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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엽 33호 홈런 공동 2위

    이승엽(삼성)이 7경기만에 홈런포를 가동,홈런 공동 2위에 올랐고 신윤호(LG)는 다승 단독 선두에 나섰다. 이승엽은 9일 잠실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LG와의 경기에서 4-6으로 뒤진 7회 1사3루에서 두번째 투수로 시즌 첫 출장한 최향남의 2구째 변화구를 통타,우중월 2점포를 그려냈다.이로써 이승엽은 지난 1일 이후 시즌 33호를 기록,타이론 우즈(두산)와 홈런 공동 2위에 오르며 선두 펠릭스호세(롯데)를 2개차로 압박했다.그러나 삼성은 6-10으로졌다. LG는 6-6으로 맞선 7회말 2사후 김정민·이종열의 연속안타와 김재현의 볼넷으로 만든 만루에서 유지현의 밀어내기 볼넷에 이어 이병규의 통렬한 ‘싹쓸이’ 2루타로 4득점,승부를 갈랐다.LG는 기아에 2.5경기차로 7위.7회 등판한 신윤호는 구원승으로 시즌 14승째를 마크,임창용(삼성)·손민한(롯데)을 1승차로 제치고 다승 단독 1위에 올랐다.또 26세이브포인트로 구원 선두 벤 리베라(삼성)를 1포인트차로 추격했다. 기아는 광주에서 연장 10회 상대 끝내기 실책으로 두산을 7-6으로 제쳤다.4위 기아는 롯데·한화와의 승차를 1경기로 벌렸다.기아는 6-6이던 연장 10회말 2사1루에서 김태룡의 좌전 안타 때 좌익수가 볼을 더듬은 데 이어 3루에 뿌린 볼을 백업플레이를 하던 진필중이 뒤로 빠뜨려 2루주자이종범이 홈을 밟았다. 현대-롯데(사직), SK-한화전(대전)은 비로 하루씩 연기됐다. 김민수기자 kimms@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9)월북작가 김남천

    편지를 잡문 차원에서 본격적인 문학 토론의 마당으로 격조있게 끌어올린 사람은 김남천(金南天,본명 孝植·1911∼?)이다.평남 성천군청에 근무했던 아버지나,일본 유학중 결혼하게 된 첫 번째 부인의 아버지가 성천 군수였다는 사실은 김남천의 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육중한 몸매에 미남이기도 했던 그는 일본 호세이(法政)대 시절부터 좌익운동에 투신,당대 운동권의 주역 임화,최승희의 남편 안막 등과 도쿄에서 카프 활동을 전개하면서 일약 지도적 인물로 부상한다. 이후 그의 이름은 언제나 임화와 나란히 붙어 다니면서 카프 후반기를 제압하는 주역으로,비단 문학활동만이 아니라 평양고무공장 파업(1930년)에 참여하는 등 현장성 강한 운동으로 제1차 카프 검거(1931년 8월)때 2년 실형을 선고 받았다. 1933년초 병보석으로 출옥하나 두 딸을 남겨둔 채 아내가죽어 조신하던 터라 이듬해 카프 제2차 검거 때는 구속을 면할 수 있었다.1935년 평양에서 상경한 그는 임화,김기진과함께 경기도 경무부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하여,10년에 걸친한국문학사에서 카프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고,이 사실 때문에 이들 셋은 두고두고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여운형이 발행인이었던 조선중앙일보(1933년 2월 창간)에입사했던 그는 근대 민족언론사의 획을 그었던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가 된다.베를린 올림픽(1936년 8월1일)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사진을 국내에 처음소개한 것은 8월 25일자 동아일보였고,이 사건으로 사회부장이었던 작가 현진건이 언론계를 떠난 이야기는 다 아는 사실이다.신문사 끼리의 경쟁심리 때문에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일장기를 없애고는 그 위에다 희미한태극까지 부각시켜 자진 휴간(9월5일)을 거쳐 아예 폐간되었다.바로 김남천의 실직 사연인즉슨 이러하다.이즈음 그는 창작과 비평의 양수잡이로 맹활약하면서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최정희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내막이 담겨있다. 그는 최정희의 소설 ‘흉가’에 대하여 월평 ‘여류작가의난관과 ‘흉가’ 검토의 중점’(조선일보 1937년 4월8일)에서 기대와 비판을 동시에 가하고 있다.당시 김남천의 태도에 대해서는 출옥후 이미 전향했다는 관점과,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고수했다는 주장이 다 있는데,이 편지로 미뤄볼 때 후자 쪽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문학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글이다.김남천의 비평활동에 불만을 품은 작가들은 많았는데,편지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그를 비난한 건 극작가 김진수(金鎭壽.1909∼1966년)였다.평남 중화군 출신인 그는 릿교(立敎)대학 졸업 후 만주국 간도성 연길현(延吉縣) 용정가(龍井街) 은진(恩眞)국민고등학교에근무(1938∼45년)했다.1920년 캐나다인 부두일(富斗一)이 창립한 이 학교는 송몽규 문익환 윤동주가 다녔던,민족의식이강한 명문교인데 1946년 ‘룡정중학’으로 병합되어 오늘날중국 동북지역의 관광명소로 남아있다. 그가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지는 바로 이 학교 공문서 서식용지이며,내용은 김남천의 평문 ‘동시대인의 거리감-9월 창작평’을 화두로 삼는다.최정희의 ‘지맥(地脈)’을 언급한이 평문이 김진수에게는 무척 못 마땅했었던 것으로 썼지만속내는자신의 분풀이가 더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글을 쓴 날자가 9월28일,책방에서 ‘문장’지를 샀다면서 그는 김남천을 한껏 물어뜯는다.누가 읽어도 편견과 속좁음이 느껴지는 이 글을 왜 썼을까.김진수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황순원등과 학생예술좌를 창립(1935년),연극활동을 했는데,문단활동은 극예술연구회(1931년 김진섭 유치진 이헌구 등이 창립) 공모에서 장막극 ‘길’이 당선(1936년)되고서였다.그가 단막극 ‘향연’을 ‘조광’에 발표한 것은 1938년 11월호였는데,김남천은 발 빠르게 조선일보 창작평 ‘미성년의 문학-김진수와 권명수’(1938년 11월11일)에서 “극연(劇硏) 당선작가(불행히 나는 당선작을 읽지 못했다)김진수씨의 희곡 ‘향연’을 읽고 나서 나는 이 분이 미혼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는 서두로 시작하여 그리 탐탁찮은 평을 가해댔다. 김남천에 대한 유감은 아마 이때부터 똬리를 튼 것 같다. 불만은 또 있다.김진수는 애시당초 문학에서 사회니,민족이니 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그러나 김진수의 울분 속에는 나름대로의 심미안이 탄탄하게 드러난다.작가 최명익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바로 김진수의 미학적 체질을 엿볼 수있는 대목이다.친일작가 장혁주와 최대의 친일평론가 김문집은 긍정하면서 김남천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비꼰 김진수가 8·15 후에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는 물으나마나다.“유치진과 더불어 해방 이후부터 50년대 희곡계의 주도적 세력이었던 보수주의적 극작가들의 보편적인 유형”(박명진 ‘한국희곡 이데올로기’)이었다는 게 정평이다. 김진수에게 그렇게도 못 마땅했던 김남천은 8·15 후 임화와 함께 화려하게 재기,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다가 월북,남로계의 몰락으로 남북한 문학사의 지평으로부터 사라져버린 별이 되었다.통일은 아마 이들의 복권과 더불어 다가 올것이다.역사는 어떤 탄압으로도 그 흐름을 막을 수 없다.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니혼(日本)대학을 중퇴한 정비석(1911∼1991년)이 ‘성황당’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1937년)되어 상경을 꿈꾸다가 매일신보 기자가 된 것이 1941년 10월이니,그가 최정희의 소설 ‘인맥’(1940년 4월)을읽고 감동하여 보낸 편지는 이즈음의 것이다.그가 상경 직전 있었던 곳은 평북 용천군.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백천(白川)온천을경영하며 많은 문인들에게 휴식을 제공했던 장만영(1914∼1975년)은 뭔가 최정희와 토라짐 같은 게 내비치는 사연을 담고 있다.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쳐 보시라. 이렇게 한쪽에서는 싸우며 고뇌하는 다른 한쪽에서는 그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또 어느 다른 곳에서는 친일에 열을 올려 그 대가로 호사를 누리는가 하면 어느 곳에서는 유유자적 즐기고 있는 속에서 역사는 흐른다.이럴 때대체 남도출신 문학인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지냈을까.김동리(金東里,본명 始鍾·1913∼1995년)는 이 무렵 참담한 심경으로 경신학교에다 휴학계를 내고 형 범부(凡父,1897∼1966년)가 살던 부산으로 내려갔다.동양사상의 대가인 이 당대의 수재이자 기인인 범부가 어렵사리 꾸려가는 살림살이에 얹히게 된 동리는 영도다리에 떨어져 죽어 버릴까도 생각했으나,어찌 연이 닿아 형이 은신처로 삼았던 경남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거처를옮긴 게 1935년이었다.신춘문예 당선상금을 밑천 삼아 창작에 몰두하겠다는 결의였다. 김종직(金宗直)의 17대손인 이들 형제의 성공담에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없지 않다.무오사화에 얽혀 부관참시형을 당한점필재 김종직의 후손들은 그 화를 피하여 월성군 서면 계림골로 숨어들어 정쟁을 피하곤 했다.이런 문중일수록 풍수지리에 밝아 김동리의 할아버지도 선산을 보유했는데,한 권세가가 그 터에다 묘를 쓰자 그는 겁도 없이 그걸 파헤쳐 버렸다고 전한다.권세가는 할아버지를 귀양보냈는데 돌아와서는또 그 권세가의 무덤을 파헤쳐 다시 귀양,또 귀향하여 파헤치기를 세 번 되풀이하자 세도가의 기가 꺾여 포기했다는 전설 아닌 사실이 전한다.그 할아버지의 본댁은 이 와중에서자살해 버렸고 재혼하여 얻은 아들이 김동리의 아버지 김임수(壬守)이다.권력의 피해를 입으면 이를 피하거나 동경하거나 혹은 도전한다.아니면 이 세가지를 다 겸하기도 한다.김동리 일가가 지녔던 이런 가풍은 그의 문학과 무관하지 않다.샤머니즘적 인습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로 입문한 것은 어머니였고,그녀의 영향으로 동리는 경주 제일교회 부속학교를나와 대구 계성학교에 다니다가 서울의 경신으로 전학했지만 중퇴했다. 다솔사에서 이내 해인사로 거처를 옮긴 김동리는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약간은 들떠서 상경하나 이 시골뜨기 신인에게 인정을 베풀기에는 당시 경성(京城,현 서울)문단은 너무 재재다사(才才多士)에다 각박했다.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동료인 서정주와 어울리면서 울분을달래던 그는 이듬해에 다솔사가 세운 광명학원 교사로 내려가게 된다.처음에는 다솔사에 기거하며 광명학원까지 걸어다니던 김동리는 그 지방의 몰락 토호집에 하숙하다가 그 집 딸 김월계와 결혼(1938년),학교 부근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때 그는 쇠약과 우울증으로 수필 한 편도 쓸 수 없었던 지경인데도 선비의 후예다운 기개를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큰 불평이 있더라도 내 자신의 신념이,일테면 천지의 정기(正氣)와 통하는 것이라고 철칙같이 믿고 있으니까,그른 것은 현실의 그것이요,그 그른 현실은 천지의약속에 따라 시정될 것이라고,이건 ‘만만디’식이라고 웃으실는지 모르지만 여기엔 조곰도 독기(毒氣)가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그러니까 말하자면 결코 염세자(厭世者)도 아니겠습니다.”이 편지들은 대략 1940년부터 1943년 그가 징용을 피해 사천읍에서 양곡조합 촉탁이 되기 이전에 보낸 것들인데,입장이달랐던 선배에게 꺼내기 어려운 화두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이만큼한 절조 위에서라야 순수문학은 제 자리를 찾을 수있을 터이다.그의 발신지 주소는 정확히 ‘사천군 곤명(昆明)면 원전(院田)' 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美 비밀문건 내용·의미/ 백범암살 美개입 의혹 증폭

