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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봇박사 데니스홍이 말하는 인생 에너지 비결

    로봇박사 데니스홍이 말하는 인생 에너지 비결

    ‘오늘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은 오늘 하지 않습니다’ 출간 데니스 홍(한국명 홍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기계항공공학과 교수가 새 책을 냈다. 홍 교수는 새 책 ‘오늘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은 오늘 하지 않습니다’에서 로봇이 아닌 자신의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들에 대한 삶의 철학을 오롯이 담아냈다. 홍 교수는 ‘긍정은 언제나 길을 찾는다’는 좌우명을 가지고 거짓을 말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말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책에서 말한다. 긍정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밝게 바라보는 이러한 지극히 당연한 일들이 모여, 단단한 나를 만들고 나의 일상을 지켜나가는 원동력이 된다고 전한다. 그는 세계적인 과학자의 삶 이전에 평범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모습도 이야기한다. 항상 유머와 위트로 주변을 환하게 만들며,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마주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꿈꾸며 자신을 지켜나가는 그의 일상 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유쾌하게 지켜나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런 홍 교수에게도 항상 신나고 즐거운 하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시연을 앞두고 로봇이 고장 나거나 연구가 연달아 실패했던 일과 사람들의 환호에 취해서 초심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좌절하거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역경을 만날 때 실패에서 배우며, 다음을 위한 도약을 준비하고, 실패할 자유를 즐기라고 조언한다. 그는 “로봇이 고장 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우리는 실패에서 배우고, 가슴을 뛰게 하는 일에 도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데니스 홍 교수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 기계항공공학과 교수이자 RoMeLa(Robotics & Mechanisms Laboratory) 로봇 메커니즘 연구소장이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 선임연구원, 버지니아공과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과 GM사의 젊은 연구자상, 파퓰러 사이언스 선정 ‘과학을 뒤흔드는 젊은 천재 10인’, 타임지 선정 최고 발명품상, 2011년~2016년 로보컵 우승 및 루이비통컵 휴머노이드상 등 국제 학회에서 수 많은 논문상과 로봇 연구와 관련한 상을 받았다.
  • [책꽂이]

    [책꽂이]

    웹 3.0시대의 디지털미디어와 저널리즘(임현찬·권만우·이상호 지음, 서울인스티튜트 펴냄) 인공지능 저널리즘, 빅데이터 저널리즘, 블록체인 미디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미디어 등 다양한 기술과 저널리즘이 만나는 지점의 이슈들을 다룬다. 신문사와 방송국, 통신사 등에서 오랫동안 일한 저자들이 빠르게 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저널리즘을 특화하는 방법을 안내한다. 306쪽. 2만원.생에 감사해(김혜자 지음, 수오서재 펴냄) 지난 60년간 수많은 배역을 맡아 연기한 한국 대표 배우 김혜자의 자전적 에세이. 편안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배우이지만 그녀는 작품을 대할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치열하게 고민했다. ‘국민 배우’, ‘국민 엄마’라는 명성 이면에 자리했던 허무와 슬픔에 대한 잔잔한 고백과 감사의 기도가 담겼다. 376쪽. 1만 7000원.오늘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은 오늘 하지 않습니다(데니스 홍 지음, 인플루엔셜 펴냄) 연구가 잇달아 실패하고 사람들의 환호에 취해 초심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긍정은 언제나 길을 찾는다’는 좌우명으로 걱정 없이 나아간다. UCLA 로봇연구소를 이끄는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이 자신의 삶을 통해 “실패할 자유를 즐기라”고 조언한다. 240쪽. 1만 5000원.호준석 앵커의 원초적 질문(호준석 지음, 미학사 펴냄) YTN에서 ‘호준석의 뉴스인’ 등 대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저자가 앵커 11년, 방송기자 17년 생활을 통해 쌓은 인터뷰 기법을 알려 주고 앵커란 무언인가를 이야기한다. 저자의 세계관·사회관·인생관을 ‘뉴스’와 ‘인터뷰’라는 사람 이야기에 투영해 풀어 나간다. 232쪽. 1만 5000원.KBS 봉숭아학당 대본집(김형진 지음, 동국 펴냄) 개그맨 김형곤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봉숭아학당’은 맹구 이창훈의 “배트맨~” 등 수많은 유행어를 내놓으며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지금은 최고의 개그맨이자 국민 MC로 우뚝 선 유재석도 무명 시절 출연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2년 동안 방송한 대본을 모았다. TV 대본으로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384쪽. 2만원.한국에서 박사하기(강수영·김보경·유현미·이송희·조승희·전준하·현수진·이우창 지음, 스리체어스 펴냄) 젊은 연구자 8명이 대학원의 생생한 현실에 대해 말한다. 대학원에 몸을 담은 이들의 고민과 희망을 통해 대학원을 다각도로 풀어낸다. 피상적인 대학원 소개가 아닌 대학원의 존재 이유를 들여다본다. 256쪽. 1만 4000원.
  • 김용일 서울시의원, ‘제15회 대한민국 지방자치 의정 대상’ 수상

    김용일 서울시의원, ‘제15회 대한민국 지방자치 의정 대상’ 수상

    서울시의회 도시계획균형위원회 김용일 의원(국민의힘, 서대문구4)은 지난 8일 서울특별시의회 별관에서 개최된 ‘제15회 대한민국 지방자치 의정 대상’ 시상식에서 지방자치 의정 대상을 수상했다. 김 의원은 제314회 임시회 시정질문을 통해 가재울 도서관 착공 추진에 기여 했으며, ▲서대문구 다누리 축제 참석 ▲서대문소방서 환경개선 시설 개선 노력 ▲서대문구 좌원상가 사업추진 현황 검토 등 활발한 지역 활동을 펼쳤다. 또한, 제315회 정례회 행정사무감사·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는 ▲서울시 고밀 개발 필요성에 따른 용도지역 개편 요구 ▲취약 청년 대상 명확한 성과 목표 설정 요구 ▲매입임대주택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한 개선 노력 촉구 등을 지적해 집행기관에 대한 감독과 견제 활동을 했다. 이처럼 탁월한 분석 능력을 바탕으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안 등을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등 서울시정과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 노력한 공로가 높게 평가됐다. 김 의원은 “넓은 시야로 더 많은 민원을 청취하고 수합해 해결하려고 노력한 활동이 좋은 평가를 받아 매우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앞으로도 시민과 교감하고 소통하며 ‘세상은 넓고 민원은 많다’는 좌우명을 때론 뜨거운 가슴으로 때론 냉철한 두뇌로 해결하고 성과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 20년 ‘16강 恨’ 풀다… 세네갈 새 역사 쓴 쿨리발리

    20년 ‘16강 恨’ 풀다… 세네갈 새 역사 쓴 쿨리발리

    프랑스 국적을 포기하고 ‘테랑가의 사자’ 유니폼을 선택한 칼리두 쿨리발리(첼시)가 부모의 나라 세네갈을 20년 만에 월드컵 16강으로 이끌었다. 세네갈은 30일(한국시간) 카타르 도하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A조 3차전에서 쿨리발리의 결승골을 앞세워 에콰도르를 2-1로 누르고 2승1패(승점 6)로 2002 한일월드컵 8강 이후 20년 만에 월드컵 본선 토너먼트에 오르는 기쁨을 만끽했다.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오를 수 있었던 에콰도르는 1승1무1패(승점 4)로 3위에 그쳐 16년 만의 16강 진출 꿈이 무산됐다. 4년 전 월드컵 데뷔의 꿈을 이룬 쿨리발리는 이번에 주장 완장을 찼다. 그는 “모두가 역사를 바꿀 펜을 쥐고 있다”는 알리우 시세 감독의 좌우명을 곧잘 입에 올린다. 그에게 세네갈 대표팀 합류를 권했던 것도 시세 감독이었다. 쿨리발리는 이날 스승 앞에서 세네갈 축구 역사를 바꾸는 명장면을 연출했다. 1-1로 맞선 후반 25분 중앙에서 에콰도르 공격을 차단하던 쿨리발리는 이드리사 게예의 프리킥이 오른쪽으로 흘러나오자 침착하게 오른발 인사이드 킥을 날리며 점수를 보탰다. 추가시간까지 30분 동안 세네갈의 중앙 수비를 책임지며 에콰도르의 파상 공세를 견뎌 2018년 러시아 대회 때 일본에 페어플레이 포인트에서 밀려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아픔을 씻어 냈다. 그는 “세네갈이 8강에 올랐던 2002년의 기억이 현재의 날 만들었다. 당시 세네갈 대표팀은 내게 우승팀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그때 돌풍의 주역은 시세 감독이었다. 쿨리발리는 “2년 전 오늘 세네갈의 위대한 축구 선수 파프 디오프가 세상을 떠났다. 디오프와 그의 가족에게 플레이어 오브 더 매치 트로피를 바친다”며 “디오프와 시세 등 앞 세대가 한일월드컵에서 이룬 성과를 또 이뤄 내고 싶다. 아프리카 챔피언의 자존심을 걸고 16강전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 세네갈 16강 이끈 쿨리발리 “모두 역사를 바꿀 펜을 쥐고 있다”

