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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범, 한신전 5타수 2안타

    이종범(주니치 드래곤즈)이 연이틀 ‘부활타’를 과시했다. 이종범은 2일 고시엔구장에서 벌어진 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와의 원정경기에서 좌익수겸 톱타자로 나서 5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했다.전날 5타수 2안타를 뽑은 이종범은 이로써 타율을 .261에서 .264로 끌어올리며 상승세를 이어갔다.주니치는 4-6으로 졌다.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3)金佐鎭장군 피살지 흑룡강성 海林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백야 김좌진(金佐鎭·1889∼1930) 장군은 독립운동 공적이나 고매한 인품에 비해 한동안 적절한 평가와 대우를 받지 못했다.기념사업회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지난 89년에 뒤늦게 결성됐고,충남 홍성군에있는 그의 생가는 92년에야 겨우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학계의 평가 역시한동안 공백상태로 유보돼 왔었다.1962년 지도자급 독립운동가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은 그가 그동안 홀대받아온 이유는 무엇인가.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피살을 둘러싼 ‘의혹’ 때문이었다고 할 수있다.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남동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는 인구 43만의 해림(海林)이란 작은도시가 있다.취재팀은 이곳에서 백야 김좌진장군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원성희(元聖熙·61)씨의 안내로 백야 김좌진 장군의 흔적과‘최후’를 만날 수 있었다.원 회장은 해림 현장(縣長)과 시장·인민대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지난해 정년퇴직한 지역 유지출신으로 김좌진 장군의 기념사업·유적지 보호운동을 펴고 있는 중심인물이다.해림 시내를 빠져나와 비포장길을 1시간 정도를 달리면 우리나라의 면(面)에 해당하는 산시진(山市鎭)에 도착한다.이곳이 바로 김좌진장군이 암살자의 손에 최후를 마친 곳이다.그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한동안 묻혀 있었듯이이곳 역시 한국인들에게 한동안 낯선 곳으로 남겨져 왔다.그러나 지난해말이곳에 그의 유적지가 조성되어 문을 연 이후 최근까지 500여명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취재팀은 김좌진장군이 1925년 독립군을 이끌고 들어와 개척한 대황구(大荒溝)를 지나 신흥촌(新興村)에서 잠시 차를 멈추었다.원 회장이 우리 일행을안내한 곳은 그가 1930년 1월 24일 피살당한 뒤 임시로 묻혔던 옛 무덤터였다.그의 유해는 1934년 본부인인 오숙근(吳淑根·작고)여사가 고향으로 모셔가 지금 이곳은 묘소 흔적만 남아있다.묘소터 일대는 주변의 밭들과는 달리공터로 남아 있었는데 원 회장은 “이 일대를 꽃동산으로 꾸며 한·중 양국청년들의 우호증진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신흥촌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도남촌(道南村)에는 그의 유적지인 ‘백야 김좌진장군 구지(舊址)’가 단장돼 있다.이 ‘구지’는 지난해 11월 26일 한국측 (사)백야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와 중국측 백야 김좌진장군연구회가공동으로 단장해 개관한 것으로 대지는 500평 규모다.전통 한국식으로 만든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만든 장군의 흉상이 나타나고그 뒤로 금성(金城)정미소를 복원한 건물이 보인다. 이 정미소는 그가 인근 농민들의 편의 제공과 한족총연합회의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동청철도회사의 창고를 빌려서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연자방아를사용하다가 1928년 여름 하얼빈에서 목탄 발동기 중고품을 구입해서 사용했다고 한다.금성정미소 자리가 바로 그가 좌익청년 박상실(朴尙實)에 의해 피살된 곳이다.현재 이곳에는 연구회측에서 세운 순국추념비가 그날의 비극의역사를 전해주고 있다.흉상 좌측에는 그가 순국 직전까지 거주하던 거처와‘팔노(八老)회의실’이 복원돼 있다.이곳 거처는 그가 1927년 7월 903명의독립군과 1,000여 명의 재향군인·가족을 거느리고 이곳에 진주한 후 이듬해 8월부터 피살될 때까지 머물던 곳이다.‘팔노회의실’은 신민부의 뒤를 이어 발족된 한족총연합회에서 그를 보필하던 8명의 원로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논의하던 곳으로 1928년 10월 그가 자택 서쪽에 세웠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해림과 목단강 인근에는 ‘8노’의 후손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으나 근거자료 부족으로 한국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구지’내 그의 옛 거처는 2m50㎝,팔노회의실은 2m70㎝,정미소는 2m90㎝로 높이가 제각각인데 거기엔 나름의 까닭이 있다.이는 그가 주도한 신민부(新民部)가 창설된 연도(1925년),신민부 본부가 이곳 산시로 옮겨온 연도(1927년),그리고 신민부의 후신인 한족총연합회가 결성된 연도(1929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그는 신민부의 군사부 위원장 및 총사령관,한족총연합회의 주석을 역임했다. 히 그는 항일독립운동의 명장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그러나 좀더 다각적인면모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충남 홍성지방의 유지 집안에서 태어나 3세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란 김좌진장군은 15세 되던 해인 1904년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奴僕) 30여명에게 논밭을 나누어주면서 풀어주고이듬해 서울로 올라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1907년 향리로 돌아와 호명(湖明)학교를 세워 90여칸의 자기집을 학교 교사로 활용하였으며,홍성에 대한협회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그리고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의 자금조달차 족질의 집을 찾아갔다가 붙잡혀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1918년 만주로 건너간 이후 무장항일투쟁의 대역정에 돌입했다. 이런 그를 두고 원성희씨는 “김 장군은 항일 명장이기 이전에 반봉건 선각자이자 민족개명의 위대한 교육자”라고 평가했다.특히 그가 서명한 ‘무오선언’에서 ▲한국독립 주장 ▲일본침략 폭로 ▲무력투쟁 선언 ▲독립후 공화국 건립 등을 주장한 것은 그가 “근대적 민주주의의 신봉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덧붙였다.김좌진연구회 부회장 겸 도남촌 당서기를 맡고 있는한족출신의 차유행(車有行·51)씨는 “김 장군은 한국과 중국 양 민족 모두의 영웅”이라며 “자금사정이 어려워 기념관 건립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편 김좌진 장군에 대한 평가는 국내와 북한은 물론 중국 조선족 자치지역에서 조차도 한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중국과 북한에서 그를 낮게 평가한 것은 그가 사회주의자가 아닌,공화주의자라는 점,그리고 그의 말기의‘변절의혹’ 때문이었다.그의 ‘변절의혹’은 국내에서도 한동안 유포됐었고,그의 아들 김두한이 반이승만 노선을 걸은 점 등도 한국사회가 그를 홀대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물론 92년 그의 생가복원을 계기로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제자리를 찾았지만 그를 살해한 세력과 살해범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중이다. 만주 항일진영의 지도자였던 그를 살해한 사람은 조선인 박상실(朴尙實,본명 李福林)이었다.한때 신민부에서 활동한 이강훈(李康勳·98) 전 광복회장은 자서전에서 “일경에게 약점이 잡힌 김봉환(金奉煥)이 자기부하인 박상실을 시켜 김 장군을 살해했다”며 “당시 김 장군이 아나키스트들을 끌어들여공산주의자들로 부터 원망을 산 것은 사실이나 공산당측에서 김장군을 살해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밝혔다.연변대 박창욱교수의 견해 역시 이와 비슷하다.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한 논문에서 “김좌진이 ‘적화방지단’이란 비밀조직을 결성해 공산조직의 침투를 막자 이들 단체의 공산화를 추진하던 공산단체 적기단이 비밀단원 박상실을 시켜 암살했다”며 “적기단이 김좌진을 암살한 뒤 ‘김좌진이 변절했다’는 일제의 모략정보를 빌려 ‘김좌진이 친일파로 변절해 처단했다’고 암살동기를 퍼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그의‘친일변절’ 의혹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자료로 입증된 바 없다. ‘청산리대첩’의 영웅이자 시대의 선각자로 치열한 삶을 살다간 백야 김좌진.그는 92년 생가복원을 계기로 국내는 물론 옛 활동무대인 중국 흑룡강성해림에서 찬란하게 부활하고 있었다. 해림(중국 흑룡강성)
  • 이종범 모처럼 펄펄… 5타수 2안타