    1949년 6월26일 백범 김구(金九)선생을 권총으로 암살한 안두희(安斗熙)는 주한 미군방첩대(CIC) 요원이었음이 밝혀졌다. 또 안두희에게 백범 암살을 지시한 인물은 해방 직후 활발한 대(對) 공산주의 테러활동을 벌인 극우테러리스트 집단인 ‘백의사’(白衣社) 단장 염응택(廉應澤,일명 염동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와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가 최근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George E.Cilley) 소령이 백범 암살 3일 뒤인 6월29일 작성, 다음달 1일 미 육군 일반참모부 정보국장 앞으로 보낸 문건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해 4일 공개함으로써 처음 밝혀졌다. 이번에 공개된 백범암살사건 관련 미국측 문서는 그동안 추측으로만 난무했던,즉 백범암살사건과 미국과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과거에 나온 여타자료와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백범암살사건과 관련해서는 주로 저격범 안두희의 국내 ‘윗선’이 누구냐에 주로 초점이 모아졌었다. 일개 포병소위인 안두희가 단독으로 민족지도자를 백주에 암살한 데는 분명히 그를 사주한 정체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서였다. 그러나 이 역시 속쉬원히 밝혀진 것은 없다. 안두희의 범행을 사주했을 것으로 지목돼온 또 하나의 세력은 미국이었다.이는 미국이 미 군정기와 단독정부 수립과정 등에서 이승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김구를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안두희는 그동안 미국과 이 사건과의 관련성에 대해 ‘흘리듯이’ 몇 마디씩을 증언한 적이 있으나 정확한 내용도 아닌데다 더러는 곧바로 번복해 의혹만 키웠다. 안두희는 84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서북청년회원들이 미국의 정보원으로 많이 활약하였으며,따라서 미국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을 알았다”고 밝혀 당시 미국의 백범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드러냈다.이 때 안두희는 흥미롭게도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제거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밝혔는데 이번에 결국 그런 자료가 나온 셈이다. 한편 안두희는 92년 4월 12일 다시 권중희씨를 통해 범행 전 장택상의 소개로 미 OSS출신 중령을 만나 백범암살에 대한 암시를 받았다고 거듭 증언했다가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돼 파장이 커지자 이틀뒤인 14일 MBC에 출연해 미국과의 관련성을 전면 부인했다. 그리고 다시 15일에는 그간의 증언을 절충, “정확한 소속은 기억나지 않지만 미군 중령과 반도호텔 등지에서 두 차례 만난 적은 있으나,이들이 백범암살과는 전연 관계없다”고 얼버무렸다. 이처럼 백범사건과 미국과의 관계는 실마리 단계에서 오락가락 하다가 96년 10월 그가 버스기사 박기서씨에 의해 살해되면서 완전히 미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번 자료는 안두희가 당시 미군 CIC(방첩대)의 ‘정보원(informer)’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정식요원(agent)’으로 활동한 사실을 명쾌히 보여주고 있으며,동시에 미국이 백범사건에 직접개입을 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어떠한 형태로든 미국이 이 사건에 관련됐음을 시사하는 방증자료를 확보한 셈이다. 특히 안두희의 바로 ‘윗선’이 테러집단인 ‘백의사’의 단장인 염응택이었다는 점은 새로 밝혀진 사실로 관련학계의 확인·검토작업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정운현기자 jwh59@. ■이강국·임화 CIC요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의 직계인 이강국(초대 북한 외무성 부상)과 임화(작가)등 남로당의 일부 핵심 간부들이 주한미군 CIC의 요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서 드러났다. 이강국은 6·25직전 간첩혐의로 체포된 이화여전 출신 김수임과 연인 사이였다. 이는 당시 미군정의 실력자였던 베어드(미8군 사령부 헌병감·대한민국 경찰 최고고문) 대령과 동거하던 김을 이용해 남한의 경찰 및 군의 고급기밀,정부의 1급 비밀을 빼내갔던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공개된 문서는 이에 대해 대부분 증거 불충분으로 결론짓고 있다. 문서에 따르면 이강국이 김수임을 통해 남한 정보를 수집해간 것이 아니라 거꾸로 베어드 대령이 김과 연결된 CIC요원 이를 통해 북측 정보를 수집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문서에는 또 임화와 이름이 기록돼 있지 않은 남로당 선전부장 등이 CIC와 연계돼 있어 CIC가 좌익 조직에 광범위하게 정보원을 침투시킨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CIC문서를 통해 이가 미군 정보기과 연계돼 있었던 점이 드러남에 따라 53년 8월 휴전 직후 북한 당국이 발표한 ‘이승엽 등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사건’에 연루된 12명의 남로당 고위간부중 일부가 미국 정보기관에 포섭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백의사’ 어떤 조직 . ‘백의사’는 ‘남의사’라는 중국 테리스트 집단을 본떠 해방 직전인 1944년 11월 무렵 신익희 주도로 서울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사무국’이 모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후 각종 극우테러리즘 활동을 벌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단체 핵심인물인 염응택은 일제하 관동군의 밀정출신. 영어·독일어·불어·일어·중국어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정적들로부터 ‘암살자’,‘청부살인자’,‘국수주의적 광신도’ 등으로 불렸다. 미군의 정보기관인 CIC는 활동이 매우 광범위해서 첩보,정보 수집 뿐만 아니라 한국인 정치지도자와 미국인에 대한 사찰도 벌였다.
  • [씨줄날줄] DMZ 평화축전

