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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 다르게 보나요 색다르게 보나요

    색 다르게 보나요 색다르게 보나요

    낙인찍힌 몸/염운옥 지음/돌베개/448쪽/2만원인종 토크/이제오마 올루오 지음/노지양 옮김/책과함께/320쪽/1만 5000원인류의 역사를 보자면 몸으로 인한 차별과 배제, 심지어는 학대가 숱하다. 이른바 인종 차별이다. 그 차별의 악순환은 끊을 수 없는 것일까. 최근 나란히 출간된 ‘낙인찍힌 몸’과 ‘인종 토크’는 바로 타고난 몸 때문에 받는 차별과 배제를 정색하고 짚고 있어 눈길을 끈다. ‘낙인찍힌 몸’이 인종주의의 역사를 훑어 차별의 수난과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짚었다면, ‘인종 토크’는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내야 했던 고난의 체험을 자전적 에세이로 풀어낸 사회비평서로 읽힌다. ‘인류는 호모사피엔스 단일 종이며 아프리카 동부에서 기원해 지구 구석구석으로 이주했다.’ 상식으로 굳어진 이 가설에 기댄다면 인종주의와 인종차별은 있을 수 없는 개념이다. 하지만 ‘인종차별 금지’의 구호가 범람하는 지금도 세상에는 차별과 배제가 요란하다. 도대체 인종주의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낙인찍힌 몸’에 따르면 근대 이전 유럽에서 ‘인종’은 가축의 혈통이나 품종을 가리켰지만 16세기경부터 유럽 각국에서 인간에 적용됐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인종주의라는 악마는 서양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바탕이며 백인 우월주의 신화를 창출했다”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그 편 가르기와 지배 유지 수단으로서 인종주의 연원을 1492년에 일어난 두 사건에서 찾는다. 바로 콜럼버스가 항해를 시작한 것과 기독교도가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면서 벌였던 재정복 전쟁인 레콩키스타의 완성, 즉 그라나다 함락이다.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각축이 유럽과 구분한 비유럽 세계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그라나다 함락 이후 개종한 유대인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그들은 우리와 핏줄이 다르다’는 생각을 낳았다고 한다. 피가 다르기에 개종해도 동화될 수 없다는 논리의 정착인 셈이다. 그 뿌리 깊은 유대인 배제와 학대는 20세기 중반 나치의 과학주의에 바탕한 인종주의와 맞물리면서 그 유명한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저자는 유대인과 무슬림의 ‘낙인찍힌 몸’은 종교적 소수자에서 인종적 소수자로 전환한 닮은꼴이라고 말한다. 19세기 후반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을 인종으로 발명했던 것처럼 이슬람 혐오도 무슬림 인종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이다. “유대 인종의 발명과 낙인찍기가 박해와 학살로 귀결되었던 역사를 알고 있기에 반유대주의와 이슬람 혐오 사이의 유사성은 불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종주의 피해자로 여겨졌던 한국인들도 지금 가해자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있다.‘낙인찍힌 몸’에서 흑인은 인은 빼놓을 수 없는 영역이다. 미국에서 흑인 차별의 뿌리 깊은 역사는 ‘한 방울 법칙’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이라는 이 법칙은,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인종 분류법이다. 책 ‘인종 토크’는 흑인 여성 저널리스트 겸 활동가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낙인찍힌 몸’의 실상과 대안을 함께 제시해 주목된다. 백인 어머니와의 갈등, 학창시절 자신의 몸에 쏟아지는 눈총, 직장 생활 속 차별 대우와 무시는 매일 반복된다. 차를 세워주지 않는 우버 운전자들, 구인광고를 붙여놓았다가 자신이 들어가면 갑자기 직원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회사,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바짝 붙어 졸졸 따라다니는 점원…. 어느 순간부터 그 차별과 비하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저자는 그 체험적 인종 문제를 17개의 카테고리로 추려 문답 형식으로 책을 썼다. 지방선거에 참여하기, 노동조합에 목소리 내기, 유색인 소유기업 지지, 다양한 인종의 정부 대표 뽑기. 실제 활용할 수 있는 대안 지침까지 제시한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골목만 돌면 항상 맞닥뜨리는 이 인종주의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아야 한다. 인종주의를 우리를 쫓아다니는 무시무시한 괴물 정도로만 취급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도망 다닐 수밖에 없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135년 만에 표준정관 만든 한국 개신교… 갈등 치유할 ‘바이블’

    135년 만에 표준정관 만든 한국 개신교… 갈등 치유할 ‘바이블’

    개신교계가 교회 운영과 관리, 재산권 행사와 관련해 공통으로 사용하거나 적용할 수 있는 표준정관이 마련됐다. 한국교회법학회는 최근 한국교회표준정관을 확정하고 그 주석서인 ‘한국교회표준정관 매뉴얼’을 9일 공개, 배포했다. 135년 한국교회 역사상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표준정관이 마련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하나의 교회’라는 가톨릭교회의 헌법은 전 세계 모든 교인들에게 효력을 발휘한다. 그에 비해 개신교 교회의 기본규범인 정관은 교회의 규모나 여건에 따라 편차가 크고 제각각이어서 갈등과 분쟁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특히 분쟁이 교회 안에서 해결되지 못해 사회법 소송으로 번지기도 한다. 이에 따라 교회법학회는 목회행정 경험이 많은 목사·장로들과 교회소송 실무 경험이 많은 교회법 전문변호사, 교회법 전공 교수들로 ‘표준정관위원회’를 꾸려 표준정관을 준비해 왔다. 확정된 표준정관은 주요 교단의 모범정관을 참조해 초교파적으로 구성됐다. 한국교회 주류를 이루는 장로교회 정관을 기본 모델로, 초대형교회나 개척교회보다는 중간 정도 교회를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많은 교회 분쟁의 대상이었으면서도 기존 교회 정관에서 소홀히 다뤄졌던 교회 재산과 재정에 관한 부분을 종교인 과세에 맞게 구체적으로 기술한 게 특징이다. 제1장 총칙, 제2장 교인, 제3장 교회의 직원, 제4장 교회의 기관, 제5장 교회의 재산과 재정, 제6장 보칙의 총 6장 68조항과 부칙 2조항으로 돼 있다. 이날 공개된 한국교회표준정관 매뉴얼은 간략 주해서로 표준정관 각 조항의 의미 및 배경과 근거, 조항 상호 간의 관계, 조항 적용 사례를 엮었다. 교회정관 각 조항에 관련된 법원 판결례와 교단재판국 결정사례를 바탕으로 각 조항에 대한 관계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친 객관적 해석을 담고 있다. 한국교회법학회 회장인 서헌제 중앙대 명예교수는 “많은 분쟁들이 교회 내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사회법정으로 가고 있다”며 “한국교회표준정관 매뉴얼이 분쟁으로 얼룩진 한국교회를 치유하고 바로 세우는 데 쓰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美대사관 인질극 악연, 친미 중동국들 과장이 ‘이란 혐오’ 키웠다

    美대사관 인질극 악연, 친미 중동국들 과장이 ‘이란 혐오’ 키웠다

    미국은 이란을 미워하고 두려워한다. 여론조사업체 갤럽은 지난 2월 미국인의 82%가 이란을 대체로 싫어하거나(46%), 몹시 싫어한다(36%)고 밝혔다. 또 미국인 93%가 10년 안에 이란이 미국의 실제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미 사회 저변에 이란 혐오와 공포가 깔린 것이다. 왜일까.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했거나, 화학무기로 대량 학살을 저질렀거나, 미국의 국익에 현저한 위협을 가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다.이란은 미국이 경험해 본 적 없는 수모를 안긴 나라다. 이란은 1979년 2월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를 전복했다. 지미 카터 당시 미 대통령은 미국을 등에 업고 민중을 탄압했던 샤(왕) 무함마드 리자 팔레비의 미 입국을 허용했다. 샤의 송환, 재판 그리고 처형을 요구했던 이란인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강경파 대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을 점거했다. 대사관 직원 등 52명이 444일간 인질로 붙잡혔다. 미대사관이 점령당하고 미국인이 인질로 잡힌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중동전문가 윌리엄 비먼 미 미네소타대 인류학 교수는 이란인들의 미대사관 점거를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가장 파괴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사건 자체가 주는 충격과 이란 혁명에 대한 몰이해가 미국인의 정서 밑바닥에 일종의 이란 혐오를 심었다고 호주 대안언론 더컨버세이션은 분석했다. 더컨버세이션은 “미국인 대다수가 친미 왕정이 폭압적인 정책을 펼친 것을 몰랐다. 미국인들은 그저 성난 군중이 미 외교관을 인질로 잡은 것으로 인식했다”면서 “정신이 나가고, 편협한 사상에 사로잡힌, 미국을 싫어하는 종교적 광신도들이 벌인 일로 평가절하했다”고 설명했다.미국인은 이란이 자국 대사관을 점령한 것은 40년간 기억하면서도, 미국이 이란 민간인 290명을 살해한 사실은 잊었다. 이란과 이라크 전쟁이 막바지였던 1988년 7월 미군 순양함 빈센스호가 이란 영해인 호르무즈해에서 이란 민항기를 격추했다. 탑승자 290명 전원이 사망했다. 미 정부는 민항기를 전투기로 오인해 공격했다고 해명했을 뿐,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의 대이란 감정과는 무관하게 양국 관계는 정부의 입장에 따라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과 이란의 관계는 아주 나빴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은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이란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면서 경제 제재를 강화했다. 버락 오마바 대통령 재임기는 해빙기였다. 특히 2013년 하산 로하니가 이란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이란 핵문제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미국과 이란 등은 2015년 이란 핵합의(JCPOA)를 체결했다. 2017년 부동산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5월 JCPOA에서 탈퇴하고 지난해 11월 이란 경제 제재를 재개했다. 양국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BBC는 트럼프 대통령의 JCPOA 탈퇴는 오바마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이란에 적대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 미 인터넷매체 복스 등은 이란에 적의를 가진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초강경 대이란 정책을 주도한 것으로 봤다. 볼턴 보좌관은 부시 전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당시 국무부 차관으로 대외 강경책에 입김을 미친 ‘슈퍼 매파’다. 볼턴은 백안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되기 약 8개월 전인 2017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란인들이 개최한 집회에 참석해 “미국은 테헤란에서 이슬람 학자들의 정권을 전복하는 정책을 선포해야 한다. 이란 정권의 행동과 목표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유일한 해결책은 정권 자체를 바꾸는 것밖에 없다”고 연설했다. 당시 발언과 관련 복스는 “볼턴 보좌관이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하려 하지 않았던 독재정권은 거의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란은 볼턴 보좌관의 마음속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했다. 볼턴 보좌관이 정치적 신념에 따라 움직여 왔다면, 폼페이오 장관은 종교적 믿음대로 결정해 온 것으로 관측된다. 폼페이오 장관은 독실한 복음주의 기독교도로 알려져 있다. 더컨버세이션은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신이 이스라엘 땅을 유대인에게 주었다고 믿는다”면서 “타협하지 않는 ‘친이스라엘’적 입장을 취한다”고 설명한다. 이스라엘은 대표적인 이란의 적성국이기도 하다.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 3월 예루살렘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이란에 공동 압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닷새 후에는 미국의 거대 유대계 이익단체 미·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행사에 참석해 “이란과 친이란 세력에 역사상 가장 강력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들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서 “반(反)시오니즘(유대민족주의 운동)은 반유대주의이며 이란처럼 반시오니즘을 지지하는 모든 국가에 맞서야 한다. 유대 민족의 정당한 조국을 수호해야 한다”며 친이스라엘적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미 시사매체 더네이션은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의 친미 국가에 주목했다. 더네이션은 “네타냐후 총리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자신이 벌인 참혹하고 잔혹한 정책에서 눈을 돌리게 할 괴물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란”이라면서 “1980년대 그 괴물은 이라크였다. 미국이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정권을 파기하자 네타냐후 총리는 이란을 이스라엘 우익이 겁내야 할 존재로 만들었다. 이 정책을 미국이 되풀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AFP통신은 “사우디는 이란이 ‘혁명’을 수출해 자국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최고 성직자가 최고지도자를 맡되 그 아래 대통령을 중심으로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를 분리해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만들었다. 반면 사우디는 1932년 국가를 수립한 이후 지금까지 전제군주제를 고수해 왔다. 사우디 국왕은 왕이자 동시에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입법, 사법, 행정 등 각 방면에 걸쳐서 절대적 권력을 가진다. 이란은 동맹 또는 친이란 세력에 상당한 자율성을 허용하면서 중동에서 세를 급격하게 키워왔다. 미 온라인매체 더인터셉트에 따르면 이란은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 이라크의 시라아 민병대, 예멘의 반군 후티를 직접 통치하거나 명령하지 않고 독립적인 정치구조를 허용한다. 반면 사우디는 이슬람 근본주의 ‘와하비즘’에 입각해 동맹에도 엄격한 종교적·정치적 기준을 요구한다. 더네이션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정치적인 의도로 이란의 위험성을 과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더네이션은 “이란의 군사력은 미국, 이스라엘 등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없는 수준이다. 이란의 국내총생산(GDP)은 미군 예산의 60%에 불과하다. 군사력으로는 3류 수준”이라면서 “이란의 공포에 떤다는 이스라엘은 80~200개의 핵탄두를 보유했다. 이란을 석기시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란이 역내에서 급격하게 영향력을 확대하고는 있지만, 그 파급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란이 아랍어가 아닌 페르시아어를 쓰는 데다 또한 종파를 중시하는 이슬람에서 비주류인 시아파 국가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20억 무슬림 가운데 시아파는 약 15%에 불과하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정부와 이란의 긴장 수위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미 중부사령부는 2일(현지시간) 전날 중동 걸프에서 모의 폭격훈련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사실상 이란에 무력시위를 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군은 이번 훈련에 B52 폭격기, FA18 슈퍼호넷 전투기, MH60 시호크 헬리콥터, E2D 조기경보기를 실은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를 동원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우리는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그러려면 이란이 ‘정상국가’로서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미국은 협상 조건이 있다면서 조건 없이 대화하자고 하고, 군사 초강대국으로서 위협해놓고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고 말한다”며 비난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서울광장] 황교안의 구심력과 원심력/박록삼 논설위원

