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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의 자유와 방종/文石南 한국사회학회 회장(특별기고)

    최근 한 유력 언론사의 崔章集 교수에 대한 왜곡보도 문제로 지식인 사회가 매우 소란하다.처음 월간 조선은 崔교수의 한국전쟁 관련 논문들을 거론하면서 논문에서 사용된 몇가지 개념과 문장을 의도적으로 편집하여 마치 崔교수가 한국의 국가적 정통성을 부인한 좌익 지식인인 것처럼 주장하였다.崔교수 본인의 해명과 한국정치학회의 성명,그리고 몇몇 비판적인 여론에 직면하자 조선일보는 한발 물러서서 崔교수 문제는 학문의 자유 문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이라는 공인이기 때문에 언론에서 당연히 검증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란 권력이 언론에 의해 감시되고,동시에 언론은 시민들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는 사회이다.언론이 공인을 검증할 권리가 있듯이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공기인 언론을 검증할 권리는 시민사회에 있다.언론의 자유는 철저히 보장되어야 하지만,동시에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종과 횡포를 즐기는 언론이 있다면 이것은 시민의 이름으로 규탄되어야 한다. 오늘날처럼 언론기관이 실질적인 권력기관이 되어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시대에는 시민의 언론 감시가 언론의 권력에 대한 감시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되었다.언론권력은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보다 더 은밀한 방식으로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시민들의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하는 왜곡보도를 자주 행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번 조선일보의 崔교수에 대한 보도가 언론의 자유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의 방종과 횡포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지난 수십년간의 권위주의시대에 우리 언론은 권력과의 유착관계 속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러 왔고,특히 조선일보는 정치권력의 재생산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다.필자는 그동안 조선일보가 한국사회 발전에 기여한 측면들도 가볍게 여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적어도 이번의 왜곡보도 사태는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지금 우리는 IMF사태를 극복하고,21세기의 경쟁력을 갖춘 사회로 거듭나기 위하여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개혁을 한창 진행하고 있다.그러나 거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분야가 언론분야이다.필자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언론개혁의 핵심은 흔히 생각하듯이 효율적 경영의 측면에서 행하는 구조조정의 문제가 아니라 수십년간 길들여져온 냉전적 시각과 안하무인으로 군림하는 습성들을 말끔하게 벗겨내는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민족언론을 자처해온 조선일보가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오히려 민족의 장기적 이익에 반하는 구시대적 발상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일부 수구세력의 기득권 유지를 옹호하는 것보다 탈냉전이라는 세계적 조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민족의 장래를 설계하려는 열린 자세가 아쉽다.
  • 獨 외무 피셔·伊 총리 딜레마/거리의 투사서 유럽정치권 核으로

    ◎피셔­고교 중퇴… 녹색당의 간판스타/딜레마­공산주의 이념 몸에 밴 독설가 거리의 혁명 전사 두 사람이 유럽 정치권의 핵으로 변신했다. 19일 독일 외무장관에 내정된 녹색당 하원 원내의장 요시카 피셔(50)와 로마노 프로디를 이어 이탈리아의 새 총리로 지명된 마시모 달레마 좌익민주당 당수(49).두 사람은 모두 이념이 주도하던 시절 극좌파 투쟁가로 활동한 전력의 소유자.두드러진 공통점은 자신들이 속한 당을 시대에 맞게 탈바꿈시켜 권력 중심무대에 옮겨놓았다는 점이다. ▷요시카 피셔◁ 세계 최초의 실험적 환경정당인 녹색당의 간판스타이자 3선 의원이다.학력은 고등학교 중퇴가 전부로 노동자시절 대학의 철학강좌를 도강했을 뿐이다. 60∼70년대 택시기사,노동자,서적 외판원 등을 전전하며 지하에서 무정부주의 극좌 혁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60년대 말 베트남전 반대 시위로 구속됐다.“폭력은 이념과 남자다움의 혼합체였다”고 회고. 81년 신생 녹색당에 입당,연방의원과 헤센주의 환경장관 등을 지냈다.3차례 결혼했으나 지금은 독신이다. ▷마시모 달레마◁ 공산주의 이념과 비밀정치가 몸에 밴 2선 의원.13살때 공산당 의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공산당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자 토글리아티에게 꽃다발을 증정하기도 했다. 만년 야당 신세이던 공산당의 이름을 베를린 장벽 붕괴후 좌익민주당으로 바꾸고 자유시장경제 이념을 수용했다. 무뚝뚝하고 독설을 내뱉는 스타일.피사대학 철학과 출신으로 60년대 말 가두시위의 단골 참석자.75년 공산주의청년동맹 책임자로 이름을 내기 시작,86년 당 서기국원,94년 당수직에 올랐다.
  • 송유관 잇단 폭발 540여명 사망

    ◎나이지리아­도둑이 구멍 뚫고 훔치려다 터져/콜롬비아­좌익 게릴라단체 테러공격 판명 【라고스(나이지리아)·보고타(콜롬비아) AFP AP 연합】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서 송유관이 폭발해 400명이 그자리에서 숨지고 수백명이 크게 다쳤다. 비슷한 시간 남미의 콜롬비아에서도 송유관 폭발사고로 45명이 죽고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나이지리아 라디오 방송은 18일 석유 중심지인 와리 부근에서 국영 석유회사의 송유관이 폭발해 400명의 주민들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불길은 부근 200여㎡를 초토화시켰다. 석유회사측은 석유 도둑들이 기름을 빼내려고 송유관에 구멍을 뚫다 불꽃이 튀어 폭발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에서는 최근 지하 무장단체들이 석유회사 시설을 몇차례 파괴했던 사례에 비추어 테러 단체들의 범행일 가능성도 있다. 콜롬비아에도 이날 송유관 폭발사고가 발생해 최소 45명이 불에 타 숨졌다. 사고는 수도 보고타에서 북서쪽으로 600㎞ 떨어진 마추카 마을에서 있었고 새벽시간이어서 피해가 컸다. 로디르고 료래다 국방장관은 “송유관 폭파는 콜롬비아 제2의 무장 반군세력인 민족해방군(ELN)소속 좌익 게릴라들의 소행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발표했다. 대원 5,000명의 ELN은 콜롬비아 석유산업에 다국적 기업이 관여하는 것에 반대,지난 10년간 이와 유사한 테러를 자행해왔다.
  • 독재자의 말로/蔣正幸 논설위원(外言內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지난 73년부터 17년동안 남미 칠레를 통치하며 무자비한 납치·살해·고문을 자행한 악명 높은 군사독재자이다.90년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끄떡없이 지내고 있던 그가 신병치료차 런던에 갔다가 영국경찰에 체포돼 국제적 관심사가 되고있다. 82세 노독재자가 체포된 것은 독재시절 80여명의 스페인 국적인을 살해한 혐의로 스페인 사법당국의 요청에 따른 것.스페인의 요청으로 영국경찰이 체포한 피노체트의 신병은 앞으로 어떻게 처리될 것이며 그를 체포한 영국의 윤리외교와 유럽통합체의 사법공조 등이 당장 관심의 대상이다. 거기에다 막상 당사국인 칠레는 상원의원 신분인 피노체트의 외교관특권을 무시한 국제법 위반이라며 영국에 강력한 항의를 하고 그의 석방을 위해 특사까지 파견했다니 관심은 더할 수 밖에 없다.그의 체포에 대한 국제적인 반응도 ‘정의의 승리이자 독재자들에 대한 경고’라는 환영과 함께 강대국의 횡포라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관심의 초점은 역시 늙은 철권 독재자의 말로가 어떻게 되느냐에 모이고 있다.73년 군참모총장으로 선거에 의한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집권한 피노체트가 장기집권을 위해 저지른 가혹한 인권탄압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악랄했다.그의 집권기간동안 3,000여명이 살해되고,흔적없이 사라진 실종자만도 1,000여명에 10만여명이 고문으로 불구자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좌익소탕을 명분으로 반체제인사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의회와 정당은 아예 없애버렸다.피노체트의 칠레는 공포가 휩쓴 암흑시대의 대명사였다. 이처럼 악명높은 피노체트였지만 90년 그가 물러나고 민정으로 복귀한 칠레정부도 막상 그를 어쩌지 못했다.그가 군 총사령관직에 그대로 머물며 권력을 행사했고 면책특권을 가진 종신 상원의원 신분을 갖는등 하야 이후에 철저히 대비했기 때문이다.그런 피노체트를 영국이 정의의 이름으로 체포한 것이다. 피노체트의 신병이 어떻게 처리되든 그의 체포로 분명해진 것이 있다.독재자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고 말로는 비참하다는 사실이다.그동안 독재자들의 은신처로 알려졌던 유럽도 이제는 더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다. 이제 피노체트의 운명은 냉전 종식이후 이념보다는 인간의 생명과 인권을 더욱 존중하는 국제조류의 결정에 달려있다.체제나 이념,그 무엇보다 인권이 우선하는 21세기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사건이다.
  • 親日의 군상:9/시인 金東煥(정직한 역사 되찾기)

