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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정치인·관료 망언 릴레이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집권 자민당 중의원이기도 한 모리오카 마사히로 후생노동성 정무관이 26일 “A급전범은 일본 국내에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도쿄 전범재판은 일방적 재판”이라고 ‘망언’, 큰 파문이 예상된다. 한국과 중국의 강한 반발을 부를 전망이다. 모리오카 정무관은 이날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중국과 한국 등의 반발과 관련,“중국을 걱정해 (일본은) A급 전범이 곧 나쁜 존재인 것으로 처리해 왔다.”고 강변했다. 모리 전 총리도 이날 밤 도쿄도내에서 열린 자민당 중의원 의원 후원모임에서 인사말을 통해 한·중 양국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등에 반발하는 것에 대해 “역사를 미화한다라든가, 정부의 반성이 없다든가라는 것은 트집이다. 일본은 어떤 교과서든 검정을 받고 있다.”고 반박했다. 한편 마치무라 노부타카 일본 외상도 이날 니혼게이단렌 인사말에서 일본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과 관련,“일본의 교과서만큼 중립적이고 공정한 것은 없으며 전혀 문제가 없다.”며 “중국도 한국도 신문의 슬로건만 보고 비판하고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taein@seoul.co.kr
  • [독자의 소리] 대학 4학년으로 산다는 것/홍혜진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이 절로 실감나는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한숨부터 쉬게 된다.4학년의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현시점에서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고 신경성 알레르기가 생기는 등 몸에서부터 스트레스의 정도를 체감하게 된다. 취업을 하기 위해서라면, 한 학기는 기본이고 1년을 통째로 휴학하는 것이 요즘 대학생들에겐 선택 사항에 불과하다. 이력서에 어학연수경력이 한줄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라고 하는 현실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연수를 가는 동기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언젠가부터 대한민국은 토익·토플 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다. 방학이 되면 알 만한 영어학원들은 미어터지고 잠깐의 기간을 이용해 해외에 나갔다 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회에서는 영어 실력뿐 아니라 제2외국어 능력, 한자능력, 한국어능력, 학점, 외모 등 갖가지 조건들을 갖춘 졸업생들을 원한다. 최근엔 취업을 하기 위해 성형을 하고 다이어트를 감행하는 학우들도 더러 있다. 외국학생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너무나 암울하고 비정상적인 현실이다. 현재 대학 4학년생들은 학교나 집에서 취업에 대한 압박감과 주위의 시선 때문에 그들 현재의 위치가 불안하고 하루하루가 힘들다. 사회에서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어쩌면 ‘맞춤형 로봇’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사회의 잣대로 판단하여 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한다고 주눅들어 마치 죄인처럼 살아갈 순 없지 않은가. 그들이 현재 갖추고 있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부족한 능력을 갖춰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홍혜진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前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前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씨

    1980년 2월4일 오후 서울 서빙고동 국군보안사령부 분실장실.50여일 동안 감방생활을 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운명적으로 만났다. 장 사령관은 전 사령관보다 장교임관 5년선배였다.. “장 선배, 그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나야, 이래저래 죽을 몸인데 건강이 뭐가 중요하겠소. 그런데 전 장군, 난 수경사령관이오. 나의 임무(반란군 진압)가 뭔지 잘 알잖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 사령관은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정승화 육참총장이 김재규 사건과 관련이 있는데도 조사에 불응했습니다. 정 총장께서 총장직을 내놓고 6개월정도만 집에서 쉬고 계시면 국방부장관이나 더한 자리를 보장해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순간 장 사령관은 쿠데타 계획이 매우 치밀하게 짜여져 있음을 직감했다. 전 사령관의 얘기는 계속됐다. “장 선배가 한강다리를 막는 바람에 지금 금값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3만원하던 것이 7만원으로 뛰었고, 국제여론도 좋지 않습니다.” 무슨 생뚱맞는 얘기인가. 장 사령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그쳐 물었다. “전 장군, 정 총장은 나를 수경사령관으로 임명한 상관이요. 총장을 연행해 갔다는 사실을 왜 안 알려줬소.” “장 선배, 사실은 밑에 사람들이 장 선배를 사전에 연금시키자는 것을 내가 야단을 쳤어요.‘그 어른은 우리가 모시고 큰 일을 함께 할 분인데 그렇게 하면 되겠나.’라고 했지요. 장 선배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우리들은 그 다음날 장 선배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군단장으로 내보내려 했습니다. 사정을 이해해주시고 6개월 동안 집에서 쉬고 계시면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장 사령관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다.6.25전쟁도 겪지 않은 후배한테 철저하게 유린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장군, 군인이 군생활을 마치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일자리는 무슨 일자리요. 자, 이제 그만합시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소. 승부는 깨끗하게 합시다. 이 패장을 죽이지 않고 집으로 보내준다니 나가야지.” 장 사령관은 다시 감방으로 돌아왔다. 수사관들이 전역지원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령관님, 이거 예편서입니다. 써주셔야 하겠습니다.” “뭐라고 쓰면 돼?” “네, 일신상의 사유로 인해 예편을 상신합니다.” “알았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일제때 태어나 광복의 기쁨도 채 가시기 전 19세 어린 나이에 구국의 일념으로 6.25에 참전했다. 또 베트남전을 겪으며 무수히 많은 사선을 넘었다. 명예롭기는 커녕 12.12 군사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불충의 죄인으로 30년 동안 몸담았던 군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전역지원서를 쓴 장 사령관은 연행돼 올 때 입었던 소장 계급장의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때마침 노을지는 저녁무렵이었다. 서울 봉천동의 집에 도착하자 아들과 딸 부인과 누나 내외, 그리고 장모가 울음으로 맞이했다. ●드라마서 전두환을 유비·관우처럼 취급 이후 장 장군의 집안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우선 장 장군은 강제로 전역된 뒤 자택에서 2년동안 가택연금을 당했다. 또 TV뉴스를 통해 보안사에 끌려가는 장 장군의 모습을 본 시골의 아버지는 곡기를 완전히 끊고 매일 막걸리만 마시다가 80년 4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또 82년 2월에는 외아들이 장 장군의 곁을 떠나버렸다. 그것도 할아버지의 산소 근처에서 꽁꽁 얼어붙은 채로. 꼭 25년 세월이 흘렀다. 쿠데타 세력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장 장군은 재향군인회장,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등을 지내며 뒤늦게나마 명예회복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가슴에 묻어둔 천추의 한을 어찌 씻을 수 있으랴. 특히 요즘 TV드라마 ‘제5공화국’으로 그날을 생생하게 되새기고 있다. 서울 대치동 자택에서 장 장군을 만났다. “쿠데타를 하고 나서 집권을 위해 어느 한쪽을 손을 봐야 했지. 그래서 민주화를 외쳐대는 전라도 광주를 친 거야. 서빙고에서 알았지만 놈들은 정부운용 계획까지 치밀하게 짜놓았더군.” 카랑카랑한 특유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는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해. 날 좀 내버려둬.”하면서 처음에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거실 의자에 앉자 “아무리 드라마라고 하지만 문제가 많아”하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전두환을 무슨 유비나 관우처첨 취급하고 있어. 나머지는 다 샌님이야.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생각할거야.” 또한 “쿠데타는 5·16이나 12·12에서 보듯 불과 200∼300명의 군인이 저질러. 이런 것이 미화되면 누가 아들을 군대에 보내겠으며, 목숨으로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들을 욕되게 하는 거야.”라고 했다. 그가 지적한 드라마 ‘제5공화국’의 오류. 첫째 쿠데타의 배경과 대통령 유고 상황에서 국가적 시스템이 전혀 작동되지 않은 부분을 쏙 빼버렸다는 것.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좌의 안위를 위해 전두환씨를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배경과 하나회를 통해 전씨에게 힘이 쏠린 과정, 그리고 10.26때 모든 요직의 책임자들이 우왕좌왕해 사실상 직무유기한 부분 등 교훈적 가치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안사서 정보 완전 장악, 12·12진압 못해 두번째는 국가운영에 필요한 정보가 한곳으로 모아지면 안된다는 부분을 간과했다는 것.10·26직후 보안사령관이 군과 경찰 정보는 물론 중앙정보부까지 완전히 장악, 대통령에게 정보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12·12가 성공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요인임에도 드라마에서는 이를 놓치고 말았다고 꼬집었다. 또한 군사반란이란 어떤 것이며, 발생했을 경우 방어와 진압의 수순 등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수경사는 대통령령으로 방패계획에 의해 창설됐지. 또 수경사의 사전 허락없이 수도권에 군병력이 절대 들어올 수 없어. 지휘관이 몰래 수경사 예하 30경비단을 장악한 그 자체가 중대 반란이야.” 12·12를 진압하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을 묻자 “무슨 명령만 내리면 저놈들이 죄다 알고 있는거야.”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어 “마지막으로 수경사 소속 전차를 출동시키려고 부대 정문을 나서는데 이희성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와 ‘출동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더군.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감시당했어. 또 휘하의 지휘관들은 이미 저쪽으로 많이 기울어졌어. 정말 기막힐 노릇이지.”라고 한탄했다. ●일과의 60% 독서… 쿠데타 막는 법 책낼 것 장 장군은 경북 칠곡에서 3남3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상고를 다니던 중 6·25가 터지자 육군종합학교(11기)에 지원, 사선을 넘었다. 육군대학 졸업논문으로 보안사령부 해체를 주장했다가 베트남 참전때 ‘사상 불순자’로 찍히기도 했다.71년 1월 별을 단 그는 5군단 참모장-수경사 참모장-26사단장 등을 거쳐 10·26 직후 수경사령관이 됐다. 요즘 장 장군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한’ 때문에 동서고금의 쿠데타 자료를 모으고 있다.1799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군력(軍力)으로 정부를 뒤집은 데서 유래한 쿠데타 막는 법을 생전에 책으로 엮어내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요즘에는 일과의 60%를 독서에 쏟아붓고 있다. “죽기보다 더 괴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시는 쿠데타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제갈공명은 강류석불전(江流石不轉)이라고 했다. 강물은 흘러도 그 안의 돌은 물결따라 이리저리 구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 그가 걸어온 길 ▲1931년 경북 칠곡 출생 ▲50년 대구상고 재학 중 6·25참전. 육군종합학교 11기 졸업. 육군 소위 임관 ▲53년 조선대학교 법학과 졸업. ▲54년 보병학교 전술학교관 ▲71년 장군진급 ▲72년 5군단 참모장 ▲73년 수경사 참모장 ▲75년 26사단장 ▲78년 육본 교육참모부차장 ▲79년 11월 수경사령관 ▲80년 육군소장 예편 ▲82년 한국증권전산 사장 ▲91년 육군종합학교전우회 회장 ▲94년∼2000년 제27대,28대 재향군인회 회장 ▲2000년 새천년민주당 입당 ▲2000∼2004년 전국구 국회의원 ■ 상훈 충무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자랑스런 한국인상(96년) ■ 저서 12·12쿠데타와 나(93년, 명성출판사) km@seoul.co.kr
  • [사설] 교직 모독하는 촌지단속 행태