    세네갈 16강 이끈 쿨리발리 “모두 역사를 바꿀 펜을 쥐고 있다”

    프랑스 국적을 포기하고 ‘테랑가의 사자’ 유니폼을 선택한 칼리두 쿨리발리(24·첼시)가 부모의 나라 세네갈을 20년 만에 월드컵 16강으로 이끌었다. 칼리두는 30일(한국시간) 알라이얀의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년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A조 3차전에서 에콰도르를 2-1로 눌러 2승1패(승점 6)으로 2002년 한일월드컵 8강 진출 이후 20년 만에 월드컵 본선 토너먼트에 오르는 기쁨을 만끽했다. 비기기만 해도 조 2위에 오를 수 있었던 에콰도르는 1승1무1패(승점 4)로 3위에 그쳐 2006년 독일 대회 이후 16년 만의 16강 진출 꿈이 무산됐다. 프랑스의 20세 이하 대표팀에서도 뛰었던 쿨리발리가 2015년 프랑스 국적을 버리고 세네갈 성인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많은 동료가 “프랑스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데, 대체 왜”라고 물었다. 7년 전에도, 지금도 쿨리발리는 “세네갈 대표팀이 된 걸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4년 전 러시아에서 월드컵 데뷔의 꿈을 이룬 그는 이번 대회에는 주장 완장을 차고 그라운드에 나선다. 쿨리발리는 “모두가 역사를 바꿀 펜을 쥐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쿨리발리에게 세네갈 유니폼을 입을 것을 제의한 알리우 시세 감독의 좌우명이다. 그는 이날 스승 앞에서 세네갈 축구 역사를 바꾸는 명장면을 연출했다. A매치 67번째 경기에서 넣은 첫 골이어서 감격은 곱절이 됐다. 1-1로 맞선 후반 25분, 중앙에서 에콰도르 공격을 차단하던 쿨리발리는 이드리사 게예가 페널티 아크 밖 20m 지점에서 페널티박스 중앙으로 올린 프리킥이 경합 중에 오른쪽으로 흘러나오자 침착하게 오른발 인사이드 킥으로 골문을 갈랐다. 추가 시간까지 포함해 30분 동안 세네갈의 중앙 수비를 책임지며, 에콰도르의 파상공세를 견뎌내 2018년 러시아 대회 때 일본에 페어플레이 포인트에서 밀려 아쉽게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기억을 씻어냈다. 이 경기의 플레이어 오브 더 매치는 쿨리발리였다. 그는 이번 대회 개막 직전 스포츠선수 기고전문매체인 ‘더 플레이어스 트리뷴’을 통해 아버지에게 영상 통화로 “세네갈 대표팀에서 뛰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의 반짝이는 눈을 봤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세네갈이 8강에 올랐던 2002년의 기억도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당시 세네갈 대표팀은 내게 우승팀이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시세 감독이 8강 돌풍의 주역이었다. 쿨리발리는 올해 2월 열린 2021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스승과 우승의 기쁨을 함께했다. 결승에서 승부차기 끝에 이집트를 4-2로 꺾었다. 그는 “결승전 승부차기를 앞두고 시세 감독이 ‘우리나라를 위해, 이 순간을 위해 희생한 앞세대 선배들을 위해, 꼭 우승하자’고 말했다”며 “첫 키커가 나였고 성공했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돌아봤다. 쿨리발리는 “2년 전 오늘, 세네갈의 위대한 축구 선수 파프 디오프가 세상을 떠났다. 디오프와 그의 가족에게 플레이어 오브 더 매치 트로피를 바친다”며 “디오프와 시세 등 우리 앞세대가 한일월드컵에서 이룬 성과를 우리 세대에서 또 이뤄내고 싶다. 아프리카 챔피언의 자존심을 걸고, 16강전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쉴 새 없이 골문을 두드린 세네갈의 선제골은 이스마일라 사르가 넣었다. 전반 42분 페널티박스 안으로 돌파를 시도했고, 에콰도르 피에로 잉카피에가 몸으로 사르의 진로를 막았다. 사르가 전반 44분 직접 키커로 나서 골문 오른쪽 구석으로 낮게 찼고, 에콰도르 골키퍼 에르난 갈린데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에콰도르는 후반 27분 곤살로 플라타의 코너킥을 펠릭스 토레스가 머리를 이용해 뒤로 넘겼고, 골문 왼쪽 앞에 자리 잡은 모이세스 카이세도가 오른발로 마무리해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에네르 발렌시아가 아닌 에콰도르 선수가 월드컵 본선에서 득점한 것은 2006년 독일 대회 조별리그 2차전 이반 카비에데스 이후 16년 만이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3골, 이날 전까지 카타르 대회에서 넣은 3골 모두 발렌시아 차지였다.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어 에콰도르 선수들은 화려한 세리머니를 펼쳤는데 3분 뒤 쿨리발리의 슛이 터지며 모든 것이 바뀌었다.
  • 이은림 서울시의원, 도봉 자원순환센터 ‘기피시설 ’아닌 ‘기대시설’ 돼야

    이은림 서울시의원, 도봉 자원순환센터 ‘기피시설 ’아닌 ‘기대시설’ 돼야

    재활용 생활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는 환경시설이 지역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기피시설’이 아닌 ‘기대시설’로 재탄생할 수 있을까?  서울특별시의회 환경수자원위원회 이은림 의원(국민의힘·도봉제4선거구)이 지난 12일 SK브로드밴드 ‘서민왕’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도봉 자원순환센터와 이웃한 안골 마을을 방문해 지역주민과 함께 해결 방안을 고민하는 자리를 가졌다. 도봉 자원순환센터의 음식물쓰레기 처리 시설은 시설 이용 년수가 20년을 넘은 노후시설이다. 도봉구 전역에서 배출되는 음식물쓰레기가 하루 평균 약 82.5톤이 반입되고, 약 6.8톤이 사료로 재생산된다. 음식물쓰레기 특성상 악취가 심해 지역 민원이 끊이지 않는 시설이다. 특히 안골마을은 반경 300m 내 위치해 환경 영향이 더욱 크다. 이날 함께 촬영을 진행한 방송인 김태진과 에바 포비엘은 재활용 선별장 및 음식물쓰레기 처리 시설에서 선별 작업을 직접 체험해 본 후 분리배출의 중요성과 작업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 의원은 “생활쓰레기를 처리하는 환경 시설은 꼭 있어야 할 시설이지만, 쓰레기라는 인식에서 오는 거부감이 큰 것이 사실”이라며 “그렇지만, 인식을 바꾸라는 말만으로는 환경 시설에 대한 거부감이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또한 시설 개선을 통해 지역주민들에게는 평온한 생활환경을 되돌려주고 작업자에게는 쾌적한 작업환경을 만들어 줘야 ‘기피시설’ 이 ‘기대시설’로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의원은 “적우침주, 깃털을 쌓듯 모든 일에 소홀히 하지 않고 임하겠다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다”라며, “도봉 자원순환센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기대시설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는 다짐을 전했다.
  • “자연과 일체” 박범계 의원이 전한 文과의 시간

    “자연과 일체” 박범계 의원이 전한 文과의 시간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추석 명절 뒤 문재인 전 대통령님 내외분을 부인과 찾아 뵈었다”라며 문 전 대통령과 촬영한 사진을 공개했다.  박 의원은 지난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렇게 밝히며 사진 6장을 게재했다. 사진 속 문 전 대통령은 갈색 모시옷 반팔 티셔츠·반바지를 입고 있다. 박 의원은 문 전 대통령과 평상에서 담소를 나누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문 전 대통령의 반려견 토리가 누워 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박 의원은 “구릿빛 얼굴에 자연과 일체가 되신 모습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며 “토리는 연신 반가움을 표하면서 평상에 누워 손님을 맞이했다. 문 전 대통령은 코스모스밭에 핀 메밀꽃을 설명하시면서 ‘너무 작은것이 애처롭다’고 하셨다”고 적었다.  박 의원은 “사저 내 아주 작은 연못에 핀 연꽃이 보라색을 띤 것을 보고 내외 분께 중통외직(中通外直)을 설명드리고 제 좌우명이라고 말씀드렸다”며 “우리도 그러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중통외직은 연의 속은 비어있지만 겉은 단단하다는 뜻으로 군자의 넒은 마음·단정한 행동을 일컫는 말이다.
  • 맏이가 모닥불 뛰어든 날, 12남매의 심장 다시 뛴 날

