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종교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한국 AI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조경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교착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곤충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4,662
  • 안양 수리산 성지, 역사공원으로 재탄생

    안양 수리산 성지, 역사공원으로 재탄생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 수리산 성지가 역사공원으로 재탄생한다. 시는 수리산 성지(1만 6475㎡)를 역사공원으로 지정 고시했다고 14일 밝혔다. 도립공원 구역에서 지정 해제된 수리산 성지는 1830년대 전후 천주교 박해시기에 교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이다. 1937년 7월 최경환 성인이 옥에서 순교하고 나서 매장된 곳이다. 성인묘역과 고택, 마리아 상 등이 있다. 시는 역사적 의의를 새기기 위해 2003년 안양 8경의 제5경으로 지정했다. 그동안 수리산 성지는 개발제한구역 및 도립공원 지역으로 묶여 있어 종교역사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부지를 활용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주교 수원교구는 이곳을 역사공원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2016년 10월 수원교구가 신청서를 접수하자 경기도와 시는 도립공원 해제를 위한 실무협의를 착수했다. 수원교구는 수리산 성지와 인접한 군포지역 사유지를 매입해 역사공원 조성에 필요한 도유지와 상호교환해 해제 절차를 마무리했다. 경기도는 지난해 12월 31일 역사공원 예정부지에 대해 도립공원 구역 지정을 해제했다. 수리산 성지에 대한 역사공원 조성이 결정됨에 따라 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려는 안양시의 새로운 또 하나의 명소가 됐다. 최 시장은 “역사, 문화적으로 가치가 높은 수리산 성지를 안양의 명소가 될 수 있도록 역사공원조성에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요셉 신부는 “순례자의 뜻을 기리고 역사적 가치가 빛날 수 있도록 잘 조성하겠다”고 화답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세계문화유산 불국사가 품은 불교 이야기

    세계문화유산 불국사가 품은 불교 이야기

    2018년에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7사찰에 앞서 24년 전에 이미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먼저 찾았다. 신라의 불교는 호국불교로 진흥왕 때부터 대형 사찰들이 건립된다. 진흥왕 때 황룡사가 건립되고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 목탑과 분황사가 건립 되었다. 무열왕이 통일의 기반을 다지고 문무왕이 통일을 완성할 무렵 신라에는 원효와 의상이라는 걸출한 승려가 있었고 이중 의상은 당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돌아와 통일 신라에 화엄경을 설파하고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이후 그의 제자들이 신라의 불교를 더 융성하게 한다.불국사는 그 선상에서 지어진 사찰이다.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을 기리며 감은사를 짓고 만파식적을 얻었다. 이후 문무왕의 증손인 경덕왕 때 불국사와 석굴암이 지어졌고 석굴암의 방향이 문무 왕릉을 향해 감은사와 같이 문무왕을 기리고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는 문무대왕의 유지대로 외세를 억누르기 위한 기원의 의미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불국사에는 두 가지 설화가 전한다. 그 하나는 김대성에 대한 설화고 또 하나는 아사달과 아사녀에 관한 설화다. 김대성에 대한 전설은 불국사의 창건에 대한 이야기고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은 무영탑이라 부르는 석가탑에 대한 이야기다. 2대의 왕을 위해 왕명을 받들어 김대성이 지은 것이 효자로 이름난 재상 김대성이 지은 것으로 잘못 전해지고 있는 듯하다.불국사는 이름 그대로 불국을 재현한 절이다. 현세의 부처인 석가모니와 과거의 부처이며 극락세계의 영주인 아미타불,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모셨고 중생을 구원하는 관음보살 역시 따로 모셨다. 네 개의 영역은 크기는 물론 마당의 높이가 다른 완전히 독립된 영역이다.석가탑 앞에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다보탑을 모셨으니 부처님만 네 분을 모신 절이다. 이중 그 중심은 현세의 부처를 모신 대웅전 영역이다. 도솔천의 33천을 상징하는 청운교 백운교 33계단을 올라 자하문을 지나면 여기부터는 불국이다. 계단의 수에 대해서는 34단이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첫 단을 지반과 같은 높이였다고 보면 33단이 된다. 다른 사찰의 경우라면 자하문은 불이문이 되었을 것이다. 계단을 교(橋)라 한 것은 부처의 나라로 들어가는 다리역할을 한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또 범영루 우측의 수구에서는 물이 떨어져 밑의 연못에 떨어졌을 것이며 청운교 아치밑에는 이 물이 흐르거나 고여 있었다면 다리교를 쓰는 것이 맞을 것이다.복원을 위해 발굴조사를 한 기록을 보면 지금의 불국사 앞 마당에도 연지의 터가 발견되었고 여기서 기와등이 발견되었다. 자하는 자색 안개를 뜻 하는데 수구에서 물이 떨어지며 물안개가 피어났는데 그 안개가 자색이었다고도 한다. 또 자하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자주 빛 금색 안개를 말한다. 자하문의 안쪽에 해와 달이 함께 그려진 것은 자하문 안의 불국이 해와 달을 위의 하늘에 있다는 의미로 불국임을 다시 알려준다. 자하문에 평주와 고주를 연결하는 계량 또는 소 꼬리같이 생겨 우미량이라고 하는 부재를 하나는 위로 휘고 하나는 아래로 휜 부재를 사용한 것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이 다르니 해가 뜨면 달이 지고 달이 뜨면 해가 지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어 해와 달이 다 있는 불국을 표현하였다.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청하여 석가탑을 비롯한 석조물을 건조 하였는데 몇 해가 가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 아사녀가 불국사로 찾아간다. 아녀자가 불사를 조성하는 곳에 들어가면 아니 된다 하여 그녀를 들이지 않고 무영지에서 가서 지성으로 기도를 하며 기다리라한다. 탑이 완성되면 그 그림자가 무영지에 비칠 것이니 그때가 되면 아사달을 만날 것이라 하였다. 지성으로 기도를 하며 기다렸으나 끝내 그림자는 비추지 아니하였다. 기다림에 지친 아사녀는 무영지에 몸을 던졌다 한다. 석가탑은 그림자가 없는 무영탑이다.해와 달 위에 떠있는 불국이니 어찌 그림자가 있을 수 있겠나? 불국사의 경내가 불국임을 이야기 하는 또 하나의 설화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분별이 없다는 것이다. 분별은 실체와 상관없이 개념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선과 악, 깨끗하고 더러운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같은 구별은 원래 하나인 세상을 인간이 둘로 나누는 것이다. 부처가 되면 이런 분별이 없어지고 비로써 하나의 세상에 있게 된다. 그림자가 없다는 이야기는 석가모니는 현세의 부처이기 때문에 분별을 하지 않고 분별이 없는 것을 상징적으로 그림자가 없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석가탑은 애초에 그림자가 없는 탑이었다. 아사녀는 결국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탑의 그림자가 생기길 기다린 것이다. 아름다운 전설이지만 자비의 부처님 전설에 희생된 아사녀의 이야기는 어쩌면 종교가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서글픈 이야기다.석가탑과 다보탑은 두 부처님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아미타불이 과거의 부처이며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라면 다보여래는 동방보정세계의 교주다. 몸 전체가 진신사리가 되어 보석처럼 빛나는 화려한 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스스로 어느 곳이든 법화경을 설하는 곳에 나의 보탑이 솟아나와 그 설법을 증명 하리라 하였다. 석가모니 부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 역시 보탑이 솟아 나왔다 하여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석가탑과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다보탑을 함께 조성한 것이다. 석가탑은 2단의 기단 아래 자연석의 기반이 있다. 석가모니가 앉아있던 바위를 상장한다. 남산 용장사지의 석탑이 바위 위에 앉은 모습이 연상된다. 석가탑의 해체 복원 시 사리함과 함께 무구정광 다라니경 목판 인쇄본이 나왔다. 이 목판 인쇄본은 최초의 목판 인쇄기록을 바꾸는 중요한 문화재로 천년이 넘은 한지의 우수성도 함께 입증되었다. 다보탑의 다섯 기둥으로 이루어진 기단부의 안쪽에 있었을 것이라 예상한 사리장엄구와 이불 병좌상이 없는 것은 일제 때 해체 복원되며 사라진 것이라 추측한다. 이불 병좌상은 다보여래가 자신의 보탑 안에 자리의 반을 내어주어 석가모니 부처와 다보여래가 함께 나란히 앉은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해체복원이 원래의 상태대로 복원해야 하는 것이나 불국사나 석굴암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가 그렇지 못하였다. 불국사의 석축을 보면 원형의 석축과 복원된 석축이 확연히 다른 것이 보인다. 원래의 석축은 크고 넓은 자연석위에 그랭이질 된 장대석을 얹어 자연과 인고의 조화를 보여주는 한편 그랭이 공법으로 잘 맞춰진 석축은 지진을 버텨낼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여러 전란에도 불구하고 불국사의 석축 등이 버틸 수 있던 것도 이러한 우리만의 독특한 기술 때문이었다.불국사의 대웅전의 영역은 기하학적으로도 거의 완벽하다. 청운교 백운교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은 정확히 중심이 일치하는 직선상에 놓여 있으며 석가탑과 다보탑, 영역을 구획하는 회랑은 그 중심축에서 완전히 대칭이다. 또 석가탑과 다보탑의 중심거리의 반을 기준 척으로 계산하면 대웅전 영역의 가로는 기준척의 네 배고 길이는 다섯 배가 된다. 또 석가탑과 다보탑의 하부 기단너비는 같으며 대웅전의 폭은 이 기단 너비의 세배가 된다. 또 대웅전 영역의 전면 두 꼭지 점과 대웅전 뒷벽의 중심을 연결하면 정삼각형이 된다. 기준척도를 가지고 그 비율로 만들어낸 정확한 규칙이 보인다. 이 완벽한 대칭은 다보탑과 석가탑의 형태에서 깨진다. 백제 미륵사의 경우 같은 쌍탑 이지만 두 탑의 모양이 같다. 이에 비해 불국사는 그 대칭의 경직성이 두 탑에서 깨진다. 그 깨진 대칭은 영역 전면의 양 끝에 범영루와 자경루에서 회복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한 석가탑의 연장선에 있는 범영루는 누각을 받이는 석조의 화려한 주초부터 건물까지 화려함을 자랑하고 화려한 다보탑의 연장선에 있는 자경루는 꾸밈없이 간결하다. 양쪽이 간결함과 화려함을 나눠서 그 무게감을 맞추어 대칭속의 비대칭, 비대칭 합의 대칭을 완벽하게 구현 하였다.아미타 부처가 있는 영역은 그 지반의 높이와 계단의 단수가 낮다. 극락왕생을 빌어준다는 그 극락이 이곳이니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계단을 오르내렸을까? 연화교와 칠보교를 통해 들어가는데 이는 극락정토가 연화와 칠보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이를 의미한다. 서방 극락정토의 부처님을 만나러 올라가는 연화교의 계단석 바닥에는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한 장의 꽃잎으로 볼 수도 있고 한 송이의 꽃으로 볼 수도 있다. 꽃잎이라 보면 꽃잎을 즈려밟고 오르는 것이고 꽃송이라면 피지 않은 봉우리를 보며 올라가서 부처님을 만나고 내려올 땐 부처의 법력으로 활짝 핀 연꽃을 보며 내려오는 형상이 된다. 나는 후자에 무게를 두고 싶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축소판이고 조금 간결해진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아미타불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의 이름은 안양문 이고 아미타불을 모신 불전은 극락전이다. 아미타불은 화엄종에서 본존불로 모시는 극락정토의 부처이며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으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부처님이다. 불국사는 경덕왕 때 지어졌다고 하나 무설전은 문무왕 때 지어졌고 대규모 사찰이 아닌 작은 사찰로는 경덕왕 이전에 존재 했으며 경덕왕 때 대규모로 중수되어 큰 사찰이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80여종 2000여 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경덕왕은 불국사 외에 석굴암을 조성하였고 불교유적의 보고인 남산과 월성의 남쪽 끝을 연결하는 월정교를 축조하는 등 신라의 대표적 유적들을 조성한 것으로 보아 불심과 효심이 깊고 예술적 감각도 뛰어난 성군이 아니었을까 싶다. 임진왜란 때 석조물과 일부 건물만 남기고 전소 되었고 중수와 방치를 거쳐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문화공보부 시절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 되었다.복원된 현재의 불국사가 원형에 비해 미흡하다는 지적들이 많음에도 지금의 모습으로도 우리의 대표적 유적중 하나로 손색이 없다. 불국사 앞의 마당과 연못을 비롯 원형이 복원된 모습을 상상해본다. 경주에 가면 작년 가을에 복원된 월정교도 꼭 들러보시길 권한다.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가 생각나는, 누각으로 덮인 누교로는 유일한 다리다. 원효대사가 요석궁에 머무를 시간을 벌기위해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젖게 하여 요석공주와 설총을 만들었다는 낭만적인 설화가 깃든 곳이니 사랑하는 이와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글 사진: 최세일 한건축 대표
  • 황교익, 백종원 비판 “‘골목식당’=최악의 방송”

