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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현호 선상살인 선원 2명 구속 영장 발부…작업 서툴다 구박에 앙심

    광현호 선상살인 선원 2명 구속 영장 발부…작업 서툴다 구박에 앙심

    선상살인 사건을 벌인 광현 803호 베트남 선원 2명이 1일 구속됐다. 부산지법 영장 전담 김상윤 판사는 이날 오후 베트남 선원 B(32)·V(32)씨 등 2명에 대해 “이들의 죄질이 무겁고 도주의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 부산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았다. 영장실질심사에서 부산해양경비안전서(해경)는 B씨 등이 지난달 19일 오후 11시쯤 인도양 세이셸군도 북쪽 640마일 해상 광현호에서 조타실에 혼자 있던 선장 양모(43)씨의 목과 배 등을 참치처리용 칼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고 밝혔다. B씨 등은 이어 조타실과 중앙 통로로 연결된 침실에서 자던 기관장 강모(42)씨의 목과 팔, 다리를 마구 찔러 숨지게 했다. 해경 조사결과 B씨 등은 평소 작업이 서툴고 느리다는 이유로 선장과 기관장으로부터 욕설을 듣고 구박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몰래 배로 반입한 양주 2병을 나눠 마시며 범행을 공모한 뒤 살인을 저질렀다. B씨 등은 앞서 구금 중이던 세이셸에서 인도 뭄바이를 거쳐 지난달 30일 국내로 압송됐다. 한편, 베트남 선원 2명에게 살해된 선장 양씨와 기관장 강씨의 시신이 이날 오후 국내로 운구됐다. 시신은 부산 영도구의 한 병원에 안치될 것으로 알려졌다. 해경은 시신을 정밀 부검해 정확한 사인을 밝힐 계획이다. 이후 유족들은 시신을 인계받은 뒤 선사 측과 보상·장례 절차에 들어갈 방침이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원양어선 ‘선상반란’… 한국인 선장 등 2명 피살

    원양어선 ‘선상반란’… 한국인 선장 등 2명 피살

    우리나라 원양어선에서 베트남 선원 2명이 한국인 선장과 기관장을 살해하는 선상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해양경비안전서는 20일 오전 2시쯤 인도양 세이셸 군도 인근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부산 광동해운 소속 광현 803호(138t) 참치연승 원양어선에서 베트남 선원 B(32)씨와 C(32)씨가 선장 양모(43)씨와 기관장 강모(42)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고 밝혔다. 양씨는 조타실에서, 강씨는 기관장방에서 각각 변을 당했다. B씨와 C씨는 다른 선원 10여명과 양주 2병을 나눠 마신 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직후 가해 선원들은 흉기를 들고 배에 숨어 있다가 항해사 이모(50)씨 등 다른 선원에게 제압됐다. 이들은 배 안에 격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가벼운 상처를 입은 이씨가 곧바로 선사에 상황을 알렸다. 선사는 다시 해경에 신고했다. 항해사 이씨가 배를 운항하고 있으며 약 4일 뒤 세이셸 군도로 입항할 예정이다. 부산해양경비안전서는 이날 수사본부를 구성하고 21일 현지에 수사팀과 유가족, 선사 관계자 등을 보낼 예정이다. 수사팀은 살인을 저지른 베트남 선원 2명에 대해 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나머지 인도네시아·베트남 선원 13명에 대해서도 공모 여부를 수사할 방침이다. 선상 살인 혐의를 받는 베트남 선원 2명은 국내로 압송해 추가 수사를 벌일 예정이다. 부산 해경 관계자는 “베트남 선원 2명이 술을 마신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경위는 조사해 봐야 안다”며 “국적 선박에서 벌어진 사건인 만큼 수사와 재판을 국내에서 진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광현 803호 사건은 페스카마호 사건 이후 20년 만의 선상 살인 사건이다. 1996년 8월 2일 사모아 섬 부근 해상에서 조업하던 페스카마호에서는 중국동포 선원 6명이 열악한 작업조건과 폭력에 반발해 한국인 선원 7명을 포함한 선원 11명을 살해한 뒤 시신을 바다에 버린 선상 반란이 발생했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포토 다큐] 西海 死守

    [포토 다큐] 西海 死守

    중국 어선… 불법조업 단속하면 격렬 저항 생명 위협… 中선원이 휘두른 쇠창에 아찔 대민 업무… 화재 진압에 응급환자 이송도 명예 회복… 실추된 이미지 벗고 주권 수호 지난 5일 우리 어민들이 인천 연평도 북방 0.5해리에 정박해 있던 중국 어선 2척을 나포해 연평도로 끌고 왔다. 매번 당연한 것처럼 우리 해역에 들어와 불법 조업을 하고 어장을 망가뜨리는 중국 어선들의 횡포에 참다못한 어민들이 직접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첨예한 대립 속에 지금 서해바다는 어장 전쟁을 치르고 있다. 늘어나는 불법 중국 어선만큼 해양경찰의 어깨는 더 무거워지고 있다. 그들의 횡포에서 우리 어민들이 유일하게 기댈 곳은 해양경찰뿐인 까닭이다. 이런 바다경비의 최전선, 우리 해양주권이 미치는 최서단 가거도 해양과학기지 인근 해역에 배치돼 해양주권 수호에 땀을 흘리고 있는 서해해양경비안전본부 소속 1509함을 찾았다. “신속한 기동으로 접근한 뒤 철저한 단속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작전회의를 마치는 함장의 한마디를 끝으로 조타실이 조용해졌다. 함장의 말에 귀 기울이던 특공대원들의 눈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누구 하나 웃지 않았다. 사명감과 고요만이 작은 조타실을 가득 채웠다. “몇 년 전만 해도 쇠파이프를 휘두르거나 배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어요.” 특공대원인 신범균 순경이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도 잡히지 않기 위해 쇠로 만든 창으로 특공대원을 찌르거나 회칼을 휘두르는 등 과격해졌지요.” 그는 중국 어선 단속을 앞두고 긴장감이 흐르는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로 중국 어선의 저항은 매우 강렬했다. 모선에서 출발한 단속용 단정을 향해 선내 집기류를 던지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날아오면 잘 보이지 않는 그물용 납 무게추는 특공대원들이 꼽는 위험요소다. 얼굴에 맞아 큰 부상을 입는 대원들도 종종 발생할 만큼 위협적이다. 날아오는 흉기들을 뚫고 단정을 중국 어선에 붙인다 해도 상황이 녹록지만은 않다. 쇠창을 꽂아두고 갑판에 높은 울타리를 친 어선에 승선하는 일은 경험 많은 베테랑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수기동대장으로 6년간 배를 탄 안형진 경사는 “중국 어선에 가장 먼저 올라타 동료가 승선하기까지 기다리는 몇 초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고 말했다. 흥분한 중국 선원들을 혼자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청도 인근 해상에서 어선 단속에 참가했던 고 이청호 경사도 어선에 올라탄 후 중국인 선장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순직했다. 대민 업무도 해경에 빠질 수 없는 임무다. 작은 배의 모터나 양식장에 걸린 그물을 제거하는 등 바다에서 생기는 어민과 섬 주민의 자잘한 민원부터 어선 화재 진압이나 음주 운항의 단속까지도 해경의 몫이다. 또한 의료시설이 변변치 않은 도서의 특성상 섬에서 발생한 응급환자를 해경 함정을 통해 육지의 병원으로 이송하는 임무도 맡는다. 급한 경우에는 의사와의 위성통신을 통한 원격진료 등의 의료서비스를 지원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바다의 경찰이자 소방관, 구급대원인 셈이다. 1509함의 이영주 함장은 “중국 어선의 횡포를 막고 바다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해상 인명사고 대처 등 직접 대민 봉사를 한다는 점에서 해경대원들의 자부심이 크다”며 “앞으로도 어민과 도민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겠다”고 밝혔다. 바다에서 해경은 주민들의 친구이자 해양 경제주권 보호의 최전선에 서 있는 어민들의 지팡이다. 지난 일로 실추된 이미지를 벗고 다시 한번 발돋움할 해경의 앞날에 기대를 걸어본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해경대원 태운 채 북쪽으로 도주한 중국어선 나포