    ◎名詩 남긴 민족 시인 끝내 변절의 길로/“聖戰 나가 죽는것이 충성의 길” 전국 돌며 강연회/‘삼천리’ 등 각종 친일매체에 논설·평론 게재 앞장/1941년 임전대책 협의회 결성 주도… ‘황민화’ 실천/해방후 반민특위에 자수/6·25때 납북후 행방불명/3男 부친 행적 대신 사죄 “아하,無事히 건넜을까/이 한밤에 男便은/豆滿江을 탈없이 건넜을까?//저리 국경 강안을 경비하는/외투 쓴 검은 巡査가/왔다- 갔다-/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소곰실이 密輸出馬車를 띄워놓고/밤새가며 속태이는 젊은 아낙네/물레 젓던 손도 脈이 풀려서/파!하고 붓는 漁油등잔만 바라본다,/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국경의 밤’ 제1부 첫머리에서) 새벽마다/고요히 꿈길을 밟고와서/머리마테 찬물을 솨- 퍼붓고는/그만 가슴을 드듸면서 멀니 사라지는 北靑물장수.//물에 저즌 꿈이/北靑물장수를 부르면/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온 자최도 업시 다시 사라진다.//날마다 아츰마다 기대려지는/北靑물장수.(‘北靑물장수’ 전문)‘시인은 가도 시는 영원한가?’ 낯익은 두 편의 시를 보면서 우리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한 시인을 그리워하게 된다.파인(巴人) 金東煥(1901∼?,창씨명 白山靑樹).바로 그다.흔히 그를 ‘북국(北國)의 시인’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그가 함경북도 경성(鏡城)출신인데다 북방지역의 정서를 담은 시를 여럿 쓴 때문이다. ○한때 민족시인으로 각광 위에 첫번째 소개한 ‘국경의 밤’은 우리 국문학사에서 ‘최초의 장편 서사시’로 평가받고 있다.당시 북방지역 조선인들의 애환을 담은 이 시는 작품 저변에 흐르는 민족적인 색채로도 특별한 평가를 받고 있다.두번째 시 ‘북청(北靑)물장수’는 ‘북청’이란 지명을 유명하게 만들었다.당시 경성(京城·현 서울)에는 물장수를 하면서 아들이나 동생의 학비를 대는 북청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문단생활 초창기 토속적인 정서로 식민지하 조선인들의 삶과 애환을 노래한 ‘민족시인’ 김동환.일제말기 그의 변절은 이래서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김동환의 첫 출발은 신문기자였다.서울 중동중학교를 마치고 1921년 일본 동양(東洋)대학에 입학한 그는 23년 9월1일 도쿄 일대를 강타한 ‘관동(關東)대지진’이 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그는 1924년 고향 경성에서 발행되던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기자로 입사,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이 신문은 일본인이 발행하던 지방신문으로 일문판(日文版)과 조선문판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여기서 조선문판 기자로 있었다. 입사 한 달만에 그는 동아일보로 일자리를 옮겼는데 여기서도 1년을 채우지 못했다.당시 좌익기자들이 주도하던 파업에 참여했다가 결국은 그도 사표를 내고 동아일보를 떠나야만 했다.이후 시대일보·중외일보를 거쳐 27년 5월 조선일보에 자리를 잡았다.그의 5년 남짓한 신문기자 생활은 조선일보에서 막을 내렸다. 그는 신문기자보다는 시인·문필가로 더 유명하다.그의 문단활동은 신문기자 생활보다도 앞선다.24년 5월 梁柱東의 추천으로 ‘금성(金星)’지에 ‘적성(赤星)을 손가락질 하며’를 발표하면서 그는 문단에 데뷔하였다.대표작중의 하나인 ‘북청물장수’는 그가 동아일보 입사 1주일만(24년 10월13일)에 동아일보 지면에 발표한 것이다.첫 시집 ‘국경의 밤’은 이듬해 3월 한성도서(漢城圖書)에서 출간됐다.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그의 시작활동은 40년대 초반까지 계속됐다. 신문기자,시인에 이어 그를 상징하는 또 하나는 잡지 ‘삼천리(三千里)’발행인(사장).‘삼천리’는 1929년 6월에 창간하여 42년 1월까지 통권 152호를 발행한 월간 종합잡지.(42년 5월1일자부터 ‘대동아(大東亞)’로 바뀜) ○中日전쟁 계기 친일 선회 ‘삼천리’ 창간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 한토막이 있다.원래 그는 자본가는 아니었다.그가 이 잡지를 창간한 밑천은 ‘촌지’였다.당시 그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차장)로 총독부를 출입하고 있었다.그해 가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출입기자들에게 300원씩(액수에 대해선 일부 주장이 엇갈림) ‘촌지’를 돌렸는데 당시 쌀 한가마 13원 하던 시절이니 꽤 큰 돈이었다.대부분의 기자들은 ‘공돈’이라며 옷을 사 입거나 유흥비로 날렸으나 그는 이 돈을 ‘사업자금’으로 활용한 셈. 초창기 ‘삼천리’는 우리 국토를 상징하는 제호(題號)만큼이나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잡지였다.당대의 거물 문사·논객들이 단골필자로 참여하여 조선의 역사·문화와 당대의 시대상을 주요 테마로 다루곤 했다.‘삼천리’는 당시 민간신문사들이 발행하던 종합잡지 ‘신동아’‘조광(朝光)’ 등과 어깨를 겨룰만큼 인기있는 잡지였다. 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잡지 발행 이외에도 신문과 다른 잡지 기고를 통해 왕성한 문필활동을 했다.그러나 그에게도 이른바 ‘시국(時局)’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을 분수령으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전개되자 여타 문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 친일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시국은 점점 긴장하여 가고 장기전(長期戰)의 체제는 점점 굳어가고,그리하여 국민총동원의 추(秋) 다다랐도다.우리는 일체의 힘을 합하여,‘전쟁에 이깁시다.국책(國策)의 선(線)에 연(沿)하여 일체의 동작을 합시다’…” ○학병 참가 촉구 詩 발표 38년 5월 ‘삼천리’ 창간 10주년호 ‘편집후기’에서 그는 자신의 향후 친일노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다.같은 호 기명칼럼 ‘시평(時評)’(‘권문세가의 반성을 촉(促)함’)에서 그는 “…이제 제국은 아세아의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대지(對支)응징의 전쟁을 기(起)하고 있다.…자식과 조카(侄)를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군문(軍門)에 보내야할 것”이라며 지원병으로 나갈것을 독려하였다.그가 친일로 전향한 배경에는 ‘삼천리’의 재정난이 한 요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보다는 기득권 유지와 ‘대세순응주의’가 주된 요인이었다고 보여진다. 그의 친일시는 이듬해부터 노골적으로 시작된다.지원병을 찬양한 ‘1천병사(兵士)의 삼(森)’에서는 ‘저마다 폐하의 무궁한 성대(聖代)를 노래부르는 젊은 건아’로,‘고란사에서’라는 시에서는 ‘대화(大和)의 처녀가 사라져 가버린 뜰에 나홀로 서성거리며 어조영(御造營)의 망치소리에 천년 역사를 회상’하며 부여신궁(扶餘神宮) 근로봉사의 감격을 읊었다.(두 편 모두 ‘삼천리’39년12월호) 조선인 학병 동원이 시작되자 그는 ‘매일신보’에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43년 11월6일)이라는 시를 통해 ‘번듯하게 사는 길이란­ 제 목숨 나라에 바쳐,…군국(軍國)에 바칠 때일세 ’라며 ‘성전(聖戰)’에 나서라고 촉구하였다.이 밖에도 그는 각종 친일매체에 다수의 친일논설·평론 등을 남겼다. ○각종 단체서 背族행위 그의 대표적인 친일행적은 그가 주동이 돼 41년 8월25일 ‘임전대책협의회’를 발족시킨 일이다.이 단체는 임전(臨戰)체제하에서 자발적으로 황민화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조선내 친일인사를 총망라하여 구성한 단체로 발족 1개월 후인 9월에는 尹致昊 중심의 친일단체인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와 통합,‘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출발하였다.그는 이 단체의 핵심요원인 상무이사로 활동하였다.이 밖에도 그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대화동맹 위원 등을 지내면서 일제말기 친일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해방후 그는 자신의 친일행각을 뉘우치며 반민특위에 자수하였다.반민재판에서 공민권 정지 5년을선고받은 그는 6·25때 납북됐다.94년 그의 3남 英植(65)은 부친의 전기를 펴내면서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대신 사죄한 바 있다. “문인이 지켜야 할 절개에 두 가지가 있다.…믿던 부류의 사람까지 이(利)에 팔리고 지위에 움직임을 받아서 부끄러운 처신을 취한다면 대중이 그를 버릴 것이요,예술은 그를 타기(唾棄)할 것이다…”.아직 민족혼이 살아 숨쉬던 시절 그가 쓴 이 한 구절이 가슴을 치는 것은 왜일까. ◎金東煥­崔貞熙 ‘사랑의 행로’ ‘같이한 친일’/유부남­미망인의 동거/7년 산뒤 딸 둘 낳아/崔貞熙 일제말 친일 전향 巴人 金東煥과 여류소설가 崔貞熙(90년 작고)의 ‘불륜’은 한국문단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다.두 사람 모두 문인이자 일제말기 친일행적도 똑같이 남겼다. ‘시대일보’ 기자 시절인 1926년 원산(元山) 출신 신여성 申元惠(93년 작고)와 결혼한 파인은 이 사이에서 3남1녀를 두었다. 파인이 崔貞熙를 처음 만난 것은 1931년 초가을.중앙보육학교장 朴熙道(33인중 1인으로 나중에 친일로 변절함)의 취직부탁을 가지고 삼천리사를 찾아 온 崔貞熙를 파인은 당일로 ‘부인(婦人)기자’(여기자)로 채용하였다.당시 崔貞熙는 결혼한 몸이었다.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한 것은 43년초.이무렵 崔貞熙는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다.두 사람은 50년 파인이 납북될 때까지 7년간 동거하면서 두 딸을 낳았다.崔貞熙는 생전에 전 남편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파인의 호적에 올렸다가 申元惠측으로부터 피소된 적도 있다. 34년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사건’으로 9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崔貞熙.그러나 그 역시 결전부인대강연회(41년 12월27일)에 연사로 참여하는 등 일제말기 친일로 전향하였다.대표적 친일작품으로는 소설 ‘장미의 집’(‘대동아’42년 7월호),‘야국초(野菊抄)’(‘국민문학’42년 11월호),수필 ‘동아(東亞)의 새아침’(‘매일신보’42년 2월21일) 등이 있다.
  • 딩링/쭝청 지음(화제의 책)