    스승의 날인 15일에 앞서 각 시도 교육청이 촌지 단속이라는 명목 아래 자행한 갖가지 행태는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인천 모고교 교무실에는 지난 13일 교육청 감사실 직원들이 들이닥쳐 교사들의 소지품을 검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또 광주시교육청은 교사들에게 촌지를 거부하겠다는 서약서를 쓰도록 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사유서를 대신 내도록 지시했다. 심지어는 학부모를 가장한 교육청 직원이 교사에게 금품을 건넸다는 ‘함정 단속’ 시비까지 일고 있다. 학부모와 교사가 촌지를 주고받는 악습은 하루빨리 근절돼야 한다. 그렇더라도 소지품 검사니, 서약서 요구니 하는 짓은 교사 모두를 ‘예비 범죄인’ 취급하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태이다. 이러고도 교육청이 교권과 교사 인권을 지켜주는 기관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이같은 일들이 교직을 천직으로 아는, 그래서 촌지를 외면하고 제 일에만 충실한 많은 교사들의 자긍심을 짓밟고 그들에게 좌절을 안겨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촌지수수를 근절하려는 수단이 교사 일반에게 상처를 준다면 득보다 실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교육당국은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아울러 교사들에게도 쓴소리를 하고자 한다. 교단 일각에 존재하는 촌지수수와 부적격 교사 문제에 대해 국민의 인식이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 교사들도 충분히 알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이제는 교육계 내부에서 자정의 기치를 높이 들어 촌지 거부, 부적격 교사 퇴출 등의 구체적인 행동에 직접 나서야 한다. 다행히 교원단체들도 현실을 인정하고 각오를 다지고 있는 만큼 가시적인 성과가 머잖아 나오기를 기대한다.
  • [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하자/최원호 한국교육상담연구원장·명예논설위원

    우리나라 학부모의 최대 관심사는 물을 것도 없이 자녀의 진학문제이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병폐 중 하나가, 학벌지상주의라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거의 종교적 신념에 가깝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어느 분야에서든 자녀가 1등이 되기를 바라는 ‘신념’은 최근 내신 반영비율 강화로 부정적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1등을 위해 발버둥치다가 채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아이들이 잇따르는 것은 성적제일주의의 교육사회가 낳은 기형적인 현상이다. 통상적으로 자녀가 대학을 진학하는 시기는 부모의 중년기와 맞물린다. 그리하여 대학진학은 부모의 인생을 중간평가하는 객관적인 요인이 되기도 한다. 자녀가 일류대학에 입학하면 부모로서는 영광이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며, 자녀가 하위권 대학에 입학하거나 아예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면 무슨 죄인이나 된 것처럼 풀 죽어 있어야 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자녀의 장래를 염려하는 부모라면 아이의 관점에 서서 최소한 10년 후의 인생을 그려볼 줄 알아야 한다. 자녀의 적성과 흥미가 배제된 명문대학 입학은 대학에 진학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은 자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몸에 맞지 않는, 당장이라도 벗어던지고 싶은 재킷을 걸쳐 입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자녀의 적성과 흥미가 철저히 배제된 진학은 언젠가는 삶의 본질을 빗나가게 하는 걸림돌이 되어 다양한 부정적 현상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적성과 흥미위주의 진로결정이 아닌, 수능시험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교육제도의 불합리와 명문대학을 강요하는 부모의 기대는 가치관의 위협으로 여겨진다. 로봇과 같은 삶은 경쟁적이고 기계적인 생활 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에서 정체감의 혼란을 초래한다. 삶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상실하고, 주변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데 따른 심리적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여 최후의 현실도피를 선택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가치평가의 기준을 높이기보다, 이제는 더 이상의 어떤 가치조차 발휘할 수 없다고 하는 자기부정적인 이미지를 대체할 만한 자신감을 높여주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사람들의 지나친 기대를 줄여주는 대신, 자기가 가장 즐거워하며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진로선택의 비상구를 마련해 줘야 한다. 자녀의 성격이나 능력은 어느 누구보다도 부모가 더 잘 알고 있다. 직업이 요구하는 직업적인 성격이 있듯이, 자녀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또한 하고 싶어하는 능력에 맞는 그 일은 자녀의 성격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죽어도 일등인 사회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기뻐하고, 삶의 보람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한 우리 모두의 교육혁신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최원호 한국교육상담연구원장·명예논설위원
  • [떴다, 포스터] 친절한 금자씨 섬뜩한 영애씨

    [떴다, 포스터] 친절한 금자씨 섬뜩한 영애씨

    이영애는 어지간히도 비싼(?) 배우다. 충무로 캐스팅 목록에 0순위로 올라있으니 몸값이 비싼 건 두말하면 잔소리. 부지런히 스크린에 얼굴을 내미는 걸로 팬들의 성원에 부응하는 게 톱스타의 의무라면, 그녀는 ‘직무유기’를 해온 셈이다.2001년 ‘봄날은 간다’ 이후 내리 4년을 스크린에서 떠나 있었으니 참을성 없는 팬들에게서 “참 비싸게도 구네∼”란 볼멘소리를 듣게도 생겼다. 그런 그녀가 만회작전에 들어갔다. 오는 7월 개봉할 ‘친절한 금자씨’(제작 모호필름)를 통해서다. 박찬욱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이래저래 얘깃거리가 많은 영화에서 그녀의 이름은 ‘이금자’. 그런데 박 감독의 영화 주인공이 친절할 수 있을까. 싱겁고 착한 영화는 만들어본 적이 없는 감독이 그녀라고 가만 놔뒀을 리 만무한 일.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 들어가 무려 13년을 보낸 뒤 ‘민간인’이 되자마자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다. 자신을 죄인으로 내몬 남자(최민식)에게 얼마나 치밀하고 끔찍하게 앙갚음하는지,‘올드보이’때처럼 감독은 영화의 세부정보를 일체 비밀에 부쳤다. 금자는 복수를 위해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갔다는 게 노출가능한 유일한 정보다. 영화는 호주 촬영분까지 5개월여의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 중이다. ‘소녀의 기도’풍의 이발소 그림처럼 역설적으로 착한 티저포스터가 극장가에 선보였다. 여주인공의 말갛게 무표정한 얼굴 아래 ‘정말이지…착하게 살고 싶었답니다’라는 카피 한줄이 선언처럼 떠있다.“신선하다”“섬뜩하다” 등의 반응이 벌써부터 시끌시끌하다. 올여름 극장가에 그녀가 광고하는 그 에어컨보다 더 시원한, 소름돋는 바람이 불어닥칠지 기다려보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儒林(33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3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퇴계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육아(蓼莪)의 슬픔’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시경 소아(小雅)에 나오는 ‘부모를 생각하여 지은 글’, 즉 ‘육아’의 내용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나의 삶 나를 있게 하셨고/어머니는 고생하며 나를 키워 주셨지. 쓰다듬어 주시고 여며 주시고/키우시고 감싸 주셨네. 언제나 돌보시고 보살피셨지./들고 나며 따뜻이 보살피셨지. 크나큰 그 은덕 갚으려 해도/저 넓은 하늘 끝이 없구나. (父兮生我 母兮鞠我 置我畜我 長我育我/顧我復我 出入復我 欲報之德 昊天罔極)”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퇴계에 있어 학문의 스승은 공자와 주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이었으나 인생의 참스승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로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였던 것이다. 따라서 퇴계는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자신을 항상 죄인이라 일컬으며 슬퍼하였으며, 심지어는 생일날 아침상을 맞을 때마다 자제들이 술잔을 올리면 ‘나는 어머님이 살아 계셨을 때에도 이렇게 하지 못했는데, 어찌 죄인 된 몸으로 차마 이것을 받겠느냐.’하면서 이를 물리치곤 하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신신당부대로 죽령을 거쳐 한양으로 간 퇴계는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가례(家禮)’를 암송함으로써 녹명(錄名)한다. 그리고 마침내 국왕이었던 중종의 친림하에 전시를 보았는데 33명의 최종 응시자 중 을과로 시험에 합격하였다. 장원급제는 갑과에 해당하는 3명을 말하는 것으로 7명의 을과에 합격한 퇴계는 따라서 월등한 성적은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퇴계는 대과에 급제함으로써 중종으로부터 홍패(紅牌)를 받는다. 홍패란 대과시험에 합격한 것을 증명하는 증명서인데, 흔히 붉은 종이에 묵서(墨書)하였기 때문에 이를 홍패라 불렀던 것이다. 과거시험의 급제자는 전정(殿庭)에서 방(榜)에 의해서 고시되며, 이때 합격자는 어전에서 숙배와 사은을 드린 후 국왕으로부터 직접 홍패와 모화(帽花)를 하사받게 되었던 것이다. 모화란 어사화라 불리는 꽃송이로 90㎝쯤 되는 참대가지에 푸른 종이를 감고 비틀어 꼰 다음 다홍, 보라, 노랑의 세 가지 빛깔의 무궁화 꽃송이를 끼워 만든 것이다. 이것을 모자 뒤에 꽂고 길이 10㎝쯤 되는 붉은 명주실로 잡아맨 다음 다른 한 끝을 머리 위로 넘기어 그 실을 입에 물게 되어 있었다. 급제자가 한양에 거주하고 있을 때에는 ‘유가(遊街)’라 하여 3일에서 5일 동안 시가를 행진하여 친지를 방문하는 축하행렬이 벌어지는데, 퇴계처럼 지방 사람인 경우에는 도문(到門)이라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 관리와 백성들의 환영 속에 부모를 찾아뵙고 문묘에 절한 후 거리를 행진하게 되어 있었다. 이때는 60일의 휴가가 주어졌으며, 이를 신래(新來)라 하였다. 한양으로 떠날 때도 죽령이었고, 대과에 급제하여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도 죽령을 넘어 돌아왔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모두 나와 길을 닦고 황토를 뿌리며 동네 앞에 임시로 홍살문을 만들어 축하해 주었는데, 이것이 퇴계가 어머니 박씨를 위해 행하였던 처음이자 마지막 효행이었던 것이다.
  • 儒林(338)-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38)-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그러는 사이 퇴계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김해 허씨가 세 아들을 낳고 죽었으며, 또한 안동 권씨와 재혼하였다. 전혀 수입도 없이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정진하던 이 무렵 퇴계의 생활은 실로 빈곤하고 처연하였다. 퇴계의 언행록에는 ‘선생은 21세 때에 부인 허씨를 맞이하여 공경하기를 손님처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퇴계의 손자 이안도는 ‘허씨 부인의 집은 자못 넉넉하였다. 선생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여가를 타서 가끔 오가곤 했었는데, 항상 여윈 말을 타고 다녔다. 부인의 집에는 살찐 말이 있었지만 그 말을 타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퇴계는 심지어 부유한 처갓집에 기대어 더부살이하는 것도 꺼렸던 것 같다. 퇴계의 제자 김성일은 이러한 퇴계의 검약 정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부인 허씨의 논밭은 영천군에 있어서 자못 넉넉하였는데, 선생의 집에는 오직 변변하지 못한 밭이랑이 있을 뿐이었으나 끝내 부인의 전장(田莊)에 가서 살지는 않았다.” 심지어 언행록에는 이 무렵 퇴계의 궁핍한 생활을 엿보게 하는 내용이 하나 남아 전하고 있다. 제자 이덕홍의 글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농사짓는 일에도 일찍이 때를 놓치는 일이 없으며, 수입에 따라 지출을 지켜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집은 못내 가난해서 가끔 끼니를 잇지 못하고 온 집안은 쓸쓸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으며 때문에 남들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선생은 항상 넉넉한 듯이 여기셨다.” 전처 허씨가 죽고 후처로 정신이 흐린 권씨를 맞이함으로써 제자 이평숙에게 준 편지처럼 ‘심신이 극히 번거롭고, 어지러워 견디지 못할 때’가 있었으며, 특히 세 어린 아들과 끼니를 거르는 빈한 생활을 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보다 못한 어머니 박씨가 퇴계에게 과거 볼 것을 권유하였던 것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최상책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소 어머니 박씨는 퇴계의 뜻하는 바가 높고 깨끗해서 세상과 야합하지 못할 것을 살피고 일찍이 ‘너의 벼슬은 지방의 주나 현이 마땅하니 높은 벼슬에는 나아가지 말라.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하였다고 언행록은 기록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퇴계는 호구지책으로 과거를 보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퇴계를 변호하고 있다. “선생이 일찍이 아버지를 잃자 어머니는 궁하게 살았는데, 선생이 과거를 본 것도 사실은 그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 장인의 죄로 말미암아 벼슬에 나갈 수가 없었는데, 얼마 안 있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선생은 육아(蓼莪)와 풍수(風樹)의 슬픔을 품고 있어서 제자들의 이야기가 부모를 섬기는 일에 미치면 반드시 슬퍼하면서 자기를 죄인이라고 일컬으셨다.” 퇴계가 ‘풍수의 슬픔’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은 공자의 말에서 비롯된 고사이다. 공자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슬피 우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묻자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객지에서 돌아오니 부모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나무가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끊이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퇴계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르고 ‘풍수의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였던 것은 이처럼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 평검사 “형소법 개정 반대”

