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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시절 박정희의 모습은?/정영진씨 실록소설 전 3권 펴내

    한국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최고권력자로서 강렬한 빛과 짙은 그림자를 던졌던 박정희.그의 극적인 삶과 당대의 시대상을 그린 실록소설 ‘청년 박정희’(전3권,리브로)가 나왔다.지은이는 대구 10·1사건을 규명한 소설 ‘폭풍의 10월’의 저자로 잘 알려진 정영진씨.‘청년 박정희’는 집권이후보다는 청년기부터 집권전까지를 주로 다뤘다. 최근 정치·경제 여건이 급변하면서 일고 있는 ‘박정희 회고붐’과 관련,작가는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것 못지않게 터무니 없이 미화하거나 우상화하는 것 역시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라고 강조한다.“밝고 어두운 면을 가리지 않고 가치중립적인 입장에서 일관되게 박정희와 그의 시대,나아가 오늘의 시대를 재조명했다”는 게 작가가 밝히는 집필방향. ‘입지’‘야망’‘권모’ 등 3부작으로 된 이 소설은 가난과 열등감,식민지 청년의 비애와 좌절속에서 키워낸 권력에의 욕망과 그 성취 과정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작가는 청년시절의 박정희는 “특출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특이했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평가한다. 평균치 이상의 두뇌와 남다른 과묵,또래들보다 두툼한 력,나름대로의 뚝심 등이 그의 청년시절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대구사범시절 박정희는 일본인 교사와 조선인 교사로부터 동시에 감화를 받았지만 민족적 각성을 주도면밀하게 끌고나갈 만한 지적 성숙은 보여주지 못했다.하지만 일본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정신의 본원지인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 입학,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치면서 사무라이적 사생관에 투철한 일본군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길을 새로 모색하게 된 그는 좌익사상에 감염되지만 숙군 회오리 속에서 조직을 배신함으로써 살아남는다.휴전이후 그는 쿠데타로 권력의 정상에 오르겠다는 줄기찬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선후배 동료들를 부추기며 끊임없이 모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권력의지를 달성시켜 나갔다고 작가는 적고 있다.이 소설은 철저한 고증과 객관적자료,최초의 공개사진 등을 통해 인간 박정희를 복원해낸다.박정희의 전생애 혹은 그의 청년시절 전부가 신화화 내지 미화되는 감이 없지 않은 현 상황에서 이 책은 진정한 박정희 평가의 출발점이 될만하다.
  • 멕시코 원주민 시위 격화/치아파스지역 경찰 발포로 긴장 고조

    【오코싱고(멕시코) AFP 연합】 지난달 45명의 농민이 학살된 멕시코의 치아파스지역에서 경찰이 12일 항의 시위를 벌이던 인디언 군중에 발포,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한데 이어 이에 항의하는 인디언 주민의 시위가 13일 격화됨에 따라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사파시스타 좌익 반군을 지지하는 1천여명의 주민들은 이날 시위 군중에 발포한 경찰관들을 처벌하는 한편 이 지역에 대한 군의 수색작전을 중지하라고 촉구했으며 사파티스타 해방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 주민들도 인디언 시위 군중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번 사건은 인디언 주민 500여명이 지난 12일 치아파스 지역의 작은 도시 악테알에서 지난달 22일 45명의 농민이 대량학살된데 항의,돌을 던지면서 시위를 벌이자 진압에 나선 경찰이 시위자들을 향해 발포,25세 여성 1명이 사망하고 그의 어린 딸과 다른 남자 1명이 부상함으로써 촉발됐다.
  • 페루 전통요리/세계 무대 각광/잉카·인디언·스폐인요리 혼합

    ◎진귀한 재료·독특한 향이 특기/해산물 요리 ‘세비체’ 환상적 남미 페루의 전통 음식들이 세계 요리 무대에서 각광 을 받고 있다. 최근 미국 스위스 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의 유명 요리사들이 페루요리를 배우기 위해 수도 리마를 찾고 있으며 페루 전통요리법을 다룬 책들도 잇따라 출판되고 있다. 페루 음식은 안데스산맥에 번창했던 고대 잉카제국의 전통 요리법과 아마존 정글 인디언들의 요리법,그리고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의 요리법 등이 혼합된 형식.구전으로 전해오는 요리법을 페루 요리사들이 최근 몇년간 500여가지의 요리로 정리했다. 요리수업을 위해 리마에 온 로저 피아젯(스위스)씨는 “페루 음식의 환상적인 맛에 도취됐다”면서 페루음식을 프랑스·중국 음식과 함께 세계 3대 요리로 주저없이 꼽았다. 페루 음식이 세계 무대에 선보인 것은 90년대 초반부터. 최악을 달리던 경제가 호전되고 치열했던 정부군과 좌익 게릴라의 전쟁이 끝난 뒤 외국관광객들이 페루에 몰려들면서 페루 요리가 미식가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다.지난해 10월부터 한달간 미국 뉴욕 UN에서 개최된 페루 요리 축제에서는 하루 400여명이 페루 음식을 즐겼다.또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페루요리사들의 세계순회 요리전 역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페루 음식의 매력은 바로 다양한 자연생태에서 생산되는 재료에 있다.안데스산맥의 고산지대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조미료와 채소,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과일,바다의 생선 등이 그것이다. 최근 리마 시내에서 전통 페루음식점을 연 이사벨 알바레즈씨는 바다농어 등 해산물로 만든 대표적인 ‘세비치’말고도 특별식을 선보여 내외국인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코카 아이스크림’.재료는 마약인 코카인의 원료로 쓰이는 코카 잎.원래 잉카 원주민들이 즙을 내거나 차로 만들어 종교의식 음식으로 사용하던 것을 변형시켰다.
  • 새 발굴 자료와 증언으로 다시쓰는 현대사(대한민국 50년:1)

