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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공 고를 때 챙겨볼 6가지

    전공 고를 때 챙겨볼 6가지

    대입 수험생에게 대학 전공을 선택한다는 것은 배우자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의미있는 숙제다. 마음의 눈으로 무엇을 바라보면서 이 숙제를 풀 것인가. 우선, 시스템의 변화를 보라. 대학 시스템 변화를 간파하는 일은 숙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많은 시스템이 변하지만 그 중 하나는 로스쿨이 생긴다는 점이다.2009년의 일이지만 이는 올해 대입 수험생에게 바로 영향을 주는 제도라는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법조인이 되려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국제 자본시장에서 한국에 투자를 이끌어 오는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도 로스쿨 제도는 눈여겨 봐야 한다. 둘째, 기술의 변화 속도를 보라. 기술을 깊이 바라보면서 학과를 선택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와이브로 기술은 여러분의 미래의 먹거리를 만들어줄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손톱만 한 크기에 영화 DVD를 80편 저장하는 세상이다. 이런 기술 진보가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한국에서 직업적으로 미래에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셋째, 내면의 욕망을 바라보라. 돈, 기술, 지위 등 자신이 가장 원하는 속세의 욕망에 솔직한 시선이 필요하다. 욕망을 감춘 채 위선적인 선택을 하는 수험생들이 더러 있다. 이들은 대학에 진학해서도 학업에 흥미를 갖지 못하고 다시 대입을 준비한다. 우리나라에 유난히 이런 학생들이 많은 것은 자기 욕망에 솔직하지 못하고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대학 전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 전공은 자기 욕망에 비춰 선택해야 한다. 남에게 손해를 주지 않는 욕망은 발휘되어야 한다. 넷째, 내게 맞는 학문인가를 보라.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공부하기도 어렵고 직업·진로를 선택할 때 갈등도 심해진다.4년제 대학만이 능사는 아니다.2·3년제 대학에도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전공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라.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야 만족도가 높듯, 주변 눈치 보지 말고 내게 맞는 길을 신념으로 택해라. 다섯째, 지구촌의 기상 변화를 보라. 기상 이변이 심해지면 세상사가 변한다. 직장에도 기상 변화가 영향을 주는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이를테면 홍수가 심해지면 곡물 딜러, 종묘 전문가가 성장하고 식량학부, 산림학부, 농업과학부의 중요성도 커진다. 기상이변은 새로운 직업 수요를 창출할 것이다. 여섯째, 평생 도전하고 싶은 가치를 보라. 내가 할 일의 가치를 평생 추구하면 흥이 절로 날 것인가, 아닌가. 온갖 고생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가.‘무엇을 하면서 평생 항해해야 가치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말이다. 전공 선택이 밥벌이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는 무엇을 터득하고 탐구하면서 일하는 것이 좋은가, 자기 인생에서 추구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대입을 준비하자. 김준성 연세대 직업평론가
  • 檢, 李후보 불기소 방침

    검찰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에 대한 서면조사를 실시했으며 서면조사 결과 등을 바탕으로 이 후보의 BBK 사건 연루 의혹에 대해 불기소 방침을 정한 것으로 3일 알려졌다. 검찰은 이 후보가 BBK 공금횡령 및 옵셔널벤처스코리아 주가조작 사건 등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날 임채진 총장 주재로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수사 발표 시기와 수위를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수사결과를 4일 또는 5일 발표하는 방안을 심도있게 논의했으나 5일로 결론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관계자는 “수사하는 검사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더 수사를 해서 발표하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지난달 27일부터 대선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사실상 이 후보 소환조사가 어려워지면서 최근 서면조사로 대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서면조사 여부에 대해 확인을 거부했으며,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회 홍준표 위원장은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관계자는 “우리 측에서 해줄 수 있는 수준에서 충실하게 해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서면조사 사실을 사실상 시인했다. 이 후보는 서면조사에서 BBK 소유와 주가조작 개입을 모두 부인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이날 계좌추적 등 막바지 보완 수사를 벌였다. 서울중앙지검 김홍일 3차장 검사는 “(BBK 전 대표 김경준씨의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 및 횡령 혐의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연루 의혹에 대한)수사는 지금도 한창 진행 중”이라면서 “김씨의 혐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확인하거나 조사하고 있으며 참고인 조사와 계좌추적이 병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않겠다는 방침 아래 최근까지 정치권 등에서 제기된 의혹에 대해 확인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를 위해 이날 전 흥농종묘 대표 이덕훈씨를 다시 불러 BBK투자시점 및 투자금 반환시기, 투자 배경 등에 대해 진술을 들었다. 검찰은 김경준씨에 대해 주가조작 및 횡령, 사문서위조 등 세 가지 혐의 외에 이면계약서와 관련된 혐의를 추가해 5일 구속기소할 예정이다. 최근 이면계약서 원본 등의 자료를 김씨에게 전해준 김씨 어머니 김영애씨에 대해서도 참고인 조서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투자과정서 李후보 본 적 없다”

    이덕훈 e캐피탈 전 회장과 홍종국 전 대표(현 ㈜다인벤처스 대표)는 30일 e캐피탈이 투자했던 BBK 주식을 모두 매각한 시점은 2000년 2∼3월이라고 밝혔다. 김경준씨가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가 BBK주식 61만주를 김경준씨에게 매각한다’는 한글계약서 작성 시점인 2000년 2월21일에는 주식을 이 후보가 아닌 e캐피탈이 보유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 전 회장은 이날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났으며, 프랑스 파리 출장 중인 홍 전 대표는 전화 인터뷰를 갖고 각각 e캐피탈의 BBK 투자 과정을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BBK에 투자한 돈의 출처는?홍 전 대표 당시 내가 대표로 있던 e캐피탈이 30억원을 투자했고, 이 자본금은 이덕훈 전 회장이 흥농종묘를 매각한 자금으로 출자했다.이 전 회장 홍종국 전 대표가 30억원을 BBK에 투자했는데 e캐피탈의 회사 돈이지 내 주머니 돈은 아니다.▶김경준씨와 알게 된 경위는?홍 전 대표 환은살로만스미스바니증권 서울사무소에서 일할 때 직장 동료로 알게 됐다.이 전 회장 홍종국 전 대표가 김경준씨를 한 번 소개시켜 준 적 있다. 살로만에서 홍 전 대표의 동료였고, 금융투자 전문가로 명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후 1999년 6∼7월 김경준씨가 따로 나를 두 번 찾아왔다. 사업에 보탬이 될 테니 도와 달라고 해서,(e캐피탈이 BBK에 투자한 30억원과 별도로) SK증권 계좌를 하나 만들고 99년 9월10일 30억원을 넣어놨다.▶BBK에 투자하게 된 경위는?홍 전 대표 김경준씨가 1999년 9월 BBK를 창업했는데,1인투자 자문업으로 등록하려면 최소 자본금 30억원이 필요하다고 했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지분을 50대50으로 하고 출범했다. 김씨가 당시 돈이 부족하다고 해 e캐피탈이 우선 30억원을 전부 출자하고 15억원은 몇 달 뒤 돌려받기로 했다.이 전 회장 당시 e캐피탈의 (대)주주였긴 했다. 그러나 주주가 회사경영에 일일이 관여하는 것 아니지 않나. 홍종국 전 대표가 BBK에 투자한 것도 몰랐다.▶투자과정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의 역할이 있었나.홍 전 대표 지금까지 이 후보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이 전 회장 난 이 후보와 아무런 관련 없다.▶e캐피탈이 BBK 지분을 매각한 시점은 언제인가.홍 전 대표 약정에 따라 1999년 10∼11월 15억원을 돌려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씨가 나머지 지분도 인수하겠다고 요청해 2000년 2월 말∼3월 초쯤에 남은 지분을 팔았다.이 전 회장 BBK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은 모른다.2∼3개월 만에 자금을 회수했다고 들었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19일 TV 하이라이트]

