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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미진진 견문기] 90년 동안 서민들 가슴 녹이는 용금옥·부민옥·북어국집 그 맛

    [흥미진진 견문기] 90년 동안 서민들 가슴 녹이는 용금옥·부민옥·북어국집 그 맛

    서울을 꽁꽁 얼릴 기세로 불어 닥친 한파도 천변풍경을 감상하고픈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1930년대, 천변 주위로 인력거와 자전거가 지나가고 세탁비를 내지 않으려는 아낙들과 시름을 하는 김첨지의 모습을 떠올리니 사람 사는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났다.1930년대부터 장사를 시작해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추어탕집 용금옥과 육개장집 부민옥, 무교동 북어국집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의 천변을 걷는 듯 정겨움이 느껴졌다.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인 광통교를 지나 천변 풍경 속 여인네들의 분노를 자아냈던 기생집이 즐비했던 관철동으로 향했다. 천변을 벗어나자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독일의 한 거리에나 볼 수 있는 고딕풍의 우아한 가로등과 장벽, 베를린시의 상징인 ‘곰’ 조형물과 걸맞게 조성된 베를린광장이었다. 63빌딩이 세워지기 전까지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던 삼일빌딩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찬바람에 온몸이 얼어붙을 즈음 몸도 녹여주고 마음도 훈훈하게 데워준 종로양복점을 만났다. 1916년 개업해 한 세기를 오롯이 옷을 짓는 일에 온힘을 쏟은 장인정신에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중국 음식으로 3대째 가업을 잇는 안동장과 송림수제화를 돌아보고 세운상가의 스카이라운지에 올랐다. 종묘가 한눈에 보이고 서울의 풍광이 아스라이 펼쳐진 하늘 옥상이 있었다. 곧 재개발이 돼 새로운 주상복합이 지어질 광장시장 앞은 세월의 흔적을 담아놓은 각양각색의 지붕들이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지붕 아래로 굴곡진 골목들을 지나 귀금속 제조업으로 유명한 거리를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서민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광장시장으로 향했다. 투어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청계천이 참 정겨웠다. 어디선가 이쁜이와 김첨지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 것 같아서 칼바람 속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신수경 동화구연가
  • 부활 김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제례’ 국내외로 알린다

    부활 김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제례’ 국내외로 알린다

    서경덕 교수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종묘제례’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제작한 영상에 그룹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재능기부로 참여했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에서 제작한 4분짜리 영상은 국가 제사인 종묘제례와 제례에서 연행된 음악과 춤인 종묘제례악을 소개하고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문화적 가치 등을 다루고 있다. 영상은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제작됐다. 김태원은 한국어 내레이션을 맡아 홍보에 힘을 보탰다. 그는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종묘제례악을 소개하게 돼 영광이며, 국내외 네티즌이 종묘제례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이번 일을 기획한 서경덕 교수는 “세계적으로 보존가치를 인정받는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이 점차 잊히는 것이 안타까웠다”며 “영상을 통해 국내 및 국외로 널리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전 세계 주요 언론사 3백여 곳의 트위터 계정에 영어 영상을 첨부했고, 50여 개국 대표 한인 커뮤니티에도 영상을 올려 유학생과 재외동포에게도 널리 알리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국내외 젊은 층들이 많이 이용하는 유튜브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의 SNS 계정으로도 영상을 게재해 홍보 중이다. 한편 배우 안성기와 박중훈, 가수 션, 김태호 PD 등 각 분야의 유명인사들이 농악, 아리랑, 판소리, 처용무의 한국어 영상 내레이션에 재능기부로 참여해 한국의 전통문화 알리기에 동참했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인류무형문화유산 ‘씨름’, 첫 남북 공동으로 등재됐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씨름’, 첫 남북 공동으로 등재됐다

    ‘씨름’이 사상 처음으로 남북 공동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을 통틀어 남북이 함께 등재한 첫 사례다. 남북은 아리랑과 김장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보유 중이다. 그러나 각각 이름을 올린 것으로 이번처럼 공동 등재는 아니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 위원회(무형유산위원회)는 26일 아프리카 모리셔스 수도 포트루이스에서 개막한 제13차 회의에서 남북의 ‘씨름’을 인류무형문화유산의 대표 목록에 등재했다. 정식 명칭은 ‘씨름, 한국의 전통 레슬링’(Traditional Korean Wrestling, Ssirum/Ssireum)이다. 무형유산위원회는 이례적으로 28∼29일로 예정된 대표 목록 심사에 앞서 개회일에 씨름 공동 등재 안건을 상정한 뒤 24개 위원국 만장일치로 등재를 결정했다. 위원회는 이번 결정이 “평화와 화해를 위한(for peace and reconciliation)” 의미가 있다고 발표했다. 앞서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의 씨름’(Ssireum, traditional wrestling in the Republic of Korea)으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씨름’(Ssirum(Korean wrestling)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우리 정부는 2016년 3월 등재 신청서를 제출했고, 북한은 2016년 12월 에티오피아에서 개최된 제11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등재하고자 했으나 정보를 보완하라는 요구를 받아 작년 3월 신청서를 수정했다. 무형유산위원회는 두 종목이 사실상 동일하다고 판단해 공동 등재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무형유산위원회는 등재 결정문에서 ‘대한민국의 씨름’에 대해 “씨름은 국내 모든 지역의 한국인들에게 한국 전통문화로 인식된다”며 “중요한 명절에는 항상 씨름 경기가 있어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과 긴밀히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평했다. 또 북한 씨름에 대해서도 “사회 모든 차원에서 깊게 뿌리 박힌 유산으로 사회적 조화와 응집력을 강화한다”고 설명했다. 씨름은 대한민국의 20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우리나라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을 시작으로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남사당놀이·영산재·제주칠머리당영등굿·처용무(2009), 가곡·대목장·매사냥(2010), 택견·줄타기·한산모시짜기(2011), 아리랑(2012), 김장 문화(2013), 농악(2014), 줄다리기(2015), 제주해녀문화(2016)를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했다. 한편 북한은 이번 씨름의 등재로 인류무형문화유산이 아리랑(2014), 김치 만들기(2015)를 포함해 총 3건으로 늘었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고려 라마탑형 사리함만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빨리 환수해야지요”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고려 라마탑형 사리함만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빨리 환수해야지요”

    미국서 우리 문화재 추적하는 김정광 이사장이 말하는 환수 운동 “부처님 세 분과 고승 두 분 사리, 한 사리함 모신 聖物”미술관 측 “사리만 반환”…韓정부 “전부 반환”에 무산“문정왕후 어보 환수 위해 美정계 실력자에 편지 전달”“알렌 후손 찾아다녀…15일 알렌 콜렉션 서울시 기증”“미국내 문화재 전수조사 위해 정부 차원 지원 필요”“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있는 라마탑 모양의 고려 사리함 반환이 아직도 해결 못한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걸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 뜁니다. 나이가 들고 교포라서 한국 유물을 보니 벅찬 감정도 있겠지만 티베트 양식의 불탑에 3명의 부처와 2명의 고승 사리를 한 자리에 안치한 사리탑은 세계적으로 유례 없이 특이합니다. 한국 불교에서는 성물(聖物) 중에 성물입니다. 꼭 찾아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하는 게 제 과제입니다.” 미국에서 우리 문화재 환수 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정광(75) 한국문화유산보존재단 이사장은 “‘고려 라마탑형 사리함’은 생각만해도 흥분된다”고 말한다. 32년째 미국에서 생활하는 그가 모처럼 귀국한 터에 지난 10일 만나 인터뷰를 했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돌아온 문정왕후 어보 환수와 알렌 콜렉션 환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제법 성공한 사업가로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법한 그에게 문화재 환수운동에 대해 들어봤다. 그는 1987년 사업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가 팔리새이즈 파크(Palisades Park)에 살고 있다. “이 사리함은 특이합니다. 큰 사리탑에 5개의 작은 사리탑이 들어있습니다. 다섯 명의 사리가 들어있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과거 부처님인 정광불과 연등불, 인도 왕자 출신으로 당나라를 거쳐 고려에서 포교활동을 한 지공선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시를 남긴 나옹선사의 사리지요. 한국 불교의 법맥입니다. 큰 사리함이 높이 22.5cm로 금은제입니다. 이 미술관은 한국관 한 가운데 전시하고 있지요. 가서 보면 가슴이 뛰고 벌렁거리지만 한편으론 약 오릅니다.”이 라마탑형 고려 사리함은 일본인이 개성의 화장사 또는 양주의 회암사에서 불법으로 도굴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턴미술관은 이를 1939년 일본인으로부터 매입했다. 두 절은 모두 고려시대의 고승 지공선사(?~1363)와 나옹선사(1320~1376)가 주석한 곳이다. 고려 왕실과 관련있는 화장사는 비무장지대(DMZ)에 있어 지금은 폐허가 됐고, 양주 회암사에는 지공선사와 나옹선사, 무학대사(1327~1405)의 부도탑이 같이 있다. 조선 건국에 많은 역할을 한 무학대사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처님과 지공·나옹 선사로 이어지는 불교 법통을 무학대사가 자신이 이어받았다는 증표로서 부도탑을 한 자리에 모은 것으로 보인다. - 문화재 환수 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2008년쯤 뉴욕주 한국불교신도회장을 지내고 있을 때였지요. 그때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문화재 관계로 뉴욕을 방문했는데 그때 만나서 이야기하고, 미국에서 유랑하는 우리 문화재를 보고 충격을 받았지요. 당시 조계종 중앙신도회 사무총장으로 왔던 이상근씨(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를 만났지요. 7명이 왔는데 용비어천가 2권을 소장한 컬럼비아대 도서관과 고려 사리함을 갖고 있는 보스턴미술관을 안내하면서 우리 문화재가 처한 현실을 보게 됐습니다. 환수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과 미국에서 하던 수출, 수입 비즈니스도 다 닫고 난 다음이니깐 그렇게 바쁘지도 않았고. - 라마탑형 사리함, 그동안의 환수 추진 과정을 설명하면.☞ 이것에 대해 보스턴미술관이 “사리는 한국에 반환하겠다. 그리고 사리함은 한국에 6개월 또는 상당기간 대여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대여 기간에 한국이 똑같은 모형을 만들고나서 돌려달라는 뜻이었지요. 한국 정부의 승인과 보증이 필요하다고 해서 이런 메시지를 문화재청에 전달하니 당시 이건무 청장이 안된다고 잘라버렸습니다. “사리함 전체를 반환해야지 일부 반환은 안된다”는 것이 이건무 청장의 논지였지요. 음미해 볼 대목은 있지만 해외 유물 가운데 일부만 반환된 사례들도 많습니다. 그 후 미술관 측은 한국 정부가 반대했으니 시민단체는 반환 요청을 할 권리가 없다는 허망한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해((遺骸)’인 사리도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계속 반환요청을 하며, 이를 위해 불법 유출을 입증할 사료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선 미술관을 상대로 소송을 하자고 하지만 불법으로 취득했다는 입증 자료가 없어서 저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선 소송 비용도 만만찮고. “큰 박물관에서 장물아비처럼 절도품을 보관해서야 되겠나”며 여론의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사리함이 어떻게 보스턴까지 갔을까.☞ 이게 화장사 것인지, 회암사 것인지는 학계에서 밝혀야 할 사안입니다. 보스턴미술관 토미타 고지로 보고서를 보면 일본인이 이 두 절에서 불법 도굴한 것들을 보스턴미술관이 1939년 매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는 일본의 조선 골동품 판매회사인 야마나카 상회가 보스턴, 파리 등에 지점을 내고 우리 공예품을 대량으로 팔아치우던 시기죠. 5명의 작은 사리함 가운데 3명은 실존 인물이어서 사리가 들어있고, 정광불과 연등불 사리함에는 사리 대신 구슬이 들어 있었습니다. 사실, 사리는 시신의 일부 내지 인체의 연장으로서 국제법상 매매가 금지돼 있다는 것을 보스턴미술관 측에 계속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 그러면 지난해 문정왕후 어보는 어떻게 환수됐나.☞ 이 때문에 저는 뉴욕에서 어보를 소장한 LA 카운티 박물관(LACMA·라크마)까지 몇차례 왔다갔다 했습니다. 매릴랜드에 있는 미국 국립아카이브(NARA)도 수차례 가서 마이크로필름을 뒤지며 기초작업을 했지요. 제가 사는 곳인 뉴저지주 상원의원이자 친한파 외교분과위원장인 로버트 메넨데스 의원에게 국토안보부 장관에게 전달해달라며 반환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주자, 그는 편지를 4통이나 더 썼더라구요. LA 상원의원 2명, 국토안전부 장관, 존 케리 당시 국무장관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미국 정계 실력자로 상원 외교분과위원장인 그의 편지가 주효했다고 믿습니다. 민간 차원의 운동을 넘어 미국 조야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지요.이 건은 혜문스님이 2009년 뉴욕공립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아낸 비밀문서 ‘아델리아 홀 레코드’를 열어보면서 시작됐습니다. 6·25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수복한 미 해병대 1시단 병사들이 요충지인 중앙청·경복궁·방송국 등에 대해 경계근무를 서면서 종묘에서 조선왕실 어보 47개를 호주머니에 넣어 가져갔고, 당시 양유찬(1897~1975) 주미 한국대사가 미국 국무부에 분실신고를 한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거죠. 이것을 라크마가 소장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보 옆에 쓰인 ‘6실 대왕대비(六室 大王大妃)’가 종묘 6실(중종의 방)에서 나온 것을 입증한 것이지요. 미국 병사의 절도품이란 것인데, 우리 정부가 되찾기 위한 노력으로 양유찬 대사가 볼티모어 선과의 인터뷰기사 1953년 11월 17일자에 실렸던거죠. 그 기사를 40달러를 주고 샀습니다. 그리고 2016년까지 환수운동이 이었졌고, 도난품이라는 것이 입증되니 미국이 돌려준 거죠. - 오바마 대통령도 국새와 어보 등 9가지 문화재를 돌려줬다.☞ 미국에서 2008년부터 민간 차원의 문화재환수운동이 시작됐고, 문정왕후 어보 사진과 환수 캠페인이 현지 신문에 조그맣게 실렸습니다. 미국 정부가 우리 캠페인을 눈여겨 보던 차에 한 미국인이 “우리집에 어보처럼 생긴 것이 있다”고 신고했고, 그게 다시 보도되니 “옆집에도 보니 그런 게 있더라”는 제보도 나왔습니다. 이런 것들을 미국의 국토안보부가 압수해 보관하고 있다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4년 4월 한국을 방문할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통해 반환한 것이지요. 미국은 불법 문화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숨기는 대신 반환을 하지요. 큰 결정입니다.- 알렌 콜렉션 반환에도 큰 역할을 했다.☞ 외교관과 선교사 등을 지냈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의 후손을 찾아낸 거지요. 그가 고종의 주치의를 지냈던 만큼 좋은 문화재를 많이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알렌 후손을 찾아보자고 결심했지만 막연했습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10여년 전 그의 후손을 초청했다는 짧은 기사 한줄을 단서로 더듬어갔지요. 초청자를 찾아보니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의료활동을 하는 허정 박사였습니다. 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해서 허정 박사와 통화에 성공했고, 그분이 10여년째 해마다 한번씩 후손들을 초청해 만찬을 베푸시더라고요. ‘그 만찬에 저도 참석해도 되느냐’고 하니 오라고 해서 비행기 2시간 타고가서 후손들과 안면을 텄지요. 후손들을 설득해 매입도 했지요. 알렌과 그 후손들이 어렵게 사는 바람에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등에 많이 팔아버렸던 거죠. 왕권의 상징인 부채인 ‘화조도접선’과 사진, 편지, 일기 등 30여점을 가져와 15일 서울시청서 기증식을 갖는다. 사실 알렌 증소녀보다는 그 사돈이 더 많이, 더 좋은 문화재를 갖고 있는 것을 파악했는데, 기증하지 않고 팔려고 해서…. 언젠가는 돌아와야 할 문화재입니다. - 문화재청은 미국 124곳에 우리 문화재 4만 4000여점이 있다고 기록했다.☞ 허허, 아무리 적게 잡아도 그 두 배는 될 것입니다. 정부가 미국에서 현장조사한 곳은 6곳 뿐입니다.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 소장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러가면서 박물관 사서에게 물어보니 한국 고서 1만 2000여권 있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문화재청은 여기에 5000권이 있다고 기록했지만 배가 넘지요. 브루클린박물관의 도록을 문화재청이 지원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박물관 창고에 들어갈 흔치 않는 기회가 생겨서 가보니 그 안에는 우리 문화재가 수두룩했고, 투구와 갑옷도 있었습니다. 발톱이 3개인 투구로 미루어 왕족의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도록에는 없는 것들이었죠. 박물관 측도 아직 정리조차 못하고 있는데, 그런 것이 무척 많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개인이 소장한 것은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지요.- 우리 문화재의 소재 파악과 유출 경로 조사가 시급하다.☞ 먼저 이런 것을 제안합니다. 미국 공영방송 PBS가 하는 ‘앤틱 로드쇼’처럼 우리 교민을 상대로 하는 문화재나 유물의 가치에 대해 설명해주고 감정 가격도 평가해 주는 겁니다. 교민들이 미국에 이민오면서 가져온 가보나 유물을 조사해 파악하는 것이지요. 고위 관리를 지냈던 가문에는 이런 게 많을 겁니다. 교민들에게 한국 문화재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해 주고, 대학이나 박물관 등에서 본 한국 문화재를 제보하게 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겁니다. 그 다음엔 미국의 큰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를 전수조사하는 것입니다. 큰 프로젝트이니만큼 수년에 걸쳐 정부 차원의 예산과 전문가 지원이 필요할 것입니다. 도록도 만들어고 해야 하니 우리 정부와 해당 박물관과의 교섭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버드대도서관이나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은 이런 제안에 구두로 “오케이”한 상태입니다. 그는 “부처님과 전생 부처님 둘, 두 명의 고승의 사리가 한 자리에 모여있는 것이 신기하지 않나요. 한국 불교 최고의 성물입니다”라며 “이 사리함을 들여와야 하는데…”라고 되뇌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청춘의 해방구 신촌… 그러나 ‘1964 서울’은 권력이었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청춘의 해방구 신촌… 그러나 ‘1964 서울’은 권력이었다

