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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근리대책단 자문위원 6명 위촉

    정부는 29일 노근리사건 대책단 자문위원으로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대장등 6명을 위촉했다.노근리사건 대책단 자문위원회는 노근리사건 진상조사의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구성된 것으로 사건 진상조사 및 처리와 관련해 대책단의 자문에 응하고 관련사항을 정부에 건의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다음은 자문위원 명단. ▲최환(崔桓) 전 부산고검장 ▲이만열(李萬烈) 숙명여대 교수 ▲이원섭(李元燮)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정진성(鄭鎭星) 서울대 교수 ▲현홍주(玄鴻柱)전 주미대사
  • ‘76년 코리아게이트’의 교훈

    최근 간첩혐의로 미 당국에 체포된 로버트 김이 우리 정부에 서한을 보내 구명운동을 호소하고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진상이 새롭게 밝혀짐에 따라 한미관계의 원칙을 재정립하자는 의견들이 많다. MBC-TV는 31일 밤11시30분 방영되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박동선과 코리아게이트’(김윤영 기획 박노업 PD)를 통해 한미관계를 막연한 혈맹에서 냉엄한 국가이익의 충돌로 바라보게 한 이 사건의 의미를 톺아본다. 지난 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지는 한국 정부의 대리인이 미의원 1인당 75만∼95만달러에 이르는 뇌물을 주고 불법로비를 했다고 폭로했고 이에따라 미의회와 법무부 등 5개 기관이 조사에 착수했다.로비스트 박씨를 증언대에 세우는 문제로 양국은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빚었고 박씨와 김동조 전 주미대사를 청문회에 세우는 조건으로 기소면책을 받았다. 제작진은 도미니카 별장에 머물고 있는 박씨를 5시간 넘게 인터뷰했다.여지껏 박씨의 단편적인 폭로는 많이 있었지만 방송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처음이다. 제작진의 결론은장기집권 욕심에 사로잡힌 박정희 정권이 정상적인 외교루트를 배제한 채 중앙정보부와 연계,박씨 등을 내세워 불법로비를 벌인데 비극의 씨앗이 있다는 것이다.김 전대사와 주미공보관장으로 일하다 미국에 망명한 이재현 웨스턴일리노이대학 교수의 증언도 맥을 같이 한다. 박씨는 중정,나아가 청와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그는 “한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중정 요원들과 의견을 나누고 자문하는 정도의 관계였다“고주장했지만 여러 정황과 문서들을 종합할 때 그 이상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제작진의 입장이다. 박 전대통령과도 수시로 만날 수 있다고 큰소리 친 것이 허풍만은 아니라는것. 박PD는 무엇보다 “정권의 음모에 공식외교가 실종됐던 단면을 직시,올바른한미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전제조건들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현재 외교무대에서 소외돼 있을 것이란 짐작과 달리 조지타운클럽을중심으로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었고 최근 부트로스 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과의 친분을 활용,하남환경박람회에 유력인사들을 초빙하는 데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임병선기자 bsnim@
  • 정통부, 해외 주재관 증원 추진

    정보통신부가 ‘정보통신 주재관’의 증원을 추진하고 있다. 지식정보산업의 비중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 경제환경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서다.당장 주재관(4급) 파견이 필요한 지역은 스위스 제네바와 중국,베트남 등 3곳. 정보통신분야가 중점 논의될 세계무역기구(WTO) 뉴라운드 협상이 내년 3월본격화되고 중국·베트남 등 거대 신흥수출시장의 개척을 지원해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한시가 급하다는 것이 정통부의 설명이다.따라서 ITU(국제전기통신연합) 등 국제기구가 모여 있는 제네바와 함께 중국·베트남에 주재관을 보내겠다는 것.중국과 베트남은 우리가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기술인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을 새 이동전화 표준으로 채택해 단말기 및 시스템의 최대수출시장으로 부상해 정부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외교통상부 산하 주재관 정원이 150명으로 대폭 축소돼 임기가 끝난 주재관들이 잇따라 철수하고 있는 마당에 정통부가 유독 증원을 추진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정통부는 현재는 유럽연합(EU·브뤼셀),OECD(유엔 경제협력개발기구·파리)에 4급 직원 2명을 공식 파견해놓고 있다.업무가 산적한 주미대사관에도 부처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정통부는 정원이 아닌 비공식 파견관이 ‘곁방살이’를 하고 있다. 정통부 관계자는 “일정한 정원을 각부처가 나눠갖다 보니 대부분의 부처가 인사적체해소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득권을 내세워 정보통신·환경분야 등 시대변화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할 분야의 주재관 파견이 어려운실정”이라고 말했다.정보통신분야의 경쟁상대인 일본은 현재 35개국에 주재관을 보내고 있다. 조명환기자 river@
  • [문명자 회고록] 비화3共의 실세들(9)陸여사와의 만남

    박정희가 5·16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은 1961년 11월 13일의 일이다.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도착한 박정희는 검은 색 선글라스를 낀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모습이었다.당시 박정희는 바지선도 세우지 않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마치 서울에 처음 올라온 촌사람처럼 잔뜩 경직된 모습이었다.주미대사관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처음으로 그와 악수를 나누면서 내가 말했다. “박 의장님 반갑습니다.그런데…”하니까 옆에 있던 정일권 주미대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문명자 입에서 무슨독설이 나오는가 싶어서였을 것이다.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했다. “색안경을 끼고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만난 것은 큰 실례인데요.자신감이없어 그렇게 한 것 아닙니까?” 정일권 대사가 아연실색해 도중에 내 말을 막으려 했으나 소용 없었다.박정희가 내게 되물었다. “문명자 기자님이라고 그러셨죠? 고맙습니다.제가 깜빡했습니다.그렇게 실례가 됩니까?” “미국에서는 그렇습니다.내일부터는 벗으십시오”.박정희는정일권에게 물었다.“문 기자는 경상도분입니까?” 내가 대답했다.“네,대구입니다” 65년 5월 박정희는 존슨의 초청으로 세번째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육영수여사를 처음으로 동반하고 왔다.그때 주미대사관에서 뷔페형식으로 점심식사가 있었는데 육 여사의 통역관겸 비서인 나은실이 나를 찾아왔다. “육 여사께서 문 기자님을 뵙고싶어 하십니다.잠시 같이 가실까요?” 그것이 나와 육 여사와의 첫 만남이었다.육 여사는 듣던 대로 아주 조신한인상의 여성이었다. “말씀 듣던 거와는 다르네요” “어떻게 다릅니까?” “여성이 기자직에 있는데다 더구나 정치기사를 쓰신다고 해서 저는 ‘문명자기자’ 하면 아주 험상궂고 무서운 분이라고 상상했어요” 쿠데타 직후부터 그 때까지 그의 남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나의 기사를 봤다면 그 편에서 그렇게 상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다 싶었다.육 여사가 또 물었다. “결혼하셨어요?” “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육 여사의 방을 나왔다.그런데 나은실이 뒤쫓아와 나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열어보니 200달러가 들어 있었다.당시 특파원들의 체재비 포함 한달 월급이 200 달러였으니 당시로선 큰 돈이었다.나는다시 육 여사에게 갔다. “저,이 돈 못 받습니다” “이러시면 안되는데….200달러 밖에 안되는 걸요.아이들 선물이라도…” “안되는 건 바로 접니다” 나는 육 여사에게 돈 봉투를 돌려주고 방을 나왔다.이 작은 ‘사건’이 육여사에게 나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긴 듯 했다. 66년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나는 수행기자로 서울에 갔다.그 때 나는돈암동 언니집에 묵었는데 육 여사의 비서 나은실로부터 전화가 왔다.육 여사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취재일정이 바빠 못가겠다고 했더니 나은실이 물러서지 않았다.그녀가 계속 강권하기에 내가 쏘아붙였다.“내가 그 분 보좌관이요?”.안되겠다 싶었던지 나은실이 “잠시 기다리라”고했다.잠시후 육 여사가 직접 전화기에 나왔다. “문 기자님,좋아하시는 근대된장국을 끓여 놓을테니 오세요,우리 같이 점심 먹어요” 하는 수 없이 나는 취재일정을 마치고 청와대로 갔다.가서 보니 육 여사의접견실은 온통 핑크색이었다. “이 방이 원래 온통 핑크색입니까?” “아니예요,미세스 존슨이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번에 핑크룸으로 바꾸었어요” ‘참 세심한 여성이구나’ 싶었다.그러면서도 한 마디 찔러 보았다.“청와대에 오래 계실랍니까?” 육 여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게 어디 우리집입니까?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만 거처하는 곳이지 이곳은 영원한 우리집이 아닙니다” 그 때 나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고 느껴졌다. 육 여사는 내가 일어서려고만 하면 버튼을 눌러 “차 좀 가져오세요”,“수박 좀 가져오세요”해가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보니 이날 저녁 나는 박정희 가족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나는 식탁에서 듬뿍장을 발견하고 반가워서 “어머,딩기장이 있네요?”하자 육 여사가 내게 물었다. “딩기장이라니요?” “햇보리로 만든 듬뿍장을 우리 고향에서는 딩기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박정희가 불쑥 말했다.“경상도 사람 아니면 그 맛 모르지” 육 여사가 웃으며 말했다.“두 분은 통하시네요” 이날식사초대에서 나는 박정희에게 ‘대통령각하’라는 말은 한번도 하지않았다.박정희를 부를 때는 주로 경상도에서 친근한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보이소’ 또는 ‘으요,으요’를 사용했다.그랬더니 박정희가 말했다. “거,수십년만에 으요!,으요! 소리듣네”.그러자 이를 듣고 있던 육 여사가 의아해 하며 남편에게 물었다.“으요!,으요!가 뭐예요?” “경상도 사람이 아니면 이해 못하지”.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면서도 대중앞에 서면 박정희의 목소리는 우렁우렁했다.내성적이면서도 더할 나위 없는 독종.이것이 내가 관찰한 ‘인간 박정희’의 면모였다. 74년 8·15,육 여사가 피격,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가엾은 여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박정희의 독재를 다시한번경고하는 뜻에서 박정희에게 영문으로 된 애도전보를 보냈다.“육 여사에 대한 나의 애도를 받아주십시오.생전에 육 여사가 내게 얘기한 ‘청와대는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합니다.지금이야말로 귀하는 대한민국을,국민을 위해 사임할 때입니다.문(Moon)”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문명자 회고록] 비화3共의 실세들(8) 귀국 기내에서

