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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눈] 민간 ‘문화재 외교’ 강화를/ 김미경 문화부 기자

    임진왜란때 함경도 최초의 의병들이 일본 대군을 격파한 기록이 담긴 북관대첩비가 일본으로 강탈돼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된 지 100년만에 고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됐다. 민족의 정기를 담은 승전 기념비가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 방치된 사실이 밝혀진 뒤 27년만의 결실이라 의미가 크다. 약탈당한 북관대첩비의 반환은 당연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녹록지 않았다. 일본정부와 야스쿠니 신사측은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며 우리의 반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번에 일본측이 태도를 바꿔 반환을 결정한 것은 지난 20여년간 한국과 일본, 북한 종교단체 등 민간의 ‘문화재 외교’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발점이 된 것은 지난 2000년 일본 일한불교복지협회장인 가키누마 센신 스님과 한일불교복지협회(한불협)를 만든 초산 스님이 의기투합하면서부터. 이들 두 노승의 만남은 양국에 북관대첩비 반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북관대첩비 반환운동본부’ 설립을 이끌었다. 한불협은 2003년부터 정부의 협조를 요청하면서 북한 조선불교도연맹에 북관대첩비 반환 공동대응을 의뢰, 결국 남북이 한 목소리로 일본측에 반환을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정부는 통일부를 통해 남북합의문을 체결했고 외교통상부를 통해 일본정부와 야스쿠니 신사측의 반환 약속을 받게 된 것이다. 일제시대 등 혼란기에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는 일본에만 3만 4000점이 넘는다. 그동안 정부간 협정과 박물관·개인의 기증 등을 통해 3800여건을 돌려받았지만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이는 유출경로 등이 밝혀지지 않은 문화재가 많아 재산권 침해 등의 문제가 있고, 정부간 반환을 청구할 수 있는 국제법적 근거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관대첩비 반환은 이같은 걸림돌을 민간 차원의 문화재 외교로 극복한 좋은 사례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간 ‘줄다리기’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민간 교류를 통한 문화재 기증과 구입, 상호 교류전시 등을 강화해 자연스러운 문화재 반환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이같은 민간 문화교류는 한국과 일본, 북한 사이의 냉기를 녹여줄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김미경 문화부 기자 chaplin7@seoul.co.kr
  • [사설] 개신교의 ‘투기 자성’ 참신하다

    최근 개신교를 중심으로 교회가 부동산 투기에 나선 것을 반성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일부 교회는 부동산 차익을 사회에 환원키로 알려진 것은 신선하다. 사회의 비난을 받기 전에 교회측이 반성을 촉구하고 개선안을 제시한 것은 일반인에게도 귀감이 되는 종교인의 자세로 보인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향상교회’는 현재의 예배당 터를 팔아 근처 부지로 이전하면서 얻게 될 차익 40억여원을 가난한 사람이나 지역사회에 기부하기로 신도들이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또 서울 강남의 ‘사랑의 교회’와 ‘서울영동교회’가 부동산 투기가 잘못이란 입장을 각각 기도와 특별설교를 통해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에는 목사와 선교사 등 91명으로 구성된 ‘성경적 토지 정의를 위한 모임(성토모)’이 ‘토지 정의를 위한 기독인 선언’을 통해 “많은 중대형 교회들이 예배당과 기도원, 수도원과 교인묘지 건축을 빙자해 부동산 투기를 하면서 교회를 성장시켜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독교인들은 부동산 투기로 번 돈을 십일조와 감사 헌금으로 내고 목회자는 그것을 축복해왔다.”며 반성을 촉구했다. 전국의 부동산값이 오르면서 교회도 보유 부동산에서 엄청난 시세 차익을 얻은 것으로 추산되지만 성토모 주장대로 예배당과 기도원 건립 등의 명목으로 일부 교회가 부동산 투기를 한 것이 사실이라면 충격적이다. 종교단체는 부동산에 대한 재산세가 면제된다. 부동산 투기 의혹이 있어도 제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여지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개신교 일각에서 교회나 종교인들이 스스로 부동산 투기를 반성하고 차익을 사회 환원하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다른 종교단체에도 이런 움직임이 확산되길 기대해본다.
  • [인권선진국으로 가는 길] (6) 양심적 병역거부의 해법(타이완)

    [인권선진국으로 가는 길] (6) 양심적 병역거부의 해법(타이완)

    국방의 의무와 양심의 자유가 충돌하고 있다. 집총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스스로 감옥행을 선택하고 있다. 이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올해 초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국민인권의식조사’에 따르면 일반 국민의 7.5%만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다.5년 전부터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한 타이완을 찾아 도입 과정과 복무 실태를 살펴봤다. ■ 대체복무자의 힘겨운 하루 |타이베이·타이중 나길회 특파원|군대생활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군대에 갔다 온 남자들은 자신있게 말한다. 대체복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도 이런 심리 때문이다. 아무리 양심적이고 종교적이라고 해도 병역거부를 군복무 기피 수단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타이완의 대체복무제를 살펴보면 이런 생각은 바뀌게 된다. ●장애인 돌보면서 관절염으로 고생도 “체력 소모만 놓고 본다면 군대 간 친구들이 더 힘들겁니다. 하지만 대체복무도 이에 못지 않게 어렵고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타이베이(臺北)시 양밍(陽明)산 자락에 자리잡은 ‘시립 장애인 보호소’의 한 교실. 미술치료 수업 중이지만 대체복무자 리런지에(21)는 누구보다 분주하다. 지도교사와 함께 아이들의 학습을 도와줘야 할 뿐만 아니라 화장실에도 데려다 줘야 한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도 리의 몫이다. 불교신자로 병역을 거부한 그는 “하루가 정신없이 간다.”며 웃어보였다.15∼60세 장애인 400여명이 생활하는 이곳에는 200여명의 직원 외에 리와 같은 양심적 병역거부자 5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물품관리와 같은 행정업무와 더불어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장애인들을 뒷바라지하는 게 군복무보다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다른 대체복무자들을 보면 알게 된다. 대체복무자인 밍청강(明成剛·21)은 이곳에서 근무한 뒤 관절염을 앓게 됐다. 장애인들을 계속 업어서 옮겨 주다 보니 다리에 탈이 났다. 밍은 “대체복무자들은 한마디로 장애인들의 손발이 돼 주고 있다.”고 말했다. 대소변을 받아내기도 하고 감정조절이 안되는 일부 장애인한테 맞는 일도 있다. 천이밍(陳一銘·24)은 “총을 들지 않아도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돼 있지만 신앙의 힘이 아니라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군대 간 친구들도 이해해줘” 타이완의 대체복무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2000년 5월 시작됐다. 지금까지 이 제도로 교도소행을 면한 이들은 119명.33만군에 비하면 적은 숫자라 군 전력에는 손실을 주지 않으면서도 사회에 보탬이 되고 있다. 대체복무자들의 일은 다양하다. 독거노인을 돌보는 일과 홍수와 같은 재난 구조 활동에도 투입된다. 타이완 중남부의 타이중 도청 사회국 왕슈옌(王秀燕) 국장은 “1999년 대지진 복구 작업에서 대체복무자들이 큰 활약을 했다.”면서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이들은 성실하기로 소문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군 복무를 한 친구들도 대체복무자들을 인정하고 이해한다고 한다. 타이중 도청에서 근무하는 대체복무자 류카이이(劉凱逸·22)는 “대체복무제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친구들이 몇명 있었지만 국가를 위한 봉사로 수긍하게 됐다.”고 전했다. ●철저한 심사로 병역기피 논란 차단 타이완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 제도를 도입하는 데 ‘가짜 지원’이 문제점으로 부각됐다. 그래서 철저한 대책을 준비했다. 내정부(우리나라의 행자부), 국방부, 학계, 종교단체 대표 등이 참여하는 중앙대체복무심사위원회에서 신청자의 신앙, 동기, 심리 등을 엄격히 심사하고 있다. 심사 후 종교 사유를 가장해 대체 복무를 신청한 것이 발각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돼 있다. 또 대체복무 기간은 일반 복무보다 기간을 더 길게 했다. 중타이리(鍾台利) 역정서(우리나라의 병무청) 서장은 “지금까지 위장 신청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면서 “제도를 악용하려는 사람들이 없어 초기에 1.5배 더 근무시켰던 것을 2003년부터는 일반 대체복무자는 2개월, 종교 사유 대체복무자는 4개월 더 근무토록 바꿨다.”고 말했다. kkirina@seoul.co.kr ■ 대체복무制 시행서 정착까지 |타이베이 나길회특파원|만 5년이 지난 타이완의 대체복무제도는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지엔시지에 평화추진기금회 집행장은 “군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도소에 가는 것은 가혹하다.”면서 “지난 5년간 이들을 구제하면서 타이완이 잃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타이완의 대체복무제를 입법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는 당시 입법위원(우리나라의 국회의원)이었던 그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1996년부터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주장했던 그는 법안을 발의하고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을 이끌어냈다. 각계각층, 특히 입영을 앞둔 학생들을 직접 찾아가 설득한 끝에 거둔 성과다. 그는 “몇백명이 빠져도 국가안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 이들은 ‘병역기피자’가 아니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준다면 한국에서도 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도를 도입하는 데 지엔시지에가 있었다면 이를 정착시키는 데는 중타이리(鍾台利) 역정서 서장이 있었다. 대체복무자를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그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군대에서는 양이지만 사회에서는 맹수”라고 표현했다. 군대에 가기를 거부하는 그들도 대체복무에서는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얘기다. 우리나라가 여전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답답하다.’고 했다. 그는 “왜 어렵게 생각하는 모르겠다.”면서 “현대전은 화력전이 아님을 주지시켜 군력 감축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복무기간을 길게 해서 형평성 문제를 해결하고 확실한 심사단체를 만들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5년 동안 대체복무제와 관련해 전혀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2000년 당시 국방부에서 근무했던 슈아이화민 현 입법위원(국방위원회 소속)은 “위장지원과 같은 문제는 없었지만 근무지역의 형평성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모 재단에서 일하게 된 일부 대체복무자들이 재단의 일반 직원들이 받는 배당금을 받은 일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 비전문가인 대체복무자들을 전문성이 필요한 최일선 현장에 배치해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국방부 출신인 만큼 군력 감축에는 신중한 그이지만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었다.“징병제 하에서 ‘공평’ 문제만 해결된다면 이들을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한국에서 하루 빨리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kkirina@seoul.co.kr ■ 미국·프랑스등 38개국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1948년 유엔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제18조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사상·양심 및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이후 유엔은 지속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된 법과 관행 검토를 요청했다. 지난해에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한국을 포함한 유엔인권위 53개 이사국은 캐나다, 영국 등 34개국이 공동으로 제안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 공동 제안 국가에는 내전을 겪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등이 포함돼 있다. 대치 상황이 반드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유엔에 1997∼2000년 보고된 각국 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국가는 프랑스, 미국, 러시아, 독일 헝가리 등 38개국에 이른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관행적으로 이들이 총을 들지 않도록 배려하는 국가도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의 경우 군지휘관이 여호와의 증인을 군 취사 담당 등과 같은 비전투적 복무에 배정하고 있다. 또 유고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자는 비무장 복무를 허락한다. 콜롬비아도 전투나 적대행위에 참가하지 않고 병역을 마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임대주택보육시설 국·공립 운영

    새로 짓는 임대주택의 보육시설은 모두 국·공립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공동주택을 지을 때 보육시설 의무 설치 규정이 강화되고, 도시공원 안에도 보육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된다. 여성가족부는 17일 보육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한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 대책’을 마련해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대책을 보면 신규 임대주택 단지에 들어설 보육시설에 대해서는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임대, 국공립 시설로 운영한다. 현재 임대주택 내 보육시설은 3000여개로 대부분 민간이 운영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이를 위해 대한주택공사가 짓는 임대주택부터 국공립으로 운영하되, 단계적으로 전체 임대주택으로 확대하기로 하고 건설교통부와 협의를 마쳤다. 이에 따라 올 하반기 입주할 임대주택 단지내 총 12곳의 보육시설이 국공립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공동주택 보육시설 의무설치 대상도 확대된다.지금은 500가구가 넘지 않으면 보육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됐지만 앞으로는 300∼400가구 이상을 지으려면 반드시 보육시설을 만들어야 한다. 여성가족부는 이를 위해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도록 건교부에 요청했다. 보육시설을 늘리는 데 걸림돌이 돼온 부지 확보 방안도 나왔다. 여성가족부는 건교부와 협의를 거쳐 올해 안에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을 개정, 전국적으로 3000여개에 이르는 도시공원 안에 국공립 보육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을 마련하기로 했다.또 여성회관이나 마을회관, 우체국, 주민자치센터 등 공공시설을 활용해 국공립 시설을 늘리고, 대학이나 종교단체가 갖고 있는 땅을 장기 임대해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월드이슈] 美 응급피임약 처방전 폐지 논란