    황교익, 백종원 비판 “‘골목식당’=최악의 방송”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대해 “최악의 방송”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12일 황교익은 페이스북을 통해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담긴 글을 공개했다. 황교익은 해당 글을 통해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사회적 공감과 연대를 방해하는 최악의 방송”이라고 지칭했다. 황교익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피자집, 고로케집 등을 언급하며 출연자들을 향한 혐오 감정을 부추겨 시청률을 상승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황교익은 “백종원의 모든 말은 옳고 식당 주인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는 문제가 있게 된 것”이라며 “이 상황에서는 백종원이 식당 주인에게 막 대하여도 된다는 생각을 시청자가 하게 되고, 시청자는 실제로 막 대하고 있다. 욕하고 비난하고 혐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골목식당’의 주인공은 한국 서민 삶을 대표하는 영세업자 사장님들”이라며 “‘골목식당’은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을 왜곡했다. 성격과 능력의 문제에 차별과 혐오를 붙였다. 서민 시청자가 서민 출연자를 욕하는 방송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덧붙였다.황교인은 백종원의 방송 출연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는 “백종원이 ‘골목식당’에 출연하면서 백종원의 얼굴을 달고 있는 프렌차이즈가 가장 큰 혜택을 보고 있다”며 “지역공동체를 깨뜨리며 성장해 온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고 돈이 일방적으로 쏠리게 만든 지금 체제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골목식당’ 주인들이 힘든 것은 그들에게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골목식당’은 식당 주인 개인의 문제인 듯 왜곡하고 있다. 심지어 시민끼리의 혐오를 부추겨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공감과 연대를 방해하고 있다. 최악의 방송”이라고 혹평했다. 다음은 황교익 글 전문. <사회적 공감과 연대를 방해하는 최악의 방송> 인간은 다 다르다. 피부색도 다르고 쓰는 말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다 다르다. 한국인끼리도 다 다르다. 성격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한다. 여기에 차별의 시각을 붙이면 안 된다. 차별은 혐오를 부르고, 혐오로 가득한 사회는 망한다. 막걸리 조작 방송 때문에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자주 보게 되었다. 건물주 아들 의혹, 프랜차이즈 업체 논란이 있는 것도 알고 있다. 애초 영세상인을 돕자는 의도로 출발한 것이니 이들의 출연은 적합하지 않다. 시청자들이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내 눈에는 더 큰 문제가 보였다. 혐오의 감정이다. 골목식당을 역주행하여서 보니 제작진이 짜놓은 프레임을 읽을 수 있었다. 백종원을 무엇이든 잘 알고 척척 해결할 수 있는 사람으로 포장하였다. 솔루션이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장치이다. 식당 주인은 솔루션을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니 부족한 점을 강조하여 편집할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 다음이 문제이다. ‘백종원 척척박사’를 너무 강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12종의 막걸리를 다 맞힌 것처럼 조작한 것도 그 이유이다. 식당 경영에 대한 솔루션을 넘어 인간 개조 솔루션까지 진행하게 하였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방송이 있었다. 그때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동원되어 문제를 해결하였다. 골목식당에서는 백종원 혼자서 모두 진행하였다.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써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백종원과 식당 주인의 부딪힘에서 힘의 균형이 완전히 한쪽으로 쏠려버린 것이다. 백종원의 모든 말은 옳고 식당 주인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는 문제가 있게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백종원이 식당 주인에게 막 대하여도 된다는 생각을 시청자가 하게 되고, 시청자는 실제로 막 대하고 있다. 욕하고 비난하고 혐오하고 있다. 게시판을 보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글들이 난무한다. 정신병을 운운하고 지역감정을 꺼내든다. 막장 드라마가 시청률이 나오는 것은 욕을 하면서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이 시청률이 나오는 것도 똑같다. 욕을 하면서 본다. 최근에 가장 욕을 많이 먹고 있는 골목식당 출연자는 피잣집과 고로케집 주인이고, 이들 ‘덕’에 시청률이 최고점을 찍었다. 막장 드라마 보듯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허구의 인물로 만든 허구의 스토리이고, 백종원의 골목식당에서는 실재의 인물이 실재의 삶을 살고 있다. 골목식당의 출연자는 막장 드라마의 배우가 아니다. 그러니 시청자의 욕은, 막장 드라마에서는 허구의 욕이지만 골목식당에서는 실재의 욕이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백종원일까. 그는 방송으로 골목식당을 스쳐지나가는 먹자골목의 황제이다. 한국에서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가장 크게 성공한 사업가이다. 골목식당 주인 입장에서 보자면 경쟁자이다. 백종원처럼 크게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에 그를 존경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치열한 외식시장에서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냉정함을 잊으면 안 된다. 백종원도 골목식당 출연 이유를 “외식업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다시, 골목식당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생각해보자. 누군가. 골목식당의 주인들이다. 한국 서민의 삶을 대표하는 영세업체 사장님들이다. 시청자의 댓글을 쭈욱 읽으며 시청자의 대부분도 서민임을 알게 되었다. 건물주 아들 의혹과 프랜차이즈 업체 논란에 시청자들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도 그 맥락에서 벌어진 것이다. 피잣집과 고로케집 사장의 배경을 알지 못했을 때부터 그들에 대한 혐오는 있었고, 배경이 알려진 이후에 혐오의 감정이 더 격해졌다. 그리고 시청률도 올라갔다. 제작진이 바라던 것이면 크게 성공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출신 성분이 어떠하든 한 개인에게 그렇게 혐오의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걱정이 있다. 댓글을 분석할 때마다 우울하다. 어찌 이리 난폭할 수가 있는지. 내가 보기에도 일부 식당 주인의 성격과 능력에 분명히 문제가 있다. 저 성격과 능력으로 식당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누구든 가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성격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혐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이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은 이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을 왜곡해버렸다. 성격과 능력의 문제에 차별과 혐오를 붙였다. 일부 출연자는 논외로 하더라도, 서민 시청자가 서민 출연자를 욕하는 방송으로 만들어버렸다. 골목식당의 주인공은 골목식당 주인이다. 방송에 나가는 행운을 잡아 이른바 대박집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늘 그렇듯, 방송 빨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대를 물리는 식당이 될 수도 있고 몇 달 안 가서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다. 임차료가 올라 그 골목에서 내쫓길 수도 있다. 방송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식당은 브랜드 사업이다. 사실, 식당 성공 요소에서 맛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맛이 기본이기는 하나 그 맛만으로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슬프게도, 다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한다. 백종원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방송과 책에서 식당 성공 법칙으로 “맛 30%, 분위기 70%”라고 이미 밝혔다. 방송에서 “좋은 식재료 확보한다고 새벽같이 시장에 갈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하였다. 백종원이 말하는 ‘분위기’를 확장하면 ‘브랜드’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 방송에 나가는 것 자체가 분위기를 더하는 것이고 브랜드를 강화하는 것이다. 솔루션을 받아들이지 않은 국숫집 앞에 손님들이 줄을 서는 것도 그 이유이다. 그런데, 그 분위기 혹은 브랜드가 자가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출연하였다는 일이 분위기 혹은 브랜드 견인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골목식당 주인 입장에서는 ‘백종원의 골목식당 출연’이 자신의 분위기도 자신의 브랜드도 아닌 것이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으로 더 좋은 분위기를 확보하거나 브랜드 파워를 강화하게 되는 주체는 백종원이다. 백종원의 얼굴을 달고 있는 그의 프랜차이즈가 가장 큰 혜택을 보고 있다. 골목식당이 어렵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구에 비해 식당이 많아서이다. 식당이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를 줄이지 못하였다. 최근 10년간 프랜차이즈가 외식업체 수를 늘리는 데 한 몫을 하였다는 자료가 있다. 도심이 개발되어 번듯한 건물이 서면 그 건물에 입주하는 것은 온통 프랜차이즈 식당이다. 이들 먹자골목과 골목상권의 소비자는 다르지 않다. 먹자골목 프랜차이즈 식당에 손님이 몰리니 전통적인 골목식당은 파리만 날리게 되는 것이다. 신이나 영웅이 나타나 세상의 고통을 싹 날려버리는 일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러니 자신의 고통을 덜어달라고 신이나 영웅을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골목식당의 문제는 몇몇 식당에 손님을 줄세우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지역공동체를 깨뜨리며 성장을 해온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 고민을 하여야 하고, 돈이 일방으로 쏠리게 만든 지금의 체제에 대한 반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식당에서 어떤 음식을 먹게 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정치이다. 국가의 부를 어떻게 분배하고 도시개발 이득을 누구에게 돌아가게 할 것이며 건물주와 임차인의 계약 관계를 어떠한 법으로 규제할 것인지 등등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우리 앞에 놓이는 음식의 양과 질이 달라진다. 서민끼리 서로 혐오하게 만들어 이 정치적 문제를 호도하는 그 모든 세력에 대해 의심의 눈빛을 보내야 한다. 골목식당 주인들이 힘든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 골목식당의 주인들에게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은 식당 주인 개인의 문제인 듯이 왜곡하고 있다. 심지어 시민끼리의 혐오를 부추겨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공감과 연대를 방해하고 있다. 최악의 방송이다. 사진=뉴스1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표절 의혹’ 배철현 서울대 교수 사직… 면죄부 논란

