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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조선학교 커지는 차별… 보조금 10년 만에 75% ‘뚝’

    日 조선학교 커지는 차별… 보조금 10년 만에 75% ‘뚝’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일본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이 10년 만에 4분의1 수준으로 급격하게 축소된 것으로 나타났다. 8일 산케이신문이 보도한 문부과학성 자료에 따르면 2019년 일본의 11개 광역지자체와 92개 기초지자체가 지급한 64개 조선학교 보조금은 2억 960만엔이었다. 2009년 22개 광역지자체와 148개 기초지자체가 지급한 조선학교 보조금 8억 4000만엔보다 75% 감소한 것이다. 조선학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본 내 초·중·고교로 북한을 중심으로 한 역사와 언어 등을 가르친다. 일본 학교교육법상 ‘학교’로 정식 인정을 받지 못해 광역지자체가 ‘각종 학교’로 인가해 보조금을 지급해 왔다. 조선학교의 일본 내 차별은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이다. 일본 정부는 2010년 4월 고교 무상화 제도를 도입했고 조선학교와 같은 외국인 학교도 요건을 충족하면 지원 대상이 됐다. 하지만 아베 신조 2차 정권 출범 이후인 2013년 조선학교가 친북한 성향의 조총련과 관계가 있어 취학지원금이 수업료에 쓰이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며 지원 대상에서 제외했다. 또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을 계기로 조선학교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끊는 지자체가 늘어나고 있다. 조선학교 보조금이 이처럼 줄어든 데는 조선학교 교과서 내용 등 교육 내용에 대한 불신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교과서에 김일성·김정일 등을 예찬하는 내용이 있거나 납북 일본인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 등이다. 조선학교는 고교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 부당하다고 일본 5개 지역에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3건에 대해 정부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인민 호날두’ 안병준, K리그 사상 첫 북한 대표팀 출신 MVP

    ‘인민 호날두’ 안병준, K리그 사상 첫 북한 대표팀 출신 MVP

    프로축구 수원FC를 5년 만에 1부 리그로 이끈 ‘인민 호날두’ 안병준(30)이 올해 K리그2(2부 리그) 최고의 별로 솟았다. 안병준은 30일 서울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2020시즌 K리그2 대상 시상식에서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북한 대표팀 경력이 있는 조총련계 선수가 K리그1, 2를 통틀어 MVP가 된 것은 K리그 38년 사상 처음이다. 이날 득점왕에 베스트11(공격수)까지 3관왕에 오른 안병준은 올시즌 팀 전체 득점 53골 가운데 40%에 달하는 21골을 홀로 책임졌다. 특히 전날 열린 경남FC와의 플레이오프 단판 승부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극적인 페널티킥 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1부 승격을 이끌었다. 안병준은 정규리그 최종전이 끝난 직후인 지난 23일 마감된 투표에서 K리그2 감독 10명 중 8명, 주장 10명 중 6명, 취재기자 75명 중 57명의 지지를 받았다. 100점 만점으로 환산하면 72.40점으로 2위 이창민(23.00·제주 유나이티드)을 압도했다. 조총련계 재일교포 3세로 북한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9경기를 뛰었던 안병준은 지난해 수원FC를 통해 K리그에 입성하며 큰 관심을 받았다. 안병준에 앞서 량규사, 안영학, 정대세 등이 비슷한 신분으로 K리그 무대를 밟은 바 있다. 안병준은 “K리그 역사에 이름을 새길 수 있어서 너무도 영광이며 행복하다”면서 “이 상에 부끄럽지 않게 선수로서, 인간으로서 더 많이 발전할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감독상은 제주를 2부 강등 1시즌 만에 1부 승격으로 이끈 ‘승격 청부사’ 남기일(46) 감독에게 돌아갔다. 2014년 광주FC, 2018년 성남FC에 이어 올해 제주까지 모두 3차례 승격을 일궈낸 유일한 K리그 사령탑인 그는 “우승 주역인 선수들과 ‘원팀’이 되어 끝까지 함께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 처음 도입된 K리그2 영플레이어상은 제주의 2년차 측면 공격수 이동률(20)이 받았다. 14경기에 출전해 5골 3도움을 올리며 팀의 승격에 힘을 보탠 이동률은 “마지막 경기까지 수상 조건(전체 50% 이상 출전)을 딱 맞춰 채우게 됐는데 믿고 내보내 주신 감독님께 감사하다”면서 “약이 되는 조언들로 발전시켜주셔서 이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기뻐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K리그 골잡이 정조국(36·제주)은 이날 공로상 수상과 함께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제주는 또 김영욱이 최다도움상을 받고 베스트11에 오승훈(골키퍼), 안현범, 정운, 정우재(이상 수비수), 공민현, 김영욱, 이창민(이상 미드필더)에 이름을 올리는 등 모두 11개 상을 받는 잔치를 벌였다. 베스트11 나머지 세 자리는 공격수 레안드로(서울이랜드), 미드필더 백성동(경남), 수비수 조유민(수원FC)이 차지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수원·경남, 최후의 결전