    이종범(주니치 드래곤스)의 방망이가 되살아났다. 이종범은 1일 고시엔구장에서 벌어진 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스와의 원정경기에서 5타수 2안타 2득점을 기록했다.주니치는 이날 팀 타선의 폭발로11-1의 대승을 거뒀고 이종범의 타율은 0.261로 올라갔다. 좌익수 겸 2번타자로 나선 이종범은 1회 1사 뒤 우전안타로 공격의 포문을열었다.2회에는 우익수 플라이,4회 유격수 땅볼,6회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난 이종범은 9회에 중전안타를 날려 대량득점의 기폭제가 됐다.
  • 이스라엘 새대통령에 카차브

    이스라엘 의회는 31일 야당인 리쿠드당의 모셰카차브를 이스라엘의 제 8대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투표 전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카차브는 이날 실시된 2차투표에서노동당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시몬 페레스 전총리를 63대 57로 제쳐 새 대통령이 돼 페레스 전총리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에후드 바라크 총리에 또한번타격을 입혔다. 바라크 총리는 1일 의회에서 또 한차례의 불신임투표를 앞두고 있다. 이에 앞서 실시된 1차투표에서도 카차브는 60표를 얻어 새 대통령으로 선출될 것이 유력시됐던 페레스에 앞섰었다. 카차브는 1일 새 대통령으로서 취임 선서를 할 예정이다. [예루살렘 AFP 연합 특약] *모셰 카차브는 누구. 시몬 페레스 전총리가 이스라엘의 새 대통령이 될 것이란 예상을 뒤엎은 모셰 카차브 이스라엘 새 대통령(55)은 이란에서 태어났다는 배경이 말해주듯이스라엘 내에서는 대접받지 못한 ‘이주자’ 출신.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것도 에후드 바라크 총리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에서 지나치게 많은 양보를 한다는 아랍으로부터의 이주자들의 불만을 반영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이스라엘 내에서 엘리트로 존경받아온 유럽출신 유대인이 아니라아랍 또는 이슬람국가로부터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국민 가운데 무시못할 비중을 차지하면서 빚어진 두 계층간 갈등을 해결할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48년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스라엘로 이주해와 키리야트 말라치의 정착촌에서 성장한 카차브는 24살 때 최연소로 키리야트 말라치의 시장에 당선되면서정치에 첫발을 디뎠고 77년 리쿠드당 소속으로 크네세트(의회)에 입성한 뒤리쿠드당이 집권할 때 내각의 한 자리씩 차지하곤 했으나 가장 중요한 보직이 교통장관일 정도로 핵심보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오슬로 평화협정을 잘못이며 이스라엘로서는 비극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평화협상보다는 이스라엘내 좌익과 우익간 갈등,유럽 출신 및 중동 출신 유대인들간 갈등,유대인과 아랍인간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을 이루는 게 우선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유세진기자 yujin@
  • 김병현 3K 무실점