    나포를 위해 승선한 해경 대원들을 그대로 태운 채 북한 쪽으로 달아나려 한 중국어선이 붙잡혔다. 인천해양경비안전서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서 50t급 중국어선 1척을 나포했다고 12일 밝혔다. 이 어선은 11일 오후 4시 40분쯤 NLL을 8.6㎞가량 침범한 뒤 인천 옹진군 연평도 남서방 50㎞ 해상에서 조업을 벌이다 해경에 적발됐다. 어선을 발견한 해경이 정선 명령을 내렸으나 중국 어선은 도주하려 했다. 이에 해상특수기동대원 14명이 어선에 오르자 중국 어민들은 조타실 철문을 봉쇄하고 NLL 북쪽 해상으로 1㎞가량 달아났다. 그대로 방치하면 NLL을 침범할 위기를 느낀 대원들은 중국어선 엔진의 공기 흡입구를 그물에 달린 부이로 막아 운항을 강제로 중단한 뒤 조타실 철문을 절단기로 열어 선원들을 붙잡았다. 인천해경 관계자는 “대원들이 단속에 나서면 보통 중국선원들은 조타실 문을 잠그고 북쪽으로 뱃머리를 돌린다”며 “하지만 대원들이 어선에 탄 상태인데도 NLL을 넘으려 한 것은 매우 드물고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인천해경은 어선에 타고 있던 중국인 선원 7명을 인천으로 압송해 처벌할 방침이다. 인천해경은 올들어 서해 NLL 인근 해역에서 불법조업 중인 중국어선 26척을 나포하고 2340척을 퇴거 조치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제재 파기 北함정 검색 물샐 틈 없다”

    “제재 파기 北함정 검색 물샐 틈 없다”

    제3국 국적으로 등록한 7000t급 북한 화물선 ‘오션리치’가 오전 9시쯤 부산항 수영만 인근 영해로 진입하자 함정 10척, 헬기 4대가 주변 1㎞를 빙 둘러싼다. 하루 전 당사국 주재 대사관으로부터 오션리치가 화물도 싣지 않고 출항해 평남 남포항으로 항해할 예정이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조타실과 선박 창고에 무기와 전략물자를 적재했다는 첨보를 입수한 터다. 관계기관 긴급회의를 소집한 정부는 선박·화물 검색지침에 따라 해경 주도로 해상 공동 감시 작전을 벌였다. 해경에서 파견한 3000t급 3척과 1500t급 2척, 500t급 1척은 해군 1500t급 및 500t급 함정과 함께 오션리치 추적에 나서 화물 검색이라는 취지를 설명하며 정지를 명령하는 ‘L깃발’을 올리고 경광등을 켠 상태에서 확성기로 정지명령을 되풀이한다. 500t급 함정 2척은 오션리치 선수(船首) 좌우에서 최대 속력으로 차단을 시도하며 경고사격을 퍼붓는다. 헬기에 탄 저격수는 뱃머리 공중을 맴돌며 차단 비행을 시도한다. 그래도 멈추지 않자 500t급 함정은 뱃머리 앞쪽에 공포탄을 발사한다. 헬기에 탑승한 특공대원들과 오션리치 선미(船尾) 양쪽에서 방탄 보트를 타고 뒤쫓던 특공대원 20여명은 9시 16분쯤 조타실에 침투해 선원들을 제압하고 선박을 정지시킨다. 9시 50분 정부합동검색반은 화물 창고에서 핵무기 부품을 발견하고 정밀 검색을 위해 부산항으로 입항하도록 조치한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포항서 실종 어선 나흘 만에 발견…선장 사망·베트남 선원 6명 실종

    동해에서 한국인 선장과 베트남인 선원 6명 등 7명을 태우고 조업하다가 통신이 끊겨 실종된 어선이 나흘 만에 발견됐다. 뒤집힌 어선 조타실에서 선장 최모(47)씨로 보이는 시신 1구를 찾았으나 함께 타고 있던 베트남인 선원들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포항해경은 3일 오후 12시 20분쯤 포항시 남구 호미곶 동쪽 61마일 해상에서 구룡포 선적 통발어선 D호(29t급)가 뒤집힌 채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중부해양경비안전본부 소속 해상초계기 B703호가 이 배를 처음 찾아냈고 경비함정과 헬기가 사고 현장에 도착해 오후 2시 8분쯤 실종 선박인 것을 확인했다. 배는 지난달 28일 오후 2시쯤 영덕 축산항에서 출항해 조업하다 29일 오후 9시 30분쯤 통신이 끊겼다. 포항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포항 앞바다 전복 어선, 이틀째 실종자 못 찾아…시신 1구 인양

    포항 앞바다 전복 어선, 이틀째 실종자 못 찾아…시신 1구 인양

    해경이 경북 포항 앞바다에서 뒤집힌 채 발견된 구룡포 선적 D호(29t급) 실종 선원들을 이틀째 수색하고 있으나 발견되지 않고 있다. 포항해양경비안전서는 어선이 발견된 지난 3일 오후부터 경비함정과 항공기, 구조대원 10명을 투입, 배 안과 사고해역 일대를 수색해 조타실에서 선장 최모(47) 씨의 시신을 인양해 포항 시내 병원으로 옮겼다.그러나 4일 현재 함께 타고 있던 베트남 선원 6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구조대는 배 주위에 얽혀있는 어망과 어구를 치우고 선내에 들어갔으나 쌓여있는 물건이 많아 실종자 수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경비함정 10척, 어업지도선 1척, 해군 초계기 등 항공기 5대가 주변 해역을 수색하고 있다. 해경은 실종자들이 해류에 밀려 유실됐을 가능성에 대비해 수색 범위를 최대한 넓히고 밤에도 경비함정을 교대로 투입해 실종자 수색을 하기로 했다. 또 어선 통신이 두절된 상황과 사고 경위도 조사하고 있다. 앞서 D호는 지난달 28일 오후 2시쯤 경북 영덕 축산항에서 조업하러 출항했다. 그러나 이튿날 오후 9시 30분쯤 포항어업정보통신국에 위치를 알리지 않았고 그 뒤 통신이 끊겼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포토] 해양대테러 훈련… 조타실 수색하는 해경특공대원

    [서울포토] 해양대테러 훈련… 조타실 수색하는 해경특공대원

    4일 오후 인천시 중구 인천해경 전용부두 인근 해상에서 열린 ‘서북도서 여객선 테러ㆍ피랍상황 유관기관 해양대테러 훈련’에서 해경특공대원들이 피랍된 선박의 조타실을 수색하고 있다.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 선원 7명 탄 실종 어선 나흘 만에 발견…시신 1구만