    수원·경남, 최후의 결전

    “(이길 수만 있다면) 누가 골을 넣어도 상관없지만 내가 넣고 싶다.”(안병준) “축구는 11대11로 하는 경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힘을 모아 막아 내겠다.”(장혁진) 프로축구 K리그2 수원FC와 경남FC가 26일 서울 축구회관과 각각의 클럽하우스를 연결한 화상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한목소리로 즐기는 경기를 하겠다면서도 K리그1 승격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두 팀은 오는 29일 오후 3시 수원종합운동장에서 플레이오프(PO) 단판 승부를 통해 한 장 남은 승격 티켓의 주인을 가린다. 이날 K리그2 득점왕 안병준이 화두였다. 북한 국적 조총련계 출신으로 지난해 수원 유니폼을 입은 안병준은 올해 정규리그에서 20골을 폭발시켰다. 이 중 가장 많은 4골을 경남을 상대로 넣었다. 안병준의 활약에 수원은 경남에 3전 전승을 거뒀다. 안병준은 “긴장감과 부담감이 있기는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즐기겠다”면서 “서로 감동적인 경기를 하고 마지막엔 우리가 이겨 홈팬에게 기쁨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안병준에 맞서는 장혁진은 “수원은 강팀이지만 우리는 부드럽고 유연한 팀”이라며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길 수 있게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정규 성적을 보면 5년 만의 승격을 노리는 2위 수원이 1년 만의 1부 복귀를 꿈꾸는 3위 경남을 압도한다. 승점이 무려 15점 차다. 공수에서도 두루 탄탄하다. 그러나 수원은 3주간 경기를 치르지 않아 실전 감각이 다소 떨어진 상태다. 반면 경남은 정규 최종전과 준PO를 거치며 상승세를 타고 있다. 나흘 만에 경기를 치러야 해 체력적인 부담이 있기는 하다.설기현 경남 감독은 “1골 승부라고 보고 우선 실점을 하지 않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며 “90분 내내 심리적으로 상대를 괴롭히다 보면 기회가 한 번은 찾아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김도균 수원 감독은 “우리가 체력에서 우위에 있기 때문에 많이 뛰는 축구로 상대를 제압하겠다”고 맞받았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조선신보 “북 ‘확실한 힘 키운다’는 건 핵전쟁 억제력 강화 의미”

    조선신보 “북 ‘확실한 힘 키운다’는 건 핵전쟁 억제력 강화 의미”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14일 북한이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2주년을 맞아 내린 결론은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한 ‘핵전쟁 억제력 강화’라고 주장했다. 조선신보는 이날 리선권 외무상이 지난 12일 발표한 담화에서 “조선의 최고지도부가 지난 5월 당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4차 확대회의에서 미국의 장기적인 핵전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나라의 핵전쟁 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로 천명한 사실”을 상기했다며 “그 맥락에서 ‘6·12 2돌을 맞으며 조선이 미국에 보내는 답장’의 내용을 밝혔다”고 전했다. 리 외무상이 당시 담화에서 “우리의 변함없는 전략적 목표는 미국의 장기적인 군사적 위협을 관리하기 위한 보다 확실한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한 것을 두고 ‘핵전쟁 억제력 강화를 뜻한다’고 설명한 것이다. 이어 조선신보는 리 외무상의 담화를 통해 “조선이 공개적으로 밝힌 자문자답을 미국의 현 행정부가 어떤 자세로 접수하고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는 그들 자신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리 외무상이 더는 대가없이 미국에 치적 선물 보따리를 주지 않겠다고 하고 북미 정상이 악수한 손을 계속 잡고 있을지 반문한 것과 관련해 미국이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대응하든 상관없이 북한은 핵전쟁 억제력 강화라는 목표를 지속해서 밀고 나가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조선신보는 또 “조미(북미)대화의 시한은 작년 말에 끝났다”며 북미 대립 국면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강조했다. 조선신보는 지난해 연말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끝까지 추구한다면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라며 ‘충격적인 실제 행동’과 ‘새로운 전략무기’를 예고한 사실을 언급하며 이같이 밝혔다. 조선신보는 “미국의 뿌리 깊은 대조선 적대시 정책이 근원적으로 종식되지 않는 한 미국은 앞으로도 조선에 대한 장기적 위협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 명백하다”면서 “따라서 조선이 미국에 보내는 대답도 명백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시민구단 부천의 폭주… 1부보다 더 재밌는 K리그2