    ◎바람속에 밝힌 등불/1948년 8월15일 감격의 새아침 열리다/유엔 총선감시단 평양행 좌절되고/좌·우 이념대립속 ‘5·10선거’ 실시/해방 3년만에 반공정권 탄생/미 군정 정책 혼선으로 우익진영은 분열되고 북은 빨치산까지 양성/정부 권력구조 싸고 이승만·한민당 또 갈등/끝내 ‘대통령중심제’로 올해 1998년은 대한민국 정부를 선포한지 5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다.그 반세기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파란만장한 당대사다.그럼에도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했던 여러 공화국의 정치상황 때문에 가려진 부분을 다 들추어내지는 못했다.또 전통주의의 수정주의에 입각한 학계의 양극화 현상은 현대사가 더러 왜곡 기술되는 오류도 드러냈다.그래서 서울신문은 새로 발굴한 자료와 생존자의 증언으로 엮은 주간기획물 ‘대한민국 50년’을 연재키로 했다.이 시리즈는 우선 대한민국 50년 역사속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었다.이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다가오는 21세기 미래사를 발전적으로 이끄는 작업의 하나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새해가 밝았다.세밑 그믐날 잔뜩 찌푸렸던 하늘도 활짝 개었다.수은주는 영하 11도7분까지 내려가 기온은 쌀쌀했지만,날씨만큼은 쾌청했다. 우리 민족에게 새해 원단은 늘 각별한 것이었다.해방을 맞고나서 세번째 돌아온 새해는 더욱 그러했다. 전해인 1947년 11월14일 유엔 총회가 한국독립을 위한 계획안을 채택해 두었던 터라 고무적일 수 밖에 없었다.유엔총회의 한국독립 계획안은 1948년 3월31일까지 남북한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국회 및 정부를 조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1947년 봄부터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구상했다.미국의 대외정책문서(FRUS)에 나타난 이같은 구상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시사하는 것이었다.미·소의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한반도문제를 합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소련은 한반도문제의 유엔 이관을 처음부터 반대하고 나섰다.그 대신 1948년초까지 남북한 주둔 미·소병력을 동시에 철수,한국인들 스스로가 외부개입 없이 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의를 내놓았다. 소련의 제의는 명분상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당시 남북한 현실을 비교하면 남한쪽에는 위험한 것이었다.북한에는 이미 소련의 지원에 따라 사실상의 정부로 보아도 무방할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다.이와는 달리 남한에는 권한과 지지기반이 취약한 남조선 과도정부가 있기는 했다.그러나 미군정의 일관된 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우익 민족진영은 분열된 상태였고,북한의 조정을 받는 강한 공산세력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1948년 새해 첫날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큰 사건 하나를 딛고 넘어갔다.이날 경무부장 조병옥은 이른바 ‘인민해방군’사건을 서둘러 발표했다.그런 어수선한 판에 1월4일에는 38선을 경비하는 북한 보안대원들로부터 황해도 연백경찰서 장곡지서가 습격되었다.그리고 15일에는 개성경찰서 여현지서가 피습되는 가운데 남로당 출신으로 이루어진 야산대라는 이름의 빨치산이 전국에서 설쳤다.이들 야산대는 소규모 빨치산에 불과했다.그러나 북한은 대규모 게릴라전을 위해 이 해에 평남 강동학원을 차렸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유엔 감시아래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키로 한 유엔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이에따라 총선을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한위·UNTCOK)이 1월8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서울에서는 영등포공업지대 근로자들이 임금인상과 고용직 근로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간 날이었지만,시민들의 환영은 대단했다.이날 KPS메논 인도 대표와 오스트레일리아·시리아 등 3개국 대표가 먼저 도착한데 이어 캐나다·프랑스·필리핀·엘살바도르 대표가 29일까지 서울에 왔다.유엔한위 1진이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유엔한위가 북한에 한 발도 못 들여놓을 것이라는 김일성 발언이 나왔다.그 때만해도 의례히 해보는 상투어 정도로 여겼다.그런데 미군정연락장교편에 평양으로 보낸 유엔한위의 입북신청은 소련군사령 참모장에 의해 거절되었던 것이다. 소련의 거부로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다.유엔한위는 남한에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를 놓고 미군정과남한 정치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속회담을 열었다.우파에서는 남한 단독선거를 환영했으나 우익중에서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반대했다.그리고 김규식을 주축으로 한 중도파도 통일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에 섰다.좌익도 물론 반대했다. 유엔한위는 남한 단독선거가 유엔 결의와 부합되는지를 놓고 고심했다.그러다 이 문제를 유엔 소총회에 넘겼다.소총회는 2월19일 유엔한위의 접촉이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이라 우선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의 안을 받아들였다.투표결과는 미국 입장에 대한 찬성 31,반대 2,기권 11로 나타났다.유엔 소총회가 남한 단독선거쪽으로 손을 들어주자 유엔한위는 곧 바로선거준비에 들어갔다.그리고 정치권에서도 이승만 중심의 우익진영이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미군정은 우익진영과 협조하여 선거준비에 들어가는 한편 3월17일에는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발표했다.전통적인 민주선거원리에 입각한 이 선거법은 21살 이상의 남녀 모두를 유권자로 규정했다.이 선거법에 나타난 특이한 점은 일제에 빌붙어살았던 부일협력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 박탈이다.새 정부의 민족정통성 확립을 위한 것이었는데,일제 청산은 뒷날 이승만정권에 의해 퇴색되었다.선거일은 처음 5월9일로 정했으나 일요일 투표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음날인 10일로 바꾸었다. 단독선거를 반대하면서 남북협상에 운명을 걸고 평양으로 떠났던 김구와 김규식이 5월5일 서울로 돌아왔다.5·10선거를 방해하려는 북한 의도에 말려들었을 뿐 남북협상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5·10선거 역시 예상했던 대로 평온하지 못한 분위기속에 진행되었다. 총선거에는 대한독립촉성회,한민당,대동청년단 말고도 45개 군소정당이 나왔다.특히 무소속이 많아 전체 당선자 198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85명이 무소속이었다.이어 대한독립촉성회가 55명,한민당이 29명,대동청년단이 12명,다른 군소정당과 사회단체가 19명의 국회의원을 냈다.이들이 바로 제헌의원인데,국회는 5월31일에 개원되었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에,신익희와 김동원을 부의장에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7월17일에 열렸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의 주장대로 대통령중심제를 권력구조로한 헌법을 통과시켰다.그리고 7월20일에는 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7월24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헌법 골격을 가지고 갈등을 빚었던 한민당과 또 격돌을 벌였다.이승만은 귀국 이후부터 자신을 추종하면서 대통령으로까지 밀어준 한민당을 각료 선임에서 소외시켰던 것이다.그래서 민국당에 이어 민주당으로 개편한 한민당의 뿌리는 1960년 4·19혁명기까지 이승만과 영원한 정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선포식은 8월15일 상오10시쯤 중앙청 광장에서 베풀었다.미군사령관 J R 하지 중장은 미군정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해방을 맞은지 꼭 3년만에 독립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극심한 혼란속에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자들과 군정의 갈등,공산주의 세력들과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극복하고 어렵사리 태어났다.그러나 제1공화국이라고도 말하는 내정체제하의 반공정권은 그 장래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로부터 50년,꼭 반세기를 맞은오늘 험란한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야당지도자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새 정부가 막 돛을 올릴 참이다.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이 걸어온 반세기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그 역사속에는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한 여러 단계의 공화국이 기록되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꺼질듯 다시 타올랐던 ‘민주화 불꽃’(하의도에서 북악까지:상)