    ‘감수성의 혁명가’ 그의 소설 쫓아 1960~70년대 소외된 사람들의 삶 1980~90년대 대학 문화 흔적 더듬어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7회 서울의 문학3(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편이 지난 3일 서대문구 창천동·대현동·신촌동·대신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1960~70년대 도시화와 산업화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좌절한 소시민의 삶을 ‘감수성의 혁명가’ 김승옥의 소설을 통해 공유했다. 또 1980~90년대 젊음과 낭만이 작열하던 대학문화의 발상지에서 흘러간 청춘을 만났다. 절정을 향해 치닫는 가을 정취가 가슴을 적셨다. 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2호선 신촌역 3번 출구에 집결한 투어단은 연세대 정문까지 이어지는 연세로 초입 홍익문고에서 투어를 시작했다.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달려라 피아노’를 거쳐, 서대문구에서 조성한 ‘문학의 거리’를 걸었다. 보도 위에 새겨진 ‘영원과 순간의 동시적 구현’이라는 김승옥의 자필 글귀와 손도장을 확인했다. 담쟁이덩굴을 건축소재로 지은 듯 운치 있는 대현교회를 거쳐 ‘청년문화예술인의 아지트’ 신촌문화발전소 옥상에 올라 신촌을 내려다봤다. 원두커피의 전설 미네르바에서 진한 커피 향기에 취했다. 그라피티 명소로 재탄생한 토끼굴을 통과, 경의선 신촌역에 도착하자 백마역으로 추억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가을 소식이 진동하는 이화여대 대강당과 진선미관이 대미를 장식했다.●동전 던지기로 멀어진 ‘조선 도읍’ 해설을 맡은 한세화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마치 ‘1964년의 서울’로 되돌아간 듯 김승옥의 작품과 삶을 구수한 입담으로 풀었다. 투어에 동행한 김동률 서강대 교수는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더없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감미로운 행사였다”면서 “멋진 날씨에다 옛 추억에 ‘고개 숙이게 해 준’ 주최 측에 깊이 감사드린다”는 감성편지를 참가자 일동에게 띄웠다.신촌은 조선왕조의 유력한 도읍지 후보였다.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정하고 그 아래 경복궁을 지으면서 결과적으로 신촌은 사대문 밖으로 밀려났다. 만약 태종의 최측근 권신이자 풍수에 능했던 하륜의 주장대로 무악(안산)을 주산으로 정했다면 지금의 연세대와 이화여대에 경복궁이 들어섰을 것이다. 하륜이 신촌을 도읍지로 강력 천거한 이유는 한강과 연결되는 모래내(사천)와 창천(봉원천)을 이용한 수운의 편리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촌은 한양도성에 비해 터가 좁았고, 도성을 둘러싼 산세와 땅의 기복이 불규칙하다는 흠결이 있었다. 태종이 종묘에 나가 동전을 던진 결과 백악산은 ‘2길1흉’, 무악은 ‘1길2흉’이 나왔다. 동전던지기에서 무악은 패했다. 비록 도읍이 되진 못했지만 신촌은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세종은 무악 아래 연희궁을 설치했고,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를 뒀다. 세조는 뽕나무가 우거진 이곳을 서잠실이라고 불렀고, 연산군은 연희궁에서 질펀한 연희를 즐겼다. 조선 초기 연희궁을 서이궁, 한양대 앞 살곶이 다리 주변을 남이궁이라고 부를 정도로 행차가 잦았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의 수경원도 이곳에 있었다. 신촌은 한양에서 서부지역으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남대문과 서소문, 서대문에서 서부로 오가는 도로는 모두 아현(애오개)과 대현을 통과한 뒤 신촌을 결절점으로 서강, 양화진 등으로 흩어졌다. 이러한 신촌의 입지적 특성은 조선 말 양화진이 개항장 제물포와 연결된 서울의 서쪽 관문역할을 할 때 극대화됐고,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장소성이 이어졌다.●일제강점기 경의선과 함께 변화 시작 신촌 대학촌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일제강점기 경의선의 기적(汽笛)과 함께 변화의 고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한성부 연희면으로 서울의 성 밖 관할 지역이던 신촌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기 고양군으로 편입되면서 도시화에서 잠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대륙진출을 위한 병참기지 용산역을 기점으로 개설했던 경의선 노선을 신촌 중심으로 바꿀 필요성이 제기됐다. 경성역(서울역)에서 가까운 신촌이 경성의 서쪽 기점으로 재부상한 것이다. 1930년 경성역~서소문~아현~신촌~연희~서강~공덕~용산을 잇는 교외순환선 개통은 신촌의 개화를 불러왔다. 이어 용산~당인리선상에 서강역과 연희간이역이 생기면서 신촌을 지나는 화물과 승객 수송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연세대와 이화여대 이전이 신촌을 경유지에서 주거지로 변화시켰다. 1920년대까지 신촌로터리 일대에는 민가 20호 정도가 흩어진 고요한 마을이었다. 1917년 지도에 따르면 봉원사 인근에 마을이 형성돼 있을 뿐 배추, 무, 호박을 재배하는 밭농사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연세대 설립자 언더우드는 평양에 대학을 세우자는 선교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관철시켰다. 무엇보다 세브란스의학교와의 통합을 통한 명실상부한 종합대학 설립을 동료 선교사들에게 호소하고 설득했다. 1917년 미국에서 타자기회사를 경영한 형에게서 받은 기부금 5만 2000달러로 수경원 부지 19만평을 동양척식회사로부터 구입했다. 1918년 연희전문학교의 신촌시대가 개막됐다. 정동에 있던 이화여자전문학교도 초대 교장 아펜젤러를 중심으로 1923년 신촌에 4200평의 땅을 매입한 뒤 모금활동을 통해 미국의 자선가들로부터 88만 2000원의 건축기금을 모았다. 1935년 본관과 음악관, 체육관을 건립하면서 이전이 성사됐다. 이화여전의 신촌 이전에는 교수진과 강의 교류 등 연희전문과의 협력이 힘이 됐다. 두 근대 사학의 신촌 이전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였다. 1918년 연희전문의 전교생은 94명이었고, 1934년 이화여전 학생도 218명에 불과했다. 학생들은 변두리 신촌에서 경성까지 통학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920년 연희전문 학생들의 동맹휴업 결의 세 가지 이유 중 ‘학교의 위치가 멀어서 통학에 불편하고 공부에 지장이 많으니 기숙사를 설치해 달라’는 내용도 포함됐다.●소설 속 병원은 인간성 상실의 세트장 신촌 일대는 대학교 캠퍼스가 전체 면적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대학의 비중이 큰 지역이다.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면적으로 보나 인지도 측면에서 신촌의 대표적 경관이다. 서강대와 홍익대, 추계예술대, 경기대, 명지대 등도 뒤를 받치고 있다. 대학상권을 형성한 최초의 지역이다. 지금도 홍대와 신촌은 서울 최대의 대학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청춘의 해방구’ 신촌문화에 대한 연구와 정의는 현재진행형이다. 원두커피와 언더그라운드 음악, 저항문화운동이 시도됐고 음악다방과 록카페, 라이브 카페와 소극장, 서점과 음반가게 등 신촌을 풍미한 문화현상이 대학문화인지, 청년문화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신촌은 서적외판원 사내의 아내가 급성 뇌막염으로 입원했다가 숨진 세브란스병원이 있는 비정한 공간으로 그려졌다. 소설 속 사내는 세브란스병원 울타리 곁에서 한없이 서성였고, 아내의 시체를 해부용으로 팔아서 받은 4000원을 술값으로 쓰고, 나머지는 불태운 뒤 자살했다. 김승옥의 소설 속 서울은 우월한 지위를 드러내기 위한 레토릭이었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은 인간성의 상실과 돈의 굴레를 보여주는 세트장치였다. 1964년 당시의 서울은 하나의 권력이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 ‘왕건 스승’ 희랑대사 조각상 1100년 만에 해인사 밖 나들이