    [월드이슈] 美 응급피임약 처방전 폐지 논란

    성관계 후 평균 72시간 내 복용하면 임신을 80∼95% 막을 수 있는 응급피임약. 실패율 높은 콘돔 대신에 효과적 피임법으로 상용화할 날이 올 것인가. 만 16세 이상에게 의사의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판매할 것인지에 대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다음달 1일 최종 결정할 계획인 가운데 이를 둘러싼 논란도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 ‘모닝 애프터 필’로 불리는 응급피임약은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돼 있다 ● FDA, 무처방 판매가능 그러나 72시간 내 긴급히 복용해야 하는 점을 들어 처방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는 주장과 함께 이미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등 7개 주가 처방전 없이 판매를 허용했다. 어린 청소년의 임신을 막기 위해 연령 제한도 없다. FDA도 이같은 추세를 반영해 사실상 ‘허용’ 쪽으로 가닥을 잡고 약품 포장지에 넣을 막판 경고문구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레스터 크로퍼드 신임 FDA 국장은 지난 3월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과학적인 부분에 대한 검토는 대체로 끝났다.”면서 “플랜 B의 포장 디자인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플랜 B는 미국에서 시판되는 대표적 응급피임약이다. 의사들로 구성된 FDA 자문위원회는 지난 2003년에 이미 “240만명 이상의 미국인과 전세계 수백만명의 여성들이 응급피임약을 별다른 부작용 없이 복용하고 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응급피임약을 처방전 없이 판매할 경우 미국 내에선 ‘원치 않는 임신’을 현재의 연간 300만건에서 절반 수준으로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AP통신이 전문가들을 인용, 보도했다. 시민단체인 ‘성교육 자문회의’의 애드린 베릴리도 “‘사고’는 주로 의사가 근무하지 않는 밤이나 주말에 일어난다.”며 허용을 주장했다. ● “의사 처방은 마지막 보루” 그러나 보수단체들은 응급피임약이 착상 전에 (임신을) 막는다고 해도 “조기 낙태약이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혈압 병력이 있는 여성에게 응급피임약이 위험할 수도 있는 등 부작용이 없지 않은데 의사의 처방전은 이를 최소화하는 마지막 보루라는 것이다. 게다가 여성이 응급피임약 복용을 강요당하고 피임 실패에 대한 비난을 뒤집어쓸 가능성이 많아 흔히들 응급피임약이 여성 해방의 지름길이라고 보는 시각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성문란을 걱정한다. 보수주의 모임인 ‘미국을 걱정하는 여성들’의 웬디 라이트는 “처방전 없이 팔면 사실상 연령 제한도 강제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2008년 대선 예비주자인 공화당 출신의 조지 파타키 뉴욕주지사는 최근 주의회가 낸 응급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 허용 확산 분위기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약사들은 처방전을 보여줘도 약품을 내주지 않을 정도로 응급피임약의 문제는 윤리와 신념의 차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로드 아일랜드주의 한 약사가 얼마전 응급피임약 판매를 거부한 데 대해 주 약국 이사회는 “약사가 직업윤리적 판단 아래 처방전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이런저런 이유로 FDA는 지난 2003년 자문위의 허용 권고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고 당초 지난 1월 결정하려던 것을 올 9월까지 미뤘다. 최종 결정이 어떻게 내려지든간에 미국 사회가 당면한 또 하나의 윤리 논쟁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英·佛선 학교 양호실서 무료 제공 미국과 달리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응급피임약을 구입하는 데 있어 의사 처방전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 긴급히 복용했을 때만 효과가 있다는 점을 일찌감치 인정한 것이다. 현재 영국·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스웨덴·그리스 등 전세계 16개국이 응급피임약을 처방전이 불필요한 일반의약품으로 취급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지난 2002년부터 만 16세 이상이면 아무런 제한 없이 약국에서 응급피임약을 살 수 있다. 인터넷에서 익명 구매도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역시 지난 2000년 허용돼 현재 약사나 학교 간호사가 여학생 부모의 동의 없이도 응급피임약을 복용시킬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학교 양호실에 이 약을 상시 비치해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 상담 후 무료로 얻어 간다. 독일은 지난해부터 자유 판매를 허용했다. 만 18세 이하 소녀의 낙태 건수가 1996년 4724명에서 2002년 7443명으로 늘어났다는 보건사회부 자문회의의 보고가 결정적이었다. 물론 이들 나라 종교단체와 일부 시민단체들도 거세게 반대했었다. 이탈리아는 응급피임약 시판에서부터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프랑스가 개발한 노레보정을 허가한 지난 2000년 로마 교황청은 “화학적 낙태행위”라며 “엄격한 조건 아래 수술로만 낙태를 허용하는 법률 194조를 위반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낙태가 불법인 가톨릭 국가 페루는 보건부 장관이 가족계획을 장려하기 위해 지난해 1월 응급피임약을 배포했다가 보수적인 국회의원들로부터 기소당하기도 했다. 필라르 마세티 보건부 장관은 “응급피임약은 세계보건기구(WHO)에도 낙태약이 아니라고 돼 있다.”고 항의했었다. 반면 10대 임신율이 서유럽 최고인 영국은 이 약품 홍보에 정부가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결과는 신통찮은 것 같다. 일간 데일리 메일은 “토니 블레어 정권은 지난 7년 동안 콘돔과 응급피임약 홍보에 1380만파운드(약 2600억원)를 지출했지만 오히려 임신율이 증가했다.”면서 성관계를 전제로 한 피임 위주의 교육을 비판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만 16세 미만 임신율이 지난 2002년 1000명당 7.9명에서 2003년 8.0명으로 늘어났다. 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한국 응급피임약 실태우리나라에서는 현재 노레보, 퍼스트렐, 세스콘 원앤원, 레보니아 등의 응급피임약을 의사의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살 수 있다. 응급피임약이 국내에서 시판된 것은 2002년부터로 2003년 24만정,2004년 29만정이 팔려 사용하는 여성의 숫자는 늘고 있다. 하지만 홍보를 할 수 없고, 처방전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전문의약품이기 때문에 판매량 증가는 미미하다는 제약사측의 설명이다. 사용과 구입의 편리성을 위해 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자는 의견에 대해 보건복지부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사전피임제와 달리 사후피임제는 주성분이 여성호르몬인 레보노르게스트렐로 다소 고함량이 함유되어 있어 사용상 엄격한 주의를 요하는 의약품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복용법은 대부분의 약이 비슷하다. 성관계 이후 최대 72시간 내에 2정을 모두 복용한다.72시간 안에 1정을 먼저 먹은 뒤 12∼24시간 안에 1정을 더 먹는 약도 있다. 가격은 단 2정이란 것을 감안하면 비싼 편으로 보험과 의료보호는 적용되지 않는다. 처방전을 받는 데 1만∼2만원, 약을 구입하는 데는 1만∼1만 5000원이 든다. 구입하는 데 연령 제한은 없어, 청소년도 살 수 있다. 처방전없이 약국에 가면 약사들이 응급피임약이 아닌 매일 복용해야 하는 보통의 사전피임약을 다량으로 주는 경우가 있다. 용량을 맞추기 위해서 통상 일반의약품인 보통피임약을 4정 정도 먹은 뒤 12시간 뒤 4정을 더 먹으라고 한다. 이럴 경우 위장장애와 두통 등 부작용이 발생할 확률은 훨씬 높고, 피임 효과도 장담할 수 없다. 응급피임약의 피임효과는 80∼95%정도로 추산된다. 한번의 생리주기 안에서 즉 한달에 한번만 사용 가능하다. 한번 응급피임약을 먹은 뒤 뒤이어 성관계를 할 때는 반드시 비호르몬적 국소피임법을 써야 한다. 약이 아니라 콘돔, 살정제, 자궁내 피임장치, 피임용 캡 등을 사용해야만 한다. 응급피임약을 먹은 뒤 가장 흔히 보이는 현상은 위장장애다. 구토, 복부 통증과 함께 피로, 두통, 현기증, 생리장애, 설사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성관계 직후 빨리 복용할수록 피임 효과는 우수하다. 제약사는 24시간내 복용하면 95%,48시간내는 85%,72시간내는 58%의 피임효과를 발휘한다고 설명했다.100% 피임이 보장되지는 않으므로 임신진단 시약 등으로 사후 확인을 할 필요가 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종교초월한 봉사기쁨 나눠요”

    “종교초월한 봉사기쁨 나눠요”

    “교무님과 신부님, 목사님, 수녀님, 스님 모두 이웃을 위해 봉사와 나눔을 함께 실천하는 좋은 친구랍니다.” 원불교 라디오방송 ‘원음방송’(FM 89.7MHz)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다. 매일 오후 4시부터 1시간동안 방송되는 ‘둥근 소리 둥근 이야기’는 이웃 종교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는 국내 유일의 종교협력 프로그램이다. 서울에서 전파를 탄 지 다음달이면 4주년을 맞는다. 원음방송에서 최장수, 최고 수준의 청취율을 자랑한다. 이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이자 작가,DJ로서 ‘1인3역’을 맡고 있는 송지은(36) 교무는 각종 신문과 인터넷 등을 통해 다른 종교 소식을 꼼꼼히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4년 전 프로그램을 맡은 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생방송을 진행하면서 이웃 종교의 새로운 소식과 성직자들의 훈훈한 나눔활동을 소개해왔다.“그동안 스튜디오로 초대한 이웃 종교의 성직자분들만 해도 200명쯤 됩니다. 이와 함께 다양한 활동을 하는 종교단체들도 150∼160개 정도 소개했지요. 다른 종교 성직자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자 행복입니다.” 종교간 대화를 통해 교리적·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소외된 이웃에 같이 눈을 돌리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인 만큼 각 종교마다 사회현장 등에서 활동하는 성직자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그동안 강원용 목사, 박청수 교무, 법륜 스님, 김성수 주교, 최일도 목사 등 유명인사들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 구석구석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평범한 성직자들의 가슴 따뜻한 사연들이 많이 소개됐다. “노숙인 무료급식, 암환자·장애인 돌보기, 빈민촌 봉사, 수재민 돕기 등에 헌신하는 목사님과 신부님, 스님 등을 만나 베푸는 삶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동성애, 환경, 성폭력문제 등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각 종교단체 관계자들을 한자리에 초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함께 풀어가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요일별로 각 종교의 경전과 상식, 뉴스 등을 소개하고, 종교계 행사와 문화공연 등을 직접 취재해 전달하는 등 모든 종교의 다양한 정보와 소식을 한꺼번에 들을 수 있다. 또 종교가 없는 일반인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마련한 ‘함께 하는 기도’코너는 청취자들의 고민거리나 기도사연을 받아 각 종교의 절대자 호칭을 함께 사용해 기도를 해줘 인기가 높다. 송 교무는 “종교계가 이기적으로 자기 종교만 챙기거나 봉사와 나눔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는 상황에서 이웃 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함께 봉사를 실천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데 의미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리 교리를 많이 알고 기도에 전념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참된 종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면서 “종교계가 연합해서 결식아동, 난치병어린이 돕기 등을 꾸준히 펼쳐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높은 청취율과 종교계 안팎의 높은 관심에 힘입어 프로그램 개편이 이뤄지는 9월부터 방송시간이 오전 10시로 바뀐다. 송 교무는 “다음달부터 종교별 봉사활동·행사뿐 아니라 개별 사찰과 성당, 교회 등을 찾아 성직자들을 소개하고 예배와 법회, 미사 등 의식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새로운 코너를 진행할 것”이라며 의욕을 보였다. 글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김태촌씨 “사회에 진 빚 갚을것”

    폭력조직 ‘서방파’ 두목이었던 김태촌(57)씨가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 고영한)는 10일 김씨에 대한 보호감호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보호감호 청구를 기각했다. 지난 4일부터 시행된 사회보호법 폐지 법률의 첫번째 수혜자로 주목받았던 김씨에 대해 법원이 사회복귀 인증절차를 마무리해준 셈이다. “사회보호법 폐지 법률 부칙에서 재판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청구를 기각하도록 하고 있다.”고 판시한 재판부는 김씨에게 “본인이 희망한 대로 서예교육과 청소년 범죄자 선도사업에 힘쓰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씨는 “몸이 회복되면 사회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 김씨는 1987년 인천 뉴송도호텔 나이트클럽 사장 폭행 사건으로 수감돼 2년 뒤 폐암 진단을 받고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그는 이어 1990년 종교단체를 가장한 범죄집단인 ‘신우회’ 조직 혐의,1997년 공문서 위조 혐의 등으로 지난해 10월까지 수감생활을 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파키스탄 “테러척결” 용의자 200명 체포

    |이슬라마바드·런던 AFP 연합|파키스탄 당국은 런던테러 발생으로 테러조직 소탕을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압력이 높아진 뒤 이슬람 무장조직 연루 혐의자 200명 이상을 체포했다고 현지 경찰 소식통이 20일 밝혔다. 파키스탄 보안군은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테러 확산 ‘척결 지시’를 내린 뒤 전국의 종교학교와 종교단체 사무실 등을 급습,200명 이상을 검거했다고 한 내무부 관리가 전했다. 한 고위 정보관리는 “이번 소탕작전은 런던테러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고위관리는 이번 단속은 외국에서 유입된 무장요원들이 소속된 조직을 흔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히고 런던테러와 직접 연관된 알 카에다 고위 인사가 체포됐다는 보도 내용은 부인했다. 앞서 영국 일간 더 타임스와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 등 외신들은 런던 테러와 관련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알 카에다 최고위급 인사가 파키스탄에서 체포됐다고 20일 보도했다. 현지 경찰 소식통들은 종교학교 수천 개가 몰려 있고 급진 무장단체들의 근거지가 되고 있는 라호르와 카라치, 수도 이슬라마바드 등에서 대대적인 검거작전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 “제3경인고속도로 전면 재검토를”

