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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규 ‘은퇴 선언’…“지금도 자신있지만, LG 떠날 순 없었다”

    이병규 ‘은퇴 선언’…“지금도 자신있지만, LG 떠날 순 없었다”

    LG 트윈스의 영원한 ‘적토마’로 남을 것 같았던 이병규(42·등번호 9번)가 은퇴한다. LG의 프랜차이즈 스타 이병규는 25일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이병규는 이날 취재진들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메모해둔 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은퇴 소감을 밝혔다. 이병규는 “일본에서 돌아오면서 결심한 게 있었다. 후배들에게 밀리면 무조건 옷을 벗자, 창피하지 말자는 다짐을 했다”며 “솔직하게 말씀드려 지금도 안 뒤질 자신 있다”고 말했다. 이병규는 “하지만 스스로 자신이 있다고 해서 되는 부분이 아니더라. 그게 아쉬웠던 것 같다”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더 노력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됐다”고 했다. 이병규는 프로 20년 차에다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올해 2군에서는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올 시즌 대부분을 2군에서 보낸 탓에 무기력에 젖을 법도 했지만, 그의 2군 성적은 타율 0.401(147타수 59안타) 3홈런 29타점에 달했다. 이병규는 2군에서 맹타를 휘둘렀지만, 양상문 감독과 LG 구단은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올 시즌 LG 구단의 과감한 세대교체 드라이브 속에 베테랑 이병규는 갈 곳을 잃었다. LG는 팬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병규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잠실야구장에서 다시 한 번 뛰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다”면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다시 한 번 열심히 뛰고 싶었다”고 했다. 이병규의 바람은 정규시즌 최종전에서야 이뤄졌다. 10월 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 정규시즌 마지막 홈 경기에서 0-5로 끌려가던 4회말 대타로 나선 그는 올 시즌 최고의 투수로 거듭난 두산의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를 상대로 안타를 쳐내 잠실을 찾은 수많은 LG 팬들을 환호하게 했다. 이병규의 올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 타석이었다. 현역 연장의 의지를 접지 않은 이병규는 시즌 후 LG 구단과 협상을 이어갔으나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다른 구단 이적도 고려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그는 “답은 LG였던 것 같다. LG를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여기서 마무리를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렇게 이병규는 무려 17년간 입었던 줄무늬 유니폼을 벗었다. 사실상 강제 은퇴에 가까운 방식으로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한 이병규는 자신과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선배님들이 떠밀리듯이 나가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저는 저러지 말아야겠다고 했는데 나도 그런 모습으로 비칠 수 있을 것 같다”며 “더 이상은 그런 모습이 안 나왔으면 좋겠다. 그라운드에서 존경받고 멋진 모습으로 은퇴하는 선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병규는 향후 진로에 대해서는 “쉬면서 생각해 보겠다”며 말을 아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동산 왕 되겠다”고 3~4시간 자며 버틴 ‘아웃사이더’

    “부동산 왕 되겠다”고 3~4시간 자며 버틴 ‘아웃사이더’

    독일 이민자 집안 5남매 중 넷째… 백인 거주지서 성장 선생님에게 주먹질하던 다혈질… 부모가 군사학교 보내 수금으로 시작해 부동산 재벌… 네 차례 도산 경험도 신문 읽기로 하루 시작… “넌 해고야” 리얼리티쇼 스타덤 막말·성추문 파문 딛고 ‘역대 최고령 70세’ 취임 기록 성공한 사업가에서 방송사 인기 리얼리티쇼 진행자를 거쳐 백악관 주인이 된 도널드 트럼프(70)는 ‘미국 우선주의’를 기치로 내건 아웃사이더 돌풍의 주역이다. 1946년 6월 14일 뉴욕시 퀸스에서 태어난 트럼프는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와 어머니 메리 애니 사이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매리엔 트럼프 배리(78) 미 연방 제3항소법원 판사가 큰누나이며, 작은누나 엘리자베스 트럼프 그라우와 남동생 로버트 트럼프가 있다. 그의 형이었던 프레드 주니어는 1981년 43세의 나이에 알코올 중독으로 숨을 거뒀다. 트럼프 집안은 독일 서남부 카를슈타트 출신인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드룸프가 16세 때인 1885년 미국에 이민 오면서 트럼프 일가를 이뤘다. 1892년 미국 시민이 된 드룸프는 미국식 이름인 트럼프로 이름을 바꾸고 숙박과 식당 사업을 해 큰돈을 모았다. 트럼프가 자란 뉴욕 퀸스는 백인 이외에는 거의 살지 않는 동네였다. 트럼프는 나중에 이곳에서 자란 것을 “오아시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배타적 이민정책의 뿌리가 이곳에서 시작됐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트럼프는 어린 시절 방이 23개, 화장실이 9개나 되는 대저택에서 보냈다. 엄격한 가정교육에도 트럼프는 사고뭉치였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을 때려 눈 주위를 멍들게 할 정도였다. 아버지의 영향력 덕분에 퇴학 대신 가벼운 근신 처벌만을 받았다. 트럼프의 아버지는 그의 이런 성격을 걱정해 13세가 되던 1959년 트럼프를 뉴욕군사학교에 보냈다. 이곳에서 야구팀 주장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일부에서는 당시 가혹한 신고식과 폭력이 난무하는 군사학교 문화에 잘 적응했다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과 승리’ 욕망을 내면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군사학교시절 야구에 뛰어난 기량을 보인 그는 지역신문에 ‘트럼프가 뉴욕군사학교의 승리를 이끌다’라는 제목의 기사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공사현장에 다니던 그는 13세 때 이미 불도저를 직접 운전하며 일을 도왔다. 1964년 뉴욕군사학교를 졸업한 트럼프는 배우나 프로듀서가 되고 싶어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영화학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뒤를 따라 부동산사업에 뛰어들었다. 뉴욕 브롱크스에 있는 가톨릭계 대학 포덤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해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에 편입했다. 그는 와튼스쿨에 편입하자마자 수강한 부동산개발 과목 첫 시간에 교수의 “왜 이 과목을 수강하는가?”라는 질문에 “저는 뉴욕 부동산업계의 왕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연방주택관리국의 저당권 상실 명단에서 정부 융자를 받았다가 저당권을 잃은 건물의 목록을 살피는 게 취미였다. 사업적 수완을 드러내자 아버지는 트럼프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1968년 대학을 졸업한 뒤 트럼프는 임대료를 수금하러 다니는 일부터 시작했다. 아버지로부터 1971년 ‘엘리자베스 트럼프 & 선’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사명을 지금의 트럼프 그룹(The Trump Organization)으로 바꿨다. 하루에 3~4시간밖에 자지 않을 정도로 일 중독인 그는 특히 새벽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신문 읽기였다. 트럼프는 “나는 다른 많은 사업가가 그러는 것처럼 경제면만 읽는 게 아니라 시간이 되는 한 다양한 분야의 기사를 읽으려고 노력한다”면서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작 이번 대선에서 미국의 주요 언론 매체 100곳 중 트럼프를 지지한 언론사는 라스베이거스 리뷰저널과 플로리다 타임스유니언 등 2곳에 불과했다. 현재 포브스 추산 37억 달러(약 4조 2000억원)의 재산을 가진 트럼프지만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카지노를 세웠다가 도산하는 등 1991년부터 2009년까지 4차례의 도산을 겪기도 했다. 기업가로 성공한 트럼프가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한 NBC의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Apprentice) 덕분이었다. 견습생 참가자가 트럼프의 회사를 연봉 25만 달러에 1년 계약으로 경영하는 조건으로 경쟁을 벌이는 프로그램이었다. 매회 트럼프가 1명씩 해고해 마지막에 살아남은 1인이 승자가 되며 계약을 따낸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넌 해고야!”라는 말을 유행어로 남겼다. 기업인과 방송인으로 성공을 거둔 트럼프는 정치에도 눈을 돌렸다. 2000년 대선에서 개혁당 소속으로 출마해 대권을 노렸으나 경선에서 탈락했다. 그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기보다 편의에 따라 지지 정당을 바꿨다. 공화당(1987∼99년) 당적을 가졌다가 개혁당(1999∼2001년), 민주당(2001∼09년)을 거쳐 2009년 공화당으로 돌아왔다가 탈당했다. 2012년에 다시 공화당에 입당했다. 트럼프는 2015년 6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표어를 내걸고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만 해도 트럼프의 출마는 기업인의 외도로 여겨지며 비웃음을 샀다. 경선 과정에서의 히스패닉과 무슬림에 대한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발언은 오히려 기성 정치권에 불신을 드러내던 계층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무려 16명의 쟁쟁한 경쟁자를 제치고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는 데 성공했다. 지난 7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트럼프가 대선주자로 선출됐지만 마지막까지 그와 경선을 벌였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트럼프 지지 선언 대신 “양심에 따라 투표하세요”라며 갈등을 겪었다. 공화당 지도부의 도움 없이 필마단기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맞대결을 벌인 그는 세 차례 진행된 TV토론에서도 클린턴을 향해 ‘추잡한 여자’(nasty woman)와 같은 막말을 내뱉은 데다 토론을 앞두고 불거진 음담패설 파문 등으로 지지율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특히 3차 TV토론에서 선거결과 불복을 시사해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 11일을 앞두고 터진 연방수사국(FBI)의 이메일 스캔들 재수사와 양극화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던 백인 노동자 계층이 대거 투표장을 찾으면서 판세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역대 미국 대통령 최고령 취임 기록도 갈아치웠다. 종전 기록 보유자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만 69세 349일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엔터테이너 기질이 강하고 여성편력이 있는 그는 첫째 부인 이반나 트럼프, 둘째 부인 말라 메이플스와 각각 이혼한 뒤 2005년 슬로베니아 출신 모델 멜라니아 트럼프와 세 번째 결혼했다. 5명의 자녀 중 출중한 미모와 뛰어난 능력, 언변을 자랑하는 이방카를 총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방카와 2009년 결혼해 트럼프의 사위가 된 재러드 쿠슈너(35)는 현재 정권인수위 팀을 꾸린 실세 중 실세다. 그는 최근 자신이 좋아하는 책으로 각각 1987년과 1990년 출간된 본인의 자서전 ‘협상의 기술’(The Art of the Deal)과 ‘정상에서 살아남기’(Surviving at the Top)를 꼽았다. 그는 1941년 영화 ‘시민 케인’과 1950년 영화 ‘선셋 대로’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국내 첫 PGA 60+α…18명 주인공 누구