    ‘표절 의혹’ 배철현 서울대 교수 사직… 면죄부 논란

    학교 측 “안건 접수되면 정당성 가릴 것” 스타 인문학자인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논문 표절 의혹이 불거진 뒤 사직했다. 서울대는 배 교수가 이달 초 제출한 사직서를 지난 9일 수리했다고 13일 밝혔다. 이 대학 관계자는 “배 교수가 학교 등 주변에 도의적 미안함을 느껴 사직서를 낸다고 했다”면서 “논문 표절 의혹을 100% 인정하는 건 아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배 교수의 표절 의혹은 페이스북 그룹 ‘신학서적 표절반대’의 운영자인 이성하 원주 가현침례교회 목사와 저작권 에이전시 ‘알맹2’의 맹호성 이사 등이 지난달 초에 제기했다. 이들은 배 전 교수의 유일한 단독저작 연구서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2001년, 가톨릭출판사)의 서론, 장별해제, 본문 해설 각주 등 주요 부분이 영어권의 선행연구를 담은 주석서나 해설서와 대부분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저서뿐만 아니라 논문들에서도 표절·중복게재 의혹이 제기됐다. 예컨대 배 전 교수의 논문 중 2006년에 낸 ‘죽는 것도 이득이다 -- 바울의 죽음관’은 논제와 고전 인용 구절 등 주요 부분이 1975년에 영어권의 다른 학자가 쓴 선행연구 논문과 일치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의혹을 제기한 이 목사는 “표절은 교육자와 학자의 자격에 관한 문제”라며 “만약 연구 업적 자체가 표절이라면 교수로 임용되고 승진되는 모든 과정이 문제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서울대가 배 전 교수의 사표를 수리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면죄부를 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만약 표절 사실이 확인되면 징계당할 수 있어 미리 사직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 측은 “이 목사 등이 페이스북에 표절 의혹을 제기했을 뿐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에 안건으로 접수하지는 않았다”면서 “향후 법정 다툼으로 비화하거나 정식 안건으로 접수되면 표절 여부를 조사해 사직의 정당성도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426일… 그들은 왜 굴뚝에 스스로를 가뒀을까

    426일… 그들은 왜 굴뚝에 스스로를 가뒀을까

    굴뚝 위 사람들이 426일 만에 땅을 밟았다. 그사이 계절은 겨울·봄·여름·가을을 거쳐 다시 겨울이 됐다. 섬유회사인 파인텍 노사가 지난 11일 극적으로 해직 노동자의 고용 승계에 합의하면서 홍기탁(46) 전 지회장과 박준호(46) 사무장의 목숨 건 투쟁도 끝났다. 이들은 왜 75m 굴뚝 위에 올라가야 했으며 내려오기까지 왜 426일이나 걸린 것일까.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두 차례 굴뚝 고공농성 배경과 과정을 되짚고 앞으로의 과제를 살펴봤다.겨울, 투쟁의 시작… 세 번 불 꺼진 공장 파인텍 사태의 뿌리는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 전 지회장 등 굴뚝 농성을 주도한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파인텍 지회 조합원 5명은 경북 구미의 한국합섬 출신이다. 한국합섬은 당시 국내 최대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업체로 생산직 노동자 800여명을 고용한 대기업이었다. 그러나 화학섬유산업 침체와 중국산과의 경쟁, 과잉 투자 등이 겹치면서 2004년부터 경영난에 빠졌고 2006년에는 생산직 절반을 정리해고하겠다고 통보했다. 노동자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해고자들은 “투쟁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고 기억한다. 정리해고에 반발한 노조는 2006년 3월부터 공장 점거에 돌입했다. 한국합섬은 2007년 결국 파산했지만, 노동자들은 남아 있는 제2공장을 지키기 위해 공장 점거 투쟁을 이어 갔다. 104명의 조합원이 불 꺼진 공장을 지킨 지 5년이 지난 2010년, 인수 기업이 나타났다. 옥외광고용 섬유 제조사인 스타플렉스였다. 김세권 스타플렉스 대표는 고용·노조·단체협약을 승계하는 조건으로 당시 자산가치 800억원의 공장을 399억원에 인수했다. 상호도 ‘스타케미칼’로 바꿨다. 그러나 공장에 돌아왔다는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회사가 “적자 때문에 운영이 어렵다”며 1년 7개월 만에 공장 가동을 멈췄기 때문이다. 강민표 파인텍 대표(스타플렉스 전무)는 “당시 인수 후 적자 폭이 차츰 개선됐지만 새 노조가 들어선 뒤 급여 조건 등을 이유로 파업했고 이 여파로 월 30억원의 손실이 발생해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노조는 “회사가 5년간 적자를 애초 예상했음에도 가동을 조기에 중단한 건 공장을 팔고 ‘먹튀’하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노조의 반발은 폐업을 막을 수 없었다. 2013년 1월 3일 시무식에서 김세권 대표는 폐업을 선언했고 노조 집행부도 권고 사직안을 받아들였다. 직원 168명 중 28명이 희망퇴직을 거부하자 2014년 5월 26일 사측은 이들을 해고했다. 해고 다음날 해고자복직투쟁위 대표를 맡았던 차광호 현 파인텍 노조 지회장은 공장 매각 중단,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45m 높이 굴뚝에 올랐다. 차 지회장은 “공장 정상화를 위해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첫 번째 굴뚝 농성이었다.봄, 408일 1차 굴뚝 농성으로 끝나는 듯했지만… 차 지회장이 굴뚝에 올라갔지만, 사측과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농성 89일째 시민들이 모인 ‘희망버스’만이 굴뚝을 찾아 농성 상황을 전국에 알렸다. 고공 농성 200일이 지나서야 노사 간 교섭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노조는 “스타플렉스가 해직자를 직접 고용해 고용을 보장하라”고 요구했지만 사측은 절대 불가 입장을 고수했다. 농성 407일째 되던 날, 굴뚝 위로 희소식이 들렸다. 스타케미칼의 모기업 스타플렉스가 신설 법인을 세워 11명의 고용을 보장하고, 해고자 노조와 2016년 1월까지 단협을 체결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노조가 요구한 직접 고용 대신 자회사 ‘파인텍’으로 고용한다는 타협안이었다. 당시 김세권 대표는 스타케미칼 청산인 대표로, 강민표 대표는 파인텍의 대표 예정인으로 합의서에 서명했다. ‘1차 굴뚝 합의’였다. 농성 408일 되던 2015년 7월 8일 차 지회장은 땅을 밟았다. 그러나 파인텍은 오래가지 못했다. 충남 아산의 새 공장으로 온 해고자 8명에게 주어진 것은 컨테이너 기숙사와 점심 한 끼뿐이었다. 생계보장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월급 120만원을 받기 어려웠고 노조 활동을 하면 임금이 더 줄어 70만~80만원을 겨우 받았다. 동료들은 하나둘 공장을 떠났고 5명만 남았다. 2016년 1월 내에 체결하기로 했던 단협도 지지부진이었다. 노사가 10개월 동안 18차례 만났으나 임금 인상 등에서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당시 공장 상황과 교섭 과정에 대해 김옥배 부지회장은 “처음부터 사측이 파인텍을 제대로 운영할 의지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반면 강 대표는 “상여나 사택 등 노조의 무리한 요구가 결렬 이유”라며 반박했다. 당시 경험은 이번 교섭에서도 노조가 자회사를 통한 고용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배경이었다. 2016년 10월, 단협이 체결되지 않자 노조는 ‘굴뚝 합의 불이행’을 이유로 파업에 돌입했다. 이에 사측은 2017년 8월 기계 반출과 공장 폐쇄로 대응했다. 그해 11월 12일 홍 전 지회장, 박 사무장이 서울에너지공사 굴뚝 위로 올랐다. 2번째 굴뚝 농성이었다. 차 지회장은 “돌아갈 공장이 없으니 파업도 불가능하고 방법이 없었다”며 “굴뚝 생활을 알기에 두 사람을 말렸지만 소용 없었다”고 말했다. 여름·가을, 두 번째 굴뚝 농성… 6차 교섭까지 ‘팽팽’ 2년여 만에 다시 굴뚝에 오른 노조는 “김세권 대표가 대화에 나서라”고 계속 요구했다. 노동자 고용 보장을 약속했던 한국합섬 인수부터 파인텍 설립까지 실질적 결정권자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사측은 “법적으로 파인텍과 스타플렉스는 별도 법인”이라며 거부했다. 지방고용청과 노동위원회가 중재하려 했지만 “양측 입장 차가 너무 크다”며 결론 내지 못했다. 그사이 굴뚝 고공 농성은 400일을 훌쩍 넘겼다. 농성자들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강해지고, 농성장을 찾는 시민들도 줄을 이었다. 결국 종교계 중재로 고공 농성 411일 만인 지난달 27일 노사가 처음 마주 앉았다. 교섭은 계속 난항을 겪었다. ‘합의 파기 트라우마’가 있는 노조와 ‘강성 노조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사측 사이에는 깊은 불신의 골이 있었다. 노조는 “1차 굴뚝 합의 파기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직접 고용하라”고 했지만, 사측은 “노조가 오면 모기업도 망한다”며 “회사가 어려운데 노동자를 평생 고용해야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1~5차 교섭 내내 노동자들의 고용을 김 대표가 책임질지 여부를 두고 팽팽히 대립했다. 지난 8일 사측 강민표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노조를 비판하며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10일 열린 6차 교섭 때 상황이 반전됐다. 김세권 대표가 두바이 출장을 앞두고 있어 ‘더이상 시간이 없다’는 데 동의한 노사 양측은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20시간에 걸친 밤샘 교섭 끝에 고용방식에서 노사가 한 발씩 양보하면서 협상이 극적 타결됐다. 김세권 대표는 파인텍 대표를 맡겠다고 했고, 노조는 3년 고용 보장을 받아들였다. 협상에 참여한 강민표 대표는 “굴뚝 위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와야 한다는 사회적인 압박이 강했기 때문에 김세권 대표가 결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차 지회장도 “미흡한 부분이 있지만 농성이 길어지면 안 돼 합의에 이르렀다”고 했다. 다시 겨울, 파인텍 사태가 남긴 것 합의서에 따르면 노사는 ▲회사의 정상적 운영 및 책임 경영을 위해 파인텍 대표이사를 김세권 현 스타플렉스(파인텍의 모회사) 대표가 맡고 ▲회사는 2019년 7월 1일부터 공장을 정상 가동하고 해직 조합원 5명을 업무에 복귀시키며 ▲고용은 2019년 1월 1일부터 최소한 3년간 보장하기로 했다. 또 2015년 1차 합의와 달리 노조를 교섭단체로 인정하고, 노조 활동을 존중·보장한다는 내용이 명시적으로 포함됐다. 파인텍의 정상 가동을 위해 기존 생산품에 스타플렉스 물량 중 가능한 품목과 신규 품목을 추가할 수 있다는 점도 포함됐다. ‘파인텍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행동’ 측은 “스타플렉스의 직접 고용이 이뤄지지 않았고 고용 보장 기간도 3년밖에 안 돼 아쉽지만, 김세권 대표가 고용을 책임지고 파인텍 노조를 인정하기로 한 데다 단체협약 체결도 약속받는 등 노동자의 요구가 합의에 담겼다”고 평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듯하지만 과제는 여전하다. 사회적 중재로 이뤄진 합의인 만큼 노사 양측의 합의 이행 노력이 필요하다. 파인텍 공장 부지 선정, 생산 품목 선정 등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용 보장 기한인 3년이 지난 뒤 노동자들이 계속 일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강민표 대표는 “3년 뒤 회사가 잘될지 내다볼 수 없지만 회사가 이윤을 남기고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노력하겠다”면서 “회사가 잘 운영되면 노사 간 신뢰도 쌓일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제조업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이 빈번해질 게 뻔한 상황에서 고용 승계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도 과제로 남겼다. 정흥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파인텍은 이미 오랜 노사 갈등이 있던 기업인 만큼 정부가 갈등 초반 적극적으로 중재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면서 “인수합병 과정에서 기본 고용기간을 정하는 등 고용에 대한 세심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사회적 인프라와 노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기업도 인지해야 한다”면서 “파인텍 사태를 고용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환기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제 소설, 문학으로 평가받고 싶죠…독자 앞에선 가슴이 두근두근 떨립니다”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제 소설, 문학으로 평가받고 싶죠…독자 앞에선 가슴이 두근두근 떨립니다”