    서울중앙지검 평검사 100여명은 2일 밤 긴급 회의를 열어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의 형사소송법 개정 초안을 놓고 논의한 뒤 “형소법 개정 논의는 국민들의 폭넓은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검찰 수뇌부와 같이 사개추위의 형소법 개정 초안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평검사들이 모은 것이다. 평검사들은 성명서에서 “사개추위의 형소법 개정 논의가 국민들의 의견수렴 없이 짜여진 일정에 맞추듯이 성급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깊이 우려한다.”고 주장했다. 평검사들은 “인권보호와 국민편익 향상을 위해 기존 형사사법시스템을 개선하려는 사개추위의 노력에 공감한다.”면서도 “현재 진행되는 형소법 개정 논의는 사전 검증절차 없이 급격히 뒤바꾸는 변혁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피의자와 피해자의 인권이 모두 존중받고,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부정부패 척결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조화로운 형사사법 절차”라고 밝혔다. 검사들은 전국 평검사 회의를 여는 방안도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회의에 참석한 한 평검사는 “이렇게 중요한 사안을 공청회도 없이 진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사개추위의 개정안대로라면 성범죄나 조직폭력범죄, 뇌물범죄 등과 같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범죄에는 수사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이날 성명을 내고 “공판중심주의 논의에 대한 검찰의 반응은 반인권적 자백위주 수사, 시대에 뒤떨어진 조서 중심의 형사 재판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김효섭 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미리 걸어보는 청계천 5.84㎞

    미리 걸어보는 청계천 5.84㎞

    황사가 날리던 지난 15일 오후. 막바지공사가 한창인 청계천 복원공사 현장을 찾았다. 흉물스러운 삼일고가가 철거되고 청계천을 뒤덮었던 콘크리트벽이 걷힌 지 1년 6개월만이다. 청계천은 오는 10월 준공되지만 장마철을 거치면서 흠을 보완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공사는 5월 말이면 끝난다. 이날 현재 공정률은 구간별로 90∼95%로 산책로·물길 바닥 등은 대부분 정리됐다. 태평로 입구 동아일보사 앞에서 동대문구 신답철교에 이르는 5.84㎞ 구간을 걷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미니 청계천’은 반짝반짝 청계천의 시작부분인 1공구에 들어서니 740여평 규모의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청계천을 상징하는 공간인 만큼 볼거리도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청계천을 133분의1로 축소해서 만든 60m 길이의 ‘미니청계천’은 표면에 광섬유를 부착해서 밤에도 반짝거린다. 바닥은 우리나라 전통적인 보자기 형태의 석재포장으로 마무리됐다. 마당의 끝에 있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청계천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됐다. 마당과 이어지는 청계천의 시작점에는 중학천과 백운동천에서 내려오는 물을 끌어와 폭포가 만들어질 예정이다. 폭포 뒤에 가려질 하수구에서는 아직 시궁창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1공구 장경식 감리단장은 “탈취설비를 해 오수에서 냄새를 제거하고 청계천에는 새 물을 흘려보낼 것이기 때문에 악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산책로는 왼쪽이 3∼5m로 오른쪽 1∼3m보다 넓었다. 산책로 바닥은 황토에 경화제를 섞어 만든 친환경적인 소재다. 산책로 벽에는 방수처리가 되어 있는 수중등(스텝등)이 설치되어 야간에 은은한 경관을 연출하게 된다. 또 산책로 벽은 아래에서 담쟁이 덩굴이 올라오고 위에서도 풀이 늘어졌다. 날씨가 더 따사로워지면 담벼락이 풀로 뒤덮일 것으로 보였다. ●물 속에 발 담그고 독서 첫다리인 모전교에서 광교사거리 사이에는 번호가 일일이 매겨진 큰 돌덩이들이 쌓여 있었다. 해체해서 이전한 뒤 복원하는 광통교의 원석이었다. 공사 관계자는 “광통교는 문화재여서 호미와 붓만으로 발굴하느라 꼬박 1년이 걸렸다.”며 “없는 돌이나 파손된 돌은 가공해서 채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광통교가 원래 있었던 광교사거리 지하에는 표석만 남게 된다. 모전교, 광통교를 비롯한 청계천의 모든 다리 밑은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청계천의 물 높이는 40㎝로 무릎 아래 정도 차오르게 되므로 여름철에는 그늘 밑에서 발을 담그고 책을 읽기 좋도록 만들어졌다. 물이 흐를 바닥을 걷다 보니 50㎏ 안팎의 공룡알 같은 돌의 윗부분이 튀어나온 곳도 더러 있었다. 하천 바닥에는 물이 새지 않도록 매트를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었지만, 흙만 있으면 뻘이 되기 때문에 큰 돌도 함께 깔았다. 나중에 물이 흐르면 큰 돌을 통해 진흙은 걸러지게 되므로 청계천이 진흙탕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물 위에 무대가 있네.” 광장시장부터 시작되는 2공구를 들어서니 물길의 폭이 1공구(6∼8m)에 비해 다소 넓어졌다.2공구 우재경 감리단장은 “동대문 의류타운 등을 끼고 있어 젊은층이 많이 찾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문화의 공간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우선 물 위에 조성되는 무대가 이색적이다. 가로 25m, 세로 8m 크기의 무대를 설치하기 위한 기둥 80여개가 박혀 있었다. 무대는 기둥 위에 올리면 된다. 또 색동 타일로 만들어진 ‘문화의 벽’도 이 곳에 생길 예정이다. 동대문을 지나니 오른편으로 70∼80년대 청계천을 상징하던 것 중의 하나였던 삼일아파트 자리에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에도 삼일아파트가 서 있었지만 이 건물 역시 올해 안에 철거될 예정이라고 했다. ●“옛 삼일고가 무대에서는 패션쇼를” 난계로부터 시작되는 3공구는 1·2공구에 비해 널찍하고 한산한 모습이었다. 물길의 폭도 최대 10m로 넓어지는 등 도시인들이 자연을 접하기 쉬운 친환경적인 쉼터로 꾸며졌다. 옛 삼일고가 기둥 3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철근이 삐죽삐죽 튀어나왔지만 흉칙하게 보이지 않았다. 3공구 이근철 감리단장은 “이 곳에 삼일교가 있다는 것을 증거로 남기기 위한 것”이라며 “과거에는 개발시대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그 시대를 기념하는 예술작품이 됐다.”고 말했다. 옛 삼일고가 기둥 주변에는 가로 34m, 세로 14m의 대형 가변무대가 만들어질 예정이다. 지난해 이 곳을 방문한 유인촌 서울문화재단 대표의 아이디어로 무대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이 곳에서는 공연·연주·패션쇼 등이 열리게 된다. 그 앞의 산책로 벽에서는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청계천으로 떨어지는 ‘터널분수’가 있다. 말 그대로 산책로 위로 분수 물줄기가 지나가서 그 밑을 지나가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이밖에 물살을 약하게 만들기 위한 여울, 철새가 쉬어갈 수 있도록 만든 횃대, 시골 마을에 있을 법한 징검다리 등도 정겹게 느껴졌다. 청계천 전 구간을 걷는 산책은 평소 2시간 정도 걸리지만 이날은 설명을 듣느라 3시간 남짓 걸렸다. 서울시는 청계천을 미리 보고 싶은 시민들을 위해 인터넷(walkingkorea.com)에서 신청을 받아 다음달 1일 ‘청계천 걷기 대회’를 개최한다. 김유영 고금석기자 carilips@seoul.co.kr ■청계천 다리들에 얽힌 사연 옛 서울 청계천에는 태평로 부근에서 중랑천 합류지점까지 모전교, 광교, 장통교, 수표교, 하랑교, 효경교(새경다리), 태평교(마천교·오교), 오간수교, 영도교 등 9개의 다리가 있었다. 다리에는 당시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진한 인연만큼이나 다양한 사연들이 배어 있다. ‘영도교’는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해 영월로 귀양갈 때 아내 송비(宋妃)와 이별했던 장소다. 사람들은 ‘영영 건넌다리’ 등으로 불렀다. 사연을 안타깝게 여긴 성종이 즉위한 뒤 나무다리였던 이 다리를 돌다리로 개축하고 직접 영도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다리를 헐어 모자란 석재로 써버렸다. ‘수표교’는 과거 청계천 오염의 주범으로 꼽혔었다. 조선 태종 때 다리 주변에 소·말을 거래하는 우마전을 설치하고 배설물을 개천으로 흘려보냈다. 이 배설물은 땔감으로 쓰던 나무의 재와 함께 청계천의 물 흐름을 가로막았다. 따라서 개천가에는 모래와 쓰레기가 쌓여 ‘가산(假山·가짜산)’이 만들어져 거지들이 몰렸었다. 수표교는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숙종의 로맨스가 얽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장통방에 있던 여염집에서 문 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궁으로 불러들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장희빈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광교’는 한이 서린 다리다. 신덕왕후가 낳은 형제들 때문에 왕좌에 오르지 못할 뻔했던 태종은 신덕왕후가 죽었어도 증오를 풀지 않았다.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왕위에 올랐음에도 광교를 흙다리에서 돌다리로 개축하면서 신덕왕후의 능을 지키던 신장석(神將石)을 뽑아다 교각으로 썼다. 뭇사람들의 발에 밟히며 고통을 받으라는 뜻에서였다. 신장석은 제자리를 떠나 600년 가깝게 수많은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다가 1958년 청계천 복개 당시 땅속으로 묻혀버렸다. 지난해 청계천 복원공사로 광교를 발굴했을 때 신덕왕후의 외가인 강씨묘 종친회에서는 광교에 깔린 신장석을 정릉으로 돌려 달라고 서울시에 탄원했다. 하지만 서울시에서는 공공의 문화유산을 개인에게 돌려주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오간수교’는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였다. 당시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된 구멍인 오간수문을 만들었다. 오간수문은 죄인이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됐었다. 명종 때에는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왔다가 도망갈 때도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사설] 한끼 식사놓고 지문 채취해야 하나

