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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7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선은 건국 이래 두 번이나 쿠데타가 있었다.그 하나는 수양대군이 임금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찬탈한 사건이었고,또 하나는 여러 대신들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왕위에 옹립한 반정이었다. 수양대군의 정권 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공신이 정난(靖難)공신이며,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이 정국공신들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는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부도덕한 일이었다.따라서 조광조는 ‘공신을 중하게 여기면 공을 탐하고 이로움을 탐해서 왕을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됩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정의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유교적 이상주의를 통해 왕조의 도덕성을 재확립하려는 조광조의 의지가 정국공신의 개정으로 나타난 것이었다.그러나 중종은 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왜냐하면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공신들이 비록 부당하게 책록되었다 하더라도 삭훈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광조 등 신진세력들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하였다.대사성 김식은 중종 앞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극간하고 있었다. “이 일은 갑자기 발의된 것이 아닙니다.정국공신은 그 외람됨이 심하였습니다.이 때문에 실로 무궁한 폐단을 열었으니,지금 이것이 발의된 것은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볼 수 있습니다.이를 고치면 이익을 탐하는 근원이 제거되어 국맥이 영구할 것이니 마땅히 그 이해를 헤아려 결정할 때를 잃어서는 아니 됩니다.” 조광조에 의해서 정국공신의 개정문제가 발의된 이래 조정은 화약고처럼 불붙고 있었다.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있는 사헌부와 사간원,홍문관,성균관,의정부 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종에게 간청을 드리고 있었고,이를 거절하는 왕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대립이 보름간이나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10월 25일에 시작된 조광조의 발의가 보름이 지난 11월 9일 조광조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즉 정국공신 103명 중에 3분의 2에 해당하는 78명이 삭훈됨으로써 남은 공신은 25명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조광조의 승리였을까.그로부터 6일 후인 15일 밤.삭훈된 홍경주와 남곤,심정과 같은 훈구세력의 반격으로 한밤중에 숙청극이 일어나 조광조는 붕당죄의 대역 죄인이 되었으니 조광조의 승리는 6일 천하로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 무렵 흥미로운 비화가 하나 전하고 있다.마침내 중종으로부터 78명의 정국공신을 삭훈한다는 전언을 받은 날,조광조는 승리감에 도취하여 김정과 김식,김구 등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이때 불쑥 나타난 사람은 최수성.최수성은 강릉 출신의 진사로 조광조가 희천에서 한훤당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있을 때 동문수학한 옛 친구였다.이러한 인연으로 최수성은 한성에 올라올 때마다 조광조의 집에서 묵고 가고 있었으므로 자연 김식을 비롯한 조광조의 신진사림파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고 있는 사이였던 것이다.조광조와 달리 최수성은 벼슬에 관심이 없는 초야의 야인이었으며,특히 시문에 뛰어났다.그래서 그 자신이 시에 능했던 김정이 최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불쑥 나타난 최수성은 조광조에게 말하였다. “이보게 정암,듣자 하니 자네의 기세가 하늘을 찔러 무소불위(無所不爲)라 하니 그게 사실인가?” 조광조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가 하는 말이었으므로 이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며 말하였다. “어찌하여 또 시비를 거시는가.” 이에 최수성이 정색을 하고 대답하였다. “항간에서 듣기를 자네가 아침에 출근하는 중 가마가 앞을 가로막고 늑장을 부리자 가마꾼을 잡아다가 볼기를 쳤다는데 그것이 과연 사실인가?”
  • 儒林(7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알성시에서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라고 시작한 조광조의 답변은 바로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연결되는 합일체,즉 ‘천인무간(天人無間)’의 명제는 하늘의 뜻이 인간의 일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는 ‘천리불리인사(天理不離人事)’로 발전되어 사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은 반드시 하늘의 뜻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철학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원인 개개인이 각각 수양을 통해서 도덕을 실천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다.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에는 먼저 정치적 대표자인 왕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조광조는 당시 군주인 중종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고,따라서 이상정치의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경연에서 중종에게 공자의 도인 성리학을 열심히 가르쳤던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4가지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 하나는 현인군자를 적극 정치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용현정신(用賢精神)이며,또 하나는 사림 보호를 위한 선비들의 사기진작,세 번째는 방법적 폐단이 있을 때는 시의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진보적 개혁정신,마지막으로 언로는 반드시 열어 놓아야 한다는 언론 자유정책이었다. 지치주의를 구체화하려는 이 네 가지 방법은 결국 사회의 개혁을 의미하며,그러기 위해서는 갖바치와 밤을 새우며 토론하였던 대로 무엇보다 사람을 바꾸는 대규모의 물갈이를 통해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나온 지 불과 4년 만에 하룻밤 사이에 대역 죄인으로 전락한 조광조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인물개혁이었던 것이다. 물론 도교의 일월성신을 제사 지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한 일과 향약을 실시하여 미풍양속을 권장한 괄목할 업적도 있었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주로 인적 자원의 개발과 인적 청산에 있었다. 조광조가 이를 위해 첫 번째로 시행한 제도가 바로 현량과(賢良科)의 설치였다.과거제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고려 광종 때에 쌍기의 제안으로 처음 시행된 이래 과거제는 고려의 전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도 인재를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그리고 이 제도는 당시의 신분제적 질서와 결합됨으로써 귀족신분층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오히려 조선왕조 건국 이후 이 과거제도는 학교제도와 더불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져 이 제도의 중요성은 더욱 강화되었다.그러나 이 과거제도는 결국 권력의 세습이라는 고질적인 폐단으로 변질되어 갔으며,숨어 있는 인재를 발탁하는 데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따라서 조광조는 단 한 번의 시험제가 아닌 천거제를 통해 인재를 발굴하는 한나라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받아 ‘현량과’라는 새로운 과거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과거제도의 혁신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아 원래 인물이 적습니다.거기에다 서얼과 사천을 분별하여 등용하지 않습니다.중국에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등용시키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는데,하물며 작은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인재등용을 좁게 할 수 있겠습니까.중국 한대의 현량방정과를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런 방식으로 하면 대현인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조광조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서 천거과는 중종 13년에 시행된다.육조 및 홍문관,사헌부,사간원과 지방의 관찰사,수령들이 마땅한 인물을 선발하여 예조에 추천하면 예조는 추천된 사람 개개인의 신분을 조사하여 왕의 임석하에 중전에서 시행하여 뽑는 것이었다.