    69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닉슨 한미정상회담이 끝난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동행 제의를 받아들여 그 일행과 함께 한국에 왔다.출발하는 날 아침 박정희는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아침 먹을 시간도 없는 것 같았다.전세기가 뜨는 미 공군기지 캐슬 에어 베이스로 가기 위해 각료들과 수행기자들이 모두 버스 한 대에 올라탔다.나는 기자들과 함께 앉았는데 앞쪽에 있던 김동조 주미대사가 내 옆으로 와 앉으면서 “우리 얘기 좀 합시다”하는 것이었다.평소 그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나는 일부러 비꼬아 말했다. “아니 저 앞에 부인도 앉아 계신데 왜 이러세요?” 그는 내가 대통령 전세기에 함께 타고 서울로 간다는 것을 알고 대통령에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좀 잘 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참이었다.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무슨 얘긴데요?” “대통령께서 만일 이 실장(이후락)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물으시면 나는절대로 이 실장 측근이 아니라는 것만 전달해 주시오” 나는 내심 ‘아니 이 사람이?’ 싶었다.김동조는 이후락의 사람이었다.이후락 맏아들의 결혼식을 자신의 대사관저에서 치러주었다.그런 사람이 자신과이후락이 관계가 없다고 말해 달라니‘이제 이후락의 권세가 끝난 모양이다’싶었다. “이번에 HR(이후락)이 목 달아납니까?” 그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이 자기 부탁만 되풀이했다(실제로 3선개헌후이후락과 김형욱은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각각 물러났다).나는“김 대사께 들은 이야기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고 말하자 그는 “아이고,그러면 안되고…”하며 당황해했다. 김동조는 원래 일제때 일본 규슈(九州)제국대학을 나와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일제때 관리를 지내기도 했다. 일본제국주의에서 이승만에게로,이승만에서 박정희에게로,거기서 다시 이후락에게로 이어진 김동조의 ‘줄서기’는 또다시 누구에게로 계속될지.제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약속을 지키마”하고 중얼거렸다. 전세기에 올라 나는 다른 기자들과 함께 비행기 꼬리부분에 있는 수행기자실에 앉아 있는데 육 여사의 통역관 겸 비서 나은실이 찾으러 왔다. “각하께서 문 기자님을 접견실에 앉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박정희 부부와 몇 시간동안 마주보고 앉아 가게 되었다.얼마뒤 식사가 나왔다.포크,나이프를 갖다놓는데 보니 물론 도금을 한 것이겠지만온통 황금색으로 번쩍번쩍 한데 대통령 휘장이 박혀 있었다.내가 말했다.“이거 하나 째빌까요(슬쩍 집어넣는다는 경상도 사투리)? 이런 걸로 밥먹기는제 일생에 처음인데…” 육 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다 세어 놓았을 거예요” 이번에는 메뉴판을 가지고 오는데 보니 그것도 대통령 휘장을 금색으로 박아 멋지게 만든 것이었다. “그럼 여행기념으로 이거 하나 주십시오”.그러자 박정희는 메뉴판에 ‘문명자여사를 위하여, 박정희’라고 쓰더니 나에게주었다.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오빠와 박정희가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다. 박정희도 오빠를 기억하고 있었다.세상은 이렇게 좁은 것이었다.이야기 중에 김동조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나는 “세상에 별 웃기는 일도 많습니다”하고는 버스안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했다.그말을 들은육 여사는 한숨섞인 소리로 “아휴”했다. 식사를 마치고 박정희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무는데 역시 신탄진이었다.칠이 벗겨진 지포 라이터를 쓰고 있었다.미국에서 지포 라이터는 주로 GI(미군병사나 하사관)들이나 쓰는 것이었다.그래서 물었다. “왜 하필 사병들이나 쓰는 지포라이터를 쓰십니까?” “옛날에 미국놈에게 선물 받은 것인데 바람이 불어도 불도 안꺼지고 참 좋아요” 박정희는 꼭 ‘미국놈’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그러다가 박정희가 갑자기 물었다. “문 기자는 3선 개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었다.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안됩니다.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로 안됩니다.이승만 박사를 보십시오” 그러자 육 여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박정희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창쪽으로 돌리더니 담배를 피워물고 연기를길게 내뿜었다.그리고 다시 말했다.“그러니까 문 기자는 한국실정을 모른다는 말이요.이번에 가서 한국실정을 좀 잘 둘러보시오” “한국실정이 어떻든 저는 3선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샌프란시스코-서울 간을 나는 14시간의 비행동안 박정희는 비서실장 이후락을 단 한번 불러 물었다. “이 실장,이번 정상회담 성과에 대해 어떻게들 보고 있소?” 나는 이후락이 박정희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나 유심히 보았다.더없이 공손한 태도로,그러나 급한 성질은 어쩔 수가 없었던지 이후락은 말을 더듬으면서 듣기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가가각하,이번 한미정상회담은 모두들 대성공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성공이라니.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변경시키러 닉슨을 만나러 간다고 했지만 닉슨은 전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나는 하마터면 이후락에게 “도대체 누가 그렇게 평가합디까?”하고 소리칠 뻔했다.그 순간 박정희를 힐끗 쳐다보니 그 역시 이후락의 보고가 듣기좋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빅5 공관장 연말 대폭 바뀔듯