    78명 출전… 인비테이션급 대회 총상금 105억원… 10년간 개최 ‘60명+α, 18자리의 주인은 누가 될까.’ 내년 10월 한국땅에서 열리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CJ컵@나인브릿지’의 출전 선수는 모두 78명이다. 통상 156명의 일반적인 풀필드 대회에 견줘 ‘인비테이셔널급’이다. 이른바 ‘알짜배기급’만 대회에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대회의 질을 높이고 품격까지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국내 첫 PGA 투어 대회를 개최하는 CJ그룹의 의중이다. CJ는 24일 서울 중구 퇴계로의 자사 인재교육원에서 열린 PGA와의 대회 협약식에서 총상금 925만 달러(약 105억원)를 걸고 향후 10년 동안 이 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서울신문 10월 18일자 27면> 이날 협약식에서 경욱호(50) CJ마케팅 부사장은 “매년 상금을 올려 경쟁력을 유지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는 PGA 투어 메이저대회 중 하나인 브리티시오픈을 넘어선 이 대회의 총상금을 월드골프챔피언십(WGC) 대회 총상금을 추월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복안으로 읽힌다. 한 시즌 네 차례의 WGC 시리즈 대회 총상금은 각 950만~975만 달러다. 또 지난주부터 시작된 2016~17시즌 기준으로 가장 많은 총상금이 걸린 대회는 ‘제5의 메이저대회’로 불리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으로 1050만 달러(약 116억원)에 이른다. 4대 메이저 가운데 최종전인 투어챔피언십도 같은 액수다. 마스터스 토너먼트와 US오픈은 나란히 1000만 달러(약 110억원)를 유지하고 있지만 브리티시오픈만 845만 달러로 다소 적은 편이다. 이제 관심은 몇 명의 국내선수가 참여할 수 있느냐에 모인다. 컷오프 없이 나흘 동안 치러지는 이 대회에 나서는 PGA 투어 선수들은 상금 랭킹 60위까지다. 나머지 18명은 전적으로 대회 메인스폰서인 CJ의 몫이지만 어떤 기준에 의해서 몇 명의 국내 선수, 혹은 외국 선수를 뽑을지는 아직 PGA 측과의 협상 과제로 남아 있다. 우승 상금은 통상대로 총상금의 18%인 160만 달러 수준으로 PGA·CJ 간 의견이 접근된 것으로 알려졌다. CJ 측은 대회 우승으로 PGA 투어에 무혈입성할 수 있는 ‘남자 신데렐라’의 예비 후보들을 확보한다는 취지에서 일단 최소 10명을 국내 선수 중에서 선발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다. 대회 우승자는 향후 2년 동안의 PGA 투어 전 경기 출전권을 챙길 수 있다. 이 밖에 중국과 일본 투어에서 일정 자격을 갖춘 ‘스타급’들과 출전 자격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후원사에 주어지는 ‘초청선수 선발권’의 혜택을 받게 될 아마추어 선수들도 PGA 측과 상의해야 할 부분이다. 10명 이상으로 예상되는 KPGA 투어 소속 선수들의 선발 기준도 스폰서인 CJ와 KPGA가 공정하고 면밀하게 협상해야 한다. 현재 시행하고 있는 대상포인트 순위대로 할지, 상금 순위대로 자를지, 아니면 별도의 커트라인 기준을 새로 만들어 새 시즌이 시작되는 내년부터 운용할지 등을 포함해 처음 열리는 PGA 투어 대회를 치르기 위한 적지 않은 과제가 산처럼 쌓여 있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트럼프 “쿠바, 특정 요구조건 충족하지 않으면 외교관계 종전으로 돌릴 것”