  • 儒林(72)-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는,알성시에서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라고 시작한 조광조의 답변은 바로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연결되는 합일체,즉 ‘천인무간(天人無間)’의 명제는 하늘의 뜻이 인간의 일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는 ‘천리불리인사(天理不離人事)’로 발전되어 사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은 반드시 하늘의 뜻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철학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원인 개개인이 각각 수양을 통해서 도덕을 실천함으로써 성인이 되는 것이다.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에는 먼저 정치적 대표자인 왕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것이다. 조광조는 당시 군주인 중종이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고,따라서 이상정치의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경연에서 중종에게 공자의 도인 성리학을 열심히 가르쳤던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4가지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 하나는 현인군자를 적극 정치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용현정신(用賢精神)이며,또 하나는 사림 보호를 위한 선비들의 사기진작,세 번째는 방법적 폐단이 있을 때는 시의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진보적 개혁정신,마지막으로 언로는 반드시 열어 놓아야 한다는 언론 자유정책이었다. 지치주의를 구체화하려는 이 네 가지 방법은 결국 사회의 개혁을 의미하며,그러기 위해서는 갖바치와 밤을 새우며 토론하였던 대로 무엇보다 사람을 바꾸는 대규모의 물갈이를 통해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나온 지 불과 4년 만에 하룻밤 사이에 대역 죄인으로 전락한 조광조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인물개혁이었던 것이다. 물론 도교의 일월성신을 제사 지내는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한 일과 향약을 실시하여 미풍양속을 권장한 괄목할 업적도 있었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주로 인적 자원의 개발과 인적 청산에 있었다. 조광조가 이를 위해 첫 번째로 시행한 제도가 바로 현량과(賢良科)의 설치였다.과거제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긴 역사를 갖고 있었다.고려 광종 때에 쌍기의 제안으로 처음 시행된 이래 과거제는 고려의 전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도 인재를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그리고 이 제도는 당시의 신분제적 질서와 결합됨으로써 귀족신분층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오히려 조선왕조 건국 이후 이 과거제도는 학교제도와 더불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져 이 제도의 중요성은 더욱 강화되었다.그러나 이 과거제도는 결국 권력의 세습이라는 고질적인 폐단으로 변질되어 갔으며,숨어 있는 인재를 발탁하는 데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따라서 조광조는 단 한 번의 시험제가 아닌 천거제를 통해 인재를 발굴하는 한나라의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본받아 ‘현량과’라는 새로운 과거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과거제도의 혁신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아 원래 인물이 적습니다.거기에다 서얼과 사천을 분별하여 등용하지 않습니다.중국에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등용시키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는데,하물며 작은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인재등용을 좁게 할 수 있겠습니까.중국 한대의 현량방정과를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런 방식으로 하면 대현인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 조광조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서 천거과는 중종 13년에 시행된다.육조 및 홍문관,사헌부,사간원과 지방의 관찰사,수령들이 마땅한 인물을 선발하여 예조에 추천하면 예조는 추천된 사람 개개인의 신분을 조사하여 왕의 임석하에 중전에서 시행하여 뽑는 것이었다.˝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儒林(67)-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7)-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17살 되던 해,스승 한훤당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던 ‘유가선비가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儒行)’에 대한 설법을 되새기던 조광조의 가슴으로 공자의 말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선비는 충정과 신의로서 갑옷과 투구를 삼고,예의와 정의로서 방패를 삼으며,인(仁)을 추대하여 행동하고,비록 폭정이라 하더라도 정의를 안고 처신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은 사자후(獅子吼)가 되어 조광조의 뇌리를 흔들었다. 사자후. 사자가 울부짖으면 뭇짐승들이 엎드려 떨듯이 20여 년 전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선비의 사상’은 하루아침에 반역죄인이 되어 유배를 떠나는 조광조의 가슴에 사자후가 되어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과연 스승 한훤당으로부터 ‘평생 잊지 말고 명심하라.’고 내린 유훈(遺訓)을 잊지 않고 지켜나가고 있었던 것일까. 조광조는 쉴새없이 흔들리는 수레 위에서 지난 세월 자신의 처신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반추하고 있었다.한훤당의 유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좁은 집 허술한 방,사립문에 거적문이 달린 집에 살며,옷을 갈아입어야 나갈 수 있고 이틀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할 형편이라 하더라도,임금이 응낙한 데 대하여는 감히 의심치 아니하며,임금이 응낙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히 아첨하지 않습니다.그들의 벼슬하는 태도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옛 사람들에게 뜻을 두며,지금 세상에서 행동하고 있지만 후세의 모범이 됩니다.마침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임금이 끌어주지 아니하고 신하들은 밀어주지 아니하며,아첨을 일삼는 백성들 중에 붕당(朋黨)을 이루어 가지고 그를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그의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뜻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끝내 자기 뜻을 믿으며,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그들의 걱정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비는 널리 공부하되 그만두는 일이 없으며,독실한 행동함에 지치지 아니하고,홀로 거처하더라도 그릇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위로 출세를 한다 하더라도 덕이 부족하여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하며,예로서 사람들을 대하되 조화를 귀중히 여기며,충성과 신의를 찬양하고,온화하고 유순한 것을 법도로 삼으며,현명한 사람을 흠모하되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며,자기의 모난 것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과 화합하고자 합니다.그들의 관대하고 너그러움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안에서 사람을 천거함에 친한 사람이라 하여 기피하지 않고,밖에서 사람을 천거함에 원수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피하지 않습니다.그의 공로를 드러내고 한 일들을 종합하여 현명한 사람이면 누구나 추천하여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하되 그 보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임금이 그의 뜻을 이해하여 사람을 씀으로써 진실로 국가를 이롭게 하려고만 하지 부귀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그들이 현명한 이들을 천거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추천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훌륭한 것을 들으면 남에게도 알려주고,훌륭한 것을 보면 남에게도 보여줍니다.벼슬자리에는 서로 남을 앞세우고,환난을 당하면 서로 죽음을 무릅쓰며,오랜 동안라도 남이 먼저 승진(昇進)하기를 기다리고,먼 곳의 사람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서로 불러 벼슬하게 합니다.그들이 벼슬하고 남을 내세움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자신을 깨끗이 건사하고 덕(德)으로 목욕을 하며,임금에게 의견을 아뢰고는 엎드려 하회를 기다리고,고요히 물러나서도 홀로 올바른 길을 지킵니다.임금이 알아주지 않고 소원히 대하더라도 은근히 깨우쳐 드리되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낮은 사람들을 대함에 오만하지 아니하고,자기만 못한 사람들 앞에 뽐내는 법이 없습니다….”