    한반도 4강과 유엔대표부 주재 대사 등 이른바 ‘빅5’ 재외공관장이 올 연말 정기인사를 통해 전면 또는 중폭으로 바뀔 전망이다.빅5 공관장 중 일부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데다 내년 16대 총선을 계기로 중진정치인의 공관장 기용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석규(金奭圭)주일대사는 내년이 정년이며,이시영(李時榮)주유엔대표부대사는 공관장 재임 10년 제한규정에 해당된다.올 연말 정기 재외공관장 인사대상이다. 이홍구(李洪九)주미대사는 국제통화기금(IMF)위기 극복 후 물러나겠다는 취임 당시의 약속과 자신을 둘러싼 특임 공관장 정년 논란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연말 퇴임의사를 홍순영(洪淳瑛)외교부장관에게 이미 전달했다는 후문이다.이인호(李仁浩)주러시아대사도 지난 96년 주핀란드대사에 이어 신 정부출범과 함께 러시아로 자리를 옮겨 특임 공관장의 통상 재임기간인 3년을 초과했다. 권병현(權丙鉉)주중국대사도 기로에 놓여있다.여권 핵심부가 주중대사로 직업외교관보다 중진정치인을 선호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빅5’ 후임으로는 주미대사의 경우 외무장관을 지냈던 H씨,주유엔대사엔고위 당국자인 S씨 등이 거론되고 있다.정치인 대사의 경우 16대 총선과 맞물려 1∼2명 입성이 점쳐진다. 오일만기자 oilman@
  • [문명자 회고록] 청와대기자단 추태(7)

    69년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통과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국내적으로는 김형욱이 돌격대장이 되어 학생데모 진압과 야당 의원 매수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이후락 비서실장 주동으로 박정희-닉슨 간의 한·미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었다.69년 6월 김동조 주미대사는 한·미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백방으로 외교교섭을 벌였다.서울에서는 서울대로 이후락이 포터 주한 미 대사를 상대로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측도 박정희의 의도를 이미 훤히 알고 있었다.당시 한국내 3선개헌 반대데모가 국민적 공감대를 얻고 있는 상황이어서 한·미정상회담은닉슨 행정부가 박정희의 3선개헌을 지지한다는 인상을 줄 것이 틀림없었기때문에 닉슨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우방국이며 특히 월남전 참전국인 한국의 대통령이 ‘주한미군 문제’를 의제로 내세워 만나자는데 닉슨으로선 만나주지 않을수 없었다.결국 워싱턴 당국은 한·미정상회담을 열되 장소를 서울측이 요청한 워싱턴이 아닌샌프란시스코 시내의 한 일반호텔로 지정했다.정상회담이 호텔에서 열린 건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미국은 한·미정상회담 장소를 ‘백악관’이란 지명이 전혀 붙지 않은 일반호텔로 격하시킴으로써 미국이 박정희의 3선개헌을지지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한·미 양국 국민들에게 남겨놓으려 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박정희-닉슨 정상회담이 69년 8월 21∼23일 샌프란시스코의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열렸다.나는 워싱턴 주재 각사 특파원 5명과 회담 시작 전날 현지에 도착,서울서 수행한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합류해 취재하게 되었다.박정희-닉슨 정상회담에서도 “수많은 인파가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박 대통령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뻥튀기 보도가 재연되었다. 회담 기간중 샌프란시스코 하늘에 나부낀 태극기는 회담이 열리는 세인트프랜시스 호텔 정문 입구에 하나,거기서 좀 떨어진 한 호텔 게양대에 하나등 총 두개였을 뿐이다. 한편 당시 한국기자들이 기사를 보내는 방법은 하와이에서 열린 박정희-존슨 회담 때와 똑같았다.청와대 출입기자들 거의 모두가 따라왔는데도 기사를보내는 사람은 당번기자 한사람뿐이었다.현지 공보관장이 미국측에 간청해어렵게 한국기자 5명의 좌석을 마련하였는데 막상 만찬회장에 가보니 한국기자단 중에는 신아일보 기자 1명뿐이었다.그래서 “왜 혼자 왔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만찬회 담당 풀기자로 선정돼 혼자 왔다”며 “다른 기자들은쇼핑 나갔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두통에 미열이 있어 호텔 지하의 드럭 스토어(약·화장품 등을 파는 상점)로 내려갔다.그런데 여점원이 나를 보자마자 손을 저으며말했다. “미안합니다만 팬티호스(여자용 스타킹)와 두바리 콜드크림은 더이상 없습니다” “무슨 소리요? 팬티호스는 뭐고 콜드크림은 또 뭐예요?” “당신은 한국서 온 손님이 아닌가요? 어제 한국분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서 우리 상점에 있는 팬티호스와 콜드크림을 모두 사갔는데 손님도 그걸 구하러 오신 줄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한국기자단이 와서 모두 긁어간 것이었다.그들은 호텔상점만이 아니라 그 주변 상점까지 싹 쓸어가버렸다는 얘기였다.나중에 팬암항공측 직원에게 들으니,이후락 비서실장이 팬암항공에서 빌린 박 대통령 전세기가 중량이 초과돼서 비행기가 예정보다 3시간이 지나도 뜨지 못하는 소동이 벌어졌었다고 한다.수행기자,경호원 할 것 없이 텔레비전·냉장고까지 잔뜩 사 전세기에 실었기 때문이었다. 정상회담이 끝난후 박정희 일행은 미국 서부의 유명한 휴양지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이틀동안 휴식을 취했다.나는 동료 H특파원과 자동차를 빌려 타고 그곳으로 향했는데 차안에서 그가 내게 말했다.“제가 이번에 보지 말아야 할 비밀수첩을 봤습니다” 남의 비밀수첩이라는 바람에 궁금해진 나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수첩을 봤는데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우리 회사 기자가 책상위에 놓아둔 수첩을 우연히 봤는데 각처에서 받은 촌지 금액과 명단이 적혀 있지 뭡니까? 이번에청와대 출입기자들 엄청나게 받았더군요” “어느 놈들이 그렇게 줬는데?” “‘김성곤 2,000달러,이후락 1,000달러,강상욱 대변인 500달러,공화당 모국회의원 3명 각각 500달러,2명의 모 장관 300달러씩,모 기업사장 500달러’,이런식으로 적혀 있는데 심지어는 모 야당 의원의 이름까지 있더군요.모두 합쳐 보니 8,000달러에서 1만달러는 되겠던데요? 이번에 온 기자들이 모두그럴 테니 기사를 제대로 쓸 수가 있겠습니까?” 1만 달러라면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다.한국언론계가 이렇게 썩고 있는 것이었다.약삭빠른 야당 국회의원들이 박정희와 자주 접촉할수 있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신경을 쓴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는데 사실이구나 싶기도 했다.밤 9시가 돼서야 겨우 현지에 도착한 나는 호텔 드럭 스토어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며 박정희에게 따졌다. “왜 출입기자들에게 돈을 줘 나라망신을 시킵니까?”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않고 박정희가 내게 말했다.“문기자,내일 모레 전세기 타고 같이 서울로갑시다.문 기자는 한국 실정을 너무 모르는데 이번에 가서 좀 둘러보시오”뜻밖의 이야기에 순간 나는 당황했다.“저는 공짜는 싫습니다” “그러면 비행기 반값만 받을까?” 나는 내심 ‘비행기 타고 같이 가면서 특종 한번 해보자’ 싶어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박정희가 3선개헌에 대해 무엇이라고든 이야기를 할 것 같았기때문이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문명자 회고록] 비화 3공의 실세들 (6)반대자들의 변신

