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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대헙」 8명 기소

    서울지검공안2부 안종택검사는 26일 박성희양(21·경희대 작곡과4년)등 2명을 북한에 보낸 혐의등으로 구속된 「전대협」의장 김종식군(24·한양대 총학생장)등 8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서울형사 지법에 구속기소 했다.
  • 소,공산독재 막 내렸다(옐친의 소련:1)

    ◎공산당사 폐쇄·레닌동상 철거의 대변혁/쿠데타 꺾은 「시민파워」업고 개혁 줄달음 소련의 공산주의시대가 마침내 「비극적」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지난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후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실험이 실패로 끝나고 마르크스­레닌이즘은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은 공산당을 해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소련관영 타스통신도 소련최고회의 당기구는 공산당활동의 종식을 결정했다고 보도했다.지난 70여년간 소련을 지배해온 공산주의체제가 붕괴되고 추악한 역사의 한장이 끝나고 있는 것이다.소련 공산주의체제의 붕괴는 「시민혁명」의 승리이다.고르바초프대통령은 쿠데타가 실패한후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나는 사회주의자이며 결코 공산당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그러나 그는 공산당의 해체를 스스로 선언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소련의 피플파워는 보수파의 상징인 공산당을 거부했다.소련의 피플파워는 옐친시대의 개막을 예고하고 있다.옐친은 강경보수파의 쿠데타를 저지시킨 시민혁명의 구심점이었다.옐친은 이미 공산당을 탈당했었고 러시아공화국내에서의 공산당 활동을 금지시킨바 있다. 고르바초프의 공산당해체선언이전에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미 소련사회에서 소멸해가고 있었다.공산당원들조차도 마르크스­레닌주의 깃발을 휘날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쿠데타이후 공산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2개의 사건이 있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뒤 지난 74년간 소련공산체제 수호의 선봉을 맡았던 KGB의 창설자 제르진스키의 동상이 끌어 내려졌다.크렘린궁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KGB본부건물앞 광장에 버티고 서있던 제르진스키의 동상이 끌어 내려지는 동안 KGB직원들은 창문을 통해 속수무책으로 그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공포의 권부였던 KGB건물앞에 동상의 기단만 덩그랗게 남은 광장을 바라보며 모스크바시민들은 말할수 없는 감회에 젖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두 장면의 주역은 소련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아니라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었다. 고르바초프의 비극은 바로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데서 시작한다.「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라는 시대의 유행어들을 만들어내며 스탈린주의 통치시대를 끝내고 변화의 물꼬를 튼 그였지만 그 변혁의 파장은 그의 사고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의 희망은 스탈린주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진정한 사회주의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이지만 소련국민들의 가슴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은 이미 깨졌고 공산주의는 조롱거리로 전락돼 있었다.사회주의체제내에서의 개혁을 고집하는 그가 소 국민들의 눈에는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지도자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이번 쿠데타를 물리친 가장 위대한 힘은 바로 모스크바시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과 저항정신이었다.맨손으로 쿠데타군의 탱크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자유에 대한 그들의 욕구가 얼마나 진한가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더이상 공산독재의 노예가 아니었으며 그들이 공산독재 부활기도를 물리친것은 일종의 시민혁명이었다. 옐친은 이러한 성숙한 시민의식의 흐름을 읽고 과감히 그들의 앞장에 섰다는 점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비치고 있다. 쿠데타세력은 물러갔지만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는 경제,와해직전에 놓인 연방체제등 이전의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있는게 소련의 현실이다.러시아민족주의·반공산주의 히스테리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경제난이 계속되고 민족간의 충돌이 재발되면 시민들은 또다시 불평을 터뜨릴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옐친의 주장대로 시장화 5백일 계획이라는 급진경제개혁안이 채택될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 동서냉전구도의 청산,동구의 대변혁등 외부에서의 찬사말고도 고르바초프는 분명 암울하던 구시대를 청산하고 소련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준 위대한 지도자였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그러나 이제 그가 쿠데타의 충격에서 벗어나 이전의 자신에 찬 모습을 다시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뚜렷한 전망을 삼가고 있다.그는 공산주의자임을 헛소리같이 되뇌이고 있지만 어느덧 고르비의 시대는 공산당독재시대와 함께 막을 내리고 있다.소련에서는 이제 옐친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것이다.
  • 한­소 우호·경협 더욱 다져질듯/소 쿠데타 실패이후의 양국관계

    ◎시베리아개발등 투자사업 박차/대북·유엔정책 수행에 자신감/북한,혼란 가중… 폐쇄노선 설땅 잃어 소련 보수강경파의 쿠데타가 「3일천하」로 끝남으로써 한소우호협력관계는 더욱 공고해질 것같다. 노태우대통령도 22일 언론발표를 통해 이 점을 강조했 듯이 이번 사태는 한소관계가 한반도와 동북아지역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정부로서는 30억달러의 대소경협과 관련,미국 등 일부 서방국가들로부터 성급하다는 눈총을 받아왔으나 이번 사태를 통해 소련과의 경제협력관계를 더욱 가속화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대소경제원조에 난색을 표시했던 서방국가들도 세계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소련의 지속적인 개혁정책을 지원해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했다고 볼때 오히려 한국의 선도적인 대소협력자세는 새삼 평가될 만한 것이다. 정부는 대소경협을 예정대로 집행하는 것은 물론 한소어업협정 등 각종 협정체결과 시베리아개발 등 투자사업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소련쿠데타실패가 남북한관계,특히 북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소련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이례적으로 신속 보도하고 쿠데타세력을 고무·찬양하는 태도로 나왔다가 「실패」이후에는 사실보도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는 북한이 지금 노선의 혼란을 일으키고 있음을 뜻한다.이번 사태는 또 폐쇄정책을 고수하며 부자세습체제로 권력이양을 추구하고 있는 북한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다. 이제 소련이 군부등 보수강경파를 배제하고 서방국들의 지원하에 개혁·개방정책을 가속화시켜나갈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북한은 국제사회의 거대한 개방압력에 직면하게 될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민주화와 개방이라는 대세의 흐름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며 앞으로의 남북한 관계에서도 그같은 징후들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은 소련에 쿠데타가 나자 돌연 오는 27일의 제4차평양남북고위급회담을 남쪽의 콜레라발생을 이유로 판문점에서 회담을 열자는등 대화거부자세를 취했으나 조만간 태도변화를 보일 것으로 보인다. 오는 9월 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하고 유엔총회에서 한반도문제가 다뤄질 경우 소련은 종전보다 더 전향적인 자세로 우리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표명할 것으로 관측된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번 소련사태를 계기로 한소관계는 더욱 강화될 것이며 우리의 대유엔외교,대북정책은 확실한 자신감 속에 강도 높게 추진될 것이 분명하다. ◎노 대통령 소 사태 언론발표 전문 나는 소련이 불행한 사태를 큰 유혈없이 단기간에 극복하고 헌정질서를 회복한 것을 환영합니다.고르바초프대통령이 모스크바에 귀환하여 합헌적인 통치권을 회복하고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소련의 갑작스런 사태에 우리는 충격과 우려를 금할수 없었습니다.세계에 냉전질서를 종식시키고 한소관계를 정상화한 고르바초프대통령의 안위에 대해서도 큰 걱정을 했습니다. 세번에 걸친 정상회담을 통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세계의 평화에 관해 깊은 마음을 주고 받은 나로서 지난3일간은 인간적으로도 매우 고통스런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소련의 사태가 비단 소련 국내문제일 뿐 아니라 세계의 장래는 물론 우리와도 직결된 문제임을 실감했습니다. 오늘의 사태진전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소련국민의 결의와 용기의 위대한 승리입니다.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을 비롯한 소련지도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지도력이 그것을 이끌어냈습니다.나는 이에 대해 소련국민과 지도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소련사태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단합되고 효율적인 행동은 소련사태의 정상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자유와 민주주의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되었습니다.세계는 이 조류를 더욱 진전시켜 평화롭고 화해로운 하나의 세계를 실현하는데 협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세계 각국이 소련이 현재 맞고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개혁을 진전시키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해나가기를 바랍니다. 소련사태의 정상화를 전기로 한소우호협력관계가 더욱 강화되고 지속적으로 발전될 것으로 믿습니다.
  • “비상사태 서명”거부하자 고르비연금/소 정변 「3일드라마」의 전말

