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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을 어떻게 볼 것인가/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특별기고)

    역사는 늘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1980년 5·18 당시의 분위기로는 이 전국적인 규모의 민주화항쟁이 광주폭동이라는 누명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그뒤 ‘5·18사태’라고 했다가 ‘5·18광주항쟁’을 거쳐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그 역사적 평가와 함께 용어가 정립되었고,관련인사가 범죄자에서 민주투사로 그 본연의 영광스러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더우기 그들은 엄청난 ‘폭동’‘반란’‘변란’‘내란음모죄’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으니 사면복권과 함께 그 처절함,고통,수모,학대,인고의 세례로부터 축복받는 광명 영광 환희의 광장에 나서게 되었다. 그로부터 18년이란 세월이 경과하였다.이제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이의 실마리는 군사정권의 군사독재와 특정지역 때리기 및 낙후방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1961년 5·16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현역 소장 출신의 박정권이 18년만인 79년 10·26사태로 종말을 고하면서 또 현역 육군소장 전두환이 그 시해범을 수사하는 과정에서신군부의 정치세력이 싹트게 됐다.권력의 냄새를 맡고 도취된 것이다.12·12 하극상 사건을 거쳐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동지 노태우 정호용과 함께 서울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대학생 중심의 민주화운동을 관망하며 혼란 소요를 키워오다가 이를 수습한다는 명분속에 느닷없이 5·17비상계엄을 선포,혼란을 수습한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때 서울의 봄을 만끽한 3김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민의 심판을 받는 선거로써 대통령을 꿈꾸었다.그러나 12·12이후 실권을 장악한 정치군인들의 ‘은밀히 계획된 정치일정’은 자신들이 일선에 나서겠다는 것이었다.그때문에 서울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결국 휴교령으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 일부와 빛고을 광주의 대학생들이 섞인 민주인사들이 그 다음날인 5월18일 무장 군인과 결전을 전개하면서 5·18은 터졌다.처절한 살육 전시회가 낭자한 피로 얼룩진 가운데 전개됐다.대치국면은 광주와 전남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무고한 시민만 죽임을 당한 역사상 매우 잔혹한 민주화 투쟁이 일어나게된 것이다. 이때 계엄군과 시민군의 결전은 곧 광주의 민주화투쟁 이었으며 이는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 이었다.마치 동학혁명(1894­5)이 이곳에서 일어나 북상,반봉건 반제국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었던 것과 같다.또 일제강점하의 광주학생항일운동(1929)도 농민,노동자의 투쟁(소작쟁의,노동쟁의)도 광주 나주 완도 하의도 등에서 먼저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어 일제타도의 애국적 분위기를 선도하였다. 5·18 역시 서울의 5·17 민주화 투쟁이 광주에서 성숙되어 전국으로 물결져 간 것이다.따라서 5·18은 광주 전남만의 민주화운동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횃불이 된 것이다.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곧 군사독재와 신군부의 민간 억압 책동에 쐐기를 박은 것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수준을 높였고 동참의식을 도출해낸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그러나 당시 광주는 폭동 소요 탈취 암흑의 광장으로 신군부와 권력지향적 철새 정객들에 의해 선동되었고 그에따라 그 지역에 대한 혐오감,증오심을 증폭케 하였다. 그렇지만 막상 광주시민들은 생필품이 떨어져도 매점매석하지 않았고 자체조직으로 질서를 잡았다.식량이 떨어진 이웃에 온정을 베풀었으며 부녀자들은 따뜻한 음료수와 끼니로 시위대의 사기를 돋구어 민주화 의지,신념을 달성케 하였다.의사,간호사가 구호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학생들이 금융,정부기관을 지켰으며 헌혈에 온시민이 동참하였다.비록 신망의 정치인인 金大中이 ‘내란음모사건’이란 누명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어도 그것 때문에 광주민주화운동이 더 불타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특정인을 위하기보다 민주화는 필연적 과제였기 때문이다.이제 그 분은 국민에 의해 대통령이 되어 바웬사 사하로프 만델라와 함께 민주의 투사요 지구 인권의 파수꾼으로 손꼽히는 반열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한다.불의,부정을 배격한 동학정신이 팽배한 이 지역의 5·18은 곧 우리 모두의 민주화운동이다.6·10항쟁,6·29선언(1987)도 그 뿌리가 여기에 있음을 새삼 주목해야 한다. 영원히 저주받을 지역감정,지방색의 차별화 등은 망각의 저 여울속으로 보내야 한다.그래야 진정한 국민의 정부,신명나는 국민으로 거듭나서 화합의 대열로 들어가게 되지 않겠는가.또 복받은 대한민국이 달성되어 통일조국 대한민국 건국의 50주년을 환희와 벅찬 희망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 핵시계 ‘자정 2분전’으로/美 핵물리학회 새달 결정

    ◎印 핵실험 영향 現 ‘14분전’서 더 단축/47년 등장이후 최고 위험수위 시각 최근의 잇딴 인도의 핵실험으로 ‘지구종말의 시계’(Doomsday Clock)로 알려진 ‘핵시계’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핵시계를 관리하고 있는 미 핵물리학회 이사장인 레너드 라이저 박사는 인도 사태는 오는 6월 열릴 이사회 의제로 상정될 것이며 핵시계 분침 조정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밝혔다. 인도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서명 및 가입에 부정적인 경우 예상되는 시각은 ‘자정 2분전’.53년 미·소의 수소폭탄 실험 이후에도 맞춰진 ‘자정 2분전’은 47년 핵시계 등장이후 가장 위험한 수위를 나타내는 시간이다. 인도는 74년에도 1차 핵실험을 강행,72년 미소가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에 서명한 덕에 ‘자정 12분전’으로 물러난 시계를 ‘자정 9분전’으로 단축시킨 전력(前歷)이 있다. 핵시계는 47년 미국 핵물리학자들이 핵으로 인한 인류멸망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자정을 지구멸망의 상징으로 삼아 만들어냈다. 핵물리학자들은 핵의 발달상황과 국제관계의긴장정도를 반영,부정기적으로 시계의 분침을 고쳤다.핵시계가 마지막으로 조정된 것은 95년 12월의 ‘자정 14분전’. 미·소의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 서명과 전략 전술핵무기폐기 선언으로 핵시계 등장이래 최고의 평화시기를 가리킨 91년 ‘자정 17분전’에서 3분 앞당겨진 시각이다.미소 양국의 협정 불이행 및 우라늄 플루토늄의 불안정한 비축 등이 그 이유.핵시계의 분침이 바뀐 것은 모두 14차례.49년 구 소련이 최초로 원자탄 실험을 했을때 자정 3분전을 가리켰으며 미소가 부분핵실험금지조약(PTBT)에 서명한 63년에는 12분전으로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68년 프랑스·중국이 핵무기를 확보하면서 5분이나 앞당겨졌고 69년 미상원의 핵 비확산조약(NPT) 비준 이후 ‘자정 10분전’으로 맞춰졌다.80년에는 미소의 군비감축협정 교착상태가 지속되고 세계의 남북대륙 갈등 및 민족분쟁 등이 심해지면서 7분전으로 앞당겨졌다. 이어 81년과 84년 88년 미소 양대국을 축으로한 냉전상태와 지역분쟁 빈발,군비경쟁이 첨예화돼 시계는 자정 4분,3분,6분전으로 각각 조정됐다.88년에는 미소가 중거리핵장비 제거협정(INF)을 체결,6분전으로,90년에는 동구민주화 운동이후 냉전이 종식되면서 10분전으로 맞춰졌다.
  • 늘어난다는 들개… 광견병이 두렵다(박갑천 칼럼)

    사람사회에 충신도 있고 역적도 있고보면 개사회에도 충견과 역견(?)은 있음직하다.예컨대 에 나오는 장성(長城)고을 갈재(蘆嶺)기슭 개떼가 그런 ‘역견’이었다고 하겠다. 그곳에 사는 한 사냥꾼이 개를 스무남은마리 길렀다.하루는 사냥꾼이 만취해서 귀가하여 화로옆에 거꾸러졌다.화롯불은 옷으로 번져 사람을 태웠다.그 냄새를 맡은 개들이 달려들어 주인을 뜯어먹었으니 개는 역시 개.밖에서 돌아온 집안사람들이 때려죽였는데 그가운데 몇마리가 숲으로 내뺐고 그 개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곧잘 해쳤다.불속에서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이웃고을 임실의 오수(獒樹)충견과는 왕청되게 달랐다. 그런 ‘개같은개’얘기는 에도 나온다.조선 중종말년께 돈의문밖에 사는 개들이 떼를 지어 북쪽산으로 올라가 시체를 파먹으며 살았다.개들은 새끼까지 쳐서 몇해가 지나자 40∼50마리로 불어나면서 산 사람한테도 달려들었다.마침내 한 늙은군사가 물려죽자 금군(禁軍)까지 동원하여 개사냥을 벌인다. 개한테는 이리라는 야성의 친친한 피가 흘러내린다.J.런던의 에 나오는 주인공개 백한테서도 그걸 느낀다.아버지는 세인트 버너드종이고 어머니는 셰퍼드종이었는데 밀러판사의 대저택에서 평화롭게 살때는 몬존하고 충직한 개였다.그런데 뜻하지않게 캐나다 북서부 크론다이크 추운 눈고장으로 끌려가 썰매끄는 신세가 되고 거기서 성질고약한 업자와 감사나운 에스키모개들한테 닦달받는 사이 야수로 바뀐다.나중에 백은 J.소튼이라는 금광업자에게 넘어가는데 그주인이 죽은다음 이리떼 울음소리에 향수를 느끼면서 그속으로 끼어들어 그들의 수령이 된다. 서울일원에 들개가 늘어나고 있다한다.사람 홈리스가 늘어난다는 세태인데 하물며 개의 홈리스이겠는가.주인이 버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저라서 뛰쳐나와 ‘야성의 자유’를 구가하기도 하는 것이리라.한데 이들 개들이 사람을 물어서 문제다.산과 들로 쏘다니며 생존에 위협을 받을때 갈재기슭의 개나 의 백과 같이 사막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한데 이런 개일수록 광견병에 걸려있을 가능성이 높아서 심각해진다.서울시에서는 그같은 들개하며 들고양이를 잡아없애는데 1차로 4천만원의 예산까지 책정했다 한다.주인있는 개라도 떠돌면 들개로 오해받는다.집개는 밖으로 나돌지 않게 하자.
  • 위대한 인물 51인의 마지막 행적/M.V.카마스 지음(화제의책)