    5·16 직후 워싱턴에 있던 한국학생·지식인·예비역 장성 가운데 5·16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백악관앞에서 연일 ‘5·16 반대시위’를 벌였다.이는 미국정부가 5·16을 인정하지 않도록 압력을 넣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5·16후 ‘한국인 정치망명 1호’를 기록한 내 남편 최동현(崔潼鉉)이었다. 5·16 반대시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로는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리욱(張利郁·작고)박사,주미대사관 참사관 신병현(申秉鉉)전 부총리,최경록(崔慶祿)·강문봉(姜文奉·작고)·김웅수(金雄洙)장군과 국회의원 양일동(梁一東·작고)씨 등이었다.강영훈(姜英勳)전 국무총리는 5·16직후 시골에 있어시위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워싱턴으로 온 뒤부터는 이 모임에 항상 참여했다. 5·16 당시 강씨는 육사 교장이었는데 쿠데타세력이 요구한 육사 생도들의5·16지지 시가행진을 거부했다.강씨와 처남 매부간인 김웅수 장군(전6군단장),장면(張勉) 정권에서 육참총장을 지낸 최경록씨도 5·16을 반대했다.당시 2군사령관이던 최씨는 자기밑에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朴正熙)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하극상 사태를 당한 셈이었다.최씨는 조선일보 등에 “군은 절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글을 발표하는 등 5·16을 반대했다.이 세사람은 5·16이 기정사실화된 후 미국측 배려로 미 국방부 장학생으로 미국에 왔다. 백악관앞 시위에는 워싱턴 조지타운대학에 재학중이던 한국유학생도 많이참여했다.당시 열심이던 학생으로는 오세응(吳世應·전 국회부의장)씨와 한광년이 기억에 남는다.그때 오씨는 워싱턴지역 한국학생회 회장이자 ‘한국인 택시운전사 1호’였다.한광년은 초지일관하지 못하고 70년대 들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넘어가고 말았다. 5·16 직후 박정희는 민주당 정권이 임명한 주미 대사관 공관원들을 모두해임시켜버리고 그 자리를 온통 자신의 수족들로 채웠다.그가 특히 신경을썼던 주미대사 자리에는 당시 하버드대학 청강생으로 있던 정일권(丁一權)을 ‘미국통’이라고 해서 앉혔다. 정일권이 주미대사로 앉게 되자 백악관앞 5·16 반대시위 참여자 중 여러사람이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남편 최동현부터 정일권의 하버드시절 그의 영어가정교사를 했던 사람이었다.영어선생과 학생이 데모대장과 진압대장으로만난 셈이었다.또 강문봉 장군은 정일권과 같은 함경도출신으로 현역때부터형님,동생 해온 사이였다.그런 그가 백악관앞에서 반(反) 5·16 시위를 하니 정일권이 닦달할만도 하였다.그때마다 그는 “골프치러 가려고 운동화 신고 나서는데 최경록이가 와 같이 가자고 해서 할 수 없이 따라갔어요”하는 식의 변명으로 모면하곤 했다. 한편 백악관 앞에서 5·16 반대시위를 벌인 사람들의 그후 행적을 살펴보면 여러가지 생각되는 바가 많다.박정희는 이들을 한 사람씩 회유해 한국으로불러들였다.민주당정권때 주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으로 있던 신병현씨는5·16이 나자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백악관앞 시위에는 그의 부인까지도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이후 미국에서 세계은행 이사로 있던 신씨는 그의 후배 김정렴(金正濂)이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된 후 회유공작에 넘어가 귀국,청와대 경제특별보좌관을 거쳐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최경록장군도 “선배님,그러실 것 없이 한국에 와서 손잡고 일합시다”하는 박정희의 간청에 결국 귀국해 주영대사,교통부장관 등을 지냈다. ‘백악관앞 시위동지’들 중 가장 부끄럽게 처신한 사람은 강영훈이라 하겠다.강영훈도 초기에는 깨끗하고 꿋꿋하게 살았다.그의 부인은 미장원에서 일했는데 독한 파마액때문에 손가락이 모두 헐 지경이었다.그런 생활고 때문이었던지 70년대 들어 강씨는 결국 중앙정보부의 돈으로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것을 설립,미국 언론계·학계에 친박정희세력을 심는 역할을 담당했다. 백악관 앞 시위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5·16을 반대한다고 떠들던 사람들의 행적도 기억해둘 만하다.장면 정권하에서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낸 이석기(李錫基·작고)씨와 나중에 야당 당수를 지낸 이철승(李哲承)씨가 그들이다. 이석기는 주미대사관 국정감사를 위해 워싱턴에 왔다가 5·16소식을 듣고는장리욱 대사 방에 달려와서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대사님,미군을 동원시켜야 합니다”하면서 열을 올렸다.그런데 5·16이 기정사실화되고 미 CIA부장 매쿤의 초청으로 당시 김종필(金鍾泌·현 국무총리) 중앙정보부장이처음 미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주미 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 김동환의 집에서 김종필 부장 환영파티가 열려 다른 특파원들과 함께 갔더니 뜻밖에도 이석기와 이철승씨의 모습이 보였다.나는 이석기에게 대뜸 물었다.“이의원,와이셔츠 걷어붙이고 미군 동원시키라던 분이 웬일이세요? 번지수를 잘못 알고 오신 것 아닙니까?” 이석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했다.“김 부장하고 나는 한 고향 출신이라 옛날부터잘 아는 사이입니다.게다가 김 부장의 춘부장도 제가 잘 알고,김 부장의 형님도 내가 은행에 취직시킨 처지라 먼길 오셨는데 몰라라 할 수도 없고….” 뒷날 김종필이 정계에 진출할때 이석기는 자신의 지역구인 부여를 주고 자신은 서울로 옮겨갔다.그 점에선 이철승도 마찬가지다.그토록 열렬히 5·16을 반대한다던 그가 왜 그자리에 왔었겠는가.정리 정운현기자 jwh59@kdaily. com
  • [문명자 회고록] 비화 3공의 실세들(4) 이후락의 ‘축재’

    이후락은 자신의 아들들을 한국 재벌들과 정략결혼을 시켜 온 나라를 사돈관계로 얽어놓았다.첫째아들은 서정귀(徐廷貴·박정희의 대구사범 동창,전흥국상사·호남정유 사장·작고)의 사위가 됐는데 그는 김동조(金東祚·전외무장관) 주미대사 시절 대사 관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둘째아들 이동훈(李東勳)은 한국화약 창업주이자 전 회장인 김종희(金鐘喜·작고)의 사위가됐다.그래서 이들 사돈기업을 포함해 이후락의 후원으로 기업을 성장시킨 다섯개 기업의 회장을 세칭 ‘이후락의 5인방’이라 불렀다.신진자동차의 김창원(金昌源·작고),극동건설의 김용산(金用山),대농의 박용학(朴龍學),한국화약의 김종희,호남정유의 서정귀가 바로 그들이다. 미국의 석유재벌 칼텍스와 유니언 오일사의 한국내 합작선 선정은 제3공화국 사상 최대의 이권이었다.한국 재벌들이 석유합작선을 놓고 벌인 혈투에서 호남정유와 한국화약그룹이 최후의 승리를 한 데는 이후락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이들 미국의 국제적 석유자본은 기름값을 정부가 결정하는 한국에서 석유공급을 독점함으로써 폭리를 취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박정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그것을 관리한 것이 이후락 일가였다. 내가 이후락 일가 부정부패의 세세한 부분까지를 알게 된 것은 사실 내 친구 ㅊ의 덕분이다.미국유학을 다녀온 그녀는 60년대 이후 이후락과 그의 부인·자녀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쳤다.ㅊ은 후암동 이후락의 집을 드나들면서 접하게 된 기기묘묘한 일들을 나에게 들려주었다.한번은 집주인이 내방객이 두고간 돈봉투를 소파 밑에 밀어넣어 두었다가 깜빡 잊어버려 청소하던 식모가 수백,수천만원짜리 수표를 주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 당시 국민학생이던 이후락의 셋째아들이 ㅊ의 집에 놀러왔다가 ㅊ의 어린 딸에게 돈세는 법을 가르쳐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지폐를 한 장씩 넘기며)“돈은 1억,2억,3억…이렇게 세는 거야” 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평양을 왔다갔다하던 이후락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때 나는 서울을 방문해 ㅊ의 집에 며칠 머물렀는데거기서 영어를 배우러 온 이후락의 부인 정윤희(鄭允熙)와 마주친 적이 있다.ㅊ이 나를 ‘미국친구’라고만 소개했기 때문에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채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그녀는 말끝마다 “우리 남편이 이제 남북통일을시킬 것”이라고 자랑을 하기에 내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정 여사,당신 남편은 도둑놈이오”.그러자 이후락의 부인이 펄펄 뛰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그건 다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세간에서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우리 주인은 절대로 결백합니다.부정이라고는 모르는 분이에요”.이후락 부인과 나는 이후락이 도둑인가 아닌가를 놓고 한참 설전을 벌였다.내가 자리를 뜨자 이후락의 부인이 ㅊ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묻더라고 한다.“워싱턴의 문 기자”라고 하자 다음날 그녀는 돈봉투를 가지고 와서 내미는 것이었다.기가 막힌 나는 그녀에게 목청을 높였다.“나까지 도둑으로 만들려고 이러십니까?” 5공시절 나는 동향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박영옥(朴榮玉)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정축재 액수에서)우리보다 이후락이가 적게 나왔는데 이럴수가 있나. 신군부 놈들이 이후락이는 봐준 거다.당시 신군부 군인들의 기세가 어땠는줄 아니?그들은 나에게 ‘이 도둑년’하면서 내 손가락에 낀 반지까지 빼갔다.그러면서도 이후락이는 봐줬으니 신군부에다 뭘 바쳤는지….목숨 바쳐 혁명한 사람은 두 번이나 외국으로 쫓아내고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권력은 다 해먹은 게 바로 그 자다” 이처럼 온 나라를 혼맥으로 엮어가며 차기 권력을 향한 자기기반을 착착 다져가던 이후락도 73년 12월 박정희의 ‘가지치기’로 해임되고 말았다.권좌를 떠난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후락은 조계종 회의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73년 12월말 한국을 빠져나와 런던으로 갔다.거기서 미국비자를 받으려했으나 실패하자 당시 한·영 영사협정에 따라 비자 없이 갈 수 있던 영국령(領) 바하마로 갔다.거기서 이후락은 당시 돈으로 50만달러를 주고 저택을사들이려 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이후락이 바하마에 집을 사 정착하려고 한 이유는 자신의 재산을 이곳으로도피시켜 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바하마는 은행에돈을 갖다 넣어도 비밀이 보장되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곳이어서 미국 부호들이 재산도피 장소로 애용하는 곳이었다. 김형욱에 이어 이후락마저 해외로 도망가자 박정희는 이후락을 귀국시키기위해 노심초사했다.자신의 엄청난 치부들이 폭로될 것을 극도로 우려했기 때문이다.두 사람 사이에 몇 차례 특사가 오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조선일보 외신부의 김 아무개 기자였다.이후락은 결국 박정희로부터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친필편지를 받고 74년 2월말 귀국했다. 73년 이후락 해임후 박정희의 스위스은행 비밀계좌는 어떻게 되었을까.일설에 의하면 박정희는 비밀계좌의 예금주 이름을 모두 자신의 측근으로 바꿨다고 한다.그런데 10·26 이후 전두환(全斗煥·전 대통령)이 보안사 요원 5명과 그를 스위스로 보내 비밀계좌의 돈을 모두 찾아왔다는 얘기가 있다.그때따라갔던 요원 중 한 사람이 미국에 와 “그 때 수고비로 5만달러를 받았다”고 발설한 일이 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문명자 회고록] 비화 3공의 실세들(3)성판