    [서울광장] 황교안의 구심력과 원심력/박록삼 논설위원

    최근 흥미로운 통계를 봤다. 한 빅데이터 전문 매체가 지난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비롯한 온라인 공간 속 예비 대선주자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빅데이터로 풀어낸 통계였다. 흔한 지지율 조사와는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SNS 관심도에서는 이낙연 총리가 30.8%로 가장 높았고 김경수 경남지사(29.3%),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15.4%), 이재명 경기지사(14.4%),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8.4%) 순이었다. 주목할 만한 이는 황 대표였다. 그는 SNS 언급량에서는 26만 4367건으로 이 지사(28만 739건)와 1, 2위를 다퉜지만 관심도는 매우 낮았다. 그에 대한 긍정적 언급(6.7%)과 부정적 언급(76.5%)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결과라는 설명이다. 참고로 이 총리는 언급량은 9만 2741건에 불과했지만 긍정적 언급이 69.3%로 부정적 언급(7.7%)을 훨씬 뛰어넘었다. 반면 뉴스 댓글 관심도에서는 황 대표가 79.6%로 압도적 1위였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8.0%), 이 총리(3.1%) 등이 뒤를 이었지만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요즘 포털사이트 기사 밑에 난무하는 댓글의 우익 편향성을 감안하면 황 대표 지지세력의 주활동 무대가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황 대표 지지 여부를 떠나 이 통계 수치 자체에 연연할 이유는 없다. 대중 여론의 추이를 확인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이 통계에서 의미 있게 봐야 할 점은 따로 있다. 공안검사, 법무부 장관, 국무총리를 지낸 ‘황교안’이라는 만년 공직자가 정치무대에 대단히 성공적으로 데뷔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2월 27일 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이후 그는 정치신인답지 않게 이념·종교·지역·성별 갈등과 극한정쟁을 부추기는 말들도 서슴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최고의 뉴스메이커였다. 3월 12일 국회에서 나경원 원내대표가 “김정은 수석대변인”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자 황 대표는 다음날 한술 더 떠 “좌파독재정권의 의회장악 폭거”라고 비판했다. 한국당이 틈만 나면 부르짖는 ‘좌파독재’ 구호의 시발점이었다. 그는 지난달 11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서도 “사실상 북한 변호인(…) 되지도 않을 남북경협”이라며 정쟁을 독려하는 선봉장이 됐다. 지난 7일에는 “임종석씨가 무슨 돈을 벌어 본 사람입니까? 좌파 중에 정상적으로 돈 번 사람들이 거의 없다”며 색깔론을 펴기도 했다. 이런 황 대표의 막말은 각종 민생경제법안을 내팽개치고 국회를 파행시킨 한국당의 이른바 ‘민생투쟁 대장정’의 마지막에 정점을 찍었다. 지난 24일 강원도 최전방 부대를 찾아 “군은 정부, 국방부의 입장과도 달라야 한다”고 말하며 ‘내란 선동’ 논란을 일으켰는가 하면 26일에는 자신의 SNS에 “현장은 지옥이며, 국민들은 살려 달라고 절규했다”고 글을 올려 ‘국가·국민 모독’ 논란을 자초했다. 당대표에게 금도(襟度)가 없으니 한국당 전체가 막말과 불법의 잔치판이었다. 폭력으로 국회 파행을 이끄는 등 국회선진화법 위반으로 무더기 고소됐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 등 한국당 5·18 망언자 징계를 몇 달째 우물쭈물 뭉개고 있는 사이 정진석 의원, 차명진 전 의원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패륜적 막말을 내뱉었다. 강효상 의원의 한미 정상 간 통화내용 기밀유출의 범죄행위에도 ‘알 권리’, ‘야당 탄압’만 되뇌고 있다. 부처님오신날 법요식에 찾아가 불교식 예법을 거부하는 종교 편향성을 보이기도 했고,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모든 운동에는 구심력 또는 원심력이 작동한다. ‘정치인 황교안’의 활동에도 구심력과 원심력이 동시에 나타났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바깥으로 밀어내면서 또 다른 누군가를 끌어들이는 방식의 힘을 전면에 내세웠다. 덕분에 지난 25일 한국당의 광화문 앞 집회에는 태극기·성조기를 흔드는 극우세력들과 한국당 지역당원협의회 깃발이 어우러지며 완전히 하나가 되는 모습을 연출했다. ‘배타적 구심력’의 결과물로,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은 법과 상식, 화해와 통합 등 정치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역할을 부정하면서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는 황 대표의 정치 방식에 넌더리를 내며 한국당이 서있는 곳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황 대표가 계속 정치를 할 뜻이 있다면, 보여주기식 민생 챙기기가 아니라 진짜 민생을 챙겨야 한다. 대립과 갈등이 아닌 대화와 통합을 택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건강한 구심력이 나타날 수 있다. youngtan@seoul.co.kr
  • 국가기후환경회의 새달 9일 국민대토론회 개최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범국가 기구인 국가기후환경회의가 정당 추천 인사를 확정해 위원 구성을 마무리했다. 국가기후환경회의는 최근 정당 추천 인사 6명을 위원으로 확정했다고 30일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강병원·김종민, 자유한국당 김재원, 바른미래당 신용현, 민주평화당 조배숙,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다. 이로써 국가기후환경회의는 지난달 29일 출범한 지 한 달 만에 위원장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포함해 총 44명의 위원을 최종 확정했다. 환경부와 기획재정부 등 6개부처 장관을 비롯해 지방자치단체장, 산업계·시민사회·학계·종교계 인사가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국가기후환경회의는 국민정책참여단 500명 인선도 최근 마쳤다. 다음달 9일 국민 대토론회를 열 계획이다. 계절적으로 미세먼지 농도가 다시 높아지기 전인 오는 9월에 미세먼지 감축 단기대책을 마련해 정부에 제안할 예정이다. 안병옥 국가기후환경회의 운영위원장은 “위원이 확정된 만큼 앞으로 속도감 있게 미세먼지 저감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맘 편히 아이 맡기는 ‘보육 1번지’ 성동… 예비맘들이 이사 온다