    ◎KGB 30명 들이닥쳐 대통령내외 별장억류/크렘린측 전화불통되자 이상 감지/옐친,“대안은 군중동원”대책 주효 워싱턴 포스트지는 21일자에서 사흘동안의 소련쿠데타 실패의 전말을 3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보도했다.「소련에서 두려움이 사라졌을때」라는 제목으로 데이비드 렘니크기자가 쓴 이 글을 통해 쿠데타의 발생·전개·실패과정을 요약,소개한다. 쿠데타가 개시된 19일 하오 늦게 기관총으로 무장한 30여명의 KGB요원들이 고르바초프대통령과 그의 부인 라이사여사를 흑해연안 크리미아반도의 포로스별장에 억류하고 있었다.그는 아무도 만날 수 없었고 전화통화도 불가능했다.군인들은 이중으로 별장을 포위하고 있었으며 바다쪽에는 15척의 경비정이 포진하고 있었다. ▷쿠데타의 징후◁ 쿠데타의 원인은 고르바초프의 잦은 정책변화와 책략등 지나친 자신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면서 그동안 여러가지 방법으로 강경파들이 궁정반란을 도모했었다고 전직 KGB간부 올레그 칼루긴이 말했다. 첫시도는 1988년 전직 정치국원이었던 이고르 리가초프에 의한 것으로 그는 언론에 신스탈린주의 강령을 발표하므로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의 종식을 꾀했다. 또 옐친은 이번의 쿠데타가 금년들어서만 세번째 시도라고 주장했다.첫번째는 지난 1월 KGB와 군부의 리투아니아 민선정부 전복음모였고 두번째는 같은 무렵 두드러진 강경파의 하나인 빅토르 알크스니스대령이 고르바초프가 「의지」를 잃었다며 군부는 소련지도부의 지원과 관계없이 더이상의 진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밝힌 것을 들 수 있다. 세번째는 6개월후 고르바초프가 옐친과의 협력관계에 돌입했을때 그의 반대자들은 「헌법상 쿠데타」를 시도,고르바초프와 협의없이 발렌틴 파블로프총리가 연방최고회의로 가서 크류치코프 KGB의장,야조프 국방장관,푸고 내무장관등 강경그룹에 별도의 권한부여를 요청,입법화를 추진했다. ▷쿠데타의 발생◁ 20일 고르바초프가 체결하려 했던 신연방조약은 ▲연방의 붕괴 ▲절대권한의 몰락 ▲개인적 지위의 손실등을 구실로 크렘린의 보수파들에게는 큰불만을 야기시켰다. 쿠데타 이틀전인 17일 하오4시 이후부터 기오르기 샤크나자로프등 고르바초프의 보좌관들은 갑자기 대통령과의 전화연락이 되지 않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크리미아와 모스크바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러시아 의회와 CIA의 보고에 따르면 야조프국방장관을 포함한 8인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지도부 수명이 일요일인 18일 크리미아의 별장으로 가서 대통령에게 신연방조약체결 무효화를 위한 소련전역에 비상사태를 선언하는 포고령에 사인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즉시 대통령을 연금상태로 두고 쿠데타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쿠데타의 전개◁ 무력시위는 19일 새벽 모스크바와 발트해공화국들의 주요도시에 탱크와 장갑차들이 진입하는 것으로 시작됐다.북부러시아의 볼로그다 같은 소도시는 지방KGB가 라디오방송국을 점령했다. 그러나 이날 새벽 옐친과 그 보좌관들은 고르바초프가 권력에서 제거됐다는 사실을 즉각 간파했으며 쿠데타세력에 대한 유일한 대응은 대중을 동원한 시위밖에 없다고 생각,옐친이 강경책을 썼다.그는 연방의회청사내에 월 룸(전투지휘소)을 차려놓았으며 그곳에는 청년정치인,급진파 학자,언론인,심지어는 군장교와 KGB요원들까지도 모여 저항세력의 싱크탱크를 구성했고 옐친은 밖으로 나가 군중들을 이끌었다. 정치적조치로는 이날 아침 외무부에서 야나예프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쿠데타사실을 밝히고 포고령을 통해 자신들의 행동거취를 밝혔다. ▷쿠데타의 실패◁ 쿠데타가 실패한것은 지난 6년동안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국민들에게 심어진 신사고와 제도적 개혁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다. 또한 강경파 지도자들도 각자의 생각이나 목표가 달랐다.실패한 원인은 첫째로 옐친이나 리투아니아지도자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 같은 지도자들을 검거하지 않았고 단지 대중적인 지지에만 크게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둘째는 외국특파원이나 국내신문·방송등 언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셋째는 러시아공화국의 KGB책임자인 블라디미르 포데리아킨이 옐친의 편에 가담했다는 사실이다.넷째 강경파지도자나 군인들에게 스탈린시대와는 달리 대량학살의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련민중에게 두려움이 소멸돼 있다는 사실이었다.옐친이 두려움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마구 진주해오는 군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광부들은 파업을,어린아이들까지도 탱크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소 쿠데타 실패와 김일성(사설)