    5·16직후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63년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직에 있던이후락(李厚洛)을 나는 공식석상에서 몇차례 만난 적이 있다.그런데 이후락에 대해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사람은 정일권 후임으로 63년부터 주미대사로 일했던 김정렬(金貞烈·전총리)이었다.그는 은퇴후 서울에서만났을 때 이런 말까지 했다. “문 기자,이후락이 같이 교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 없을 거요.이후락과 김형욱이란 악당 손에 박 정권은 결국 몰락하고 말거야.3선개헌때 우리 공화당 의원들이 그 두사람 손에 어떻게 끌려갔는지 아시오? 깜깜한 어둠속에 앞 사람 허리띠를 붙잡고 소경처럼 질질 끌려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끌려간 곳이 제3별관(현 대한매일 주차장 자리)이야.가보니 촛불 몇개 켜놓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이효상 국회의장이 시간을 끈다고 장경순(張坰淳·당시 국회부의장)이가 이 의장 손에서 의사봉을 확 뺏더니 “왜 이렇게지체해요? 이건 이렇게 때리는 겁니다”하면서 땅땅 때리는데,개헌안 통과시키는데 1분도 안 걸렸어요.모두가 화적단같은 사람들이야.문 기자,내가 죽은 후에 언젠가 이것만은 역사에 밝혀주시오” “대사님,그러게 5·16 나고 나서 공화당 사전조직 의혹이다 뭐다 해서 모두들 들고 일어나 공화당 해체하라고까지 하는 판국에 무엇 때문에 공화당에 참여하셨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5·16이 났을 때 내무부장관(4.19 당시 법무부장관)으로 있던 홍진기(洪璡基·전 중앙일보 회장·작고)가 발포책임자의한 사람으로 잡혀들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었거든.그런데 홍진기 하고 나하고는 일제 때부터 절친한 사이로 자유당때 각료도 같이 했고 해서 인간적으로 몰라라 할 수 없는 관계였어요.그런 판에 하루는 박 의장(박정희)이 나를 부르더니 ‘공화당 의장을 좀 맡으라’고 하더구만.그래서 나도 ‘부탁이 하나 있다.공화당에 갈테니 홍진기 좀 풀어달라’고 했지.나는 결국홍진기 살리려고 공화당에 간거야” 김정렬은 이후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이후락이는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에 대위로 시작한 사람이오.그보다 나이도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말이오.해방직후 귀국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은 모두들 군사영어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를 수료하면 일본군 시절의 계급을 참작해서 국군 장교로 임관시켰거든.그런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거야.하도 우기니까 미군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사실상 그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측과 거래가 있었겠지만…” 공화당 정책위원장 박준규(朴浚圭·현 국회의장)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5·16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 나가더구만” 이때 이후락이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CIA의 뒷받침 때문이었다.민주당 정권에서 장면(張勉)의 비서를 지낸 선우종원(鮮于宗源·변호사)은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당 정권때 이후락이가 중앙정보부의 전신이라 할 ‘정보조사국’을만들었다.당초 정보조사국 책임자로 이후락이가 추천됐을 때 여러 사람이 안된다고 했는데 결국 이후락이가 맡게 된 것을 보니 CIA 한국지부에서 그를민 것 같았다” 사실 이후락은 5·16 이후 CIA가 박정희 주변에 깊숙이 박아놓은 첩자였다고 할 수 있다.그는 최고회의 공보실장 시절부터 최고회의 정보를 미군측에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미국으로서는 창군 초기부터 내내 미국 정보기관의 끄나풀이었던 이후락을 좌익전력을 가진 박정희 옆에 붙여 놓았으니까 박정희에 대해 자신만만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박정희가 일방적으로 감시만 당했던 것은 아니었다.박정희는 박정희대로 이후락 같은 미국의 끄나풀을 자기 곁에 둠으로써 오히려 그를 자신이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방편으로 써먹었던 것이다. 63년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면서 이후락의 이른바 ‘떡고물’ 정치가본격화됐다.그것은 비단 국내에서만이 아니었다.이후락은 자신의 아들·딸·사위 등을 모두 미국에 보내놓고 미국에서조차 축재에 열을 올렸다.사위등은LA 현지에 은행을 설립해 주주로 참여했고 교포방송인 LA방송국을 설립하기도 했다.이같은 재력을 기반으로 그의 사위는 LA한인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는 또 LA의 부자동네인 윌셔 브루버드에 당시 돈으로 3,000만 달러를 주고 빌딩을 사들여 이것을 한국교포들에게 세를 놓았다.당시 교포들 사이에“이 빌딩은 실은 이후락 것이다”하는 소문이 나 현지의 민주화운동 그룹들이 “이후락의 부정부패와 해외 재산도피의 산 증거인 문제의 건물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훗날 코리아게이트 조사과정에서 FBI가 조사에 들어갔을 때 그는 빌딩을 매각한 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70년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이후락은 그 해 12월 정보 무경험자인 사위를 중정 국제담당 2국장으로 앉히고 둘째아들도 자신의 비서로 임명해 72년 남북회담 당시 모두 북한까지 자신을 수행토록 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알림] 문명자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연재물 제목을 문명자회고록 발췌 ‘비화,3공의 실세들’로 바꿉니다.이는 본지가 문씨의 회고록 중 일부를뽑아 정리,게재하기 때문입니다.
  • 韓·美외교 50년역사 한눈에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국과의 외교관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료실이탄생했다. 미국주재 한국대사관(대사 李洪九)은 4일(현지시간) 주미대사관 개관 50주년을 맞아 ‘한미외교사료실’을 개관했다. 초대 주미대사를 지낸 장면(張勉)박사의 흉상 제막식과 함께 거행된 이날 개관식에는 국정감사차 워싱턴을 방문한 유흥수 의원 등 국회 통일외교 통상위원들과,학자들을 비롯한 워싱턴지역 주민 등이 참석했다. 이 대사의 노력으로 시작된 이 사료실은 흔적이 사라져가는 지난 50년 동안한·미 외교역사의 각종사료들을 힘들여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으로 앞으로이 분야의 체계적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 의회도서관에서 45년간 재직했던 양기백박사가 고문으로 활동,사료발굴과 수집·정리 등이 이뤄진 이 사료실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담당고문으로 건국과 한국전쟁 당시 대외정책 수립에 큰 역할을 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 등 각계인사들이 소장했던 사료를 기증받아 전시하게 됨으로써 더욱의미가 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옛대사관 청사인 현재의 워싱턴 총영사관 3층에 약15평규모로 마련된 이 사료실에는 구한말 이후 외교사령장과 기록들,역대 외교관 관련 서류 및 사진자료,한미 외교관련 서적,등 400여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최근 국내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장면 박사의 흉상도 건립,고인의업적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함은 물론 한미외교 시작의 의미를 새롭게 했다. 대사관측은 또 한미외교개설 50주년 기념을 기념하는 조형물도 오는 11월 설치할 예정이다. hay@
  • 美에‘노근리 사건’공동조사 제의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우득정 기자] 이홍구(李洪九) 주미대사는 4일 노근리 사건과 관련 진상조사를 위해 미국정부에 공동조사단 구성을 제의했다고 밝혔다. 이 대사는 이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스탠리 로스 국무부 차관보와 양국 공동조사단 구성문제에 대해 논의했다”고 말하고 “미국측도 이에대해 전적으로 협력하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 대사는 그러나 이 문제는 미측의 조사 주관부서가 국방부여서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이 동남아시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5일 이후 논의키로 했다고 말했다.또 오는 5,6일 도쿄에서 한·미·일 3국 국방부 회동이 예정돼있어 그자리에서도 노근리 조사대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대사는 이어 러스 데밍 부차관보 등 미 국무부 관계자들과 실무차원 채널도 가동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지난 1일 워싱턴을 방문한 정영무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에릭 신세키 미 육군참모총장과 만난 자리에서도 이 문제를협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편 스탠리 로스 차관보는 이날 본사 기자와 만나 노근리 사건 진상 조사와 관련,“한국과 공동조사단을 구성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로스 차관보는 이날 한국정부가 제의해온 한미 공동조사단 구성 가능성에대한 질문에 “노”라고 밝히고 “그러나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의 조사는 상호협조 아래 2원체제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관련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한국정부는 김대중 대통령의 철저조사 지시아래 범정부적인 조사기구가 구성됐지만 미국은 국방부가 조사를 맡게 돼있다”면서 “양국의 공동조사단 구성은 체계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그러나 “양국은 각각의 조사과정을 갖되 정보를 공유하고,양국관할에 대한 조사에서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조성태(趙成台) 국방부장관도 5일 집무실에서 존 틸럴리 한미연합사령관을 만나 노근리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양국 공동조사단 구성을 제의했으며 틸럴리 사령관은 긍정적 검토 의사를 밝혔다.
  • 페리보고서 美의회 청문회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이홍구(李洪九) 주미대사는 4일 대북정책 현안과 관련,페리 보고서에 대한 미 의회의 청문회가 13일 하원 국제관계위,15일 상원 외교관계위에서 각각 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대사는 이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국정감사에서 이같이 밝히고 “공화당 내부에서도 북한의 베를린협상 수용의도를 참작,강경 움직임을 늦추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 대북제재 완화 이후 특별히 북한 투자를 모색하거나 교민들의 투자움직임이 있지는 않지만 미국 기업 가운데 북한산 광물자원 수입을 희망하는 업체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사는 또 최근 미국비자 발급과 관련,현재 160개인 국내비자면제 발급대상 기업의 수를 650개로 확대시킬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 [문명자 회고록] 내가 본 朴正熙와 金大中(2)