    동해에서 한국인 선장과 베트남 선원 6명 등 7명을 태우고 조업하다가 통신이 끊겨 실종된 어선이 나흘 만에 발견됐다. 어선에서는 선장으로 보이는 시신 1구가 인양됐다. 그러나 함께 타고 있던 베트남 선원 6명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포항해경은 3일 낮 12시 20분쯤 포항시 남구 호미곶 동쪽 61마일 해상에서 구룡포 선적 통발어선 D호(29t급)가 뒤집힌 채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29일 통신두절 신고 접수 이후 나흘 만이다. 중부해양경비안전본부 소속 해상초계기 B-703호가 이 배를 처음 찾아냈고 경비함정과 헬기가 사고 현장에 도착해 오후 2시 8분쯤 실종 선박인 것을 확인했다. 뒤집힌 어선 조타실에서 선장으로 보이는 시신 1구를 발견했다. 실종 당시 통발어선에는 선장 최모(47)씨와 베트남 선원 6명 등 모두 7명이 타고 있었다. 포항해경은 배 안에 선원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낮 동안 구조사 4명을 동원해 수색했다. 또 중앙해양특수구조단 등 구조대원 10명을 현장으로 보냈으나 나머지 선원을 찾는 데 실패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해경은 어선 내부 수색을 중단하고 주변 수색만 하고 있다. 해경은 날이 밝는대로 다시 선내 수색에 들어갈 계획이다. D호는 지난달 28일 오후 2시쯤 영덕 축산항에서 출항해 조업하다 29일 오후 9시 30분쯤 통신이 끊겼다. 포항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영종도 어선 실종자 3명 중 2명은 부자지간

    지난 4일 인천 영종도 앞바다에서 조업 중 실종된 3명 가운데 선장 등 2명은 부자 사이로 확인됐다. 인천해양경비안전서에 따르면 전날 3명이 실종된 채 빈 배로 발견된 7.93t급 낭장망 어선 A호에는 선장 B(63)씨와 그의 아들 C(35)씨가 함께 타고 있었다. 실종된 선원 D(39)씨는 이들 부자와 어떤 관계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해경은 전날 사고 어선이 설치한 그물 12개를 끌어올리는 등 밤샘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5일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해경은 이들이 모두 조류에 떠내려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경은 경비정 8척과 공기부양정 1척, 헬기 1대 등을 투입해 왕산해수욕장 인근 해상을 수색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정 이후에도 경비정 3척으로 밤샘 수색한 해경은 5일 오전 5시부터 수색 경비정을 13척으로 늘려 수색 해역을 확대하고 날이 밝는 대로 수중 수색도 병행할 계획이다. 앞서 인천해양경비안전서는 4일 오후 5시 8분쯤 7.93t급 낭장망 어선이 복귀하지 않는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출동해 40분 뒤인 오후 5시 48분쯤 영종도 왕산해수욕장 남서방 4㎞ 해상에서 해당 어선을 찾았다. 발견 당시 어선은 선장 등 탑승자 3명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어선의 조타실에는 히터가 켜져 있었고 그물을 끌어올리는 기계가 작동하는 등 발견 직전까지 작업하던 중이었다. 배 안에서는 침수 흔적이나 흉기 등 범죄와 관련된 단서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영종도서 선원 3명 실종… 손상 없는 빈 배만 발견

    인천 영종도 앞바다에서 조업하던 어선에서 선장과 선원 등은 모두 사라진 채 빈 배만 발견돼 해경이 조사에 나섰다. 인천해양경비안전서에 따르면 4일 오후 5시 8분쯤 7.3t급 인천 선적 낭장망 어선 ‘제2부광호’가 복귀하지 않았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해경은 오후 5시 48분쯤 인천시 중구 영종도 남서방 4㎞ 해상에서 어선을 발견했다. 그러나 수색 결과 배는 멀쩡했으나 타고 있던 선장 이모(63)씨, 선원 옥모(39)씨와 이모(35)씨 등 3명은 실종된 상태였다. 이 선장의 동생이자 다른 어선 선장인 이모(58)씨는 “오늘 오전 3시쯤 형과 중구 북성포구에서 출항해 오전 5시까지 영종도 해상에서 함께 조업을 했으나 이후는 떨어져 상황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선 발견 당시 조타실에는 전등과 히터가 켜져 있었고, 그물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하던 흔적이 있었다. 해경은 이 선장 등이 돌발적인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경비정과 공기부양정, 헬기 등을 동원해 해상 수색을 하고 있다. 해경 관계자는 “선박 침수·파손·전복 등의 흔적 없이 선원들만 사라진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면서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선원 3명 실종, “배는 멀쩡하고 직전까지 작업 흔적” 무슨 일?

    선원 3명 실종, “배는 멀쩡하고 직전까지 작업 흔적” 무슨 일?

    선원 3명 실종, “배는 멀쩡하고 직전까지 작업 흔적” 무슨 일? 선원 3명 실종 4일 인천 영종도 앞바다에서 조업하던 어선에서 선장과 선원 2명 등 3명이 실종돼 해경이 밤샘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해경은 경비정 8척과 공기부양정 1척, 헬기 1대 등을 투입해 왕산해수욕장 인근 해상을 수색했지만 실종자들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5일 자정 이후에도 경비정 3척으로 밤샘 수색한 해경은 이날 오전 5시부터 수색 경비정을 13척으로 늘려 수색 해역을 넓혔다. 앞서 4일 오후 5시 8분쯤 인천해양경비안전서에 7.93t급 낭장망 어선이 복귀하지 않는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해경은 이후 5시 48분쯤 영정도 왕산해수욕장 남서방 4㎞ 해상에서 해당 어선을 발견했으나 어선에는 선장 A씨(63)과 30대 선원 2명 등 배에 타고 있던 3명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발견 당시 어선의 조타실에는 히터가 켜져 있었고, 그물을 끌어올리는 기계가 작동하는 등 발견 직전까지 작업을 하던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배 안에서 침수 흔적이나 흉기 등 범죄와 관련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아 해경은 계속해서 해상 수색을 이어가고 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영종도 인근서 선원 3명 실종, “배는 멀쩡하고 작업 흔적” 대체 무슨 일?

    영종도 인근서 선원 3명 실종, “배는 멀쩡하고 작업 흔적” 대체 무슨 일?

    영종도 인근서 선원 3명 실종, “배는 멀쩡하고 작업 흔적” 대체 무슨 일?선원 3명 실종 4일 인천 영종도 앞바다에서 조업하던 어선에서 선장과 선원 2명 등 3명이 실종돼 해경이 밤샘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해경은 경비정 8척과 공기부양정 1척, 헬기 1대 등을 투입해 왕산해수욕장 인근 해상을 수색했지만 실종자들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5일 자정 이후에도 경비정 3척으로 밤샘 수색한 해경은 이날 오전 5시부터 수색 경비정을 13척으로 늘려 수색 해역을 넓혔다. 앞서 4일 오후 5시 8분쯤 인천해양경비안전서에 7.93t급 낭장망 어선이 복귀하지 않는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해경은 이후 5시 48분쯤 영정도 왕산해수욕장 남서방 4㎞ 해상에서 해당 어선을 발견했으나 어선에는 선장 A씨(63)과 30대 선원 2명 등 배에 타고 있던 3명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발견 당시 어선의 조타실에는 히터가 켜져 있었고, 그물을 끌어올리는 기계가 작동하는 등 발견 직전까지 작업을 하던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배 안에서 침수 흔적이나 흉기 등 범죄와 관련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아 해경은 계속해서 해상 수색을 이어가고 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산 인근 해상 어선 화재… 1명 사망·7명 구조