    ◎괴테 등 유명인들 삶의 마지막 모습 독일의 문호 괴테는 죽어가면서 “빛을! 조금 더 빛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그는 1832년 3월22일 정오,빛의 한가운데서 죽었다.이것은 아마도 자신의 주변세계를 보려는 괴테의 마지막 노력이었는지도 모른다.한 인간의 죽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있다.죽음 앞에 선 위인들의 마지막 모습을 어떠했을까.인도 출신의 저널리스트인 카마스는 위대한 인물들의 화려한 업적을 말하는 대신 그 본성의 밑바닥을 꿰뚫는 데 초점을 맞춘다. 셰익스피어는 중년의 나이인 52세에 죽었다.바이런은 36세,셸리는 30세,그리고 키츠는 26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또 프란츠 카프카는 41세,제라드 맨리 홉킨스는 45세,오 헨리는 48세,보들레르와 아폴리네르는 46세와 38세에 각각 죽음과 만났다.이처럼 대부분의 유명작가들은 30,40대에 전성기를 이뤘고 그 이후는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중요한 것은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내용이다.정신분석학의 대부 프로이트의 죽음은 적잖이 감동적이다.프로이트는 83세에암으로 죽었다. 두번의 암수술 뒤 ‘소생불가’ 판정을 받은 그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정신분석학 개요’를 계속 썼다.생각이 흐릿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진통제를 먹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전기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의 죽어가는 방식을 “그의 삶에 못지 않은 도덕적 업적”이라고 평했다.이 책은 이타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았다고 결론짓는다. 그 종말의 풍경은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에 나오는 마지막 기원을 연상케한다는 것.“밤이면 향수에 젖어 산속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두루미떼처럼 내 삶은 신에 대한 한번의 인사,영원한 집을 향해 항해한다” 이옥순 옮김 사과나무 7천원.
  • 디지털시대의 글쓰기/脫문자사회의 철학적 규명

    ◎문자의 역사와 미래 에세이로 분석 【金鍾冕 기자】 마샬 맥루한이 ‘활자시대의 종말’을 선언한 지 30여년,컴퓨터와 영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연 글쓰기의 미래는 있는가.문자와 글쓰기로 이루어진 ‘구텐베르크적 문화’로부터 컴퓨터와 디지털 코드로 대변되는 이른바 ‘텔레마틱 문화’로의 이행기에 우리의 사고와 가치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이러한 물음에 대해 우리는 체코 태생의 유태인 철학자 빌렘 플루서의 ‘디지털시대의 글쓰기’란 책으로부터 적잖은 암시를 얻을 수있다.플루서의 주요저서로 꼽히는 ‘디지털시대의 글쓰기’(윤종석 옮김,문예출판사)가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이 책은 ‘책 없는 세상’에 관해 다루지만 단순히 책의 종말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플루서는 이 책에서 현대적인정보 테크놀로지를 토대로 한 인간의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새로운 철학을 펼쳐보인다.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에 관한 철학적 해명작업을 시도해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플루서는 ‘텔레마틱 유토피아’란 개념을 내놓아 디지털사상가로도 불린다.텔레마틱이란 텔레커뮤니케이션(Telekommunikation)과 정보학(Informatik)을 합친 신조어로,그가 주장하는 텔레마틱 유토피아는 자동조절장치에 의해 작동되는 미래의 정보통신 사회를 가리킨다.플루서는 이 책에서 문자와 글쓰기 행위에 대해 현상학적으로 분석하는 한편 문자의 역사와 미래를 지적이고 화려한 비유가 숨쉬는 한편의 철학에세이로 풀어간다.그에 따르면 문자이전 그림의 시대는 전(前)역사,문자의 시대는 역사,문자이후 디지털코드의 시대는 탈(脫)역사의 시기다.탈역사 혹은 포스트역사란 문자의 지배가 끝나는 상황으로 알파벳적인 선형적·단선적 사고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카오스 상태를 말한다.그것은 정치적으로는 텔레마틱과 사이버네틱에 의해조절되는 사회다.요컨대 우리는 이제 점(點)단위로 사고하며 ‘계산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여기서 플루서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과 역사의 구조변혁이다.뉴미디어들의 대화적 네트워크화에 대한 그의 이념이나 텔레마틱 사회에 대한 모델 역시 이같은 변혁을겨냥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당시로서는 뉴미디어인 문자에 대해 살아있는 정신의 직접적인 교류에 방해가 된다고 비판했다.문자에 대한 플라톤의 이같은 비판에서 우리는 문자를 통한 지식의 대중화와 당시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귀족적 보수주의를 읽어낼 수 있다.이러한 보수적인 문자관과 오늘날 뉴미디어를 거부하고 문자의 형태를 고집하는 휴머니즘적 문화비판론이 같은 맥락이라는 점은 매우 역설적이다.플루서는 뉴미디어를 거부한 채 문자만을 고집하는 이들에 대해 “종이를 파먹는 흰 개미같은 존재들”이라고 비아냥거렸다.하지만 그 역시 문자문화와 글쓰기의 종말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다.그는 생전에 컴퓨터 대신 낡은 타자기로 글을 썼다.그에게는 여전히 ‘휴머니즘적 에세이스트’란 말이 어울린다.
  • 환경 시민공원/李重漢 社賓 논설위원(外言內言)

    전남 나주시가 혐오시설로 인식되고 있는 하수종말처리장을 시민공원으로 처음 조성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하수처리장 최종 침전지에 오리도 기르고 잉어와 붕어 수도 늘렸는가 하면 영산강 둑을 따라 단풍나무를 더 심고 군데군데 잔디를 보완했다고 한다.영산강변이 원래 수려하므로 어느 지점이더라도 운치있는 공원 만들기가 별로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환경문제가 확대된 뒤 이에 연관된 혐오시설은 모든 나라에서 매우 어려운 사회적 과제가 되었다.쓰레기 하치장과 소각장,오염물질 처리산업 인근지역,그리고 하수종말처리장들이 특히 주변 주민들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켜 왔다.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매우 훌륭한 탈출구를 찾아 냈다.그것이 곧 혐오시설이 있는 곳을 공원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 방법에서 대표적으로 성공한 것이 일본의 소각장 공원이다.일본 도쿄는 구마다 쓰레기소각장을 지하에 넣고 그 위 지면에 공원을 조성했다.그러니까 쓰레기소각을 번잡한 도심에서도 하고 있는 셈이다.이렇게 하려면 물론 다이옥신 같은 유해물질을 완전 해소할 수 있는 연소 기술이 필요하다.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오염처리 과정이 공개돼도 떳떳할만큼 시설 운영의 과학적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이점에서 오염처리시설 공원화는 단순히 공원을 만드는데 의미가 있다기보다 오염을 해소할 수 있는 기술력과 이를 통한 행정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서 더 큰 성과를 얻는 것이다. 이점에서 나주 경우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시민공원화했다는 것은 나주 하수종말처리과정이 제대로 운용되고 있다는 뜻이다.상당수 지자체의 하수종말 처리 업무가 방치되어 종말처리장을 통과한 물이 더 악화된 오수라는 현실마저 있는 상황에서 나주는 오염환경 탈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한편 타 처리장들에도 경종이 된다.나주 처리장은 그간에도 영산강 수계 처리장 중 가장 방류수질이 좋아 94년 ‘전남환경보존 시범교육장’으로 지정된 바 있다.한번씩 찾아가 볼 명소가 된 것이다.
  • 어떻게 되나 금융 빅뱅/니혼게이자이 신문(미래를 보는 세계의눈)

