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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택! 역사를 갈랐다] (6) 최우와 하급무사들

    [선택! 역사를 갈랐다] (6) 최우와 하급무사들

    고종 18년(1231) 음력 8월에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략했다. 이에 고려의 재상은 9월에 무인정권의 집권자 최우(최이)의 집에서 의논해 삼군(三軍)을 출동시켰다. 삼군은 중군, 우군, 후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0월에 고려의 삼군이 북상해 청천강 하안의 안북성(안주)에 주둔했다. 몽골군이 도전해도 삼군은 성 밖으로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후군 지휘자 대집성이 나가서 싸우기를 강력히 요구하니 삼군이 성 밖으로 나가 진을 쳤다. 하지만 정작 중군과 우군 지휘자는 나가지 않고 성에 올라 관망하다 대집성 역시 성으로 도로 들어왔다. 고려의 삼군은 고위급 지휘자도 없이 성 밖에 진을 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몽골군이 고려군을 추격해 무찌르자 고려군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대집성이 삼군을 안북성 밖으로 나가게 해 싸우도록 만든 행위는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몽골군은 기마병이 세계 역사상 가장 강했으니 그러한 몽골군의 주력과 성 밖의 벌판에서 전면전을 벌인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었다. 안북성을 지키면서 몽골군의 배후를 치거나 몰래 기습하는 전법을 구사했어야 했다. 대집성은 과부가 된 미모의 딸을 최우에게 보내 패배의 책임에서 벗어난다. 몽골군이 물밀듯이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11월에 몽골군이 개경의 길목인 평주성을 도륙하더니 개경성의 서문인 선의문 밖에 주둔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자 개경이 흉흉했다. 최우와 사위 김약선이 사병으로 자신을 지킨 반면 개경성을 지킨 자는 대개 노약 남녀였다. 12월에 몽골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최우가 몽골군에 화친을 요청했다. 몽골 사절단이 개경성으로 들어와 고려 임금 고종을 만나 화친이 성립되었는데 고려가 항복을 한 모양새였다. 고려의 재상이 고종 19년(1232) 2월 20일에 모여 도읍 옮기기를 의논했다. 5월 21일에 재상이 몽골 방어를 의논했고, 23일에도 재상과 4품 이상이 몽골방어 책략을 의논했다. 거의 모두가 개경성을 지켜 적을 막아야 한다고 했는데, 오직 재상 정무(鄭畝)와 대집성이 도읍을 옮겨 난을 피해야 한다고 했다. 고종 19년 6월에 최우가 재상을 그 집에 모아 천도를 의논했다. 당시 고려는 오랫동안 태평을 누려 개경은 호(戶)가 10만에 이르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집이 서로 바라볼 정도로 번성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정서가 이 편안한 곳에 살고 싶어 천도를 어렵게 여겼지만 최우를 두려워해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이때 재상 유승단이 나서서 이의를 제기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김은 이치이니 예(禮)로써 섬기고 신(信)으로써 외교하면 저(몽골) 역시 무슨 명분으로 매번 우리를 곤란하게 하리오. 성곽을 포기하고 종묘사직을 버리고 섬에 달아나 숨어 구차하게 세월을 연장함으로써 장정을 적의 무기에 모조리 죽게 하고 노약자를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좋은 계책이 아니오.” 유승단이 이처럼 과감하게 발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고종 임금의 사부이기 때문이었다. 천도 예정지는 섬이 언급된 것을 보면 강화로 정해져 있었다. 고려 정부가 백성을 버리고 섬으로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유승단의 발언은 가슴을 울리지만 예의와 믿음으로 몽골을 사대(事大)하면 몽골이 고려를 괴롭히지 않으리라는 해결책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다. ●최우, 천도 반대 무관 베고 임금 협박… 수레 100개로 재산 운반 유승단의 발언으로 회의장이 술렁이는 사이에 야별초지유 김세충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최우에게 따졌다. “송경(개경)은 태조 이래로 지켜온 지 무릇 200여 년이라, 성(城)은 견고하고 무기와 식량은 풍족하니 힘을 다해 지켜 사직을 보위해야 마땅한데, 이를 포기하고 떠나 장차 어디에 도읍하려 하시오.” 야별초는 최우가 치안을 위해 만든 부대로 훗날 삼별초의 모태인데 그 중간급 지휘자가 용감하게 최우를 윽박지른 것이었다. 최우가 개경성을 지키는 책략을 묻자 김세충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집성이 최우에게 김세충이 감히 큰 의논을 저지하니 베어서 내외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고 요청했다. 무반을 대표하는 상장군도 대집성의 뜻에 맞추어 그렇게 하기를 요청했다. 이에 최우가 김세충을 끌어내 베게 했다. 김세충의 발언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개경성 방어책을 대답하지 못한 데에서 드러나듯이 구체적이지 못했다. 개경성의 무기와 식량은 풍족했을지라도 개경성이 견고했는지는 따져볼 문제이다. 개경 나성(외성)은 현종 때 거란의 침략으로 개경이 불탄 다음에 축조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때때로 수리하기는 했지만 훼손이 진행되어 여기저기 허물어져 있었다. ●당시 수도 개경 성곽, 거란침입에 이미 훼손된 상태 인종 초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의 서긍은 여행기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왕성(도성)이 지형을 따라 모래와 자갈을 섞어 축조되었는데 호참(壕塹·해자)과 여장(女牆·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없고 그리 견고하지 않아 성의 낮은 곳은 적을 감당할 수 없어 지키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이로 보아 개경 나성은 그리 견고하지 않았다. 또한 개경 나성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성곽이라 수리하기도 벅찼고 병력이 많지 않으면 지키기도 어려웠다. 최우는 김세충을 죽이면서 강화로의 천도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최우가 그날에 고종에게 아뢰어 속히 강화로 행차하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임금은 미적거리며 결정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고종이 임금으로서 백성을 육지에 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작용했겠지만, 왕권을 무력화시켜 권력을 행사해 온 무인정권을 몽골군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너뜨려 왕권을 회복하고 싶은 속내도 작용했을 것이다. 최우는 천도를 강행하고 수레 100개 정도를 동원해 자신의 재산을 강화로 운반하니 개경이 흉흉했다. 최우는 담당관청에 명령해 개경성 안에 방을 게시해 기한 내에 강화로 출발하지 못한 자는 군법으로 논한다고 했다. 또한 관원을 여러 도(道)에 파견해 백성을 산성과 섬으로 이사시키도록 했다. 최우는 6월 16일에 임금에게 강화로 천도하도록 위협했고, 다음날에 2000명의 군인을 동원해 강화에 궁궐을 조영하도록 했다. 7월 6일에 임금도 어쩔 수 없이 개경을 출발해 승천부(강화도 북쪽 맞은편 고을)에 머물렀다가 다음 날인 7일에 바다를 건너 강화 객관에 들어갔다. 고려 임금과 정부가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7월 7석에 강화로 들어온 것이었다. 비가 열흘 넘게 내렸기 때문에 개경에서 강화로 가는 동안 사람과 말이 진창에 빠져 넘어지곤 했다. 높은 벼슬아치와 양가집 부녀 중에도 맨발에 짐을 이고 멘 자도 있었다.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홀몸 노인이 길을 잃어 울부짖었다. 이렇게 강화 천도가 마무리됨으로써 약 38년 동안의 강도(江都) 시대가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이를 빌미로 고려에 대한 제2차 침략을 단행했는데, 이것은 몽골과의 전쟁 재개를 의미했다. 강화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강화도의 동쪽과 동북쪽 해안을 따라 외성을 쌓았다. 그리고 아들 최항은 도성인 중성을 쌓아 방위를 더욱 강화했다. 당시 강화도 일대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이 거세고 갯벌이 발달해 배를 댈 만한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았다. 그러니 몽골군은 김포반도에 와서 강화도를 향해 소리만 지를 뿐 건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만약 몽골군이 고려군의 화살을 뚫고 강화도 연안에 진입한다고 해도 외성과 중성을 넘어야 하고 고려 최고 정예부대와 싸워야 했다. 강화도는 세계 최강의 몽골군에게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고려는 몽골과 30년 동안이나 싸울 수 있었다. ●강화 거친 물살 덕에 ‘난공불락’… 방치된 육지 백성 삶은 참혹 대신에 본토에 남겨진 고려 백성은 무인정권이 간간이 보낸 지휘자와 병력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거의 자신의 힘으로 고향을 지켜야 했다. 광주산성(남한산성) 전투, 용인 처인성 전투, 충주성 전투, 죽주(안성 죽산) 전투 등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며, 특히 처인성 전투에서는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를 화살로 쏘아 죽이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몽골군은 30년 동안 6차례에 걸쳐 집요하고 빈번하게 고려를 침략해 강산을 유린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끌어갔다. 최우는 한편으로는 몽골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몽골과의 전쟁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자신은 강화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린 반면 백성을 육지에 방치해 온갖 참상을 겪게 만든 악당으로 비난받는다. 최우의 강화 천도는 그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임은 분명하지만, 그의 선택이 옳았는지 글렀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강화로 천도했기 때문에 몽골과 오랫동안 싸울 수 있었고 그 항쟁을 인정받아 몽골에 항복한 이후에도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강화로 천도하지 않았다면 오래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랬다면 고려 백성의 고통은 그리 심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고려국이 망해 몽골인이나 중국인으로 살아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몽골족 원과 만주족 청의 판도가 오늘날 중국의 판도에 거의 계승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최우의 선택에 대한 가치판단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김창현 연구교수(고려대 한국사연구소)
  • 흥겨운 우리 가락 어깨춤 덩실덩실

