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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규씨의 시해는 ‘민주화 운동’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지난 2001년 민주화 보상심의 대상에 올랐으나 사안이 중대하다는 이유로 심의가 총선 이후로 연기된 것으로 확인됐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1일 “2001년 10월26일 신청된 김재규씨에 대한 보상심의건을 분과위에서 논의,심의를 총선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고 밝혔다. 위원회는 “지난달 15일 처음으로 분과위원회를 열었으나 이 안건 심의가 총선 및 탄핵정국에 영향을 미칠 것이 우려돼,총선 이후에 심의하는 것으로 잠정 결정했으며,구체적인 일정은 확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보상심의위원회의 심의절차는 시·도 기초조사 → 심의위 1차조사 → 심의위 2차조사(전문위원 조사) → 분과위원회 → 본위원회 등의 절차를 거치게 돼 있다. 관계자는 “현재 기초조사와 심의위 조사를 모두 마친 상태”라고 밝혔다. 위원회는 이 사건을 놓고 분과위에서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관련 인사들의 폭넓은 의견을 청취하자는 주장에 따라 한때 공청회도 검토했으나 공개적으로 공청회를 하면 위원회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자체 워크숍 형태의 비공개 모임으로 바꾸기로 했다. 분과위는 10명의 위원,본위원회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9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있으며,심의의결은 ‘과반수 이상 출석,출석 위원 과반수 이상 찬성’으로 이뤄진다.한편 김씨에 대한 민주화 보상심의가 본격화할 경우 ‘김재규 의사(義士)’ 논란이 재연될 가능성도 있어 파장이 예상된다. 김씨에 대한 민주화보상심의 요청은 김씨의 5촌 조카인 김진백씨가 냈으며 김씨는 김 전 부장이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것은 민주화운동으로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조덕현기자 hyoun@˝
  • 김인곤 광주대이사장 투신자살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인곤(76) 광주대 이사장이 투신 자살했다. 1일 오전 11시30분쯤 광주시 남구 진월동 광주대 호심관 앞에서 김 이사장이 피를 흘린 채 숨져 있는 것을 경비원 황모(66)씨가 발견했다. 황씨는 “경비실에 있다가 ‘퍽’하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이사장님이 양복차림으로 피를 흘린 채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평소보다 2시간 늦은 오전 11시쯤 호심관 21층 자신의 사무실로 출근했으며,비서가 준 녹차를 마시고 30분쯤 뒤 사무실 창문을 통해 뛰어 내렸다.투신 당시 부속실에 있던 비서실장과 여직원은 투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유족들은 “수십년간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광주지역 대동건설 박현동 회장과 동갑인 사돈 등 친구분들이 지난달 지병 등으로 잇따라 사망한 뒤 허탈해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지난 2월부터 재산정리도 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그의 조카사위인 신종희(53) 광주대 총무처장은 “지난 2월20일 학위수여식을 마치고 열린대학 이사회에서 이사장님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80평 빌라와 숨지기 전까지 살던 광주 학동 69평 빌라를 대학측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한편 이 사건을 조사중인 광주 남부경찰서는 “김 이사장이 숨지기 직전 미국에 있는 딸에게 송금할 3억원을 인출할 것을 비서실장 천모씨에게 지시했다.”고 밝혔다. 숨진 김 이사장은 1988년 13대 총선 당시 신민주공화당 전국구 1번으로 정계에 입문,민자당을 거쳐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으며 14대와 15대 때 전남 영광·함평 지역구에서 잇따라 당선돼 국회 행정위원장 등을 지냈다.성균관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김 이사장은 연세대 교육학 석사에 이어 미국의 웨스턴 일리노이주립대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74년 인성고,81년 광주대의 전신인 광주경상전문대를 설립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영애씨와 2남1녀를 뒀으며 장남 혁종(47)씨가 지난해 5월 광주대 총장으로 취임했다.유족과 학교측은 장례위원회를 구성,학원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빈소를 교내 종합강의동인 호심관 3층에 마련했다.발인은 5일 오전 10시,장지는 광주시 진월동 선산.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 [2일 TV 하이라이트]

    ●꼭 한번 만나고 싶다(오후 7시20분) 언니와 형부가 맞벌이를 해 조카 세호를 보살펴 준 기순씨.세호가 다섯 살 되던 해 언니 일순씨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기순씨는 안타깝게도 형부·조카와 헤어졌다.늘 아버지처럼 의지하던 형부와 언니의 분신인 조카 세호를 만나고 싶어하는 기순씨의 사연을 들어본다. ●라이프n조이(오전 8시30분)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는 말도 있듯,봄이 되면 유독 여자들의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학적으로 밝혀본다.휴대전화로 통화만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전자사전부터 모바일 뱅킹,교통카드, 호신기능과 엠씨스퀘어 기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실속있는 만물박사 휴대전화에 대해 알아본다. ●생방송60분-부모(오전 10시) 빡빡한 육아 일정 속에서도 만학도의 길을 걷는 부모가 늘고 있다.전문화시대,자기 계발이라는 측면에서도 부모는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자녀 교육비 못지 않게 부모 자신을 위한 교육비 항목을 당당하게 설정해놓고 있는 부모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본다. ●코미디쇼 4막5장(오후 10시50분) 졸업생과 낙제생의 차이는 오직 청력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노래를 완성해야 졸업할 수 있고 실패하면 무시무시한 벌칙이 기다린다.졸업이냐 벌칙이냐.이번주에는 필리핀 민요 ‘아낙’에 도전해본다.‘NG는 없다’코너에서는 제작진이 제시하는 엉뚱한 상황에 도전한다. ●이경규의 굿타임(오후 10시5분)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한다.에피소드는 ‘화장실 사건’.수업 중 급해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볼일을 봤지만 휴지가 없을때 어떻게 해야하나.이경규와의 추억을 폭로한 이휘재,이성진과 김성수의 숨겨진 사연,입만 열면 얼굴이 빨개지는 김진수의 모습을 지켜본다.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오후 11시20분) 가게 임대료를 올려달라는 집주인을 만나 사정해보려던 은영은 사귀자며 추근대는 집주인 상필을 보고 기겁을 한다.다시 만나기가 겁이 난 은영은 남편을 내보낸다.그런데 상필은 바로 남편의 절친한 친구다.아무것도 모르는 명호는 상필과 함께 있는 술자리에 은영을 불러내고…. ●인물현대사(오후 10시) 80년대 이름 모를 ‘전기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던 대공수사관 이근안.사실상 국가에 의해 ‘고문’이라는 범죄행위가 생산됐던 우리의 70,80년대는 도대체 어떤 사회였는가.이근안의 예를 통해 자기 정당성 없는 국가권력이 어떻게 ‘폭력’과 ‘공포’로 국민을 길들여 가는가 살펴본다. ˝
  • 현대 경영권 현정은 회장 ‘완승’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KCC와의 경영권 분쟁에서 완승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30일 경기도 이천 본사에서 열린 정기주총에서 현 회장의 신임이사 선임안을 찬성 77.8%(250만 3568주),반대 22.2%(71만 4141주)로 통과시켰다.최용묵 사장도 연임됐다.현 회장은 현대아산·현대상선에 이어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이사로 선임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그룹 총수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KCC는 주총 이후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면서 “보유주식에 대한 현대측의 장외매수 제안에 협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현 회장의 승리는 전날인 29일 법원이 KCC의 주식 53만 9046주(지분 7.5%)에 대해 의결권 제한 결정을 내린 데다 현대백화점과 현대중공업이 불참을 통해 중립의사 표명을 한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경영권 분쟁이 마무리 수순에 돌입했지만 양측의 손실은 만만치 않다.KCC는 이번 패배로 명분과 함께 실리를 잃는 상처를 입었다.‘시삼촌이 조카며느리의 기업을 탐냈다.’는 도덕적 비난과 함께 향후 보유 주식매각 과정에서의 금전적 손실도 우려되기 때문이다. 경영권 분쟁에서 이긴 현대 역시 손실이 적지 않다.고 정몽헌 회장 타계이후 8개월여 동안 경영권 분쟁에 시달리면서 구조조정과 그룹의 재도약 방안 마련이 지연됐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현 회장도 경영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김성곤기자 sunggone@˝
