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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의 ‘세계주의시대’ 선언/崔章集 고대 교수·정치학(기고)

    金大中 대통령이 인촌기념강좌에서 “지금은 민족주의 시대가 아니라 세계주의 시대이다”라고 한 선언은 ‘국민의 정부’가 지향하는 정책기조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로 이해된다. ○권력과 자식의 화해 그동안 우리나라는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던 대통령과 지식의 중심적 산실인 대학이 반목과 긴장관계를 계속해 왔다.이 갈등적 관계는 권위주의적 정치현실과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사이의 대립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이점에서 金대통령의 고려대 강연은 이 양자 사이에 존재해 왔던 갈등의 해소, 권력과 지식의 화해라는 의미를 갖는 하나의 역사적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金대통령이 새로운 천년을 여는 역사적 전환점에서 ‘세계주의 시대’라는 국정운영의 좌표를 제시한 것은 특히 의미깊다. 이는 IMF관리체제라는 국난을 세계주의를 통해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다.세계주의는 곧 보편주의의 이념이며 원리이다.또한 세계주의는 정경유착과 배제를 통하여 기득이익을 유지,온존시켜왔던 폐쇄성과 배타성을 거부하고 참여와 통합의 원리를 중심으로 한다.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민족주의의 원리,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강조만으로는 세계의 규범과 세계의 시간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변화,세계화의 파고가 몰고오는 변화에 대응하면서 우리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수 없다. ○참여와 통합원리 강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국정운영기조 역시 이 세계주의에 바탕을 둔다.그러나 이 말이 민족주체성의 부정이나 상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그와 반대로,세계주의는 우리 민족의 수난과 이를 극복했던 집합적 노력의 역사,즉 도전과 응전의 다이나믹스를 국낭의 위기에서 다시금 실험하고자 하는 의지의 천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계주의는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위기와 실업사태,지역 갈등과 국민분열,남북간 대립과 갈등이 가져오는 위기극복을 위한 개혁의 담화이다.이는 또한 21세기적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지식중심의 유연하고 창발성이 넘치는,그리고 민주적이면서도 높은 생산성을 갖는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한 미래지향적 담화이기도 하다. 金대통령이 대학특강이라는 형식을 빌어 국민들에게 준 메시지는 분명하다. 역사적 도전에 직면한 우리의 대응전략이란 다름아닌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국민 모두의 창조적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것이라는 점이다.이 전략은 고통받는 모든 이들이 고통을 분담하고 그 성공의 가치도 고루 나누는 민주주의에 기초한다. 金대통령은 이를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인 ‘한(恨)’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풀이하였다.다시 말해서 우리가 직면한 국가적 위기에서 어떤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한’을 갖고 있는 한 우리 민족은 기필코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적 에너지 결집 우리가 세계주의로 나아가는 데서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보편적인 시민적 덕목이 취약한 우리 사회를 수직적으로 분획해왔던 지역주의이다.지역주의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현실의 난국을 극복할 에너지를 끌어낼 수도 없고,민족의 염원인 분단극복을 위한 방안을 마련할 수도 없는 것이다.즉 세계주의와 지역주의는 결코 양립 가능할 수 없다.
  • 공작원 3명 무인함 설치/합동신문조 수사결과

    ◎해안침투후 귀환중 발각… 총 9명 승선 북한 잠수정은 지난 21일 자정 무렵 강원도 양양군 수산리 해안에 노동당 작전부 소속 저격수 3명을 침투시켜 무인함을 설치한 뒤 돌아가다 우리 영해내에서 꽁치잡이 어망에 걸려 발견된 것으로 밝혀졌다. 일명 드보크,또는 무인 포스트라고 불리는 무인함은 권총 수류탄 독침 등 무기류나 통신장비,공작금 등 북한이 남파 간첩에게 보내는 지원물자나 남파 간첩이 북한에 보내는 활동보고서 등을 은닉하는 장소이다. 특히 작전일지에 기록된 좌표를 추적한 결과,잠수정은 남하 과정에서 해안선으로부터 5∼7마일을 벗어나지 않는 등 공해를 거치지 않고 낮 시간대에 대담하게 침투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앙합동신문조는 29일 잠수정에서 노획한 총 203종 1,388점의 장비 및 자료 등을 조사한 결과 이같이 최종 확인됐다고 밝혔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 20일 원산 황토섬을 출발한 북한 잠수정에 승선한 인원은 총 9명으로 이중 저격수(안내원) 3명이 21일 하오 11시 37분쯤 양양군 수산리 해안에 상륙,1시간 가량 무인함을 설치한 뒤 전원 복귀해 북으로 돌아가려다 잠수정이 고장나 22일 하오 4시 33분 속초앞 11.5마일 영해상에서 우리 어선에 발각됐다. 이들은 우리 어선에 발각된 뒤 그물 제거작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22일 하오 5시를 전후해 저격수 및 조장 등 4명이 수류탄과 AK소총 등으로 승조원 5명을 살해한 뒤 체코제 기관권총으로 자살했다. 합신조는 “메모 형태의 작전일지와 유류품 등을 분석한 결과 이들 9명 외에 국내에 잠입한 공작원은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고 강조했다. 합신조가 공개한 잠수정 승선인원은 조장 윤기주,부조장 리성철,항해장 김주성,무전장 한태현,기관장 리주남,부기관장 김성철 등 승조원 6명과 저격수(행동조장) 김정인,저격수 리덕인,저격수(추진기수) 유학진 등 3명이다.
  • 흔들리는 野 “중심이 없다”

    ◎지도부는 당권경쟁·소장파는 물갈이 주장/계파별로 이합집산… 정체성 최대위기 한나라당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구심점이 없다. 정체성의 위기다. 지도부는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투쟁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급급해 한다. 상황 논리만 팽배할 뿐 수권 야당으로서 비전과 미래는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金大中 대통령의 정치개혁 복안을 ‘여론 호도용’이라고 비난하면서도 뒤늦게 독자안을 마련하는데 착수한 것도 집권 경험을 가진 정당으로서는 궁색하다. 당내 일각의 느닷없는 내각제 논의는 그 출발점이 국리민복이 아니라 당리당략이라는 점에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 특히 ‘8·31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장악 가능성’만을 기준으로 계파별 이합집산이 이뤄지고 있어 ‘정체성 확립’이라는 과제는 더욱 뒷전으로 밀렸다. 소장파 의원들이 ‘한국의 토니 블레어’가 절실하다고 주장한 점에서도 한나라당의 현주소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徐淸源 사무총장과 영남권의 姜在涉 姜三載 의원 등 구체적 대안이 거론될 정도다. 李會昌 명예총재가 지난 합숙 토론회에서 ‘토니 블레어 시기상조론’을 들고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장파의 목소리가 당내 일각에서 먹혀들고 있다는 위기 의식 때문이다. ‘차세대 육성론’을 내세워 소장파의 자중(自重)을 당부하는 메시지였던 셈이다. 그나마 趙淳 총재 등 당권파는 좌표를 설정·제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현 지도부가 당을 책임지고 이끌 힘이 없다는 반증이다. 현재로서는 정책 정당의 역할도 기대할 수 없다. 한마디로 무기력 상태다. 초·재선의원 20여명이 18일 모임을 통해 “정체성을 잃고 국민에게 대안세력으로 비치지 못하면 공멸할 수 밖에 없다”며 계보를 초월한 소장파 모임을 발족키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당대회에서 새 지도부가 출범하지만 진정한 자기 개혁 없이는 당의 정체성 회복은 요원해 보인다.
  • 주한미군:下(대한민국 50년:17)