    정치인서 소설가로 변신한 신기남 위원장의 ‘두브로브니크’“장편소설 첫 데뷔작이 서점가에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잘 팔려야 할 텐데…. 소설가를 선언했으니 문학작품 자체로 독자와 문단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유권자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조마조마한 심정입니다.” 4선 국회의원과 집권 여당 대표를 지낸 신기남(66)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책정보위원장이 늦깎이 ‘신예’ 소설가로 변신했다.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TV에서도 한창 ‘주가를 올리던’ 변호사에서 정치인으로, 이젠 ‘배고픈 직업’인 소설가라니…. 이런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하고자 9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 7층의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를 찾았다. 그의 첫 작품은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사람’, 필명은 ‘신영’. 큰 줄기는 유고슬라비아 전범재판소에서 재판관으로 일하는 법률가 출신 남성과 미술을 전공한 무대 미술가 여성이 만나서 발칸반도의 역사, 미술, 철학, 종교 등을 종횡으로 섭렵하는 소설이다. “정치 일찍 그만뒀다면 지금쯤 문학결실 볼 터늦게 데뷔…깊이 있는, 무게 있는 소설 가능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자 신 위원장은 “목감기가 와서 목소리가 잠겼다”고 말했다. 사실, 이 때문에 인터뷰 날짜가 늦춰지기는 했지만 목소리는 선거 막판처럼 여전히 반쯤은 잠겨 있었다. “독자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으니, 많이 떨립니다. 많이 팔려서 위축된 소설 시장에 작은 불쏘시개가 됐으면 합니다. 제 소설이 처음엔 출판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출판되고 나니 많이 좀 팔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기네요. 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소설가로서 인정을 받고 또 불황인 출판계에 도움도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소설가가 소설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면 좋겠습니다.” - 소설가 데뷔가 너무 늦지 않나.☞ 사실, 정치를 10년쯤 더 일찍 그만뒀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정치 10년 더 해 봤지만 크게 한 일이 없었거든요. 더 일찍 방향전환을 했다면 지금쯤 어떤 문학적 결실을 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법조인으로 또 정치인으로 그동안 보통 사람들이 잘 가보지 못한 세상을 가보고 인생의 달고 쓴 맛을 경험하고 느꼈으니, 이런 것이 제 소설의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합니다. 이미 저에겐 ‘선배’가 된 젊은 소설가들의 싱싱한 작품들도 좋지만, 인생 경험이 많은 저 같은 사람의 소설도 우리 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라 봅니다. 어떤 면에서는 늦게 데뷔했기 때문에 한결 성숙하고 깊이 있는 소설을 쓸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첫 소설이 여러모로 상당히 특이하다.☞ 늦게 내는 만큼 이왕이면 좀 독특하게 써보자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다양한 인생 경험을 했으니 재미있으면서도 독자들에게 유익한 소설을 쓰고자 했습니다. 소재, 무대, 스토리, 전개 방식 등 여러 면에서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소설을 쓰고 싶었거든요. 두브로브니크가 있는 아드리아 바다는 딱 맞는 얘깃거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1994년 영국 런던대학 유학시절부터 역사·민족·종교적으로 얽히고설킨 발칸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왔습니다. 주변 다른 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며 맞서 싸우고, 끝내 나라가 분단되어 같은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전쟁을 겪었던 험난한 역사가 우리나라 상황과 오버랩 되면서 아픔과 연민을 많이 느꼈습니다. 국회 한국-세르비아 의원 친선협의회 회장으로 세르비아를 방문했을 때 그쪽의 현실을 직접 보았고, 그 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를 여행하면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고내전 전범재판 과정을 연구하면서 소설의 뼈대를 세웠습니다. “데뷔작 두브로브니크, 독특하다는 문단 평가발칸반도의 역사·종교·국제정세 얽히고설켜소재·무대·스토리 전개 신선하다는 평가받아” - 장편 소설을 쓰면서 느낀 점은.☞ 과거 단편소설은 여러 편 써 보았으나, 장편소설은 크게 달랐습니다. 마치 큰 건물을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건물의 설계도가 정교해야 하듯이 장편소설은 구조가 치밀해야 하고 연구도 많이 해야 하더군요.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기 위해서는 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동시에 재미와 감동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척 어려운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습니다. -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사람’은 원고지 1200~1300장 분량인데 쓰는 데 1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독자들은 쉽게 읽고 넘길지 모르지만 어떤 페이지는 관련 서적 두 세권을 읽어야만 쓸 수 있었습니다. 전 유고 대통령 티토와 그의 정적 미하일로비치에 관한 부분은 12페이지 분량이지만 티토의 전기 3종을 읽고 완전히 소화해야만 했습니다. 유고의 내전 역사와 국제전범재판에 관련한 서술을 위해서는 외국 서적도 읽어야 했고요. 그렇게 해서 쓰인 이 소설에는 역사, 지리, 종교, 철학, 국제정치 등이 씨줄날줄로 얽혀 있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난해한 글은 아니고, 독자들이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읽다가 호흡을 멈추고 한번쯤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 나이에 뒤늦게 작품을 내놓는 마당에 무게가 있는 글을 쓰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어서 나름대로 공을 들였습니다. “한 페이지 쓰는데 전기·외국 서적 읽고 소화한 것단숨에 읽기보다는 호흡 멈추고 생각 기회 바라”- 이 소설에 카메라 기법을 시도했다던데.☞ 작가가 등장인물의 마음속에, 머릿속에 절대로 마음대로 들락거리지 않습니다. 영화의 카메라가 쫓아가듯 객관적 사실만을 표현하고,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는 방식을 고집스럽게 추구했습니다. 상당히 실험적인 기법인데, 그렇게 하자니 표현의 한계도 많이 느꼈습니다만 나름대로 독특한 스타일을 보인 셈입니다. 서평을 쓴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해 줬습니다. 앞으로도 이 카메라 기법을 더욱 발전시켜볼 생각입니다. - 해군을 소재로 한 소설도 썼다던데.☞ 사실은 이미 다 썼고, 출판사에 두 편의 소설을 같이 줬는데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사람’을 먼저 출판하게 된 것이죠. 소설 한편만 쓰면 별로 평가를 안 해 줄 것 같아서 동시에 두 편을 썼지요. 해군장교로 전투함을 직접 탔던 경험을 살린 소설입니다. 이 소설 역시 사회성 있는 주제가 다분히 녹아 들어가 있는 작품입니다. 출판사는 두브로브니크를 먼저 선택했습니다. 문단에선 ‘문턱이 높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솔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나서 과연 통과가 될 것인지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출판하자고 연락이 왔던 겁니다. 굉장히 기뻤죠.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 행운을 놓치지 않고 이어가고 싶습니다. 두 편 외에도 3~4편의 소설 아이디어가 더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빨치산에 관한 소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비극적 현대사를 오늘의 상황과 연결시켜 되살려 보려 합니다. 일종의 판타지 소설로서 동화도 한번 써 보려고 합니다. “2년간 두문불출 ‘천신정’ 전화도 안받고 글만 써책 안 읽지 사회는 문제…정권차원 문화정책 필요” - 소설 쓰기에 대해 따로 공부했나.☞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썼던 편이죠. 고교 시절엔 문예반 반장을 하면서 교내외에서 상도 많이 탔습니다. 선생님의 권유도 있어서 국문과에 진학하려 했는데 어머님의 희망에 따라 법대에 가게 되었지요. 대학에서도 고시공부보다는 글 쓰는 데 관심이 많았고요. 제대 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도, 정계에 들어와서도 ‘언젠가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정치를 그만두게 되었고, 그러자 드디어 40년 만에 글을 제대로 쓸 기회가 왔습니다. 마지막 기회인거죠. 다부지게 결심했습니다. 2년간 두문불출하고 써내려갔습니다. 정치 쪽과는 일절 연락을 끊고 모임 초청에도 응하지 않았죠. ‘천신정(정치개혁을 주도한 천정배·신기남·정동영 의원을 일컫는 머릿글자)’이라 불렸던 그 옛날 동지들과도 거의 교류가 없었습니다. 엊그제 천정배 의원이 뉴스를 보고 “소설 냈다며…”하고 전화를 걸어 왔더군요.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 반갑긴 하더군요. - 출판계의 불황이 심각하다.☞ 우리 사회가 점점 책을 읽지 않는 사회가 되고 있어 정말 걱정이 큽니다. 도서관 이용자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상업주의가 깊어지면서 사회가 너무 향락적이랄까 편하게 사는 위주로 흘러가고, 서점에서 팔리는 책도 지극히 실용적인 책 위주입니다. 갈수록 문학 서적은 설 자리가 좁아집니다. 문학의 현실은 어둡습니다. 우리 경제는 어언 선진국에 진입했지만 문화는 그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습니다. 문화선진국이 진정한 선진국이잖아요. 시민들이 도서관과 서점을 많이 찾고 소설도 많이 읽도록 그런 분위기를 끌어가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문화정책이 필요한 때라고 봅니다. “현실 정치 안 돌아와…이젠 내 인생 살 터시민이 주인 시대…민족화합 절호의 기회”- 그러자면 현실 정치로 돌와와야 하는데.☞ 나름대로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인권변호사로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참여연대 창립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1990~94년 KBS에서 ‘여의도 법정’, MBC의 ‘생방송 신변호사’ 등의 프로에서 변호사로는 처음으로 사회를 봤습니다. 정치에 들어와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적 정권교체에 힘을 보탰고 노무현 대통령 탄생에 앞장섰습니다. 당시 국회의원 가운데 처음으로 저와 천정배 의원이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며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죠. 개혁정당인 열린우리당 창당을 성사시켜 진보정권으로는 최초로 제1당을 만들고 여당 대표도 했습니다. 이제 60대 중반도 넘어섰고, 정치 20년 했으면 됐지요. 제가 안 해도 할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국회의원 한 번 더 한다고 무슨 큰 의미가 있겠어요. 그것보다는 이제 남은 시간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정치하는 동안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을 돌아보지 못했고 친지,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죠. 이제라도 정치를 그만두고 이쪽으로 넘어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합니다. - 요즘 우리 정치는 어떻습니까.☞ 대체로 올바른 방향을 잡아서 잘 가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정치에 입문할 당시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정치가 훨씬 깨끗해졌고, 동교동이니 상도동이니 하는 파벌정치도 없어졌습니다. 지역 색채도 많이 엷어졌고, 정치가 많이 선진화됐습니다. 법, 제도, 정치의식이 개혁된 결과입니다. 시민이 스스로 판단해서 선택을 하고 시민이 주인이 되어 이끌어 가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미래를 매우 희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랜 시련 끝에 열리는 값진 열매입니다. 특히 때 맞추어 민족화합의 기류가 감돌고 남북통일이 가시화되는 것은 우리민족에 큰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과거처럼 같은 민족이 계속 서로 싸우기만 한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냉전이 소멸되고 국제정치도 우리의 통일을 허락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앞으로 갈등과 시련은 왜 없겠습니까마는 능히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파인텍 타결]겨울·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400여일만 땅 밟은 노동자들