  • ‘죽음의 회전문’ 日 6세아 상가 문에 걸려 숨져

    |도쿄 연합|초등학교 취학을 한달 앞둔 6살 난 남자아이가 26일 도쿄 중심부에 있는 쇼핑상가 ‘롯폰기(六本木) 힐스’내 회전문에 걸려 숨졌다. 료 미조카와라는 이 소년은 이 건물 2층 정문에 난 회전문을 어머니보다 앞서 뛰어들어가다 목이 걸려 변을 당했다고 상가측 관리인들이 전했다.사고 당시 회전문에는 경비원이 아무도 없었다. 오사카부(府) 스이타(吹田)시 출신인 이 소년은 다음달 취학을 앞두고 있었으며 이날 아버지가 일하는 도쿄를 방문했다가 변을 당했다.경찰은 이번 사건이 상가측 직무유기에 의한 것으로 보고 사인에 대한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지난해 11월과 12월에도 이 건물에서 비슷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두 명의 소녀가 다쳤다.이날 사고가 발생한 뒤 회전문 제작사는 같은 종류의 회전문 판매를 중단키로 했다고 밝혔다.˝
  • [28일 TV 하이라이트]

    ●타임머신(오후 10시35분) 1932년 전남 영흥.혼례를 치르는‘초례청’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신부 앞에 신랑이 무려 셋이나 등장했다.영문을 모르는 신랑들은 서로 자신이 진짜 신랑이라고 주장한다.패널로 출연하는 가수 김지훈이 ‘늑대와 춤을’편을 통해 밤무대 가수로 깜짝 변신,무대의상을 입고서 나훈아의 ‘잡초’를 부른다. ●인사이드 월드(오후 1시25분) 홍수를 막기 위해 둑을 쌓는 공사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걸리고,홍수 피해는 매년 심해진다.그것에는 지역 의원과 건설업자들의 부정부패가 큰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백단나무와 코끼리 등의 밀매가 기승을 부리는데 이는 밀매신고의 복잡한 절차와 1년뒤에야 나오는 보상금이 원인이다. ●일요초청특강(오후 1시) 1월1일부터 일본 대중문화가 전면 개방되었다.일본 애니메이션은 2006년까지 유보됐지만 사실상 전면적인 개방이 이루어진 셈이다. 일본문화를 어떻게 맞이해야 충격을 줄일 수 있을지 또 우리 문화를 어떻게 보호 육성할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 본다. ●최동호의 세상읽기(오전 7시) 탄핵안 가결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전 국민의 70% 이상이 이 같은 사태에 반대하며 분노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학계와 법조계 사이에서 탄핵안이 위법이라는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대한변호사협회 김갑배 법제이사와 함께 ‘대통령 탄핵 소추안’의 법적 정당성에 대해 알아본다. ●폭풍속으로(오후 9시45분) 현준은 미선에게 빨리 정리해 내려가라고 하지만 미선은 너무 힘들어 이제부터는 현준을 기다리지 않겠다고 말한다.현태는 기호의 지시를 받고 모든 일을 순조롭게 처리하며 조직에서 서서히 신뢰를 쌓아간다.한편 선우는 아버지 병석에게 미선을 결혼할 여자라고 소개하고 미선은 당황해 한다. ●일요일은 101%(오후 6시20분)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멋진 직업 ‘호텔리어’.숙박뿐 아니라 모든 문화생활을 한꺼번에 누릴 수 있는 꿈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진다.호텔에서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도전과 희망을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느껴본다.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과감히 취업전선에 뛰어든 인재들을 만나본다. ●무인시대(오후 10시20분) 아란은 황룡이 살아날 길은 장남인 지순을 죽이는 길밖에 없다 하고,이에 노한 이의민은 아란을 별채에 감금시킨다.최충수는 황도군의 추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하나 조카 우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이의민은 전존걸을 회유하려 하며 무인의 자부심과 자신과 군사들의 목숨을 놓고 고민한다. ˝
  • ‘맹부삼천지교’ 치맛바람보다 무서운 바짓바람

    26일 개봉하는 ‘맹부삼천지교’는 역발상의 기발한 제목으로 절반쯤 영화 분위기를 전한다.무지렁이 아버지의 맹목적 부성애가 좌충우돌 빚는 코미디는 연신 웃음을 자아낸다. 그런데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교육 공화국’이라는 세태 풍자와 감동도 들어 있다.‘맹부‘로 데뷔하는 김지영 감독은 신인답지 않은 솜씨로 코믹과 감동의 균형감을 유지한다.그래서 영화가 끝나도 한동안 웃음과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국졸 학력의 맹만수(조재현)가 하나뿐인 아들 사성(이준)에 대해 갖는 애정은 남다르다.끔찍이도 사랑하던 아내와 맞바꾼 자식이기 때문.사성을 상여소리꾼으로 키우겠다는 소리꾼의 제의에 충격을 받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면서 만수의 ‘삼천지교’(三遷之敎)는 시작한다.처음 자리잡은 곳은 달동네 옥탑방.주민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트로트 리사이틀을 하는 사성을 보고 경악해 다시 환경 좋은 아파트로 이사한다.사성을 명문대로 보내려는 만수에게 그곳이 양에 찰 리 만무.‘일당십락설’(집·학교·학원이 1㎞ 안에 있어야 명문대에 합격한다는 유행어)을 듣고 사채를 얻어 강남 아파트로 이사한다. 앞 집에 전국에서 1등 하는 학생이 산다는 말에 무조건 입주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심야의 못질 소리와 험상궂은 폭력배들.조카 현정(소이현)의 공부를 위해서라면 망가짐도 마다 않는 조폭 최강두 일당이 숨어 살고 있다. 아들 공부를 방해하는 것이라면 소음 하나도 참지 못하는 만수지만 우락부락한 인상에다 온몸은 문신으로 화장(?)하고 싸움엔 이골난 조폭들 앞에서 참을 수밖에 없다.술집 아가씨를 불러 난장판을 벌여도 울며 겨자먹기로 견디던 만수의 분노는 사성의 성적이 떨어지자 폭발한다.강두 일당을 몰아내려는 만수의 다양한 작전과 강두 일당의 대응을 중심으로 ‘웃음의 속도’는 빨라진다. 감독은 영화가 흐를수록 만수-사성,강두-현정을 중심으로 부성애 비중을 늘려간다.돌잔치 때 집으라는 연필 대신 마이크를 잡아 가수로서 ‘될성부른 나무’ 자질을 보였던 사성은 가수의 끼를 누르지 못해 아버지의 헌신이 ‘고마운 부담’으로 다가온다.현정에게도 남모를 비밀이 있다.두 관계를 따라가던 감동의 부피와 깊이는 사성의 콘서트 장면에 이르러 만개하고 콧잔등을 알싸하게 만든다.웃음과 감동의 중심은 조재현.영화 속 비중만큼 그의 연기도 커 보인다. 이종수기자˝
  • 월트 디즈니 주주들 반란

    퇴진 압력에 시달려온 마이클 아이즈너 월트디즈니 회장겸 최고경영자(CEO)가 3일(현지시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힘겹게 자리를 지켜냈다.그러나 전체 주주의 43%가 아이즈너 회장에 대한 지지를 철회,아이즈너는 자리 보전 성공에도 불구하고 ‘주주들의 대반란’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 3개월간 아이즈너와 경영권 다툼을 벌여온 로이 디즈니(월트 디즈니 창업주의 조카)는 아이즈너가 회장 및 CEO에 재선임됐음에도 불구,43%의 반대표가 나온 것은 미 기업 역사상 유례없는 불신임투표라고 강조하고 이날의 결과가 아이즈너를 퇴진시키기 위한 일련의 공세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이즈너 회장에 대한 반대표가 예상보다 훨씬 많은데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1984년 이래 디즈니를 책임져온 아이즈너는 지나치게 권위적인데다 기업경영에 대한 전략적 사고가 미흡하다는 비난에 시달려왔다. 디즈니는 주총 직후 아이즈너가 겸임하고 있던 회장과 CEO직을 분리,아이즈너는 CEO직만 맡고 조지 미첼 이사가 새 회장직을 맡을 것이라고 밝혔다.이는 주주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궁여지책이지만 일단 주주들의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한 상황에서 이를 완전히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여 아이즈너의 앞날은 매우 불투명해 보인다. 유세진기자 yujin@˝
  • 평택 실종초등생 넉달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이혼녀와 결혼한 사실이 가족들에게 알려질 것이 두려워 의붓딸을 살해한 뒤 야산에 암매장한 3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 경기도 평택경찰서는 2일 의붓딸을 야산으로 데려가 살해한 뒤 암매장한 혐의(살인 및 사체유기)로 박모(32·화물차 운전사)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박씨는 지난해 10월25일 오후 2시40분쯤 평택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장모(8·초등 1년)양에게 “과자 사 먹어라.”며 1000원을 준 뒤 밖으로 나가는 장양을 곧바로 뒤따라 나갔다.이어 박씨는 “놀러 가자.”며 자신의 옵티마승용차에 장양을 태워 집에서 40여㎞ 떨어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 야산으로 데려가 손으로 입을 막아 질식시켜 살해한 뒤 시체를 산책로에서 20여m 떨어진 계곡에 파묻은 혐의다. 경찰 조사결과 박씨는 2002년 5월 아내(32)와 결혼한 뒤 아내가 두번째 남편에게서 낳은 장양을 주민등록상 동거인(조카)으로 올려 함께 살면서 장양이 의붓딸이라는 사실을 숨겨왔으나 최근 가족 친지들에게 이런 사실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박씨는 경찰에서 “딸이 있는 이혼녀라는 사실을 부모에게 숨기고 결혼했는데,친딸이 3살이 되면서 의붓딸에게 자꾸 ‘언니’라는 말을 하고 우리 가족들에게도 사실이 알려질까봐 두려워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경찰은 사건 당일 밤 10시 장양의 어머니로부터 ‘딸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신고를 받고 야산 수색과 아동보호시설 탐문에 나섰으나 장양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자 전담반을 편성,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이후 장양이 실종된 당일 ‘충남 합덕에서 휴대전화로 동서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박씨의 말을 확인한 결과,발신지가 평택 안중인 사실을 밝혀내고 박씨에게 혐의점을 두고 수사를 벌이다 1일 밤 박씨로부터 범행일체를 자백받았다. 경찰은 2일 오전 11시쯤 장양의 시체를 파묻었다는 합덕읍 성동리 야산에서 시신 발굴작업을 벌였으며 정확한 사인규명을 위해 부검을 실시하기로 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7)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상)