    ◎일의 금융개혁 의미와 앞날/외환거래 자유화 실시로 빅뱅 첫 걸음/1,209조엔 개인자산 해외유출 우려/80년대 후반 영국 성공사례 소개도 【도쿄=姜錫珍 특파원】 최근 일본에 진출한 외국 자본계의 은행에는 외화표시예금 구좌를 개설하는 일본인 고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도쿄 오테마치의 한 미국계 은행 지점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외화 구좌를 개설하는 여사무원(OL)들로 북적거리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외화구좌 개설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4월1일부터 개정 외국환거래법이 실시됐기 때문이다.일본에서 드디어 금융빅뱅이 시작된 것이다.빅뱅이라는 말은 우주가 생성된 태초의 대폭발을 일컫는다.금융빅뱅은 80년대 후반에 영국에서 실시된 증권거래 수수료의 자유화 등 일련의 증권시장 개혁을 일컫는다. ‘어떻게 되나 금융 빅뱅’,이 책은 일본의 금융개혁의 의미와 영향,그리고 앞날을 전망하고 있다.일본에서도 4월1일부터 폭발은 시작됐다.2000년대 초까지 매듭지어질 일본판 금융빅뱅의 첫 걸음이 개정 외국환거래법의 실시다.개정된 외국환 거래법에 따라 일본인은 외화 구좌를 개설하고,해외에서 자유롭게 결제할 수 있게 됐다.외환 거래가 자유롭게 됐기 때문에 외화 매매시 드는 비용이 저렴하게 된다.내외의 자금이동의 장벽이 현저히 낮아지게 된 것이다. 또 이자가 너무 싼 국내 시중은행 예금을 달러화 표시 예금으로 바꾸면 연 2% 이상의 이자 소득이 더 나오게 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본 시중 자금의 흐름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96년말 현재 1천2백9조엔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개인금융자산이 해외로 상당 부분 빠져 나갈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부에서는 20년대말 금 수출 해금으로 거액의 자본이 해외로 유출돼 공전의 디플레이션을 겪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고 우려한다. 일본의 경우 해외 예금은 통화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4%에 불과하다.독일 17.1%,영국 7.9%,프랑스 4.7%에 비하면 현저히 낮다.그러나 외환 거래 자유화로 프랑스 수준만큼 자금이 해외로 빠져 나가도 35조엔의 해외 유출이 예상된다. 우려하는측에서는 일본정부의 경기부양대책이 자금 흐름을 좌우할 것으로 본다.즉 대책이 시원찮으면 자금이 빠져 나갈 것이고,엔저 현상이 심화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반면 해외 예금은 환 리스크를 안고 있으며 해외에서 자금이 유입되기도 쉽게 되기 때문에 자금시장이 동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일본 금융빅뱅의 첫 걸음이 어떤 모습이 될 지는 일본은 물론,경제위기를 겪고있는 아시아 국가 더 나아가 세계적인 관심사다.전투는 이미 시작된 상태다.외국 자본계 금융회사들은 최근 도쿄시장 영업을 강화하고 있다.1천2백9조엔의 개인자금을 거머쥐기 위해서다. 금융빅뱅은 외환 거래의 자유화와 함께 증권,보험업계에도 자유화의 광풍을 몰아치게 될 것이다.이는 증권 보험업계의 변화는 물론 기업과 개인의 자금운영 방식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일본의 개인금융자산 1천2백9조엔 가운데 예저금과 현금이 56.9%,보험·연금이 25.1%,주식 6.1%,투자신탁·채권 등이 11.9%를 차지한다.이같은 비율은 23조8천8백86억달러(2천5백32조엔)에 달하는 미국의 개인금융자산이 예저금과 현금 12.5%,보험·연금 28.7%,주식 19.5%,투자신탁·채권 21.2%,기타 18.2%로 다양화돼 있는 것과 크게 대비된다. 금융빅뱅은 개인금융자산의 부문별 이동도 촉진시키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이 책은 이러한 시장의 변화 양상을 빅뱅 추진과정과 함께 그리고 있다.니혼케이자이심분(日本經濟新聞)에 그동안 실렸던 기사들을 다소 손을 봐서 편집했다. 빅뱅의 목적은 투자자에게 보다 싸게,다양한 금융상품을 제공하고 자금 수요자에게는 보다 다양한 자금수집 루트를 제공하는데 있다.일본이 금융빅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이러저러한 규제를 그대로 두고는 도쿄 금융시장이 공동화될 것이라는 우려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일본판 금융빅뱅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대장성과 일본은행의 개혁이다.하지만 이 책은 대장성 개혁이 96년 대두되게 된 것은 주택금융전문회사(住專)의 부실채권 처리 문제에 대해 당시 물러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총리와 다케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대장상의 책임을 피하기위해 추진됐다고 지적하고 있다.대장성의 개혁이 아직도 원활하게 추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대장성의 파워와 함께 이같은 정치적 계산 때문에 엉성하게 추진된 때문이 아닌가라는 시사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 책은 영국이 실시한 빅뱅의 내용과 그 결과 금융업계가 겪은 변화 등도 소개하고 있다.영국의 경우 증권거래소가 종말을 고하고 말았지만 자유화 조치를 통해 런던이 국제금융시장의 중심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빅뱅 덕택에 런던 금융시장이 재탄생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급격히 변화되고 있는 일본의 금융 개혁의 진전상황은 세부적인 사항에 있어서는 이 책의 일부 내용을 구문으로 만들고 있다.일본의 빅뱅은 그렇게 요동치면서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원제 どうなる 金融 ビシゲバソ.니혼케이자이심분샤(日本經濟新聞社).246쪽.1천500엔.
  •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세계 문화유산 순례:66)

    ◎중앙아 실크로드에 핀 이슬람의 꽃/전성기땐 사원 360여개/도시전체가 거대한 성채로 우뚝솟은 50m 칼얀첨탑 압권 중앙아시아는 실크로드가 있어 항상 우리에게 미지와 낭만으로 다가온다.그러나 그 곳에도 찬연한 도시문화가 있었고,가장 수준높은 인류의 지혜가 번득이던 곳이다.황량한 스텝위에 개화한 문화이기에 더욱 눈부셨고,너무나 독특하고 당당하여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부하라가 바로 그런 곳이다.동서를 관통하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에서 온갖 문물과 종교,사상과 신화를 머금은채 성숙해 갔고,급기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가장 중앙아시아적인 성곽도시 문명을 이룩해 내었다.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가 주관한 부하라 도시성립 2천5백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치러졌다.부하라 도시문화의 장구한 역사적 의미와 그 중요성이 다시 한번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 칭기스칸에 정복 부하라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성채를 이루고 있다.광활한 사막의 교역로에 터를 잡은 도시는 처음 4.2㎢의 면적이었으나,시대에 따라 부침을거듭하면서 크기는 수시로 변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따라서 고고학적 발굴을 해보면 20m의 문화지층이 다양하게 중첩돼 있다.가장 두터운 하층은 기원전 4세기에서 서기 4세기에 이르는 고대문화층이고 상층은 9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화려한 중세문화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이곳에서 만난 우즈벡 학자들은 유네스코가 부하라의 역사를 2천5백년으로 잡는 것에 불만을 표하면서 성채 바깥의 고대 유적지를 근거로 3천년으로 올려잡고 있었다. 이미 당나라때 이곳을 방문한 구법승 현장은 그의 ‘대당서역기’에서 부하라를 그 크기가 1천7백리에 이르고 동서는 넓고 남북은 좁은 장엄한 도시로 묘사하고 있다.역사상 부하라를 최초로 수도로 정한 나라는 9세기의 사만조였다.사만조를 이어 터키계 왕조인 카라한조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하라는 터키인의 도시문명으로 확연히 자리잡게 된다.이때 부하라는 상업과 수공업이 번성하고 학문과 과학이 크게 발달하여 당시 세계문화의 한 축을 이룰 정도였다.그러나 부하라는 1220년 봄 운명의 날을 맞았다.정복자 칭기즈칸에게 복종을 거부하며,끝까지 하레즘샤 제국의 자존을 지키려던 부하라는 침략자의 철저한 약탈과 파괴,대량살육이라는 가혹한 응징을 받았다.붉은 사막이 끝없이 펼쳐지는 황량한 대지위에 회생불능의 폐허만이 남았다.한 시대,한 문화의 종말은 이처럼 너무나 비극적이었다. 부하라가 제2의 운명을 개척한 것은 14세기 티무르시대였다.중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 티무르의 정열과 넘치는 신앙으로 부하라는 그 폐허의 잔해위에 다시 찬란한 이슬람의 도시로 새롭게 탄생하였다.거대한 성채와 성벽이 축조되고 동서남북으로 곧게 뚫린 도로를 중심으로 엄밀한 계획도시가 들어섰다.왕궁와 이슬람사원(모스크),학교,병원,도서관,공중목욕탕,주거지 건물 하나하나가 예술작품이 되어 되살아 났다.성채 바깥에도 시장과 대상들의 숙소인 캐러밴사라이,종교학교인 메드레세들이 군데군데 즐비하게 줄지어 서있다.전성기에는 360여개 모스크와 113개의 메드레세가 도시를 채웠다 한다.이것이 오늘날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부하라 도시유적의 중심을 이루고있다. 도시 유적지는 쉐이크 잔달 출입문에서 시작된다.세계 각국 상인들과 외교관들이 세금을 내고 일정한 절차를 거쳐 이 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부하라 문화의 수련생이 된다.그러면 도시의 상징인 높이 50m의 칼얀 첨탑이 정중앙에서 이방인을 맞이한다.이 첨탑은 예배시각을 알리기 위해 꼭대기에서 코란구절을 육성으로 낭송하는 기능 이외에도 낮에는 높이로 밤에는 불빛으로 지평선에 지쳐있는 캐러밴의 등대 구실을 했다.칼얀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다.불로 구워낸 단순한 벽돌을 색과 모양을 달리하여 기하학적으로 처리하고,들죽날죽하게 배열해 놓았다.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데,벽돌을 쌓아 놓은 것이 한 치의 비뚤어짐도 없이 하나의 정교한 직선면을 이루고 있었다. ○종교학교도 113곳이나 선명한 쪽빛 하늘에 솟아있는 무작위의 벽돌건축이 만들어내는 조화의 극치였다.칼얀 첨탑을 끼고 칼얀 모스크와 미리 아랍 메드레세 건물이 또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1만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모스크는 당시 최대 종교건물이었으며,입구의 색색 벽돌모자이크 장식과 다층 돔식 건축양식은 부하라 건축학파라는 새로운 예술적 사조를 만들어 내었다. 성채 바깥의 시내를 돌아본다.어디를 가도 중세 분위기가 그득하다.골목마다 들어찬 집들은 모두 진흙을 햇볕에 구워만든 벽돌을 사용하였고,벽면은 다시 진흙으로 매끈하게 발랐다.똑같은 집의 모양과 사람들,걸친 옷가지와 음식들,군데군데 모이는 양담배와 코카콜라 병들만 없다면 우리는 분명 고대 부하라에 서있는 것이다.한 골목을 지나면 모스크가 나타나고 또 한 골목을 지나면 메드레세가 나타난다.아무렇게 지은 허술한 건물들이 아니다.혼과정성이 배어있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더욱이 흙과 사막이 딩구는 침침한 분위기에 유적들은 하나같이 채색 모자이크와 벽화를 통해 선연한 색깔을 담았다. 시내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는 나디르 디반베이 메드레세와 라비 카우즈 메드레세는 특히 인상적이었다.자그만 호수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메드레세는 중세 중앙아시아 학문의 중심지였다.이슬람 세계 최고의 종교학자 이맘 부하리,유럽 의학의기초를 다진 이븐 시나(아비켄나),자신의 업적으로 자신의 이름이 학문명칭이 되어 버린 연산법(algorism)의 개발자 알고르즈미 등과 같은 대학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여행 가이드/타슈켄트서 항공편 40분/면제품·토기·공세공 인기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까지 아시아나와 우즈벡 항공이 직항로를 개설하여 여행이 편리해졌다.타슈켄트에서 국내선으로 부하라까지는 40분 소요. 자동차로는 타슈켄트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목화 밭을 따라 약 8시간을 달려야 한다.“부하라 투리스트”라는 관광회사(전화:3652­232276)가 가장 큰 부하라 전문여행업체이며,부하라 호텔이 최근 개관되어 관광객의 불편을 덜었다.세계적인 목화산지답게 면제품이 뛰어나며,토기,인형,동세공 제품도 인기가 있다.
  • 세계화의 두 얼굴/송일 외국어대 교수·경영학(시론)