    [파인텍 타결]겨울·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400여일만 땅 밟은 노동자들

    홍기탁·박준호씨, 노사 합의 뒤 75m 굴뚝에서 내려와동료들, 환호…얼싸안고 기쁨의 눈물“헌법에 보장되는 기본권 하나 지키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습니다.” 426일간의 굴뚝 농성을 끝내고 마침내 땅을 밟은 노동자들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다독였다. 섬유가공업체 파인텍 노사가 11일 오전 극적으로 협상을 타결하며 서울 양천구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1년 넘게 이어진 홍기탁(46) 금속노조 파인텍 전 지회장과 박준호(46) 사무장의 고공 농성도 끝이 났다. 1년 여전 겨울 시작했던 농성은 다시 겨울이 돼서야 마무리된 것이다. 이날 오후 2시부터 119구급대원이 두 사람을 구조하기 위해 75m 굴뚝 위로 올라갔다. 이들은 오랜 고공 농성과 단식으로 인해 건강상태가 몹시 나쁜 것으로 알려져, 애초 헬기를 통해 이송하거나 들것에 실려 내려오는 등 여러 방안이 논의됐다. 하지만 두 사람이 스스로 내려가겠다는 의사를 보였고, 안전 로프를 몸에 묶고 소방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직접 걸어 내려왔다. 홍 전 지회장과 박 사무장이 난간과 안전 로프에 의지해 수직 계단과 회전 계단을 모두 밟아 천천히 내려오는 동안 아래에서는 100여명이 넘는 시민들이 손을 흔들고 환호하면서 이들을 맞이했다. 두 노동자에게 전해줄 꽃을 들고 있던 수녀회연합회 살루스 수녀는 “수녀회에서 매주 금요일 저녁 식사를 올려다 주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면서 “하루빨리 내려와서 건강을 회복하길 바랐는데 이렇게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돼 다행”이라고 말하며 웃었다.마침내 땅으로 내려온 홍 전 지회장과 박 사무장은 이동 침대에 실린 채 열병합 발전소 정문으로 나갔다. 이들은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광호 지회장을 비롯해 김옥배 수석부지회장, 조정기 총무 등 파인텍 동료들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홍 전 지회장은 “저희 동지 5명이 부족한데도 정말 많은 사람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면서 “헌법에도 보장된 ‘노조’할 권리 하나 지키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청춘을 다 바쳤다”고 울먹였다. 박 사무장도 “저희 투쟁에 연대 단식까지 하면서 같이 싸워주신 시민 여러분께 감사하다”고 말문을 열며 “이제부터 다시 시작인 것 같다. 앞으로 현장에서도 지금까지 함께해준 분들 마음 잊지 않고 올곧게 나가겠다”고 말했다. 2014년 45m 높이의 스타케미칼 공장 굴뚝에 올라 408일 동안 농성을 벌였던 차 지회장도 “다섯명은 절대 적지 않다”면서 “앞으로도 똘똘 뭉쳐서 저희의 권리를 찾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해단식에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김호규 위원장을 비롯해 그동안 파인텍 노사의 교섭을 중재한 박승렬 목사,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송경동 시인 등 시민사회·종교계 인사들도 참여해 축하의 말을 전했다. 박 목사는 “오늘 노사가 협의한 데는 많은 시민이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싸워준 덕분이고 저도 작게나마 힘을 보탠 점이 기쁘다”면서도 “이때까지 이어진 노사 간 깊은 갈등을 하루아침에 잠재우긴 힘든 만큼 앞으로도 평화롭게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송 시인 역시 “정의와 진실이 승리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바로 세워진 날”이라고 평가하면서 “다시는 그 누구도 저 까마득하게 높은 굴뚝에 오르지 않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소회를 전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종교는 장애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 ‘종교는 장애(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오는 26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전법회관 지하1층 선운당에서는 종교 속 장애와 관련해 독특한 행사가 열린다. 장애인 불자 모임인 보리수아래(대표 최명숙)가 ‘스님과 신부가 만나 종교와 장애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마련하는 세미나. 불교를 비롯해 개신교와 천주교 등 각 종교의 장애에 대한 견해 차를 살피면서 장애인 포교 방안 등을 논의하게 된다. 발제자는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장 담준 스님과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전 원장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담준 스님은 ‘불교윤리 측면에서 본 장애’, 이수철 신부는 ‘가톨릭에서 보는 장애’를 각각 발표한다. 담준 스님은 중앙승가대 승가학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원효 윤리사상에 관한 연구’ ‘원효 윤리의 공리주의적 해석 가능성 검토‘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수철 신부는 1982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입회해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미국 성 요한 세인트 존 신학대학원에서 수도영성을 공부했으며 ’사랑 밖에 길이 없었네‘를 저술했다. 세미나에서는 각각의 종교에서 부닥치고 느낀 문제점을 장애 종교인들이 직접 표현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보리수아래 회원인 홍현승(뇌성마비)씨와 이상복(심장장애) 파주한사랑공동체 원장이 ‘내가 바라는 종교’라는 주제로 각각 시와 수필을 발표한다. 최명숙 대표는 “사찰과 성당에서 장애인들이 직접 부딪히는 일상적인 만남을 중심으로 바른 종교 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며 “장애인들이 원하는 종교 생활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종교 안에서 그들의 문화예술활동과 종교활동의 연계 가능성을 알 수 있는 기회”라고 밝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파인텍 협상 타결]‘벼랑 끝’ 20시간 마라톤 교섭…노사 양보 빛났다

    [파인텍 협상 타결]‘벼랑 끝’ 20시간 마라톤 교섭…노사 양보 빛났다

    교섭 초반 입장차 ‘팽팽’…고용 보장이 핵심사측 “김세권 대표가 파인텍 경영 맡겠다”노조, ‘파인텍 폐업 땐 모회사 고용’ 양보400여일 간의 굴뚝 농성과 엿새간의 단식. 목숨 건 투쟁을 벌여온 파인텍 해직 노동자들이 노사 합의 끝에 굴뚝에서 내려오게 됐다. 연초 사회적 관심이 집중돼 종교계·정치권 등이 중재에 나서면서 끝이 없을 것 같았던 투쟁은 마무리됐다. 파인텍 노사는 11일 오전 서울 양천구 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전날부터 이어진 20시간의 6차 교섭 끝에 노사 간 쟁점을 합의했다고 밝혔다. 노사는 ▲회사의 정상적 운영 및 책임 경영을 위해 ㈜파인텍의 대표이사를 김세권 현 스타플렉스(파인텍의 모회사) 대표가 맡고 ▲회사는 2019년 1월 1일부터 6개월간 유급휴가로 임금 100%를 지급하며 2019년 7월 1일부터 공장을 정상 가동하고 해직 조합원(노동자) 5명을 업무에 복귀시키고 ▲고용은 2019년 1월 1일부터 최소한 3년간 보장하기로 했다. 또, 노사는 민·형사상의 모든 소송을 취하하고 노조는 모든 집회나 농성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날 6차 교섭은 노사 양측 모두 벼랑 끝이라는 절박함 속에 시작됐다. 중재자로 나선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의원은 교섭에 앞서 “오늘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 당분간 교섭 재개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김세권 대표는 두바이 국제 전시회 참석을 위해 해외 출국이 예정되어 있고 차광호 금속노조 파인텍 지회장 등 노조 측 대표는 단식으로 건강상태가 위급했기 때문이다.교섭 초반 양측은 팽팽한 기존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이견의 핵심은 고용 보장이었다. 지난달 27일 이후 열린 5차례 교섭에서 노조 측은 “해고자 5명을 모회사인 스타플렉스가 직접 고용하라”고 요구했다. 노동자들에겐 고용 합의가 파기됐던 트라우마가 있었다. 파인텍 노조는 2015년 차 지회장이 408일간 경북 구미 공장 인근에서 굴뚝 농성을 한 끝에 스타케미칼(현 스타플렉스) 측과 고용보장, 노조활동 보장, 단체협약 체결에 합의했다. 이후 회사는 파인텍이라는 자회사를 세웠고 2016년 공장이 가동됐으나 노사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 4차 교섭까지 사측은 “파인텍 공장을 재가동하고, 김 대표가 이 회사 1대 주주로 참여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노조측이 “김 대표가 주주가 아닌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맞섰다. 총책임자가 파인텍의 대표를 맡아야 고용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고용 보장 기간도 사측은 ‘파인텍 재가동 후 3년간 보장’을 제안했으나 노조는 만약 파인텍이 다시 폐업한다면 스타플렉스로 고용하라고 요구했다. 돌파구를 못찾던 마라톤 협상은 사측이 “김 대표가 파인텍의 대표도 맡겠다”며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났고 노조도 간접고용을 받아들이면서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노조 측은 ‘파인텍 폐업 땐 노동자를 스타플렉스에 고용하라’던 기존 요구는 양보했다. 노사가 첫 교섭 2주 만에 극적으로 합의에 이른 것은 장기간의 굴뚝 농성을 하루 빨리 끝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굴뚝 농성이 1년 2개월을 넘긴데다 지난 6일부터는 단식 투쟁에 돌입하며 두 농성자의 건강은 매우 악화됐다. 인권 문제가 제기되고 농성에 연대하는 시민사회단체가 많아지자 지난달 22일 정치권도 처음 농성장을 찾았고, 종교계가 적극 중재에 나서며 노사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귀족 대구’ 때문에 미국 독립혁명이 시작됐다고?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귀족 대구’ 때문에 미국 독립혁명이 시작됐다고?