    맏이가 모닥불 뛰어든 날, 12남매의 심장 다시 뛴 날

    1% 걸리는 조현병 6명 걸렸어도아픈 형제 사이 인간다움 재발견‘병 만드는 엄마’ 낙인에도 꿋꿋이학대당한 막내는 눈물겨운 봉사DNA 자료 기증해 연구에 기여과거 ‘정신분열증’으로 불렸던 조현병은 전 세계에서 100명 중 1명꼴로 발생하고 있지만 정확한 원인과 치료법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이 조현병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 분명하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로버트 콜커의 ‘히든밸리로드’는 조현병에 괴로워하는 한 대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논픽션으로, 조현병이 가족에게 준 아픔과 이에 직면한 가족들에게 어떠한 용기가 필요한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다. 돈과 미미 갤빈 부부는 2차 세계대전 후 베이비붐세대가 겹쳐진 1945년부터 1965년까지 12명의 자녀(아들 10명, 딸 2명)를 낳았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콜로라도스프링스 히든밸리로드에서 완벽한 대가족을 이루고 싶었던 이들의 삶은 언뜻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첫째 아들 도널드가 모닥불에 뛰어드는 등 자기파괴적 행동을 계속하면서 가족의 불행이 시작된다. 형에게 경쟁 의식을 느끼던 차남 짐도 환청을 듣는 등 이상 증세를 보였고, 4남 브라이언, 7남 조, 9남 매슈, 10남 피터도 잇달아 조현병의 수렁에 빠진다. 여섯 형제의 발작을 고스란히 지켜본 나머지 형제자매들은 자신도 조현병에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고, 미미는 아픈 아들들을 돌보면서도 ‘조현병을 만드는 어머니’로 낙인찍혀 매서운 눈총을 받았다. 조현병 형제들 때문에 자신의 경력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일부 형제는 가족을 멀리하게 된다. 하지만 미미는 엉망이 된 가족의 모습을 숨기면서도 아픈 아들들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1970년대 조현병 연구가 진척되면서 이들 가족은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DNA 자료를 기증해 조현병 연구의 새로운 장을 펼치는 데 기여한다. 오빠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두 자매는 점차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딸들의 아픔을 외면했던 어머니를 이해하기에 이른다. 특히 막내딸 린지의 희생과 봉사는 가족들에게 큰 감동과 희망을 준다.저자는 이 책을 통해 조현병 연구의 획기적 발전사를 보여 준다. 형제 중 일부는 조현병을 억압적 성장 환경과 아버지의 욕심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학계는 유전적 문제에 주목한다. 갤빈 형제들에게선 공통적으로 ‘SHANK2’라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견됐고, 이는 조현병에 걸리지 않은 어머니 미미의 혈통에서 온 것으로 분석됐다. 아들 6명이 정신질환으로 고생하고 나머지 아들 4명과 딸 2명은 괜찮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어머니 쪽 돌연변이가 아버지 쪽의 또 다른 돌연변이와 뒤섞였을 가설이 제기된다. 조현병을 유발한 유전적 결함이 부모 어느 한쪽의 문제가 아니며, 둘의 유전자가 가족 전체의 삶을 바꿀 만큼 강력하고 독특한 ‘칵테일’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현병 치료법은 크게 진전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현병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이는 난청과 실명을 장애가 아닌 차이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현병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정확히 진단하기 어려운 질병으로 인식하게 됐다. 그리고 대다수 연구자들은 예방을 좌우명으로 삼아 최초의 정신착란 전에 조현병 발생 위험이 있는 사람을 정확하게 진단하고자 한다. 인터뷰를 통해 갤빈 가족 한 명 한 명의 초상을 그리듯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전개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하다. 무엇보다 아픈 형제들 사이에서도 인간다움을 재발견하는 가족의 이야기가 울림을 준다. “우리의 관계는 우리를 파괴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변화시키고 회복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기 때문에 인간이 되는 것이다”라는 린지의 고백을 통해 갈수록 파편화되는 우리 시대 가족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된다.
  • 제주 오영훈, 김포공항 악재 뚫고 ‘파란 깃발’ 확실

    제주 오영훈, 김포공항 악재 뚫고 ‘파란 깃발’ 확실

    더불어민주당 오영훈(53) 제주도지사 후보가 막판 ‘김포공항 이전 공약’ 변수에도 이변 없이 제주도민의 선택을 받았다. 오 후보는 2일 오전 1시 현재 개표율 76.14% 상황에서 54.65%를 득표, 39.87%를 얻은 국민의힘 허향진 후보에게 14.78% 포인트 차로 앞서 당선이 확실시됐다. 선거운동 중 여론조사에서 상대 후보를 큰 격차로 따돌렸던 오 후보는 선거 막판 민주당의 ‘김포공항 이전 공약’이라는 돌발 변수를 만났지만, 무난히 극복했다. 국민의힘은 김포공항이 인천공항으로 흡수되면 제주 관광객이 줄어 제주가 큰 타격을 받는다고 집요하게 공격했다. 오 후보는 2002년 우근민 지사 이후 20년 만에 민주당 제주도지사 타이틀을 갖게 되는 데다 도의원과 국회의원을 거쳐 도지사 자리까지 오르는 도내 첫 정치인으로 기록됐다. 오 후보는 이날 선거캠프에서 “새로운 미래를 위해 먼저 갈등과 분열을 끝내고 제왕적 도지사 시대도 막을 내리겠다”며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제주의 자존을 지켜 내겠다는 도민의 당당함, 새롭고 위대한 제주 시대를 반드시 열어 가야 한다는 도민의 염원이 만들어 낸 고귀하고 값진 도민의 승리”라고 밝혔다. 오 후보는 선거운동 초반부터 여론조사에서 줄곧 허 후보를 오차범위 밖인 10% 포인트 이상 큰 격차로 따돌렸다. 오 후보는 서귀포시 남원읍에서 4·3사건으로 증조부와 할아버지를 한꺼번에 잃어 희망이 무너졌던 3대 독자 집안에서 대를 잇는 장손으로 태어났다. 4·3과의 태생적인 인연은 제주대 총학생회장 시절을 거쳐 20대, 21대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4·3 진실규명에 앞장서게 됐다. 그는 특히 지난해 유족회 등과의 협의를 통해 4·3 희생자 보상 문제를 풀어내 ‘4·3 해결사’로 불린다. 부인 박선희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좌우명은 ‘희망은 힘이 세다’, ‘정도정행’(正道正行·바른 길로 가고 바르게 행하라)이다.
  • [자치광장] 재정분권이 진정한 지방자치의 지름길/유덕열 서울 동대문구청장

    [자치광장] 재정분권이 진정한 지방자치의 지름길/유덕열 서울 동대문구청장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는 말이 있다. 동학의 뿌리인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이 강조하며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한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이르는 말이다. 평생 정치적인 지주로 삼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일생 동안 강조하신 말이기도 한 이 말을 목민관으로 봉직하는 동안 좌우명으로 삼았다. 1995년 답십리 지역에서 서울시의원으로 출발해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구청장직을 수행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친절하고 청렴한 구청, 행정서비스 최우수 자치단체라는 성과로 보답했다. 이런 성과는 2010년 8년 만에 다시 도전한 민선 5기 구청장에 압도적으로 선택을 받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민선 2기 4년을 포함해 총 16년간 동대문구청장직을 수행하면서 어려운 과제를 해결했다는 뚜렷한 성과도 있었지만 지방자치의 한계로 인한 좌절도 많았다. 구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은 구민이 직접 뽑은 구청장에게 위임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아직까지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98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만든 헌법을 적용해 40년 넘은 오늘날에까지 그대로 적용하다 보니 40살 넘은 성년에게 돌쟁이 옷을 입힌 격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미완의 지방자치를 하고 있다고 보는 이유다. 우리나라에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된 것이 1991년이니 벌써 31년의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한 세대가 지나도록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재정분권의 문제는 완성도 높은 지방자치를 실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국가예산의 재원배분 구조를 살펴보면 국민의 세금 중 중앙정부에서 76%, 서울시에서 11%, 25개 자치구가 12~13%를 나눠서 갖는다. 이런 실정에서 전체 국고보조사업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복지 예산 규모는 국고 보조율에 비해 더 가파르게 상승했고, 최근 3년 동안 지방비 지출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우리 구의 경우에도 전체 구 예산 7360억원 중 53.7%인 3958억원이 복지예산으로 편성돼 있어 지방재정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서울의 인구는 1000만명으로 한 나라의 규모이며, 25개 자치구별 실정은 제각각이다. 각각의 실정과 규모에 맞는 예산배정을 통한 지방재정 확충이 재정분권 실현의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개헌을 통한 법령과 제도 정비로 재정분권을 실현하고 지자체의 특성에 맞게 예산을 집행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재정분권이 진정한 지방자치 실현의 지름길이고, 진정한 지방자치 실현이 지역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행복지수를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 왼 다리 의족으로 104일 연속 42.195㎞ 완주, 4390㎞ 놀라운 여정