    지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 안으로 편입시켜 그들의 역사화를 시도하고 있다.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중국의 이런 태도를 비난하며 반발하고 있다. 그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에는 조선족이라 불리는 200여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그들의 생김새,언어,전통,음식은 한국인들과 닮은 데가 많다.한글과 한문을 함께 사용하는 문자생활,조상 제사하는 방법과 장례 풍속 등의 문화생활도 유사한 데가 있다. 그들의 국적은 중국이며 자식들은 중국인과 똑같은 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다.특히 동북 3성이라 일컫는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조선족들은 한글과 한국 역사를 함께 가르치는 조선족 특유의 교육제도를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그들은 가난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일한다.돈을 벌기 위해서다.그런데 참 서럽다.한국인의 지독한 차별대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문제로 중국에 대해 분노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고구려 땅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들을 차별대우하는 한국인의 태도 사이에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조선족은 한국 슬픔의 한 원류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태도와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태도는 중국과 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며 조선족은 분명 한국 슬픔의 한 원류다.동북 3성이 아닌 중국의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조선족들도 많은데 이들은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한족(漢族)·몽골족·만주족 등으로 귀화했는데,이들 사는 곳을 두고 조선족들은 관내(官內)로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교포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1992년부터 꽤나 긴 시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만주와 북만주,일본의 총련과 민단사회를 두루 방문 여행했다. 특히 동북 3성인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여행은 러시아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카레이츠와 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갖게 했다.당시 나는 조선족의 기구한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족 역사학회’ 이사 서명훈(徐明勳) 선생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그의 아파트로 방문했다. 1992년 여름에서 1998년까지 사이에 있었던 20여 차례의 여행기록을 토대로 하여 그 이후의 변화된 사정들을 전화 취재와 자료로 보완하면서 한국 슬픔의 뿌리를 들추어 본다. 문: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徐:글쎄요.조선족 역사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적이 없어놔서….시작은 조선에서였지만,과정은 후금(後金),청(淸)나라,중국을 거쳐왔기 때문에 각 나라와 시대의 한 부분 또는 토막에 묻혀 있어서…. 문: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보시는지요. 徐:중국에서 출판된 어떤 조선인 이민사에 관한 기록에 보면 19세기 중엽 또는 19세기 말엽부터였다고 하더군요.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조선족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중국과 조선 역사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일찍이 17세기부터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민을 왔음이 확인됩니다. 문:중국과 조선의 역사 기록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을는지요. 徐:청대통사(淸代通史),헤이룽장이민개요(黑龍江移民槪要),성정회람(省政回覽),한국이민사연구(韓國移民史硏究),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태조고황제실록(太祖高皇帝實錄),청사고(淸史稿),청조사료총간(淸朝史料叢刊),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명청사료(明淸史料),만문노로(滿文老櫓),심관록(沈館錄),조선통사(朝鮮通史),선양일기(沈陽日記),랴오둥문헌미략(遼東文獻微略),중국동북농업사,팔기통지(八旗通志),지린통지(吉林通志),헤이룽장조선민족 등이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그런데 이 자료들 중에는 겨우 몇 마디,몇 글자로밖에 쓰여 있지 않은 것도 있는데,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뭐랄까요,중국역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문제는 바로 그 점입니다.한 두 글자로라도 적혀 있다는 것 말입니다.소위 조선인의 중국 이민을 연구한다는 이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역사란 많고 풍부한 자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淸에 잡힌 조선포로 1만3000명 귀환 기록 없어 문:17세기부터 중국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면 구체적인 시기나 원인을 알 수 있습니까. 徐:17세기 초 조선과 청국 사이에는 수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지 않습니까.1627년 1월13일 후금(後金)의 황제 황태극이 3만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한 일이 있었지요.한국에서는 정묘호란이라 부르지요. 그 후 1636년 3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그해 12월9일 만주군,몽골군,한군을 합한 12만 대군으로 재차 조선을 공격했는데 병자호란이 그것입니다.패한 조선에서는 수천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정묘호란 때의 포로가 4986명이었고,병자호란 때는 3000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또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명나라를 지원하려고 파견되었던 조선군 1만 3000명 중에서 5000명이 후금에 투항하여 포로가 된 일도 있었지요. 이렇게 보면 이미 1618년에서 1636년에 이르는 18년 동안에 무려 1만 3000여명이라는 많은 조선 군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는데,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들은 결국 청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었겠지요. 문:전쟁 포로를 이민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徐:그 점이 조선족 역사의 특성입니다.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에서 살게 된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하는데,중국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경우지요.앞에서 살핀 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끌려와서 주로 노예신분이 되어 살았습니다. 둘째는 납치된 사람들입니다.즉 후금은 만주 땅에다 나라를 세운 뒤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에서 사람을 납치해 와서 노비로 삼았지요.현재 랴오닝성의 흥경노성(興京老成) 밖에 있는 고려촌이 그 증거입니다. 셋째는 중국으로 피신해온 사람들이지요.정치범이나 일반 형사범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대표적인 경우로 1625년 인조반정 때 이괄(李适)과 함께 처형당한 한명렴(韓明廉)의 아들 한윤(韓潤)과 조카 한의(韓義)가 후금으로 피신하여 후금의 군인 간부가 된 일이 있지요.