    제3경인고속도로 건설 예정지인 경기도 시흥지역 주민들이 고속도로가 건설될 경우 심각한 환경파괴가 우려된다며 건설 재검토를 요구하고 나섰다. 시흥지역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제3경인고속도로 전면 재검토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는 13일 “제3경인고속도로㈜가 제출한 환경영향평가서를 환경청이 검토한 결과 고속도로가 건설되면 해양 생태계가 심각하게 파괴될 것으로 지적됐다.”고 밝혔다.이들은 또 “도로건설 구간이 저지대여서 대규모 성토에 따른 지역간 통행저해와 경관 단절현상이 초래되고 소음피해마저 우려되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주장했다. 대책위는 이에 따라 경기도에 제3경인고속도로 건설계획 타당성 검토를 위해 주민,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조사연구사업과 함께 객관적인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인천시 남동구 고잔동 해안도로와 시흥시 논곡동 서울외곽순환도로 목감IC를 잇는 제3경인고속도로(길이 14.3㎞, 왕복 4∼6차선)는 4357억원을 들여 2009년 완공 목표로 추진되고 있으나 주민들의 반발 등으로 아직 착공조차 못하고 있다. 주민들은 고속도로 노선이 시흥시 월곶·연성·매화·목감동 등 시 중심부를 관통, 환경파괴와 소음공해 등이 우려된다며 사회·종교단체 등과 연대해 건설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다.시흥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런던 연쇄폭탄테러 이모저모] 전세계 열차테러 5년간 181건

    지하철과 버스, 열차, 항공 등 세계 주요 도시의 대중교통 수단이 갈수록 테러단체의 공격 목표가 되고 있다. 대중교통은 수십만∼수백만명이 이용하고 운행 시간이 일정하지만 막대한 비용 문제로 대부분 보안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테러에 취약하다. 이번 런던 지하철·버스 테러에 앞서 지난해 3월 마드리드에선 열차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출근 시간대의 통근열차 4대를 노린 마드리드 테러는 191명의 사망자와 1800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 테러는 알카에다 연계조직의 소행으로 추정됐다. 그보다 한달 전인 2월6일 모스크바 지하철에선 체첸 분리주의단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폭탄 테러가 일어나 42명이 숨지고 250여명이 다쳤다.가장 끔찍한 테러는 역시 2001년 미국 뉴욕과 워싱턴 근교 등에서 발생한 비행기 납치 테러인 ‘9·11’이다. 승객 등을 포함해 무려 2986명이 숨졌고 6000여명이 부상했다.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2403명의 미국인이 숨졌던 것과 비교하면 피해 규모를 알 수 있다. 이는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 소행으로 추정된다. 1995년에는 프랑스에서 4개월 간 이슬람 극단주의단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열차 폭탄 테러 등이 발생,8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다쳤다.같은 해 도쿄에서는 종교단체인 옴진리교에 의한 지하철 독가스 테러로 12명이 숨지고 5000여명이 부상했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철도산업안전회의에서 전문가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1998년부터 2003년까지 발생한 열차 관련 테러만도 전세계적으로 181건 이상이라고 BBC방송 인터넷판은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4) ‘원조’ 예언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4) ‘원조’ 예언자들

    언제 누가 무슨 예언으로 세상을 움직였을까.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예언자의 계보도 많이 달라졌다.20세기 초엔 손병희를 비롯한 신종교단체 지도자들이 ‘정감록’을 근거로 ‘후천개벽’을 예언했다. 그에 앞서 조선 후기에는 풍수지리와 점술에 밝은 ‘술사(術士)’들이 예언자로 활동했다. 그들은 정권에서 소외된 이른바 ‘원국지사(怨國之士)’들과 연합해 새 왕조의 창립을 꿈꾸었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언서 ‘정감록’을 민간에 유포시켰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좀더 다양한 부류의 예언자들이 발견된다. 우선 고려 후기에는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다가 사기꾼으로 단죄된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고려시대만 해도 국가는 정치적 예언을 독점 관리하였으며, 이를 위해 천문과 지리 등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술관(術官)을 따로 설치했다. 국가가 예언을 제도적으로 독점하는 경향은 이미 고대로부터 비롯됐다. 우리와 이웃한 고대 중국은 물론, 서양문명의 뿌리로 알려진 로마제국에서도 정치적 예언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정치적 예언은 허가받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만큼 고대사회에서 예언의 역할은 중요했다. 한국 고대의 예언자들은 크게 네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왕, 무당, 일관 및 승려가 그들인데, 이들은 예언의 원조였다.‘정감록’의 가장 깊숙한 뿌리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성한 왕들의 예언능력 고대엔 왕들이 직접 예언자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신라 선덕여왕이 그랬다.‘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인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줄거리만 간단히 언급하겠다.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 떼가 모여 여러 날 동안 울어댔다. 이것을 보고 여왕은 여근곡이란 곳에 백제 군사가 잠복해 있는 줄을 알아냈다. 개구리는 눈이 툭 불거져 있어 성난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병사로 해석했다. 개구리가 울던 옥문은 곧 여자의 생식기인데 여자는 음이요, 빛깔로 말하면 흰색, 방향으로는 서쪽이다. 여왕은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짐작했다. 그런데 남근이란 여근 속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라 여근곡의 적군은 물리치기가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선덕여왕의 예언은 사물의 형태, 이름, 빛깔이 당시 사람들이 공유한 상징체계의 틀 안에서 이뤄졌단 점이 주목된다. 역사가들은 이 설화를 예로 들어 선덕여왕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든가, 또는 여왕의 권위가 만만치 않았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고대의 왕은 신성시 됐는데, 왕의 초월적 능력에 대한 기대가 그 이면에 자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중국 고대의 진시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신성한 능력의 소유자로 간주돼, 사시사철 천지의 순조로운 운행을 알리는 달력을 공포할 권리가 있었다. 심지어 고대 동양에서는 신기한 동식물의 출현, 별자리의 움직임을 비롯해 갖가지 천문 현상, 바람과 비 등 일체의 자연 현상에서 하늘의 뜻을 발견하고자 했다. 자연환경의 사소한 변화에도 한 나라의 정치적 공과가 반영되어 있다고 믿었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물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에 관한 기사가 수없이 많다. 왕은 이 모든 현상의 이면에 암시된 하늘의 뜻을 정확히 읽고 적절히 대응해야만 됐다. 그것이 하늘과 백성에 대한 왕의 의무였다. 이런 점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한국 고대엔 왕이 흉년이나 자연재해에 대해 직접 책임을 져야 됐다. 부여에선 여차하면 왕을 바꾸기까지 했다고 한다. 부여 왕은 정치적 수장이자 최고의 사제로서 책임을 져야 했다. 부여 사람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하늘의 의지가 절대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굽 모양으로 길흉을 점칠 정도였다. 일종의 동물 점(占)이 애용되었던 것인데, 그 방법이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갑골점(甲骨占)과 비슷해 보인다. 고대에는 아직 세속적인 지식과 종교적인 신앙심이나, 정치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왕은 최고 권력자이자 종교적으로 신성한 존재로서 하늘의 뜻을 정확히 읽어내야 된다는 사명을 떠안게 됐다. 심한 경우, 예언과 주술의 능력이 부족한 왕은 퇴출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상적인 왕은 선덕여왕처럼 예지 능력을 구비했어야 됐다. ●궁중의 무당 또는 일관들, 예언 전문가로 국정에 간여해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정치와 종교는 점차 분리되었고, 정치권력이 종교적 권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왕 노릇을 하는 데는 여전히 정치적 예언능력이 요구되었지만, 왕이 직접 예언자여야 할 필요는 사라졌다. 왕은 궁궐 안에 예언자들을 고용했고, 그것으로 족했다.‘삼국사기’에 보면 이미 백제의 초창기인 온조왕 때,‘일관(日官)’이란 전문가가 측근으로 기용돼 있었다. 어느 한 해엔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도성에 사는 어떤 백성의 집에서 말이 소를 낳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 머리는 하나였으나 몸은 둘이었다. 이런 변고(?)에 대해 일관이 해석을 내놨다.“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크게 세력을 일으키게 될 징조입니다. 소가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하게 될 징조입니다.” 예언은 맞아들었다. 얼마 후 온조왕은 진한과 마한을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일관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다. 고구려에서는 일자(日者)라고도 하였다. 그는 천체의 이상현상을 예언으로 풀이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예컨대 149년(고구려 차대왕 4년) 5월에 다섯 별(歲星 또는 木星,熒惑 또는 火星,太白 또는 金星,辰星 또는 水星 그리고 鎭星 또는 土星)이 동쪽 하늘에 모였다. 일자가 보기에 흉한 조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의 마음에 거슬리면 공연히 화를 당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임금의 덕”이 있다는 증거라고 거짓으로 둘러댔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 늦어도 2세기에는 천문에 정통한 직업적인 예언자들이 고구려 왕실에 존재했다. 일자는 이를테면 전문직 관리로 왕을 보좌했다. 고구려 왕실에는 또 다른 부류의 예언자들도 있었다. 역시 고구려 차대왕 때의 기록이 참고가 된다.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마침 하얀 여우가 보이기에 활을 쏘았다. 그러나 맞히지 못해 떨떠름해했다. 왕은 ‘무사(巫師)’에게 이 일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스승 사(師)’ 자를 붙여 무사라 일컫는 데서 짐작되듯, 최상급의 무당이었다. 무사는 그 일이 아주 나쁜 징조라고 말했다. 여우는 요사스러운 짐승인데 하물며 그 빛깔이 하얗다면 더욱 괴이한 일이라 했다.“임금님은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여 덕을 닦고 잘못을 반성하십시오. 만일 임금님이 덕을 닦으시면, 화가 변하여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왕은 화가 치밀어 올라 이렇게 간언하는 무사를 죽여 버렸다. 나라 안의 최고 무당으로서 예언자는 자연 현상에 은밀하게 담긴 하늘의 뜻을 제대로 알아맞혀야 했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돼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무당은 자연 현상의 예언적 의미를 캐낼 때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의 정치적 개입은 위의 이야기가 상징하듯 상당한 위험이 뒤따랐다. 우리에게 삼국통일의 명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유신만 해도 본래는 고구려의 무당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전생에 고구려의 무당 추남이었다 한다. 추남은 천지자연의 여러 현상을 예언으로 풀이하는데 능했다. 뿐만 아니라 점술에도 밝았다. 하지만 고구려 왕비의 뜻을 거스른 바람에 무고하게 죽음을 당했고, 이를 복수하기 위해 적국 신라의 귀족 가문에 환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삼국유사’에 보면, 고구려의 연개소문 역시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적국의 장수로 환생하였다고 했다. 환생에 얽힌 전설이 사실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점은 추남이든 또는 차대왕 때의 무사든 국가의 운명을 바로 예언해야 될 사명을 띤 무당들이 왕의 곁에 포진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과 별도로 천문에 밝은 일자들 역시 예언을 임무로 삼았다. ●명산대천과 시조 사당의 제관들, 국운을 예언하다 7세기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얼핏 무당과 비슷해 보이지만 엄밀한 의미로는 구별되는 새로운 부류의 예언자들이 등장했다. 사제 또는 제관(祭官) 즉, 나라의 중요한 제사를 담당하던 종교인들이 예언자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고구려 말기인 보장왕 때 일이다.654년(보장왕 13년) 4월, 마령 고개 위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했다. 마령의 신인이란 산신령을 가리킨 것이 거의 틀림없다. 신라의 경우 김유신의 전기를 읽어보면 삼산(三山)의 여신들이 국운을 수호하는 신으로 언급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마령도 국가적으로 중시되던 명산이며, 그 곳의 산신이라면 특별한 신앙대상이 아닐까 한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마령 산신의 예언을 청취한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일 수가 없다. 그는 산신령의 제사를 전담하는 사제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딱히 고구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삼국에는 저마다 국가적인 제사의 대상이 정해져 있었다. 유명한 산천과 국가의 시조묘(始祖廟) 등이 신앙 대상이었다. 이들 종교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따로 있었다. 고구려 요동성(遼東城)만 해도 시조 주몽(朱蒙)의 사당이 설치돼 있었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는 마침 예언자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 도움이 된다. 보장왕 때 당나라 장수 이세적(李世勣)이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 아래까지 쳐들어 왔다. 당나라 군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달아 성을 공격했다. 당 태종까지 친히 합세해 요동성을 수십 겹으로 에워싸 북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요동성 주민들의 사기는 저하됐고 성은 함락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주몽 사당을 관리하는 사람이 나섰다.“우리가 모시는 주몽 사당에는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이 있고 날카로운 창이 있다. 전해오는 말로 이것은 전연(前燕·249∼370) 때 하늘이 내려 보냈다고 한다. 지금 적에게 포위되어 형세가 위급하다. 미녀를 단장하여 주몽 신에게 아내(‘婦神’)로 바치자.” 그의 제안대로 미녀를 바친 다음 제관이 다시 말했다. 주몽이 기뻐하시므로 성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란 이야기였다. 그러나 요동성은 바로 함락되고 말았다. ‘삼국사기’에는 주몽 사당의 제관을 단순히 무당(‘巫’)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크게 괘념할 일은 아닐 성싶다. 요동성의 함락에 관한 내용은 고구려의 적국인 당나라 측의 사료를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 사당을 보호하고 관리할 ‘사제’ 또는 ‘제관’이 없었을 리는 만무하다. 이쯤에서 요점을 간추려보자. 첫째, 고구려의 건국 시조 주몽은 사후에 국방의 요충인 요동성을 수호하는 신으로 간주돼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비슷한 예로 신라의 문무왕도 죽어 국가의 수호신이 되었다. 문무왕과는 달리 주몽은 성곽의 수호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주몽 사당은 후대 중국 성황(城隍)의 원형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주몽 신에게 젊은 여성이 희생으로 바쳐졌다는 점이다. 사람을 산 채로 무덤에 부장품으로 삼는 순장(殉葬) 풍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종교적 희생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인용한 사료에서 확인되듯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 사당을 관리하는 제관이 있었고, 그는 수호신 주몽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바로 이 점이 지금 우리에겐 가장 중요하다. 백제의 경우에도 명산대천은 국가적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중요했던 만큼 국가의 멸망을 예언하는 징조가 가장 분명하게 포착된 장소이기도 했다. 백제가 멸망하기 몇 해 전부터 기이한 현상들이 자주 목격됐다. 빨간 말이 북악의 오함사(烏含寺)에 들어와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은 사찰을 여러 날 동안 맴돌다 죽었다는 것이다. 북악이라는 명칭에서도 짐작되듯 그 산은 백제의 오악 가운데 하나였다. 명산 중의 명산으로 백제가 국가적 신앙대상으로 삼았던 북악 산신이 나라의 멸망을 알리는 징조였다면 의미심장하다. 하필 ‘말’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상징적이다. 앞서 예로 든 고구려의 산신도 마령 즉 ‘말 고개’에 출현했던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에 말은 전쟁 또는 군신(軍神)의 상징이었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 백제의 우물, 강물 그리고 바다에도 재앙의 조짐이 역력했다. 서해안 해변에는 무수히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어찌나 많던지 백성들이 아무리 먹어도 남았다고 했다. 생초진(生草津)엔 거대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됐다. 그 길이가 무려 18척이나 됐다고 한다. 수도 사비성의 서남쪽으로 흐르는 사비하(금강)에는 큰 물고기가 죽어 떠올랐는데, 길이가 3척이나 됐다. 이어서,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게 물들었다. 도성의 우물물도 핏빛으로 변했다. 모두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따져보면 우물물이나 강물이 붉게 변했다는 이야기는 큰 물고기나 거대한 여성이 폐사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대 한국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물속에는 물의 신이든가 아니면 용이 살고 있었다. 그 형상은 특출한 사람의 모습일 수도 있었고 물고기 또는 지렁이와 같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물의 신은 우선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등장한다. 주몽의 외할아버지 하백이 바로 그렇다. 작은 물고기들은 물의 신(水神,河伯)의 신하로 인식됐다. 적에게 쫓기던 주몽이 무사히 강물을 건너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물고기와 자라들 덕분이었다. 만일 주몽이 수신의 외손이 아니었더라면, 수중 생물들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웠다는 것이 신화의 논리다. 백제 왕실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였던 만큼 명산 못지않게 대천(大川)도 중요했다. 수도 사비성을 감싸 흐르던 사비하, 생초진 그리고 서해 바다의 수신은 모두 백제의 수호신이었을 것이다. 물론 수호신들의 죽음에 대한 관찰은 비현실적이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현상을 목격하고 보고하고 기록한 것은 보통사람들의 몫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언자인 제관들의 고유한 권리요, 또한 의무였다. ●호국사찰의 승려들, 불안한 미래를 보다 삼국에 불교가 전파된 뒤로 각 나라엔 호국사찰(護國寺刹)이 들어섰다. 기존의 산신과 수신에 더하여 부처님의 가호가 나라의 융성을 보장해주리란 믿음이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 조짐이 호국사찰에도 나타났다. 백제의 경우,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의 탑이 벼락을 맞는가 하면, 백석사(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왕흥사(王興寺)에선 배의 돛과 같이 생긴 것이 강물을 따라 절간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목격됐다. 왕흥사 승려들은 이런 모습을 함께 지켜봤다 한다. 정치적 예언은 본래 신성한 왕과 무당들의 독점적 영역이었으나, 역사 속에 새로 등장한 일관(日官)들, 불가(佛家)의 스님들에게도 예언의 권능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런 고대 예언자들의 직업적 계보가 이어져, 조선후기엔 술사(術士)와 스님들이 정감록의 생산과 유통을 주로 담당하게 된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3)정감록과 혹세무민

