배△영광원자력본부 제2발전소장 조병옥△월성원자력본부 제2발전소장 류하칠△월성원자력본부 신월성건설소장 강현구△울진원자력본부 제2발전소장 염택수△원자력발전기술원 방폐물기술센터장 정기진△원자력발전기술원 기술담당역 강덕구■ 한국서부발전 ◇전보 △기획처장 박종훈△관리처장 권재성△자재처장 이인재△태안발전본부장 신상철△태안발전본부 제1발전처장 박승연△태안발전본부 제2발전처장 민종선△태안발전본부 건설처장 안수영△삼랑진발전처장 김덕진△청송발전처장 이한희△발전처 발전운영팀장 석성원 ◇승진△경영혁신실장 양수근△평택발전본부장 이상량△서인천발전본부장 권영박△한국발전교육원장 김종도△기획처 정보통신팀장 이수근△태안발전본부 부처장 박형락△태안발전본부 부처장 원종열△청송발전처 부처장 성길제△발전회사 노사업무실장 김웅중■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 승진 △장국현 ◇부장 승진△최성수 김용옥 배명한 엄치성 ◇부장 전보△임찬석 김보수■ 서울보증보험 ◇1급 승진 △동대문지점장 金大洙△동래〃 金鳳來■ 조선일보 (업무직군) ◇승진 △PM실장 車亨鎬△판매국 부국장 겸 수도권판매1부장 金東煥△재경국 〃 겸 경리부장 朴壽命△인사부장 朴元培△광고지원〃 朴爀圭△광고영업〃 林東範△자재〃 김일용◇전보△마케팅전략실 부실장 李忠一■ 동아일보 △영업·사업담당 이사 최맹호△논설주간 이사대우 배인준△출판편집인 〃 최용원△논설위원실장 이재호△출판국장 고승철△광고〃 박영균△수석논설위원(부국장급) 황호택△출판국 마케팅팀장(부장급) 김영관◇부국장급△편집국 편집지원팀장 이경일△경영지원국 건설〃 박태근△사업국 문화사업〃 겸 정보통신사업〃 이민희◇부장급△지식정보센터 지식경영팀장 조헌주△편집국 기획위원 최수묵◇전보△교육사업본부장(국장급) 송대근△2020위원회 부국장급 황의봉△〃 부장급 이수항△논설위원(차장급) 김창혁■ 일간스포츠 △중앙엔터테인먼트앤드스포츠 편집·디자인담당 겸 일간스포츠 편집·디자인 에디터 이상국△사업국장 전태석△전략기획팀장 이용현△편집팀장 서기찬■ 한겨레신문사 (마케팅본부) △마케팅본부장 김태읍△마케팅실장 직무대행 겸 마케팅기획부장 우현제△판매국장 직무대행 겸 수도권영업부장 이광재(경영지원실)△기획예산팀장 강대성■ 한국경제신문 △상무이사·주필 李啓民△상무이사·경영본부장 겸 광고국장 崔鍾千△이사대우 편집국장 李熹周△〃 관리국장 裵聖仁■ EBS ◇승진 △정책기획센터장 金載根△정책기획센터 홍보팀장 金奉烈△영상아트센터 그래픽〃 金載錫△〃 스튜디오·중계영상〃 呂運吉△경영지원센터 인사법무〃 趙起鎬△제작본부 시사통일〃 金柄洙△〃 어린이청소년〃 金民△기술본부 기술기획〃 全炳鍾△〃 영상기술〃 金錫兌△〃 라디오기술〃 姜淳道△콘텐츠사업본부 e-러닝제작〃 黃盛煥◇전보△시청자참여센터 심의평가팀장 겸 우리말연구소 부소장 金利基△정책기획센터 정책팀장 金正基△편성센터 편성기획〃 沈孝茂△제작본부 유아교육〃 吳丁錫△콘텐츠사업본부 문화사업〃 孫洪宣■ MBC애드컴 △상무 金贊會△경영기획실장 柳亨秀△커뮤니케이션2본부장 李建相△크리에이티브〃 李英鎭△매체〃 權炳孝△프로모션〃 洪性勇△커뮤니케이션1본부 기획1국장 柳熙朝△커뮤니케이션2본부 기획1〃 成耆勳△〃 기획2〃 鄭光鎬△〃 기획3〃 朴贊翊△크리에이티브본부 크리에이티브〃 李芙希△마케팅〃 朴廷勳△광고개발〃 李楨基△프로모션본부 프로모션1〃 申亨宇△〃 프로모션2〃 韓相國△경영관리〃 洪淳禹△재무〃 裵錫天△신규사업1〃 白承豪△신규사업2〃 朴勝七■ 현대건설 ◇승진 (부사장) △토목사업본부 정무현△플랜트〃 안승규△제2영동고속도로사업단 강희용 (전무)△주택영업본부장 박상진△기술개발원장 이영남△토목사업본부 김진엽△〃 남선중△건축사업본부 고인석 손효원 최영화 박상진△플랜트사업본부 강기령△경전선 BTL 사업단 경우근 (상무)△토목사업본부 성판영 심재두 박경호 이창덕△건축사업본부 박준석△주택영업본부 고기영△플랜트사업본부 이승택 오윤택 송진섭 박윤정△전기사업본부 김정기△영업본부 천길주 최병욱△해외영업부 김영택 한진우△국내공사관리부 이구호△설계실 신철호 (상무보)△토목사업본부 오대철△건축사업본부 변종선△주택영업본부 조수곤 강원△플랜트사업본부 차동철 정계섭△전기사업본부 송재륜△인재지원부 김연일△홍보실 정근영△토목사업본부 김정기 김영 윤철수 이동진 조학연 하진기△건축사업본부 김정철 박승순 고창수 정유성 강봉환△플랜트사업본부 김면우 최재찬 최윤 송근호△품질경영실 이광채 (상무보 대우)△토목사업본부 전호권 유병일 김문현 김제방 이태범△건축사업본부 남재우 박은식 전진수△주택영업본부 송창현 김원집△플랜트사업본부 한관우 이경우△전기사업본부 김승호 이영극△해외영업부 이혜주△국내공사관리부 이동호 박병관△IT기획부 박상문△서산개발사업단 이승은△설계실 김달선■ ㈜레뱅드매일 △대표이사 사장 成百煥(매일유업 경영고문 겸직)■ SK케미칼 ◇상무 △황춘현△편용욱 임영문■ 진로발렌타인스 (승진) ◇부사장△전국영업총괄 金一柱 ◇전무△재무담당 제롬 코틴 비죤(Jerome Cottin-Bizonne) ◇상무△서울 영업담당 陳仁豪△경기/강원/제주 〃 金性洙◇이사△영남영업담당 郭洙鎭■ 신동아건설 △기술연구소장 상무 유원석△기획본부장 상무 이한세△건축본부장 상무 최원락△영업담당 이사 정광열△자체·외주담당 이사 우수영△홍보실장 이사 이상철△회계담당 이사대우 소동의■ 엠사이어티 ◇전무 승진 △김명환■ 넥스원퓨처 ◇승진 △부사장 이효구△이사 박영도 ◇신규 △이사대우 박영철 정필훈■ 대한주택공사 △도시이사 윤병천■ 워커힐 ◇승진 △사장실장 이창규△외식사업본부장 최종선■ 한라건설 ◇승진 △전무 이은시△상무보 이현동 박철홍 ◇전보△기획실장 고세욱△현장지원본부장 이석민
  • 한수원 이전 놓고 경주 핵분열