    부산 인근 해상 어선 화재… 1명 사망·7명 구조

    부산 사하구 다대포 나무섬 인근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7성훈호(29t)가 29일 오후 1시 52분쯤 발생한 화재로 시꺼먼 화염에 휩싸여 있다. 선체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선장 이모(65)씨가 조타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으며, 불을 피해 바다로 뛰어든 강모(56)씨 등 선원 7명은 인근을 지나던 마린호(4명)와 대성호(3명)에 구조됐다. 해경은 폭발음 후 배가 불길에 휩싸였다는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화재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부산 연합뉴스
  • [밀리터리 인사이드] 인천상륙작전 D-1 ‘장사상륙작전’ 아시나요

    [밀리터리 인사이드] 인천상륙작전 D-1 ‘장사상륙작전’ 아시나요

    9월 15일. 디데이(D-day)라는 암호명으로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한 상륙작전으로 꼽히는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 날입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스스로도 ‘5000대 1의 도박’이라고 말했을 만큼 성패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 작전이었죠. 북한 인민군은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우리 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 밖에 걸리지 않았을 만큼 전세는 급변하게 됩니다. 허리가 잘린 인민군은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급격히 세력이 약화됐고 곧 패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하기 전 난관이 많았습니다. 당시 인천의 항만은 대규모 함정이 입항하기에는 수로가 매우 좁았고, 조수간만의 차가 7~10m나 돼 안정적인 상륙작전을 벌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작전 당일 인천항의 만조시간은 2시간 밖에 되지 않아 위험부담이 컸습니다. 인민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강력하게 저항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죠. 그래서 유엔군사령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연합군 수뇌부와 마찬가지로 기만전술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양동작전 준비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6개월 전부터 스웨덴, 노르웨이가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프랑스 칼레에서 상륙작전이 이뤄질 것이라는 허위정보를 꾸준히 흘렸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1944년 전세를 뒤집기 위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이뤄질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6·25전쟁 초기 유엔군사령부도 7만명이 넘는 병력과 260여척의 함정이 참여하는 역사적인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두 가지 묘안을 짜냈습니다. 우선 유엔군이 남쪽인 전북 군산으로 상륙한다는 거짓 소문을 내는 한편 실제로 군산을 포격해 인민군의 주의를 돌렸습니다. 또 상륙이 한반도 동쪽에서도 동시에 이뤄질 것으로 오인하도록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경북에서 상륙작전도 벌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장사상륙작전’입니다. 경북 영덕에서 남쪽으로 15km, 포항 북쪽 26km에 위치한 동해안의 작은 어촌 장사동(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인천상륙작전 불과 한 달 전인 8월 16일 국군 3사단이 북한군 12사단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하자 해상으로 철수했던 독석동과 인접한 지역입니다. 3사단 지휘부는 포항여중 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이 분전한 덕분에 인민군의 공격을 피해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이 전투는 330만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 재연돼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장사상륙작전도 포항여중 전투와 마찬가지로 학도병들의 희생에 모든 것을 맡긴 슬픈 역사였지만 인천상륙작전에 가려 지난 65년 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극비로 수립된 작전명 174호. 9월 13일 오후 부산항 제4부두에는 2700t급 상륙함(LST) ‘문산호’에 탑승할 학도병들이 모였습니다. 육군본부는 상륙작전을 위해 이명흠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독립유격대 1개 대대를 차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보름 훈련받은 10대 학도병, 비밀 작전을 맡다 이름만 ‘유격대’였을 뿐 편성된 이들의 대부분은 경남 밀양에서 불과 보름 동안의 훈련받은 앳된 10대 학도병이었습니다. 실탄을 채 10발도 채 쏴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죠. 군에서 보급받은 것이라곤 소련제 장총과 배낭, 인민군 군복, 물 약간, 건빵 한 봉지, 미숫가루 세 봉지가 전부였습니다. 낙동강 전선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끊는 작전에 투입된다는 설명이 곁들여졌습니다. 원래 이 작전은 위험한 임무 특성상 미 8군이 수행해야 했지만 미군은 “실패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우리 군에 떠넘겼습니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웠던 육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학도병들에게 작전을 배정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학도병 772명은 전란의 회오리 속에서 오로지 애국심 만으로 군에 자진입대한 이들이었습니다. 수개월째 이어진 전쟁으로 마음마저 피폐해진 그들이었지만 사기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14일 새벽 상륙함은 드디어 장사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상륙작전은 시작부터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거센 파도가 일면서 문산호는 해변에서 30m 가량 떨어진 지역에 좌초되고 말았죠. 바다에 뛰어든 학도병의 60여명이 제대로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물에 빠져 숨졌습니다. 무사히 헤엄쳐 해변에 도달한 이들이 밧줄을 소나무에 연결해 다른 많은 대원이 해안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이날 오전 문산호는 심한 파도에 떠밀려 바다 속에 가라앉았습니다. 고난은 이어졌습니다. 상륙 직후부터 1개 대대 규모의 인민군이 해안 앞 200m 고지에서 공격해왔습니다. 오후 2시 30분 미 해군 구축함 함포지원을 받아 간신히 적을 물리친 학도병들은 빠르게 동해안의 7번 국도를 차단하고 다수의 적 진지를 파괴했습니다. 상륙, 전투 과정에 ‘유격전의 귀재’로 불렸던 군사고문 전성호 대령, 민간인 황재중 선장 등 29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다음날 오전 6시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인민군 5사단 등 적 정예병력을 만나 악착같이 싸웠습니다. 인민군은 대규모 상륙부대가 들이닥친 것으로 판단해 전차 4대를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학도병들이 사용해야 할 탄약 대부분은 배와 함께 물에 가라앉았고, 배낭에 든 보급품은 불과 3일치였지만 전투는 계속됐습니다. ●악착같이 7번 국도를 끊고 임무를 수행한 그들 해군본부는 인천상륙작전 뒤인 16일 해난구조선을 보냈지만 문산호가 너무 깊이 침몰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대로 철수했습니다. 우리 해군의 304정도 출동했다가 극심한 풍랑으로 포항 구룡포로 귀항하고 말았습니다. 해군은 “상륙부대를 구출하려면 증원부대를 보내거나 철수하는 수 밖에 없다”고 육군본부에 연락한 뒤 상륙함 조치원호를 현장에 다시 급파하게 됩니다. 또 상륙 5일째인 18일 수송기를 보내 약간의 탄약과 의료품을 투하했습니다. 상륙 6일째인 19일 드디어 조치원호가 장사해안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민간인 선장은 인민군의 공격이 두려워 침몰한 문산호와 멀리 떨어진 곳에 배를 대려고 했습니다. 미군 고문관으로 참가한 프랭크 스피어 소령이 다그쳐 겨우 문산호 동북쪽 약 400m, 육지에서 300m 떨어진 지점에 닻을 내리고 구조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학도병 39명은 적의 공격과 구명대가 유실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복귀하지 못하고 적의 포로가 되거나 죽음을 맞았습니다. 일부는 우리 군이 북진하는 과정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배에 타지 못한 인원 외에도 작전 중 전사한 인원이 총 139명이나 됐고, 90여명이 부상했습니다. 나머지 인원들은 다행히 7시간에 걸친 결사적인 구조작업으로 조치원호를 통해 부산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상륙작전은 군사기밀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작전 상황이 제대로 명시된 공식문서조차 없었습니다. 생존 대원들의 입을 통해서만 일부 내용이 알려졌죠. 하지만 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당시 평양방송은 아군 2개 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고 보도했을 정도로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죠. 특히 우리 1군단은 인천상륙작전 뒤 교착상태였던 낭동강 전선을 돌파해 북상할 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교란작전 때문에 인민군 5사단과 2군단이 주력부대를 전선에서 이탈시켜 동해안에 집중적으로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맥아더도 경의를 표한 학도병들의 활약 1997년 3월 해병대원들이 갯벌에 묻힌 문산호를 발견하면서 역사는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역사 재조명 필요성을 느낀 영덕군은 지난해부터 1년 4개월 동안 부산의 한 조선소에서 문산호 복원 작업을 진행해 길이 90m, 폭 30m, 높이 26m의 배를 건조했습니다. 원래 배보다는 길이 10m, 너비 5m 가량을 줄인 축소 모형입니다. 지난 5월 복원된 문산호는 바지선으로 옮겨져 장사해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상륙작전 65년 만의 일입니다. 내달 문산호는 스토리 전시관으로 개관할 예정입니다. 문산호 1, 2층에는 장사상륙작전의 역사적 배경과 200고지를 점령한 학도병 영웅 이야기를 영상물과 디오라마로 만들어 설치하는 등 다양한 콘텐츠로 채워집니다. 4층에는 PX와 군번줄 걸기 등 군 체험코너, 5층엔 조타실과 전망대를 마련할 계획입니다. 역사는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인천상륙작전의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도 잊지 않은 역사, 우리가 되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래는 맥아더 장군이 사망하기 4년 전 772 유격동지회에 전한 서한입니다. 이종훈 회장 귀하. 최근에 보내주신 귀하의 편지를 통해 772 유격동지회가 결성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귀하의 동지들이 수행한 전투는 혁혁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한 것이었습니다. 772 유격대 동지들이 보여준 용맹과 희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영원히 빛나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 귀하의 동지들에게 제 진심어린 안부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들을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전우로서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1960. 10. 31 더글라스 맥아더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밀리터리 인사이드는 핫한 아이템을 가지고 매주 화요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더 많은 기사를 보시려면 아래 리스트를 보세요. (17)국산 ‘명품 복합소총’ 왜 애물단지가 됐나 (18)“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19)“남침 땅굴, 있다니까요!” 끝나지 않는 전쟁 (20)北 목함지뢰 도발, 과연 이번이 처음일까 (21)당황하셨어요? ‘서울 불바다’ 통하지 않는 이유
  • [데스크 시각] 지진보다 무서운 메르스/한준규 사회2부 차장