    고르바초프 소련방대통령이 지난 19일 군부쿠데타에 의해 실각되는듯하자 북한방송은 이를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보도했다.북한의 언론매체들은 북한과 이해관계가 밀접한 국가에서 모종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그 사태의 추이를 분석한뒤 뒤늦게 그들 나름의 시각을 곁들여 보도하는 것이 관례이다.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 처형과 중국의 천안문사태에 관한 보도 등이 그 좋은 예이다.그런데도 고르바초프의 실각설에 그날 하오에 즉각 보도한 것은 김일성주석이 소련사태에서 크게 고무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모스크바의 정변이 소련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냉전종식으로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세계질서에 어떤 충격을 던질 것인지,또 소련의 쿠데타가 성공할 것인지,실패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채 사실 자체만 신속하게 보도한 것은 그 자체가 김일성주석에게는 지극히 반가운 소식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사태를 피상적으로만 관찰하면 그로서는 입지를 보다 강화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다고 판단할 수도있다.고르바초프의 실각설은 그로 하여금 「우리식대로 살자」는 폐쇄체제의 당위성을 인민들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됐고 그 기회가 그의 발언권을 대내외적으로 강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계바늘을 되돌려 놓는다고 해서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소련의 강경보수파와 군부가 설사 고르바초프를 실각시켰다고 해도 페레스트로이카의 거대한 불길이 사그라들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이미 자유와 개방의 참뜻을 체득하고 있는 소련국민들은 스탈린과 브레즈네프식의 탄압정책을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며 쿠데타가 실패할 것이란 징후도 여러 곳에서 발견됐었다.따라서 김일성주석은 소련사태에 고무될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에 반역하는 극단적인 폐쇄주의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주석은 남북관계를 냉각시키는 어리석은 작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남북체육회담을 거부한데 이어 오는 27일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던 남북고위급회담도 엉뚱한 트집을 내세워 무산시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그가 남북고위급회담을 기피하고 있는 이유가 콜레라 때문이라면 누구나 웃을 일이다.그의 속셈은 소련의 사태를 지켜본뒤 대남및 대외정책을 재조정해 보겠다는 전략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문제는 탈냉전의 도도한 흐름속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한 소련사태를 바라보는 김일성주석의 인식이 어느 정도의 현실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그는 최근 『우리도 지구의 한 나라인 이상 지구의 움직임과 함께 행동해 나가겠다』고 언급했으며 우리는 그의 이같은 현실판단을 환영한바 있다.그런데도 소련에서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돌발사태」가 일어난 것을 기화로 폐쇄의 사슬을 더 죄고 남북관계를 냉각시킨다면 그에게나 7천만겨레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남북한의 유엔가입이 사실상 확정된 이 시점에서 우리는 김일성주석이 「남조선해방」이라는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 책임있는 국제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남북관계도 개선시켜나가는 슬기로운 자세를 보여주었으면한다.그는 소련의 정변이 결국 민주화된 국면의 힘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 사실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한다
  • 소 강경보수파의 「막후」/“검은대령” 알크스니스

    ◎김영만기자가 만났던 “소유즈의 얼굴”/“고르비식은 혼란만… “비상조치 역설/“「60년대 한국」,경제난 타개의 모델” 소련쿠데타세력이 지향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독재」가 아닌가 싶다.그들이 구체적 모델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박정희형독재」라는 유추도 가능하다. 서울에서 이같은 추론이 가능한 것은 쿠데타세력의 의회내 기반으로 보이는 소유즈그룹이 한국의 「박정희독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들이 현 쿠데타세력의 아이디어뱅크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실제로 8인국가비상위원회의 실세로 알려진 푸고내무장관은 소유즈그룹의 「도움」으로 개혁파인 전내무장관 바딤 바카틴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지난 4월 검은대령 알크스니스를 정점으로 한 소유즈그룹은 『파국의 소련을 구하기 위해 소련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일찌감치 쿠데타세력에게 거사의 명분을 제공한 바 있다. 기자는 지난 4월23일 알크스니스대령의 숙소인 모스크바 호텔에서 2시간동안 그와 단독인터뷰를 했다.당시 그들은 비상사태선포를 주장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으려는 고르바초프대통령을 축출하려는 운동을 공공연히 벌이고 있었다.그들의 소련정세에 대한 시각과 그들이 바라고 있었던 소련의 미래상을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은 현 쿠데타세력의 이념적 기초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알크스니스는 고르바초프가 말하는 시장경제로 가기위한 혼란과 경제침체가 「일시적」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공산당과 연방정부가 강력한 힘을 행사해 전권을 장악하지 않을 경우 소련경제는 3류 빈민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보혁갈등이 조기에 종식되지 않음으로써 끝내는 내전에 빠질 수 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알크스니스는 박정희와 한국경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그는 『보수세력이 개혁자체에 반대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우리는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개혁을 위한 정치안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한국은 우리가 따라야 할 주요한 모델이다.한국은 정치적 안정이 있었기때문에 경제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정치적 안정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다』 알크스니스의 소련정치관을 요약하면 이렇다.우선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해 소련경제를 희생시켜야한다.그러나 그방법은 현재와 같은 연방정부의 무기력화로는 빈곤과 내전만이 있을 뿐이며 연방정부가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면서 하나씩 개혁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알크스니스 일파가 현재 어느정도의 쿠데타 핵심세력인지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이같은 알크스니스식 논리가 핵심세력의 이론적 기초임에는 틀림 없어 보인다. 그들은 유혈사태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감내해야 할 희생」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민주화가 어느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비상사태선포와 같은 강경책은 필연적으로 유혈이 따를 수 밖에 없다는 한국의 경험을 알크스니스에게 이야기해주자 그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그는 『생명의 가치는 무한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자신은 유혈적인 방법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러나 다른 생명을 보호하기위해 국가는 때때로 힘을 사용할수 밖에 없고 소련은 개혁정책이 실시된이래 민족분규 등으로 1천명이상이 사망했다』고 덧붙였다. 알크스니스 일파가 직접 쿠데타에 연루돼있는지는 지금 확인할 수는 없으나 다만 당시의 보수파들은 쿠데타가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알크스니스는 쿠데타가 가능할 것으로 믿느냐는 질문에 『불가능하다』고 한마디로 잘랐다.한국과 달라서 쿠데타를 지휘하고 의견일치를 보아야 할 장군의 숫자가 너무 많고 나라가 커서 쿠데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그는 『장성만 모여도 크렘린궁으로는 자리가 모자란다.또한 우리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프랑코나 피노체트,주코프원수 같은 대중에게 익숙한 장성도 없다』고 말했다.그럼에도 소련에는 쿠데타가 일어났다.모스크바에 진주해 있는 군부대간에도 알력이 있고 비상위원회와 친고르바초프쪽으로 세가 나누어져 있는 것을 보면 알크스니스의 쿠데타 불가능론은 어느정도 맞아들어간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알크스니스는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한 발트3국중 라트비아 출신이다.그는 출신배경과 현재의 정치적견해 사이를 어떻게메울수 있느냐는 질문에 『민족주의자들이 내놓는 것은 「배고프지만 자유롭게」이다.경제적 독립이 불가능한데도 연방탈퇴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는 것은 정치적 이해 때문에 인간의 생존권을 희생시키는 지나치게 무책임한 처사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당시 모스크바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개혁파가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을 때였다.그럼에도 알크스니스는 매우 확신에 찬 어조로 비상사태를 선포해야한다고 이야기해 나갔다.
  • 소 쿠데타 61시간만에 왜 실패했나