    ◎경제 부축·문화 오염 ‘빛과 그림자’/대도시마다 기지촌·PX물품 암시장 형성/군납·건설로 고용 창출… 戰後 복구 큰 역할/80년대 주권의식 급신장 反美 기류 확산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출범이 다름아닌 미군정(美軍政)의 이양이라는 점과 미군이 이땅에 반세기 넘게 계속 머물러 온 사실은 주한미군의 존재가 그동안 우리 사회와 어떠한 함수관계를 맺어왔을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주한미군이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한국은 오랜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 경제와 정신문화 모두가 고갈상태였다.따라서 그들이 풀어놓는 풍부한 물자와 생경한 문화는 쇼크와도 같은 영향력으로 다가와 기본 먹거리를 비롯한 생활양식에서부터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촉매역할을 하면서 지난 반세기동안 이땅에 빛과 그림자를 드리워 왔다.특히 주한미군으로 인한 사회상의 변모와 인식의 변화는 우리의 경제력 및 주권의식의 신장과 밀접하게 연관돼 왔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빈사경제 소생 원동력 안보 외적인 측면에서 주한미군이끼친 가장 큰 영향은 경제였다.45년 해방 직후의 경제혼란기를 거쳐 60년대 초까지의 재건기에 이르기까지 주한미군을 통해 배포된 물자와 미국측의 무상원조는 거의 빈사상태나 다름없던 우리 경제를 소생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이 사실이다.비록 물자의 대부분이 소비재이긴 했지만 56년과 57년 사이 3억달러의 무상원조에 힘입어 역사상 처음으로 소비자물가가 하락한데서 보듯 주한미군의 존재는 우리 경제를 좌지우지했다.경제개발기인 60년대 이후는 우리 경제가 제 궤도를 잡아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주한미군 자체로서의 영향력은 감소됐다.하지만 당시 군납산업이니 PX경제니 하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미군에 의한 달러의 위력은 여전했다. 속칭 주보(酒保)로 불리던 PX(미군용 매점)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았지만 지난 78년 수입자유화 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 우리의 실생활 및 의식구조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PX를 통한 미군물품의 시중유출은 미군의 상륙 직후부터 시작됐지만 50년 전쟁발발을 계기로 본격화돼 이후 대도시와 기지촌에는어김없이 PX물품 암시장이 형성됐다.국산은 상품다운 것이 없었기에 깡통식품,담배,커피,화장품,의류 등 PX물품은 미제(美製)로 통칭되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PX물품은 웬만한 집이라면 한두개쯤 다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안방 깊숙이 침투했으며 쓰고난 깡통이 버킷이나 판자집 지붕으로 이용되는 등 일상생활에서의 미제 의존도는 광범위했다.그래서 미군물품이 판을 친 50년대 우리 경제를 빗대 PX경제 또는 깡통경제라고 하는 혹평도 생겨났다.PX가 가장 많았던 50년대 말에는 전국 120여개소에서 총 취급품의 60%정도가 부정유출되고 이는 당시 가격으로 300억원어치 이상으로 추산됐다.PX물품의 부정유출은 그 자체가 불법이기도 하지만 경제질서를 교란시킴과 함께 범죄사건으로도 자주 비화해 끊임없이 사회문제화했다.또한 가짜상품이 판을 치게 만들고 국민들의 소비 조장,외제 선호,사치와 허영심의 확산 등 국민정서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하지만 부족한 물자의 공급을 메워전후 인플레 수습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긍정적 평가도 없지 않았다.주한미군은 이같은 PX유출과 원조를 통한 상품공급 외에 군납과 건설,고용창출 등 간접적으로 끼친 효과도 컸다.그러나 외국군의 주둔에 따른 부산물로 우리 사회가 떠안은 대가도 적지 않아 기지촌과 혼혈아,저급문화의 확산 등 부작용이 심했다. ○소비조장 허영심 확산 한국속의 아메리카인 기지촌,한국도 미국도 아닌 국적불명의 이방지대.양공주와 혼혈아,성(性)거래,마약과 폭력 등 부정적 언어로만 상징되던 기지촌의 역사는 주한미군의 역사와 떼놓을 수 없다.미군이 처음 진을 친 부평은 한국 최초의 기지촌으로 변했다.하지만 초기엔 엄격한 유교윤리와 미풍양속에 대한 뿌리깊은 사회관념 탓에 드러내 놓고 성의 거래가 이뤄지지는 못했다.45년 10월 열린 연합군 환영연무회가 “미군 앞에서 여자가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야유와 욕설을 퍼붓는 관중에 의해 깨질 정도로 우리 국민은 미군과 우리 여인들의 접촉을 용인하지 않았다.그러나 한국적 윤리의식의 높은 벽도 가난의 현실 앞에서는 오래 견디지 못했다.엄청난 물자와 달러를 쏟아내는 미군부대 주변엔 술집과 상점이 하나둘씩 들어섰고 자연 양공주 또는 양색시로 불리게 된 여인들도 몰려들었다. ○혼혈아 7만명 태어나 기지촌이 본격 정착하게 된 계기는 전쟁이다.전쟁은 이땅에 미군을 대거 불러들였고 또한 숱한 미망인과 고아들을 양산했다.생활능력이 없는 이들은 자연 물자와 달러를 찾아 미군부대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이에따라 기지촌 경기도 급속히 확산됐다.기지촌 경제가 황금기를 구가하던 60년대 후반 이태원·동두천·의정부·송탄·평택·대구·군산·부산 초량 등 전국 62개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윤락녀의 수는 2만명을 넘었다.한달에 이들이 화대로 벌어들인 달러의 규모도 1백만달러를 훨씬 상회,朴正熙 정권은 윤락행위방지법을 무시하고 미군상대 술집에 면세 혜택을 주는 등 기지촌 육성책을 펼 정도였다.또한 이런 와중에 기지촌에서는 외국군 주둔에 따른 필연적 산물로 7만여명으로 추산되는 혼혈아가 태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번성일로를 걷던 기지촌도 경제성장에 따른 달러의 위력 감소와 70년대 들어 단행된 미국의 연이은 철군정책으로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한때 7천명에 달했던 동두천지역 기지촌 여성들의 모임 ‘민들레회’가 지난 89년 회원이 없어 자진 해체한 반면 또다른 대표적 기지촌인 의정부시에서 96년 1월 ‘우리땅 미군기지 되찾기 의정부시민연대회의’가 결성된 것은 이땅의 주한미군 존재양식과 관련,한 시대가 지났음을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주한미군은 경제적 측면 못지 않게 문화적 영향도 크게 끼쳤다.미군교재가 대학교재로 그대로 사용될 만큼 한국 대중이 최초로 접촉한 미국문화는 군대문화였다.따라서 하위문화로서의 군대문화가 지닌 저급성과 퇴폐성,폭력성 등의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사기도 했다.그렇지만 비행기 한 대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조종사를 살리는게 더 중요하다는 미국적 사고는 목숨보다 소총한 자루가 더 중요하다는 일본식 사고에 젖어있던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한미行協 등 난제 남아 주한미군은 처음 이 땅에 해방군으로 들어왔다.그리고 한동안은 한국이 군사적·경제적으로 신세를 지는 원조자로 존재해왔다.하지만 70년대 후반을 고비로 애증이 교차하는 냉정한 재평가와 함께 우리 국민으로부터 새로운 존재양식을 요구받았다.그 대표적인 움직임은,80년대 대학가의 반미 기류를 계기로 급속히 확산된 우리 국민의 권리의식 신장이다.전에는 약자로서 억울해도 참았지만 이제는 이유없는 불이익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동등의식의 발로다.한국민의 권리의식 신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주한미군 기지이전과 미군 범죄자에 대한 한국정부의 재판권행사 요구를 꼽을 수 있다.과거 주한미군의 문제가 주로 국가간 차원에서 중요성을 띠었다면 이제는 범죄·환경·권리침해·경제실리 등 국민 개개인이 권리차원에서 제기하는 문제가 주된 쟁점으로 등장한 것이다.아직도 타결되지 않은 한미행정협정(SOFA)의 개정을 비롯,주한미군과 한국민간에 새로운 좌표의 정립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日 경제회복 과제와 美의 선례(해외사설)

    98년도 예산이 성립되자마자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는 재정개혁노선을 사실상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무서우리만치 빠른 변신에 놀라울 뿐이다.불과 4개월전의 법률(재정구조개혁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 아닌가. 총리는 “일본 경제는 전후 가장 어려운 상황”이라고 이유를 설명한다.일본경제가 전후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것은 사실이다.그렇기 때문에 버블로부터 빨리 벗어나기 위해 구조개혁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16조엔의 대책이 유효할지 의문이다.오히려 유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정부는 “공공사업에도 좋은 공공사업이 있다”라고 말한다.그 예로 광섬유망등 정보통신관련,환경,복지 분야를 내세운다.그러면왜 본예산 편성에서 이러한 21세기로 연결되는 전략적 투자를 하지 않는가.부처별 사업분야별로 기득권에 의해 지켜지는 공공사업예산을 그대로 둔 채새로운 추경예산으로 ‘좋은 사업’을 하는 것은 이치가 닿지 않는 이야기다.‘나쁜 사업’을 싹 깎아 버리는 것이 선결과제다.미국에서도 오랫동안 군수산업을 중핵으로 하는 ‘군산복합체’가 있어 일본의 공공사업처럼 재정에 군림해 왔다.일본은 바로 ‘공공사업 복합체’인 것이다. 총리는 대책의 주요 내용의 하나로 특별감세 실시를 내놓았다.그러나 이것도 바람직한 세제의 형태에 등을 돌린 것으로 재정적자를 늘리는데 이바지하게 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먼저 사태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는것이다.버블은 이미 붕괴된 것이 아니다.이제 붕괴의 최종국면에 들어섰을 뿐이다.일본 경제의 비밀무기로 믿어져 왔던,일본 경제의 가로 세로 축이었던 땅값과 주가의 상승을 대신하는 새로운 좌표축을 구해야 한다. 그 해답은 지금 진행중인 개혁과 규제완화 뿐만 아니라 정부에 의존하지않는 자립적이고 선진적인 경영자와 산업이 등장하는 것이다.그 선례는 다름아닌 미국 경제 재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정치판의 朴正熙 家/조카 埈弘씨 자민련 탈당

    ◎박세직 의원 영입에 반발/장조카 박재 전 의원은 박의원 나간 지구당 맡아/차녀 서영씨 시장출마설 ‘朴正熙 家 사람들’이 정치판에 흔들리고 있다.정쟁(政爭)에 휘말리거나 좌표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그런데 움직이는 방향은 야(野)쪽이다.18년 집권의 朴正熙 대통령과 대비된다. 자민련은 9일 朴전대통령의 조카 朴埈弘씨를 당무위원에 임명했다.그러나 朴씨는 탈당계를 제출한 뒤였다.같은 구미출신의 朴世直 의원이 한나라당에서 자민련으로 입당하자 그 반작용이다. 자민련은 당무위원 감투로 다독거리기에 나섰다.하지만 朴씨는 받을 기색이 아니다.당측은 물론 외부와 연락을 끊고 잠적중이다.그는 주변에 “당 지도부가 한마디 사전 상의도 없었다”고 불만을 터뜨린 것으로 전해진다. 또 朴전대통령의 둘째딸 書永씨는 정계진출설이 나돌고 있다.朴전대통령 고향인 구미에서 치러진 4·2보선에서 언니 槿惠씨가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된 데 이어 6·4지방선거에서 구미시장 후보로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펄쩍 뛴다.書永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 보선에서 언니를 돕다보니 그런 얘기가 나온 모양”이라고 분석했다.그리고는 “육영재단 일에 매달릴 뿐 정치와는 아무 인연이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한편 朴전대통령의 장조카인 朴在鴻 전 의원은 朴世直 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하자 한나라당 구미갑 지구당위원장을 맡았다.
  • 중국 고대문명 기원은?

    ◎갑골문에 새겨진 일­월식/하·은·주 도시 유적지 분석/학자들 연대표 작성 박차 【북경=정종석 특파원】 중국 고대문명의 기원은 언제인가. 사람들은 중국의 고대문명사가 보통 지금부터 5천년 전에 시작했다고 얘기한다.그러나 중국 고대문명의 기년이 확정되지 않았으며,연대학적으로도 믿을 만한 표준이 아직 없다.학자들은 먼저 3천년 전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상(또는 은)·주시대의 시대구분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중국당국은 150여명의 저명한 학자들로 하여금 내년 9월까지 과학적 근거가 있는 고대 중국의 연대표를 작성,공포하기로 했다.고대왕국인 하나라의 존재 및 건국시대,하나라와 상나라의 구분,상나라 전기의 비교적 상세한 연대표,상나라 후기,서주(주나라 평왕 천도 이전) 중기 이후의 비교적 정확한 연대표를 확정하는 것이다. 하·상·주 세 왕조의 시대구분 사업에는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하나는 상나라의 탕왕이 하나라의 걸왕을 친 연대.둘째는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의 주왕을 친 연대이다.전자는 하나라와상나라,후자는 상나라와 주나라의 분계선이다. 무왕이 주왕을 친 것은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건립된 분계선이다.그 정확한 연대를 확정짓는 것은 서주 건립으로부터 기원전 841년까지 몇백년간의 역사를 추산하는데 좌표성적인 의미가 있다.그런 의미에서 지난 83년 하남성 서남부에서의 상나라 도읍 발견은 하나라와 상나라의 연대 분계점 확정에 도움이 된다.전문가들은 이 작은 도시유적지의 건립시대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큰 유적지보다 빠른 것으로 본다.그래서 상나라가 하나라를 멸망시킨 뒤 상나라 최초의 도읍 중의 하나로서 작은 도시의 건립연대가 곧 하·상 두 시대의 분계선이라고 인정한다. 현대 천문학은 새로이 쓰이는 연대 확정의 중요한 수단중 하나다.현대 천문학 수단은 하·상·주 3개 나라 시대의 목성과 5개 성좌의 실제적 위치를 문헌기록과 비교해 비교적 정확하게 추리계산하고 일식·월식이 나타난 연대와 날짜를 계산할 수 있다.또 갑골문에 기재된 일식·월식 등 천문기록도 상나라의 연대를 확정하는 중요한 근거이다.지난해 9월에 갑골문·천문학자들 은이 갑골문에 쓰인 일식·월식 문제에 대해 함께 연구한 결과 똑같은 결론을 내리고 각 왕조의 연대 확정에 큰 도움을 얻었다. 중화문명의 기원에 관해 재래의 역사연구에서는 줄곧 사마천의 사기에 근거했다.2천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내용이 끊임없이 연구·발전됨에 따라 중국 고대사 내용을 재구성할 필요성이 생겼다.고고학 고찰에 따르면 중화문명은 전설 속의 황제 이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이미 출토된 동남해양 문명성의 하모도 문화유적은 지금부터 7천년전,농경문명의 대표적인 호남 풍현 팽두산 유적은 9천년전,기타 우하량 홍산 문화유적과 대지만 문화유적은 모두 5천년 전 이상의 것으로서 중화문명이 근 1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 최근 중국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 변화·내분 기로의 러 공산당/탄생 100돌의 명암