    1970년 3월 17일 한강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 전 정인숙(鄭仁淑)은 1년정도 미국에 체류했다.아들까지 낳은 정인숙이 도처를 다니며 청와대를 들먹이는 등 말썽을 일으키자 경호실장 박종규가 정인숙 모자를 미국으로 보낸것이다. 정인숙 모자는 워싱턴 16번가에 있는 ‘우드너’라는 아파트와 같은 호텔에한달 반동안 살다가 뉴욕으로 옮겼다. 당시 뉴욕에는 미국남자와 결혼한 한국여성들의 모임인 ‘한미부인회’라는 모임이 있었다.정인숙의 화류계 친구중에도 한미부인회의 회원이 있어 정인숙도 모임에 한두 번 나왔는데 그때정인숙을 본 기억이 있다.예쁜 얼굴의 젊은 여인이 모자를 쓴 남자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목소리가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 남자같은 음색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자신을 ‘미세스 박’이라고 소개했다.내가 물었다. “남편은 무슨 일을 합니까?” “재일교포 사업가예요”. 나는 그때 그 남자아이가 누군가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바로 정일권이었다.정인숙이 죽고난 뒤 ‘워싱턴 포스트’의셀리그해리슨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그는 ‘정인숙사건’을 취재중이었다.한국신문에는 어차피 실리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취재원을 밝히지말 것을 전제로 내가 가진 모든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며칠후 ‘워싱턴 포스트’ 1,2면에는 ‘한국의 크리스천 킬러 스토리’라는제목으로 셀리그 해리슨이 쓴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크리스천 킬러’란 미모의 한 영국 고급창녀가 남성편력을 계속하다가 살해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71년 3월4일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한미공수기동훈련)’ 취재차 나는이 신문을 들고 서울에 갔다.‘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은 ‘팀스피리트’의 전신이랄 수 있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이다.오산공항을 거쳐 숙소인 조선호텔에 도착했을 때 정일권의 비서 김종하(金鍾河·전 신아일보 편집부국장)가나를 찾아왔다. “총리께서 문 기자님이 오신 것을 신문에서 보시고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십니다” 정일권의 특징중 하나는 자신의 주변사람들을 잘 챙기는 것이다.특히 자신이 주미대사 시절 데리고 있던 부하들이워싱턴에서 돌아오면 마지막까지 보살펴 출세길을 열어준 것으로 유명하다.그래서 이들을 속칭 ‘워싱턴클럽’이라고 했다.나야 ‘워싱턴클럽’과 관계가 없었지만 정일권은 61년 주미대사 시절 안면을 익혔다고 해서 내가 한국에 가면 종종 ‘워싱턴클럽’의 식사자리에 나를 부르곤 했다. 이처럼 한국에 가면 정일권으로부터 종종 초대를 받았지만 71년 당시만은나를 만나자는 이유가 정인숙사건 때문이란 것을 직감했다.정일권이 워싱턴포스트 취재원이 나라는 것을 짐작했을 것 같았다.나는 나대로 정일권을 만나 진상을 추궁해볼 작정으로 약속장소로 갔다.잠시후 정일권이 측근 한 사람과 나타났다.그런데 앉자마자 뱉아낸 정일권의 발언이 걸작이었다. “문 기자,나는 정인숙과 딱 한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리가없소.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 아마 요즘 정치인들 같으면 사실이야 어떻든 “나는 정인숙과 관계가 없다”고 딱 잡아뗐을 것이다. “딱 한번밖에 안 잤다”고 변명하는 정일권의 태도를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가군대시절 “야,야”하고 부르던 박정희에게 “각하”,“각하”하면서 끝까지미움을 사지 않고 그 그늘 밑에서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유들유들한 성격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문제의 ‘워싱턴 포스트’를 들고 그 길로 정일권의 부인을 만나러 갔다.그녀와 나는 정일권이 주미대사 시절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지금까지내가 만난 여성들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조선여인상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서슴지 않고 정일권의 부인을 꼽을 것이다.나는 들고 간‘워싱턴 포스트’를 그녀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이 사건 아세요?”.정 총리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이 집에 시집와 아들을 못낳은 죄로 우리집 주인이 어디서든 아들을 낳아 오면 받아들이려고 해요.그래서 우리 주인에게 신문에 난 그 아이가당신 혈육이라면 호적에 올리자고 했는데 우리집 주인이 절대 아니라고 합니다.장기영(張基榮·전 한국일보 사주·작고)씨 하고도 의논했어요.장기영씨가 ‘그분이 공직자라 곤란해서 그렇다면 일단 내 호적에 넣어주겠다’고도했는데 본인이 한사코 아니라고 하니 난들 어쩌겠습니까?” 70년대 후반 정일권의 이 현숙한 부인은 세상을 떴다.얼마후 정일권은 재혼을 해 새로 장가든 부인과의 사이에 3남매를 두었다.“불임수술 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았는가”하고 따져보고 싶었는데 정일권 스스로 제 발이저렸는지 “불임수술을 풀었다”고 변명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정인숙의아들 정성일(鄭成一·32)은 90년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정일권에게 자기를아들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정일권은 비서를 시켜 4,000만원을 전해주고는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정성일은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까지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李총재·이홍구대사 워싱턴서‘어색한 만남’