    왼 다리 의족으로 104일 연속 42.195㎞ 완주, 4390㎞ 놀라운 여정

    한쪽 다리 밖에 없는 여성 마라토너가 104일 동안 매일 42.195㎞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스물다섯 살 때 희소암인 유잉 육종에 걸려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했던 재키 헌트브로에스마(46)가 의족을 찬 채 달린 놀라운 여정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나고 자라 네덜란드와 영국을 거쳐 지금은 미국 애리조나주 길버트에 살고 있는 헌트브로에스마는 지난 1일(이하 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익살스럽게 “휴식 첫 날, 연속 휴식일 세계기록에 도전 중”이라고 적었다. 간만에 일요일 느긋하게 잠에서 깨어난 그는 “내 일부는 이 일을 해냈다는 것을 완전히 기뻐했고, 다른 부분들은 내가 계속 달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더 단단해졌다고 느낀다”고 영국 BBC에 털어놓았다. 104일 동안 매일 하루 5시간 가량을 달리기에 바친 헌트브로에스마는 AP 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암 진단을 받은 뒤, 3주 만에 다리를 절단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았다”고 되돌아봤다. 처음 2년 동안은 달라진 삶에 적응하느라 힘겨웠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화를 냈고, 다른 취급을 받는 것에 당황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의족을 가리려 긴 바지를 입었다. 마흔이 될 때까지 가벼운 운동만 하던 헌트브로에스마는 6년 전 남편 에드윈을 따라 마라톤을 시작했다. 처음 남편의 장거리 달리기 대회를 응원 갔는데 그렇게 먼 거리를 달리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다. 자신이 마라톤에 빠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의사는 “의족으로 그렇게 멀리 뛰는 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곧 마라톤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각종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며 5㎞,10㎞,하프 마라톤(21.0975㎞)으로 거리를 늘린 헌트브로에스마는 2020년 트레드밀(러닝머신)에서 하루에 100마일(약 161㎞)을 달렸다. “난 ‘모 아니면 도’인 사람이다. 해서 스스로를 던져 버렸다. 난 한계를 밀어내길 좋아했고, 그것도 얼마나 빨리 밀어낼 수 있는지 보고 싶어했다.” 그 뒤 새로운 목표를 정했다. 미국 버몬트주에 사는 알리사 아모스 클라크가 팬데믹에 적응하기 위해 시작해 달성한 여성 최다 연속 마라톤 풀코스 완주(95일) 경신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지난 17일부터 헌트브로에스마는 매일 42.195㎞를 달렸다. 보스턴 마라톤 등 참여할 수 있는 마라톤 대회에는 참여했지만 매일 열리는 것이 아니어서 시골 길, 동네 주변, 날씨가 좋지 않으면 트레드밀 위에서도 달렸다. 남성 연속 마라톤 풀코스 완주 기록은 엔조 카포라소(이탈리아)의 59일 밖에 안된다. 그런데 울트라 달림이 히카르도 아바드는 2012년에 607일 연속 기록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공인받지 못했다. 헌트브로에스마는 원래 100일 돌파를 목표로 했는데 도전 중에 케이트 제이든(영국)이 101일 연속 마라톤 완주 기록을 세우자 상향 조정했다. 클라크와 제이든, 카포라소, 아바드 모두 비장애인이다.지난달 30일 104일째 완주에 성공한 헌트브로에스마는 ‘휴식’을 선언했고 SNS에 ‘104일의 기록’을 다양한 숫자로 남겼다. 104일 동안 4390㎞를 달렸고, 10족의 신발을 신었다. 하지만 그의 왼쪽 다리를 지탱한 의족은 하나로 충분했다. 영양제 400개와 피로회복제 45개, 땅콩버터와 젤리 샌드위치 100개, 200개의 삶은 감자, 208ℓ의 물, 200개의 젤리, 피자 20판, 여러 개의 도넛으로 몸에 에너지를 공급했다. “나는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좌우명으로 살아온 헌트브로에스마는 104일 동안의 완주를 SNS로 중계하며 많은 이에게 용기와 희망을 선사했다. 절단 수술을 받은 이들에게 의족, 의수 등을 제공하기 위한 기금 6만 7000달러도 모금했다. 3개월 정도 뒤에는 헌트브로에스마의 기록이 ‘공인’될 전망이다. 기네스 월드 레코드 대변인 어맨다 마커스는 “그의 도전에 대해 알고 있다. 기록을 확인하고 공인하는 데 12∼15주가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 두 아이의 엄마이며 교양 강연 등을 하는 그의 다음 목표는 오는 10월 386㎞의 모하비 사막 마라톤 도전이다.
  • 털털한 그들, 반상 위 적 탈탈 터는 그들… “한국, 최강 증명할 것”[스포츠 라운지]

    털털한 그들, 반상 위 적 탈탈 터는 그들… “한국, 최강 증명할 것”[스포츠 라운지]

    2003년 대회 이후 19년 만에 한중일 여자바둑 삼국지로 부활한 ‘2022 호반배 서울신문 세계여자바둑패왕전’(패왕전)의 한국 대표 5명이 확정됐다. 한국 여자바둑 1위 최정(26) 9단이 랭킹 시드로 선발됐고, 지난 14일 끝난 선발전에서 예상대로 랭킹 2위 오유진(24) 9단이 통과했다. 또 후원사 시드로 랭킹 3위 김채영(26) 7단이 지명됐다. 김채영 7단은 코로나19 확진으로 이번 대회 선발전에 나오지 못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기사 2명이 강력한 경쟁자들을 연이어 격파하고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처음 국제대회 국가대표로 선발된 허서현(20) 3단과 지난해 프로 입단한 이슬주(16) 초단이 주인공이다.지난 14일 대표 선발전에서 승리하고 인터뷰를 위해 만난 자리에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허 3단의 주도로 둘은 한 손씩 내밀어 하트를 만들며 사진 촬영 포즈를 취했다. 이 초단이 연습생 시절부터 둘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허 3단은 이번 패왕전의 국가대표 도전이 전환점이 됐다며 기뻐했다. 2019년 바둑대상 여자신인상을 받았던 허 3단은 “한동안 스스로 정체돼 있다고 생각했는데, 패왕전 덕분에 분위기 전환에 성공했다”면서 “한국 대표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준비해 후회 없이 대국하고 싶다”고 말했다. 프로 데뷔 만 1년도 되지 않아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린 이 초단은 “패왕전 본선 멤버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그냥 열심히 바둑을 뒀는데 운이 좋아 뽑힌 것 같다. 기분이 좋다”면서도 “본선에서 3연승 이상 거둬 팀의 우승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다부진 각오를 내비쳤다. 연승전 방식으로 펼쳐질 패왕전 첫 번째 승부의 관건은 선봉 기사가 연승을 올려 기세를 올릴 수 있느냐이다. 즉 이 초단이 가장 먼저 나서서 최대한 많은 중국, 일본 기사를 쓰러뜨려 주면 남은 기사들이 대국 준비하는 데 수월해진다. 두 번째는 과거 이창호 9단, 최근 신진서 9단이 농심 신라면배에서 보여 준 것처럼 믿을 만한 확실한 에이스가 있느냐인데, 이는 최 9단이 맡을 것으로 보인다. 이 초단은 이번 대회 예선에서 차주혜 초단, 박태희 3단, 김민서 초단, 김선빈 2단을 차례로 꺾었다. 준결승에서 만났던 2007년생 김민서 초단과는 입단 동기다. 입단 전부터 바둑 영재로 화제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김민서 초단은 토너먼트 두 번째 대국에서 국내 랭킹 4위 조승아 5단에게 백 반집승을 거두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 초단 또한 김민서 초단과의 대국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이 초단은 “유리했던 상황에서 한 번의 실수로 질 위기에 놓여 내심 포기한 상태였다”면서 “그런데 상대인 김민서 초단도 실수해서 이길 수 있었다. 정말 그 대국은 행운이 따랐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고 털어놨다. 허 3단은 김경은 3단, 디아나 초단, 김은지 2단, 박소율 2단을 꺾고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허 3단 또한 토너먼트 세 번째 대국에서 만난 여자바둑 세대교체의 선두주자인 김은지 2단이 가장 어려운 상대였다고 했다. 허 3단은 “가장 늦게까지 두기도 했고, 내용상으로도 복잡했다”고 설명했다. 허 3단은 가장 존경하는 기사로 이창호 9단을 꼽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이창호 9단을 존경했다. 이번에 같은 팀이 된 최 9단도 좋아하고, 그렇게 되고 싶다”면서 “바둑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지만, 최 9단은 그걸 뛰어넘은 것 같아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초단은 최 9단을 가장 뛰어넘고 싶은 기사로 지목했다. 이 초단은 “최 9단의 기록들만 봐도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여자 바둑계에 살아 있는 전설”이라면서 “최 9단 기록을 깨보는 게 내 목표”라고 말했다. 또 “신진서 9단을 존경한다. 상대를 압도하는 바둑 내용도 그렇고, 기전에서 우승할 때마다 기부하는 것도 인상적”이라면서 “인터뷰도 재밌게 잘하는 것 같아 배울 점이 많다”고 덧붙였다. 바둑이 궁극적으로 개인전이긴 하지만 이번 대회가 중국, 일본의 일류 기사들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국가대항전인 만큼 강한 팀워크가 필요하다. 프로 6년 차인 허 3단은 이번 대회 국가대표로 선발된 두 언니(최 9단, 오 9단)와도 친하고, 이 초단과도 친분이 두텁다. 허 3단은 “두 언니가 평소에도 (나를) 잘 챙겨 주고, 친하다”면서 “이 초단과는 입단 전부터 알고 지내서 편하다”고 했다. 프로로 갓 데뷔한 이 초단은 “최 9단, 오 9단은 존경하는 사범님들이지만, 뵌 적이 많지 않아 친하지는 않다. 허 3단은 좀 친한 언니”라고 했다. 대표팀의 중견급인 허 3단의 윤활유 역할을 기대해 볼 대목이다. 이 초단과 허 3단의 공통점은 ‘실리형’인 바둑 기풍과 털털하고 밝은 성격이다. 바둑과 마찬가지로 말에도 차분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평소 좌우명이 ‘즐기자’라는 이 초단은 “즐기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것이 없다”면서 “팀의 막내인 만큼 바둑으로도 젊은 패기를 보여 드리면서 제 역할을 다하고 싶다”고 웃었다. 이 초단은 대국 하루 전 손톱이 길면 꼭 깎고 가는 징크스가 있다고 했다. 징크스도 좌우명도 아직은 없다는 허 3단은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둘은 “여자바둑도 한국이 최강이란 걸 보여 주겠다”며 성격은 털털해도 상대는 탈탈 털어버리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이번 대회 본선 1차전은 다음달 22~ 28일 온라인 비대면 대국으로 펼쳐진다. 2차전은 오는 10월 열린다. 우승 상금은 1억원으로 일본의 센코배 월드바둑여류최강전(1000만엔), 중국의 오청원배 세계여자바둑대회(50만 위안)와 함께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본선에서 3연승하면 상금 200만원을 주고, 여기서 1승을 추가할 때마다 200만원이 더해진다. 10연승하면 2000만원이다. 출전 기사는 대국당 각자 120만원을 받는다. 대회 공식 개막식은 다음달 12일 서울 서초구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열린다.
  • 남을 기쁘게 하라… 불교, 이렇게 쉽죠