    ‘왕건 스승’ 희랑대사 조각상 1100년 만에 해인사 밖 나들이

    고려 태조 왕건(877~943)의 스승이자 화엄종의 고승인 희랑대사(생몰년 미상) 목조 조각상이 1100여년 만에 해인사 문을 나선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2월 4일 개막하는 고려 건국 1100주년 특별전 ‘대고려 918·2018, 그 찬란한 도전’에 선보일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과 대장경판 이운(移運·불화나 불구 등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을 부처에게 알리는 고불식(告佛式)을 오는 9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연다.93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희랑대사좌상은 해인사 조사(祖師)였던 희랑대사의 진영상(眞影像) 조각이다. 앞쪽은 건칠(乾漆·헝겊을 여러 겹 바르고 칠을 거듭하는 방식) 기법, 뒤쪽은 나무로 제작했다. 체구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크고, 자비로운 눈매와 잔잔한 입가에 번지는 미소 등 인자한 모습이 잘 드러났다. 9일 오전 해인사에서 진행되는 고불식에서는 법보전에서 일주문까지 이운 행렬이 재현된다. 10일에는 고려의 실질적인 종묘인 경기 연천 숭의전지(사적 제223호)에서 왕건의 초상화와 희랑대사좌상 사제의 만남을 축하하는 문화 행사가 열린다. 이날 오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이운행사가 열린다. 한편 정부는 ‘대고려전’을 앞두고 북한이 소장한 태조 왕건상과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고려 금속활자를 대여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태조 왕건상이 2006년 이후 12년 만에 한국을 찾으면 처음으로 희랑대사좌상과의 만남이 성사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태조 왕건 스승 희랑대사좌상, 1100여년 만에 해인사 바깥 나들이 나선다

    태조 왕건 스승 희랑대사좌상, 1100여년 만에 해인사 바깥 나들이 나선다

    고려 태조 왕건(877~943)의 스승이자 화엄종의 고승인 희랑대사의 목조 조각상이 1100여년 만에 해인사 문을 나선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2월 4일 개막하는 고려 건국 1100주년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에서 선보일 경남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과 대장경판 이운(移� ㅊ蘆?� 불구 등을 다른 장소로 옮길 때 하는 의식)을 부처에게 알리는 고불식(告佛式)을 9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연다. 93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희랑대사좌상은 해인사 조사(祖師)였던 희랑대사의 초상 조각인 진영상(眞影像)이다. 이 불상은 앞쪽은 건칠(乾漆·여러 겹 삼베를 바르고 옻칠하는 방식) 기법으로 만들었고 뒤쪽은 나무로 제작했다. 체구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으로 자비로운 눈매와 잔잔한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노스님의 인자한 모습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고불식에서는 해인사 주지인 향적 스님이 고불문을 낭독한 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경판을 전달한 후 법보전에서 일주문까지 이운 행렬을 재현한다. 이어 대장경과 희랑대사좌상을 차량에 싣고 경기도 연천 숭의전지(사적 제223호)로 이동한다. 숭의전은 고려 왕조 4왕인 태조·현종·문종·원종과 고려의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는 고려의 실질적인 종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0일에는 숭의전지에서 왕건의 초상화와 희랑대사좌상를 두고 사제의 만남을 축하하는 동시에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의미의 문화 행사를 진행한다. 이날 오후에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정문에서부터 취타대 및 전통의장대의 안내를 받으며 대장경과 희랑대사좌상을 옮기는 의식을 연다. 신달자 시인의 헌시 낭독과 특별 공연이 마련되고, 박물관 앞 거울못에서는 소원등을 띄우는 행사도 펼쳐진다. 내년 3월 3일까지 이어지는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에서는 청자병(국보 제94호), 고려 불화를 비롯해 국내외 주요 문화재 390점이 전시된다. 정부는 북한이 소장한 태조 왕건상과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고려 금속활자를 대여하기 위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태조 왕건상이 2006년 이후 12년 만에 한국을 찾으면 처음으로 희랑대사좌상과의 만남이 성사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선농단 향나무는 기억한다 풍년 기원하는 왕의 손길을 빼앗긴 봄 암울했던 세월을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선농단 향나무는 기억한다 풍년 기원하는 왕의 손길을 빼앗긴 봄 암울했던 세월을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6회 청량리(약령시의 기억) 편이 지난 27일 동대문구 휘경동·전농동·청량리동·제기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을이 농익은 서울시립대에서 낙엽이 흩날리는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했다. 또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청량리 수산시장, 동부청과시장, 청량리 재래시장, 청과물도매시장, 서울약령시(경동시장) 등 끝도 없이 이어지는 5개 개별시장이 뭉친 슈퍼시장의 위용을 체감했다. 때마침 26일부터 이날까지 ‘제24회 서울약령시 서울한방문화축제’ 기간이어서 흥겨운 한방축제 분위기에 젖었고, 한방박물관 무료관람 혜택도 누렸다.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1호선 회기역에 집결한 투어단은 의병장 허위 장군의 호를 딴 왕산로를 따라 내려오다 110년 전통의 시조사를 보고 동광대장간을 들렀다. 떡 파는 가게가 즐비했던 떡전교를 지나 서울시립대에서 경농관과 자작마루를 둘러봤다. 사도세자의 능이 있던 배봉산은 건물과 아파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청량리 육교 위에서 수십 갈래로 쪼개지는 철길의 행렬을 지켜본 뒤 청량리역~금강헤어라인~청량리청과물시장~서울약령시~제기동성당의 순서로 2시간 20분간의 바쁜 일정을 마무리했다. 해설을 맡은 김은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철저한 사전답사와 준비를 통해 만족스러운 투어를 선사했다. 서울시립대는 자작마루의 문을 열어줬고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동광대장간, 금강헤어라인의 장인으로부터 자부심 어린 뒷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같은 아리아가 흐른 10월의 마지막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였다.청량리는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인창방 청량리계에 속하는 고요한 성 밖 동네였다. 1911년 경기도 경성부 인창면 청량리,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청량리를 거쳐 1946년에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으로 자리잡았다. 서울과 경기도를 들락날락한 동쪽 교외(동교)였다. 겸재 정선이 남긴 ‘동문조도’(東門祖道)라는 진경산수화에 300년 전 동대문 밖 풍경이 등장하는데 낙산과 동망봉, 안암, 용마산 아래 동묘와 청량리 일대가 펼쳐져 있다. 조도란 길 떠나는 사람을 송별한다는 뜻이니 동대문 밖 청량리가 서울을 벗어난 첫 지점이라는 장소성이 내재돼 있다. 그러나 용두동·제기동·전농동 등 이른바 청량리 일대는 왕이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적전)을 두고 제사를 모신 점에서 여타 교외 지역과는 격을 달리했다. 적전은 한성과 개성 2곳에 뒀는데 한성의 적전을 동적전, 개성의 적전을 서적전이라고 지칭했다. 김정호의 경조오부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지도에 동적전을 안암천(성북천)과 정릉천 사이에 표시하고 있고 동적전의 관리청인 필분각이 있던 텃골과 곡식을 저장하던 창고마을인 창마을(倉村)이 오늘의 서울시립대 앞 전농로에 있었다. 선농단의 친농의례는 종묘제와 사직제, 환구제의 대사(大祀)에 이어 중사(中祀)의 위상을 가졌다. 조선 성종 6년(1475)에 적전의례가 처음 실행된 뒤 연산군, 중종, 명종, 선조, 광해군 때 1회씩 거행됐으며 이후 영조와 고종, 순종 때 자주 거행됐다. 선농대제가 끝난 뒤 소를 잡아서 참가자들에게 나눠 준 게 설렁탕(설롱탕)의 유래가 됐다. 청량리(淸凉里)는 신라 고찰 청량사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청량이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청량산에서 따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각산(북한산)에 청량사가 있다고 적었다. 또 고려 예종 12년(1117) 왕이 남경(서울)에 행차하면서 청량사에 머문 사실도 전한다. 세종 5년(1423) “태조의 공신은 청량사에, 태종의 공신은 승가사에서 주상의 탄신일에 장수를 기원하자는 재를 열자”는 세종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 청량사의 격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청량사는 1897년 명성황후가 홍릉에 들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선농단 일대는 참담한 변화를 겪는다. 고종은 영조 이후 100년 넘게 거행하지 않던 친경례를 부흥시켰고, 순종은 1909년과 1910년 두 차례 친경례를 행했지만 1908년 개정된 제사제도 칙령에 의해 선농단의 위패는 사직단으로 옮긴 뒤여서 사실상 폐지된 것과 다름없었다. 일제는 선농단 터에 느닷없이 잠업기술 및 기술자를 양성하는 잠업시험소의 전신 원잠종제조소를 설치했다. 또 1934년 경성여자사범학교 부지로 제공, 기숙사를 짓는 과정에서 원형을 잃었다. 일제강점기 선농단은 청량대(淸凉臺)라는 공원으로 훼손됐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책동이었다. 지금도 청량대라고 새겨진 빗돌 하나가 누워 있다. 광복 후 주민들이 넘어뜨려 울분을 달랬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선농단은 1950~60년대 서울사대부고나 서울사범대생들에게 개나리와 벚나무, 측백나무가 우거진 뒷동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선농단 터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왕이 농사를 지은 장소 정도로 알았다. 휴식과 축제 장소로 사용했다. 대학신문 1961년 4월 27일자 ‘청량대 새 단장’이라는 기사에서 “왕이 백성들의 농사하는 모습을 살피려고 올라서곤 했던 청량대 비석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도록 그 위치를 옮긴다. 가장 큰 나무인 향나무에 중점을 두고 주위의 다른 나무들은 제거 혹은 이식시킨다”고 적혀 있다. 선농단 터는 제기동에 속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제기동과 용두동 경계에 걸쳐 있었다. 이후 116개의 필지로 분할됐다. 우뚝 솟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선농단의 존재를 말없이 증언하고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240호로 지정된 높이 10m, 줄기의 둘레 2m에 이르는 600년 묵은 이 노거수는 다른 향나무처럼 휘어지지 않고 위로 곧게 자란 게 특징이다. 청량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청량리역, 588 집창촌, 서울약령시로 이름을 바꾼 경동시장 등이다. 주민의 삶이 아니라 외부인의 시각이다. 청량리의 두드러진 정체성은 철도이다. 청량리역은 1950~60년대 철도교통의 발달에 따른 도시적 확장 과정의 산물이다. 근대교통기관인 전차가 1899년 처음으로 홍릉까지 왕래했고, 수송의 중심이 전차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1968년 70여년간의 전차운행이 중단될 때까지 전차노선의 중심이었다. 1911년 경원선 철도가 일부 개통됐고 1939년에는 경춘선이 성동역(제기역)을 기점으로 운행된 데 이어 중앙선까지 연결되면서 청량리는 물자 유통과 여객 수송의 요충지이자 철도 중심지로 명맥을 이었다. 1974년 개통된 지하철 1호선이 근대 전차의 첫 목적지였던 청량리 궤도를 여전히 달리고 있다. 관사주택과 부흥주택, 도시 한옥, 시민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도심주변부 근대도시 주거지의 역할을 해냈다.서울약령시는 1000여 한의약 관련 전문 업소가 모여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한약재 전문시장으로 전국 한의약 약재의 70%가 거래되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의 문학3(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일시 : 11월 3일(토) 오전 10시~12시 ●집결장소 : 지하철 2호선 신촌역 3번 출구 앞 ●신청·안내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서해해경청, 어장환경개선사업 보조금 편취 사범 6명 검거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은 불법 수산물 유통업자와 관리감독을 부실하게 한 한국어촌어항협회 감독관 등 6명을 보조금관리에관한법률위반 및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검거했다고 5일 밝혔다. 해경에 따르면 수산물 유통업자 3명은 2015년부터 3년간 영광군 유류피해지역 국고보조금 지원사업인 ‘종묘발생장 환경개선사업’과 관련, 수산물 채취확인서를 위조해 공유수면에서 불법 채취한 백합을 해상에 살포했다. 이들은 그 양을 부풀려 국고보조금 7000만원을 부당하게 편취한 혐의다. 한국어촌어항협회 감독관 3명은 감독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추가로 7000만원을 지원하게 하는 등 국고보조금 총 1억 4000만원 상당을 부당하게 지급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살포된 백합은 조위망(유실 방지망) 설치와 관리 등이 되지 않아 대부분 해상으로 유실됐다. 이때문에 당초 사업 목적인 어업생산 기반 구축과 어업인 소득증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서해청 관계자는 “국민의 혈세로 조성된 해양관련 국고보조금에 대한 비리를 근절하는데 수사력을 집중해 지속적으로 단속해 나갈 계획이다”고 밝혔다. 목포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명당(明堂), 임금이 태어나다 - 서울 운현궁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명당(明堂), 임금이 태어나다 - 서울 운현궁