    흥겨운 우리 가락 어깨춤 덩실덩실

    올 설 연휴는 주말을 끼고 있어 길지 않다. 그래도 여느 해 못지않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관객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 짧은 연휴라도 충분히 알차게 보낼 수 있다. ●국악 들으며 액운 씻고 희망 찾고 국립국악원은 설 당일인 23일 오후 4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과 야외광장에서 ‘미르(龍)해의 새아침’을 공연한다. 1부 ‘벽사(?邪)-나쁜 기운을 물리치고’에서는 ‘열두 달 액살풀이’로 시작해 궁중무용 ‘처용무’, 남도잡가 ‘보렴’ 등을 선보이며 묵은 해의 액운을 씻는다. 2부 ‘진경(進慶)-경사를 맞이한다’는 용이 승천하는 2012년에 모든 이들에게 경사가 있길 바란다는 의미로 준비했다. 창작악단이 들려주는 국악관현악곡 ‘춘설’, 남자 무용수들의 힘찬 몸짓을 느낄 수 있는 ‘북춤’, 연희컴퍼니의 타악퍼포먼스 ‘유희’, 창작악단의 실내악 편성 ‘판놀음, 신풀이’를 차례로 연주한다. 사회자로 나선 소리꾼 이자람도 ‘판소리 단가 중 사철가’를 들려준다. 공연 시작 전에는 야외광장에서 연날리기, 제기차기 등 민속놀이 체험을 할 수 있다. 전석 1만원. (02)580-3300. 서울 정동극장은 21~24일 야외 쌈지마당에서 제기차기, 고리 던지기, 투호 던지기 등의 놀이를 준비했다. 설 전후인 22일과 24일에 전통 뮤지컬 ‘미소’를 관람하는 관객 모두에게 전통 한과를 선물한다. (02)751-1500. ●서울 도심에서 즐기는 우리 가락 세종문화회관은 세종·충무공이야기와 미술관 등 전시관과 서울남산국악당 등에서 공연과 전시, 세시 풍속 프로그램을 펼친다. 서울 중구 필동 한옥마을 안 서울남산국악당은 23~24일 새해 희망 콘서트 ‘신년 아리랑’과 전통 문화체험 프로그램 ‘설맞이 미수다(美秀茶)’를 연다. 클래식·재즈·아카펠라 등 다양한 장르와 우리 민요를 접목해 온 소리꾼 김용우가 지역 특징을 살린 아리랑을 신명나게 풀어낸다. 전석 1000원으로 즐길 수 있다. 이 기간 오후 1시부터 5시 사이에는 앞 마당에서 사물놀이와 길놀이, 제기차기, 떡메치기 등 설날 세시풍속을 즐길 수 있다. 20~24일 남산국악당 국악체험실에서 열리는 ‘설맞이 미수다’는 우리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싶은 이들에게 가래떡 썰기, 다례 체험 등 전통 설 풍속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마련했다. (02)2261-0515. 삼청각은 23일과 24일 오후 5시 디너 콘서트 ‘까치까치 설날’을 준비했다. 소리꾼 남상일과 박애리가 판소리 ‘춘향가’, ‘흥부가’, ‘심청가’ 세 마당을 들려주고 삼청각 국악 앙상블 ‘청아랑’이 흥겨운 연주를 선사한다. 한국 전통의 세시풍속과 공연, 한정식을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02)765-3700. 이 밖에 서울 광화문광장 지하에 있는 역사문화 체험 공간 ‘세종·충무공이야기’에서는 체험과 국악 공연이, 북서울꿈의숲 아트센터에선 24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사물놀이와 전통 윷놀이등 잔치마당이 준비돼 있다. ●궁(宮)과 능()에서 제대로 즐겨 문화재청은 설 당일인 23일 세화를 나누는 행사를 갖는다. 세화는 새해를 기념하기 위해 왕과 신하들이 서로 주고받던 그림으로, 임진년을 맞아 경복궁 사정전 안에 그려진 운룡도(雲龍圖)를 세화로 제작했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종묘 등 궁과 동구릉·선릉·융릉·장릉·정릉·영릉·서오릉 등 조선 왕릉에서 선착순으로 증정할 예정이다. 이 가운데 경복궁 홍례문 광장에서는 오후 2시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관으로 국왕이 세화를 하사하는 모습을 재현한다. 영릉과 동구릉, 선릉, 융릉, 장릉, 정릉에서는 설날을 전후해 전통 민속놀이마당을 운영한다. 이날 오후 2시부터 궁궐(창덕궁 후원 제외)과 종묘, 조선 왕릉을 무료로 개방한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주말을 즐기자] 국악을 저렴한 관람료로… 클래식을 친절한 설명과…

    [주말을 즐기자] 국악을 저렴한 관람료로… 클래식을 친절한 설명과…

    우리 국악과 클래식 공연을 보고 싶었지만 관람료가 조금 부담됐다면, 또는 이해하기 다소 어렵지 않을까 고민했다면 토요일에 열리는 공연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친절한 설명을 곁들인 공연이 다채롭게 준비돼 있다. 서울 국립국악원은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우면당에서 상설공연인 ‘토요명품공연’을 진행한다. 지난 7일부터 시작된 토요명품공연은 초심자를 위한 종합프로그램 38회와 국악계 명인들이 꾸미는 명인 명품 프로그램 6회, 유네스코 등재 유산을 감상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 프로그램 6회 등 모두 50회에 걸쳐 열린다. 종합 프로그램은 정악곡, 산조독주, 정악성악곡, 전통춤, 창작음악, 연희공연 등으로 골고루 구성해 전통 음악과 민속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도록 했다. 명인 명품 프로그램은 국악 애호가를 위해 ‘길고 깊게’ 볼 수 있는 무대로 꾸민다. 영산회상·정가·판소리·산조 등의 명인 무대로, 5~7월과 9월, 10월, 12월 둘째 주 토요일에 갖는다. 오는 14일부터 2~4월, 8월, 11월 둘째 주 토요일은 세계 유네스코위원회의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가곡, 종묘제례악, 판소리, 처용무, 강강술래, 영산재 중 작법 등으로 채운다. 국립국악원은 토요명품공연의 ‘단골 관객’을 위해 적립카드 제도를 만들었다. 5회 관람하면 토요명품공연 관람권 2장, 10회 관람에는 토요명품공연 관람권 4장 또는 송년 공연 2장을 제공한다. 전석 1만원. (02)580-3300. 클래식을 즐기고 싶다면 서울 예술의전당 토요 콘서트가 제격이다. 2월부터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토요 콘서트’는 평소 바쁜 일상으로 공연장을 찾기 힘들었던 직장인이나 심화된 해설 음악회를 원하는 관객을 위한 자리다. 국내 최정상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활동한 김대진이 정통 클래식 음악에 본질적으로 접근하는 해설을 덧대는 것이 특징. 8월까지 계속되는 주제는 지난해 10월부터 이어온 베토벤 탐구다. 부조니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입상한 피아니스트 김혜진(2월), 베토벤 국제콩쿠르에서 1위를 하며 ‘한국의 베토벤’이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유영욱(3월), 바이올리니스트 김현아·첼리스트 박노을·피아니스트 오윤주(4월), 거장의 기질을 타고 났다는 바이올리니스트 민유경(5월), 고급스러운 기량을 선사할 바이올리니스트 임재홍(6월)이 관객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8월에는 김대진이 지휘와 해설, 연주를 함께 선보이며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다. 1만 5000~2만원. (02)580-1300. 예술의전당은 3월부터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방송인 손범수·진양혜 부부가 진행하는 ‘토크 앤드 콘서트’를 시작한다. 다양한 음악 장르에서 국내 최고로 꼽히는 연주자들을 초대해 진솔한 이야기와 멋진 연주를 함께 만나는 특별한 음악회이다. 2만~5만원. (02)580-1300.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지역경제 살리기·복지향상 역점…백령도에 대형여객선 취항 모색”

    “지역경제 살리기·복지향상 역점…백령도에 대형여객선 취항 모색”

    조윤길 옹진군수에게 지난해는 매우 어렵고 힘든 한 해였다.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으로 파괴된 현지 복구와 주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섬과 육지를 수십 차례 오갔다. 서해5도에 대한 국가 지원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기위해 정부 청사도 수없이 드나들었다. 덕분에 교부세와 보조금 지원이 대폭 확대돼 2007년 1800억원이던 옹진군 예산 규모는 올해 3000억원을 넘어섰다. 조 군수는 “지역경제 살리기와 실질적 복지 향상을 추진, 옹진군이 만성적인 낙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안정되고 평화로운 서해5도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정부가 발표한 서해5도 종합발전계획에 의한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해 소득과 일자리를 늘려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겠다. 바다목장화 사업과 종묘 방류사업을 통해 풍요로운 수산자원이 조성돼 소득증대로 이어지도록 하겠다. 예산이 줄어든 노후주택 개량사업도 정부 측에 지속적으로 건의해 당초 계획대로 할 방침이다. 중국어선 불법조업이 원천적으로 방지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책을 강구하겠다. →도서지역 정주기반 확충이 시급한데. -백령도에는 대형 여객선이 조속히 취항될 수 있도록 하고, 국민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섬을 찾을 수 있도록 여객운임 대중화 방안을 모색하겠다. 물 부족으로 불편을 겪는 지역에는 풍부한 양질의 식수가 공급되도록 식수원을 개발하겠다. 의료진이 없는 소연평도·울도·문갑도 등에 보건진료소를 설치하고 이동진료를 확대하겠다. →관광산업 개발을 강조해 왔는데. -100개의 섬으로 구성된 옹진군에 해양레저 관광산업은 매력 있고 경쟁력 있는 산업이다. 경인아라뱃길과 연계해 덕적도에 마리나항을 건설하고 해양생태 체험어장 등 관광 인프라를 내실있게 구축하겠다. 연평도에 안보관광교육장을 조성하고 영화 ‘섬마을 선생님’ 촬영지인 영흥도 계남분교를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공간으로 꾸미겠다. 시민단체 등의 반대로 지연되고 있는 굴업도 관광단지는 골프장을 포함한 종합적인 해양관광지로 개발될 수 있도록 군민과 함께 공동대응하겠다. →연평도는 완전히 정상화되었는지. -포격 당시 파괴된 주택과 건물에 대한 복구는 마무리됐다. 기반시설과 어장 등도 정상화돼 주민들은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정신적 고통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루빨리 남북관계가 정상화돼 주민들에게 다시는 똑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열린세상] 박수속에 한 해를 보내는 문화유산/이세섭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

    [열린세상] 박수속에 한 해를 보내는 문화유산/이세섭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

    지난달 28일 한국 무형유산의 가시성과 중요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쾌거’가 있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6차 무형문화유산 보호 정부간 위원회에서 한산모시짜기가 택견과 줄타기와 함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택견과 줄타기는 예비심사 단계에서 이미 ‘등재 권고’를 받아 유네스코 정부간 위원회 회의 관례상 등재가 확실시됐으나 한산모시짜기는 예비 심사에서 ‘정보 보완 권고’(등재 보류) 판정을 받아 등재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대표단의 적극적인 교섭활동으로 위원국들의 지지를 얻어내 막판에 등재되었다. 한산모시짜기 등재가 쾌거인 이유는 ‘정보 보완 권고’를 받은, 각국에서 신청한 26건의 무형유산 중 유일하게 대표 목록에 등재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국은 2001년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을 시작으로 2003년 판소리, 2005년 강릉단오제, 2009년 강강술래·남사당놀이·영산재·제주 칠머리당영등굿·처용무, 지난해 가곡·대목장·매사냥에 이어 모두 14건에 이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5000년의 역사와 함께 형성된 우리 무형유산의 가시성과 중요성이 하나하나 국제적으로 인정받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는 우리의 무형유산 제도가 무형유산을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도록 구체화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무형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제고에 기여함으로써 전 세계의 문화다양성을 보여 주고, 인류 창의성을 증명하는 데 기여하고 있음이 확인된 셈이다. 삶의 일부로서 우리의 공동체·개인이 자유롭고 광범위하게 참여하면서, 수천년 세월의 켜로 축적해 놓은 우리 무형유산의 보호와 증진은 ‘우리’를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재인식되어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의 ‘발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젠 단순한 전승과 보존, 보호를 넘어 활용과 증진을 통한 가치를 재인식하면서 그 의미망들을 다양하게 확산해야 하는 과제들이 ‘유네스코 무형유산 대표목록’ 수만큼 시나브로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이런 문화적 흐름 속에서 문화유산 정책을 총괄하는 문화재청과 우리 재단은 다양한 문화유산 활용과 증진의 방안들을 모색해 왔다. 문화재청이 지난해부터 야심차게 추진해 왔던 ‘살아 숨쉬는 5대궁 만들기’ 사업은 그 대표적인 정책 중의 하나였다. 특히 4~6월, 9~10월 음력 보름을 전후해 유네스코 세계유형유산인 창덕궁에서 행해진 달빛 기행은 달빛 속 궁궐의 야경, 전통공연으로 구성되어 유·무형 유산의 ‘융합’적인 활용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 매회 관람인원이 100명 내외로 제한되긴 했지만, 예약시작 몇 분 만에 마감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10월에 2회에 걸쳐 국보 224호 경복궁 경회루에서 진행된 전통공연 ‘연향’도 문화계의 찬사를 받았으며, 유·무형유산 활용과 가치 증진의 사례로 기록될 만한 기품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경회루의 건축미와 경복궁의 아름다운 야경, 경회루의 연못, 만세산 등을 ‘무대배경’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빚어 인류 무형유산인 강강술래, 판소리 그리고 궁중정재 가인전목단, 오고무, 선유락의 춤사위를 펼치며 인류 무형유산에 걸맞은 연출력으로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 외에 국악 버라이어티 공연으로 국악인이자 배우인 오정해씨 사회로 진행되는, 전국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가는 ‘굿보러가자’ 공연에 우리 전통 탈을 만들어 써보고, 그 용도를 이해하는 체험프로그램 ‘찾아가는 문화유산’을 더해 예능과 기능(공예)의 ‘융합 프로그램’ 역시 성공적인 문화유산 활용과 증진의 모범적 사례로 꼽을 만하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와 형식의 유·무형 유산의 융·복합적 활용 방법은 고루한 전통문화 접근 방식에 변화를 주면서 관람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어 문화유산의 저변을 넓히며 그 자체로 전승, 보전에 기여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접근 방법에 따라 잠재된 무한한 가치가 드러나면서 그 속에 스며들어 있는 의미들이 재해석되고, 재발견되어 풍성한 문화적 자산들을 재생산하고 확산시키는 효과까지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충남 서해안 온대·한대성 어류 공생