    ‘정감록’ 때문에 민중이 울었다. 정감록은 민중의 희망이었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정감록을 이용해 자기 한 몸의 안락과 치부(致富)를 꾀하는 못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정감록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배층의 평가는 늘 부정적이었다.‘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잣대로 삼은 것이었다.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상당수 민중이 정감록 때문에 재산을 잃거나 심지어 목숨을 앗기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백백교(白白敎)의 아전인수(我田引水) 일제시대 백백교 사건은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대표적인 사례다.1937년 백백교 간부 150여명이 집단살인사건으로 검거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조사 결과 핵심 간부 18명이 최소한 신도 314명을 살해한 사실이 확인됐다. 특히 이경득은 61회에 걸쳐 166명을 살해했고, 문봉조도 129명이나 되는 교인을 죽여 암매장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백백교는 교단 이름부터 ‘정감록’을 빌렸다. 정감록에 보면 말세에 사람이 다 죽은 뒤 “사람의 종자를 양백(兩白)에서 구한다.”고 했다.‘양백’은 곧 백백(白白)으로 풀이된다. 백백교에서는 이 구절을 끌어다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오직 백백교도뿐이라고 내세웠다. 또 한 가지. 정감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라도운봉두류산(全羅道雲峰頭流山) 성인출어함양림중(聖人出於咸陽林中)”이란 대목이 있다. 글자 그대로는 “전라도 운봉에 두류산 즉, 지리산이요, 성인은 함양 땅 수풀 속에서 나온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백백교에선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앞부분은 “전(全)씨가 도(道)를 열(라)고 운(運)을 만(逢)난다.”고 보았다. 뒷부분은 성인이 출현하기로 예정된 ‘함양림’이란 장소를 백백교가 창시된 함(咸)경도 운림(林)면 마양(陽)리로 풀이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 있긴 하지만 이쯤 되고 보면 정말 기발한 해석이었다.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억지 춘향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많은 한국 사람들은 백백교 식의 정감록 해석을 환영했다. 그들은 도리어 기상천외한 해석에서 비결의 힘과 매력을 발견했다. 그만큼 순리대로 살기가 어려웠다는 뜻이다. ‘백백’이란 “한 가지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만들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구호를 요약한 것이기도 했다.‘흰 것’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계룡산 바위가 희어진다.”는 구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흰 바위란 전통적으로 미륵을 상징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 가지 흰 것”은 정씨 진인이 출현할 시기이자 미륵부처나 다름없는 백백교의 교주를 가리켰다. 요컨대, 새 종교 백백교와 더불어 이 세상이 완전히 바뀐다는 선동적 믿음이 구호에 담겨 있었다. 백백교의 남자 신도들은 “백백백의의의적적적”이라는 주문을 줄곧 외워댔다. 그러면 무병장수하고 말세에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들은 말세에 서양은 불로 망하고, 동양은 물로 망한다고 했다.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본래 기독교 성경에 나와 있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의 본고장 서양은 불로 망한다고 보았다. 동쪽은 서쪽의 반대라 물에 약하다고 풀이했다. 중요한 점은 백백교를 믿는 사람만이 무사히 살아 남는다는 주장이었다. 교단 측은 신도들에게 일단 한국의 53개 성지에 들어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다 말세의 심판이 닥치면 곧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가라 했다. 금강산엔 ‘피수궁’(물의 재난을 피하는 궁궐)이 있고 거기서 잠시 기다리면 백백교의 교주 대원님이 하강해 신도들을 이상향으로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백백교의 이상향은 동해의 섬이었다. 동해 바다 한 가운데 3000리나 되는 영주란 섬이 있다고 했다. 그 섬엔 봉황과 기린이 살고 불로초도 있다. 신선처럼 살고 싶은 백백교 신도는 누구나 그리로 인도된다. 그러나 만일 부귀영화를 한껏 누려보고 싶은 이라면 계룡산으로 안내된다. 백백교의 수장인 대원님이 새 세상의 왕이 되어 교단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신도들에게 관직을 준다고 했다. 교단에 재산을 많이 헌납한 사람은 당연히 큰 벼슬을 받게 된다. 이런 감언이설로 백백교 지도층은 세상 삶에 지친 민중을 유혹했다. 백백교를 세운 이는 가난한 농부 전정운(全廷雲)이었다. 본래 동학교도였던 그는 1900년 평안남도 영변군 근산면 화현동에서 백도교(白道敎)란 간판을 걸었다. 얼마 뒤 그는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교명을 백백교로 바꿨다. 그는 1904년 6월 사상 초유의 대홍수가 한국을 휩쓸어 말세가 된다면서 이상향에서 살고 싶으면 무조건 백백교에 입교하라고 선동했다. 물론 전정운의 예언은 빗나갔다. 그럼에도,1905년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는 등 세상은 무척 어수선해졌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백백교의 거짓 예언을 뿌리치지 못했다. 교주 전정운이 늙어 죽자 아들 전해룡이 뒤를 이었다. 전해룡은 1923년 경기도 가평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교당을 지었다. 교단에 대한 일반의 신뢰를 높이려는 술책이었다. 그는 평소 단식을 잘했다.20일 동안 단식한 뒤에도 평소와 같은 기력을 과시해 신도들 사이에 신비감을 조장했다. 이 역시 28수라는 그의 허다한 고등 사기수법의 하나였다. 전해룡은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해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했다. 그뿐 아니었다. 만일 신도들의 자녀 가운데 아직 미혼인 여성이 있으면 성적 노예로 삼아 착취했다. 유부녀라 해도 용모가 아름다우면 마음껏 유린했다. 전해룡은 변태성욕자가 분명해 자기의 정사(情事) 장면을 숱한 여신도들이 지켜보게 했다. 그는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불렀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신도가 있으면 이상향에 보낸다며 산으로 끌고 가 남몰래 살해했다. 살인을 담당한 간부들은 벽력사(霹靂使)라는 명칭으로 부를 만큼 백백교 지도층은 집단광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살인극은 무려 14년간 지속됐다. 만일 교주 전해룡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교단을 배신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는 경우는 물론 간부나 첩이라도 태도가 변한 기색이 보이면 즉시 살해되었다. 또한 신도들은 재산을 전액 헌금하게 돼 있었는데, 이를 조금이라도 어길 경우 생매장 당했다. 엄청난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백백교는 무사했다. 교단 간부들이 해마다 거액을 상납했기 때문에 일제 경찰은 눈을 감아준 것이었다. 그러다 1937년 우연한 일로 백백교의 비리가 세상에 폭로된다. 백백교 사건의 충격과 파장은 컸다. 소설가 박태원은 ‘금은탑(金銀塔)’이라는 제목으로 이를 소설화해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시기 한국의 민중은 정치에 실의하고 생활에 궁핍했다. 근대 한국 민중의 불안한 사회심리를 이용해 우후죽순 격으로 뻗어난 것이 바로 백백교 따위의 악질적인 사이비 종교단체였다.1930년 6월 현재 정체불명의 그런 사이비 단체가 55개, 신도 수는 10여만명을 헤아렸다(동아일보 1930년 6월16일자 사설). 백백교 같은 사이비 종교단체는 암울한 시대배경 속에서 자라난 독버섯이었다. ●정감록을 이용한 재물 뺏기 ‘정감록’을 이용한 사기행각은 식민지 시기 사회 전반에 꽤 널리 퍼진 병리현상이었다.1930년께 김창하라는 사람은 ‘천병만마’(千兵萬馬·무수한 군대)를 격퇴할 해인(海印)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병통치약이라며 가짜 약을 판매하다가 검거됐다. 비슷한 무렵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에 살던 경호창과 최성기는 태백산 기슭의 벽촌을 돌아다니면서 곧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보천교도 외에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입교하라고 강요했다. 물론 입교 시에는 소정의 돈을 납입하게 돼 있었다. 경호창 등은 유언비어를 살포한 죄로 20일의 구류처분을 받았다(중앙일보 1932년 3월16일자). 이런 일은 식민지 사회에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비슷한 사건은 조선 후기에도 많았다.1826년(순조 26) 충청도 청주에서 정상채라는 사람이 붙들려 처벌을 받았다. 그는 여러 고장을 들락거리며 나이와 이름을 멋대로 속였다고 했다. 도술을 부린다고 거짓을 늘어놓고 ‘환묘문(幻妙門)’과 같은 도술 책을 친구에게 주어 타인의 물건을 빼앗게 했다. 마침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그것은 전주곡에 불과하며 진짜 난리는 얼마 뒤에 일어난다며 민심을 선동했다. 그러면서 정상채는 진인이 이미 섬에 와 있다고 황당한 말을 꾸미는 한편 진인의 당에 가입하려면 이름을 직접 서명하라고 사람들을 졸라댔다. 뿐만 아니라 섬에 있는 진인의 군대에 군복을 지어 입힌다며 군자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모은 돈을 그가 착복했음은 물론이다. 정상채의 동료 박형서도 비슷한 혐의로 체포돼 사형을 받았다. 주된 죄목은 남의 재물을 속여서 빼앗고 ‘흉언(凶言)’ 즉 거짓 소문과 예언을 지어내 인심을 소란케 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전쟁이 박두했다는 둥, 해도(海島)에 진인이 있다는 둥 거짓 예언을 퍼뜨리며 자기가 살길을 아노라 했다(실록·순조 26년 10월27일 을해). 비슷한 예는 정말 많았다. 박형서나 정상채 같은 사람들을 변호하는 입장에서는 그들은 조선왕조를 전복시키기 위해 군자금을 마련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변호인들은 왕조사회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면서 ‘범인들’이야말로 실은 ‘혁명아’였다고 강변하겠지만, 과연 그랬을까? 남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군자금을 생활비와 용돈으로 소비한 사람들이 과연 혁명아일지 의문이다. 그들이 말한 진인은 결국 환상적인 존재였을 뿐이다. 그들에게 금품을 건네준 사람들의 기대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한마디로 그들은 사기꾼이었다. ●홍경래의 난 그런데 어떤 경우엔 도무지 이것이 ‘혹세무민’인지, 사기행각인지 또는 진정한 의미로 민중의 투쟁이었는지를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결코 백백교와 동렬에 놓일 성질은 아니지만 경계 짓기의 어려움을 확인하기 위해 홍경래의 난을 예로 들어 보겠다. 결코 홍경래 난을 매도하려는 뜻은 아니란 점을 다시 강조한다. 홍경래 난은 1811년(순조 11) 12월18일 시작됐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을 장악했다. 그러나 전열을 재정비한 관군의 반격을 받고 곧 정주성에 갇혀 버렸다. 정주성 싸움은 이듬해 4월19일까지 제법 오래 계속됐지만, 결국 관군의 승리로 끝났다. 장기간 싸움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란군 측은 여러 차례 격문을 내걸었다. 격문엔 정감록이 예언한 정진인(鄭眞人)도 언급됐다. 서북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하라, 세도정권의 가렴주구는 악행이라는 등 그 시대 서북 사람들의 고민과 희망도 모습을 드러냈다. 참고로 정감록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면 대개 이런 식이었다. “지금 나이 어린 국왕과 주위의 간악한 무리들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다. 그런데 다행히도 세상을 건질 성인이 청북 선천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성인은 나서부터 비범하신데 평안도 지역은 성인의 고향이라 직접 손을 대지 못하시고 우리들에게 명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하셨다.” 정감록이 예언한 새 왕조의 창건자가 이미 홍경래의 곁에 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로써 반란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인식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격문을 짓게 한 홍경래 자신은 각종 병서(兵書)와 술서(術書), 특히 ‘정감록’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는 풍수지리에도 능통해 전국을 유람했다고도 전한다. 홍경래 일당은 정감록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그런 까닭이겠지만 난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에도 사람들은 정감록과 해도 진인에 대해 더욱더 이야기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홍경래 난은 무려 10년 동안 사전에 준비됐다고 했다. 조직적인 반란이었던 셈이다. 풍수 전문가 홍경래를 비롯해 우군칙, 김사용, 김창시 등 유랑지식인 또는 몰락 양반들이 반란군의 지도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중국과 무역을 통해 벼락부자가 된 이희저의 가산 다복동의 사저를 거점으로 삼아 평안도 각지의 부자들과 연합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운산에 광산을 열어 빈농과 유이민 등을 모아 훗날 군사로 동원했다. 이 당시는 청나라와 국경무역이 활발했을 때라 평안도 출신 가운데는 이희저의 경우처럼 대상인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수요에 맞춰 평안도엔 유기(鍮器) 등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광산 개발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다. 홍경래 일파는 이런 시대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이 기회에 서북지역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서울로 진격해 일거에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연구자들이 지적하듯 홍경래를 지지한 계층은 민중이라기보다는 평안도 각지의 부호들이었다. 좌수와 별감을 비롯한 향임(鄕任·행정보조집단)과 별장(別將)과 천총 등 무임(武任·군사 및 치안담당자) 가운데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이 홍경래를 후원했다. 민중의 지지는 정주성을 지킬 때 엿보이는 정도였다고 한다. 본래 유랑지식인이었던 홍경래나 자칭 제갈공명이라 불렀던 우군칙은 반란을 모의하는 과정에서부터 갖은 방법으로 부자인 이희저를 포섭하는 데 주력했다. 결과적으로 이희저는 반란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책임지게 됐으며, 비슷한 처지에 있던 평안도 유지들을 후원자로 끌어들인다. 그런 점에서 홍경래 난은 일부 유랑지식인과 상층부 인사들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홍경래 등은 서북지방의 숙원이던 지역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했고, 그 점에 있어 해당지역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만했다. 하지만 일반 민중과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평안도의 부호들이 반군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점으로 보아 실상은 평안도 지배층의 정치적 이해를 반영하는 반란이었다. 실제로도 격문을 분석해 보면 소농과 빈농 등 하층민의 요구를 반영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1894년의 동학농민운동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만일 이 점을 확대 해석한다면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지배층이 중앙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홍경래 등이 자주 거론한 ‘정진인의 출현’은 민중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중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홍경래 난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혹세무민’이었다. 왕조의 입장은 그렇다 해도 반란이 실패로 끝난 뒤 한때 홍경래 일파를 적극 지지했던 평안도의 부자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한마디로 판단하기는 참 어려운 문제다.‘사물은 하나지만 해석은 구구하다.’라 했던 어느 역사가의 주장이 문득 뇌리에 떠오른다. 홍경래의 난은 복잡했다 해두자. 어쨌거나 틀림없는 한 가지 사실은 때로 정감록은 민중에게 고난과 아픔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시대가 어려울 때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했다. 이 점을 인식한 듯 근세의 종교지도자 소태산은 이렇게 말했다.“근래의 인심을 보면 사술(邪術)로 대도를 조롱하는 무리와 모략으로 정의를 비방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가득하여, 각기 제가 무슨 큰 능력이나 있는 듯이 야단을 치고 다니나니, 이것이 이른바 낮도깨비니라. 그러나 시대가 더욱 밝아짐을 따라 이러한 무리는 발 붙일 곳을 얻지 못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자살로 마감한 ‘유랑 인생’