  • 儒林(67)-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17살 되던 해,스승 한훤당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던 ‘유가선비가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儒行)’에 대한 설법을 되새기던 조광조의 가슴으로 공자의 말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선비는 충정과 신의로서 갑옷과 투구를 삼고,예의와 정의로서 방패를 삼으며,인(仁)을 추대하여 행동하고,비록 폭정이라 하더라도 정의를 안고 처신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은 사자후(獅子吼)가 되어 조광조의 뇌리를 흔들었다. 사자후. 사자가 울부짖으면 뭇짐승들이 엎드려 떨듯이 20여 년 전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선비의 사상’은 하루아침에 반역죄인이 되어 유배를 떠나는 조광조의 가슴에 사자후가 되어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과연 스승 한훤당으로부터 ‘평생 잊지 말고 명심하라.’고 내린 유훈(遺訓)을 잊지 않고 지켜나가고 있었던 것일까. 조광조는 쉴새없이 흔들리는 수레 위에서 지난 세월 자신의 처신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반추하고 있었다.한훤당의 유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좁은 집 허술한 방,사립문에 거적문이 달린 집에 살며,옷을 갈아입어야 나갈 수 있고 이틀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할 형편이라 하더라도,임금이 응낙한 데 대하여는 감히 의심치 아니하며,임금이 응낙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히 아첨하지 않습니다.그들의 벼슬하는 태도는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옛 사람들에게 뜻을 두며,지금 세상에서 행동하고 있지만 후세의 모범이 됩니다.마침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임금이 끌어주지 아니하고 신하들은 밀어주지 아니하며,아첨을 일삼는 백성들 중에 붕당(朋黨)을 이루어 가지고 그를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그의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뜻을 뺏을 수는 없습니다.비록 위태롭다 하더라도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끝내 자기 뜻을 믿으며,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그들의 걱정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비는 널리 공부하되 그만두는 일이 없으며,독실한 행동함에 지치지 아니하고,홀로 거처하더라도 그릇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위로 출세를 한다 하더라도 덕이 부족하여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하며,예로서 사람들을 대하되 조화를 귀중히 여기며,충성과 신의를 찬양하고,온화하고 유순한 것을 법도로 삼으며,현명한 사람을 흠모하되 모든 사람들을 용납하며,자기의 모난 것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과 화합하고자 합니다.그들의 관대하고 너그러움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안에서 사람을 천거함에 친한 사람이라 하여 기피하지 않고,밖에서 사람을 천거함에 원수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피하지 않습니다.그의 공로를 드러내고 한 일들을 종합하여 현명한 사람이면 누구나 추천하여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하되 그 보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임금이 그의 뜻을 이해하여 사람을 씀으로써 진실로 국가를 이롭게 하려고만 하지 부귀를 추구하지는 않습니다.그들이 현명한 이들을 천거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추천함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훌륭한 것을 들으면 남에게도 알려주고,훌륭한 것을 보면 남에게도 보여줍니다.벼슬자리에는 서로 남을 앞세우고,환난을 당하면 서로 죽음을 무릅쓰며,오랜 동안라도 남이 먼저 승진(昇進)하기를 기다리고,먼 곳의 사람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서로 불러 벼슬하게 합니다.그들이 벼슬하고 남을 내세움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자신을 깨끗이 건사하고 덕(德)으로 목욕을 하며,임금에게 의견을 아뢰고는 엎드려 하회를 기다리고,고요히 물러나서도 홀로 올바른 길을 지킵니다.임금이 알아주지 않고 소원히 대하더라도 은근히 깨우쳐 드리되 서두르는 법이 없습니다.낮은 사람들을 대함에 오만하지 아니하고,자기만 못한 사람들 앞에 뽐내는 법이 없습니다….”˝
  • 儒林(6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는 천천히 그 내용을 읽어 보았다. “나으리,나으리의 재능은 족히 한 시대를 경제(經濟)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오나 그것은 반드시 주상의 마음을 얻은 후에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갖바치의 마지막 편지는 조광조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였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나으리께오서는 반드시 주상의 마음을 얻어 하늘에서부터 새는 비를 우산으로 막아야만 태평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오나 주상께오서는 지금 명성 때문에 나으리를 쓰시지만 실제로는 나으리를 잘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만일 나으리와 주상 사이에 소인이 끼어든다면 나으리께오서는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갖바치의 문장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조광조 역시 중종의 유약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갖바치의 말대로 지금 주상은 필요성 때문에 자신을 쓰지만 언젠가는 변심하여 내칠지도 모른다. 소인(小人).이는 유교에서 군자(君子)와 대비되는 사람으로 ‘학문이 깊고,덕이 높고,행실이 바른 사람’을 군자라고 일컫고 있으며,이에 비하면 소인은 ‘학문이 얕고 이익을 좇아 함부로 날뛰는 소인배’를 뜻하는 것이다.논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공자의 가르침은 ‘군자의 학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사람들이 훌륭한 군자가 될 것을 열심히 설교하고 있으며,공자는 군자와 소인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로움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군자는 편안함에서 교만하지 않고,소인은 교만하면서 편안하지 못하다.(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조광조 역시 갖바치의 충고대로 평소 소인의 음모를 경계하고 있었다.그는 평소 중종에게 왕으로서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면서 이 세상에 음과 양,낮과 밤이 있는 것처럼 조정에서는 군자와 소인이 섞여있을 수밖에 없어 이들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군주 자신의 판단력 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군자와 소인은 구별하기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대감이 논하고 재상이 개진하는 바에 따라 그 사람이 현명한지,안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그래도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옛날에는 임금이 신하들 접하기를 마치 아비와 형이 자식과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하여 생각하는 바를 모두 토로하게 하였기 때문에 임금은 그들이 행하는 것을 보고 그 말 하는 것을 들으며 그 사람의 깊이 숨어 있는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중략)… 비록 현명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왕을 가까이 모실 때에는 착한 말 하는 척하며,언사를 꾸며서 아뢰므로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아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그러므로 후세에 와서는 사람을 알아보기가 어렵게 되었으므로 임금 된 사람은 한층 더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그때 조광조는 갖바치가 남기고간 문서의 내용을 다 읽어 보고 그것을 수표교 위에서 찢어버렸다.찢어진 종이 조각은 모래톱 위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아낙네를 지나 청계천의 맑은 개울물을 따라 흘러가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벌써 1년여 전. 그 일년 동안 조광조는 얼마나 갖바치에 대해 수소문하였던가.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는가 하면 사물놀이패 각설이를 따라서 전국을 떠돈다는 뜬소문이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조광조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갖바치의 모습을 쳐다보며 생각하였다. 바로 그 갖바치가 1년 만에 제 발로 나타난 것이었다.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광조가 죄인이 되어 유배 길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한양에서부터 줄달음질쳐서 좇아온 것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대의 말이 정확하였네,그려.” 조광조는 탄식하여 웃으며 말하였다. “나와 주상 사이에 소인이 끼어든다면 화를 면할 수 없다던 그대의 참위가 오늘날 그대로 들어맞았네,그려.”