    ○리스트의 ‘세계주의 경고’ 대공황의 전주가 시작된 1929년 10월24일 금요일은 뉴욕 월가에서 ‘암흑의 금요일’로 기억되고 있다.주가가 수직적으로 폭락하면서 미국 경제는 하루 아침에 다운된 컴퓨터처럼 주저앉고 말았다.실업률이 25%를넘어 1천3백만명이 실직했으며 공황의 파고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을 강타했다.시장경제와 세계주의가 조종을 울렸다. 지난 연말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체제로 접어든 한국은 지금 전대미문의 경제 변란을 경험하고 있다.국내외의 전문가들은 IMF 위기의 본질을 국제수준의 규범과 세계화시대에 적합한 경쟁질서를 따라가지 못한 폐쇄된 구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곧바로 보호주의의 종말을 알리는 요란한 경적처럼 금융,주식,M&A 시장에 남아있던 외국인 투자장벽이 남김없이 무너져 내렸다.세계주의로 회귀를 선언한 미국의 역습이다.E.H 카의 말대로 역사는 반복하며 현재와 과거의 부단한 대화임을 실감한다. 역사학파의 선구자인 리스트의 사상체계는 최근 한치 앞을 예단하기 어려운 불확실성 시대에 한번쯤 반추해 볼 가치가 있다.리스트는 19세기 말 독일 정부의 자유무역정책에 저항하며 고전학파가 복음처럼 신봉하는 시장원리의 초역사성과 세계주의를 비판했다.공업생산력과 무역이 타국을 압도하는 영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세계주의 원리가 국익에 부합되지만 독일과 같은 후진국에서는 자유무역정책이 민족적 실천과제를 해결해 줄 수 없으며,후진국은 선진국의 가치와 공유할 수 없는 고유의 목적과 역사적 개성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90년초 ‘정부’와 ‘시장’의 갈등적 관계가 첨예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가운데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을 서두를 즈음 엘리스 아담스의 ‘아시아의 다음 거인­한국과 후기산업화’가 국제경제학계에 뜨거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그는 이 책에서 산업혁명이나 기술혁신을 주도한 서구의 ‘전기산업화’와 구별하여 ‘후기산업화’란 ‘학습’을 통해 의도적으로 경제발전을 추구한 사업구조로 정의하면서 그 성공적 전형으로 한국을 지목했다.그리고 ‘후기산업화’가 ‘전기산업화’를 추격하기 위해서는 전략적이고 인위적인 선택이 필수적이라고 해석했다. ○다국적 기업의 생존방식 그동안 눈부신 고도성장과 함께 세계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역동성을 발휘하던 아시아 각국이 왜 줄줄이 IMF 구제금융의 수혈을 받는 신세로 추락하고 말았는가.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생산성이나 기술향상과는 무관한 것으로 성장결과는 노동과 자본의 투입량 증가에 단순 반응한 것이라는 폴 크루그만의 주장도 음미할 필요는 있다.한편 한국의 고비용­저효율 시스템에 이르면 더욱 더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준비되지 않은 개방화와 강요된 세계화가 아시아 경제에 고도의 취약성을 제공하고 있다.아시아인에게 세계화란 희망과 재난을 동시에 안겨주는 패러독스일 뿐 결코 유토피아는 아니다.세계화는 열강의 논리이며 경쟁력을 확보한 초일류 다국적 기업의 생존방식이다.이들은 국가의 강약빈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인 보호주의의 타파가 세계 경제의 후생을 극대화시킨다는 자유경쟁원리의 이론적 옹호를 받으며 지구촌 전역을 공략한다.특히 ‘적자생존’ ‘정글의 법칙’ 등 세계화를 통념화하는 무차별 경쟁윤리 속에는 다윈의 ‘진화론’과 맬더스의 ‘인구론’에서 도출된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적 계율을 정당화시키는 독소가 있음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하버드대 로렌스 교수는 오늘날 국제환경은 열강의 각축전이 극에 달했던 1차 세계대전의 전야를 연상케 한다고 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세계주의(WTO)와 지역이기주의(EU,NAFTA)의 첨예한 갈등에 미국의 쌍무주의(슈퍼 301조)가 이중,삼중으로 난마처럼 얽혀 열강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음을볼 때 그의 주장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감한다. ○실사구시의 노선 세우자 세계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대명제임에 더 이상의 이론이 없다.그러나 국제경제질서를 움직이는 힘의 실체와 방향은 분명히 간파해야 한다.이제 한국시장의 문은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다.개방화에 따른 ‘지킬’적 영향과 ‘하이드’적 영향을 분리해 실사구시의 세계화 노선을 자주적으로 확립할 수 있는 변별력과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한국의 자본주의는 아직 완료형이 아니며 미래형이기 때문이다.
  • 코소보사태 국제분쟁 비화 가능성

    ◎세르비아군,알바니아계 인종청소 강행/“제2 발칸화약고” 미·영 등 오늘 대책회의 세르비아 병력이 7일 신 유고연방 코소보주 알바니아계에 대한 소탕작전을 강행,지난 이틀간 알바니아계 ‘테러범’ 26명이 사망했다고 보안군측이 발표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지난주 보안군의 소탕작전이 시작된 이후 사망자가 50명정도라고 주장했으나 알바니아계 소식통들은 세르비아 병력과의 충돌로 발생한 사망자 수가 최소한 75명이라고 전했다.알바니아계 정당인 코소보민주연맹은 알바니아계 주민 5천여명이 이 지역을 빠져나갔다고 주장했다. ‘발칸의 새로운 화약고’ 코소보주에서의 유혈사태가 악화되면서 국제사회의 개입도 두드러지고 있다. 제 2의 발칸분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는 미국 독일 영국 등 서방국가들은 세르비아 병력의 알바니아계 학살에 대해 강경대응을 경고하고 9일 런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6개 접촉국 각료급 회의를 연다.그러나 접촉국회의 회원국인 러시아가 서방측의 개입 움직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난하고 나서 회의결과는 불투명하다.중국도 러시아측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알바니아계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알바니아는 세르비아측이 ‘인종말살 정책’을 자행하고 있다면서 지난 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 소집을 요청했다.알바니아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국경수비대에 비상경계령을 하달했다. 미국 등 서방측 움직임도 빨라졌다.로마를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은 7일 알바니아계 주민학살을 중단시키기 위한 ‘결정적이고 단호한 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알바니아계 난민의 대량유입을 우려하고 있는 독일의 클라우스 킨켈 외무장관도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을 검토할 것을 촉구,코소보 사태의 국제전 비화 가능성을 예고했다. 코소보 사태는 밀로세로비치 신유고 연방 대통령의 ‘세르비아 패권주의’와 알바니아계 민족주의 정면대결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따라서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인종분쟁의 성격을 띤 코소보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어떤 형태로든 국제사회의 개입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 중국이각종 제재조치에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유엔의 직접개입은 불가능하다.9일 접촉국 회의에 이어 소집될 것으로 보이는 안보리 이사국회의가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선거제도:상(대한민국 50년:10)