    안병준·안드레, 개막 5경기 연속골 격돌 포털 중계 동시접속 작년보다 80% 늘어 5라운드까지 마치고 FA컵 일정으로 한주 휴식기에 들어간 프로축구 K리그2의 1위 경쟁과 득점왕 경쟁이 뜨겁다. 1부인 K리그1 보다 흥미진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네이버 중계 경기당 평균 최대 동시접속자가 지난시즌 같은 기간보다 80% 늘어난 1만 3647명으로 집계됐다. K리그1은 2만 6277명으로 18.2% 늘었다. 올시즌 K리그2에서는 예상을 깨고 부천FC가 돌풍을 일으키며 강력한 1위 후보 대전하나시티즌과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다. 현재 4승1패(승점 12)로 대전(3승2무)을 승점 1점차로 제치고 1위다. 부천FC는 극적인 내러티브를 갖고 있어 K리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2006년 부천 SK(현 제주 유나이티드)가 연고지를 옮기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팀을 잃은 서포터스들이 중심이 돼 창단된 시민구단이다. 2008년 옛 K3에서 출발한 부천은 K리그에 승강제가 본격 도입된 2013년부터 K리그2에 합류했다. 지난 7년간 거둔 최고 성적은 4위. 승강 플레이오프에도 오른 적 없고 스타 플레이어도, 몸값 비싼 외국인 선수도 없어 올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선수단 모두가 절실함으로 똘똘 뭉쳐 끈적끈적한 플레이를 펼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개막 3연승을 달리다 제주에 0-1로 패하며 주춤했지만 이내 수원FC를 잡고 반등했다. 시민구단에서 기업구단으로 재창단한 뒤 공격적 투자로 탄탄한 전력을 갖춘 대전이 머쓱해질 정도라는 평가다. 코로나19로 리그가 27경기로 단축된 K리그2는 벌써 20%가량 진행된 상태다. 부천이 초반 기세를 끝까지 몰고가 K3 출신 팀으로는 사상 처음 1부 그라운드를 밟는 역사를 쓸지 주목된다. 내셔널리그 출신으로는 수원FC가 2015년 1부 무대를 처음 맛본 바 있다. 득점 1위 경쟁도 점입가경이다. ‘인민날두’ 안병준(수원FC)과 ‘브라질 특급’ 안드레(대전)가 개막 5경기 연속 득점으로 시즌 6호골을 기록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조총련계로 북한 대표팀 출신 4번째 K리거인 안병준은 제공권 싸움에도 능하고 골 결정력까지 갖춘 데다 수비에도 적극적이다. 브라질 명문 코린치안스 출신 안드레는 지난 2월 대전에 ‘승격 청부사’로 영입됐다. 탄탄한 체구에 저돌적인 돌파와 몸싸움 능력을 보여주며 ‘(웨인) 루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둘의 경쟁이 시너지를 내 K리그 최다 경기 연속골 기록이 바뀔지도 관심이다. 현재 최고 기록은 K리그1과 K리그2를 통틀어 7경기 연속이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1부보다 흥미진진 K리그2의 1위 경쟁, 득점왕 경쟁

    1부보다 흥미진진 K리그2의 1위 경쟁, 득점왕 경쟁

    스타 없는 부천FC, 예상 깨고 1위 도약-대전하나시티즌과 각축北국대 출신 안병준, 브라질 명문 출신 안드레와 득점 1위 경쟁5라운드까지 마치고 FA컵 일정으로 한 주 휴식기에 들어간 프로축구 K리그2의 1위 경쟁과 득점왕 경쟁이 뜨겁다. 1부인 K리그1 보다 더 흥미진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올시즌 K리그2에서는 예상을 깨고 부천FC1995가 돌풍을 일으키며 강력한 1위 후보 대전하나시티즌과 엎치락뒤치락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다. 현재 4승1패(승점 12)로 대전(3승2무)을 승점 1점차로 제치고 단독 1위다. 부천FC는 극적인 내러티브를 갖고 있어 K리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는 시민구단이다. 2006년 부천 SK(현 제주 유나이티드)가 연고지를 옮기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팀을 잃은 서포터스들이 중심이 되어 창단됐다. 2008년 옛 K3에서 출발한 부천은 K리그에 본격적으로 승강제가 도입된 2013년부터 K리그2에 합류했다. 지난 7년간 거뒀던 최고 성적은 4위. 승강 플레이오프(PO)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고, 스타 플레이어도 몸값 비싼 외국인 선수도 없어 올해도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선수단 모두가 절실함으로 똘똘 뭉쳐 끈적끈적한 플레이를 펼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개막 3연승을 달리다 사상 처음으로 맞선 ‘연고 이전 악연’의 제주에 0-1로 패하며 상승세가 한풀 꺾일 것 같았지만 다시 수원FC를 잡고 반등을 이뤄냈다. 시민구단에서 기업구단으로 재창단한 뒤 공격적 투자로 탄탄한 전력을 갖춘 대전이 머쓱해질 정도라는 평가다. 코로나19로 리그가 27경기로 단축된 K리그2는 벌써 20%가량 일정이 진행됐다. 부천이 초반 기세를 끝까지 몰고가 K3에 몸담았던 팀으로는 사상 처음 1부 그라운드를 누비는 역사를 쓸지 주목된다. 역시 K3와는 별도의 내셔널리그 출신으로는 수원FC가 2015년 1부 승격을 처음 맛본 바 있다. 득점 1위 경쟁도 점입가경이다. ‘인민날두’ 안병준(수원FC)과 ‘브라질 특급’ 안드레(대전)가 개막전부터 5경기 연속 득점으로 시즌 6호골을 기록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조총련계로 북한 대표팀 출신 4번째 K리거인 안병준은 제공권 싸움에도 능하고 골 결정력까지 두루 갖춘데다 수비에도 적극적이다. 지난해 부상으로 마음껏 뽐내지 못했던 능력을 이번 시즌 활짝 꽃피우고 있다. 브라질 명문 코린치안스 출신 안드레는 지난 2월 대전에 ‘승격 청부사’로 영입된 선수다. 탄탄한 체구에 저돌적인 돌파와 몸싸움 능력을 보여주며 ‘(웨인) 루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두 선수의 경쟁이 시너지를 내 K리그 최다 경기 연속골 기록이 바뀔지도 관심이다. 현재 최고 기록은 K리그1과 K리그2를 통틀어 7경기 연속이다. 작성 시점을 기준 K리그1에서는 이동국(2013) 조나탄(2016) 주민규(2017)가, K리그2에서는 주민규(2015) 김동찬(2016) 이정협(2017)이 기록했다. 개막전부터 연속 경기 골 기록은 이정협이 최고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씨줄날줄] 해외여행의 자유/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해외여행의 자유/박록삼 논설위원