    남을 기쁘게 하라… 불교, 이렇게 쉽죠

    매년 500회 이상 법문 기록 모아이야기 덧붙여 3년 만에 책 출간“불교는 왜 이렇게 어렵습니까.” 오래전 한 택시 기사가 보각(68) 스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보각 스님이 “불교를 얼마나 배워 봤느냐”고 되묻자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택시 기사에게 “불교가 알고 보면 참 쉽다”고 답했던 스님이 이제 더 많은 사람이 불교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냈다. 보각 스님이 25일 서울 종로구 조계종 총무원에서 ‘기도로 사는 마음’ 출판 간담회를 통해 자신의 두 번째 책 소식을 알렸다. 책 제목인 ‘기도로 사는 마음’은 평소 스님이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아함경’의 “몸뚱이는 음식을 먹고 살고, 마음은 기도를 먹고 산다”란 문구에서 따왔다. 스님이 주지로 있는 전남 강진의 백련사에 템플스테이를 하러 온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이가 “불교가 이렇게 편하고 좋고 함께할 수 있는 가르침이구나”라고 느끼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작업이 3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보각 스님은 ‘불교 사회복지의 선구자’로 불린다. 스님으로서는 최초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중앙승가대에서 2000명이 넘는 제자를 길러 냈다. 승가원, 자제공덕회 등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회복지 시설도 그의 손으로 키웠다.많은 스님이 책을 내지만 보각 스님은 활발하게 활동한 것에 비해 출간한 책이 적다. 2019년 ‘눈물만 보태어도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가 첫 책이었다. “기록으로 남는다는 게 겁이 났다”는 스님은 앞으로 입적할 때까지 책을 딱 한 권만 더 낼 계획이다. 그동안 보각 스님이 했던 법문 중에 고르고 골라 선정한 문구를 책에 담았다. 스님은 “1년에 강의를 합쳐서 500회 이상 법문을 한 것 같다”면서 “수십년 동안 법문 노트에 기록을 남겼고, 그중 꼭 들려줘야겠다고 한 것을 발췌했다”고 설명했다. 꼭 불교와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논어, 속담, 해외 유명 인사의 명언 등 다양한 소재에서 발췌한 문구에 스님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사회복지에 앞장서 온 만큼 스님은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해서도 생각을 전했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차별’을 꼽은 스님은 “불교가 모든 중생의 행복에 앞장서는 종교인 만큼 그 역할 역시 차별을 해소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보각 스님은 또 “중생을 기쁘게 하는 마음을 자심이라 하고, 남의 고통을 없애 준다는 것이 비심”이라며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남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지 못하면 무자비하게 사는 것이다. 하루라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 바로 기도”라고 했다.
  • 35년 복무한 직업군인 인권운동 뛰어든 까닭

    35년 복무한 직업군인 인권운동 뛰어든 까닭

    안기부 지시로 운동권 병사 감시그때의 인연 30년 이어가다 전역“어려운 이들에게 도움 줘서 보람”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87년 부사관으로 입대해 30년 이상을 직업군인으로 살았다. 육군 원사로 전역할 당시 기업 두 곳에서 관리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그가 택한 건 경기 양주에 있는 집에서 서울 사무실까지 왕복 4시간의 출퇴근길이었다. 인생 2막을 인권운동가로 연 조용철(54) 인권연대 연구원은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며 웃어 보였다.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로 한 건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고등학교에서 3년간 군입대 장학금을 주고 군대 취직도 시켜 준대서” 입대를 결심한 뒤 육군 6군단 예하 포병대와 감찰부 등에서 35년 7개월을 복무했다. 그가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건 전역하기 훨씬 전의 일이다. 군 복무를 시작한 지 3년쯤 됐을 때 군수과 선임하사였던 그에게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운동권 학생 하나가 배치될 테니 특별관리를 해 달라”고 했다. 당시 “거리를 두며 감시하고 동향을 파악해 몰래 보고하던 보급계 병사”가 지금 그가 일하는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이다. 조 연구원은 “같이 일하다 보니 서로 정이 들어 얘길 많이 했다. 그때까진 군대만 알았는데 세상 보는 눈이 넓어졌다”고 떠올렸다. ‘그 병사’가 제대한 뒤에도 둘의 인연은 이어졌다. 가끔 만나서 술도 한잔씩 하다 보니 전역하고 시민단체에서 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고 했다. 마침 감찰 업무를 하면서 느낀 군대의 부조리한 모습에 실망도 쌓이고 있었다. 조 연구원은 “입바른 소리를 했다고 오히려 내가 감찰 대상이 되는 일을 겪었다. 더 오래 있다가 후회하는 것보다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오 국장에게 먼저 ‘취업 제안’을 건넸다. 조 연구원은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낼 돈이 없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이 한 해 4만명이라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이자 없이 벌금을 대출해 주는 공익사업인 ‘장발장은행’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일도 재미있다”고 말했다. 좌우명이 “절대긍정 과잉성실”이라는 조 연구원은 “틈틈이 오 국장과 함께 부사관 처우 개선을 비롯한 군대 개혁 방안도 의논한다”면서 “일단 지금 목표는 인권연대에서 꾸준히 오래 일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35년 짬밥 육군 원사, 인권운동가로 인생2막 도전

    35년 짬밥 육군 원사, 인권운동가로 인생2막 도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사관으로 입대해 35년을 직업군인으로 살았다. 전역식까지 치른 예비역 육군 원사는 인생2막으로 인권운동가를 선택했다. 기업 두 곳에서 관리직으로 채용하겠다는 제안도 거부하고 경기도 양주시에서 서울까지 왕복 4시간을 다녀야 하는 버거운 출퇴근 속에서도 조용철(사진·54) 인권연대 연구원은 28일 “보람과 재미를 느낀다”며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군대에서 몸에 밴 성실함과 솔선수범으로 인권운동가로 거듭난 전직 육군 원사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조 연구원이 군대에 들어간 건 1987년이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형편에 전액 장학금도 주고 군대 취직도 시켜 준다니까 고등학교 3년간 군입대장학금을 받았다”면서 “육군 6군단 예하 포병대와 감찰부 등에서 35년 7개월을 복무했다”고 말했다. 직업군인과 인권단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사실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 연구원은 “당시 내가 군수과 선임하사였는데 운동권 학생 하나가 배치될테니 특별관리를 해달라는 요청을 하러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나를 찾아왔다”고 회상했다. 당시 그가 “거리를 두며 감시하고 동향파악해 몰래 보고하던 보급계 병사”가 지금 그가 일하는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이다. 조 연구원은 “같이 일하다보니 서로 정이 들어서 얘길 많이 했다. 그때까진 군대만 알았는데 세상 보는 눈이 넓어졌다. 그러다 오 국장 부친과 인연이 닿아서 결혼식 주례도 해주셨다”고 말했다. 오 국장이 제대를 하고 천주교인권위원회를 거쳐 인권연대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교류가 계속 이어졌다. 가끔 만나서 술도 한 잔씩 하다보니 전역하고 시민단체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고 했다. 마침 감찰 업무를 하면서 느낀 군대의 부조리한 모습에 실망도 쌓이고 있었다. 조 연구원은 “입바른 소리를 했다고 오히려 내가 감찰 대상이 되는 일을 겪었다. 더 오래 있다가 후회하는 것보다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해서 오 국장에게 먼저 ‘취업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조 연구원은 인권연대에서 운영하는 ‘장발장은행’ 관련 업무를 담당한다. 장발장은행은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낼 돈이 없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이 한 해 4만명이라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이자 없이 벌금을 대출해주는 공익사업이다. 조 연구원은 “대출 안내도 하고 대출과 상환 관련 서류 처리도 하고, 대출 상환 안내도 한다”면서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일도 재미있다”고 말했다. 조 연구원의 좌우명은 “절대긍정 과잉성실”이다. 그는 “틈틈이 오 국장과 함께 부사관 처우개선을 비롯한 군대 개혁 방안도 의논한다”면서 “일단 지금 목표는 인권연대에서 꾸준히 오래 일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길섶에서] 29만원봉(峰)/박홍환 평화연구소장