    ◎5·10 첫 총선 ‘애국심 투표율’ 95.5%/56년 3대 정·부통령선거 자유당서 불법 자행/60년 3·15땐 온갖 부정 총동원… 4·10혁명 유발 민주주의 발전은 선거의 성숙도와 정비례한다.헌정 초기에 성숙되지 못한 권력은 독재의 풍토를 조성했다.이는 급기야 부정선거를 초래했고 결과로 4·19혁명을 불러왔다.5·16군사 쿠데타와 유신헌법에 따른 기형적인 선거제도를 거쳐 드디어 97년에 이르러서야 여야 정권교체라는 최초의 민주적 선거혁명을 경험하게 됐다. 1947년 11월 14일.유엔총회에서는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국회가 정부를 수립케 하기 위해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파견한다’는 미국의 제안이 43대 0,기권 6으로 가결됐다.그러나 파견된 유엔한국위원단은 북한에 주둔한 소련 점령군의 방해로 남북 총선을 실시할 수 없음을 유엔에 보고했다.유엔은 1948년 2월6일,가능한 지역내의 선거 실시 권한을 한국위원단에 부여했고 이에 따라 역사적인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게 됐다. ○26개 정당·단체서 1명씩 드디어 1948년 5월 10일.남북분단과 내전을 우려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이 실시됐다.당시 언론에는 ‘애국의 단심을 결집한 감격의 투표’ 등의 제목으로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투표에는 7백84만871명의 유권자 가운데 7백48만7천649명이 참여해 95.5%라는 놀라운 투표율을 기록했다.첫 총선에는 무소속 417명을 비롯해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48개 정당 및 사회단체에서 모두 948명의 후보가 등록,평균 4.4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이 가운데 단 한명의 입후보자를 가진 정당 단체도 무려 26개나 됐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이날 선거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으나 한국의 통일과 주권을 향한 일보의 진전이 될 것이며 투표과정도 대체로 원활히 진행됐다”고 유엔에 보고했다.미군정청의 하지 중장도 “한국의 자유선거는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같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구 광주 보성 화순 등 각지역에서는 좌익 등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통신망 파괴와 경찰서 습격,선거공무원 피살 등소란사태가 빚어졌다.당시 선거를 전후한 폭동 및 폭행사건 등은 총 1천47건으로 집계됐다. 선거 결과 정원 200명중 4·3민중항쟁으로 제주도 2개구가 제외되어 198명이 당선됐으며 북한을 위해 100석은 유보시켰다.정당별 분포에서는 무소속이 85석을 차지했으며 다음으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회가 55석을 얻었다.김성수의 한국민주당이 29석,대동청년단 12석,조선민족청년단 6석,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석,대한노동총연맹 1석을 차지했다.김구의 한독당후보들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30석을 얻었다. 초대 국회는 제헌헌법을 제정한뒤인 1948년 7월20일 상오 10시 신익희 국회부의장의 사회로 초대 대통령선거를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실시했다.이승만 180표,김구 13표,안재홍 2표,무효 1표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에 선출했다.이어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시영이 당선됐다. 38선에서 소규모 충돌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5월 위기설이 정국을 불안케하는 가운데 1950년 5월30일,제2대 총선이 실시됐다.제2대 총선은 대한민국 정부 주관으로 실시한 첫 선거였다.6·25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선거는 실시됐다.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의 통과로 1952년 8월5일 제2대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부통령에는 무소속의 함태영이 당선됐다.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에게 독재의 길을 열어 주었다.이 선거에서 이승만정권은 야당에게 선거운동을 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선거 준비기간을 17일로 단축시켰다.당시 선거법은 선거일 40일전에 선거일자를 공고하도록 돼 있었으나 52년의 선거만은 예외규정을 두었다. ○유권자보다 많은 표도 1956년 5월 15일 치러진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에 의한 갖가지 관권선거와 부정선거가 자행됐다.선거 10일전 신익희 후보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에는 이승만 후보가 당선됐지만 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됐다.이는 자유당 정권의 실정에 대해 제한적이나마 국민들의 심판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대중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평가된다.‘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담은 민주당의 구호는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를 대변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의 집권 연장이냐,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냐 하는 갈림길이었다.이미 대통령선거에 앞서 58년 5월2일 실시된 총선에서는 정통야당 민주당의 승리로 끝났다. 대선에 앞서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이승만 정부는 7월까지 여유가 있던 선거일자를 3월15일로 앞당겨 실시한다고 공고했다.조박사에게 선거운동 기간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그러나 미국의 월터리드병원에 입원중이던 조박사는 2월15일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야당에서 대통령후보를 내지못함에 따라 선거전은 부통령선거전 양상으로 변했다. 자유당은 이대통령이 후계자로 지목한 이기붕을,민주당은 장면을 각각 부통령후보로 내세웠다.선거전이 불꽃을 튀기는 가운데 이미 4·19의 전조들이 곳곳에서 불거져 나왔다.일요일인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민주당의 정견발표회에학생들이 집결할 것을 우려해 당국은 학생들의 일요등교를 강행했다.이에 반발한 3백여명의 경북고 학생들은 학교를 뛰쳐나와 경북도청앞에서 시위를 벌여 주동학생 30여명이 구속됐다.3월5일과 14일에는 서울과 마산 등에서 소규모 학생시위가 잇따랐다. 3월15일.투표개시전에 4할의 무더기 투표가 나오는가 하면 투표함 검사를 거부하고 집단 대리투표를 하는 등 민주주의의 초석인 자유선거와 비밀선거는 완전히 파괴된 가운데 투표가 실시됐다.개표과정에서도 올빼미표가 등장했다.민주당의 투개표참관 포기로 투표와 개표를 마음대로 조작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를 지나치게 많이 발표해 총유권자수를 초과하는 지역도 있었다.대구의 한 선거구에서는 이기붕이 5천표,장면이 32표로 발표된 곳도 있었다.이날 밤 자유당은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이승만은 80%,이기붕은 70∼75% 정도로 지지율을 조정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를 믿는 국민들은 아무도 없었다.민심은 자유당을 떠났다.부정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기본권을 유린당한 이승만정권은 결국 4·19학생의거로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지는 종말을 맞았다. ◎여,50년 2대총선 야 중진 ‘좌경용공’ 조작/미 대사관 비밀 주간전문 ‘조인트위커’서 확인 선거에 있어서 상대를 음해하는 흑색선전은 우리의 선거사와 역사를 같이한다.최초의 총선에서 부터 가장 최근인 97년 12월 대선에까지 흑색선전은 여지없이 등장했다.주요선거때마다 ‘용공’문제가 이슈화됐으며 지난 대선때는 ‘북풍’문제로 까지 이어졌다.그러나 시민의식이 성숙되어가면서 흑색선전은 효과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이는 우리 선거문화 발전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한 미대사관은 한국정부의 주도아래 처음으로 1950년 5월30일 치러진 제2대 총선에서 “윤치영 이범석 임영신 등 대한국민당 지도부가 야당인 민국당 중진들을 ‘좌경용공세력’으로 조작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주요현안에 대한 사건보고와 논평을 담은 미대사관의 비밀 주간전문 조인트 위커(JOINT WEEKA)에는 “총선을 앞두고 한국정부와 정당들은 갈수록 공익과 신문 등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서 “상대당을 누르기 위한 루머도 난무하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미 대사관측은 “특히 민국당은 각 선거구에서 후보당 일백만원까지 지원해주었다.48년 선거때와 달리 민국당은 각 선거구마다 한 후보씩만을 지원하기로 계획하고 있다”고 보고했다.또 “대한국민당은 혼란을 야기하고 민국당을 누르기 위해 지역구마다 한사람의 후보를 지원하는데 덧붙여 70명정도의 ‘새도우’후보(비밀공천자)들을 지원한다는 소문을 냈다.따라서 적은 수의 후보를 미는 정당은 갈수록 줄어들었다”고 보고하고 있다.돈선거와 함께 상대당을 혼란시키고 같은 정당내에서도 서로를 의심케하기 위한 흑색선전이 동원됐다는 얘기다. 보고전문은 관권선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경찰은 48년때와 마찬가지로 선거가 자유롭고 비밀리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에도 불구하고,선거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 과학기술의 앞날은/박성래 외국어대 부총장(서울광장)

    ○무한한 발전을 믿는 사람들 과학기술의 발달은 놀라운 속도로 세상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런데 이렇게 과학과 기술은 계속 발달을 거듭할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오늘의 문삼고 있는 문제들은 모두 풀리게 될까? 한 세대 전의 과학사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즉 과학 논문은 약 15년마다 그 숫자가 그 전까지 나온 논문 수의 두 배나 된다.즉 과학 지식은 15년마다 두 배의 고속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그리고 이런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장래를 무한히 밝게 비춰 줄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낙관적인 생각이 지금은 많이 퇴색해 버린 것을 느끼게 된다.전세계적으로 이상한 미신과 괴상한 종교가 성행하는 요즈음이다.18세기 이래 현대인의 종교가 되었던 과학은 이제 위기에 서게 된 것일까? 시사잡지‘타임’이 새해 특집호를 내면서 과학의 장래에 대한 한 권의 책을 꾸민 뜻도 아마 이런 곳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이 특집의 끝에는 과학의 장래에 대해 두 과학평론가가 쓴 낙관론과 비관론이 실렸다. 낙관론자 매독스의 주장으로는 과학은 이제서야 겨우 성숙 단계에 도달했다.과학은 앞으로 무한히 발전해 가면서 많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우주의 시작에 대한 대폭발(빅뱅) 이론,생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유전자연구와 인간 두뇌에 대한 이해가 지금 그 절정을 향해 가고 있고,그것이 과학 발전의 추진력을 제공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게다가 인간은 지금까지 역사 발전 단계에서 전혀 엉뚱한 질문을 생각해 내고 그에 대한 답을 얻어 인간 문명을 발달시켜 왔다.그런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되면 전혀 다른 가능성의 세계가 인류 앞에 열릴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비관론자 존 호간의 주장은 정확히 같은 발전을 과학이 그 한계에 도달한 조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우주론은 이제 지극히 사변적 단계로 들어가고 말았고,대통일 이론의 추구야말로 일종의 불치병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고 그는 주장한다.또 실제로 과학이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문제가 얼마나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었던가를 그는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한계 도달을 말하는 사람들하나는 핵융합 연구로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도 20년 안으로 핵융합 연구에 성공하여 경제적이면서도 깨끗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하지만 지금 전세계의 과학자들은 핵융합 연구에서 슬그머니 발을 빼고 있다.아직 낙관적인 일부 과학자들 조차 그 가능성을 50년 뒤로 잡고 있다.또 미국정부는 1971년 공식으로 ‘암과의 전쟁’을 선언했고,지금까지 300억 달러이상을 쏟아 넣었지만,지난 50년 동안 암 사망률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앞으로 언제 암을 퇴치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일찍부터 과학 발달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말하자면 나는위의 두 사람 가운데 비관론자 호간의 주장에 더 가까이 서 있었던 셈이다.길게 설명할 여지는 없지만,내가 과학 발달의 한계성을 주장한 데에는 장자의 말에서 떠 올리게 되는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제약이 밑에 깔려 있다.즉“유한한 존재로서 무한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위태롭다”(이유애 수무애 태의)는 이유 때문이다. ○유한한 인간… 무한한 과학 인간은 수명도 유한하고,그 지능의 용량도 유한하다.하지만 그에 비하면 과학의 세계란 무한하고도 무한하여 도저히 비교하여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그러니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과학의 세계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하튼 어느 이유에서건 사람들은 이제 과학 발달의 무한과 유한을 놓고 고민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물론 그렇다 하여 과학 발달이 지금 어느점에서 정지할 것이란 뜻은 전혀 아니다.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앞으로도 언제나 나라와 나라,민족과 민족들 사이의 경쟁 분야가 될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과학의 궁극적 문제들은 점점 더 종교적 문제로 귀착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즉 우주의 시작과 물질의 시작,그리고 생명의 근본이나 우주의 종말 같은 궁극적 의문이란 결국 종교적 해답으로 귀착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관심 갖되 주눅들진 말아야 물론 그렇다 하여 그런 궁극적인 큰 문제들에 대한 과학적 관심을 접어둘수도 없는 일이다.과학은 그런 큰 문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중간적 발견들이 훌륭하게 생산적 역할을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다만 중요한 사실은 이제 우리는 과학 잡지를 장식하는 수많은 논문들의 행렬에 압도당하여 과학이 15년마다 두 배씩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식의 환상에서는 벗어나야 하겠다.요즘의 그 많은 논문들 상당수는 필자 이외에는 단 한 명의 독자도 없는 논문들일 수가 많기 때문이다.
  • 동서문화의 북방 통로(중앙아시아를 가다:15)