    ●와신상담(EBS 오후 8시50분) 부차는 오나라 종묘 밖에서 월나라인을 모욕한다. 또한 오나라 조상 앞에서 구천이 무릎을 꿇지 않자 군졸들을 시켜 구천을 제압한 후 그를 강제로 고개 숙이게 만든다. 오자서는 구천을 죽이자고 청하지만, 부차는 철저하게 신복을 받아내고 말겠다며 그의 청을 거절하고, 백비마저 부차의 편에 선다.   ●창사46주년 특별기획드라마 `이산´(MBC 오후 9시55분) 화완은 울부짖으며 `산에게 탕약을 중단하라는 명을 거둬주라´고 호소한다. 화완은 하루만 말미를 달라며 만약 하루 안에 차도가 없으면 자신의 목을 내놓겠다고 말한다. 한편 정순은 정후겸에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박초를 도성 밖에 집결시켜 두라고 명한다.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35분) 이스라엘의 한 어린이 심장재단은 인종이나 종교를 초월해 심장수술이 필요한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을 선정해 수술해주는 인도적 사업을 펼치고 있다. 적대적인 이스라엘과 아랍국 사이에 이런 교류가 이뤄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어린이 심장재단은 지난 4년간 35명의 이라크 아이들을 수술했다.   ●그 여자가 무서워(SBS 오후 7시20분) 신성그룹에서 영림은 승미에게 전화를 걸어 준철의 안부를 묻게 된다. 승미는 모른다며 준철이 영림 대신 끌려간 건 사실이고, 잠을 깬 준철은 지갑이며 휴대전화 모두를 잃어버렸다는 것도 들려준다. 한편, 은애는 백회장에게 영림을 불러와서 궁금한 점을 물어보겠냐고 넌지시 건네는데….   ●가요무대(KBS1 오후 10시) 제 빛을 다해가는 단풍잎과 우수수 떨어진 낙엽으로 가득한 거리. 완연한 가을의 정서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가을날의 애달픈 사랑을 노래한 한국가요의 고전 `짝사랑´을 설운도의 목소리로 들어본다. 문희옥 `낙엽이 가는 길´, 김상배 `마지막 잎새´, 한혜진 `갈색추억´ 등도 감상해 본다.   ●미녀들의 수다(KBS2 오후 11시5분) 따루가 이번 주 맨 앞자리에서 시청자를 찾아간다.“예쁘고 잘빠진 애들만 앞에 앉는다.”는 솔직당당한 발언이 방송에 나간 후 “따루를 앞자리에 앉혀달라.”는 시청자들의 의견에 앞자리로 이동하게 된 것. 정작 앞자리에 앉자 따루는 ‘에바 자밀라 리에’와 같은 줄에 앉아 비교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 [Metro] 서울 중구 초고층 빌딩 아이디어 공모전 전시

    서울 중구가 후원하고 한국건축가협회가 주최하는 ‘초고층 아이디어 공모전 전시회’가 10∼18일 봉래동 옛 서울역사에서 열린다. 9일 중구에 따르면 이번 전시회에는 지난 6월 전국 대학(원)생의 참여로 이루어진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서울의 투명 오벨리스크’를 비롯, 당선작 26점이 전시된다. 서울의 투명 오벨리스크는 수직으로 뻗은 타워의 상징성과 더불어 남산과 종묘를 잇는 세운상가 축의 개방성, 그에 따른 도시적 구성력을 뛰어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공모전은 ‘서울도심 내 초고층 건축을 통한 도시의 정체성과 비전 확보’를 주제로 도심부 건축물 높이 90m(20층 이하) 제한에 묶인 중구가 초고층 건축물 건립을 위한 디자인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추진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삼성물산, 쌍용건설이 참여해 현재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 시공 중인 버즈두바이와 에미리트 타워호텔 모형 등 세계적인 초고층 건물 작품 6점도 함께 전시돼 구경할 수 있다.한편 공모전 시상식은 오는 14일 오후 3시 옛 서울역사 이벤트홀에서 열릴 예정이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Local] 강도다리 새끼 7만마리 방류

    울산시는 31일 강도다리 새끼 7만2000마리를 동구 일산 앞바다와 울주군 강양어촌계 어장에 방류했다. 강도다리는 가자미과로 수심 200m의 연안에서 보통 30∼40㎝까지 자라며, 넙치 등에 비해 육질이 단단하고 쫄깃쫄깃해 횟감으로 각광받고 있으나 그동안 자연산에만 의존해 오다 국립수산과학원 동해수산연구소에서 지난 2004년 인공종묘 생산에 성공했다.
  • 옹진군 양식시설 확충

    옹진군 어업이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변모된다.30일 군에 따르면 점점 고갈돼 가는 어자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51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수산종묘 방류와 양식장 조성 등 양식기반시설사업 확충에 나섰다. 이에 따라 올들어 전복종패 26만마리와 우럭종묘 270만마리, 넙치종묘 383만마리, 감성돔 14만마리와 바지락종패 350t, 백합 60t, 가무락 39t을 바다에 뿌렸다. 아울러 연평·백령·덕적·자월·영흥도 등 5개 섬에 다시마양식시설, 김양식시설, 산지가공처리시설, 바지락양식시설을 만들어 채취한 수산물을 산지에서 가공처리할 방침이다. 옹진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부고]