    전북 지역의 15개 중·고교에서 비급식자의 출입을 막기 위해 학교급식소에 지문인식기를 설치해 말썽을 빚고 있다. 몰래 밥먹는 학생들을 차단하기 위해 지문을 채취한 교육담당자들의 발상이 놀랍기만하다. 학교 당국은 식당운영에 손실이 발생하는 데다, 학생증은 미소지나 분실의 우려가 있어 학부모의 동의를 받아 지문인식기를 설치했다고 한다. 이런 해명이 더 한심스럽다. 다른 데도 아닌 교육현장에서 도둑밥 한끼 막자고 학생들을 잠재적 범죄인으로 취급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한창 크는 학생들이 설사 두번씩 먹거나 외부인이 몰래 먹더라도 밥 한그릇 주면 되는 것이지, 지문으로 확인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식당운영에 손실이 있다면 예산을 늘리든가, 안되면 급식학생을 다른 방법으로 가려내면 된다. 학생증을 소지하도록 교육하거나 식권을 나눠 주는 등 얼마든지 교육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가 있다. 그런데도 학교당국자들이 자기네들 편하자고 한대당 150만원이나 하는 지문인식기를 들여놓고 학생들의 지문을 채취해서야 되겠는가. 일반이나 공사장의 식당에서도 도둑밥을 가려내자고 지문을 찍는 데는 없다. 지문채취는 범죄인을 가려내는 데 사용하는 것이 일반인의 상식이다. 지문이나 홍채 등 개인의 신체정보는 잘못 활용될 경우 심각한 인권침해를 야기한다. 더욱이 신체정보를 저장하고 이용하고 전달할 경우는 법률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최근 인감증명 발급에 지문인식기를 사용한 한 지방자치단체가 시민과 인권단체의 반발로 철거한 예도 있다. 인권단체들이 지문인식기 철거를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학교당국은 당장 사과하고 철거해야 한다. 민주시민을 육성하는 학교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이 밥 한끼에 상처받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학교급식 예산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학생들의 인권을 짓밟는 해결책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학교는 밥 한끼의 따뜻함을 학생들이 배우고 느끼는 곳이어야 한다.
  • [뒷골목 맛세상] 흑석동 연못시장