    ◎고구려,만리장성 북로 이용 서역과 교류/외교사절·통신 등 비밀 유지 위해/비단기 요충지 중원 피해 왕래/서역선 만리장성 남로 따라 고구려로 청동기 이전부터 유라시아 대륙에는 민족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그이동 통로는 한대 이후에는 비단길이라고 부른 고대 상업유통로였다.교역 상품들은 멀리 한국에서 영국까지 유통되었다.그러나 몽골제국 시대를 제외하고는 이 교역품들은 한번에 비단길의 끝에서 끝까지 간 것이 아니었다.여러 번 되팔리면서 여러 차례의 단거리 운송 끝에 유라시아 대륙의 끝까지 전해졌던 것이다.그 주 통로가 두말 할 필요없이 중앙아시아였다. 그리고 무역은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었다.이때문에 중앙아시아의 고대 및 중세 도시는 타지역과 비교할 수 없는 굉장한 부를 누릴 수 있었다.지역적부를 차지하기 위하여 중앙아시아에 세계사적 대정복전쟁들이 일어났던 것도 그 지역의 부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알렉산더 대왕,한나라,이란의 사산 왕조,당나라,티베트 왕조,위구르 왕조,몽골제국,또 청나라가 각각 중앙아시아의 비단길을 장악하려는 전쟁을 일으켰다.그러나 역사적으로 제국의 관심을 샀던 비단길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열강국 ‘비단길 장악’ 전쟁 청나라가 동투르크스탄 곧 신강성을 점령할 즈음,유럽의 열강이 해양을 통해 직접 중국으로 들어왔다.따라서 비단길은 급격하게 고립되고 그 기능이 상실되었다.이어 19세기에는 러시아가 서투르크스탄을 정복하면서 동서교류의 통로인 비단길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일정구간의 물품유통은 당연히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나 오아시스를 거쳐서 이동되었을 것이다.그러니까 서역에서 온 상품들은 신강성에서 하서주장을 따라 난주를 지나 서안에 이르러 집하되었다.이 상품들 가운데 얼마가 고구려까지 전달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남북조시대는 많은 소국들이 중원에 난립한 때다.그 상품들이 중원을 지나자면 여러 번 통관세를 내는 번거로움을 치르고 나서야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와 한반도에 전달되었을 것이다.이익을 위한 순수 상품의 유통일 경우에는 그런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이익을 위한순수상품이 아닌 경우에도 반드시 중원을 거쳐서 고구려에 왔을까 하는 의문이 간다.예컨대 고구려와 돌궐 칸 사이의 외교사절이나 중요한 통신같은 경우는 오히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중원을 피해서 서역에 갈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그리고 고구려에서 전교할 것을 이미 결정하고 전교행을 떠난 서역의 스님들 역시 그렇다.도중에 중원을 관광하기를 원하지 않는 한,중원을 우회할 수 있는 통로를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어떤 이유에서든지 서안에서 낙양과 북경을 거쳐 요동에 이르는 통로,곧 만리장성 남로를 피하여 고구려에 오는 길을 택한 동서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가장 잘 웅변해 주는 사건이 양무제때의 삼론종의 조사 승랑이었다.승랑은 원래 도사였기 때문에 저술을 남기지 않아 결국 송나라때의 ‘송고승전’에 빠졌다.그러나 그의 손자벌 제자인 가상 대사 길장이 그가 지은 ‘대승현론’과 ‘삼론현의’에서 다음과 같이 거듭거듭 강조한다.승랑은 요동에서 온 고구려 승려로서,양나라 무제때에 화남의 섭산으로 내려왔다.그가 가르친 공사상의 핵심이 진속합명중도인데,이는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가장 온전하게 전하는 논리로서 길장 자신은 물론이고 삼론종의 사상적 근거를 이룬다.이러한 주장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사상적 근거이기 때문에 삼론종은 중국에 대승불교를 건설하는 이론적 초석의 역할을 했다.다시 말해서 삼론종은 당나라의 대승불교를 유도한 안내자였다.이처럼 중요한 삼론종의 조사가 승랑이었다는 사실을 길장이 주장하는 것이다.그런데 승랑은 이미 요동에서 명성을 쌓고,화남으로 내려왔던 것이다.그리하여 양무제가 그를 모시려 해도,이를 뿌리치고 승랑은 산간에서 공사상의 진정한 뜻을 제자들에게 전하여 삼론종의 논학을 일으켰다.그리하여 공사상은 극동의 불교문화를 변화시키는 효시의 역사적 역할을 감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승랑만큼 큰 역사적 역할을 했던 한국 사상가가 또 있었던가.우리는 어째서 그를 잊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중원의 불교문화를 전환시킬 만큼 큰 힘을지닌 승랑과 같은 사상가는 결코 본인 당대에 나타날 수 없다.그만한 인물이 나타나기 위해서는,그를 성장시킬 수 있었던 불교 사찰이나 문화센터가 있어야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다.그런데 요동의 불교문화센터는 중원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랑은 요동에서 성장했다.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미 투르크의 오르혼비문과 사마르칸트의 고구려 사신도를 거론하면서 고구려는 한문이나 한문문헌지식과 관계없이 멀리는 로마의 사절들과도 교섭했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야기했다.이런 맥락에서 승랑이 성장했던 요동의 불교문화센터는 중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요동으로 들어온 서역의 승려들에 의하여 용수의 중관론이 전해졌을 것이라는 상정이 가능하다.고구려에서 중원을거치지 않고 투르크의 세계,곧 서역으로 직접 이어지는 통로는 두 길이 가능하다. ○고구려 벽화에 서역인 등장 하나는 신강성까지 와서 고비사막을 직접 건너는 이른바 만리장성 북로이다.다른 하나는 신강성도 거치지 않고 천산북쪽 현재의 카자흐스탄의 대초원을 가로질러 알타이산맥과 바이칼호수 사이의 계곡을 타고 몽골로 들어와 만주로 닿는 대스텝 통로이다.아마도 신강성의 동투르크스탄과는 장성북로가 더욱 편리했을 것이고,서투르크스탄의 서쪽 중앙아시아까지 가는 데는 스텝통로가 더 유리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북방방통로를 통해서 고구려인들은 서역인들과 직접 교섭을 했기 때문에 고구려 벽화에는 코가 큰 서역인들과 씨름도 하고 격기도 하는 풍습을 그릴 수 있었다.그 뿐 아니라 신라인들은 위구르조각과 같은 서역과의 문화교류의 흔적들을 남겼다.이제는 서역과의 교섭사를 개방된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 물이 정말 좋아졌나(사설)

    전국 대부분의 샛강이 하수종말처리시설 등에 힘입어 해마다 오염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환경부 자료가 나왔다.예컨대 서울 중랑천 수질은 95년 30.5ppm에서 97년 14.2ppm이 되었고 낙동강 물금지역은 95년 5.1ppm에서 97년 4.2ppm이 됐다는 것이다.우리는 이 수치를 믿고 싶다.늘 악화되기만 했던 물오염상황이 다소나마 개선된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희망의 단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하는 의문은 있다.곳곳 강물은 육안으로도 맑은 곳을 찾기가 어렵고,모든 조사자료에서도 오염양상은 어느 곳이나 위험선에 놓여있다.대도시에서는 이제 식수에 관한한 생수를 사먹는 것이 일반화되었다.그래서 또 93년부터 17조원이나 투입한 맑은물 대책 자체가 실패작의 표본이라는 분석까지 나와 있다. 기능적으로 보면 오수정화시설이 물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질오염의 주범이라는 역설적 사실도 있다.이는 지난해 말 환경부 자신이 밝힌 것이다.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등 4대강 수계별로 오염행위를 단속 한 결과 ‘101개 위반업소 가운데 56.7%인 57곳이 오수정화시설이었다’는 것이다. 환경단체들 주장에 의하면 수질을 조사하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다.수질을 나쁜 지점에서 채취해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좀 나은 지점에서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다.이 지적은 당국이 오염 조사지점을 확실히 밝히지 않는한 계속 될수 밖에 없다.각종 오염수치들의 일관성에도 맹점이 있다.오염단속 수치에서는 늘 위험도가 높게 나타나는데 수질조사 수치에서는 또 개선되고 있다는 평가가 자주 등장한다.이렇게 해서는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것이다. 수질개선 행정에도 투명성이 중요하다.그리고 환경부가 급히 할 일은 현존 하수종말처리장의 철저한 점검과 개수다.처리시설이 오염시설로 둔갑해 있다면 새 시설 설치보다 부실시설을 먼저 고치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
  • 샛강 다시 살아난다

    ◎안양천 BOD 88년 102.6ppm서 13.5로/금호강·무심천 등도 1∼8.6ppm으로 개선 샛강이 살아나고 있다. 4일 환경부에 따르면 대표적인 오염하천인 안양천의 생화학적산소요구량(BOD)은 지난 88년 102.6ppm으로 최악의 상태를 기록한 후 계속 개선돼 96년 14.6ppm으로 낮아진데 이어 지난해에는 13.5ppm으로 떨어졌다. 92년 BOD 38.9ppm이었던 중량천도 95년 30.5ppm,96년 17.7 ppm,97년 14.2ppm으로 해마다 수질이 좋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시를 거쳐 낙동강에 유입되는 금호강도 88년 98.7ppm으로 시커먼 간장물을 연상케 했으나 지난해에는 8.6ppm으로 떨어져 환경부의 지천수질 개선목표(10ppm 이하)를 달성했다. 금호강의 수질 개선에 힘입어 부산시민들의 상수원인 낙동강 물금지역의 수질도 95년 5.1ppm,96년 4.8ppm,97년 4.2 ppm으로 점차 좋아졌다. 금강수계의 무심천도 85년 51.1ppm까지 악화됐으나 93년부터 목표수질(10ppm) 아래로 떨어져 지난해에는 2.6 ppm을 유지했다. 만경강의 전주천도 88년 46.2ppm까지 나빠졌으나 그후 크게 개선돼 96년과 97년 2년동안 BOD 1.0ppm의 1급수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경기도 용인과 광주지역을 지나는 경안천은 주변지역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96년 7.5ppm에서 지난해 9.4ppm으로,분당과 성남을 거쳐 서울 잠실로 흐르는 탄천 역시 11.4ppm에서 13.5ppm으로 수질이 나빠졌다. 원주천도 원주지역 입주업체 및 인구가 늘어나면서 수질이 7.2ppm에서 11.9ppm으로 악화됐다. 환경부 고재영 수질정책과장은 “정부가 80년대 하반기부터 건립해 온 하수종말처리장이 본격 가동,각종 오·폐수를 20ppm 이하로 정화처리하면서 대부분의 지천 수질이 좋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 얼룩진 헌정(대한민국 50년:4)