    ●유봉환(숭실대 명예교수)영환(바오로의원 원장)인환(브라질 거주·사업)계환(한국칼리정밀 대표)씨 모친상 이종대(사업)씨 빙모상 유승기(을지대 의대 교수)씨 조모상 심기남(이대 의대 교수)씨 시조모상 2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6시30분 (02)3410-6919●함석원(신광D&C 전무)석훈(KBS 연기자)씨 부친상 김윤현(사업)씨 빙부상 2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 (02)3010-2236●유시수(희림상사 사장)시정(경기대 경영학과 교수)시영(전 대상식품 대표)시탁(파카하니핀코리아 총괄사장)시준(토론토 의대 교수)씨 부친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6시30분 (02)3410-6917●홍대식(포항 홍대식법무사사무소장)씨 상배 26일 대구 영남대병원, 발인 28일 오전 9시 (053)620-4242●안회영(한림대 강동성심병원 이비인후과 교수)순영(성모신나는일터 원장)숙영(성모복지원 〃)미영(신라대 가족학과 강사)씨 부친상 안형택(성신여고 교사)의택(패션 디자이너)씨 조부상 이명숙(이명숙소아과 원장)씨 시부상 이철영(한국해양대학 교수)이재청(이재청소아과 원장)배경한(신라대 교수)씨 빙부상 2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6시40분 (02)3010-2237●홍완식(문화일보 교열팀장)씨 부친상 26일 전북 부안 혜성병원, 발인 28일 오전 (063)584-4355●이성구(전 국민은행 지점장)씨 별세 승우(대통령비서실 경제정책비서관)건우(우리은행 청계8가지점장)창우(자영업)씨 부친상 고효선(명일여고 교사)씨 시부상 김계현(서울대 사범대 교수)씨 빙부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 (02)3410-6902●장일세(전 제일은행 지점장)씨 모친상 김승진(변호사)최금영(키삭 회장)홍성구(미국 거주)유연오(유니온시스템정보 대표)씨 빙모상 2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30분 (02)3410-6908●황재국(사업)씨 부친상 김동식(세산 대표)김진우(그랜드택 대표이사)씨 빙부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9일 오전 6시 (02)3010-2265●김재황(CJ푸드시스템 대리)씨 형님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2)3010-2266●신건철(평화종묘 회장)씨 별세 동혁(건국대병원 성형외과 교수)동한(평화종묘 과장)씨 부친상 김선미(통역사)씨 시부상 22일 건국대병원, 발인 29일 오전 7시30분 (02)2030-7901●이용원(삼성에버랜드 홍보팀장)씨 빙모상 26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29일 오전 6시 (02)590-2135
  • [국악인] 정악피리의 외길을 걸어 온 김관희 명인

    [국악인] 정악피리의 외길을 걸어 온 김관희 명인

    이 세상에는 다재다능하여 이 일 저 일을 두루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직 한 길 한 우물만 파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내가 오늘 소개하려는 사람은 중학교부터 피리를 전공하여 졸업과 동시에 국립국악원에 들어가 56세가 되도록 오직 한길 국립국악원 연주단의 일원으로 음악의 일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동기생들이 대학교수로 또는 다른 단체의 연주단원으로 직장을 옮겼지만 김관희라는 피리의 명인은 군복무기간을 제외하곤 국립국악원의 테두리를 한 시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국립국악원에서도 행정직을 맡으면 과장도 하고 원장도 바라볼 수 있지만 김관희는 오직 연주단에만 몸을 담고 근무해왔다. 그 대신 연주자로서 누릴만한 자리는 거의 다 누렸다. 합주단의 목피리(피리파트의 리-더)도 해 봤고 정악단의 악장도 해봤고 지금은 지도위원으로 있다. 국내의 각종 큰 무대는 물론이요 해외 연주 경험도 엄청나게 많다. 피리 독주자로 또는 단소 독주자로 무대에서 연주하기도 하고 태평소나 생황의 연주자로 무대에 서기도 한다. 근래에는 합주의 총지휘격인 집박을 하기도 한다. 온통 음악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음악 속이 훤-하고 연주기량 또한 대단하니까 그냥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합주를 이끌어가기도 하고 주위 후배들을 부분적으로 가르쳐가며 연주생활을 하게 된다. 본인은 악장이나 지도위원쯤 되면 으레 그래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긴 전통 있는 국립국악원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김관희(金寬熙)는 1951년생으로 1964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에 입소하여 피리를 전공하고 1970년 졸업하면서 바로 국립국악원에 들어갔다. 근무하는 중 ‘72년 군에 입대하여 ’74년까지 군대생활을 하고 ‘75년 1월에 복직한 이래 지금까지 국립국악원에 근무하고 있다. 군대생활 3년을 빼더라도 34년을 근무한 셈이다. 김관희는 피리가 전공이어서 김태섭, 이충선, 정재국 등을 사사했다. 특히 김태섭과 정재국을 철저히 사사하여 그들이 김관희 음악의 사표가 되고 있다. 6년 동안의 교육과정에서 이주환에게 가곡, 가사, 시조도 배우고 이창배에게 민요도 배웠다. 김천흥에게는 무용을 배웠고 박동진에게는 판소리를 배웠다. 그가 배운 성악들은 그 음악을 반주하는데 더 없이 좋은 자산이 되고 무용 역시 정재의 반주에 큰 도움이 된다.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처럼 그가 배운 여러 가지 실기들은 다 그의 피리음악을 위해 크게 도움이 된다. 내가 보기에 가곡은 행세를 하지 않아 그렇지 실제 노래를 불러도 훌륭히 부를 만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악기연주자들이 그냥 악기의 음악만 하지 가곡이나 무용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김관희는 그렇지 않다. 악기 하는 학생들에게 가곡, 가사, 시조 같은 성악을 가르치고 정재도 가르치는 것은 옛날 이왕직아악부 아악생양성소 시절부터 해 온 관행이다. 1897년 770여명이던 궁중악인이 1907년 270여명으로 줄고 1917년에는 50여명만 남게 되니 당시 궁중음악의 지도자들이 위기의식을 갖게 되어 1919년부터 아악생을 모집하여 가르치기 시작했다. 5년 주기로 모집하여 월급을 줘가며 가르쳤는데 김천흥은 2기 졸업생이고 성경린은 3기 졸업생이다. 그들을 가르치는 함화진 같은 당시의 지도자들은 미래의 음악생활을 위해 전래의 궁중음악뿐만 아니라 가곡, 가사, 시조도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하여 전교생에게 그것을 가르쳤다. 그래서 민간에서 전승되던 정가란 이름의 가곡, 가사, 시조가 아악부의 연주곡목이 된 것이다. 김관희는 그런 음악을 철저히 배웠다. 그리고 계속 연주하며 활동했다. 요즘 젊은 연주자들에게 가곡반주 하라고 하면 대부분 악보를 봐야한다고 말한다. 악보 없이 외워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가 많지 않다는 말이다. 가곡은 반주 또한 훌륭한 음악이어서 악보 없이 멋진 음악을 만들어야 반주도 되고 노래와 함께 멋진 음악이 되는 것인데 그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있으니 안타깝다. 이런 시대가 되니 김관희 같은 진짜 전통음악을 꿰뚫어 제대로 연주하는 음악가가 더욱 귀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참고로 김관희는 가곡 전바탕이나 영산회상 전바탕 등을 모두 악보 없이 옛날 악인들처럼 연주하고 수제천이나 보허자, 낙양춘, 여민락, 도드리 종류와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 등도 다 외워 연주한다. 수십 시간의 음악이 머리속에 있는 셈이다. 김관희는 정악피리와 함께 무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대취타도 전공했다. 국립국악원에 있으면서 ‘77년 6월에 대취타의 전수생으로 들어갔는데 지금은 피리정악 및 대취타의 전수조교를 하고 있다. 정재국이 예능보유자이니 옛날의 피리 스승이 지금은 피리와 대취타의 스승이 된 것이다. 대취타는 김관희가 전공한 피리 정악과는 음악의 성격이 조금 다르다. 본래 대취타는 군대들이 주둔하는 영문에서 연주하던 음악이고 임금님이 사대문 밖을 행차할 때 연주하던 음악이다. 그래서 궁중에서 연주하던 다른 음악과 성격이 좀 다르다. 그런데도 김관희는 그런 음악의 차이를 제대로 알고 후진들을 지도하며 전수조교 역할을 잘 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는 정재국이 예능보유자가 되면서 대취타만의 예능이 아니라 피리정악 및 대취타의 예능이 되었기 때문에 김관희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음악적 기량이나 경력과 딱 맞아 떨어지는 종목이다. 그래서 김관희의 꿈도 장차 이 종목의 예능보유자가 되고 많은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다. 전통음악의 외길을 걸어 온 사람들에게 인간문화재 칭호를 듣는 예능보유자는 더 없이 명예롭고 보람 있는 타이틀이기에 김관희도 꼭 그 반열에 오르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최종민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월간 <삶과꿈> 2007.09 구독문의:02-319-3791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1) 정묘호란의 후유증