    ◎중국 행동주의 작가 딩링 일대기 페미니즘 소설 ‘소피의 일기’와 프롤레타리아 소설 ‘태양은 쌍간허를 비추고’ 등의 작품을 남긴 중국의 행동주의작가 딩링(丁玲·1904∼1986)의 전기. 분열과 격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딩링의 삶과 문학세계를 통해 중국 현대문학사의 흐름을 살핀다. 딩링은 좌익작가인 남편 후예핀이 국민당에 의해 처형된 뒤 중국공산당에 입당,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다룬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1936년에는 공산당본부가 있던 옌안으로 가 혁명사업에 뛰어든다. 문화대혁명 기간 우파주의자로 지목받아 투옥된 딩링은 75년 석방될 때까지 18년 동안 육체노동과 구금생활을 한다. 그는 당원 자격을 회복한 뒤에는 문학지를 창간하는 등 활발한 문필활동을 해왔다. 김미란 옮김 다섯수레 8,500원
  • 故 朴斗鎭 시인의 삶과 문학/곧은 詩정신 지켜온 마지막 청록파

    세상의 온갖 유혹에도 한치의 흔들림 없이 올곧은 시정신을 지켜온 朴斗鎭 시인은 ‘청록파’의 마지막 증인으로 한국시사의 거대한 봉우리를 이뤄왔다. 보통학교만을 졸업한 뒤 독학으로 문학을 수업,일가를 이룬 朴시인은 자연을 노래한 시인이자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대쪽같은 선비정신을 보여준 ‘지사(志士)’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좌익계열에 맞서 김동리·조연현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문학외적으로도 ‘강기(剛氣)’를 드러냈다. 또 한일협정 당시에는 ‘한일협정,대학,대학교수’라는 정문일침의 시론을 써 대학사회의 무기력을 꾸짖었고, ‘오적사건 감정서’를 통해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법정에서 옹호하기도 했다. 朴시인의 시세계는 기독교적 이상과 윤리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런 만큼 시인의 시는 언제나 인간존재의 심연을 건드린다. 시인의 시혼(詩魂)은 늙바탕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74세 고령이던 90년 신작시집 ‘빙벽을 깬다’를 냈는가 하면 95년에는 신앙시집 ‘폭양에 무릎 꿇고’를내는 등 뜨거운 문학적 열정을 과시했다. 생전에 수석(壽石)에 심취했던 시인은 변함없는 ‘돌의 마음’을 간직한 채 하나님의 부름을 좇았다.
  • 음악/전통음악 성장 ‘주목할만’(한국문화 50년:9)

    ◎국악창작 활발­사물놀이 등 해외공연 성공 1948년 1월 정치·사회적 혼란속에서 조선오페라협회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서울 시공관 무대에 올렸다. 이로써 우리 오페라 역사는 시작됐다. 순수성악예술이 자리잡기도 전에 오페라가 먼저 공연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정부수립 직후엔 좌익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이 가해졌다. 좌익에 가담한 작곡가 김순남·이건우 등 많은 예술가들이 월북,국내 예술계는 우익계열에 의해 명맥이 유지됐다. 이런 와중에서 49년 대한음악가협회가 결성됐다. 50년 5월 일제시대 부민관이었던 국립극장에서는 한국 최초의 창작 오페라 ‘춘향전’(현제명 작곡)이 공연돼 장안의 화제가 됐다. 62년 4월에는 국립오페라단이 창단돼 68년 5월 민간 오페라단인 김자경 오페라단이 탄생하기까지 국립오페라단의 독주시대를 누렸다. 75년 2월에는 또 하나의 민간 오페라단인 서울오페라단이 창단돼 오페라단의 트리오시대가 열렸다. 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러시아동포 성악가 넬리리가 모스크바방송합창단과 함께 내한 공연을 가져 관심을 모았다. 94년 9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됐다. 그러나 윤이상은 정부측과의 마찰로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음악계에서는 95년을 전후해 조수미 장영주 정경화 정명훈 백건우 백혜선 홍혜경 신영옥 등 외국에 기반을 둔 한국출신 음악스타들이 크게 부상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외국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사람들이다. 이런 현실에서 정체성을 갖춘 음악영재 교육을 위해 탄생한 것이 93년 3월에 문을 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이다. 98년은 한국 오페라 50주년의 해로 풍성한 기념축제가 열리고 있다. 한편 전통음악은 51년 4월 국립국악원의 개원과 64년부터 시행된 무형문화재 지정을 계기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국악 50년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일은 60∼70년대의 김기수 백병동 강석희 등의 국악창작이다. 80∼90년대에는 전통음악의 대중화와 함께 해외공연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김덕수 사물놀이 패의 세계연주계에서의 성공은 특기할 만하다. 94년은 ‘국악의 해’와 ‘서울정도 600주년이 맞물려국악계가 전례없이 왕성하게 활동했다. 96년 10월엔 국악전용극장인 예악당의 개관됐다.
  • 대한민국 정체성(金三雄 칼럼)