    [워싱턴 오풍연특파원]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와 이홍구(李洪九)주미대사가 오랜만에 만났다. 미국을 방문중인 이 총재는 14일 오전(한국시간) 워싱턴에 도착한 뒤 숙소인 힐튼호텔로 찾아온 이 대사와 20분 가량 만났다.배석자 없이 이 총재의부인 한인옥(韓仁玉)여사 등 셋이서만 자리를 같이했다.국내문제보다는 건강과 미국 생활을 화제삼아 얘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둘은 경기고 동창으로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9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때는 함께 나섰다가 이 대사는 도중하차했다. 이 총재와 이 대사는 당초 이날 저녁 만찬이 계획되어 있었다.그러나 이 총재가 “공관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일정을 조정하도록 지시,만찬이 출국 직전 취소됐다.대신 이 총재는 워싱턴 소재 세계은행에 근무하는 큰아들 정연(正淵)씨 등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poongynn@
  • [지구촌 밀레니엄 준비] 미국 / 온고지신으로 새천년 진로 찾는다

    얼마전 존 홉킨스 대학초청 강연에서 21세기와 새천년(밀레니엄)을 앞둔 미국에서 연일 논의되고 있는 과제는 Y2K뿐인 듯한 인상이 짙다고 말한 적이있다.이는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미국에서의 새천년 맞이 준비치고는 다소 의아할 정도의 조용함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요란하지 않을 뿐 사실 미국의 언론이나 연구소,기업들은 나름대로 새천년을 소재로 한 특별기획을 준비중에 있고 수십권의 밀레니엄 관련 연구서적의 출간을 앞두고 있는 등 새천년에 한발씩 더 다가가면서 차분하고 실속있는 준비가 진행중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 97년 8월 대통령 자문기구로 미국의 새천년위원회를 조용히 발족하면서 새천년을 맞는 미국의 지표를 ‘과거를 존중하며 미래를 생각한다(Honor the Past-Imagine the Future)’로 정했다.명실상부한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국제정치와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면서 내세운 테마는 기념 우주선 발사나 대형 조형물 신축도 아니고 축제도 아니다.우리에게는 진부하게조차 느껴지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새천년위원회의 기본사업은 크게 4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사업이 역사의식 함양에 역점을 두고있다.첫번째 사업인 ‘새천년 지역사회 프로그램’은 전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각 지역 사회별자기 고장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서 후세에 도움이 될 만한 고장의 유산을찾아보자는 것이다.새천년 기념사업에 온 지방과 국민이 참여토록 함으로써그 의미를 높이려는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두번째 사업인 미국의 ‘유물보존’은 3,000만달러 규모의 정부 예산과 추가 모금중인 민간기금을 재원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을 재현,보전하자는 취지다.최근 워싱턴 기념탑 복구작업이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성조기 모체 재현작업 등이 이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세번째는 미교통부 지원하에 추진중인 ‘새천년 발자취’ 사업이다.미 국토 전역을 인간,역사와 문화와 연결지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해 보자는 것이다. 보스턴 내 15개 독립운동 사적지를 연결하는 프리덤 트레일 등 역사와 자연이 결합된 2,000여개에 이르는 트레일 조성사업은 미국땅 구석구석을 역사적으로 부활시키기 위한 기념비적 사업이 되기에 충분하다. 끝으로 대통령 부부의 초청으로 개최되는 ‘새천년의 저녁’은 미국의 사상,문화,예술과 과학을 조명하기 위한 일련의 강연회와 사상탐구를 위한 행사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이 새천년의 길목에서 강대국으로서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요란한 전시성 행사를 외면하고 200년 남짓한 길지않은 기간의 역사의식 함양에 공을들이는 이유는 무엇인가.클린턴 대통령은 이에 대해 “과거를 소중히 하는가운데 이미 이 땅의 미래를 생각해 온 선조들이 계셨음을 알 수 있으며 미래를 생각하는 가운데 오늘의 성공과 미래에 대한 성공적 도전을 가능케 하는 소중한 가치와 유산들이 우리의 과거 속에 깊게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은 새천년의 길목에서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어온 전통과 유산이 무엇이며 다민족의 전시장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동의 가치가무엇인지를 국민 개개인을 상대로 일깨워 주면서 다가오는 새천년을 조용히준비하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바로 자연보존에 못지 않게 사회보존의 중요성을 이 시점에서 범국민적으로 인식하자는 것이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온 우리 민족은 아직도 시급히 극복해야 할당면과제에 직면한 채 새천년을 맞을 수밖에 없다.우리는 다가오는 21세기에 민족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선진국 반열에 진입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안고있다. 이미 이룩한 거대한 업적과 성공을 선조들의 지혜와 희생의 유산으로 감사히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미래의 도전에 과감히 대응할 수 있는 용기와 창의성을 찾고자 하는 미국민의 슬기로운 모습은 새 천년을 준비하는 우리의올바른 자세를 가다듬는 데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이홍구 주미대사
  • 인천市, 美와 인천상륙작전 50주년 공동 기념행사 추진

    인천시가 2000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를 미국과 공동개최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인천시는 지난달 최기선(崔箕善)시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홍구(李洪九)주미대사를 만나 미국의 한국전 참전 50주년이 되는 내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를 한·미 공동으로 마련하는 방안을 협의,행사기간 동안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초청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전직 대통령을 초청하기로 합의했다고 6일 밝혔다. 시는 이를 위해 현재 외교통상부 등 중앙부처와 협의를 벌이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
  • 金대통령, 탄신100주년 기념회 관계자 접견 안팎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5일 고(故) 장면(張勉)박사 탄신 100주년 기념회인 ‘운석기념회’ 관계자 6명을 접견한 자리는 부드러우면서 화기애애했다고박선숙(朴仙淑)청와대부대변인이 전했다.이 자리에서는 장박사의 생전의 업적과 기념사업에 대한 많은 얘기가 오고갔다. 김대통령은 “장면박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고 국가적으로 관심을 가질수 있는 시대가 돼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르게 산 분들은 비록 생존시에 좌절이나 실패,혹은 누명을 쓰는 일이 있어도후세의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바로잡아가야 한다”며 동학혁명을실례로 적시했다. 김대통령은 장박사를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분”으로 평가했다.그러면서 “이번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국민들이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지도자로서 장박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수환(金壽煥)추기경도 “장박사가 정부수립 과정에서 유엔 승인을 받기위해 로마 바티칸에 도움을 청하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펼친 일을 신학교 학생때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기념회이사장인 강영훈(姜英勳)전총리 역시 “주미대사 시절 외국 외교관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분”이라며 건국과정과 6·25전쟁 당시의 기여를 되새겼다.이와 관련,정부는 장박사에게 이승만·박정희 전대통령이 받았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키로 했다. 접견에는 장박사의 아들인 춘천교구청 장익 주교와 이성모(李性模) 전 장면총리비서관도 참석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언더우드목사 白骨되어 한국에