    남북한 모두에 적응하지 못하고 버림받았던 40대 남자가 결국 구치소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법무부는 8일 “밀입북을 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모(43)씨가 지난달 23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목을 매 숨졌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지난 4월 박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고 8일 첫 공판을 받을 예정이었다. 박씨는 지난달 22일 구치소 화장실에서 자살을 시도, 순찰 근무자에게 발견돼 외부병원으로 긴급 이송됐지만 다음날 사망했다. 박씨의 시신은 거둬줄 가족이 없어 종교단체에서 인도해 갔다. 박씨는 1984년 7월 자신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계모를 살해한 뒤 “차라리 북한에 가서 사는 게 마음 편하겠다.”고 생각해 월북을 시도했다. 그러나 박씨는 곧 붙잡혀 살인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1997년 9월 출소한 박씨는 건설노동자, 이삿짐센터 인부 등을 전전했지만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지난해 11월 인력사무소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이모씨의 제의로 중국을 방문한 박씨는 다시 북한으로 넘어갈 생각을 했다. 박씨는 지난 2월1일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월북했다. 박씨는 한달간 북한에 머물면서 국내 정치상황, 주한미군 현황 등을 북측에 알려줬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지난 3월 박씨를 추방, 중국 정부로 넘겼다. 박씨는 지난 4월 중국에서도 강제 추방돼 결국 국가정보원에 신병이 인도됐다. 한편 지난 1995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 동안 전국 교정시설에서 자살한 수용자는 모두 85명으로, 해마다 평균 8∼9명의 수용자가 목숨을 끊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2) 정감록과 천주교의 대화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2) 정감록과 천주교의 대화