    ◎“공산회귀는 불용”… 국민이 등돌렸다/명분없는 거사에 군수뇌부 적전분열/경원동결등 서방의 강경대응도 큰 몫 전세계에 충격을 던진 소련의 쿠데타가 3일천하로 끝난 이유로는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강렬한 저항 ▲저항선봉장으로 나선 옐친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 ▲쿠데타 지도부의 내분 ▲군장악의 실패등을 들수 있으며 그외에 간접적인 원인으로는 소련에 대한 서방세계의 강력한 압력도 들수 있다.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소련국민들의 호응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이 쿠데타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다.그것은 또 쿠데타의 주역들이 처음부터 국민들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뜻이기도 하다. 3일간의 짧은 기간동안이긴 하지만 탱크로 무고한 시민을 깔아뭉개는 무자비한 무력탄압 앞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시위금지령과 통금령을 무시하고 20일 하룻동안에만 80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반쿠데타 시위를 벌이는 한편 육탄으로 탱크를 저지한 소련국민들의 용기는 진정 놀라운 것이었다.과거 수차례에걸친 소련에서의 정변때마다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소련국민들이 이처럼 용기있게 변한 것은 바로 고르바초프대통령의 개방정책이 소련국민들의 의식수준을 크게 향상시킨 결과라고 할수 있다.따라서 이번 쿠데타가 3일천하로 끝난 것은 결국 쿠데타 주역들이 고르바초프의 신병은 체포할수 있었지만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이 국민들의 가슴속에 불어넣은 자유정신마저 가둬둘수는 없었던데 따른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지난 3일간의 쿠데타 진행과정을 지켜보면 이번 쿠데타의 주역들이 처음부터 아무 계획도 없이 『일단 일부터 일으키고 보자』는 형태로 상황이 벌어졌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이들은 그동안 누려오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난 20일 체결될 예정이었던 신연방조약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저지해야겠다는 초조감에서 쿠데타 성패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 군장악과 국민동향,지도부내의 결속등을 사전에 치밀하게 점검하지 못한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사전준비가 미비된 상태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과거처럼 무관심으로 나타나지 않고 적극적인 저항으로 나타나자 비상위는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쿠데타의 절대적 동조세력으로 생각했던 공산당이 중앙위원회 성명을 통해 쿠데타를 비난하고 나선 것은 비상위에 결정적인 정신적 타격이 된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타격은 비상위내부의 적전분열로 나타났다. 쿠데타 발생 이틀이 안돼 비상위의 8인 멤버중 3명이 『건강상의 이유로』사임했다는 것이 쿠데타 지도부의 내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도부내의 분열과 함께 군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한 것도 쿠데타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다.비상위는 당초 군부내에 냉전종식에 따른 군위상 축소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판단,일단 쿠데타가 일어나면 군 대다수가 이에 동조할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물론 군부가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자 평소 「국민의 군」이란 자부심을 갖고 있던 소련군은 『우리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돌릴수는 없다』는 쪽으로 급선회함으로써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됐다. 이번 쿠데타에서 서방이 보인 대응도 쿠데타실패를 간접적으로 도운 한 원인이 됐다고 할수 있다.고르바초프의 실각소식이 전해지자 서방측은 한결같이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요구하며 서방의 경제지원을 갈구하는 소련에의 원조를 동결시켰다.서방세계는 또 반쿠데타 저항세력의 선봉에 선 옐친 러시아공대통령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보냄으로써 옐친으로 하여금 국민저항을 극대화할수 있도록 했다. 결국 국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조속한 개혁의 완결이란 점을 무시하고 오히려 개혁을 지연내지는 후퇴시키는 쪽으로 기치를 들고 시작됐다는 점에서 소련에서의 쿠데타는 처음부터 실패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고 국민들의 진정한 바람 앞에선 무력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여준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할수 있다. ◎“3일천하” 쿠데타 일지/비상위 구성→불복선언→서방 경원동결→유혈충동→비상위 분열→병력 철수→고르비 귀환 소련의 강경보수파가 21일 소련역사상 처음 「월요정변」으로 기록될군사쿠데타를 야기한지 3일만에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해체됨으로써 이들의 꿈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모스크바정변 소식이 전해진것은 19일 상오4시.소련전역에 6개월시한의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언론과 출판물의 검열이 시작됐다.방송국들도 쿠데타군에 접수되어 방송이 통제됐다. 타스통신은 크리미아반도 휴양지에서 휴가중이던 고르바초프가 실각되었다고 전하면서 대통령직을 겐나디 야나예프부통령이 승계하고 8인으로 구성된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전권을 인수했다고 보도했다.그러나 기세 좋게 몰아 붙이던 쿠데타세력들은 옐친의 시민 불복종운동촉구와 총파업선동으로 시작부터 예상치않던 장애물에 직면했다. 보수파들에 의해 야기된 쿠데타가 시련을 맞기 시작한것은 정변이 발생한지 8시간만인 19일 정오.옐친 러시아공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포고령을 무효라고 선언하며 반쿠데타 봉기를 부추기자 모스크바 시민들은 이미 모스크바시내에 진입했던 중무장 소련군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이며 강력히 저항했다. 부시 미대통령은 이날 휴가를 중단하고 긴급대책회의를 연뒤 기자회견을 갖고 하오5시 소련의 군사쿠데타를 강력히 비난했으며 대소원조를 보류할것임을 시사했다. 이튿날 쿠데타세력들은 위기감을 느꼈는지 상오6시 일류신76 수송기 60대를 동원,모스크바로의 병력을 증강했으나 이에 맞서는 소련국민들의 시위는 세를 더해갔다. 그후 러시아공내에 주둔하고 있던 무장병력들은 러시아공 의사당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으며 21일 새벽 급기야 유혈충돌로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처음의 상황과는 달리 쿠데타세력이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주춤거리고 서방세계의 외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이날 최후의 「히든카드」를 내보였다. 군내 강경파인 모이셰프군참모총장이 전면에 나서고 그로모프중장(전아프가니스탄 주둔군사령관)과 바렌니코프 지상군총사령관이 실세로 급부상한 것이 그것이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듯 「최후의 항전」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으며 무력충돌도 불사하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뒤 10시간만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듯 강경입장을 누그러뜨리고 고르바초프와의 면담을 시도했다. 루키아노프 소연방 최고회의의장이 크림반도로 고르바초프를 만나기 위해 떠났으며 소련 국방부는 비상사태가 선포된 지역에 배치됐던 병력들에 대해 철수명령을 내렸다.이어 모든 포고령이 무효화되고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 귀환길에 오름으로써 보수파들이 주연한 「쿠데타」드라마는 61시간만에 막을 내렸다.
  • 소 정변이후,한소관계의 전개(사설)