    트럼프 “쿠바, 특정 요구조건 충족하지 않으면 외교관계 종전으로 돌릴 것”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경우 쿠바가 ‘특정 요구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뤄놓은 쿠바와의 외교 관계 회복을 종전으로 되돌리겠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16일(현지시간) 저녁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열린 유세에서 이같이 말했다. ‘특정 요구조건’에는 종교와 정치적 자유의 보장, 수감된 모든 정치범의 석방 등이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트럼프는 “공산당 압제에 맞서 싸우는 모든 쿠바인 편에 설 것”이라며 미국과 쿠바의 관계복원 협상이 카스트로 정권에만 이익이 되는 “일방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이같은 발언은 쿠바와의 관계 복원을 지지한다던 종전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10월 일간지 ‘데일리 콜러’에 “50년이면 충분하다”면서 미국과 쿠바의 관계 정상화를 지지하지만 더 나은 조건으로 협상을 타결하길 바랐다고 말한 바 있다. 오바마 정부는 2014년 12월 쿠바와의 관계복원을 선언했고 지난해 5월 쿠바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33년 만에 삭제했다. 같은 해 7월에는 1961년 외교단절 이후 54년 만에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을 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올해 3월 미국 대통령으로는 88년만에 쿠바를 방문해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성주투쟁위 사드 배치 제3후보지 협상 가능성 내비쳐

    성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철회투쟁위원회(이하 투쟁위)와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오는 17일 만남에서 사드 배치 제3후보지에 대해 논의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투쟁위 이재복 공동위원장은 12일 “오는 17일 오후 2시 투쟁위 임원 20여명과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성주군의회에서 간담회를 갖는다”면서 “성산 포대가 왜 사드 배치 최적지로 결정됐는지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제3 후보지와 관련, 그는 “투쟁위 측의 협의 대상은 아니지만, 상대(국방부) 측에서 이야기를 꺼내면 할 수 없지 않겠느냐”며 협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 않았다. 이는 투쟁위 측이 제3 후보지에 대해서는 협의를 않겠다던 종전 강경 방침에서 후퇴한 것으로 앞으로 논의 본격화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이런 가운데 성주군 초전면에 있는 롯데 스카이힐 성주CC가 제3의 사드 배치 장소로 급부상하고 있다. 국방부 유재승 정책실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최근 2차례에 걸쳐 롯데CC를 찾아 지형을 살펴보고 간 것으로 확인됐다. 그간엔 수륜면 까치산(해발 571m)·칠봉산(517m), 금수면 염속산(872.5m), 벽진면 빌무산(783m) 등이 제3후보지로 거론됐다. 투쟁위는 8·15 광복절에 815명 삭발식과 함께 열려고 했던 성산포대에서 성 밖 숲으로 이어지는 평화의 인간띠 잇기 행사를 27일 개최하는 것으로 전격 연기했다. 성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EU 브렉시트 협상대표에 佛출신 강경론자

    EU 브렉시트 협상대표에 佛출신 강경론자

     유럽연합(EU)과 영국의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협상이 강경한 원칙주의자들끼리의 격전장이 될 전망이다.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27일(현지시각) 영국과의 브렉시트 협상을 이끌 협상대표로 프랑스 정치인 출신인 미셸 바르니에 전 EU 집행위원을 임명했다고 AFP 등이 보도했다.  융커 위원장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친구인 미셸 바르니에가 이 중요하고 도전적인 책무를 받아들여 매우 기쁘다”면서 “그가 이 새로운 도전에 적임자이고, 영국과 새로운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바르니에 협상대표는 프랑스 외무장관과 농업장관을 지냈고 지난 2010년부터 2014년까지 EU집행위에서 내부시장 및 서비스 담당 집행위원을 역임하며 유로존의 국가부채 위기를 해결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오는 10월 1일 공식 취임할 예정이지만 브렉시트 협상은 리스본 조약 50조에 따라 영국이 EU에 공식으로 탈퇴 의사를 통보해야 개시되며 2년간 최종 타결에 이르지 못하면 영국은 자동으로 EU에서 탈퇴하게 된다. 하지만 영국 측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탈퇴협상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바르니에 협상대표는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영국과의 협상을 책임지게 돼 영광스럽다”고 밝혔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EU 집행위가 바르니에를 협상대표로 임명해 브렉시트 협상에서 영국을 강경하게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그는 EU 집행위원 시절에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중심 규제를 강조한 원칙주의자다.  텔레그래프는 프랑스의 보호무역주의자인 바르니에 대표가 자유시장을 추구하는 영국식 앵글로색슨 자본주의 모델을 반대하는 이로도 유명하다고 소개했다.  바르니에 협상대표는 EU 집행위원이던 2013년 EU 회원국이면서도 EU의 금융 서비스 규제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영국을 비판했다. 그는 EU 집행위에서 물러나고서도 영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태도를 유지했다고 EU 외교관들은 전했다.  한 외교관은 “바르니에는 영국의 ‘소울메이트’와는 거리가 멀다”면서 “그는 냉정한 협상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럽에서는 이미 EU와 영국의 협상이 순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영국 쪽에서 브렉시트 협상에 나설 대표인 데이비드 데이비스 브렉시트 장관도 만만치 않은 원칙주의자로 평가받는 인사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유럽 통합에 회의적 입장을 견지해온 데이비스 장관은 브렉시트 협상 테이블에서 강경한 태도로 맞설 적임자라는 이유로 낙점됐다.  데이비스 장관은 EU 단일시장 접근과 관련해 무관세 접근을 가장 가능성 있는 결과로 본다. 그는 EU가 단일시장에 대해 이기적인 태도로 세계무역기구(WTO) 규정과 추가 부담금을 고집하고 있다며 EU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바르니에 협상대표와 데이비스 장관은 1996년 각각 프랑스와 영국에서 같은 직책인 유럽 장관을 맡아 이미 친분이 있는 사이다. 현재로서 영국과 EU의 브렉시트 협상에서는 단일시장 접근권이 가장 큰 쟁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영국은 노동을 위한 다른 회원국 국민의 영국 이주를 통제하면서도 종전처럼 EU 시장을 무역장벽 없이 누비고 싶다는 의욕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EU에서는 이주노동의 EU의 기본권이라며 영국의 이 같은 요구를 자국 이익만을 노리는 부당행위로 일축하고 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26만 희생’ 콜롬비아 내전 50년만에 종식

    무장해제·마약밀매 퇴치 등 합의 서명식에 반기문·카스트로 참석 평화협정 비준 국민투표만 남아 콜롬비아 정부와 좌파 반군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50여년에 걸친 내전을 끝내기 위한 최종 휴전에 합의, 합의문에 서명한다고 AP와 AFP 통신 등이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콜롬비아 정부와 FARC는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에서 “콜롬비아 정부와 FARC 대표단은 최종적인 휴전과 적대 종식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양측은 23일 쿠바 아바나에서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과 로드리고 론도뇨 FARC 지도자가 합의문에 서명하고 50여년에 걸친 적대 관계를 청산한다. 역사적인 서명식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해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등도 참석한다. 양측이 발표하는 합의문에는 최종 평화협정 체결 후 7000여명에 달하는 FARC의 무장해제 장소와 방식, 이들의 신변 안전보장방안 등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산토스 대통령은 지난 20일 각료회의 뒤 “다음달 20일 콜롬비아의 독립기념일 전에 3년 넘게 이뤄진 평화협상을 끝내기를 기대한다”고 말해 협상에 진전이 있음을 시사했다. 양측의 서명이 이뤄지면 곧바로 휴전이 시작된다. 양측이 협상의 최대 쟁점 중 하나였던 무장해제를 포함한 종전에 합의하면서 평화협정 체결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유엔은 지난 1월 양측 요청에 따라 1년간 FARC의 무장해제와 쌍방 정전을 감시할 비무장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양측은 협상 과정에서 토지 개혁과 FARC의 정치 참여, 마약밀매 퇴치, 희생자 보상 등의 안건에는 합의했다. 정전안에 합의하면 평화협정 비준을 위한 국민투표 방안만 남는다. 이와 관련해 산토스 대통령은 양측의 합의를 바탕으로 마련한 평화협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예정이다. 산토스 대통령은 국민투표에서 평화협정안이 부결될 경우 반군과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한 증세를 검토하겠다고 해 야당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콜롬비아 정부와 FARC의 평화협정 체결 협상은 2012년 아바나에서 시작됐다. FARC가 지난해 7월 일방적인 정전을 선언하고 정부가 FARC에 대한 공습을 중단했지만 반군 해산 문제 등을 놓고 양측은 이견을 노출해 왔다. 1960년대 농민 봉기로 시작된 콜롬비아 내전은 좌파 반군과 우파 민병대, 마약조직 등이 가세하면서 50년 넘게 이어졌다. 이로 인해 26만여명이 사망하고 4만 5000명이 실종됐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김종인 대표 “새누리당, 선거 결과 승복해 원 구성 협조해야”