    정감록은 조선후기 한국에 전파된 천주교와도 만났다? 서쪽에서 들어온 새 학문이라 당시엔 서학(西學)으로 불린 천주교와 정감록의 관계에 관심을 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파고 들어가 보면 천주교와 정감록의 관계는 쌍방향 교류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정감록에 담긴 ‘해도진인(海島眞人)’이란 관념을 빌려갔다. 또한 ‘정감록’처럼 편년체 예언서 형식을 차용해서 ‘니벽전’이란 천주교신자들만의 예언서를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정감록 신앙집단은 ‘요한계시록’에 보이는 말세관에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발견했다. 얼핏 생각하면 서로 대립적이었을 것만 같은 정감록 신앙과 천주교 신앙 사이에 양방향의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관심거리가 될 만하다. 알다시피 18∼19세기 한국의 천주교는 일종의 비밀 종교단체였다. 정감록 신앙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천주교회에 호응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민중이었다. 정감록의 경우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양자는 저마다 종교 철학적 출발점은 달랐지만 신앙집단으로서 사회적 구성이 엇비슷했고, 그들이 처한 정치 문화적 배경도 같았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조선 후기 천주교와 정감록 신앙은 이를테면 이란성(二卵性) 쌍생아와도 같았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해도진인(海島眞人)으로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정감록과 서학의 미묘한 관계를 증명하는 사건 하나가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정감록에서 말하는 해도진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단 이야기다. 알고 보면 이미 1794년부터 주문모 신부는 국내에 잠입해 전교활동을 벌였다. 그 당시 국왕 정조는 천주교를 그다지 심하게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세는 나날이 확장되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제사를 거부했기 때문에, 유교 국가인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이를 국가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하였다. 1801년 정월, 정조가 세상을 뜨고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섭정을 맡은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지배층의 정서를 대변하듯 천주교를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소동을 겪은 끝에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신자 100여명이 처형되고 400명가량이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지도급 천주교 신자들 및 진보적인 학자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사실 신유박해는 천주교세의 팽창에 불안을 느낀 지배층의 종교탄압인 동시에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의 일부이기도 하였다. 신유박해에 관한 ‘실록’ 기사를 살펴보면 문제의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그 대강을 간추려 보겠다. 당시 체포된 사람 중에 김건순이란 서울 양반이 있었다. 그는 집안도 좋고 재산도 많아 어느 모로나 부족함이 없었는데도 방술(方術)에 관한 책들을 유독 좋아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이를테면 정감록과 같은 비결이나 도술에 관한 책을 늘 끼고 살았다. 자연히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 중엔 천주교 신자들도 끼어 있었다. 신자들의 소개로 그는 주문모 신부를 만났다. 김건순의 눈에는 주문모 신부가 도사 중에서도 출중한 ‘이인(異人)’으로 비쳤다. 늘 주문모를 성심껏 모시던 김건순은 주문모에게 함께 해도(海島)로 들어가자고 간청했다. 섬에 들어가서 무기를 마련하고 큰배(巨艦)를 만들어 중국으로 쳐들어가자고 했다. 병자호란 등 청나라로부터 받은 원한을 씻어보자는 것이었다. 장차 진인이 해도에서 나와 세상을 평정한다는 정감록의 내용에 공명했던 김건순은 이런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주문모는 이를 거절했다. 김건순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주문모에 대한 그의 기대는 사그라지지 않아 결국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당시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 중에서 김건순은 지적 수준으로나 재력 면에서 최상위층에 속했다. 그런 그조차 해도에서 진인이 나와 세상을 바꾼다는 정감록의 예언에 매달려, 주문모를 진인으로 상정해 거사를 꿈꾸었던 것이다. 조선의 관헌 앞에서 털어놓은 말로는 장차 청나라를 공격할 생각이었다고 했지만 정말 그랬을지는 의문이다. 하필 가까운 조선을 놔두고 머나먼 청나라까지 쳐들어간다는 것이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역시 천주교 신자였던 김이백의 언사는 더욱 심했다. 그는 서울 사는 친척 김건순과 천안 사는 천주교 신자 강이천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편지를 전해주곤 했는데, 정감록 풍의 예언을 많이 지어냈다. 예컨대 “바다 가운데 품(品) 자 모양의 섬이 있는데, 그곳에는 군사와 말(兵馬)이 무척 날래다.”고 했다. 이런 말도 했다 한다.“바다 가운데 진인(眞人)이 있다. 진인은 육임(六壬)과 둔갑(遁甲) 즉, 점과 도술에 능하다.” 당국의 조사 결과, 강이천과 김이백은 그런 예언을 이용해 남의 재물을 빼앗으려 한 적도 있었다. 달리 말해, 자기들이 섬에 있는 진인의 군대와 잘 통하므로 미리 군자금을 제공하면 장차 좋은 수가 생긴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강이천이라면 꽤 유명한 선비였다. 일찍이 진사 시험에도 합격한 적이 있는 지식인인데, 그 또한 정감록의 내용과 논리를 빌려 포교의 기회를 노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강이천 등은 정감록 비결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단 점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천주교를 전교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니벽전’, 초기 천주교 지도자 이벽의 예언서 19세기 중엽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정감록을 모방해 일종의 신앙 비결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이벽선생몽회록(李檗先生夢會錄)’이란 이름의 필사본이 문제의 비결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알려주는 책이란 뜻에서 ‘새벽젼’이라 부르기도 하고, 예언자의 이름을 따라 ‘니벽전’이라고도 한다. 알다시피 정감록은 예언자 정감의 이름을 따서 붙인 책이름이다.‘니벽전’은 천주교 신자 정학술이란 선비가 천주교 초기의 거물인 이벽(1754-1786)을 사후 60년만인 1846년 6월 14일 밤 꿈에서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록한 대화체로 되어 있다. 이 책은 대화체란 점에서도 정감록을 연상시킨다. 비결에 예언자로 등장하는 이벽은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거물급 지도자였다. 그는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뒤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셋집을 빌려 천주교 교리 연구와 묵상에 전념하였다.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그는 전도에 앞장서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형제들과 서울의 중인층인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에게도 천주교를 전했다. 당대의 석학 이가환, 이기양 등과 교리논쟁을 벌어졌을 때도 그들을 압도할 만큼 교리에 능통하였다. 이벽의 천주교 이해는 ‘성교요지(聖敎要旨)’란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마테오 리치를 비롯해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이 하느님 을 천주(天主)나 천제(天帝)라고 불렀던 것과는 달리 상제(上帝) 또는 상주(上主)라고 불렀다.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아울러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등 유교적 윤리가 천주교의 교리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이벽이 그리던 하느님 나라는 유교에서 말하는 고대의 성인(聖人), 성군(聖君)의 정치와 일치했다. 그는 인간의 마음에 내재하는 하늘의 본성(天命)을 탐구해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룩하는 데 신앙의 목적을 두었다. 이벽의 천주교는 다분히 유교적 천주교였다. 그는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쓴 정약종(丁若鍾·1760-1801)과 더불어 18세기 조선후기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였다. 공교롭게도 ‘니벽전’은 이벽을 예언자로, 정약종을 저자로 설정해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 정약종이 “정유년(1777년·정조1)”에 기록했다고 적혀 있는 관계로, 사람들은 이 책을 정약종이 지은 종교 소설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조사한 바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미 1801년 신유박해 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정약종이 어떻게 1846년 정학술이란 사람의 꿈속 일을 기록할 수가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 틀림없다. 하지만 정약종을 저자로 가탁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로 말하면 의금부에 잡혀 가서 심문을 받을 때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바로 임금이요, 가정에 큰 원수가 있으니 바로 아비다(國有大仇君也 家有大仇父也).”라고 하여, 유교적 사회질서를 한마디로 질타했다. 더욱이 그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다 죽은 사람이므로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위대한 신앙의 모범이었다. ‘니벽전’은 이와 같은 사람의 붓을 빌려 천상선인(天上仙人) 이벽이 천주교 신앙에 관한 말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소재를 훑어보면, 우주창조의 원리, 낙원추방과 예수의 구원, 유·불·도의 황당함, 조상제사와 우상숭배의 잘못된 점, 신유옥사와 천주교의 마지막 승리, 하느님의 최후심판이 거론된다. 그런 다음 이벽은 정학술에게 천주밀험기(天主密驗記)를 주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두말할 것 없이 이 책의 목적은 천주교도들에게 널리 존경을 받는 이벽 같은 인물을 내세워 천주교 박해사건을 예언함으로써, 온갖 박해 속에서도 신자들이 신앙을 더욱 강화하도록 고무 격려하는 데 있었다. 책은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반드시 알아야 될 교리에 대한 설명이다. 둘째, 하느님과 예수를 굳게 믿고 끝까지 제사를 거부하라는 교회의 명령이다. 셋째, 한국천주교회에 닥친 박해와 환란은 미리 예정된 것이지만 이제 곧 끝난다고 예언한다. 신유박해를 비롯해 19세기 전반의 숱한 박해사건을 연대기식으로 적어나가는데, 기록방식이 편년체란 점에서 정감록을 완전히 닮았다. 참고로, 이벽의 입에서 떨어진 마지막 예언은 이러했다.“병오 이후로 다음 세상이 되어 죄 있는 자는 모두 멸망하며 착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어갈 때가 오느니라.” 여기서 병오년은 1846년을 가리킨다. 이 예언에 따르면,19세기 중엽 세상은 종말을 맞이해 최후의 심판이 열린다. 죄지은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고, 착한 천주교 신자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를테면 지상천국이 열릴 거라고 했다. 이런 천주교 신자들의 예언에서 나는 19세기말에 등장한 동학의 ‘후천개벽설(後天開闢說)’과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동학에서도 새 세상이 열리면 동학의 가르침대로 수련을 쌓은 군자(君子)들이 지상천국을 맡아 다스린다고 보았다. ●정감록에 스며든 ‘요한 계시록’ 물론 동학을 설립한 최제우가 말한 후천(後天)의 개념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중국 고대부터 있었고, 우리 역사에서도 이미 고려 인종 때 선천과 후천이 곧 바뀔 거라는 예언이 나오기도 했다. 설사 그렇다 해도 동학과 고대 중국의 후천관은 차이가 있다. 동양 고대의 선·후천 교대설과는 달리 동학에는 ‘최후의 심판’이란 요소가 감지된다. 이 ‘심판’이란 것은 다분히 기독교적인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에 등장한 예언서에도 아직 찾아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럼 ‘정감록’은? 내가 보기에 조선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에는 ‘심판’을 연상시키는 구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감결’에서 이심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돼 있다.“세 사람이 마주하였으니 못할 말이 어디 있겠나. 신년(申年) 봄 삼월, 성세(聖歲) 가을 팔월에 인천(仁川)과 부평(富平) 사이에 밤중에 배 1000척이 정박하고, 안성(安城)과 죽산(竹山) 사이에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여주(驪州)와 광주(廣州) 사이에 인적이 영영 끊어지고, 수성(隨城)과 당성(唐城) 사이에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한강 남쪽 백리에 닭·개의 소리가 없고, 인적이 영영 끊어질 것이다.” 이번의 신문연재에서 이미 한 두 차례 언급한 구절이라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세에 전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는 메시지는 다시 강조할 만하다. 이와 같은 비극적 종말은 ‘요한계시록’을 뇌리에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정감록의 저자가 반드시 천주교 신자였다는 뜻은 아니다. 17세기 이후 한국사회는 직접 간접으로 천주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고 있었다는 점을 우선 인정해야 하겠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는 비록 소수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존재했다. 더욱이 중국에는 서양선교사들이 파견되어 있는 상태였다.18세기 후반엔 한국에도 천주교회가 지하조직으로 운영되었다. 그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최후심판’과 같은 천주교의 기본교리라든가 몇몇 유명한 성경구절은 한국사회에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설사 명확한 증거를 댈 순 없을지라도, 천주교가 정감록이란 민중의 신앙에 끼친 영향은 적어도 논리적인 면에선 개연성이 인정돼야 한다. 요한 계시록이 상정하는 말세의 비참한 모습은 정감록의 여러 곳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정감록의 일부라 할 ‘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에도 최후의 상황이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다.“살아 있는 백성들이 달아나 숨으니, 삼강(三綱)이 없어져 끊어졌네. 하늘의 재앙이 계속하여 혹독하니, 벌레의 독을 무엇이라 말하리. 부자가 먼저 죽으니, 아무리 뉘우쳐도 미치지 못하리. 우물 가운데 물이 연하여, 자미(紫微)에 저녁 무지개가 떴네. 다시 들러서 동쪽으로 나뉘니, 나라에 변괴가 있고, 상사가 참혹하네. 남쪽과 북쪽 군사의 조짐이 불과 같이 점점 번져오네. 집 위의 토운(土運)이 하늘의 재앙에 때로 변하네. 옛날에도 드물고 오늘날에는 없는 일, 굶주려서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어, 저마다 서로 짓밟고 있네. 사람의 목숨을 해치니, 산 자가 몇이나 되리. 또 겸해서 흉년이 들어, 쌓인 시체가 구렁을 메우네. 벼락같은 화운(火運)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네. 먼 방향에서 움직여 화서, 바람과 구름이 어두우니 장차 다시 어찌한단 말인가.” 이처럼 정감록은 ‘최후의 심판’이 행해질 때, 그것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보았다. 전염병, 흉년, 전쟁은 그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 점은 ‘요한계시록’을 비롯해 신약과 구약의 경우에도 똑같다. 한 가지 나로선 무척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정감록에 보이는 말세의 모습이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불교적 세계관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현재도 도솔천에서 수행 중이라고 전하는 미륵보살이 이 세상에 내려와 건설할 용화세계(龍華世界)는 피를 흘리는 전쟁 따위를 전제로 삼지 않는다. 불교의 이상향인 용화세계를 선도할 전륜성왕은 절대 무력에 호소하지 않고 모든 적의 항복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정감록이 기술한 참혹한 말세는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것, 다분히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이다. 좀더 생각해 보면 문화란 결국 상이한 계층, 종교, 언어권의 소통으로 풍요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주교와 정감록의 만남은 나쁘게 볼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고, 바로 그런 만남이 있었기에 한국 민중의 문화는 좀더 풍요로워졌다고 생각해야겠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대일본제국의 애국적 지식인’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호소이 하지메란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한일합병(1910년)을 전후해 ‘동경아사히신문’과 ‘한일전보통신사’ 기자로 다년간 한국에 체류했다. 갓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호소이는 흥미를 느꼈고 나름대로 많은 ‘연구’도 했다. 그런 호소이에게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은 전혀 뜻밖의 사태였다. 무지렁이로 보였던 한국인들이 수백만 명씩이나 길거리로 뛰쳐나와 독립을 요구할 줄 그는 미처 몰랐다. 한낱 정치군인에 지나지 않는 조선총독이 그걸 짐작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당한 한국전문가 호소이 자신도 사태를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독립만세운동이 좌절되자 한국엔 예언서 ‘정감록’이 더욱 인기를 끌었다. 대한독립이 박두했다는 둥, 신천지가 열릴 거라는 둥 갖가지 소문과 예언이 한반도를 뒤덮을 지경이었다. 특히 1921년부터는 계룡산을 중심으로 숱한 신흥종교단체들이 등장해 위세를 떨쳤다. 겉으론 종교를 표방했지만 은연중 독립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조선총독부는 정감록 비상이 걸렸다. 1922년 겨울, 호소이는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부탁을 받았다.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동경의 자택 서재에 틀어박혀 호소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반도는 우리 대일본제국에 무엇인가. 제국의 용맹스러운 장졸(將卒)들이 목숨 바쳐 강적 청나라도, 러시아도 연달아 무찌른 다음 어렵게 얻어낸 제국의 새 영토가 아닌가. 저 버러지 같은 한국 놈들은 천황폐하의 신민이 된 영광을 모른다. 놈들은 감히 독립을 바라고 있다. 훈련된 군대도 총칼도 없이 맨주먹으로 일어서려는 무지막지한 저들의 맨주먹을 쇠뭉치로 둔갑시키는 것은 독립에 대한 부질없는 열망이다. 거기 불 붙이는 부싯돌이 바로 정감록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정감록을 처단할 것이다. 나 호소이로 말하면 천황폐하의 뜻에 언제나 기꺼이 순종하고 순수한 대일본제국 신민의 고귀한 혈통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는 위대한 제국의 충량한 신민이 아닌가. 우리 대일본제국으로 말하면 단일하고 순수한 혈통이 천만대를 두고 이어져온 아름다운 나라. 그에 비할 때 이른바 저 한국 놈들은 어떤가. 놈들은 우선 생리학적으로 열등하다. 혈액만 하더라도 한국 놈들의 피는 ‘거무칙칙하고 더럽다.’ 그렇기 때문에 이조 500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이 살상됐지만 나라꼴은 늘 엉망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 놈들은 유전인자 자체가 불순하고 열등하다. 따라서 놈들에게 밝은 미래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천황폐하의 자애로운 품속에 있을 때만 그들은 행복을 바랄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나는 이미 두 권의 저서에서 명확히 입증했다.‘조선문화사론(朝鮮文化史論)’과 ‘조선 문제의 근본적 해결(朝鮮問題の根本的解決)’이 그것이다. 한국에 대한 나의 전문적인 연구는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바쳐질 것이다. 실용성이 없는 학문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대일본제국의 발전을 위해, 무지하고 악랄한 한국 놈들의 순화를 위해 나의 저술은 두고두고 쓰일 만한 것이다. 탁상공론으로 걸핏하면 양심을 들먹이는 비겁하고 위선적인 놈들이 있어 훗날 나 호소이를 대일본제국의 어용학자(御用學者)라고 불러도 좋다. 제국의 영예를 위한 나의 일편단심은 그럴수록 더욱 밝게 드러날 것이다. ●정감록을 죽이는 묘책 호소이는 묘안을 찾기 위해 좀더 생각했다.‘도무지 정감록이란 무슨 책이냐. 조선시대 위정자들도 몹시 두려워했던 책이 아니냐. 위정자들은 정감록을 소지하거나 퍼뜨리는 일체의 행위를 범법 행위로 간주했다. 그런데 혹독한 금압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널리 퍼져나갔다. 지금 반도의 덜떨어진 한국 놈들이 감히 독립을 바라는 것도 다 그놈의 정감록 때문이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공개하라. 그렇다, 금단의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는 방법은 공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감록은 신비함을 잃게 된다. 신비성을 잃어버린 정감록이라면 이미 반쯤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또 하나. 기왕에 공개할 바엔 정감록의 정본(正本)을 만드는 거다. 바로 이 호소이가 대일본제국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할 정감록의 정본을 결정한단 말이다. 총독부에서 수집해 놓은 정감록의 이본들을 자세히 살펴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 선동성이 별로 없는 텍스트를 골라 공개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 텍스트에 살짝 손을 댈 수도 있다. 아주 심하게 손을 대면 조작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영악하고 의심 많은 한국 놈들을 상대로 하는 일인 만큼 더욱 주도면밀해야 한다. 나는 정감록을 순화시킬 뿐이다. 이것은 변조나 개작이 아니다. 나는 대일본제국과 천황폐하를 위해, 한반도와 한국 놈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정감록을 편집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잊지 말아야 될 일이 또 있다. 이렇게 교묘한 수단을 부려 김을 빼놓더라도 한국 놈들은 순화된 나의 정감록을 다시 개악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할 우려가 있다. 놈들은 워낙 피가 더럽기 때문에 제멋대로니까. 그들의 망령된 행위를 막기 위해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을까. 그래, 예방주사를 놓자! 정감록은 이래서 진짜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런 식으로 계몽적인 비평을 잔뜩 써 가지고 독자 놈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다. 정감록의 대가 호소이가 만든 정감록 정본의 맨 앞에 실린 비판을 읽게 하자. ●동경판 정감록에 대한 불만 대일본제국의 충량한 신민 호소이는 이미 수집된 정감록 이본들을 널따란 책상 위에 펼쳐놓고 수술을 시작했다. 일제는 이미 오래 전에 광개토대왕비문까지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변조했다. 정본이 따로 존재할 리도 없던 정감록을 개작하는 것쯤이야 호소이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그의 솜씨와 애국심은 참으로 대단해 불과 몇 달 만에 ‘정감록비결 집록’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한국인들에겐 억압의 상징인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정감록을 죽이기 위한 음모가 결실을 맺은 날은 1923년 2월15일이었다. 이것이 사상 최초의 정감록 인쇄본이다. 도쿄판 정감록은 인기가 대단했다. 초판으로 몇 부를 찍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출간된 지 약 보름 만에 제3판을 제작할 정도였다. 도쿄판은 아마 일본에서도 상당히 팔렸겠지만 주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소비됐을 것이 뻔한 이치였다. 호소이가 바란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도쿄에서 만든 정감록으로 한국의 정감록 세계를 평정한다는 목표는 어쩌면 단시일 내에 달성될 듯도 하였다. 도쿄서 들어온 정감록이 잘 팔려 나가자 한국의 출판계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정감록을 찍어내면 돈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각에선 호소이의 민족성 비판에 강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내놓고 맞싸울 형편은 안 되었지만 정감록까지도 ‘그 잘난’ 일본인의 손으로 다듬어진 책을 봐야 되는가 하는 강력한 반발이 없지 않았다. 동경판의 뚜껑을 열어본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호소이는 무지한 한국 사람을 계몽한답시고 무려 50쪽이나 되는 정감록 비평을 썼다. 정감록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치고 나아가 한국 사람의 타고난 ‘야만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 논지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한국인들은 태초부터 불합리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련한 한국 민족의 정신적 미성숙은 그들이 정감록과 같은 미신에 맹목적으로 빠져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이렇게 유치하고 야만적인 성격이 한국민족의 본성이다. 국제적으로 저열한 한국의 민족성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한반도의 역사 및 지리적 조건이 빚어놓은 결과다. 당시 유행하던 지리적 결정론을 빌려 호소이는 ‘미개한’ 한국인을 질타했다. 귀신을 숭배하고 점치기를 좋아하는 풍습은 당시 일본사회에서 더욱 성행했다. 그러나 일본민족의 위대성을 맹신한 호소이의 눈에는 그런 현상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야만적’인 한국인까지도 호소이는 마음속 깊이 사랑했던 것일까. 그는 하루바삐 정감록 신앙에서 한국인을 구출하여야만 된다고 믿었다. 합리적이고 발달된 현대 일본사회의 참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한국인은 정감록 신앙을 포기해야 된다. 이것이 호소이의 변(辯)이었다. 그러나 1923년 동경판 정감록을 간행한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해 정감록이라는 정치적 폭탄에서 뇌관(雷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동경판이 제3판에 돌입한 지 보름 정도 지난 1923년 3월19일 김용주가 편찬한 정감록이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편찬에 나선 김용주는 호소이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는 정감록의 내용에 대해 아무런 비평도 보태지 않았다. 딱히 정감록을 옹호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호소이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다. 굳이 김용주가 정감록을 신앙하였다거나, 민족주의자였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정감록에 대해 아무런 비평을 가하지 않은 데는 호소이의 지나친 악평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도 김용주에게는 정감록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첫째,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정감록의 내용을 틀림없는 예언으로 믿고 있었다. 식민지의 힘없는 지식인에 불과했던 김용주로서는 대중의 그러한 열망에 굳이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없었다. 설사 그가 남다른 애국심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대한독립이 된다고 믿고 있는 동포들의 기대심리를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둘째, 단순히 책을 많이 팔기 위해서라도 잠재적인 독자들의 희망을 꺾어서는 안 됐다. 김용주의 편집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호소이에 대한 반감을 비롯해, 독립에 대한 기대와 상업적 목적이 골고루 다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김용주는 정감록의 신빙성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또 하나의 정감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은 한성판이라 불릴 만했다. 한성판엔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동경판과 공통되는 부분도 상당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았다. 두 판본이 내용 면에서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매사를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민간에 퍼져 있던 허다한 비결 가운데 어느 것은 호소이만, 또 다른 것은 김용주만 수집해서 자연히 그렇게 됐다고 할 것이다. 실제 정감록은 수백 년 동안 필사본으로 암암리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각자의 수집본이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동경판과 한성판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비결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야 물론 좀 더 널리 퍼져 있던 유명한 예언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전국 어디에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누구나 손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그런 대표적인 예언서 말이다. 나는 이런 입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동경판을 편집한 호소이가 매우 국수주의적이었단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수집된 정감록을 모두 출판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 달리 말해 진인출현이나 대한독립의 메시지가 약한 ‘순화된’ 비결만을 선별적으로 알리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는 ‘고약한’ 내용의 예언까지 인쇄에 부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용주는 달랐다. 그는 도쿄본의 상당수를 답습하면서도 도쿄본에 실리지 못한 다른 비결들을 많이 포함시켰다. 김용주는 호소이가 정감록의 정본을 만들려고 한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쿄판이 정감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진짜 정감록은 훨씬 더 위험한, 폭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정감록을 출간하지는 못했다. 총독부의 검열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결국 호소이의 뜻대로 되다 당연히 김용주의 정감록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의도와 배치된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김용주의 한성본이 딱히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점이 없지 않아 조만간 도태되어야만 될 책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식민지 한국의 정세는 한결 경색됐다. 이른바 전시총동원체제가 작동돼 비상시국이었다. 엄격한 사상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되는 가운데 정감록에 대한 통제도 한 단계 더 나갔다. 그 무렵 새로운 정감록이 나왔다. 현병주의 ‘비난정감록진본’이었다. 마침 경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를테면 경성본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해명돼야 할 문제가 있는 책자였다. 우선 표면상 출간연도가 미상이란 점이 문제다. 책의 간행지를 ‘경성(京城)’이라고 표기해 놓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식민지시기 서울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다. 경성본이 나온 시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나는 본문의 표기법을 자세히 분석했다. 문장의 구조와 맞춤법이 현대의 격식에 가깝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경성본의 간행시기를 1930년대 중반 이후로 확신한다. 경성본은 내용면에서도 앞서 간행된 한성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경성본은 정감록이 사실무근의 허망한 책자라는 논설을 싣고 있다. 편자 현병주는 정감록의 가치에 대해 직접적인 판단을 보류한 김용주와는 달랐다. 하지만 현병주가 단순히 일본인 국수주의자 호소이를 추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정감록의 허구성을 비판하였을 뿐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한국인의 저열한 민족성에서 찾지는 않았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점은 현병주가 비결의 내용 중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못하는 대목에 대해 일일이 비판을 가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비결의 본문에 길지(吉地)에 피난을 가더라도 피난 시기에 따라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부분이 있다. 현병주는 바로 그 구절의 끝에 괄호를 치고는 “생명을 건지는 땅 중에도 종종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곳이 있다.”고 비꼬는 투로 주석을 붙였다. 이와 같이 조목조목 정감록의 내용을 비판함으로써 현병주는 정감록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 했다. 호소이의 정감록 말살 의도는 현병주에 이르러 더욱 공교해졌다. 나는 현병주가 친일파였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정감록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정감록을 출간했다는 점에서 현병주는 호소이의 완벽한 후배다. 현병주는 좀더 중요한 점에 있어서도 호소이의 전통을 계승했다. 나는 지금 경성본에 실린 비결의 내용을 문제로 삼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호소이는 35종의 선별된 비결을 공개했다. 김용주는 그보다 16종이 더 많은 51종을 간행했다. 그런데 경성본에는 25종만 실려 있다. 현병주는 호소이의 동경본과 김용주의 한성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비결로 한정했다. 결과적으로 말해 그는 호소이가 간행한 비결의 일부만이 정감록의 정본이라는 인식을 심는 데 기여했다. 호소이가 공개한 35개의 비결 가운데 25종은 광복 이후 간행된 여러 정감록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20세기 후반부터 한국사회에서 정감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호소이의 비결을 정본으로 대접하게 됐다. 그렇게 된 줄이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와! 어린이 세상이다”