    [뒷골목 맛세상] 흑석동 연못시장

    ●20여년전 미당 선생의 추억 아련 1980년대 5월 무렵이었다. 소위 ‘80년의 봄’으로 불리던 그때 나는 복학생 신분이 되어 뒤늦은 나이에 마지막 남은 학기를 채우려고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학교를 다니던 중이었다. 오후를 갓 넘긴 시각에 대학교 정문에서 시인인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을 우연히 조우하게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내려오고 선생은 이제 막 학교로 올라가면서 서로 엇갈리는 식이었다. 미당 선생은 내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어어, 하고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더니 가방을 들지 않은 한 손으로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자네, 잘 만났네.” 내가 무슨 일인가 싶어 작은 눈을 크게 뜨자 미당 선생이 말을 이었다. “자네, 지금 바쁜가?”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면 잘 됐네. 자네 여기서 오분만 기다려 줄 수 있겠나?” “예, 그러지요.” “딱 오분일세. 내 얼른 학교에 올라가서 휴강하고 옴세.” 미당 선생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도대체 선생에게 무슨 황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이랴 싶어 얼마간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생은 10분이 채 못 되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아직도 헐떡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나에게 물었다. “자네, 여기 연못시장에 대해 잘 안다면서?” “예, 알기야 압니다만….” 무슨 뜬금없는 연못시장인가 싶어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미당 선생은 다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잘 됐네, 자, 연못시장에 가보세.” “아니, 이런 벌건 대낮에요?” 미당 선생은 얼굴 전체에 주름이 지도록 특유의 너털웃음을 활짝 터뜨렸다. “와하핫, 이 사람아, 자네하고 나 사이에 술 마시며 노는 자리에서 어디 낮밤을 따진 적이 있었던가?” 하기는, 얼마든지 맞는 말이었다. 미당 선생은 일찍이 내가 1960년대 미아리에 있던 서라벌예술대학에 다닐 무렵부터 시를 배운 스승이기도 하였는데, 돌이켜 보면, 바로 1학년에 갓 입학한 신입생 때부터 우연찮게 선생과 술자리를 어울리기 시작하여 2학년이 되어 군에 입대할 때까지 거의 일주일에 한번 꼴로 술자리를 함께 했던 터였다. 주로 길음시장 안에 있는 소위 니나노집이라고 부르는 막걸리집을 드나들었는데,30,40대의 나이든 여인들이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흘러간 유행가도 불러주고, 입에 안주도 넣어주는 집이었다. 그런 집에서 어쩌다 내가 술집여자의 가슴에 손이라도 넣거나 아니면 입이라도 맞추고 있노라면 미당 선생은 대번에 쯧쯧, 혀를 찼다. “어허, 쯧쯧, 스승도는 되는데 제자도가 안되구먼 그랴.” 미당 선생은 고작해야 옆에 앉은 술집여자의 손이나 조물거리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나를 귀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미당 선생과 나 사이에 이따금 이시영 시인이 합석을 하고는 했는데, 이시영보다는 일찍부터 되바라진 장돌뱅이 악동 출신으로 니나노집 문화에 호가 난 나를 선생은 더 귀여워해주었다. “자네를 보면 말이야, 꼭 젊은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거든.” 미당 선생은 어쩌면 나의 되바라진 장돌뱅이 악동 모습에서 선생의 대표시이기도 한 ‘자화상’의 한 구절을 돌이키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어떤이는 내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가고/어떤이는 내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이마우에 언친 시(詩)의 이슬에는/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병든 숫개마냥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선생은 내가 위악적으로 놀면 놀수록 그런 내 모습에서 젊어서 힘든 시절의 선생의 시의 이마를 적셔내리는 몇 방울의 피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각설하고, 중대부속고등학교 교정에서 새어나오는 라일락 향기가 나른한 봄날 오후의 흑석동 길을 걸어, 이제는 일흔에 가까운 나이가 된 선생과 서른을 훌쩍 넘긴 제자가 다시 한번 위악적인 악동이 되기 위하여 연못시장을 찾았다. 연못시장이란 흑석동 시장과 배수장 사이에 있는 술집거리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길음시장 안의 니나노집과는 달리 비교적 젊은 여자들이 술도 팔고 노래도 하는 곳이었다. ●외로움과 눈부심을 알게 했던 연못시장 연못시장은 시쳇말로 집창촌처럼 드러내놓고 몸을 파는 식은 아니었지만, 술집 아가씨들과 서로 눈만 잘 마주치면 얼마든지 하룻밤의 연애도 가능한 곳이었다. 대학시절의 한때 나는 퇴폐주의나 탐미주의에 깊이 빠져 아예 그런 연못시장 안에 있는 개선여인숙의 3층에 월세로 방을 빌려 산 적이 있어서, 술집 아가씨들과는 손님의 관계를 떠나서 옆집 오빠처럼 누구와도 친한 사이이기도 했었다. 연못시장 안의 목포집이라는 곳에서 옆에 아가씨들을 끼고 앉자, 미당 선생은 단숨에 술 한 잔을 넘기고 나서 지그시 눈을 감더니 참으로 행복한 표정이 되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내 남은 생애를 불쌍히 여기셔서 오늘 자네를 나한테 보내주셨네.” 미당 선생의 한 마디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슴 한 곳이 찌르르, 아파왔다. 모르기는 해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나이가 들면 찾아온다는 저 깊은 외로움과 눈부심을 함께 보았을 것이었다. 미당 선생은 그렇듯 외로움과 눈부심이 함께 깃든 표정으로 나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자 드세나. 더군다나 지금은 봄이 아닌가,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봄이란 말일세.” 내가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봄’이란 말에 감탄을 하자, 미당 선생은 와하핫,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사연이 있거든. 동리 있잖은가, 왜, 자네 소설 스승 동리말이야. 그 동리가 아직 소설가가 되기 전에는 원래 시를 썼었거든. 시인이 되겠다고 말일세. 그런 어느 날 동리가 나를 찾아와서 시를 썼다면서 외우지 않겠나. 그래서 들어보니 과연 좋더라고.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운다니 얼마나 좋나. 암, 꽃이 피면 벙어리도 마땅히 울어야지, 내가 탄복을 해서 몇 번이고 그 구절을 암송하자, 자세히 듣던 동리가 손을 휘휘 내젓는 걸세. 그게 아이라, 그게 아이라, 벙어리도 꽃이 피면이 아이라 꼬집히면 인기라. 벙어리도 꼬집히면 운다, 알고 보니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었던 게야. 그래서 동리에게 내 당장에 시를 집어 치우라고 호통을 쳤지. 동리가 마침내 유명한 소설가가 된 데는 내 덕도 있을 걸세.” ●시장대신 푸짐한 먹자골목이 김동리 선생의 ‘꼬집히면’을 흉보던 그때부터 다시 훌쩍 스물 몇 해가 흘러가버린 지금 미당 선생은 물론 김동리 선생마저 세상을 달리 하여 먼 곳으로 떠났고, 연못시장 또한 술집거리의 기능이 아예 폐쇄된 채 빈민가가 되어 재개발을 기다리는 운명이 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찾은 연못시장 어디에도 이제는 저녁마다 화려한 한복을 떨쳐입고서 목청껏 흘러간 유행가를 불러대던 꽃다운 아가씨들은 자취도 없고, 죽음 같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런 적막 속에서 얼핏 미당 선생의 쯧쯧, 혀를 차는 소리를 들었다. “이 사람아, 쯧쯧, 더 이상 뭘 찾겠다고 아직도 연못시장을 헤매나?” 연못시장은 사라졌지만, 대신에 연못시장 주변으로는 서민들의 땀내가 물씬 풍겨나는 맛집들이 먹자골목을 이루며 처마를 맞대고 이어져 흑석동시장까지 뻗어 있다. 생고기집, 돼지갈비집, 횟집, 풍천장어집, 떡볶이집, 라면집, 치킨집, 모둠전집, 순대집…. 엉터리생고기(02-814-3376)는 동작대로의 흑석동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흑석동 시장으로 가는 골목 안에 있는 생고기전문집이다. 엉터리생고기는 정육점과 식당을 겸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삼십대 초반의 잘생긴 젊은이가 주인이다. 중고등학교 때 날렸던 씨름선수 출신인 하윤철씨는 역시 씨름선수 출신인 친구 박영준씨와 함께 사이좋게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데, 고기의 질이며 양은 대한민국의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며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런 자부심은 일찍이 독산동 도매시장에서 83호점을 운영하던 하윤철씨의 어머니 김정순씨로부터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고기맛 보려면 족히 1시간은 기다려야 엉터리생고기는 저녁 무렵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 일도 예사인데, 그렇듯 손님이 몰리는 데는 무엇보다도 푸짐하면서도 싱싱한 생고기에 이유가 있다. 돼지고기의 경우에는 암퇘지만을 사용하는데, 그이는 고기의 깊은 맛을 알려면 반드시 얼리지 않은 생고기를 먹을 것을 강변한다. 뭔가 고기에 양념을 하거나 와인 따위로 숙성을 하는 식은 고기 자체에 하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엉터리생고기는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소고기 또한 특수 부위가 전문이다. 돼지고기의 경우 생항정살, 생갈매기살, 생오겹살, 생삼겹살, 생목삼겹살, 돼지등심의 끝부분에서만 나오는 가브리살 등이 1인분 300g에 7000원인데 세 명이서 2인분만 시켜도 충분할 만큼 양이 풍성하다. 돼지 한 마리라는 돼지고기 모둠에는 위에 나오는 여러 부위가 다 들어 있는데,1㎏에 2만원으로 4,5인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다. 소고기의 경우 갈비에서 뼈를 추려낸 갈비본살이 1인분 300g에 1만 3000원, 안창살, 토시살, 차돌박이, 등심, 육회 등이 1만 5000원에다가 보리소 한 마리라는 소고기 모둠에는 역시 여러 부위를 모아서 1㎏에 4만원인데, 이 또한 4,5인이 먹기에 충분한 양이다. 생고기를 불판에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낸 다음 참기름에 적셔 파무침을 얹어 마늘을 더해 상추며 깻잎에 싸먹는데, 생고기의 고소함과 부드러움이 그야말로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나는 느낌이다. 불판의 중심에 올려놓게 되어 있는 된장찌개는 손님이 원하는 한 얼마든지 무료로 리필이 가능하다. 동작대로에서 흑석동 중앙대학교 병원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부산오뎅(02-821-1159)이라는 작은 규모의 일본식 선술집이 있다. 중년답지 않게 앳되어 보이는 오경자씨가 주인인데, 언젠가 일본에 갔다가 불과 서너 명이 들어서면 꽉 찰 것 같은 선술집의 작고 아담한 규모에 매력을 느껴 마침내 일본식 선술집을 차린 것으로, 밀창문을 들어서는 순간, 아아, 여기에 미당 선생이 함께 있다면 하는 뜻밖의 아쉬움이 들었던 곳이다. 미당 선생이라면 분명히 신명이 나서 나에게 일본술을 마시는 여러 가지 복고조의 방법들을 일러주었을 터이다. “이 히레소주란 건 말씀이야, 일본말로는 히레사케라고 하지. 소주를 한소끔 가볍게 끓여내어 복어 지느러미를 넣고 이번에는 라이터로 불을 붙여 잠깐 알코올의 나쁜 기운을 걷어내는데 말씀이야, 정종대폿잔에 가득 부어 훌훌 마시면, 아랫배에서부터 차츰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간다 이 말씀이야. 추운 겨울에는 언몸을 녹이는 데 최고거든. 어디 몸뿐이겠는가? 허방이라도 짚듯 자꾸 마음이 허전한 이들한테도 최고지.” 부산오뎅이 더 반가운 것은 히레소주가 정종대폿잔으로 한 잔에 2500원이라는 사실이다. 강남이나 명동 같은 여느 번화가 거리의 오뎅집이 똑같은 잔에 8000원인 데 비하면, 이게 무슨 횡재냐 싶게 거의 공짜 같은 기분이 된다. 게다가 탁자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는 유부, 맛살, 곤약 등 10가지 오뎅들은 한 꼬치에 1000원이어서 히레소주나 히레정종의 안주 삼아 하염없이 먹어도 값이 몇 천원밖에 되지 않는다. 술 종류는 이밖에도 정종대포, 냉정종 등의 일본술 외에도 소주나 청하, 천국, 백세주며 맥주 같은 우리 술도 다양하게 있다. 안주 또한 오뎅 이외에도 오징어데침, 고등어구이, 열빙어구이, 계란찜, 번데기, 은행구이 등이 있는데, 각각 7000원이다. ■ 15일자부터…새 연재 ‘서울이야기’ 지난해 9월부터 연재돼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송기원의 뒷골목 맛세상이 8일자로 막을 내립니다. 맛깔스러운 음식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낸 송기원 선생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15일자부터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연구진이 전하는 ‘서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서울 이야기는 서울의 숲과 강, 애완동물과 이웃, 시민에게 다가가는 화장실 문화 등 서울에 관한 다양한 토픽을 소개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3)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上)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3)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上)