    ◎온건주의자들 옐친과 타협… 개혁노선 공개 지지/레닌신봉 금진파도 정체성에 ‘새 좌표’ 설정 막막 【모스크바=류민 특파원】 러시아 공산당이 13일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정확히는 1898년 3월13일부터 15일까지 3일 동안 혁명가인 레닌,플레하노프 등은 현재 벨라루시공화국의 수도인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결성을 꾀했다.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바로 그해 가을 탄생한 러시아공산당의 모태다. 그러나 오랜 역사의 러시아공산당은 이제 발전은 커녕 정체감 위기 속에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새 러시아’에서 공산당의 역할은 무엇인가.옐친정부의 협력자인가 아니면 적인가.공산당 이론에 충실한 반대자인가 급진적인 무리들인가.옛 이론에 충실한 고위층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공산당은 방황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에 염증을 느끼고 정치보다는 오히려 경제적 이익에 관심이큰 ‘신세대 공산주의자’에게 러시아 공산당은 이제 아무런 호소력도 없다.겐나디 주가노프 러시아 공산당 당수는 최근 옐친 대통령에게 ‘연립정부’의 뜻을 비추다 ‘퇴짜’도 맞았다.이 연립정부 제안은 곧바로 공산당의 분열을 가속시킨다.“공산당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일부 관측통들은 당이 최소한 두조각이 날 가능성을 벌써부터 점치고 있다. 서방국가들은 소련체제의 붕괴를 ‘공산주의의 사망’으로 연결했었다.그러나 공산당은 여전히 러시아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국가두마의 다수당이요,러시아 남부 ‘레드벨트’에서 공산당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공산당은 무엇인가.당내 일부세력은 서방의 사회민주당을 본따며 변화하려 든다.하지만 상당수는 여전히 소련식 전체주의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미국을 적대시한다. 변화의 한 축에는 주가노프 당수가 자리잡고 있다.그는 온건하고 합리주의적인 공산주의자의 선봉으로 꼽힌다.마르크스주의보다는 러시아의 민족주의에 호소한다.때때로 시장개혁과 자본주의자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일부분파들은 그를 실용주의자로 분류해 비난한다.러시아 정치무대에서 옐친과 타협하며 그와 권력을 공유하려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축인 급진주의를 대표하는 블라디미르 세마고 하원의원은 “공산당이 좌파로서 새 좌표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되며 레닌주의는 21세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정작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공산당의 정체성과 관련한 최대의 아이러니는 옐친정부 지도부의 상당수들이 전직 공산당 간부라는 점이다.한 몸에서 나온 두개의 머리가 러시아 정치를 괴롭히고 있다.
  • 미 칼럼니스트 조지 멜로언 WSJ 기고 요지(해외논단)

    ◎클린턴,인니 개혁 직접 요구를 월스트리트 저널의 칼럼니스트인 조지 멜로언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IMF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도네시아의 모든 문제를 다루려 하지 말고 직접 나서서 수하르토에게 인니 문제를 말하라”고 촉구했다. 적절치 않아 보이지만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에 대해 여러해동안 한가지만을 염두에 둔 것 같다.그가 인도네시아(인니)의 금융가인 제임스 리아디와 친분을 가진 것은 지난 1984년부터 이다.그 당시 리아디는 알칸사주에서 클린턴 친구의 도움을 받아 금융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을 때이다.리아디와의 친분은 물론 최근 그를 통해 유입된 아시아의 돈이 백악관에서 무엇을 얻어왔는가에 흥미를 갖는 의회에서 철저히 관찰되고 있다. 그 댓가의 일부는 아시아에 대한 보호이다.지난 1993년 백악관으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되지 않아 클린턴은 미키 캔터와 함께 인니를 새로운 무역정책안을 위한 시험장으로 만들었다.그들은 미국 노동조합원들에게 개발도상국에 대한 가격보호 조치에 대해 안심시켰으며 몇몇으로부터는동정적인 표도 얻었다.이 두사람은 또 무역부문의 양보를 이유로 인니의 노동과 환경수준을 높이기를 요구했으며 그 결과 인니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그 실험의 결과는 미미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아직도 클린턴파들이 무역협상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들의 선례가 되었다. ○수하르토·IMF 해법 이견 시간이 흘러 지금 아시아 각국들은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현재 클린턴은 인니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어떻게 국가를 경영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주고 있다.계획대로 5년 더 권좌에 머물게 된 수하르토는 처음 권좌에 올랐을 때 이제 막 대학생으로 등록했었던 클린턴으로부터 많은 조언을 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 수하르토는 워싱턴의 희망을 무시하고 인니 화폐인 루피아화의 급격한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달러화 고정환율 조치를 채택하려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클린턴 참모와 재무부 차관의 조언을 받는 국제통화기금(IMF)은 이같은 난해한 문제에 대해 인니와 강공으로 맞서기 시작했다.IMF는 30억달러의 자금지원을 정지시켰고 수하르토가 백악관이 원하는대로 하지 않을 경우 계속해서 자금지원을 중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수하르토는 인니의 경제위기 이면과 정권불안의 배후에는 한때 친구였던 클린턴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루피아화의 붕괴는 지난해까지만해도 완만한 모습을 모이면서 경제성장율이 7%로 예견하게 하던 인플레이션 비율을 급격히 올려놓았다.쌀과 같은 기초생필품의 가격도 치솟아 국민들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이즈음 수하르토는 “왜 하필이면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들이 나에게 이런단 말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좋은 질문이다.그에 대해 IMF가 권고하는 기준선을 지키라는 해답외에 클린턴이 대답할 만한 다른 것이 있을지 모르겠다.수하르토의 잘못은 이미 기록으로 작성돼 있다.편파적 자본주의,정실인사,그리고 정적들에 대한 강경책 등이 그것이다.인니는 분명 워싱턴이 원하는 시장경제체제의 수준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니는 지난해 경제위기를 겪기 전까지 헤리티지재단이나 월스트리트저널이 작성한 경제자유도와 질적 성장수준에 따른 도표상 좌표에서는 “아시아의 호랑이”로 등재돼 있었다.세계에는 2억1천만여명이 6천여개의 섬에 흩어져 사는 인니보다 더 혹독한 독재국가가 존재한다. ○총체적 부패 척결 제기할때 수하르토는 IMF와는 달리 인니의 가장 급박한 정치문제부터 다루려하고 있다.아시아의 문제는 금융위기이다.그점을 기억하는지?.이와같은 문제는 자국 통화가 외국통화에 대해 가치가 하락하려는 순간에 무리하게 방어책을 취했던 태국과 말레이시아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근본적인 접근법은 통화량을 줄이고 이자율을 높이는 것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원치 않는 가치하락을 본 적이 없는 IMF의 똑똑한 친구들은 그같은 정책을 취하도록 하지 않았다.일단 시작된 자본전쟁은 그 자체에 의해 계속된다.루피아화는 가치가 폭락했다.결과 달러와 엔을 차입했던 인니는 깊은 외채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수하르토씨는 지난 32년동안 권좌에 있었으면서도 바보같이 “아하 나의 문제는 바로 돈문제였구나”라고 말하는 우를 범했다.그래서 그는 미국경제학자인 스티브 핸케의조언을 들어 자국통화가 공격을 받았을때 이자율을 높이고 자동적으로 통화량을 줄이도록 하는 금융통화위원회를 만들었다.그는 분명 흠집 한번 나지 않고 통화가 잘 흘러가게 한 홍콩의 위원회를 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문제는 자신이 경제를 성장시켰다고 믿기를 좋아하는 클린턴씨가 수하르토씨 추리의 간결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수하르토가 돈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준 것이 아니라 IMF로 하여금 돈문제만을 제외한 인니의 모든 것을 해결하라고 도운 것이다.4백30억달러에 달하는 원조는 바로 미끼에 불과한 것이다.그리고는 IMF는 수하르토에게 인니의 편파적 자본주의,부패,정실인사 등 모든 문제를 고치도록 요구했다.만일 그가 이에 대해 외면한다면 IMF는 원조정지를 알리는 호각을 불게 돼 있다. 확실히 인니는 많은 개혁을 할 수 있다.그러나 그 일들은 지금 당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만일 지금 인니의 금융문제가 해결되고 통화가치가 회복되면 부패 등 많은 문제들이 다시 수면위로 고개를 들 것이다. IMF가 유보하고있는 2차분 30억달러란 돈은 인니의 통화를 고정시키고 통화위원회의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데 아주 유용하다.그렇다면 도덕적 위엄에 대해 전문가인 클린턴은 지금 수하르토에게 부패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석원 의원,정계 입문 2년만에 쌍용 복귀

    ◎“기업살리기가 정치보다 우선” 쌍용그룹회장 출신의 한나라당 김석원 의원이 돌연 의원직을 내던졌다.김의원의 의원직 사퇴는 소속 당이나 동료의원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전격적이다.당도 공식 논평을 통해 “귀중한 인재를 잃는 아픔이 있다”고 아쉬워했다.김의원은 9일 보도자료를 통해 “지금 당장 경제현장으로 달려가 어려운 경제를 살리는데 미력이나마 보태는 것이 최선이란 결론에 이르렀다”고 사퇴의 변을 밝혔다. 그는 아직도 쌍용그룹의 대주주다.8개의 개열사 가운데 쌍용양회의 지분 13.5,쌍용화재 14.1,쌍용건설 5.9%를 갖고 있다.따라서 의원직 사퇴와 동시에 그룹의 상임고문을 맡아 곧바로 경영 일선에 복귀할 전망이다.하지만 그룹 회장은 당분간 동생인 김석준 현 회장이 맡을 것이라고 측근이 전했다. 김의원은 2∼3개사의 대표이사 회장직을 맡으며 김회장과 쌍두마차체제로 그룹을 이끌것이란 전망이다. 김의원은 부친 고 김성곤씨(성곡)의 후광과 성공한 대기업 회장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지난 96년 15대 총선에서 고향인대구 달성구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정계에 화려하게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지역구의 높은 인기와는 달리 그는 중앙무대에서 한낱 초선의원에 지나지 않았다.정계와 재계에서 모두 성공한 인물이 되고자 했던 그의 꿈은 이루기 힘든 벽으로 느껴졌다.때마침 쌍용그룹의 위기설이 터졌고 그때부터 김의원은 좌표 설정에 고민했다고 한다.그러던 차에 지난 연말 대선 결과는 그에겐 결정타였다.야당정치인으로선 그룹의 경제회생에 도움은 커녕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고,결국 정계은퇴만이 유일한 선택이란 판단을 내렸음직하다.그는 앞으로도 절대 정계에 복귀하지 않을 생각이다.
  • ‘대학의 의무’등 3권/도널드 케네디 외(미래를 보는 세계의눈)