    “이제 이 터는 내가 가져야겠소!” 최근에 개봉한 영화 ‘명당’의 한 장면이다. 왕족이었지만 파락호(破落戶) 행세로 목숨을 근근히 부지하던 흥선(지성 분)에게 명당이란 아들이 임금이 되는 땅이다. 결국 차남 재황(載晃)은 조선의 제 26대 마지막 왕이 된다. 고종(高宗)이다. 1863년 흥선의 소원대로 12세 소년 재황이 왕위에 오른다. 10년간 흥선은 대원군의 이름으로 섭정을 한다. 며느리 명성황후 민씨와의 권력 다툼 끝에 1873년 11월 흥선대원군은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된다. 이후 고종은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기 전까지 무려 44년 동안 왕위를 지킨다. 또한 고종은 왕위를 내어주고도 12년을 상왕으로 살았으니 56년 동안이나 왕의 이름을 달았던 조선 최장수 임금이기도 하였다. 고종이 태어난 집터, 운현궁(雲峴宮)이다. 창덕궁 입구 길 건너편, 그러니까 지금은 낙원상가 입구 쪽으로 빠지는 왼편 좁다란 길 언저리에 있는 솟을대문이 바로 고종의 생가(生家)이자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인 운현궁(雲峴宮)의 입구다. 지금은 사적 제 257호로 지정된 곳으로 고종이 즉위하면서 왕의 잠저라 하여 ‘궁(宮)’의 명칭을 받게 된 집이다. 운현(雲峴)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러하다. 원래 흥선대원군의 사저 앞 고갯마루에 조선시대 천문과 기상 관측을 하던 서운관(書雲觀)이 있었다. 바로 서운관의 ‘운(雲)’과 고개를 뜻하는 ‘현(峴)’이 합쳐져 운현궁(雲峴宮)이라는 집이름이 나왔다. 원래 이 집 주변이 천문을 관측하는 상서로운 기운이 있다하여 양반가에서도 명당, 즉 ‘밝은 집터’라 하여 탐을 내던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1860년대에는 운현궁의 위세가 하늘을 서너 번 찔러도 남을 만큼 대단하였으니, 조선 팔도 모든 관직이 흥선대원군이 머무는 운현궁에서 결정이 되었다. 오죽하였으면 흥선대원군만이 창덕궁으로 드나들 수 있는 전용문, 공근문(恭覲門)이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또한 그 때의 운현궁 규모도 지금 크기의 10배는 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담장의 길이만 해도 수 리에 이르렀다고 하니 과히 또 다른 궁궐 규모였다. 지금은 그때의 영광을 운현궁에서 찾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도심 한 가운데서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제격인 아담한 규모로 집터는 남아있다. 현재 이곳에는 1864년에 지은 노락당과 노안당이 그대로 있다. 특히 노락당은 1866년 명성황후가 고종과 혼례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여 지금도 웨딩 촬영 장소로 종종 사용된다. 1870년에서는 이로당이 건립되었고, 이후 아재당과 사당이 들어섰다. 한때 조선의 모든 기운이 다 모여 들고 사라졌던 집터인 운현궁(雲峴宮)에도 어김없이 가을바람은 불어온다. 올해도. <운현궁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조선 후기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낙원 상가 주변을 다니다 쉴 곳을 찾는다면. 덕성여대의 양관 건물도 운현궁의 일부였다. 2. 누구와 함께? - 누구라도 상관없이. 서울 양반 살림집을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좋다. 3. 가는 방법은? -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가 가장 편하다. 4. 감탄하는 점은? - 원형 그대로 남은 조선 후기 양반집의 원형.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이름에 비하여 관람객들은 많지 않다. 6. 꼭 봐야할 전각은? - 명성황후와 고종이 혼례를 올린 노락당 7. 관람 예상 소요시간은? - 여유를 가지고 돌아보아도 20분.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unhyeongung.or.kr/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덕수궁, 경복궁, 창경궁, 종묘, 인사동, 낙원상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이야기를 잘 알고 간다면 유익한 발걸음이 될 수 있다. 서울 내에서 이 정도 규모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궁(宮)은 많지 않다. 추천!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가을 축제 즐기러 충북 오셔유”

    “가을 축제 즐기러 충북 오셔유”

    10월은 축제의 계절이다. 충북에서도 10개가 넘는 지역축제가 열린다. 나들이하기 좋은 계절에 성격이 다른 축제가 집중되다보니 골라서 즐기는 재미가 있다. 청주시는 다음달 1일부터 21일간 청주예술의 전당 일원에서 청주직지코리아국제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직지 숲으로의 산책’이란 주제로 진행되는 이 행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의 가치를 세계인과 공유하는 국제행사다. 다양한 전시와 공연, 체험 등이 가득하다. 그동안 몰랐던 직지의 내면적 가치를 알고 싶다면 가볼만하다.증평군은 다음달 4일부터 4일간 증평읍 송산리 보강천체육공원 일원에서 증평인삼골축제를 연다. 하이라이트는 6일에 펼쳐지는 홍삼포크삼겹살대잔치다. 방문객들은 기네스북에 최장 길이 구이틀로 등재된 204m 구이틀에 홍삼포크를 구워먹는 이색체험을 할수 있다. 홍삼사료를 먹인 증평의 특산품인 홍삼포크를 홍보하기위해 약 1000kg의 삼겹살이 무료시식용으로 제공된다. 증평 인삼골 어린이사생대회, 백곡 김득신 백일장, 인삼골건강가요무대, 인삼골합창제, 인삼골장사씨름대회 등도 진행된다. 난계 박연 선생의 고향인 영동군에서는 다음달 11일부터 4일간 영동천 일원에서 영동난계국악축제가 풍악을 울린다. 국악의 신명과 흥이 살아있는 오감만족축제다. 난계국악단의 흥겨운 국악 공연, 다양한 퓨전 국악 연주, 조선시대 어가 행렬, 종묘제례악 시연 등 현대와 전통의 문화예술이 어우러진다. 또 난계 거리 퍼레이드와 어가행렬, 국악·문화공연, 국악기 제작·연주 체험, 새마을야시장과 풍물야시장 등도 즐길수 있다. 포도의 고장으로도 유명한 영동군에서는 같은기간 ‘대한민국와인축제’가 열려 한번에 2가지 축제를 체험할수 있다. 청원생명축제는 다음달 5일부터 10일간, 생거진천 문화축제는 다음달 5일부터 3일간, 음성인삼축제는 다음달 10일부터 5일간, 단양온달문화축제는 다음달 19일부터 3일간 각각 진행된다. 제천의병제는 다음달 19일부터 2일간, 보은대추축제는 다음달 12일부터 10일간 열린다. 보은속리축전은 다음달 26일부터 3일간, 충주 앙성탄산온천휴양축제는 다음달 27일부터 3일간 펼쳐진다. 글 사진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수목원은 현대인에 치유죠···시간이 갈수록 가치 빛나”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수목원은 현대인에 치유죠···시간이 갈수록 가치 빛나”

