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의 빨강 아닌, 위로의 빨강 만나는 순간
이근민, 정신질환을 회화로 승화빨간색 등으로 치유와 생명 표현이지현은 붉은색으로 과거 소환돌아가고 싶은 따뜻한 순간 그려수많은 색깔 중 빨강처럼 명백한 상징성을 띠는 게 있을까. 미술에서 빨간색은 정열, 에너지, 혁명, 그리고 사랑의 동의어로 쓰인다.
이근민·이지현 작가는 이런 기존 문법에서 벗어난 빨강을 펼쳐 보인다. 작풍은 전혀 다르지만 이들은 특정한 장면과 대화로 기억되는 어느 순간, 머릿속에 오래 남는 강렬한 찰나를 독창적인 붉은색 이미지로 표현한다.
이근민 작가는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에서 자신의 정신질환을 바탕으로 한 회화와 드로잉을 선보인다.
초등학교 때부터 원인 모를 구토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대학 진학 이후 환후(幻嗅)가 심해졌다.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시체 썩는 냄새를 맡았다. 병원에서 진단받은 병명은 경계성 인격장애. 몇 달간 입원해 겪은 환각과 피해망상, ‘덜 아픔’을 증명해야 하는 억압의 기억은 그에게 고통이자 작업의 원동력이 됐다.
캔버스를 채우는 건 인간이나 짐승의 살, 내장으로 보이는 추상들이다. 작가가 보는 환각을 형상화한 듯한 작품은 비정상적인 느낌을 주지만 거북하지만은 않다. 그에게 빨강과 주황, 노랑 등 난색은 살, 피, 그리고 생명의 빛깔이다. 그림은 병으로 인한 기억에서 벗어나는 통로이자 개인을 멋대로 분류하고 재단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반기이기도 하다. 이 작가는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고, 가리게 만드는 세상에서 이를 서로 공유하고 위로받고 싶었다”고 전했다. 오는 18일까지.서울 종로구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개인전 ‘레드씬’을 열고 있는 이지현 작가에게 빨강은 잊힌 과거를 현실로 소환하는 장치다.
12년 전 미국으로 이민 간 뒤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내면 깊숙이 자리한 유년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유난히 붉은색으로 부각됐던 부엌 벽면, 사물이 비칠 정도로 맨들맨들했던 빨간 찬장이 그것이다.
2m가 훌쩍 넘는 대형 회화 ‘레드씬 글립토텍’은 이 붉은 부엌의 이미지와 그동안 경험한 현실, 혼재된 기억이 일종의 콜라주처럼 겹쳐진 작품이다. 작가에게 붉은색 공간은 작품과 관람객을 분리하는 경계이자 가상과 현실, 실재와 허상,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곳을 뜻한다. 그는 “부엌에서 어머니, 가족들이 시간을 보내며 대화하는 모습은 꿈에 나올 정도로 그리운 장면”이라며 “붉은색은 과거로 돌아가기 좋은 색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 준 수제 인형을 떠올리며 만든 봉제 오브제, 도자기 드로잉, 대형 회화를 작업하는 중간중간 환상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던 여러 생각을 이미지화한 ‘판타즈마’ 연작들은 아기자기한 재미를 준다. 오는 2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