    건국 50주년은 통사적 의미에서 대한민국 건국 77년이라야 옳다. 우리 헌법의 전문대로 “3·1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11일과 12일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 모인 애국지사들은 제 1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전문 10조의 임시헌장을 심의 통과시켰다. 헌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제11조)”,“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이라 규정하여 명실상부한 근대민주국가의 국체와 정체를 확립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11일 의정원의원 申錫雨의 동의가 가결되어 채택되었다. 이날 조선 고려 대한 등 여러가지가 논의되었으나 결국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어 이후 임정의 헌법강령 포고문 대일선전포고문 등 모든 문건이 대한민국으로 표기되고 1919년을 건국기원으로 삼았다. 그러나 망국시절의 정파들은 ‘대한’‘고려’‘조선’을 각 진영의 이념 성향에 따라 쓰게 되었다.대체로 보수적 우익측은 대한,좌익측은 조선,회색적 중간층은 고려라는 국호를 선호했다. 이른바 ‘좌(左)조선 우(右)대한,남(南)대한 북(北)조선’의 성향이고,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해방 직후 다시 국호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설정식은 ‘대한’을 사용해야 할 근거로 ①망국 직전까지 사용했던(대한제국) 국호이니 광복적 의미가 있고 ②대한은 3·1운동 이후에도 사용했던 것이니 그 법통을 계승하는 의미가 있으며 ③대한의 ‘한’은 삼한시대부터 국호의 표상으로서 역사적 유래가 있다고 지적했다. ○항일단체들 민주공화제 선호 그는 또 ‘조선’을 재사용할 근거로 ①조선은 단군시절부터 국호로 역사적 유래가 있고 ②조선은 우리 민족의 범칭적 용어로 어느때든지 사용할 수 있으며 ③조선은 우리 지역의 이름으로 널리 쓰는 말로 쓰기에 쉽고 편리하다고 해석했다. ‘고려’의 근거로는 ①대한과 조선에 구애됨이 없이 완전히 새로 출발하기 위해서 ②대한과 조선이 지금 대립하니 이를 발전적으로 해소하여 분열을 피하고 통일을 기하기위해서 ③외국에서 불리고 있는 코리아와 관련이 있는 용어라는 이유를 들었다.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의 1919년 7월 4일자 경성지방법원 예심조서에 따르면 “조선이 독립하면 어떠한 정체를 세울 생각이었는가”란 검사의 신문에 “민주정체로 할 생각이었다. 그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언명하여 민주정체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일제강점기동안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460개 가운데 민주공화제를 추구하는 민주지향형이 244개로 53%인데 비해 계급투쟁형 34%,왕정복고형 8%,군정추구형 5%로 나타났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이념적 성향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민주공화제의 의지는 임정으로 수렴되고 해방과 함께 건국의 이념으로 승계되었다. 8·15 건국은 최초로 실질적인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전제군주체제와 일제식민통치를 청산하고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후삼국통일 이래 다시 분열 학계는 여전히 8·15 해방이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타율적으로주어졌다는 외인론(外因論)과 한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이 해방의 필연성을 싹틔웠다는 내인론(內因論)으로 나뉘고 있다. 외인론이든 내인론이든 해방과 함께 이질적인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후삼국의 통일 이래 꼭 1012년만에 서로 대립 상쟁하는 분단국가를 만들어 어언 남북이 정권수립 50주년을 맞게 되었다. 비록 분단상태에서 맞은 건국 50주년이지만 적어도 3·1항쟁 이래 국혼(國魂)과 국맥(國脈)으로 지켜온 민주공화제를 바탕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제2건국’을 계기로 국난극복과 통일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하겠다.
  • 테러/종교·민족 갈등 탓/33% 이상 美 겨낭