    [데스크 시각] 지진보다 무서운 메르스/한준규 사회2부 차장

    친한 후배의 일본인 아내가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며칠 전 도쿄 친정으로 떠났다고 한다. 아내의 친정 여행으로 ‘프리’한 시간을 즐기는 후배에게 “좋아 죽네, 아주~” 하고 농을 던졌다. 후배는 정색하며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고 받아쳤다. 한국에서 10년을 넘게 산 후배의 아내는 “한국의 메르스보다 일본 지진이 훨씬 안전하다”는 말을 남기고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일본인에게 ‘지진’의 공포는 엄청나다. 어려서부터 크고 작은 지진을 직접 느꼈고 각종 언론을 통해 지진의 무서운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일종의 감기라는 ‘메르스’가 순식간에 건물과 고가도로를 무너뜨리고 엄청난 해일로 수백 명의 목숨을 집어삼키는 ‘지진’보다 무섭다고 느꼈을까. 반정부 세력의 유언비어 때문일까, 언론에서 너무 침소봉대해서일까. 아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컨트롤타워’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95년 6000여명이 숨진 고베 지진 때도, 2011년 15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본 대지진 때도 일본 정부는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침착하게 대처했다. 일본 정부는 일사불란했다. 국민에게 믿음을 주었다. 그래서 그녀가 메르스보다 일본 지진이 더 안전하다고 느낀 건 아닐까. 허둥대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우리 정부의 대처 방식이 국민을 불안으로 몰아넣고 있다. 현 상황에 대해 충분한 정보도 없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와 판박이다. 어린 학생들이나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이야기하고 선원들만 살겠다고 도망치고, 그 선원을 조타실에서 구조하면서 선원인 줄 몰랐다고 어이없는 답변을 늘어놓는 해경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분개했다. 사고 수습을 하면서 우왕좌왕하고 제대로 구조 상황을 알리지 않아 유가족의 공분을 샀다. 그래서 정부는 ‘국가안전처’라고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거대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지금. 우리 정부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국민에게 발생 병원과 발생 지역, 발생한 사람들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정부만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소통의 부재와 안일함으로 세월호 참사처럼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메르스 골든타임을 놓쳤다. 그러고도 ‘공포감 확산’이라는 우산 뒤에서 쉬쉬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한 국가안전처는 ‘강 건너 불구경’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4일 무능한 보건 당국에 직격탄을 날렸다. 박 시장은 메르스 관련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보건 당국이 채우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직접 나서겠다며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다. 이에 정부는 서둘러 24개 메르스 관련 병원 이름을 공개했다. 또 지방자치단체와 메르스 관련 정보를 모두 공유하겠다고 했다. 박 시장을 비난하던 청와대와 여당도 메르스 확산을 막기 위해 초당적 대처를 하겠다고 태도를 바꿨다. ‘정치적 행동이다’, ‘공포감을 확산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박 시장을 비난할 수 있지만, 누구도 메르스 예방에 대한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잉대응이 늦장대응보다 낫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난 7일 정부와 서울, 경기 등 지방자치단체장이 손을 잡았다.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힘을 합쳐 메르스 확산을 막겠다고 했다. 지금은 누구의 공과를 따질 때가 아니라 힘을 합쳐 메르스 확산을 막고 빨리 우리 사회를 정상으로 돌려놔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를, 이 도시를 떠나는 시민이 없을 것이다. hihi@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전쟁영웅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요.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부터 거론할 겁니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지금도 성웅(聖雄)으로 불리는 존경받는 위인이죠. 하지만 교과서에 단 한 줄만 언급된, 아니 우리가 따분하다고 덮어버린 역사책 속에 숨겨진 전쟁영웅은 수없이 많습니다. 저는 이번에 우리가 몰랐거나 지나쳤던 6·25 전쟁의 영웅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독일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처럼 웅장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치고 각박한 삶이지만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 준 그분들을 한번 쯤은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국민 성금으로 산 중고 초계정, 첫 승전보를 올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19만명(한국군 10만명)의 병력과 소련이 제공한 T-34 전차 240여대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불과 사흘만인 28일 수도 서울을 빼앗게 됩니다. 전차는 커녕 변변한 대전차 무기조차 갖추지 못한 우리 군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전쟁발발 다음날 깜짝 놀랄 만한 승전보가 전해졌습니다. 전쟁 직전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지휘부는 장병들의 월급과 국민 성금 1만 5000달러와 정부지원금 4만 5000달러를 합한 6만 달러를 들여 미 해군의 450t급 중고 초계정을 구입했는데요. 초계정은 연안을 감시하는 작은 전투함입니다. 참고로 우리 최신 이지스함 세종대왕함 배수량이 7500t(만재 배수량 1만t)이니 정말 작은 함정이죠. 선박이 진해 해군기지에 들어온 시기가 전쟁 발발 불과 두 달 전인 4월 10일입니다. 무장조차 없었던 선박에 3인치 함포 1문과 포탄 100발을 어렵게 갖췄습니다. 드디어 27일에는 ‘PC-701’이라는 함명을 받고 ‘백두산함’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전쟁 당일 진해 해군본부는 백두산함에 동해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백두산함은 초계임무 중 울산 앞바다에서 덩치가 두 배인 1000t급 괴선박을 발견합니다. 깃발이나 표식이 없었지만 함정을 북한군 상륙함으로 판단한 백두산함 지휘부는 해군본부로 “600명의 북한군이 승선한 채 전속력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긴급보고했습니다. 부산항을 노려 남하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위협사격을 가하자 적선이 중기관총과 주포로 대응했고, 곧 백두산함의 3인치 주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4시간의 교전 끝에 26일 오전 1시 30분쯤 적선은 포탄에 명중돼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대한해협 해전’이라는 이름으로 6·25 전쟁 첫 승전으로 기록됐습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장전수 전병익 중사, 조타수 김창학 하사가 전사했습니다. 김창학 하사는 침몰 위기에 놓인 적함이 집중적으로 조타실을 공격해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타실 키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백두산함 함장이었던 최용남 중령은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소장으로 진급해 해병대 1사단장에 오른 뒤 1998년 타계했습니다. ●수류탄과 화염병 뿐…적의 자주포를 육탄공격하다 6·25 전쟁 영웅으로 또 심일 소령이 있습니다. 심 소령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으로,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한 당시로서는 엘리트 군인이었는데요. 전쟁 발발 당일 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소위)으로,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남하하는 10여대의 SU-76 자주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적이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2문의 57mm 대전차포 발사를 명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죠. SU-76은 이름만 자주포이지 전면에 35mm 장갑을 갖춰 당시 우리 군 입장엔 전차나 다름없었습니다. 초라한 무기에 좌절감을 느낀 것도 잠시, 그는 포탑을 돌리지 못하는 자주포의 특성상 좌우 측면이 취약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합니다. 이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 공격을 감행해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성과를 거뒀죠. 이런 방식은 전차에 대한 공포심을 사라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선 곳곳에서 적 전차를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충북 음성군, 경북 영천군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 잇따라 참전했고 1951년 1월 26일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강원 영월군에서 정찰 활동을 하던 중 북한군의 총에 맞아 안타깝게 전사했습니다. 