    충남 서해안의 수온 상승과 먹이생물 변화 등으로 온대성 어류가 한대성 어류와 공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4일 보령수협 등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5년간 집계된 어종 중 온대성 어종인 삼치, 갈치와 남해안에서 주로 잡히는 멸치, 아귀가 크게 늘어난 반면 한대성 어종인 대구와 가자미는 줄었다. 삼치는 21t에서 100t으로 5배 가까이 늘었고, 갈치는 69t에서 127t, 멸치는 1540t에서 1723t, 아귀는 380t에서 651t, 서대는 18t에서 45t, 참돔은 9t에서 23t, 병어는 32t에서 119t으로 각각 늘었다. 물메기는 한대성 어종이지만 겨울에 집중적으로 잡혀 64t에서 601t으로 급증했다. 반면 한대성 어종인 대구와 가자미는 각각 1915t과 3330t에서 754t과 1076t으로 줄었고, 키조개는 3326t에서 2144t, 주꾸미는 463t에서 329t으로 각각 감소했다. 온대성인 참조기와 오징어도 각각 32t과 506t에서 17t과 233t으로 각각 줄어들었다. 서해수산연구소 손재경 박사는 “충남 서해안은 수온이 들쭉날쭉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수온 및 먹이생물의 변화가 어종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해안에서 전통적으로 많이 잡히던 꽃게는 2006년 131t에서 지난해 1460t으로 급증했고, 넙치도 103t에서 357t으로 크게 늘었다. 이는 자치단체 등에서 하고 있는 수산종묘 방류 사업 때문으로 보인다. 어종이 다양해지고 소비성이 강한 물고기가 많이 잡히면서 보령 지역 어민의 총소득은 지난해의 경우 933억원으로 5년 전보다 2배가량 증가했다. 보령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8·15 65주년] 훼손 궁궐 제모습 찾기 어디까지

    원형 복원된 광화문이 15일 일반인에게 공개되면 1990년부터 진행돼 온 경복궁 1차 복원사업은 마무리된다. 경복궁 복원사업은 일제 강점기에 변형, 훼손된 경복궁을 원형대로 복원해 민족 정기를 회복하고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한편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조성하려는 목표로 시작됐다. 1차 복원사업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거나 훼손된 전각을 새로 지어 정전(正殿), 편전(便殿), 침전(寢殿), 동궁(東宮), 빈전(殯殿) 등으로 이루어진 기본 궁제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1990~1995년 강녕전 등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는 침전 권역이 복원됐고, 1995년 동궁 권역 복원을 위해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됐다. 1999년에는 세자의 거처인 동궁 자선당 영역이 복원됐고, 2000년대 들어 흥례문, 건청궁, 태원전 등이 되살아났다. 20년간 총 89동을 복원했다.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 있던 기존 건물 36동을 포함하면 총 125동으로, 고종 당시 500여동의 25% 수준에 도달했다. 1571억원의 사업비가 들었다. 경복궁은 내년부터 2030년까지 2차 복원 사업이 추진된다. 총 54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궐내 각사와 동궁 권역 등을 중심으로 6개 권역에서 254동의 건물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경희궁은 1980년 9월 궁터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1985년에는 공원으로 지정됐다.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과 함께 서울시립박물관과 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경희궁터의 유구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발굴 결과와 문헌 고증을 거쳐 1987년 흥화문, 1991년 숭정전, 1998년 자정전과 회랑, 2000년 태령전과 그 일곽을 각각 복원했다. 다만 흥화문은 원래 있던 자리에 구세군회관이 자리해 서쪽으로 100여m 옮겨 복원했다. 창덕궁 인정전 행각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뒤 일제가 복원하면서 전통 궁궐 건축 양식으로 복원하지 않고 트러스 구조 위에 일본식 널개판과 루핑을 깔고 그 위에 한식 기와를 올렸다. 겉으로는 우리 전통 궁궐의 모습으로 보이나 내부 구조는 서구식이다. 정부는 1990년부터 1999년까지 대규모 복원 사업을 벌여 돈화문 월대, 낙선재 일대, 진선문, 숙장문 등을 복원했다. 창덕궁과 종묘는 원래 담장을 사이에 두고 하나로 이어져 있었으나 1931년 일제가 율곡로를 개설하면서 분리됐다. 서울시는 10월부터 이 구간의 일부를 지하화하는 등 복원계획을 추진 중이다. 덕수궁은 석조전의 내부 원형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2012년 10월까지 고종 당시 원형 그대로 복원해 ‘대한제국 역사관’(가칭)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일제강점기에 최대의 행락지였고 광복 후에도 유원지로 전락했던 창경원은 가장 먼저 복원공사가 이뤄져 1983년 12월 창경궁으로 환원됐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문화재 활용해 삶의 질 높여야”

    “문화재 활용해 삶의 질 높여야”

    “전통문화를 원형대로 보존하는 건 분명 중요합니다. 하지만 원형 유지에 급급해서 동시대와의 호흡에 실패한 문화는 결국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김홍렬(60) 재단 이사장은 31일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문화재 활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한편 ‘찾아가는 문화 버스’ 등 각종 30주년 기념 사업을 소개했다. 문화재보호재단은 1980년 문화재청 산하 특별법인으로 설립됐다. 문화재 정책에서 늘 대립하는 가치인 ‘보존과 활용’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 목표였다. 이후 재단은 30년 동안 중요무형문화재의 보존·전승에 힘쓰면서, 유형문화재를 활용한 각종 문화사업을 벌여 왔다. 김 이사장은 30여년 공직 생활 대부분을 문화재청 등 문화재 관련 분야에서 일해온 ‘문화재통’이다. 그만큼 문화재에 대한 그의 철학은 뚜렷하다. 그가 재단을 지휘한 것은 3년 전부터. 그는 “전에는 주로 문화재 보존과 전승에 치중했다면, 요즘은 문화재를 어떻게 활용해 삶의 질을 높일 것인가가 관건”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생각은 문화재보호재단이 문화재를 현대인의 삶과 연결시켜 줄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는 데 이어졌다. 경복궁 등 궁궐 앞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 ‘궁성문 개폐식’, ‘수문장 교대의식’이나 ‘종묘제례’ 같은 전통의례가 대표적인 예다. 올해는 임금이 직접 종묘 관리실태를 점검하는 ‘전알봉심례(展謁奉審禮)’도 되살려 전통 알리기와 볼거리 제공 효과를 함께 노린다. “문화재가 삶의 질을 높인다.”는 생각은 올해 30주년 기업 사업인 ‘찾아가는 문화버스(가칭)’ 등으로 구체화된다. 그는 “문화재에서 소외된 노인, 장애인 등에게 문화재가 직접 찾아가는 행사”라면서 “무형문화재 방문 공연 등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가을쯤 시행될 예정이다. 현재 김 이사장은 30주년 행사 준비에 정신이 없다. 1일 창립식을 시작으로 3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전시, 공연이 열린다. 창립기념 특별공연으로 3일까지 서울 대치동 코우스(KOUS)에서 연산군 일기를 바탕으로 한 무악극(舞劇) ‘왕의 춤’(연출 진옥섭)이 개최된다. 30일까지 서울 삼성동 중요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는 ‘발굴로 본 한반도 사람의 발자취’ 사진전을 열고 문화 연구·발굴에 관한 사진 200여점을 전시한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설연휴 곳곳서 문화행사

    설연휴 곳곳서 문화행사

    민족의 명절인 설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가족 나들이객을 겨냥한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린다. 서울 광화문광장은 차 없는 거리로 조성돼 14일 오후 차량통행이 전면 통제되고 시내버스도 우회한다. 서울시는 설 당일인 14일 오후 2시부터 9시까지 세종로 양방향 교통을 통제하고 ‘차 없는 광화문광장 설날 한마당’ 행사를 개최한다. 광장에서는 미8군 군악대, 국방부 3군 의장대의 시범과 조선왕조 수문장교대의식 등이 이어진다.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설치된 무대에서 ‘궁중정재’와 ‘청성곡’ 대금 독주, 한해의 모든 액(厄)을 막아내고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 ‘액막이타령’ 등 정통 국악공연이 펼쳐진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103번, 109번, 9708번 등 세종로 구간을 운행하는 시내버스 31개 노선은 의주로, 을지로 등으로 우회운행한다. 운현궁에서는 다양한 민속행사가 진행된다. 연휴 첫날인 13일에는 풍물패의 공연과 차례상 차리기 시연, 14일에는 떡국 나누기 행사가 진행된다. 각종 민속놀이와 민속제기·복조리 만들기도 체험할 수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 등 고궁에서도 세배 장소를 제공하고 중요무형문화재 공연을 연다. 14일 오후에는 인왕산 정상과 사 직동 삼거리초소, 청운공원 윤동주 시비 옆 등 3곳에 대형 호랑이 조형물을 설치하는 행사가 진행된다. 한국관광공사는 오는 20일까지 청계천로 관광안내전시관에서 전통 민속놀이와 한복입기 체험행사를 마련했다. 설 연휴 3일간은 매일 100명에게 복주머니를 증정한다. 서울랜드, 롯데월드, 에버랜드 등 놀이공원들도 특별 이벤트와 퍼레이드, 전통문화체험 등을 진행한다. 한국민속촌은 설연휴 3일간 ‘설맞이 민속한마당’을 열고 소원성취 12거리 큰굿한마당과 큰북공연단체의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새해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대북공연을 준비했다. 경기도박물관 방문객은 13~15일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 사진전을 무료로 볼 수 있다. 경기도미술관은 올해 첫 기획전인 ‘오! 명화’전을 무료 개방한다. 경기도자박물관, 백남준아트센터, 실학박물관 등도 공짜로 입장할 수 있다. 민속촌 앞 경기도국악당에서는 ‘엄마랑아빠랑 전통문화 나들이’ 행사가 마련되고 ‘별주부와 함께 떠나는 소리여행’, ‘교육과 체험이 만난 음악공연’, ‘덩더쿵 얼쑤~신나는 마당’ 등을 연다. 광주 경기도자박물관에서는 전통도예가 15명의 작품을 전시하는 ‘법고창신전’이 열린다. 화성과 화성생궁을 정상운영하고 설날에는 무료개방한다. 국립공주박물관은 야외광장에서 떡과 알밤 구워먹기 등 설 음식 시식과 대추, 생강차 등 전통차를 마실 수 있도록 했다. 13일에는 ‘우리그림 풍속화’ 체험, 14일에는 전통놀이 ‘쌍륙’ 행사가 진행된다. 국립김해박물관은 종이딱지치기와 비석치기, 사방치기 등 추억의 놀이마당을 마련하고 매일 오후 2시 영화를 상영한다. 김병철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큰 고통받은 위안부·강제징용 문제 반드시 털고 가야”

    [한·일 100년 대기획] “큰 고통받은 위안부·강제징용 문제 반드시 털고 가야”