    테러의 사전적 의미는‘폭력수단을 행사하여 상대를 위협하거나 공포에 빠뜨리게 하는 행위’다.우리는 테러에서 처참하고 무자비한 살상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테러는 우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인류의 공분을 자아낸다.발생 시점 또한 전혀 예측 불가능하다.뿐만 아니다.수단이 대단히 잔인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더라도 분개심을 느끼게 된다. 지구촌에서는 사실 이틀이 멀다하고 크고 작은 테러들이 저질러지고 있다. 최근 250명 가까운 인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5,000여명이 부상한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는 하나의 ‘큰 사건’에 불과하다. 인류가 제1의 공적으로 꼽고 있는 테러.과학기술의 발달로 더욱 치명적이고 대형화,다양화하고 있는 테러를 해부한다. ◎원인과 표적/美 세계 경찰국가 자임 분쟁 개입 많아/이슬람 무장세력 주축 각국서 저항 불러 ‘미국의 모든 것은 사악하다.따라서 우리 이슬람 무자헤딘(戰士)들은 사우디 등 성지(聖地)에 있는 미국의 존재들에 대해 ‘지하드(聖戰)’를 벌여야한다’ 이번 케냐 및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 폭탄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라딘이 올해 밝힌 회교 교령이다.비록 이슬람국가라도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면 용서할 수 없다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이는 무차별 테러에 대한 확신이다. 문명시대에 자행되는 반(反)인류적인 국제 테러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종교나 종파 갈등에서 민족·인종갈등,영토분쟁,식민지 반대 운동,반정(反政)투쟁 등이 우선 꼽히는 명분들이다. 그러나 국익이 우선시되는 국제사회에선 많은 경우 복합돼 테러로 이어진다.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한 영토를 놓고 분쟁을 벌이고 아랍권 국가내에서 이들 세력에 대한 지지 모습이 제각각인 것이 좋은 예다. 또 지난해 발생한 304건의 테러 가운데 3분의 1이상이 미국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도 한두가지 이유로 설명되지 않는다.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임,세계 곳곳에 개입하다 보니 원망을 사는 예도 잦다. 미국이 지목한 테러 국가는 리비아,수단,이라크,이란,쿠바,북한,아프카니스탄 등 7개국.냉전적 대립관계에 있는 국가는 북한과 쿠바뿐,나머지는 이슬람권 국가들이며 지난해 10월 발표한 30개 테러단체 역시 대부분 이슬람 무장세력이었다. 중동 정책에 개입,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이들 테러 국가들에 경제제재를 가한 것 등이 최근 빈발하는 대(對)미 테러의 요인이다. 유나 버머와 같은 반 문명주의자들,미국 오클라호마 연방건물 폭파범과 같은 자생적 극우주의자들도 최근들어 대형 테러 대열에 합류했다.최근에는 특별한 의도없이 대형 테러를 서슴지 않는 사례가 급속히 증가,인류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주요 발생 지역/유럽·중동 등 51개국 ‘핏빛 공포’/유럽­스페인 등에서 독립투쟁… 獨선 극우파 기승/중동­과격파 활동 가장 활발… 휴양지도 안심 못해 종교·인종·이념을 축으로 한 테러단체들은 줄잡아 51개국에서 살상을 일삼는다.피바람이 멈추지 않는 세계 곳곳의 테러 현황을 소개한다. ▷중동◁ 과격 회교근본주의 무장단체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중동에 주둔한 미군 및 공관과 이스라엘에 대항,회교원리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피빛 테러를 일삼고 있다.이스라엘에서는 94·95년 텔아비브,휴양지 나타니아에서 버스 폭탄테러가 발생했고 지난해엔 예루살렘 시장 폭탄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사우디 아라비아에선 96년 다란 미 군사기지 폭탄테러가,95년 리야드 미군사령부 차량폭탄가 발생했다. ▷유럽◁ 비교적 안정된 유럽 역시 테러 안전지대는 아니다.스페인의 분리독립 단체인 바스크 독립과 자유당(ETA)의 테러,독일의 우익단체 테러가 기승을 부린다.북아일랜드의 신페인당 무장단체 아일랜드 공화국군(IRA)과 신교도 얼스트의용군(UVF)도 주목받는 테러단체.아일랜드 오마시에서의 차량 폭탄테러는 세계를 경악케 하고 있다. 프랑스도 심각한 상태.95년 잇따른 지하철 폭탄테러로 수십명이 사망하는 등 크고 작은 사건에 시달리고 있다.94년 마르셰이유 공항에서 에어프랑스 납치사건이 유명하다. ▷아시아◁ 스리랑카,필리핀,아프카니스탄에서도 무차별 테러는 끊이질 않는다.회교무장학생단체 탈레반과 현 정부와의 내전이 끊이않는 아프카니스탄은 이란과의 접경지로중동 테러리스트 양성소 역할을 한다.스리랑카에선 자살 특공대 ‘검은 호랑이’의 테러와 박격포까지 동원된 엄청난 규모의 테러로 피냄새가 가시질 않는다.파키스탄도 이슬람 모하지르인의 무장단체(MQM)의 테러로 연평균 1,000명이 사망한다. ▷남미◁ 좌익게릴라들의 반 정부 유정(油井)폭탄 테러및 요인납치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콜롬비아에선 7일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대통령 취임에 앞서 일어난 테러에서만 250여명이 사망했다. ▷아프리카◁ 알제리 92년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래 이에 회교근본무장단체들과의 내전으로 6년 동안 8만명이 숨졌다.버스안에 시민들을 가둬놓고 불을 지르는 등 극악한 테러를 자행한다.부녀자 강간도 극에 달했다.,이집트 룩소르 관광지에서 외국인 버스 테러가 잇따르는 등 위험지대다. ◎어떤 수법 있나/납치·폭파서 이젠 사이버테러까지/日선 독가스 살포… 세균탄도 실용화 가능성 높아/러,핵무기 위험성 담보 美에 보안비 요구하기도/컴퓨터 바이러스로 순간에 도시 마비시킬수도 인터넷 등 과학 기술의 발달은 테러수단을 첨단화시켰다. 핵무기를 사용한 테러의 위험성이 대두된지는 이미 오래다.냉전이후 보안이 느슨해진 러시아의 핵무기와 원료는 국제 테러리스트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실제로 레베드 전 러시아국가안보위원회 서기는 미국에 이를 구실로 보안비용을 요구하기도 했다. 비행기 납치 및 폭파는 70년대부터 테러범들이 자주 써온 전형적인 수법. 이제는 세균 덩어리나 포탄을 장치한 소형 비행기를 이용하는 방법까지 모색하고 있다. 최근 미국 기술평가국은 지난 93년 백악관 앞마당에 돌진했던 것처럼 소형 비행기에 100㎏의 탄저병원균을 실어 날려 보낼 경우 300만명이 희생될 수 있다고 밝힌 바있다. 95년 일본 도쿄의 지하철에 독가스를 살포한 오움진리교가 인체에 치명적인 에볼라 바이러스를 배양하려 했다는 사실도 이러한 세균테러의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 가공할 위력을 과시하는 최첨단의 테러는 사이버 테러.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만으로 뉴욕시 전체를 암흑의 도시로 만들 수 있다. 선진국의 산업시설과 군사시설을 제어하는 컴퓨터에도착하기만 하면 그 기능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를 담은,이른바 전자우편 폭탄(E­mail bomb)을 한꺼번에 보내 전 도시를 일시에 마비시킨다.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은 이란,리비아,중국,러시아 등 일부 국가들이 사이버 테러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페루의 투팍아마루혁명운동(MRTA www.blythe.org)과 콜롬비아 인민해방군(ELN www.voces.org) 등 상당수 좌익 테러 단체들은 아예 인터넷에 웹사이트까지 만들어 교리,주장을 전파하며 때로는 모금운동 까지 벌이는 등 첨단 이기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무차별 파괴하고 처참한 결과를 유발하는 폭력성 테러는 고전적이지만 전시효과를 노린 테러범들에 의해 계속 사용될 것이 분명하다. ◎악명 높은 단체/하마스­가자지구 주무대… 지지자 수십만명/헤즈볼라­레바논 회교도 조직… 이란 지원 받아/GIA­알제리에 근거… 잔혹한 학살 일삼아 ▲하마스(이슬람 저항운동)=87년 이슬람 동포단의 팔레스티나 지부가 발전, 조직된 단체. 이스라엘 점령지 가자지구가 주 무대.수만명의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지도자이자 창립자는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62).반 이스라엘 테러혐의로 8년간 투옥됐다 지난해 10월 석방됐다. ▲헤즈볼라(신의 당)=레바논의 시아파 회교 근본주의자들.조직원은 5,000여명.79년 이란 회교혁명후 이란 지원을 받아 급성장했다.83년 베이루트의 미국 해병대 막사폭탄 테러와 85년 미국 TWA기 납치 사건을 저질렀다. ▲가마아 이슬라미아=이집트내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조직중 가장 과격한 단체.무바라크 대통령의 세계주의 노선을 반대하고 있다.지난해 룩소르 관광객 버스 테러를 자행했다. ▲타밀엘람 해방호랑이(LTTE)=스리랑카에서 타밀족의 분리 독립을 위해 83년 조직된 단체.무장이 가장 잘 돼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조직원 1만여명. 자살특공대 ‘검은 호랑이’는 악명이 높다.지도자는 빌루필라이 프란바카란(45). ▲콜롬비아 혁명무장군(FARC)=남미 최대 무장 테러조직.5,000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다.최근에도 전국 42곳에서 동시 다발적인 테러를 자행 230여명을 살해했다. ▲이슬람 무장그룹(GIA)=알제리에본거지를 둔 가장 잔인한 단체.92년 이슬람 구국전선(FIS)이 승리를 목전에 두고 군부정권에 의해 불법화되자 무장투쟁에 나섰다.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에 부녀자 강간까지 일삼는다.지도자는 28세의 안타르 주아브리.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멕시코 치아파스에 근거를 둔 게릴라.94년 조직돼 농민폭동을 주도하고 있다.지도자 마르코스는 프랑스어에 유창하며 인터넷을 통해 외부와 연락한다.큰키에 다갈색눈으로 파이프를 물고 다니는 지적인 분위기의 소유자.여성팬들도 많다는 소문이다.
  • 姜萬吉 교수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주제 발표

    ◎민족해방운동은 근대국가 수립 과정 일제식민지시대 좌우익의 통일전선운동은 해방공간에서는 평화통일운동으로 전환됐으며 분단시대의 통일운동은 ‘대등통일’이어야 한다고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가 7일 주장했다.姜교수는 이날 광복 53주년 및 독립기념관 개관 11주년 기념 제 12회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주제발표에서 이같이 주장하고 민족해방운동은 근대국가 수립 과정이었다고 말했다.다음은 주제발표 요약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에 강점당한 것은 알려진 대로 무력을 앞세운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서였다.그러나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조선이 사상적으로 성리학 유일사상 체제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됐기 때문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은 자본주의와 국민주권주의를 배우지 못해 일제 강점후 민족해방을 독자적으로 지도할 세력을 가질 수 없었다.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은 계속 추구됐다.좌익 노선은 3·1운동 전에도 일부 형성됐었으나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했다.3·1운동의 실패와 좌익의 본격적인 등장 이후 우익 세력은 일부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다.그러나 비타협적인 우익도 일정한 세력으로 존속됐다.주로 지주및 상층 자산계급은 타협주의 우익으로,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은 중소자산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됐다는 분석이 있으나 그 구분은 분명하지 않았다. ○노동자 농민 의식성장 우익의 일부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나아간 것은 노동자와 농민계급의 의식성장으로 민족내부의 계급적 갈등이 시작되고 일본이 적극적으로 유인했기 때문이었다. 우익의 일부 세력이 타협주의로 변하고 그 때문에 민족해방운동전선이 약화됨에 따라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방법론이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좌익과 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이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투쟁력을 강화하는 일이 더욱 절실해진 것이다.1920년대 중반에 좌익과 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에서 동시에 통일전선론이 일어난 것도 이때문이었다. ○협력과 분열 반복 좌우익은 시대상황에 따라 협력과 분열을 반복했으나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워진 1940년대 전반기에 접어들며 통일전선운동은 전체 민족해방운동으로 더욱 적극화됐다.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과 함께 38도선이 획정되고 남북에 분단국가가 성립되는 상황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 때문에 좌우익은 해방후 미·소 양군이 남북을 분할 점령한 조건에서도 통일된 단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을 계속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제 강점시대의 민족해방운동 과정 전체가 곧 자산계급과 노동계급의 지도층이 함께 참가한 근대민족국가 수립과정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것이 해방 후 민족분단의 위험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좌우익 정치세력이 함께 참가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외국자본주의 세력의 침입이후 한반도에는 근대민족국가 수립운동이 꾸준히 추구됐는 데 그 운동이 좌우익으로 나뉘었던 일제시대에는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통일전선운동으로 계속됐다.해방 후 민족분단시대에는 그 운동이 평화통일 그것도 대등 통일 운동으로 연결됐다고 할 수 있다.
  • 콜롬비아軍­반군 충돌/군경·민간인 200명 사망