한윤,한의는 뒷날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길 안내를 맡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정여립 모반사건 때 화를 피해서 온 정(鄭)가 성씨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굶주림 피해 국경넘어 中동북3성 정착 넷째는 유민(流民)들입니다.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은 자주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에 와서 정착했습니다.17세기 조선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봉건통치 계급의 참혹한 착취를 피하거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는 일이 빈번했지요. 토지가 넓고,인구는 매우 적으며,압제와 수탈과 부역이 적은 중국 쪽으로 피해서 살고 싶은 욕망이 크게 작용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족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이들 유민이었습니다.살아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경 탈출을 한 이들이 본격적인 중국이민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들에 관한 일은 1628년,1631년,1635년,1639년,1686년의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중국의 책임자가 조선의 왕에게 국경을 봉쇄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단속해 달라는 강력한 항의가 주를 이루고 있지요. 다섯째는 혼인정책에 의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조선의 공주가 청나라 왕실과 결혼하거나 조선 대신들의 딸,손녀가 청나라 왕실 귀족들과 혼인한 일이 많았습니다.조선의 공주나 대신들의 딸들이 청나라로 시집을 오게 되면 이들을 따라서 오는 조선인이 많았지요.이들은 친인척들끼리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비교적 높은 벼슬을 유지하면서 중국화되었지요. 그 외에 청나라 때에는 조선에서 여자들을 데려와 혼인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조선에서는 벼슬아치들의 첩실 몸에서 난 어린 딸들을 주로 보내주었지요.이들도 뒷날 중국화했습니다. 문:그러면 포로 등 다섯 부류로 나눠진 조선인들이 중국에 와서 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요. 徐:그들의 직업은 크게 나누어 가장 많은 숫자가 농사짓는 노예였고,더러는 귀족 가문에 소속된 노예도 있었고,팔기군(八旗軍)의 병사도 있었으며,매우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사회 상층부 인물도 있었습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7)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상)

    지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 안으로 편입시켜 그들의 역사화를 시도하고 있다.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중국의 이런 태도를 비난하며 반발하고 있다. 그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에는 조선족이라 불리는 200여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그들의 생김새,언어,전통,음식은 한국인들과 닮은 데가 많다.한글과 한문을 함께 사용하는 문자생활,조상 제사하는 방법과 장례 풍속 등의 문화생활도 유사한 데가 있다. 그들의 국적은 중국이며 자식들은 중국인과 똑같은 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다.특히 동북 3성이라 일컫는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조선족들은 한글과 한국 역사를 함께 가르치는 조선족 특유의 교육제도를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그들은 가난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일한다.돈을 벌기 위해서다.그런데 참 서럽다.한국인의 지독한 차별대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문제로 중국에 대해 분노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고구려 땅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들을 차별대우하는 한국인의 태도 사이에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조선족은 한국 슬픔의 한 원류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태도와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태도는 중국과 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며 조선족은 분명 한국 슬픔의 한 원류다.동북 3성이 아닌 중국의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조선족들도 많은데 이들은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한족(漢族)·몽골족·만주족 등으로 귀화했는데,이들 사는 곳을 두고 조선족들은 관내(官內)로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교포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1992년부터 꽤나 긴 시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만주와 북만주,일본의 총련과 민단사회를 두루 방문 여행했다. 특히 동북 3성인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여행은 러시아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카레이츠와 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갖게 했다.당시 나는 조선족의 기구한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족 역사학회’ 이사 서명훈(徐明勳) 선생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그의 아파트로 방문했다. 1992년 여름에서 1998년까지 사이에 있었던 20여 차례의 여행기록을 토대로 하여 그 이후의 변화된 사정들을 전화 취재와 자료로 보완하면서 한국 슬픔의 뿌리를 들추어 본다. 문: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徐:글쎄요.조선족 역사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적이 없어놔서….시작은 조선에서였지만,과정은 후금(後金),청(淸)나라,중국을 거쳐왔기 때문에 각 나라와 시대의 한 부분 또는 토막에 묻혀 있어서…. 문: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보시는지요. 徐:중국에서 출판된 어떤 조선인 이민사에 관한 기록에 보면 19세기 중엽 또는 19세기 말엽부터였다고 하더군요.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조선족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중국과 조선 역사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일찍이 17세기부터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민을 왔음이 확인됩니다. 문:중국과 조선의 역사 기록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을는지요. 徐:청대통사(淸代通史),헤이룽장이민개요(黑龍江移民槪要),성정회람(省政回覽),한국이민사연구(韓國移民史硏究),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태조고황제실록(太祖高皇帝實錄),청사고(淸史稿),청조사료총간(淸朝史料叢刊),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명청사료(明淸史料),만문노로(滿文老櫓),심관록(沈館錄),조선통사(朝鮮通史),선양일기(沈陽日記),랴오둥문헌미략(遼東文獻微略),중국동북농업사,팔기통지(八旗通志),지린통지(吉林通志),헤이룽장조선민족 등이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그런데 이 자료들 중에는 겨우 몇 마디,몇 글자로밖에 쓰여 있지 않은 것도 있는데,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뭐랄까요,중국역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문제는 바로 그 점입니다.한 두 글자로라도 적혀 있다는 것 말입니다.소위 조선인의 중국 이민을 연구한다는 이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역사란 많고 풍부한 자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淸에 잡힌 조선포로 1만3000명 귀환 기록 없어 문:17세기부터 중국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면 구체적인 시기나 원인을 알 수 있습니까. 徐:17세기 초 조선과 청국 사이에는 수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지 않습니까.1627년 1월13일 후금(後金)의 황제 황태극이 3만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한 일이 있었지요.한국에서는 정묘호란이라 부르지요. 그 후 1636년 3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그해 12월9일 만주군,몽골군,한군을 합한 12만 대군으로 재차 조선을 공격했는데 병자호란이 그것입니다.