    한완상 전 부총리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서울신문과의 신년특집 인터뷰에서 “한·일 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서로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전 부총리는 정부 차원에서 청소년 교류를 적극 추진하기를 희망했다. 와다 명예교수는 일왕의 방한 문제에 대해 “방한한다면 방문 자체로 그쳐서는 안 되며 역사적이어야 한다.”면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순종의 묘에 참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 전 부총리는 일왕의 방안을 전제로 “100년 전 병탄의 부당성 등 일본의 잘못을 정중하고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고 말했다. 다음은 대담 형식으로 구성한 두 원로의 인터뷰다. │도쿄 박홍기특파원·서울 홍지민·강병철기자│ →한국(일본)에게 일본(한국)은 무엇인가. 한완상 전 부총리 일본은 20세기 초부터 36년간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억압·수탈·차별한 나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데다 아시아에 속하면서도 서구 열강에 속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나라다.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 일본과 한국은 무척 깊은 역사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은 한국을 침략, 식민지화했다. 반성해야만 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 봐도 한국은 일본에게 대단히 중요한 이웃 나라다. →지난 100년간 한·일 관계는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 전 부총리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있었다. 1910년 한일병탄이 이뤄졌다. 늑약의 1조는 ‘통치권을 완전히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이양한다.’이다. 519년 조선 왕조가 끝나는 순간이다. 1936년 일본은 내선일체를 외쳤다. 창씨개명, 한글사용 금지 등도 강요했다. 문화와 민족혼마저 빼앗는 통치를 시도했다. 태평양전쟁에 패전한 일본은 승전국인 미국과 함께 한반도의 분단에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 전범국인 일본은 통일된 자유 국가로 남고, 식민지로 질곡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한반도는 갈라져 있다. 100년을 되돌아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와다 명예교수 단적인 예로 조선은 식민지였기에 일본에 저항하지 못하고 침략전쟁에 말려들었다.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가장 큰 죄다. 1945년 한국은 독립을 맞았지만 일본은 침략과 식민 지배에 사과하지 않았다. 역사 자체를 내동댕이쳤다. 때문에 일본은 그때의 역사를 잊고 살아오게 됐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맺었는데 그 당시에도 과거의 반성 없이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한국은 엄청난 노력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일제 강점이 현재 한국인이나 일본인에게 미친 영향은. 한 전 부총리 한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 충격을 줬다. 씻기 힘든 수치심과 분노다. 백색(서구) 제국주의의 흐름을 타고 등장한 황색(아시아) 제국주의의 제물이 된 사실에 대한 울분과 함께 민족자주의식이 형성됐다. 해방됐을 때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믿지 말자. 일본이 일어난다. 조선은 조심해라.’라는 민담을 들었다. 백색·황색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일본을 향한 불신과 거부감이 한국인의 성격 속에 내면화된 것이다. 와다 명예교수 일본은 한국에 대한 병합(와다 명예교수의 표현대로)한 사실을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잊으려 했고, 실제 잊어버렸다. 그런 탓에 일본 젊은이들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었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길 정도다. 반면 한국의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역사다.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를 받은 사람의 고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지나쳐 버리고 싶어 한다. 한국을 병합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의 생활 속에서는 별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인은 분명하게 한국인의 감정을 읽어야 한다. 한 전 부총리 너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에게 감정적인 대응을 자제하라는 건 정말 잔인한 일이다. 울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가장 큰 고통을 받은 두 부류가 위안부와 강제 노동자다. 합리적으로 털고 가야 한다. 경제적 보상 이전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잘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시인 받아야 한다. 또 최소한의 경제적 보상도 있어야 한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람직한 미래는 가능한가. 한 전 부총리 가능하다. 19~20세기는 서세(西勢)의시대였다. 19세기는 팍스브리태니카 시대, 20세기는 팍스아메리카나 시대였다. 21세기는 동세(東勢)의 시대다. 동세의 기운을 정보기술(IT) 혁명이 활성화시키고 있다. 줄씨알(네티즌)이 국경을 초월하고 있다.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는 데다 연대 강화도 쉬워졌다. 동세의 기운이 솟구치고 있다. 21세기에 일본과 한국, 중국까지 평화의 중심세력으로 힘을 합칠 수만 있다면 글로벌 이슈, 즉 기후나 테러 등 어떤 문제에서든지 굉장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일간 평화 강화에 반하는 열악한 조건의 존재가 냉전벨트다. 한국 정부의 힘만으로 해체할 수 없다. 미국과 일본의 지원이 필요하다. 북한 경제에 대한 대국적인 지원은 한반도 냉전을 해체하는 출발점이다. 그렇게 되면 남·북, 북·일, 북·미 관계 정상화가 쉬워질 것이다. 한국, 미국, 일본 정부가 함께 한반도 냉전 체제를 확실히 깨 21세기에 세계에서 냉전체제가 종식됐다는 선언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와다 명예교수 미래를 생각하면 일본과 한국은 자국의 테두리만이 아니라 지역적인 공동 번영, 공생을 위해 협력해 나가야만 한다. 동아시아공동체 구축에서도 한국은 중심에 서서 추진자, 대안자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일본도 성심성의껏 힘을 보태는 게 한·일의 미래지향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일본은 섬나라다. 한국은 반도국으로 대륙과 맞닿아 있는 만큼 지리적으로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 중요한 위치에 있다. 과감하게 말하면 한국과의 협력 없이 일본의 미래는 없다. →국제 사회에서 한·일의 경쟁과 협력은 필연적이다. 한 전 부총리 정보기술(IT), 생명공학(BT), 문화 기술(CT) 분야는 일본과 격차가 없다. 서로 협력하며 경쟁할 수 있다. 협력 없는 경쟁은 금물이다. 21세기는 협력을 통한 경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처럼 서로 먹고 먹히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 실제 엇비슷한 수준의 IT, 동물 복제 등에서 강한 BT, 특히 한류로 대변되는 CT는 일본에 자극을 줄 수 있다. 또 제조업, 조선, 자동차 분야 등도 한국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단계에 올라섰다. 와다 명예교수 잘할 수 있는 분야는 서로 이끌고 격려해야 한다. 뒤처진 부분은 서로 배우면서 따라가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앞으로 나가길 바란다. 달리 말해 모든 것은 한 가지 사안 속에 경쟁, 협력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 어떤 것은 경쟁, 어떤 것은 협력이라는 식으로 이분화할 게 아니다. 조화시키며 동시에 추진해 나가야 한다. 한국의 에너지는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한·일 양국의 국민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와다 명예교수 과거 역사에 대해 반성하도록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렸으면 한다. 인내심을 갖고 말이다. 한국의 노력 덕에 일본에도 여러 변화가 가능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흘린 땀에 비해 일본 전체적으로는 크게 변하지 않는 점도 알고 있다. 초조하기도 하고, 불만이 있는 줄도 잘 안다.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한국을 여러 면에서 좋아하는 사람들도 크게 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인은 과거의 역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역사는 역사대로 놓아두고 미래로 나갈 수는 없다. 미래를 위해 더더욱 과거 문제를 인식하려고 힘써야 한다. 한 전 부총리 일본은 한반도에서 저지른 부당한 조치들을, 최소한 독일이 연합국에 보여줬던 수준으로 시인했으면 좋겠다. 독일 정부는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고개를 숙인다. 나치 전범에 대해서는 시효가 없다. 일본이 왜 못하는지 안타깝다. 일본 지식인들의 말처럼 늘 아시아를 넘어 서구를 좇는다면 적어도 독일 수준으로는 가야 한다. 불행한 역사는 청산해야 한다. 양국에는 이를 거부하는 세력이 있다. 한국 쪽에도 식민지는 한국을 근대화시킨 시기라고 긍정하는 일부 지식인·정치인들이 있다. 일본에도 이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우파들이 있다. 친일 세력과 일본의 보수적 민족주의 세력의 냉전적 연대와 연계를 어떻게 성숙하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가가 중요한 과제다. 이런 것을 위해 한·일간 여러 차원에서 교류·협력이 필요하다. 와다 명예교수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뛰어넘는 ‘하토야마 담화’가 발표되기를 희망한다. 무라야마 담화는 침략과 조선지배에 대해 사죄하고 반성하는 내용으로 발표됐다. 담화가 나온 이후 일본 국회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병합을 강제적인 것으로 볼 것인지,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다. 담화로부터 15년이 지났다. 적잖게 훼손됐다. 그러나 식민지화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 등에 대한 역사연구는 꾸준히 진행됐다. 병합은 한민족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에 의해 강제됐다. 따라서 ‘하토야마 담화’에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적 판단을 담아야 한다. 전향적이고 획기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병합 100년은 상징적으로 아주 좋은 계기다.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바른 역사관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 전 부총리 젊은 세대는 조부모·부모 세대가 이룬 성취, 즉 독립운동, 민주화, 인권운동, 평화운동 등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요 문제는 좋은 직장과 안정된 삶 등 개인 중심적인 복지다. 어느 나라나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다. 분단의 아픔, 억울함에 대해 체계화되고 설득력 있는 지식을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됐으면 한다. 젊은이들은 지식을 획득하는 속도나 양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런 걸 보면 인터넷 시대에 새로 깨우쳐 줄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와다 명예교수 젊은이들이 옛일에 대해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사회에 있어서든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태평양전쟁을 잊지 않도록 젊은 세대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사람들이 역사의 연구, 조사를 계속해야 한다. 역사란 건망증이 심하다. 방치해 두면 잊혀진다. 따라서 자국만이 아닌 넓은 범위에서 지역적 협력을 통해 건망증을 방지해야 한다. 한 전 부총리 일본 젊은이들은 조상들이 제국주의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10여년 전 중국 창춘(長春)에서 겪은 일인데 일본 청년이 위화관에서 인체실험인 마루타 전시를 보고 기절한 일이 있었다. 자기 조상들의 만행을 믿지 못해서다. 일본 교육이 문제다. 불과 할아버지 세대에 있었던 반인류 범죄인데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서대문 역사박물관에 있는 독립투사의 고문받는 모형을 보고도 충격을 받는다. 양국 청년들이 서로 불행했던 과거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서로 용서해 주는 두 민족 간의 정신적 트라우마(충격)를 극복하는 치유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일 청년들의 교류를 정부 차원에서 적극 추진했으면 한다. 비정부기구(NGO)나 종교단체도 앞장서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을 한국에 초청하겠다고 했는데. 한 전 부총리 일왕 초청엔 두 가지 조건이 전제돼야 한다. 100년 전 병탄의 부당성 등 일본의 잘못을 정중하고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그래야 한·일, 북·일 관계 모두에 도움이 된다. 동아시아공동체에도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 일왕의 가계는 한민족의 조상에 닿는다. 종묘에서 경의를 표하고, 특히 100년 전 병탄과 105년 전 늑약 때 가졌던 고종황제, 명성황후, 순종의 아픔 등을 되새기고 참배했으면 한다. 대학생들과 자유로운 간담회를 갖는 것도 좋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일왕 초청은 전적으로 찬성한다. 와다 명예교수 천황은 일본 국민의 상징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전쟁이 끝날 당시 지금의 아키히토 천황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신춘 휘호로 평화를 염원하는 글자를 썼었다. 마음이 깃든 휘호라고 본다. 천황은 히로히토 전 천황이 방문할 수 없었던 중국도 찾았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방문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단 한국 방문 자체에 그쳐서는 안 된다. 역사적이어야 한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순종의 묘에 참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2010년에 실행된다면 매우 뜻깊을 것이다. 2010년은 100년이라는 역사 속에서 마지막 기회의 해다. →북한과 일본의 국교정상화 문제도 병탄 100년을 맞는 시점에서 중요한 문제다. 한 전 부총리 하토야마 정권이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들려면 대북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방북 의사가 있다고 했다. 북한 지도자와 허심탄회하게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한 환경 조성에 앞장섰으면 한다.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하토야마 정권의 노력은 긴요하다. 역사적인 성취를 하려면 대북 관계를 전향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북한과 대화를 통해 두 나라 관계를 개선하면 불가피하게 거쳐야 할 부분이 식민지 청산문제다. 과감한 사죄와 적절한 보상조치를 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되면 1965년 한·일 기본조약보다 훨씬 평가받는 북·일 기본조약이 나오고, 하토야마 정권이 주창하는 동아시아공동체가 구축될 것이다. 하토야마 정권은 동아시아의 비핵화도 강조해야 한다. 동아시아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화는 함께 해야 할 과제다. 와다 명예교수 일본과 북한의 국교 정상화는 실현돼야 한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고 100년이 된 이때 피해를 입은 국가의 반쪽과 아무것도 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다. 어떻게 해서든 국교를 정상화해야 하는 것이 옳다. 교섭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 불행하게도 북한의 핵개발이 국제적인 이슈가 됐다. 그러나 국교 정상화를 절차적으로 본다면 북한의 핵포기와 국교 정상화 추진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한다. 병합 100년이라는 측면에서 절호의 타이밍이다. 일본은 국교 정상화를 한 뒤 과거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경제협력을 약속할 수 있다. 경제 원조를 갑자기 추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국교정상화 뒤라면 자연스럽다. 그러면 남북대화에도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본다. 통일은 필연적인 것이며 머지않은 일이기도 하다. 중요한 전제는 모든 과정이 완전히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 전 부총리 북·일 관계에서 한국의 역할은 분명하다. 일본이 6자회담 밖에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를 꺼낼 경우, 북한이 전향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권고할 수 있다고 본다. 또 일본에 대해서도 납치문제가 한반도 평화 정착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6자회담에서 납치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새로운 채널을 가동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hkpark@seoul.co.kr ●한 前부총리는 1980년대 초까지 저항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이다. 제5공화국이 끝나도록 금서였던 저서 ‘민중과 지식인’은 운동권뿐만 아니라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다. 사회과학자이면서 교육, 정치, 종교계 등을 넘나들었다. 시민단체인 경실련에도 관여했다. 교수 시절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두 차례 해직과 복직을 거듭한 데다 수형 생활을 하기도 했다. 문민 정부와 국민의 정부 등 2대 정권에서 통일부총리, 교육부총리를 역임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한성대 등 3개 대학의 총장도 지냈다. 최근에는 언론, 논객, 시민과 대화한 내용을 묶으며 YS(김영삼 전 대통령)부터 MB(이명박 대통령)까지 돌아보는 대담집 ‘우아한 패배’를 출간했다. ●와다 하루키는 일본을 대표하는 진보학자이자 한반도 전문가다. 1960년 도쿄대 문학부를 졸업, 66년부터 도쿄대 강단에 섰다. 소련사와 북한 현대사가 전공이다. 1970~80년대 일본 지식인으로서 민주화 운동 때문에 투옥된 김대중·김지하씨 등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1980년 김대중씨 사형 선고와 관련, 교수 신분으로 주일 한국대사관 앞에서 매일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조만간 러·일전쟁을 중심으로 1875~1904년의 역사를 다룬 저서를 상·하권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그는 “최근 틈나는 대로 대장금, 태왕사신기, 주몽 등 한국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혁명 1991’, ‘역사로서 사회주의’, ‘조선전쟁’ 등 30권 이상의 저서를 집필했다.
  • 찌아찌아족 마을에 ‘한글성지’ 세운다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한 찌아찌아족이 사는 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市)에 ‘한글 성지’가 들어선다. 훈민정음학회는 원암재단의 후원을 받아 바우바우시에 원암한국문화원을 건립하기로 하고 조감도를 25일 공개했다. 조감도에 따르면 문화원은 지상 3층에 연면적 1144㎡ 규모로 26개의 기둥이 천장을 지탱하는 장방형의 그리스풍 건물이다. 붉은색 큐브를 쌓아 놓은 형상인 건물 벽에는 훈민정음이 새겨져 있고 건물 주변은 얕은 해자와 잔디밭으로 둘러싸인다. 문화원 내부 중앙은 광장 형태로 꾸며져 날씨에 상관없이 다양한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했고 연구실과 학예관실, 자료실, 전시실, 교실, 주방, 식당 등의 각종 시설도 들어선다. 설계자인 윤경식 한국건축KACI 대표는 “우리나라 종묘와 부톤 섬의 옛 건축에서 나타나는 열주 양식으로 두 나라 문화의 전통과 자긍심을 표현했고 용기와 순결을 상징하는 인도네시아 국기의 빨강과 흰색을 주 색상으로 채용했다.”고 설명했다. 학회는 이를 위해 지난 22일 서울클럽에서 바우바우시 및 원암재단과 함께 ‘원암한국문화원 건립을 위한 의향서(LOI)’를 체결했다. 훈민정음학회 이기남 이사장은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의 승인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첫 삽을 떠 내년 상반기 안에는 공사가 마무리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오욕의 흔적 지우고… 광화문 144년만에 복원 상량식