    ‘월급쟁이 출신’ 성만기 원장이 말하는 수목원 40년“오늘 우리 한국 사람은 너무 바쁘게 급하게 삽니다. 오늘 일을 하면 내일 결과가 바로 나오기를 바랍니다. 3년이나 5년 계획을 ‘장기 계획’이라고 우깁니다. 조급증 환자같이 살다 보니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도 모른 채 살다가 죽습니다. 하지만 나무를 키우니, 수목원을 하다 보니 시간의 의미를 체험합니다. 수목원은 최소 100년, 어쩌면 한 300년쯤 지나야 제대로 된 멋과 품격을 풍깁니다.” 수목원 가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 재벌도 기업가도 아닌 평범한 월급쟁이 출신이 수목원을 멋있게 가꾸고 산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23일 경남 고성군 동해면에 있는 소담수목원으로 차를 몰았다. 국토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을 따라 향했지만 길가에 촘촘하게 선 전봇대와 얼기설기 걸린 전선이 눈에 거슬렸다. 수목원에 들어서 엔진을 끄자마자 성만기(73) 수목원장이 나왔다. 조성한 지 올해로 40년째인 이 수목원 앞에는 호수처럼 잔잔한 옥빛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이름 그대로 작고 아담했다. 그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숲을 걸었다.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나뭇잎은 여름 그대로였다. “저기 저 나무가 스트로보 잣나무입니다. 미국 코네티컷에서 이 나무를 보고 반했지. 나무 대신 씨앗을 가져와 심었는데 저렇게 자랐습니다. 한 40년 자랐을까, 대한민국에서 아마 유일할 겁니다. ‘이스턴 화이트’라고도 해” 설명을 듣고보니 경기도나 강원도에서 보던 잣나무보다는 흰색이 강했고, 가지들이 피라미드처럼 층을 이루며 자라고 있었다. “스트로보 잣나무가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만큼 우리 생물자원이 풍부하다는 겁니다. 저건, 로보참나무야. 독일에선 ‘할아버지가 로보참나무를 심으면 손자가 벤츠를 탄다’는 말이 있지. 그만큼 목재 가치가 높거든.”국내 유일한 잣나무, 국내 최대 참나무 보유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한 나무 앞에서 그가 걸음을 멈췄다. “이건 핀오크 참나무야. 국내에선 제일 클 겁니다. 손기정(1912~2002) 선생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하면서 받은 월계관이 사실은 이 핀오크 참나무 가지로 만든 거야. 손기정 선생을 기념해 서울 양정고등학교에도 저런 핀오크 참나무가 자라고 있지.” 이 나무 높이가 25m쯤 돼 보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뭇잎이 다른 참나무와는 달리 단풍나무처럼 들쭉날쭉 길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핀오크를 대왕참나무로 부른다며 그 유래를 설명했다. “1990년 중반 핀오크 참나무를 조달청에 우리말로 등재하기 위해 고민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국립수목원 조무연 박사와 의논했지요. 참나무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생각에 대왕 참나무로 명명했습니다. 목재로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가을 단풍도 정말 아름답지요.” “대왕 참나무 이름도 지어···생물자원 풍요”그는 미국 노스웨스턴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73년 대한항공에 공채로 입사했다. 승무직으로 4년가량 일하다 그만두고 나와 건축업과 자동차 딜러 등 개인 사업을 했다. 갑자기 불어닥친 불황으로 1년여 만에 모두 ‘까먹고’ 1979년 대한항공에 재입사했다. 대한항공 재입사 1호다. 수석 사무장 15년과 객실이사(현재의 상무)를 지낸 그의 비행시간은 약 3만 시간에 이른다. 지구를 300바퀴쯤 돌았다. 전 세계 곳곳의 좋다는 곳은 다 가봤다. 2000년 퇴직하고 수목원을 가꾸고 있다. 왜 수목원을 할까. “두 발을 땅에 딛지 않고 하늘에서 승무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만큼 깎아먹는 시간입니다.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 일하는 나의 시간, 나의 ‘우주’를 갖자는 열망이 강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시간, 사색의 시간이 많아지면서 외국의 유명 식물원과 정원을 찾았습니다. 캐나다의 부차드가든, 영국의 큐식물원, 호주의 닐슨파크 등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지요. 그러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거리(소피스트 로드)’에서 영감을 얻고 수목원을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철학자의 거리를 자양분 삼은 문인과 철학자가 많이 나면서 독일의 지적 수준을 높였지만, 하이델베르크보다 더 풍광이 좋은 제 고향 이곳은 궁색한 시골이었습니다. 이를 바꿔보고 싶었거든요.”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거리’서 영감···고향 바꾸고 싶어서“수목원을 하는 데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자란 그의 개인적 특성도 작용했다. “씨앗을 지배해야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 세계 곳곳에서 씨앗을 사 들였다. 소담수목원도 어린나무를 심는 게 아니라 씨앗을 발아시켜 성장시킨다. 수목원을 가꾸는데 시간도 훨씬 많이 걸린다. “요즘 길가 화단을 보면 꽃이 잘 핀 화초를 심는데 이건 1회용이예요. 1회용. 꽃이 시들면 파내 버리고 다른 화초로 갈아 끼우고···, 화초엔 인간의 이기심이랄까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도시의 욕망이 빚어낸 참사입니다.” 그의 비판이 신랄하다. “한번은 뉴욕 외곽의 종묘상에 갔는데 파산으로 ‘땡처리’를 하는 거예요. 평소 400달러 하던 씨앗을 40달러에 팔기에 무작정 종류대로 사들였지요. 한 1330여종이 됩니다. 국내엔 없는 희귀 종자들이 많이 있었지요. 종자를 사기는 했는데, 어떻게 발아시키는지 몰랐고, 당시엔 발아시킬 곳도 없어서 1976년 경기도 광릉임업시험장(현재 광릉수목원)에 그대로 기증했습니다. 당시 내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죠.” 지금도 국립수목원 종자표본실에는 ‘기증자 성만기’의 이름이 내걸려 있다. 외국 수종실을 만든 이로 기록돼 있다. 희귀종자 등 외국 씨앗 1330여종 국가기증 성 원장은 오솔길의 호젓함을 달래주는 새소리를 따라 걸으며 계속 설명해줬다. “이건,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에 평양 백화원초대소 앞에 심은 모감주나무”, “이건, 열매를 깨서 하천에 던지면 미꾸라지와 가재가 배를 뒤집고 뜬다는 때죽나무”, “이건, 밤에 잎이 오므라드는 자귀나무”, “이건, 6·25때 숲으로 피신한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준 돌배나무” 등등 숲 해설사처럼 들려줬다. “저기 보이는 저 참나무, 줄기에 검은빛이 도는 나무가 루브라참나무고, 그 옆에 저 잣나무는 변종이야. 학계에서 아직 이름을 붙여주지 못하고 있어요.”그의 수목원 프로젝트는 아들이 태어나던 1978년 시작됐다. “처음엔 고향 아버지의 밭뙈기 한쪽에 나무 씨앗을 뿌렸지요. ‘쓰잘데 없는 일한다’고 핀잔도 많이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대부터 살던 이곳 3만 5000평을 샀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어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외딴 오지여서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땅값이 말 그대로 ‘껌 값’이었다. “여기에 수목원 한다고 땅을 사니 가까운 사람들이 저보고 ‘돌았다’고 했습니다. 땅을 더 살 작정이었는데 그만 1995년쯤 마산 진전면에서 여기까지 다리를 놓는다는 계획이 덜컥 나오더라고요. 땅값이 너무 뛰어서 수목원을 더 확장할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그때 다리(동진대교)만 놓지 않았더라도 이곳이 확 변했을 겁니다.” 고향 땅 사서 일궈···주말마다 나무 심어 주중에는 승무원으로 세계를 누비고 주말에는 스튜어디스였던 부인과 함께 내려와 종자를 뿌리고, 어린나무를 옮겨심고, 잡초도 맸다. 부부가 항공사 승무원이었으니 사천공항이나 김해공항을 통해 내려오기가 한결 수월했으리라 짐작된다. “가능하면 자연을 그대로 살리고자 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만 살리고 모두 베어낼 수는 없잖아요. 원래 이곳에 터를 잡았던 소나무, 밤나무, 물푸레나무, 칡덩굴 등등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4계절 다 아름다우면서도 주위 경관과도 조화를 이루는 그런 수목원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봄에 벚꽃 하나만 피면 좀 유치해 보이잖아요. 현재도 수목원을 한창 만들어가는 과정이니 한 50~60년쯤 뒤에는 수목원다운 풍모를 보일 겁니다.” 현재 이 수목원에서 자라는 나무만 300여종이란다. 식물은 1000종 이상 심었다. “여기 수목원의 고성의 기후와 토양에 따라 어떤 식물이 가장 계절을 잘 나타내주느냐 그렇게 만드는 것이 사명이고 정체성입니다.” 성 원장은 산책길을 따라 심은 어린 핀오크 참나무를 만지며 “아까 그 핀오크의 씨앗이 발아한 2세예요. 이네들은 고성이 ‘네이티브’인 핀오크입니다. 돈이 급할 때 내다 팔려고 길가에 심었습니다만···. 어릴 때는 볼품 없지만 크면 클수록 똑바로 서서 자랍니다. 나무에 기품이 있지요.” 이 수목원에 성 원장 부부의 전 재산이 다 들어갔다. 그러나 수목원이 미완성이니 아직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국내 유일이거나 국내 최고의 나무가 있는 수목원이 한편으론 경남의 얼굴이고 고성의 작품이지만 모두 고개를 돌렸다. 자연적 문화공간에 정부 돈은 1원도 들어가지 않았다. 부인 이상숙씨가 카페를 운영하며,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거든다. 수목원을 산책하다 카폐에서 마시는 차 한 잔에도 여유가 묻어났다.고향의 얼굴인데도 지원 없어···카페도 운영 “캐나다 부차드가든은 한 개인이 만들었지만 정부의 지원으로 전세계에서 관람객들이 옵니다. 반면 우리나라 천리포수목원은 전세계 목련을 모았고 세계적인 작품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돈달라는 것도 아닌데 국가에서 이런 자원을 이용해 국익을 위해 활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도 내가 죽고 나서가 아니라 살아있을 때 관심을 두고, 관리에 참여하면 지역 전체가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가 이 말을 하면서 목에 힘이 들어갔다. “형편상 사람을 데리고 쓸 수가 없어 제가 다 합니다. 요즘도 하루 평균 4~5시간 잡초를 속고, 씨앗을 거두고, 나무를 심고 합니다. 운동도 되고 좋습니다. 카페가 문 여는 오전 10시30분 이전에 다 마칩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열정 이외는 식물과는 인연이 없다. “식물 공부, 책으로 혼자 했지요. 조경회사 만수원의 고 김명원씨, 천리포수목원을 세운 ‘미스터 밀러’(고 민병갈 원장), 충북 진천에 있는 영주농장 이영주 대표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카페 한쪽 구석에 자리한 창고에는 식물과 관련된 책으로 가득했다. 초창기엔 씨앗만 보고 어떤 특징을 지닌 나무인지 모르니 움이 트더라도 숱하게 죽었으리라. “멘토로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삼았습니다. 그 눈빛만 봐도 힘이 났습니다.” 그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멘토를 이야기할 때 수목원을 조성하면서 느꼈을 벽, 고독과 고난 등이 묻어났다. 킹 목사가 멘토···“그 눈빛만 봐도 힘 솟아”성 원장은 산책 도중 중간에 칡덩굴 숲 옆에 서며 “아침이면 굴뚝새 수백 마리가 날아오릅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정글을 이룬 칡덩굴이 나무를 휘휘 감고 넘실거리고 있다. “이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생태계로 작은 우주입니다.” 몇 걸음 더 가다 “이게 백화등이라고, 담쟁이처럼 나무를 감고 올라가 5월이면 아주 향기로운 하얀 꽃을 피웁니다. 어떤 향수보다 더 달콤하고 향긋합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선생님, 이게 나무를 휘감아 죽이는 것 같아 베어냈습니다’고 말해요. 몇 년 동안 정성 들여 팔뚝 굵기로 키웠는데, 너무나 안타깝지만, 기왕 베어낸 것, 제가 말을 못합니다. 들어와서 보는 것은 좋은데 제발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수목원의 가치요? ‘종자 전쟁’이나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지구에 재앙이 닥쳤을 때 씨앗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로 노르웨이의 스발바르 씨앗저장소가 대표적이다.)는 아니지만 수목원은 훼손된 자연의 복원과 치유입니다. 오늘 일하고 내일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조급한 세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수목원에서 조금이나마 치유가 될 것입니다. 수목원은 시간이 갈수록 진가가 발휘되죠. 그게 느리게 산다는 것, 여유롭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만족합니다.” 산책하던 성 원장이 엎드려 작은 루브라참나무 옆에 우거진 잡초를 손으로 뽑아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현대이지만 한 자리에 우뚝 서서 수백년을 지키는 거목같은 수목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고성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GSP사업, 하반기에도 수출 실적 달성에 매진

    GSP사업, 하반기에도 수출 실적 달성에 매진

    농림식품기술기획평가원세계 종자 산업은 글로벌 거대 기업의 대형화로 독점체제를 형성하는 가운데 상위 10개의 종자 기업이 전체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고 국내 종자 시장은 농업생산량 감소로 인해 정체 상태 및 종자 수요 감소가 이어지고 있다. GSP 사업은 글로벌 종자 시장 선점을 통한 종자 강국 실현을 위해 13년부터 연구개발을 추진해 왔고 1단계 연구(2013~2016)를 거쳐 2단계 사업(2017~2021) 1년차(2017)에서는 수출 목표를 달성한 바 있다.특히 2년차인 올해 수출 목표가 3868만 달러로 전년 2329만 달러 대비 66% 증가한 반면, 상반기 수출실적 집계 결과 1028만 달러로 전년 동기 수출액인 298만 달러 대비 245% 증가하였다. 올 여름은 폭염으로 인한 채소종자의 생육 불량 및 고수온으로 인한 수산종자의 생산 차질 등 어려움이 예상되는 가운데 주력 시장 확대 및 신규 시장 개척 등 하반기에도 수출 목표 달성을 위한 전 방위적인 노력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상반기 수출 실적 요인으로 ▲신규 수출 시장 개척 ▲기존 주력 시장에서의 수출 증가 등이 있고, 향후 ▲국제·국내 박람회 참여 지원 ▲각 사업단 및 관계기관의 해외 시범포 행사 개최 등 이어갈 계획이다. ●고추·옥수수·양배추·황금넙치·종계 신규 시장 개척 GSP사업에서 개발한 고추 종자로 아시아권 위주의 해외 수출에서 탈피하여 지중해 및 미주지역으로 새로운 수출 시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농우바이오㈜는 지중해권·미주권에서 선호하는 원통형 모양이면서 내병성(세균점무늬병) 및 바이러스 저항성을 갖춘 고추 품종 ‘NW Golden’ 등을 개발하고 상기 지역 7개국에 수출 264만 달러 실적을 달성하였다. 향후 현지 적응성 시험(7개국), 해외 시범포(터키·알제리), 고추 품평회(미국)를 운영하여 수출 활로를 개척한다. GSP사업을 통해 식량 종자의 첫 수출 성과가 나타났다. 2017년 인도에 옥수수 종자 17만 달러를 시작으로 2018년 상반기에는 35만 달러 수출 실적을 달성했다. 단옥수수 종자 ‘미타스’는 농우바이오가 인도 벵갈루루 육종기지에서 개발한 품종으로 다국적기업의 경쟁품종보다 당도 및 수량성이 좋아 현지 가공업체 및 농가의 높은 관심과 선호도를 보인 바 있다. 조은종묘의 양배추 ‘조은에이스’는 아프리카 동부의 케냐 시장을 개척하고 남부 유럽 및 중동 지역으로 수출을 확대하여 2017년부터 2018년 상반기까지 8만 달러 수출 실적을 달성했다. ‘조은에이스’는 시들음병, 검은썩음병 저항성을 가지고 고온 조건에서도 안정적으로 양배추 구를 형성하여 현지 적응성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아시아태평양종자협회(Asia Pacific Seed Association)회의를 통해 신규 거래처를 확보 후 올해 처음 판매가 진행되었고 내서성이 요구되는 남부 유럽 및 중동 지역으로도 수출되었으며 향후 수량성을 보완하여 수출을 확대할 계획이다. 황금넙치는 중국에 이어 홍콩 및 베트남 시장을 공략하여 현재까지 14만 달러 수출 실적을 달성했다. 황금색은 중화권뿐만 아니라 베트남에서도 선호한다. 영어조합법인 해연에서는 2017년부터 수출 상담 및 국제 박람회 참가 등으로 베트남 시장을 공략하였으며, 향후 현지 시식회 및 프로모션도 준비하고 있다. GSP사업에서 개발한 토종닭 ‘GSP 한협 토종닭’은 2017년 키르기스스탄에 수출을 시작하여 2018년 상반기까지 7만 5000달러 수출 실적을 달성했다. ‘GSP 한협 토종닭’은 2015년에 키르기스스탄에 원종 농장을 설립해 한국에서 수입한 종란으로 어미 닭이 되는 닭(종계)과 실제 먹는 닭(실용계)을 생산·보급하고 현지 실증시험, 시식회, 시범판매(닭고기·달걀·산닭), 매체 홍보 등을 통해 소비자의 인지도를 높여나갔다. 키르기스스탄을 교두보로 삼아 중앙아시아 및 미얀마, 몽골 등으로도 수출 확대를 준비하고 있다.●제2차 수출지원협의회 개최… GSP 성과발표회 추진 농식품부, 해수부, 농진청 관계관 및 수출지원 유관기관은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 제2차 수출지원협의회를 개최한다. GSP 성과발표회는 전북 김제에서 국제종자박람회와 연계하여 우수 연구자를 시상하고 연구 성과에 대한 발표와 앞으로의 계획을 공유할 예정이다. ●카자흐스탄 아그로월드, 터키 그로텍 참가 하반기 국제 박람회 지원도 이어나갈 계획이다. 10월 말 카자흐스탄 아그로월드 참여하여 채소, 원예, 식량 개발 품종을 선보이고 11월 말 터키 그로텍 유라시아에서는 박람회 인근 시범포에서 설명회를 갖는 ‘Korea Seed Field Day’를 연계하여 적극 홍보한다. ●해외 시범포 개설 및 ‘Field day’ 참가… 검역협상 등 추진 사업단 및 관련 기관도 수출 확대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채소종자사업단은 중국, 인도, 태국 등에 해외 시범포를 추가 개설하여 수출 타깃 대상 지역에 ‘Field Day’를 개최하고 원예종자사업단은 중국, 인도 등 현지 ‘Field Day’ 개최 및 백합품목에서 중국 화훼 종묘회사와 수출 및 업무협약을 추진한다. 수산종자사업단은 상해 국제 수산박람회에서 붉바리와 터봇 품종을 해외 바이어들에게 선보여 많은 관심을 끌었으며, 남미 넙치 시장 개척을 위한 페루 생산기지 구축을 위해 현지 협력 기업과 지속적인 협의를 추진한다. 식량종자사업단은 감자의 대서 품종 및 옥수수의 KM2, GW222 품종의 현지 출원 및 통상 실시 후 현지 생산 계획을 수립하고, 종축사업단은 종돈 품목 베트남 검역 협상과 종계품목의 수출지역 확대를 위해 관계기관과 협의를 추진할 예정이다. 농림식품기술기획평가원 오경태 원장은 “기존의 주력 시장과 함께 수출대상 국가를 다변화하는 게 중요한 만큼 시장 개척 활동, 수출 애로사항 해결 등 수출목표 달성을 위해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의석 객원기자 hong5960@seoul.co.kr
  • 전국 방방곡곡 관광시설 한가위맞이 통큰 할인