패한 조선에서는 수천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정묘호란 때의 포로가 4986명이었고,병자호란 때는 3000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또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명나라를 지원하려고 파견되었던 조선군 1만 3000명 중에서 5000명이 후금에 투항하여 포로가 된 일도 있었지요. 이렇게 보면 이미 1618년에서 1636년에 이르는 18년 동안에 무려 1만 3000여명이라는 많은 조선 군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는데,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들은 결국 청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었겠지요. 문:전쟁 포로를 이민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徐:그 점이 조선족 역사의 특성입니다.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에서 살게 된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하는데,중국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경우지요.앞에서 살핀 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끌려와서 주로 노예신분이 되어 살았습니다. 둘째는 납치된 사람들입니다.즉 후금은 만주 땅에다 나라를 세운 뒤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에서 사람을 납치해 와서 노비로 삼았지요.현재 랴오닝성의 흥경노성(興京老成) 밖에 있는 고려촌이 그 증거입니다. 셋째는 중국으로 피신해온 사람들이지요.정치범이나 일반 형사범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대표적인 경우로 1625년 인조반정 때 이괄(李适)과 함께 처형당한 한명렴(韓明廉)의 아들 한윤(韓潤)과 조카 한의(韓義)가 후금으로 피신하여 후금의 군인 간부가 된 일이 있지요.한윤,한의는 뒷날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길 안내를 맡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정여립 모반사건 때 화를 피해서 온 정(鄭)가 성씨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굶주림 피해 국경넘어 中동북3성 정착 넷째는 유민(流民)들입니다.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은 자주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에 와서 정착했습니다.17세기 조선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봉건통치 계급의 참혹한 착취를 피하거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는 일이 빈번했지요. 토지가 넓고,인구는 매우 적으며,압제와 수탈과 부역이 적은 중국 쪽으로 피해서 살고 싶은 욕망이 크게 작용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족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이들 유민이었습니다.살아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경 탈출을 한 이들이 본격적인 중국이민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들에 관한 일은 1628년,1631년,1635년,1639년,1686년의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중국의 책임자가 조선의 왕에게 국경을 봉쇄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단속해 달라는 강력한 항의가 주를 이루고 있지요. 다섯째는 혼인정책에 의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조선의 공주가 청나라 왕실과 결혼하거나 조선 대신들의 딸,손녀가 청나라 왕실 귀족들과 혼인한 일이 많았습니다.조선의 공주나 대신들의 딸들이 청나라로 시집을 오게 되면 이들을 따라서 오는 조선인이 많았지요.이들은 친인척들끼리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비교적 높은 벼슬을 유지하면서 중국화되었지요. 그 외에 청나라 때에는 조선에서 여자들을 데려와 혼인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조선에서는 벼슬아치들의 첩실 몸에서 난 어린 딸들을 주로 보내주었지요.이들도 뒷날 중국화했습니다. 문:그러면 포로 등 다섯 부류로 나눠진 조선인들이 중국에 와서 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요. 徐:그들의 직업은 크게 나누어 가장 많은 숫자가 농사짓는 노예였고,더러는 귀족 가문에 소속된 노예도 있었고,팔기군(八旗軍)의 병사도 있었으며,매우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사회 상층부 인물도 있었습니다.
  • [사건 패트롤] 왕따에 무너진 中조기유학생

    “칼을 들 때 두려움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돈 없다고 한 학기 내내 왕따를 당하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5일 서울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중국 베이징의 명문 중학교(한국의 고교 과정)에 조기유학을 갔다가 방학을 맞아 귀국한 뒤 출국 하루를 앞두고 강도짓을 벌인 전모(17)군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전군과 마주한 어머니 김모(41)씨는 “남들 1000원 쓰면 100원은 써야지.엄마에게 말하면 어떻게든 보내줬을 텐데 왜 여기까지 왔냐.남편 잃고 너 하나 보고 살았는데…”라며 가슴을 쳤다. 전군은 이날 0시5분쯤 영등포구 당산동 H아파트에서 귀가하던 약사 이모(39·여)씨를 흉기로 위협,현금 8만 4000원과 신용카드 3장을 빼앗다 현장에서 검거됐다. 2년 전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영등포 인근 시장에서 행상을 하는 홀어머니를 둔 전군은 사촌동생(16)과 함께 조기유학을 가게 됐다.음식업을 하는 고모부 내외가 7대 독자인 조카를 제대로 공부시켜야 한다며 유학을 보낸 것.고모부 내외의 후원으로 중국 학교에 입학했지만 전군에게 지난 한 학기 동안의 유학 생활은 악몽과 같았다. 2인1실의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전군에게 처음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학비를 내고 남은 돈으로 같은 또래의 한국 학생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학교 밖에서 식사를 하며 공부도 했다.성적도 중간은 됐다.그러나,전군의 집이 가난하고 용돈마저 궁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따돌림’이 시작됐다.한 달에 10만원 안팎의 용돈으로 친구들과 어울릴 수도,밥값 한번 내기도 힘들었다.주위에서 “넌 돈도 없냐.”고 면박을 받거나 “밥도 한번 못 산다.”면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전교에 소문이 퍼지면서 전군은 “저기 왕따 지나간다.”는 비아냥에 시달려야 했다. 혼자 기숙사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도 부쩍 많아졌다.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됐다.한국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왕따’를 중국에서 겪으며 고민을 나눌 상대도 없었다. 비싼 전화요금 때문에 한달에 한번 어머니와 통화한 게 고작이었다.지난달 10일 귀국한 전군은 26일 출국을 앞두고 부엌칼을 가슴에 품었다.전군은 “같은 한국친구를 사귀려면 돈이 필요했다.”고 말했다.경찰은 이날 전군에 대해 강도협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우리회사 킹카퀸카] 신한캐피탈 김혜원씨

    신한금융지주의 자회사인 신한캐피탈 총무부 소속 비서실에 근무하는 입사 5년차 김혜원(28) 사원.외모·마음씨 등 모든 면에서 신한캐피탈의 ‘꽃’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을 받고 있는 최고의 미혼 ‘퀸카’다. 김씨를 ‘인기짱 예비 신부감’으로 추천한 같은 회사 영업2부 고광희 차장은 김씨와의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지난해 제 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그런데 아내가 출산을 하고 퇴원한 지 3일만에 아이가 많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게 됐어요.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그때 혜원씨가 사내 메신저로 메시지를 보내왔더군요.자신도 조카가 어릴 때 아파서 크게 걱정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으니 제 아이도 금방 건강해질 거라고 말입니다.참 고마웠습니다.” 김씨의 ‘재치만점’ 메시지를 받고 행복한 한때를 경험한 사원은 고 차장만이 아니다.신한캐피탈 직원들은 늘 김씨의 밝은 미소를 접하고 있다. “평소에도 대화할 기회가 많았어요.같은 전철을 탔거든요.외모뿐 아니라 심성도 무척 곱고 바른 사람입니다. 신앙심(기독교)도 깊고 결혼관도 확실하고 요즘 보기드문 현모양처감이랄까요.” 고 차장이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본 소감이다. 고 차장은 또 2년전 북한산 등반대회에서 김씨가 도시락으로 초밥을 싸와 여러 사람의 미각을 즐겁게 했던 일도 기억한다.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 주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꼭 인연을 만났으면 좋겠네요.”아까운 신부감이 솔로로 세월을 보내는 게 못내 안타까워 중신에 나선 고 차장의 바람이다. 연락처 (02)773-8038.