    “와! 어린이 세상이다”

    5일 어린이날, 아이들과 함께 서울 월드컵공원에 가면 경비행기들이 펼치는 곡예·연막비행 등 ‘비행기 쇼’와 스카이다이버들이 하늘에서 연출해 내는 짜릿한 장면들을 접할 수 있다. 서울시는 5일 제83회 어린이날을 맞아 월드컵공원내 평화의 공원에서 ‘어린이날 기념행사’와 ‘하이서울 하늘축제’를 개최한다. 보라매공원 서울대공원 서울시대 주요 공원에서도 어린이날 행사가 열린다. 경기도와 인천에서도 다채로운 어린이날 행사가 선보인다. ●꿈을 펼쳐라 5일 오전 10시 서울 월드컵공원 특설무대에서 펼쳐지는 1부 기념행사에서는 ‘어린이상’과 ‘소년상’시상식이 열리고 2부 ‘하늘축제’에서는 ‘항공쇼’가 펼쳐진다. 오전 11시와 오후 2시,2회에 걸쳐 열리는 ‘항공쇼’에는 헬리콥터 16대와 경비행기 18대, 모형비행기 4대 등 모두 38대의 항공기가 선보인다. ‘항공쇼’의 대미를 장식할 스카이다이버 12명은 1500m상공에서 낙하해 하늘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날씨가 좋을 경우 이들은 평화의 공원에 있는 난지연못 주변에 안착한다. 무대에서는 정오부터 ‘동요공연’‘마술공연’‘어린이 장기자랑’등이 열려 동심을 사로잡는다. 이외에도 시는 서울광장 주변에서 ▲청계천 그림그리기대회(오전 10시)▲서울대공원 아기동물나들이(오후 2시)▲하이서울 애견이벤트(오후2∼4시)등을 개최한다. ●공원 행사 서울 곳곳에 있는 공원들에서도 다채로운 어린이날 행사가 이어진다. 서울시 푸른도시국은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공원을 안전하고 즐겁게 이용할 수 있도록 74개 공원 188개 시설을 정비했다. 먼저 서울대공원에서는 ‘동물원 작은음악회’를 비롯, ‘흙으로 빚는 서울대공원’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어린이대공원에서도 ‘러시아 유로댄스’’브라질 삼바댄스 공연’등 가족끼리 관람할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박물관 광장에서 2회에 걸쳐(정오·오후 3시)‘봉산탈춤 한마당’을 연다.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공연이 끝난 뒤에는 가족끼리 봉산탈춤의 기본장단과 춤을 배울 수 있다. ●경기도·인천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사창리 초록산 삼림욕장에서 오산·화성환경운동연합이 주최하는 어린이날 행사가 눈길을 끈다.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2시30분까지 열리는 이 행사는 ▲풀어놓는 가게 ▲먹을거리 마당 ▲어울리는 마당 등으로 꾸며진다. 천주교·기독교·불교 등 종교단체를 비롯, 농업 및 환경단체·학교·음식점 등 20여곳에서 먹을거리 등을 준비한다. 풀어놓는 가게는 참가자들이 집에서 책, 장난감, 옷, 가방, 먹을거리, 운동화 등 물건을 가져와 채워놓으면 필요한 사람들이 아무 대가 없이 가져가는 코너다. 또 먹을거리 마당에서는 먹을거리를 돈을 받지 않고 나눠준다. 어울리는 마당에서는 야생화 화분 만들기, 나무목걸이 만들기, 천연 염색, 새끼꼬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축제 현장인 초록산 삼림욕장은 양감면 사창초등학교 및 경기도 종합사격장과 인접해 있다. 인천시는 오전 10시 문학경기장에서 어린이날 기념식을 갖고 축하공연 등을 갖는다. 김병철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주택 가격 첫 공시] ‘가장 비싼 집’ 주인은 이건희회장