    추석 연휴 기간 전국 각지에서 문화·여행시설을 무료 개방하거나 할인해 준다. 전통놀이와 세시음식 체험 등 특별 프로그램도 기다린다. 가족, 친지들과 함께 혜택을 누리면서 명절을 즐겨 보는 것은 어떨까. 문화체육관광부는 추석 연휴인 22~26일 ‘한가위 문화·여행주간’을 운영한다고 10일 밝혔다. 문화·여행주간은 명절 기간 국내 여행을 활성화하고 가족 단위로 즐길 거리를 풍성하게 제공하고자 2016년부터 운영 중이다.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등 4대 고궁과 종묘, 왕릉 등 서울·경기·충남 지역 20여개 문화재를 이 기간 무료 개방한다. 북한산, 설악산, 지리산, 소백산 등 4개 국립공원에서는 생태관광 프로그램이 무료다. 부산, 대구, 광주, 과천 등 4개 국립과학관의 상설전시관 관람료는 50% 할인해 준다. 광주 북구 국립광주과학관, 강원 속초 시립박물관, 전남 순천 그림책도서관과 드라마촬영장, 낙안읍성, 순천만 국가정원 및 순천만 습지는 한복을 입고 방문하면 무료입장할 수 있다. 이 밖에 서울 종로 국립민속박물관이 ‘한가위 한마당’(25~26일), 부산 ‘영판좋다 달(Moon)판이네’(24일), 대구 달서구 ‘빽 투 더 달구벌’(22~26일), 광주 북구 국립광주박물관 ‘한가위 우리 문화 한마당’(22~26일), 전북 남원 ‘신관 사또 부임행차’(24~25일), 경북 문경 ‘문경새재 달빛사랑 여행’(22일) 등 행사도 참가해 볼 만하다. 문화·여행주간 정보는 ‘대한민국 구석구석 누리집’(korean.visitkorea.or.kr)과 ‘여행주간 누리집’(travelweek.visitkorea.or.kr) 한가위 특집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행사마다 혜택 조건이 달라 방문 전 반드시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 종묘(宗廟)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 종묘(宗廟)

    “왜적 대장 평수가(平秀家)는 무리를 이끌고 종묘(宗廟)로 들어갔는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적들은 경동(驚動)하여 서로 칼로 치다가 시력을 잃은 자가 많았고 죽은 자도 많았었다.” <선조실록 26권, 국편영인본 21책 486면> 1592년 음력 4월30일 새벽, 선조는 서울을 급히 빠져 나간다. 4월 14일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과 열흘 만에 한성이 함락될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이에 임금은 백성의 원성은 뒤로 한 채 급히 몸을 개성으로 옮긴다. 이 때 임금보다도 먼저 서울을 빠져나간 것이 바로 종묘와 사직에 있던 신주와 위판이었다. 조선에서 임금이라는 자리는 말 그대로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상징이자 유교의 심장인 종묘(宗廟)다. 종묘(宗廟)를 둘러보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덕수궁 등지를 휘적휘적 카메라 셔터 누르며 지나치는 발걸음과는 사뭇 다른 곳이 종묘다. 종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마음인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몸인 백(魄)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이를 ‘신혼체백(神魂體魄)’이라 하는데, 신혼은 사당으로 모시고 체백은 능이나 묘로 모셔진다. 여기서 조상의 마음, 즉 몸을 떠난 혼령이 머무는 장소가 바로 사당에 있는 나무로 만든 신주(神主)다. 흔히들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종묘는 바로 조선의 왕과 왕비들의 혼령, 즉 신주가 모셔진 사당이다. 지금의 종묘(宗廟)는 1395년 9월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주례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의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한 것이다. 현재 종묘에서 가장 중심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으로, 예전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합쳐 종묘라 부른다. 정전은 왕과 왕비의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는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다. 현재 정전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34위의 신주를 모셨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지만, 왕위에서 쫓겨났다가 숙종 때 명예를 회복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셔져 있다. 원래 종묘는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응봉자락을 따라 흐르는 산줄기의 지맥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거쳐 흘러 들어온 길지(吉地)에 자리 잡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의 종묘와 창경궁 사이에는 도로가 동서 방향으로 나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때 광화문에서 이화동으로 통하는 도로(현재의 율곡로)를 내어 종묘로 들어오는 지맥을 끊었다고 한다. 현재 다행스럽게도 율곡로를 덮고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복원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허물어진 듯한, 별스러운 장소인 종묘(宗廟). 우리는 이곳에서 낡아버린 조선 왕실의 옛 시간을 느낄 수가 있지 않을까? <종묘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장소야? -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가볼만한 곳이다. 2. 누구와 함께? -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가족.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3. 위치는? - 지하철 종로3가역 (1호선)11번 출구, (3호선)8번 출구, (5호선)8번 출구 도보 5분 4. 꼭 봐야하는 곳은? - 정전, 영녕전, 신로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지만 의외로 관람객들은 많지 않은 편. 6. 여행의 의미는? - 역사서에 늘 나오는 ‘종묘와 사직을’에서 진짜 종묘를 만날 수 있다. 7. 주의할 점은? - 종묘에 대한 공부를 먼저 하고 가기를. 혹은 반드시 해설사와 함께 투어를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s://jm.cha.go.kr/agapp/main/index.do?siteCd=JM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세운상가, 창경궁, 창덕궁, 인사동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서울 시내 역사적인 장소로서는 으뜸인 의미가 있다. 조선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인 종묘 방문은 적극 추천! 토요일 자유관람. 화요일 휴무, 나머지날은 시간제 관람이어서 종묘 홈페이지를 참조.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고장 신고 1년 후에야 수리”… 빛바랜 ‘가판대 태양광’

    “고장 신고 1년 후에야 수리”… 빛바랜 ‘가판대 태양광’

    가로수 아래 설치로 ‘무용지물’ 되기도 용량 부족에 전기요금 절약 효과도 적어 市 “자치구에 위임”… 구청은 “관리 안 해”서울시가 ‘태양의 도시’를 만들겠다며 추진한 ‘태양광 미니발전소’ 사업이 아무런 실익도 거두지 못한 채 방치돼 있다. 시가 전시 행정에 급급하다 예산만 축낸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는 2015년 중구·종로구에 있는 10곳의 가로판매대 지붕에 250W 태양광 미니발전소(패널)를 설치하고 시범 운영했다. 2016년에는 서대문구 일대 가판대 14곳에 확대 설치했다. 한 달에 생산되는 약 24(하루 3.2시간 기준)의 ‘친환경’ 전력으로 가판대의 냉장고와 선풍기 등 전기 시설을 가동한다는 취지였다. 패널 하나당 가격은 64만원으로, 전액 서울시가 지원했다. ‘베란다, 옥상 등 작은 공간만 있으면 누구나 설치할 수 있어요. 여러분 집에서도 지원받아 설치하세요’라는 홍보 문구가 가판대에 걸렸고, 각종 ‘인증샷’ 이벤트도 진행됐다. 하지만 도심 속 태양광 시설은 금세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 고장이 나 아예 사용하지 못하는 사례가 허다했고, 시청에 수리를 요청해도 민원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로구 종묘 공원 인근에서 가판대를 운영하는 박향양(60)씨는 “고장 났다고 신고한 지 1년 만에 겨우 수리를 받았다”고 말했다. 종각역 부근 가판대 점주 김의한(69)씨는 “수리를 받았는데도 천장에서 계속 소리가 난다”면서 “시청에 전화하면 담당자는 없고, 전화만 계속 돌리다 끊겨 버려 그냥 내버려뒀다”고 말했다. 태양광 패널이 빛이 들지 않는 가로수 아래에 설치된 곳도 있었다. 양오봉 한국태양광발전학회 회장은 “패널에 그늘이 지거나 먼지가 쌓이면 발전력이 크게 떨어진다”면서 “전기 생산량이 50~70%까지 줄어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태양광 발전 시설의 용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로 150㎝, 세로 90㎝ 크기의 패널 한 장으로는 소형 에어컨 하나조차 가동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태양광 설비를 설치함으로써 절약되는 전기료도 2500~8000원 정도에 그친다고 한다. 동대문역 인근의 가판대 점주인 이우연(66)씨는 “패널이 두 장은 돼야 한다”면서 “패널이 한 장이다 보니 충분한 전력을 공급하지 못하고 과열만 된다”고 말했다. 서울시와 구청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서울시 녹색에너지과 관계자는 “각 자치구의 가로 환경 관리 부서에 해당 사업의 유지·보수 업무가 위임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종로구청과 중구청은 “구에서 따로 관리를 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글·사진 고혜지 기자 hjko@seoul.co.kr
  • 추석 때 中企·취약계층에 35조 지원, 23~25일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

    추석 때 中企·취약계층에 35조 지원, 23~25일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

    영세·중소가맹점 부가세환급금 조기 지급추석을 앞두고 중소기업·소상공인·취약계층에 35조원이 지원된다. 지난해 추석보다 6조원 이상 늘어난 것이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30일 발표한 ‘추석 민생안정 대책’에 따르면 추석을 전후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지원 규모를 지난해 27조원에서 올해 32조원으로 확대한다. 여기에 외상매출채권 보험인수액 2조 8000억원 등을 더해 35조원 이상을 지원한다. 영세 업체나 중소 가맹점 등 226만 사업자에 대한 카드 결제대금이나 부가세 환급금 등을 추석 연휴 전에 조기 지급한다. 고용·산업 위기지역에는 앞서 발표한 1조 1000억원 규모의 사업을 신속히 집행해 소상공인과 실직자를 지원한다. 일반적으로 11월에 지급하는 농업직불금 역시 추석 전에 지급하고 316만 가구에 대한 2조 2000억원 규모의 근로·자녀장려금도 추석 전에 준다. 관련 기관은 전통시장 상인들이 성수품을 살 수 있도록 50억원 규모의 명절 자금을 대출한다. 추석 성수품 물가 안정을 위해서는 배추와 무, 소고기, 돼지고기, 밤, 대추, 명태, 오징어 등 14개 중점관리 품목의 공급을 확대한다. 농·임·수협 직판장 2236곳, 직거래 장터 253곳, 로컬푸드 마켓 209곳 등을 열어 5000여개 관련 상품을 10∼70%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또 다음달 23∼25일 고속도로 통행료가 전액 면제된다. 특별교통대책기간인 다음달 21~26일에는 원활한 교통 소통을 위해 갓길 차로를 임시 운영한다. 24시간 응급의료 체계도 유지된다. 당직의료기관과 휴일지킴이약국을 지정하고, 보건복지콜센터(129)·구급상황관리센터(119)·시도콜센터(120)·애플리케이션 등을 통해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아울러 다음달 22~26일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 등 4대 고궁과 종묘, 조선왕릉 등을 무료 개방한다. 전국 국립박물관 14곳은 다음달 22∼26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천관·덕수궁관 등은 24∼25일 각각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국립과학관 4곳은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주요 영화관들은 가족 단위 관람객에게 할인 이벤트를 실시한다. 추석 연휴 전인 다음달 14일부터 10월 17일까지는 전국 500여개 전통시장이 참여하는 ‘코리아 세일 페스타’가 열린다.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문화재, 우리 손으로 파괴한 것 많아 통탄스러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우리 문화재, 우리 손으로 파괴한 것 많아 통탄스러워”