  • 임진왜란 '진정한 승자는 한국’

    “고요제(後陽成)천황을 북경으로 옮길 것이니,준비를 해주었으면 좋겠다.…천황에게는 북경 주변의 10개 영국(領國)을 헌상할 것이다.…너를 중국 관백(關白·왜의 최고 직위)에 임명한다.수도 주변의 100군데 영국을 줄 것이다.…조선의 국왕에는 기후(岐阜)의 재상을 앉힐 것이다.” 왜군이 서울에 진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5월18일 중국 점령도 머지않았다며 ‘망상과 공상’을 담아 조카인 히데쓰쿠(秀次)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30여년 동안 일본에 머문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국립진주박물관이 펴낸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만 장원철 번역)는 그의 ‘일본사’에서 히데요시와 임진왜란에 관한 부분만 발췌했다.히데요시의 편지도 이 책에 실려 있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을 왜군(倭軍)의,그것도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편에서 바라보았다.일본인들에게 인기 있는 히데요시는 “추악한 용모의 소유자로…극도로 오만했으므로 누구나 싫어했다.”고 평가절하한 반면 조선침략의 선봉에 선 고니시는 영웅적으로 묘사했다.히데요시가 천주교를 탄압한 ‘이교도(異敎徒)’였던 반면 세례명이 ‘아고스티뇨’인 고니시는,스페인의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를 전쟁이 한창인 조선 땅으로 초청할 정도로 독실했다는 사실이 한몫했을 것이다. 프로이스의 기록도 임진왜란의 승자가 일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프로이스에 따르면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하기까지 파죽지세로 조선군을 격파했지만,곧 어려움에 처했다.조선군은 처음에는 왜군을 두려워했으나 복종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전력을 다하여 과격하게 저항했다.식량을 수송하는 군사들은 매복한 조선 병사들에 ‘약탈’당하기 일쑤였다.조선 수군도 일본 배를 발견하면 곧바로 습격하여 ‘해적질’을 했다.크고 견고한 조선 배는 왜군 것을 압도했으며,조선군은 해전에도 훨씬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왜군의 성채가 하루에 오갈 수 있는 거리마다 만들어졌음에도,300∼500명의 병력조차 기습이 두려워서 오가기가 어려웠다.당시 일본에서는 먹지도 않던 옥수수로 연명하면서,추위와 물기에 약한 짚신으로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던 왜군의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중국으로의 원정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명나라의 원군은 고시니로 부터 평양성을 탈환하는 등 전투력도 강했다.중국인은 천성이 나약하여 왜군이 나타나기만 해도 도망갈 것이므로 쉽게 중국까지 점령할 수 있다는 인식은 크게 잘못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일부 왜구(倭寇)가 중국의 해안지대를 노략질하면서 평생 무기를 잡아본 적이 없는 중국인의 무리를 쉽게 물리친 것을 두고 오판한 것이었다. 결국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속내는 조선을 점령하여 일본내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라고 프로이스는 해석한다.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선 땅을 영지로 나눠주고,일본 땅은 자신의 가신으로 채운다는 구상이었다는 것이다.도서출판 부키.1만 6000원. 서동철기자 dcsuh@˝
  • 盧 “閔씨 철저수사… 원칙 처리”

    노무현 대통령은 5일 강원지역 언론인과의 간담회에서 민경찬씨 문제와 관련,“국민들에게 또 하나의 의혹을 던져드린데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철저히 수사를 통해 처벌받을 일이 있으면 단호하게 원칙대로 처벌해 이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사태가 상식 밖의 사태인 것은 틀림없다.”면서 곤혹스러운 입장을 내비쳤다. 이어 “보통사람이 650억원을 쉽게 모을 수 있겠느냐.”면서 “그래서 뭔가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민씨 거액모금 상식밖의 일” 노 대통령은 “대통령 주변에 있는 사람이 별로 득 본 일이 없는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그런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참 납득이 안 간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가까이 줄서서 득보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해오고 있고,실제로 조카들로부터 취직했다가 역차별을 받았다는 불평을 듣고 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참으로 난감하다.”면서 “민경찬씨가 사람들을 속인 것인지,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접근한 것인지 알수 없지만 참 (이런)세태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과거 정권에서는 여러가지 풍문이 많이 돌아다녔지만 민정수석실에서 대통령이 두려워 조사를 하지 않고 우물우물 덮어뒀다가 뒤에 병을 크게 키운 사례가 있지만 지금 민정수석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명했다. 이어 “최근 (민씨건)풍문이 접수돼 조사를 시작하는데 민경찬씨가 인터뷰를 해서 조사를 제대로 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빠르게 먼저 노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의 경선자금 수사와 관련,“검찰이 경선자금을 본격적으로 수사하자고 해서 수사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그래서 이것을 편파적 수사라든지 표적수사라고 하는 것은 좀 억지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은 “저는 경선자금이든 무슨 자금이든 한번도 누구를 표적으로 삼아서 수사하라고 검찰에 명령한 일도 없고,요청한 일도 없다.”면서 “하늘에 맹세를 하는데 진실”이라고 역설했다. ●“재신임 야당 때문에 철회못해” 노 대통령은 재신임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국민들의 뜻을 묻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 아직 철회하지 않고 있다.”면서 “재신임을 철회하면 야당이 흔쾌히 동의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야당을 비판했다. 이어 “철회하면 이랬다 저랬다 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대통령이라는 공격이 (야당으로부터)반드시 들어오게 돼 있어서 이 문제를 함부로 할 수도 없다.”고,재신임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지 못하는 이유를 들었다. ●“불법 대선자금 野 10분의1 안 넘을것” 노 대통령은 “야당이야 모든 것을 다 쓸어담아서 (내가 쓴 불법선거 자금이 한나라당의)10분의1을 넘었다고 하고 싶겠지만,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계산이 다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저는 지금도 결코 10분의1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곽태헌기자 tiger@˝