    ◎망명·투옥 등 역경의 세월/‘40대 기수론’ 정계 새바람/71년대선 95만표차 석패/신군부에 사형언도 받아/3당합당에 92년 또 패배/‘적과의 동침’ 4수끝 집권 후광 김대중.그의 삶은 꺼질듯 하면서도 이내 다시 타오르는 촛불이자,얼은 눈밭에서도 꽃망울을 터뜨리는 인동초이기도 했다. 그의 40년 정치역정은 영과 욕,환희와 좌절이 교차한 한편의 드라마다.특히 유신의 장막이 드리워진 72년부터 6·29선언이 있은 87년까지는 납치와 망명·투옥·연금으로 점철된 가시밭 길의 연속이었다. 그의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그에 뒤따른 인고의 세월은 11차례나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는 것으로 국제사회에서 먼저 인정 받았고,이제 당당히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국민적인 평가를 받은 셈이다. 정치가로서 김대중의 이력은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그는 당초 좌우익이 망라됐던 건준의 주도권이 다툼끝에 좌익으로 넘어가자 탈퇴한다.그러나 평생 ‘색깔론’의 꼬리표가 따라붙는 뼈아픈 경력이 됐다.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눈을 돌린 것은 해운업으로 여유가 생긴 54년이다.정치지망생 김대중은 목포에서 민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이어 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와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도 거푸 쓴잔을 마셨다.그는 4.19혁명으로 다시 치러진 61년 5월 인제보선에서 처음 당선됐다.그러나 금배지는 커녕 사흘만에 5·16쿠데타가 나는 바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상실하고 만다.그는 군정 기간 동안 모두 3차례나 투옥되는 등 야당정치인으로 본격적인 고난을 겪기 시작했다.그러나 장면박사를 만나면서 민주당 신파의 맥을 잇는 계기가 된다. 그는 63년 6대 총선에서 훗날 정치적 고향이 된 목포에서 다시 출마해 당선되면서 부터 발군의 지략과 달변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6대 국회 초반 6개월동안 13차례나 본회의 발언을 했고,차관도입과 세제특혜·경제개발계획의 문제점 등을 날카롭게 추궁,야당의 경제통으로 명성을 날렸다. 67년 7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된 그는 68년 5월 평생의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 된 김영삼과의 첫번째 대결인 원내총무경선에서 패한다.그러나 71년대선을 앞둔 신민당 대선후보 지명경선에서 2차투표 끝에 결국 김영삼을 꺾는 대역전을 엮어냈다.이때 김영삼·이철승과 함께 내걸었던 기치가 바로‘40대 기수론’이다. 김대중 후보는 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바람을 일으켰으나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게 95만표차로 석패하고 만다.‘투표에서 이기고,개표에서 진’ 이 선거는 그러나 혼쭐이 난 박정권이 그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된다.이때부터 5년반 동안의 투옥과 3년여의 망명,6년반의 가택연금으로 대표되는 그의 험난한 정치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특히 71년말 교통사고로 위장한 살해기도를 간신히 모면했으나,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도쿄에 체류하던 73년 여름에는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수장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가택연금중이던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사면복권되어 정치일선에 복귀했지만 ‘5·17’을 주도한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그는 국제여론과 미국정부의 압력에 힘입어 사형에서 무기,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어 82년말 죽음의 그림자에서 또 한번 벗어나지만 그 ‘대가’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다.그는 그곳에서 2년2개월동안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했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고국의 민주화운동에 힘을 바쳐 국내에 있던 김영삼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한다.또 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신민당의 압승을 끌어내는 견인차가 됐다.그의 계속된 민주화운동은 87년 6월항쟁을 촉발시켰고,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과 함께 이민우의 신민당을 깨고 나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그러나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하게 된다.그러나 결과는 노태우·김영삼 후보에 이어 3등이었다.대권 재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평민당은 88년 4.26총선에서 ‘황색돌풍’에 힘입어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한다.그가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하지만 90년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입지가 다시 좁아진 결과 92년 14대 대선에 김영삼 후보에게 패해 세번째 도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오늘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평범한 시민이 되겠다’는 유명한 정계은퇴 선언은 이때 나온 것이다.그는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연구활동에 정진하다 93년 7월 귀국했다.그는 이후 순수한 연구단체를 표방한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는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연설원으로 정치일선에 재등장하면서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한다.9월5일에는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정치국민회를 창당,제1야당 총재로 정계전면에 공식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96년 4·11총선에서 전국구 14번의 배수진을 치고 내각제 개헌저지선인 100석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79석을 얻는데 그쳤다.‘야권분열의 책임자’라는 비난이 거세게 몰아닥쳤다. 40년 정치역정에서 최대 정적의 한사람이자 이념적 좌표가 다른 김종필이 동지가 된 것은 이때 부터다.그는 15대 국회개원과 함께 김종필이 이끄는 자민련과 공조체제를 구축하여 ‘DJ(김대중) 불가론’으로 대표되는 당내 이상기류를 잠재웠다.15대 대통령선거전이 본격화되자 김종필과는 혈맹의 관계로 발전한다.김대중을 두당의 대통령 단일후보로 하는 이른바 DJP연합이 그것이다. 김대중은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결국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었다. □김대중 당선자 연보 ▲생년월일=25년 12월3일 ▲출생지=전남 신안군 하의면 ▲44년=목포상업학교 졸업 ▲48∼50년=목포일보 사장 ▲51년=흥국해운 사장,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단장 ▲60년=민주당 대변인 ▲61년=5대 민의원 보궐선거 당선(강원·인제) ▲62년=이희호 여사와 결혼 ▲63년=6대의원(목포) ▲65년=민중당 대변인 ▲68년=신민당 정책위의장 ▲71년=7대 대선출마 ▲76∼78년=3·1민주구국선언사건 등 주도 및 투옥. ▲80년=사면복권(2월),5·18 내란음모 사형언도(9월) ▲81년=무기 감형,미국 망명 ▲85년=민추협 공동의장 ▲87년=평민당 창당,13대 대선출마 ▲91년=신민당 창당 ▲92년=14대 대선출마 및 정계은퇴 ▲93년=영국 출국 ▲94년=아태재단 설립 ▲95년=국민회의 창당 ▲97년=15대 대선출마 및 당선
  • 인니 쿠데타 음모설/수하르토 건강악화로

    【방콕 연합】 인도네시아 정부가 현 통화위기 극복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는 가운데 수하르토 대통령의 건강과 관련,군사 쿠데타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기 시작했다고 방콕의 영자지 네이션이 18일 자카르타발로 보도했다.쿠데타 풍문은 지난주 자카르타에서 유포되기 시작했으며 14일 싱가포르의 영자지 스트레이츠 타임스가 인도네시아에 쿠데타가 발발할 것이라는 추측이 널리 퍼지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기세를 올렸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그러나 타임스는 쿠데타 설의 상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은 채 다만 인도네시아군 정보사령관 자키 안와르 마카림 소장의 말을 인용,좌익 성향의 단체들이 그같은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비난한 것을 지적했다. 쿠데타 설은 군부가 지난주 두 차례의 군사훈련을 실시했고 수하르토 대통령이 건강문제 때문에 콸라룸푸르 아세안 정상회담 참석을 취소했다는 정부대변인의 발표가 있은 뒤부터 표면화됐다.
  • “안보체제 확립 앞장” 결의/자유민주민족회의