    지난해 말 강원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 앞바다에 명태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일이 있었다. 표본을 추출해 유전자 분석을 해 보니 모두 자연산이었다. 어민들과 수산 전문가들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언제부턴가 동해에서 명태가 사라졌고, 이를 되살리기 위해 2014년부터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어민들과 수산 전문가들은 그 계획의 성공을 예측했지만, 놀랍게도 2만 1000여 마리의 명태는 모두 자연산이었다. 40여 마리가 더 잡히고 다시 사라진 명태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간 것일까. 수산 전문가들은 명태의 회유 경로와 습성 등을 더 세밀하게 연구해야 한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기후변화와 남획으로 사라진 명태의 속성을 좀더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책이 있다. 명태와 사촌쯤 되는 대구에 얽힌 역사와 조리 방법까지 서술한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가 그것이다. 일단 책에서 말하는 대구는 ‘대서양대구’로 몸집이 크고 개체수가 많으며 맛이 담백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어종이었다. 얕은 물을 좋아해서 잡기 쉬웠다. 전 세계에서 상업적인 생선이 된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대구는 역사상 유럽인의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8세기에 바이킹은 말린 대구, 우리로 치면 북어를 주식으로 삼아 유럽을 주름잡았다. 17세기 초 종교 박해를 피해 바다를 건넌 순례자들은 종교도 종교지만,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 앞바다에는 그만큼 대구가 풍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민들 중에 명태 잡아서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대구를 잡아 큰돈을 번 유럽인들은 제법 많다. 18세기 초 뉴잉글랜드는 대구 무역의 중심지였는데, 대구 어업으로 가문의 부를 쌓은 사람들을 일러 ‘대구 귀족’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국제적인 상업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소금에 절인 대구를 지중해 시장에 판매해 큰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질이 떨어지는 대구는 서인도제도의 설탕 플랜테이션에 팔았다. 설탕 플랜테이션 노예들은 이 물고기를 주식 삼아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버텨야만 했다. 저자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소금에 절인 대구는 카리브해의 노예들을 먹여 살려 노예무역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저자는 대구 때문에 미국이 독립했다는, 듣기에 따라 황당한 주장도 펼친다. 역시 18세기 들어 영국이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의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꿈에 부푼 사람들이 이 조치에 반발해 미국 독립혁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782년 영국과 평화협상이 벌어졌지만, 가장 큰 난제는 미국의 대구 잡이 권리에 대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예나 지금이나 남획이 문제다. 더 많은 대구를 잡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는데, 19세기 들어 어업 현대화가 이뤄지면서 대구 개체수는 급감했다. 어업의 현대화를 이룬 수단은 주낙이었다. 프랑스는 국가적으로 선단에 주낙을 설치하기도 했다. 낚싯줄에 낚싯바늘이 여러 개 달린 이 장비에 얼마나 많은 대구가 잡혔을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구의 남획을 걱정하면서도 저자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한 요리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대구 요리를 소개한다. 흥미롭지만 다소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구’를 읽으며 자연산 명태도 돌아오고,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로 바다에 나간 치어들도 성장해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식탁이 더 풍성해질 테니 말이다. 이 기대도 다소 생뚱맞은 것 아닌가 저어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인권위, “양심적 병역거부→종교적 병역거부 용어 대체는 부적절”

    인권위, “양심적 병역거부→종교적 병역거부 용어 대체는 부적절”

    최영애 위원장, “용어 변경은 국제인권 기준 등에 안 맞아”“종교 아닌 기타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도 18년 간 80여명”국가인권위원회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표현을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자’로 대체하려는 국방부의 계획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표현을 두고 “병역거부가 양심이면 군필자는 비양심이냐”는 불만 여론이 비등하자 국방부가 대체 용어를 제안했는데 인권위가 이에 반기를 든 것이다. 9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은 성명을 내고 “국방부의 용어 변경은 대체복무제에 대한 국제인권기준과 헌법재판소 결정, 대법원 판결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병역거부가 개인이 가진 양심의 보호와 실현이 아닌 종교적 가치에 따른 행위로 비춰질 소지가 있다는 점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최 위원장은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특정 종교나 교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인류 공통의 염원인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 수 없다는 양심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특정 종교를 이유로 하지 않고 기타 신념에 따라 병역거부를 한 사람이 2000년 이후 80여명에 이르는 점은 병역 거부가 단순히 종교적 신념만을 이유로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최 위원장은 “1980년대 후반부터 유엔 인권위원회 등 국제 사회는 병역거부를 세계인권선언과 자유권규약이 규정하는 ‘사상·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근거한 권리로 인정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지난해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병역거부에 대해 ‘병역의무가 인정되는 징병제 국가에서 종교적·윤리적·철학적 또는 이와 유사한 동기로부터 형성된 양심상의 결정을 이유로 이행을 거부하는 행위’로 ‘양심’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전했다. 국방부는 지난 4일 “대체복무제 용어를 둘러싼 불필요한 논란을 최소화하고 국민적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양심·신념·양심적 등과 같은 용어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국방부는 지난해 12월 28일 교정시설 합숙 근무안 등이 담긴 대체복무 관련 정부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서울광장] ‘공약파기’와 ‘괄육취골’/김성곤 논설위원

    [서울광장] ‘공약파기’와 ‘괄육취골’/김성곤 논설위원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 하나 버리기가 아까울 것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을까. 그러나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고, 바꿀 것이 있다면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 문재인 정권 집권 3년차를 맞아 나온 공약파기 얘기다. 솔직한 심정으로 괄육취골(刮肉取骨·내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함)이나 이대도강(李代桃?·작은 손해로 큰 승리를 얻음)을 권하고 싶지만, 순발력 떨어지고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이 정권에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지도 모른다.광화문을 메웠던 촛불에서는 함성이 없었다. 침묵과 삼삼오오 모인 작은 속삭임, 낮은 노래들이 있었다. 촛불혁명은 이런 개개의 촛불과 속삭임, 염원이 모여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은 목소리나 염원의 갈래가 많이 나뉘었고, 방향도 서로 갈렸다. 일각에서는 과도한 청구서를 내밀기도 한다. 이런 때 가장 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도 있고, 그중 가장 약한 이, 가장 절실한 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도 있다. 어떤 게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종교인이라면 가장 절실한 이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게 맞지만, 정치는 마냥 이를 좇을 수도 없다. 그러다간 큰 방향을 놓칠 수도 있다. 참으로 어렵다. 청와대가 새해 벽두 문재인 대통령 1호 공약인 광화문 집무실 이전을 보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말이 보류지 공약파기의 완곡한 표현이다. 곳곳에서 아우성이다. 지지자 중에서도 “광장으로 집무실을 옮겨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당초의 취지를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려서야 되겠느냐”는 비판이 쏟아진다. 야당은 공약파기에 대해 문 대통령이 사과하라고 난리다. 사과하라는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소득주도성장 등 문재인표 공약을 바꾸지 않는다고 질타하는 것을 보면 표리부동이요 정치공세다. 그러나 광화문 집무실이 야당이 아닌 국민에 대한 약속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솔직하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또 그 정신도 이어 가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그 시점은 10일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될 것 같다. 기자들이 묻든 묻지 않든 문 대통령은 답해야 한다. 대통령의 공약파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대표적인 게 김대중 정권 때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DJP연합’을 통해 국민에게 약속한 내각제 개헌이다. 그러나 이것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동남권 신공항 건설 약속을 못 지켜 사과했고, 대운하도 사실상 공약(空約)이 돼 버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기초노인연금 도입과 4대 중증 의료비 전액보장 등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이 사임하기도 했다. 바다 건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술 더 뜬다. “당선되면 8년 내 20조 달러 부채를 해결하겠다”, “공무원 고용동결” 등을 외치더니 당선되자 “내가 언제?”라며 오리발이다. 문 대통령의 공약파기도 처음은 아니다. 원자력발전소 건설 백지화 공약에 따라 대통령 취임 이후 중단했던 신고리 5, 6호기 건설을 공론화 과정을 거쳐서 재개했고, 지난해 7월 16일에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이 사실상 지키기 어려워졌다”며 사과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공약들은 광화문 집무실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촛불로 탄생한 정권이고, 그 근원지로 집무실을 옮겨서 귀를 열고 시민과 함께하는 국정을 펼치겠다는 근원적인 약속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광화문 집무실 무산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1호 공약이지만, 지킬 수 없게 됐다며 솔직히 시인하는 것에 대해 “용기 있다”고 칭찬하고 싶다. 취지는 좋았지만, 실현이 쉽지 않은 공약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런 결정은 좀더 빨랐더라면 하는 것이고, 이런 버릴 줄 아는 자세가 다른 국정 과제에도 일찍 적용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대통령에 당선됐으니까 공약쯤은 파기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이 꿈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꿈꾸는 바대로 세상을 바꾸는 게 꿈이었을까. 만약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게 꿈이었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공약 가운데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중간점검이 필요하다. 경제 때문에 그나마 쌓아 온 외교나 남북 문제의 성과까지 다 날아갈 판이다. 국민의 삶이 팍팍해지면서 소득주도성장은 날개조차 펴지 못할 지경이다.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괄육취골은 못 하더라도 이대도강의 자세로 문 대통령이 메시지를 전했으면 한다. sunggone@seoul.co.kr
  • [열린세상] 순혈주의 신화는 없다/양중진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장