    오욕의 흔적 지우고… 광화문 144년만에 복원 상량식

    광화문이 오욕의 흔적을 지우고 완연한 제 모습을 찾을 순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2006년 복원을 시작해 꼬박 3년을 채운 광화문 공사 현장에서는 27일 궁궐 전통의례에 따라 복원 상량식(上樑式)을 거행했다. 1865년 고종황제가 광화문을 중건하고 상량식을 치른 지 꼭 144년 만이다. 상량은 기둥에 보를 얹은 뒤 그 위에 도리를 걸고 끝으로 마룻대를 올리는 일로 목조 건축에서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마룻대가 올라가면 목조 건축물들은 전체적인 뼈대를 갖추게 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제례 보존회에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근거해 상량문 봉안(奉安) 의식을 거행했고, 이어 상량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이건무 문화재청장, 복원 공사를 총지휘하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인 신응수 대목장(大木匠) 등의 손으로 이뤄졌다. 앞으로 광화문은 추녀와 서까래 설치, 지붕 기와 잇기, 단청 등의 과정을 거쳐 내년 10월에 제 모습을 찾게 될 예정이다. 글 강병철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씨줄날줄] 시전 행랑/노주석 논설위원

    종로 일대에 시전행랑(市廛行廊)을 조성하는 공사가 대략 마무리된 것은 조선 태종 14년인 1414년이었다. 태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호조가 아뢰었다. 철거해야 할 기와집은 1칸에 저화(楮貨·당시 지폐) 20장, 초가집은 1칸에 10장을 주어야 합니다. 총 보상비는 저화 1만 3600장이 소요됩니다.” 종로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민가 1486채와 기와집 126채를 헐고 1360칸의 행랑을 새로 짓는 대대적 도심재개발공사의 보상비 내역을 왕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시전은 조선시대의 관영시장이고 행랑은 상점이다. 나라에서 쓰이는 주요 물품을 조달하던 시장의 가게이다. 종묘에서 흥인지문까지, 종로에서 숭례문까지 두 갈래로 이어 지었다. 갈수록 사전(私廛)이 늘어나면서 난전(廛)화하자 금난전권(禁廛權) 같은 독점적 특권을 주는 육의전(六矣廛)이 중심이었다. 행랑 뒤편에는 말을 피하는 길 즉 ‘피맛길’이라는 골목을 만들었다. 장 보러온 백성이 고관대작이나 양반들과 마주치는 불편함을 없애준 고도의 행정서비스였다. 시전행랑의 유구(遺構), 즉 토목 구조와 건축 양식의 자취가 살아 남은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2003년 12월 청진동 피맛골 일대에서 진행되고 있던 도심재개발 현장을 살펴보던 문화재전문가 황평우씨가 공사장에서 오래된 건물의 기초석을 발견, 문화재청에 신고한 것이 발굴과 보존의 시작이었다. 기록에만 남아 있던 시전행랑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발굴된 시전행랑의 유구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어제 공개됐다. 이전·복원된 유구는 시전행랑이 ‘방-마루-방-창고’의 구조이며, 40평 크기로 지어졌음을 보여준다. 조선 600년의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기록의 나라’ 조선의 섬세한 기록문화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고고학적 흔적이다. 조선 건국 초부터 현재까지 켜켜이 쌓여 있는 6개의 문화층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임진왜란 시기인 제5문화층에는 30㎝짜리 불에 탄 층이 선연하다. 당시 종로 일대가 화재로 말미암아 완전히 소실됐음을 보여준다. 시전행랑은 조선의 부활이자 재발견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뉴스 다큐 시선]서울 사라지는 골목길 사람들의 애환

