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레싱의 ‘생존자의 회고록’
“도리스 레싱은 여성의 경험을 서사적으로 풀어내는 시인이다. 회의하는 눈과 시적 영감, 비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분열된 현실 문명을 파고 든다.”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영국의 도리스 레싱을 선정하면서 이 같은 배경을 밝혔다.
이런 레싱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생존자의 회고록(The Memoirs of a Survivor)’(황금가지)의 개정판(초판 2002년 출간)이 출간됐다.197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당시 유럽 사회를 짓누르던 세기말적 징후를 자전적 SF판타지 형식으로 묘사해 유럽 문단에서 “인류가 꿈꾸는 어두운 백일몽을 가장 레싱답게 소설화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레싱은 이 작품을 통해 줄기차게 ‘물질문명의 종언’과 ‘인류의 파멸’이라는 단선적인 예단을 내린다. 이런 그의 문명비판적 시각은 현대 과학과 사실주의, 신비주의의 경계를 넘나들며 뉴욕타임스의 서평이 말했듯 ‘반짝반짝 빛나는 우화’를 빚어냈다. 판타지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가상을 배제하고, 그러면서도 인간과 문명의 문제를 꼬집는 문제의식을 버리지 않는다. 머잖은 미래, 많은 현자들의 우려처럼 물질문명이 마지막 불꽃으로 명멸하는 순간, 세상은 지금까지 ‘문명을 지탱하는 가장 충실한 기제’라고 믿었던 이성적 질서와 발전의 동력을 잃고 마치 추락하는 비행체처럼 파멸의 굉음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내 통제할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영국, 눅눅한 이곳의 한 도시에 사는 중년 여성인 ‘나’는 어느날, 벽 너머에서 현실에 없는 숨겨진 방들을 보게 되고, 그 방에서 ‘과거’와 ‘미래’,‘공상’과 ‘실제’가 파노라마처럼 교차하는 와중에 어린 여자아이 ‘에밀리’가 그에게 다가온다.
빈곤과 약탈, 학살이 자행되는 ‘나’의 현실에서 희망이라곤 찾을 수 없고, 에밀리와 함께 암울한 현실의 장벽에 갖혀 있는 나날이 계속된다. 두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두려운 바깥 세상, 그러나 그녀는 결국 이런 세상과의 소통에 나선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물질문명의 궁극에서 마침내 정신분열로 내몰리는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미래에 대한 인류의 기대를 일순 우려로 바꿔 놓았다.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려는 인간은 마치 시궁쥐의 몰골처럼 비열하고, 무기력하며, 더럽고 구차하다.‘나’와 에밀리는 서로 의지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절망은 그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 두려운 것은 그들이 느끼는 절망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고, 무엇에 대한 것인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영국 문단에서는 이 작품을 ‘내면적 공상소설’이라고 지칭했다. 일반적인 과학소설과 달리 인위적인 설정이 배제된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오로지 ‘나’의 독백과 심리 묘사를 통해서만 어두운 미래상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레싱은 이 작품에서 특유의 직관과 통찰력이 넘치는 문체를 구사해 많은 사람들이 ‘희망’이라고 믿는 미래를 공포가 지배하는 종말적 상황으로 그려냈다. 이런 작가의 의도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바로 공상을 사실화한 그녀의 재능이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생존자의 회고록’은 지금도 할리우드에서 양산되는 허접한 SF영화의 그렇고 그런 시나리오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