    중저준위방사성폐기장(방폐장) 유치 1년을 맞은 경북 경주가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유치를 놓고 둘로 갈라졌다. 방폐장이 들어설 경주 양북·양남면, 감포읍(동경주) 주민들은 방폐장의 안전성 입증을 위해, 도심권 주민들은 경주 전체의 균형발전을 위해 각기 자신들이 주장하는 지역으로 이전해야 한다며 강력히 맞서고 있다. 동경주 주민 2000여명은 28일 오후 5시부터 2시간여 동안 감포읍 시가지 일대에서 한수원 본사의 양북 이전을 촉구하며 나흘째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방화로 보이는 산불도 잇따랐다. 이날 28일 오전 2시45분쯤 경주시 양남면 서금리 야산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으며, 지난 25∼27일 3일간 3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이 불로 모두 임야 3.6㏊가 불에 탔다. ‘방폐장 유치에 따른 지역대책위’ 배칠용(53) 집행위원장은 “백(상승) 시장이 당초 한수원 본사의 양북 이전을 약속하고도 결국은 도심권 이전을 추천해 1만 9000여 주민에 대한 배신을 저질렀다.”며 “한수원 본사가 도심권으로 갈 경우 공공건물 및 원전 관련 시설에 대한 파손 및 방화 등 폭동에 가까운 강경한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방폐장 백지화 ▲신월성 1·2호기 건설 저지 ▲고준위 폐기물 임시저장고 추가 건설 반대 ▲월성 1·2호기 연장 가동 반대 및 영구 폐쇄 등 ‘4대 투쟁’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이들은 앞서 지난 25일부터 양북면사무소 유리창 수십여장을 깨고 승용차와 폐타이어를 쌓아 놓고 불을 지르는가 하면 경운기와 차량으로 도로를 점거하기도 했다. 이처럼 주민들의 시위가 과격양상으로 치닫자 경찰은 지난 24일부터 월성원자력발전소 등 공공시설 곳곳에 30개 중대 병력 3000여명을 배치, 경비를 펴고 있다. 27일엔 양남면 월성원전 사택 앞에서 폐타이어를 불태우며 원전 직원들의 출근을 저지한 김모(38)씨 등 6명을 연행한 한편 지금까지 극렬 가담자 16명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내는 등 주동자를 엄벌하기로 했다. 반면 경주 도심지역 26만명은 경주 전체의 균형발전을 위해 한수원 본사 도심유치를 당연시하고 있다. 도심권 50여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도심위기대책범시민연대’ 소속 주민들은 한수원 도심권 이전을 요구하며 동천동 경주시청 앞에서 19일부터 천막농성 중이다. 이들은 10월부터 경주역앞 등에서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집회를 열고 10만명 시민서명운동을 벌였다. 도심위기범시민연대 최태랑 공동대표는 “한수원이 동경주로 갈 경우 구성원들이 교육·문화적 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울산에서 출퇴근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경주 이전효과가 전혀 없다.”면서 “따라서 경주 전체의 발전과 경제적 파급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는 시내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수원 본사는 10만평 규모의 부지에 지어지며 건설 및 이전 사업비가 1200억원에 이른다. 본사와 유관기관 상근 직원 2000여명에 그 가족까지 다 이주하면 연간 600억∼700억원에 이르는 소비지출로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가 기대된다. 게다가 협력회사가 2만여 업체에 달해 원자력 유관산업 유입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한편 백 시장은 지난해 10월 방폐장 유치 주민투표운동 당시 “(동경주) 찬성률이 경주 전체 평균을 넘으면 한수원 본사를 동경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투표결과 동경주 주민들의 찬성률은 58.2%로 전체 평균치 89.5%에 비해 크게 낮았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우토로 거주권 문제 일본에 책임”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 진상규명위원회’는 7년째 퇴거 논란을 빚고 있는 일본내 조선인 집단촌인 우토로 지역의 거주권 문제에 대해 “책임은 일본에 있다.”고 28일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최근 정부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진상조사를 마치고 ‘일본 우토로 지역 주민의 도일(渡日) 배경에 관한 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는 “일제의 전시노동력동원 정책 속에서 조선인들이 생존전략 차원에서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면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거주권 문제는 역사적 기원이라는 차원에서 일제의 전시정책과 일본 국제항공공업회사의 책임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토로 지역의 조선인들은 그동안 알려진 것과 달리 한국에서 강제 징용된 것이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1930년대 말 일본이 전시노동력 동원 정책을 펼치자 ▲해외징용을 피하거나 ▲일자리를 얻기 위해 ▲공습을 피하기 위해 이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일본은 교토부에 90만여평의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값싼 임금의 조선인을 고용했다. 고용된 조선인이 1300여명에 이른다.지난해 민간 차원에서 ‘우토로 문제 국제대책회의’를 마련해 모금운동에 나서 4억 8000만여원이 모였으나 서일본식산이 요구하는 13억엔(약 117억원)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관심이 줄어들어 올해 모금액은 0원이다. 한편 28일 일본 도쿄 외무성 회의실에서 열린 제15차 재일한국인문제 한·일 아태국장회의에서 우리측은 인도적 지원에 적극적으로 임해줄 것을 일본측에 요청했으나 일측은 우토로 문제가 민사상 문제로서 당사자간 해결이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HAPPY KOREA] 대전·광주·충북 탐방