    ◎위기의 미 대학교육 원인은 뭔가/“교수 종신제·학문 비밀주의 폐단/돈벌이 연구 매달려 본분 망각/도덕·인격 중시 전통교육 회귀를” 【뉴욕=이건영 특파원】 대학교육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현 시대에 대한 대처능력을 상실,위기를 맞고 있다는 미국 대학교육의 현실을 진단하고 향후 좌표설정에 도움을 주기 위한 서적들이 최근 미국 대학자체 출판사에 의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대학의 의무’,‘고등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절반의 진실들’,‘인문학 개발’등이다. 미국의 대학환경이 갈수록 열악해 지고 있는 데는 교수의 노령화와 연구개발비의 축소가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또 새로운 첨단기술의 발달은 대학으로 하여금 학생들과 자금을 유치하는 경쟁을 벌이도록 강요하고 있다.이 책들이 주목 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도널드 케네디의 저서 ‘대학의 의무’는 미국 대학교육의 미래를 제시한 사실상의 첫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다.80년부터 92년까지 스탠포드대학 총장을 역임한 그는 대학의 책임보다는 대학의 자유를 더많이 주장한다.대학교수들에게 연구실적을 공개하고 잘 가르치며,대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모든 학문적 도전을 뚫고 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그의 주장은 지금까지의 관례를 타파,교수들이 현재 무엇을 연구하고 있느냐를 공개하지 않고서는 대학사회에 대한 일반인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그가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스탠포드대는 연구개발비 지원에 대한 회계부실이 지적돼 시끄러웠다.결국 이 문제로 총장직을 물러난 그는 이러한 뼈아픈 경험에서 대학교육자들은 그들이 지금 무슨 항목으로 지원 받는지를 모르고 있으며,연구내용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고 비판한다.대학학문의 비밀주의를 단호하게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박사학위 준비자들을 가르치면서 대학의 의무를 실감했다는 저자는 현재의 교수진들은 과거처럼 은퇴연령인 65세가 됐어도 물러나지 않아 젊은사람들이 대학강단에 서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교수의 노령화는 대학으로 하여금 정규직 교수 채용을 줄이고 시간강사수를 늘리게 하며 이는 대학의 책임성 결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대학의 현안을 둘러싼 갈등을 대학의‘문화전쟁’으로 부르면서 개별분석을 통해 문화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현재의 대학의 명성과 위상이 교수들의 연구실적만 토대로 한 것이라면 학생들이 고품질의 수업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교수들이 ‘생명공학’같은 돈벌이 되는 연구계획만을 맡을 때 대학당국은 이를 어느 정도로 제어해야 하는가. 대학당국 자체가 그런 수익 높은 연구계획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저자는 연구대학의 미래는 정부와 산업체와의 협력관계에 묶일 수 밖에 없지만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정부와 기업체간의 협력관계 속에서 대학의 역할을 찾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대학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 어려운 선택에 있어 역시 대학총장 출신인 ‘대학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절반의 진실들’의 저자 조지 D.오브라이언은보수적인 방법을 제시한다.그는 한세기 전에 대학사회를 지배한 전통적인 대학교육의 체제로 회귀하자는 이색주장을 펴고 있다.학문적 발견과 다양성보다는 도덕적·인격적인 면을 중시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는 많은 미국학생들이 인문학을 소홀히 하면서 학습단위만 큰 첨단기술학문 쪽을 선호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3천600개의 대학중 교양과목을 설치한 대학은 600개에 불과하다.저자는 또 현재의 대학사회가 교수집단이 아닌 관리자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다면서 교수의 수급 시장기능에 맞지 않는 ‘교수 종신제’는 마땅히 폐지돼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저자는 특히 대학은 다문화적인 여러가지의 학문연구보다는 각자 전문성과 독자성 제고에 치중함으로써 다양성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문학 개발’의 저자 마사 C.누스바움은 다문화적 학문연구를 지양하자는 오브라이언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철학자이며 고전주의학자인 그는 미국의 전 대학을 순례하면서 대학의 다양성 부족을 목격하고 이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그는 일부 대학은 자신의 독자성을 강조한 나머지 지적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인문학 교육의 목적은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학과 철학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대학들이 학문의 자유와 개방적 표현의 터전이란 명성을 얻은 것은 튼튼한 재정 때문이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적 목적달성을 위한 추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만큼 미국의 대학들은 이제 변화하는 사회를 계속 선도하기 위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시점에 왔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이 세 학자들의 문제제기는 최근의 미국 대학의 재정난과 관련해볼 때 음미할 점이 상당히 많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학의 의무’:원제 Academic Duty,하버드대학 출판,310쪽,29.95달러.‘고등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절반의 진실들’:원제 All The Essential Half­Truths About Higher Education,시카고대학 출판,243쪽,19.95달러.‘인문학 개발’:원제 Cultivating Humanity,하버드대학 출판,328쪽,26달러.
  • ‘제3영상시대’ 디딤돌 놓는다/‘98사진영상의 해’주요 기념사업

    ◎사진박물관­최대숙원… 연내 건립기반 마련/현대기록전­정부수립 후 50년 발자취 조명/남북교류전­서울·평양서 동시에 교환 추진/전국민축제­지자체별로 고향 참모습 알려 1998년은 문화체육부가 정한 ‘사진영상의 해’.이 땅에 사진이 들어온지 118년째를 맞는 올해는 ‘사진영상의 해’를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들이 펼쳐질 전망이다. 사진은 우리의 역사와 삶의 모습들을 기록하면서 점차 독특한 예술영역으로서의 위치를 탄탄히 굳혔고 산업·정보매체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시켜 왔다.특히 매스미디어를 통한 정보접근 측면이 강화되면서 컴퓨터세대에 대한사진의 영향력은 절대적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전문가들은 현재 전국적으로 5만여명의 전문 사진가들이 예술·보도·광고·산업 등 각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디지털카메라 시판 또 30여개의 각급 대학에서 매년 2천여명의 전문 사진인력을 배출해 사진 분야의 인력도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이같은 분위기에서 사진관련 업계도 급속한 신장을 보여 특히 카메라 생산부문에서는 세계 6대 카메라 생산국으로 부상할 정도다. 올 ‘사진영상의 해’는 한국 사진계의 일대 전환기가 될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관측.우선 디지털 카메라가 시판돼 기존 카메라를 대체하면서 촬영·제작방식의 획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여기에 홀로그램·입체사진 등 첨단사진기술이 연구단계를 거쳐 실용화를 앞두고 있다. 따라서 조직위측은 올해를 계기로 사진분야의 대전환을 이루어 내겠다고 야무진 계획들을 세워놓고 있다.격동의 와중에서 소실된 가치있는 사진자료들을 발굴,체계적으로 보관·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심도있게 추진하고 있다.영상이미지화한 사진의 폭넓은 보급으로 사진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실생활에서의 사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켜 제3영상시대를 준비하는 토대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조직위가 세워놓은 ‘사진영상의 해’ 기본방향을 보면 ▲한국사진사 118년의 유산 계승 발전 ▲한국적 사진영상의 독창성 추구와 21세기 한국사진문화의 발전방향 모색 ▲사진영상의 중요성에대한 국민적 인식변화를 통한 제3영상시대에 대비 등으로 압축된다 ‘사진영상의 해’에 펼쳐질 중점사업들을 소개해본다. △사진박물관 건립추진=모든 사진인들의 오랜 숙원이며 ‘사진영상의 해’사업중 최대의 현안.올 1월중 집행위원회에 별도의 추진위원회를 구성,자료수집과 건물확보를 동시에 추진할 계획이다.자료수집은 현재 각 사진단체·언론기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을 기증받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외국의 문서보관소·박물관·연구기관 등이 보유한 자료 수집과 함께 각종 행사를 통해‘전국민사진찾기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홀로그램 실용화 눈앞 수집된 사진은 보존처리해 영구보존하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자료의 활용 및 판매에 활용한다.건축에 필요한 경비는 토지매입비를 포함해 15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98년중 건립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사진자료 보존공간과 상설전시장·임대전시장·사진단체 사무실·기타 부대시설로 구성된다. △한국 현대기록사진전=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정부수립 과정에서부터 이후 50년 동안의 민족의 발자취를 조명한다.한국사진기자회가 주관하는 행사로 각 언론사와 정부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중요 기록사진들을 수집해 서울을 비롯해 전국 순회전을 개최한다. △남북교류사진전=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사진가들의 작품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교환전시한다.남북 사진작가들의 실무협상을 거쳐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전시회를 개최하고 작가들의 교환방문도 추진한다.현재 통일원으로부터 사진전시 및 북측 접촉승인을 받았으며 북측도 관련당국으로부터 사진전 공동개최에 관해 승인을 받은 상태다.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 △인터넷 사이버 갤러리 운영=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해 ‘사진영상의 해’ 행사 추진을 위한 국제 정보교류에 활용한다.사이버 갤러리를 개설해 전문 사진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한다.또 홈페이지에 제공되는 화상 데이터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한 실시간 사진전송·사진이미지를 누구나 자유롭게 변용할 수 있는 다채로운 이벤트를 벌인다. △한국사진역사전=사진도입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사진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한국사진 118년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게 한다.한국사진의 특성을 다각도로 조명해 정보통신시대를 맞는 한국 사진영상의 좌표를 제시한다.기록사진과 사진작품·사진책자·사진기재 등 사진의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는데 이미 확보된 사진자료 뿐만아니라 전 국민 사진찾기운동을 통해 새롭게 발굴된 사진을 보존·복원·재인화 과정을 거쳐 공개한다. △사진영상축전=전국의 모든 사진인들이 전 국민과 함께 하는 축제의 장.각 사진단체의 회원들이 출품하는 사진 및 영상작품을 전시하고 사진기자재전을 통해 우리나라 사진산업의 현주소를 재조명한다. △전 국민 사진축제=‘내고장’이란 주제아래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전시회 등을 운영,사진을 통해 고향의 참모습을 재인식한다.지역행사를 통해 모아진 우수한 사진들을 선정해 ‘국토사랑 사진축제 한마당’을 벌이며 향토풍물제를 연다.
  • 역경 이긴 반세기…한국혼 다시 일깨운다/정부수립50주년 기념사업