    [병자호란 다시 읽기] (41) 정묘호란의 후유증

    인조는 1627년 4월12일, 서울로 돌아와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1624년 이괄의 난을 맞아 서울을 버렸다가 되찾았던 경험을 3년 만에 되풀이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어렵사리 정권은 지킬 수 있었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청북에서는 의병들이 계속 저항하는 와중에 모병과 후금병 사이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명은 ‘조선이 오랑캐와 화친했다.’고 의혹의 눈길을 보냈고 후금은 ‘속히 모문룡을 잡아 죽이라.’고 채근했다. 민생 문제가 시급한 와중에 조정 신료들은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에 대해 시비와 논란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모문룡, 후금과 화친 빌미 자신의 발호 정당화 화의가 체결되면서 후금군 대부분은 철수를 시작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의주를 조선에 반환하지 않았다. 후금군은 의주 부근에 주둔하면서 모문룡을 체포하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몽골병을 포함하여 수천 명에 이르렀는데 아예 농사를 지으면서 장기간 주둔할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조선은 사자를 보내 완전히 철수하라고 종용했지만 후금 측은 듣지 않았다.“조선이 모문룡을 제거해 주면 철수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모병들은 그들대로 청북 주변의 섬과 육지를 오가며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후금군을 습격하는가 하면 조선 관아와 백성들에 대한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단속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모문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조선이 후금과 화친했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들의 발호를 정당화하려 했다.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정묘호란 이후 청북은 훨씬 더 위험한 ‘화약고’가 되어 버렸다. 모병과 후금군 사이의 충돌은 다반사가 되었고, 그 와중에 조선은 ‘샌드위치’의 처지로 몰렸다. 화약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사자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문제는 사자들이 서울과 심양을 오가면서 모병들이 득실대는 청북 지역을 지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모문룡은 후금 사자를 체포하여 ‘한 건 올리려’ 덤볐고, 후금 사절들은 그들대로 모병들과의 충돌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1627년 5월, 심양을 왕래했던 이홍망(李弘望)의 보고 내용은 ‘샌드위치’가 되어 버린 조선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 준다.“후금 군인이 한인 네 명과 조선인 네 명을 붙잡아 제게 데려왔습니다. 그는 저에게 ‘한인이 조선 사람들을 살해하기에 잡아 왔으니 그대가 직접 한인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럴 수 없다는 뜻으로 말했더니 후금 군인이 말하기를 ‘조선은 한인과 마음을 같이하고 있으니 도리상 그러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한인을 죽였습니다.” ●화친에 대한 비판이 격화되다 종묘사직을 지키려고 화의를 맺긴 했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오랑캐’ 후금을 ‘형’으로 받드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와 함께 인조와 화의를 주도한 신료들을 특히 힘들게 했던 것은 명의 반응이었다. 이미 정묘호란이 일어난 직후 명 일각에서는 노골적으로 조선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1627년 5월, 성절사(聖節使)로 명에 갔다가 귀국했던 김상헌(金尙憲)은 명에서 ‘조선이 누르하치에게 양곡을 원조했던 사실이 있다. 조선이 후금을 두려워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관망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1627년 6월, 요동에서는 ‘조선이 오랑캐와 혼인을 맺었고, 오랑캐에게 땅을 내주고 거주하는 것을 허용했다.’는 풍문마저 돌았다. 인조와 조선 신료들은 명의 그 같은 태도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오랑캐와 화의를 맺은 것 때문에 인조반정 당시 내세웠던 명분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스스로 찜찜해 하던 차였다.‘광해군이 후금과 화친했기 때문에 타도해야 한다.’고 외쳤던 인조정권의 입장에서 명의 비난은 극심한 굴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이미 척화파 윤황(尹煌)의 발언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은 바 있다. 윤황은 강화도에 있을 때, 화의에 반대하면서 ‘오늘의 화친은 이름만 화친일 뿐 실제로는 항복입니다. 전하는 요행을 바라는 간신들에게 넘어가 더러운 오랑캐 사자를 접견하고도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십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렸었다. ‘항복’이란 말에 격분한 인조는 ‘유식한 그대들은 오랑캐에게 항복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맞받았다. 그러면서 윤황을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지시했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 논란은 재연되었다.7월1일, 생원 이흥발(李興渤) 등이 상소를 올렸다.‘명나라 장수가 우리 경내에서 피살되었음에도 전하는 오랑캐 사신을 객관에 머물게 하고 극진히 예우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적 사신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중국을 배신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던 인조는 ‘그대들이 가상하다. 나도 후회하고 있다.’며 물러섰다. 화의에 대한 자괴감과 명에 대한 미안함은 신료들에게 엉뚱한 자격지심을 촉발시켰다. 후금군은 철수하면서 강홍립이 조선에 남도록 허용했다. 이어 강홍립이 후금에 억류되었을 때 거느리던 사람들도 조선으로 송환했다. 화의가 이루어진 데 대한 만족감의 표시였다. 송환된 사람 가운데는 강홍립이 후금에서 재취(再娶)했던 부인도 있었다. 그녀는 한족 출신 장군 동기공( 奇功)의 딸이었다. 신료들은 그녀가 강홍립에게 가겠다고 하자 아우성을 쳤다.‘오랑캐에게 항복하여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를 섬긴 자에게 한족 여인을 다시 거느리게 해 주는 것은 참람하다.’는 것이 반대 명분이었다. 인조는 그녀를 강홍립에게 보내라고 했지만 신료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그녀를 명나라로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기공의 딸은 ‘조선에서 살 수 없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호소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논란이 한창이던 7월27일 강홍립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을 ‘매국노’로 매도하는 분위기에서 비롯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그의 죽음과 함께 논란은 종식되었다. ●이인거, 창의중흥대장 칭하며 병권 요구 화의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던 1627년 9월, 모반 사건이 터졌다. 강원도 횡성(橫城)에 살던 유학(幼學) 이인거(李仁居)가 주도했던 사건이었다. 이인거는 9월26일, 원주목사 홍보와 강원감사 최현(崔晛)을 찾아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계획을 털어 놓았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조정에서 오랑캐와 화친했으니 내가 의병을 일으켜 곧바로 서울로 올라 가겠다. 전하께 주화파 간신 한 사람의 목을 베도록 청한 다음 서쪽으로 달려가 오랑캐를 토벌하겠다.’ 최현 등이 미심쩍게 여겨 반신반의하고 있던 9월29일, 이인거는 군사를 일으켜 횡성현의 무기고를 탈취한 뒤 스스로를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칭했다. 10월1일, 이인거의 상소가 조정에 도착했다. 이인거는 ‘전하는 호란을 맞아 몸소 갑옷을 입고 와신상담하는 자세로 적과 맞서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오랑캐 사신의 접대나 일삼고 눈치만 살폈으니 천지와 귀신이 공분(公憤)하고 나라가 견융(犬戎)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라고 일갈한 뒤, 자신에게 병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인조와 조정은 경악했다. 급히 선전관을 보내 강원감사 최현을 잡아들이게 하는 한편, 서울과 경기도의 병력 수천을 동원하여 전진시켰다. 비변사는 궁성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호위대장이 군관들을 거느리고 대궐 밖에서 숙직하도록 하고, 동대문에서 횡성에 이르는 길의 요소 요소마다 정탐병을 배치했다. 이인거가 거느렸던 병력은 고작 70명 남짓이었다. 그는 9월30일, 횡성읍에서 벌어진 가벼운 교전 끝에 체포되었다. 싱거운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처벌은 참혹했다. 심문 과정에서 모두 20명이 죽고 14명이 유배되었다. 진압 이후 인조는 모든 책임을 윤황에게 돌렸다. 윤황이 ‘항복’ 운운하는 바람에 이인거 등이 민심의 불만을 틈타 일을 저질렀다고 질타했다. 하지만 인조와 화의를 주도한 신료들의 마음은 도무지 편치 않았다. 이인거의 시도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후금과의 화의에 대한 싸늘한 민심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직후 조선의 분위기는 그렇게 어수선하고 착잡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故 송범씨에 금관문화훈장