    자유민주민족회의는 15일 “건국호국세력들과 월남동포들은 건국정신으로 뭉쳐 간첩과 친북좌익세력을 뿌리뽑고 안보체제를 근본적으로 바로잡는데 앞장선다”고 밝혔다. 자유민주민족회의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또 “우리 민족진영 애국세력이 앞장서서 IMF와의 협약을 준수하여 자립경제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여 이 나라를 구출한다”고 말했다.
  • 30년 넘게 우익으로 철저위장/고영복은 누구인가

    ◎보수파학자로 분류… 학생운동 강력 비판/남북적 자문위원 활동 등 요직 두루 거쳐 61년부터 36년간 고정간첩으로 암약한 서울대 사회학과 고영복 명예교수(69)는 좌익사상과는 정반대 성향의 보수파 학자로 불려왔다. 경남 함양 출신인 고교수는 54년 서울대 사회학과,56년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전형적인 ‘국내파’ 교수로 분류된다.62년 이화여대 전임강사를 거쳐 66년부터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해 온 고교수는 71년 학국사회학회 회장,73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북한을 방문하는 등 ‘사상성’을 확실하게 검증받기도 했다. 고교수는 특히 81년 현대사회연구소 소장과 국무총리 정책자문위원,84년 보사부 사회보장심의위원을 지내면서 5공 정권의 이데올로기 전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다. 평소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고답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보수우익적인 노선을 견지해 왔다. 90년에는 퇴임에 대비,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사회문화연구소를 설립,제자들의 학문을 지원하며 사회문제 전반에 걸쳐 연구를 계속해 왔다. 지금까지 ‘사회학개론’ 등 22권의 저서와 1백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93년 서울대 교수직에서 물러나면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고 94년에는 문화정책개발원 초대 원장을 맡기도 했다. 8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3차례에 걸쳐 지병인 고혈압이 발병하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아 최근에는 동료 교수들이나 제자들과의 왕래가 뜸했다. 부인과의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 충돌/월터 라페버 저(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미의 대일 외교정책 허실 분석/양국 문화·사상 차이 고찰… 공동지향점도 시사 이 책은 지금까지의 미·일간의 역사적 관계를 지적하며 미국의 외교정책의 허실을 분석하고 있다.또 유독 일본에 대해서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원인을 진단하면서 21세기 중국의 부상을 앞두고 향후 대일본 외교정책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를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제시해주고 있다.뿌리깊은 두나라의 문화적·사상적 차이를 시대적 고찰을 통해 분석해 줌으로써 무역·통상등 양국 현안에 대한 개선방향과 함께 ‘불편한 동반자’관계를 뛰어넘는 공동의 외교지향점을 시사해주고자 하고 있다. ○21세기 중 부상 앞두고 미 코널대학의 외교역사학 교수인 저자 월터 라페버(Walter Lafeber)는 ‘충돌’(원제:THE CLASH)이란 제목의 이 책에서 1853년 일본이 서방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부터의 미·일 관계를 상세히 기술하면서 미국의 일본과의 관계는 순전히 일본의 ‘이익’만을 좇으려는 일본 특유의 속성때문에 일종의 ‘대립’선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지금의 미·일간의 무역전쟁도 이에 근거한 것이라고 못박고 있다. 저자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두가지의 이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하나는 미국은 다른 나라들을 원칙적인 방법으로 행동하도록 하기 위한 힘이고,다른 하나는 미국안보의 핵심적 요소를 보호해주는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미국의 대일 외교적 역사는 때때로 이러한 전제조건이 무너져 위험한 양상을 보여왔다고 지적하고 있다.미국이 일본에 비해 국력이 엄청날 때도 간혹 이러한 전제조건은 지켜지지 않았으며,미국의 막강한 국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방법으로 행동할 때가 많았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고 적고 있다. 미국은 지난 150년 가까이 일본에 자유무역의 가치를 존중할 것을 외쳤지만 일본은 자신에게 유익하고 편리할 때만 미국의 말을 들은 것이 일본의 관행이었다는 것이다.아직 일본의 국력이 미약할 때인 19세기 말 일본은 중국과의 무역을 개시하려는 미국의 정책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무역거래의 혜택을 뒤에서 만끽한 것은 오히려 일본이었다는 사실은 미국 정책의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비판하고 있다.힘이 강해졌을때인 20세기 초에는 미국을 제치고 중국대륙에 자신의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에 걸친 미·일간의 대립은 누가 중국의 잠재적 경제력을 선점하느냐에 있었던 것이라고 저자는 단언하고 있다.현재에도 이같은 현상은 계속돼 오고 있으며 중국을 둘러싼 두나라의 경쟁은 앞으로 아주 중요하고도 폭발성이 있는 사안이지만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이익·무력관계서 출발 저자는 미국은 일본이 2차세계대전에 패한 1945년 이후 자유무역이 관련되는 모든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설명하면서 누누히 일본의 협조를 촉구했지만 일본은 듣는 척만 했을뿐 실제행동에 있어서는 이중성을 보여줬다고 힐난하고 있다.저자는 미·일 두나라 사이의 자본주의 형성의 형태가 다른데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일본은 역사상 혼란을 두려워하는 동종·동질성의 사회인데 비해 미국은 경제후퇴를 염려해국제시장 개발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다인종의 개방적 사회라는 것이다.이 차이에서 오는 오해가 두나라를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갈수록 간극을 넓히고 있는 근본이라고 보면서 오늘날 두나라의 현안인 미·일 무역마찰의 중심적 원인도 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은 일본의 군사기지에서 공산주의로부터 일본을 보호해줬지만,일본은 미국에 대한 도전을 중지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미국이 원했던 속도만큼의 군사재무장을 서두르지 않았으며,오키나와의 반환을 요구했고,중국 천안문 사태에 대한 미국의 비난강도를 낮추려고 했다는 것이다.1960년 미·일 안보동맹 체결시 무효화를 주장했던 일본의 좌익세력뿐 아니라 친미 우익세력의 일부도 안보동맹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데서도 일본의 시각을 짐작할 수 있다고 예시했다. 그러나 미국의 외교정책이 동구권·중동·발칸지역과는 달리 일본에 대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일본과의 관계가 인권·정의·평화중재가 아니라 ‘이익’과 ‘무력’의 관계라는 잘못된 출발선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1852년 미국의 밀라드 필모어 13대 대통령이 일본에 무역통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처음 보냈을 때부터 일본은 자신의 ‘장사’만을 생각했으며 급기야 1940년대 초 아시아 대륙에서 상업적 경쟁관계가 겉잡을 수 없이 치열해졌을 당시 두나라는 끔찍한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는 것이다.미·일 관계는 한마디로 ‘힘겨루기’에 기초를 둔 것이었므로 외교정책의 원칙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논리다. ○이념에만 얽매인 한계 이것이 바로 일본이 바라던 바였다고 꼬집은 저자는 아시아 각국이 무력에 의해 강대국들의 외교정책에 순응하기 시작했을때 일본은 상업적·군사적인 역량을 배양하고 외국의 논리에 귀를 막아 외교정책 원칙의 지배에서 벗어날 결심을 한 사실에 주목했다.일본은 자신에게 이익이 있을 때만 미국과 거래를 했으며,자유무역이 좋다는 말에 결코 현혹되지 않았다는 것이다.자신의 편협된 이익에 맞다고 생각될 때만 미국과의 안보동맹을 구축했다고 했다.저자는 일본에게는 인권·국제적 정의같은 것은추상적인 것은 관심사안이 못됐다고 덧붙이고 있다.일부에서는 저자의 견해에 더해 2차세계대전 이후 군부세력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미국에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일례로 전쟁이후의 일본의 권력공백을 친공산주의의 좌익성향의 인사들이 뒤를 이을 기미를 보이자 미국은 궤도수정을 했으며 그 결과 20만명의 숙청인사가 복권됐다는 것이다.전범처리 문제도 일본의 약체정권이나 공산정권 등장을 우려,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념에만 얽매인 한계성 때문에 역풍을 만나게 될 지 모른다고 경고하면서 중국의 부상에 따라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한계성 극복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다.자칫 일본에 대한 시장개방 요구와 아시아에서의 방위분담 촉구에 따른 일본의 반발이 우려된다고 암시하고 있다.노턴 앤드 컴퍼니(W.W Notton & Company) 출판사 간행,508쪽에 29.95달러.
  • 사면할 양심수가 누구인가(사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광주지역 TV토론에서 “집권하면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조국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람들을 석방,사면하겠다”고 밝혀 파문이 일고 있다. 김총재는 사면 대상 양심수를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조국을 사랑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는 사람”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양심수’란 국제사면위원회 정의에 따르면 ‘폭력을 사용하거나 옹호하지 않음에도 신념·피부색·인종·언어·종교등의 이유로 구금된 사람’을 뜻한다.이런 양심수는 문민정부 출범후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그렇다면 김총재는 우선 자신이 언급한 양심수가 누구이며 어떤 혐의로 복역중인 사람들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하리라고 본다. 과거 집권과정에 하자가 있는 권위주의정권 아래서는 민주화 투쟁이 시국·공안사범이란 이름아래 공권력의 탄압 대상이었다.김총재는 물론 김영삼 대통령도 이런 부당한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었으며 아울러 양심수도 적잖이 있었던게 사실이다.그러나 분명 현재의 상황은 그때와는 다르다.한 예로양심수의 대표격이던 김근태씨는 지금 국민회의 부총재로 있으며 복역했던 다른 민주·인권·노동운동가들도 정부,여·야당에서 중책을 맡고있다. 사면 대상으로 지칭한 ‘애국 방법에 차이가 있는 양심수’라든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양심수’라는 것도 위험한 분류방법이다.검거된 고정간첩조차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이며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행동이라고 간첩행위를 강변하는 것이 현실이다.또 실정법에 어긋난 방법으로 ‘애국’을 했다면 정상참작은 될지언정 법적용은 면할수 없다.한총련 가입을 탄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발언 역시 문제다.이적단체만 단속하고 그 구성원은 놔두라는 주장과 다름 없으니 말이다. 책임있는 정치인 입장에서 김총재는 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 위반사범을 지칭한 것으로 보이는 ‘양심수’를 거론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 문제로 이들 법에 대한 입장이나 좌익사범 처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당당히 밝히고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옳으리라고 본다.북한의 대남적화노선에 전혀 변화의 조짐이 전혀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제기된 ‘양심수 사면’발언이 많은 국민의 불안감을 촉발하지 않았는지 김총재는 심사숙고하기 바란다.
  • 공산주의자 아닌 구속자 석방·사면/검찰,김대중 총재 발언 촉각