심 소령에게는 사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습니다. 심 소령의 동생으로 셋째 동생 심익은 1952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실종됐고, 경찰관이었던 둘째 동생 심민은 1960년 32세의 나이로 과로사하는 아픈 가족사를 남겼습니다. 보훈처는 올해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세 형제의 어머니인 고(故) 조보배 여사를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훈장 하나 못 받았지만…북한군 간담을 서늘하게 한 ’구월산 여장군’ 여성 전쟁영웅으로는 ‘구월산 여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정숙 여성유격대원이 있습니다. 그의 활약상은 1965년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 유격대’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6·25 전쟁 직전 북한군에 의해 부모와 남편을 잃은 그는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처음 ‘서하무장대’를 결성,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그는 중공군에게 많은 부하를 잃고 고향 황해도로 돌아온 육군본부 김종벽 대위의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했고, 김 대위의 보좌관으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1951년 1·4 후퇴 당시에도 후퇴하지 않고 구월산에 남았는데요.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도 못한 채 적의 후방을 기습공격해 탈취한 물자로 생존해야 했지만 늘 그들의 가슴은 뜨거웠습니다. 같은 달 18일 고립된 재령유격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촌부로 가장한 채 밤새 100여 리를 걸어 적 포위망을 뚫고 89명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올해 여군으로는 처음으로 보훈처가 선정한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됐습니다. 지금도 일부 대원이 생존해 있지만 유격대를 이끌던 이정숙씨조차 훈장하나 받지 못했고 올해 뒤늦게 아들이자 구월산유격대 청장년회장인 김광인(60)씨가 참전 유공자 증서를 받았습니다. 6·25 전쟁 훈·포장은 1953년 12월 31일부로 종결한다는 이승만 정부 당시 법 조항이 걸림돌이 됐다고 합니다. 북한이 2013년 42일간 억류했다가 추방한 미국인 메릴 뉴먼(당시 85세)씨는 6·25 전쟁 당시 이 구월산 유격대와 함께 활동했다고 밝히면서 유격대의 활약상에 관심이 집중됐는데요. 그는 추방 뒤 공식 성명을 통해 북한 가이드에게 구월산 유격대원 생존 여부를 묻고 “구월산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오해를 받고 억류됐다고 밝혔습니다. 6·25 전쟁에서는 유엔군, 특히 압도적 다수였던 미군의 희생도 많았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흥남철수’도 사실 미군이 목숨을 걸고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해 이뤄졌습니다. 역사상 미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입니다. 당시엔 미국 언론의 조롱까지 받았지만 종전 후에는 전략적으로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압록강을 목표로 북진을 거듭했죠. 동부전선을 맡았던 미 10군단은 1950년 11월 해병대 1사단을 주력으로 한국군과 함께 함경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중공군이 장진호 북쪽까지 진출한 상태였고, 병력은 1만 5000명인 한미 연합군의 8배에 가까운 12만명에 달했습니다. 7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제9병단은 미군이 주력인 연합군을 장진호 계곡으로 몰아넣고 섬멸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중공군에 패해 후퇴하면서도 피난민을 구한 그들 11~12월 이 지역에는 영하 20~32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해발 1000m 산악지대여서 살을 에는 추위가 전투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전체 미 해병대 1사단 사상자 7200명의 절반인 3600명이 동상으로 쓰러졌을 정도였습니다. 부상자에게 사용할 약품이 얼어터지고 총은 사용하지 않으면 얼어붙어 작동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니 당시 추위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을 겁니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싶었겠지만 중공군의 기습을 대비해야 해 강제로 지퍼를 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을 에워싸고 단숨에 전멸시킬 기세였던 중공군은 미 해병대의 악착같은 반격에 사망자만 2만 5000명, 부상자 1만 2500명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중공군 제9병단은 이곳 동부전선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서부전선의 제13병단과 합류하지 못하고 부대 재편을 위해 휴식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성공적으로 후퇴해 흥남에 도착한 미군은 전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결정을 했습니다. 김백일 1군단장과 의사 출신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씨의 설득으로 에드워드 알몬드 미 10군단장이 민간인 피난민까지 모두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공로로 현씨는 ‘한국의 쉰들러’라는 별명을 얻었죠. 그는 종전 뒤 미국 버지니아대, 콜롬비아대, 펜실베니아대에서 의대 교수로 활약, 의학 발전에 공헌했고 2007년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부두를 떠날 때 미군이 시설과 군수 물자를 폭파하면서 일부 민간인이 희생돼 논쟁이 있긴 합니다만, 흥남 철수 작전은 2차 세계대전의 ‘됭케르크 철수 작전’과 더불어 가장 성공한 철수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흥남 철수 당시 피난민들을 도왔던 또 한 명의 영웅이 있는데요. 라루 선장은 배에 실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1만 4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원의 피난민을 태우라고 지시합니다.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배로 기네스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죠.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후 아픔을 겪은 한국인들을 떠올리며 ‘마리너스’라는 이름을 얻어 가톨릭 수도회인 베네딕토회 수사가 됐습니다. 그는 당시 항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 장군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 장군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전쟁영웅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요.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부터 거론할 겁니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지금도 성웅(聖雄)으로 불리는 존경받는 위인이죠. 하지만 교과서에 단 한 줄만 언급된, 아니 우리가 따분하다고 덮어버린 역사책 속에 숨겨진 전쟁영웅은 수없이 많습니다. 저는 이번에 우리가 몰랐거나 지나쳤던 6·25 전쟁의 영웅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독일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처럼 웅장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치고 각박한 삶이지만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 준 그분들을 한번 쯤은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국민 성금으로 산 중고 초계정, 첫 승전보를 올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19만명(한국군 10만명)의 병력과 소련이 제공한 T-34 전차 240여대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불과 사흘만인 28일 수도 서울을 빼앗게 됩니다. 전차는 커녕 변변한 대전차 무기조차 갖추지 못한 우리 군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전쟁발발 다음날 깜짝 놀랄 만한 승전보가 전해졌습니다. 전쟁 직전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지휘부는 장병들의 월급과 국민 성금 1만 5000달러와 정부지원금 4만 5000달러를 합한 6만 달러를 들여 미 해군의 450t급 중고 초계정을 구입했는데요. 초계정은 연안을 감시하는 작은 전투함입니다. 참고로 우리 최신 이지스함 세종대왕함 배수량이 7500t(만재 배수량 1만t)이니 정말 작은 함정이죠. 선박이 진해 해군기지에 들어온 시기가 전쟁 발발 불과 두 달 전인 4월 10일입니다. 무장조차 없었던 선박에 3인치 함포 1문과 포탄 100발을 어렵게 갖췄습니다. 드디어 27일에는 ‘PC-701’이라는 함명을 받고 ‘백두산함’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전쟁 당일 진해 해군본부는 백두산함에 동해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백두산함은 초계임무 중 울산 앞바다에서 덩치가 두 배인 1000t급 괴선박을 발견합니다. 깃발이나 표식이 없었지만 함정을 북한군 상륙함으로 판단한 백두산함 지휘부는 해군본부로 “600명의 북한군이 승선한 채 전속력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긴급보고했습니다. 