  • 儒林(6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는 천천히 그 내용을 읽어 보았다. “나으리,나으리의 재능은 족히 한 시대를 경제(經濟)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오나 그것은 반드시 주상의 마음을 얻은 후에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갖바치의 마지막 편지는 조광조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였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나으리께오서는 반드시 주상의 마음을 얻어 하늘에서부터 새는 비를 우산으로 막아야만 태평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오나 주상께오서는 지금 명성 때문에 나으리를 쓰시지만 실제로는 나으리를 잘 모르고 계실 것입니다.만일 나으리와 주상 사이에 소인이 끼어든다면 나으리께오서는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갖바치의 문장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조광조 역시 중종의 유약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갖바치의 말대로 지금 주상은 필요성 때문에 자신을 쓰지만 언젠가는 변심하여 내칠지도 모른다. 소인(小人).이는 유교에서 군자(君子)와 대비되는 사람으로 ‘학문이 깊고,덕이 높고,행실이 바른 사람’을 군자라고 일컫고 있으며,이에 비하면 소인은 ‘학문이 얕고 이익을 좇아 함부로 날뛰는 소인배’를 뜻하는 것이다.논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공자의 가르침은 ‘군자의 학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사람들이 훌륭한 군자가 될 것을 열심히 설교하고 있으며,공자는 군자와 소인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로움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군자는 편안함에서 교만하지 않고,소인은 교만하면서 편안하지 못하다.(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조광조 역시 갖바치의 충고대로 평소 소인의 음모를 경계하고 있었다.그는 평소 중종에게 왕으로서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면서 이 세상에 음과 양,낮과 밤이 있는 것처럼 조정에서는 군자와 소인이 섞여있을 수밖에 없어 이들을 구별하는 것은 오직 군주 자신의 판단력 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군자와 소인은 구별하기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대감이 논하고 재상이 개진하는 바에 따라 그 사람이 현명한지,안한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그래도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옛날에는 임금이 신하들 접하기를 마치 아비와 형이 자식과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하여 생각하는 바를 모두 토로하게 하였기 때문에 임금은 그들이 행하는 것을 보고 그 말 하는 것을 들으며 그 사람의 깊이 숨어 있는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중략)… 비록 현명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왕을 가까이 모실 때에는 착한 말 하는 척하며,언사를 꾸며서 아뢰므로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아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그러므로 후세에 와서는 사람을 알아보기가 어렵게 되었으므로 임금 된 사람은 한층 더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그때 조광조는 갖바치가 남기고간 문서의 내용을 다 읽어 보고 그것을 수표교 위에서 찢어버렸다.찢어진 종이 조각은 모래톱 위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아낙네를 지나 청계천의 맑은 개울물을 따라 흘러가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벌써 1년여 전. 그 일년 동안 조광조는 얼마나 갖바치에 대해 수소문하였던가.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는가 하면 사물놀이패 각설이를 따라서 전국을 떠돈다는 뜬소문이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조광조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갖바치의 모습을 쳐다보며 생각하였다. 바로 그 갖바치가 1년 만에 제 발로 나타난 것이었다.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광조가 죄인이 되어 유배 길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한양에서부터 줄달음질쳐서 좇아온 것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대의 말이 정확하였네,그려.” 조광조는 탄식하여 웃으며 말하였다. “나와 주상 사이에 소인이 끼어든다면 화를 면할 수 없다던 그대의 참위가 오늘날 그대로 들어맞았네,그려.”˝
  • [씨줄날줄] 지옥문/이기동 논설위원

    지옥문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서울시내 남대문 옆 로댕갤러리에 가서 입장료 2000원만 내면 지옥문 저편 끔찍한 장면들을 실컷 볼 수 있다.로댕의 필생의 역작 ‘지옥문’은 거푸집 주형으로 모두 7개가 만들어져 파리 로댕미술관,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을 비롯,세계 각지에 보관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칼레의 시민’과 함께 서울 로댕갤러리에 상설전시돼 있는 것이다. 지옥문에는 단테의 ‘신곡’을 토대로 200여 인간군상이 그려내는 아비규환의 장면들이 반복 조각돼 있다.육욕의 죄를 지어 영원히 잡을 수 없는 여인을 뒤좇는 ‘허무한 사랑’.아이들의 주검앞에 절규하다 배고픔을 못이겨 결국 그 시신을 먹는 ‘우골리노와 아이들’.지옥문 입구에 써있는 ‘이곳에 들어가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의 문구를 형상화한 세 망령,생각하는 사람…. 불교의 지옥은 보다 사실적이다.목련경은 부처의 10대 제자중 가장 신통력이 뛰어났다는 대목건련이 쓴 지옥견유기.18개 아비대지옥의 하나인 검수지옥(劍樹地獄)은 사방이 날카로운 칼날로 뒤덮인 나무에 매달려 고통받는 중생들이 사는 지옥.맷돌로 죄인을 갈아 고통을 주는 석할지옥(石割地獄)도 있다.쉴 틈 없이 계속 고통받는 지옥을 통칭 아비대지옥,그 고통을 못이겨 중생들이 지르는 소리를 일컬어 아비규환(阿鼻叫喚)이라 부른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지도자 셰이크 아흐마드 야신을 살해한 데 대해 하마스 지도부가 “샤론 이스라엘 총리가 지옥문을 열었다.”는 말로 피의 보복을 선언했다.이스라엘군은 하마스가 자살폭탄 테러로 이스라엘인들을 살해한 데 대한 보복으로 야신을 죽였다고 주장한다.공격을 당하면 그 열배의 보복으로 되갚는 게 양측의 생존논리.이스라엘 건국 후 반세기를 그렇게 죽고 죽여왔다. 지난 3년여 계속된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봉기)기간중 양측 사망자가 4000여명.야신 장례식에 20여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유대인 전멸 때까지 서로 순교자가 되겠다고 외쳐댔다.지난 살육의 역사 동안 두 민족 모두 사실상 지옥문 저편에서 살아온 셈.‘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중동문제는 한 영토에 두 민족이 함께 살아야 하는 숙명이 만들어낸 문제.누가 누구를 더 탓하랴.서로 공존의 지혜를 모으는 것 외에는 길이 없어 보이는데,그게 안 되는 게 또 인간의 역사인가 보다. 이기동 논설위원 yeekd@˝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儒林(54)-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54)-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원래 이자는 교제가 넓어 조광조를 숙청하는데 앞장 선 남곤과도 원만하게 지내어 평소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앞장섰던 중도파였다.