    문화재 수난사 연구하는 정규홍씨가 말하는 ‘문화재’“우리 문화재의 과거사를 정리하다보면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가슴 아픈 일이 많아요.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골동품상 이희섭(李禧燮)은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에서 조선대공예전람회를 7차례 엽니다. 전람회 한 번에 우리 문화재 1500점에서 3000점을 도쿄와 오사카에서 전시하고 모조리 팔아치웁니다. 이희섭은 도록을 7권 만들었지요. 도록에 실린 문화재 일부가 일본 국보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7차례 전람회에 진열된 문화재가 1만 4516점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희섭은 서울에 ‘문명상회’라는 본점을 두고 도쿄와 오사카에 지점을 개설해 우리 문화재를 상설 전시해 팔아먹었습니다. 이렇게 일본으로 팔려나간 문화재가 최소 3만점에서 5만점에 이를 겁니다. 한 나라의 문화재가 통째로 옮겨진 것인데요, 한 개인이나 상인이 그렇게 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습니다. 통탄할 일이지요.” ●“조씨 문중, 가전 서적 700여권 일본에 스스로 갖다바쳐” 우리 문화재 수난사를 30년째 연구해 정리하는 정규홍(62)씨는 광복절 다음날인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아본 일본이 빼앗아 간 것도 있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스스로 갖다바친 것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이완용(1858~1926)은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갑옷과 투구를 바쳤다는 기록도 나온다고 설명했다. “어느 조씨 가문에서는 일본 도쿄대박물관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서적 700여권을 아주 싼 값에 넘겼다는 기사가 고고학 잡지에 나옵니다.” 어느 문중이냐고 묻자 정씨는 “기사에서 그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고, 한자로 조나라 조(趙)가 적혀 있더라.”고 소개했다.정규홍씨는 1981년 교직 연수를 받으면서 석굴암에 대한 일본인들의 참담한 취급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헌책방 등을 돌아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문화재 수난일지와 우리문화재 수난사, 유랑의 문화재 등을 펴낸 수난 문화재 전문가다. 문화재 수난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 중학교 교사직도 그만뒀다. 그동안 정부나 관계당국의 지원은 전혀 없었다. 경북지역 문화재 수난사를 쓰면서 용역 의뢰받은 것이 당국의 지원 전부였다. - ‘돈 안 되는’ 우리 문화재 역경사를 정리하는 이유는.☞ 무슨 엄청난 사명감이나 그런 것이 있어 하는 건 아닙니다. 이 일이라는 게 희한하게도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희열감도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자존감이랄까 자존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측면도 있고···. 일종의 중독성이 있어요. 한번 빠져들면 잠자면서도 술마시면서도 그 생각이 들고, 꼬투리가 잡히면 잊으려해도 그게 안돼요. 강단에 있는 사람들은 강의 때문에 중도에 끊기는데, 난 그런 것도 없기에 이것 하나만 파고 들어갑니다. ●“문화재 수난사 정리 이유?···중독성에 희열감이죠”- 많이 힘들겠다.☞ 돈 안되는 일을 하니깐 무엇보다 집사람에게 미안하죠. 교직에 있을 때 월급받아 상당액을 이것 연구에 쏟아부었으니깐. 지방에 한번씩 현지 조사 다니면 교통비에 숙박비도 만만찮죠. 책도 사고, 도서관에서 자료 복사도 엄청 합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때 복사비가 한장에 3원이었는데 이젠 50원으로 16배가 됐어요. 문화재 수난사에 관한 책을 냈는데, 잘 팔리는 분야가 아니라서···. 출판사에서 저자에게 책 몇 권 주고 그걸로 끝이예요. 그래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니 시간은 잘 갑니다. - 그만 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 이번에 ‘요것만 정리하고 손 떼야지’하는 생각이 들 때도 가끔 있지요. 그런데 한 건을 정리하다 보면 다른 게 파생되어 나오고, 그기에서 또 다른 게 파생되어 나오고···. 그러다보면 숙제처럼 이만치 쌓입니다. 그러니깐 계속 손을 놓지 못하고 이러고 있습니다.- 수난 문화재가 그동안 왜 공식적으로 정리가 안 됐나.☞ 1945년 해방 직후에 박물관 관계자들이 우리 문화재에 대해 정리해 뒀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우리 문화재와 관련된 고적조사와 유적연구 등에 한국인의 근접을 못하게 했어요. 일본인들이 독점했거든. 해방 이후 이 분야에 관한 지식을 가진 한국 사람이 없었어요. 일본이 떠나고 나니깐 총독부박물관과 경주박물관에 남은 고적조사, 발굴보고서 등의 정리를 전혀 못한 채 박물관에 쳐박혀 있었던거지요. 아직도 다 정리가 안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유물 목록과 실물과의 대조가 정확하게 안 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인력 부족 탓이지만 국가적으로 재원을 투입해서라도 빨리 했어야 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예요. ●“일제시대 한국인 유적연구 차단···유몰 목록과 사료 대조 못 해”- 문화재 수난 분야, 처음 연구는 어떻게 했나.☞ 처음엔 마땅한 자료가 없으니 헌책방을 많이 기웃거렸죠. 1981년 이후 헌책방에 다니면서 문화재 관련 책을 사모았죠. 그리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축쇄본을 돋보기로 보면서 자료를 모았죠. 또 일본인이 남긴 조사자료와 잡지 이런 것을 위주로 연관지어 보죠. 연관성이 있으면 메모를 해두는 거죠. 예컨대 발굴사업 보고서가 나오면 이게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옵니다. 기사와 고적조사 보고서가 약간 차이가 날 경우가 있거든요. 무덤 발굴의 경우 일본인들이 1차적으로 유물명을 기록하고 바로 박물관에 수장시키지 않고 1년간은 걔네들이 연구를 해요. 그 기간 유물이 분실될 수가 있어요. 실제로 분실이나 망실 그런 문헌이나 문서가 나와 있어요. 이를 비교해서 불법적인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 당시 일본이 얼마나 우리 문화재에 혈안이 됐나.☞ 일본의 각 대학이 잔치를 벌이듯이 우리문화재를 진열해 놓고 경쟁적으로 전람회도 가졌지요. 낙랑 유물부터 그때까지. 도쿄대 공과대와 문과대가 별도로 진열할 정도였으니. 당시 전람회 도록이나 기록들이 감춘 게 없이 매우 정확해요. 일본이 우리나라를 영구 통치할 줄 알았던 게지. 식민지 정착을 위한 하나의 사료로 삼기 위해 우리 문화재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수집해 가져갔지. 그때 조선에는 1908년 설립된 ‘이왕가박물관’ 뿐이었거든. 1915년 12월에서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생기면서 법으로 유물 반출이 금지돼 있었지만 자신들이 보고서 작성을 핑계로 얼마든지 일본으로 가져갔지. 이런 단체로는 조선고적연구회가 대표적이지요. 당시 일본 도굴꾼들이 대거 몰려들어 우리나라 무덤을 다 파헤쳤죠. 1908년 이전에 고려 무덤의 경우 거의 다 파괴됐다고 보면 됩니다. 조선실록을 보면 수시로 어느 무덤이 파괴되고, 어떤 무덤은 4~5회에 걸쳐 도굴됐지요. 심지어 대낮에 총칼을 갖다놓고 후손들이 보는 앞에서 도굴하고···. ●“고려 무덤 마구 도굴···日대학들, 우리 문화재 진열 경쟁도”- 해방이 되면서 문화재 수난이 줄었나.☞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에 진주합니다. 그리고 9월20일 미군 300명이 부산항에 들어오지요. 미군은 가장 먼저 일본 군인의 무장해제와 퇴출이예요. 미군이 부산에 들어오기 전에 눈치빠른 일본인들이 문화재를 잔득 가지고 일본으로 나갔던 거죠. 미군이 10월 말쯤부터 일본 민간인을 퇴출시키죠. 그때 귀국 일본인에게 돈 1000원과 작은 옷보따리 정도만 허용하고 귀중품은 모두 압수했든거죠. 그러니깐 일본인들은 어선같은 것을 빌려서 밀항을 합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공주에 있던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같은 이들이 어마어마한 유물을 가져간 것이지요. 이들에 빌붙어 밀한을 도운 게 한국사림이예요. - 미군에 의한 문화재 유출도 있었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귀국을 원활히 하기 위해 ‘세화인회(世話人會)’이라는 것을 만들었죠. 일본인들의 물품 같은 것을 맡아서 일본으로 보내는 일을 맡은거지요. 당시 서울역에서 화물을 부산으로 보내면 중간인 대전역에서 미군이 화물을 압수해 물자영단(物資營團)에 넘겨버리는 것이지. 그 물자영단 창고를 미군이 관리했는데, ‘우리 문화재나 귀중품은 박물관에 넘기고 나머지는 P.X에 넘긴다’고 말하지만 미군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거나 처분해버린 경우도 많았죠. 해방전후 골동계에서 유명한 이영섭이 부산에서 미군들과 친하게 지내며 물자영단에 있는 그림 1000점 이상을 싼 값에 샀지. 그가 샀던 그림들이 어떻게 흩어졌는지 알 수 가 없어. 또 한때 현재 심사정(1707~1769)의 그림으로 잘못 알려진 ‘맹호도’ 출처는 흥미롭지. 1946년 한 미군이 골동품 상인 두명을 일본인 창고로 데려갔지요. 골동품 상인들에게 감정을 요청해 감정해 주니 미군이 그 댓가로 주었던 게 맹호도이지요. 나중이 국립중앙박물관이 거금을 주고 사들였지만 미군에 의해 흩어진 문화재도 부지기수예요. ●“미군정기와 6·25 전쟁서 문화재 수난도 어머어마”- 6·25 한국전쟁 때도 문화재가 많이 파괴·유출되었다.☞ 6·25 때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파괴됐지. 성보문화재(불교문화재) 파괴가 가장 심했지요. 유엔군이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초토화작전을 펼쳤던거죠. 소개령이 떨어지니 사찰에선 중요 유물들을 갖고 나옵니다. 작전이 끝나고 돌아가보면 절은 없어지고 재만 남은 거예요. 그러면 그 유물들이 절로 들어가지 못하고 흩어진 것이죠. 전국을 돌아다녀보면 오래된 절인데 건물만 새로 짓고, 유물이 없는 사찰이 많아요. 또 부산으로 피난 간 문화재는 극히 일부인데, 이마저도 용두산 대화재로 많이 불타버렸지요. 미처 피난하지 못한 우리 문화재는 미군들이 찾아내 저희들끼리 나눠 가졌습니다. 예를 들면 종묘에 있는 옥새와 금보(金寶·선왕이나 선비에게 올리는 추상존호를 새긴 도장) 이런 것이 상당히 분실됐지요. 1952년 신문을 보면 미군들이 옥새와 금보를 금은방에 가져와 감정해달라고 하다가 다른 미군에 의해 검거되는 그런 기사가 몇건 나옵니다. - 그 이후엔 문화재 수난이 더 없었나.☞ 1960~70년대에는 왠 도굴이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일본인 밑에 따라다니면서 도굴을 배운 기술자들이 그렇게 많이 도굴을 해요. 일재 잔재지요. 심지어는 집 짓는다하고 장막을 두르고 밤에 도굴을 하기도 했어요. 이런 유물은 1970년대엔 이삿짐으로 위장해 미국에 갖다나르다 적발된 경우가 많지요. 유물을 모조품처럼 가장해서 밀수출하다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 밀수전문가들과 한국의 중간 브로커들하고 짜고 가져간 것도 감당을 못할 정도로 많지요.- 지금까지 수난당한 문화재는 몇 점이 되나.☞ 1981년부터 올 4월까지 조사해 파악한 국외유출 문화재는 17만 2300여점에 이릅니다. 이것은 관공서·도서관·박물관 등 공식기록을 비교 조사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를 포함한 것으로 낙랑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유물입니다. 제 조사는 관공서 위주여서 개인소장은 거의 포함돼 있지 않거든요. 오구라가 반출한 문화재의 경우에는 극히 일부인 1100여점만 도쿄박물관에 기증됐고, 나머지 수천점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어요. 이런 식으로 개인이 소장한 것을 포함하면 100만점이 해외에 떠돌고 있지 않겠느냐고 추산합니다. ●“파악된 수난 문화재 17만 2300여점···실제론 100만점 넘을듯”- 국외 유출 문화재를 환수하려면 어떻게.☞ 현재 파악된 17만 2300여점은 물론이고 앞으로 소재가 확인되는 문화재에 대해 정부와 민간단체가 합심하여 경로 추적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개인이 하기엔 너무 벅차지요. 어떤 과정을 거쳐 발굴해 소장했느냐는 경로 파악을 위해 고적 조사자료, 잡지에 실린 논문, 신문기사 한 줄까지도 축적해 종합적으로 정리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 쌓아나가다 보면 불법성 드러날 것입니다. 불법성이 드러난 것은 환수 운동을 펼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한일협정 때의 ‘청구권 포기 규정’ 때문에 정부가 일본에 공식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 환수 부분은 민간단체가 적극 나서야지요. 정씨는 “문화재는 미래 세대에 전해야 할 귀중한 유산”이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혼이자 공동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 가운데 우리 손으로 파괴하는 것 즉, 함부로 관리하고 방치한 것은 없는지 반성해야 한다”며 일침을 가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제 암흑기·근대 새벽의 경성…구보씨의 고독한 하루를 걷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제 암흑기·근대 새벽의 경성…구보씨의 고독한 하루를 걷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4회 서울의 문학1(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편이 지난 14일 진행됐다. 