    [HAPPY KOREA] 대전·광주·충북 탐방

    산해진미도 그릇이 흉물스럽거나 어울리지 않으면 맛이 반감된다. 펄펄 끓는 구수한 청국장이 뚝배기가 아닌 양은냄비에 담겨 있다면 식욕을 앗아갈 수 있다. 사람이 음식이라면, 사람이 모여사는 마을이나 동네는 바로 그릇이다. 도시는 도시답게, 농촌은 농촌답게 만들어야 주민들을 담아낼 제대로 된 그릇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시작은 마을 가꾸기다. ■ 주민 뭉치니 도시도 확 바뀌네 흔히 국민의식이 주민의식보다 상위개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물론 성숙한 국민의식은 나라를 변화시키는 원천이 된다. 하지만 국민의식만으로 마을이나 동네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지역사회에서 국민의식은 ‘심정적 동조’, 주민의식은 ‘실천적 행동’이라는 차이로 나타난다. 대전 서구 둔산동과 광주 북구 문화동·오치동을 들여다봤다. ●둔산동, 사회지도층 참여 저조가 ‘옥에 티’ 대전 둔산동은 공영개발 방식으로 조성된 신도시 지역으로, 대전정부청사와 대전시청 등 굵직굵직한 기관들도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둔산동 일대는 대전에서 손꼽히는 부촌이며, 이곳에 위치한 M아파트도 경제력을 갖춘 중산층 이상이 모여살고 있다. 하지만 이웃간에 단절되고 삭막한 여느 아파트와는 차이가 있다. 다양한 형태의 지역공동체 활동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부터 M아파트를 포함한 인근 5개 아파트단지는 뜻을 모아 요일마다 번갈아 알뜰시장을 열고 있다. 수익금은 노인층이나 불우이웃 등을 돕는데 쓰고 있다. 지난 10월에는 둔산동 일대 13개 아파트단지의 난방 방식을 중앙공급식에서 지역난방식으로 바꿔 에너지 절감은 물론, 대기오염 등 환경문제도 일정부분 해소했다.‘담장 허물기’와 휴일에는 아파트단지 사잇길에 차량을 통제하는 ‘차없는 거리’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참여는 극히 저조한 수준이다.M아파트에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전지역 공공기관장과 대학 총장, 전 국회의원, 의사와 변호사를 비롯한 전문직 고소득층 등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한 주민은 “가끔 행사 때만 얼굴을 비출 뿐, 사는지 안 사는지도 모를 정도”라면서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시간이 많은 사람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같아 안타깝다.”고 꼬집었다. ●문화·오치동, 참여율 높여야 동네가 바뀐다 광주 북구는 지난 2000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운동’을 시작했다.6년이 지난 현재 마을에서 콘크리트 담장이 사라지고, 불법 주차와 쓰레기 더미로 너저분하던 골목길은 꽃과 나무가 심어진 녹지공간이나 주민쉼터로 탈바꿈하고 있다. 오치1동의 경우 금호아파트 주민들은 쓰레기가 쌓인 채 방치됐던 아파트 담장을 허물어 ‘만남의 광장’을 조성했다. 쓰레기장이 이웃간 소통의 장으로 변신한 것이다. 우미아파트 주민들은 담장을 없애는 대신 화려한 동양화를 그려 넣었다. 우산중학교 정문 쪽엔 마을의 유래를 바로 알리자는 취지에서 ‘오치골 옛터의 거리’가 조성됐다. 오정초등학교 담장 100여m를 따라 ‘동화의 거리’도 꾸며졌다. 특히 오치1동 주민들은 ‘오치골 소식지’를 발행, 동네가 바뀌어 나가고 있는 소식을 이웃들에게 꼼꼼히 알리고 있다. 문화동 주민들은 각화약수터길 주변에 스스로 선정한 시와 그림을 타일에 새긴 뒤 담장에 붙여 ‘시화(詩畵)의 마을’로 꾸몄다. 집 앞에 내건 문패에는 이름 석자 대신 ‘행복이 가득한 집’,‘사랑이 넘치는 안식처’와 같은 글귀가 자리잡고 있다.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운동이 성공한 배경은 의외로 단순하다. 바로 주민들의 참여다. 운동은 지역별로 주민들이 마을 가꾸기나 생활편의시설 확충 등을 위한 추진 목표를 세우면 구가 예산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주민들이 직접 공모를 통해 구체적인 사업을 선정하고, 대상사업 확정에 앞서 주민설명회를 거치는 등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진행됐다. 구에서도 주민자치전담팀을 신설하고,‘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조례’를 제정하는 등 적극 지원했다. 구청 관계자는 “주민들의 참여가 전제됐을 때 마을이나 동네가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주민의식은 바로 지역에 대한 관심과 참여”라고 강조했다. 글 광주·대전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흉물’가꾸니 ‘명소’로 둔갑했네 애초부터 지역 이미지를 갉아먹는 ‘흉물’은 없다. 차츰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관리의 ‘사각지대’가 돼 흉물로 낙인 찍히는 것이다. 주민들의 관심 여부에 따라 흉물이 명소로 둔갑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충북 제천시 백운면 덕동리 덕동산촌마을, 청원군 문의면 소전1리 벌랏한지마을, 청주시 흥덕구 평동 전통떡마을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화전 흔적도 가꾸면 문화가 된다 덕동산촌마을은 60∼70년대만 해도 150가구 1000명 이상이 모여 사는 제법 융성했던 화전민 부락이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정부의 화전민 이주정책으로 지금은 70가구 140명이 고작이다. 게다가 65세 이상 노인층이 전체 주민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연간 3만명 정도가 인근 덕동계곡을 찾고 있지만, 주민들의 주소득원은 여전히 약초·산초 재배이다. 마을을 들어서면 울창한 침엽수림 사이로 듬성듬성 조성된 낙엽수림이 과거 화전이 번성했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주민들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됐다. 이문수 이장은 “화전민의 아들, 딸로 태어났음에도 정작 화전 문화와 흔적들을 30년 가까이 방치하다시피했다.”면서 “귀틀집과 움집 등 전국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는 화전 문화를 보존하는 게 마을 가꾸기이자 뿌리찾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덕동산촌마을 인근에는 일제 당시 채굴이 이뤄졌던 금광 4곳이 있다. 주민들은 폐금광 활용 방안을 찾기 위해서도 머리를 맞대고 있다. ●개발제한, 불편함을 이점으로 벌랏한지마을의 경우 지난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농지 대부분이 수몰됐다. 마을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각종 개발도 ‘올스톱’됐다. 한지의 원료인 닥나무가 잘 자라는 환경 덕택에 주민들은 70년대까지 한지 생산에 주력했지만, 이마저도 한지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손을 뗐다. 이후 담배와 양잠, 고추 등으로 작물 전환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100가구에 육박하던 가구 수도 30여가구로 줄었다. 김장배 이장은 “30년 가까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환경과 조화된 마을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면서 “없고 불편한 게 많다고 불평만 하는 게 아니라,‘청정지역’이라는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을 주민들은 지난해부터 환경훼손을 최소화하는 대신 소득을 높일 수 있는 방안으로 한지를 테마로 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김 이장은 “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이 체험프로그램보다는 오히려 잘 보존된 자연환경에 깊은 인상을 받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마을가꾸기,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전통떡마을 인근에는 널리 알려진 ‘청주 가로수길’이 있다. 가로수길은 지난 1952년 4.5㎞ 구간에 플라타너스 묘목 1600그루를 심은 게 시작이었다.50년이 넘은 지금 가로수길은 영화촬영지 등으로 유명세를 얻고 있다. 지난달에는 ‘제1회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지역자원 경연대회’에서 당당히 도로 부문 1위도 차지했다. 쌀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전통떡마을도 늘어나는 방문객의 발길을 마을까지 유도하기 위해 2000년부터 떡을 만들기 시작했다.2004년에는 영농법인으로 등록까지 마쳤다. 이곳에서 만드는 전통떡만 구름떡과 쇠머리떡, 직지떡, 인절미, 쑥개떡, 기주떡 등 20여종에 이른다. 홍순주 영농법인 대표는 “시중에서 유통되는 떡에 비해 가격경쟁력에서 뒤져 대량 판매에는 어려움이 있다.”면서 “하지만 방문객뿐만 아니라, 전자상거래를 통한 주문생산도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청주시는 오는 2009년까지 가로수길을 확장해 자동차와 보행자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꾸민다는 계획이다. 가로수길의 변모에 발맞춰 마을도 ‘진화’해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글 청주·제천·청원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우토로의 꿈’ 끝내 이루지 못하고…