그러나 파직이 되어 자신의 초당으로 내려왔다가 막상 죄수가 되어 유배를 떠나는 조광조를 보자 기가 막혀 눈물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대감.” 이자는 울면서 말하였다. “지나는 길에 잠시 선영에 들러 예를 표하고 떠나시지요.” 용인은 조광조의 부친이었던 조원강(趙元綱)의 묘소가 있어 조광조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고장이었다.조광조의 부친뿐 아니라 그의 조부,조광조의 사후에는 그의 묘소가 이장된 곳이며,부인 이씨뿐 아니라 조광조의 아들이었던 정(定)과 용(容) 등 모든 가족들이 묻혀있는 선산이었던 것이다.특히 그의 부친이었던 조원강이 19세 때 죽자 부친의 묘소 앞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하는 한편 학문에 정진하였던 조광조에게는 유서 깊은 고장이었던 것이다.주자가례에 따라 부친의 묘아래 여막(廬幕)을 마련해두고 잠을 잘 때에도 참최(斬衰)를 벗지 않고 아침저녁 드리는 제상의 제기들도 종을 시키지 않고 손수 씻어 제사를 올렸던 곳이었다.3년의 시묘가 끝났어도 조광조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여막이 있던 자리에 초당을 마련하여 집 앞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연꽃과 잔 나무도 심어놓고 학문에 정진하였던 곳으로 조광조의 정치사상이 완성된 곳이었던 것이다.벼슬길에 올랐을 때도 조광조는 가끔 이곳에 들러 성묘를 하면서 지친 심신을 회복하는 특별한 장소였던 것이다.용인의 심곡리,지금의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인 이곳은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고향이었던 것이다.따라서 조광조가 마음만 먹으면 잠시 유배길을 멈추고 선영에 들러 이자의 권유대로 예를 표하고 떠날 수 있음이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국법을 어긴 강상(綱常)죄인이 되어,내 어찌 선영에 참배할 수 있겠소이까.그 대신.” 조광조는 이자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문충공의 묘소에는 잠시 들려서 예를 표하고 떠나겠소.” 문충공(文忠公)은 고려 말의 충신.정몽주(鄭夢周)를 가리키는 말로 조광조는 평소에 정몽주와 그의 스승이었던 김굉필(金宏弼),두 사람을 사표로 삼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이자는 나장에게 소리쳐 말하였다. “잠시 수레를 돌려 문충공의 묘소로 향하도록 하라.” 정몽주의 묘소는 모현면 능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용인현에서 동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는 외진 곳이었다. 압송을 맡은 나장들은 어쩔 수 없이 수레의 방향을 정몽주의 묘소로 바꾸었다.묘소에 이르자 조광조는 잠시 수레에서 내려 이자와 함께 제단 위에 술을 따르고 배를 올려 예를 갖추었다. 정몽주. 고려 말의 충신.이성계가 날로 위망(威望)이 높아져서 고려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보이자 이성계를 먼저 제거하려다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에 의해서 선죽교(善竹橋)위에서 이방원의 부하인 조영규(趙英珪)에게 격살되었던 천품이 높고 충효를 겸하였던 충신 정몽주. 생전에 조광조는 정몽주를 사숙하여 항상 이렇게 말하곤 하였던 것이다. “내겐 두 사람의 스승이 있다.죽은 사람으로서는 문충공이고,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한훤당(寒喧堂)이었다.” 한훤당은 김굉필을 가리키는 것으로 조광조가 17세 때 직접 찾아가 사제로서의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었다.
  • 儒林(54)-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원래 이자는 교제가 넓어 조광조를 숙청하는데 앞장 선 남곤과도 원만하게 지내어 평소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앞장섰던 중도파였다.그러나 파직이 되어 자신의 초당으로 내려왔다가 막상 죄수가 되어 유배를 떠나는 조광조를 보자 기가 막혀 눈물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대감.” 이자는 울면서 말하였다. “지나는 길에 잠시 선영에 들러 예를 표하고 떠나시지요.” 용인은 조광조의 부친이었던 조원강(趙元綱)의 묘소가 있어 조광조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고장이었다.조광조의 부친뿐 아니라 그의 조부,조광조의 사후에는 그의 묘소가 이장된 곳이며,부인 이씨뿐 아니라 조광조의 아들이었던 정(定)과 용(容) 등 모든 가족들이 묻혀있는 선산이었던 것이다.특히 그의 부친이었던 조원강이 19세 때 죽자 부친의 묘소 앞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하는 한편 학문에 정진하였던 조광조에게는 유서 깊은 고장이었던 것이다.주자가례에 따라 부친의 묘아래 여막(廬幕)을 마련해두고 잠을 잘 때에도 참최(斬衰)를 벗지 않고 아침저녁 드리는 제상의 제기들도 종을 시키지 않고 손수 씻어 제사를 올렸던 곳이었다.3년의 시묘가 끝났어도 조광조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여막이 있던 자리에 초당을 마련하여 집 앞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연꽃과 잔 나무도 심어놓고 학문에 정진하였던 곳으로 조광조의 정치사상이 완성된 곳이었던 것이다.벼슬길에 올랐을 때도 조광조는 가끔 이곳에 들러 성묘를 하면서 지친 심신을 회복하는 특별한 장소였던 것이다.용인의 심곡리,지금의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인 이곳은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고향이었던 것이다.따라서 조광조가 마음만 먹으면 잠시 유배길을 멈추고 선영에 들러 이자의 권유대로 예를 표하고 떠날 수 있음이었다. 그러나 조광조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국법을 어긴 강상(綱常)죄인이 되어,내 어찌 선영에 참배할 수 있겠소이까.그 대신.” 조광조는 이자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문충공의 묘소에는 잠시 들려서 예를 표하고 떠나겠소.” 문충공(文忠公)은 고려 말의 충신.정몽주(鄭夢周)를 가리키는 말로 조광조는 평소에 정몽주와 그의 스승이었던 김굉필(金宏弼),두 사람을 사표로 삼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이자는 나장에게 소리쳐 말하였다. “잠시 수레를 돌려 문충공의 묘소로 향하도록 하라.” 정몽주의 묘소는 모현면 능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용인현에서 동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는 외진 곳이었다. 압송을 맡은 나장들은 어쩔 수 없이 수레의 방향을 정몽주의 묘소로 바꾸었다.묘소에 이르자 조광조는 잠시 수레에서 내려 이자와 함께 제단 위에 술을 따르고 배를 올려 예를 갖추었다. 정몽주. 고려 말의 충신.이성계가 날로 위망(威望)이 높아져서 고려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보이자 이성계를 먼저 제거하려다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에 의해서 선죽교(善竹橋)위에서 이방원의 부하인 조영규(趙英珪)에게 격살되었던 천품이 높고 충효를 겸하였던 충신 정몽주. 생전에 조광조는 정몽주를 사숙하여 항상 이렇게 말하곤 하였던 것이다. “내겐 두 사람의 스승이 있다.죽은 사람으로서는 문충공이고,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한훤당(寒喧堂)이었다.” 한훤당은 김굉필을 가리키는 것으로 조광조가 17세 때 직접 찾아가 사제로서의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었다.˝