    [뉴스 다큐 시선]서울 사라지는 골목길 사람들의 애환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 시인 김광섭은 1968년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에서 개발의 열풍 속에 파괴돼 가는 인간성을 비둘기에 빗대 표현했다.여기 오랜 삶의 터전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시가 2007년부터 시작한 ‘디자인 서울거리 조성계획’이 서울 전체를 바꾸고 있다. 이 사업은 2007년 대학로, 이태원로 등 10개 지역에 439억원을 투입해 전면 재단장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것의 이면에는 사라지는 것들이 있고 그 뒤안길에는 사람들의 추억과 삶이 녹아 있다. 철거가 됐거나 이제 곧 철거를 앞두고 있는 서울의 추억을 찾아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의 애환을 들어 봤다. 글 박건형 오달란 유대근 박성국기자 kitsch@seoul.co.kr 동영상 나우뉴스 박성조기자 voicechord@seoul.co.kr 30년 전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일대에는 80여채의 한옥들이 서로 처마를 맞댄 채 줄지어 서 있었다. 집집마다 경쟁하듯 내놓은 화분이 골목을 화사하게 꾸몄다. 대문은 잠겨있는 적이 없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영이 엄마, 된장이 다 떨어졌네. 한 숟갈만 퍼줘.” “언니, 나 대파 한 단 사올 동안 우리 애 좀 잠깐 봐 줘요.” 하는 정겨운 대화가 오갔다. 이 동네 14칸짜리 한옥에서 35년째 살고 있는 피터 바돌로뮤(61)가 들려준 이야기다. 간간이 비가 흩뿌리는 지난 13일 저녁 바돌로뮤의 집 대청마루에 앉았다. 마당에 심은 대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사각거렸다. 그는 “이렇게 조용하고 아름다운 한옥을 불편하고 낡았으니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속이 상한다.”고 푸념했다. 그는 “콘크리트 건물도 수리하지 않으면 30년을 못 간다.”면서 “나도 매년 두 번 지붕에 올라가 깨진 기와를 보수하고 홈통에 쌓인 낙엽을 치우면서 집을 부지런히 가꾼다.”고 말했다. 그의 기와 수리 실력은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로 뛰어나다. 옆집 할머니가 ‘피터씨, 김치 넉넉히 줄 테니 우리집 기와도 손 봐주우.’라며 부탁할 정도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정겹던 동네 인심은 재개발 광풍이 몰아치면서 사나워졌다. 2004년 이 일대가 동선3구역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자 개발을 원하는 주민들과 한옥을 지키려는 주민들이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했다. 바돌로뮤는 “쥐꼬리만 한 보상금 몇 푼과 평생 지켜온 유일한 자산인 집을 바꾸라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안타깝다.”면서 “재개발되면 이 일대에는 삭막한 아파트 4동이 들어서게 될텐데 그 모습은 절대 못 본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겨웠던 동소문동 한옥마을 정부 중심의 재개발 정책이 일방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한옥마을의 예술적 가치를 몰라보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멀쩡히 사람이 사는 곳에 테두리를 쳐놓고 건물을 새로 짓겠다고 선포하는 것은 독재와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그가 생각하는 재개발의 근본 취지는 하꼬방(판잣집)처럼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해 살 만한 곳으로 바꾸어 주는 일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정릉 일대를 재개발하면서 개량 한옥 한 채를 남겨 주민들의 자치공간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한옥 마을을 단지 구경하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죽은 공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동소문 일대를 제2의 인사동, 제2의 북촌으로 만드는 것이다. 갤러리와 점집, 골동품 가게, 카페와 한옥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예술마을을 이웃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고 한다. 그는 “그러면 사라질 뻔한 골목에 다시 사람들이 찾아와 북적대지 않겠나.”라고 기대했다. ●삶의 전부인 세운상가는 추억의 공간 같은 날 종로구 장사동 세운1지구 ‘초록띠 공원’. 40여년간 자리를 지켰던 세운 현대상가가 헐리고 대신 들어선 공원 한쪽에는 벼, 옥수수 등을 직접 기를 수 있는 ‘도시농장’(시티-팜·City-Farm)이 조성되고 있다. 모내기 작업 중인 인부들의 모습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웅재(59)씨가 한마디 던진다. “서울시민 모두를 위한 일이라는데 터를 지켜온 사람들은 왜 슬퍼해야 하나.” 그는 30년째 세운상가의 전체 7동 중 하나인 세운상가 본관에서 TV와 난로 등을 팔아온 ‘터줏대감’이다. 시는 지난해 5월 남산에서 세운상가와 종묘를 가로질러 북악산까지 연결되는 ‘세운 녹지축’ 조성계획을 발표했고, 1단계 사업을 통해 현대상가터에 ‘초록띠공원’을 만들었다. 오세훈 시장은 지난 5월20일 열린 초록띠공원 준공식에서 “5개월 전 착공 당시 삭막하기만 했던 터가 녹지로 바뀐 걸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며 흐뭇해했다. 시는 아직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청계천~을지로~퇴계로 구간도 오는 2015년까지 3단계에 걸쳐 완공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를 지켜 보는 이씨등 세운상가 상인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70년대 초 세운상가에 처음 발들여 놓은 이씨는 인생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종업원으로 시작해 점포를 얻었고 96년부터 8년간 상인연합회장도 지냈다. 대학생인 아들도 상가에서 장사하며 낳고 길렀으니 “세운상가가 내 삶의 전부”라는 이씨의 말이 과장된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러나 시가 상인들과 별 상의없이 세운 녹지축계획을 발표하고 지난해부터 공사를 진행하면서 우리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다.”면서 “3개월 영업보상비와 대체상가 등을 마련해 줬지만 몇십년째 이곳에서 일한 상인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할 뿐”이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재개발도 좋지만 그동안 터를 지키며 살아온 이들에게 의견을 묻고 배려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했다면 모두가 행복하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가 철거된 현대상가의 상인들을 위해 대체건물로 지어준 인의동 ‘세운스퀘어’의 정인학(54) 상인연합회장도 “일본 도쿄시는 65년된 전자상가 아키하바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오 시장의 눈에 세운상가는 없애야 할 낡은 건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며 서운해했다. 세운상가 터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종로1, 2가 뒤쪽 골목에 이어져 있는 피맛골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여년 간 이곳에서 생선구이집을 해온 대림식당 사장 석송자(67·여)씨는 “자고 나면 가게가 하나씩 없어진다.”면서 “외국인들도 600년 전통의 거리를 왜 없애느냐며 아쉬워하더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80년대 학생운동이 한창일 당시 경찰을 피해 피맛골에 몸을 숨겼던 대학생들이 어느새 40대 중년이 돼 아이들과 이곳을 찾기도 한다.”면서 “서민들의 추억이 서린 공간은 보존해야하는 것 아니냐.”며 안타까운 듯 되물었다. 골목 한쪽에서 35년째 ‘원조 감자탕’집을 운영하고 있는 강옥희(70·여)씨는 “이곳에서 감자탕을 팔며 죽은 남편 대신 3남매를 키웠다.”면서 “재개발 때문에 곧 건물을 비워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사라져 가는 옛 터전들. 그곳을 지켰던 서민들에게 도시개발 계획은 빛보다 그림자였다. “정치하는 사람들 눈에는 문화는 없고 돈만 보이는 것 같아요. 이렇게 독특한 예술촌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데 왜 보존할 생각은 못하고 없애지 못해 안달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영등포구 문래동 3가. 낡고 녹슨 소규모 철강소들이 거리를 따라 줄지어 이어졌다. 그중 대부분은 문을 닫고 일부 철강소에서만 쇠 깎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허같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니 범상치 않은 그래피티(벽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와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이 곳은 마니아층에게 ‘문래예술공단’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생 함광일(26)씨는 공단 곳곳을 찾아다니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함씨는 “이곳이 없어지기 전에 사진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어 찾았다.”면서 “문래예술공단은 한국의 몽마르트 언덕과도 같은 곳인데….”라며 아쉬워했다. ●“문래동 3가 예술촌 보존은 안되나요” 문래동3가는 70~80년대 서울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이었다. 하지만 산업구조가 변하면서 철공소 상인들은 공단을 떠났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술가들이 찾아와 빈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70여개의 작업실에 160여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서울시의회가 준공업지역인 이곳에 최대 80%까지 아파트를 건립할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이미 예술촌 주변은 아파트와 주상복합 건물이 에워싸고 있었다. 아파트에 둘러싸인 예술촌은 어색하고 초라해 보였다. 이곳의 예술가들은 문래동 3가의 매력을 세가지로 꼽았다. 우선 임대료가 저렴하다. 그래서 요즘도 홍익대 부근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도 많이 건너온다고 한다. 주변이 빈 공단이거나 철공소라 작업 중에 발생하는 소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래동 3가만의 녹슬고 낡은, 오래된 분위기가 예술적 영감을 자극한다고 입을 모았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이소주(33)씨는 “재개발을 하게 되면 건물 주인은 임대료를 올려 입주해 있는 예술가들을 쫓아낼 것”이라면서 “단순히 예술가들의 문제가 아닌 한국 문화계의 위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 [뉴스 다큐 시선] 서울 사라지는 골목길 사람들의 애환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 시인 김광섭은 1968년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에서 개발의 열풍 속에 파괴돼 가는 인간성을 비둘기에 빗대 표현했다.여기 오랜 삶의 터전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시가 2007년부터 시작한 ‘디자인 서울거리 조성계획’이 서울 전체를 바꾸고 있다. 이 사업은 2007년 대학로, 이태원로 등 10개 지역에 439억원을 투입해 전면 재단장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것의 이면에는 사라지는 것들이 있고 그 뒤안길에는 사람들의 추억과 삶이 녹아 있다. 철거가 됐거나 이제 곧 철거를 앞두고 있는 서울의 추억을 찾아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의 애환을 들어 봤다. 글 박건형 오달란 유대근 박성국기자 kitsch@seoul.co.kr 동영상 나우뉴스 박성조기자 voicechord@seoul.co.kr 30년 전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일대에는 80여채의 한옥들이 서로 처마를 맞댄 채 줄지어 서 있었다. 집집마다 경쟁하듯 내놓은 화분이 골목을 화사하게 꾸몄다. 대문은 잠겨있는 적이 없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영이 엄마, 된장이 다 떨어졌네. 한 숟갈만 퍼줘.” “언니, 나 대파 한 단 사올 동안 우리 애 좀 잠깐 봐 줘요.” 하는 정겨운 대화가 오갔다. 이 동네 14칸짜리 한옥에서 35년째 살고 있는 피터 바돌로뮤(61)가 들려준 이야기다. 간간이 비가 흩뿌리는 지난 13일 저녁 바돌로뮤의 집 대청마루에 앉았다. 마당에 심은 대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사각거렸다. 그는 “이렇게 조용하고 아름다운 한옥을 불편하고 낡았으니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속이 상한다.”고 푸념했다. 그는 “콘크리트 건물도 수리하지 않으면 30년을 못 간다.”면서 “나도 매년 두 번 지붕에 올라가 깨진 기와를 보수하고 홈통에 쌓인 낙엽을 치우면서 집을 부지런히 가꾼다.”고 말했다. 그의 기와 수리 실력은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로 뛰어나다. 옆집 할머니가 ‘피터씨, 김치 넉넉히 줄 테니 우리집 기와도 손 봐주우.’라며 부탁할 정도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정겹던 동네 인심은 재개발 광풍이 몰아치면서 사나워졌다. 2004년 이 일대가 동선3구역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자 개발을 원하는 주민들과 한옥을 지키려는 주민들이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했다. 바돌로뮤는 “쥐꼬리만 한 보상금 몇 푼과 평생 지켜온 유일한 자산인 집을 바꾸라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안타깝다.”면서 “재개발되면 이 일대에는 삭막한 아파트 4동이 들어서게 될텐데 그 모습은 절대 못 본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겨웠던 동소문동 한옥마을 정부 중심의 재개발 정책이 일방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한옥마을의 예술적 가치를 몰라보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멀쩡히 사람이 사는 곳에 테두리를 쳐놓고 건물을 새로 짓겠다고 선포하는 것은 독재와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그가 생각하는 재개발의 근본 취지는 하꼬방(판잣집)처럼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해 살 만한 곳으로 바꾸어 주는 일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정릉 일대를 재개발하면서 개량 한옥 한 채를 남겨 주민들의 자치공간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한옥 마을을 단지 구경하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죽은 공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동소문 일대를 제2의 인사동, 제2의 북촌으로 만드는 것이다. 갤러리와 점집, 골동품 가게, 카페와 한옥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예술마을을 이웃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고 한다. 그는 “그러면 사라질 뻔한 골목에 다시 사람들이 찾아와 북적대지 않겠나.”라고 기대했다. ●삶의 전부인 세운상가는 추억의 공간 같은 날 종로구 장사동 세운1지구 ‘초록띠 공원’. 40여년간 자리를 지켰던 세운 현대상가가 헐리고 대신 들어선 공원 한쪽에는 벼, 옥수수 등을 직접 기를 수 있는 ‘도시농장’(시티-팜·City-Farm)이 조성되고 있다. 모내기 작업 중인 인부들의 모습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웅재(59)씨가 한마디 던진다. “서울시민 모두를 위한 일이라는데 터를 지켜온 사람들은 왜 슬퍼해야 하나.” 그는 30년째 세운상가의 전체 7동 중 하나인 세운상가 본관에서 TV와 난로 등을 팔아온 ‘터줏대감’이다. 시는 지난해 5월 남산에서 세운상가와 종묘를 가로질러 북악산까지 연결되는 ‘세운 녹지축’ 조성계획을 발표했고, 1단계 사업을 통해 현대상가터에 ‘초록띠공원’을 만들었다. 오세훈 시장은 지난 5월20일 열린 초록띠공원 준공식에서 “5개월 전 착공 당시 삭막하기만 했던 터가 녹지로 바뀐 걸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며 흐뭇해했다. 시는 아직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청계천~을지로~퇴계로 구간도 오는 2015년까지 3단계에 걸쳐 완공할 계획이다. 하지만 이를 지켜 보는 이씨 등 세운상가 상인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70년대 초 세운상가에 처음 발들여 놓은 이씨는 인생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종업원으로 시작해 점포를 얻었고 96년부터 8년간 상인연합회장도 지냈다. 대학생인 아들도 상가에서 장사하며 낳고 길렀으니 “세운상가가 내 삶의 전부”라는 이씨의 말이 과장된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러나 시가 상인들과 별 상의없이 세운 녹지축계획을 발표하고 지난해부터 공사를 진행하면서 우리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졌다.”면서 “3개월 영업보상비와 대체상가 등을 마련해 줬지만 몇십년째 이곳에서 일한 상인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할 뿐”이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재개발도 좋지만 그동안 터를 지키며 살아온 이들에게 의견을 묻고 배려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했다면 모두가 행복하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가 철거된 현대상가의 상인들을 위해 대체건물로 지어준 인의동 ‘세운스퀘어’의 정인학(54) 상인연합회장도 “일본 도쿄시는 65년된 전자상가 아키하바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오 시장의 눈에 세운상가는 없애야 할 낡은 건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며 서운해했다. 세운상가 터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종로1, 2가 뒤쪽 골목에 이어져 있는 피맛골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여년 간 이곳에서 생선구이집을 해온 대림식당 사장 석송자(67·여)씨는 “자고 나면 가게가 하나씩 없어진다.”면서 “외국인들도 600년 전통의 거리를 왜 없애느냐며 아쉬워하더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80년대 학생운동이 한창일 당시 경찰을 피해 피맛골에 몸을 숨겼던 대학생들이 어느새 40대 중년이 돼 아이들과 이곳을 찾기도 한다.”면서 “서민들의 추억이 서린 공간은 보존해야하는 것 아니냐.”며 안타까운 듯 되물었다. 골목 한쪽에서 35년째 ‘원조 감자탕’집을 운영하고 있는 강옥희(70·여)씨는 “이곳에서 감자탕을 팔며 죽은 남편 대신 3남매를 키웠다.”면서 “재개발 때문에 곧 건물을 비워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사라져 가는 옛 터전들. 그곳을 지켰던 서민들에게 도시개발 계획은 빛보다 그림자였다. “정치하는 사람들 눈에는 문화는 없고 돈만 보이는 것 같아요. 이렇게 독특한 예술촌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데 왜 보존할 생각은 못하고 없애지 못해 안달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영등포구 문래동 3가. 낡고 녹슨 소규모 철강소들이 거리를 따라 줄지어 이어졌다. 그중 대부분은 문을 닫고 일부 철강소에서만 쇠 깎는 소리가 들려왔다. 폐허같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니 범상치 않은 그래피티(벽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와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이 곳은 마니아층에게 ‘문래예술공단’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생 함광일(26)씨는 공단 곳곳을 찾아다니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함씨는 “이곳이 없어지기 전에 사진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어 찾았다.”면서 “문래예술공단은 한국의 몽마르트 언덕과도 같은 곳인데….”라며 아쉬워했다. ●“문래동 3가 예술촌 보존은 안되나요” 문래동3가는 70~80년대 서울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이었다. 하지만 산업구조가 변하면서 철공소 상인들은 공단을 떠났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술가들이 찾아와 빈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70여개의 작업실에 160여명의 예술가들이 모여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서울시의회가 준공업지역인 이곳에 최대 80%까지 아파트를 건립할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이미 예술촌 주변은 아파트와 주상복합 건물이 에워싸고 있었다. 아파트에 둘러싸인 예술촌은 어색하고 초라해 보였다. 이곳의 예술가들은 문래동 3가의 매력을 세가지로 꼽았다. 우선 임대료가 저렴하다. 그래서 요즘도 홍익대 부근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도 많이 건너온다고 한다. 주변이 빈 공단이거나 철공소라 작업 중에 발생하는 소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래동 3가만의 녹슬고 낡은, 오래된 분위기가 예술적 영감을 자극한다고 입을 모았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이소주(33)씨는 “재개발을 하게 되면 건물 주인은 임대료를 올려 입주해 있는 예술가들을 쫓아낼 것”이라면서 “단순히 예술가들의 문제가 아닌 한국 문화계의 위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서울 ‘도시농장’ 13일 열린다