    김병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이 모처럼 ‘핵잠수함’의 위용을 뽐냈다. 김병현은 23일 미국 프로야구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1과 3분의2이닝동안 2안타 1볼넷을 내줬지만 삼진 3개를 솎아내며 무실점으로 막았다. 승패없이 방어율을 3.12에서 3.00으로 끌어내린 김병현은 위력적인 ‘삼진투’를 과시,매트 맨타이와의 마무리경쟁에 불씨를 되지폈다. 애리조나가 3-6으로 뒤진 7회 1사 만루의 위기에서 등판한 김병현은 후안카스트로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 세웠지만 대타 마이클 터커에게 아쉽게 밀어내기 볼넷을 내준 뒤 크리스 스타이니스를 좌익수 플라이로 처리했다.8회말 첫 타자 배리 라킨을 삼진으로 잡은 김병현은 켄 그리피 주니어와 단테비세트에게 연속 안타를 맞았으나 베니토 산티아고를 헛스윙 삼진,드미트리영을 유격수 땅볼로 처리해 이닝을 마쳤다. 김민수기자
  • 삼성 김기태 “막판에 뒤집는다”

    ‘군기반장’ 김기태(31)가 후반기 ‘삼성호’ 쾌주의 등대가 되고 있다. 김기태는 지난 18일 대구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LG와의 경기에서 팀이 9회말 7-6의 극적인 재역전승을 일궈내는데 주역을 담당했다.팀이 2-6으로 뒤져패색이 짙던 8회 스미스의 2타점 2루타에 이은 짜릿한 2점 동점포로 역전의발판을 놓은 것.드림리그 3위 삼성은 김기태의 활약으로 2위 두산에 4.5게임차로 따라붙으며 후반기 뒤집기 가능성을 높였다. 특히 김기태는 최근 3경기 연속 8회이후 동점타를 터뜨리는 무서운 뒷심을발휘했다.지난 16일 롯데전에서 1-2로 뒤진 9회 2사에서 1점 동점포를 뿜어냈고 17일 롯데전에서도 0-1로 8회 무사 2루에서 그림같은 동점타를 날렸다. 2경기 모두 패했지만 김기태의 막판 분전은 ‘역전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동료들에게 심어주었고 결국 18일 경기에서 역전 드라마를 연출해 냈다. 98년 김현욱과 함께 무려 현금 20억원에 쌍방울에서 트레이드된 김기태는시즌 초반 무척 흔들렸다.주전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간간이 대타로 나서는 것이 고작이었고 힘겹게 좌익수로 출장해서는 불안한 수비로 코칭스태프의 믿음을 사지 못했다.김기태는 4월 단 2경기에 나선 뒤 5월에는 15경기에서 2할대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그러나 6월들어 전경기에 출장하며 홈런 5개를 포함,3할타(타율 .308)에 13타점을 올려 예전의 타격감을 회복했다. 이어 7월에는 14경기에서 고비마다 홈런 4개를 터뜨리는 등 4할타(.409)에 17타점을 뽑아 한때 선두에 11경기차로 뒤진 팀이 13연승을 달리는데 결정적인 몫을 해냈다. 김기태의 역할은 팀 타선을 이끄는데 그치지 않는다.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그는 ‘저마다 잘난’ 삼성 선수들을 타고난 리더십으로 똘똘 묶어 팀 체질을 바꿔놓고 있다.지난달 25일 심판폭행 사건으로 김용희 감독 등 코칭스태프가 출장정지의 중징계를 받자 삭발을 하고 그라운드에 나타난 대목은 이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94년 홈런왕(25개),97년 타격왕(.344)을 차지한 대들보 김기태가 후반기 어떤 활약을 펼칠 지 자못 궁금하다. 김민수기자 kimms@
  • 韓赤 이산가족 창구 이모저모