부산항을 노려 남하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위협사격을 가하자 적선이 중기관총과 주포로 대응했고, 곧 백두산함의 3인치 주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4시간의 교전 끝에 26일 오전 1시 30분쯤 적선은 포탄에 명중돼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대한해협 해전’이라는 이름으로 6·25 전쟁 첫 승전으로 기록됐습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장전수 전병익 중사, 조타수 김창학 하사가 전사했습니다. 김창학 하사는 침몰 위기에 놓인 적함이 집중적으로 조타실을 공격해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타실 키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백두산함 함장이었던 최용남 중령은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소장으로 진급해 해병대 1사단장에 오른 뒤 1998년 타계했습니다. ●수류탄과 화염병 뿐…적의 자주포를 육탄공격하다 6·25 전쟁 영웅으로 또 심일 소령이 있습니다. 심 소령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으로,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한 당시로서는 엘리트 군인이었는데요. 전쟁 발발 당일 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소위)으로,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남하하는 10여대의 SU-76 자주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적이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2문의 57mm 대전차포 발사를 명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죠. SU-76은 이름만 자주포이지 전면에 35mm 장갑을 갖춰 당시 우리 군 입장엔 전차나 다름없었습니다. 초라한 무기에 좌절감을 느낀 것도 잠시, 그는 포탑을 돌리지 못하는 자주포의 특성상 좌우 측면이 취약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합니다. 이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 공격을 감행해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성과를 거뒀죠. 이런 방식은 전차에 대한 공포심을 사라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선 곳곳에서 적 전차를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충북 음성군, 경북 영천군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 잇따라 참전했고 1951년 1월 26일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강원 영월군에서 정찰 활동을 하던 중 북한군의 총에 맞아 안타깝게 전사했습니다. 심 소령에게는 사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습니다. 심 소령의 동생으로 셋째 동생 심익은 1952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실종됐고, 경찰관이었던 둘째 동생 심민은 1960년 32세의 나이로 과로사하는 아픈 가족사를 남겼습니다. 보훈처는 올해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세 형제의 어머니인 고(故) 조보배 여사를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훈장 하나 못 받았지만…북한군 간담을 서늘하게 한 ’구월산 여장군’ 여성 전쟁영웅으로는 ‘구월산 여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정숙 여성유격대원이 있습니다. 그의 활약상은 1965년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 유격대’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6·25 전쟁 직전 북한군에 의해 부모와 남편을 잃은 그는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처음 ‘서하무장대’를 결성,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그는 중공군에게 많은 부하를 잃고 고향 황해도로 돌아온 육군본부 김종벽 대위의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했고, 김 대위의 보좌관으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1951년 1·4 후퇴 당시에도 후퇴하지 않고 구월산에 남았는데요.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도 못한 채 적의 후방을 기습공격해 탈취한 물자로 생존해야 했지만 늘 그들의 가슴은 뜨거웠습니다. 같은 달 18일 고립된 재령유격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촌부로 가장한 채 밤새 100여 리를 걸어 적 포위망을 뚫고 89명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올해 여군으로는 처음으로 보훈처가 선정한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됐습니다. 지금도 일부 대원이 생존해 있지만 유격대를 이끌던 이정숙씨조차 훈장하나 받지 못했고 올해 뒤늦게 아들이자 구월산유격대 청장년회장인 김광인(60)씨가 참전 유공자 증서를 받았습니다. 6·25 전쟁 훈·포장은 1953년 12월 31일부로 종결한다는 이승만 정부 당시 법 조항이 걸림돌이 됐다고 합니다. 북한이 2013년 42일간 억류했다가 추방한 미국인 메릴 뉴먼(당시 85세)씨는 6·25 전쟁 당시 이 구월산 유격대와 함께 활동했다고 밝히면서 유격대의 활약상에 관심이 집중됐는데요. 그는 추방 뒤 공식 성명을 통해 북한 가이드에게 구월산 유격대원 생존 여부를 묻고 “구월산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오해를 받고 억류됐다고 밝혔습니다. 6·25 전쟁에서는 유엔군, 특히 압도적 다수였던 미군의 희생도 많았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흥남철수’도 사실 미군이 목숨을 걸고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해 이뤄졌습니다. 역사상 미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입니다. 당시엔 미국 언론의 조롱까지 받았지만 종전 후에는 전략적으로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압록강을 목표로 북진을 거듭했죠. 동부전선을 맡았던 미 10군단은 1950년 11월 해병대 1사단을 주력으로 한국군과 함께 함경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중공군이 장진호 북쪽까지 진출한 상태였고, 병력은 1만 5000명인 한미 연합군의 8배에 가까운 12만명에 달했습니다. 7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제9병단은 미군이 주력인 연합군을 장진호 계곡으로 몰아넣고 섬멸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중공군에 패해 후퇴하면서도 피난민을 구한 그들 11~12월 이 지역에는 영하 20~32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해발 1000m 산악지대여서 살을 에는 추위가 전투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전체 미 해병대 1사단 사상자 7200명의 절반인 3600명이 동상으로 쓰러졌을 정도였습니다. 부상자에게 사용할 약품이 얼어터지고 총은 사용하지 않으면 얼어붙어 작동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니 당시 추위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을 겁니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싶었겠지만 중공군의 기습을 대비해야 해 강제로 지퍼를 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을 에워싸고 단숨에 전멸시킬 기세였던 중공군은 미 해병대의 악착같은 반격에 사망자만 2만 5000명, 부상자 1만 2500명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중공군 제9병단은 이곳 동부전선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서부전선의 제13병단과 합류하지 못하고 부대 재편을 위해 휴식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성공적으로 후퇴해 흥남에 도착한 미군은 전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결정을 했습니다. 김백일 1군단장과 의사 출신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씨의 설득으로 에드워드 알몬드 미 10군단장이 민간인 피난민까지 모두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공로로 현씨는 ‘한국의 쉰들러’라는 별명을 얻었죠. 그는 종전 뒤 미국 버지니아대, 콜롬비아대, 펜실베니아대에서 의대 교수로 활약, 의학 발전에 공헌했고 2007년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부두를 떠날 때 미군이 시설과 군수 물자를 폭파하면서 일부 민간인이 희생돼 논쟁이 있긴 합니다만, 흥남 철수 작전은 2차 세계대전의 ‘됭케르크 철수 작전’과 더불어 가장 성공한 철수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흥남 철수 당시 피난민들을 도왔던 또 한 명의 영웅이 있는데요. 라루 선장은 배에 실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1만 4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원의 피난민을 태우라고 지시합니다.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배로 기네스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죠.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후 아픔을 겪은 한국인들을 떠올리며 ‘마리너스’라는 이름을 얻어 가톨릭 수도회인 베네딕토회 수사가 됐습니다. 그는 당시 항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이준석 세월호 선장 항소심도 사형 구형, 검찰 “살인과 동일”…왜?