    문화관광부는 지난 6월 타계한 원로 한국무용가 송범(본명 송철교)씨에게 금관문화훈장을, 대하소설 ‘객주’를 쓴 작가 김주영씨와 고 이강덕(전 중요무형문화재 1호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씨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한다고 16일 발표했다. 만화가 이두호씨와 연기자 고두심씨는 옥관문화훈장 수장자로 선정됐다. 가수 보아(본명 권보아)씨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는다.
  • “해주, 농·수산·공업 종합특구로 개발을”

    남북 정상선언에서 합의된 ‘해주경제특구’를 농업·수산업·공업을 포괄하는 종합경제특구로 개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남북이 ‘윈-윈’할 수 있는 서해양식단지, 공동협동농장, 개성공단 연계공장 등의 조성이 바람직한 것으로 분석됐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과 동북아시대위원회는 1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남북정상회담 경제분야 합의사항 이행전망과 과제’ 세미나에서 이같이 밝혔다. 정형곤 KIEP 연구원은 ‘서해평화특구 실현방안과 과제’를 통해 “해주지역은 개성특구와 상호보완적 입장에서 개발돼야 하며, 중국 선전처럼 농업·공업·수산업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경제특구로 개발해야 효율적”이라고 밝혔다. 개성은 대북 비즈니스 중심지 역할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구체적 추진 방안으로는 우선 수산업 부문에서 ‘서해 양식단지’ 조성이 제안됐다. 이곳에서 북한은 김·미역·다시마·새우·바지락 등 양식장 부지와 노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남측은 양식장 건설에 필요한 지게차 등 물자와 기반시설, 종묘배양장 등의 설치를 지원한다. 수산양식 전문가도 파견한다. 북측에서 생산된 수산물은 남측으로 반입돼 소비하게 된다. 점진적으로 북방한계선(NLL) 해역에 ‘바다목장’을 조성해 협력사업을 확대한다. 농업 협력을 위해선 개성공단과 인접한 해주에 ‘남북공동 협동농장(영농단지)’ 2∼3곳의 조성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됐다. 크기는 1000㏊(300만평) 정도가 적당하며, 식량작물증산 시범단지 설치도 가능할 전망이다. 정 연구원은 “남측이 농기자재, 시설 및 농업기술을 지원하고 북측이 토지·노동력을 활용해야 한다.”면서 “개성공단 근처를 판로로 삼아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산업단지는 개성공단 2단계와 연계된 공장을 설립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으로 분석됐다. 개성공단 2단계 입주기업들은 부품·부분품·조립품 제조에 주력하고 해주공단은 완성품,R&D, 물류중심기지로 상호 연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해주공단은 개성공단 2단계 입주업체와 공장의 ‘지원산업단지’(물류센터 등)로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서는 판단했다. 해주특구 개발과 도로·철도 보수 등 남북 정상선언에서 합의한 6대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약 113억달러의 비용이 소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종묘광장 제모습 찾는다