    [길섶에서] 29만원봉(峰)/박홍환 평화연구소장

    산봉우리는 크고 높거나 사연이 깊지 않은 한 모양새를 빗대 불리는 경우가 많다. 용봉, 매봉, 학봉 등이 그렇다. 서울의 진산 북한산에도 그런 봉우리가 있다.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 중 서쪽 끝에 위치한 해발 300여m의 봉우리가 그렇다. 풀 한 포기 없이 너른 바위로 이뤄진 이 봉우리는 등산객들 사이에서 ‘대머리봉’으로 유명하다. 머리 숱이 많지 않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빗대 ‘전두환봉’이라고도 하고, 그가 생전 법정에서 “29만원밖에 없다”며 버텼던 양상을 풍자해 ‘29만원봉’으로도 불린다. “앞으로 나를 섬기라”는 당나라 황제의 회유를 자결로 거절했던 양나라 장수의 평생 좌우명은 ‘표사유피, 인사유명(豹死留皮 人死留名·표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이었다고 한다. 사람이란 죽어 명예로운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사죄 한마디 없이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전두환씨, 그 이름이 북한산에서 불명예스럽게 회자되는 사실을 알기는 할까.
  • 3만원 들고 무작정 상경한 부산 청년, 국민MC로 날다...허참 별세