    김종인 대표 “새누리당, 선거 결과 승복해 원 구성 협조해야”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는 8일 20대 국회 원 구성이 지연되고 있는 데 대해 “새누리당이 선거 결과에 승복을 하고 하루빨리 원 구성이 되도록 협조해주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김 대표는 이날 국회 비대위 회의에서 “여당 일각에서는 여당이 단독으로 모든 걸 해야 일이 빨리 결정될 것 같지만, 지금 시대가 그렇지 않고 우리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엄연히 더민주가 제1당이 됐으면 종전의 의회 관행상 1당이 국회의장을 차지하는 건 더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이걸 갖고 새누리당이 종전 여당의 관행 등을 운운하면서 반드시 의장을 차지해야겠다는 얘기를 해 어제 실질적으로 개원이 불가능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앞서 국민의당이 국회의장 자유투표를 제안한 데 대해서는 “여소야대 상황에서 종전의 룰(규첵)을 지키지 않고 투표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대표는 또 “경제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고 환경 문제도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며 “여야가 서로 상식 선에서 양보를 하고 타협을 해야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씨줄날줄] 트럼프의 ‘상술 외교’/구본영 논설고문

    [씨줄날줄] 트럼프의 ‘상술 외교’/구본영 논설고문

    미국 공화당의 사실상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외교 전략을 둘러싼 베일이 살짝 걷혔다. 그제 그의 외교 담당 보좌역인 왈리드 파레스 미 BAU국제대학 부총장이 한·미 동맹과 북핵 해결 4단계 전략 등을 밝히면서다. 과도한 미국 중심주의와 거친 막말에 가려졌던 그의 외교 정책의 속살이 일부 드러난 셈이다. 파레스는 “(트럼프가 집권하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동맹인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군 주둔비 증액을 요구하면서 한·일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강변해 온 트럼프의 종전 입장과는 대조적 자세였다. 트럼프는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더라도 알 바 아니라는 투로 한·일 양국에 “행운을 빈다”고 냉소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외교 복심(腹心) 격인 파레스는 “북한이나 다른 국가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면 한국을 지킬 것”이라고 눙쳤다. 특히 “한국의 방위비 100% 부담도 협상 테이블에 올릴 최대치”라며 협상으로 조정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는 트럼프가 외교도 비즈니스 협상처럼 접근한다는 뜻일 게다. 미 정가의 이단아 트럼프가 집권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경우 우리 외교 당국이 그의 장사꾼 기질을 십분 고려해야 할 이유다. 사실 부동산 재벌인 그는 과거 한국에서 상당한 이익을 챙겼다. 대우건설이 서울 여의도 등 전국 7곳에 지은 주상복합아파트 ‘트럼프 월드’가 그 증거다. 그는 브랜드 사용료 명목 등으로 600만∼700만 달러를 챙겼다는 후문이다. 당시 트럼프는 추후 아파트에 문제가 생기면 그의 이름을 언제든 뗄 수 있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명기할 만큼 타고난 상술을 발휘했다고 한다. 물론 기업인이라고 해서 그를 외교 문외한으로 단정하는 건 신중하지 못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미 역대 정부에서 힘깨나 쓴 국무·국방 장관은 군이나 외교관 출신이 아니라 대개 기업 최고경영자들이었다. 존 F 케네디 정부에서 베트남전을 치른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전직은 포드자동차 사장이었다. 올해 PC게임 개발자로 변신해 화제를 모은 도널드 럼즈펠드도 마찬가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국방장관으로 장수했던 그는 제너럴인스트루먼트 등 민간 기업 CEO를 지낸 인물이다. 트럼프가 앙숙이었던 폭스TV의 인기 앵커 매긴 켈리와 단독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고 한다. ‘빔보’(외모는 매력적이지만 머리가 빈 여자)라는 막말로 조롱하던 그녀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화해한 것이다. 까닭에 트럼프의 외교 노선을 고정불변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을 듯싶다. 그렇다면 대미 외교에서 당장 신경 써야 할 포인트도 분명하다. 트럼프의 일천한 외교 정책상 식견이나 부박한 레토릭에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그의 숨은 외교 브레인들과의 네트워크 부재를 먼저 걱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kr
  • 참사 7년 만에… 용산 4구역 공공·상업지구 탈바꿈

    주상복합 4개 동·업무시설 등 2020년까지 5만 3066㎡ 개발 철거민에게 식당 운영권·입주권 용산 4구역과 구룡마을 등 꼬여 있던 서울의 개발사업이 속도를 낸다. 이 두 지역은 개발과정에서 다수 철거민이 사망하는 등 대형화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서울시는 용산구 한강로 3가 국제빌딩 인근 용산4구역 정비계획 변경안을 통과시켰다고 7일 밝혔다. 용산 4구역은 2009년 1월 20일 강제철거에 반대하던 세입자들을 경찰이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세입자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을 당한 용산참사의 현장이다. 당시 진압작전의 책임자였던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경찰청장으로 내정된 상태에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했다. 서울시도 개발 과정에서 철거민과 개발사, 토지주 간의 갈등을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2011년 8월 시공사인 삼성물산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조합원들도 대출금 2000억원에 대한 이자 비용을 부담하게 돼 파산자가 나오는 등 피해를 받았다. 용산4구역은 사업부지 5만 3066㎡에 31∼43층 주상복합 4개 동과 34층 업무시설 1개 동, 5층 규모 공공시설, 주상복합 1155가구 (임대 197가구)로 개발된다. 완공 시점은 2020년이다. 철거민과 유족들에게는 임시식당(함바집) 운영권과 상가 우선입주권이 주어졌다. 철거민을 대신해 협상에 나섰던 김덕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인권위사무국장은 “삼성물산이 사업을 포기하면서 약속했던 철거민 대책을 이행할 주체가 없어져 난감했는데 서울시 전문가와 코디네이터가 중재를 해줘, 합의가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사업이 지지부진했던 강남 구룡마을 개발사업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구룡마을은 2011년 개발이 결정됐으나 개발 방식을 놓고 서울시와 강남구의 갈등으로 사업이 장기 표류했다. 2014년 8월 도시개발구역 지정이 해제됐지만 같은 해 11월 대형화재가 발생해 개발 논의가 재개됐다. 시는 개포동 구룡마을 4개 단지는 SH공사가 직접 건설하고 2개 단지는 민간에 택지 매각하는 방안이 검토하고 있다. 종전에는 3개 단지는 임대, 3개 단지는 분양으로 분리하는 방식이었다. 양재대로변은 고층으로 개발하고 대모산과 구룡산 인접지역은 저층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결정절차를 밟는 과정에 내용이 수정될 수 있다”며 “관계기관 협의와 도시계획위원회 심의 등 절차를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곰 같은 조직 문화 바꾸자”… 3대 승부수 띄운 이경섭 농협은행장