    맘 편히 아이 맡기는 ‘보육 1번지’ 성동… 예비맘들이 이사 온다

    국공립어린이집 이용률 59%로 압도적 아이꿈누리터 등 초등돌봄 체계 구축도 권역별 보육반장·보육반상회 사업 호평 장난감대여소·놀이체험소 이용객 늘어 정보력 뛰어난 예비맘은 강남보단 성동서울 성동구는 ‘보육 1번지’로 통한다. 지난해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서울시 합계출산율은 0.836명인데, 성동구는 0.972명에 달한다. 서울 자치구 중 합계출산율 1위다. 교육·부동산 관계자들은 “너도나도 교육 때문에 강남으로 ‘교육 이민’을 하는데, 누구보다 정보력이 뛰어난 예비맘들이 성동으로 옮겨오고 있다”고 했다. 비결이 뭘까. 29일 성동구 왕십리역광장에서 만난 학부모들은 “걱정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1순위로 꼽았다. 성동구는 지난달 기준 국공립어린이집 이용률이 59.4%에 이른다. 서울시 평균 이용률 39.6%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10명 중 6명이 국공립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구 관계자는 “신혼부부와 영유아 학부모 전입 증가에 따른 보육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지난 4년간 국공립어린이집 32곳을 확충했다”고 했다. 구는 공동주택이나 종교시설 유휴공간을 활용해 국공립어린이집을 신설,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 통상 어린이집을 신축하면 20억원 이상의 비용과 2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는데, 이런 방식으로 하면 3억원 이하의 비용으로 1년 내 설치할 수 있다. 구 관계자는 “공공은 예산 확보 어려움을 해결하고, 민간은 주민편의와 아파트 브랜드 가치 향상을 꾀할 수 있다”며 “2020년까지 국공립 이용률을 60% 이상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민간어린이집도 최적의 보육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민간보육시설 특성화사업’이 대표적이다. 구는 민간·가정어린이집에 다니는 24개월 이상 아동의 특별활동프로그램 운영비(아동 1인당 연 20만원)를 지원하고, 어린이집은 사회관계, 신체운동, 예술경험, 자연탐구, 의사소통 등 영유아의 정신적·신체적 발달에 도움이 되는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구 관계자는 “지난해 9~12월 민간보육시설 11곳 160명을 대상으로 시범 운영한 결과 아동과 학부모의 만족도가 높았다”며 “시범 운영 결과를 토대로 지난 3월 특성화 사업을 확대, 지역 내 민간·가정보육시설 100곳의 아동 2300명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고 했다.초등돌봄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초등돌봄 체계 구축에도 힘쓰고 있다. 지역 학교, 종교시설, 아파트 커뮤니티, 동주민센터, 작은 도서관 등 다양한 공간을 활용, 성동형 초등돌봄센터 ‘아이꿈누리터’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2월 하왕십리동에 아이꿈누리터 1호점이 개소한 데 이어 현재 4곳이 문을 열었다. 구 관계자는 “2022년까지 공적 돌봄 수요 100% 충족을 목표로, 시설을 확충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시간과 공간 제약 없이 마을에서 이웃과 함께 아이를 돌보는 ‘초등 이웃돌봄’도 추진한다. 엄마와 자녀가 동참하는 ‘돌봄가구’, 자녀만 참여하는 ‘돌봄아동’, 하교 후 학업 일정 수행을 위한 ‘이동돌봄’, 긴급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긴급돌봄’, 2개 이상 돌봄그룹이 함께하는 ‘커뮤니티돌봄’ 등 여러 유형의 돌봄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예정이다. 보육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성동구육아종합지원센터’도 빼놓을 수 없다. 센터는 영유아 보육 전반에 대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과 자녀 양육에 따른 재정 부담을 덜어 주는 양질의 육아 서비스를 제공한다. 어린이집 운영에 관한 컨설팅, 보육교직원 교육·상담, 대체교사 지원 사업, 아동학대 예방 사업, 장애아 지원 프로그램 운영 등을 한다. 지난해 보건복지부 주관 전국 육아종합지원센터 평가에서 우수센터로 선정됐다. 센터에서 도입한 ‘우리동네 보육반장’은 서울시 우수사례로 꼽혔다. 구에는 권역별 보육반장 5명이 있다. 출산·전입 가정 육아 정보 제공, 육아 전문상담과 전문기관 연계, 부모자조모임 활성화 등 아이들을 기르는 데 도움을 준다. 부모와 지역 내 유관기관 관계자들이 모여 보육환경개선 토론을 하는 ‘보육반상회’도 운영한다. 보육반상회에서 건의된 안건은 관련 기관에 전달해 문제를 해결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는 새로운 사업으로 구상·추진한다. 6세 이하 자녀와 동행 때 음식 가격을 할인해 주는 ‘성동 아이사랑 맛집·카페’는 보육반상회 제안으로 시작된 대표적인 사업이다.센터에선 영유아 발달단계에 적합한 장난감이 구비된 장난감대여소 4곳(무지개·왕십리·금호·옥수 장난감세상), 놀이체험 공간과 가정양육 지원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는 놀이체험실 3곳(노올터·성수영유아플라자·금호키즈카페)도 운영한다. 장난감대여소와 놀이체험실은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두 시설 이용자는 2017년 5만 7545명에서 지난해 6만 3734명으로, 6189명(10.7%) 증가했다. 구 관계자는 “센터는 지난 3월 왕십리역 철도 유휴부지에 연면적 866㎡, 지하1층·지상3층 규모로 신축 공사를 시작했다”며 “2020년 6월 준공되면 공동육아방, 아이들과 함께 장난감과 도서를 이용할 수 있는 놀이 공간 등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필요한 시설들이 모두 갖춰질 것”이라고 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기고] 종교인과세법은 폐지해야/김집중 종교투명성센터 사무총장

    [기고] 종교인과세법은 폐지해야/김집중 종교투명성센터 사무총장

    대한민국 최초의 종교인 소득세 신고는 언제부터일까? 해외 선진국에는 종교인과세법이 있을까? 정답은 ‘모른다’와 ‘없다’이다. 우리 세법에 종교인 비과세 규정이 없기에 일부 종교인들은 지난 수십 년간 근로소득신고를 해 왔다. 사실 근로소득에서 종교인 소득을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니 언제부터 신고했는지 알 수 없다. 해외 선진국에서도 별도의 종교인과세법이 있는 게 아니어서 종교인도 일반인처럼 근로소득이나 사업소득으로 신고한다. 많은 종교인들이 세금을 안 냈던 건 그냥 몰랐기 때문이다. 몰라서건, 의도적이건 엄연한 탈세다. 종교인들도 평범한 우리 이웃이다 보니 세법에 무지할 수 있다. 탈세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 중 얼마만큼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양지로 끌어낼지 고민하고 해결하는 게 정부의 일이다. 종교인 과세도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선거철마다 종교계와 정치권이 엮이다 보니 이상한 양상으로 흘렀다. 근로자가 아니니 기타소득이라 고집하고, 한도 없는 비과세, 세무조사 금지를 관철시키더니 이젠 근로장려금은 받고 싶다고 한다. 국민들은 종교계도 세금 좀 내자고 요구한 것뿐인데, 세법을 모르는 종교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안은 정치권이 거꾸로 종교인특혜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기획재정부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종교인은 근로자나 자영업자로 분류돼 일반 납세자 수준의 세금을 낸다. 영국, 독일도 다르지 않다. 기타소득 분류, 무제한 비과세, 세무조사 면제 등의 특혜는 없다. 이런 조사에도 종교계를 설득하지 않은 기획재정부도 문제지만, 개신교는 무엇을 근거로 특혜들을 요구했던 걸까? 곧 총선이다. 종교인과세법이 어떻게 전개될지 불을 보듯 뻔하다. 종교인 과세 논의를 주도하는 개신교의 아우성에 수차례 또 개정될 것이다. 기왕에 종교인과세법의 이름하에 온갖 특혜를 나열해 놨으니 특혜 추가는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종교인과세법은 지역 정치인의 당선 보증수표로 재활용되고 있다. 우리는 불교, 유교가 국가와 결탁한 특혜로 발생했던 폐해들을 분명히 배웠는데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내가 종교인이라면 일반 납세자와 나란히 서서 세금신고를 하면서도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 것 같다. 종교인과세법은 폐지해야 한다. 특혜법을 없애고 일반세법을 적용하는 게 세계 표준이다. 종교인과세법을 유지하거나 개악하려는 정치인들은 표로 심판해야 한다. 이웃 종교에도 실상을 알려 함께 특권을 내려놓도록 요구하자. 또 하나의 부끄러운 구체제로 뿌리내리기 전에 일상에서 납세자들이 행동해야 한다.
  • 하동군, 2022년 하동야생차문화 엑스포 유치 본격 시작

    하동군, 2022년 하동야생차문화 엑스포 유치 본격 시작

    경남 하동군이 하동야생차문화 엑스포 유치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전통방식으로 차를 재배·수확·생산하는 하동 전통 차농업은 2017년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됐다. 하동군은 23일 화개면 켄싱턴리조트 컨벤션홀에서 ‘2022 하동야생차문화 엑스포 자문단 및 기획단 발대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이날 발족한 엑스포 자문단 및 기획단은 국내 각계 원로를 비롯해 학계, 문화·예술계, 종교계, 기업인, 방송·문화기획자, 연구기관, 엑스포 경험자, 차 생산자 및 단체, 행정 등 각계각층 인사 각 100명씩 모두 200명으로 구성됐다. 자문단은 반기마다 회의를 갖고 엑스포 유치를 비롯한 주요 정책·사업·행사 등의 자문역할을 한다. 기획단은 기획·문화·산업 등 3개 분과로 나눠 분기마다 한차례 및 수시 회의를 갖고 엑스포 추진방향, 관광객 유치 방안, 행사장 구성 등 기획·조사·실행 업무를 한다. 이날 발대식은 식전 차 체험에 이어 개회선언, 참석자 소개, 자문단 및 기획단 대표자 위촉장 수여, 제1·2 주제영상 상영, 엑스포 관련 주제발표 및 토론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첫번째 주제영상에서 한상덕 경상대 교수가 칠불사에서 ‘다신전’을 초록한 조선시대 차 중흥조 초의선사로 분장해 1200년 하동야생차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차문화산업의 미래를 함께하자는 메시지를 연출했다. 두번째 주제영상에서는 윤상기 군수가 자전거 앞바퀴와 뒷바퀴의 융합을 매개로 신성장 차 산업 육성과 자연·농업·관광이 어우러진 전통자원의 조화로움 속에서 100년의 비전을 세우고, 엑스포의 성공적 유치를 담은 메시지를 전했다. 이어 정남수 공주대학교 교수가 좌장을 맡아 엑스포 관련 주제발표와 자유토론을 진행했다. 이상균 ‘차와 문화’ 편집장이 ‘세계 차산업의 흐름과 세계농업유산으로서 하동차 산업의 육성 필요성’을 주제로 발표를 하고, 박미경 원광대학교 교수가 ‘하동 티 엑스포의 의의’를 주제로 발표했다. 김대호 목포대 교수가 ‘국내·외 차 산업 동향과 하동차의 미래전략’을 주제로 발표를 하고 김종두 동국대학교대학원 교수가 종합 토론을 했다. 이날 행사에는 윤상기 군수와 신재범 군의회 의장, 이정훈 도의원 등 기관·단체장과 엑스포 자문단 및 기획단 위원, 차 생산자·단체, 관계 공무원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군은 엑스포 자문단 및 기획단 발대식을 시작으로 하동야생차문화 엑스포 유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고 밝혔다. 군은 국내·외 차 문화 교류를 통해 차 시배지 대한민국의 차 산업 위상을 강화하고, 하동야생차의 세계화를 위해 2022년 5월 전후로 20일간 하동야생차문화 엑스포를 개최할 계획이다. 엑스포 주 행사장은 화개면 차박물관 일원으로 예정하고 부 행사장은 화개면 천년다원, 탄소없는 마을, 악양면 최참판댁, 평사리들판 등으로 할 계획이다. 군은 엑스포 행사기간에 외국인 관람객 5만명을 포함해 모두 100만명 참가를 목표로 잡고 있다. 군은 오는 8월 말까지 기본계획 용역을 마치고 경남도 국제행사 평가위원회, 유치 신청, 기획재정부의 국제행사 심의위원회 타당성 용역 결정 및 타당성 조사 등을 거쳐 내년 8월 기재부 국제행사심사위원회 최종 승인을 받을 계획이다. 유치 승인이 나면 국비와 지방비 등 모두 140억원을 투입해 엑스포 운영을 위한 각종 시설과 전시 등 인프라 구축을 시작한다. 윤상기 군수는 “야생차문화 엑스포는 차 생산지로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된 하동차를 항노화바이오와 연계해 100년 미래 신성장 산업으로 육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동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트럼프가 내놓은 중동평화안, 뼈대는 ‘돈’… 한국이 롤모델