    ◎양심수 아닌 비공산주의자 표현에 당혹/‘재야단체들 끌어안기 위한 포석’ 분석도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사면관련 발언이 검찰 관계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다. 김총재는 31일 광주 무등파크호텔에서 현지 인사들과 간담회를 갖고 “우리가 집권하면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 조국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람들을 석방,사면하겠다”고 말했다. 검찰의 공안 관계자들은 당혹스러워 하면서 발언 배경을 파악하는 데 부심하는 모습이었다.특히 김총재의 발언내용을 담은 녹음테이프를 긴급 입수,분석하는 등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그냥 ‘양심수’를 석방하겠다고 하면 될텐데 굳이 ‘공산주의자’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면에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대검 고위 관계자는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스스로 밝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자 운운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면서 “김총재 말대로라면 모든 공안사범을 다 석방해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우리가 잡아넣는 좌익 사범들은 재야단체들 입장에서 보면 모두 다 양심수”라면서 ”그렇게 보면 수사 정보기관의 존재 이유가 없는 것 아니냐”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검찰 내부에서는 김총재가 조금 더 표를 모으면 당선이 확실하다는 생각에서 이같이 발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 공안검사는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양심수의 석방을 요구한 재야단체로부터 표를 얻겠다는 전략의 일환일 것”이라면서 “특히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사면하는 것과 동시에 양심수 석방을 요구한 5·18 관련 단체의 요구에도 부응하려는 다목적 포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 노벨문학상 수상 다리오 포의 작품세계·생애

    ◎정치 부패상 통렬히 풍자 이탈리아의 극작가 겸 배우인 다리오 포는 1926년 이탈리아의 라고 마지오레의 해안마을 산지아노에서 태어났다.사회 선동가로 급진적인 작품경향을 보이기도 한 포는 소규모 캬바레와 극장을 위한 레뷔(revue),곧 시사풍자극을 제작하면서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이탈리아 작가로는 6번째 노밸문학상 수상자가 된 포는 1954년 연극배우이자 작가인 프랑카 라메와 결혼했다.5년후인 1959년에는 부인과 함께 ‘다리오 포­프랑카 라메’ 극단을 설립했다.텔레비전 연예물인 ‘칸초니시마’에서 유머 넘치는 촌극을 선보임으로써 그들은 이내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들은 점차 일종의 정치적 선동·선전극을 발표했다.그중에는 때로는 신성모독적이며 외설적인 것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포가 이야기하는 이른바 ‘비공식적 좌익사상’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특히 20세기의 중요한 극작가들인 마야코프스키나 브레히트 등은 그에게 커다란 지적 자극을 주었다. 1968년 포와 라마는 이탈리아 공산당과 연합해 또다른 연극단체인 ‘누오바 스케나’를 결성했다.그들은 그뒤 1970년 공동체 집단극장을 설립하면서 공장·공원·체육관 등 대중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순회공연을 갖기 시작했다.포의 대표작으로는 ‘미스테로 부포’‘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우연한 죽음’‘낼 수도 없고 내지도 않겠다’ 등을 꼽을수 있다.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우연한 죽음’(1970)이다.극의 배경은 밀라노 경찰서.도시의 폭탄테러 사건에 대해 신문받던 한 정치적 행동주의자인 주인공은 창문에서 떨어져 죽는다.그 죽음은 당시 이탈리아 정부의 부패상에 대한 더없이 강렬한 풍자로 읽힌다.이 작품은 국내에서는 극단 산울림 등에서 장기 공연됐다. 연기자로서 포는 1인극 ‘우스꽝스러운 비밀’(1873) 공연을 통해 놀라운 솜씨를 보여줬다.이 극은 중세 신비극에 뿌리를 둔 것이지만 전형적인 현대의 내용을 담고 있어 관객의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수 있다.포는 최근들어 몇몇 작품들을 통해 여성문제를 집중적으로다뤄왔다.최근작 ‘얼간이들과 함께 하는 악마’는 귀신에 씌인 여인과 질투심 많은 판관을 주인공으로 한 르네상스풍의 진지한 풍자극으로 주목을 끌었다.한편 포는 해학성을 겸비한 예리한 정치비판 희곡으로 명성을 얻고 있지만 그동안 비평가들에 의해 수상후보로조차 거론되지 못했다.그에게 노벨문학상이 돌아간 것은 의외라는 평이다.
  • 김광림 교수가 본 다리오 포/희랍 아리스토파네스 이후 최고작가