    이제 소련을 똑바로 지켜봐야할 때이다. 국제적으로 탈냉전·화해의 한쪽 주역이었고 개혁과 개방의 기수였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실각한 소련의 대외정책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는 아직 이르다.그러나 소련의 국내 권력상황의 변화는 곧바로 세계정치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고 소련은 여전히 군사적 초강국이라는 점에서 「고르비이후」의 사태전개는 세계적인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수 없다. 고르비 없는 소련은 어디로 갈것인가.그들 개혁과 개방은 어떻게되고 탈냉전의 세계질서는 반전될 것인가.그 보다 우리의 북방외교와 남북한관계,통일에 미칠 영향은 어떨 것인가.이제 그것이 우리의 문제인 것이다. 고르비의 실각은 그의 개혁노선에 힘입어 급속도로 발전된 한소관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것은 분명하다.대통령직을 인수한 야나예프의 보수적성향과 일견 강경파 일색인 비상사태위의 인적구성으로 보아 외교·안보·경제 정책면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임을 쉽게 예측할수 있다.우선 한소관계와 관련하여 우리 외교에서 볼때 6공화국은 북방외교를 큰 축으로 삼아왔고 그 주된 바탕이 고르비의 개혁·개방정책이었다고 할수 있다.물론 지난해 한 소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6월) 정식수교(9월) 노대통령 방소및 2차정상회담(12월)과 올 4월의 제주 정상회담등 지난 1년여에 걸친 한소관계 발전은 우리 북방정책의 결실이었다.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냉전의 종식과 함께 소련 내부의 정치·경제 사정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많은 부분이 고르비의 탁월한 국제감각과 우호적인 대한인식에 기인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북방정책의 최종 목표는 물론 남북문제의 해결에 있다.노대통령은 한소정상 회담 때마다 『내가 모스크바에 온 것은 평양에 가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었다.그리고 동서화해와 동북아질서 재편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면서 남북문제 해결에 주도적으로 임해온 우리의 북방정책 또한 기본적으로는 고르비가 이끄는 소련 정부의 직접 간접적인 지원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볼때 보수회귀의 색채를 강하게 띤 이번 소련 정변은 동북아질서 특히 한반도문제와 관련해서 보다 경직된 북한의 태도변화를 수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우리로서는 특히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실현을 눈앞에 두고 소련의 권력구조가 변화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만일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고르비개혁 이전의 양상으로 복귀하는 사태가 온다면 우리 북방정책은 차질을 빚는 셈이 된다. 한소 경제협력문제도 그러하다.정변이후의 소련 정권이 경제정책의 방향을 과거로 되돌리거나 부분적인 정책선회를 할 경우 앞으로 한소 경협관계의 확대에도 당분간 차질이 오게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수파들이 고르비 없는 소련으로서도 개혁의 계속 없이는 국가적 생존이 어렵게 되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개혁노선의 굴절은 있을 수 있으나 철회될 수는 없다는 것이 또한 세계와 우리의 인식이기도 하다.이러한 냉철한 사태분석과 현실인식 위에서 기존의 한소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하리라고 본다.
  • M·L주의 포기한 개혁의 주역/고르비 집권에서 실각까지

    ◎85년 서기장 피선·90년 대통령으로/신사고로 세계냉전의 흐름을 바꿔 집권 6년5개월만에 실각된 고르바초프는 세계정세의 흐름을 냉전에서 데탕트로 바꿔놓은 장본인. 체르넨코가 서거함에 따라 러시아혁명(1917년) 이후에 출생한 최초의 소련지도자로서 지난 85년3월11일 54세의 나이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고르바초프는 집권직후부터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신사고외교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및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을 추진,사회주의혁명 70년의 낡은 유물들을 몰아내기 위한 일대운동을 전개했다.총성없는 「제2의 러시아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사유재산제를 도입하는 등 소련경제를 철저한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시키고 공산당 권력독점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는 등 국내에서의 엄청난 정치·경제적 변화를 주도했다. 국제적으로도 지난 88년 브레즈네프독트린을 폐기하고 동유럽개혁 불간섭을 선언,동구전역을 휩쓴 민주화물결의 불을 댕겼다.독일통일도 고르바초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지난달 모스크바 미소정상회담에서 역사적인 전략무기감축협정에 조인하는 등 미소관계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에까지 화해의 대기운을 몰고온 것도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거나 최소한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지난해 6월 노태우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한소수교를 맺고 지난 4월 방한했는가 하면 북한에 개방압력을 꾸준히 가하는 등 한반도의 해빙무드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있다. 이같은 국제무대에서의 빛나는 업적으로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에서는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같은 급속한 개혁추진과정에서 정치·경제적 대혼란이 불가피하게 수반돼 인기가 곤두박질쳤다.식량위기 등 극심한 경제난에 따른 불만이 극에 달했다.지난달 런던에서 서방선진7개국 정상들과 회담을 갖는 등 서방세계로부터 대소경제지원을 얻어내기위해 안간힘을 다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한 채 국내에서는 오히려 구걸외교라는 비난을 사기도했다.발트3국을 비롯한 소수민족의 독립요구에 따른 연방해체위기로 골머리를 썩이면서 러시아공화국 등 9개공화국과 신연방조약 체결을 추진,20일 조인할 예정이었다. 급진개혁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있는 보수파와 더딘 개혁속도를 못마땅해하는 개혁파의 협공 속에서 어려운 줄타기를 해온 것도 사실이다.자신에게 도전한 보수파의 거두 리가초프를 제거하는데 성공하는 등 위기를 맞을 때마다 번번이 승리를 이끌어내 간간이 나돌던 실각설을 비웃으며 정치의 마술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60세로 지난 31년 남부 러시아의 프리볼노예에서 출생,모스크바대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78년 농업담당서기로 당중앙위에 진출,80년 정치국원이 됐다.헌법을 개정,지난해 5월 임기5년의 대통령직에 선출돼 공산당서기장과 겸직하던중 1년 남짓만에 도중하차하는 불운의 주인공이 돼버렸으나 고르바초프라는 이름은 세계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고르바초프 연보 ▲31.3.2 러시아공 프리볼노예에서 출생 ▲50 모스크바대 법학과 입학 ▲52 공산당 청년조직(콤소몰)에 가입 ▲78 공산당 농업담당 서기 ▲80 정치국정위원 ▲85.3.11 공산당 서기장 ▲85.8 핵실험 일방중지 선언 ▲85.11 레이건과 제네바에서 제1차 정상회담 ▲86.10 레이캬비크에서 레이건과 2차 정상회담 ▲87.12 워싱턴 방문,INF 폐기협정서명 ▲88.9 크라스노야르스크선언 ▲89.5 북경방문,최고회의 의장 피선 ▲89.10 몰타정상회담,냉전종식선언 ▲90.3.15 5년임기의 초대대통령 취임 ▲90.5 워싱턴방문,미소정상회담,전략핵감축합의 ▲90.6 샌프란시스코한소정상회담 ▲90.10 한소수교 ▲90.10.15 노벨평화상 수상 ▲90.12 모스크바서 한소정상회담 ▲91.4.16 방일 ▲91.4.19 방한 ▲91.7.26 소련공산당 중앙위서 마르크스­레닌주의 포기,신강령안채택 ▲91.7.30∼31 모스크바서 미소정상회담,START(전략무기감축협정)조인
  • “일제 식민지배 사죄는 마땅”/일 사회당 초청 「동북아평화…」토론