  • 儒林(5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5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젊은 유생들은 자신의 직접적인 스승격인 조광조와 김식 등이 투옥되자 정의감이 폭발되었다.수백 명의 유생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거리로 나서 대궐로 향하였다.광화문 밖에 이르렀을 때 신명인(申命仁)이란 학생이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다. “상두꾼들도 상소를 올려 신원하려 하거늘,하물며 여러분 유생들이 아직도 상소를 준비하지 못함은 어찌된 일이오.” 신명인의 말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천한 상여꾼들도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기 위해서 신원하는데,어찌 스승인 조광조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는데 이를 보고만 있겠느냐는 고함소리에 유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덤벼들었다. 신명인이 붓을 들어 상소문을 초하니,나머지 유생들도 거들어 순식간에 연명으로 된 상소가 완성되었다. 이 유생들의 대표는 이약수(李若水)였다.이들 150여 명은 궐기대회를 가진 후 곧 대궐을 향해 시위행렬을 계속해 나갔다.문을 지키는 군졸들이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허사였다.학생들은 저지선을 맹렬한 기세로 뚫고 들어가 합문(閤門) 앞에까지 이르렀다.이 과정에서 여러 유생들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들은 합문 앞에 이르러 상소를 올린 후 모두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하였다.기록에 의하면 유생들의 곡성이 대궐을 진동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곡성이 온 대궐을 뒤흔들었으므로 자연 중종이 이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중종은 크게 놀랐고,곧이어 승지로부터 이들이 보낸 상소문을 전해 받아 읽어보았지만 상소문을 읽은 중종은 더욱더 화를 내며 말하였다. “유생들의 처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노라.대궐 안에 함부로 난입해 들어와도 죄가 되거늘,하물며 문을 밀치고 들어와 곡성을 냄은 천고에 없는 일이 아닌가.” 중종은 주동자를 색출하여 엄단하도록 명령내리는 한편 금군을 풀어 유학생들을 궐내에서 쫓아내게 하였다.어명을 받은 군사들이 이들을 모두 쫓아내려 하였지만 유생들은 필사적이었다.옷과 갓이 찢어지고,상처 입은 몸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상소를 올린 주동자 다섯 명,즉 이약수,윤언직(尹彦直),박세호(朴世豪),김수성(金遂性),황계옥(黃季沃) 등은 곧 체포되었는데,모든 유생들이 모두 함께 잡혀 가길 원하니,감옥이 부족하여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조광조가 중종의 교지가 내려지자마자 즉시 능주로 유배를 떠나게 된 것은 이처럼 흉흉한 민심 때문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조광조를 도성에 머물도록 하였다간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서둘러 조광조를 귀양길로 쫓아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의 유배 길은 이와 같은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전송하는 백성들에 의해서 외로운 것만은 아니었다.조광조를 압송하는 나장들도 비록 조광조가 죄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를 함부로 다룰 수는 없음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최고의 권세를 가졌던 인물이었으므로 나장들도 조광조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지방의 많은 관원들도 나와서 조광조를 위문하였고,선산이 있는 용인을 지날 때에는 이자(李)의 전송을 받을 수 있었다. 이자는 우참찬으로 조광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에 의해서 ‘장차 국가에 크게 이바지할 인물이오니 아무쪼록 의금부로 하여금 죄가 있고 없음을 분명히 가리어 처결토록 하소서’란 탄원을 받고 특별히 사면되었던 것이다.이자는 감옥에서 석방되자마자 자신의 초당이 있는 용인으로 내려왔다가 마침내 유배지로 떠나는 조광조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대감.” 비참한 모습의 조광조를 보자 이자는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으며 말하였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 오니까.”
  • [씨줄날줄] 과태료 50배/이상일 논설위원

    고 함병춘 박사는 자신의 국제정치 안목에 대해 한 미국인이 “아직도 유교적”이라고 비판한 사실을 전한 바 있다.한·미 관계에서 이익 추구외에 신의나 성실을 내세우는 함 박사의 동양적 시각을 간파한 것이다.함 박사는 국내 정치에서도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적지 않게 배어 있다고 말했다.예컨대 선거때 출마하는 입후보자가 어색해 한다거나 자신에게 투표해달라고 직접 호소하기보다 대신 칭찬해줄 찬조연사를 동원하는 것 등이 그런 예라고 지적했다.실제 음식을 차려놓고 잔치판처럼 정치행사를 치르며 후보는 나타나지 않는 걸 흔히 볼 수 있다.그 주변 인물들이 분위기를 띄우고 후보 지지를 호소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7일 모 정당의 지구당 행사후 초콜릿 선물(6000원)과 식사(9250원) 등 1만 5250원을 제공받은 유권자 3명에게 각각 그 50배인 76만 2500원씩의 과태료(過怠料)를 부과키로 했다고 발표했다.음식을 제공해 검찰에 고발된 사람은 지구당 관계자의 부인이었다.향응 받은 유권자들이 과태료를 내지 않으면 세무서장에게 통보된다. 과태료는 일종의 금전벌(金錢罰)로 불법 과외나 주·정차 위반 등 행정질서를 위반했지만 위반 행위가 크지 않을 경우에 매긴다.유권자에게 제공받은 음식의 50배에 해당하는 과태료를 부과한 것은 정치판에서 돈을 준 측뿐 아니라 받은 사람도 처벌,혼탁한 선거분위기를 바로잡으려는 포석이다.사실 선거를 앞두고 부패한 유권자들도 적지 않았다.자신들의 관광여행이나 오락행사에 후보들이 돈을 내도록 요구하는 경우도 있어 과태료치고는 일벌백계의 무거운 뜻을 담고 있다. 다만 한국적 정치판 분위기를 과태료로 일거에 바로잡을 수 있을까,궁금하다.프랑스 학자 뒤르캥은 “처벌이 진정으로 미래에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으려면,우리는 무엇보다도 과거의 단죄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며 “만약 우리가 어떤 죄인이 나쁜 짓을 한 만큼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면,그러한 우리(처벌하려는)노력은 설명될 수 없다.”고 말했다.‘과태료 50배’는 기존 관행에 익숙한 유권자들에게 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하며 쇼크로 작용할 것이다.수백억원의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이 버젓이 활보,불형평감을 주긴 하지만 말이다. 이상일 논설위원˝
  • 儒林(53)-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젊은 유생들은 자신의 직접적인 스승격인 조광조와 김식 등이 투옥되자 정의감이 폭발되었다.수백 명의 유생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거리로 나서 대궐로 향하였다.광화문 밖에 이르렀을 때 신명인(申命仁)이란 학생이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다. “상두꾼들도 상소를 올려 신원하려 하거늘,하물며 여러분 유생들이 아직도 상소를 준비하지 못함은 어찌된 일이오.” 신명인의 말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천한 상여꾼들도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씻기 위해서 신원하는데,어찌 스승인 조광조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는데 이를 보고만 있겠느냐는 고함소리에 유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덤벼들었다. 신명인이 붓을 들어 상소문을 초하니,나머지 유생들도 거들어 순식간에 연명으로 된 상소가 완성되었다. 이 유생들의 대표는 이약수(李若水)였다.이들 150여 명은 궐기대회를 가진 후 곧 대궐을 향해 시위행렬을 계속해 나갔다.문을 지키는 군졸들이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허사였다.