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필성ㆍ필화 「남북 오누이」 40년만에 일 삿포로서 극적 상봉
◎“오빠!왜 이제 왔어요”… /목메인 남매,오열ㆍ절규도 잊어/생이별의 한은 울음까지 삼켜
【삿포로(일본)=동계아시안게임 특별취재반】 『오빠,왜 이제 왔어요』
『40년만에야…』
헤어지기 40년,생사를 확인한지 19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남북의 오누이는 오히려 담담했다.
통곡도 오열도 절규도 없었다.
40년 생이별이 서러웠고 남북의 정치적대립으로 상봉직전에서 또 19년을 기다려야했던 안타까움과 그동안 가슴을 저린한이 큰울음까지도 삼켰기 때문이다.
지난50년 6.25의 와중에서 이산가족이 돼버린 한필성(62ㆍ목축업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통패리 166의2) 한필화(48ㆍ북한국가체육위원회 동계경기지도부국장)남매는 지난71년 극적으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상봉직전까지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필성씨는 71년 2월7일 삿포로 동계프레올림픽에 출전한 북한 스피드스케이팅선수중 여동생 필화씨가 포함돼 있는 것을 알고 일본 아사히신문 주선으로 도쿄로 날아가 30분동안 전화로 통화,「목소리만의 상봉」은 이루었으나 남북간의 팽팽한대립의 벽에 막혀 눈물을 뿌리며 귀국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19년만인 8일 하오8시 이국땅 삿포로에서 필성,필화남매는 혈육의 정을 갈라놓은 벽을 마침내 허물고 40년만에 재회했다.
17살 홍안소년이던 필성씨는 어느덧 환갑을 넘은 노인으로,8살의 귀엽기간 했던 막내동생 필화씨도 중년을 넘긴 주부로 세월이 흐른뒤였다.
삿포로 지도세공항 입국장대합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오누이는 비명처럼 반가움의 한마디를 토해 놓고는 어깨를 들먹이며 얼싸안고 흐느꼈다.
두 오누이의 극적인 만남은 북한선수단 임원으로 지난2일 삿포로에 도착,선수촌 프린스호텔에 묶고있던 필화씨가 남편 임세진씨(김일성대학 체육교수)와 조총련 간부 송암우의 안내를 받아 삿포로에 도착한 한필성홍애자 내외를 마중나옴으로써 지도세공항 로비에서 이뤄졌다.
한필성씨는 회색싱글 양복차림,홍애자씨는 분홍빛 치마저고리에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공항에 나와 플래시세례를 받았으며 1백50명의 내외신기자들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돌아서는 순간 회색빛깔의 양장차림에 파머를 한 필화씨가 『오빠』하고 부르며 와락 달려들어 극적인 상봉이 이뤄졌다.
◎“기쁘단 것외엔 할말 없어 이젠 어머니한 푼것 같다”
○한필성ㆍ필화 남매 회견
지도세공항에서의 아쉬운 첫만남을 마친 필성ㆍ필화남매는 이날 하오10시15분쯤 공항에서 동남쪽으로 40㎞ 떨어진 삿포로 프린스호텔에 도착,45분동안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금의 소감은.
▲필성=기쁘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다.
▲필화=19년전에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됐다. 하지만 나도 오빠만큼이나 기쁘다.
사전에 상봉을 위한 연락이 있었는가.
▲필성=없었다. 서울에는 나같은 이산가족이 많다. 남북한의 자유왕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생사확인과 서신교환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일이 더 잘풀려 교향방문단교환이 성사되면 제일 먼저가고 싶다.
앞으로의 일정은.
▲필성=오늘(8일)은 일단 따로 숙소를 정해 각자 휴식을 취하겠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동생이 삿포로를 떠날때까지 숙식을 함께할 예정이다.
북한을 떠날때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나.
▲필화=『이번에는 꼭 오빠를 만나라,네가 지명한 체육인이니 주위의 도움을 청하면 상봉이 성사될 것이다. 오빠를 만나면 큰절을 올리고 숙식을 함께하라. 너만이라도 필성이를 만날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