    3만원 들고 무작정 상경한 부산 청년, 국민MC로 날다...허참 별세

    허참을 만난 것은 2016년 11월 말 그의 남양주 농장에서였다. 농장을 자신만의 휴식, 휴양 공간으로 활용하다가 외부 손님을 받는 전원형 레스토랑으로 리뉴얼해 ‘참스팜스’라는 간판으로 새로 문 연 직후였다. 마당 한켠에서는 아직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자기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사들의 삶을 긴 호흡으로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를 담당하고 있던 나는 MC계 거목인 그를 연예담당 기자를 통해 어렵사리 섭외할 수 있었다. 그는 농장 건물 내부를 1층부터 2층까지 안내하고 자신이 아끼는 뒷마당 텃밭도 구경시켜 주었다. 밭에서 채소들을 직접 길러 먹고 손님들에게도 내놓는다고 했다. 2층에는 MC, 가수, 배우로서 다양한 인생 궤적이 담긴 사진과 포스터 등이 전시돼 있었다. 수많은 전시물 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25년간 진행했던 KBS ‘가족오락관’의 네온사인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쉴새 없이 풀어내는 인생 이야기는 3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잠시 쉬어갈 때에는 오랫동안 쌓아온 자신의 건강지식을 풀어놓았다. 당시 그는 종편채널에서 ‘엄지의 제왕’이라는 건강정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특정 제품 홍보가 될 수 있어서 방송에서는 말하기 어렵지만, 김 기자에게만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라며 몇가지 ‘건강비책’을 일러주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때에는 “언제 가족들과 한번 놀러 오세요. 우리 농장에는 없는 게 없어요. 꼭 오세요 꼭.”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가 1일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73세. 그가 5년 전 풀어 놓았던 자신의 인생역정을 약간의 가필을 거쳐 다시 싣는다. 기사의 지면 게재일은 2016년 12월 8일이었다.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31>MC계의 ‘팔방미인’ 허참 허참(67)은 얼마 전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자기 농장을 일반에 오픈했다. 음식을 먹고 노래를 듣는 전원형 레스토랑으로 꾸미고 ‘참스팜스’라는 간판을 세웠다. 2층은 일종의 기록실로 만들었다. 자신의 예능 40여년 역사가 담긴 사진, 포스터, 앨범들을 한데 모았다. 자신이 직접 그린 회화 작품들도 걸었다. 그래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서울 여의도 KBS 녹화홀에서 25년 동안 실제로 썼던 ‘가족오락관’ 네온사인이다. “창고에 처박아 두면 그냥 썩는다고, 방송국에서 선물로 주더군요. 그걸 여기 가져와서 전원을 연결하니까 불이 들어오는데, 눈물이 납디다. 그 오랜 시간 등 뒤에서 나를 지켜보느라 고생했다. 이제는 내가 널 지켜봐 줄게, 이렇게 다짐했어요.”●1973년 여동생 결혼 밑천 3만원 들고 ‘무작정 상경’ -기차가 덜컹거리며 부산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속으로 웃음이 났다. 아무 대책 없는 ‘무작정 상경’의 주인공이 내가 되다니. 군에서 막 제대한 1973년의 어느 날이었다. 지갑 속엔 3만원이 들어 있었다. “오빠가 나중에 돈 벌면 몇 배로 갚아줄게.” 결혼 밑천 삼는다고 고이 모아 온 여동생의 돈이었다. -서울살이는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애초부터 내집 같은 것은 없었으니 군대나 고향 친구들 집을 번갈아가며 하루하루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정동 MBC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됐는데, 자전거로 채소나 생선 같은 것들을 배달해 주며 공짜 숙식의 대가를 치렀다. 그러고 있다 보면 코미디언이 됐든, MC가 됐든, DJ가 됐든 뭐라도 하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기회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그해 겨울 군대 친구와 함께 종로에 나갔다가 통기타 라이브 클럽 ‘쉘부르’를 지나치게 됐다. 문앞에 탄산음료 ‘오란씨’ 시음 행사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공짜 음료수 한 잔 얻어먹을 요량으로 안에 들어갔다. (입구에 유난히 코가 큰 사람이 서 있었는데, 쉘부르의 주인이자 당시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PD 겸 DJ로 활동하던 이종환 선생이었다) 무대에서는 이태원, 전언수씨로 구성된 통기타 듀오 ‘쉐그린’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노래를 마친 그들이 객석 손님들에게 경품을 나눠주는 행운권 추첨을 시작했다. 내가 당첨됐다. -“무대로 잠깐 올라오세요.” 나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내 말 몇 마디에 공연장은 폭소와 박수로 가득 찼다. 정신없이 웃던 이태원씨가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아, 그게…기억이 안 나네요.” “허 참, 자기 이름도 몰라요?” “앗,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나요? 저는 허참입니다.” 공연이 끝나고 이종환 선생이 나를 불렀다. “여기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월급은 없었다. 먹여주고 재워준다니 그걸로 감지덕지였다. 청소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틈틈이 손님들 신청곡 받아 노래를 틀어주는 게 나의 일이었다. 그러다 잠깐씩 무대에 올라 짤막하게 MC를 볼 일이 생겼는데, 차츰 “쉘부르에 명물이 하나 들어왔다”고 입소문이 났다. 날 보러 오는 손님들이 하나둘 늘면서 몇 달 후에는 어니언스, 쉐그린, 김정호, 김세화, 권태수 같은 포크 스타들의 공연을 진행하는 정식 MC로 승격이 됐다. 스탠딩 코미디와 노래를 섞은 ‘허참쇼’라는 코너도 만들어졌다.-MBC의 라디오 PD 겸 DJ였던 박원웅 선생이 어느 날 나를 불렀다. “우리 회사에서 ‘청춘은 즐거워’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DJ 한번 해 볼 생각 없나.”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전거에 동태 궤짝이나 채소 꾸러미를 싣고 지날 때 그토록 높게만 보였던 MBC 사옥. 그곳에 내가 입성한다.’ 나는 그때까지도 쉘부르의 객석에서 소파 몇 개 붙여놓고 슬리핑백에서 잠을 자는 신세였다. 노래 ‘편지’의 성공으로 형편이 나아진 어니언스 임창제가 물려준 슬리핑백이었다. 방송 DJ를 시작하면서 동대문 근처에 방을 얻은 나는 임창제의 슬리핑백을 의기양양하게 다른 친구에게 물려주고 쉘부르 시대를 마감했다. ●남다른 입담… 통기타 라이브 클럽 ‘쉘부르’에서 운명의 MC 제안 -우리 집안의 뿌리는 황해도다. 나도 1949년 거기에서 태어났는데, 이듬해 6·25 전쟁이 나자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월남을 했다. 어쩌다가 땅끝인 부산까지 와서 부민동에 터를 잡고, 부산지방 법원에 주사로 취직을 했다. 공무원 아버지를 둔 덕에 생활은 적당히 풍족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소고기 반찬을 싸 주면 나보다 못사는 아이가 배급받아온 옥수수빵과 바꿔 먹기도 했다. -그 당시 법원 주사 정도면 마음 먹기에 따라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정한 청탁으로 위에서 압력이 들어오자 신분증 집어던지고 며칠 동안 출근을 안해서 같은 부서 동료들이 와서 겨우 모시고 갔던 기억도 있다. 주변에서는 “그렇게 대쪽처럼 살면 뭐하냐. 실속 좀 차리지”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나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1956년 부민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에 나가 여러 번 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직접 그려 팔아 용돈을 벌기도 했다. 미술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었다면 남다른 끼와 말솜씨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소풍 가서 사회를 보는 일은 늘 내 차지였다. 그래선지 말이나 행동에 남다른 스타 의식이 강했다. 이를테면 아침에 교문에서부터 영화배우처럼 겉멋을 부리며 걸었다. 저 멀리 3층 교실 창문에서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여자애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과장되게 폼 잡으며 사진 찍히는 것도 좋아했다. 그때 사진을 지금 보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주위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만들었던 것은 나의 성우 흉내였다. ‘삼국지’, ‘수호지’,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라디오 드라마를 듣고 외워 성대모사를 하면 식구들, 친구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국어 시간에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미망인 모씨는~’으로 시작하는 고전 ‘조침문’을 ‘전설 따라 삼천리’의 성우 유기현씨 목소리로 읽어주면 교실은 난리가 났다. -웅변도 좋아해서 영도섬 등대 앞에 가서 소리 높여 목이 쉴 정도로 연습했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한번은 중학교 때 ‘북괴 공산주의’를 타도하자는 주제의 웅변대회에 나가 목청 높여 “이 어린 연사 소리높여 외칩니다”를 말하고 마무리 국면으로 들어가는데, 어떤 아저씨들이 학교 바깥에서 철조망에 개를 매달아 놓고 사정없이 몽둥이질을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때 개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 팔고 멍하니 서 있다가 고배를 마신 적도 있다.-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할머니가 등대 쪽에서 꼼장어 장사를 하셨는데 매일 같이 달려가서 꼼장어 먹고, 딱딱한 알사탕 입에 넣고 책가방 던져 놓고 물놀이를 했다. 앙장구(성게), 해삼, 멍게 이런 게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중학교 입학 이후 가세가 기울었다. 초등학교 때는 아무렇지 않게 싸가지고 다녔던 소고기 구경을 중학교 때부터는 거의 할 수가 없었다. “크면 반드시 정육점을 할 거야. 그래서 소고기를 실컷 먹으리라.” 공부도 못했고 가세도 기울어서 대학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영남상고에 들어갔는데, 막상 졸업을 할 때가 되니 아버지는 “네가 장남인데 대학을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재수를 시작했는데, 길게 하지는 못했다. 안 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공부에 대한 아쉬움은 지금도 크다. -1972년 군 복무 중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박정희 정부는 전군에 ‘문화선전대 경연 행사’를 열어 유신의 필요성을 병사들에게 홍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사단 웅변대회 선수로 뽑힌 나를 대대장이 불렀다. “이상용, 너는 오늘부터 웅변 대신에 유신헌법을 홍보하기 위한 문선대 경연 준비를 해라.” -유신헌법이 뭔지 내가 알 리 없었다.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우리 몸에는 우리 옷을 입어야 하는데, 유신헌법이야말로 우리 몸에 맞는 옷이다’란 내용을 주제로 코미디를 구성해 연기했고, 그걸로 사단에서 1등을 했다. 그때부터 MC 겸 코미디 담당으로 예하부대를 돌며 유신 홍보 공연을 다녔다. MC와 코미디언으로서 능력을 자연스럽게 기를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얼마 후에는 사단 내 방송 DJ도 맡게 됐는데, ‘쌀’을 ‘살’로 발음하고 ‘의사’를 ‘어사’라고 말하는 억센 부산 사투리가 문제가 됐다. 문선대 공연에서야 사투리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수단이었지만, 방송에선 아니었다. 교정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매일 책과 신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 또한 나중에 사회에 나와 큰 도움이 됐다. ●‘수그려라’가 제 좌우명… 저를 방송인으로 남게 한 건 8할이 ‘노력’ -박원웅 선생의 스카우트로 MBC 라디오 데뷔를 한 이후 몇몇 프로그램이 나를 더 따라왔다. 사람들은 나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리듬감 있는 말투를 좋아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위기가 찾아왔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가요계를 평정할 때였으니 1976년쯤인 듯한데, MBC 라디오의 간부 한 분이 나를 호출했다. “라디오 진행자를 모두 전문 아나운서로 교체하라는 지시가 위에서 내려왔다. 미안하다.” 교통정보 프로그램 ‘푸른 신호등’에서 하차하라는 말이었다. 방 한 칸 신혼살림에 아내는 첫아이를 임신한 상태. 세간이라곤 쌀통 하나뿐이고, 찬장도 없어 사과상자로 대신하고 있던 우리 부부였다. “저, 좀 더 잘하겠습니다. 이거 그만두면 생계가 막막해집니다.” 소용 없었다. 다시 실업자가 됐다. 폭음을 하고 들어가 아내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방송하는 사람은 방송국에서 안 불러 주면 끝이다. ‘푸른 신호등’에서 졸지에 잘린 뒤 나는 장사를 하기로 했다. MBC 근처에 신발가게를 차렸다. 동대문 시장에서 패션구두 같은 것을 떼어다 아내와 같이 팔았다. 조용필이나 이은하 같은 당대의 스타들이 찾아와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6개월도 안 돼 망했다. 장사는 말주변만 갖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었다. 묘하게도 신발가게를 폐업하자 연달아 방송 요청이 들어왔다. 잠깐 동안의 실업자 생활과 신발가게 실패를 통해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에 간단한 것은 없다. 무엇이든 필사적으로 해야 한다.’ -라디오로 주가가 오르면서 TBC ‘7대 가수쇼’ MC로 TV 데뷔를 했다. 운현궁 공개홀에서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 당대의 스타들과 인사를 했다. ‘내가 여기까지 왔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시 고려진씨와 짝을 이뤘는데 최초의 남녀 공동 MC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150명 정도의 여성 MC들과 호흡을 맞춰왔다. 얼마 후에는 MBC ‘토요일 밤에’와 함께 주말 저녁을 양분하고 있던 TBC ‘쇼쇼쇼’의 MC로 위키리(이한필)의 뒤를 이어 발탁됐다. 쇼쇼쇼에서 나와 최고의 콤비를 이뤘던 정소녀씨를 만났다. ‘허참’ 하면 ‘정소녀’, ‘정소녀’ 하면 ‘허참’이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나와 같이 MC를 보던 정혜경씨는 내 이름에 이어 자기 이름을 말하는 순서에서 돌연 ‘정소녀’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보기 드문 방송사고를 내기도 했다. -한창 때에는 새벽부터 심야까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방송을 했다. 아침에 ‘푸른 신호등’ 2시간 진행하고, 잠깐 쉬었다가 ‘싱글벙글쇼’ 2시간, 좀 있다가 ‘허참의 가요앙콜’ 2시간. 이런 식이었다. 방송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극심한 스트레스다. 수십년을 해도 마찬가지다. 거기에서 오는 긴장과 피로, 고독감을 술로 달래면서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무교동 식당들에서 배달시킨 짬뽕, 짜장면에 소주를 마셔가면서 방송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청취자들은 내 옆에 배달음식 빈 그릇과 소주병이 수북이 쌓여있는지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방송이 끝나면 심신이 헛헛해져 또다시 무교동 낙지골목 등을 훑고 다녔다. 그렇게 일에 술에 파김치가 돼서 집에 갔다가 새벽에 나오는 생활이 이어졌는데, 방송국에서 쓰러져 응급차로 실려간 적도 있었다. -나를 대표하는 ‘가족오락관’은 1984년 4월 3일 벚꽃이 한창일 때 처음 전파를 탔다.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공교롭게 마지막 1237회 녹화일이 2009년 4월 2일이었다. 하루도 어긋나지 않는 만 25년. 나의 청춘과 중장년이 그대로 녹아 있는 사반세기와 좀 더 따뜻하게 이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은 참 아쉽다. 새로운 포맷의 참신한 가족오락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해서 갑자기 관두게 됐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KBS는 가족오락관 후속으로 ‘가정오락관’이란 프로그램을 편성했지만, 몇 번 내보내고는 시청자 반응이 안 좋다며 폐지해 버렸다. 지금은 온 가족이 모여 볼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수그려라’가 나의 좌우명이다. 남을 존중하고 경청하려고 애쓴다. 남들 앞에 과하게 나서지 않으려 한다. 나는 항상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염두에 두고 무대에 오른다. 후배들한테 말한다. 분위기 뜨고 흥겹다고 해서 객석에 마이크 들이대며 반말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방송인으로서 나의 능력이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끼’는 타고났을지 몰라도 나머지를 채운 것은 나의 부단한 노력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젊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기 위해 시중에 있는 거의 모든 유머집을 구입해 외우고 또 외웠다. 소설이건 수필이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중요한 부분을 메모해 암기했다. 교수, 의사, 성악가, 요리사, 언론인 등 자기 분야의 고수들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겼다. 그들과의 얘기는 모두가 살아 있는 공부였고, 나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단련될 수 있었다. ■허참은 누구 본명은 이상용. 1949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민 MC’ 중 한 명이다. TBC 동양방송, KBS 한국방송, MBC 문화방송에서 수많은 TV 및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중에서도 26년 동안 진행한 KBS ‘가족오락관’은 그의 이름과 동일시된다. 코미디언, 가수,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영남상고, 동아대, 중앙대 국제경영대학원 수료 ▲TV 프로그램 TBC ‘7대 가수쇼’ ‘쇼쇼쇼’ ‘전국 TOP10 가요쇼’, KBS ‘가족오락관’ ‘도전! 주부가요스타’ ‘왕건오락관’ ‘지구촌 노래자랑’, MBC ‘젊음은 가득히’ ‘지붕뚫고 하이킥’, 대전MBC ‘허참의 토크&조이’, SBS ‘빙글빙글 퀴즈’ ‘잉꼬부부 재치부부’, MBN ‘엄지의 제왕’ ▲라디오 프로그램 MBC ‘싱글벙글쇼’ ‘푸른 신호등’ ‘청춘은 즐거워’, SBS ‘허참의 즐거운 저녁길’ ▲음반 ‘왜 몰라주나’(1976년) ‘추억의 여자·소낙비’(2007년) ▲제29회 한국방송대상(2002년) 제12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2005년) KBS 연예대상(2006년)
  • “저를 버티는 힘”…父 노태우 보며 견딘 딸 노소영 [노태우 별세]