    “곰 같은 조직 문화 바꾸자”… 3대 승부수 띄운 이경섭 농협은행장

    농협은행은 흔히 ‘곰’에 비유된다. 우직하지만 둔하다는 의미가 혼재돼 있는 별칭이다. 은행원들 사이에서는 후자의 부정적 이미지에 방점이 더 찍혀 있다. 농협은행의 지난해 말 기준 총자산은 339조 8000억원이다. 업계 수위다. 하지만 연간 순이익은 4023억원으로 다른 시중은행의 석 달치 순익에 불과하다. 석 달 전 취임한 이경섭 농협은행장은 3가지 승부수를 꺼내 들었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 행장은 취임하자마자 부장급 이하 발탁인사 대상자를 3배 이상 늘리는 파격을 단행했다. 지난해 46명을 조기 승진시켰는데 올해 이 숫자를 140명까지 늘린 것이다. “우수한 직원은 빨리 키워 연공서열에 익숙해진 조직 문화에 자극을 던지겠다”는 게 이 행장의 포석이다. 대졸 신입으로 입행한 주임급(6급) 직원이 과장급(4급)이 되려면 통상 10년이 걸린다. 하지만 이 행장 체제에서는 ‘5년’을 노려볼 수 있게 됐다. 더 큰 파격은 ‘성적표’에서 나왔다. 은행원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는 ‘핵심성과지표’(KPI·Key Performance Index) 산출 방식을 대폭 바꾼 것이다. KPI는 임직원 및 영업점 성적을 매기는 기준으로 인사 고과 및 성과급 등을 결정하는 핵심 잣대다. 이 행장은 건수 중심의 ‘정량평가’를 수익성 중심의 ‘정성평가’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예컨대 대출 창구 직원은 대출 상품만 잘 팔아도, 수신 창구 직원은 예·적금만 잘 팔아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종전에는 대출 담당도 예·적금 실적을 의무적으로 채워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개인별 할당을 맞추려고 건수만 올리거나, 자신이 팔지도 않은 예·적금과 대출, 펀드 등을 서로 교환하는 ‘거래’가 비일비재했다. 이 행장은 “수학 잘하는 사람한테 영어는 물론 미술, 음악까지 잘하라고 하는 게 과거 평가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대출 잘하는 사람은 대출만, 예금 잘 받는 사람은 예금만 잘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잘하면 좋은 평가(KPI)를 받을 수 있는 셈이다. 이 행장은 “평가를 위한 평가와는 이제 결별할 때”라고 잘라 말했다. 업계에서는 처음 이뤄지는 시도로, 상당한 파격이다.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수익성 강화다. “잘하는 것에 집중하면 수익성도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이 행장은 자신했다. 다른 은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해외시장 진출도 농협만의 장점을 앞세워 차별화할 계획이다. 이 행장이 가장 공을 들이는 시장은 중국이다. 중국 최대 농업협동조합인 ‘중화전국공소합작총사’와 지난해 말 업무협약도 맺었다. 총자산 187조원, 한 해 영업이익만 약 25조원(2014년 기준)에 이르는 국영기업이지만 아직 농업금융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상태다. 금융기술 이전, 경영 자문, 재무적 지분투자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협상 중이다. 이 행장은 “농협은행은 1960~70년대 아무것도 없던 우리 땅에 농촌 현대화를 일군 경험이 있는 유일한 금융사”라면서 “농업인 대출부터 농기계 사업, 유통까지 농협만이 잘할 수 있는 사업으로 승부수를 건다면 충분히 승산 있는 게임”이라고 강조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안보 이슈 Q&A] 中, 對北 레버리지 강화·美 견제 노림수… 韓·美 “비핵화 먼저”

    [안보 이슈 Q&A] 中, 對北 레버리지 강화·美 견제 노림수… 韓·美 “비핵화 먼저”

    북한의 핵 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안 논의가 이달 중 마무리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가운데 중국이 ‘평화협정’ 병행을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 17일 중국 왕이 외교부장이 이같이 주장하자 우리 정부는 “비핵화가 먼저”라고 선을 그은 상태다. 평화협정에 대한 궁금증을 문답 형식으로 짚어 본다. Q. 평화협정은 뭘 말하는 것인가. A. 현재 휴전 상태를 완전히 끝내는 종전 협상을 하자는 의미다. 1953년 7월 27일 미국을 위시한 유엔군과 북한이 6·25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하며 남북은 지금까지 휴전 상태로 있다. 평화협정은 이를 끝내고 서로 체제를 보장하며 평화롭게 지내는 방법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Q. 평화협정 주장의 근거는. A. 정전협정 합의 및 9·19공동성명 등이다. 정전협정 전문에는 이 협정이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의 한시적 성격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 협정문 4조 60항에는 휴전협정 후 쌍방이 정치회담을 소집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고 돼 있다. 북한은 1960년 말부터 평화협정을 미국에 제의했고 이것이 우여곡절 끝에 현재 6자 회담 형태가 됐다. 6자 회담은 2005년 9·19공동성명에서 북한 비핵화의 대가로 평화체제 협상을 제시했다. Q. 평화협정의 주체는 남북인가. A. 아니다. 평화협정은 보통 북·미 협상을 뜻한다. 정전협정 당시 우리나라는 주체가 아니라 단지 유엔군 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 때문에 북한은 평화협정도 우리나라를 배제하고 미국과 하겠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평화협정 주장을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Q. 한·미는 왜 평화협정을 반대하나. A. 진정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한의 평화협정 주장은 한반도 내 외국 주둔군, 즉 주한미군의 영구적인 철수를 뜻한다. 정전 상황에도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을 이어 왔기 때문에 한·미는 북한의 비핵화가 전제돼야 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북한은 핵·경제 병진노선을 천명했고 비핵화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어 평화 체제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Q. 중국은 왜 갑자기 평화협정을 주장했나. A. 대북 레버리지 강화 및 미국 견제 차원이다. 평화협정은 북한 체제를 인정하고 보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 북한과 대화가 시작되면 6자 회담 테이블 등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커지게 된다. 또 미국이 한반도에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공식화하자 평화협정을 내세워 주한미군 철수 주장으로 맞서겠다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한·미·일이 안보리의 고강도 제재 결의를 강조하며 중국을 압박하자 북한 손을 들어주며 불만을 표출한 것이란 분석도 있다. Q. 안보리 제재 논의에 영향을 줄까. A. 미지수다. 중국이 고강도 제재 결의안에 불만을 표하며 평화협정 개시를 연계시킬 경우 안보리 논의에 다시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왕 외교부장은 평화협정을 주장하며 “적절한 때에 구체적 논의를 하기 원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당장 안보리 결의 등 대북 제재 국면보다는 북한의 5월 노동당 대회 및 미국 대선 이후 상황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사설] 여야 의원정수 확대 꿈도 꾸지 말라