    새달 서안·가자지구 투자 독려 워크숍 팔레스타인 “항복 요구서” 불복 시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고심 끝에 다음달 중동평화안을 내놓기로 했다. 트럼프 정부가 제시할 ‘세기의 거래’의 뼈대는 ‘돈’이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 한국식 모델 등을 적용해 경제 발전을 보장함으로써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정치적·종교적 갈등 요소를 다루지 않은 이번 평화안을 “항복요구서”라고 일축했다. CNN은 19일(현지시간) “백악관이 중동평화안의 첫걸음으로 서안지구, 가자지구 투자를 독려하는 경제 워크숍을 오는 6월 25일부터 이틀간 바레인 마나마에서 개최한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각국 재무장관 및 기업가를 워크숍에 초청할 예정이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이자 이번 평화안 작성을 주도한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이 “한국과 폴란드, 일본, 싱가포르 발전 모델에서 착안해 계획을 세웠다”고 전했다. 쿠슈너 고문은 “할아버지 세대의 갈등이 후손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며 “이번 계획은 지금까지 없었던, 흥미롭고 현실적이며 실행 가능한 미래로 가는 길을 열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미 정부 고위 관리는 “기간 시설, 산업, 인적 투자, 통치구조 개혁 등 4가지 요소에 집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악관은 이번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규모를 밝히지 않았다. 뉴욕타임스(NYT)는 복수의 외교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미국은 유럽, 아시아와 부유한 걸프국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으려는 구상이다. 목표는 680억 달러(약 81조 1376억원)”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경, 예루살렘의 소유권, 팔레스타인 난민 등 예민한 문제를 모두 제외했다는 점에서 이번 평화안의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쓸모없는 계획”이라고 일축하고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보장하지 않는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리야드 알말리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외무장관도 “트럼프 정부 평화안을 수용하는 것은 조건부 항복”이라며 불복 의사를 밝혔다. 한편 쿠슈너 고문은 무슬림 금식 기간인 라마단이 끝나는 다음달 평화안을 공식 발표한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자치광장] ‘국가복지대타협’이 시급하다/정원오 서울 성동구청장

    [자치광장] ‘국가복지대타협’이 시급하다/정원오 서울 성동구청장

    보편적 복지 수요가 늘면서 복지 지출이 급증하고 있다. 문제는 중앙정부가 아닌 일부 지방정부들에 의해, 그것도 주민 맞춤형 복지서비스보다는 ‘○○수당’이라는 이름의 현금 지급 형태로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잘사는 동네가 여력만큼 복지혜택을 늘리면, 재정 여건이나 인구 구조상 이를 따라가기 어려운 이웃 동네가 너무 많다. 억지로 따라가자니 재정이 파탄 나고, 그대로 방관하자니 더불어 잘살기 위한 복지 정책이 새로운 지역 간 격차를 낳는 역설을 조장한다. 해법은 어렵지 않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 최저수준(National Minimum)을 보장하는 현금 복지는 대부분의 선진국이 그러하듯 중앙정부 책임하에 확대해 나가고, 지방정부는 한정된 재원으로 지역 주민 만족을 극대화할 지역 맞춤형 복지서비스를 발굴하면 된다. 서울 성동구는 주민 요구에 귀 기울이면서 주민들이 가장 시급히 여기는 복지서비스를 파악하고 이를 확충하는 데 힘써 왔다. 국공립어린이집 확충, 돌봄 지원 확대, 체험형 학습센터 개설, 어르신일자리주식회사 설립, 효사랑주치의 시행 등 공공 복지서비스 발굴과 확대에 전념했다. 특히 주민 요구가 높은 국공립어린이집은 민간주택이나 종교시설 같은 유휴 공간 등을 활용해 78곳으로 대폭 확충했다. 그 결과 2017년 기준 서울 25개 자치구 중 출산수당 지출은 하위권이지만 출산율 1위, 공보육 이용률 59.4%로 1위를 기록했다. 지금이라도 중앙정부는 보편적 복지 확대를 위해 복지재정을 확충하고 지방정부들은 현금복지 확대 경쟁 대신 건전한 복지서비스 발굴 경쟁에 매진하는 복지정책 대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전국의 지방정부와 민간 전문가 그리고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현재 각 지방정부에서 시행 중인 다양한 복지정책들의 배경과 내용, 파급효과를 검토한 뒤 정책 방향을 조율해야 한다. 효과가 좋은 정책은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지원이 필요한 부분은 중앙정부에 건의해 적극 검토하도록 해야 한다. 반면 시범기간 동안 지켜본 뒤 효과가 미흡하거나 부작용이 확인되면 일몰시켜 복지정책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중앙과 지방 모두를 아우르는 ‘국가복지대타협’을 통해 복지국가와 자치분권이라는 시대정신이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 고양시장, 혈세 잡아먹는 회사에 ‘낙하산’ 인사

    고양시장, 혈세 잡아먹는 회사에 ‘낙하산’ 인사

    이재준 경기 고양시장이 매년 27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는 공공자전거 서비스 ‘피프틴’의 운영회사인 ㈜에코바이크 새 대표이사로 전문 경영인 경력이 없는 최성 전 고양시장의 보좌관 임명을 추진해 논란이다. 이런 가운데, 고양시의 피프틴사업 민간투자방식 추진을 처음 부터 강력히 반대해 온 박규영 전 고양시의원(세종교통연구소 대표, 공학박사)은 26일 “이 사업을 2008년 처음 도입할 당시 수익창출계획은 불명확했고, 사업시행자의 수익 및 운영비 일부를 시민 세금으로 충당해야 하는 구조도 문제였다”면서 사업재구조화 방법을 제안했다. 박 대표는 “피프틴사업은 민간투자사업으로 추진할 만한 요건을 갖추지 못했는데 민자로 추진하면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痼막?보인다. 현재 여러 문제점을 노출한다고 해서 공공자전거 사업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성급한 결정을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용 실태 및 문제의 원인을 면밀히 분석하고 고양시의 교통정책방향을 고려해 백지상태에서 사업재구조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고양시 공무원 노조는 25일 “매년 수십억원의 적자를 내 진작에 폐지했어야 할 사업체의 대표이사에 전임 시장 보좌관을 내정한 사실이 놀랍다”면서 “실현 불가능한 가짜 사업계획서로 시작된 (공공자전거 대여)사업에 더이상 혈세를 낭비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고양시의회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피프틴사업은 시민세금으로 매년 27억원의 적자를 메워주고 있어 내년 ’적자보전 계약기간 8년‘이 만료되면 존폐를 결정해야 한다”며 비전문 경영인 출신 전임 시장 측근 임명 추진을 비판했다. 의원들은 “지난 해 시장출마 당시 최성 전 시장의 적폐청산을 주장하던 이 시장이 전임 시장 보좌관의 내정을 확정한다면 시민의 분노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 했다. 구축비 116억원과 운영비 418억원이 들어간 ’피프틴‘사업의 운영회사인 에코바이크는 지난 2008년 한화 S&C를 주관사로 한 삼천리자전거, 이노디자인, 한국산업은행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해 2009년 설립됐다. 이듬해 6월부터 전국 최초 민간투자방식(BOT)으로 공공자전거 서비스를 시작했으나, 해마다 수십억원씩 적자를 내고 있다. 2013년 고양시의회가 ’운영방식 변경에 따른 재정지원‘을 승인해 향후 8년간 현금부족액 217억원을 연간 27억 1000만원씩 시민세금으로 지원하되, 내년 6월에는 고양시가 전체 지분을 인수하게 돼 있다. 앞서 2016년에는 사업 초기부터 미지급된 구축비 31억원을 고양시가 한화 측에 되돌려 주고 에코바이크의 지분 70%를 차지하며 1대 주주가 됐다. 비리행정척결운동본부 고철용 본부장은 이날 “시장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보좌하고 직언해야 할 관련 공무원들이 잘못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따르는 것은 공직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다”며 “잘못된 임명을 강행할 경우 시장과 관련 공무원들은 중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특별기고] 교도소와 닮은꼴 교실…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투자 늘려야/최교진 세종특별자치시 교육감

    [특별기고] 교도소와 닮은꼴 교실…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투자 늘려야/최교진 세종특별자치시 교육감

    “인구가 줄면 국가 예산도 줄일 겁니까?” 지난 2월 20일 국회에서 열린 지방교육재정교부금에 관한 토론회에서 기획재정부 발표자가 학생수 감소를 이유로 지방교육재정 확대에 난색을 보이자 객석에서 나온 목소리다. 학생이 줄어드니 교육재정을 확대할 수 없다는 말은 기존 교육재정이 정상적으로 공급됐을 때 하는 말이다. 우리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학교교육비나 학교건축비가 정상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교육감이 된 후에 맨 처음 한 일이 학생들의 의자를 바꿔 주는 것이었다. 고등학생은 그 의자에서 하루 15시간 동안 앉아 있다. 우리 학생들이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의자의 단가가 얼마인지 살펴보라.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초등학교를 짓는 평당 건축단가는 578만원이다. 반면 정부청사 평당 단가는 717만원이다. 어린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실이 어른들이 사무를 보는 건물보다 허름하게 짓는다는 말이다. 심지어 교도소의 평당 단가보다 낮다는 통계도 있다. 학교 건물과 가장 유사한 건물이 교도소다. 넓은 연병장에 성냥갑 같은 네모난 건물. 일자형 복도에 각 교실이 배치돼 있는 구조와 교도서 감방의 설치 구조가 비슷하다. 이렇게 권위적이고 획일화된 교실에서 창의성이 나올까? 창의적인 교육을 하려면 공간 자체가 그런 창의성을 길러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교육청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를 같은 공간에 짓는 설계를 했다. 각 건물이 3층을 넘지 않으며, 초등학교는 저학년과 고학년을 나누었다. 직육면체를 벗어나 복도 역시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설치하고 복도에도 다양한 코너를 설계했다, 초등학교 지붕 바로 아래에도 다락방 같은 공간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다양한 공부와 놀이를 할 수 있게 설계했다. 그런데 이렇게 설계하고 나니 예상되는 건축 비용이 교육부의 기준 건축비를 넘겨버렸다. 기존의 건축비 기준이 잘못인가? 설계가 잘못된 것인가? 지금 교육부에서 학교공간 재구조화를 준비하고 있다. 공간은 수업의 형태를 좌우한다. 지금의 교도소 구조의 학교에서는 획일적 암기식 수업을 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활동은 다양한 공간에서 나온다. 올해 세종시 학교기본운영비, 즉 학생들과 교수학습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돈을 학생 1인당으로 환산하면 97만원이다. 한 달에 학생 1명당 8만원을 투자하는 셈이다. 이것을 정상적인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4차 산업혁명은 교육혁신이 전제돼야 한다. 세종교육청에서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과서 이외에 281개의 교과목을 개설해서 수업을 한다. 중학교 학생들에게도 44개의 교과목을 신설했다. 이것을 우리는 공동교육과정이라 부른다. 이런 교육활동은 기존에는 없던 교육활동이다. 그동안 양적 성장에 주력했다면 이제는 질적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재정은 교육재정이어야 한다. 그 어떤 투자보다 중요한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비율을 높여야 한다. 고교무상교육과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국가가 결단할 일이다.
  • [존엄한 죽음을 말하다] “안락사 시행은 이르지만 논의는 시작해야…사회적 돌봄 제공하는 의료복지 구축부터”

    [존엄한 죽음을 말하다] “안락사 시행은 이르지만 논의는 시작해야…사회적 돌봄 제공하는 의료복지 구축부터”