    오는 10월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 도라산 부근에서 ‘2001 평화촌’ 행사가 마련된다고 한다.남북의 예술인 500여명이 경의선 도라산 역이 들어설 자리에 텐트 50채로 ‘평화촌’을 만들어 4박5일 동안 머물며 갖가지 평화 이벤트를한다는 것이다. 경의선을 주제로 콘서트도 열고 작품도 발표하고 비무장지대의 희귀 동식물 보호방안도 논의한다고한다. 생각만 해도 신명나는 일대 ‘사건’임이 틀림없다.예술인들이 허허벌판에 텐트를 치고 별을 헤며 ‘하나’를 지향한다는 게 야릇한 흥분마저 불러일으킨다.그러나 한편으론 방정맞은 생각도 드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먼저 북측 예술인들이 정말 참여할 것인지가 미심쩍다.긍정적인 답변을 했다지만 도장을 찍은 약속도 지키지 않는 판에 확답도 아니었다니 안 믿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라고 전망이 밝은 것도 아니다.‘남남갈등’이라는 시련을 지금 겪고있질 않는가.이런 갈등은 양자택일이 강요된일제 강점기와 남북 분단시대를 거치며 똬리를 튼 반목구도에서 비롯됐다.친일 행각이 뿌리라면 동족상잔이 줄기인셈이다.일제의 침략으로 시작된 민족의 수난사가 한 세기를관통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래저래 ‘악업’의 굴레를쓰게 됐다. 문제는 ‘악업’을 청산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정리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다.‘지도층’을 꿈꾸는 사람들이 ‘자신’의 결백을 조작하면서 이념적 갈등을 조장했다.미국의 LA타임스는 26일자 지면에서 한국의 역사 교과서 기사를 다루며 “일제의 부역자가 반공의 망토로 과거를 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누구도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한 바에야 차라리둘다 묻어야 했다. 서로 용서하고 민족적 화합과 단합을 도모했어야 할 일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태어나 자라고 배웠다면 일단은 건전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민족문제에 대한생각이 다르다 해서 좌익에서 진보까지 등급을 매겨가며 싸잡아 몰아붙일 일이 아니다.또 하나 지금과 같은 분단상황이 계속되는 한 내부 갈등도 한동안 이어질 것 같다. 벽을허물지 못한다면 ‘모양’이라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2001 평화촌’ 행사는 모양 바꾸기 노력의 하나로 이해된다.사회 성숙도의 가늠자가 될 것이고 보면 관심있게지켜 볼 일이다. 정인학 논설위원 chung@
  • [대한광장] 정치 포르노

    방북단 중 일부가 볼썽사나운 짓을 한 모양이다.어떤 이는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고썼다 한다.본인이 김일성 찬양과 아무 관계없다고 하니,그래,이 부분은 이해해주고 넘어가 주자.어떤 이는 방명록에‘훌륭한 장군님’이라 적었다고 한다.이것도 외교적 언사로 이해해 주고 넘어가자. 하지만 어떤 이는 거기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고,김일성 밀랍 인형 앞에서 눈물을 적셨다고 한다.어떻게 독재자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그 밀랍 인형 앞에서 눈물을흘릴 수 있을까? 이것은 사이비 종교의 신도에게나 어울리는 태도다.사상과 감정은 자유라고 하나,증상이 이 정도면‘정치 포르노’,일종의 음부 노출증이라 할 수 있다. 더 짜증나는 것은 이들의 무책임한 태도다.이들의 돌출행동이 그러잖아도 방문단 내부에서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듣자하니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고 한다.단체로갔으면 단체로 행동해야 한다.그게 상식이고,예의고, 원칙이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가 언제 국가보안법 무서워서 통일운동 못하냐”며 막무가내로 행동했다 한다.누가 자기들이 국가보안법으로 끌려가는 게 걱정이 돼서 말리나? 그 피해가자기들만이 아니라,고스란히 남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말리지.보라,결국 자기들이 튀긴 흙탕물을 방문단이,통일운동전체가,나아가 통일을 바라는 모든 국민이 뒤집어 쓰지 않았는가. 이 기회에 진보진영은 통일운동 일각의 이 시대착오적 흐름과 선을 그어야 한다.아울러 뚜렷한 이유없이 이산가족상봉에 미적거리고,쓸데없이 장소문제를 걸어 민간단체의교류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북한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통일은 정권의 이해를 넘어서는 민족적 과제다.남북의 어느 정권도 통일의 대의를 정권유지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남의 일각에 반통일 세력이 있다면,북에는 반통일적 경향이 분명히 존재한다.‘통일’에 모든 것을 건 듯이 말하는북한이 정작 남북교류에 소극적인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외세의 개입없는 자주적 통일을 주장하며 사사건건 미국을문제삼아 민족 내부의 교류마저 미국과 연계시키는 것도 비난받아마땅한 일이다. 짜증나는 포르노는 또 있다. 이런 가십거리를 신문 1면에대문짝만 하게 걸어놓고 보수층의 본능을 자극하는 ‘반공옐로 페이퍼들’의 행태다. 국민정신을 해치는 이 저급한 반공 음란물 유포도 이제 자제되어야 한다.왜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는가.몇년 전에 임수경이 북을 방문했을 때에도 그들이 당장이라도 나라가 무너질 듯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국민들은 공포에 떨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떤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대한민국 안 무너진다.그들의 행동은빈축을 살 일이지 여론몰이로 마녀사냥을 하거나 법으로 단죄할 일이 아니다. 우리 시민사회도 그동안 많이 성숙했다.이 정도는 사상의자유시장에 맡겨도 된다.그래야 그런 ‘삑사리’가 저절로퇴출이 되는 것이다.쓸데없이 이런 목소리들을 억압하니까,그게 황당하게 엉뚱한 장소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김포공항에서 어느 우익단체 회원이 방북단을 환영나온 어느 여학생에게 폭행을 가했다.이것은 그저 한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우리사회에 내재된 이념폭력의 포텐셜(잠재력)이 터져나온 것이다.북에 가서 ‘장군님 만세’ 부르는좌익 음란물도 짜증나지만,멀쩡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여론몰이로 마녀사냥을 하는 이념 깡패질,우익 폭력물도짜증난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한줌도 안되는 이 몰지각한 사람들이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것을 소위 ‘남남갈등’이라 부르며 관람해줘야 하는가.도대체 대한민국에는 이들밖에 안사는가? 이들이 대한민국을 전세라도 냈는가? 이런 분들 하고 한 동포 하려니 정말 짜증난다. 제발 우리,상식 좀 갖고 삽시다. 진중권 문화비평가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4)식민지 저항적 지식인