    북한이 이산가족 방문단 명단을 보낸지 3일째인 18일에도 서울 중구 남산동 대한적십자사에는 명단을 확인하려는 이산가족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작정 들른 실향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한 이산가족들은 벌써 상봉이라도 한 듯 울음을 터뜨렸고,일부는 “상봉단 100명 안에 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며 적십자사 직원들에게 매달렸다. ■변호사 박찬운(朴燦運·37·사시26회)씨는 국민학교 교사로서 월북했던 외삼촌 리길영씨(71)를 만나기 위해 상봉신청서를 작성한 뒤 “우리 집안은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가족이었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외가는 좌익,본가는 우익,처가는 월남자 가족”이라며 “집안의복잡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사시에 합격하고도 검사 진출은 엄두도 못내고 변호사를 선택했으며,외삼촌이 오시면 자세한 사연을 물어 가족사를 책으로 내겠다”고 말했다. 박씨의 아버지는 국군 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했으나 외삼촌은 월북했고충남 인민위원장이던 외할아버지는 국군에게 처형됐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이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정춘자씨(72·여·경기도 이천군 율면)는 “이미 재혼해 남편을 볼 면목은 없지만 50년전헤어졌던 남편을 꼭한번 만나고 싶다”며 전 남편인 김희영씨(72)의 망부가(望婦歌)에 조심스럽게 화답했다. ■12남매중 셋째 오빠 림순응씨(65)의 생사를 확인한 영숙씨(54·서울 영등포구 문래동)는 “매일 정화수를 떠놓고 오빠가 살아있기만 빌던 어머니는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오빠를 찾았다”며 “이제서야 오빠의 생사를 확인했는데 100명의 상봉단에 들지 못하면 어쩌냐”며 상봉이 이루어지길 간절히소망했다. ■북에 있는 가족들의 생사 확인을 위해 무작정 적십자사를 찾거나 북측에서 보낸 200명의 명단에서 자신이 빠진 이유를 따지기 위해 온 사람도 제법 많았다.이영준씨(78·서울 서대문구 천연동)는 “나이 많은 사람부터 고향에보내 준다더니 왜 나를 명단에서 제외시켰느냐”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
  • 구국의 뜻 되새기자/ 독립유공 이젠 이념의 굴레 벗어야

    일제하 항일독립운동을 벌인 애국지사 가운데는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못한 경우가 상당수 있다.그 이유는대개 두 가지로 압축된다.첫째,조선공산당 등에 가입해 좌익활동을 했거나또는 해방후 월북한 자 둘째,건국후 간첩죄 등의 죄명으로 실정법상 처벌을받은 자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당국의 미포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우선 독립유공자 포상은 일제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한 포상인만큼 해방 이후의 행적을 이유로 포상에서 배제한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인 경우 좌익활동이 독립운동의 방편이었을 경우 이를이념에 구애없이 포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최근 남북한 관계개선을 계기로 ‘이념의 굴레’에 묶인 독립유공자에 대해 적극적인 포상정책으로 전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3·1의거 10년 뒤인 1929년 11월 발생한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으로 의거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 그로 인해 최종선고에서 징역 4년의 최고형을받은 인물로 장재성(張載性)이란 인물이 있다.4·19후 민주당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건국훈장을 주기로 결정했다.그러나 5·16후인 1962년 3월 1일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주무부처였던 내각사무처는 돌연 장씨에 대한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서훈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내각사무처는 서훈취소 이유로 신원조회 결과 장씨가 “해방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활약하다가 1948년 2월 월북,공산당 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가 남파된 후 체포돼 7년형을 받고 복역중 6·25 후퇴시 피살된 사실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동일한 사안에 대해 정권마다 독립유공자 포상에 대한 잣대가달랐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장재성이 반공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면 죽산 조봉암(曺奉岩)은 정치적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일제 당시 3·1의거 참가 등으로 3차례에 걸쳐 8년여동안 옥살이를 했고,해방후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독립유공 공적은 물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도 공이 적지않은 인물이다.그러나그에 대한 독립유공 포상은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유공자가 달고 있는 ‘빨갱이’ 꼬리표와는 또 다르다.죽산에게는‘간첩죄’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고 있다.이승만정권 시절 진보당을 창당,급진적 정치노선을 표방했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이승만을 위협하기도 했던 죽산은 ‘국가변란’을 기도한 간첩혐의로 59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그러나 그가 이승만의 정적으로 몰려 ‘정치재판’에서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정황·증거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한편 죽산 사후 그의 동지 및 유족들은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왔으나 아직까지 그에 대한 사면·복권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그에 대한독립유공 포상 역시 한 발자국도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보훈당국은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자로서 형을 받은 자는 그 서훈을 취소한다’는상훈법에 의거,그에 대한 포상을 거부하고 있다. 보훈당국으로선 실정법에 의해 사형집행을 받은 자가 사면·복권이 안된 상태에서 포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그러나 문제는 독립유공자 포상제도가 공적 자체보다는 이념의 굴레와 정치적 잣대에 휘둘려 왔다는 사실이다.현행 독립유공자 포상제도가 적잖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보훈처 관계자들 역시 일부 수긍하고 있다.통일시대를 맞아 독립유공자포상과 관련,일대 정책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하겠다.지난 95년광복 50주년을 맞아 그동안 이데올로기 문제로 포상에서 제외됐던 이동휘(李東輝)선생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이 실시된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달 분단후 첫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계기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호전되면서 해방후 월북,북한정권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에 대한 포상문제도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임꺽정’의 저자이자 1927년 결성된 민족 단일조직인 신간회(新幹會) 부회장을 지낸 벽초 홍명희(洪命熹·내각 부수상 역임),국어학자 출신으로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이극로(李克魯·조국전선 의장 역임)선생 등이 대표적 인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정치학자는 “통일시대를 앞두고 민족사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독립유공포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는 남북간 역사적 동질성을 모색하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23년 黃鈺사건 주도 金始顯의사. 생전에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24년간 감옥살이를 한 초인적인 애국지사가있다.감옥생활 가운데 16년은 일제하에서 였으니 독립유공 공적이 결코 적지 않다.의열단원 출신으로 1923년 소위 ‘황옥(黃鈺)경부사건’의 주모자로체포된 김시현(金始顯)의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 의사는 거듭된 거사-투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해방을 맞은,몇 안되는 지사형 애국지사다.그러나 김 의사에 대한 독립유공 포상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유족측은 “보훈처가 지나치게 신중을 기한 나머지 서훈이 지연되고 있다”며 보훈당국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김 의사에 대한 포상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김 의사의 공적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해방후 김 의사와 관련된 정치사건의 ‘전과딱지’가 김 의사의 독립유공 포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김 의사는 1954년 1월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나중에 무기로 감형됨)를 받고 복역중 4·19혁명으로 풀려났다.평소 의협심이 강했던 김 의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헌정질서를 짓밟고 독재정치를 펴자 동지유시태(柳時泰)와 함께 그를 처단하려다 미수에 그쳤다.이 일로 구속된 김의사는 4·19의거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석방되었으며,특별사면(1960.6.25)까지 받았다. 김 의사의 아들 김봉년(金峯年·78)씨는 “부친이 당국으로부터 특별사면을받은 만큼 그 사건과 관련해서는 원인무효가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 이종범 시즌 5호 홈런