    ◎연극연기자로서도 뛰어난 기량 발휘 연출가·극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연극계의 중견 김광림씨(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교수)는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다리오 포를 “현대의 희극작가중 최고로 평가할만한 작가”라고 칭찬했다. 중산층 부부의 성의식을 예리한 시각으로 포착해낸 포와 포의 부인 프랑카 라메의 공동작품 ‘오픈 커플(Open Couple)’을 직접 연출,80년대 말 국내에서는 처음 무대에 올린 바 있는 그는 “포는 유럽과 미국의 평론가들 사이에서 희랍의 아리스토파네스 이후 최고의 희곡작가로 꼽히고 있다”는 말로 그의 세계 문학계에서의 위치를 설명했다. 김교수는 “포의 작품은 주로 현대 유럽과 이탈리아 중산층과 빈민층의 삶을 희화적으로 풍자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정치적 단상을 강렬하게 투영하는 한편 사회적 코멘트를 강하게 덧씌우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라면서 “그같은 그의 급진적이고 좌익적인 성향 때문에 그의 작품은 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공연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교수는 ‘그의 작품은 때로신성모독적이고 선동·외설적이라는 비판도 따랐지만 1인극 ‘우스꽝스런 비밀’에서 연기자로서의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는 등 극작가로서,연기자로서,또 극장경영자와 사회운동가로서 치열하고 단단한 삶을 살아온 광대같은 예술가”로 기억했다. 김교수는 “이같은 작품의 우수성 때문에 그의 사상이 문제시되는 속에서도 포의 작품은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우연한 죽음’과 ‘안내놔 못내놔’ 등 여러 작품이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리오 포 연보 ▲1926년 3월24일 이탈리아 라고 마지오레의 해변마을 산지아노에서 출생. ▲밀라노 예술아카데미 수학. ▲1952년 동료 배우들과 함께 실험극단 설립. ▲1959년 부인 프랑카 라메와 함께 본격적인 극단 ‘다리오 포­프랑카 라메’설립.TV 연재물인 ‘칸초니시마’에서 유머넘치는 촌극을 통해 유명인사로 발돋움. ▲1968년 이탈리아 공산당과 연합,연극단체 ‘누오바 스케나’결성.‘비공식적 좌익사상’이라는 평가와 함께 정치적 선동·선전극 발표. ▲1970년 공동체 집단극장 설립.공장·공원·체육관 등 대중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순회공연 시작. ▲1970년 이탈리아 정부의 부패상을 다룬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발표. ▲1974년 ‘캔 페이 원 페이’발표. ▲1991년 ‘사기거래’발표.이후 52개국에서 상연. ▲1997년 10월 노벨문학상 수상.
  • 북 공작원 한총련침투 확인/동아대 좌익단체 암약 실태와 파장

    ◎주사학습 함정빠져 노동당 입당… 북 선전꾼으로/북 공작금 받아 학생회 활동… 한총련간부 맡기도 주체사상파 학생들이 북한 노동당에 입당해 공작금을 받고 한총련 등에 침투,친북 통일투쟁을 해온 사실이 처음으로 확인됐다.그동안 학원가 운동권의 이적성 시비가 공안당국과 학생들간의 해묵은 공방 정도로 생각해 온 국민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수사당국은 이번 사건의 주범격인 배윤주(28·여),지은주씨(28·여)등이 이념적으로 노출돼 있었던 것이 북한 공작원에 포섭된 원인이며 간첩사건으로 비화된 발단이었다고 밝혔다.지난 88년 동아대 일문과에 입학한 이들은 ‘철학의 기초이론’등 의식화 교육을 받은 뒤 지하 이적단체 조직원으로 주체사상을 신봉하면서 각종 집회나 시위에 가담하다 졸업했다. 이들은 졸업후 94년 3월 어학연수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마자 “주체사상을 공부해보지 않겠느냐”며 접근한 일본 조총련의 꾐에 쉽게 넘어갔고 이후 주체사상의 함정에 빠져 북한 노동당 가입 등 북한의 꼭두각시가 됐다.조총련 조직원의 세뇌교육을 받고 주체사상 선전꾼과 공작원으로 둔갑,당원 정신서약 및 공작금 수령 등 진짜 간첩이 된 것이다. 지난 95년 귀국한 배,지씨는 후배들에게 접근,도경훈씨(25·응용통계4)등 5명을 노동당 당원으로 가입시켰다.더욱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총련이 주최하는 입당식에서 ‘저는 도선노동당 입당을 영광으로 여기며 충성을 다할 것으로 맹세합니다” 등 서약을 하고 김일성 사진에 절까지 했다. 후배들도 배,지씨의 접근을 별 꺼리낌없이 받아들였고 도씨는 이들이 준 북한 공작금을 사용,총학생회장 당선에 이어 운동권 조직의 최고 상부조직인 한총련 간부까지 됐다. 그동안 우리는 한총련 등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북한의 직접적인 공작과 침투 가능성을 우려하면서도 학생들의 완강한 부인을 믿어 왔다.그러나 이번 사건을 볼때 운동권 내부에 북한 공작에 포섭된 학생들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학생들의 사상적 오류를 막고 건전한 길로 유도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 불 철학자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분석 1995년 11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행동파 좌익인사들이 상당수인 프랑스 지성계에서 들뢰즈는 비교적 철학에만 몰두한 ‘예외적인’ 인물이었다.그는 동시대 프랑스의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와 함께 ‘차이’의 철학을 주창했으며 실존주의를 비판했고 헤겔적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에 도전했다.‘철학자 중의 철학자’ 들뢰즈의 초기 저작에 속하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서동욱·이충민 옮김)이 최근 민음사에서 나와 관심을 모은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과 사물들을 하나의 기호체계로 분석한 연구서.들뢰즈는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이 이 소설에 접근한다.바로 이 지점에서 들뢰즈만의 새로운 프루스트 읽기가 시작된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르셀이라는 문학청년을 주인공으로,시간의 파괴력 앞에 무력한 자신과 주변인물들의 모습을 치밀하게 그린 1인칭시점의 소설이다.이 작품은 종종 과거에 대한 소설로 간주되어 왔다.그러나 들뢰즈는 소설의 통일성을 화자 마르셀의 기억이나 추억에서 찾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본질은 마들렌 과자나 포석들 안에 있지 않다.들뢰즈에 의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단순한 회상의 노력이나 기억의 되찾기가 아니다.기억은 일종의 견습의 수단이며,탐구의 도구일 뿐이다.요컨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과거를 지향하는 소설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한편의 도제소설인 것이다.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네개의 기호체계를 찾아낸다.사교계의 기호들,사랑의 기호들,감각 경험의 기호들,그리고 예술의 기호들이 그것이다.들뢰즈는 이 네가지 형태의 기호체계들을 이집트학 학자처럼 해독,기호와 의미를 종합하는 진정한 영원성으로서의 시간,즉 절대적 원초의 시간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예술기호라는 결론에 도달한다.이 책은 무엇보다 들뢰즈 사상의 발전과 관심의 이동경로를 그 싹에서 열매에 이르기까지 발생학적으로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 한총련 잔류자 사법처리 착수/검찰