    근대 여성작가 중 가장 치마폭이 넓었던 최정희는 유파와연령을 초월하여 문우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소중한 것으로는 국제 입찰에 부칠만한 중량급 서간문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김사량(金史良,본명 時昌,1914∼1950)의 편지이다.일본에서 더 유명한 김사량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를 일깨워 준 근대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한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평양에서 1914년에 태어난 그는 평양고보 재학 중 배속장교와 일본인 교사 및 그들에 동조하는 조선인 교사 배척을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처분을 받고는 형 시명(時明,교토제대 법학부 졸업 후 사법·행정 양과 합격,홍천·평창 군수,조선인 최초의 전매국장,8·15 후에는 중앙산림조합연합회 이사장 등을 지냄)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다.학창시절에는 연극에 관심이 많아 신협(新協)극단과 연계,장혁주(張赫宙)가 각색한 ‘춘향전’의모국 순회공연에도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펼치다 여러이유로 경찰에 자주 구금 당했다. 결혼 직후 하이네에 관한 논문으로 도쿄제대 독문학과를졸업(1939)한 그는 잠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서울의 하숙집에서 출세작 ‘빛 속에서’를 썼다.이 무렵에 아마 서울의 잡지사와 문인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것인데,최정희와의 인연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도쿄제대 대학원 입학허가를 받은 그는 6월 아내와 도일,일본과 한국 문단을 잇는 가교 역할을 맡게 된다.편지에서 김사량은 매우 조심스럽게 최정희의 ‘지맥’을 추천했으면 싶었으나,이미 일본의 다른 출판사(赤塚書房)가 추진하고 있던조선문학 선집에 관여하는 장혁주가 손을 댔기에 ‘흉가’로 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몇 차례 오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는 최정희가 자신의 소설을 일본에 소개되기를 희망한데 대한 답신 내용이 대부분이다. 장혁주는 누구였던가.김사량보다 먼저 등단한 그는 잡지사,문인 등을 후배에게 소개시켜 주는 역할을 했던 재일조선인 문단의 대선배였다.1905년 대구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은중(恩重),창씨개명은 노구치 가쿠주(野口赫宙,첫 창씨명은 野口이었음)로,불륜사건에 연루되어 도일,본처와 이혼,일본여자와 재혼,8·15후 아예 일본으로 귀화해 버린 인물이다. 그는 초기의 민족적인 성향과는 달리 친일화 정도가아니라 아예 혈통까지도 일본인화 해야된다는 각오로 일본여자와 결혼을 감행한 친일문학인 가운데서도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었다.1952년 10월,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변장한 채 일본 ‘부인구락부’ 특파원 신분으로 입국하여 취재활동을 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을 힐난하는 글을 써서 당시 문학단체가 법석을 떨게 했던 장본인이다.그는 아예 일본문학보국회에 가입하여 활동에 열을 올렸던 인물로한국을 영원히 등진 조국상실자가 되었다. 최정희의 ‘지맥’은 평론가 한식(韓植)이 번역을 맡은 것으로 드러나며,편지에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김사량은 ‘모던 일본’에다 이광수의 ‘무정’을 번역했는데,아마 이 사실은 고의로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김사량은 ‘조광’에장편 ‘낙조’(1940.2∼1941.1)를 연재하면서 모국어 문제에 대하여 매우 겸허하게 최정희의 조언을 구하고 있지만사실 그는 ‘양국어 작가’로 손색이 없었다.그가 ‘삼천리’에 발표한 글로는 잡문 ‘조선문학과 언어문제’(1941.1)와 소설 ‘지기미’(1941.4)인데,이 두 사실을 편지에 대입해 읽으면 그와 최정희의 교유가 대략 1939∼1941년임을 알 수 있다.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자.‘문예춘추’는 1935년 일본최고의 아쿠다가와 (芥川)문학상을 제정했는데,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김사량이 이 상의 후보작으로 뽑혀 일약 일본문단의 유망주가 되었다(1940.2).1941년12월 9일 새벽 진주만 기습에 따른 사상범예방구금법으로감금당했고,유명세만큼 그에게 부하되는 역사적인 책무도커서 친일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했다. 일본 문학인들의 구명운동으로 이듬해 1월29일 석방된 그는 이내 귀향,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강제동원을 피할 수 없었다.이효석(1942년 작고)이 있었던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사가 된 건 1944년 4월.강제 친일에 동원되면서도 일본문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격렬하게 식민통치를 비판하던 이투사는 1945년 2월 조선출신학도병 위문단으로 중국에 파견,일정을 마친 뒤 탈출,화북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하여 떳떳하게 해방을 맞았다.이때의 탈출 투쟁기는 ‘노마만리(駑馬萬里)’란 제목으로 남아있다. 1945년 11월 서울에서 그의 희곡 ‘호접’이 단성사에서 공연되는 등 광복 후 한국 좌익문단의 정화에 일조했던 그는이듬해 평양으로 돌아가 6·25때 종군작가로 참가,후퇴 도중 원주 부근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낙오된 채 행방불명된 게 그의 최후다(안우식 지음,심원섭 옮김 ‘김사량 평전’ 참고).김사량은 자신의 친일행각이 강제에 의한 것임을 문학인들에게 공공연하게 실토했던 점과 모험을 무릅쓴 극적인 탈출로 민족해방투쟁에 나섰던 문학인이었다는 점에서식민지시대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세계 저항문학사에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극적인 생애는 한설야(韓雪野)도 마찬가지다.기생 이름 같은 낭만적인 필명과는 달리 1900년 함주(함흥)에서 태어난그는 1976년 북한에서 사망할 때까지 영욕을 두루 겪은 비극적인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인물인데,유명한 한의학자 이제마(李濟馬)의 제자로,홍범도(洪範圖)등의 의병활동을 무마시키라는 일제의 강요를 거절코 고향을 떠나 피신했다.한설야는 경성제일고보에다니다가 서모(庶母)와 불화로 귀향,함흥고보로 전학,3·1운동에 관련되어 구금 체험을 한다.중국,일본 등지를 떠돌거나 유학 한 뒤 ‘조선문단’으로 등단한 그는 서울에 머물렀다가(1925∼1926),아버지가 많은 빚을 남기고 죽자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1927) 귀국하여 카프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문학과 사상 연구회,‘한설야 문학의 재인식’).한설야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은 1932년경인데 함남지역에 특파됐다가 본사에 왔을 때는 경영권 문제로 매우 복잡 미묘할 때였다.창간 초기부터 경영진의 시국 순응 성향과 편집진의 민족의식 지향이 갈등관계를 유지했던조선일보는 계속 사주가 바뀌면서도 반일논조 때문에 정간과 필화가 잇따랐다.신간회(新幹會)운동으로 안재홍(安在鴻)사장이 구속되는 등 혼란을 틈타 고리대금업을 하던 채권자 임경래(林景來)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주장하여 조병옥(趙炳玉)·주요한(朱耀翰)의 정통 편집팀과 대결,두 개의 조선일보 발행이라는 희극이 연출되다가 방응모(方應謨)가 참여,부사장을 거쳐 발행인이 된 것이 1933년 7월(사장은 조만식).이 혼란 속에서 한설야는 학예부에 근무하며 노동 현장소설의 신기원이란 평가를 받은 이북명(李北鳴)을 발굴하여 ‘질소비료공장’을 연재 중단 당하는 등 카프노선에 충실한 언론인으로 활동한 것 같다. 당시 정황을 한설야는 단편 ‘세로(世路)’에서 너무나 자세히 언급하여 한국언론사의 충실한 증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소설은 자신이 회사로부터 해직 통고서를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왜 그렇게 됐는가에 대한 자초지종을 회상하고있다.등장인물은 모두 실명이지만 사정상 이니셜을 썼는데,쉽게 알만한 인물들이 그대로 나온다.새 경영진은 기구와인사 개편을 통하여 그때까지 신문사의 주류였던 M일파(투옥 경력자 등으로 묘사)를 약화 시키는데,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배신감과 사회적인 공분이 폭발한 한설야는 술자리에서 변절한 동료의 뺨을 후려친 게 화근이 되어 권고 사직을 당했다. 조선일보 사사(社史)에 의하면,1934년 1월 1일자로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특히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된 M(문석준)의 좌천도 바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미뤄 볼 때 한설야의 퇴직도 이 무렵일 것이다.이 문석준은 1943년 함흥에서 한설야와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한설야는 1944년 5월 석방) 당하는 주인공이다.1934년은 그에게 매우 불행한 한 해였다.해직 후 8월 그는 카프 2차사건으로 구속됐기 때문이다.달필인 한설야의 편지는 함흥에서보낸 것인데,아마 1941∼2년초 경 ‘삼천리’가 ‘대동아’로 개제하기 직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최정희가 한설야에게 잡지에 재수록할만한 짧은 작품을 추천해 달라는 청탁에 대한 회답 형식인 이 편지에서 그는 ‘강아지’와 ‘능금’을 천거했다.앞의 작품은 ‘한설야 단편집’에 실려 있는데,그게 1941년 7월에 나왔으며,뒤의 것은 1940년 간행 단편집 ‘귀향’에 게재된 것으로 볼 때,그리고 ‘대동아’개제가 1942년 3월부터였음을 감안하면 이 편지가 씌어졌던 시기는 밝혀질 것이다.이 무렵 그는 함흥에서 서점·극장·인쇄소 등에 손을 대는 등 생업과 창작에 전념하면서 해방의 날을 준비하고 지냈다.여담이지만 한설야는 광복 후북한에서 ‘김일성장군 전기’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쓴 한편 소련(1947),평화옹호 세계대회 참석차 프랑스(1949) 등지를 방문하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1962년 비판당한 후 불행한 최후를 마치고 작품도 판금,아직도 전면적인 해금이 안된 상태에 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21세기 담론-생명을 말한다] (16)녹색운동 이론가 정수복박사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녹색당이 집권하면 무엇이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녹색당을 이해 하는 지름길일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항을 하나하나 다루기 보다는 세계관과 패러다임의 수준에서논의를 해야 합니다.