    일본 속 마지막 조선인 마을이자 일제 강제징용인 집단촌인 ‘우토로마을’의 남성 최고령자인 최중규(90) 옹이 지난 1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21일 재외동포 인권단체인 지구촌동포연대(KIN)에 따르면 최옹은 지난해 7월 노무현 대통령에게 ‘철거 위기에 놓인 일본 우토로마을을 지켜달라.’는 탄원서를 보내는 등 우토로마을 살리기에 헌신해 왔다.최옹은 최근까지 일본인과 재일교포들이 함께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투쟁을 벌여 왔다. 우토로 마을은 일본 교토 우지시 우토로 51에 위치한 마을로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1년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위해 조선인 노동자 1300여명을 강제 징용해 집단 합숙시켰던 마을로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형편이 어려웠던 200여명은 이곳에 정착했다. 대부분 양철지붕을 얹고 철판들을 이어 붙인 낡은 판자촌을 형성해 살아왔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이 땅이 닛산차체주식회사로부터 전매됐고 토지를 사들인 부동산회사가 주민들의 강제퇴거 작업과 소송을 시작했다. 최옹은 일제가 한창이던 1942년 후쿠오카의 탄광에 강제동원됐다가 1967년 우토로로 이주해 건설 노동자로 일해왔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화성시에 ‘효 역사공원’ 조성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와 융·건릉 일대에 ‘효’를 주제로 한 역사공원이 조성된다. 도는 21일 대한주택공사가 화성시 태안읍 화산동 일대 118만 8000㎡에 추진 중인 태안3 택지개발지구내 일부 토지를 매입, 역사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도가 매입할 토지는 문화재인 용주사와 융·건릉 주변에 위치,2층 이하 주택만 건설할 수 있는 단독주택용지(9만 4530㎡)로 주공은 현재 토지보상과 주민이주, 건물철거작업을 완료한 상태다. 도는 주공으로부터 해당 토지를 매입한 뒤 도가 인근에 건립 예정인 효행원 부지 3만 3000㎡와 주차장 용지 등을 합쳐 모두 16만여㎡ 규모의 역사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홍어의 고향’ 영산포아리랑

    ‘홍어의 고향’ 영산포아리랑

    뱃길마저 끊긴 저문 강은 또 얼마나 쓸쓸한가. 여린 물의 속살을 날선 갯바람이 할퀴는 겨울, 무량했던 옛날의 풍요는 간 곳 없고 오로지 쇠락의 적막에 몸을 떠는 강. 그래서 사는 일 숨가쁜 사람들이 찾아와 남몰래 마음을 풀어놓는 묵시의 강. 사람들은 그 강을 영산강이라고 추억했고, 근대를 지나면서 그 강에 기대어 살집을 늘려온 나주의 정체를 보고는 ‘전라도 다운 것의 상실’이라며 아쉬워 했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전라도’라는 권역 명칭이 전주와 나주의 머릿글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조선시대 때 지금의 도청 격인 나주목이 설치돼 있었던 그 나주와 영산강은 따로 떼어 말하기 어렵다. 곡창의 기능을 말하지 않더라도 나주가 나주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영산강에 기대어 터를 잡은 까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주를 속속들이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 침묵의 강 홍어가 깨우다 영산강 하구언이 건설되면서 강의 물줄기를 막아 동양 최대의 담수호인 영산호를 만들면서 그 옛날 조운선이 드나들었던 ‘전라도의 대표 포구’ 영산포는 지금 거룻배조차 사라진 침묵의 강으로 변했고, 남도의 물산이 모여 흥청거리던 물길은 강바닥을 드러낸 채 ‘개발’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 병증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영산강에 젖줄을 대고 살아 온 수많은 사람들이 “옘병할 하구언 땜시 못살겄다.”며 영산강 뱃길 복원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을까. 지금 나주와 영산강의 옛 영화를 간직한 것은 오로지 ‘홍어’뿐이다. 이제는 전국구 음식이 되어버린 홍어. 나주와 영산강을 거치지 않고는 그 홍어 식도락의 대표격인 홍탁삼합을 설명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바다 대신 강과 짝을 이룬 ‘영산포 홍어문화’를 의아해 한다. 거기에는 내력이 있다.1363년(고려 공민왕 12년) 당시 조정은 왜구가 극성을 부리자 흑산도에 사는 어민들을 영산강 하류의 남포, 즉 지금의 영산포로 강제 이주시키는 공도(空島)정책을 폈는데, 그 이주민들이 홍어를 먹기 시작하면서 ‘영산포 홍어’의 전통이 시작됐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설도 있다. 신현만 나주시청 관광기획팀장은 “당시 공도정책으로 이주해 온 주민들이 살았던 섬이 흑산도 인근 영산도여서 그들의 집단 거주지를 영산포라고 불렀으며, 그들에 의해 홍어문화가 시작됐다는 설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후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가 뱃길로 호남 물산의 집산지인 나주 영산포에 닿는 5∼6일 동안 자연스레 숙성돼 지금처럼 ‘썩혀 먹는’ 홍어문화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 영산포구에 홍어음식점 30~40개 그 홍어가 나주의 오랜 잠을 깨우고 있다. 나주시 영산동 옛 영산포 포구에 조성된 ‘홍어의 거리’에는 줄잡아 30∼40개 홍어 음식점이 늘어서 나주와 영산포의 부활을 알리고 있다. 초행길의 나그네라도 이 거리에 들어서면 영산포와 홍어문화의 상관성을 알아채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옛적의 번화와 번성의 기억이 고스란히 홍어문화에 배어나는 곳이다. 영산포 홍어문화를 일군 양치권(영산강홍어 대표) 전 선창번영회장은 “홍어가 국민 음식으로 자리잡으면서 하구언으로 물길이 막혀 쇠락의 길을 걸었던 나주와 영산포 홍어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다행스럽다.”며 “지금이야 목포나 흑산도는 물론 전국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됐지만 만약 원조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면 영산포와 ‘영산포 홍어’는 항상 기억되고 또 회자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장한 영산강의 물길 위로 미칠 듯 붉은 노을이 사위고 있었다.‘가장 전라도답다.’는 강, 그 강에 검붉은 노을이 비끼고, 끝없이 피어나는 물안개 속으로 임방울의 절창 ‘함평천지’가 나즈막히 깔리고 있었다. # 여행정보 시가지 곳곳에서 커다란 걸개그림으로 만나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주몽)과 소서노 캐릭터가 이곳이 인기 사극 ‘주몽’의 촬영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나주배는 여전하며, 목사고을답게 나주목 객사였던 금성관, 목사내아와 정수루, 벽류정, 나주읍성의 동점문과 남고문이 남아 옛 영화를 증언하고 있다. 광주와 화순, 영암, 함평, 무안과 인접한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로 해마다 천연염색문화제가 열리고 있으며, 영산강 물길을 따라 국내 유일의 강 등대인 영산포 등대와 삼한지 테마파크, 나주호관광단지 등이 있다. 골드레이크CC와 나주CC가 있어 여가문화를 한층 풍요롭게 한다. 항공편은 광주공항을 이용하면 되며,KTX를 이용하면 서울에서 나주역까지 2시간55분이 소요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려면 하행선 무안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곧장 왼쪽으로 꺾은 뒤 국도를 따라 20여㎞를 가면 나주시가지와 영산포에 다다르게 된다.
  • ‘서해안의 베니스’가 열린다