    기왕 변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조선 영조 때 태진(太眞) 스님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서 빠뜨릴 수가 없다. 그는 남원에서 발생한 불온 벽보 사건에 연루됐었고 그 사건은 조선왕조의 정사(正史) ‘왕조실록’에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반역죄인을 취조한 기록을 엮은 ‘추안급국안’이란 책자에도 상세하다. 태진은 반역에 관한 혐의로 엄중한 조사를 받았던 것인데,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월명암은 월출암의 다른 이름? ‘실록’ 등엔 태진이 부안 변산에 있던 월출암(月出菴)의 승려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찾아본 부안 지방의 고문헌에는 월출암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절의 스님이 역모사건에 관련됐던 관계로 폐찰(廢刹)이 되고 만 게 아닐까 짐작되기도 하지만, 꼭 옳은 짐작일지는 모르겠다. 그런 식이었다면 역사상 큰 절치고 문 닫지 않고 배겨날 절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달리 생각해 보면, 절의 이름이 잘못 적혔을 가능성도 없지 않고, 또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을 계기로 절 이름이 다소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 대역부도 사건 등이 발생한 다음엔 고을의 명칭이 바뀐 사례가 많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참조된다. 그런 점에서 일단 혐의를 둘 만한 암자가 하나 있는데 월명암(月明菴)이 바로 그 경우다.‘달이 뜬다.’는 뜻을 가진 월출(月出)이나 ‘달이 밝다.’는 월명(月明)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변산의 제2봉인 쌍선봉(498m) 중턱에 자리한 월명암은 경관이 수려하다. 월명암 뜰에 서면 변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발아래 깔고 있는 듯이 느껴지고, 암자 뒤 낙조대(落照臺)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점점이 늘어선 고군산군도의 뭍섬들이 아름답다. 이 절의 이름이 하필 월명(月明)인 것도 잘 생각해 보면 그 일대에서 목격되는 달 뜨는 정경 또한 기막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월명암은 월출암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월명암은 본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호남의 명승(名僧)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가 중건하였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암자에선 허다한 고승들이 배출됐다. 선가(禪家)에선 대둔산 태고암, 백양산 운문암과 함께 도인을 많이 키워낸 3대 성지로 손꼽힌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태진 역시 당대의 ‘명승(名僧)’으로 존경받던 스님이었다. 여느 스님들과는 달리 그는 양반가 출신이었는데 참선수행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정치현실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 돼 태진은 결국 조정으로부터 엄벌을 받았다. 어쩌면 그가 몸담았던 불교계조차 그를 영구히 추방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 해도 나는 태진을 비난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거꾸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태진은 부조리한 18세기 조선의 현실을 변혁시킬 꿈을 꿨다. 그런 점에서 그는 뒷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월명암을 찾았던 강증산, 소태산, 백학명 등 근대 종교계의 큰 별들과 일맥상통했고, 그가 연루됐던 사건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영조가 직접 심문 나선 ‘괘서’ 사건 때는 영조9년(1733) 음력 7월 말이었다. 한여름 불볕더위가 조금씩 수그러들고 아침저녁으론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구중궁궐에 계신 영조임금부터 강원도 두메산골 김첨지네 복슬강아지에 이르기까지 다들 살맛을 되찾아 가고 있던 차에 불길한 사건이 터졌다. 그것도 서울에서 700리나 떨어진 전라도 남원에 괴문서 한 장이 나붙은 거였다. 먼 시골 도시 성벽에 밤새 어떤 사람이 종이 한 장을 붙였기로 그게 무슨 큰 야단이라고들 호들갑인가, 현대를 사는 우리로선 납득이 잘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괘서’(요즘말로는 벽보) 사건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문제의 벽보는 우선 그 내용이 ‘매우 흉악했다.’ 지엄하신 상감마마와 동궁을 저주할 뿐만 아니라 이제 세상이 곧 뒤집어진다는 믿기 어려운 소리가 가득했다. 역모의 혐의가 명백하게 느껴지는 ‘불충한’ 글이었다. 더구나 이 괘서의 상당부분은 이미 4년 전에 진압된 ‘무신란(戊申亂·경종의 독살설을 주장하며 소론과 남인들이 일으킨 반란)’의 주동세력이 각지에 퍼뜨린 소문이나 선동적인 구호와 일치했다. 영조로선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무신 잔당’의 부활을 입증하는 증거로 의심해볼 만했다. 영조는 몹시 긴장했으며, 그를 보좌해 국정을 이끌던 조정대신들 역시 마음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시급히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역모사건을 전담하는 의금부며, 사건발생지역의 수장인 전라감사, 그리고 조정에서 현지로 파견된 관리인 남원부사 등이 열흘 이상 이 사건에만 매달리다시피 했다. 피의자에 대한 고문과 취조가 날마다 계속되었고 그동안 영조는 몸소 수사를 진두지휘하다시피 했으며, 직접 신문에 나서기도 했다. 일반에는 문예부흥기로 알려져 있지만 영조와 정조 때는 실상 이런 역모 사건들이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발생해 조정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월출암 승려 태진이 소장했던 ‘남사고 비결’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예언서는 ‘남사고 비결(南師古秘訣)’이었다. 태진이 가지고 있었던 그 책은 갑자년을 기점으로 해마다 일어날 사건들이 예언돼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편년체 예언서였다. 이 책엔 역모사건으로 정국이 뒤숭숭했던 무신년에 대해서 “또한 좋지 않다.”든가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길이 막히며 민호에 연기가 끊긴다.”는 예언이 적혀 있었다. 실제 영조4년(1728) 무신년엔 하3도(충청, 전라, 경상)에서 반역사건이 있었으나 곧 진압됐었다. 그러므로 ‘남사고’의 예언은 그런대로 잘 들어맞은 셈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남사고’도 역시 편년체로 돼 있다. 그러나 예언서의 시작은 갑자년이 아니라 경인년으로 돼 있어 태진이 소장했던 ‘남사고’와는 분명히 다르다. 위에서 예로 든 무신년에 대해서도 “제갈량(諸葛亮)이 이미 죽었으니 어떤 성 한쪽에 금성(錦城)이 피폐하구나. 경시(更始)는 자리를 긁고 범증(范增)은 등창이 나는구나.”라고 했다. 자구상 표현은 전혀 다르지만 그 해의 운이 무척 나쁘다고 본 점에선 우연히 일치한다. 그밖에도 태진이 소장한 ‘남사고’엔 백저 안답(白猪按答), 봉목 장군(蜂目將軍), 승입병도(僧入丙都), 노색연절(路塞煙絶), 만가여일(萬家如一) 등의 표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글귀는 현재의 ‘남사고’엔 전혀 없다. 책의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그 내용은 똑같지 않은 줄을 미루어 짐작하겠다. 평소 태진이 소지했던 ‘남사고’에는 무신년 이후로도 여러 해 동안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돼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남사고’도 역시 그런 내용이다. 예컨대, 무신년으로부터 4∼5년이 지나면 “세상일이 이미 끝이로다.”라고 했다. 그 참상은 “백 가호에 소가 한 마리요, 열 계집에 한 남편이로다.”라는 구절에 가장 잘 압축돼 있다. 요컨대, 세상은 최후를 맞이하고야 만다는 것인데, 햇수를 따져보면 영조9년이 바로 그 말세운이었다. 영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로선 이런 ‘남사고’의 예언을 그저 웃으며 지나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정의 금지명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사고’를 비롯한 ‘정감록’의 대중적 인기는 갈수록 높아져 조정은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태진이 ‘남사고’를 손에 넣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전국의 명산을 두루 유람했는데, 충남 보령의 오서산(烏棲山·791m)에 들른 적도 있었다. 거기서 그는 도승(道僧) 자명(自明)을 만났다고 했다. 태진은 그것이 기유년(1729)의 일이라고 회상했는데 그 기억이 정확한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쨌거나 태진은 오서산에 이틀 동안 머물렀고 그 때 자명이 가진 ‘남사고’를 처음으로 구경했단다. 태진이 이 책에 큰 관심을 보이자 자명은 필사해 주었다. 태진은 평소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어딜 가나 늘 ‘남사고’를 휴대했다. ‘남사고’의 예언은 현실로 입증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 태진의 변함없는 믿음이었다. 어서 빨리 세상이 바뀌어 현세가 미륵세상으로 바뀌기를 그는 열렬히 바랐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변화를 알리는 예언서를 무척 좋아했다. 더욱이 변산은 한국 미륵신앙의 출발점이었고, 태진은 그런 사상적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에게 ‘남사고’의 내용을 들려주었고, 그 예언을 시세에 맞게 적절히 풀이해주는 것을 직업으로 삼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태진의 주위에는 ‘남사고’를 베껴 나눠 갖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태진, 남원 양반 최봉희를 사귀다 태진은 기회가 되는 대로 속세의 여러 사람들과 사귀었다. 때론 산사를 찾아온 양반들과도 자연스레 친교를 맺었다. 그는 그런 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유년(1729) 10월, 전북 진안의 팔공암(八公菴)에 있을 때야. 그 암자가 경치 좋고 한가한 곳이란 소문이 있어 찾았던 게지. 내가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지. 젊잖아 뵈는 세 양반이 그 절간엘 들렀어. 무슨 약초를 캐러 왔던 모양 같아. 한 분은 이름을 최봉희라 했는데 남원서 온 가난한 양반이었고, 또 한 분은 윤징상이라고 했지 아마. 그리고 또 정원덕이라는 분이었을 거야. 이 양반들은 서로 친구사이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팔공암의 노스님을 모신 승방에 들어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참 진지하게도 나누었지. 부처님의 법이 공자의 가르침과 과연 다른 것인가, 사람이 죽으면 무엇이 되는가, 부모에게 효를 다한다는 것은 결국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등등 얼핏 철학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매우 현실적인 주제를 폭넓게 다루었어. 승방 한담이란 게 흔히 그러하듯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화제가 자연 정치 문제에 미쳤지. 무신년(영조4년 1728)에 있었던 난리에 대해 또 한참을 이야기하게 됐어.‘그때 참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게 중론이었어. 난 빙그레 웃기만 하고 별 말을 안 했지. 그래도 영 암말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는 좀이 쑤셔, 내가 소장하고 있던 ‘남사고’에 관해 몇 마디만 들려주었어. 그 이튿날 세 양반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 글쎄 날더러 ‘남사고’를 보여 달라는 거야. 암자에 계시던 노스님도 한 번 보여주라고 자꾸 권하셔서 나중엔 바랑에서 그 책자를 꺼냈어.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더군. 이 왕조의 끝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 챘던 모양이야.” 그날 오전 최봉희가 일행을 대표해 태진에게 이렇게 물었다.“선사(禪師)께선 양반 자제로 불가(佛家)에 입문하셨고 덕이 높아 평소 많은 불자들이 대사(大師)라 부른다 들었습니다. 옛날 강원도에 머무실 때는 여러 지방관들이 선사께 서찰(書札)을 보내 시문(詩文)을 구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고도 하더군요. 시사(時事)가 장차 어찌 될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남사고’의 예언을 가지고 계신단 말씀을 잠깐 들었습니다만, 저희는 시골의 무식한 선비라 아직 그런 책을 한 번 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혹시 선사께서 아시는 대로 설명을 좀 해 주실 수가 없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극진한 예의를 갖춰 간청해 마지않는 세 양반들의 겸손한 태도에 태진은 거의 감격했다. 그는 평소 가슴에 조용히 담아둔 몇 마디 말을 꺼냈다.“이런 말세(末世)를 당해서 백성이 보존될 수 있는 곳은 산림(山林)뿐인데, 선비님들께선 야지(野地)를 버리고 산협으로 들어오셨으니 진실로 살 길을 얻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윤징상이 ‘백성이 보존될 수 있는 곳이란 산림이다.’라는 말씀은 어느 책에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자 태진은 마치 그 말이 있기를 기다렸단 듯 ‘남사고’에 그런 말이 나온다며 한참 동안 설명했다. 태진의 말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양반은 최봉희였다. 최는 가문은 매우 훌륭했으나 이미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울어 가엾은 시골의 한사(寒士)에 불과한 처지였다. 서글픔 속에서 끼니 걱정을 하고 지내는 최봉희인지라 세상에 대해 유난히 불평불만이 많아 보였다. 마침내 최는 젊은 정원덕의 도움을 받아 ‘남사고’ 한 벌을 베낄 수 있었다. ●김원팔, 최봉희의 ‘남사고’를 베끼다 남원으로 돌아온 최봉희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남사고’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다. 김원팔과 김원하 형제, 김태기, 김중기 등 7명이 필묵계(筆墨契)를 맺어 서로 절친하게 지냈는데, 김원팔 등은 최봉희의 이야기를 듣자 ‘남사고’를 구경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들은 ‘남사고’를 ‘무신년 난서(亂書)’라고도 불렀다. 무신란에 대한 예언이 기막히게 잘 들어맞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 계원들 중에서도 최봉희와 특히 친했던 사람은 김원팔 형제였다. 원팔의 아우 김원하는 마침 논밭이 최의 집 근처라 매일 같이 만나는 형편이었고, 김원팔은 당시 전주(全州)에 살고 있어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최봉희의 입장에선 우정을 핑계대어 출입이 잦은 편이었다. 최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수상쩍은 소문을 수집해다 친구들에게 퍼뜨렸다. 김원팔은 그 점을 예를 들어가며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영조8년) 10월 최봉하가 내 아우 김원하(金元河)를 찾아가서 중국 서쪽의 양만족들이 전쟁을 일으켜 청나라 측이 조선에 청병(請兵)했다고 말했고, 물가가 급등한다는 등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을 많이 했다. 심지어는 북부 지방에선 소가 기린(麒麟)을 낳았으므로 이제 성인(聖人)이 나올 차례라고도 했다. 하여간 남원 제일의 소식통은 최봉희다.” 남원의 선비들 가운데는 최봉희를 통해 세상사를 알아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가 들려주는 황당한 이야기에 왠지 가장 솔깃해하는 사람은 김원팔과 그 아버지 김영건이었다. 원팔은 최봉희를 줄기차게 졸라 가지고 ‘남사고’를 모두 필사했다. 그런데 그 당시엔 좀 신기하다 싶은 남의 글이나 책자를 베끼는 일은 보통이었다. 아들로부터 책을 전해 받은 김영건은 한문을 제대로 읽을 만한 실력이 없어 그 책을 그저 무신란의 실상을 묘사한 것으로 짐작하는 정도였다. 김원팔이 아버지에게 바친 책자엔 ‘남사고’ 외에도 ‘요람(要覽)’이란 예언서가 포함돼 있었다.‘요람’의 주인 역시 최봉희였는데, 김원팔은 양반의 서얼인 이서방(李書房)에게 위촉해 책의 대부분을 필사하게 했다. 그러나 그 책의 마지막 대목만은 원팔이 자필로 베꼈다. 이쯤에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에 봉착한다. 김원팔 부자는 태진 등이 소장했던 예언서를 구해다 도대체 무엇에 이용할 생각이었을까? 그들은 과연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던 걸까? 또는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예언서를 필요로 한 것일까? 태진 사건과 관련해 여러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드는데 자세한 것은 다음호를 기약한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인권위 사형폐지 의견표명