    [열린세상] 순혈주의 신화는 없다/양중진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장

    아시안컵 축구대회가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1960년 이후 59년 만에 우승을 노리고 있는데,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아시안컵에는 대한민국 국적의 선수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적의 감독도 출전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적의 감독이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은 아니다. 대한민국 국적의 박항서 감독은 대한민국이 아닌 베트남 대표팀 감독이다. 우리 대표팀의 감독은 포르투갈 출신의 파울루 벤투다.외국인 감독이 팀을 이끄는 나라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북한, 일본, 호주, 투르크메니스탄을 제외한 20개국이 외국인 감독에게 팀을 맡기고 있다. 왜 자국인이 아닌 외국인에게 감독을 맡길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좀더 나은 성적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축구에서 좀더 선진국 출신을 감독으로 선임함으로써 보다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베트남은 박항서 감독 선임 이후 U23 아시아선수권 준우승,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강 진출, 10년 만의 스즈키컵 우승 등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덕분에 박 감독은 베트남의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박 감독의 성과는 축구에만 그치지 않았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그를 광고 모델로 기용해 높은 매출 신장률을 달성했다. 동남아시아를 강타하고 있는 한류 열풍보다 더 큰 성과를 박 감독이 한국 기업에 안겨 준 것이다. 박항서 감독의 성과는 사실 우리에겐 데자뷔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2002년 한·일월드컵을 개최하면서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 감독을 선임해 4강에 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히딩크 감독이 묵었던 호텔은 이름을 아예 히딩크 호텔로 바꾸기도 했다. 이후에도 히딩크 감독은 한국 대표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원 투수로 거론되곤 했다. 또 지금도 히딩크재단을 통해 전국 각지에 축구장을 만드는 등 한국 축구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외국인이 나라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으로 관여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로마는 정복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도 시민권을 인정했다. 심지어는 그들 중에서 집정관이나 황제가 탄생하기도 했다. 정복지의 주민들뿐만이 아니다. 노예들에게도 로마의 시민권은 개방됐다. 능력만 있다면 출신이나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두 시민으로 받아들여 국가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했지만, 동로마제국은 그로부터 1000년이나 더 존속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만든 3중 성벽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숱한 이슬람 제국의 공격으로부터 굳건히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3중 성벽을 무너뜨려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에 넘긴 사람은 아니러니하게도 기독교인이었다. 바로 헝가리 출신의 대포 기술자 우르반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동로마제국 황제에게 자신을 고용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술탄 메메드 2세에게 자신의 기술을 제공했다. 결국 우르반이 만든 대포에 의해 3중 성벽이 무너지고 동로마제국은 그 수명을 다하게 됐다. 역사는 국적이나 종교, 출신 지역에 대한 순혈주의가 한 나라 발전의 장애로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가르쳐 준다. 오히려 국적이나 종교, 출신 지역을 가리지 않는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여 준 나라가 시대를 선도한다고 알려 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얼마 전 인천 중학생 사망 사건은 너무나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더구나 그 학생은 외모가 조금 다를 뿐 외국인도 아니었다. 순혈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우리 안에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자문해 볼 대목이다.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외국인만 250만명에 이르렀다. 다문화 가정을 이룬 우리 국적자도 100만명에 이른다. 국내 거주자 백 명 중 일곱 명이 외국에서 출생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앞으로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이 숫자는 10명 중 1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우리 사회가 이미 외국인과 다문화 가정 없이는 지탱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올바른 외국인·다문화 정책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그 시작점은 바로 외국인과 다문화에 대한 포용 그리고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 [글로벌 In&Out] 70년 만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회 신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70년 만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회 신설/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2018년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한 해였지만 한국 매체가 간과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이다. 본 기사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끝내고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그 선교 활동은 1900년 2월 대수도사제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았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은 1903년 재정비한 선교회 부속학교에서 문을 열었고 성 니콜라이 성당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한편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총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대위기를 맞았다. 1918년 종교단체 자금 공급이 중단되고 자산과 토지가 몰수돼 러시아 정교회는 재정난에 봉착했다.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회의기구인 성 시노드가 1923년 그 관할권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했고 재산을 일본 정교회 재단 명의로 등기했다. 조선선교회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하에 발전해 나갔으며 1935년 조선인 정교도는 약 1100명에 달했다. 1940년대에 일본 당국이 조선선교회를 세르기로부터 독립시키려 압력을 가했고, 결국 1941년 10월 초 조선선교회의 전권이 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에게 이양되었다. 해방 전후 조선선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고 곧이어 1945년 12월 27일부터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하에 ‘임시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소련의 위신이 극도로 높아지자 그동안 볼셰비키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한 백계 러시아 디아스포라도 친소련파와 반소련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1946년 이후 한반도에 냉전체제가 성립되면서 선교회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욱 공공연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회 신도가 미소공위 소련 대표단이 폴리카르프 신부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이용해 폴리카르프 신부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 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지하에 일본 정교회의 관할권을 장악한 북미관구 소속 베냐민 대주교의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일본 정교회 산하로 들어갔고 폴리카르프 신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6월 말 추방당했다. 선교회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일본 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인 2018년 12월 28일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회의가 남북의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총대주교대리구를 신설하고 러시아인 신부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정교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 불러도 대답 없는… 종교계 남북 교류 ‘숨고르기’

    불러도 대답 없는… 종교계 남북 교류 ‘숨고르기’

    참여 응답 못 받아 단독행사 치를 듯 조불련 새해 서신 보내는 등 교감 유지 “북·미 정상회담 교착에 답보상태지만 긍정적 결과 얻을 땐 교류 급물살 기대” ‘할 일은 코앞에 산적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요즘 종교계에서 남북 관계와 관련해 흔히 들을 수 있는 볼멘소리다. 두 차례에 걸친 남북 정상회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과 맞물려 한껏 부풀었던 기대감이 썰물처럼 꺼지고 있는 데 대한 불만과 안타까움의 토로로 들린다. 한반도 화해의 분위기에 편승해 각 종단, 혹은 종교 연합단체 차원에서 앞다투어 추진하려던 대북 지원과 교류가 답보 상태인 만큼 당연한 반응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종교계는 어느 때보다 북·미 정상회담 추이에 촉각을 세우는 눈치다.천도교는 3·1운동 100주년과 관련해 대대적인 기념대회와 기념식을 치를 예정인 가운데 북측 천도교 인사들을 초청해 놓고 있다. 하지만 8일 현재 답신을 받지 못한 상태다. 천도교 측은 북한 통치권과 천도교의 밀접한 관계를 들어 3차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추이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결과가 여의치 않을 경우 남측 천도교 단독행사로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 개신교계는 다음달 25~28일 서울에서 3·1절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준비 중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YMCA, YWCA가 공동 추죄하는 이 행사에 북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 강명철 위원장을 초청했지만 역시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개신교계는 NCCK를 중심으로 남북 개신교 교류와 협력사업을 추진할 ‘한국교회 남북교류협력단’을 전격 발족했지만 개점 휴업 상태에 빠졌다. 여의도순복음교회도 난처한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다. 순복음교회는 지난달 중순 기자회견을 자청해 북측과 협의해 평양에 심장 전문 대형병원을 짓기로 했다고 발표했었다. 260병상 규모의 이 병원이 건립되면 북한 최대의 종합병원이 될 전망이다. 의료진이 북한에 머물면서 시술 등 의료행위뿐 아니라 의료장비의 전수·교육까지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병원 건축에 쓰이는 기자재의 일부가 인도적 지원에 위배되는 만큼 대북 제재 완화와 직결되는 북·미 정상회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남북, 북·미 정상회담의 교착에 따라 지원과 교류가 답보 상태에 빠졌지만 남북 종교계는 훈훈한 정서적 교감을 유지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은 지난 1일 한국불교종단협의회에 ‘민족 화해와 단합, 평화 통일을 위해 적극 노력하자’는 내용의 새해 서신을 보내왔다. 조불련은 “통일조국에 대한 신심과 열정으로 충만된 뜻깊은 새해에 조불련과 종단협 사이의 연대가 더욱 발전하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와 통일에 이바지하게 되리라는 기대와 확신을 표명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북한 조선종교인협의회는 지난해 성탄절을 앞두고 이례적으로 남측 개신교·천주교계에 성탄 축하영상 메시지를 보내왔다. 1분 38초 분량의 영상에는 ‘평화와 통일의 길로 뜻과 마음을 합쳐 굳게 손잡고 나아가는 북남 종교인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한다’는 문구도 등장했다. 따라서 종교계는 향후 양대 정상 회담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경우 남북 교류가 급물살을 띠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각 종단은 남북 관계 경색으로 미뤄 왔던 대북 지원과 교류 사업을 재추진하기 위해 대책위원회를 꾸리는 등 발 빠르게 움직여 왔다. 천주교계는 북한의 장충성당 복원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개신교계는 8·15광복절 기념 남북 공동기도회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함께 추진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협의회’를 평양에서 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불교계도 8·15 남북 불교도 합동법회와 금강산 신계사 복원 합동법회를 우선 추진 중이다. 이와 관련해 김영주(전 NCCK 총무)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은 “북·미 정상회담이 긍정적으로 진행될 경우 종교계의 움직임이 급속하게 활발해질 것”이라면서 “종교는 꽉 막힌 상황에서 매듭을 먼저 풀어 내는 역할도 중요하지만 항상 종교 본연의 인도적, 평화적 가치를 버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중단과 70년 만의 재개

    2018년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은 한 해였다. 대한민국 올림픽 개최 및 남북 단일팀의 참여, 남북한 관계의 전면적 개선,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의 채택, 북-미 정상회담 등 사건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7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냉전질서가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뉴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매체들은 2018년 말에 일어난 또 한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간과하였다. 그 것은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이다. 2018년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가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인정한 후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와의 친교관계를 단절하면서 동방 정교회 내 분열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교회는 2018년 말 러시아에서 올레그 넬린 대사제(протоиерей Олег Нелин)를 한국에 파견함으로써 지난 70년 간 중단되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을 재개하려고 하고 있다. 물론, 2006년 평양에 김정일의 지시로 건설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삼위일체 성당, 일명 ‘정백사원’이 있으나 북한의 국가 특성상 선교 활동이 어렵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는 2018년 서울에서 재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 기사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회의 역사는 조선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대한제국을 선포할 준비를 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으나 그 선교 활동은 1899년 중순 2명의 러시아인 선교사와 1900년 2월 흐리산프 셧콥스키 대수도사제(архимандрит 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가 한성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싶었던 고종이 1898년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짓도록 서울 정동의 토지 825평을 러시아 외교사절단에 선물하였는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외교적 스캔들이 되었고 러시아 정부는 결국 땅 값을 한국 정부에 환불함으로써 토지를 사실상 구입하였다.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에 새로 들어온 정교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00년 4월 9일자 ≪제국신문≫이 정교회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최근 희랍교(그리스 정교)는 들어온 지가 수 주일에 불과한데 입교하는 사람이 심히 많다고 하니 어느 교파이던지 천주교(기독교 전반)란 일반적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 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아 정교 신도가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은 1903년에 재장비한 선교회 부속 학교에서 열렸고 성 니콜라이堂으로 명명되었지만 불과 1년 후 문을 닫게 되었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 간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한반도와 만주가 전장이 되었다. 한국에 진주한 일본군은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한국선교회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활동은 1906년 재개되었다. 1906년 ~ 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고 선교회 부속의 새 남학교들과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총 322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 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자도 생겼다.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대위기를 맞이하였다. 1918년 인민위원소비에트의 ‘국가와 종교, 교회와 학교의 분리에 관한 법령’ 공포로 종교 단체 자금 공급이 중단되고 그 자산과 토지가 몰수되면서 러시아 정교회가 재정난에 봉착하였다. 소비에트 정부가 조선선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회의기구인 성 시노드가 1923년 그 관할권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하였고 일본정부로부터 소유권 보호를 받기 위해 그 재산을 일본정교회 재단의 명의로 등기했다. 조선선교회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하에 발전해 나갔으며 1935년 조선인 정교도는 약 1100 명에 달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당국이 조선선교회를 러시아인 관구장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로부터 독립시키려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1941년 10월 초 조선선교회의 전권이 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제에게 이양되었다. 해방 전후 조선선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고 곧 이어 1945년 12월 27일부터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 하의 임시 자치가 공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소련의 위신이 극도로 높아지자 그 동안 볼셰비키 정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망명한 백위계 디아스포라도 친소련파와 반소련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1946년 이후 냉전체제가 한반도에서 성립되면서 선교회는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욱 공공연한 탄압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2차 미소공위 개최시 소련 대표단이 선교회 맞은편에 숙소를 차리고 폴리카르프 신부를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자 선교회의 대소관계와 관련된 의혹이 심화되고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 신도가 이를 이용하여 폴리카르프 신부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 (SCAP)의 지지 하에 일본정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그 관할권을 장악한 북미관구(현재 아메리카 정교회) 소속의 베니아민 바살리가 대주교(архиепископ Вениамин Басалыга)의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선교회는 최종적으로 일본정교회의 산하로 들어갔고 폴리카르프 신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6월말 북한으로 추방당하고 만주를 거쳐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선교회는 한국전쟁에서 폭격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북미관구 소속의 일본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이탈하고 터키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이렇게 한국 땅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인 2018년 12월 28일 러시아 정교회 성 시노드 회의가 남북한의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싱가포르 및 동남아시아 주재 총대주교대리구를 신설하고 러시아인 신부가 한국에 입국함으로써 한국정교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글·사진 : 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 인권위, “기독 대학에서 성소수자 강연 불허는 인권 침해”