    ◎‘경제50년사’ 등 백서 발간… 고난 극복의 역사 재조명/창작극 ‘대한국 창조’ 순회공연… 국민축제 행사 다양/21세기 걸맞는 정책 수립… 학술대회 통해 비전 제시/‘겨레의 노래’ 재정·보급 등 나라사랑운동 지속 전개 98년은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반세기동안의 발전과 우여곡절을 되돌아보는 한 해이면서 동시에 21세기를 준비하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이기도 하다. 정부는 ‘정부의 회갑’을 맞아 알뜰하고 다양한 기념사업 계획을 범정부적으로 추진중이다.특히 광복 50주년 행사를 이미 3년전 치른 만큼 내실있는 행사 위주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정부는 연중 기념사업을 펼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주년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오는 8월15일에 행사가 절정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미 지난해 말 국무총리 자문기구로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 강영훈 전 총리)를 구성,사업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또 기념사업위원회 산하에는 정부 14개 부처 관계자들과 국회·법원 등 범정부적으로기념사업실무위원회(위원장 우근민 총무처 차관)가 구성돼 기념사업 계획의 수립·추진 및 조정작업을 맡고 있다.이와 함께 기획추진반(반장 최석충 총무처의정국장)이 구성돼 부처별 추진계획을 종합지원하고 추진상황을 점검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각 분야별 기념사업 계획안은 다음과 같다. ▷정부수립의 의의 부각◁ ▲세미나 개최=서울 뿐 아니라 미국·캐나다·프랑스·독일 등의 지역을 순회하는 5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정부수립의 의의를 재조명한다.통계숫자로 사회변화를 알아보는 통계세미나를 개최한다. ▲독립운동 사료집 발간=해외에서 전개된 각종 독립운동 관련 자료와 문헌을 발굴,보급한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개관=애국지사들의 영혼이 서려있는 서대문 형무소를 역사관으로 꾸며 선열들의 옥중 수감생활과 모습을 재현해 청소년들과 후세들을 위한 역사의 교육장으로 활용한다. ▷역사·기록의 재정리◁ ▲정부 백서 발간=‘교육 50년사’로 교육의 역사를 집대성하는 등 각 부처별로 백서를 발간해 반세기를 정리한다. ▲‘정부조직 변천사’ 발간=확장과 축소를 거듭하면서 50년동안 우여곡절을 겪어온 정부 조직 변천의 모습과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또 ‘한국지방행정 50년사’를 발간해 지방행정의 변화상을 알아본다. ▲기념 영상물 제작=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성장을 이룩한 과정을 영상물로 제작하고 사진과 그림 등을 통한 화보집을 발간한다. ▲기념전시회=기록으로 우리나라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국가기록물을 전시한다.또 정부수립 이후 발간된 문헌과 자료 가운데 현존하면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을 모아 전시회를 개최한다. ▷정부수립 유공자 발굴◁ ▲유공자 발굴=아직도 가려있는 정부수립 유공자를 찾아내 훈·포장을 하고 생존 애국지사와 제헌의원 및 초대 각료들을 위문해 격려행사를 갖는다. ▲유엔 참전용사 초청=생존해 있는 유엔참전용사들의 방한을 초청해 격려하는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를 갖는다. ▷국민과 함께하는 행사◁ ▲8·15 경축식=국민 각계 각층이 참석하고 정부수립 유공 외국인 및 재외교민을 초청해 국가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도록 한다.동대문 운동장에서 광화문 사이에서 길놀이 행사를 갖고 국민적인 축제행사로 승화시킨다. ▲문화행사=종합가무극을 열고 표어 및 포스터를 공모해 국민의 참여의식을 높인다.또 지난 반세기동안의 생활용품을 전시한다.한국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한국의 발전과 역동적인 모습을 세계에 소개하는 영상자료를 제작한다. 서울미술제를 개최해 공예대전,서예대전,사진대전,미술대전,도시와 영상전 등의 다양한 문화행사를 갖는다. 특히 충청북도는 정부수립 이후 현재까지의 변화과정을 연극으로 만는 창작극 ‘대한국 창조’를 전국 순회공연할 계획이다.이와함께 봉화올리기 행사를 재현해 시민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한다. ▲국가상징물의 선양=태극기 거리를 조성하고 건물에는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하는 등 태극기 사랑운동을 전개한다.나라꽃인무궁화 사랑하기 운동을 펼쳐 무궁화 분재·사진전시회·글짓기대회를 개최한다. 또 무궁화를 널리 선양한 남궁억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한다.이와함께 나라사랑하는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겨레의 노래­응원가’를 제정해 보급한다. ▲건군행사=건군 50주년을 맞아 국민과 군의 안보 공감대 형성을 위한 건군 행사를 갖는다.군부대를 공개하고 안보현장에 대한 견학 기회를 넓혀 국민과 함께하는 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국회개원 행사=국회내에 헌정기념관을 세워 헌정에 관련되는 영상물과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대한민국 국회 50년사를 발간한다. ▷새시대를 미래상 정립◁ ▲21세기 정부의 비전 제시=지난 50년을 새롭게 조명하는 과거지향적인 행사와 함께 미래지향적인 정부의 미래상을 정립한다.이를 위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정부의 좌표를 새롭게 설정하고 부처별 중·장기 계획을 수립한다. ▲학술대회 개최=21세기에 걸맞는 정부 미래상의 의견수렴을 위해 종합학술대회인 ‘21세기 정부의과제와 전망’을 개최한다.학술대회는 정치·행정·경제·사회 등의 분야별로 개최한다.통일에 대비한 해양정책토론회와 태평양 해양과학기술회의를 개최해 해양국가로의 잠재력을 높인다. ▷연중 추진계획◁ ▲1월 기념사업 공식 휘장 선정·보급 ▲2월 기념사업 표어 및 홍보 ▲3월 대한민국 정부50주년 기념사업 세부추진계획 확정 ▲4월 부처 및 단체별 세부추진계획 시행 착수 ▲5월 국회개원 50주년기념 관련행사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의 달 선포 ▲8월15일 정부수립 50주년 중앙경축식 ▲10월 건군 50주년 행사 ▲12월 기념사업 평가 및 정리,결과 보고서 채택 ◎정부조직 개편사/‘11부4처’로 출발… 40차례 변화/50년대 부흥부 전후부흥·경제정책 기획 조정/5·16뒤 경제기획원 신설… 수출드라이브 주도 대한민국 정부 50주년 역사는 정부조직 개편에서 찾을 수 있다.정부조직은 시대 변화와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48년 8월15일 11부4처로 출발한 ‘미니 정부’는그동안 40여차례에 걸쳐 변화를 거듭했다. 광복과 6·25를 겪은 50년대에는 체제형성 및 유지에 초점이 맞춰졌다.총리제의 폐지로 대통령중심의 체제정비와 3차례의 조직개편을 통해 전쟁 이후 부흥과 경제정책을 종합적으로 기획·조정하는 기구로 부흥부가 신설됐다. 60년 제2공화국 출범으로 행정권이 국무원에 소속되면서 정부조직은 또다시 개편을 맞았다.3·15 부정선거를 겪은 직후여서 경찰의 중립 확보를 위해 공안위원회가 구성됐고 공직기강 확립을 위해 감찰위원회가 부활됐다. 5·16 이후에는 경제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조직의 근간이 바뀌었다.부흥부(건설부로 바뀜)가 건설부로 바뀌면서 산업정책기능과 산하 산업개발위원회를 통합한 경제기획원이 탄생했다.공보처와 중앙경제위원회 등이 신설됐다. 60·70년대에는 늘어나는 민원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청 단위의 행정단위가 급격히 늘어난 점이 특징이다.노동·철도·검찰청(63년),국세·수산·산림청(66년),관세·병무청(70년),항만청(75년),특허청(76년) 등으로 행정조직은 확대됐다.또 77년에는 동력자원부가 신설됐고 환경문제가 증가됨에 따라 79년에는 환경청이 새로 생겼다. 70년대 말에 들어서자 경제규모의 급격한 확대와 산업구조의 다변화로 거대한 정부조직은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이에따라 81년 정의사회 구현과 복지사회 건설을 기치로 내건 출범한 5공화국은 행정개혁을 통해 과감한 중앙행정부처의 부서 통합과 인원감축을 단행했다.공무원 숫자가 사상 처음으로 감소한 것이다.신설된 부처는 올림픽 개최 결정으로 인한 체육부 정도에 불과했다. 88년 출범한 6공화국 역시 ‘작은 정부’ 정책을 유지했다.환경청이 환경처로,문화공보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89년) 바뀌었다.문민정부 들어서도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지향해 군살빼기가 계속됐다.집권초기인 93년3월 문화부와 청소년체육부가 문화체육부로,상공부와 동력자원부가 상공자원부로 각각 통합됐다. 대대적인 정부조직 개편은 행정쇄신위원회가 1년10개월 작업한 끝에 이뤄졌다.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거대화됐으며 이 과정에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건설부과 교통부가 건설교통부로 합쳐졌으며 상공자원부가 통상산업부로,보건사회부가 보건복지부로,환경처가 환경부로 바뀌었다. 새정부의 출범과 함께 비대해진 경제기획원이 최근의 금융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또다시 정부조직에 또다시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정부조직이 어떤 형태로 짜여질지 주목된다.
  • 무용/‘한국춤의 세계화’ ‘세계춤의 한국화’(’97문화계 결산)

    ◎외국 유수발레단 내한공연 줄이어/30대 젊은 안무가 춤의 대중화 앞장 무용계의 97년은 그 어느 때보다 한국춤의 세계화와 세계춤의 한국화라는 ‘우리 춤의 국제화’의 지평을 크게 넓힌 한해였다. 우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연극제는 광주비엔날레와 함께 우리 무용계와 일반관객들이 한자리에서 선진 외국춤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우리춤의 좌표도 점검함으로써 우리 춤예술의 국제교류 기반을 넓히고 춤의 표현영역을 확장하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세계연극제에 참가한 프랑스의 마기마랭,독일의 자샤발츠,헝가리 이베트보직 무용단 등은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허무는 기발한 소재와 표현기법으로 우리 무용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국제교류 측면에서 국내 춤의 해외활동도 활발해 중국공연을 가진 국립무용단을 위시해 김말애 춤·타래무용단(미국),김복희현대무용단(과테말라와이집트) 등이 성공적 해외무대를 펼쳤다.미국 8개도시를 순회한 재미무용가 손인영씨의 ‘한국의 춤과 소리’공연 역시 올해 우리 춤의 국제화부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춤의 국제화는 특히 발레쪽에서 두드러졌다. 뉴욕시티발레단이 창단 50년만에 첫 내한공연을 갖는등 아메리칸발레시어터,샌프란시스코발레단,상트 페테르부르크발레단 등 세계 유수 발레단의 한국행이 잇따랐고 그에 못지않게 국립발레단의 이스라엘·이집트 공연과 유니버설과 서울발레시어터의 일본공연 등 국내발레단의 해외 진출도 활기를 띠었다.여기에 국립발레단 무용수 김용걸과 배주윤이 모스크바콩쿠르에서 3위와 특별상을 수상한 것은 우리 발레역량을 세계무대에서 인정받는 또하나의 경사였다. 그러나 활발한 국제교류에도 불구하고 무용계 역시 사회 전반적인 침체분위기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따라서 개인공연이 부쩍 줄고 이는 자연스레 창작춤의 부진으로 나타났다.하지만 이는 또한 무용인들로 하여금 표현영역의 확장 및 대중화 노력을 자극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결과 올해는 춤의 대중화를 위한 실험적 활동이 30대 젊은 안무가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됐다.춤과 의상의 만남 또는 춤과극의 만남 등 여러 양식으로 시도된 기존 춤의 형식파괴 흐름은 침체의 무용계에 활력을 찾아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춤의 대중화와 관련해서는 특히 국립발레단의 연중기획 ‘해설이 있는 금요발레’가 일반인들의 높은 호응을 이끌어내 춤인구의 실질적 저변 확대를 이룩하는 새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울국제무용제 대상작을 안무한 손관중을 비롯해 홍승엽·박호빈·박해준 등 남성무용인들의 강세와 ‘편애의 땅’의 사포현대무용단,‘연어에 대한 보고서’의 대구시립무용단 등 지역무용단이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인 것도 올해 무용계가 또다른 특징이었다.
  • 김대중시대­성장기와 정치철학(하의도에서 북악까지:하)