    서울시는 종로구 장사동 세운초록띠공원에 벼, 옥수수 등을 직접 기를 수 있는 ‘도시농장’(시티-팜·City-Farm)을 조성해 13일 개장한다고 9일 밝혔다. 도시농장은 940㎡ 규모로, 외부에 벼 위주로 심고 내부에는 옥수수, 해바라기, 수수, 메밀, 깨, 조 등의 농작물을 계절에 맞게 재배하게 된다. 시는 올해 사각 함(포트)에 흙을 담아 농작물을 심었지만 내년부터는 땅 위에 직접 재배하는 한편 시민들이 직접 모내기와 추수, 탈곡 등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세운초록띠공원은 종묘와 남산을 연결하는 세운녹지축 조성사업 1단계 구간인 세운상가 내 현대상가 자리에 길이 70m, 폭 50m, 면적 3500㎡ 규모로 지난 5월 준공됐다.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60년 전 서울,사진으로 만난다

    60년 전 서울,사진으로 만난다

    건국 60주년을 맞아 ‘서울’을 재조명하는 사진전이 열린다. 종로구는 내년 2월1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서울 근·현대를 돌아볼 수 있는 희귀사진 110여점을 전시하는 ‘서울,타임캡슐을 열다’는 사진전을 연다. 전시회는 1940~50년대의 대표적 사진작가 고(故) 임인식씨의 작품 110여점을 통해 과거의 서울을 집중 조명한다. 구는 특히 과거 종로의 문화와 역사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돈화문 공방거리,역사문화탐방 고궁길,창경궁~종묘 간 녹지축 연결 등 다양한 개발 사업의 밑그림으로 삼기로 했다. 전시회는 ‘하늘에서 본 고궁과 주변모습’ ‘고궁 주변 일반서민의 생활상’ ‘과거 종로거리의 모습’ ‘종로 한옥마을,골목길 풍경’ ‘광화문에서 벌어진 행사장면’ 등 5개 분야로 나뉜다. 이번에 공개되는 자료들은 1940~50년대 광복 혼란기와 6·25전쟁을 통해 소실되고 파손되면서 찾기 어려운 근·현대사의 모습을 담았다. 작가 임씨는 1948년 정부수립기념식장의 맥아더장군,1949년 경복궁에서 열린 제1회 국전장 모습,1953년 서울 대홍수 당시 종로와 서울의 모습,1955년 제1회 산업박람회가 열린 창경궁의 모습 등 1940~50년대 사료적 가치가 높은 역사적 사건을 담았다. 1953~54년 찍은 20여점의 항공사진은 국가기록원의 확인결과 건국 최초로 민간인이 촬영한 항공사진들로 밝혀졌다. 땔감 부족으로 벌거숭이가 된 삼청공원과 가회동 한옥마을,전쟁의 폭격 속에서도 보존된 경복궁과 비원 앞 한옥들,동대문 옆 전차기지와 청계천의 겨울 모습은 경이와 감탄사를 자아낸다. 김충용 구청장은 “이번 사진전은 서울과 종로의 1940~50년대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한 편의 역사 파노라마”라면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전시회를 찾아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와 전통을 느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4)기생과 기방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44)기생과 기방

    왼쪽 그림 ‘기방의 풍경’을 먼저 보자. 이 그림은 담장 안과 담장 바깥에 각각 사람이 여럿 있다. 먼저 담장 안을 보자. 기와집 안에는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가 한 사람 있고 그 좌우에 남자 둘이 있다. 기둥에 손을 대고 서 있는 사내 하나가 있고, 마당에서 막 집 안으로 들어서려는 사내가 또 하나 있다. 대문 바로 안에 있는 늙은 할미는 아마도 기방에서 음식을 하고 소소한 잡일을 맡고 있을 것이다. 대문 밖에 푸른 치마, 녹색 저고리를 입은 젊은 기생이 남자 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있고, 또 그 앞에는 사내 둘이 멱살을 잡고 드잡이질을 하고 있다. 뭔가 맞지 않아 시비가 벌어진 것이다. 오른쪽 그림 ‘술을 기다리며’를 보자. 푸른 치마를 입은 여자가 한 사람 앉아 있고, 사내 셋이 오른쪽에 나란히 앉아 있다. 그림의 왼쪽을 보면, 여자 하나가 왼손에 술병을 들고 오른손에는 옷을 벗은 계집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오고 있다. 술을 사가지고 오는 참이다. 이것이 기방의 풍경이다. ●조선전기엔 양반 기방 출입 금지 자, 누가 기방의 손님들인가.TV 사극에 이따금 벼슬 높은 양반들이 기방을 찾아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건 무언가 좀 잘못된 것이다. 시정에 기방을 열고 손님을 받아 영업하는 것은 조선후기에 생긴 것이니, 조선전기에는 그런 장면이 나올 수가 없다. 또 양반은 기방에 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양반 중 무반은 기방에 드나들 수 있지만, 우리가 양반 하면 떠올리는 글 읽는 선비, 문관은 기방 출입이 금지다. 물론 집안 말아먹을 그런 파락호라면 상관없다. 왼쪽 그림에서 기생 오른쪽에 앉아 있는 노란 초립(草笠)을 쓴 사내가 보이는가? 이 사람이 바로 별감(別監)이다. 별감은 액정서란 관청에 소속된 하급 벼슬아치다. 별감은 왕명을 전달하고, 궁문과 궐문의 자물쇠와 임금이 사용하는 붓과 벼루의 관리, 대궐 뜰에 자리를 까는 일 등을 맡는다. 별감은 임금에게 딸린 대전별감, 왕비에게 딸린 왕비전별감, 세자에게 딸린 세자궁별감이 있는데, 끗발은 대전별감이 가장 세다. 이 별감이 기방의 운영자이자 고객이었다. ●기방의 단골 고객은 중인·상인 기방의 운영자를 기부(妓夫), 곧 기둥서방이라고 한다. 기부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전(殿)의 별감, 포도청의 포교, 승정원의 사령(使令), 의금부의 나장(羅將), 궁방이나 왕실 외척의 겸인(人·청지기), 무사만이 기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의금부의 나장과 승정원 사령은 관기(官妓)의 기부가 될 수 없도록 하였다. 따라서 대원군 이전에는 위의 여섯 부류가 기부가 되어 기방을 운영할 수 있었고, 또 기방에 출입하는 단골이었던 것이다. 그림으로 확인을 해 보자. 왼쪽 그림에서 담장 밖에서 기생의 전송을 받고 있는 자주색 상의를 입은 사내가 곧 포도청의 포교다. 이 그림에 별감과 포교가 등장하는 데는 이런 내력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만이 기방의 고객은 아니었고, 각 관청의 서리, 역관이나 의관(醫官) 등의 중인, 시전(市廛) 상인 등도 기방을 찾았다. 대개 서울에 사는 양반도 상민도 아닌 중간층들이 기방의 고객이었던 것이다. 기생에는 서울 기생이 있고 지방 기생이 있다. 서울 기생은 지방 기생을 뽑아 올린 것이다. 성종 때 완성된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보면, 기생 150명과 연화대(蓮花臺) 10명, 의녀(醫女) 70명을 3년마다 여러 고을의 관비(官婢)에서 뽑아 서울로 올리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뽑힌 기생이 서울 기생이다. 이들은 장악원에 소속되어 춤과 노래를 배운다. 이들의 본래 임무는 국가와 궁중의 행사에 춤과 노래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외에 기생들은 양반들의 연회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 경국대전을 개정하여 속대전을 만들었는데, 기생에 관한 조항에 변화가 있었다. 즉 지방 각 고을에서 3년에 한 번 기생을 뽑아 서울로 올려 보내는 조항이 없어지고,“진연(進宴·왕실 연회) 때 여기(女妓) 52명을 뽑아 올린다.”라는 새 조항이 생긴다. 진연이 있을 때만 지방에서 52명을 선발했던 것이다. 물론 이 수는 왕의 명령에 의해 바뀔 수 있었다. 법이 바뀐 것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장악원은 악기가 망실되고 악공이 달아나 종묘제례조차 지낼 형편이 못 되었다. 기생은 원래 장악원에서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 주게 되어 있었지만, 두 차례 전쟁 이후 장악원은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기생을 정기적으로 뽑아 올리는 규정이 유명무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생의 꽃은 ‘옥당 기생´ 진연 때 선발되는 조선후기 기생은 주로 관동 지방(강원도)과 삼남 지방(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뽑혀 오면, 내의원(內醫院) 혜민서(惠民署) 상의원(尙衣院) 공조(工曹)에 소속된다. 기생은 명목상 내의원과 혜민서의 의녀(醫女)이거나 상의원과 공조의 침선비(針線婢)로 발령이 났던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랭킹이 높은 기생은 내의원 기생이다. 조선시대 벼슬 중에서 가장 좋은 벼슬로 홍문관 벼슬을 친다. 홍문관을 다른 말로 옥당이라 하는바, 내의원 기생도 기생 바닥에서는 홍문관 격이라 해서 ‘옥당 기생’이라 불러 최고로 꼽았다. 국가가 기생의 의식주를 해결해 줄 형편이 못 되자, 기생들이 서울 시내에서 기방을 열어 영업하는 것을 묵인하였다. 기방에 처음 기생이 나오면, 오입쟁이들은 기생을 기생답게 단련시켰는데, 여기에도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그 법도를 어디 한번 감상해 보자. “한 사람이 좌중에 통할 말 있소.” “네, 무슨 말이오.” “처음 보는 계집 말 묻겠소.” 이렇게 운을 떼면 “같이 물읍시다.” 또는 “잘 물으시오.”라고 한다. 이 말에 다시 “이년아, 네가 명색이 무엇이냐?”라고 묻고,“기생이올시다.”라고 하면,“너 같은 기생은 처음 보았다. 이년아, 내려가 물이나 떠오너라.” 하고 빰을 살짝 때린다. 이건 기생이 아니라 하인이 아니냐는 수작이다. 기생이 여전히 “기생이올시다.”라고 하면 “이년아, 죽어도 기생이야.”라고 하고, 여기에 또 “기생이올시다.”라고 답하면 이후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네가 하― 기생이라 하니, 이름이 무엇이냐?” “무엇이올시다.” “나이가 몇 살이냐?” “몇 살이올시다.” “그 나이를 한꺼번에 먹었단 말이냐?” “한 해에 한 살씩 먹었습니다.” “그러면 꼽아라.” ●수치스러운 기생 적응훈련 기생은 “한 해에 한 살 먹었고, 두 해에 두 살 먹었고, 세 해에 세 살 먹었고….” 이런 식으로 나이를 꼽는다. 그러면 원래 물었던 오입쟁이가 “이년아, 듣기 싫다.” 하고 “시골이 어디냐?”고 출신지를 묻는다. 기생이 아무 곳이라고 답을 하면, 올라오면서 거친 곳을 꼽으라는 뜻으로 “노정기를 외라.”고 한다. 기생이 노정기를 외면, 본격적으로 기생을 단련시키기 시작한다. “서방이 누구냐?” “아무 서방님이세요.”(성만 말한다) “그 서방 이름은 무엇이냐?” “아무세요.” “그러면 그 서방님은 오입에 연조가 높으시거니와 너는 그 서방님과 사는 것이 당치 않으니 버려라.” “못 버리겠세요.” “왜 못 버리겠니, 버려라.” “못 버리겠세요.” “왜 못 버리겠니?” “정이 들어서 못 버리겠세요.” “아따, 이년아, 그동안 정이 들었어. 네가 정이 하 들었다니 어디 정이 있단 말이냐?” “뱃속에 들었세요.” “어디 보자.” 이제부터 ‘정’이란 말을 꼬투리로 삼아 치마를 들추고 성기를 약간 엿보는 것으로 하여 단련은 끝이 난다. 기부들은 이것이 기생을 빨리 적응시키는 방법이라 하여 일부러 오입쟁이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림 왼쪽과 오른쪽의 기생들은 이처럼 수치스런 통과의례를 거치고 본격적인 기생이 되었던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가족과 함께 인사동서 ‘미션게임’