    어제 여야는 내년 총선에 적용할 선거구 획정안을 절충하느라 온종일 진통을 겪었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야 하는 법정 시한 하루 전날까지 극심한 산고를 치른 셈이다. 법을 만드는 국회가 스스로 위법적 상황을 자초한 것도 문제이려니와 협상의 교착을 의원 수를 늘려 풀겠다면 염치없는 일이다. 여야는 의원 정수 확대는 안 된다는 데 이미 국민적 공감대가 이뤄졌음을 직시하기 바란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선거구 획정을 지각 처리하는 행태는 정치권의 고질이었다. 이번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종전엔 일부 지역구만 조정됐기에 행정상 큰 문제가 없었지만, 올해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현행 선거구 구역표 전체가 무효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으로 몰리게 된 근본 원인은 여야의 당략 탓이다. 여야가 의원 정수를 300명으로 유지하라는 게 국민의 뜻임을 받아들였다면 타협이 불가능하진 않았을 터다. 피차 농어촌 선거구 수 축소를 최소화하기로 공감했다면 현행 지역구 수(246개)와 비례대표 의석 수(54석)를 적정하게 조정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헌재는 지난해 선거구별 인구편차 3대1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2대1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농어촌 선거구 축소가 불가피한데, 지역 대표성의 약화를 막기 위해 축소 폭을 줄이려면 그만큼 비례대표를 줄이면 되는 것이다. 물론 지역구도 완화를 위해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주장도 명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군소 지역당이 난립하는 게 우리 정치 풍토에 적합한 것인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비례대표를 소폭으로 줄인다면 석패율제 도입 등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제3의 대안 모색도 가능하다. 그러나 새정치연합은 며칠 전 이병석 정치개혁특위 위원장의 중재안마저 거부했다. 현행 의석 수를 유지하면서 지역구를 일정 부분 늘리고, 비례대표제는 정당득표율에 따른 의석 수의 과반을 보장해 주는 ‘균형 의석’으로 변환시켜 여야 간 이해를 절충하는 안이었다. 이처럼 결국 야권이 한사코 비례대표를 단 몇 석도 줄이지 못하겠다니 의원 정수를 늘리자는 꼼수가 고개를 드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여야는 의원 기득권 확대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의원 수가 모자라 국회가 정부의 독주를 견제하지 못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보는 국민이 얼마나 되겠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미국과 일본 등은 우리보다 의원 1인당 인구가 훨씬 많지 않은가. 농어촌 지역 대표성 유지나 직능 전문성을 살린 비례대표의 필요성도 고려해야겠지만, 유권자의 헌법상 평등권 보장을 위한 인구 등가성 원칙을 지키는 것을 우선할 순 없다. 헌재가 선거구별 인구편차를 2대1로 정했다면 그에 따라 합리적으로 지역구부터 조정하는 게 먼저라는 얘기다. 비례대표가 직능 전문성보다는 여야 당 지도부의 낙하산식 전략공천의 방편으로 활용된 측면이 강했던 게 저간의 사정이 아닌가. 그렇다면 비례대표를 조금도 줄이지 말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별반 설득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 총리 사망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 총리가 10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96세.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1974~1982년 총리를 지냈다.  동·서독 대치 국면에서 동독 지원을 받는 적군파들의 서독 요인 납치·암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안보 위기와 제1차 석유파동으로 경제 위기 속에서 슈미트의 임기가 시작됐다. 그는 타협 없는 단호한 자세로 안보 위협에 대처했고, 통상외교를 강화해 경제 위기를 극복했다. 독일의 수출 증대를 위한 포석으로 자국 보호주의를 막기 위해 슈미트가 주도한 협상 체제가 주요 6개국(G6) 회의로 지금은 원래 회원국인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에 더해 캐나다가 합류한 주요 7개국(G7) 회의로 발전했다.  슈미트는 또 유로존 단일 통화인 유로화 탄생의 초석을 닦는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 받는데, 석유파동 이후 변동환율제가 도입될 때 유럽 내 복수 통화 간 등락 폭을 2.5% 이내로 제한하는 공동 변동환율 시스템을 채택하도록 처음 아이디어를 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슈미트 제안에 따라 도입된 유럽통화체제(EMC)가 유로화 체제로 발전했다.  동서독 통일 문제와 관련, 슈미트는 전임자인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했다. 동·서독 정상회담, 서독·소련 정상회담을 열었고 1974년 동·서독 수도에 대사관 격인 상주대표부를 설치했다. 동독 고속도로 연간 운행료로 5억 마르크를 지불하고, 동독 내 정치범 석방을 위해 차관을 제공하는 슈미트에게 “동독 정권에 이익을 준다”는 정치적 비판이 가해지기도 했다.  역으로 슈미트가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에 대한 서방의 공동대응 일환으로 독일에 크루즈미사일을 배치하는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재무장 결정을 내렸을 때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슈미트의 재무장 결정은 독일 녹색당이 결성되는 계기가 됐다.  정계은퇴 뒤 슈미트는 고향인 함부르크로 돌아가 프리미엄 잡지 ‘디 차이트’ 공동 발행인으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과 1993년에 방한했다. 지난 8월 탈수 증상을 보여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등 고령으로 건강에 이상을 보여 왔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TPP 타결, 누가 웃고 누가 우나

     미국과 일본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타결에 대해 증시 전문가들은 6일 베트남에 생산 거점을 둔 의류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업체들이 중장기적으로 가장 큰 수혜를 볼 것으로 내다봤다. TPP로 역내 관세가 철폐된다면 섬유·의류 최대 수출국인 베트남의 의류 수출 기반이 더욱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 수혜주로 베트남 생산 비중이 60%에 달하는 한세실업이 꼽히고 있다. 한세실업은 이날 장중 한때 7만원까지 오르며 52주 신고가를 기록했다. 김근종 현대증권 연구원은 “한세실업은 TPP 타결에 대비해 지속적으로 베트남 생산설비를 확충, 지난해 기준 한세실업 매출액의 60%가 베트남에서 발생했다”며 한세실업의 목표주가를 종전 6만 5000원에서 8만원으로 올렸다. .  영원무역, 태평양물산 등 다른 의류 OEM주도 수혜 기대감에 동반 상승했다. 유정현 대신증권 연구원은 “섬유산업은 한·일간의 경합도가 낮아 TPP 체결 시 일본의 수혜가 적고, 관세 철폐로 TPP 참여국인 베트남에서 생산 중인 국내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이 오히려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그동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일본보다 유리한 위치였던 자동차 업종에 대해서는 이번 TPP 협상 타결로 가격 경쟁력 약화 우려가 제기된다. 이날 현대차, 현대모비스, 기아차는 물론 만도, 현대위아 등 관련 부품주들도 덩달아 내림세다.  다만 전문가들은 자동차 업종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력은 제한적일 것으로 봤다. 한·미 FTA 일정에 따라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완성차에 대한 관세가 현재 2.5%에서 내년부터 0%로 철폐되기 때문이다. 이상현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 멕시코 등에 이미 한국 완성차와 부품업체들이 동반 진출해 있기 때문에 실제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며 “현대차와 기아차는 미국 공급량 중 현지 생산 비중이 각각 53%, 47% 수준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TPP 타결, 의류OEM 주는 웃고 자동차주는 우울