    이종범(주니치 드래곤즈)이 시즌 5호 홈런을 터뜨렸다. 이종범은 4일 나고야돔에서 벌어진 일본 프로야구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경기에 2번타자 겸 좌익수로 출장,홈런 1개를 포함해 5타수 1안타 1타점 1득점했다.이로써 이종범은 197타수 55안타로 타율 .279를 마크했다. 이종범의 홈런은 지난달 6일 야쿠루트전 이후 처음이다.주니치가 7-4로 승리했다.
  • 이종범 부진씻는 3안타

    이종범(주니치 드래곤즈)의 방망이가 다시 불붙었다.이종범은 2일 나고야돔에서 벌어진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1번타자겸 좌익수로 선발 출장,5타석 4타수 3안타의 맹타를 터뜨려 전날 4타수 무안타의 부진을 말끔히 씻었다.이로써 이종범은 시즌 타율을 .271에서 .281로 끌어올렸다. 이종범은 1회 선두타자로 나서 좌전안타를 뽑아 만든 1사 1·2루에서 3루도루를 감행했으나 아쉽게 실패했다.2회 볼넷으로 출루한 이종범은 5회 1루내야안타를 기록했으나 8회에는 삼진으로 돌아섰다.이종범은 9회 좌전안타를터뜨렸다.그러나 주니치는 5-10으로 졌다. 김민수기자
  • 이종범 5타수 2안타 ‘웃고’ 정민철 4안타 5실점 ‘울고’

    이종범(주니치 드래곤즈)이 2안타를 뽑은 반면 정민철(요미우리 자이언츠)은 뭇매를 맞았다. 이종범은 30일 나고야돔에서 벌어진 일본 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경기에 2번 타자겸 좌익수로 출장,5타수 2안타를 터뜨렸다.이종범은 타율을.274에서 .277로 끌어올렸다.주니치가 8-4로 승리. 정민철은 히로시마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 카프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1회무려 8타자를 상대하며 홈런 2발 등 4안타와 1볼넷 1탈삼진으로 5실점했다.2회에 물러난 정민철은 팀이 13-9로 역전승해 패전은 면했지만 방어율은 2.55에서 4.82로 치솟았다.정민철은 1군 잔류가 불투명해 졌다. 김민수기자
  • 최태원 700경기 연속출장 대기록