    인권위, “기독 대학에서 성소수자 강연 불허는 인권 침해”

    한동대, “건학이념 어긋난다”며 주최 학생 징계인권위, “종교 자유는 타인 기본권 지키는 범위에서 행사돼야”국가인권위원회가 학내에서 성소수자 강연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담당 학생에게 징계 처분을 내린 한동대에 징계 취소를 권고했다. 인권위는 건학 이념을 이유로 학내 성소수자 강연회를 허가하지 않거나 시설을 대관해주지 않는 것은 평등권 및 집회 자유의 침해라고 판단했다. 7일 인권위는 “성소수자 관련 강연회를 불허하고 학생을 무기정학 및 특별지도 처분한 건에 대해 한동대 총장에게 처분 취소와 재발방지대책을 수립·시행할 것을 권고했다”고 밝혔다. 지난 2017년 12월 한동대 미인가 동아리 ‘들꽃’ 소속 학생 석모(28)씨 등은 학내에서 다자성애와 매춘, 동성애 합법화를 주장하는 강연을 열었다. 학교 측은 강의 내용이 기독교 건학이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행사를 개최한 학생들을 징계했다. 이에 대해 석씨 등 3명은 표현·집회·학문·종교·양심 등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지난해 1월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한동대 측은 “건학이념에 비춰 학내에서 동성애, 성매매 등에 관한 강연회는 기독교 신앙에 어긋나 대학에 부여된 종교의 자유,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율성을 이유로 개최를 불허하거나 장소 대관을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강연회에서 표현하고자 한 내용 모두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에 반하는 것으로, 헌법상 표현의 자유 보호영역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인권위는 “헌법상 종교의 자유, 운영의 자유 등을 보장받는 종교 사학이라 하더라도 공공성이 전제된 교육기관이므로, 헌법질서와 타인의 기본권을 지키는 범위 내 행사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대학이 취한 일련의 조치는 과잉금지의 원칙(수단의 적합성, 침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을 위배한 것으로, 향후 대학 내 학교구성원들의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이 크게 위축될 수 있어 피해학생들의 법익이 보다 두텁게 보호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인권위는 숭실대에서 총여학생회 등이 인권영화제를 진행하면서 ‘마이 페어 웨딩’ 등 성소수자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학내 시설 대관을 신청하자, 학교에서 이를 불허한 것 또한 차별이라고 보고 시정을 권고했다. 지난 2015년 숭실대 총여학생회장과 숭실대 성소수자 모임 등은 학교의 결정이 “평등권 침해에 해당한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대학에 종교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성이 있다고 인정하지만, 장애인, 소수 인종,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를 배제하는 행위는 허용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이어 “기독교인 상당수가 동성애를 포함한 성소수자를 반대하더라도 모든 기독교인들이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성소수자의 성적지향이나 성 정체성에 관한 내용은 입시요강이나 학칙 등에 규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학생들에게 사전에 충분한 설명이나 동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데스크 시각] 혐오 시대, 청년들은 무엇에 분노해야 하나/이창구 사회부장

    [데스크 시각] 혐오 시대, 청년들은 무엇에 분노해야 하나/이창구 사회부장

    “꼰대 같은 소리 집어치우라”는 댓글이 달릴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청년들을 훈계하려는 게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추락이 안타까워서 쓰는 글은 더더욱 아니다. ‘혐오’의 시대에 청년들은 과연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 보자는 취지다.지난달 17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를 보면 20대 남성의 문 대통령 지지율이 29.4%로 전체 남녀별 연령집단 중 가장 낮았다. 대통령의 지지율을 20대 남성들이 앞장서서 끌어내리고 있는 셈이다. 20대 남성들이 문재인 정부와 갈라선 결정적인 원인은 젠더 이슈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학창 시절에는 여학생들이 공부를 더 잘했고, 취업 경쟁과 직장 생활에서는 오히려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여성들에게 차별받고 있다고 느끼는 남성들에겐 현 정부의 여성 우대 정책이 실현 여부와 상관없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여성을 혐오해도 우리 사회는 ‘미투운동’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된다. 여성을 적으로 돌린다고 남성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사회구조를 보면 권력을 휘두르는 다수는 여전히 남성이며, 수많은 여성들이 매일 성폭력에 희생되고 있다. 20대 남성이 분노할 대상은 또래 여성이 아니라 폭력적인 가부장주의다. 많은 남성들이 대법원의 양심적·종교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판결에 반발하고 있다. 일부는 “그럼 군대 갔다 온 내가 비양심이냐”라는 단순 논리를 들이댄다. 총을 드는 것 대신 다른 방식으로 의무를 다 할 테니 종교적 신념과 양심을 지키게 해 달라는 소수를 포용하지 못하는 국가는 전체주의나 다름없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아니라 자신은 물론 아들까지 군대에 보내지 않았으면서 철 지난 반공이데올로기를 외치는 자들이다. 난민과 이주노동자를 혐오하는 양상은 남녀 구분이 없다. 난민을 일자리 도둑 또는 잠재적 성폭행범으로 보는 청년도 적지 않다. 난민을 추방하는 서구의 극우세력을 비판하던 이들까지 막상 제주도에 예멘 난민 480여명이 도착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난민과 이주민을 다 몰아내면 ‘좋은 일자리’가 늘까? 정작 청년들이 분노해야 할 것은 경제력 세계 12위인 대한민국이 480여명 중 고작 2명만 난민으로 인정한 옹졸함이다. 정규직에 안착한 청년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한다. 나는 힘들게 공부해 정규직이 됐는데 정부가 나서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구분을 공정한 경쟁의 결과로 인식한 탓이다. 그러나 비정규직을 양산한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낙오자가 아니라 이 체제의 피해자다. 청년들은 정규직화 정책에 분노할 게 아니라 오직 경쟁만 부추겨 대한민국을 각자도생의 전쟁터로 만든 기득권 세력에 분노해야 한다. 해방 이후 친일과 분단으로 기득권을 유지했던 구세대는 4·19세대에 의해 전복됐고, 군사정권과 야합한 4·19세대는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생)에 의해 부정당했다. 그러나 지금 청년들은 정치적 올바름에 경제력까지 움켜쥔 86세대를 향해 욕만 할 뿐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다. “당장 먹고살 길이 없는데 무슨 세대 타령이냐”는 항변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을’들의 싸움을 부추기는 구체제의 본질은 간과한 채 자신보다 약한 타자를 향해 ‘메갈녀’, ‘무기(무기계약직)충’, ‘난민충’이란 혐오만 퍼부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window2@seoul.co.kr
  • “누군 비양심적이라 군대 가나” “병역거부 무죄 판결 존중해야”

    일반적으로 ‘올바른 생각’ 의미해 혼선 법률상 ‘신념’ 의미… 과도한 해석 오해 군인권센터 등 용어 변경에 거센 반발 “특정 종교집단 혜택으로 오인” 지적도 국방부가 대체복무제와 관련해 ‘양심적 병역거부자’ 대신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양심’의 뜻과 법률상 ‘양심’의 뜻이 달라서 용어를 두고 오해와 불만이 나오기 때문이다. 7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지난해 11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판결한 이후 ‘병역거부가 양심이면 군필자는 비양심이냐’는 불만이 제기됐다. 국방부는 이런 여론을 고려해 ‘양심’, ‘신념’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지난 4일 발표했고, 군인권센터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은 용어 변경에 거세게 반발했다. 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한 만큼 판결 취지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어를 둘러싼 논쟁은 대법 판결 전에도 있었다. 대법원은 판례 변경 전인 지난해 8월 공개변론을 열었는데, 당초에는 명칭을 ‘양심적 병역거부 공개변론’으로 했다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바꿨다. 국립국어원은 2007년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에 대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비양심적으로 만들어 버린다”며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양심에 대한 일반 의미와 법률 의미 차이를 알 수 있다. 헌법 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갖는다’고 규정했는데, 여기서 보호하는 양심은 착한 마음이나 올바른 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대법원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인격적 존재 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로, 절박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법조계에서는 법률에서 말하는 양심은 일상 용어로 ‘신념’과 의미가 통한다고 말한다. 검찰도 대법원 판결 이후 전국 검찰청에 병역거부자를 판단하는 기준을 내려보내면서 ‘종교·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라고 명명했다. 검찰 관계자는 “판결문을 분석해 보면 ´양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피고인 오모씨의 종교적 신념에 대한 판단이 주를 이루고 있다”며 “일반인들이 혼동할 수 있기 때문에 ‘양심´이라는 용어보다는 ‘종교·신념´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피고인 오씨를 변호한 오두진 변호사는 “외국에서는 종교적 신념에 기반을 둔 병역거부라도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표현한다”며 “종교적 병역거부라고 변경할 경우 특정 종교집단에만 혜택을 주는 것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논란을 재점화시킨 국방부는 “특별히 내놓을 입장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줄기세포, 고대 힌두교가 발견한 것”…印과학자들 주장

    “줄기세포, 고대 힌두교가 발견한 것”…印과학자들 주장

    인도 과학자들이 줄기세포 연구의 기원 및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반박하는 주장을 내놓아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BBC 등 해외 언론이 6일 보도했다. 지난 3일부터 열린 제 106회 인도과학회의(India sceince congress 2019)에 참석한, 타밀나두 지역에 있는 한 대학 소속 과학자는 이번 연례회의에서 “아이작 뉴턴과 알버트 아인슈타인 모두 중력파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들의 이론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과학자는 “줄기세포는 수 천 년전, 인도의 고대 힌두교에서 발견한 것”이라며 힌두교의 2대 서사시 중 하나인 '마하바라타'가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현재 과학계에서는 줄기세포라는 용어를 처음 제안한 것이 1908년 러시아 생물학자 막시모프, 줄기세포의 이론이 처음 확립한것은 1961년 캐나다 토론토대학 연구진이라고 보는 시각이 보편적이다. BBC는 “인도 과학계 일부에서 힌두교의 신화와 종교를 바탕으로 한 이론은 점차 일반화 돼 가고 있지만, 올해에는 그러한 발언이 평소보다 훨씬 강하게 나왔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현지 과학자이자 안드라대학의 부총장은 비행기가 인도의 대서사시이자 힌두교의 경전처럼 여겨지는 ‘라마야나’에 등장한 만큼, 고대 인도에서부터 존재해왔다고 주장했었다. 또 2014년부터 집권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2015년 당시 한 병원에서 가진 공식석상에서 코끼리 머리와 인간의 몸을 가진 신인 ‘가네샤’를 증거로 들며 “고대 인도에서부터 성형수술이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인도의 고등 교육부 장관이 다윈의 진화론이 잘못됐다면서, 이를 반영하기 위해 전국 학교 커리큘럼을 변경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발언과 관련해 현지 과학계도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인도과학의원회의 사무총장인 프레멘두 P. 마투르는 AFP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책임있는 사람들의 그러한 발언에는 심각한 우려가 있다”고 비난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