    이준석 세월호 선장 항소심도 사형 구형, 검찰 “살인과 동일”…왜?

    이준석 세월호 선장 항소심도 사형 구형, 검찰 “살인과 동일”…왜? ‘이준석 세월호 선장’ 검찰이 이준석(69) 세월호 선장에 대해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구형했다. 광주고법 형사 5부(부장판사 서경환)는 7일 이 선장 등 승무원 15명, 세월호 침몰 당시 기름 유출과 관련해 기소된 청해진해운(법인)에 대한 항소심 결심공판을 열었다. 공소유지를 맡은 검사는 시청각 자료를 활용한 의견 진술에서 “원심 구형량과 같은 형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검찰은 1심에서 이 선장에 대해 사형을, 승객 또는 동료 승무원에 대한 살인 혐의가 적용된 1등 항해사 강모(43)씨·2등 항해사 김모(47)씨·기관장 박모(54)씨 등 3명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을, 나머지 11명에 대해서는 징역 15~30년을 구형한바 있다. 검사는 특히 이 선장 등에게 적용된 승객 살인 혐의와 관련해 “선내 이동이 가능했고 조타실내 방송장비, 전화기, 비상벨, 무전기 등으로 퇴선 준비나 명령을 손쉽게 할 수 있었다”면서 “승객이 ‘퇴선하라’는 말 한마디를 간절히 기다리는데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검사는 또 “선내 대기하라는 방송을 하고 추가 조치를 원하는 승무원의 무전요청에 응하지도 않고 정작 자신들은 해경 경비정이 도착하자 먼저 탈출하고 승객 구조를 해경에 요청하지도 않았다”면서 “선장 등의 부작위(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음)는 살인의 실행과 동일하게 평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살인죄 판단의 핵심 쟁점인 선장의 탈출 전 승객 퇴선 명령 여부에 대해서는 “(했다고 주장하는) 일부 피고인들의 진술이 수시로 엇갈리고 있다”고 퇴선 명령은 없었던 것으로 간주했다. 이 선장은 최후 진술에서 “죽을 죄를 졌다. 죽는 그날까지 반성하고 사죄를 드리겠다”면서 “특히 단원고 학생들 유가족에게 고개숙여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변호인들은 피고인별로 선장 등 상급자의 지시 없이 활동할 수 없는 지위, 계약도 하지 않은채 사고 당일 처음으로 승선한 점, 일부 구조활동에 참여하거나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 등 개인적 사정을 부각하며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고 감형 또는 무죄 선고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선장은 지난해 11월 11일 1심에서 살인 등 주요 혐의가 무죄로 인정되면서 징역 36년을 선고받았다. 기관장 박씨가 동료 승무원에 대한 살인 혐의가 인정돼 징역 30년을 선고받는 등 나머지 14명은 징역 5~30년을, 청해진해운은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선고 공판은 오는 28일 오전 10시 열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준석 세월호 선장 사형 구형, 검찰 “퇴선 명령 없었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 사형 구형, 검찰 “퇴선 명령 없었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 사형 구형, 검찰 “퇴선 명령 없었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 검찰이 이준석(69) 세월호 선장에 대해 항소심에서도 사형을 구형했다. 광주고법 형사 5부(부장판사 서경환)는 7일 이 선장 등 승무원 15명, 세월호 침몰 당시 기름 유출과 관련해 기소된 청해진해운(법인)에 대한 항소심 결심공판을 열었다. 공소유지를 맡은 검사는 시청각 자료를 활용한 의견 진술에서 “원심 구형량과 같은 형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검찰은 1심에서 이 선장에 대해 사형을, 승객 또는 동료 승무원에 대한 살인 혐의가 적용된 1등 항해사 강모(43)씨·2등 항해사 김모(47)씨·기관장 박모(54)씨 등 3명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을, 나머지 11명에 대해서는 징역 15~30년을 구형한바 있다. 검사는 특히 이 선장 등에게 적용된 승객 살인 혐의와 관련해 “선내 이동이 가능했고 조타실내 방송장비, 전화기, 비상벨, 무전기 등으로 퇴선 준비나 명령을 손쉽게 할 수 있었다”면서 “승객이 ‘퇴선하라’는 말 한마디를 간절히 기다리는데도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검사는 또 “선내 대기하라는 방송을 하고 추가 조치를 원하는 승무원의 무전요청에 응하지도 않고 정작 자신들은 해경 경비정이 도착하자 먼저 탈출하고 승객 구조를 해경에 요청하지도 않았다”면서 “선장 등의 부작위(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음)는 살인의 실행과 동일하게 평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살인죄 판단의 핵심 쟁점인 선장의 탈출 전 승객 퇴선 명령 여부에 대해서는 “(했다고 주장하는) 일부 피고인들의 진술이 수시로 엇갈리고 있다”고 퇴선 명령은 없었던 것으로 간주했다. 이 선장은 최후 진술에서 “죽을 죄를 졌다. 죽는 그날까지 반성하고 사죄를 드리겠다”면서 “특히 단원고 학생들 유가족에게 고개숙여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변호인들은 피고인별로 선장 등 상급자의 지시 없이 활동할 수 없는 지위, 계약도 하지 않은채 사고 당일 처음으로 승선한 점, 일부 구조활동에 참여하거나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 등 개인적 사정을 부각하며 검사의 항소를 기각하고 감형 또는 무죄 선고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선장은 지난해 11월 11일 1심에서 살인 등 주요 혐의가 무죄로 인정되면서 징역 36년을 선고받았다. 기관장 박씨가 동료 승무원에 대한 살인 혐의가 인정돼 징역 30년을 선고받는 등 나머지 14명은 징역 5~30년을, 청해진해운은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선고 공판은 오는 28일 오전 10시 열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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