    ◎재한 피폭자 지원 기금운용 바람직/북한민주화 지원,통일 걸림돌 제거/“탈 냉전조류 부응”… 자위대 전력증강 없어야 일본사회당 중·참의원 11명이 고대평화연구소(소장 최상용)가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일사회당의 대한반도 정책의 변화를 실증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일사회당의원들은 이토 히데코(이동수자)의원의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하여」라는 주제발표에 이어 남재희·황병태(민자)정대철(신민)이부영부총재·박찬종의원(민주)홍사덕전의원,이종율전정무장관등 한국측 인사들과 ▲한반도정세 ▲한일관계 ▲일·북한수교교섭 ▲일사회당의 대한반도 정책등에 관해 자유토론을 벌였다. 이토의원은 주제발표에서 한일관계의 재정립을 위해서 ▲대한식민지배에 대한 일국회의 사죄및 청산결의선언 ▲일총리의 한국등 아시아제국에 대한 사죄순방 ▲일정부에 의한 한인 원폭피해자 및 사할린잔류 한인에 대한 근본해결책 모색을 강조함으로써 일사회당의 대북편향노선 포기및 현실인정으로의 방향선회를 강력히 천명했다. 특히 이날 토론에 나선 쓰쓰이 노부다카의원은 『사회당이 지금까지 한국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해왔으나 이미 당대회에서 한일기본조약에 찬성하고 한반도에 두개의 정부가 있다는 점을 인정,남북한과 대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입장을 정한 바 있다』고 말해 사회당의 한반도정책변화를 기정사실화했다.이날 이토의원이 발표한 주제발표와 토론 요지는 다음과 같다. 동북아시아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이 급변하고 있다.한소국교수립,한중경제교류 진전,남북한유엔동시 가입,일·북한 국교정상화 교섭,그리고 남북한에 있어서 대화와 교류의 진전등은 한국측의 「북방외교」노력에 따른 성과로 보고 높이 평가한다. 「공통의 안전보장」 「공유하는 미래」라는 새로운 발상 아래 군축·평화의 실현이라고 하는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동북아시아의 집단적 안전보장의 확립을 위한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일으킨 침략과 만행의 사실들을 올바로 응시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함께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이 과거 청산이 이루어지는 길이다.이를 위해일본정부는 국가권력의 최고기관인 국회에서 한국에 대해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하고 청산결의를 선언해야 한다.그리고 이러한 진지한 사죄의 의지를 전달하기 위해 총리 스스로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을 순방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일본정부에 대해 전체적인 해결을 위해 재한피폭자에 대한 지원과 함께 기금의 운용에 의한 자주적 해결을 요망한다. 일본과 북한은 지금까지 3회에 걸친 정부간 국교정상화교섭을 벌였지만 커다란 기대에 반해 현재 교섭이 정체돼 있어 유감으로 생각한다. 북한사회의 각종 정보가 한층 더 공개되고 국제사회에서의 신뢰를 높일 수 있도록 일본 사회당은 북한의 민주화진전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남북한이 상호 불신을 불식시켜서 군축을 실현하고 민족·문화·경제의 교류가 더욱 발전을 보이게 됐을 때 아시아의 평화와 군축이 더욱 현실적인 것이 될 것이다. 냉전이 종식되고 새로운 공존과 협조시대를 맞이한 지금이야말로 자위대의 개편 축소에 착수할 호기이다. ◇황병태의원(민자)=정치는현실과 이상을 조화하는 것이 중요한데 일사회당의 대한정책은 한반도가 처해있는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사회당이 갖고 있는 한국의 존재에 대한 정책변화와 입장을 보다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쓰쓰이 노부다카의원=과거 한국이 군사독재정권이었기 때문에 사회당이 관계정상화에 노력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지금 한국은 그렇지 않으며 사회당 역시 최근 당대회에서 한반도의 두 정부를 인정했다. ◇이부영민주당부총재=최근 사회당의 노선변화는 사회당이 국민정당으로 성장할 가능성보다 보수화하고 있는 일본사회를 도리어 고무시켜 대외패권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질 우려가 높다. ◇남재희의원(민자)=한일관계의 재정립을 식민지시대의 여자정신대문제와 재일교포 법적지위개선문제등 작은 문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가라시 고조=남의원의 얘기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한일관계를 재정립하는 문제는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시작됐다. ◇센고쿠 요시토의원=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수탈은 인정하나 한국과동남아시아 저개발국가간의 수직분업적 경제관계도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 남북 전자공학 관계자/연길서 첫 대좌

    ◎1백여명,전자정보통신학술대회 참석 남북한 전자공학자와 산업계인사 1백여명이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하는 대규모 한민족전자공학학술대회가 19일부터 23일까지 중국 연길시에서 열린다. 「91국제전자정보통신학술대회(ICEIC91)라 명명된 이 학술대회는 중국 연변대학이 주최하고 대한전자공학회(회장 임제탁·한양대전자공학과교수)및 연변 자동화연구소·전자공학연구소가 공동후원하는 형식으로 돼 있으며 소련 미국 일본등의 교포학자들도 다수 초청돼 총 94편의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특히 이번대회에는 김용열(김일성대학) 홍기태(과학원) 소종식(김책공과대학) 강민기(자연과학대학)교수등 북한학자 11명이 처음으로 참가,컴퓨터시스템,전자교환기분야등에서 9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5개분과에서는 남한측 학자들과 나란히 공동좌장도 맡게 된다. 이번대회에서는 또 남한측에서 최상규 금성사상무,권승한 삼성전자상무,오계환 현대전자전무등 업계관계자가 별도로 마련된 「산업」분과에 참가,각 전자업체 현황을 소개하도록 돼 있어 주목된다.
  • 영 하원/「병력감축계획」 강력 제동

    ◎“적의 위협 상존”… 삭감배경 해명 촉구 【런던 로이터 연합 특약】 영국하원은 16일 냉전종식의 국제적 분위기에 따른 정부의 병력 20% 삭감계획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하원 국방위원회는 이날 국제정세의 변화와 영국군의 미래양상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 보고서는 지난달 톰 킹 국방장관이 오는 90년대 중반까지 육군 4만명,공군 1만4천명,해군 8천명등 모두 6만2천명을 감축,전체병력을 현재보다 20%가 줄어든 24만6천명으로 유지시킨다는 정부안을 확정시킨데 대해 나온 것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보고서는 또 정부가 국방예산을 책정하는데 있어 적의 위협을 주된 요인으로한 가변적인 적용을 하지않고 국가예산에 대한 고정된 비율을 적용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킹장관은 90년대 중반까지 병력을 감축해야된다는데 대한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병력감축규모는 군부내 큰 자극을 가해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흑인분쟁 종식/평화협정 합의/남아공

    【요하네스버그 AFP 연합】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정부와 2대 흑인 단체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및 인카타 자유당은 15일 다음달 14일 평화협정에 조인하기로 합의함으로써 흑인 종족들간의 유혈분쟁 종식을 위한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교회 소식통들이 전했다. 소식통들은 이들 세 당사자가 평화안의 초안 일부에 대해 견해차를 보이고 있으나 다음달 14일 이전에 추가 회담을 열고 이견을 조정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 한­스웨덴 협력 논의/노 대통령,구스타프국왕 접견