    “저를 버티는 힘”…父 노태우 보며 견딘 딸 노소영 [노태우 별세]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로 26일 사망했다.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온 노 전 대통령을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의료진의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건강악화로 인해 연희동 자택과 병원을 오가며 칩거생활을 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 참석을 마지막으로 사망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2009년 10월 희귀병인 소뇌 위축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2011년 4월 기관지에서 침이 발견돼 제거 수술을 받았다. 2015년 12월에는 천식으로 서울대 병원에 9일간 입원했다. 최태원 SK 회장과 이혼 소송 중인 딸 노소영 아트센트 나비 관장은 어버이날을 맞아 “아버지가 오늘따라 두 눈을 크게 뜨고 계신다. 이때다, 싶어 평소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며 “아빠의 사랑 듬뿍 받고 자랐다. 그게 저를 버티는 힘”이라고 말했다. 노소영 관장은 올해 4월 10일 ‘아버지의 인내심’이란 글을 통해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어떻게 십 여년을 지낼 수 있을까? 나는 단 한 달도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운을 뗐다. 이어 “소뇌 위축증이란 희귀병인데 대뇌는 지장이 없어서 의식과 사고는 있다. (이것이 더 큰 고통이다.) 때로는 눈짓으로 의사 표현을 하시기도 하는데,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소통이 잘 되지 않으면 온 얼굴이 무너지며 울상이 되신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노소영 관장은 “또 한고비를 넘겼다. 호흡 보조장치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지상에서 아버지(그리고 어머니)께 허락된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확실한 교훈을 주셨다. 인내심이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티고 계신 아버지를 뵈면, 이 세상 어떤 문제도 못 참을 게 없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참.용.기.(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라)가 아버지의 좌우명이다. 정말 어려운 길임에 틀림없다”며 글을 맺었다. 노 전 대통령의 손녀이자 노소영 관장의 차녀 최민정씨 행보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최민정씨는 2014년 11월 재벌가 자제로서는 파격적인 해군 소위로 임관해 군생활에 나섰다. 중국에서 대학을 다닐 당시 아르바이트를 해 생활비를 충당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2017년 11월 중위로 전영한 최씨는 이듬해 중국 투자회사를 거쳐 지난 2019년 SK하이닉스에 입사해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 다시 도마 앞에 선 신재환… “신 키즈 생겼으면”

    다시 도마 앞에 선 신재환… “신 키즈 생겼으면”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의 마지막 금메달을 딴 신재환(23·제천시청)은 올림픽 이후 신분이 180도 바뀌었다. 방송가에서는 러브콜이 쏟아졌고 신재환은 외부 일정에 정신없는 날을 보냈다. 그러나 언제까지 체조 바깥에 머물 수는 없는 일. 신재환은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본업 모드로 돌아갔다. 방송가를 종횡무진하던 신재환은 지난 7일 진천선수촌에 다시 입촌했다. 오는 10월 일본 기타큐슈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3일 연락이 닿은 신재환은 “본업이 운동선수니까 운동에만 집중하려고 한다”며 본분을 되새겼다. 신재환은 충북 청주의 율량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남들보다 늦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체조를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누구보다 독하게 훈련했다. 신재환은 “좌우명이 ‘하루하루 후회 없이 하자’인데 오늘 성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늘 복기하며 연습을 후회 없이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고등학생 때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으면서 큰 위기에 처했다. 올림픽 당시 “그 얘긴 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신재환은 “MRI도 찍어봤는데 괜찮다고 했다. 앞으로 대회 준비하는 데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신재환은 올림픽 금메달을 결코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지 않았다. 신재환은 “내가 잘한 게 아니고 코치 선생님, 선수촌 감독, 코치 선생님, 한체대 교수님 등등 주위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덕분에 운이 좋았다”면서 “지역에서 운동하고 싶었는데 없는 TO를 만들어주신 제천시청 이광연 감독님도 감사하다”고 했다. 충북에는 제천시청밖에 체조팀이 없는데 그나마도 여자팀이라 신재환을 위해 이 감독이 어렵게 자리를 만들었다. 바로 3년 뒤 올림픽이 열리는 만큼 신재환이 기량만 유지한다면 메달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나 신재환은 “그런 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면서 “출전을 목표로 하겠다”고 몸을 낮췄다. 오히려 신재환은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훈련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 도마 금메달리스트 양학선(29·수원시청)을 보고 꿈을 키운 신재환은 ‘신재환 키즈’에 대한 기대감도 나타냈다. 신재환은 “밥줄을 끊어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신재환 키즈가 생기면 좋을 것 같다”면서 “기회가 올 때마다 항상 세게 잡았는데 후배들도 기회가 왔을 때 잘 잡고 하루하루 후회 없이 사는 걸 목표로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세계대회 향해 훈련 매진, 다시 도마 앞으로 돌아간 신재환

    세계대회 향해 훈련 매진, 다시 도마 앞으로 돌아간 신재환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의 마지막 금메달을 딴 신재환(23·제천시청)은 올림픽 이후 신분이 180도 바뀌었다. 방송가에서는 러브콜이 쏟아졌고 신재환은 외부 일정에 정신없는 날을 보냈다. 그러나 언제까지 체조 바깥에 머물 수는 없는 일. 신재환은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본업 모드로 돌아갔다. 바쁜 외부 활동을 마친 신재환은 지난 7일 진천선수촌에 다시 입촌했다. 오는 10월 일본 기타큐슈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3일 연락이 닿은 신재환은 “본업이 운동선수니까 운동에만 집중하려고 한다”며 본분을 되새겼다. 신재환은 충북 청주의 율량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남들보다 늦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체조를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누구보다 독하게 훈련했다. 신재환은 “좌우명이 ‘하루하루 후회 없이 하자’인데 오늘 성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늘 복기하며 연습을 후회 없이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고등학생 때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으면서 큰 위기에 처했다. 올림픽 당시 “그 얘긴 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신재환은 “MRI도 찍어봤는데 괜찮다고 했다. 앞으로 대회 준비하는 데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신재환은 올림픽 금메달을 결코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지 않았다. 신재환은 “내가 잘한 게 아니고 코치 선생님, 선수촌 감독, 코치 선생님, 한체대 교수님 등등 주위에서 많은 도움을 주신 덕분에 운이 좋았다”면서 “지역에서 운동하고 싶었는데 없는 TO를 만들어주신 제천시청 이광연 감독님도 감사하다”고 했다. 충북에는 제천시청밖에 체조팀이 없는데 그나마도 여자팀이라 신재환을 위해 이 감독이 어렵게 자리를 만들었다. 바로 3년 뒤 올림픽이 열리는 만큼 신재환이 기량만 유지한다면 메달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나 신재환은 “그런 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면서 “출전을 목표로 하겠다”고 몸을 낮췄다. 오히려 신재환은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훈련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 도마 금메달리스트 양학선(29·수원시청)을 보고 꿈을 키운 신재환은 ‘신재환 키즈’에 대한 기대감도 나타냈다. 신재환은 “밥줄을 끊어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신재환 키즈가 생기면 좋을 것 같다”면서 “기회가 올 때마다 항상 세게 잡았는데 후배들도 기회가 왔을 때 잘 잡고 하루하루 후회 없이 사는 걸 목표로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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