    ‘서해안의 베니스’가 열린다

    서해안 최고의 해양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는 충남 태안 안면도 국제관광지개발사업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20일 충남도에 따르면 전날 밤 도청에서 교수, 공인회계사, 도의원 등 11명으로 구성된 투자유치위원회(위원장 이완구 지사)를 열고 심사위원 99%의 찬성으로 인터퍼시픽컨소시엄을 민간사업자로 선정했다. 이로써 18년간 표류하던 충남도 최대 관광지 개발사업이 제 궤도를 찾게 됐다. 이 컨소시엄은 에머슨퍼시픽 45%, 삼성생명보험 10%, 모건스탠리 45% 등의 지분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충북 진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에머슨퍼시픽은 경남 남해 힐튼리조트를 최근에 오픈했고 금강산에 아난티리조트를 추진하고 있는 국내 최대 골프레저 리조트업체다. 모건스탠리는 1969년 설립된 미국의 세계 최대 부동산 투자회사이다. 이 지사는 “인터퍼시픽컨소시엄은 외자유치 방안이 구체적인 데다 개발계획도 친환경적이어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며 “국내외 자금조달 능력도 매우 우수하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 컨소시엄은 2014년 8월까지 총 7408억여원을 들여 안면읍 승언·중장·신야리 일대 꽃지해수욕장 주변 115만 4000평을 퍼블릭 씨사이드 골프&빌리지, 리조트&스파, 기업마을, 베니스파크 등 4개 지구로 개발한다. 퍼블릭 씨사이드 골프&빌리지에는 각각 18홀과 9홀짜리 골프장을 비롯, 골프연습장, 골프하우스와 골프텔, 골프숍 등 ‘골프 마을’로 만들어진다. 리조트&스파에 타워콘도, 리조트호텔, 고급빌라, 해변상가와 워터파크가 조성되고 기업마을은 각종 기업연수원과 주민이주단지 등으로 꾸며질 계획이다. 베니스파크는 대형 아쿠아리움과 타워콘도, 상가시설이 들어선다. 이탈리아 베니스를 연상케 하는 운하, 산책로, 수상스포츠시설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아쿠아리움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해양생태 환경학습 장소로 활용될 예정이다. 하지만 당초 추진이 검토됐던 카지노와 병술만에 유람선을 띄우는 것은 법적인 허가절차와 환경문제 등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관광지 개발대상 부지는 도유지 86.5%, 국유지 8% 등으로 돼 있다. 도는 컨소시엄에 이 부지를 매각할 계획이다. 현 시세는 평당 50만원 정도를 호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면도 국제관광지 개발사업은 1989년부터 시작돼 재미교포와 국제적 무기거래상인 카쇼기의 자본유치가 추진되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하면서 지금까지 표류해왔다. 또 안면도 개발사업과 관련, 초기부터 환경단체 등의 반발이 제기돼왔다. 이번 재심의에서는 인터퍼시픽컨소시엄이 지난 7월 1차심의에서 1위를 한 안면도 오션캐슬 운영업체 등으로 구성된 대림오션캔버스컨소시엄과의 경쟁에서 예상을 뒤엎고 선정됐다. 당초 1차심의에서는 4개 컨소시엄이 참여했으나 2개는 중도에 참여를 철회했다. 인터퍼시픽컨소시엄 관계자는 “해안선과 주변경관이 조화를 이루는 스카이라인을 만들고 해안사구 등 훼손된 생태환경 복원과 동식물 생태통로 개설 등을 통해 안면도를 첨단 휴양시설과 자연환경이 공존하는 국제수준의 관광지로 개발하겠다.”고 말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미아뉴타운 내년 3월쯤 착공

    서울시내 2차 뉴타운인 미아뉴타운의 재개발사업이 본격화된다. 19일 서울시에 따르면 미아뉴타운 가운데 처음으로 재개발 제6구역 관리처분계획이 15일 인가가 났다. 관리처분계획 인가는 재개발 사업 착공 전 거치는 마지막 행정절차로 주민 이주와 기존 건물 철거 등을 마치고 내년 3∼4월쯤 착공에 들어갈 전망이다. 제 6구역은 강북구 미아동 1268의 1 일대 7만 7500㎡(2만 3443평) 규모로, 용적률 230.89%에 최고 24층, 평균 15층 이하의 공동주택 22개동 1247가구가 들어서게 된다. 시는 조만간 6구역 내 기존 노후·불량건축물 589동에 대한 이주 및 건물 철거 작업을 끝내고 내년 3∼4월쯤 미아 제12구역과 함께 합동 기공식을 가질 계획이다. 미아뉴타운은 전체 3개 구역, 총면적이 60만 6000㎡(18만 3000평)로 지난해 3월 개발기본계획이 확정됐고 올 6월에는 미아 5동이 뉴타운지구에 추가됐다. 미아뉴타운 내 나머지 2개 구역 가운데 제 12구역은 이달 중 관리처분계획 인가 예정이고, 제8구역도 현재 조합설립 인가를 신청한 상태다. 시는 미아뉴타운 개발에 맞춰 삼양사거리 지구단위계획구역 내 이면도로개설사업은 2008년 12월, 길음뉴타운 경계부분의 산책로 조성사업은 2007년 12월 각각 준공키로 했다.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퍼도 퍼도 줄지않는 사랑