    【보고타 AFP UPI 연합】 콜롬비아 정부군과 좌익 반군인 콜롬비아혁명군(FARC)간에 3일부터 동시다발적 무력충돌이 일어나 군인과 경찰,민간인 등 최소 200여명이 사망했다고 알프레도 살가도 장군이 4일 밝혔다. 살가도 장군은 이날 퇴임하는 에르네스토 삼페르 대통령및 국방·내무장관 등과 회의를 마치고 나온 뒤 “모두 42곳에서 반군의 기습으로 전투가 벌어져 군인과 민간인 80여명,반군 120여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길베르토 에체베리 국방장관은 이번 공세는 “4년 임기를 채우고 물러나는 삼페르 대통령에게 반군측이 보내는 ‘작별 메시지’이자 파스트라나 신임대통령에 대한 ‘환영 메시지’로 풀이된다”고 해석했다.
  • 北,對南 공작기구 확대 개편/안기부서 밝힌 北 테러정보

    ◎우회없이 직접침투 목표/최근 담당인물 대폭 교체/김정일이 실질지휘 분석 최근 북한은 대남(對南)군사정보 및 테러·납치 전담기구를 확대 개편하고 유사기구를 통폐합하는 등 대남 기구들을 재정비하고 있다. 국가안전기획부가 30일 발표한 ‘98년 전반기 국제테러정보’에 따르면 최근 북한은 옛 사회문화부를 대외연락부로 바꾸었다.대외연락부는 한국내 지하당 구축과 공작원 밀봉교육을 주로 맡는다.한국내 ‘주사파’와 같은 좌익세력을 포섭해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한국 사회를 교란시키는 일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대외정보조사부는 35호실로 변경됐다.35호실은 대외·대남 정보수집을 한다.해외간첩공작,국제·대남테러 공작을 하는 등 대남‘우회’침투 활동을 한다.해외를 통한 정보 수집과 테러 활동을 하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 테러 공작기구가 재정비된 것은 최근 金正日이 “우회없이 직접 대남 침투를 기본으로 하는 활동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한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북한이 지난 26일 제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통해 대남관련 인물들을 대폭 교체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남 담당 비서 金容淳이 모든 대남 공작기구를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金正日이 직접 지휘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 “좌익사범 不容” 이념 경계 명확히/朴 법무 특사 기준제시 안팎

    ◎“준법서약은 사상 떠나 국민 의무”/좌우익논쟁 따른 국론분열 차단 朴相千 법무부장관은 24일 준법서약서를 둘러싼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상전향서 대신 제출토록 한 ‘준법서약서’도 거부하는 미전향 장기수에게는 사면·복권·가석방 등 어떤 혜택도 주지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는 좌익사범에 대한 ‘정서적인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국민의 정부의 이념적인 선을 명확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준법서약서제도 도입방침을 발표한 이후 우익단체 등에서는 이념 혼란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반면 일부 재야단체에서는 준법서약서도 사상전향서나 다름없다면서 미전향 장기수의 ‘무조건’ 석방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몰고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같은 논란은 정부의 의도와 상관없이 국민의 정부를 ‘좌우익 논쟁’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서둘러 공안사범에 대한 선처기준을 공표한 것으로 해석된다. 朴 장관은 이날 “우리 국민이 우리 국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지적,재야의 요구를 일축했다.
  • 햇볕정책의 변증법/黃台淵 동국대 교수·정치학(서울광장)

    ‘국민의 정부’는 무력도발 불용의 대전제 위에서 정·경분리 원칙에 기반한 남북화해·협력으로 요약되는 ‘햇볕’정책을 천명,시행하고 있다.이에 대한 북측의 저항은 잠수정사건 및 간첩시신 발견 등으로 볼때 한동안 아주 강할 것으로 예상된다.따라서 북측을 전향시키려면 강력한 안보체제와 대단한 인내심,그리고 고탄력의 정치적 지혜가 필요하다. 이 전향을 촉진하는 지혜 가운데 하나는 햇볕을 ‘안쪽’의 미전향수 등 친북세력에게도 비추는 것이다.서독은 30년전 동방정책과 병행하여 내부정비 차원에서 인권 확장,공산당 합법화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이 조치는 동독 공산당을 전향시켜 동서해빙의 물꼬를 열었고,훗날 무혈승공의 평화통일을 가져왔다.1990년 동독 공산당은 통일 이후에도 공산당까지 포용하는 서독의 선진적 민주체제 하에서 충분히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까닭에 동독시민들의 통일시위에 대한 무력진압을 단념한 것이다. ○햇볕은 민주체제 강화 우리의 경우에도 미전향수 등 친북세력에 대해 ‘더 강한’ 민주논리로 대처해야 승공할 수 있지 않을까?‘안’을 향한 햇볕은 우리 민주체제를 강화하여 필경 대북 햇볕정책을 돕는 변증법적 상승효과를 낼수 있을 듯하다. 물론 전쟁을 겪은 우리의 처지에서는 공산당의 합법화를 거론할 수 없다.또한 ‘안’을 향한 햇볕은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가령 북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전쟁포로의 수와 인권상황의 파악작업,미전향수 및 간첩과의 맞교환과 프라이카우프(Freikauf)도 꺼리지 않는 귀환대책,천신만고 끝에 복귀한 노병들에 대한 특별예우법령 제정 등과 같은 일련의 국가정통성 강화정책이 ‘안쪽’의 햇볕정책을 수반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정통성 강화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우리 내부의 미전향수 등 친북세력에 대한 ‘강풍’정책의 재고는 필수적이다.북측은 이 ‘강풍’을 북에 대한 적대행위로 느껴 전쟁포로 등 친남(親南)세력의 탄압강화로 대응해 왔고 앞으로는 대북 햇볕정책을 방해할 것이다.특히 미전향수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남한에 억류된 ‘북측 전쟁포로’라는데 주목해야 하다. 따라서‘안’을 향한 햇볕은 대북정책에 대한 븍측의 호응을 끌어내고 친남세력의 처지를 개선하는 지렛대이다.이 점에서 양심수 대사면,전향서 폐지 등 정부의 전향적 방침은 중요한 ‘안쪽’의 햇볕조치이다.‘준법서약서’는 분단의 ‘한’에 대한 센서로 보고 시비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미전향수 등에 관용을 나아가 ‘안쪽’의 햇볕이 장차 더 따뜻해졌으면 싶다.이적단체 단순가담자는 관용으로 대하고 한총련의 경우에는 이들이 학생이라는 데 유의해야 한다.또 햇볕으로 기존 이적단체의 점진적 전향을 촉진해야 한다.이 햇볕은 머지않아 이들에 대한 ‘살균효과’를 가져 올 게다.물론 이 대명천지의 햇볕속에서도 스스로 음지로 기어드는 좌익 폭력세력은 논외의 사안이다. ‘안’을 향한 강풍정책은 민주주의를 삭감하는 역효과로 인해 친북세력을 더욱 극렬분자로 만든다.반대로 햇볕은 친북세력을 ‘살균’하여 ‘골동품화’한다.이것이 우리 민주주의를 선진화하고 승공통일을 앞당기는 지혜일 게다.이 ‘골동품화’정책은 훗날 통일의 길목에서 북측으로 하여금 무력저항을 단념하도록 유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엘비스와 오웰은 ‘밀고자’