     미국과 일본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타결에 대해 증시 전문가들은 6일 베트남에 생산 거점을 둔 의류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업체들이 중장기적으로 가장 큰 수혜를 볼 것으로 내다봤다. TPP로 역내 관세가 철폐된다면 섬유·의류 최대 수출국인 베트남의 의류 수출 기반이 더욱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 수혜주로 베트남 생산 비중이 60%에 달하는 한세실업이 꼽히고 있다. 한세실업은 이날 장중 한때 7만원까지 오르며 52주 신고가를 기록했다. 김근종 현대증권 연구원은 “한세실업은 TPP 타결에 대비해 지속적으로 베트남 생산설비를 확충, 지난해 기준 한세실업 매출액의 60%가 베트남에서 발생했다”며 한세실업의 목표주가를 종전 6만 5000원에서 8만원으로 올렸다.  영원무역, 태평양물산 등 다른 의류 OEM주도 수혜 기대감에 동반 상승했다. 유정현 대신증권 연구원은 “섬유산업은 한·일간의 경합도가 낮아 TPP 체결 시 일본의 수혜가 적고, 관세 철폐로 TPP 참여국인 베트남에서 생산 중인 국내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이 오히려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그동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일본보다 유리한 위치였던 자동차 업종에 대해서는 이번 TPP 협상 타결로 가격 경쟁력 약화 우려가 제기된다. 이날 현대차, 현대모비스, 기아차는 물론 만도, 현대위아 등 관련 부품주들도 덩달아 내림세다.  다만 전문가들은 자동차 업종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력은 제한적일 것으로 봤다. 한·미 FTA 일정에 따라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완성차에 대한 관세가 현재 2.5%에서 내년부터 0%로 철폐되기 때문이다. 이상현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미국, 멕시코 등에 이미 한국 완성차와 부품업체들이 동반 진출해 있기 때문에 실제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며 “현대차와 기아차는 미국 공급량 중 현지 생산 비중이 각각 53%, 47% 수준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中 전승절 열병식] 美 국무부 “한·중 정상회담 평화·안정 촉진… 美 국익에도 부합”

    [中 전승절 열병식] 美 국무부 “한·중 정상회담 평화·안정 촉진… 美 국익에도 부합”

    서방 언론들은 3일 사상 최대 규모의 중국 열병식 행사를 ‘호화 퍼레이드’, ‘화려한 축제’ 등으로 묘사하며 중국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기획됐다고 평가했다. 미국과 영국 일간 신문과 방송, AP와 AFP, 로이터 등 주요 통신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다는 사실을 비중 있게 다루며 열병식 소식을 속보로 전했다. 미 국무부 동아태국 공보관실은 “우리는 역내 국가들의 좋은 관계가 평화와 안정을 촉진한다고 믿는다”며 “이는 한·중 양국의 이해는 물론 미국의 이익과도 부합한다”고 긍정적 반응을 내비쳤다. 이어 한·중 정상 간 의미있는 6자회담 재개 등 합의에 대해 “북한은 2005년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고 되돌릴 수 없는 조치들을 통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준수한다는, 진정성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조건으로 대화와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무부가 밝힌 ‘역내 국가의 좋은 관계’는 한·중뿐 아니라 한·일, 중·일 관계도 의미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한·중 정상이 한·중·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다만 미 정부는 공식 논평 없이 언론의 요청에 입장을 밝히는 수준에 그쳤다. 알래스카를 방문 중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70년 전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날인 2일(현지시간) “태평양전쟁의 종전은 미·일 관계의 새로운 장이 시작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일본과의 화해를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독일 언론은 한·중·일 3각 구도에서 일본의 고립을 강조했다.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SZ)은 논평에서 “한·중 관계가 경제를 포함해 더욱 긴밀해지는 동안 일본은 더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평했다. 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베이징으로 날아가 시 주석과 회담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다”고 꼬집었다. 슈피겔 온라인판도 “대다수 서방지도자들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이번 행사는 특히 일본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영국 BBC 방송은 “중국의 세계 평화에 대한 기여가 이런 이례적 군사력 과시로 잘 드러날지 의문”이라고 꼬집었고, 일간 텔레그래프는 “주변국에 누가 이 지역을 이끌고 있는지 보여주려는 메시지가 담겼다”고 해석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열병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것이 시진핑 국가주석의 유일한 외교적 성과”라며 “중국이 남북한에 대해 좀 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서울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北도발 단호히 대응… 대화문은 열어둬 통일 대비해야”

    “北도발 단호히 대응… 대화문은 열어둬 통일 대비해야”