    “지난 여름부터 쌀 걱정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광주시 남구 월산 5동 김모(75)할머니는 일주일에 한번꼴로 동사무소에 들러 이곳에 설치된 ‘쌀뒤주’에서 쌀을 퍼간다. 김씨는 “처음엔 쑥스럽기도 했지만 동사무소 직원들의 따뜻한 배려로 요즘은 맘놓고 쌀을 가져 간다.”며 “어려운 사람들을 남몰래 도와 주는 이들이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홀로 살고 있는 박모(71) 할머니도 서구 금호1동 사무소에 설치된 뒤주에서 쌀을 가져다 끼니를 잇는다. 박씨는 자녀들이 경제적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기초생활 수급자’로 지정받지 못해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끼니 걱정 없이 사는 덕분인지 고달픈 일상이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광주지역에서 이같은 현대판 ‘운조루(雲鳥樓) 뒤주’가 퍼져 가면서 세밑 훈훈함을 더해 주고 있다. 운조루의 주인이 뒤주를 곳간 뒤채에 마련해 쌀을 퍼가는 사람과 얼굴을 대면하지 않도록 배려한 점도 그대로 이어 받았다. ‘사랑의 쌀뒤주’는 지난 1월 광주시 서구 금호 1동 사무소에 처음 설치됐다. 뒤주 앞엔 ‘미안해 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말고 따뜻한 밥을 지어 드세요.’란 안내문이 붙었다. 일주일 만에 참여자가 100명을 넘어섰다. 이어 다른 동사무소로 이 운동이 확산됐고 부녀회·청년회 등 주민 자치조직과 독지가의 도움이 이어졌다. 현재 시내에는 ▲주월동 ▲백운 2동 ▲월산 5동 ▲금호 1동 ▲화정 3동 등 모두 5개 동사무소에 뒤주가 설치돼 있다. 뒤주의 운영 방식도 바뀌고 있다. 처음에는 동사무소에서 설치·운영을 맡았지만 지금은 어려운 이웃의 형편을 공무원들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는 주민들이 앞장서고 있다. 남구 월산 5동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사랑의 쌀 나눔 운영위원회’ 구성을 추진 중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영업자·사업가 등 주민들이 쌀을 직접 구입해 뒤주에 붓거나 매달 5만∼10만원의 후원금을 내고 있다. 현재 월산 5동에서는 매월 20㎏들이 쌀 6∼8가마가 소비된다. 한달 40∼50명의 주민이 이용하고 있다. 남구는 이들 뒤주를 ‘효사랑 나눔의 가게’로 이름 붙이고 독지가의 참여확대에 나섰다. 서구 화정 3동에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동사무소 직원들이 직접 찾아가 쌀을 건네주고 있다. ■ 운조루의 뒤주는 조선 영조 52년(1776년) 낙안군수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의 운조루 곳간에 놓인 뒤주를 일컫는다.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 ‘누구든 마음대로 쌀을 퍼갈 수 있다.’는 의미의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가 씌어 있다. 주인은 이 통나무 뒤주를 곳간에 놓아 편안한 마음으로 쌀을 퍼가도록 배려했다. 주인은 매월 말 뒤주를 열어 보고, 쌀이 남아 있으면,“덕을 베풀어야 집안이 오래간다. 당장에 이 쌀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눠 줘라.”며 며느리에게 호통을 쳤다고 전해진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12) 전남 신안군 암태면 당사도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12) 전남 신안군 암태면 당사도

    목포에서 직선거리로는 불과 20㎞이지만 뱃길로 2시간30분이 걸려 도착한 전남 신안군 암태면 당사도. 겨울의 찬 바닷바람이 배에서 내린 몇 안 되는 방문객을 종종걸음치게 한다. 면적은 4.38㎢, 둘레라고 해봐야 채 9㎞가 안 된다. 그나마 최근에는 가구 수가 줄어 학생이 있는 가구가 이주해 오면 주택개량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할 만큼 작고 외로운 섬이다. 물이 귀하다 보니 식수도 마을 뒷산 정상부근에 파 놓은 인공저수시설에서 받은 빗물을 사흘에 한번 꼴로 공급받는다. 주요한 생업은 김 양식업. 일제 시대부터 시작한 김양식으로 한 때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는 말이 돌 정도로 호시절을 구가했지만 다른 지방의 김양식업이 성행해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시세가 폭락했다. 그러다 보니 빈집들이 하나둘 늘어나 이제 60여호에 주민 120여명 정도만 남았다. 그래도 주소득원은 여전히 김 양식업. 섬 대부분이 김발로 둘러싸여 있다.35년째 김발을 손질하고 있는 이상백(53) 이장은 바닷가의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김 자랑을 멈추지 않는다.“당사도 김은 전국에서 최고입니다. 다른 곳에선 김이 물에 잠겨서 자라는 부류식이지만, 여기서는 일정한 시간 햇볕을 받을 수 있는 지주식으로 재배해서 맛과 색깔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됩니다.” 바닷가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암태 초등학교 당사도 분교에서는 섬에서 유일한 학생인 김정재(12)군이 선생님과 마주보며 대금 연주를 하고 있었다. 성만 알려줄 뿐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는 30대 초반의 오 교사는 “마을 사람들이 학교일에 적극적이고 애정과 관심이 높다. 무엇보다도 학교가 살아 남아야 섬도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학교 발전을 간절히 기원한다.”고 했다. 오 교사는 정재군에게 사회성을 길러주고 어휘력을 늘려주기 위해 신문을 읽히고 운동도 함께 한다. 학교는 주민들의 복사나 팩스 이용 및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는 공동의 사무공간이다. 장래 꿈이 컴퓨터 기술자인 김군에겐 친구가 없다. 그래서 “한 달에 두 번씩 본교가 있는 암태도로 가서 받는 협동수업이 기다려진다.”며 외로움을 표현한다. 최근 신안군은 당사도 분교에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학생이 이주하는 가구에 주택개량 자금을 지원하고, 소득원개발을 위해 8억원을 투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6가구가 지원을 하였고 지금도 계속 모집중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외지인의 발길이 잦아졌다. 마을의 반대편 방죽골에는 이순신 장군이 열두 척의 전함으로 명량해전을 치른 후 팠다는 우물이 있어서 가뭄에도 항상 샘물이 솟았다지만 이젠 제멋대로 자란 잡목으로 찾아갈 길조차 없다. 이름에 모래사(沙)가 들어 있을 정도도 모래가 많은 섬이었지만 과도한 모래채취로 검은 바위가 백사장 위로 흉칙하게 드러나 있어 당사도(唐沙島)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한다. 외로운 섬의 삶은 힘들고 척박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어 온기를 불어넣는다. 청각 장애인이면서도 ‘당사도의 맥가이버’인 부권수(45)씨다. 마을의 농기계나 선박, 가전제품 등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마을에서 김 양식에 사용하는 배도 부씨가 직접 만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소소한 민원 때문에 농사와 김양식에 지장을 받지만 “그래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고맙기만 하다.”며 싱글벙글이다. 청각 장애인인 아내와 항상 웃는 얼굴로 사는 그는 나보다 이웃이 먼저이고, 없이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만간 입주할 도회지 사람들과 당사도 개발계획이 주민들에게 진정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더욱이 내년말 목포∼압해도간 연륙교가 개통되면 20여분 만에 당사도에 이를 수 있다니 도시인들의 거친 발길에 자연 경관이 훼손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이 기우(杞憂)이기를 바라며 돌아오는 뱃길을 재촉했다. 사진 글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HAPPY KOREA] 강원지역 4곳 주민활동 탐방