    ◎고난의 한평생 용서·화합으로 일관/목포상고 수석입학후 정치에 남다른 관심/엄한 어머니에 바르게 사는 삶의 좌표 배워/73년 납치사건 직후 “이후락씨 용서했다” 15대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19일 아침. 기자회견을 위해 국회로 떠나기에 앞서 일산자택의 계단에 잠시 멈춰선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눈에는 물기가 어렸다.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며,고난으로 점철된 40년 정치 역정을 포함한 지나간 생애가 주마등 처럼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젊은 시절의 정열을 보상받아야 할 시기에 젊은 시절보다 더 큰 역경에 부딪쳐야 했고,능력을 발휘해야할 때 비방과 모략에 대한 해명에 시간을 보내야 했다.그럼에도 ‘잘 못 알려진 것도 내 책임’이라면서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와 처절하게 싸워 온 인고의 세월이 마침내 보상받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철저하게 용서하는 삶이기도 하다.지난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뒤 그는 이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됐던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대해서 “이미 용서했다”며 화합을 역설했다.지난 9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처음 찾았을 때는 ‘이제는 과거를 묻고 그분의 공적만을 생각하겠다’고 약속했다. 80년 ‘서울의 봄’때 사형선고를 받은뒤 그는‘나는 이제 죽지만,이 땅에서 정치보복의 희생자는 나로써 끝나기를 바란다’고 마지막 진술을 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듯 사형선고를 내린 주역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에 대해서도 ‘죄는 묻되 사람은 용서해야 한다’고 당선되자마자 사면을 추진했다. 혹자는 그의 관용을 두고 ‘유권자를 의식한 것’이라고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의 일관된 화두는 ‘국민’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국민’이지 ‘절대권력과의 대결’이 아니었기에 보통사람에게는 어려워 보이는 가해자에 대한 관용이 더 쉬웠을 것 만은 분명하다. 그는 종종 감옥에 갖혔던 시절을 회상하며 ‘토인비나 러셀,종교서적을 읽다가 ‘감옥에 안왔으면 이런 진리를 모르고 죽을텐데’라고 느낀 적이 많았다’고 말한다. 이같은 술회가 대정치인의 풍모를 보여주기위한 스케일 큰 농담이라기 보다는 그의 진심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그는 ‘역사속에서 어떻게 평가받을지가 가장 두렵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역사’ 또한 ‘국민’의 미래형임에 분명하다. 그는 정치가 국민들로 부터 백안시당할 때도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고자하는 목표를 버린 적이 없다. 나아가 ‘위인정치’를 흠모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선생님’이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불리우고 싶어하는 것도 이같은 분위기의 반영일 것이다. 정치 뿐 아니라 인생 그 자체에도 이같은 자세는 유지된다. 그에게 있어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 관한 한 ‘평범’이란 아마 ‘참을 수 없는 정도’의 동의어인 것 같다. 그의 일생은 이처럼 ‘참을 수 없는 정도’를 넘어서려는 노력으로 일관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의 성장환경이 그만큼 평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목포에서 뱃길로 두시간 남짓 떨어진 한반도 서남단의 작은섬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그를 낳은 마을 후광리를 두고 풍수장이들은‘물가로 나오는 달팽이의 더듬이’에 해당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고향마을 이름은 훗날 그의 아호가 된다. 그의 아버지(김운식)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부농이었다. 이장이었던 아버지 덕에 그는 신문을 일찍부터 접할 수 있었고,여덟살 무렵에는 벌써 1면의 정치기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또 육자배기나 쑥대머리가 장기인 한량이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정치적 자질과 예능인에 대한 애정은 아버지로 부터 비롯됐다. 그의 어머니(장수금)는 아버지의 두번째 부인이었다. 어머니는 아들 셋과딸 하나를 낳았지만 어린시절부터 보기 드물게 총명했던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것 같다. 그런 탓에 어머니는 누구보다는 엄하게 자식들을 키웠고,특히 그에게는 더했다. 그는 지금도 어머니를 설명할 때 마다 여섯살 무렵 술취한 방물장수의 담뱃대를 아버지께 드린다며 들고왔다고 회초리로 장단지에 핏물이 배도록 맞았던 일화를 들려준다. 어머니는 또 친지가 그의 총기를 높이 사 일본에서 공부를 시키고 싶다고 했을 때 허락치 않았다. 유일한 희망을 멀리 떠나보낼 수 없었던 탓일 것이다. 대신 어머니는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목포에 나가 끝까지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보통학교 4학년 때 현실화됐다. 어머니는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모두 처분하고 목포로 나가 여관을 운영하며 학창시절 그를 뒷바라지했다. 그는 목포 제일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5년제 목포상업학교에도 수석으로 들어갔다. 상업학교를 택한 것은 실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학한 뒤에는 점차 정치쪽에 관심이 쏠렸다. 학교에서 한달에 한번씩 열리는 시국강연회에 특히 흥미를 느꼈다. 한반도와 일본,세계정세를 듣는 일이 신났다. 시국강연회가 열리면 이따금 날카로운 질문을 해서 교관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너는 사리가 분명해 남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언어구사 능력이 정확명료하다’고 학적부에 기록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일련의 일은 그로 하여금 정치가의 길로 나가겠다는 꿈을 더욱 부풀게 만들었다. 그는 3학년이 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 가겠다는 뜻을 세우고 취업반에서 진학반으로 옮긴다. 그러나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었고,여행허가를 받는 일도 어려웠다. 그는 1944년 봄에 졸업할 예정이었지만 전시특별조치에 따라 한해전인 43년 가을에 졸업했다. 그에게 정규교육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지금도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그래서 자신의 저서인 ‘대중참여경제론’이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 출간된 것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가 이희호 여사와 결혼한 것도 아마도 ‘인간 이희호’에 대한 도전이자,이화여전과 서울사대를 나와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학력에 대한 도전이 성공을 거둔 것인지도 모른다.
  • 꺼질듯 다시 타올랐던 ‘민주화 불꽃’(하의도에서 북악까지:상)

    ◎망명·투옥 등 역경의 세월/‘40대 기수론’ 정계 새바람/71년대선 95만표차 석패/신군부에 사형언도 받아/3당합당에 92년 또 패배/‘적과의 동침’ 4수끝 집권 후광 김대중.그의 삶은 꺼질듯 하면서도 이내 다시 타오르는 촛불이자,얼은 눈밭에서도 꽃망울을 터뜨리는 인동초이기도 했다. 그의 40년 정치역정은 영과 욕,환희와 좌절이 교차한 한편의 드라마다.특히 유신의 장막이 드리워진 72년부터 6·29선언이 있은 87년까지는 납치와 망명·투옥·연금으로 점철된 가시밭 길의 연속이었다. 그의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그에 뒤따른 인고의 세월은 11차례나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는 것으로 국제사회에서 먼저 인정 받았고,이제 당당히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국민적인 평가를 받은 셈이다. 정치가로서 김대중의 이력은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그는 당초 좌우익이 망라됐던 건준의 주도권이 다툼끝에 좌익으로 넘어가자 탈퇴한다.그러나 평생 ‘색깔론’의 꼬리표가 따라붙는 뼈아픈 경력이 됐다.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눈을 돌린 것은 해운업으로 여유가 생긴 54년이다.정치지망생 김대중은 목포에서 민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이어 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와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도 거푸 쓴잔을 마셨다.그는 4.19혁명으로 다시 치러진 61년 5월 인제보선에서 처음 당선됐다.그러나 금배지는 커녕 사흘만에 5·16쿠데타가 나는 바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상실하고 만다.그는 군정 기간 동안 모두 3차례나 투옥되는 등 야당정치인으로 본격적인 고난을 겪기 시작했다.그러나 장면박사를 만나면서 민주당 신파의 맥을 잇는 계기가 된다. 그는 63년 6대 총선에서 훗날 정치적 고향이 된 목포에서 다시 출마해 당선되면서 부터 발군의 지략과 달변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6대 국회 초반 6개월동안 13차례나 본회의 발언을 했고,차관도입과 세제특혜·경제개발계획의 문제점 등을 날카롭게 추궁,야당의 경제통으로 명성을 날렸다. 67년 7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된 그는 68년 5월 평생의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 된 김영삼과의 첫번째 대결인 원내총무경선에서 패한다.그러나 71년대선을 앞둔 신민당 대선후보 지명경선에서 2차투표 끝에 결국 김영삼을 꺾는 대역전을 엮어냈다.이때 김영삼·이철승과 함께 내걸었던 기치가 바로‘40대 기수론’이다. 김대중 후보는 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바람을 일으켰으나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게 95만표차로 석패하고 만다.‘투표에서 이기고,개표에서 진’ 이 선거는 그러나 혼쭐이 난 박정권이 그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된다.이때부터 5년반 동안의 투옥과 3년여의 망명,6년반의 가택연금으로 대표되는 그의 험난한 정치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특히 71년말 교통사고로 위장한 살해기도를 간신히 모면했으나,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도쿄에 체류하던 73년 여름에는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수장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가택연금중이던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사면복권되어 정치일선에 복귀했지만 ‘5·17’을 주도한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그는 국제여론과 미국정부의 압력에 힘입어 사형에서 무기,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어 82년말 죽음의 그림자에서 또 한번 벗어나지만 그 ‘대가’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다.그는 그곳에서 2년2개월동안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했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고국의 민주화운동에 힘을 바쳐 국내에 있던 김영삼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한다.또 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신민당의 압승을 끌어내는 견인차가 됐다.그의 계속된 민주화운동은 87년 6월항쟁을 촉발시켰고,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과 함께 이민우의 신민당을 깨고 나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그러나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하게 된다.그러나 결과는 노태우·김영삼 후보에 이어 3등이었다.대권 재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평민당은 88년 4.26총선에서 ‘황색돌풍’에 힘입어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한다.그가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하지만 90년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입지가 다시 좁아진 결과 92년 14대 대선에 김영삼 후보에게 패해 세번째 도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오늘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평범한 시민이 되겠다’는 유명한 정계은퇴 선언은 이때 나온 것이다.그는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연구활동에 정진하다 93년 7월 귀국했다.그는 이후 순수한 연구단체를 표방한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는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연설원으로 정치일선에 재등장하면서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한다.9월5일에는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정치국민회를 창당,제1야당 총재로 정계전면에 공식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96년 4·11총선에서 전국구 14번의 배수진을 치고 내각제 개헌저지선인 100석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79석을 얻는데 그쳤다.‘야권분열의 책임자’라는 비난이 거세게 몰아닥쳤다. 40년 정치역정에서 최대 정적의 한사람이자 이념적 좌표가 다른 김종필이 동지가 된 것은 이때 부터다.그는 15대 국회개원과 함께 김종필이 이끄는 자민련과 공조체제를 구축하여 ‘DJ(김대중) 불가론’으로 대표되는 당내 이상기류를 잠재웠다.15대 대통령선거전이 본격화되자 김종필과는 혈맹의 관계로 발전한다.김대중을 두당의 대통령 단일후보로 하는 이른바 DJP연합이 그것이다. 김대중은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결국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었다. □김대중 당선자 연보 ▲생년월일=25년 12월3일 ▲출생지=전남 신안군 하의면 ▲44년=목포상업학교 졸업 ▲48∼50년=목포일보 사장 ▲51년=흥국해운 사장,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단장 ▲60년=민주당 대변인 ▲61년=5대 민의원 보궐선거 당선(강원·인제) ▲62년=이희호 여사와 결혼 ▲63년=6대의원(목포) ▲65년=민중당 대변인 ▲68년=신민당 정책위의장 ▲71년=7대 대선출마 ▲76∼78년=3·1민주구국선언사건 등 주도 및 투옥. ▲80년=사면복권(2월),5·18 내란음모 사형언도(9월) ▲81년=무기 감형,미국 망명 ▲85년=민추협 공동의장 ▲87년=평민당 창당,13대 대선출마 ▲91년=신민당 창당 ▲92년=14대 대선출마 및 정계은퇴 ▲93년=영국 출국 ▲94년=아태재단 설립 ▲95년=국민회의 창당 ▲97년=15대 대선출마 및 당선
  • 21세기 한국의 비전과 교육/3당 대선후보 초청강연회:Ⅲ