    노태우대통령은 14일낮 청와대에서 세계잼버리대회 참관을 위해 방한중인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국왕의 예방을 받고 오찬을 함께 했다. 노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구스타프국왕의 전왕이자 조부인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세자시절인 1926년 한국을 방문,경주고분 서봉총에서 금관을 발굴한 사실과 함께 스웨덴이 유엔한국감시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점등을 상기시키며 『한­스웨덴간의 긴밀한 유대관계가 더욱 발전되기를 바라며 국제무대에서 한반도의 냉정종식을 위해 협력해줄것』을 요청했다. 세계스카우트지원재단 명예총재자격으로 내한한 구스타프국왕은 『현재 스웨덴에서는 한국도자기전시회가 열리고있는데 이같은 양국국민간의 교류를 더욱 확대해나가자』고 말하고 노대통령의 스웨덴방문을 희망했다.
  • “우의의 새 시대로 전진을”/노 대통령,잼버리 관계자 격려

    【고성=이경형기자】노태우대통령은 12일 하오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가 열리고 있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벌의 잼버리장을 방문,전망대와 종합상황실·국제본부·과정활동장·야영지 등을 둘러보고 참가대원들과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노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단절과 대결의 어두운 시대를 종식하고 세계가 우의와 협력에 바탕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이때 이 분단된 땅에서 다시 세계청소년의 대축제가 열리게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고 말하고 『이번 대회가 21세기를 향해 인류가 다함께 전진해가는데 있어 빛나는 한 이정표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노대통령은 또 『이 대회에 소련과 동중부 유럽국가의 스카우트들이 2차대전이후 처음으로 참가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라면서 『이번 잼버리를 계기로 스카우트운동에서도 「세계는 하나」가 실현된 것』이라고 말했다.
  • 마다가스카르 시위/1백여명 사망·실종

    【파리 AP 연합 특약】 마다가스카르에서 지난 주말 벌어진 반정부시위로 최소한 51명이 죽고 50여명이 실종됐으며 약 3백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마다가스카르의 한 고위 적십자관리가 12일 밝혔다. 이는 디디에르 라트시라카대통령의 16년통치 종식과 다당제 자유총선을 요구하는 지난 2개월간의 시위중 가장 최악의 사태이다.
  • 남북한 유엔가입 이후/소 바자노프박사 특별기고

    ◎한반도통일/“북의 체제변화 와야된다”/남북 관계개선 낙관… 중국도 권고할것 ○소 외교아카데미부원장 본사초청 내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후 전개될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와 북한의 대남 정책이 우리 통일정책의 주된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소련 외무부산하 외교아카데미 부원장 페트로비치 유진 바자노프박사(47·국제정치학)는 이와관련,『현 국제환경은 냉전종식을 이룩했지만 그것이 한반도의 대치구조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바자노프박사의 한국통일에 대한 전망과 견해는 그 자신이 소련의 아시아정책 수립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서울신문사 초청으로 지난 7일 방한,열흘동안 머물며 포항제철등 산업시설을 돌아보고 각계 인사들과 접촉한다. 얼마전 미소정상들은 모스크바에서 만나 냉전이 완전종식됐음을 다시한번 확인했다.그러나 우리는 이같은 미소양국의 냉전종식선언에 「표면적 가치」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선 곤란하다.전략무기감축협정이 타결됐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환상에 사로잡힐수 있다.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전쟁준비를 상호 제한한 두국가가 여전히 적대관계의 대치상태를 유지했던 숱한 예를 찾아볼수 있다. 부시미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소련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확고히 공약했다.그러나 미국은 결코 소련을 동정하지 않으며 소련의 약점이 보완되는 것을 도우려 하지도 않는다.따라서 우리는 냉전종식의 의미를 「냉전」이라는 과거의 유산이 단지 표면상 사라진 것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국제관계에 있어 현재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은 소련내부사정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또한 소련의 정치는 앞으로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기존의 체제는 이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두 붕괴되고 새로운 세계질서에 부응하는 새 체제가 창출될 것이다.사실이 그러하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결론에 이르게 된다.즉 앞으로의 국제관계 상황은 필연적으로 심각한 변화를 겪게된다는 것이다.냉전의 유산들은 조만간 모두 사라지며 한반도의 대치상황도 그 막을 내릴수 밖에 없다.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어떻게 분단됐으며 왜 대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주지의 사실이다.사회주의혁명을 수출하고자 했던 이념적 열망,강대국이 되고자 했던 야망,미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와 안보관심등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한반도 북쪽에 「형제정권」의 출현을 유발시켰으며 무력통일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그후 스탈린이후의 소련지도자들은 다소 평양과 마찰이 있었지만 북한을 전략적 동맹국으로 인식,꾸준한 관계를 맺어왔다.한편 미국은 이에대한 대상으로 남한에서 공산이념을 몰아내고 서울을 친구로 맞이했다.결국 모스크바와 워싱턴의 이같은 상이한 태도가 한반도에서 호전적 대치상황이라는 토양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이 심각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데탕트 분위기 서울∼평양에도 확산/미도 북한과 대화유지 필요성 있어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것은 한국에 대한 소련의 정책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우선 소련은 더이상 미국과 세계 어느곳에서도 대치할 생각이 없으며 분란을 일으키려 하지도 않는다.소련의 이같은 태도는 한반도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돼 북한은 더이상 소련을 전략적 동맹국으로 볼수 없다. 둘째는 소련이 그간 추진해왔던 「사회주의이념 강화정책」을 포기한 사실이다.지금 소련에선 내부에서 조차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따라서 모스크바정부는 현재 북한에 대해 특정이념을 주지시키려 하지않고 있으며 이 때문에 소련과 북한의 이념체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련은 이와함께 한국에 대해선 기존의 입장에서 탈피,긍정적이고 우호적인 시각으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합리적인 외교정책,국내 민주화조치,괄목할만한 경제성장,대소경제지원등 한국의 일련의 조치는 소련의 호감을 얻고 있다.그리고 이러한 호감은 소련으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새로운 역할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그 누구도 예전엔 사회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한국을 승인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한국인들이 소련의 호전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 대한 새로운 소련정책의 근간은 한소 양국이 좋은 「이웃관계」로 발전하는 것이다.또한 미국·중국·일본등과의 관계개선 및 상호협조를 통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환경을 새로이 조성하는 것이다.따라서 장기적으로 볼때 소련은 일본의 정치적 야망을 어느정도 견제할수 있도록 통일된 한국이 한반도에서 출현하기를 바란다. 중국은 아직까지는 북한을 지지하며 북한과 상호협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멀지않아 서울과 평양이 친선을 맺도록 강력히 권고할 것이다.미국의 정책은 한반도 상황과 관련,중요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워싱턴 당국이 북한에 매료된 것은 아니지만 더이상 북한을 코너로 몰아가려 하지 않는다.미국은 기본적으로 북한과 대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이와함께 한국이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통일을 맞이할 경우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한반도를둘러싼 외부환경은 지금 남과 북의 화해를 촉진시키고 있으며 강대국간의 데탕트 분위기는 서울과 평양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세계는 현재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국가가 보다 밀접하고 우호적으로 접근하길 바라고 있다.남북 사이에 존재하는 민족 감정이나 경제적 필요성도 서울과 평양의 상호접근을 가속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한다.필자는 그렇기 때문에 향후 남북관계의 전망은 매우 낙관적이라고 생각하나 조기통일문제는 당분간 힘들 것으로 본다.남한과 북한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이념적·정치적·경제적 체제를 40여년 이상 각기 유지해 왔기 때문에 합일점을 찾는데 어려움이 있다.통일을 위해서 북한은 내부변화가 선행돼야 하며 개인의 자유신장을 포함,경제체제의 변화,이념체제의 탈바꿈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또 남한도 보다 자유가 신장되고 민주주의가 공고히 확립돼야 하며 특히 경제에 있어 사회주의적 요소인 배분정의가 실현돼야 한다. 이같은 통일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될때 통일은 부드럽게 그리고 덜 충격적으로 한국인들에게다가갈 것이다.그러나 만일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체제가 붕괴되길 바란다면 그것은 결코 소망스런 통일이 될수 없다.시간을 갖고 인내하며 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모스크바국제관계대 졸업 □정치학 박사 □주미·주중대사관 근무 □당 국제부 동아시아국장
  • 아태지역 냉전종식의 징표/유엔가입 각국의 반응