    ◎좌파동료 연예인 동향 FBI에 낱낱이 보고 미국 ‘로큰 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냉전이 극을 달하던 70년대 미국 연방수사국(FBI)을 드나들며 동료 연예인들의 동향을 밀고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는 FBI가 정보 공개법에 따라 지난해 7월부터 취급 기한이 지난 1만6,000페이지에 달하는 파일을 인터넷에 올려놓으면서 드러난 사실이다. 파일중 당시 FBI직원 M.A 존스씨가 남겨놓은 비망록은 엘비스의 당시 행적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엘비스는 경쟁자인 비틀스의 존 레넌 등이 신좌익단체에 기부금을 준 경위 등을 낱낱히 고해 친 것이다. ◎구소 동조 유명인 명단/영 외무부에 수시 제공 【런던 AP 연합】 작가 조지 오웰이 영국 정부를 위한 ‘제보자’역을 한 증거를 담은 공산당 비밀동조자들’이라는 명단이 다음 주중 그의 작품집의 일부로 처음 공개된다.‘1984년’의 저자인 오웰은 2년전 영국 정부 문서 공개시 ‘잠재적 소련 동조자들’에 대한 정보를 영국 외무부에 제공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일간 데일리 텔리그래프의 23일 보도에 따르면 명단에는 유명인사와 무명인사 130여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시인 스티븐 스펜더,배우 찰리 채플린 등 좌파 인사들도 포함돼 있다.
  • 느낌 극락같은·천년의 수인/개성강한 연출자의 두 무대

    ◎느낌 극락같은­불상 코러스 연출로 원작 난해성 줄여/천년의 수인­재미 곁들여 비틀린 한국현대사 조명 연극 ‘느낌,극락같은’과 ‘천년의 수인’.공통점이라야 대표적 전업 극작가 신작이다,6월14일 끝난다는 등이 고작이어 뵌다.하지만 보고 나면 둘다 연출의 개성이 그 정도의 동굴을 파냈다는 걸 수긍하게 된다.정체성 모를 평면 무대가 난무하는데 연출자 나름의 자장과 힘을 느끼게 하는 공간을 만나는 건 기쁨이 아닐 수 없다.안겨 볼 만한 깊이와 그늘을 거느린 동굴인 건분명하되 막다른 골목,절벽은 없는지 발밑도 살펴보자면. 이강백씨 신작 ‘느낌,극락같은’은 우선 연출자 이윤택의 ‘탈각’ 몸짓이 진지하다.천성이 화려하고 공격적인 연출자는 불교가 형식이냐,내용이냐 설왕설래하는 고전적 대본을 받아놓고 한호흡 졸라맨 것 같다.불상 코러스는 생각보다 요란스럽지 않게 희곡의 굳은 반죽을 무르게 하는 일등공신이 됐다.뒤쪽까지 넓힌 무대를 시원스럽게 써 공백만 보면 채우고자 하던 기질을 억제한 티도 역력했다. 문제는 희곡.이강백작품의 관념성이야 고유 세계라 치더라도 신작이 그의 연대기에서 뚜렷한 발전으로 뵈지 않는다.소재만 불교로 옮아갔을 뿐.예를 들어보자.형식보다 부처 마음이 중요하다고 돌부처를 만들며 떠도는 불상 제작자 서연.죽은 스승 함묘진은 그를 뒤쫓는 딸의 환상에 나타나 “돌부처 있는 길에서 못 만났거든 없는 길에서 기다려 보라”고,비워야만 찾아지는 삶의 비의를 은유한다.이는 방황 장면의 초현실적 정황에서 울림있는 상징으로 설득력 있다.그렇다면 이 대목.‘형식’파 동연과 형태니 마음이니 숱한 논쟁을 벌이다 집나간 서연이 오랜만에 돌아와 “사람사는 곳 돌아다녀 보니까 모든 것을 형태가 결정하더라”고 또 되뇐다.이 정도 되면 형태며 마음은 더이상 상징이 아니다.구호다.이런 날말들을 쏟아부으며 연출가에게 살을 붙이라는 건 너무 가혹한 것 아닐까. 게다가 연기.역사적 맥락이나 일상이라는 안전장치가 없는 은유적,우화적 작품에서 연기자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다.그는 서사 전달을 넘어 울림의 공간을 보여줘야 한다.사투리며 혀짧은 소리는 부수적이라고 접어두자.본질로만 따져도 젊은 연기자들은 한참 수련을 요한다.예술의전당 토월극장.580­1880. ‘천년의 수인’ 이전에 근엄한 표정의 한국현대사를 누가 감히 ‘개그’로 건드려 볼 생각을 했을까.연출가 오태석은 안두희,비전향 좌익수,80년 광주 진압병 등을 통해 한국현대사 고름의 진원지를 꿰뚫을 기도를 한다. 그런 류의 기도는 흔했다.그런데 방법이 전복적이다.총 한발에 평생을 저당잡혀버린 안두희 가족의 불운이,명령복종한 죄로 살인자가 돼버린 저격병의 광기가 드러나려 할 때마다 람보같은 상사가 이끄는 감시군이,노란 비옷차림의 간호사가 떼로 나타나 쇼를 벌이며 미꾸라지처럼 감정이입의 상황에서 관객을 빼간다.‘수인’들의 푸념과 초현실같은 코미디가 끝까지 엎치락뒤치락하는 연극은 일단 재미있다.그 숨가쁜 호흡이 때론 빠른 컷으로 돌아가는 컬트영화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연극에서 한국현대사 처지는 불운하다.현대사를 이리저리 비틀어 관객에게 낯설게 보이게 하자니 무얼 다시 봐야 하는가.안두희며 저격병이며 수인들도 따지고 보면 피해자이고 책임질 권력자가 따로 있다?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저처럼 역사에 잘못 발목잡히면 피보기 쉽다.그저 조용히 살아야지”하는 역사 허무주의와 상대주의에나 빠지게 만들 위험이 없는지.이 ‘조울증’ 연극은 재미로는 성공했지만 ‘현대사 다시보기’에 새롭게보탠 뭔가는 없어 뵌다.동숭아트센터.3673­4466.
  • 콜롬비아 교도소 피습/좌익 죄수 326명 탈옥

    ◎총격전 3시간… 6명 死傷 【보고타 AP 연합】 콜롬비아의 좌익 게릴라들이 24일 상오 이 나라 서남부의 포파얀의 한 교도소를 공격,3시간여 동안 총격전을 벌인 뒤 최소한 326명의 동료 죄수들을 탈옥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와중에 간수를 포함 3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했다고 콜롬비아 당국이 밝혔다. 현지의 세사르 네그레트 지사는 이날 방송에서 “다이너마이트와 중무기로 무장한 200여 게릴라들은 산 이시드로 교도소를 포위한 뒤 점거해 버렸으며 수백명의 죄수들이 포파얀 일대를 헤메는 등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밝혔다. 이날 교도소를 습격한 게릴라들은 콜롬비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대규모인 ‘콜롬비아혁명무장군’ 소속으로 이들중 1명과 죄수 2명은 게릴라와 교도소경비병들간의 총격전 및 수류탄 투척중에 숨졌으며 간수 2명과 죄수 1명이 부상했다. 또 총격전이 벌어지자 이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총 970명의 죄수들중 거의 3분의 1이 탈옥했으며 그중 47명은 군의 도움으로 재검거됐다고 당국이 밝혔다.
  • 좌익혁명·폭력시위 선동/‘국제사회주의’ 17명 구속