일단 자연과 생태계의 복원,자정능력범위 안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성장의 한계’를 설정할것입니다.군비축소가 먼저 단행될 것이고 정치는 100% 지방분권화가 이루어져 작은 단위로 직접 참여가 가능한 풀뿌리 민주주의가 활성화 되겠지요.대의민주주의는 주민의사의반영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남·여 균등참여도 제도적으로 보장될 것이고….오염자 부담 원칙에따라 조세정책도 개편돼야 겠지요. ◆환경과 건설은 항상 상극이니 대규모 건설도 중단 되겠군요. 건설은 언제나 지속 가능성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의 교통정책은 도로를 계속 늘리기만 하는데 자동차를 제한하지 않고는 아무리 늘려야 소용 없습니다.불편해서 승용차를 안가지고 나오는 것이오히려 개인이나 국가적으로,또 미래사회를 위해서 더 좋은 정책입니다.그대신 공공 교통을 최대한 늘려야겠지요. ◆‘불편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역설이 되는 셈인데 도심주차비 더 올리고 단속도 더 심하게 하겠군요. 실제로 외국에는 시청이나 공공기관에 주차장을 폐쇄해 버리는 곳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핵무기에 대한 두려움 보다 불황과 실업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큽니다.일반적으로 실업문제 등을 해결하기위한 적정 경제성장률을 6%로 잡습니다.녹색정치하의 경제는 제로 아니면 마이너스 성장일텐데 그에 따르는 제반 문제 해결책은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주5일 근무제를 하면 일자리 68만개가 생긴다지요.일자리 나누기 외에도 소비조합 등 신뢰를 바탕으로하는 여러 대안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시장경제 패러다임하에서는 이런 대안들이 실효성이 없다는 겁니다.마찬가지로 시장경제 마인드로는 어떤 대안을 말해 봐야 납득하기가 어렵겠지요. ◆군 장성이었다가 독일 녹색당원이 된 게르트 바스티안(Gert Bastian)이 군 직책을 사임하면서 내린 결론은 “군사력에 대한 도덕적인 정당성은 핵시대에는 점차 그 의미를 잃고 있다”고말 했습니다.이 발언은 서독인들의 분노를 산것으로 알려졌는데 녹색당의 ‘비무장 군비축소’ 정책이 각나라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녹색운동이 녹색정치로 운동영역을 넓힌 것도 바로 핵문제 때문이었지요.댐이라든가 일반 환경운동은 시민의 힘으로어느정도 막아지는데 군비문제 특히 핵무기는 시민운동으로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한 겁니다.핵전쟁이 일어나면 모두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방어핵은 의미가 없습니다.지금 세계의 핵탄두가 약 5만개쯤 된다고 하는데 이는 현존 인류를수십번 전멸시킬수 있는 양입니다.인류가 함께 풀어야 할문제 입니다. ◆독일 통일때 유일하게 녹색당이 반대 했더군요.녹색당 창당 멤버인 페트라 켈리는 그 이유를 “민족국가들은 이기적이며 국수주의적이고 경쟁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 했던데…. 녹색운동가들은 원래 민족국가 보다는 인류주의를 앞세웁니다.특히 국가 안보가 핵지상주의 틀안에서 해석되는 한민족국가는 위험한 것이지요.그러나 분단이 더 큰 파괴를불러 오고 주민의 인간다운 삶을 제약하는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다르지요.우리의 경우 ‘녹색연합’이 백두대간의 생태계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그러자면 통일이 전제 돼야지요.아마 서독 녹색당이 통일을 반대했다는 것은 ‘냉전적 분단’을 원해서 아니라 ‘패권주의적 통일’을 경계한 것으로 봐야 겠지요. ◆독일에서 녹색당을 농담 삼아 ‘토마토’라고 한다더군요.처음에는 녹색인데 갈수록 빨개진다는 거지요.그 말 속에는 녹색외투로 위장한 마르크시스트들이 있다는 뜻이기도합니다. 우리나라 색깔공세와는 질이 다르지만 유럽 보수정치 세력의 악의적인 색깔공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녹색운동 내부의 과거 마르크시스트 출신들은 녹색으로 위장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옷을 갈아 입은 겁니다.이들중 소수 급진좌파는 테러리스트로 떨어져 나가고 대부분은 세계관이 바뀐 거지요.녹색주의 입장에서 보면 보수나 진보나 둘 다 계급정당일 뿐입니다.그들은 둘다 경쟁하기 때문에 어느 쪽에 맡겨도 바다와 하늘의 오염,자원의 고갈,생태계 파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람과 사람의 조화로운 삶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궁국적으로 녹색주의가 실현되려면 모든 주민이 청교도가 돼야 하는 것 아닌가요.그런데 사람이 욕망을 억제 하기가 쉽지 않지요. 세계관,가치관의 문제 입니다.행복이 속도와 양에 비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부작용만 더 많다는 것을 인류가 실감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지겠지요.녹색운동가들은그것을 한발 먼저 감지한 사람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가령 어느 한 민족국가가 완벽하게 녹색주의 정책을 편다면 자체문제는 조화롭게 해결하겠지만 작은 정부가 되고 그렇게 되면 안보문제가 생기는데…. 그래서 민족국가주의는 위험 합니다.녹색운동이 민족과 인종을 초월해 연대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독일 녹색당의 경우 페트라 켈리 같은 사람도 여성이기때문에 받는 질시가 있고 창당 공로자 중에도 노선과 인간적 갈등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더군요.모든 조직이 소수일때는 참신하지만 커지면 갈등이 생기고 보수화 하는 것이역사적 경험입니다.녹색정치는 이에대한 어떤 장치가 있습니까? 명망가 중심이 그렇게 되기 쉽지요.또 대의민주주의는 명망가 중심이 되기 쉽고요.그 대안은 직접민주주의 입니다. 모든 결정은 구성원이 직접 참여하는 회의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겁니다. ◆대개 진보진영은 이념의 분화가 심하지요?머리수 싸움에서 패배 하는 원인이기도 한데 유럽에서도 녹색당이 다수당이 되기는 어렵겠지요? ‘비정치적 정당’이라고 표방 했듯이 정권획득을 목표로하는 기존 정당과는 처음부터 목표가 다릅니다. ◆그러나 비젼이 있어야 할텐데요. 소수세력으로도 굉장히 큰 역할을 해 내고 있습니다.유럽에서 기존 정당을 견인하는 역할이 크지요.또 언제나 소수라는 법도 없습니다.녹색주의가 지금은 몽상적으로 들릴지모르지만 미래시점에서 보면 가장 현실적이기도 하니까요. ◆한국에서 녹색정치의 가능성을 어떻게 보십니까?1980년대 말인가 녹색당이란 것이 잠깐 등장했다가 소문도 없이 사라진 일이 있는데…. 선관위에 등록도 못하고 몇몇분들의 임의단체처럼 생겼다가 없어졌습니다.아직은 노동자 정당의 원내 진출도 못하고 있습니다.그러나 노동,환경,교육,여성,소비자 운동 등 각분야에서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힘쓰는 사람들의 수는 적지 않다고 봅니다.이들이 녹색을 바탕색으로 하는 대연합이 필요 합니다.또 정치·사회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그렇게되리라고 봅니다.이를 ‘무지개 연합’이라고 하면 될까요. 독일식 정당명부제와 1인2표 제도가 도입되면 하나의 계기가 되리라 봅니다. 김재성 논설위원. ■정수복박사 약력. ▲연세대학교 정외과,동 대학원 사회학 과 졸업,파리 사회과학고등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 취득▲연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강사,환경운동연합 ‘시민환경운동연구소’ 부소장 크리스챤 ‘바람과물연구소’부소장 역임,KBS 텔레비젼 ‘정수복의 세상 읽기’ 진행. ▲현재 ‘사회운동연구소’ 소장▲저서;‘의미 세계와 사회운동’‘녹색대안을 찾는 생태학적 상상력’‘바다로 간 게으름뱅이’‘교양환경론’(공저)‘현대의 위기와 새로운 가회운동’(공저)▲역서;‘구조주의 현대 마르크시즘’‘현대 프랑스 사회학’‘새로운 사회운동과 참여민주주의’. ■‘녹색정치'란 무엇인가. 녹색정치는 녹색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이를 녹색운동 이론가 정수복씨(사회운동연구소장)는 이렇게 설명 한다.“환경문제가 단지 생물학적 산소 요구량(BOD)이나 화학적 산소 요구량(COD)의 문제가 아니라 부패,비리,폭력,불평등 등‘사회학적 산소 요구량’(SOD)을 높이는 정치·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자각”을 녹색정치의 출발점으로 본다. 이는 “우리는 좌익도 우익도 아니다.우리는 단지 최전선에 있을 뿐이다.”독일 기민당 소속 보수 정치인이었던 헤르베르트 그륄(Herbert Gruhl)이 1978년,녹색당 전신인 ‘녹색행동의 미래’(Green Action Future)를 결성 하면서 내건 슬로건에서 잘 나타 난다.여기서 최전선이란 핵위협,공해,환경오염,생태계 파괴,폭력,성적불평등,시민의 의사를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대의민주주의 등 총체적 문제가 산적한 전지구적 위기를 말한다. 1960년 말에 시작한 유럽의 환경운동은 1970년대에 들어반핵운동을 계기로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이 제기돼 1980년독일과 벨기에에서 녹색당(Die Cruennen)이 창당 됐다.녹색당은 스스로 ‘비정치적 정당’(None Political)이라고 천명한 것처럼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의사결정 구조와 돈 안드는 정치를 실천하고 있다. 이들은 보수든 진보든 기존의 정당은 계급을 대변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연착취,남성의 여성 착취 등 전인류적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따라서 주부,교사,교수,학생,성직자 등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다양한 면면의 녹색당원들은 환경,의료,교육,여성,소비자 등 시민의 구체적인 삶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조화로은 삶을 꿈꾸는사람들이다.비록 5% 전후의 득표에 머물지만 녹색의 물결은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에 번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들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몽상가 정도로 치부하는 기성 정당과 특히 매스컴에 대해 “과연 미래에대해 누가 현실주의적인가“라고 되묻는다.
  • “소액주주운동 왜곡 명예 훼손”