    연세대 설립자인 고(故) 언더우드(원두우·元杜尤) 목사가 83년만에 제2의고국인 한국에 돌아왔다. 오는 19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서울 외국인묘지공원에서는 각계 인사들이참석한 가운데 박사의 탄생 140주년과 이장(移葬)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박사의 유해는 지난 5월20일 이미 이장됐다. 1916년 발진티프스병이 악화돼 요양차 미국으로 떠났던 박사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 해 10월12일 57세로 별세,뉴저지주의 작은 교회에 묻혔다.당시 박사의 시신을 한국으로 이장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부인인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뜻에 따라 이장을 위해 준비해둔 비용을 유치원 건립비로 썼다. 이장보다는 한국의 교육시설 확충이 시급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96년 박사의 80주기 기념예배에서 후손들은 박사의 부인과 외아들원한경(元韓慶)박사 부부,그리고 장손인 원일한(元一韓·82)박사의 부인이묻힌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했다.이로써 언더우드가의 ‘가족묘’가 한국에 완성된 셈이다. 4세 때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박사는뉴욕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인도로 가기를 희망했다.그러나 뉴브런스윅 신학교를 졸업한 1884년 주미대사였던 명성황후의 오빠 민영익(閔泳翊)을 통해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1885년 4월 인천에 도착한 박사는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원을 만들었다.1889년에는 ‘한국어 문법’과 ‘한영사전’을 편찬·간행했다.1897년에는 순 한글신문인 ‘주간 그리스도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1887년에는 우리나라 장로교의 모체인 ‘새문안 교회’를 설립했다. 일제 초기인 1912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형으로부터 5만2,000달러라는 거금을 받아 세상을 뜨기 한해 전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언론에도 관심이 많았다.선교와 교육 활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했다.장손인 원일한 연세대 상임이사는 “할아버지는 특히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인 베델과 가깝게 지냈고 교육과 언론의 사명에대해 자주 의논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박사는 연세대 교정에 세워진 동상에 새겨진 글귀대로진정 ‘하나님의 사자(Messenger of God)’로 이 땅에 와서 ‘그리스도의 제자(Follower of Christ)’로 살다가 ‘한국인의 친구가 된 사람(Friend of Korea)’이었다. 이지운 김미경기자 jj@ - 언더우드家 3代 안장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소장 李康泌)은 마포구 합정동 145 당산철교 근처에있다. 지난 1890년 고종황제가 장로교 선교회 소속 미국 의료선교사 존 해론박사의 장지로 이 땅을 기증한 것이 시초가 됐다.이때부터 미국을 비롯해 호주,벨기에,캐나다,프랑스,백러시아,독일 등 11개국 외국인 500여명이 묻혔다.선교사 뿐만 아니라 백러시아에서 온 피난민들,외교관 및 군 관련 외국인들도포함되어 있다. 공원 뒤쪽에 바로 언더우드 일가의 묘지가 있다.최근 이장한 언더우드 박사를 비롯해 부인 릴리아스,아들 원한경(元漢慶),며느리 와그너,손자 일한(一漢)씨의 부인 원성희씨가 묻혀 있다. 이외에도 지난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베델,최초의 미국감리교선교사로서 배재학당 창시자인 아펜젤러,고종의 밀사로 1907년 이준 열사와 함께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헐버트,이화학당 창시자스크랜튼,세브란스 병원설립에 참여한 애비슨 등이 안장돼 있다. 이종락기자 jrlee@
  • 金대통령 워싱턴 행보

    워싱턴 양승현특파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일 오전 서울을 출발해 14시간10분간의 장시간 비행끝에 미국 워싱턴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여장을 풀자마자 곧바로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들어가는 등 5박6일간의 ‘강행군’에 들어갔다. 정상회담 김대통령은 장시간의 여행 끝인데도 별달리 피로한 기색 없이 3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2시40분 클린턴 대통령이 주최한 환영오찬에 참석한 뒤 정상회담에 들어갔다.회담에 앞서 김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은 굳은 악수로 양국의 전통적 동맹관계를 재확인하는 모습을 과시하며 기념촬영을 했다. 1시간동안 계속된 정상회담에는 우리측에서 홍순영(洪淳瑛)외교통상부장관,이홍구(李洪九)주미대사,이기호(李起浩) 청와대 경제수석,황원탁(黃源卓)외교안보수석,박준영(朴晙瑩) 공보수석 등이 참석했다.미국측에서는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존 포데스터 대통령비서실장,샌디 버거 대통령안보보좌관 등이배석했다. 세번째 정상회담을 갖게된 김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은 여유있고 친숙한 태도를 보였다.김대통령은 서해교전 사태와 관련,미국이 핵잠수함 등을 신속히 파견하는 등 협조해준데 대해 감사의 뜻을 표시했으며 클린턴 대통령은 양국간의 확고한 안보공조체제를 강조했다. 1시간여의 회담이 끝난 뒤 양측은 언론발표문 형식으로 각자 결과를 발표했다.김대통령의 이번 방문이 국빈방문이 아닌 실무방문이어서 공동기자회견이나 공동발표문은 없었다. 환영오찬 김대통령은 정상회담에 앞서 이희호(李姬鎬)여사,공식수행원들과 함께 백악관 2층 ‘올드 패밀리 다이닝룸’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주최한 환영오찬에 참석했다.김대통령은 새벽 2시30분 백악관에 도착,환영나온 클린턴 대통령과 반갑게 악수를 나눈 뒤 ‘디플로매틱 리셉션 룸’으로 입장해 방명록에 서명했다.이어 클린턴 대통령의 안내로 칵테일장으로 이동한 김대통령은 대기중이던 양국 공식수행원을 클린턴 대통령과 번갈아가며 소개한 뒤오찬장으로 향했다.클린턴 대통령은 “장시간의 비행으로 피곤하지 않으냐”고 걱정했으나 김대통령은 “오랜 친구의 나라를 방문해 전혀 피곤하지 않다”고 답했다. 페리조정관 면담 정상회담이 끝난 뒤 김대통령은 숙소인 영빈관에서 페리대북정책조정관을 40분간 면담했다.김대통령은 페리 조정관이 지난 5월 북한을 방문,포괄적 접근방안에 대해 권고안을 제시한 이후 북한측에 어떤 기류변화가 있었는지,또 페리 조정관이 최종보고서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 등에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배석자들은 전했다. 특파원 및 교포 간담회 김대통령은 페리 조정관과의 면담을 마친 뒤 영빈관에서 워싱턴에 주재하는 한국 언론사의 특파원 20여명을 접견하고 한·미간의 현안 등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김대통령은 이어 현지 동포 대표 30여명과 간담회를 갖고 격려했다.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동포 여러분이 복잡한 국내외 상황에 대해 걱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경제위기 극복과 대북포용정책의 성과가 서서히 가시화되는 만큼 안심하고 생활하라”고말했다. 이희호여사 일정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이희호여사는 회담장 옆 ‘옐로 오벌 룸’에서 힐러리 여사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이여사는 이어 현지의‘나라사랑 어머니회’ 간부 70여명과 1시간여동안 간담회를 갖고 동포들의생활상 등을 들었다. 출국 행사 김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이에 앞서 2일 오전 서울공항 2층에서 10분간 간단한 출국 행사를 가졌다.행사장에는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내외와 국민회의 김영배(金令培) 총재권한대행,자민련 박태준(朴泰俊)총재,김중권(金重權) 청와대 비서실장,조성태(趙成台) 국방부장관 등 30여명의 당정 인사들이 나와 김대통령 내외를 환송했다. 정상외교 홍보방 청와대는 2일부터 인터넷 홈페이지에 ‘정상외교 홍보방’을 개설해 김대통령의 미국·캐나다 방문소식을 신속하게 제공한다.청와대측은 7일까지 김대통령의 주요 일정에 맞춰 공식연설문,보도자료,기자회견문 등을 한글과 영문으로 서비스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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