    ◎52년 첫 개헌… 87년까지 9차례 뜯어 고쳐/이승만 이어 박정희도 종신집권 노려 헌법손질/69년 3선 개헌­72년 유신 선포… 대통령 간선 고착/전두환 쿠데타 집권… 87년 6월 항쟁 직선제 확립 이승만은 1954년 2차개헌으로 종신집권에의 길을 텄다.그러나 이는 몰락을 재촉했다.1960년 4·19혁명은 마침내 이정권의 무한권력 추구를 좌절시켰고 6월15일 3차 개헌을 가져왔다.큰 골격은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이다.그리고 헌법재판소를 설치하고 법률유보조항을 손질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정리하는데 촛점을 맞췄다.그러나 내각제 도입으로 3·5부정선거범 등에 대한 처벌근거인 정·부통령선거법이 소멸되자 혁명 주체세력들은 거세게 반발했다.학생들의 의사당 난입 등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집권민주당은 11월29일 이승만 정권하의 반민주행위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 근거규정을 헌법 부칙에 설치하는 4차개헌을 단행했다. 헌법의 수난은 갈수록 심화됐다.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군사쿠데타는 헌정파괴라는 극단적사태를 몰고왔다.국회는 즉각 해산됐다.이듬해 12월16일엔 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에 의한 5차 개헌이 단행했다.이 개헌안은 인권규정을 보강하고 미국식 사법심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외견상으로는 3권분립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그러나 핵심 골자는 부통령제 폐지와 정당설립 규제 등으로 대통령에게 권한을 몰아주었다. ○6차 3선개헌 날치기 처리 박정희는 5차개헌으로 부활된 새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중임제한 규정에 부닥치자 전에 이승만이 걸었던 전철을 답습했다.영구집권의 획책한 것이다.중임제한 폐지 개헌안이 야당의 거센 반대에 부디ㅊ치자 1969년 10월21일 새벽 국회 제3별관에서 야당의원들을 따돌린채 여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들만으로 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다.3선개헌으로 불리는 6차개헌이 그것이다. 개헌뒤 실시된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대통령 3선에 성공했다.그러나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박정희 634만표,김대중 539만표로 나타난 개표결과는 영구집권에 대한 위기감을 증폭시켰다.그래서 영구집권을 확실하게 제도화하는 장치를 마련했다.이것이 바로 헌정 수난의 절정판인 이른바 유신헌법이다. 유신은 1972년 7월17일에 선포됐다.이날은 아침나절 약간 흐렸으나 낮부터는 전국적으로 맑았다.시민들의 생활은 평온했으며 각 관청들만 막바지에이른 국정감사로 다소 부산했다.이날 상오까지만 해도 국체변혁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나 물밑에서는 이를 위한 시나리오가 극비리에 착착 진행됐다.상오9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우시로쿠(후궁호랑) 주한일본대사와 만나 약 20분간 요담한데 이어 10시 15분부터는 필립 하비브 미국대사와 40분간 요담을 가졌다. 유신을 통보한 자리였지만 누구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러나 하오가 되면서 여기저기서 이상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서울 소공세무서에 대한 국정감사를 행하던 재무위에서는 “야당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국회가 해산될지 모른다”는 협박투의 발언이 여당의원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날 상오 청와대 대통령집무실에서는 박정희 주재로 마지막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박정희는 둘러앉은 보좌관과 비서관들을 응시하다가 서랍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모두 한번씩 읽어보고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시오” ‘하오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헌법 정지,국회 해산,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개헌,….’달리 의견이 있을수 없었다.너무도 엄청난 일에 모두 할말을 잃었다.이어 외무장관 김용식은 하오5시 주한외교사절 23명을 불러 유신단행을 설명했다. 계엄선포 H아워를 1시간 앞둔 하오6시 청와대에서는 영문도 모른채 소집돼온 국무위원들이 비상계엄령을 의결했고 같은 시간 시내 전역의 주요 공공건물에는 계엄군이 포진하기 시작했다.중대뉴스가 예고된 하오7시,라디오에서는 헌법의 효력을 2개월간 중지시키겠다는 박정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유신이 일단 선포되자 개헌작업은 미리 짜인 각본에 맞춰 일사천리로 진행됐다.작업은 신직수 법무·이경호 보사·서일교 총무처장관과 유민상 법제처장,헌법학자 한태연·갈봉근 교수로 구성된 법무부 헌법심의회에서 맡았다.하지만 실상은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팀으로 구성된 일명 ‘기획소위’가 건네준 골자를조문화하는 것에 불과했다.이때 심의회의 역할이 어땠는지는 “이 헌법의 기본골격은 이미 고위층에서 만든 것이므로 골격 자체에는 일체 손을댈 수 없습니다”고 한 신직수의 발언이 입증하고 있다. 개헌안은 유신선포 25일만인 11월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됐다.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간선과 대통령의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국회의원 3분의1과 대법원장 등 전법관 임명권 보유 등 사실상 대통령 1인의 무한권력 창출이었다. 박정희에게 유신헌법은 종신집권을 담보해주는 안전판이었다.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종말로 향하는 단초이기도 했다.국내 상황은 팽팽한 긴장으로 치달았고 최대우방 미국과도 갈등이 깊어갔다. ○80년 8차개헌 간선제 유지 서울신문이 최근 입수한 미국 국무부의 ‘한미관계의 조사’라는 보고서는 당시 한미관계가 급속하게 악화돼 갔음을 보여준다.유신 직후인 73년 미연방수사국(FBI)의 정보를 토대로 국무부가 작성한 이 문건에서 이미 미국이 경제원조 중단과 미군철수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결국 안팎으로 시련을 겪던 유신은 끝내는 1979년 박정희의 피살과 함께 또한번의 헌정중단 및 개헌을 초래했다.공백상태의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은 민심을 얻기 위해 1980년 10월27일 복지규정 보강 등으로 위장한 8차 개헌을 실시하지만 권력획득의 핵심인 대통령 간접선거는 그대로 유지했다.전두환 군사정권은 강압적 통치로 일관하다 직선제 개헌 요구로 상징되는 전국민적 저항에 굴복하고 말았다.그래서 87년 6월29일 개헌을 수용하기에 이른다.이 9차 개헌의 결과물이 현행 헌법이다. 헌정 50년을 맞는 올해는 그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가 정권을 인수인계하는 뜻깊은 해다.하지만 헌법은 또다시 개정의 고비를 맞고 있다.내각제 공약을 내건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합정권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미,73년부터 “유신철회” 압박/본사특별취재반,미 하원보고서 입수 확인/“주한미국 철수” 일방선언­‘코리아게이트’ 돌출 유신이 절정을 이뤘던 1970년대 중반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은 급기야 1977년 3월9일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를 일방선언했고 6월에는 미중앙정보국(CIA)의 청와대 도청사건이 불거졌다.한국내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한국정부의 항의가 거세자 미국은 박동선 사건으로도 불리기도 했던 코리아게이트를 돌출시켜 한국정부를 더욱 옥죄었다. 모두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철회를 겨냥한 미국정부의 압박전술이었다.그런데 미국은 이처럼 유신에 대해 명백하게 거부태도를 보이기 훨씬 전부터 유신의 몰락을 예견한 교포들의 지적들을 주목했으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압박수단도 강구했었음이 최근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문건에서 확인됐다. 이 문건은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1978년 작성한 ‘한미관계의 조사’(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라는 보고서에 포함된 것으로 1973년 9월 미연방수사국(FBI)의 정보보고를 토대로 하고 있다. 문건은 김대중 등 미국내에서 반한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인과 교포들의 증언을 인용한 것이다.문건은 “남한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으로 인해 아시아권에서 점차고립되는 상황이고 대미관계에서도 원조와 군사지원을 둘러싸고 문제가 커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문건은 이어 “한국인들은 만약 미국이 일본과의 공조아래 경제원조 및 권사지원 철회로 압력을 가할 경우 박정희 정권은 급격히 붕괴할 것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이 문건이 작성된 직후부터 미국내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의 활동에 대한 FBI의 사찰이 강화됐다.이와 더불어 한미 정부간에 인권침해와 내정간섭을 놓고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됐던 사실에 비추어 이 보고서는 미국정부의 정책결정에 큰 작용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문화부 기자 서정아 문화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한국 정권교체는 신뢰회복 전기(해외사설)