    인권위 사형폐지 의견표명

    국가인권위원회는 6일 전원위원회를 열어 국회에 ‘사형제도 폐지’ 의견을 표명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전원위에서는 위원장과 상임위원 3명을 포함한 11명의 위원 가운데 2명이 해외출장으로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8명의 찬성으로 사형제 폐지 의견표명을 의결했다. 사형제 폐지는 2003년 인권위가 ‘10대 인권 현안 과제’로 선정해 검토해 왔다. 지난해 11월 이후 3차례 전원위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다 이날 4번째 상정에서 의결됐다. 위원회는 “인간존엄의 가치와 행복추구권을 규정한 헌법 제10조와 ‘사형폐지를 위한 국제규약’의 취지에 따라 사형 폐지 의견을 표명한다.”고 결정했다. 또한 쟁점이 됐던 사형제의 ▲조건 없는 폐지 ▲감형·가석방 없는 무기형으로 대체 ▲평화시 폐지·전시 유지 등 세부 안에 대해서는 결정문에 소수의견이나 결정 이유 등으로 포함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유일하게 ‘존치’ 의견을 낸 김호준 상임위원은 “사형제가 해당 범죄에 대해 갖는 어느 정도의 억제력을 부정할 수 없고, 교정·교화 가능성이 없는 범죄인에 대한 국민의 법감정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지난 7년 동안 사형 집행이 없어 사실상 폐지된 현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선택의 문제”라며 반대하는 이유를 밝혔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儒林(317)-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儒林(317)-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鄒魯之鄕 그러나 권씨 부인의 집안은 할아버지인 권주(權柱)가 연산군의 갑자사화 때 평해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별세한 후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벼슬이 참판에까지 올랐으며 문명이 뛰어나 당시 최고의 문인으로 손꼽히던 권주가 사약을 받고 별세하게 되자 부인 이씨는 남편이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 자살을 하여 부군의 뒤를 따름으로써 관비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권씨 부인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권씨 부인의 부친인 권질(權瓆)은 거제도로 유배를 가 위리안치(圍籬安置)의 귀양을 살게 되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딸 권씨 부인을 낳았던 것이다. 그 후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물러나 억울하게 화를 입은 신하들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는 녹용(錄用)의 대우를 받아 연산군에게 빼앗긴 황구방(皇口坊:오늘의 필동) 집을 되찾고 서울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또 다른 비극의 파도가 덮친 것은 조광조의 사림파를 숙청한 기묘사화 때문이었다. 이때 숙부였던 권전(權 )은 매를 맞다가 현장에서 비참하게 죽었으며, 숙모는 하루아침에 관비로 끌려가고, 아버지 권질은 또다시 예안으로 귀양을 가버린 것이었다. 권씨 부인은 어린 시절 이 모든 비극을 황구방 집에서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다. 집을 지킨 사람은 어머니 전씨와 어린 딸인 권씨뿐이었는데, 이 엄청난 비극을 본 어린 소녀는 이때의 충격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정신착란이 온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권질은 어느 날 퇴계를 조용히 불러들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이보게, 자네 연전에 상처를 하고 난 뒤 속현(續絃)을 하였는가.” 속현이라 하면 아내가 죽고 처녀에게 새장가를 가는 혼인을 뜻하는 말로 3년 전 상처하고 재혼을 했는가 하고 단도직입으로 묻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물론 퇴계의 사정을 모르고 묻는 말은 아니었다. 퇴계는 권질의 아버지였던 화산(花山) 권주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있었고, 또 그 아들인 권정과 같은 현량과 출신의 사림을 흠모하고 있었으므로 예안에 귀양 온 권질을 이따금 찾아와 문안 인사드리고 있었는데, 대뜸 그렇게 묻자 난처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문집은 기록하고 있다. “아직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권질은 느닷없이 딸을 불러 찾아온 손님인 퇴계 앞에 차 한 잔을 대접하라고 이른다. 이때 권질의 부인 전씨는 실성한 딸을 거둬서 남편이 귀양 와 있는 적소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간 남자 앞에 과년한 딸을 불러 차 대접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으나 권질과 퇴계는 묵묵히 처녀가 차를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딸이 돌아간 후 권질이 말하였다. “내가 자네에게 묻는 것은 바로 자네가 아직 속현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물었던 것이네. 자네는 내 집에서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양대에 입은 사화로 내 여식은 보다시피 혼이 나가 온전치가 못하네. 그러니 어디 누가 데리고 가겠는가. 내가 적소에 온 지도 이미 9년째 들어섰고 언제 풀려날지 기약도 없는 터에 혼기를 넘겨 버린 저 여식을 두고 죽을 수는 없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뒤 권질은 길게 한숨을 쉬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은 내 딸을 데려가 달라는 것이네. 아무리 생각하고 이치를 따져 봐도 자네밖에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내 딸의 처녀를 면케 하여 부디 이 죄인의 원을 풀어주시게나.”
  • [사회플러스] 수사기록 분리제출 시범 실시

    대검찰청은 법원의 공판중심주의 강화에 맞춰 수사기록 중 증거로 사용할 자료만 분리, 법원에 제출하기로 했다고 25일 밝혔다. 형사소송규칙은 법관의 선입견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피고인을 기소할 때 공소장만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검찰은 앞으로 내부수사보고서, 범죄인지보고서 등을 제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참고인 진술조서도 변호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증인 신문 후에 낼 계획이다. 그러나 변호인이 첫 공판 전이라도 검찰청에서 증거서류의 열람·등사를 요청하면 받아들이기로 했다.
  • [사설] 사법정보 온라인 통합 지나치다

    정부혁신위원회가 경찰, 검찰, 법원, 법무부 등 각 형사 사법기관이 따로따로 관리하던 수사, 재판, 수형기록 등 범죄 및 범죄인 관련 정보를 통합, 온라인으로 활용케 하는 통합형사사업체계 구축계획을 밝혔다. 향후 국세청 관세청 등 특별사법경찰 관서까지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엄청난 정보력으로 개인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빅 브라더’가 탄생하는 셈이다. 무선으로까지 정보가 오간다니 유출과 악용의 위험성 또한 어느 시스템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시민의 기본권보다 행정효율성만을 앞장세운 계획이 아닌지 우려된다. 정부는 대국민 서비스 향상을 강조한다. 종이없는 전자문서로 정부가 혁신되고 업무처리가 획기적으로 빨라지리란 것이다. 설명대로 한해 50만건에 이르는 음주·무면허운전 사건처리 기간이 3∼4개월에서 3∼4일로 단축된다는 것은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음주측정을 하는 시민의 녹화 영상이 보관돼 검사에게까지 전달된다는 설명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지문까지 찍어 수배여부 등을 확인한다니 지문날인은 무슨 법적 근거로 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초상권 침해는 물론 자칫 모든 시민을 범죄용의자로 전락시키는 인권침해 요소가 크다. 가장 민감한 개인정보라고 할 수 있는 사법관련 정보가 여러기관 사이를 넘나드는 것도 문제다. 공공기관 홈페이지의 71%가 개인정보를 노출시키고 있을 정도로 우리 기관의 정보인권의식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범죄정보가 유출·악용될 경우 피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또한 개인의 전모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수사상 불가피할 경우도 있지만 프라이버시 침해 위험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사업은 간단히 착수할 일이 아니다. 국민적 합의, 법적 근거 마련, 개인정보보호법 제정 등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정보를 분리하고 대민 서비스위주로 추진하는 등 추진체계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외국에는 왜 이 시스템을 도입한 곳이 한 곳도 없는지를 정부는 돌아봐야 할 것이다.
  • ‘e형사절차’ 2007년 실현