    ‘존엄한 죽음’에 대한 해법 - 전문가 좌담서울신문이 6회에 걸쳐 ‘존엄한 죽음을 말하다’를 연재한 건 높아진 한국인의 삶의 질과 달리 죽음의 질은 제자리걸음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서 삶을 마감한다. 임종 직전까지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지속하다가, 삶을 정리하고 가족과 마무리할 시간도 없이 죽음을 맞고 있다. 김명희 국가생명윤리정책원 사무총장, 박지영 상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신현호 법률사무소 해울 변호사, 윤영호 서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가나다 순)를 서울신문 본사로 초청해 ‘존엄한 죽음’에 대한 해법을 물었다. 이들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 호스피스 돌봄을 확대하고 병원이 아닌 환자 중심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되 사회적 돌봄을 충분히 제공하는 의료복지 체계 구축이 우선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래야 안락사를 도입하더라도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좌담은 유영규 탐사기획부장이 진행을 맡았다. -시행 1년을 맞은 연명의료결정법(존엄사법)에 대한 평가는. 김 총장 우리가 그동안 금기시했던 죽음에 대한 논의를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법을 통해 의사와 환자, 보호자가 죽음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열었다. 그동안은 임종이 임박환 환자에 대한 연명의료를 언제까지 지속할지에 대해 결정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부담을 떠넘겼다. 하지만 이 법이 마련되면서 서로 논의를 통해 임종 시기를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신 변호사 존엄사법이 말기 환자에 대한 의료를 내팽개치는 일종의 ‘고려장’법 아니냐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다. 오히려 ‘말기 환자 권리보호법’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중환자실에 환자를 데려갔다가 치료를 중단할 수 없어서 파산할 때까지 퇴원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때문에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환자가 많았다. 이 법의 시행으로 환자가 원하면 치료를 중단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든 병원에 갈 수 있게 됐다. 박 교수 존엄사법 시행 후 실제 현장에서 보면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들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예전처럼 처절하지 않다. 과거에는 개인이 혼자 죽음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법과 제도 안에서 개인이 어떤 죽음을 선택하고 어떤 치료를 중단할지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윤 교수 하지만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매년 28만~29만명이 사망하는데, 이 중 0.1%만이 본인이 사전에 직접 작성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따라 임종을 맞았다. 가야 할 길이 멀다. 단순히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것을 넘어 품위 있는 죽음의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이를 위해 필요한 조건들은 뭔지 논의해야 한다.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는 정책과 조직과 예산이 갖춰져야 한다.-연명의료 중단과 호스피스 돌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윤 교수 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완화 의료나 호스피스 돌봄이 최소 임종 6개월 전부터 제공돼야 한다. 하지만 현재는 임종기가 다 돼서야 호스피스에 입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환자의 남은 삶이 3~6개월 이내로 판단되면 치료 과정에서도 언제든지 완화 의료나 호스피스 돌봄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신 변호사 호스피스는 종교인이나 사회복지사, 봉사자가 중심이 되고 의료진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게 이상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반대다. 호스피스는 원래 회복 가망이 없는 노숙인 환자를 수녀원으로 데려가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돌보는 데서 시작됐다. 호스피스가 선진화된 독일 등에선 의료진이 중심 역할을 하는 우리나라 호스피스를 보면 깜짝 놀란다. 윤 교수 존엄한 죽음을 위해선 육체적 고통을 완화하는 의료 영역뿐만 아니라 정신적, 경제적 문제까지 전반적으로 돌보는 사회복지영역과 환자들의 손과 발이 되는 봉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의료 영역만 강조되는 게 현실이다. 미국은 호스피스 전체 돌봄 과정에서 최소 5%는 봉사자가 담당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독일도 봉사자가 130시간의 교육을 받고 2년간 의무적으로 활동한다. 봉사자 교육 비용은 정부가 지원한다. 김 총장 호스피스가 선진화된 국가 대부분은 의료진과 사회복지사, 봉사자가 왕진을 가는 형태의 가정형 호스피스가 주축을 이룬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족구조, 주거형태, 사회·경제적인 문제들로 아직은 많은 사람이 병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가정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정형 호스피스 등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박 교수 우리나라 사회복지 체계도 억지로 연명의료를 강요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사가 아픈 노인을 발견했는데 그대로 두면 방임이 된다. 그래서 그들을 입원시키고 병원에서 운명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한다. 의사로부터 직접 이들의 사망 선고를 받아야 사회복지사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결국 집에서 임종을 맞고 싶다고 강하게 원해도 시스템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사회 전반의 문화와 제도 변화가 필요하다. -여론조사 결과 안락사 찬성이 80%를 넘었다. 이에 대한 생각은. 김 총장 서울신문 보도를 통해 안락사 도입 여론이 생각보다 높다는 걸 알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시대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죽음을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하는 문화가 우리나라에 구축됐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일단 치료비를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자녀들에게 간병과 경제적 도움을 받는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안락사 여부를 결정하는 건 힘들 수밖에 없다.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해 달라며 제출된 연명의료의향서를 봐도 환자 스스로 쓴 경우는 3분의1에 불과하다. 나머지 3분의2는 보호자의 합의로 쓰였다. 이들의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 과연 명확하게 자발적인 것이었는지 아직까진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윤 교수 안락사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시행은 시기상조다. 환자가 안락사를 요구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병의 고통이 극심한 육체적 문제,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등 정신적 문제, 치료비로 인한 경제적 문제, 비참하게 사는 걸 원치 않는 존재론적 문제다. 이 중 육체적·정신적·경제적 문제는 사회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영역이다. 이런 문제로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건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보기 어렵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몰아세운 사회 제도적인 모순들을 개선하는 게 우선이다. 박 교수 안락사를 제도화거나 정책화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논의는 빨리 시작해야 한다. 윤 교수가 말한 안락사를 원하는 네 가지 이유는 사실 자살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를 사회에 호소하거나 도움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고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삶을 더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 죽음을 앞둔 당사자와 그 가족, 사회가 생각하는 존엄한 죽음에 대한 시각은 서로 다를 것이고, 이를 합의하는 과정은 오래 걸릴 것이다.신 변호사 안락사 시행이 시기상조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안락사를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진 만큼 논의를 시작할 적기라고 본다. 안락사는 의사가 직접 치명적 약물을 주입하는 적극적 시행과 환자의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기고자 영양분 공급 등을 중단하는 소극적 시행으로 나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고자 공급한 영양분이 암세포를 활성화시키고 상태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양분 공급을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가 오히려 환자를 위해 필요한 때도 있다. 윤 교수 우리 사회는 영양분 공급 중단이 굶겨 죽인다는 선입견을 품고 있어 특히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신 변호사 말대로 영양분을 공급하는 게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등 해를 가하는 상황이 있다. 이럴 땐 공급을 중단하는 게 맞지만, 현행법상 처벌 대상이라 그러지 못한다. 법 때문에 환자에게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공론화돼야 할 부분이다. -안락사 논의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나. 윤 교수 풀어 가는 방식이 중요하다.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목적은 궁극적으로 존엄한 죽음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연명의료 중단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존엄한 죽음의 토양을 마련하는 데 소홀한 실정이다. 안락사 논의도 이런 식으로 진행돼선 안 된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보다 사회적 돌봄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 사회·경제적 부담으로 삶을 마무리하려는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김 총장 연명의료결정법도 20년에 걸친 논쟁 끝에 시행된 것이다.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을 원하는 목소리가 쌓이고 다양한 논의를 거쳐 입법화된 것이다. 안락사도 이런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 한다. 사회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면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신 변호사 안락사를 허용하는 네덜란드나 벨기에 같은 나라는 의료가 거의 무상으로 이뤄지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의료비가 여전히 상당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안락사를 허용하면 결국 돈에 떠밀려서 안락사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순수하게 자기 뜻이 아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회안전망 확보가 우선이다. -사회적 여건을 따지지 않고 개인적인 안락사에 대한 생각은. 박 교수 안락사의 필요성을 부정할 순 없다. 서울신문이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40대 남성의 사연을 보도했다. 이 남성이 단순히 통증과 고통만으로 스위스행을 결정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가장 역할 수행이 불가능해지고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는 등 존재론적 고민도 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더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될 경우, 죽음을 준비하고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길을 뚫어 주는 건 굉장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윤 교수 진통제로 환자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이마저도 잘 안 되는 상황이다. 진통제로도 통증 관리가 불가능하고 의학적으로 다른 대안이 없다면, 스위스에서 시행하고 있는 안락사의 한 형태인 의사 조력자살(의사가 처방한 치명적인 약을 환자가 스스로 마시는 행위)에 대해 논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전에 정밀한 시스템 구축이 필수적이다. 김 총장 안락사는 반대하지만, 의사 조력자살에 대해선 찬성한다. 조력자살은 환자가 죽음을 결심하면 의사가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형태다. 의사가 약물을 직접 주입하는 적극적 안락사나 영양 공급 등을 중단해 환자의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기는 소극적 안락사는 반대한다. 신 변호사 2~3개월밖에 살 수 없고, 신체가 썩어 문드러지는 극한의 고통을 겪는다면 의사 조력자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순수하게 본인의 결정으로 안락사가 가능하려면 사회적으로 충분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돼야 한다. -우리나라는 마약성 진통제 처방이 세계에서 가장 적은 나라에 속하는데. 김 총장 임종기 환자의 통증 완화에 사용되는 약물이 모르핀 등 마약성 진통제다. 한국 의사의 모르핀 사용률이 해외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개선이 필요하다. 그런데 모르핀은 환자의 고통을 줄여 주기도 하지만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킨다. 이게 종종 의료 현장에서 문제가 된다. 모르핀 사용으로 환자가 사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의료진 입장에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신 변호사 한번 모르핀을 투여하면 한 달 뒤에는 18배나 많은 용량을 써야 같은 진통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내성이 강하다. 모르핀의 과도한 투여는 죽음도 앞당길 수 있다. 이것이 법적 처벌 대상인가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치료를 위한 모르핀 투여로 인해 죽음이 앞당겨지는 것은 책임을 묻지 않아야 한다는 게 형법 학계의 통설이다. 윤 교수 국내 의료계에 모르핀이 들어온 지 벌써 15년 정도 됐다. 문제는 모르핀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어느 정도 사용량이 적절한 수준인지 조사와 평가를 안 하고 있다. 과다하게 쓰면 호흡곤란으로 환자가 사망에 이를 수 있지만 환자의 고통을 조절하기 위해 써야 할 필요가 있는 약물이다. 현재 모르핀을 사용하는 상황이 어떤지, 어느 정도로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할 수 있게 정부가 나서야 한다. -우리가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신 변호사 돌봄 시스템을 환자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게 공급자 중심이다. 그래서 병원이나 시설에 입원하고 여기서 죽음을 맞는다. 임종기 환자에게 가장 좋은 죽음은 내가 자던 침대에서 치료받고 일상을 영위하다 떠나는 것이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가족들 손 붙잡고 있다가 편하게 떠나는 게 많은 사람이 원하는 죽음일 것이다. 그러려면 집이든 직장이든 의료진이 찾아와 돌보는 체계가 구축돼야 한다. 200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존엄사 인정 판결을 받은 ‘김 할머니’도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기 전 온 가족이 모여 애틋하게 마지막 인사를 했는데, 이게 바로 존엄한 죽음이라고 느꼈다. 박 교수 낯선 공간과 모르는 사람 속에서 떠나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많다. 나의 시간이 담긴, 나의 공간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존엄한 죽음이지만 많은 사람이 병원에서 사망하고 있다. 정부는 국민이 어떤 죽음으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게 행복할지 깊이 있는 고민을 해야 한다. 단순히 장례비를 지원하는 게 아닌, 행복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는 다양한 옵션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엔 그런 옵션이 없다. 병원에서 홀로 사망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존엄한 죽음이 무엇인지 개념을 정립하고, 삶을 마감하는 다양한 길을 열어 주는 게 국가의 책무다. 윤 교수 고통을 완화해 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삶을 잘 정리하고 떠나도록 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유산은 물론 정신적인 유산, 자신이 존재한 가치를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고 떠나는 게 존엄한 죽음이다. 이런 죽음을 맞을 수 있게 하려면 중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연명의료결정법도 정부가 5년마다 종합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말기 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돌봄이 얼마나 필요한지, 어느 정도 인력과 재정이 투입돼야 하는지 중장기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선진국 수준의 완화 의료 및 호스피스를 제공할 경우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하는 비용의 20~40%를 절감하면서 존엄한 죽음을 확대할 수 있다. 캐나다는 개인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죽음의 권리를 담은 ‘모든 캐나다인의 권리’를 만들었다. 영국은 매년 국가가 나서서 ‘좋은 죽음’을 정의한다. 탐사기획부 tamsa@seoul.co.kr 탐사기획부 유영규 부장, 임주형·이성원·신융아·이혜리 기자
  • 늘 민중 곁에 선 목회자, 북간도 나리꽃 보러 떠나다