    ◎교육개방과 한국의 대학­박영식 광운대 총장·전 교육부 장관/대학이 국가경쟁력 좌우/양보다 질위주교육 필요 세계화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드는 경쟁의 시대에서 대학도 예외일 수 없다.민주화에만 매달려 오랫동안 경쟁없이 무풍지대를 거쳐온 우리 대학들은 오늘날 세계의 대학들과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대학사회에서 국내대학 출신 박사들은 외국출신에 밀려 점차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우수한 인재들이 외국대학으로만 나가려 할뿐 국내 대학은 철저히 외면해 최종 학위 생산을 중단할 위기마저 우려되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화와 정보화로 특징되는 오늘날 국가 경쟁력은 대학에서 나온다.현재 흔들리고 있는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도 대학의 역할이 한차원 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 첫째로 ‘양의 교육’에서 ‘질의 교육’으로 대전환이 필요하다.해방 전후 10여개였던 우리의 대학은 3백20여개로,대학별 학생수도 2천∼3천명에서 2만∼3만명 수준으로 거대하게 변모했다.재단의 재정지원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재정규모를 늘리자니 양적 팽창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던 탓이다.자연히 학문의 우수성이나 교육 내실화는 부차적 일로 치부될 수 밖에 없었다. ○양적 팽창 중지해야 미국 대학들은 학생수를 늘리면 재단의 부담이 늘어나고 교육효과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학생수를 거의 늘리지 않는다.이제 우리 대학들도 양적 팽창을 중지해야 한다. 둘째,경쟁관계에 있는 대학을 10개 가량 만들어야 한다.경쟁이 있는 곳에서만 경쟁력이 나온다.미국의 대학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것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좋은 교수확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총장 중심의 중앙집권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S대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대학이 상위 1%의 우수학생을 모두 휩쓸어간다.많은 지방대학들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데서도 나타나듯 대학입시와 과외의 과열도 결코 대학의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S대에 입학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대학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또 입시 과열을 막고 과외수업 부담으로 휘어진 서민들의 허리를 펴기 위해서도 서로 경쟁할 수 있는 대학을 10개 가량으로 늘려야 한다. ○과감한 재정 지원을 세번째는 국가의 과감한 교육투자와 적극적 재정지원이다.국가가 모든 교육을 맡는다고 생각해야 한다.선진국은 대부분이 공립인데 비해 우리는 교육을 사학에 맡겨왔다.이런 잘못된 구조를 하루속히 바꿔야 하지만 당장은 사립대학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교수 1인당 학생수가 미국의 2배,일본의 1.5배에 이르고 서울대 학생 1인당 도서수가 미국 하버드대의 13분의 1,일본 도쿄대의 6분의 1에 불과한 현실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개방되는 교육시장에서 난파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감한 제도개선과 획기적인 투자를 통한 대변혁이 있어야 한다. ◎한국대학의 역할과 과제­윤형원 충남대 총장·전 교총회장/사회변화 중심역할 강화/첨단학문 대책 서둘러야 한국 대학은 정말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가.해답은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관점이 있을수 있다. 대학은 연구와 사회봉사,이상적 민주공동체 창조 등의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그렇다면 한국 대학발전의 조건과 과제는 무엇인가. ○교육행정 전문화 숙제 첫째 고등교육행정의 전문화와 책무성의 강화이다.교육부는 대학 정원을 책정할 때 국가발전에 필요한 요청을 예견해야 한다.그 구조 속에서 대학 전공과 교육내용을 접합시키는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고도로 정밀한 인력의 수요를 전망·기획하는 새 행정기법이 요구된다.사회발전의 요구와 대학의 교육내용 간의 편차를 조정,교육의 질을 높힐 수 있는 다양한 행정 전략도 필요하다.특히 계량적 대학 평가는 질적 평가로 전환돼야 한다. 둘째 대학 조직의 합법성에 대한 제도적 장치이다.한국 대학도 통치조직과 행정실무간의 기능 분화를 명시하는 대학설치법(유럽형)이나 대학헌장(영미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교육부는 국립대학에 대한 재정지원과 행정서비스를 주도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사학에는 법정 수익용 재산을 확보토록 촉진하는 기폭제로서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국립대의 경우 국립대 설치법을,사립대는 사립대 설치법을 따로 만들어 통치기구와 행정조직의 권한 관계를포괄적으로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째 대학 구성원의 자기혁신을 위한 노력 강화다.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한과에 수백명씩 되는 학생을 해마다 뽑는다.학부에서는 학문 계통상으로 분류할 필요 조차 없는 유사학과를 세분화했다.이제 대학은 건학이념이나 설치목적,존재 이유에 대한 자성론을 내놓아야 한다.또 대학 문화를 창조하고 자율적으로 첨단 학문에 접근할 수 있는 대책도 만들어야 한다. ○대학자율성 보장돼야 넷째 사회변화를 선도하는 대학으로 거듭나야 한다.사회변화와 요구조건을 수용하는데 혼신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교육 내용에서는 원리적 소양을 응축시켜 첨단의 지식문화 가치로 재창조해야 한다.교수방법에서는 첨단멀티미디어를 다양하게 활용,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익혀야 한다. 다섯째 대학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맹목적 교육열을 해소해야 한다.교육은 국가의 것이지 정당이나 집권 행정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정부는 대학교육의 질과 사회발전에 필요한 인력 사이의 관련성을 심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대학 스스로도사는 지혜를 깨우치는 인격도야의 장으로 만들고,교육을 민족정신의 우생학적 유전인자를 창출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대학의 통치체제는 새롭게 다듬어져야 하고 대학 구성원은 자기 혁신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이같은 바탕위에 우리의 대학은 민족의 생존과 번영의 좌표를 튼튼하게 설정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회조직으로 각광받게 될 것이다. ◎한국교육과 지도자 역할­홍일식 고려대 총장/21세기는 문화대국 시대/전통바탕 비전 제시 시급 정보화 시대는 많은 정보와 창조적 아이디어를 가진 집단이 지도계층으로 떠오르는 새로운 역사 단계라고 할 수 있다.인간의 정신노동 능력과 지적 창조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은 아직도 산업사회의 후발주자로서 가졌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교육 또한 경쟁과 대결을 위주로 한 구시대의 궤도를 달리고 있다. ○물질보다 정신역량 중요 유엔은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로 규정했다.문화의 세기란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역량이 중요한 시대이며,정신능력중에서도 종래에 강조돼 온 IQ(지능)보다는 EQ(감성적 능력)이 중요한 시대다.나아가 21세기는 분명 MQ(도덕지수)시대를 지향하고 있다. 사물과 자연을 정복과 이용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함께 살아가야 할 유기적 질서의 일부분으로 이해하고,인간 존재를 욕망의 대상 또는 경쟁자로 인식하기보다는 공감의 동반자로 볼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이같은 자세와 능력을 갖추지 않고는 그 누구도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갈 지도적 계층으로 떠오를 수 없으며,그 국가 또한 미래 세계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문화란 숭고한 인간정신의 표현이다.따라서 민족문화란 바로 민족정신의 구체적 실체인 것이다.한 민족의 존재 가치는 그 독특한 문화로써 확인받고 인정받는 법이다.따라서 민족문화의 상실은 곧 민족 자체의 소멸을 의미한다.이는 나라를 잃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21세기 국가경영과 교육의 과제는 문화대국의 건설이다.과학 기술 경제 군사 등 모든 부문의 발전도 결국은 문화대국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요 수단이다. ○물신주의 극복 절실 오늘의 시대상황을 볼 때 고도 산업사회가 빚어내는 물신주의를 극복하고 인간 회복,인간 부활의 새로운 사회적 조화를 찾아야 할 필요가 참으로 절실하다.그리고 이것은 서구문명에서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현대사회의 경험으로 증명됐다.따라서 우리가 지녀온 민족문화 전통의 바탕으로부터 찾지 않으면 안된다.서구사회는 근대의 물질 기술문명에 힘입어 오늘의 풍요를 얻는데 성공했지만 인간 사회 자연,그리고 우주를 연결하는 조화로운 유대를 상실하는 비싼 대가를 치렀다. 이런 혼미를 극복하고 올바른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서도 민족문화 유산과 전통에 대한 탐구는 거듭 강조돼야 마땅하다.민족문화의 유구한 전통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이를 구심점으로 해 현재와 미래를 창조할 때 우리는 오늘의 서구문명이 봉착한 난관을 넘어서는 동시에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로 열어가는 과업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다.이를 위한 일대 각성과 전환이 오늘날우리 교육에 주어진 과제인 동시에 21세기를 설계하는 지도자의 역할이다.
  • 절반의 성공/해외작 ‘북적’ 국내작 ‘썰렁’/세계연극제 중간결산