    [HAPPY KOREA] 강원지역 4곳 주민활동 탐방

    과거를 답습하면 미래는 없다. 같은 맥락에서 농촌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농촌이 변화하려면 일거리의 ‘양’을 늘리거나, 생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인 ‘질’을 높여야 한다. 그 밑거름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노력이다. 이같은 변화의 과정을 만들어가고 있는 강원도 산골마을들을 찾았다. ■ “농한기 따로 없어요” “농한기가 뭐이래요?” 겨울은 한가한 농한기가 아니냐는 질문에 순박함이 물씬 풍기는 강원도 사투리로 농담반, 진담반 이렇게 되묻는다.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용탄2리 달뜨락마을 주민들과 평창군 봉평면 흥정리 펜션마을 주민들의 겨울은 농번기 이상으로 바빴다. ●달뜨락마을 주민, 영농자금 ‘소 닭 보듯’ 달뜨락마을은 몇 해 전만 해도 이맘때가 마땅한 할 일이 없는 농한기였다. 마을 주민들의 소득원 가운데 80%는 콩이다. 콩은 5∼6월에 파종해 9월이면 수확이 끝나기 때문에 10월부터 이듬해 이른 봄까지는 별다른 일거리가 없었다. 해발 1500m가 넘는 가리왕산 자락에 위치한 산촌마을이라, 겨울철에는 땔감을 구하러 산을 오르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난 2003년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달뜨락’이라는 상표를 만든 뒤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고철호 당시 이장은 “일반적으로 농촌은 농번기 6개월은 일하고, 농한기 6개월은 쉰다.”면서 “농한기에 술에 빠지거나 씀씀이가 커지게 마련이라, 일거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수확한 콩으로 11∼12월에 메주를 쑨다.2월에는 메주로 간장과 된장 등 장류를 담근다. 메주와 장류는 마을 공동생산·판매시설에서 달뜨락이라는 상표로 판매되며, 수익금은 주민들이 일한 만큼 나눠 갖는다. 예전에는 콩 80㎏ 1가마를 내다팔아 20만원 정도를 버는 데 만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콩 1가마를 메주로 팔면 60만원, 장으로 판매하면 90만원으로 각각 소득을 높일 수 있다는 비결을 터득했다. 농사일이 한가해지는 여름철에는 도시민들을 위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 매년 5000명 정도가 마을을 찾는다. 마을 근처에는 국내 두 번째로 매장량이 많은 정선탄전이 있다.80년대에는 달뜨락마을을 포함한 인근 5개 마을에 3000명 가까이 살았지만, 탄전이 폐광된 현재 주민 수는 채 1000명도 안 된다. 유독 달뜨락마을은 최근 10가구 30명가량 늘었다. 농한기, 농번기 구분이 사라진 덕분이다. 고씨는 “우리 마을에 배정되는 연간 1억원의 영농자금을 예전에는 서로 빌리겠다고 다툼이 일었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 남는다.”면서 “마을의 소득이 높아지면서 돈을 빌려가라고 먼저 제안하는 금융기관도 있지만, 오히려 주민들이 관심조차 갖지 않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달뜨락마을 주민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다. 마을 공동기금을 활용해 ‘생약초체험관’을 짓고 있다. 지천에 널려있는 황기, 더덕, 도라지 등 약초와 산나물을 새로운 소득원으로 만들겠다는 취지다. ●펜션마을 주민,“시골에서 농사만 지어야 하나요?” 흥정계곡을 끼고 6㎞ 구간에 길다랗게 위치한 흥정리 펜션마을은 옥수수와 감자, 배추 등이 주산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 122가구 가운데 ‘손에 흙을 묻히지 않는’ 농가가 전체의 40%가 넘는 49가구다. 더이상 농사 지을 힘이 없는 노령층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40세 미만 젊은층이 전체 주민의 절반에 육박한다. 산골짜기와 계곡 사이사이에 농업기반 시설을 늘리는 노력 대신, 흥정계곡이라는 자연자원과 연계한 펜션 등 체험관광시설을 확충하는 데 주력한 결과다. 현재 마을에는 모두 80여개 펜션이 자리잡고 있다. 모양과 형태도 제각각이어서 전국적으로 손에 꼽히는 펜션단지로 자리잡고 있다. 하룻밤에 600여 가족이 동시에 머물 수 있다 보니, 지난해 방문객만 17만명에 이른다. 김형일 이장은 “주민들의 평균 소득은 연간 2000만원 안팎이지만, 상위 20%의 소득은 5000만원 이상”이라면서 “상위 소득자들은 농업과 펜션을 겸업해 사계절 쉬지 않고 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주민간 소득격차가 심해지고 있어 이를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글 사진 정선·평창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부가가치 높였어요” “부가가치를 높여야죠.” 인구와 소득 감소로 신음하는 우리 농촌의 살 길은 없느냐는 질문에 대답은 의외로 명쾌하고 간결했다.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삽교1리 산채마을 주민들과 홍천군 화촌면 외삼포2리 산초울마을 주민들이 몸으로 실천하는 농촌의 나아갈 방향을 들여다봤다. ●산채마을 주민,30~40대 평균소득 7000만~8000만원 산채마을은 당초 해발 700m 고지에 자리잡은 화전민 마을이었다.60∼70년대 정부의 화전민 이주정책으로 250가구 1500명이던 주민 수는 37가구 110명으로 급감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것은 주민들이었다. 주민 수는 줄었지만, 고랭지 배추와 감자 등을 재배했던 농지는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것. 지금은 농가당 경지면적이 평균 2만∼3만평에 달해 주민 모두가 ‘만석꾼’인 기업농 형태가 됐다. 1999년부터는 마을 공동으로 산채작목반을 구성, 산나물을 심기 시작했다. 마을 주변 산에서 생산되는 나물만 취나물과 곤드레 등 13종에 이른다. 더덕과 꿀, 오미자 등 철마다 생산되는 농산물이 수십종에 달할 만큼 생산품이 다양해졌다. 감학석 당시 이장은 “농촌도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해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면서 “주민들끼리 협의를 통해 품목별 생산량을 자율 조정하기 때문에 가격이 폭락해 울상 짓는 일도 줄어들었다.”고 강조했다. 마을이 명성을 얻고 체험시설을 갖추자, 방문객도 증가했다.1999년 당시 한 명도 찾지 않던 이곳에 지난해는 1만명이 다녀갔다. 김씨는 “방문객이 늘면서 직거래가 가능해져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윈-윈’이 가능해졌다.”면서 “특히 산나물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태기산채영농조합’에서 적정 가격으로 일괄수매하기 때문에 중간도매상들이 가격을 낮추고 폭리는 취하는 횡포도 차단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평균 소득은 3000만원 안팎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균등 분배하는 체험마을 운영수익 등 가구당 500만원 정도의 농업외소득도 포함돼 있다. 특히 30∼40대 젊은층의 평균 소득은 7000만∼8000만원을 웃돈다. 마을 땅의 30% 정도를 외지인이 사들였을 정도로 여느 농촌의 ‘팔리지 않는 땅’과도 거리가 멀다. 김씨는 “마을의 발전된 모습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면서 “하지만 마을이 바뀌기까지 주민들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배워가야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발전 방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초울마을 주민,“생산은 필수, 가공도 필수” 산초울마을은 지난 3월 마을 공동으로 발아현미 작업장을 건립했다. 발아현미는 영양소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발아과정에서 유익한 효소도 생성되기 때문에 친환경 농산물로 떠오르고 있다. 발아현미는 현재 전국적으로 10여곳에서만 생산된다. 농민 입장에서는 굳이 생산물을 바꾸지 않아도 소득을 끌어올리는 수단이 된다. 일반쌀은 80㎏ 한 가마당 16만원 선이지만, 친환경재배를 통해 현미로 팔면 24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 현미를 발아시키면 가격은 70만원으로 껑충 뛰어오른다. 주민 최철수씨는 “앞으로는 발아현미를 이용한 가공식품에 대해서도 연구할 계획”이라면서 “다만 판로 확보에는 아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외부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산초울마을은 갈수록 늘어나는 노인층과 휴경 농지를 각각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묘안’도 짜냈다. 주민 330명 가운데 3분의1 정도인 65세 이상 노인들이 공동으로 휴경 농지를 경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섭 노인회장은 “농사를 안 지으면 농지도 흉물이다.”면서 “수익금은 노인회 운영기금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글 사진 횡성·홍천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부시맨’ 고향 되찾다