    ‘e형사절차’ 2007년 실현

    수사·재판·수형기록 등 범죄 및 범죄인 관련 정보를 디지털화한 통합형사사법체계가 이르면 2007년 구축된다. 경찰·검찰·법원·법무부 등 각 형사 사법기관이 따로 관리하던 정보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집대성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민원인들은 민원접수, 벌과금 납부, 제증명 신청 등 모든 민원을 인터넷으로 해결하고, 사법기관도 증거수집, 구속영장 신청 및 청구, 기소, 판결문 송달 등 형사사법 업무를 온라인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대통령 산하 정부혁신위원회는 ‘e형사절차’ 구축을 위해 지난달 23일 검찰 등 4개 형사사법기관이 참여한 ‘통합형사사법체계 구축기획단’을 구성, 현재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있다고 14일 밝혔다. 이 체계가 구축되면 검·경의 수사자료나 증거는 종이문서가 아닌 무선인터넷으로 저장하고 법원은 이를 열람해 재판에 활용한다. 또 구치소에 수용된 피고인들의 정보도 검찰·법원 등이 즉시 확인할 수 있다. 교도소 민원서류도 경찰에서 뗄 수 있게 된다. 기획단은 오는 7월까지 통합형사사법체계 구축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2006년 11월까지 경찰·검찰·법원·법무부 사이의 전자 형사절차를 실현할 기반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이어 2007년 12월까지 국세청·관세청 등 특별사법경찰관서까지 시스템을 확대하고 인터넷 통합민원창구도 개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법기관이 각종 개인정보를 한 곳에서 관리하고 공유하는 데다 무선인터넷이 해킹이나 바이러스에 취약한 만큼 보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변호사는 “범죄자라 해도 사생활 보호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면서 “개인정보가 모아지면, 그만큼 유출 위험도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인터넷 백신업체 관계자는 “현재 기술로 무선인터넷에 대한 해킹이나 바이러스를 완벽히 차단하기는 어렵다.”면서 “앞으로 금융거래나 통화내역도 온라인으로 전송된다면 개인정보 노출 위험은 더욱 커진다.”고 설명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배심·참심제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배심·참심제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지난 7일 제1회 ‘국민의 사법참여 연구회’를 개최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배심제도와 참심제도에 대한 의견 수렴과 연구 활동에 들어갔다. 배심제와 참심제는 한마디로 국민이 재판에 참여해서 유·무죄를 결정하거나 법관과 함께 판결을 내리는 제도다. 사법개혁위원회는 2007년부터 국민 5∼9명이 법관 3명과 함께 재판에 참여하는 사법참여제를 도입한 뒤 5년간 성과를 바탕으로 2012년 완성된 형태의 한국형 사법참여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었다. 7일 회의에서 논의된 핵심 쟁점은 ▲참여시민의 적극적인 재판 참가 방안 ▲참여시민의 수와 참여사건의 범위 ▲참여시민들의 결론 도출방법이었다. 또 “전문성이 아닌 합리성을 기준으로 참여시민을 평가해야 사법참여제의 정신을 살릴 수 있으며 이를 위해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을 극대화하고 합리성을 보장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지지구조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 국민의 재판참여 의미와 장단점 ●배심제, 참심제란 배심제란 법률전문가가 아닌 국민 중에서 선출된 일정 수의 배심원으로 구성된 배심이 법관으로부터 독립해 기소하거나 심판하는 제도를 말한다. 사실문제를 인정하고 심판을 하는 것을 소배심(심리배심·공판배심)이라 하고, 기소를 하는 것을 대배심(기소배심)이라 한다. 배심재판이 처음 시행된 것은 13세기 영국에서였다. 당시에는 국왕의 권리를 둘러싼 분쟁에서 배심은 증인의 역할만을 하다가 15세기 말 심판자의 기능까지 하게 됐고, 1670년의 부셸 사건에 이르러 독자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게 됐다. 미국도 이를 이어받아 연방헌법과 주헌법에 배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배심제는 모든 재판에서 이용되는 것은 아니고 극히 일부의 중요한 형사사건에서만 활용되고 있다. 배심원은 사건의 사실에 대한 판단만 하고 소송의 지휘, 증거조사, 법률의 해석 및 적용은 법관이 한다. 배심원은 가령 살인 사건의 경우 누구를 죽였다, 그래서 유죄다는 식의 판단만 내린다. 미국의 배심원은 12명이며 전원일치가 원칙이다. 기소배심제(대배심)는 1933년에 영국에서도 폐지되었지만 미국에서는 헌법상 중죄에 관한 기소배심제를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1923년에 도입해 1943년 폐지했으며 대신 참심제 도입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방 유권자의 명단에서 배심원을 선발하고, 영국은 지방 당국이 비치해둔 명단에서 뽑는다. 독일식 참심제는 국민 중에서 선거나 추첨에 의해 선출된 참심원이 직업적인 법관과 합의체를 구성하여 재판하는 제도로 배심제와 구별된다. 참심제는 사실문제나 법률문제도 참심원과 법관이 합의하여 다수결로 재판한다. 참심은 배심에 비하여 인원이 적어도 되는 점에서 경제적이기는 하나, 그만큼 법관의 의견에 끌려가기 쉬워 국민 참여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도입하려는 이유 국민의 사법 참여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법관의 판결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뢰도를 높이고 재판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검토됐다. 전관예우나 학연·지연에 의한 불공정 재판 시비를 차단하고 재판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배심제가 도입되면 검사와 변호인이 법정에서 증인과 증거를 내세우고 공방을 벌이는 공판중심주의가 자연스럽게 정착된다. 우리가 도입키로 한 제도는 배심제와 참심제의 혼합 형태다. 국민 5∼9명이 가칭 ‘사법참여인단’으로 재판에 참여해 유·무죄 판단 및 형량 결정에 참여하되 결정의 구속력은 인정하지 않는다. ●배심제의 장단점 배심제는 직업이 다른 10여명 내외의 국민들이 합의해서 유·무죄를 따지므로 단독 판사나 합의 재판부가 판단하는 것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일반인이 참여하므로 법률 규정보다는 국민 감정이나 도덕적 감정에 따라 판단을 내리게 돼 법률에 얽매인 불합리한 판결을 피할 수 있다. 다수가 합의해서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판사 개인이 피의자의 유죄를 선고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배심제는 또한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측면이 있다. 검사가, 판사가 아니라 일반 국민인 배심원들을 상대해서 인신 구속을 결정하거나 공소를 유지하려면 높은 수준의 증거나 자료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단점으로는 법률에 따르면 위법 사항인데도 범죄 요건이 다소 모호해서 유죄인 피의자가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점을 우선 꼽을 수 있다. 배심제는 법관에 의한 재판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들고 법률적 전문성이 떨어지는 시민들이 재판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여론재판이 될 우려가 있다. 또 법정공방과 결론을 내리기까지 배심원들의 협의 과정이 복잡하다. 보석이 보편화된다는 점도 단점으로 들 수 있다. ●우리 현실에 맞나&위헌 논란 배심·참심제는 현재 시행 중인 국가에서도 논란이 많다. 영국에서는 대배심을 폐지했다. 따라서 우리 실정에 맞는, 문제점이 적은 제도를 어떻게 고안하느냐가 앞으로의 과제다. 미국에서도 배심제는 OJ 심슨 사건처럼 유능한 변호인을 선임하는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배심·참심원이 지연과 혈연을 재판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이 많다. 일반 국민의 전문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현실에서 쉽게 정착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 헌법 2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어 국민이 재판에 관여하는 제도가 위헌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즉, 재판은 ‘직업 법관’만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은 헌법에서 규정한 법관은 반드시 직업 법관으로 해석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합헌이라고 주장한다. 손성진 기자 sonsj@seoul.co.kr
  • [서울광장] 세금 자랑스럽게 내게 해야/ 육철수 논설위원

    [서울광장] 세금 자랑스럽게 내게 해야/ 육철수 논설위원

    반부자·반기업 정서가 최근 많이 누그러졌으나 크게 바뀌지는 않은 것 같다. 경기가 썩 좋지 않은 탓에 정부가 온갖 소리를 들어가며 분배에 노력했는데도 빈부격차는 갈수록 벌어질 뿐이다. 그렇다고 해소책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정부의 합리적인 조세·부동산 정책과 부자의 절제와 양보, 못 가진 사람들의 노력과 인내가 따른다면 그리 머지 않은 시기에 그 격차는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반부자 정서의 타깃이라 할 수 있는 서울 강남지역에는 사실 부자들이 많이 산다. 세금통계만 봐도 확실히 입증된다. 강남지역의 중심에는 강남·서초·송파구 등 3개 자치구가 있다.3개 구의 면적은 모두 합쳐 120㎢ 남짓이다. 이곳에는 2003년 말 현재 156만명(이하 통계는 2003년 기준)이 살고 있다. 국토면적의 0.12%에 국민의 3.3%가 거주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들이 내는 세금은 어마어마하다. 직접세 9조 6100억원, 간접세 4조 1600억원, 지방세 2조 8000억원을 부담했다. 국세와 지방세를 합친 전체 세금의 15%가 강남지역에서 나온다는 계산이다. 지방 군소도시 수십개를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다. 부(富)의 편중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강남지역에도 총 33만 5000가구 중 전세 10만 7000가구, 월세 2만 3000가구 등 40%가 자기집이 없다. 다른 데 집이 한 두 채씩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렇다. 사글세나 무상임대주택도 5000가구 정도 되는데, 그래도 강남을 통째로 미워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기업쪽도 살펴보자. 기업들은 2003년에 법인세만 25조 6000억원을 냈다. 준조세 부담도 23조원이었다. 가장 잘 나가는 삼성전자는 3조 2000억원(국세의 2.8%)을 부담했으며, 삼성그룹은 6조 5000억원(6.3%)을 세금으로 냈다. 이렇듯 부자동네 사람들과 기업은 나라살림에 지대하게 공헌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을 돈 많다는 이유만으로 몰아세운다면 뭔가 잘못됐다. 물론 강남의 부자들과 대기업 가운데는 반칙과 특권으로 재산을 모은 이도 있을 것이다. 도덕성하고는 아예 담 쌓은 투기꾼,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돈을 상속받거나 긁어모은 재벌 후손과 졸부들도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들의 재산을 법에 의하지 않고 강제로 빼앗을 수 없는 나라다.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란 얘기다. 국내에는 소득세를 한 푼도 안 낸 국민이 746만명이나 된다. 근로소득자의 45.8%인 529만명, 자영사업자의 51.3%인 216만 8100명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당연히 국민으로서 보호받고 혜택을 누려야 한다. 그 밑바탕에는 세금을 내서 나라 재정을 유지토록 한 납세자들이 있다. 혹시 부자들이 한정된 재화인 땅과 주택을 독차지하는 바람에 자신에게 돌아올 몫이 줄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릇된 생각이다. 부의 양극화는 민주적 절차와 합리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할 국가적·국민적 과제다. 따지고 보면 강남의 땅과 집값이 수천만∼수억원 올랐다고 부러워할 일도 아니다. 실거래 과세가 점차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이다. 제 아무리 올라봤자 그 돈은 부동산이 하늘로 치솟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는 한 날아가지 않는다. 소유자가 매각하거나, 상속·증여할 때 세금으로 상당부분 환수될 돈이다. 시간이 흐르면 늘어난 국고를 통해 분배도 더 이루어지게 돼 있다. 부자나 기업이 무슨 죄인이나 된 것처럼 벌금 물리듯 세금을 부과하는 분위기는 곤란하다. 세금 많이 내고 손가락질 받는다면 누군들 기분이 좋겠는가. 고액 납세자들이 국가의 재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고, 이들에게 세부담을 더 높이도록 설득하는 작업은 정부의 국정운영 테크닉이다. yc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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