    [주택 가격 첫 공시] ‘가장 비싼 집’ 주인은 이건희회장

    건교부의 개별주택 공시지가와 국세청의 기준시가를 기준으로 따져볼 때 아파트와 단독·연립·다세대주택 1258만가구를 통틀어 최고가 주택 보유자 1,2위는 삼성 이건희 회장인 것으로 확인됐다. 1위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 1동에 있는 이 회장 집으로 대지면적이 2133(646평)㎡, 건물 면적은 3417㎡(1033평)이다. 건물 소유주는 이 회장이지만 대지는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가 1505.6㎡(456평),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보가 628㎡(190평)를 보유 중이다. 지하 2층, 지상 2층으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완공되면 한남동에 살고 있는 이 회장 일가가 입주할 예정이다. 공시가는 74억 4400만원. 공시가격이 시가의 80% 수준에서 결정된 점을 고려하면 시가는 92억원대이지만 중개업소는 최소 130억원대로 평가한다. 이 집은 공사과정에서 소음 문제로 농심 신춘호 회장의 3남인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으로부터 공사중지 소송과 건축허가 무효확인 소송을 당하는 등 시련을 겪었지만 이 회장측이 최근 신 부회장의 집을 매입하는 조건으로 화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번째로 비싼 집도 이 회장 소유 중구 장충동 1가 280평짜리 단독주택(65억 8000만원). 한때 이재현 CJ 회장이 살았으나 지금은 비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위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동작구 흑석동 소재 연면적 221평짜리 주택으로 가격은 61억 6800만원대. 실제 가격은 90억원 안팎.4위는 성북동 23의1 주택으로 성원토건 김성필 전 회장이 종교단체에 기증, 모 사찰이 보유 중이다. 50억 4000만원대의 서초구 방배동 87평짜리 단독주택은 고 박정구 금호 회장 장남인 박철완씨 소유로 5위에 올랐다.6위는 현대 현정은 회장 소유의 성북동 147평짜리 주택으로 공시가격이 45억 4000만원. 인근의 44억 7000만원짜리 주택은 한국타이어그룹 조양래 회장의 차남인 조현범 상무의 소유다.7위에 올랐다. 10위인 41억 3000만원짜리 성북동 211평짜리 단독주택은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갖고 있다. 한편 한남동에 사는 구본무 LG회장의 집은 18억 4000만원, 용산구 이태원동의 농심 신춘호 회장 집은 26억 8000만원으로 밝혀졌다. 자산총액 기준 재계 2위인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용산구 한남동에 공시가격 18억 3000만원짜리 집에 살고 있어 ‘상위권’에 끼지 못했다. 성북동 현대백화점 정몽근 회장의 대지 1685.96㎡(510평) 자택은 33억 3000만원을 기록했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클릭이슈] 지자체 모럴해저드 천태만상

    [클릭이슈] 지자체 모럴해저드 천태만상

    모 군청 전직원의 70% 이상이 기부금 영수증을 허위로 발급받아 부당 소득공제를 받았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해 감사원이 벌인 공직비리 직무감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민간기업 직원들 사이에선 허위 기부금 영수증을 이용해 탈세를 공공연하게 하다 적발되곤 했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같은 수법을 사용해 집단적으로 탈세에 가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뿐만 아니라 국고보조금 지급 업무를 소홀히 해 국고낭비를 초래하는 등 지방자치단체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는 상상을 초월했다. 감사원은 250개 지방자치단체에 대해 이같은 비리가 근절될 때까지 연중 감사체제를 가동한다는 계획이다. 이에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측은 성명서를 내는 등 집단 반발할 조짐이어서 주목되고 있다. 자칫 충돌할 가능성도 큰 것으로 전해졌다. ●공무원이 단체로 부당 소득공제 감사원은 지난해 초 일부 지자체 직원들 사이에서 가짜 기부금 영수증이 유행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직무감찰을 벌인 결과, 전라북도의 모 군청 본부와 7개 읍·면 사무소,3개 보건의료원 등 소속 기관 직원들이 지정기부금 공제제도를 악용,2년간 탈세를 해 온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은 사찰과 교회 등 종교단체로부터 기부금 영수증을 허위로 발급받아 연말정산시 소득공제를 받았다. 군 전체 소속 공무원 480여명 가운데 70%를 웃도는 350여명이 연루됐다. 이들이 탈세한 금액만도 1억 1000여만원에 달한다는 것이 감사원의 설명이다. 조사결과 해당 군청 공무원들이 2002년부터 2년간 총 723건의 지정기부금 공제신청을 했으나, 이 중 123건(17%)을 제외한 600건(83%)이 허위신청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허위신청된 600건 가운데 388건은 실제 기부사실이 없음에도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받았고, 나머지 212건은 기부금액을 부풀렸다. 감사원 관계자는 27일 “탈세에 가담한 공무원이 너무 많아 해당 공무원을 모두 징계하지는 않았다.”면서 “사실을 알면서도 방조한 관리책임자 4명을 징계조치하고, 가산세를 포함해 총 1억 2000여만원에 대해 환수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금품 수수 및 공금유용 금품을 수수하다 적발된 공무원도 다수다. 서울시 모 구청 공보과 관계자 A씨 등은 구청 홍보업무를 처리하면서 특정 업체에 부당한 특혜를 제공하고, 명절에 인사명목으로 금품을 수수한 사실이 적발돼 정직 등의 징계를 받았다. 성남시 모 구청 지방건축주사보 B씨는 건축허가 사용승인 업무를 담당하는 직위를 이용, 건축업자의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 200만원 상당의 텔레비전 1대를 받아냈다. 공공예산을 제 돈 쓰듯 유용한 사례도 적지 않다. 문화관광부 소속 한국청소년상담원의 고위인사 C씨는 기관 예산 400만원을 명목없이 직원들에게 선심성으로 지급하는 등 예산을 부당하게 집행한 사실이 드러났다.C씨는 또 2002년 공무를 위한 해외출장 기간 중 개인적으로 여행을 한 데 이어 2003년에도 무단으로 11일간 해외여행을 했다. 특히 야근 등 특근매식비용 관리가 부실한 것으로 지적됐다. 철도청 소속 D씨는 특근매식비용을 결제하기 위한 관용카드를 관리하면서 업무용카드를 개인카드처럼 사용했다.D씨는 자신의 술값 50만원 등 총 87회에 걸쳐 2000여만원을 본인과 동료들의 음주비용으로 물쓰듯 사용했다. ●불성실 등 근무기강 해이 건설교통부 소속 감정평가업무담당 E씨는 서울시가 감정평가를 의뢰한 토지에 대해 최고 7억원 이상까지 가격을 과다하게 산정해 행정차질을 빚게 했다.E씨의 불성실한 업무처리 때문에 빚어진 과실이라는 것이 감사원의 지적이다. 또한 시흥시 본청이 2003년 학교가 들어설 용지 부근에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내 금지시설인 경륜장외매장의 설치를 승인하는 등 부적절하게 건축사업을 승인한 사례도 상당하다. 제식구 감싸기식의 행정처리도 적지 않았다. 재정경제부 F씨는 4·5급 인사와 근무평정 업무를 담당하면서 4년 이상 휴직중인 사무관을 중간에 복직한 것처럼 처리했다. 그 결과 해당 사무관은 휴직 중에도 복직된 것으로 처리돼 인사발령을 받는 등 인사상의 혜택을 받았다. 그 외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사업대상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실적조사 등 관리를 허술하게 해 보조금을 과다 집행하는 등 국고손실도 초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남군에서는 자생란 재배단지 조성사업 대상자에게 온실공사 명목으로 8억여원을 지급했으나 회사측이 온실공사에 들인 비용은 4억여원에 불과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대해 감사원 관계자는 “지자체들이 업무수행에 있어 도덕적 해이를 보이는 사례가 많다.”면서 “감사원에 접수되는 민원을 바탕으로 연중 직무감찰을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혜승기자 1fineday@seoul.co.kr
  • 교복입은 고딩들 안방극장 접수!?

    교복입은 고딩들 안방극장 접수!?

    ‘교복’이 안방극장을 휘젓고 있다. 고등학교를 주요 배경으로 ‘학원 폭력’과 ‘사제간의 사랑’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모티프로 한 이른바 ‘고딩 드라마’가 잇따라 전파를 타고 있는 것. 최근 들어 드라마 소재의 성역이 끝없이 무너지면서 나온 새로운 트렌드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대부분 학교 문제보다는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이야기에 천착하는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KBS 2TV는 새달 2일부터 월화드라마 ‘러브홀릭’(극본 이향희, 연출 이건준)을 방영한다. 가수에서 연기자로 변신한 강타와 김민선이 주연을 맡은 이 드라마는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여선생님과 남학생의 ‘지독한 사랑’을 그린 멜로물. 드라마는 사고뭉치 남학생이 ‘기면증’이라는 수면장애를 갖고 있는 여선생을 사랑하면서 시작된다. 남학생이 자신을 괴롭히던 학생을 실수로 살해한 여선생을 대신해 교도소에 가 5년간 복역한 뒤 출소, 약혼한 여선생과 애틋한 사랑을 나눈다는 쇼킹한 설정이 화제다. 지난 13일부터 전파를 탄 SBS 수목 드라마 ‘건빵선생과 별사탕’(극본 박계옥, 연출 오종록)에서도 ‘사제간의 사랑’이 펼쳐지고 있다. 학창시절 ‘쌈짱’으로 통하다 퇴학 당한 뒤 임시교사직으로 모교로 되돌아온 여선생(공효진)이 문제 남학생(공유)과 나누는 특별한 사랑 이야기가 스토리 전개의 중심축이다. 앞서 KBS 2TV 드라마 ‘쾌걸춘향’과 ‘열여덟 스물아홉’에서도 드라마 전반부에 고등학교를 주요 무대로, 고등학생을 주요 캐릭터로 삼았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안방극장에서 전파를 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MBC드라마 ‘로망스’부터. 이 드라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여선생(김하늘)과 남학생(김재원)의 사랑을 그려 종교단체와 시민단체의 항의를 받는 등 화제와 함께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상대적으로 소재의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는 영화에서는 일찌감치 이와 같은 트렌드가 반영됐다. 지난 2001년 개봉 당시 ‘학원액션로망’이라는 장르명을 표방하기도 한 ‘화산고’부터 ‘두사부일체’,‘동갑내기 과외하기’,‘말죽거리 잔혹사’에 이어 최근 개봉된 ‘잠복근무’ 등 여러 작품이 그랬다. 그러면 ‘학원 무협(폭력)’과 ‘사제간의 사랑’이 드라마의 주요 소재로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러브홀릭’의 이향희 작가는 “사회와 분리된 또 다른 세계인 학교안에는 다양한 이야깃 거리가 생겨날 수 있으며, 특히 ‘여선생-남제자의 사랑’은 사회적 금기로서 시청자의 눈길을 끄는 매력적인 소재가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송전문가들은 “하나의 드라마가 성공한 뒤 그 드라마와 비슷한 소재, 포맷의 드라마들이 앞다퉈 기획되는 추세가 늘고 있다.”면서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만큼 시류에 편승하지 말고 ‘작품성’으로 승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오늘의 눈] ‘출산드라’와 종교 대중화/ 김미경 문화부 기자

    “날씬한 자들은 가라, 뚱뚱한 자들의 세상이 오리니…” 한 공중파TV의 인기 개그프로그램에 나오는 ‘뚱뚱교’교주 ‘출산드라’가 통쾌한 웃음을 선사하며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 살찐 사람을 ‘선택받은 자’로 묘사하고, 육류요리를 예찬하는 ‘말씀’을 전하는 그녀는 살빼기와 외모지상주의에 빠진 우리 사회를 풍자한다. 그러나 교주로 분장한 패러디 형태를 띠면서 일부 종교단체들이 특정 종교를 폄하하는 처사라며 문제를 제기하는 등 종교적인 논란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출산드라’의 출연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곳은 한국교회언론회. 최근 낸 논평을 통해 “‘출산드라’의 내용이 기독교적 소재를 배경으로 하면서 종교적 경건성을 폄하, 무시해 단지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며 ‘종말적 오락성’을 반성할 것을 촉구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도 ‘출산드라’의 말과 행동이 기독교를 너무 희화화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된다. 이같은 기독교단체와 네티즌들의 반응을 반박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특히 개그 마니아들은 “시대적인 풍자와 웃음을 위해 사이비교주 형식을 빌려왔을 뿐 특정 종교와는 상관없다.”며 표현의 자유를 강조한다. 논란이 이어지자 결국 ‘출산드라’의 주인공인 개그우먼 김현숙씨가 기독교전문 인터넷매체를 통해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출산드라’를 찬찬히 보면 기독교와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밝히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를 풍자소재로 삼아 방송에 내보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지만 시도 자체는 의미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말했듯이 우리나라에서 종교는 아직도 성역에 갇혀있는 듯하다. 물론 종교를 너무 쉽게 희화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인들이 종교를 편하게 말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종교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줄 수 있지 않을까.‘출산드라’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 교류를 통해 종교가 단지 믿는 자들만을 위한 전유물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열고 한걸음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김미경 문화부 기자 chaplin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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