    지난 30년간 동북아가 그리고 최근에는 동남아가 경제비약의 모델로 인용되어왔다.그러나 민주주의는 그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독재체제,계엄령,부패와 압제가 상처를 남겼으며 나라에 따라 정도는 다르지만 그러한 상처는 아직도 잔존하고 있다.민주주의는 아직도 생동하는 아시아의 속성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한국 유권자들의 투표는 주목할만 한 것이었다.그들은 반체제인사인 김대중씨를 권력의 대안으로 선택함으로써 진정한 정치성숙의 실례를 제시했다.오랜기간 독재정권을 거쳐 경제적 파산으로 끝난 불완전한 민주주의를 경험한 다음 민주주의 투쟁의 상징인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권좌에 오른 이 어제의 반체제 인사는 한국이 큰 사회적 문제에 봉착할 위험성이 있는 재정위기를 극복해나가는 데 적절한 인물일까.16년간의 가택연금과 투옥,두번의 암살기도에 맞서 싸웠다는 점은 적어도 역사적 정당성을 갖게 하며 40년간 한국을 통치해온 정당과 엘리트층과의 필요한 단절을 구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 단절은 한국이 신뢰의 위기에서 탈출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신뢰의 위기는 재정적 부도보다도 장래의 더 큰 장애다.국제사회는 현재 한국을 믿지 않는다.갚지 못할 빚을 가지고 세계 각지에서 사업을 확장한 재벌들의 허세가 한국의 신용에 타격을 입혔다.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한국의 경험과 경제적 잠재력은 번영의 후신인 젊은 세대들이 덜 희생적이라 해도 국민들의 결집력과 함께 재건의 담보가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당선됐다면 해외에서 한국의 참담한 이미지가 계속된다는 메시지일 수도 있었다.그러나 변화를 선택함으로써 한국인들은 유익한 정치적 분발을 보여주었다.이는 전제주의가 흔히 부패와 결탁하는 소위 아시아적 발전 모델의 종말를 상징할 수 있을 것이다.아시아의 경제위기는 실업으로 귀착될 가능성이 크다.이는 인기에 영합하는 민족주의적 발작을 일으키게 하거나 전제주의적 수단방법을 선동함으로써 발전에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그런점에서 한국의 선택은 본받을 만큼 매우 모범적이다.
  • 금융위기·대선편승 대남교란­비방 강화/중앙방송등 관영매체 총동원

    ◎국론분열·민심이반 부추겨/IMF 경제예속 악의적 부각­대선을 투견 비유/노동자·대학생 반정부투쟁­한총련 재건 선동 그동안 식량·경제난으로 수세적 입장에 놓여있던 북한이 때를 만난듯 우리의 금융위기와 대선정국에 편승,비방과 교란선동 등 대남공세를 강화하고 있다.연일 중앙방송,중앙통신,평양방송 등 각종 관영언론매체들과 민민전방송 등 흑색선전매체들을 총동원,경제문제와 대통령선거에 초점을 맞춰 국론분열과 민심이반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북한 방송들은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자금을 지원받고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심각한 부도위기에 몰리는 등 경제환경이 날로 악화되자 한국의 금융위기를 주요 뉴스로 보도하고 있다.방송들은 한국 언론의 보도를 인용하는 형식을 빌어 통화·금융위기와 외채 급증,주가 폭락,실업자 급증 등을 보도하면서 정부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불만을 부각시키고 있다.또 한국내 중소기업인의 자살 등 자극적인 소식을 사건발생 시간에 관계 없이 반복 보도하는가 하면 남한 주민들이 처참한 생활을하고 있다는 등 악의적이고 사실을 왜곡하는 보도로 일관하고 있다.북한측의 이같은 보도행태는 한국에 대해서는 국론분열과 민심이반을 부추기고 대내적으로는 식량난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들의 불만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한국의 금융위기 및 대선정국과 관련해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있는 점은 ▲한국경제의 외세예속 심화 ▲한국경제의 문제점 ▲정치판에 대한 혐오감 조성 ▲대통령에 대한 인신공격 등이다.IMF의 구제금융 지원에 대한 비난은 ‘예속성의 심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이조 말기 일제가 들이민 국채에 덜미를 잡혀 종말을 고했던 그 때가 연상된다”며 과거사를 들추면서 “경제를 신탁통치에 내맡겼다”,“남조선 경제를 외세에 더욱 예속시키고 파산의 구렁텅이에 더욱 깊이 밀어넣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악의적인 보도를 하고 있다. 또 한국경제에 대해서는 “칠흙같은 어둠이 남조선 경제를 뒤덮고 있다.금융시장이 제 기능을 잃은지 오래고 기업부도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남조선에서 내년 최악의 실업사태가 초래될 것이며 실업율은 올해의 2배가 넘을 것”이라고 전했다.또 한국 경제위기가 고조되는 것에 편승,소년소녀가장들의 생활고와 청소년 자살 문제 등을 한데 묶어 한국민들의 어려워진 생활상과 사회불안을 과장·왜곡 보도하고 있다.대통령선거와 관련해서는 선거를 투우와 투견경기에 비유하면서 한국민들의 정치혐오감 조성을 적극 선동하고 있다.주요 정당의 후보들과 그 주변 인사들을 ‘사람값 못나가는 추물들’이라고 원색적인 비방을 하면서 “선거전이 한덩어리의 비계를 놓고 으르렁거리는 난투극 같다”고 비하하고 있다.또 “권력욕에 환장한 ‘정치 간상배들’들의 각축전은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더욱 치열해지고 있고 남조선 인민들은 혐오 끝에 침을 뱉고 있다”고 악의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북한은 이같이 한국의 경제및 정치상황을 왜곡 보도하는 한편 노동자 및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반정부투쟁과 한총련 재건을 선동하고 있다.
  • 학술지 ‘안과 밖’ 윤혜준·성은애 교수 논문

    ◎‘노튼 영문학 앤솔로지’지적 편견 비판/시대구분 모호·특정작가들에게만 특혜 우리나라 대학의 영문학 교재로 절대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노튼 영문학 앤솔로지’에 대한 비판이 국내 영문학계에서 처음으로 본격제기됐다.최근 나온 반연간 영미문학 학술지 ‘안과 밖’(창작과비평사) 3호는 ‘노튼 영문학 앤솔로지’의 지적 편견과 이데올로기성을 비판한두 편의 논문을 실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한국외국어대 윤혜준 교수의‘노튼 영문학 앤솔로지의 편집,가격,무게’와 단국대 성은애 교수의‘고전 교과서로서의 노튼 영문학 앤솔로지’가 그것.‘거울과 램프’라는 비평서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미국 코넬 대학의 에이브럼즈 교수가 편자 대표격으로 되어있는 이 앤솔로지는 1·2권을 합쳐 5천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지난 93년 6판까지 출간됐다. 윤교수는 우선 ‘노튼 영문학 앤솔로지’가 초서·시드니·스펜서·셰익스피어·던·밀턴·드라이든·포우프·존슨·워즈워스·테니슨·아놀드 등으로 이어지는 잉글랜드의 남성작가들이 영문학 전통의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을 지면의 철저한 차별을 통해 강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적잖은 사상적 성취와 기술적 발전을 통해 근대 영국사회의 형성에 기여한 스코틀랜드인들은 대체로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다.실제로 이선집의 1권에 나오는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로는 제임스 보스웰이 유일하다.또 낭만주의 이후를 다루는 2권의 경우 스코틀랜드인으로는 번즈와 칼라일,스코틀랜드 어머니를 둔 바이런 등이 있고 월터 스콧과 휴 맥다이어미드가 한 구석에 끼어 있을 뿐이다.윤교수는 또한‘노튼 영문학 앤솔로지’는 산문 편집에 관한한 일관된 원칙이 없다고 비판한다.18세기 소설은 왜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외롭게 대변하며,19세기 소설은 왜 조지 엘리어트의 ‘플로스 강가의 방앗간’ 일부를 제외하면 낄 수가 없는가라고 그는 반문한다. 한편 성교수는 ‘노튼 영문학앤솔로지’의 시대구분상 문제점을 집중 비판한다.이 선집의 시대구분은 다른 대부분의 영문학사 책과 마찬가지로 왕조의 전환,정치적 사건,문예사조,세기의 전환 등 여러 기준을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이 앤솔로지 3판에서는 워즈워스와 코울리지의 ‘서정 담시집’이 출간된 1798년을 낭만주의 원년으로 삼고 1차선거법개정안이 통과된 1832년을 낭만주의 시대의 종말로 삼은 반면,6판에서는 초기 낭만주의의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1780년대의 중간인 1785년을 낭만주의의 기점으로 삼고 낭만주의 작가들이 더이상 생존해 있지 않거나 제대로 된 작품을 쓰지 않게된 1830년을 낭만주의 시대의 종말로 보는 등 시대구분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다.이처럼 특정작가들이 편집상의 배려와 특혜를 누리고 있는 사실은 이 앤솔로지가 일정한 정전(정전,canon)을 전제하고 있음을 반증한다.이번 특집과 관련,문학사연구의 처음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정전에 관한 논의가 보다 활성화할 것인지에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아름다운 물/임정규 한국수자원공사 사장(굄돌)

    물은 산소와 수소로 모아져서 사람들에게 생수를 제공하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물이 만드는 자연의 아름다움 또한 지극하다.물이 없으면 사막이다.사막엔 모래바람만이 불고간다.사람이 살 수 없다.우리는 물이얼마나 귀중한지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물처럼 살아간다면 평화가 저절로 만들어지고,타인에게 른 나라에게 생명을 유지할 도움을 주고,아름다운 사람들이 될 것이다.물은 산소가 수소를 껴안고 흘러간다.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거기엔 화가 없다.불만이 없다.온화함만이 있다.우리가 물로부터 교훈을 잊지 않고 산다면 우리가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아름다움을 보이고 산다.공장의 기계를 돌아가게 하고,걸레를 씻어내주고 묵묵하게 흘러간다.바위가 있고,언덕이 있으면 돌아간다. 사람들도 물길 위에 마을을 짓고,밭·논을 만들고,도로를 만들며 살다가수를 당하고 산다.지나치게 물을 많이 쓸 때 물의 질은 나빠지고 우리들은그 나쁜 물을 깨끗하게 환원하는 돈을 쓰게 된다.하수도가 그래서 존재한다.하수종말처리장이 그래서 존재한다.우리의 물 문제는 우리가 더럽혀 놓은 물을 깨끗하게 환원하는데 돈을 인색하게 쓰는데서 온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우리가 고쳐야 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공장이 화학폐수를 몰래 버리고,목장에서 가축들의 배설물을 여과없이 강으로 흘려보내고,사람들이 하수처리장을 만들지 않고 물을 그대로 강물에 버린다면 결국 강물은 그 본래의 물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된다.결국 사람들이 물에게 죄를 짓고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물과 자연에게 fair해야 한다고 믿는다.우리가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는 강물을 깨끗하게 대해야 한다.우리가 물의 질을 나쁘게 했다면 돈을들여 좋게 환원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그것이 바로 fairness.우리나라의 말 속에 fairness를 번역할 말이 없음을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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