    1980년대 초등학교 때 ‘메이드 인 USA’라고 써진 육각연필, 지우개 등속을 자랑하는 친구들이 한두 명씩은 꼭 있었다. 교포가 보내준 물건, 또는 해외출장 다녀온 아빠·삼촌 등이 준 선물이다. 부러움의 눈길과 듣기 좋은 칭찬을 연신 던지다 보면 한 번씩 얻어 써 보기도 했다. 공책 위에서 춤이라도 추는 듯 부드럽게 써지는 그 연필의 감촉이라니…. 외국을 나가 본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때였고, 외국 물건 구경만으로도 신기하던 시절이었다.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가 됐다. 1983년에는 50세 이상에 한해 200만원 1년간 예치 등 조건을 붙여 연 1회 관광여권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해외여행은 1989년부터인 셈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 등을 거쳐 넓은 세상을 좀더 가깝게 몸으로 접한 국민이었다. 또한 그들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직접 실천한 국민이었다. 눈높이가 높아졌고, 시야 또한 넓어졌다. 잇단 국제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고무된 정부로서는 굳이 국민을 한반도에 가둬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해외 출국자는 반드시 자유총연맹 등에서 하루 종일 한국인 해외 납북사례, 조총련 활동 등 반공안보교육을 받도록 했다. 이 제도는 1992년 없어졌다. 그렇게 TV나 책에서만 보던 외국의 문물, 풍광 등에 대한 갈망의 봇물이 터졌다. ‘부곡 하와이’가 아니라 진짜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생겼고,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 어학연수, 배낭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유행처럼 자리잡았다. 이제 한국 여권은 스웨덴과 함께 세계 여권 파워 랭킹 1위이다. 무비자 혹은 도착비자 등으로 여행할 수 있는 국가는 188개국에 이른다. 한국 국적이라면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환영받는다. 심지어 외국 암시장에서 한국 여권은 수천 만원 가격대로 거래된다는 소식까지 있을 정도다. 국가의 경제력, 외교력 등 위상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가 모든 것을 뒤바꾸었다. 한국발 입국을 막거나 절차를 강화한 나라가 170개국이지만, 일본발 입국을 막는 나라는 200여개국이 넘는다. 확진자가 치솟던 초기에는 한국발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불안도 있었지만, 지금 현재 검사와 치료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가 한국이다. 지난 23일 외교부는 한 달 동안 전 세계 국가 해외여행에 대해 특별여행주의보를 발령했다. 돈과 시간이 없으면 해외여행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도 희망이라도 품고 살 수 있도록 해외 입출국이 자유로워지는 날은 언제쯤 올까. youngtan@seoul.co.kr
  • 경계인 저항을 읊조리다

    경계인 저항을 읊조리다

    ‘식민지 소년인 나를 열렬한 ‘황국(皇國) 소년’으로 만들어 낸 예전의 일본어와 그 일본어가 자아내던 음률의 서정은 삶이 있는 한 대면해야 할 나의 의식의 업(業)과 같은 것이다.’(‘잃어버린 계절’ 92쪽) 아흔 평생 자신의 업을 갈고닦은 시인, 재일 조선인 김시종의 시집과 비평서가 나란히 출간됐다. 세계인 혹은 경계인으로서의 김시종을 조명하려는 움직임이다. ●反일본적 서정 담긴 7번째 시집 ‘잃어버린 계절’ 창비에서는 2010년에 출간된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잃어버린 계절’을 번역 출간했다. 철학자 이진경(본명 박태호) 서울산업대 기초교양학부 교수와 한국문학 연구자 가게모토 쓰요시의 공동 번역으로 국내에 첫 소개되는 완역본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제주로 건너간 김 시인은 제주 4·3항쟁에 휘말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1949년 일본으로 탈출, 오사카의 재일 조선인 거주지 이카이노에 정착해 줄곧 일본어로 시를 써왔다. 시인에게 일본어는 자신의 감성과 의식 체계의 밑바탕이 되는 모국어나 다름없다. 그러나 스스로 ‘일본어에 대한 보복’으로 문필 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혔듯, 그의 시는 일본식 문체가 아닌 데다 반일본적 서정이 담겨 있다.‘고향도 연고도 잃은 새가/ 쓰레기밖에 주울 게 없는 일본에서/ 나의 말을 모이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점점 까악까악 외칠 수밖에 없는/ 새가 되어가고 있다./ 곧 입술이 붉게 물들 것이다.’(‘조어(鳥語)의 가을’ 중) 낯선 발음을 붙이거나, 쓰지 않던 한자어를 만들어 내고, 한자 아닌 단어들도 익숙한 어법을 피해 어색함과 생소함을 만들어 내는 것이 김시종의 시다. 이 때문에 오랜 기간 일본 문단에서 비주류 취급을 받았으나 이후 마이니치출판문화상(1986), 오구마히데오상 특별상(1992) 등을 수상했다. ‘잃어버린 계절’은 2011년 다카미준 수상작이다.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 전설의 시인을 말하다 시집의 번역자이기도 한 이진경 교수는 김시종의 문학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비평한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도서출판 b)도 함께 펴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 ‘맑스주의와 근대성’ 등 사회학·철학 등 다양한 학제 간 경계를 넘나든 저자의 첫 문예비평서다. 일본에서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갈등을 빚어 결별하는 등 남한도 북한도 아닌 일본에 살고 있지만 일본인도 아닌 존재로서 시인의 삶과 시에 대해 분석했다. 이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김 시인은 ‘삼중의 디아스포라’다.시인이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형상화한 장시 ‘니이가타’, 오사카의 재일조선인 집단거주지의 삶을 풍자적으로 그린 ‘이카이노 시집’, 광주민주화운동이 3년 지난 시점에서 ‘광주사태’를 들춰본 ‘광주시편’ 등 대표 시집을 각 장에서 한 권씩 다루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런 삶이, 이런 시가 어떻게 전설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8쪽)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군사정권 시절, 간첩단 사건 연루 2명 재심서 무죄