    종로구는 12일 가회동과 인사동 일대에서 ‘제3회 가족 걷기대회’를 연다고 9일 밝혔다. 이날 오전 9시30분 운현궁에서 시작되는 행사에는 가족이나 친구, 이웃 등 200가족(약 500여명)이 참여해 가족 화합의 시간을 갖는다. 완주한 가족에게는 사은품과 기념품을 나눠준다. 특히 이번 걷기대회는 가족이 함께 미션을 수행하는 ‘오리엔티어링’을 가미해 재미와 성취감을 더하게 된다. 또 우리 전통이 남아 있는 가회동과 인사동 지역에서 행사가 펼쳐져 역사 여행과 다양한 체험활동을 즐길 수 있게 꾸몄다. 인사동, 가회동, 종묘로 이어지는 걷기대회 코스는 ▲민영환 의사 자결터에서는 민영환과 관련된 문제를 풀고 ▲조계사에서는 떡치기, 차 체험, 투호놀이 등 전통음식과 놀이를 하면서 고유문화의 소중함을 느낀다.▲우정총국에서는 한국 최초의 우편행정관서의 의미를 살려 ‘가족에게 사랑의 엽서쓰기’가 열리고 ▲서울교육사료관 앞마당에서는 림보놀이, 제기만들기와 차기, 딱지만들기와 치기,1960년대 추억 속 가족사진 찍기를 할 수 있다.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가족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손맛사지’ 체험으로 마무리된다. 또 가훈써주기, 문패만들기, 소원벽만들기, 건강가정지원센터 홍보관 등 체험부스와 가족 OX퀴즈 가족댄스타임 등 열린다. 정동식 가정복지과장은 “이번 대회를 통해 많은 가족들이 유대감과 친밀감을 유지하면서 건강한 가족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9) 강화도가 함락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89) 강화도가 함락되다(Ⅰ)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가는 문제를 놓고 마지막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던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왕실 가족들과 조정 신료들의 처자들, 그리고 역대 선왕들의 신주(神主)가 피란해 있던 곳이 강화도였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이 외롭고 추운 산성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만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조선 군신들은 ‘변변한 수군도 없고 바다에도 익숙지 못한 청군이 강화도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강화도는 무너졌고 피란해 있던 피붙이들은 모두 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강화도를 장악하라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도발하면서 가장 크게 우려했던 상황이 바로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조의 입도(入島)를 막지 못할 경우 전쟁은 분명 길어지게 될 것이고, 속전속결로 ‘조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구상도 헝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홍타이지는 청군 본진의 출발에 앞서 선봉 부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했던 것이다. 1637년 1월 중순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한편, 출성을 완강히 거부하는 인조를 제압할 수 있는 묘수를 찾기 위해 부심했다. 묘수란 다름 아닌 강화도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강화도만 공취(攻取)하면 인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청태종실록’에는 홍타이지가 일찍부터 강화도 공략을 염두에 두고 병선(兵船)을 제작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부하들에게 1월21일 전까지 병선 제작을 완료하라고 독촉했다. 홍타이지의 지시를 받은 청군은 심양에서 철장(鐵匠)을 비롯한 장인들을 데려오는 한편 병선 제작에 돌입했다. 한강과 임진강 일대에 흩어져 있던 선박들을 끌어 모아 수리하고, 주둔 지역 주변의 민가를 헐어 뗏목과 배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병선을 운반하기 위해 동거(童車)라 불리는 작은 수레도 제작했다. 수군이 미약하고 해전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청군이 이렇게 병선을 제작하여 강화도를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그들은 강화도 주변에 대한 세심한 정찰을 통해 섬을 공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섬 주변에 배치된 조선군의 방어 태세가 그다지 견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청군 가운데는 수군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장수들이 있었다.1633년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명에서 귀순해 왔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고 홍이포(紅夷砲)의 화력을 적절히 활용하면 강화도를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무사안일에 젖은 강화도의 조선 지휘부 홍타이지는 1637년 1월18일까지는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유보했다. 적어도 이날까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조가 나오지 않자, 홍타이지는 구왕(九王) 도르곤(多爾袞)에게 강화도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1월19일, 청군은 자신들이 제작한 작은 배 80척을 수레에 싣고 강화도로 출발했다. 당시 강화도 건너편에는 도르곤, 호게(豪格), 공유덕 등 청군 지휘부가 1만 6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21일까지 강화도를 공략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있던 조선군의 방어 태세는 어떠했을까? 당시 강화도 방어와 왕실 가족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인물은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강화도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일가와 친지들만을 노골적으로 챙겨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이다. 강화도로 들어온 뒤에도 김경징의 행태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는 강화도를 그야말로 금성탕지(金城湯池)로 여겨 방어를 위한 군사적 준비를 거의 팽개치다시피 했다. 청군이 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청군 내부에 해전을 경험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경징은 광성진(廣城津) 부근에 약간의 수군을 배치했을 뿐, 다른 지역의 방어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강화도의 대안인 김포 주변을 감시하고, 그곳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대비하는 것이 절실했지만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병자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보면, 김경징은 날마다 잔치를 열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일이었다.‘금성탕지’에서 오래 버틸 요량으로 주변의 육지 고을에서 곡식을 운반해 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저 강화도에서 오래 버틸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주변의 신료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자 그는 참견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심지어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일의 효종(孝宗))조차 그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인조의 어명에 의해 검찰사로 임명된 데다 그의 부친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체찰사(體察使) 김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상 강화도로 피신해 있던 모든 사람들의 생사 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존재였다. 검찰사 김경징을 보좌해야 할 검찰부사(檢察副使) 이민구(李敏求) 또한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근왕병을 이끌고 왔다가 죽자,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민구를 대신 충청감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민구는 갖은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충청도로 부임하는 것을 회피했다.‘병자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처삼촌(妻三寸)인 전 영의정 윤방(尹昉)의 ‘백’까지 이용하여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정작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한 조처에는 손을 놓았던 것이다. ●무너지는 강화도 김경징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부가 여전히 안일에 젖어 있던 1월21일, 심상치 않은 보고가 날아들었다. 통진가수(通津假守) 김적(金迪)으로부터 청군이 강화도를 향해 배를 운반하면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던 것이다. 김경징은, 강물이 언 상태에서 배를 운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김적의 목을 베려고 덤볐다. 그가 허위 보고를 통해 군정(軍情)을 어지럽혔다는 명목이었다. 김경징은 청군이 동거를 이용하여 배를 육로로 운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갑곶(甲串)을 지키는 장수로부터도 똑같은 보고가 들어오자 김경징은 다급해졌다. 강화유수(江華留守)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인 장신(張紳)의 수군을 광성진에 배치하여 갑곶 연안까지를 방어토록 하고,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수군을 연미정(燕尾亭) 아래 갑곶에 배치하여 가리산(加里山)부터 월곶(月串)에 이르는 해안을 방어토록 했다. 또 한흥일(韓興一),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 종묘령(宗廟令) 민광훈(閔光勳),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등을 차출하여 강화성과 주변 포구 등지의 수비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강화도 수비군 1000여명을 이끌고 진해루(鎭海樓)에 지휘본부를 차렸다. 육지를 방어하는 지휘관들은 김경징 자신을 포함하여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문관과 종실들이 대부분이었다. 미리 방어 훈련을 실시해 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이 같은 임기응변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김경징은 장병들에게 무기와 화약 등을 나눠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화약을 조금씩 분급하면서 그것을 일일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적의 상륙 시도가 임박한 위기 상황을 고려하면 문제가 있는 조처였다. 강화도가 함락될 경우, 화약 분급량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1월22일 새벽, 청군은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청군은 새로 건조하거나 수리한 선박 100여척에 50∼60명씩의 병력을 분승시켜 공격을 개시했다.‘청나라 오랑캐는 바다에 약하다.’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청군의 일부 선박에는 홍이포까지 거치되어 있었다. 홍이포에서 포탄이 발사되자 조선군의 사기는 이내 꺾이고 말았다. 전투 경험도 없고, 사전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철옹성’ 강화도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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