    늘 민중 곁에 선 목회자, 북간도 나리꽃 보러 떠나다

    故 문익환 목사 동생… 독재 부조리 설파 이민자·떠돌이 신학 연구 ‘민중신학 큰 별’ 민주당·민평당 등 논평 내고 고인 애도민중신학의 큰 별로 북간도 나리꽃을 그리워하던 문동환 목사가 지난 9일 98세로 별세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10일 “문 목사님이 9일 오후 5시 50분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문 목사 측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문 목사는 일제강점기인 1921년 5월 북간도 명동촌에서 독립신문 기자로 일했던 문재린 목사와 여성운동가였던 김신묵 여사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문재린 목사를 비롯한 다섯 가문이 북간도로 이주해 ‘동쪽(한반도)을 밝힌다’는 뜻의 ‘명동촌’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터울의 형 고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 등과 함께 성장하며 민족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특히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 목사에게 큰 영향을 받고 목회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38년 은진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을 떠난 그는 1951년 미국 하트퍼드신학대학에서 종교교육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1961년 유학 중 만난 헤리엇 페이 핀치백(문혜림) 여사와 결혼했다. 신학 성서 해석에 중점을 둔 그는 힘없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이라면서 후학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부조리를 설파하는데 앞장섰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문’ 사건에 참여하면서 투옥돼 2년 가까이 복역했다. 석방 이후에도 동일방직 및 와이에이치(YH) 노조원의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되기도 했다. 1988년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를 지냈고 국회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문 목사는 1991년 미국으로 돌아가 젊은 목회자와 함께 성서 연구에 주력했다. 그는 2015년 5월 빗나간 바울 사상이 예수정신을 훼손시키고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한다는 내용이 담긴 ‘예수냐 바울이냐’ 등의 출판물을 펴냈다. 또 이주노동자의 저임금 구조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민중신학을 더욱 발전시켜 ‘이민자 신학’ ‘떠돌이 신학’ 연구에도 매진했다. 지난해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고향인 명동촌 뒷산의 나리꽃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또 지난 1월 CBS TV가 방송한 다큐멘터리에서 “진지하게 살면 역사와 통하게 되고 예수님하고 교류하게 되는 경험을 가진다”며 “내가 영웅적으로 살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역사가 나를 그렇게 끌고 갔다”고 말했다. 민주화에 기여한 원로 목사의 별세에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 정의당은 별도 논평을 내고 고인을 애도했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도 문 목사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창근·태근, 딸 영혜·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씨 등이 있다. 배우 문성근씨가 조카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2일 오전 8시.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이다. (02)2227-7500.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환경부 블랙리스트’ 김은경 전 장관 출국 금지에 청와대 “수사 지켜보겠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김은경 전 장관 출국 금지에 청와대 “수사 지켜보겠다”

    산하기관 표적 감사 등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출국금지와 관련, 청와대가 “검찰 수사를 지켜보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19일 정례 브리핑에서 김은경 전 장관이 직권남용 등 혐의로 출국금지 조치된 것과 관련해 청와대 입장이 있느냐는 질문에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라고 짧게 언급했다.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부장 주진우)는 문재인 정부 첫 환경부 장관인 김은경 전 장관이 박근혜 정부 당시 임명된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 등을 내보내기 위한 환경부의 표적 감사에 관여한 정황을 뒷받침하는 문건과 환경부 전·현직 관계자 등의 진술을 다수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검찰은 지난달 말 김은경 전 장관의 자택을 압수수색했고, 이달 초 김은경 전 장관을 소환해 블랙리스트 의혹과 ‘표적 감사’ 의혹 등을 조사했다. 김은경 전 장관은 혐의를 전면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김태우 전 수사관이 청와대 특감반의 민간인 사찰 등 의혹을 폭로하면서 불거졌다. 한편 김의겸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문 대통령이 지난해 말 일부 진행하고 남은 부처에 대한 올해 업무보고를 서면으로 받을 예정이라고 전했다. 김의겸 대변인은 “작년 말에 진행한 올해 업무보고 부처 7곳을 제외한 나머지 부처 보고를 서면으로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작년 12월 11일 교육부와 고용노동부를 시작으로 산업통상자원부·농림축산식품부·환경부·여성가족부·국방부 등에 대해 대면 업무보고를 받았다. 이에 따라 문 대통령은 기획재정부·국토교통부·중소벤처기업부·문화체육관광부·행정안전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해양수산부·통일부·외교부·보건복지부·법무부 등 11개 부처를 비롯한 각 기관에 대한 보고를 조만간 서면으로 받는다. 김의겸 대변인은 “아직 업무보고를 받지 못한 부처를 모두 대면 보고받기에는 물리적·시간상으로 촉박하고 다른 국정 현안도 많아서 서면보고로 대체하는 것”이라면서 “서면보고 준비는 이미 각 부처에서 거의 마무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해 사이트에 대한 강력한 차단 정책인 이른바 ‘https 차단’에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데 대해서는 “국민청원 답변을 통해 청와대 입장을 말씀드릴 것이며 그 전까지는 방송통신위원회에 문의하기 바란다”고 답했다. 전날 문 대통령이 종교지도자와 오찬 간담회에서 “남북 경협이 시작된다면 가장 먼저 시작할 수 있는 게 금강산 관광”이라고 말한 것과 관련해 ‘이번 북미정상회담에서 금강산 관광 문제가 풀릴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이에 “(금강산 관광이) 북미정상회담과 직접 연관됐다고 말씀드릴 순 없지만, 북미 협상이 진행돼 가면서 자연스럽게 금강산 관광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답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김구, 우파정당 세워 中국민당과 연합 전선…사회주의 김원봉 “자유는 우리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김구, 우파정당 세워 中국민당과 연합 전선…사회주의 김원봉 “자유는 우리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