    종묘광장 제모습 찾는다

    연내 종묘광장에 대규모 녹지공간이 조성되고, 내년부터는 종묘광장 성역화 사업(조감도)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전망이다. 서울시는 10일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종묘광장을 역사와 문화 공간으로 복원하는 ‘종묘광장 성역화 사업’을 2010년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한다고 밝혔다.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제례 공간으로 사적 제125호로 지정돼 있다.1995년에는 유네스코가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 양식을 지닌 의례공간으로 인정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그러나 출입구인 종묘광장에는 각종 불법 노점상, 무료급식장, 노인을 상대로 한 성매매, 집회·시위 등 불법행위가 자행되면서 위상이 훼손됐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1단계 성역화 사업으로 무질서의 원인이 된 주요 요인부터 정리했다. 우선 단속요원을 상설 배치해 노점상과 이동식 노래방을 철거하고, 경찰과 합동으로 노인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는 속칭 ‘박카스 아줌마’에 대한 단속을 벌였다. 또 무료급식소를 인근 노인복지센터 3곳으로 분산 이전하고, 대형버스 주차장을 광장 외부로 옮겼다. 정비된 자리는 연내 녹지로 조성하고, 내년 1월에는 술과 음식물을 파는 매점과 자판기까지 완전히 철거해 1단계 사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시에 따르면 1단계 사업 추진 결과 고정적으로 광장을 이용하던 인원이 하루 3500명에서 2100명으로 40%가 줄었고, 종묘를 관람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시민은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시는 내년부터 2010년까지 종묘광장 안에 있는 문화재를 복원하는 2단계 사업을 추진한다. 어도(임금이 다니는 길), 홍살문(궁전·능·묘 등의 앞에 세우는 나무문), 하마비(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지점을 표시한 비석), 어정(임금이 마시던 우물), 피맛길(평민들이 다니던 골목), 순라길(순찰하던 길) 등의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투입되는 예산은 42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시대에 가장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가 마마였다. 마마는 누구나 평생 한번은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병인데, 심하면 죽었고, 가볍게 나아도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 심하게 얽으면 곰보라고 했는데, 조선시대 초상화를 살펴 보면 얼굴에 얽은 자국이 심한 분들이 많다.‘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에 200여명의 초상화가 실렸는데,17세기 후반에 태어난 인물들의 얼굴이 특히 많이 얽었다. 예를 들어 16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20년 동안 태어난 분들 가운데 정수기, 박필건, 오명항, 이덕수, 어유룡, 윤봉근, 정현복 등의 얼굴에 마마자국이 심한데, 이들은 숙종과 비슷한 연배이다. 이 시기 인물들의 절반 정도는 마마를 심하게 앓았던 후유증을 평생 지니고 살았던 셈이다. ●왕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전염병 마마 마마를 전문으로 치료한 의원이 두의(痘醫)인데, 가장 빠르게 승진했다. 임금들이 두의를 특히 고맙게 여긴 이유는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왕노릇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평생 수많은 신하와 외국 사신들을 만나야 하는데, 성형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얼굴이 심하게 얽은 임금을 만나야 하는 신하도 마음이 괴롭고, 임금도 편치 못했다. 왕과 세자의 마마를 모두 치료해 지중추부사까지 오른 유상(柳 )은 대표적인 두의이다. 왕실에서 마마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현종 즉위년(1659) 9월5일 기사에 실린 이야기를 살펴 보자. 인조가 청나라 태조에게 항복한 뒤에 심양에 인질로 끌려 갔던 봉림대군이 돌아와 즉위하자 청나라에 복수할 준비를 했다. 효종은 송시열과 함께 북벌책(北伐策)을 추진했는데, 세상을 떠나던 해인 1659년 3월11일 희정당에서 송시열을 만나 북벌에 관해 의논했다. 몸이 차츰 약해지는 것을 걱정한 효종이 10년을 기한으로 청나라 칠 준비를 하자고 했다.10년이 지나면 효종 자신이 나이 쉰이 되어 기력이 약해지고 송시열도 늙을 테니, 북벌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다고 했다. 효종은 그러면서 아들의 마마 이야기를 했다. “세자가 매우 현명한데, 비록 부자지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장단점을 모르겠는가? 세자는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운데다 견고한 의지가 있으니, 문치(文治)로 국가를 보존할 임금이 될 것이다. 깊은 궁중에서 자라 병가(兵家)의 일을 알지 못하니, 억지로 어려운 일을 책임지울 수 없다. 아직 마마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호하고 있다.” 효종은 세자의 마마를 걱정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두 달 뒤에 종기를 고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쉰이 될까봐 걱정했는데, 겨우 마흔이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도 마마를 걱정했다. 현종 8년(1667) 2월에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책례(冊禮)를 치르기로 했는데, 나중에 숙종이 된 원자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한달쯤 전에 마마가 유행하자 현종은 행사보다 아들의 건강이 더 걱정되었다. 몸이 약해 자주 온천에 다니던 현종은 1월18일에도 침을 맞다가, 영의정 정태화를 불러 명했다. “세자가 책례를 마친 뒤에 사례의 전문(箋文)을 올리는 것은 중요한 의례이다. 그러나 지금 마마가 치성하고 있는데 세자가 연일 외정에서 예를 행하고 있으니 염려스럽다.” 그러나 정태화가 ‘내정에서 하는 것은 너무 구차하니, 동궁 소속 관원들만 외정에서 참여하여 간략하게 치르자.’고 아뢰어 그대로 하였다. 그만큼 마마는 왕에게도 무서운 병이었다. 이듬해 5월17일에 궁인이 마마를 앓자, 현종이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마는 환자와의 접촉은 물론, 공기로도 전염되었다. 그래서 지엄하신 임금도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 12년(1671) 2월29일 실록에는 “팔도에 기아, 여역,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마를 앓지 않고 왕위에 오른 숙종과 마마 전문의원 유상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숙종 완쾌되자 유상의 품계를 두 계급 이상 올려 명성대비는 숙종이 마마를 겪지 않은 것을 늘 걱정했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1683년 10월에 몸에 두창(痘瘡)이 나자 깜짝 놀라 목욕재계하고 자신이 대신 죽기를 청했는데,11월에 마마가 깨끗이 나았다. 허준이 ‘두창집요(痘瘡集要)’를 편찬한 뒤부터 두창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는데, 일생에 한번은 걸린다고 해서 백세창이라고도 불렸다. 그랬기에 숙종은 늘 마마를 걱정했으며, 내의원에 두의를 두었다. 한의학에서는 두창이 걸리는 이유를 태독설과 운기설로 설명했는데, 태(胎) 안에 있을 때에 어머니의 나쁜 기운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두창에 걸린다는 것이 태독설이다. 그랬기에 명성대비도 숙종이 어렸을 때에 마마를 앓지 않자 평생 조바심하며 걱정했던 것이다. 명성대비가 기도하여 숙종의 마마가 나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치료한 의원은 유상이다. 10월18일에 숙종의 마마 증상이 시작되었는데, 이틀 뒤에 유상을 불러 진료케 했으며, 의원 일곱 명이 번갈아 숙직했다. 현종이 왕궁을 비워두고 온천에 행차했을 때같이 십며칠 치의 군호(軍號)를 미리 정해 올렸으며, 숙직하는 군사도 새로 뽑지 않고 활쏘기 시범도 중지시켰다. 왕이 마마를 앓기 시작하자 비상사태에 들어간 것이다. 숙종의 증세는 나날이 심해져, 열흘째 날에는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안부를 물어도 혼미한 상태로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28일에야 비로소 곪은 데가 아물며 딱지가 생기기 시작했다.29일에는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사면령을 내렸다. 11월1일에 딱지가 떨어져 완쾌되자, 대비의 수라상에도 고기와 생선이 오르게 되었다.5일에 시약청(侍藥廳)을 해체하고, 군사들의 비상체제도 원상으로 복구했다.10일에 유상을 종2품 동중추부사로 초자(超資)하고, 금관자를 내려 주었다. 상을 줄 때에는 품계를 하나씩 올리는 것이 관례인데, 유상의 경우에는 두 계급 이상 올렸다는 뜻이다.14일부터 의원들에게 지나친 상을 주었다는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언관들도 유상의 공로는 인정했다.17일에 종묘 사직에 경사를 아뢰었으며, 전 승지 이현석이 ‘성두가(聖痘歌)’를 지어 기쁨을 표현하자, 많은 사람들이 외워 전하였다. 그 정도로 왕의 마마는 큰 사건이었다. 12월4일에 유상을 종4품 서산군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튿날 “임금의 환후가 평상시 같이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멀리 내보낼 수 없다.”고 하여 한양 옆의 고양군수로 옮겨 주었다. 언제라도 불러 들일 수 있는 곳에 둔 것이다. ●감꼭지를 달여 마마를 치료했다는 전설까지 유상이 숙종의 마마를 치료한 비법이 ‘청구야담’에 실려 있다. 유상이 영남관찰사를 따라 책실(冊室)로 내려갔는데, 몇 달 동안 할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관찰사에게 말했다. 금호를 건너 우암창에 이르기 전에, 종이 변을 보겠다고 고삐를 맡겼다. 유상이 채찍을 들어서 한번 치자, 나귀가 깜짝 놀라 달아났다. 하루가 다하도록 멈추지 않다가, 날 저물 무렵에야 어떤 집 마루 앞에 멈춰섰다. 마루에 있던 노인이 아들을 부르더니 “손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으니, 나귀도 잘 먹이고 손님도 잘 모시라.”고 했다. 인사를 나눈 뒤에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자 주인이 긴 칼을 차고 나가면서 “내 책은 보지 마시오.”라고 했다. 유상이 휘장 속을 보니 의서(醫書)가 가득해 아무 책이나 들춰 보았다. 주인이 돌아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는데, 첫닭이 울자 주인이 “빨리 떠나라.”고 했다. 한낮이 되어 판교에 다다르자, 액정서 아전들이 열댓 명이나 길가에 줄지어 서서 유상에게 빨리 서울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지금 성상께서 마마를 앓으시는데,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서 의원 유상을 부르라고 했다오.” 구리개를 넘어서는데 어떤 할미가 마마에 걸렸던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묻자 할미가 설명했다.“이 아이는 곪긴 속에 출혈이 심해 숨까지 막혔었다오. 다들 팔짱을 낀 채 죽기만 기다렸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탕(湯)을 달여 먹게 해서 효험을 보았지요.” 말린 시체탕은 감꼭지를 달인 약인데, 딸꾹질에 복용했다. 듣고 보니 어젯밤 보았던 의서에도 시체탕이란 말이 있었다. 왕을 진찰했더니, 할미가 업고 있던 아이와 같은 증세였다. 그래서 시체탕을 올렸더니 곧바로 효험이 있어, 신의라고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병균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시대에 두창은 귀신에 의해 생겨났다고 믿었다. 민간에서는 두창신을 중히 여겨 왔으며, 여러 가지 금기(禁忌)가 생겨났다. 그래서 그 귀신을 마마, 손님이라고 높이 받들었던 것이다. 고을마다 여단( 壇)을 쌓아 놓고 전염병이 돌 때마다 여제( 祭)를 지냈는데, 억울한 원혼(魂)을 달래 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마가 유행하면 마마배송굿이나 하던 시대에 유상은 숙종뿐이 아니라 1699년에는 세자,1711년에는 왕자와 왕비의 마마까지 모두 치료했다. 더 이상 승진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으니, 왕실의 마마를 치료하던 의원은 조선 최고의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상의 아들이 대를 잇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까지 생겨난 그의 의술은 전수되지 못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Local] 삼베사업 타당성 조사 용역