    서울신문은 12일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서희외교포럼(대표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과 공동으로 ‘분단을 넘어 통일로, 이제는 외교다’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마련했다. 장 대표의 사회로 조태용 외교부 1차관, 염돈재 성균관대 초빙교수, 김태현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국제정치학회장), 여인곤 통일연구원 명예연구위원 등이 참석한 좌담회에서 참석자들은 북한의 도발에 단호한 대응을 주문하면서도 대화의 문을 열어두고 남북 관계 개선을 모색해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 한반도 통일보다 어렵다던 독일 통일이 이뤄진 지 벌써 25년이 됐다. 아직도 우리의 통일에 대한 전망은 불투명하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북한의 정세와 향후 진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염 교수:남북 관계 개선과 통일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은 북한의 3대 세습 체제다. 북한 정세는 장기적으로 볼 때 갈수록 불안정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소위 ‘급변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적다. 결국 북한의 개혁·개방과 한반도의 통일은 김정은 3대 세습 체제가 무너진 후에야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조 차관:경제적으로 평양은 종전에 비해 활발하고 휴대전화 확산과 먹거리의 증가가 목격되는 등 일부 나아진 점도 보이지만 물자나 재화가 상대적으로 풍부해진 것은 생산량이 증대됐기 때문이라기보다 수확량의 일부를 경작자가 가져가도록 하는 분조제나 장마당을 통해 유통, 분배 측면에서 나아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정치·경제 상황이 근본적으로 개선되기 위해서는 북한이 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핵·경제 병진 노선을 포기하고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가야 한다. 북한의 전략적 도발은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고난을 더욱 가중시키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여 위원:북한의 목표는 김정은 정권의 공고화, 만성적인 경제난 극복, 외부 체제 위협 세력의 억제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동북 3성, 러시아는 자국 극동 지역의 경제 발전을 위해 한반도 통일보다는 분단을 선호하고 있어 단기간 내에 한반도가 통일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박근혜 정부의 통일 준비와 노력에 대한 평가는. -조 차관: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입각해 대화와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 등 북한 주민과의 접촉면을 넓힐 수 있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남북 관계에 있어 북한은 예외적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북한 예외주의’를 극복하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을 도입하는 일관된 노력도 함께 기울이고 있다. -김 교수:통일대박론은 1990년대 소위 ‘통일비용론’으로, 식은 우리 사회의 통일 열기를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통일은 쌍방적 과정이고 우리 사회에서 통일 열기가 살아났다는 것은 오히려 북한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통일이 남북한 모두에게 대박이어서 결국 한민족 전체에 대박이라는 점이 충분히 납득됐는지는 의문이다. -염 교수:큰 틀에서 박 대통령의 정책이 옳은 길로 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은 미국, 중국, 북한이 외면하고 있어 실현 가능성이 적고 통일준비위가 구상한 통일헌장 제정도 성사될 가능성이 없는 제안이다. →한반도에서 실현 가능하고 바람직한 통일 한국의 비전은 무엇인지. -조 차관:박근혜 정부는 ‘작은 통일에서 큰 통일로’ 나아가는 점진적, 평화적 통일 방식을 지향한다. 정부는 이를 위한 일관된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며 북한의 부정적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입각해 북한의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하되 대화의 문은 계속 열어 두고 남북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가운데 통일을 준비해 나갈 것이다. -김 교수:중국식 일국양제처럼 통일의 의미를 보다 확대하는 식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실적으로 두 개의 주권국가가 하나의 주권국가로 통합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통일에 관한 한 남북 관계를 제로섬으로 만들어 오히려 통일의 가능성을 저해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정치적 ‘통일’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통합’도 통일의 한 과정 또는 한 유형으로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염 교수:한반도 통일은 불가피할 경우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대로 단기간의 국가 연합 과정을 거칠 수도 있으나 가급적 독일처럼 평화통일, 흡수통일 및 단일체제하의 통일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민주화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여 위원:일부에서는 통일 한국의 중립국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중립국이었던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독일군의 공세로 단기에 점령당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통일이 되더라도 중립국화된 통일 한국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남북 관계는 경색되고 중국의 부상으로 한국 외교가 시험대에 오르게 됐는데 바람직한 방향은. -염 교수:한반도 통일에 주변국의 동의가 필수 요소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변국의 태도에 너무 민감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한반도 통일을 적극 지지할 것이고, 러시아는 통일을 적극 방해해야 할 이유가 없고, 일본은 대미 관계 및 한·일 관계에 비춰 함부로 어떤 시도를 할 수 없는 처지다. 중국에 대한 공공외교를 확대하면서 주한 핵무기의 한시적 재배치 등을 추진해 나간다면 중국이 북한을 포기할 가능성도 많다. -조 차관:현재 동북아시아는 각국의 안보정책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역사, 영토 등의 요인마저 겹치면서 갈등이 심화되는 등 정치적 협력이 경제 협력 증진에 역행하는 ‘아시아 패러독스’ 현상이 대두되고 있다. 미국과의 포괄적 전략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조화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우리 외교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장 대표: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면서 한국이 ‘주변부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주변 이해당사국에 통일의 긍정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 부정적인 효과를 최소화하는 방향의 ‘균형외교’가 요구된다. 균형외교를 위해서는 한·일 관계도 안정화시키고, 러시아와는 자원 중심의 경제 협력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비무장지대에 유엔 제5사무국을 유치하는 외교적 노력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유엔은 세계 평화 유지를 목표로 하고 있고 유엔 사무국은 현재 미국 뉴욕, 스위스 제네바, 오스트리아 빈, 케냐 나이로비 등 네 곳에 있다. 세계 인구 60%를 넘는 아시아에는 없다. 비무장지대의 유엔 사무국은 남북 평화뿐 아니라 세계 평화에도 기여한다는 당위성이 있다. →북한 핵 문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외교 전략은. -조 차관:정부는 한·미 동맹에 기초한 맞춤형 억제 전략을 강화하고 도발 저지를 위한 예방외교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아울러 한·미·일·중·러의 5자 공조 강화를 위해 적극적인 외교를 전개하고 있다. 굳건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미·일과의 긴밀한 공조를 강화하는 가운데 한·중 전략적 협력 관계 속에서 중국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북한 비핵화 진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도록 유도해 나가고 있다. -여 위원:북핵 문제는 김정은 정권이 병진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해결 가능성이 적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차선책은 북한의 핵 개발을 동결시키는 것이고, 13년을 끌어 오던 최근의 이란 핵 합의가 해결 방안이 될 수 있다. -김 교수:미국과 우리나라를 포함한 관련국 사이에 ‘북핵 피로감’이 만연해 있다. 협상을 통한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차라리 북한의 붕괴, 그 뒤를 이은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이 첩경이라는 인식이 성장하고 있다. 우리 전략과 외교는 보다 다차원적일 필요가 있다.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한 비핵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돌발 상황 발생 시 우리나라의 주도권 확보가 필요하다. 남북 관계 개선, 북한 비핵화를 위한 꾸준한 대화 제의와 노력의 외교적 효용이 여기에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이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김 교수:대한민국이 독립변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파워로 인정받아야 한다. 이 파워를 영토, 인구, 경제, 군사 등의 하드파워라고만 이해하면 적어도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이 설 땅은 없어진다. 법과 규범, 문화와 지식 등 소프트파워로서 파워를 규정할 때 우리나라의 입지가 커진다. MIKTA와 같은 중견국 외교가 대표적인 예다. -염 교수:통일을 위해 북한과의 화해, 협력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통일을 위해서는 우선 북한 3대 세습 체제의 붕괴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통일 문제와 관련해 국민적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환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고 접근 방법이 다양한 중요한 국가적 문제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룬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 위원:해방 70년을 맞는 우리에게 가장 안타까운 일은 정권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성을 가진 대북·통일정책이 없다는 것이다. 대북·통일정책은 분단 상황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면서 교류 협력을 확대하는 한편 통일에 대비하는 정책이어야 한다. -장 대표:통일 준비의 종착역은 통일 한국이다. 독일처럼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통일을 이뤄 낼 수 있는 내부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이나 주변 환경을 우리의 희망대로 바꿀 수는 없지만 통일 역량을 강화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가능하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정권 교체에 관계없이 일관성 있는 대북·통일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정리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김무성 “美, 아베 역사왜곡에 영향력 행사해야”

    김무성 “美, 아베 역사왜곡에 영향력 행사해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미국 워싱턴DC 방문 나흘째인 29일(한국시간) 미국 정부에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촉구했다. 김 대표는 이날 미 행정부·의회 주요 정치인들과 잇따라 면담을 갖고 워싱턴 방미 일정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기대를 모았던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의 만남은 불발됐다. 30일부터 이틀간 예정된 뉴욕 일정 가운데 31일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의 면담이 예정돼 있다. 김 대표는 이날 워싱턴DC의 미 국무부에서 대니얼 러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와 면담을 갖고 “일본의 역사왜곡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면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번 8·15 기념사에서 역사 왜곡을 하지 말라고 미국도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김 대표와 낸시 펠로시 민주당 원내대표와 만난 자리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거론됐다. 김 대표는 펠로시 원내대표가 2007년 하원의장 재임 당시 미 의회 사상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는데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고 함께 배석한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이 전했다. 펠로시 원내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조금 더 분명한 언급을 해야 하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이에 김 대표는 “여성 인권문제이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부탁한다”고 답했다. 김 대표는 또 의사당 내 레이번하우스에서 공화당 소속 에드 로이스 하원 외교위원장을 만나 “종전 70년을 맞는 일본 총리의 연설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데, 위원장께서 압력을 많이 넣어 우리 한국민들이 만족할 만한 연설이 나올 수 있도록 많이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김 대표와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미 국무부는 대사관을 통해 “미 의회의 이란 핵 협상 관련 청문회가 예상 외로 길어져 면담에 참석하지 못해 유감”이라며 김 대표에게 안부를 전했다. 워싱턴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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