    ▷미국◁ 미국정부는 8일 유엔안보리가 남북한가입권고결의안을 통과시킨데 대해 이를 기쁘게 생각한다고 논평했다. 국무부의 한 관리는 이날 미국정부가 남북한의 유엔가입을 지지해왔음을 지적하면서 9월17일 46차 총회개막과 더불어 유엔총회에서도 만장일치로 남북한의 유엔가입안이 통과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본◁ 일본 외무성은 9일상오 유엔안보리가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권고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을 환영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외무성은 이 담화에서 『남북한의 동시 유엔가입은 매우 기쁜 일로 일본으로서도 환영하는 바』라고 밝히고 『일·북한간의 국교정상화 교섭에도 플러스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소련◁ 소련은 유엔 안보리의 남북한 유엔가입 권고 결의를 한반도에서 해빙과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냉전종결에 있어서 「필요하고 동시에 구체적인 일보」라며 환영하고 있다고 일 요미우리신문이 9일 소련 외교소식통들을 인용,모스크바발로 보도했다. ▷중국◁ 국영 신화통신은 9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남북한 유엔가입을 총회에 권고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사실을 뉴욕발 기사로 논평없이 보도했다고 일 교도통신이 전했다. 신화통신은 한국에 대해 종래의 「SOUTH KOREA」(남조선)가 아니라 「REPUBLIC OF KOREA(ROK)」(대한민국)이라는 정식 명칭을 사용했다고 교도통신은 덧붙였다.
  • 한국정부 비난/박성희양,백두산서/출정선언문을 낭독

    【내외】 지난5일 입북한 전대협대표 박성희양(21·경희대 작곡과4년)은 7일 상오 백두산에서 열린 「백두­한라대행진」출정식에 참가,임수경등 밀입북자와 김종식등 전대협 핵심간부들을 구속한 한국정부를 비난하는 내용의 전대협 명의의 출정선언문을 직접 낭독했다. 7일 하오 이 행사를 녹음중계한 북한방송에 의하면 박양은 한국정부가 범민련 남측본부를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임수경·문익환·김종식씨(전대협 5기회장)등의 구속사실을 들어 한국정부가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난했다.
  • 유엔가입과 한반도 정세발전(사설)

    세계는 지금 크게 변하고있다.대포를 녹여 쟁기를 만드는 평화의 시대가 되었다고들 한다.세계를 지배하던 미소두나라의 정상이 냉전시대의 종식을 뒷받침하는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에 서명함으로써 세계는 화해와 협력의 새기운을 더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속에서 한반도의 남북한도 분명 변화속에 들어섰다.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은 가장 크고 확실한 변화요인중의 하나이다.남북한이 분단상태에서나마 이제 나란히 함께 전쟁과평화와 통일의 과제를 논의하게 된 것이다. 실로 분단 46년,그리고 한국이 유엔의 문을 처음 두드린지 42년만의 「역사적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북한측은 이미 지난 7월8일 단독으로 가입을 신청했다.그쪽에서 내세운 명분이야 어떻든 유엔안보리가 양측의 가입안을 단일 권고결의안으로 묶어 만장일치로 채택한다면 결국은 남북한동시가입으로 실현되는 셈이다.우리 북방정책의 크나큰 결실이다. 남북한은 모두 가입신청과 함께 『유엔헌장에 규정된 모든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하는 의무수락서를 냈다.의무수락선언서에 쓰인 노태우대통령의 서명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진다. 유엔회원국이 된다는 것은 국제사회의 성실한 구성원으로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애호하며 기아와 질병에 공동대처하고 공존번영에 기여하는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보유하는 자격을 말한다.우선 유엔에 가입하면 분담금을 내야한다.그것은 세계의 평화유지기금으로 축적된다.국력에 따라 분담금 부담률이야 남북한이 다르다지만 어떻든 남북한은 이제 국제적인 의무와 함께 세계평화유지를 위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남북한은 또 이제부터 국제무대를 배경으로 서로의 이념과 체제를 존중함으로써 평화공존속에 대화와 교류협력을 넓혀갈 수 있게 됐다.세계평화에 기여함은 물론 민족문제해결을 위해서도 이 무대를 최대로 활용해야 한다.그 과정에서 세계가 지원하고 협력하겠지만 결정은 어디까지나 남북한 양당사자가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하지 아니하고 어느 한쪽이 국제무대에서까지 적대적 대결을 유발하고 상호이해와 신뢰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민족적인 수치가 될 것이다.유엔동시가입으로 우리 한민족은 국제무대에 자존심과 긍지를 걸었다고 할 수 있다.평양측도 이 점을 인식해야 한다. 북한측의 국제적인 위치와 입장도 크게 변해야 할 것이다.특히 북한은 유엔가입을 계기로 먼저 그들의 「하나의 조선」논리와 대남혁명노선의 철회를 국제사회에 공표해야 한다.그것이 바로 유엔헌장의무수락선언에 합치하는 행동의 표시가 될 것이다.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실현과 함께 오는 27일엔 그동안 중단됐던 남북총리회담 제4차 평양회의가 열린다.남북한유엔가입이라는 변화되는 상황에서 열리는 첫번째 회담이 된다.기대하건대 평양회의가 남북한이 정치·군사적 대치상태를 크게 해소하고 대화와 교류의 폭을 획기적으로 넓히는 양당국간 회담이 돼야 할 것이다.그럴때 세계가 다시 한번 한반도를 주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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