    ‘부시맨’ 고향 되찾다

    영화 ‘부시맨’으로 널리 알려진 남부 아프리카의 산(San)부족이 보츠와나 정부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지 4년 만에 고향 칼라하리 사막으로 되돌아가게 됐다. 보츠와나 로체베 고등법원은 13일(현지시간) 산족이 정부를 상대로 2002년 제기한 소송에 대해 원고가 조상 대대로 살던 곳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2만년 전부터 칼라하리 사막에 정착해온 산족은 최근까지도 수렵과 채집 등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보츠와나 정부는 칼라하리 자연보호구역내 동물보호를 이유로 1997년부터 산족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사막 외곽에 학교와 병원시설 등을 갖춘 정착촌을 만들어 산족을 회유하는 한편 사막에 식수 제공을 끊고, 사냥 허가를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이주를 강요했다. 정부의 이주 정책에 떠밀려 새 정착촌으로 옮긴 산족은 1000여명. 벨기에 면적에 해당하는 드넓은 사막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던 이들은 현대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대신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려야 했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알코올 중독과 에이즈에 시달리는 주민들이 늘어나는 등 부작용도 심각했다. 견디다 못한 산족은 결국 소송을 냈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칼라하리 사막에 매장된 다이아몬드 때문에 산족을 강제 이주시켰다는 주장이 영국의 소수부족 보호단체인 ‘서바이벌 인터내셔널’ 등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산족은 최근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전쟁을 다룬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의 주연배우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에게 지원을 요청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날 판결에서 정부와 다이아몬드 업체 드비어스를 둘러싼 의혹에 대해 어떤 근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서구 행동주의자들이 오래전에 사라진 부시맨의 생활양식을 낭만적으로 포장하고 있다.”고 비난해온 정부는 항소 여부를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한국 외국인 고용허가제 더 보완을”

    “한국이 시행 중인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이주자 인권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에는 시기상조입니다.” 지난 5일부터 한국을 방문 중인 호르헤 부스타만테(68) 유엔 이주자인권 특별보고관이 1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방한성과 및 소감 등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 방문이 처음인 그는 지난 일주일간 외교통상부와 법무부, 노동부, 여성가족부, 행정자치부 등 정부부처와 국회, 국가인권위원회, 시민단체 등의 관계자들을 면담하고 주한 외국인 노동자 등 이주자들의 인권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고용허가제가 이주자 이동의 자유를 어느 정도 실현했다고 보지만 제도 자체가 완전히 실행된 것이 아닌 만큼 이주자 인권 문제를 얼마나 해결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면서 “국제결혼도 브로커 수수료 문제 등이 여전히 남아 있어 더욱 개선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이어 “한국 정부가 이주민 인권과 관련,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는 만큼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잘 살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한국 사회는 이주민에게 매우 개방적이고 그들의 권리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고용허가제나 국제결혼 등의 시스템을 더욱 보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스타만테 보고관은 12일 출국, 인도네시아로 떠날 예정이며 각국의 방문 결과를 토대로 이주자 인권상황 보고서를 작성, 내년 3월 유엔 인권이사회와 유엔 총회에 보고할 예정이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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