    동해시가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삼베페스티벌을 찾아 사업 아이디어를 벤치마킹한 데 이어 삼베(햄프)사업 용역을 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수립에 들어갔다. 인제대 햄프사업지원단이 용역을 맡은 ‘삼베 브랜드사업 타당성 조사 및 기본설계’는 사업 추진을 위한 ▲삼베사업 개발여건 ▲삼베 종합 분석 ▲전략구상 및 세부계획 ▲사업 추진계획 등을 계획한다. 인제대 햄프지원사업단은 최근 삼베 브랜드사업 보고에서 ▲삼베 종묘사업을 통한 종자 수출 ▲삼베 오일을 활용한 제품 생산 ▲삼베 테마단지 조성 등을 제시했다. 삼베 테마단지 조성은 동해시의 해양·건강·관광 마케팅과 연계해 추진될 전망이다.
  • [Seoul In] 창경궁 집춘문 100년만에 개방

    종로구(구청장 김충용) 창경궁의 동쪽 문인 집춘문(集春門)이 100년만에 개방된다. 창경궁과 문묘를 연결하는 다리 거동로를 설치해 줄 것을 문화재청에 건의했다. 집춘문은 일반 관리들은 다닐 수 없고, 임금이 성균관의 공자 사당에 작헌례(능이나 사당을 참배하고 술잔을 올리는 행사)를 올릴 때 이용하던 문이다. 거동로도 임금과 왕세자가 주로 다녔다. 집춘문을 개방하면 종묘→창경궁→문묘를 연결하는 관광로가 열리는 셈이다. 문화체육과 731-0359.
  •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26) 경남 산청군 오봉마을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26) 경남 산청군 오봉마을