    ‘소액주주운동’을 둘러싼 참여연대와 자유기업원의 논쟁이 법정으로 비화됐다. 참여연대는 13일 “자유기업원이 소액주주운동을 자본주의체제 부정행위처럼 매도해 이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참여연대 구성원들의 인격과 명예를 심각하게 침해했다”며 자유기업원과 원장 민병균씨를 상대로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참여연대는 소장에서 “민씨와 자유기업원은 참여연대가시장경제를 부정한다며 허위,왜곡,과장된 내용을 전제한 뒤 ‘좌익의 지속적인 공격’ ‘국정의 농단’ 등 극렬한 언어를 써가며 우익의 총궐기로 좌익을 뿌리뽑자고 선동하는등 참여연대의 인격권에 심대한 타격을 줬다”고 주장했다. 조태성기자
  • MLB/ 박찬호 “오늘만 같아라”

    박찬호는 19일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경기를 통해 야구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될 멋진 투구를 뽐냈다.지난해 9월30일 샌디에이고전에서 9이닝 동안 삼진을 무려 13개나 낚으며 단 2안타 1볼넷으로 생애 첫 완봉승을 올렸을 때에 견줘 결코 뒤지지 않았다.제구력에 문제를 안고 있는 그가 ‘무사사구’로 완봉승을 챙겼기 때문이다. 후반기 첫 등판인 지난 14일 오클랜드전에서 최악의 투구를 보인 박찬호는 이날 수염을 깎은 말끔한 모습으로 등판,다부진 의지를 보였다. 박찬호가 1회초를 삼자범퇴로 깔끔히 막자 곧바로 행운이뒤따랐다.1회말 1사후 마크 그루질라넥이 좌중간 ‘바가지안타’(행운의 안타)로 출루했고 게리 셰필드가 데드볼을 얻어 1·2루의 찬스를 맞은 것. 다음 숀 그린이 1루수 앞 땅볼타구를 날리자 상대 1루수 리치 섹슨이 잡아 2루로 송구,1루주자 셰필드를 아웃시키고 유격수 호세 에르난데스가 1루로 병살플레이를 펼쳤다.그러나투수 앨런 레브롤트가 1루 백업에 들어가지 않아 공은 허공을 갈랐고 2루주자 그루질라넥이 홈을 밟았다. 선취점을 얻은 박찬호는 2회초 위기를 맞았다.선두타자 리치 섹슨의 평범한 좌익수 플라이 타구를 데드볼로 부상당한셰필드 대신 좌익수로 나선 폴 로두카가 어이없이 놓쳐 무사 2루를 허용했다.하지만 박찬호는 제로미 버니츠를 포수 파울플라이,라울 카사노바와 에르난데스를 거푸 삼진으로 돌려세워 무실점으로 넘겼다.박찬호는 3회 마크 로레타에게 우전안타,4회 중견수 실책성 안타를 내줬을 뿐 5회부터 9회까지5이닝을 모두 삼자범퇴로 완벽히 요리했다. 박찬호와 레브롤트의 살얼음판 투수전 속에서 다저스가 승기를 잡은 것은 7회.다저스는 1사에서 채드 크루터의 볼넷,알렉스 코라의 우전 안타에 이어 번트를 시도하던 박찬호가결정적인 볼넷을 골라 1사 만루의 득점 찬스를 잡았다.부진했던 후속타자 탐 굿윈은 전진 수비하던 2루수 앞에 강습 타구를 날려 2점을 보탰고 계속된 1·3루에서 그루질라넥의 희생플라이로 박찬호마저 홈인,4-0으로 달아났다. 다저스는 8회말 그린이 1점포를 쏘아올려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한계 투구수에 도달한 박찬호는 9회초 1루수 직선타와삼진 2개로 완봉승을 연출했다.‘마의 9승’을 작성한 박찬호는 오는 24일 다시 밀워키전에 등판한다. 한편 올스타전 출전에 이은 이날 완봉승으로 박찬호의 내년 연봉협상 전망도 한결 밝아졌다.미국 언론들은 박찬호가 내년 자유계약선수가 되는 것과 함께 2,000만 달러의 연봉을요구할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김민수기자
  • 네팔 총리, 의회압력 받고 사임

    [카트만두 외신종합] 기리자 프라사드 코이랄라 네팔 총리가 좌익반군 봉기로 인한 치안부재와 부패 스캔들 등 정정불안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의회압력에 못이겨 19일 사임했다. 코이랄라 총리는 이날 국영TV와 라디오를 통해 “정부수반으로서 테러리즘을 소탕하는데 실패했다”며 사임을 발표한 뒤 “갸넨드라 국왕에게 23일까지 후임자를 임명할 것을요청했다”고 말했다.작년초 취임한 그는 민항기 도입과정에서 불거진 부패의혹 등과 관련,그동안 마오쩌뚱(毛澤東)주의 반군과 야권으로부터 끊임없이 사임압력을 받아왔고최근에는 집권 네팔회의당 의원들도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 반세계화 시위대 속속 입국

    오는 20일 개막되는 G-8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난 16일에이어 이날 두번째로 실비오 베를리니쿠스 이탈리아 총리가소유하고 있는 밀라노의 TG4방송사에서 우편물 폭발사고가 발생, 안보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가운데 이탈리아 경찰은 반세계화 시위대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제노바 시내 곳곳에 철책을 설치하는 등 비상대책에 돌입했다. 공항과 항구,기차역,고속도로가 이미 폐쇄됐으며 경찰은두칼레궁 등 주요 정상회담장 주변을 비롯해 200여곳에 4m높이의 철책가설을 마쳤다. 경찰은 제노바와 밀라노 피렌체 나폴리 파도바 등 이탈리아 5대 도시 좌익 및 무정부주의단체 근거지를 급습,각종서류와 쇠망치·돌 등을 압수했다. 프랑스와 독일 등 인접국도 국경순찰을 강화했으며 독일바이에른 주정부는 이미 파악된 난동꾼 2,000여명의 자료를 경찰에 제공했다. 이번 G-8정상회담에는 약 10만명의 반세계화 시위대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며 이미 영국·스페인 출신 시위대 3,000여명이 제노바에 도착했다. 로마·제노바 AFP 연합
  • 앤서니 기든스 강연요지 “”제3의 길 기본목표는 정부개혁””

    ‘제3의 길’의 저자 앤서니 기든스(런던정치경제대 학장)는 9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제3의 길,어디까지 왔나’를 주제로 가진 초청연설을 통해 사회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제3의 길의 현주소를 진단했다.다음은 강연요지. *정부의 직접통제보다 여건조성이 중요. 사회민주주의는 한때 쇠퇴했지만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당선을 기점으로 경이롭게 복귀했다.이 변화의 근저에 ‘제3의 길’이 있다.‘제3의 길’은 ‘진보적 정치’나 ‘새로운 진보주의’를 풀이될 수도 있다.나라마다 다른,다양한‘제3의 길’이 있지만 기본목표에는 공통성이 있다. 우선 공공부문 축소가 아니라 쇄신과 강화를 목표로 한 정부개혁이다.정부의 직접적 통제보다 여건조성이 중요하다. 경제분야에서는 긴축재정과 균형예산의 유지,낮은 인플레와 안정적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춘 거시경제 운용,교육 및 기술훈련에 대한 집중투자,복지국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구조개혁,능동적 노동시장 정책 등을 꼽을 수 있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책임 없이는 권리도 없다’는 새로운시민의식 모델,확고한 인류 평등주의,시민사회 개혁,지방자치로 향햐는 권력의 이양과 분산,법과 질서의식 확립,생태계 현대화 등을 꼽을 수 있다.마지막으로 국제적 시각이다. ‘제3의 길’의 성공사례는 클린턴 대통령의 집권기다.완전고용을 수반하는 장기간의 고성장이 지속됐고 빈민층 비율이 줄고 흑인과 히스패닉의 경제적 입지가 호전됐다. 유럽에 대한 평가는 다소 유보적이다.유럽연합(EU) 15개국 중 현재 12개국에서 사회민주당 정부 또는 사회민주당 주도연합이 정권을 잡고 있지만 지속여부는 불투명하다. 유럽은 심각한 취업난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유럽경제가 만성적 실업문제를 극복하려면 경제 중심이 서비스와 지식분야로 확대돼야 한다.유럽의 복지국가는 다수의 공공부문 일자리를 지원하지 않으며 민간부문의 고용을 창출하지 않아 서비스나 지식산업 분야가 취약하다. 좌익의 부활과 함께 극우파도 새롭게 대두됐다.극우정당들은 세계화를 값싼 노동력으로 국가경제를 질식시키려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경제·문화 보호주의를 촉구하며 외국인혐오증과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공통성을 갖고있다. ‘제3의 길’은 공산주의 몰락 이후 좌익재건의 틀을 제공했다.선거승리를 도왔고 사회민주주의 부흥을 위한 필요조건이 됐다.세제 또는 연금개혁 등 인기는 없지만 불가피한혁신들을 합법화하는 기틀 등 일관되고 실용적인 정책개발을 지원했다. ‘제3의 길’은 현재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너무나 많은 미지수와 유권자 해체,정치 지도자에 대한 신뢰하락등민주주의 매커니즘의 변화가 외부로부터의 도전이다. 정치인들이 매일 언론보도에 답하는,정치지도자와 언론간의 대화라는 새로운 직접민주주의가 등장하고 있다.이런 ‘언론 민주주의’는 정치 지도자에 초점을 맞춘다.지도자와정기적으로 접촉하는 ‘두뇌집단에 의한 통치’다. 정리 전경하기자 lark3@. ■기든스는 누구.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정책브레인이자 ‘제3의 길’의저자로 잘 알려진 현대 사회학계 최고의 거목.1970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사회학 강의를 맡으면서부터 본격적인 학자로서의 활동을 시작,80년대 이후 좌우 이념의 대립 및 그 극복 방안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의 연구결과는 ‘사회주의의 경직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공했다’는 평가와 함께 블레어 총리가 주창한 ‘제3의 길’의 이론적 기반이 됐다.주요 저서로 ‘자본주의와 현대사회 이론(1971)’‘좌파와 우파를 넘어서(94)’‘사회학의 변론(96)‘기로에 선 자본주의(2000)’ 등 30여권이 있다. 1938년 런던 출생으로 헐대학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케임브리지대 교수를 거쳐 97년 1월부터 런던정치경제대 (LSE)총장 겸 교수로 일하고있다. 이동미기자 eyes@
  • 몬테시노스 페루 前정보국장 “비밀 테이프 공개”