    부산지법 형사5부(권기철 부장판사)는 군사정권시절 간첩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최모(1923년생),박모(1939년생) 씨 등 2명에 대한 재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고 18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영장 없이 수십일간 불법 감금된 최씨와 박씨는 경찰에게 고문 등 가혹 행위를 당하거나 심리적으로 억압된 상태에서 허위 자백한 것이 인정된다”며 “수사기관에서 작성된 피의자 신문조서 등이 진술의 신빙성이 없어 유죄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무죄 이유를 설명했다. 최씨와 박씨는 1980년대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조총련) 간부에게 돈을 건네거나 받은 혐의(국가보안법상 편의 제공 등) 등으로 1985년 기소돼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24년 뒤인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최씨와 박씨 등이 연루된 간첩단 사건이 경찰의 고문과 가혹 행위에 조작된 인권침해 사건이므로 재심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이로부터 8년 뒤인 2017년 검사가 재심을 청구했고 2년 만인 올해 2월 재심 개시 결정이 났다. 부산 영도에서 살았던 최씨와 박씨는 경찰의 고문과 가혹 행위로 날조된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숨졌지만,34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무죄받은 제주 4·3] “재판이 뭐야, 그냥 쏴죽일 땐데… 앞줄 15년, 뒷줄은 무기 이랬지”

    [무죄받은 제주 4·3] “재판이 뭐야, 그냥 쏴죽일 땐데… 앞줄 15년, 뒷줄은 무기 이랬지”