    ◎경찰청,이적표현물 등 2천여점 압수 시대 착오적인 좌익혁명을 꿈꾸며 폭력 시위와 불법 파업을 부추겨 온 이적단체 조직원들이 대거 적발됐다. 경찰청 보안국은 15일 노동자 혁명정부 수립을 목표로 총파업을 선전 선동하는 기관지를 제작 배포하고 각종 불법시위에 참가해 온 ‘국제사회주의자들’(IS) 중앙위원 李동수씨(27·가명) 등 조직원 17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이들의 사무실에서 ‘사회주의자의 행동지침’‘전쟁과 사회주의’등 이적 표현물과 컴퓨터 디스켓을 포함,1천여종 2천여점을 증거물로 압수했다. 李씨 등은 91년 11월 ‘국제사회주의자들’이라는 이적단체를 결성한 뒤 서울 시내 대학가 등지에서 ‘사회주의 노동자’ ‘선진 노동자’ 등의 이름으로 격주로 기관지를 제작하는 등 지금까지 5백30여종의 이적표현물을 제작 배포하거나 판매해 왔다. 특히 지난 1일 서울 종로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 현장에서 폭력시위와 총파업을 선전 선동하는 ‘지금은 총파업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노동계 및 대학가 집회 현장에 참가해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좌경화를 시도해왔다. 이들은 ‘사회주의 노동자 10월호’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는 이 나라 정부와 사장을 진심으로 미워하는 투사들”이라고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성격을 규정했다. 이와 함께 ‘조직 강령’에서 ‘아래로 부터의 노동자 권력’ ‘개혁이 아니라 혁명’을 강조하고 “노동자들의 대중투쟁으로서만 자본주의의 착취,억압 체제를 파괴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직의 단계별 목표’에서는 “조직원 수가 3천명을 넘으면 노동자 계급혁명 이론에 기반을 둔 혁신정당을 건설할 것”이라고 적었다.현재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조직원은 3백여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들이 신분위장을 위해 2∼3개의 가명과 음어로 된 통신연락망을 구축했으며 남녀 핵심 조직원들끼리 결혼,‘혁명부부조’로 활동해 왔다고 밝혔다.
  • 5·10 제헌국회총선 의미/徐仲錫 성균관대 교수·사학(특별기고)

    제헌국회총선거가 오는 10일로 50주년을 맞는다.1948년 5월10일 치러진 5·10선거는 분단을 고정화하였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을 가짐과 동시에 역사상 최초로 보통선거를 통하여 민주공화국을 탄생케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역사상 첫 보통선거 1947년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치열해짐에 따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이 어려워지자 그해 9월 미국은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에서 다룰 것을 제안하였다.그리하여 국제연합 총회에서는 11월14일 남북 총선거를 통한 한국정부 수립안과 가급적 조속히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미소 점령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하였다.그러나 예상한대로 소련과 북측은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이 38도선을 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국제연합 소총회에서는 1948년 2월26일 가능한 지역에서만의 선거 실시를 건의하여,미군정에 의하여 5월10일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5·10선거에는 각 정치세력의 폭넓은 참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한국은 그때까지 분단을 경험한 적이 없어 한반도에는 하나의 단일 민족국가만이 존재하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통일정부의 수립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좌익은 단선단정 반대운동을 격렬히 벌였다.金九 金奎植 등 민족주의자들은 남한만의 선거는 미소가 획정한 38도선을 국제적으로 합법화시키는 행위이고,따라서 남과 북에 들어서는 정부는 미소의 영향력 아래서 자주성을 갖기가 어렵고,참혹한 동족상잔을 초래할 수 있다고 하여,5·10선거를 반대하고,4월에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그러나 일부에서는 이 선거에 통일운동세력도 참가해 제헌국회에서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주장하였다. 曺奉岩과 지방의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은 부분적인 현상이었지만 이 선거에 입후보하였다.金九 金奎植같은 지도자들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기 때문에 해방이 분단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또 민족의 대의를 위해서도 통일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데 국제관계로 분단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이 선거에는 되도록 각 정치세력이 많이 참여하여새 정부에 대한 지지를 폭넓게 할 필요가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李承晩·한민당 세력은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출마하는 것에 대하여 민중은 그들의 정체와 야욕을 간파하여야 할 것이라고 선전하였다.그만큼 그들은 편협성 편파성이 강하여 자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였고 그것은 새 정부와 자유민주주의에 짙게 암영을 드리우는 것이었다. ○전체유권자 75% 투표 5·10선거에서는 만 21세 이상의 남녀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고,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친일파를 제외하고 25세 이상이면 피선거권이 있었다.선거는 소선거구제로 치러졌고,제헌국회였기 때문에 임기는 2년으로 제한하였다. 의원후보자는 선거인 명부 등록자 200인 이상의 서명 날인이 있는 추천장을 첨부하여야 했는데,이 제도는 李承晩이 출마한 동대문구에서 악용되었다.5·10선거에는 8백13만여명의 유권자중 7백84만여명이 선거인 명부에 등록하고,그중에 7백48만여명이 투표한 것으로 발표되었다.전체 유권자의 75%가 투표한 것이다.제주도의 두 지역에서는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하여 198명이 당선되었다.북측에서 선출할 의원 100명은 공석으로 놔두었다. 이 선거에서는 한민당이 미군정 시기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기 때문에 다수 의석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그러나 개표 결과 한민당 이름으로 나온 후보들은 불과 29명밖에 당선되지 못하였고,李承晩을 영도자로 한 독립촉성국민회의가 55석을 차지하였으며,무소속으로는 85명이 당선되었다.우리나라 선거는 이변이 적지 않은데,바로 첫 번째 선거가 예상을 뒤집은 것이었다. ○우리선거사상 첫 이변 5·10선거에서 시행된 보통선거에 대해서 그것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많은 정치학자들은 이 선거가 미국에 의하여 이식된 것이라고 말한다.선거도 민주주의도 모두다 이식된 것이라는 주장이다.그렇다면 이 선거가 보통선거가 아닌 제한선거로 치러질 수 있었을까.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이후 한국인은 다른 나라에 비하여는 놀랍게도 일찍부터 민주공화국을 세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일제침략기에 왕정복고를 생각한 사람은 극소수였다.또 공화국은 보통선거로 수립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독립운동세력한테는 일반적이었다.이미 상해임시정부가 만들어질 때부터 그것은 등장하였고 趙素昻의 삼균주의에서 정치의 평등이란 보통선거를 가리켰다.일제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은 처음에는 민주공화국을 상정하였다가 나중에는 인민공화국을 내세웠고,1930년대에는 소비에트 체제까지 구상하였다. 해방후의 혁명적 분위기에서 모든 정치세력은 당연히 보통선거를 실시할것을 주장하였다.이러한 분위기에서 보통선거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을 것이다.다만 李承晩·한민당세력은 나이 먹은 사람들일수록 보수적이고 봉건의식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권자의 연령을 높이려고 입법의원때부터 노력하였지만,그것도 성사될 수 없었다.따라서 한국인은 선거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독재자들의 지나친 권력욕때문에 선거가 요식행위나 치장물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듣게 된 것이다. ○소장파의원 발언 강화5·10선거 이후 제헌국회에서 소장파들의 발언이 강화된 것도 주목하여야할 것이다.정부수립 얼마후부터 ‘소장파 전성시대’라는 말을 듣게 되거니와,소장파의원들은 金九 金奎植과 입장을 같이하여 통일운동을 벌였고 친일파 처단을 올바로 하여 민족정기를 세우고자 하였다.그들은 농민위주의 농지개혁을 위하여 보수세력과 싸웠고,민주주의적인 지방자치법을 통과시켰다.그러나 제헌국회내 소장파 의원들은 金九 선생 암살이 있었던 시기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무력해졌다.이로써 의회민주주의는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1948년 5월31일 소집된 국회는 제헌국회라는 이름 그대로 헌법제정에 힘을 쏟았다.권력형태는 李承晩의 고집으로 하루밤 사이에 내각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이 헌법은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경제조항이 들어가 있는 것도 특색이다.한마디로 헌법자체는 서유럽의 그것에 별반 손색이 없었다. ○민중 우습게 알면 안돼 7월17일 헌법이 공포된후 제헌국회에서는 대통령에李承晩,부통령에 李時榮을 선출하였다.국회의장은 申翼熙,대법원장은 金炳魯가 되었다.8월15일 정부수립이 공포되었다.金九 金奎植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착잡한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는 6월4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지금 5·10선거는 두가지의 교훈을 주고있다.그것은 정치인들이 민중을 우습게 알거나 기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선거는 결코 말의 유희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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