    대한민국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나뉜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가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로 운영돼야 한다고 믿었던 이들이 대부분 민족주의자이다보니 역사학계에서는 그렇게 분류한다. 두 계열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기 전부터 갈라져 활동했다. 하지만 일제의 위력을 체감한 1920년대 후반부터 ‘서로 힘을 합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안창호 “대혁명적 조직으로 하나된 행동을” 지난달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를 위해 찾아간 중국 상하이 황푸구 닝하이둥루. 빌딩숲 사이로 저층의 주상복합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식당들이 많아 활기가 넘쳤다. 임정 시절 상하이 한인들의 종교 활동 공간이자 독립운동 집회 장소로 쓰였던 기독교 예배당 ‘산이탕’ 터다. 서울신문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여기서 안창호(1878~1938)가 ‘민족유일당’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한국 독립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대인배였다”고 평가했다. 1923년 전 세계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의 미래를 논의하고자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임정이라는 구심점이 와해되자 정치 세력들도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개별 독립단체가 일본을 상대하기에는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이상의 분열은 자멸’이라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이때 안창호가 모든 독립운동 단체·정당을 하나로 묶는 연합정당을 창설하자고 주장했다. 이것이 민족유일당 운동이다. 안창호는 1926년 7월 산이탕에서 동포들에게 호소했다. “공산주의 혁명을 하자, 무정부주의로 가자, 복벽(왕정복고) 운동에 나서자 등 각자가 자기의 의견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다투면 안 됩니다. ‘민족 혁명’을 한다는 각오로 ‘대(大)혁명적 조직’을 만든 뒤 하나의 행동을 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을 건지기 위해 개인의 사리(私利)를 버리고 큰 혁명당을 조직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민족 혁명이란 독립운동 세력이 정치·경제·종교의 차이를 떠나 민족 역량을 하나로 모으자는 것이다. 대혁명적 조직은 민족 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구심체를 뜻하는데, 이는 결국 임정을 대신할 새 기구를 꾸리자는 의도다. 안창호는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가 조국 독립인 만큼 모든 갈등을 잠시 접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백가쟁명에 나서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민족유일당 운동은 독립운동계의 최대 화두가 됐다.●반임정 기치 내건 조선민족혁명당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윤봉길(1908~1932) 의거로 일본에 쫓겨 항저우로 피신했던 1935년 7월. 난징에서 의열단과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5당이 모여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김두봉(1889~1961)을 비롯한 사회주의자, 김원봉(1898~1958년)으로 대표되는 무정부주의자, 이청천(1888~1957)과 신익희(1892~1956) 같은 민족주의자가 두루 모였다. 이들은 ‘반(反)임정’ 혹은 ‘비(非)김구파’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다. 독립운동가 2200여명이 참여한 거대 좌파 정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야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세계적으로 좌우 통합 분위기가 거셌다. 중국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제와 함께 싸우기 위해 1차 국공합작(1924~1927)을 성사시켰다. 소련에서도 한국 사회주의자들에게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은 이런 시대적 조류와도 잘 맞았다. 이들은 일본의 중국 침략(1931)과 독일의 국제연맹 탈퇴(1933),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1935) 등을 보며 제국주의 국가들이 다시 한 번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으로 예측하고 한국 독립의 기회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초기부터 김원봉이 이끄는 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의 독단이 문제가 됐다. 통합 두 달 만인 1935년 9월 한국독립당 조소앙(1887~1958)과 신한독립당 홍면희(1877~1946) 등이 탈당했다. 1937년 3월 이청천(1888~1957)도 김원봉과 결별하고 조선혁명당을 다시 세웠다. 충칭에서 만난 이선자(55) 전 충칭임시정부기념관 부관장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 중국 국민당이나 공산당 기밀 문서를 살펴보면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힘을 합치지 못하고 분열을 일삼는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고 전했다.●한국국민당 창립 멤버 이동녕·안공근 조선민족혁명당은 외교 독립 노선에 매달려 온 임정 인사들을 ‘몽상가’로 여겨 줄곧 임정 폐지를 주장했다. 김구(1876~1949)는 이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과거 사회주의 세력이 ‘자유시 참변’(1921)과 ‘레닌 자금 배달사고’(1920) 등으로 독립운동 진영을 어려움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진영은 임정을 지키고자 ‘대항마’ 성격의 우파 정당을 준비했다. 김구는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된 지 넉 달쯤 뒤인 1935년 11월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결성했다. 창립 멤버는 이동녕(1869~1940)과 안공근(1889~1939) 등으로 대부분 그의 핵심 측근이었다. 이 정당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중국 국민당과의 연대를 중요하게 여겼다. 실제로 한국국민당은 중국 측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며 임정의 여당 역할을 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한국국민당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돕고자 조선민족혁명당 탈당파인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일종의 우파 연합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계열도 같은 해 12월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이 모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해 맞섰다. 이로써 중국 본토에서 독립운동은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임정파·민족주의 세력과 조선민족혁명당이 주축이 된 반임정파·사회주의 세력의 두 축으로 재편됐다.●재평가 받아야 할 의열단 지도자 김원봉 난징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시간쯤 차로 이동하자 한 산골마을에 서탕녠 저수지가 나왔다. 여기서부터 산을 타고 1㎞ 넘게 걸어 올라가니 산 중턱쯤에 폐허에 가까운 도교사원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1920년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무장단체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이 조선혁명간부학교(1932~1935) 학생들을 훈련시킨 톈닝사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일부러 산속 깊숙한 절에서 군사 훈련을 한 것이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우리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1919~1920)를 신성시하면서 이 학교 출신이 주축인 의열단을 무시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우리나라에서 재평가받아야 할 독립운동가를 꼽으라면 김원봉이 단연 1위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봉은 스무 살이던 1918년 중국 난징의 진링대학(현 난징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 같은 약소국을 위해 일본과 싸워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고 미련없이 학업을 포기했다. 이후 무장투쟁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가 의열단원에게 한 말이 지금도 전해진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우리(의열단)가 선구자가 돼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조국 광복의 꿈을 안고 의열단을 창단한 스물한 살 때부터 광복을 맞아 귀국한 마흔일곱 살까지 26년간 일제와 쉬지 않고 싸웠다. 조선총독과 친일세력, 한국인 밀정을 처단하고자 의열단 투쟁을 진두지휘했고, 독립운동 조직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항일무장 세력으로 인정받은 조선의용대도 세웠다. 그는 1919년 3·1운동을 ‘실패한 혁명’으로 봤기에 이를 계승한 임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래도 조선 독립을 위해 1941년 김구와 과감히 손잡고 임정에 참여했다. 한국광복군 부사령관과 임정 군무부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 해방을 앞당겼다.●일제, 현재 가치 300억원 넘는 현상금 걸어 일제는 그에게 100만 대양(大洋·중국 화폐단위)이라는 현상금을 걸었다. 요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30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이 60만 대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원봉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헬렌 포스터 스노(1907~1997·필명 님 웨일스)가 쓴 책 ‘아리랑’에 나오는 김원봉에 대한 묘사다. “그는 고전적 유형의 의열투쟁가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몰랐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가씨들은 그를 동경했다. 미남으로 빼어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김원봉의 생애는 영화 ‘아나키스트’(2000)를 시작으로 ‘암살’(2015), ‘밀정’(2016) 등을 통해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상하이·난징·충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글로벌 In&Out] 70년 만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회 신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70년 만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회 신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2018년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한 해였지만 한국 매체가 간과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이다. 본 기사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끝내고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그 선교 활동은 1900년 2월 대수도사제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았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은 1903년 재정비한 선교회 부속학교에서 문을 열었고 성 니콜라이 성당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한편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총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대위기를 맞았다. 1918년 종교단체 자금 공급이 중단되고 자산과 토지가 몰수돼 러시아 정교회는 재정난에 봉착했다.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회의기구인 성 시노드가 1923년 그 관할권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했고 재산을 일본 정교회 재단 명의로 등기했다. 조선선교회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하에 발전해 나갔으며 1935년 조선인 정교도는 약 1100명에 달했다. 1940년대에 일본 당국이 조선선교회를 세르기로부터 독립시키려 압력을 가했고, 결국 1941년 10월 초 조선선교회의 전권이 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에게 이양되었다. 해방 전후 조선선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고 곧이어 1945년 12월 27일부터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하에 ‘임시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소련의 위신이 극도로 높아지자 그동안 볼셰비키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한 백계 러시아 디아스포라도 친소련파와 반소련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1946년 이후 한반도에 냉전체제가 성립되면서 선교회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욱 공공연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회 신도가 미소공위 소련 대표단이 폴리카르프 신부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이용해 폴리카르프 신부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 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지하에 일본 정교회의 관할권을 장악한 북미관구 소속 베냐민 대주교의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일본 정교회 산하로 들어갔고 폴리카르프 신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6월 말 추방당했다. 선교회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일본 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인 2018년 12월 28일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회의가 남북의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총대주교대리구를 신설하고 러시아인 신부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정교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2018년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한 해였다. 대한민국 올림픽 개최 및 남북 단일팀의 참여, 남북한 관계의 전면적 개선,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의 채택, 북-미 정상회담 등 사건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7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냉전질서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뉴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매체들은 2018년 말에 일어난 또 한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간과하였다. 그 것은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이다. 2018년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가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인정한 후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와의 친교관계를 단절하면서 동방 정교회 내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교회는 2018년 말 러시아에서 올레그 넬린 대사제(протоиерей Олег Нелин)를 한국에 파견함으로써 지난 70년 간 중단되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을 재개하려고 하고 있다. 물론, 2006년 평양에 김정일의 지시로 건설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삼위일체 성당, 일명 ‘정백사원’이 있으나 북한의 국가 특성상 선교 활동이 어렵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는 2018년 서울에서 재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 기사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대한제국을 선포할 준비를 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으나 그 선교 활동은 1899년 중순 2명의 러시아인 선교사와 1900년 2월 흐리산프 셧콥스키 대수도사제(архимандрит 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싶었던 고종이 1898년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짓도록 서울 정동의 토지 825평을 러시아 외교사절단에 선물하였는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외교적 스캔들이 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결국 땅 값을 한국 정부에 환불함으로써 토지를 사실상 구입하였다.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00년 4월 9일자 ≪제국신문≫이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최근 희랍교(그리스 정교)는 들어온 지가 수 주일에 불과한데 입교하는 사람이 심히 많다고 하니 어느 교파이던지 천주교(기독교 전반)란 일반적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 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아 정교 신도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은 1903년에 재장비한 선교회 부속 학교에서 열렸고 성 니콜라이堂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한반도와 만주가 전장이 되었다.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년 ~ 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총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대위기를 맞이하였다. 1918년 인민위원소비에트의 ‘국가와 종교, 교회와 학교의 분리에 관한 법령’ 공포로 종교 단체 자금 공급이 중단되고 그 자산과 토지가 몰수되면서 러시아 정교회가 재정난에 봉착하였다. 소비에트 정부가 조선선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회의기구인 성 시노드가 1923년 그 관할권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하였고 일본정부로부터 소유권 보호를 받기 위해 그 재산을 일본정교회 재단의 명의로 등기했다. 조선선교회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하에 발전해 나갔으며 1935년 조선인 정교도는 약 1100 명에 달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당국이 조선선교회를 러시아인 관구장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로부터 독립시키려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1941년 10월 초 조선선교회의 전권이 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에게 이양되었다. 해방 전후 조선선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고 곧 이어 1945년 12월 27일부터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 하의 임시 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소련의 위신이 극도로 높아지자 그 동안 볼셰비키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한 백위계 디아스포라도 친소련파와 반소련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1946년 이후 냉전체제가 한반도에서 성립되면서 선교회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욱 공공연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2차 미소공위 개최시 소련 대표단이 선교회 맞은편에 숙소를 차리고 폴리카르프 신부를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자 선교회의 대소관계와 관련된 의혹이 심화되고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 신도가 이를 이용하여 폴리카르프 신부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 (SCAP)의 지지 하에 일본정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그 관할권을 장악한 북미관구(현재 아메리카 정교회) 소속의 베니아민 바살리가 대주교(архиепископ Вениамин Басалыга)의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일본정교회의 산하로 들어갔고 폴리카르프 신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6월말 북한으로 추방당하고 만주를 거쳐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선교회는 한국전쟁에서 폭격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북미관구 소속의 일본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이탈하고 터키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인 2018년 12월 28일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회의가 남북한의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싱가포르 및 동남아시아 주재 총대주교대리구를 신설하고 러시아인 신부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정교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글·사진 : 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3·1운동 진원지 서울 한복판서 ‘한성임시정부’ 수립 선포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3·1운동 진원지 서울 한복판서 ‘한성임시정부’ 수립 선포