    최태원(30·SK)이 한국의 ‘철인’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이승엽(삼성)은 2경기 연속 홈런포를 가동,홈런 선두 추격의 고삐를 조였다. 최태원은 18일 청주에서 벌어진 2000프로야구 한화와의 경기에 2루수겸 2번타자로 출장(4타수 무안타),통산 700경기 연속 출장의 신기원을 열었다.성남고-경희대를 거쳐 93년 프로에 첫 발(쌍방울)을 내디딘 최태원은 95년 4월16일 광주 해태전에서 8회 대타로 그라운드에 나선 이후 5년 2개월여 동안 단한경기도 빠지지 않고 연속 출장했다.최태원은 지난해 9월18일 대구 삼성전에서 김형석이 두산 시절 세운 622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경신했었다.메이저리그에서는 칼 립켄 주니어(40·볼티모어 오리올스)의 2,632경기,일본에서는 기누가사 사치오(전 히로시마 카프)의 2,215경기가 최고 기록이다.그러나 SK는 한화에 6-7로 졌다.한화는 장종훈(1점)·데이비스(2점)·허준(1점)의 홈런 3발을 앞세워 승리했다.송진우는 6과 3분의 2이닝 동안 8안타 6실점했으나 타선의 지원으로 6승째. 이승엽은 사직 롯데와의 경기에서 1회 1사2루에서 좌월 2점포를 쏘아올렸다.이로써 이승엽은 2경기 연속 홈런으로 시즌 18호째를 기록,선두 박경완·박재홍(이상 현대)에 2개차로 바짝 다가서며 홈런 공동 6위로 올라섰다.그러나 삼성은 어이없는 실책을 연발하며 롯데에 4-6으로 패했다. 롯데는 4-4로 맞선 7회 1사 1·3루에서 김대익의 좌익수 플라이볼을 김인철이 놓쳐 1점을 얻고 계속된 1·2루에서 김현욱의 폭투와 포수의 2루 악송구로 1점을 더 보태 승기를 잡았다. 두산은 수원에서 최용호의 호투와 장단 8안타로 현대를 5-2로 꺾고 5연패뒤 3연승했다.최용호는 6이닝 동안 1실점으로 막아 3승째.8회 등판한 진필중은 시즌 첫 20세이브 고지를 밟으며 24세이브포인트째로 구원선두 고수.해태는 잠실에서 4-4로 맞선 9회초 1사만루에서 타바레스의 2루땅볼로 결승점을뽑아 LG를 5-4로 제쳤다. 김민수기자 kimms@
  • 한국논단 잇따라 패소

    서울고법 민사8부(재판장 蔡永洙 부장판사)는 15일 “시민단체와 노조를 좌익용공세력으로 매도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참여연대·민주노총 등 9개 단체가 보수 월간지 ‘한국논단’과 발행인 이모씨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는 원고들에게 1억8,000만원을 배상하고 정정보도문을 게재하라”는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상록기자
  • 정민철, 日데뷔 첫 완봉승

    정민철(요미우리 자이언츠)이 일본 데뷔 2경기만에 짜릿한 완봉승을 일궈냈다. 정민철은 14일 도쿄돔에서 벌어진 일본 프로야구 요코하마 베이 스타즈와의경기에 2번째 선발 등판, 9이닝 동안 34타자를 상대로 삼진 7개를 솎아내며7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틀어막아 팀의 11-0 완승을 이끌었다.이로써 정민철은 시즌 2승째를 챙기며 방어율 0.56을 기록했다. 한편 이종범(주니치 드래곤즈)은 이날 고시엔구장에서 벌어진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좌익수겸 3번타자로 출장,5타수 2안타 1타점 1득점했다.이종범은 타율 .283을 마크했고 주니치는 4-0으로 승리,센트럴리그 1위를 지켰다. 김민수기자
  • 印尼 역사 바로세우기 “35년전 불발쿠데타 진실 밝히라”

    인도네시아판 ‘역사 바로 세우기’작업에 불이 붙었다. 대상은 9.30사태.1965년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을 실각시키고 군 출신의 수하르토가 권력을 장악한 계기가 된 사건이다.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PKI)과좌익성향의 군장교들이 정부전복을 기도, 7명의 고위 군장성중 6명을 살해했다.전략사령관이던 수하르토의 지휘로 하룻 만에 쿠데타가 종결됐고 배후 조사과정에서 50만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처형됐고 60만명이 투옥됐다.공산당과친(親)중국 성향의 수카르노 대통령이 연루설이 제기되면서 자연스럽게 권력이 수하르토에게로 넘어간 계기가 된 ‘피의 사건’. 인도네시아에서 9,30사태가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 압두라만와히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부터.와히드 대통령이 과거 수하르토 독재의 전가의 보도였던 반공법 폐지를 강행하고 인권유린 행위 진상규명을 지시하는분위기에 힘입어 9.30사태의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지난 달 인도네시아 대법원이 수하르토에 대해 1년간 출국금지 조치를 명령한데 이어인도네시아 전문가인 호주 국립대학의 해럴드 크라우치 교수는 지난 19일 9.30사태 재조명을 위한 진상조사팀 구성을 인도네시아 검찰에 촉구했다.또 9.30사태가 수하르토정권에 의해 철저히 왜곡됐다는 자서전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당시 정부전복혐의로 체포돼 78년까지 옥고를 치른 라티에프라는 예비역 중령은 수하르토가 반란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인지,9.30사태의 주도세력과 공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증언했다. 학계는 수하르토가 당시 공산세력의 급격한 확산을 우려, 미국과 영국의 묵시적 지원을 받아 공모했을 가능성을 가장 설득력 높은 주장으로 보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이종범 5타수 2안타