여름 야행 세 번째 행사가 치러진 이날 여름의 마지막 몸부림이 느껴졌으나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예약하지 않고 현장으로 직접 오거나 현장에서 일행을 따라나선 이들도 있어 준비된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과 쿨 스카프가 동났다.이날 투어는 집결 장소인 청계광장의 소음을 피해 한국관광공사 2층 관광안내센터 ‘K-STAR 존’으로 이동,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쾌적하게 시작했다. 서울 중구 다동 10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는 구보의 옛 집터(다옥정 7번지)이다. 청계천을 따라 광교까지 나간 뒤 화신백화점(종로타워)을 보고, 나석주 열사의 동상이 서 있는 옛 동양척식주식회사(하나은행 본점)~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소공로 낙랑파라(더플라자호텔)~숭례문~경성역(서울로7017) 구간을 걸었다. 해설을 맡은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구보의 동선을 안내하면서 소설 속의 적절한 장면을 낭독했다. 참가자들은 문학 향기를 음미하면서 몰입했다. 1930년대 경성과 박태원이라는 소설가, 주인공 구보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구보가 배회했던 1930년대의 서울, 식민지의 수도 경성은 어떤 도시였을까. 일제강점기의 암흑과 근대의 새벽이 공존하는 이 시기는 식민 잔재라는 이름으로 혹은 근대유산이란 이름으로 서울 도시 공간 곳곳에,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다. 도시는 자연환경의 개조이고, 근대성의 임상실험이다. 이 시기 식민지 도시문화와 도시계획이 만들어 낸 지층이 우리가 사는 21세기 서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식민통치기 경성의 외관과 도시민의 내면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주입하는 일본식 전통과 일본이 도입한 서구 문물이 혼재돼 있었다. 중국식 전통이나 중국을 경유한 서구 문물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일본으로부터 전해진 서구 문물에 눈을 뜨고, 귀가 열린 게 바로 1930년대 경성의 본질이다. 한국적 근대의 비밀은 한국인이 서구에서 직접 가져오거나, 서구에서 전해진 게 아니라 일본을 거쳐서 받았다는 데 있다. 소설 속 식민지 지식인 구보가 걸었던 소공로와 남대문로의 이국적 풍경과 우울한 독백 또한 여기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구보가 소설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경성은 사실상 새로운 도시였다. 현대 서울의 기원은 조선의 수도 한성이 아니라 경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30년 동안 경성시구개수 계획과 경성시가지 계획에 따라 경성의 간선도로망을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전통적 도심 공간의 구조를 재편했다. 청계천 이북 종로 중심 도시구조를 청계천 이남 경성부청(시청) 중심의 격자형 도시로 뜯어고쳤다.광화문 네거리 정동 쪽을 막고 있던 황토마루(황토현) 고개를 밀고 광화문~남대문에 이르는 남북 간 축선도로 태평로(세종대로)를 뚫었다. 종묘관통선(율곡로)을 만들고, 식민통치 기구와 일본인 거주지가 밀집한 본정통(충무로)과 황금정통(을지로) 중심의 방사상 도로망을 구축했다. 본정통과 남대문의 교차점인 조선은행(한국은행) 앞에 광장을 조성하고, 경성부청과 조선은행 앞 광장을 잇는 장곡천정통(소공로)을 뚫어 연결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하나은행 본점) 등 일제의 경제 수탈기구와 금융기관, 백화점이 명치정(명동)·본정통(충무로)과 이어졌다. 소설의 주인공 구보는 월북 소설가 박태원(1910~1986)의 분신이다. 박태원은 이념을 배제하고 도회적인 풍물과 도시성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도시를 무대화하면서 전통의 몰락, 가족의 생성과 해체, 물질주의와 환락의 변주, 반복되는 일상을 묘사했다. 도시를 배경으로 개인의 일상을 그려 내면서 내면의식의 추이를 서술하는 모더니즘소설의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도시 문학의 전형이다. 소설 속 구보는 집을 나서 경성 최고의 백화점을 둘러보고, 전차를 타고, 당대 대표적 건축물인 조선은행을 지나 경성역을 오간다. 낙랑파라로 대표되는 경성의 다방과 술집에서 오가는 대화와 친구와의 만남은 욕망과 소비문화의 분출을 나타낸다. 박태원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설이 구구했으나 2016년 구보의 장남 박일영이 펴낸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문학과 지성사)이 믿을 만하다. 조부 때부터 약방을 운영했고 부친이 약종상으로 공애당약방을 운영했으며 숙부가 양의로서 공애의원을 개업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개화한 중인가문 출신이라고 알려졌으나 밀양 박씨 양반 가문임을 족보를 통해 밝혔다. 구보의 첫 부인 김정애는 한약국집 무남독녀로 숙명여학교(숙명여고)를 수석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서울사대) 연수과를 수료한 뒤 진천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지낸 신여성이었다. 슬하에 2남 3녀를 뒀다. 영화 ‘괴물’, ‘설국열차’를 연출한 봉준호 감독이 외손자이다.구보는 7살 때부터 소설책에 관심을 보여, 9살까지 춘향전과 심청전 등 집에서 구할 수 있었던 시중의 이야기책 50~60권을 독파했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 재학 중이던 17살 때 본명으로 시 ‘할미꽃’을 발표했고, 18살 때 춘원 이광수에게 사사했으며 스승의 글을 평한 ‘묵상록을 읽고’를 발표하기도 했다. “문학에 인생을 걸 천재에게 정규교육은 불필요하다”면서 휴학, 집에 틀어박혔던 시절도 공개됐다.이상한 머리 모양과 친구 이상과의 우정, 월북 후 ‘갑오농민전쟁’ 출간 스토리가 대표적 이야깃거리다. 23세에 도쿄 법정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한 구보는 빨간 넥타이에 지팡이를 짚고, 바가지 머리 모양으로 다니면서 장안의 화제 인물이 됐다. 트레이드마크였던 ‘오갑빠머리’에 대해 구보는 ‘나는 내 머리를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고 있다.… 내 머리터럭은 그저 제멋대로 위로 뻗쳤다. 나는 수없이 빗과 기름을 가지고 이것들을 다스리러 들었다.… 이마 위에 간즈런히 추려가지고 한일자로 짜르는 방법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상과 구보에 대해 ‘자신만큼 아는 사람도 흔치 않다’고 장담한 언론인이자 작가 조용만은 저서 ‘구인회 만들 무렵’에서 ‘이상과 구보는 짝패였다. 이상의 더벅머리와 수염에 대해서 구보의 ‘오갑빠머리’가 한 쌍이었고, 언변에 있어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결말을 들으면 포복절도할 만담가의 흥행을 보는 것 같았고…둘이 다 한가한 몸이므로 밤낮 붙어 다니며 노닥거렸다’고 기록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여름야행 4=성수동(서울숲 밤마실) ●일시:8월 18(토) 오후 6~8시 ●집결장소:지하철 분당선 서울숲역 3번 출구 역 구내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아저씨들의 추억 속 그곳 - 세운상가 전자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아저씨들의 추억 속 그곳 - 세운상가 전자박물관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나 이곳을 서성였다네” <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1 中에서, 1995> 헛기침 서너 번은 다듬고 난 뒤에서야 말할 수 있는 동네였다. 70,80년대에 청소년기를 서울에서 보낸 중년 ‘아저씨’들의 세운상가 전자골목 2층은 은밀하게 달뜬 호기심의 거리였다. 흔히 세운상가 키드라 불리는 소년들의 사춘기를 가로지르는 뒷골목이자 빨간 책과 빽판의 추억이 담긴 곳, 미국판 마분지 소설과 3년 지난 ‘허슬러’와 ‘플레이보이’가 노포 구루마에 버젓이 나뒹굴던 품행제로 100미터 골목길, 세운상가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훌쩍 넘은 시간이다. 당시 세운상가의 부품들과 기술자들을 다 모으면 우주선도 쏘아 올린다는 호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국내 1세대 정보기술(IT) 전자 산업 업계의 산파 역할을 톡톡히 할 때에는 ‘코맥스’, ‘TG삼보컴퓨터’가 이곳에서 터를 잡아 회사를 키웠고, ‘한글과컴퓨터’는 ‘아래아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전국으로 유통시켜 토종 소프트웨어의 자존심을 지켜낸 곳 또한 세운상가다. 원래 세운상가는 1967년부터 1972년까지 건설된 곳으로 세운, 현대, 청계, 대림, 삼풍, 풍전(호텔), 신성, 진양상가가 총 길이 약 1km에 달하는 메가스트럭쳐이자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었다. 당시 쌀가게와 연탄가게를 빼고는 서울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구입할 수 있는 고급아파트이자 70,80년대 가전제품과 80,90년대 컴퓨터, 전자부품 등으로 특화된 상가건물로 입지가 탄탄하였다. 60년대 청계천변 일대 고물상 거리에서 출발한 이 지역은 용산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각종 기계, 공구, 전자제품들을 판매하거나 제품을 뜯어서 부품을 팔고 그 부속품으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장들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이후 광도백화점과 아세아백화점을 중심으로 장사동, 청계천 일대에는 전자업종들이 집중 모여들었고 70년대에는 전자 완제품을 만드는 단계까지 성장한다. 자연히 이 일대에는 전자업종 기술자들의 작업실과 사무실이 들어서면서 주거용 아파트는 작업실과 사무실로 대체되어 버린다. 특히 강남의 개발로 주거 시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저층부 점포에도 전자 업체들이 들어서면서 70년대에 이르러 세운상가는 곧 전자상가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용산전자상가 시대가 개막되고, 이후 인터넷과 디지털, 모바일 기술 등의 발달로 유통구조가 크게 변화하면서 세운상가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이곳에는 각종 개발품 제작, 전문 수리업종, 소규모 제조업체들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전기, 전자부품을 비롯하여 금속, 아크릴, 공구, 건축자재, 조명, 음향 등의 재료상들이 너끈히 버티고 있다. 이러한 세운상가의 잠재적 가능성을 바탕으로 2014년 서울시는 세운상가 존치 결정을 공식화하면서 ‘메이커시티 세운: 도심 창의제조산업의 혁신지’로서 세운상가의 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기술적 해법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문제 해결을 중개하는 기술 코디네이팅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세운 마이스터제도, 청년 스타트업과 예술가 그룹이 입주하여 도심 창의 제조 산업의 혁신을 이끌고 세운상가 일대의 활성화를 촉진하고고자 노력중이다. 또한 세운상가의 과거와 현재를 담고있는 오래된 공간과 풍경들을 둘러보는 코스도 마련되어 있어 도심투어 장소로서 색다른 재미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세운상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장소야? - 그냥 방문을 한다면 의미를 찾지 못한다. 반드시 투어를 신청해서 가도록 2. 누구와 함께? - 가족들, 친구들, 모임이 있다면 3. 위치는? - 1,3,5호선 종로3가역 12번 출구방향 도보5분 - 직진 후 CU편의점에서 우회전 - 2,5호선 을지로4가역 1번 출구방향 도보8분. 직진 후 세운대림상가 앞 모던라이팅에서 우회전 후 약 200미터 직진, 청계천 세운교 건너 맞은편 4. 꼭 봐야하는 곳은? - 세운전자상가박물관, 엘리베이트를 타고 옥상으로.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알려져 있지 않고, 방문객도 적은 편이다. 6. 여행의 의미는? - 지금은 40대를 훌쩍 넘은 세운상가 키드들의 소년 시절을 만나는... 7. 주의할 점은? - 투어를 신청해서 오도록. 각종 다양한 프로그램이 많다. 홈페이지 참고. 8. 홈페이지 주소는? - sewoon.org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종묘, 익선동, 종로 5가, 청계천 박물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도심 재생 프로젝트의 대상으로 선정된 세운 상가는 1970년대 서울을 안고 있는 인문지리적인 의미가 큰 곳이다. 방문한다면 홈페이지에서 투어 신청을 꼭!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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