    부정축재와 인권유린 등의 혐의로 체포된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전 페루 국가정보부장이 재판부가 선처를 약속하면자신이 보관하고 있는 비밀 비디오테이프 3만여개를 공개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고 그의 변호인이 27일 밝혔다. 파트리시아 후르타도 변호인은 몬테시노스가 지난 25일 판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비밀 테이프 공개 의사를 밝혔다면서그러나 이는 해군 중죄인 감옥에 수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발적으로 나온 것일 뿐 재판과 관련된 공식적인 발언은 아니라고 말했다. 몬테시노스가 말한 비밀 비디오테이프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 시절 야당의원과 선거관리위원,군 관계자,경제인및 언론인을 뇌물로 회유하는 장면을 비밀리에 녹화한 것으로 공개되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해군 중죄인 감옥은 주로 좌익 반군 지도자들이 수감되는곳으로 현재 수감된 죄수도 6명에 불과하다. 리마 AP 연합
  • 김병현, 통산 10승-200K

    김병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이 개인통산 10승과 200탈삼진을 돌파했다. 김병현은 24일 덴버 쿠어스필드에서 벌어진 미국 프로야구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경기에서 2이닝 동안 삼진 5개를 낚으며 무안타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막았다.99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김병현은 이로써 올 3승(2패3세이브),방어율 3.35를 마크하며 통산 10승10패18세이브,203탈삼진을 기록했다.김병현은 또 최근 8경기,13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며 구원투수 중 탈삼진 1위(61개)에도 올랐다. 김병현은 5-5로 맞선 8회말 4번째 투수로 등판,토드 헬튼을 시작으로 제프 시릴로와 토드 워커 등 3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워 8회를 넘겼다.김병현의 삼진 퍼레이드 속에서 애리조나는 9회초 1사 1·2루에서 에루비엘 두라조의적시타에 이어 레지 샌더스의 통렬한 3점포로 9-5로 달아났다.어깨가 가벼워진 김병현은 9회말 그레그 노튼을 좌익수플라이로 잡은 뒤 브렌트 메인과 브룩스 키쉬닉을 연속 삼진으로 요리했다. 김민수기자
  • 英 ‘유로화 가입’ 힘받을듯

    영국 노동당이 7일 치러진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둠에따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향후 5년 동안 자신의 공약을 더욱 힘있게 밀어부칠 것으로 전망된다.우선 영국의 유로화 가입 추진에 가속도가 붙을 예정이다.노동당은 이제까지 60%를 웃도는 반대 여론을 의식,원칙적으로는 찬성하되 선행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소극적 입장을 취했었다.그러나 선거직전 블레어 총리는 “총선 후 2년 내에 유로화 가입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며,승리할 자신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적극적 가입 추진 의사를 분명히 했다. 블레어 총리 측근들은 이번 총선 결과를 감안,블레어 총리가 이르면 오는 9월중에 여론을 유로화 가입쪽으로 돌리기위해 국민 대토론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전하고 있다.일부에선 내년 가을 국민투표 실시를 점치고 있다.이를 반영하 듯영국의 파운드화는 노동당의 총선 압승 소식과 함께 달러화에 대해 약세를 보였다.외환 딜러들은 “영국의 유로화 가입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파운드화 매물이 나와 약세를 기록했다”고 분석했다. 이번 노동당의 압승 요인은 블레어 총리의 집권 이후 영국경제의 호황 때문이다.현 영국의 실업률은 3.7%로 25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실업자 수도 100만명 이하로 떨어진 상태다.전문가들은 경제가 뒷받침하는 한 블레어 총리의 대내정책은 탄탄대로라고 분석하고 있다. 반면 블레어 총리의 대외정책은 순탄치만은 않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가장 큰 걸림돌은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결정과 유럽의 신속대응군 창설 계획으로 불편해진 미국·유럽과의 관계다. 블레어 총리는 지난달 의회 답변을 통해 MD는 미국이 확고한 안을 내놓기까지는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라며 반대하는자세를 보였다.게다가 블레어 총리가 빌 클린턴 행정부 때와는 달리 조지 W 부시 대통령과는 정치이념을 공유하지 않는것도 영-미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이다.유럽의 신속대응군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위협할 것이라는 미국의우려에 대해 블레어 총리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영국으로서는 미국보다는 신속대응군을 추진하려는 유럽의 입장을대변할 수 밖에 없는 입장 때문이다. 한편 최근 독일과 프랑스의 공방으로 열기를 더해가는 유럽의 정치적 통합 논의에 대한 영국의 입장은 블레어 총리의재집권으로 변화가 없을 전망이다.블레어 총리는 개별 국가의 역할을 강조,EU는 각료위원회를 통해 연간 의제를 마련하는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블레어는 누구.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노동당 창당 100년만에 처음으로연속 집권 역사를 달성한 성공한 정치가로 남게됐다. 지난 97년 44세의 나이에 영국 총리에 오른 그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국제정치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젊은 지도자로 부각됐다.94년 노동당 당수가 된 그는 ‘신노동당’ 기치 아래 중산층 끌어안기에 나서는 동시에 내부 개혁을 통해 극좌로 흐르던 노동당을 중앙무대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집권 이후 사회정의와 시장경제를 결합시킨 ‘제3의 길’을 표방,인기를 끌었었다. 탁월한 표현능력과 중산층 유권자들의 요구를 정확하게 꿰뚫는 정치감각,강력한 조직 장악력은 그의 최대 장점으로 평가된다.젊고 지적이며 깊은 기독교 신앙심에 가정적 아버지상까지 갖춰 TV시대에 더할 나위없는 정치가상이라는 평을듣고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대외 이미지에 신경을 쓴다는 혹평도 끊이지 않고 있다.보수당으로부터 정책의 실질적 내용과실행보다 어떻게 언론에서 다뤄질 지,겉모양에만 신경쓴다는 비판을 받았을 정도다.영국 언론들도 블레어 총리에게 이제는 보건·교육·교통 등 공공서비스 개선을 위한 개혁의 실천을 강력 요구하고 있다. 올해 48세인 블레어 총리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중산층가정에 태어났다.에든버러의 명문 사립학교인 피츠칼리지를졸업한 뒤 옥스퍼드대학에 진학했다.그곳에서 머리를 장발로 기르고 ‘어글리 루머스(추한 소문)’라는 보컬그룹에서 기타 연주를 하기도 했다.졸업후 변호사로 일하다 83년 처음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당내 중도개혁파 기수로 자리잡았다.94년 존 스미스 노동당 당수 사망으로 최연소 당수직에 올랐다.80년 좌익운동가 집안 출신의 변호사인 셰리 부스와 결혼,3남 1녀를 두고 있다. 김균미기자 kmkim@
  • ‘네팔 왕가 몰살’ 음모설 증폭

    지난 1일 밤 발생한 네팔 국왕 일가 집단학살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폭력시위가 격화하면서 5일 이틀째 통금령이 내려진 가운데 왕실내부 쿠데타,외세 개입 등 온갖 음모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군주제에 반대하는 네팔내좌익반군및 정부 관료 연루설과 힌두교 왕정을 반대하는 인도 개입설 등 각종 음모론 가운데 가장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은 새 국왕에 취임한 갸넨드라 부자(父子)에 의한 왕실 쿠데다설. 왕위계승 순위에서 밀려있던 갸넨드라가 국민적 신망이 높은 이튼칼리지 출신 엘리트인 조카 디펜드라 왕세자를 ‘미치광이’패륜아로 몰면서 권력을 찬탈했다는 이야기다.세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현대판 추리다. 갸넨드라는 디펜드라 왕세자가 사망한 뒤 4일 왕위에 올랐지만 대관식장은 ‘썰렁함’그 자체였다. 당초 왕실 고위 관리들은 디펜드라 왕자가 가족들의 결혼반대에 격분,만취상태에서 부왕 등 왕실 일가에 총을 겨눠몰살시키고 자신도 자살했다고 밝혔다.그러나 디펜드라는사건 몇 시간 전 정부 관리들과 담소하며 스포츠경기상황을 점검,‘멀쩡’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사건 당일 왕실 만찬에 갸넨드라 신임 국왕과 아들인파라스 샤 왕자만 불참한 것도 의혹이다.만취 상태인 디펜드라가 어떻게 정확히 목표물을 명중시킬수 있었는지,아무제지도 받지 않고 디펜드라 왕자 혼자 10여명을 죽일 수 있었는지,왜 왕가 직계 가족만 죽고 왕실 다른 직원들은 안죽었는지 등도 수수께끼다.병원에 실려간 디펜드라의 총상이 등뒤에 있었으며 이는 디펜드라 역시 살해 대상이었다는추정이 돌고 있다. 네팔 언론들은 갸넨드라의 아들 파라스 샤 왕자도 공모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파라스는 지난해 가을 교통사고로 네팔의 인기 대중가수를 죽였다는 의혹과 함께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있는 인물로 부자가 함께 권력찬탈을 꾀했다는 추측이다. 디펜드라의 신붓감 데브야니 라나가 현재 모습을 감춘 것도 신상의 위협 때문이라는 시각도 적지않다.비극의 단초를제공한 여인으로 당초 알려졌으나 사실은 음모속에 죽어간연인의 비보를 숨어서 들어야만 했던 비극의 주인공 ‘오필리아’라는 것이다. 갸넨드라 신임 국왕은 4일 TV 성명에서 “케샤브 브라사드우프댜야 법원장이 지휘하는 조사위원회가 참극이 빚어지게 된 배경을 조사할 것”이라며 사흘안에 사건 진상 규명을 약속했지만 네팔 국민들을 납득시킬지는 의문이다. 김수정기자 crystal@
  • [대한포럼] 경제단체가 운동단체인가