학생들은 저지선을 맹렬한 기세로 뚫고 들어가 합문(閤門) 앞에까지 이르렀다.이 과정에서 여러 유생들이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들은 합문 앞에 이르러 상소를 올린 후 모두 무릎을 꿇고 땅을 치며 통곡하기 시작하였다.기록에 의하면 유생들의 곡성이 대궐을 진동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곡성이 온 대궐을 뒤흔들었으므로 자연 중종이 이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중종은 크게 놀랐고,곧이어 승지로부터 이들이 보낸 상소문을 전해 받아 읽어보았지만 상소문을 읽은 중종은 더욱더 화를 내며 말하였다. “유생들의 처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노라.대궐 안에 함부로 난입해 들어와도 죄가 되거늘,하물며 문을 밀치고 들어와 곡성을 냄은 천고에 없는 일이 아닌가.” 중종은 주동자를 색출하여 엄단하도록 명령내리는 한편 금군을 풀어 유학생들을 궐내에서 쫓아내게 하였다.어명을 받은 군사들이 이들을 모두 쫓아내려 하였지만 유생들은 필사적이었다.옷과 갓이 찢어지고,상처 입은 몸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상소를 올린 주동자 다섯 명,즉 이약수,윤언직(尹彦直),박세호(朴世豪),김수성(金遂性),황계옥(黃季沃) 등은 곧 체포되었는데,모든 유생들이 모두 함께 잡혀 가길 원하니,감옥이 부족하여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조광조가 중종의 교지가 내려지자마자 즉시 능주로 유배를 떠나게 된 것은 이처럼 흉흉한 민심 때문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조광조를 도성에 머물도록 하였다간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서둘러 조광조를 귀양길로 쫓아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의 유배 길은 이와 같은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전송하는 백성들에 의해서 외로운 것만은 아니었다.조광조를 압송하는 나장들도 비록 조광조가 죄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를 함부로 다룰 수는 없음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최고의 권세를 가졌던 인물이었으므로 나장들도 조광조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지방의 많은 관원들도 나와서 조광조를 위문하였고,선산이 있는 용인을 지날 때에는 이자(李)의 전송을 받을 수 있었다. 이자는 우참찬으로 조광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에 의해서 ‘장차 국가에 크게 이바지할 인물이오니 아무쪼록 의금부로 하여금 죄가 있고 없음을 분명히 가리어 처결토록 하소서’란 탄원을 받고 특별히 사면되었던 것이다.이자는 감옥에서 석방되자마자 자신의 초당이 있는 용인으로 내려왔다가 마침내 유배지로 떠나는 조광조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대감.” 비참한 모습의 조광조를 보자 이자는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으며 말하였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 오니까.”˝
  • 儒林(52)-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52)-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1519년 11월 17일. 마침내 죄인 조광조의 유배행렬은 황급히 한양을 출발하였다. 조광조를 능주까지 압송하는 나장들은 의금부 소속의 사령들이었는데,그 숫자가 여섯 명에 이르는 삼엄한 행렬이었다.이들의 임무는 조광조를 유배지 능주까지 압송한 후 고을수령에게 인도하는 일이었다.특히 의금부 소속의 나장들은 납패( 牌)를 차고 있었는데,이들은 다른 나졸들과는 달리 군기가 세고 권위를 갖고 있었다. 조광조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방책에 둘러싸여서 이송되고 있었는데,조광조를 알아본 수많은 백성들이 다투어 다가와 통곡하였으며,이때마다 나장들은 손에 든 주장으로 이들을 쫓아 버리곤 하였다. 백성들은 한결같이 조광조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그들은 조광조가 실시하였던 향약(鄕約)에 대한 소문들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향약은 문자 그대로 동네주민들 사이의 생활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데,향약은 주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에서 비롯되었다.중국 북송말기 남전(藍田)에 살고 있던 여대방(呂大防)형제가 가문의 약속으로 만든 ‘여씨향약(呂氏鄕約)’이 그 모체였다.이 향약의 약조는 대충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그 하나는 덕업상권(德業相勸)으로 효도와 미덕 등 덕 있는 일을 서로 권하는 것과 그 둘째는 과실상규(過失相規)로 잘 못하는 일을 서로 바로잡는 것이며,셋째는 예속상교(禮俗相交)로 예절을 다하여 서로 사귀기를 가르치는 것이며,그 넷째는 환난상휼(患難相恤)로 화재나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서로 돕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이는 백성들의 풍속을 순화시키고 상호부조하게 하는 일종의 지방자치단체의 협약이었던 것이었다.조광조가 향약을 실시한 것은 이와 같이 작은 규모의 풀뿌리 자치행정에서부터 그가 생각하는 혁신정치를 실현시킴으로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새로운 기풍을 불러오기 위함이었다. 이미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건국하면서 이 향약을 중시하여 태조 주원장 때부터 전국을 200∼300호의 가구로 분할하여 향약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조광조는 미신타파와 아울러 백성들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향약의 점진적 확대를 주장하였으며,그리하여 지난 10월에는 향약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할 것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광조가 실시하였던 향약은 백성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백성들은 향약을 통해 자신들이 국가의 주체이며,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자부심을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훗날 김육(金堉)은 그가 쓴 ‘기묘록(己卯錄)’에서 조광조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다. “조정암이 정치를 맡았던 1년 동안에 향약을 통해 시중소민들은 그 부모를 잘 섬기고,자식을 정성껏 기르며,장사(葬事)에는 깊이 애통하여 3년 복을 입고,군졸이나 천한 사람들까지 시묘(侍墓)하고 제사에 위패를 모시고 묘에 비를 세우게 되었다.만약 조정암의 행적이 수년간 계속되었더라면 풍속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이 대동법을 만들어 충청도에서 이를 시행하여 지방자치에 큰 성공을 거두었던 김육의 표현대로 시중소민(市中小民),즉 백성들은 조광조가 펼친 향약에 대해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따라서 조광조에게 깊은 신뢰를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조광조가 하루아침에 죄수가 되어 유배를 떠난다는 소문이 떠돌자 너나할 것 없이 수많은 백성들이 조광조의 행렬을 찾아 울며 애통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광조를 호송하는 나장들은 격리시키기 위해서 주장을 들고 위협하거나 때리기도 하였지만 구름처럼 모여드는 백성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유배를 슬퍼한 사람들은 백성들 뿐만이 아니었다. 성균관도 들고 일어선 것이었다.조광조 등이 옥에 갇혔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제일 먼저 시위에 나섰던 사람들이 바로 성균관의 유생들이었던 것이다.