    ◎차기집행부도 현노선 고수땐 처벌 대검찰청 공안부(주선회 검사장)는 11일 좌익사범 합동수사본부 9차회의를 열고 오는 11월말 구성될 것으로 보이는 제6기 한총련 집행부가 이적단체로 규정된 5기 한총련의 노선과 강령을 고수하면 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 구성·가입죄 등으로 사법처리키로 했다. 이와 함께 제5기 한총련 중앙조직원에게는 탈퇴 시한을 충분하게 주었다고 판단,각 대학 총학생회의 탈퇴 찬반투표 여부와 일정에 상관없이 미탈퇴 중앙조직원들을 즉각 사법처리키로 했다.
  • 한총련 조직재건 사전차단/위장탈퇴·탈퇴번복 학생 가중처벌/검찰

    검찰의 와해 방침에 따라 그동안 활동이 주춤하던 한총련이 최근 조직재건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이에따라 한총련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며 조직재건을 위한 집회나 행사를 사전에 차단키로 했다. 대검찰청 공안부(주선회 검사장)는 3일 안기부 교육부 경찰청 등의 공안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좌익사범 합동수사본부 8차 회의를 갖고 한총련의 조직재건 움직임을 차단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세부 지침을 전국 지검에 시달했다. 대검은 이 지침에서 한총련 탈퇴자 가운데 조직 재건 활동에 관여한 사람은 위장 탈퇴자로 간주해 엄단하고,위장탈퇴 사실이 밝혀지거나 탈퇴 의사를 번복한 학생은 즉시 검거해 가중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검찰은 이날 한총련 중앙조직이 각 대학의 2학기 개강을 맞아 서총련 등 9개 지역 총련에 ‘조직사수 혁신안’을 제출하고 학생회를 복구하도록 지시하는 등 조직 재건을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2차 사법처리 대상자 360명과 1차 대상자 가운데 아직 사법처리되지 않은 37명 등모두 397명을 10월말까지 붙잡아 사법처리키로 했다.
  • 법정으로 치닫는 여야 색깔공방

    ◎신한국­‘안기부 프락치’ 발언 명예훼손 고소/국민회의­‘함상 총살’ 미에 질의서 쟁점화 시도 오익제씨 월북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정치권의 ‘색깔공방’이 23일 여야간 맞고소 사태로 이어져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여야간 공방전도 전선이 확대되고 있진 않지만,강도는 어느때보다 강하다. ▷신한국당◁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과 이사철 대변인 정형근 정세분석위원장 등은 김대중 총재와 정동영 대변인 등 국민회의 관계자 4∼5명을 오는 25일 명예훼손혐의로 검찰에 맞고소키로 했다. 이대변인은 이날 주요당직자회의 직후 “국민회의가 우리당 정위원장을 ‘안기부의 프락치’‘한국 메카시즘의 대명사’ 등으로 비난한 것은 명백한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했다. 이대변인은 이어 논평을 통해 “국민회의가 개인이 임의로 작성한 메모를 내놓고 6·25 당시 김총재의 해상방위대 근무사실을 주장하며 좌익활동 경력을 부인한 것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면서 국민회의가 김총재의 해상방위대 활동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송인명당시 목포경비부사령관의 증언록을 반박했다. 앞서 강총장은 기자들과 만나 “야당고발에 대해 의연하고 대범하게 맞서겠다”면서 “터무니없는 공격에 대해서는 우리도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강경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강총장은 특히 “여당이 최대한 인내하도록 노력하겠지만 야당이 지금 하는 것을 보면 도에 지나친다”며 공세수위를 높였다. ▷국민회의◁ 국민회의는 이날 신한국당의 맞고소 전략을 예상한 듯,특별한 논평없이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면 되는 일”이라고 애써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그러나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 신한국당 이대변인을 겨냥,집중타를 퍼부었다.표적은 이대변인 최근 제기한 ‘김총재에 대한 미군 함상 총살의혹’ 문제였다. 장성민 부대변인은 이날 “이 문제는 한미 우호관계를 해치는 일이며 외교적으로 심각한 마찰이 우려된다”며 이대변인의 발언취소와 사과를 촉구했다.이어 “미대사관의 부인으로 이미 허위사실로 증명됐음에도 이대변인이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외교를 파탄내자는 의도가 아니냐”고 공격했다. 국민회의측은 나아가 오는 25일 이대변인의 발언에 대한 미 대사관 입장을 묻는 질의서를 보내 정치쟁점화를 시도할 예정이다. 한편 김대중 총재와 오익제씨의 전화통화 및 면담의혹 등에 대해 김충조 사무총장은 “김총재는 오씨와 만난적도 직접 전화통화도 한 적이 없었다”며 “선거때마다 악용해온 용공음해가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 제17차 세계정치학회 주요 논문