    ‘욕하다 닮는다’던가.요즘 대한상공회의소와 전경련 등경제단체들의 행동은 그들이 비판해오던 과거 재야 운동권단체나 노조의 행동을 어찌 그리도 빼닮았는지 신기할 정도다.걸핏하면 경제5단체장들이 우르르 몰려 합동 간담회를갖는 풍경이며 ‘시국선언’과 ‘성명문’을 발표하는 것도그렇다. 뒤늦게 철회했지만 엊그제 전경련이 벌이려던 집단소송제 반대 2만명 서명운동도 운동권에서 한 수 배운 듯하다. 다만 ‘재계’로 불리는 경제단체들의 파워는 운동권단체나 노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다.단체장들이 밥 한끼 먹으면서 회동하고 ‘말씀 한마디’하거나 전경련의 한임원이 ‘서명운동’운운하면 주요 뉴스로 취급된다.그러면정부가 총액출자한도제 등 주요 정책의 틀을 바꿔주고 규제도 풀어준다.세계 어느 나라 경제단체들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모이고 국내 어느 조직의 임원이 장관만큼 센 말발을갖고 있을까,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전경련 산하 한 연구원장 말대로 “이미 재벌공화국인데재벌을 모두 떨어버리고 갈 수는 없다”는 국민적 인식때문일까,재벌 권력이 이미 정부권력을 능가한 것일까,아니면재계의 별 것아닌 행사에 여론이 놀아난 것일까.물론 경제단체들이 새삼 운동역량(?)을 강화하고 과시해야 할 이유는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껄끄러운 정부정책과 노조의 6월 총파업 등은 기업 대응이 필요한 사안일 것이다.여기에다 모경제단체 유관 연구원장이 지적하듯 ‘사회 전체가 좌익으로 가는 것같은’과잉우려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자.먼저 6월 총파업과 관련한 ‘현시국에 대한 경제계 성명문’이 과연 ‘적격자’들이 발표한 것일까.노사문제 ‘전공’은 원래 한국경영자총협회다. 대기업과 일부 중견·중소기업 등 4,000개 업체를 대표하는경총은 노사문제에 골치아파하는 기업들을 대변해 노조에정면 대항하기 위해 출범했다.반면 전경련은 재벌 소유주들의 친목단체다.무역협회는 삼성물산 등 종합상사나 오퍼상등이 회원이지만 절대다수의 이들 무역업체들은 노사문제가적어 경총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따라서 적어도 전경련과무역협회 등의 두 단체가 노사 관련 성명문에 참여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경제단체들이 월권시비를 일으키는 것은 또 오지랖이 너무 넓은 데 있다.경제단체들은 작년 총선전 재계에부정적인 선거후보자들의 낙선운동을 펼치면서 정치활동에나섰다.작년말에는 ‘현 시국에 대한 경제계 선언’을 통해▲경제회생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고 ▲정쟁을 중단하며▲노동법 개정을 중단할 것 등을 주장했다.여기에다 최근재벌정책 변경과 규제완화를 요구했으며 노조 총파업을 비판하는 성명문을 발표했다.외국인들에게 한국은 경제단체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서구 역사에 있던 극우주의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라는 인상을 줄 정도이다. ‘노조가 강경대응하니까 우리도…’하는 식의 재계 인식도 문제다.흑자·적자 기업과 국내·외국 투자기업이 혼재된 산업계에서 경총과 노조가 벌이는 전국적인 단위의 임금협상과 대립은 별 의미가 없다. 회사 사정에 따른 임금결정과 연봉제가 우선 고려사항이기 때문이다.먼저 ‘힘있는’재계가 경총을 해체하면 노조는 대항 파트너를 잃어 노사대립이 완화될지 모른다. 사실 경제단체 숫자는 너무 많아 줄이거나 통합해야 한다. 현대자동차는 자동차공업협회와 대한상공회의소,경총에 ,그리고 그 오너는 전경련에 각각 연회비를 낸다.이런 ‘준조세’를 임금인상에 인색한 기업들이 왜 적극 깎으려 들지않는가.정부가 수십년간 외면해온 복지를 조금 강화하고 재벌을 규제했다고 ‘좌경’운운하지만 우리가 더 경계할 것은 경제단체들의 과잉행동과 이들에 의한 지나친 우익화 경향이다.5공 정권때 한 정부인사가 독일역사를 들어 “사회가 일정 단계에 이르면 금력이 공권력을 짓밟고 올라서려는데 이를 반드시 눌러야 한다”고 주장한 말이 자꾸 생각나는 6월이다. 이상일 논설위원 bruce@
  • 페루대통령 톨레도 원주민출신 첫 당선

    [리마 외신종합] 페루 선거사상 처음으로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다. 3일(현지시간) 실시된 페루 대선 결선투표에서 ‘페루의 가능성(페루 파서블)’의 알레한드로 톨레도(55)가 전직 대통령인 좌익계 아메리카인민혁명동맹(APRA)의 알란 가르시아(52) 후보를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임기 5년의 새 대통령에 당선됐다. 가르시아는 전체 투표의 70%가 개표된 가운데 전국에 생중계된 연설에서 톨레도 후보의 승리를 인정,이번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의 승리를 확인했다면서 민주적 선거에서 승리한톨레도 후보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말했다.
  • 네팔 참사 음모설 ‘모락모락’

    지난 1일 밤 네팔 왕궁 만찬석상에서 발생한 총격사건으로뇌사상태에 빠졌던 디펜드라(29) 국왕이 4일 오전 사망했다. 왕실 고문기관인 국가평의회는 디펜드라 국왕 사망 직후 긴급회의를 열고 국왕의 섭정인 갸넨드라(54) 왕자를 새 국왕에 추대했다.갸넨드라 신임 국왕은 이번 총격사건으로 숨진비렌드라 전 국왕(55)의 동생이다. ●음모설 모락모락=이번 네팔 왕궁의 참상을 둘러싸고 음모설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우선 디펜드라 국왕이 진짜 범인일까 하는 대목이다.UPI통신은 자결한 것으로 알려진 디펜드라가 사실은 뒤에서 총을맞았다는 소문이 수도 카트만두 전역에 퍼져있다고 보도했다.특히 사건 직후 아무리 왕세자라고 해도 아버지인 국왕을죽이고 자신은 뇌사상태에 빠진 그를 국가평의회가 국왕에추대한 것도 석연치 않다.비렌드라 전 국왕 등 이번 총격사건에서 사망한 왕족 8명의 시신을 사건 직후인 2일 오전 서둘러 화장한 것에도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사건 당일 대부분의 왕족이 왕실 만찬에 참석했는데 권력을 쥐게 된 갸넨드라 국왕과 그의 아들 파라스가 불참한 것에대해서도 의혹이 일고 있다.갸넨드라 국왕은 이날 국영 라디오를 통해 이번 참사가 “비극적 돌발사고”라고만 논평했다. 네팔인 대부분은 영국의 명문학교에서 유학한 젊은 엘리트왕세자가 갑자기 부모·형제를 모두 죽였다고는 믿지 않는분위기다.네팔의 좌익 반군은 이번 참극이 심각한 ‘정치 음모’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위 확산=왕족 몰살에 대한 음모설이 퍼지고 있는 가운데 4일 수천명의 군중들이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시위를 벌였다.신임 국왕의 대관식 직후 수천명의 시위대가왕궁까지 진출,경찰과 충돌해 사상자가 발생했다.시위대 일부는 ‘갸넨드라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시위가 확산되면서 카트만두 전역에는 통금령이 내려졌다. 문제는 갸넨드라 새 국왕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다.국왕은 왕자 시절 곱지못한 성품으로 대중의 인기를 잃었다.왕세자에 취임할 그의 아들 파라스 역시 자동차 사고로 사람을 죽이는 등 비행을 일삼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하기자 lark3@
  • 페루 대선 예상 뒤엎고 접전

    임기 5년의 대통령을 뽑는 페루 대선 결선투표가 3일(현지시간) 시작된 가운데 중도계 야당인 ‘페루 가능성’(페루파서블)의 알레한드로 톨레도(55)후보와 좌익계인 ‘아메리카인민혁명동맹’(APRA)의 알란 가르시아 후보(52)가 박빙의 승부를 겨룰 것으로 예상된다 페루의 독립여론조사기관인 ‘아포요’가 2일 3,000명의 유권자를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발표한 바에 따르면 톨레도 후보는 결선투표에서 총 43.4%의 득표율을 얻을 것으로 예상돼 38.2% 정도의득표가 점쳐지는 가르시아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앞설 것으로 분석됐다. 몇주 전만 해도 톨레도 후보는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20%이상의 우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가르시아 후보가 맹렬한 추격전을 벌이고 있어 결선투표가 예상외의 치열한 접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선거전문가들은 분석했다. 한편 유권자중 18% 가량은 두 후보 모두에게 투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리마(페루) 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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