    ‘바람의 아들’ 이종범(주니치 드래곤즈)이 2안타를 쳐내며 팀 연승에 기여했다. 이종범은 17일 요코하마구장에서 열린 일본 프로야구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에서 2번타자겸 좌익수로 출장,5타수 2안타 2득점하며 타율을 .284에서 .291로 끌어올렸다. 이종범은 이날 1회 1사에서 좌전안타로 출루한 뒤 고메스의 홈런으로 득점까지 올렸고 8회 선두타자로 나서 우전안타를 뽑고 고메스의 홈런이 다시 이어져 2득점했다. 주니치는 7-4로 이겨 최근 6연승을 달리며 18승18패를 기록,요코하마와 센트럴리그 공동 2위로 올라섰다.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7.끝)살레 이스마일 회담

    *79년 남·북예멘 회담. 5월22일 통일 1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옛 남예멘 수도 아덴에서 100㎞ 떨어진 다라라는 곳에서 14일 폭탄이 터져 민간인 1명이 숨지고 여러명이 다쳤다. 통일과 함께 석유개발로 경제적 번영이 기대됐지만 여전히 전체 인구의 40%가량이 가난과 싸우고 있는 등 통일 예멘은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90년 5월22일 합의로 통일된 지 4년만에 내전이 발발,무력으로 재통일을이룬 예멘의 분단 역사는 1857년 영국의 아덴 점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이후 1962년 북예멘에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젊은 장교들이 쿠테타를 일으켜예멘아랍공화국을,남예멘에서는 민족해방전선이 1967년 남예멘인민공화국을세우면서 분단이 고착됐다.남예멘 독립후 예멘인들은 통일을 추진했지만 남북예멘 정치인들의 이해대립과 사우디 아라비아와 소련의 개입으로 통일은요원하게만 보였다. 1세기를 넘는 분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까지는 아랍 ‘형제국’들의 중재와 80년대에 불기 시작한 동서화해바람과 냉전체제의 붕괴가 주효했다.18년간의 남북예멘간 통일논의는 1972년 9월 국경분쟁 이후 리비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의 적극적 중재로 같은해 10월 28일 카이로 정상회담이 개최되면서 시작됐다.77년까지 5차례의 정상회담을 갖는 동안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던 통일 논의는 79년 전기를 맞았다. 79년 2월 2차 국경분쟁때 아랍연맹은 ‘남북 예멘간 전쟁종식을 위한 평화안’을 가결한 뒤 양국에 이를 따를 것을 종용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3월28일부터 3월30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아랍연맹에 떠밀린 알리압둘라 살레 북예멘 대통령(현 대통령)과 압둘 파타 이스마일 남예멘대통령이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군 출신인 살레 대통령과 남예멘사회당을 창당한좌익 성향의 이스마일 대통령은 카이로협정,트리폴리 성명에 기초한 통일국가 수립을 재확인하고 4개월이내에 통일국가 헌법안을 마련하자는데 합의,통일논의를 가속화시켰다. 살레-이스마일 대통령의 쿠웨이트 정상회담을 계기로 특사의 상호방문이 이뤄졌고 급기야 81년 살레 북예멘 대통령의 남예멘 방문이 이뤄지면서 통일에관한 합의가 구체화됐다.문화·예술단체들의 상호 방문도 허용됐다.경제교류·협력도 정부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언론자료의 개방과 공보 출판물의 교환,단일 역사교과서의 사용 등 사회통합을 위한 움직임의 출발점이됐다. 80년 이스마일 남예멘 대통령이 권력투쟁에서 밀려 모스크바로 망명을 떠나면서 정상회담의 파트너가 바뀌었지만 남북예멘간 통일논의는 79년 합의내용을 토대로 흔들림없이 이어졌다. 80년대 중반 소강기에 접어들었던 통일논의는 국경지역에서 대규모 석유가매장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활발해졌다.석유를 공동발굴함으로써 통일이양측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88년 5월3∼4일살레 대통령과 예멘 사회당 서기당 알비드는 북예멘 사나에서 정상회담을개최,국경지대의 석유를 공동개발키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사나 정상회담은그때까지 반복돼 온 통일 논의와는 달리 2년 뒤 실질적인 통일로 이어지는이정표가 됐다. 90년 통일을 일궈낸 예멘은 4년이 지났는데도 남북예멘 정치인들간에 상호불신을 해소하지 못하고 결국 전면적인 내전을 치뤘다. 1994년 7월7일 살레대통령의 북예멘 군대가 남예멘 수도 아덴을 함락함으로써 무력으로 재통일됐다. 김균미기자 kmkim@
  • 조선시대 宗親府건물 제자리 찾을 가능성 높다