    지리산 아래 사방으로 뻗은 다섯 산봉우리 사이 분지에 자리잡은 경남 산청군 금서면 오봉마을. 산 아래 동네는 몇 십년 만에 찾아온 폭염으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인데도 해발 600m 고지에 위치한 이곳의 밤 공기는 서늘함이 느껴진다. 13가구 30여명이 살아가는 오봉마을의 토박이는 마을 최고령자인 이이순(83) 할머니. 나머지는 10여년 전부터 이곳에 요양차 이주해 눌러앉은 외지인들이다.17년 전 산세가 너무 좋아 터를 잡은 최호경씨. 그는 함양에서 종묘업을 하면서도 거주는 이곳에서 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최씨가 마을 자랑을 한다.“몇년 전 술땜시 간이 문드러질 정도로 상해서 들어 왔던 사내가 여 살문서 병이 싸악 나아가꼬 펄펄해져가 나갔다 카데예.” 물하고 공기가 ‘엉캉’ 좋았기 때문이란다. 페인트공장에서 일을 하다 폐에 이상이 생겨 낙향한 민대호(44)씨도 건강을 다시 찾았다. 지금은 집 앞으로 펼쳐진 지리산을 정원 삼아 토종꿀, 나물, 약초 채취를 하며 살고 있다. 마을 이장 강신국(57)씨는 기자를 만나자 찾아오는 데 고생이 많았다며 아내를 시켜 손수 만든 콩국수를 내온다.“산골이라 이런 거밖에 대접해 드릴 게 없어서….” 진하고 고소한 콩국에 소금을 반숟가락 정도 넣고 간을 맞춘 다음 국물을 맛보았다. 고소하면서도 입안 가득 느껴지는 풍미에 염치 불구하고 후루룩 소리를 내며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함께 나온 겉절이의 감칠맛은 입안에 짝짝 붙는다. “콩이며 배추며 이곳에서 나는 모든 게 농약을 안친 유기농 채소라예.” 주민 대부분은 특별히 농사를 짓지 않고 텃밭 정도만 일구며 지리산을 터전 삼아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몸에 해로운 농약은 아예 쓰질 않는다. 부족한 수입은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 민박을 치며 메운단다. 이이순 할머니는 예전엔 산에서 곰, 노루 등 야생동물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요즘은 먹잇감을 찾아 내려오는 멧돼지를 겨울철에나 볼 수 있다. “자연의 섭리가 진리인 기라. 하늘 무서븐 줄 알고 순리대로 살믄 병도 안 생기고 생겼던 병도 시나브로 낫는다 카이.”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젊은 세대들이 들어와 살길 바라고 있다. 그래야 마을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풍토가 좋고 청정한 지역이라지만 새사람이 터잡고 살지 않으면 점점 쇠락하기 마련. 작은 오지마을에서 평화롭게 오순도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한편으론 외진 마을이 혹여 버려지지나 않을까 염려를 하는 것 같다. 마을을 뒤로하고 내려 오는 길. 이이순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한다.“찬찬히 경치 보고 쉬엄쉬엄 가이소. 우리 마을 좋다꼬 이우재 소문도 쫌 내주시고예. 잘 댕기 가입시데이.” 글·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Seoul In] 종묘 집회금지 등 성역화 작업

    종로구(구청장 김충용)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종묘 입구광장에 대한 성역화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 5월 주류판매 금지, 포장마차 철거, 윤락호객 행위 근절 등 기초질서 위반에 대한 단속을 했다. 성역화 1단계로 확성기 사용 집회 금지, 행상의 판매행위 금지, 소음·악취 등 혐오감을 주는 행위 금지 등을 시행하기로 했다.2단계로 소음공해의 원인인 팔각정을 철거하고 진·출입로 차단문을 설치, 노숙자 급식장소 이전을 시행하기로 했다. 공원녹지과 731-1452.
  • [부고]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 김천흥씨 별세

    [부고]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 김천흥씨 별세

    ‘한국춤의 역사’로 불리던 심소(心韶) 김천흥씨가 18일 오전 11시50분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98세. 고인은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나 13세 때인 1922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생양성소에 들어가 궁중음악과 궁중무용, 해금·양금·아쟁을 배웠다. 고인은 순종 황제의 50세 경축연에서 춤을 춰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후 1940년까지 이왕직아악부에서 궁중음악과 궁중무용을 공부한 뒤 대한국악원 무용과장과 국립국악원 예술사 등을 지냈다. 1941년 명인 한성준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하며 민속예술에 입문한 고인은 살풀이와 탈춤 등으로 범위를 넓혀 정악과 궁중무용, 민속무용을 두루 아우르는 보기 드문 예술인이 됐다. 고인은 궁중무용의 유일한 계승자로 1970년대 후반부터 40여가지 춤의 내용을 풀이해 공연하는 등 궁중무용 재현에 힘썼다. 이화여전 음악과 강사, 국립국악원 자문위원, 한국국악협회 이사 등으로 국악계와 무용계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보유자이자 제39호 ‘처용무’ 명예보유자로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인 고인은 서울시문화상(1960), 대한민국 예술원상(1970), 국민훈장 모란장(1973), 금관문화훈장(2001)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운·정완씨와 딸 정순·정원·정실씨 등 2남3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는 22일 오전 10시 국립국악원 별맞이터에서 국악인장으로 치러진다.(02)590-2609.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내국인 사용가능 관광카드 발행

    서울 관광카드인 ‘서울 시티패스 플러스’(SEOUL CITYPASS+)카드가 새롭게 선보인다 서울시는 9일 최대 50만원까지 충전해 사용할 수 있는 서울 시티패스 플러스카드는 지하철과 버스뿐만 아니라 편의점, 서울 4대 고궁(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 등에서도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서울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할 때 기존의 T머니 카드처럼 환승과 일반할인 요금을 적용받는다.특히 지난해 11월 출시된 외국인 관광자용 교통카드와는 달리 내국인도 이용가능하며, 사용하다 남은 금액은 모두 환불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극장,N서울타워, 한강유람선,63빌딩, 세종문화회관 등 서울시내 12개 문화공연 관람시설을 이용할 때 5∼20%까지 입장료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음식점과 안경점, 대중사우나, 마사지, 네일아트점 등 시내 60여개 제휴업체에서도 할인혜택도 누릴 수 있다. 서울시티패스 플러스카드는 일반용, 청소년용, 어린이용 세종류며 카드가격은 3000원이다. 수도권에 있는 GS25 편의점과 관광안내소에서 10일부터 구입할 수 있으며 주요 편의점에서 충전과 환불가능하다.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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