  • [임영숙 칼럼] 어머니의 새우잠

    며칠전 TV 드라마 ‘대장금’을 보다가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의 답을 찾았다.아니 답을 찾았다기보다 이미 알고 있었던 답을 한마디로 요약한 단어와 맞닥뜨리고,오래 묵어 거의 화석화된 가슴속 깊은 상처 하나가 다시 생생하게 살아 남을 느꼈다. 의녀 장금이가 당돌하고 맹랑하게도 대비마마에게 낸 수수께끼 문제에 그 단어가 들어 있었다.장금이는 어떤 사람인지 맞히는 수수께끼 문제를 내면서 이렇게 말한다.“이 사람은 아주 오래전부터의 식의(食醫)로서 그 집안의 노비나 다름이 없으나 실은 그 집안 모든 사람의 스승이옵니다.” 이 수수께끼의 답은 ‘어머니’다. 내 가슴속 묵은 상처는 어머니의 새우잠 자는 모습이다.어린시절 명절은 풍요롭고 즐거운 축제였는데 그 축제의 기억 한쪽에는 항상 어머니의 새우잠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큰댁인 우리 집을 찾은 일가친척들이 돌아가고 북적이던 집안이 잠시 조용해질 때 어머니는 낮잠을 주무셨다.바느질 솜씨 음식 솜씨 좋기로 소문 난 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오빠들의 설빔과내 색동옷은 물론 차례음식까지 장만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명절을 그렇게 마무리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소에는 낮잠을 주무시지 않던 어머니가 명절날 오후 늦게 이불은 물론 베게도 없이 건넌방 한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는 모습은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태산 같이 든든하던 어머니가 한없이 작고 고단해 보이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김승희 시인은 한국에서 직업을 가진 기혼여성들의 삶을 “아프거나 바쁘거나-그 둘 중 하나만을 산다.”고 표현했다.이 글을 읽으면서도 직업을 가진 내 삶보다 어머니의 새우잠이 먼저 떠 올랐으니 어지간히 깊게 각인된 기억인 듯싶다.장금이의 수수께끼처럼 한 집안의 노비이자 스승인 어머니의 모습은 내게 새우잠으로 압축돼 남아 있는 것이다. 올 설에 나도 새우잠을 잤다.그러나 어머니와 올케랑 함께 친정집 안방에서 잔 새우잠은 참으로 달콤했다.결혼 후 처음 친정에서 설 명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올케 덕분이었다.명절이 끝나는 날 상경하는 기차표까지 마련해 놓았으니 내려오지 않겠느냐고 몇번씩 전화를 거는 올케의 성화에,조카가 차례상을 차리는 시댁 대신 친정에서 설 명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다른 관계로 만났으면 좋았을 사람도 시댁의 ‘시’자가 들어가면 어색해지고 시댁이 싫어서 시금치도 싫어하는 여성들이 있다지만 올케는 명절에 시누이를 불러 들일 만큼 스스럼없다.게다가 팔순의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똑소리나게 야무진 살림꾼인 그 올케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어머니 못지않게 뛰어난 올케의 음식 솜씨에 감탄하면서,서울보다 시골 채소와 고기가 더 맛있다고 바리바리 싸주는 꾸러미들을 쑥스럽게 받으면서 혈육과 다름없는 따뜻함을 느낀다. 그 올케에게도 이른바 명절증후군,명절이 골치 아프고 짜증나는 여자들의 증세가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친정집 부엌에서 잠시 떠올랐다.어머니는 내게 집안일을 가르치지 않으셨는데(솜씨 좋은 여자가 오히려 고생하게 된다고 생각하셨던 듯싶다) 올케도 조카딸에게 애써 부엌일을 가르치고자 하는 듯이 보이진 않았다.거꾸로 집안일 못하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는 나는 딸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남에게 먹이는 즐거움과 보람’을 강조해 왔고 부엌일을 하도록 부추겨 왔다.그런 내게 한 친구는 “딸이 결혼하면 지겹도록 할 부엌일을 왜 지금부터 하게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우리가 새우잠을 자는 사이 아이들은 건넌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며 즐겁게 놀았다.올케의 헌신으로 아직도 푸근한 명절을 누리는 그들이 훗날 어머니가 됐을 때 딸들을 어떻게 키울까.조카딸은 지금 자기 어머니의 새우잠을 어떤 모습으로 가슴에 담고 살까. 주필 ysi@
  • 이영로씨 가족 주내 소환/특검, ‘300억 제공설’ 관련

    특검이 ‘300억원 제공설’의 진원지인 부산지역 기업주와 이영로씨의 가족 등 최소 5명을 이번 주 안에 대거 소환,불법대선자금 조성 여부 수사에 본격 착수한다. ‘대통령 측근 비리’ 특별검사팀은 27일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의혹 사건과 관련,이번 주 안에 노무현 대통령의 고교 선배인 이영로씨의 부인 배모(59)씨와 아들(30),조카 등 친인척 등을 소환,조사키로 했다.이와 관련,이날 밤 이미 압수수색한 3곳 외에 부산 지역 기업 3곳에 대한 계좌 압수수색 영장을 추가로 발부받았으며,28일 집행할 것으로 전해졌다. 특검팀 관계자는 “소환 대상에는 이미 압수수색을 실시한 부산 K사 최모 회장과 B사 권모 회장 등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지난 16일 압수수색한 기업 3곳의 자료를 토대로 앞으로 부산 지역 업체 관계자를 차례로 소환,조사할 계획”이라면서 “현재 추가 압수수색이 필요한 부산 지역 업체들을 선정하고 있으며 이르면 다음주 초부터 본격적인 압수수색을 실시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밝혀 부산 지역 일부 기업들의 자금 흐름에 이상 징후가 포착됐음을 시사했다. 김재천기자 patrick@
  • 한국배구에 푹 빠졌어요/호주서 배구유학온 마이클 클리시

    “기회가 된다면 한국 배구코트에 서고 싶습니다.” 지난 20일 배구 V-투어 3차대회 대학부 경희대-한양대의 경기가 열린 인천 도화체육관.코트 엔드라인 바깥쪽 광고판 뒤에 선 벽안의 한 청년이 연신 팔몸짓을 해댄다.총알 같은 속공이 터질 때마다 놀라운 듯 탄성을,대포알 같은 백어택이 블로킹에 막힐 때면 아쉬운 듯 한숨을 토해내는 모습이 열성팬의 모습 그대로다. 경희대 유니폼을 입고 있는 마이클 클리시(사진·19·호주)는 한국 배구를 배우고 싶어 태평양을 건너온 호주의 배구선수.지난해 8월 경희대 배구팀의 호주 전지훈련 당시 연습경기에 뛴 그는 한국 배구의 파워에 푹 빠졌다.슈퍼마켓의 부점장으로 차곡차곡 비행기삯 모으기를 4개월.고교를 졸업한 그는 지난달 26일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거처는 경희대 수원캠퍼스의 선수단 합숙소.가끔씩은 김찬호 감독의 집에서 숙식을 하기도 한다. 누나만 둘인 막내 클리시는 집을 떠난 직후 세상에 나왔을 조카의 얼굴이 그립기도 하지만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아침 저녁으로 3시간 이상씩 치러야 하는 강훈.“초등학교 때 농구로 시작,배구만 5년째지만 고교와 뉴사우스 웨일즈주 대표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연습이라야 고작 일주일에 세 번뿐이었다.”면서 “한국배구가 호주보다 월등하게 앞서는 이유가 강한 훈련 때문인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찬호 감독은 “꾀부리려면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괜찮다.’고 손사래 치는 모습이 안쓰럽지만 집에 돌려보낼 땐 한국배구의 그 무엇이라도 쥐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올 4월 시드니대학에 입학,호주배구리그(AVL) 코트에서 뛰게 될 클리시는 “기회가 된다면 한국의 코트에도 서고 싶다.”면서 “V-투어 경기장이 선수들의 열기로 후끈하지만 이빠진 듯 비어 있는 관중석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따끔한 한마디도 곁들였다. 인천 최병규기자 cbk91065@