    세계정치학회 서울대회 3일째인 19일 ‘한국의 민주화와 세계화 정책’‘동북아시아에서 한반도통일이 미치는 영향’ 등을 주제로 각 패널이 개최됐다.또 북한 신포에서 경수로부지 착공식이 있은 이날 ‘미북 핵합의와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라는 논문도 발표됐다.다음은 관련논문들의 요지. ◎미·북 핵합의와 한반도에너지 개발기구­/길영환 아이오와대 교수/한반도 영구 비핵지대화 기대커져 미·북 핵협정은 ▲경수로가 흑연감속로보다 더 핵확산 방지에 적절한가 ▲미·북 핵협정은 위험한 전조인가 ▲북한을 믿을수 있을 것인가 등 세가지 의문이 먼저 해결돼야 한다.첫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현재 북한이 보유하고 있거나 건설중인 흑연감속로보다는 경수로가 핵확산 방지에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스(yes)”다. 두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상당히 불투명하고 애매하지만 북한의 상황은 매우 독특하고 미·북 핵협정을 이끌어낸 것과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질 것같지는 않다.따라서 이것이 위험한 전조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세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아마 “노(no)”일 것이다.그러나 핵협정의 성패 여부는 ‘신뢰’보다는 ‘이행’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북 핵협정은 또 ▲이 협정이 북한이 과거 생산한 플루토늄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IAEA가 검증할 여력을 배제,1∼2개의 핵무기를 만들기에 충분할 것으로 추정되는 플루토늄으로부터 북한이 어떤 것을 만들든 개입할 방법이 없고 ▲북한이 IAEA가 추구하는 특별사찰을 거부했을때,또 북한이 영변의 5MW 원자로에서 핵연료를 제거하는데 있어 IAEA의 규정을 무시했을때 제재조치를 취할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 등 두가지 중요한 결함을 안고 있다.그러나 미·북 핵협정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의 규정을 위반했을때 북한에 북한에 특별제재를 가할수 있도록 명기함으로써 이같은 결점들을 보완하고 있다. IAEA와 KEDO는 서로 다른 기구지만 북한의 핵 불투명성을 검사,한반도에서의 핵위기를 해소하려는 공통목표를 위해 서로 보완적인 일을 할 수 있다.이제 KEDO가 미·북 핵협정의 완전한이행을 위한 책임을 떠맡게 됨으로써 지난 94년 핵위기때와 같은 수수께끼가 해결되고 한반도가 영구히 비핵지대로 남을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한층 커질수 있게 됐다. ◎한반도 통일에 대한 주변 강대국의 예상 반응­R.존슨 미 응용과학연 연구원/미,동북아안보 단극체제 유지 노력 한반도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반응은 주변국 각국의 전략적 목표,한반도 통일의 유형,통일과정에 따른 지역안보환경의 유형을 분석함으로써 예상이 가능하다.즉 우선 통일의 유형과 지역안보환경에 기반해 시나리오를 구성한 후 이를 토대로 주요국가들이 추구할 전략적 목표를 추정해본다. 첫째,미래시나리오를 만들어보면 통일의 유형은 전쟁을 통해 남한이 북한을 무너뜨리는 경우,북한이 붕괴하는 경우,남한이 북한을 점진적으로 통합해가는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지역안보환경은 단극체제(현재와 같은 경우의 지속),양극체제(미국과 중국의 경쟁),다극체제(중국,미국,일본의 경쟁)로 나뉜다. 둘째,가상시나리오와 관계없이 주요주변국 및 통일한국의 예상되는 안보목표를 평가해보는 것이다.중국,일본,러시아,미국의 장기적인 안보목표에 대한 평가는 이 시나리오들에 결합되어질 것이다.마지막으로 이같은 시나리오들을 분석함으로써 각 국가들이 어떻게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려고 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얻을수 있다. 미국의 경우 동북아안보환경에서 단극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이다.긴밀한 한미안보관계의 유지는 미일관계의 안정에 필수적이다.이는 한일간에 잠재해있는 긴장을 완화하며 중국의 세력이 지나치게 증대되는 것을 막는데도 중요하다.미국은 또 자국의 이익과 목표를 위해 한반도통일의 전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할 것이다.미국으로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한국을 잃는 것이기보다는 한국을 중국에게 잃는 것이다.통일이후의 한국의 정치적 전개는 한미 안보관계에 비판적일 것이지만 미국은 한반도통일 시나리오에 바람직한 결과가 이루어지도록 공헌할 수 있다.미국은 남한이 복한을 통합하는 속도와 방법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통일한국에 주둔할 미군의 규모에 대한 결정도 한미공동의 합의에서 나와야 한다.미국은 지역방위를 위한 강력한 군사력을 포함해 지속적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자국의 공헌을 증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마지막으로 미국은 한반도통일과정에서 가능한 빨리 한반도내의 대량살상무기문제를 해결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민주화와 세계화:일·한·대만 비교연구­T.J.펨펠 워싱턴대 교수/한·일·대만 거대 여당 유지·좌파 무력화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관계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있다.바로 경제발전이 특정단계에 도달하면 그 국가는 더이상 독재나 권위주의로 남아있기 어렵다는 주장과 민주화가 오히려 대중들이 정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게 해 경제성장을 억제시킨다는 주장이다.일본,한국,대만 등 3국의 민주화가 어떤 방식으로 경제성장과 대치되지 않으며 발전해왔는지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상관관계를 탐색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최근의 경제침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세 국가들 가운데 가장 긴 민주화를 경험했으며 꾸준한 경제성장을 유지하고 있다.일본의 민주제도,국제적 환경과 특수한 사회·경제연합은 한국과 대만의 경우와도 비슷한 상황이 많다. 이들 세 국가의 민주화 경험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안목을 제공한다.첫째,이 세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의 주된 특징들중의 하나는 일당지배하에 모든 주요기업들이 하나의 당 아래로 통일됐다는 것이다.그러므로 기업의 이익은 한곳으로 집중되어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노동과 좌익정치인들은 정치적으로 힘을 잃고,계급투쟁은 국가성장의 명분하에 잠식됐다.둘째,제도적 측면에서 볼때 일당 지배체제와 좌파의 무력화를 언급할 수 있다.일당 지배정당체제는 노동자와 좌파가 선거무대외에 올라오는 것을 막았다.셋째,민주화와 경제발전에 있어 동북아 3국과 미국의 관계가 밀접했다는 사실이 특히 중요하다.미국의 계속적인 개입과 지원이 없었다면 그 성공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그러나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정치가 경제의 논리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자국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에게 이러한 수혜가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 오익제 월북 색깔공방 가열

    ◎여 DJ에 사상공세 야 조사단구성 요구 여야는 오익제씨의 월북을 둘러싸고 사흘째 ‘색깔공방’을 계속했다. 신한국당 이사철 대변인은 18일 성명을 내고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관련된 8대 의혹으로 ▲6·25전후 좌익활동의혹 ▲한민통관련 행적 ▲서경원 의원 및 문익환 목사 밀입북사건 ▲김총재 비서관 군사기밀유출사건 ▲간첩 이선실사건 ▲허인회 당무위원 북한 남파간첩 접촉사건 ▲김일성 조문론 ▲북핵관련발언 등을 제시하고 “(김총재는)대통령후보로서의 거취를 결정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는 간부회의에서 “신한국당과 안기부가 오씨 사건을 이용,조직적으로 국민회의에 대한 음해를 개시하고 있는데 대해 좌시할 수 없다”면서 오씨 사건과 ‘황장엽파일’에 대한 국회 조사단구성을 요구했다. 자민련도 간부회의를 열어 오씨가 평통 자문위원임에도 관리소홀에 대한 정부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국회 정보위 소집과 황장엽파일의 공개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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