    제주 4·3사건은 한국 근대사의 ‘대학살극’이다. 2003년 발표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른 공식 희생자(사망, 행방불명 등)만 1만 4000여명이다. 추정되는 희생자는 그 두 배가 넘는다. 세상이 이승을 떠난 수많은 넋을 기리는 동안, 억울하게 전과자가 돼 몸을 낮추고 살아야 했던 불법 군사재판의 피해자들은 71년을 더 살아왔다. 이름도 불리지 않고 형량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전국 각지 형무소에 흩어져 청춘을 허망하게 보내버린 18명의 피해자들이다. 육체에 남은 크고 작은 흉터만큼, 이들에게 남겨진 전과기록도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서울신문은 구순이 다 돼서야 공권력이 찍은 낙인을 떨치게 된 이들의 한 맺힌 삶을 들었다. 인터뷰는 제주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를 하루 앞둔 지난 16일 피해자들의 자택에서 진행됐다.●“그냥 살았는데 내란죄래… 따지지도 못했어” 4·3이 극으로 치닫던 1948년 10월. 군경 토벌대는 제주도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기로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토벌 작전으로 희생됐다. 미처 해안가로 이주하지 못해 사살된 주민들도 있었고, 뒤늦게 내려온 주민들도 ‘폭도들을 지원했던 것 아니냐’며 무차별적으로 끌려갔다.양근방(86) 할아버지도 군경 작전으로 부모님과 떨어지고 형제도 잃었다. 중산간 마을에 혼자 남아 총살될 위기에 처했던 양 할아버지는 겨울이 되자 산에서 버틸 수 없어 헌병대에 자수했다. 곧바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배에 실려갔더니 인천형무소였어. 마당에 줄줄이 앉혀 놓더니 ‘이 열은 7년, 이 열은 15년, 이 열은 무기(징역)’ 이러더라고….” 6·25 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양 할아버지는 광주까지 갔다가 다시 붙잡혀 형이 추가됐다. “광주고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넌 북한군이 풀어줬으니 도피자다’라면서 징역 10년을 더 때리더라고. 그땐 10년인 줄도 몰랐어. 최근에 광주형무소에 신원조회해서 알았지.”부원휴(90) 할아버지도 학교에 다니던 19세 때 집에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았다. 지금도 봉투에 싸서 고이 간직하고 있는 ‘제주공립농업중학교 학생증’을 황급히 내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군 막사에 붙잡혀 갔는데 ‘너 삐라 같은 거 안 뿌렸냐. 산사람들한테 쌀 갖다주지 않았느냐’ 하더라고. ‘학생이어서 그럴 시간도 없었다’고 하니까 봉으로 마구 팼어.” 전주형무소로 갔다가 인천형무소로 이감된 부 할아버지는 1948년 12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유는 ‘내란죄’라고 했다. 왜 내란죄냐고 미처 따지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7년, 15년 선고받았는데 ‘난 살았다’고 생각했지. 그땐 재판 없이 가두고 쏴 죽이고 아주 무법천지였어.” 형무소 시설이 좁고 수형자 관리가 엉망이어서 부 할아버지가 있던 전주형무소에는 전염병이 돌았다. “세면장에 가면 피고름이 섞인 똥이랑 온갖 이물질이 쌓여 있었어. 제대로 먹질 못해서 이질(설사병)도 걸리고 많이 죽어나갔지.” 1949년 7월 열여섯 살이던 김순화(86) 할머니도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 갇혔다. 변론할 기회도 없었고, 몇 년 형인지도 몰랐다. 당시 상황을 묻는 질문에 김 할머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이유가 뭔지. 재판도 안 받고 붙잡혀 있다가 배 타고 형무소로 갔어.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토벌대가) 부모님을 왜 죽였는지도 모르겠어.”●“전과자 낙인 찍히니 육지로 돌아다녔지” 형을 마치고 살아 나왔지만 흉터는 진하게 남았다. 김 할머니는 왼쪽 팔에 있는 콩알만 하고 동그란 초록색 문신을 보여 줬다. “형무소에 같이 수감됐던 분이랑 각자 왼팔에 바늘로 이렇게 새겼지. 나중에 만나서 알아보게.” 함께 문신을 새긴 김경인(87) 할머니와는 69년 뒤 같이 재심을 청구하는 동지로 다시 만났다. 작은 문신은 71년 세월을 버텼고, 김 할머니의 아픈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다 끝났으면 좋겠어. 피곤해. 그냥 묻어버리고 싶어. 생각만 하면 너무너무 속상해.” 양 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가장 한이 맺힌 일이 있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1960년 10월 출소해 고향으로 돌아오자 불과 7개월 전에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0년 3월에 아버님이 형무소로 면회를 오셨어. 내가 나갈 시한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니까 아버님이 ‘너를 두고 어떻게 제주로 가느냐’ 하시고, 돌아서서 막 눈물을 흘려. (나도) 감옥에 돌아가서 한참 울었어.” 양 할아버지의 부친은 제주로 돌아온 뒤 일주일 만에 숨졌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면회를 다녀온 뒤 식사를 하지 않고 줄곧 피를 쏟아내더니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고향에 돌아온 양 할아버지는 10년 만에 육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4·3으로 10년 가까운 형을 산 양 할아버지는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돼 있었다. 일을 해 모은 돈으로 밭을 살 때도 조총련과 연통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야 했다. 결국 연고도 없는 경기도 파주로 거처를 옮겨 목장 일을 하며 20년을 살았다. 그렇다고 정부의 감시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다. “전과자가 신고도 안 하고 제주도에서 없어지니까 ‘북한으로 가려는 거 아니냐’면서 제주도로 다시 잡아가더라고. 남의 목장에서 월급 받고 산다고 말해서 하룻밤 조사받고 풀려났어.” 양 할아버지가 다시 제주로 돌아온 건 1990년이었다. 전과기록 탓에 자꾸만 찾아와 감시하는 경찰들 때문에 부 할아버지는 본적도 바꿨다. “원래 본적이 화북리였는데 이도1동으로 옮겼어. 옮겨도 얼마간은 찾아오더라고.” 부 할아버지는 이후 19년간 공직에 몸을 담았지만 전과 기록 때문에 하마터면 운명이 달라질 뻔했다. “공무원도 전과가 있어서 못할 뻔했어.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된 거야. 제주 사람들은 4·3으로 억울하게 형무소 갔다 왔다는 걸 다 아니까.” ●“만시지탄… 그래도 새로 태어난 기분” 재심이 시작될 수 있었던 토대가 된 ‘수형인 명부’는 1999년 추미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처음 발견했다. 이후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진상보고서는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4·3사건에 대해 직접 사과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불법재판의 피해자들이 유죄의 낙인을 지우는 데는 그로부터 15년이 더 걸렸다. 재심 당사자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정기성(97) 할아버지는 치매가 악화돼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진 후부터 공판에 출석하지 못했다. 형사재판은 피고인 출석이 원칙이지만 재판부는 정 할아버지의 상태를 고려해 진단서로 대신하면서 공판을 진행했다. 부 할아버지는 인터뷰 도중 거듭 “만시지탄”이라고 되뇌었다.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양 할아버지는 연방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험하고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 오늘에 왔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야.” “이제 우는 것도 귀찮다”던 김 할머니도 기뻐했다. 김 할머니는 4·3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자식들에게까지 함구한 채 살았다고 한다. “내가 형무소에 갔다 왔다는 기록만 없어졌으면, 아이들에게도 그(형무소에 갔다 왔다는) 기억만 없어졌으면 좋겠어.” 글 사진 제주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北 김정은 위원장 모친 고용희, 일본 아닌 목포서 태어났다”

    “北 김정은 위원장 모친 고용희, 일본 아닌 목포서 태어났다”