  • 안희정은 盧캠프 모금책?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구속)씨가 재작년 대선 때 민주당 노 후보측의 모금책 역할을 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지난해 12월29일 대검 중앙수사부가 안씨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지만 새해 들어 서울지검이 시작한 대우건설 비자금 사건 수사에서도 안씨의 이름이 등장했다.이로써 안씨가 대기업에서도 선거자금을 거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대우건설이 재작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측에 10억여원,노 후보측에 수억원을 건넸는데 민주당에서 이 돈을 받은 인사가 안씨라는 것이다.사실이라면 총액 규모로 30억원에 가까운 돈을 안씨가 재작년초부터 최근까지 관리한 셈이다. 대선전만 따지면 우선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이 썬앤문그룹으로부터 1억원을 받아 안씨에게 전달했고,안씨 본인은 43명의 ‘지인’으로부터 1000만∼2억원씩 17억 4000여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대선 이후에도 안씨의 자금 관리가 이어졌다. 지난해 3∼8월 노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창신섬유 회장 강금원(구속)씨 조카 명의의 계좌에 6억원이 입금됐는데 이 돈이 안씨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검찰은 “계좌 추적 결과 수표 발행일이 대선 이후였다.”고 밝혔다. 결국 24억 4000여만원의 돈을 안씨가 총괄 관리한 것으로 집계됐다.여기에다 안씨가 대우건설로부터도 불법 자금을 받은 사실이 최종 확인되면 총액 규모로 지금까지 드러난 노캠프의 불법 대선자금 60억원의 절반을 안씨가 걷거나 관리했다는 얘기가 된다. 대우건설과 관련된 첩보 가운데는 재작년 대선을 전후해 대우건설 경영진이 하도급업체나 회사 임직원들을 통해 당시 후보 최측근 인사들에게 접근했다는 내용도 있어 수사 내용에 따라서는 안씨의 역할이 더 확대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박홍환기자 stinger@
  • 책/고대로부터의 통신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기본자료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이미 오랜 시간이 흐른 고려시대에 전승자료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반면 글씨나 그림을 쓰거나 새긴 금석문(金石文)은 뒷사람의 손길이 타지않은 생생한 자료다.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사실을 전해주고,잘못도 바로잡아준다. ‘고대로부터의 통신’(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지음,푸른역사 펴냄)은 ‘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라는 부제처럼 금석문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여 한국 고대사를 복원해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역사가 소설과는 또 다른,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머리에 실린 ‘신라왕족의 로맨스’부터가 그렇다.각석(刻石)이란 글씨나 그림이 새겨진 돌이다.울산 울주의 천전리 각석에는 청동기시대 이후 갖가지 명문과 그림이 새겨져 있다.바위 중간 아래쪽에는 상당한 길이의 명문이 있다.먼저 새겨진 원명(原銘)과 나중에 덧붙여진 추명(追銘)을 재구성하면 신라사의 상당부분이 규명되고,더하여 한 편의 사랑이야기가 탄생한다.원명을 정리하면 ‘을사년 어느 날 신라 사훼부(沙喙部)에 소속된 갈문왕이 골짜기에 놀러왔다 갔으며,함께 온 누이는 어사추였다.’는 내용이다.을사년은 법흥왕 12년(525년)이다.갈문왕은 왕에 버금가는 최상급 신분으로,법흥왕대의 갈문왕은 왕의 친동생인 사부지(徙夫知)였다. 어사추는 ‘갈문왕의 우매(友妹)’라고 했다.손아래 누이라면 매(妹)만으로 족하지만,우매라고 한 것은 신라 왕실에서 근친혼이 성행한 것과 관련이 있다.혼인을 하기 이전의 예비 커플이 서로 ‘벗으로 사귀는 오라비(友兄)’나,‘벗으로 사귀는 누이(友妹)’로 부르며 가까이 지내는 것은 지극히 흔한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추명은 두 사람이 천전리 계곡을 찾은지 14년이 지난 기미년(539년)에 사부지의 부인 지몰시혜비가 다시 이 곳을 찾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불행하게도 사부지와 어사추는 세상을 떠난 뒤다.삼국유사에 따르면 지몰시혜는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로 알려진 지소부인(只召夫人)이다.사부지가 법흥왕의 아우이니 사부지와 지몰시혜는 삼촌과 친조카사이이다. 연인 사이이던 사부지와 어사추가 결혼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다.사부지가 지몰시혜와 결혼한 것도 어사추가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지,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인지도 알 수 없다.그러나 어사추가 사랑하던 사람과 인연을 지속하지 못한 비운의 여인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은 금석문이 과거를 밝히는 열쇠라는 사실을 일러주지만,일본 나라(奈良)현 텐리(天理)시 아소노카미(石上)신궁에 있는 칠지도(七支刀)처럼 왜곡된 역사를 증거하는 수단으로 잘못쓰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1892년 발견된 뒤 현재까지 칠지도에 대한 일본사학계의 해석은 임나일본부설의 전개상황에 맞추어 뒤바꾸는 불합리한 욕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소장파 고대사학자가 대거 참여하여 집필한 ‘고대…’은 이밖에 ▲동수묘지 ▲광개토대왕릉비 ▲모두루묘지석 ▲중원고구려비 ▲무령왕릉 지석 ▲영일 냉수리비와 울진 봉평비 ▲진흥왕순수비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 ▲사택지적비 등 금석문 18가지를 다루고 있다.1만4000원.서동철기자 dc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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