    ◎관객 저변확대·한국 연극수준 알려준 계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한국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연극제가 23일로 꼭 절반 일정을 소화했다. 이번 세계연극제는 지구촌 각국에서 참가한 113편의 연극·무용·음악극·마당극들이 각기 미학적 다양성과 개성을 펼쳐보이는 축제 한마당.주최측인 한국으로서는 우리 공연예술의 현실좌표를 점검도 해볼겸 공연 관계자와 일반관객의 자극과 시야 확대,관람인구의 저변을 확대시킬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현재까지 나타난 이번 연극제의 두드러진 경향으로는 우선 관객들이 해외연극에 몰린 반면 국내연극은 외면을 당하고 있는 점을 꼽을수 있다. 개막 초기 적게는 한자리수,많아봐야 절반 이하의 유료 객석점유율을 보였던 해외작품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관람객이 증가,캐나다와 이탈리아의 합동공연 ‘약속의 땅’과 미국 라마마극단과 한국 드라마센터의 합작품 ‘트로이의 여인들’의 경우는 평균 객석점유율이 100%를 초과하는 대성황을 이뤘다.이같은 해외연극 붐현상은 인도 소파남극단의 ‘중간의 것’을 제외한전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 평균 객석점유율 60%를 웃돌았다.그리스 참가작 ‘안티고네’,베네수엘라의 ‘아무도 대령에게 연락하지 않는다’,프랑스 ‘카포니노’,일본의 ‘도쿄 게토’ 등 작품성과 보편성을 두루 갖춘 작품들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반면 국내 연극은 평소 100명을 웃돌던 특정 뮤지컬까지 관객이 10명선으로 뚝 떨어질 정도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이번 축제를 통해 관객의 저변이 확대되기보다는 단순 수평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같은 현상은 우리 연극의 경쟁력 수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여서 국내 연극계에 심각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이같은 와중에 “한국 전통을 담은 공연물마저 외국 냄새를 풍긴다”고 꼬집은 한 외국 공연예술가의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반해 열린 무대를 지향한 과천 마당극잔치는 국내외 작품의 구별없이 관객이 고루 몰려 19일만에 14만명을 돌파하는 성황을 보였다.물론 대부분 야외공연에 무료라는 점이 큰 몫을 했겠지만 공연의 대부분이 관객의 직접 참여를 유도,호흡을 나눔으로써 서울 등 먼거리 관객을 많이 끌어들이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콜롬비아 참가작 ‘싱가로스’에 평균 2천500명의 관객이 몰린 것을 비롯해 러시아 ‘돈 코사크 송 앤 댄스’,필리핀의 ‘남국의 낙원’,한국 길라잡이의 ‘밥’ 등에 2천명 안팎의 많은 관객이 몰렸다.그러나 이같은 관객들의 높은 호응에도 불구하고 과천 마당극잔치 역시 야외공연장 시설의 미비와 분야별 전문가 부재,국제적 행사에 걸맞는 사전준비 부족 등 적지않은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세계연극제 사무국 관계자는 “현재까지를 평가하자면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다”면서 “관객의 참여가 당초 기대에 못미치고 운영상의 여러 시행착오도 없지 않지만 이번 경험은 분명 우리 연극인과 관객 모두에게 상호자극을 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좌표 잃은 세계/장 폴 샤놀로(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냉전붕괴 따른 지구촌불안 조명/군사·경제·기술질서 파괴의 파장 심층 분석 21세기는 인류 역사의 파라다이스인가.‘현대 국제관계’라는 책을 집필한 저자 장 폴 샤놀로는 “결코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20세기 말인 지금 현세계는 혼돈의 강에서 표류를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프랑스 최고 수재들을 양성하는 에콜 폴리테크닉 교수이자 국제정치학자인 그는 책의 부제조차 ‘방향타를 잃은 세계’라고 달았다. 그의 주장은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만들고 있는 역사를 알지 못한다’는 역사의 파라독스에서 출발한다.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사회 구조가 수백년에 걸쳐 뿌리를 내릴 즈음에야 위정자들이 그 방향을 잡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도 하기 때문에 역사의 파라독스에 따른 부담은 적지만 당장은 그렇지 않다는 지적이다.지금이 이같은 새로운 파라독스가 전개되고 있는 그 시점이라는 것이 논리 전개의 근간이다. ○선진·개도국 경제 갈등 심화 그가 주장하지 않더라도 지난 40년동안 세계의 주요 방향타는 양극화로 볼 수 있다.이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정치적이나 군사적이나 경제적인 모든 행위와 국가간의 관계가 여기서 비롯되어 왔기 때문이다.이처럼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요한 틀처럼 여겨졌던 이것이 무너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는 이러한 양극화 붕괴의 반작용으로 새로운 움직임들이 세계 사회속에서 움트고 있다고 말한다.기존질서에 대한 파괴라고 정의하고 있다.즉 인간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보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 20세기말에 3대 파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그는 3대 파괴로 공산주의 붕괴에 다른 군사및 전략적 질서의 파괴,무역과 산업에 있어 세계화 확산에 따른 경제질서의 파괴,처음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없애주는 것으로 여겨졌던 통신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인한 기술 질서의 파괴 등을 꼽고 있다.굳이 여기에 하나를 첨가한다면 인류역사에 있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인구의 폭발을 들 수 있다는 것이다.우리들의 눈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각기 본질은 다르지만 동시에 전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들은 생산적인 목적으로 출발한다.그러나 그가 말한 역사의 파라독스처럼 그 파장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다.그의 논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객관성은 잃지 않고 있지만 너무 비관적인 면만 부각시키고 있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그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그러나 그는 이미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파장은 닥쳐오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세계적이고 구조적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동구의 세계 무대에서의 변화,이에 파생된 동유럽의 새로운 국지적 긴장과 중·근동의 민족및 종족주의 위기,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정치 및 종교적 성격의 집단의 부활 및 다민족의 영토 분할주의로 인한 기존국가 형태의 와해,이로 인한 대규모 살상무기의 증가와 테러리즘의 발호,세계시장 헤게모니 다툼으로 인한 경제 무역전쟁의 발발 가능성등 파괴시작 현상의 예로 들었다. ○국제사회­국가간 긴장 고조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3대 파괴로 인해 예측되는 파장의 결과를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변화·긴장·위험 등 3가지로 분류해 설명하면서 서로간의 연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변화가 긴장을,그리고 긴장이 위험을 더욱 촉진시킬 수 있다는 여운을 주고 있다.3대 파괴의 축을 주위로 붕괴되는 총체적인 형태를 경고하고자 하는 의도로 풀이된다. 우선 파괴의 가장 기본이 되는 변화의 단계는 경제의 세계화에서 출발하고있다.경제의 세계화를 다국적주의로 보면서 가장 고전적인 지점망에서 현지공장,외국의 직접투자,그리고 더욱 활발해지는 국제교역을 예로 든다.그러나 이는 결국 국가별로 세계화에 대한 또다른 세계화라는 형태을 양산하면서 선진국과 선진국,선진국과 개도국간의 결투로 종결된다는 분석을 내리고 있다.제3세계의 종말과 후진국의 붕괴,그리고 이민 등을 통한 민족의 이동현상도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긴장의 파장은 주체성의 반발과 국가의 기존제도 붕괴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그는 예상한다.불씨는 요즘 문제가 되고있는 민족주의와 종교주의.이는 궁극적으로 과거 국가의 형태를 무너지게 만들 것이라는분석이다.과거 국가는 영토 국민 주권이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라고까지 말했다.또 국제적 권리로 인해 국내적 권리는 빛을 잃을 것이며 변화의 파장을 포함,국가를 넘어선 강력한 조류의 등장이 주권도 기존의 형태와는 달라지게 하면서 그 반작용은 결국 긴장을 불러 오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미래에 맞는 새틀 짜야” 강조 그러면 대안은 없는가.그는 단지 미래에 맞는 틀을 짜야한다고 강조할 뿐 이책에서 다른 언급은 않고있다.그런 부분이 아쉽다.그가 가장 관심이 있는 유럽연합 성공여부에 대해서도 새로운 유럽경제조직에 맞는 유로통화 외에 다른 분야에도 맞는 신제도를 구축해야 한다고만 밝히고 있을 뿐이다.그렇다면 종전으로 돌아가야 하냐고 물을 수 있다.그의 답변은 ‘만약 국가를 위해 민족의 존재를 무시하는 경향과 영토의 팽창이 낫다는 판단이 선다고 구소련이 현실에 등을 돌리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고 되묻고 있는 것으로 끝난다.그는 책 서두에서도 단지 3개의 축으로 인한 세계의 혼돈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을 쓰노라고 친절히 밝히고 있다. 원제는 Relations Internationale contemporaines.244쪽 프랑스 라르마탕출판사 130프랑.
  • 여 “DJ 사상 재검증” 총공세/오씨 월북 대응전략

    ◎황파일 대선전 공개 촉구/수세정국 일대 반전 모색 오익제씨 ‘밀입북’사건에 대한 신한국당의 자세는 매우 단호하다.이같은 강경분위기는 ‘황장엽파일’ 수사와 맞물려 비등점을 향해 치달을 전망이다.이사철 대변인이 19일 전날 제기한 8대 의혹 시리즈의 제1탄을 터트린데서도 잘 나타난다.물론 여기에는 대선전략이 배어 있다.병역시비에 따른 수세국면의 일대 반전과 동시에 국민회의 김대중총재의 ‘아킬레스 건’인 색깔론을 집중 부각,각종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는 김총재를 끌어내리겠다는 것이다. 이런 기조아래 신한국당은 크게 두가지 점에 비중을 두고 있다.첫째는 김총재 사상의 철저한 재검증이고,둘째는 ‘황파일’의 본격 수사와 대선전 공개다.물론 이 두가지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강삼재사무총장은 “황파일은 국가안보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전제,“대선을 앞두고 있다 해서 검찰 등이 수사 수위를 조절하거나 공개시기를 정치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대선전 공개를 촉구했다.또 “일련의 크고 작은 간첩사건들이 특정야당 주변에서 직·간접적으로 일어나는지 분명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고 김총재에게 직격탄을 쏘아올렸다. 이사철 대변인도 ‘김총재의 사상검증을 위한 제언’이란 제목의 시리즈 1탄으로 6·25당시 DJ의 행적과 사상적 좌표를 밝힐 것을 촉구했다.일본 월간지 중앙공론(80년 7월호)과 정계(96년 2월호),미국 워싱턴투데이 95년 8월24일자의 기사내용을 발췌,“김총재는 6·25당시 서울이 아니라 목포에 있었고 전쟁발발과 동시에 구속상태에 있었음에도 자신의 용공부역 행적을 숨기기 위해 새빨간 거짓말을 했음이 드러났다”고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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