  • 儒林(52)-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1519년 11월 17일. 마침내 죄인 조광조의 유배행렬은 황급히 한양을 출발하였다. 조광조를 능주까지 압송하는 나장들은 의금부 소속의 사령들이었는데,그 숫자가 여섯 명에 이르는 삼엄한 행렬이었다.이들의 임무는 조광조를 유배지 능주까지 압송한 후 고을수령에게 인도하는 일이었다.특히 의금부 소속의 나장들은 납패( 牌)를 차고 있었는데,이들은 다른 나졸들과는 달리 군기가 세고 권위를 갖고 있었다. 조광조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방책에 둘러싸여서 이송되고 있었는데,조광조를 알아본 수많은 백성들이 다투어 다가와 통곡하였으며,이때마다 나장들은 손에 든 주장으로 이들을 쫓아 버리곤 하였다. 백성들은 한결같이 조광조에 대한 신의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그들은 조광조가 실시하였던 향약(鄕約)에 대한 소문들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향약은 문자 그대로 동네주민들 사이의 생활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데,향약은 주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에서 비롯되었다.중국 북송말기 남전(藍田)에 살고 있던 여대방(呂大防)형제가 가문의 약속으로 만든 ‘여씨향약(呂氏鄕約)’이 그 모체였다.이 향약의 약조는 대충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그 하나는 덕업상권(德業相勸)으로 효도와 미덕 등 덕 있는 일을 서로 권하는 것과 그 둘째는 과실상규(過失相規)로 잘 못하는 일을 서로 바로잡는 것이며,셋째는 예속상교(禮俗相交)로 예절을 다하여 서로 사귀기를 가르치는 것이며,그 넷째는 환난상휼(患難相恤)로 화재나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서로 돕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이는 백성들의 풍속을 순화시키고 상호부조하게 하는 일종의 지방자치단체의 협약이었던 것이었다.조광조가 향약을 실시한 것은 이와 같이 작은 규모의 풀뿌리 자치행정에서부터 그가 생각하는 혁신정치를 실현시킴으로써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새로운 기풍을 불러오기 위함이었다. 이미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건국하면서 이 향약을 중시하여 태조 주원장 때부터 전국을 200∼300호의 가구로 분할하여 향약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조광조는 미신타파와 아울러 백성들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향약의 점진적 확대를 주장하였으며,그리하여 지난 10월에는 향약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할 것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광조가 실시하였던 향약은 백성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백성들은 향약을 통해 자신들이 국가의 주체이며,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자부심을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훗날 김육(金堉)은 그가 쓴 ‘기묘록(己卯錄)’에서 조광조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하고 있다. “조정암이 정치를 맡았던 1년 동안에 향약을 통해 시중소민들은 그 부모를 잘 섬기고,자식을 정성껏 기르며,장사(葬事)에는 깊이 애통하여 3년 복을 입고,군졸이나 천한 사람들까지 시묘(侍墓)하고 제사에 위패를 모시고 묘에 비를 세우게 되었다.만약 조정암의 행적이 수년간 계속되었더라면 풍속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이 대동법을 만들어 충청도에서 이를 시행하여 지방자치에 큰 성공을 거두었던 김육의 표현대로 시중소민(市中小民),즉 백성들은 조광조가 펼친 향약에 대해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따라서 조광조에게 깊은 신뢰를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조광조가 하루아침에 죄수가 되어 유배를 떠난다는 소문이 떠돌자 너나할 것 없이 수많은 백성들이 조광조의 행렬을 찾아 울며 애통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광조를 호송하는 나장들은 격리시키기 위해서 주장을 들고 위협하거나 때리기도 하였지만 구름처럼 모여드는 백성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유배를 슬퍼한 사람들은 백성들 뿐만이 아니었다. 성균관도 들고 일어선 것이었다.조광조 등이 옥에 갇혔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제일 먼저 시위에 나섰던 사람들이 바로 성균관의 유생들이었던 것이다.˝
  • 儒林(50)-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50)-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1519년 11월 16일. 조선 역사상 가장 길고 길었던 한밤의 숙청극은 중종이 조광조에게 참형의 교지를 확정하여 내림으로써 마침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이 비극적인 숙청이 일어났던 해는 기묘년.따라서 후세 사람들은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부르고 있다.결과적으로 정치적인 개혁의 희생양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는 조광조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공초를 올려 자신의 죄상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공초란 죄인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사실에 대해 진술하고 이에 서명하는 일인데,술에서 깨어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최후진술을 하고 있다. “신의 나이가 38세에 이르기까지 선비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믿은 것은 오직 군심(君心)뿐입니다.국가의 병폐가 모두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이원(利源)에 있다고 망령되이 생각하여 국맥을 영구히 새롭게 하고자 했을 뿐 전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담담하게 진술한 조광조뿐 아니라 8명의 죄인들도 공동으로 작성하여 중종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리고 있다. “신들은 모두 뜻만 높고 어리석은 자들로서 어진 상감을 만나 경연에 드나들면서 성덕을 가까이하고 상감의 밝은 경광(耿光)만을 믿으며 미충(微衷)을 다하였습니다.간혹 많은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오직 상감만을 믿고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은 채 우리 임금님이 요순과 같이 되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그러니 어찌 사심(邪心)이 있었겠습니까.하늘이 내려다보는데 정말로 다른 사사로운 마음은 없었습니다.신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더라도 선비들의 참화가 한번 발생하면 장차 나라의 명맥이 염려되지 않겠습니까.천문(天門:대궐문을 가리킴)은 멀어 한번 직접 뵈옵고 말씀드릴 수 있다면 백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뜻은 넘치고 마음은 간절하지만 말이 차올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비장한 상소문은 중종에 의해 무시된다.‘한번 직접 뵈옵고 말씀드릴 수만 있으면 백번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진술함으로써 마지막으로 왕과의 면담을 간청하고 있는 8인의 진술은 그러나 중종에 의해서 철저하게 기각되는 것이다. 다만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정 김식 김구에게는 참형,나머지 4인에게는 귀양보내게 했던 처음의 형량을 변경하여 조광조 등 4인에게는 장 100대에 벽지에 안치시킬 것과 나머지 4인은 벽지에 부처(付處)시킬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었다.그나마 조광조가 참형에서 장형으로 감형되었던 것은 정광필을 비롯하여 안당과 같은 의정부 대신들이 눈물로 읍소하였기 때문이었다.특히 정광필은 조광조가 병약한 몸이라 장 100대도 과중하여 장형을 감하여줄 것을 탄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8인의 죄수들은 의금부 앞뜰에 모여서 중종이 내린 최후의 전지를 듣게 된다.중종의 전지를 대신 읽은 사람은 판중추부사였던 김정이었다.조광조를 비롯한 8인의 죄인들은 부복하고 군신으로서의 예의를 갖춰 왕이 있는 곳을 향해 큰절을 올린 후 모두 무릎을 꿇고 중종의 교지를 듣는다.기록에 의하면 중종의 전지는 다음과 같다. “…너희들은 모두 나를 시종하던 신하들로서 경연에 출입하면서 상하가 한마음으로 옳은 정치를 하려 하였으므로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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