    더팩트 “金 외조부 친척 할머니에게서 증언 확보”“목포 유달산 근처서 태어나…일본 갔다가 북한行”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모 고용희(2004년 작고)가 기존에 알려진 일본 오사카가 아니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는 보도가 나왔다. 더 팩트는 17일 고용희 어머니의 조카며느리인 현모(92)씨로부터 “고용희 엄마가 우리 시고모인데, 영희는 일본이 아니고 목포 유달산 근처에서 태어났다니까”라는 증언을 확보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그러나 더팩트는 이같은 증언을 확보했다면서도 증언을 한 할머니의 이름과 얼굴을 밝히지 않았다. 더 팩트는 이같은 증언의 확보 과정에 대해서도 밝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고 한라산 방문 가능성이 제기되던 즈음인 지난 11일부터 친모 고용희와 외조부의 친인척들을 수소문했다고 전했다. 그러던 중 11일 오후 김 위원장의 외할아버지와 친척인 고모(80) 씨를 제주시 조천읍에서 만날 수 있었다. 고씨를 통해 또 다른 친인척을 수소문했고, 다음 날인 12일 고용희의 어머니 조카며느리 현모(92)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이날 오후 제주시 조천읍 모 경로당에서 만난 현 할머니는 그동안 고용희의 부친 고경택은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에서도 “고용희의 아버지 고경택은 1913년 태어나 16세 때인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1999년 사망했다. 고용희는 1952년 6월 오사카에서 태어났고, 이 가족은 1962년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도해 왔다. 이런 사실은 제주도 조천읍에 있었던 고경택의 묘비(허묘·시신 없이 묘비만 만든 묘)에 ‘1913년 태어나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99년 귀천하시어 봉아름에 영면하시다. 사정에 따라 허총을 만들다’라고 적힌 내용과도 거의 같다. 그러나 현 할머니는 “고용희의 아버지 고경택의 형 고경찬이 조천읍(면) 면장을 했었다. 일제 당시 공출 등으로 해방 후 인근 지역에서 괴롭힘을 당해 참지 못하고 목포 유달산 인근으로 떠났다”며 “그때 고경택도 목포에서 형인 고경찬의 집에 같이 살았다”고 말했다. 다른 친인척과 마을 노인들 역시 현 할머니의 말이 맞다고 했다. 더팩트 취재진이 조천읍사무소에 확인한 결과 “고경찬 씨는 1940년 4월부터 45년 8월까지 면장을 지낸 것이 맞다”고 확인했다.현 할머니는 고경택이 목포에 살았고, 거기에서 고용희가 태어났다고 했다. 할머니가 이처럼 고용희의 태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유는 고용희의 어머니가 시고모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고용희의 어머니의 성(姓)은 한 씨로, 목포에서 용희를 낳고 살다 일본으로 갔다”고 정확히 말했다. 취재진은 그동안 언론에 알려진 고용희의 출생과 방북 등을 거듭 설명했지만, 현 할머니는 “그게 아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특히 고경택이 목포에서 우유공장을 하다가 일본으로 부인과 용희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현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외할아버지 고경택 씨는 1957년에서 1960년 사이 아내 한 씨와 고용희를 데리고 일본으로 갔다. 이후 고경택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우유 장사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할머니는 “고경택은 한국으로 우유를 가져오는 도중 시고모와 용희 등이 일본에 있다가 조총련을 통해 북한으로 갔다고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한국이 아닌 북한으로 갔지만, 시고모는 일본에 남아있었고 거기서 돌아가셨다”고 말한 것으로 더팩트가 보도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황규관의 고동소리] 재일 조선인 시인 김시종

    [황규관의 고동소리] 재일 조선인 시인 김시종

    재일 조선인 시인 김시종의 오래된 첫 시집 ‘지평선’(소명출판)이 번역돼 나왔다. 이 시집에는 2017년 가을 제주에서 있었던 ‘전국문학인 제주포럼’에서 발표한 ‘시는 현실 인식의 혁명’이라는 인상 깊은 산문도 수록돼 있다.김시종은 그동안 띄엄띄엄 우리에게 소개됐지만, 아직까지 그의 문학적 성취 혹은 특성이 깊이 연구되지는 못한 듯싶다. 최근에는 철학자 이진경이 김시종에 대한 인상 깊은 에세이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으나 획기적인 조명으로는 미흡해 보인다. 김시종은 제주 4·3항쟁 당시 한라산 유격대의 연락책으로 참여했다가 죽음 직전에 일본으로 탈출했다. 그의 자전인 ‘조선과 일본에 살다’(돌베개)에 따르면 아들의 밀항을 마련한 아버지는 붉은 약봉지를 쥐여 주면서 자신 앞에서는 절대 죽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 김시종은 밀항선이 일본에 거의 다다르자 붉은 약봉지를 바다에 뿌렸다. 그것은 청산가리였다. 김시종이 일본에 정착하며 맞닥뜨린 것은 비참한 재일 조선인의 삶과 조국에서 들려온 전쟁 소식이었다. ‘지평선’에서는 조국의 전쟁에 대한 비통함과 그 전쟁의 본질, 그리고 전쟁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는 일본에 대한 통렬한 시선이 담겨 있다. 일본 당국에 체포되면 전쟁 중인 조국으로 송환돼야 하는 처지를 빤히 알면서도 그는 반전 운동에 참여했다. 김시종에게 일본이란 함께 살아야 하면서도(在日) 절대로 빨려 들어가서는 안 되는(朝鮮人) 실존 조건이었다. 김시종이 태어났을 때 이미 조선이란 나라는 없었다. 그의 현실적 조국은 일본이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해방도 차라리 낯선 사건이었다. 하지만 김시종은 역사적 급변 속에서도 자신의 이성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이식된 일본에 대한 기억을 떨쳐 내고 4·3항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재일 조선인의 비참한 삶을 강제한 일본과 싸웠고, 조총련을 통해 시달되는 북한의 교조적인 이념과도 불화했다. 문학적으로는 “정감이 과다한 일본어”와도 싸웠는데, 김시종은 그러한 시도를 일본어에 대한 ‘의식적인 보복’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김시종의 연대기를 되돌아보면 어쩔 수 없이 그의 투쟁과 상처를 떠올리게 된다. 김시종은 4월에는 절대 제주도를 찾지 않는다. 제주 4·3의 피바람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부채 의식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4·3의 희생자들이 괜한 이념 공세에 시달릴까 봐 자신이 남로당원으로 항쟁에 참여한 사실을 숨겨 오다가 2000년에 들어서야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간을 우리가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물론 없다. 하지만 시대를 사는 이성적 태도와 안이한 길을 거부한 시적 양심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 우리 시사에는 일본제국주의였건 잔혹한 군사정권이었건 현실적인 이해타산에 걸맞은 선택을 한 시인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인들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시의 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자나 깨나 역사를 의식하는 무거운 역사주의도 탈이지만, 자신의 시와 삶은 역사로부터 초월해 있다는 망상은 더 위험하다. 김시종은 시종일관 자신의 시와 삶을 역사적 지평 위에 놓았다. 그 결과는 끝내 깊은 고독이었지만, 그 고독은 그의 시에 그치지 않고 흘러드는 샘물의 원천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시인을 모국어를 지키는 존재로 부르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시인은 모국어로 모국어를 넘어가는 존재에 가깝다. 이것은 단지 미학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김시종의 삶을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치지 않았던 그의 역경을 말이다. 전반적인 불가능성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면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어느 프랑스 철학자의 말마따나 새로운 것 또는 지금과 ‘다른’ 시간은 불가능을 깊이 감각한 바탕 위에서 드디어 운동한다. 이는 시의 영역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창출한 기술 문명에 깊이 사로잡힌 생활의 영역에서도 절박한 문제이기에 도리어 시의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당대의 일반 언어에 맞서는 운명이 시의 속성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남북경협 넘어 신동북아 경제지도] 日, 北과 교류 재개 조건은 ‘납치문제 해결’…北·美 대화 변수로