    <1부> 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③서울 ‘한성임시정부’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지자 일제는 헌병을 동원해 주모자를 검거·학살했다. 특히 조선의 수도이자 이번 운동의 진원지인 서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은 대담하게 적지(敵地)가 된 서울 한복판에서 임시정부 설립을 선언했다. 바로 노령정부(러시아)와 상하이정부(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수립된 한성정부다. 이 정부는 인민의 뜻을 수렴하기 위해 민주적 절차를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3·1운동 당시 감리교 전도사 이규갑(1888∼1970)은 평양 대표로 시위에 참석했다가 일제의 검거령으로 친척 집에 숨어 있었다. 3월 5일 오후 9시쯤 그에게 동지 8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이번 시위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될 수도 있으니 서둘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이규갑은 “정부를 세우는 건 한두 사람의 기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민의 총의를 모을 지역 대표부터 뽑자”고 설득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임정이 만들어졌다. 임정 설립 주도자는 검사 출신 홍면희(홍진·1877~1946)와 목사 출신 이규갑 등이다. 이들은 조선 황실 인사나 독립운동가 33인 등과 관계없는 순수 민간인이었다. 17일에는 검사 한성오(생몰연대 미상)의 집에 20여명이 모여 임시정부 준비위원회를 열었다. 정부 명칭을 ‘한성임시정부’로 정하고 민주공화제에 기반한 집정관총재 제도를 택했다. 이들은 보름 뒤인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기로 했다. 각 도 대표들이 모여 민주적으로 결의하면 조선 국민 전체 의견으로 봐도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임정 준비위는 곧바로 전국 각지를 돌며 민족 대표 25명을 모집해 13도 대표자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풍경을 묘사한 이규갑의 증언이다. “당일(4월 2일) 아침 권혁채와 홍면희, 안상덕 등과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그때는 3·1운동 뒤 각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던 때라 일경(일본 경찰)의 경계가 심했다. 인천역에 내리자 불심검문을 받았다. 홍면희는 변호사여서 무사했지만 나는 검색을 당했다. 그러자 홍면희가 ‘이 사람은 약장사로 우리와 일행’이라고 둘러대 위기를 면했다.” 이날 만국공원에 찾아온 이들은 많지 않았다. 종교계와 서울·경기 지역 대표들만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13도 대표자회의 장소를 만국공원으로 정한 것은 당시 이곳이 일본인을 중심으로 외국인이 모여 살던 곳이었기에 조선 독립 의지를 보여줄 좋은 장소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대표자회의 참석자들은 같은 달 23일 서울 종로 중식당 봉춘관에서 총회 격인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보신각에서 민중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3·1운동의 여파가 끝나지 않은 때 한번 더 일제의 허를 찌르겠다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이날 종로 일대에는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등이 뿌려졌다. 집정관총재 이승만(1875~1965)과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 내무총장 이동녕(1869∼1940) 등 각료 명단도 나왔다. 이런 내용은 미국의 UP통신(현 UPI)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됐다. 덕분에 한성정부는 국내외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임시정부가 됐다.●현실적 제약으로 ‘미완의 시도’ 평가도 다만 한성정부가 완전하게 수립된 임정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인천에서 열린 13도 대표자회의는 성원을 채우지 못했고 서울의 국민대회 역시 소수 학생들이 전단을 살포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는 것이다. 노령·상하이정부와 달리 국민 전체의 뜻을 반영해 민주공화정을 탄생시키고자 했지만 일제의 압박 등 현실적 제약이 많아 ‘미완의 시도’에 그쳤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이현희(1937~2010) 전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한성정부는 13도 대표나 임시정부 준비위원회 위원들을 집행부 임명에서 배제하는 등 공평무사한 인사를 단행하려고 했다. 절차적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이 덕분에 1987년 9차 개헌 당시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의 법통이 (한성정부를 계승한)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확히 선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논란의 중심에 선 임정 초대 대통령 “(해방 당시) 대한민국이 갓 도입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정부와 국민 모두 낯설고 서툴렀다. 이승만 정부는 (불가피하게 권위주의 방식으로 통치했지만) 그래도 헌법을 정지시키거나 국회를 해산하거나 언론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훼손하지는 않았다.”(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는 (같은 진영인)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조차 좋았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독재·반공 이데올로기는 이승만 정권과 연관성이 높기에 그를 치켜세워야 (독재·반공 정치체제가) 합리화된다. 이승만의 재평가 시도는 반대편을 종북이나 용공세력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다.”(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에 추대돼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오르는 우남 이승만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독립운동의 분열과 남북 분단, 한국전쟁 당시 그릇된 대처, 부정부패, 독재정치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이승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마음놓고 그를 비난하는 자체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한 그의 공로”라며 “과(過)보다 공(功)이 훨씬 큰 만큼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1896년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만들어졌다. 자주독립과 천부인권 존중, 한글 사용 등을 강조했는데, 배후에는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 등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만들어 조선인에게 영어와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이승만은 이 학당의 학생이었다.●“일단 비위 거슬리면 타인 이해하려 안해” 독립협회는 종종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배재학당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이승만은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하다가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7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조선사회에 환멸을 느꼈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면 반드시 기독교 이념에 입각한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배재학당의 경험과 기독교의 이분법적 선악 개념 등이 더해져 훗날 남과 타협하지 않는 특유의 성격이 생겨난 것 같다. 이승만을 가까이서 도왔던 정치인 허정(1896∼1988)은 “평소 장난도 잘 치고 유머러스했지만 일단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조금도 자기 뜻을 굽히거나 남의 사정을 봐주려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한성정부 집정관총재를 시작으로 중국 상하이로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그는 임정 대통령 재임기간 5년 6개월 가운데 상하이에는 반년 정도만 머물렀다. 대부분 기간은 미국에 혼자 머물며 전보를 이용해 ‘원격 통치’를 했다. 이 때문에 이동휘(1873~1935), 안창호(1878~1938) 등과 마찰이 생겼고 훗날 임정 전체가 내분에 휩싸이는 원인이 됐다.●“정부가 단 한 사람 때문에 법을 바꾼 사례” 그는 또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에 임명된 때부터 스스로를 집정관이 아닌 ‘대통령’(president)으로 칭해 논란이 됐다. 교민 성금 유용 의혹과 윤봉길(1908~1932) 의거 비난 등으로 구설에 올랐다. 최근에는 1918년 10월 그가 미국에서 작성한 1차 세계대전 징집 카드에 국적을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적은 것이 알려져 비난을 샀다. 당시 미국에서 일본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좋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도적 오기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원래 상하이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였다. 하지만 이승만이 끝까지 대통령 직함을 고집해 결국 임정이 1919년 9월 개헌 때 통치제도를 대통령제로 바꿨다. 정부가 한 사람 때문에 법을 바꾼 보기 드문 사례”라고 설명했다. ●루스벨트·윌슨과 인연… 지도자로 급부상 그럼에도 이승만은 1919년 4월 15일 중국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17일 평안도에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방총리로,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에 선임되는 등 거의 모든 임정에서 1, 2인자로 지목됐다. 조선 사회는 왜 이승만을 새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 여겼을까. 그는 31살이던 1905년 8월 기독교계의 주선으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를 만나 한국의 독립을 청원한 경험이 있다. 또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해 약소 민족에게 희망을 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 역시 이승만이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학교 총장이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 갖기 힘든 경력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승만은 1차 세계대전 뒤 최강국이 된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외교 카드’였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해방구 佛조계지서 태동한 상하이 정부… 대한민국 국호 첫 명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해방구 佛조계지서 태동한 상하이 정부… 대한민국 국호 첫 명시

    1부 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②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중국 상하이는 명나라 말기부터 성장해 1880년대에는 동북아시아의 최대 상업 도시가 됐다. 1910년 대한제국 국권을 빼앗긴 뒤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주목받았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이 독자적 주권을 행사하는 ‘조계’(외국인 자치구역)를 설치해 일본을 비롯한 다른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간섭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외국인에게도 건국이념인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보장해 한국인에게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 민족의 두 번째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태동했다.●“첫 번째 ‘임정 터’ 못 찾아…대한민국의 숙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를 위해 지난달 중순 찾아간 상하이 최대 번화가 화이하이중루 일대. 사람과 차들로 거리가 넘쳐나고 전 세계 패션 브랜드가 건물마다 즐비했다. ‘자본주의 최전선’인 이곳이 정말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고층빌딩이 가득 찬 서금이로(옛 김신부로) 지역을 바라보며 “100년 전 이곳 어딘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상하이 임정 기념관은 ‘보경리 청사’로 1926~1932년에 썼던 곳이다. 이 작가는 “최근 중국인 학자가 첫 번째 임정 터를 찾았다고 간략히 발표했지만 이에 대한 고증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시원(始原)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919년 3월 17일 러시아 고려인들이 프리모르스키(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를 선포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때마침 서울에서도 임정 수립을 논의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같은 달 26일 프랑스 조계의 한 예배당에 모였다. “조선총독부에 맞서 서둘러 임시정부를 조직하자”는 의견과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라도 국내 지도자들의 뜻을 들어 보고 정하자”는 반론이 맞섰다. 하지만 3·1운동 직후부터 중국과 러시아에서 거물급 인사들이 상하이로 모여들고 있어 정부 수립을 더는 늦추기 어려웠다. 앞선 노령정부에다가 서울에 임정(한성정부)이 또 생기면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놓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퍼졌다. 4월 10일 이동녕(1869~1940)과 이광수(1892~1950), 여운형(1886~1947) 등은 우리 역사 최초의 의회인 임시의정원을 꾸리고 첫 번째 회의를 가졌다. 밤을 새워 토의하던 중 신석우(1894∼1953)가 “임시정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고종 황제가 선포한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따오고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에서 ‘민국’을 가져온 것이다. 여운형이 “이 나라가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망했는데 또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 보자”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 의원 다수가 이에 공감해 상하이정부의 이름이 정해졌다. 다음날 이들은 국무총리에 이승만(1875~1965)을 추대하고 내무 안창호(1878~1938), 재무 최재형(1860~1920) 등 6부 총장(장관)을 임명했다. 우리가 국가기념일로 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4월 11일)은 여기서 유래됐다.●왕 아닌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정 첫 공식화 그렇다면 두 번째 임정은 왜 상하이에 세워졌을까. 독립운동가 양우조(1897~1964)·최선화(1911~2003) 부부의 임정 기록을 외손녀 김현주씨가 정리한 ‘제시의 일기’(1999년)를 보면 여기가 왜 임정의 적지인지 잘 묘사돼 있다. “중일전쟁(1937~1945) 전 상하이는 서양 문물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와 똑같이 살 수 있도록 조계지로 분할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조계지가 시설이 가장 좋았다. 프랑스는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답게 망명객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조선에서 온 이들이 다른 조계지에 숨으면 곧 붙들려 갔지만 프랑스 조계지에서는 안전했다. 설사 끌려간다고 해도 프랑스 정부가 항의하면 다시 풀려나올 수 있었다.”(1946년 2월 21일) 상하이정부는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노령·한성정부와 달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명시하고 한국사 최초로 민주공화정 국가 건설을 공식화한 것이다. 새 나라가 대한제국(조선)을 계승하면서도 국가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3·1운동 전까지 이어져 오던 복벽주의(나라를 되찾아 왕을 다시 세우겠다는 주장)를 완전히 단절시킨 것이다. 다만 상하이정부가 추구한 ‘외교독립론’은 훗날 임정이 끊임없이 갈등과 내분에 빠지는 단초가 됐다. 외교적 방법론은 당시 우리 민족의 현실적 역량을 반영한 전략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이기든 지든)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지 않고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고 믿는 무장투쟁론자들을 설득하진 못했다.●쑨원의 부인 추모 능원에 신규식 등 만국공묘 상하이지하철 10호선 쑹위안루역 2번 출구로 나오니 말끔하게 정돈된 공원이 있었다. ‘중화민국의 아버지’ 쑨원(1866~1925)의 두 번째 부인이자 ‘중국의 국모’로 불리는 쑹칭링(1893~1981)을 추모하는 곳이다. 공원 한쪽에 외국인 묘지를 모아 놓은 ‘만국공묘’가 나타났다. 묘비를 하나씩 더듬다가 낯선 한국인 이름 하나를 찾아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기획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계자’로 인정받는 신규식(1880~1922)이었다. 나라를 위해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불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특히 한쪽 눈을 가린 채 카이저 수염을 기른 외모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하지만 그가 초기 임정을 상하이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충북 청원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채호(1880~1936), 신석우와 함께 ‘산동삼재’(산동신씨 가문의 3대 수재)로 불렸다. 대한제국에서 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첫 번째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가족에게 발견돼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눈 시력을 잃었다. 지인들이 ‘애꾸눈’이라고 놀리자 신규식은 스스로를 ‘예관’(睨觀·한쪽 눈으로 흘겨봄)으로 불렀다.●신해혁명 경험삼아 민주공화정 개념 전파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두 번째로 집에서 독을 마셨다. 때마침 대종교 종사 나철(1863~1916)의 눈에 띄어 다시 한 번 구조됐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의 공화주의 노력을 한반도에 적용하겠다는 생각에 쑨원과 천두슈(1879~1942), 천치메이(1878~1916) 등 혁명가 그룹과 친분을 맺었다.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1905~1912·중국 국민당의 전신)에 가입하고 청 왕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에도 직접 참여했다. 1912년 국내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고자 ‘동제사’를 조직했다. 총재 박은식(1859~1925)을 비롯해 김규식(1881~1950), 신채호, 조소앙(1887~1958) 등 동제사 출신은 후일 임정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다. 이들은 1917년 7월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2년 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촉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두 번째 임정이 상하이에 자리잡은 건 신규식의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국호를 제안한 신석우가 바로 신규식의 조카”라며 “신규식은 자신의 신해혁명 경험을 독립지사들에게 소개해 대한민국의 토대가 된 민주공화정 개념을 설파했다”고 설명했다. 1921년 11월 쑨원이 이끄는 중국국민당이 베이징 군벌정부에 대항해 광둥에 호법정부를 세웠다. 신규식은 국무총리·외무총장 자격으로 그를 찾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국가로 승인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쑨원은 혁명동지 신규식을 극진히 예우했다. 호법정부의 정치·재정 상황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그의 부탁을 일부 받아들였다. 이는 국제적으로 정식 주권기구로 인정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임정이 국민당의 후원을 받아 다소나마 활로를 찾는 계기가 됐다. ●해외서 문전박대 뒤 임정 외교독립론 도마에 1922년 대통령 이승만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워싱턴회의에 갔다가 개최국인 미국으로부터 문전박대 당해 쫓겨났다. 임정의 외교독립론이 논란이 됐다. 신규식은 이런 임정의 처지를 비관해 25일간 단식하다가 같은 해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일각에서는 그가 1921년 쑨원을 만났을 때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만세’를 외친 것을 두고 사대적 자세를 지적한다. 하지만 대의명분을 누구보다 중시하던 신규식의 평소 성격에 비춰 볼 때 그런 굴욕을 참아내며 쑨원을 대한 건 오로지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으리라. 상하이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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