    지난 81년 국군기무사령부 뒷마당에서 해체된 뒤 정독도서관 마당으로 옮겨세워진 조선시대 종친부(宗親府) 건물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국방부가 경복궁 동쪽의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기무사 건물을 새로 짓는 계획을 재검토키로 함에 따라 그 자리에 종친부 건물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종친부는 조선시대에 왕실 일가친척들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궁궐안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경복궁 건춘문 바로 앞에 자리했다.고려시대제왕자부(諸王子府) 이후 명맥을 이어오던 종친부는 1907년 폐지됐다. 1913년에는 일제가 그 자리에 경성의대 부속건물을 세웠고,해방 이후 수도육군병원으로 활용되다 1971년 기무사가 홍릉에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종친부 건물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대로 서 있었다.81년 해체될 당시에 이미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상태였다. 종친부 건물은 1894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진다.63.45평 짜리 주건물(中堂·중당)과 건물에서 바라보아 왼쪽의 32.84평 짜리 부속건물(左翼廊·좌익랑)이 아직도 위세가 당당하다.다만 오른쪽에 왼쪽과 같은 규모로 서 있었을부속건물(右翼廊·우익랑)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기무사는 8,000여평에 이르는 부지 안쪽에 대형건물을 신축하되 삼청동길에면해 있는 옛 경성의대 부속건물 자리 700여평에 미술관을 짓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문화예술인들로 이루어진 사간동 문화거리추진위원회가 지난 96년부터 종합문화센터나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등 기무사 이전 및 문화공간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 공감대를 넓혀왔기 때문이다. 이제 국방부가 기무사령부를 이전키로 결론내릴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이곳을 문화공간화하는 방안은 더욱 다양하고 활발하게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거 기무사 부지에 세워져있던 건물까지 남아있는 만큼 문화공간을새로 조성하기에 앞서 역사성을 회복시키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목소리도 높다. 일부에서는 소격동 일대가 종친부를 비롯하여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과 왕의 사위인 부마들을 위한 관청인 의빈부(儀賓府) 등 왕실 관련기관이 밀집한지역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기무사 부지 안쪽의 제자리에 종친부 건물을 먼저 복원하고 주변을 사적공원으로 조성한 뒤 여유공간에 새로운 문화공간을 만드는 방안을 논의해야 올바른 순서라는 것이다. 나아가 덕수궁 안에 있는 궁중유물전시관은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그 자리에 조선왕조역사박물관으로 확대되어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경복궁을 완전복원하려면 기존 박물관 건물은 언젠가는 철거할 수 밖에 없다.결국 조선왕조박물관의 역사성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위치는 종친부 주변이 아니겠느냐는 반문이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서동철기자
  • 英블레어총리 정국운영 ‘암운’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집권 3년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띈 4일의 런던민선시장 및 지방의회 선거에서 집권 노동당이 참패를 당해 블레어 총리의연임 및 노동당의 향후 정국 운영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특히 총리에 이어 영국에서 두번째로 비중있는 자리인 런던 시장에 노동당을 박차고 나와 무소속으로 출마한 좌익성향의 켄 리빙스턴이 당선된 것은그가 오래전부터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노동당의 인기가 곤두박질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어서 블레어 총리의 부담은 더욱 가중될 수 밖에 없다.런던 시장 자리를 노동당 소속이 아닌 리빙스턴에게 맡길 수도 없고 당을 박차고 나간 그를 다시 노동당원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인 것이다. 진정한 노동자 계층 출신인 리빙스턴은 81∼85년 광역자치단체회의(GLC) 의장 자격으로 런던 시장직을 수행하면서 핵무장 해제 및 아일랜드공화군(IRA)을 지지하고 왕실과 경찰을 비난하는 등 좌익성향으로 마거릿 대처 당시 총리와 충돌을 빚은 끝에 대처가 GLC를해체하면서 중도하차했던 인물.그런 그가 런던의 새 민선시장으로 당선된 만큼 경제개혁을 위해 보수적 노선을 취하고 있는 블레어정권과 앞으로 사사건건 마찰을 빚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일이다. 런던 시장 뿐아니라 3,300여석을 뽑는 지방의회 선거에서 야당인 보수당이591석의 의석을 늘린 반면 집권 노동당은 567석이나 잃은 것도 블레어와 노동당에 큰 부담으로 남게 됐다. 유세진기자 yujin@
  • 리빙스턴, 런던 첫 민선시장

    [런던 AP 연합 특약] 좌익성향의 ‘레드 켄’ 리빙스턴(54)이 5일 런던 최초의 민선시장이 됐다. 리빙스턴은 4일 실시된 선거에서 40%의 득표율로 26%를 득표한 보수당의 스티브 노리스와 2차투표까지 간 끝에 새 시장으로 당선됐다.노동당의 프랭크돕슨 전보건장관은 토니 블레어 총리의 강력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3위에 그쳤다. 블레어 총리는 런던시장 선거에서 패했을 뿐만 아니라 런던시장 선거와 함께 치러진 152개 지방의회선거에서도 보수당에 참패,집권 3년에 대한 중간평가에서 점수를 잃으며 집권 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블레어 총리는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하고 싶은 말을 했다.우리는 시민들의 평가를 받아들이고 새 시장이 런던 시민들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노동당은 모두 3,337명을 뽑는 이번 지방의회선거에서 560석 이상을 잃은반면 보수당은 600석 가까이 의석을 늘렸다.노동당은 런던시 의회에서도 보수당에 6-8로 밀렸다. 리빙스턴은 1981년에도 런던시의회 의장으로 런던시 시정을 이끌었는데 좌익성향으로 인해 마거릿 대처 당시 총리와 사사건건 충돌을 빚은 끝에 86년대처가 시의회를 해산하는 바람에 중도하차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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