    [남북경협 넘어 신동북아 경제지도] 日, 北과 교류 재개 조건은 ‘납치문제 해결’…北·美 대화 변수로

    “저기 아래 보이는 니가타 항구에서 바로 13살밖에 안 된 요코타 메구미가 납치됐어요.” 지난 4일 일본 니가타현 니가타시 반다이지마 빌딩 13층 일본 동북아경제연구소(ERINA) 사무실 창문에서 바라본 니가타항은 을씨년스러웠다. 마침 한반도를 비껴간 7호 태풍 쁘라삐룬의 영향 탓에 비바람이 몰아쳤기 때문이었을까. ERINA 사무실에서 만난 북한전문가 미무라 미쓰히로 선임 연구위원은 첫 인사를 나누자마자 항구를 가리키며 일본 납치 문제의 상징인 메구미 사건을 대뜸 거론했다.니가타현은 해방 이후 북한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지만, 납치 문제가 얽혀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복잡미묘한 감정이 뒤섞인 지역이다. 만경봉 92호는 해방 이후 일본 니가타현과 북한 강원도 원산을 왕래하면서 재일조선인들의 북한 송금과 냉장고, 세탁기, 자전거 등 중고 물품 전달을 하는 최대 창구였다. 하지만 2006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일본이 만경봉 92호의 입항을 금지했다. 북한과 일본의 경제협력도 점차 끊어졌다.만경봉 92호는 북한이 일본인 납치 목적으로 활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니가타에 사는 일본인들의 납치 문제에 대한 공포감과 반감은 상상 외로 컸다. 미무라 연구위원은 “자기 아들, 딸이 납치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들 공포에 떨어야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북한이 왜 일본인을 납치했는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반감과 공포감은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차별로 이어졌다. 지난 4일 니가타시에서 만난 김종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니가타지부 위원장은 니가타 유일의 조총련계 조선학교 교장을 12년 동안 역임했다. 그는 “조선학교는 올해 3월에 중학교 3학년 마지막 학생이 졸업하면서 휴교 상태”라면서 “니가타 납치 문제의 화살이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폭행과 위협으로 이어져 다들 일본학교로 떠났다”고 전했다.일본 정부는 납치 문제 해결이 동북아 경제협력, 작게는 북·일 교류 재개의 전제 조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 프로세스 역시 북·일 교류 재개를 위한 중요 조건이지만, 납치 문제는 일본의 국민정서를 납득시켜야 하는 정치적 사안이다. 지난 2일 도쿄에서 만난 일반재단법인 국제경제교류재단 구사카 가즈마사 회장(전 경제산업성 관료)은 “납치 문제는 일본의 대북제재에 대한 압박 수단이 아니라, 인도주의 차원에서 국민을 지키는 중심 가치”라고 강조했다.그러나 납치 문제 해결은 쉽지 않은 난제다. 일본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납치 피해자는 17명. 북한은 2002년 북·일 평양선언을 계기로 이 가운데 5명을 일본에 돌려보냈다. 나머지 8명은 사망으로 집계했다. 그럼에도 일본이 석연치 않다며 재조사를 요구했으나 북한은 납치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을 보였다. 2004년에는 메구미가 1994년 자살했다며 일본으로 유골을 보냈지만 DNA 검사 결과 가짜로 판명 났다. 이에 대해 일본의 주장일 뿐이라는 비난도 있을 만큼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일본은 현재 ‘납치 피해자 전원 귀국’ 방침인 반면, 북한은 ‘납치 문제는 이미 해결’이라는 입장이다. 문제는 일본 정부는 물론 북한조차도 납치 피해자들의 정확한 현황을 모른다는 것이다. 조총련 니가타지부 김 위원장은 “일본이 주장하는 납치 피해자들 가운데 일반 행방불명자도 있을 수 있어 100% 해결은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이쥬인 아츠시 일본경제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은 “아베 신조 총리가 전원 귀국 방침을 관철할지, 한 사람이라도 귀국하는 것을 우선할지는 어려운 판단”이라면서 “북한에 대한 금전적 지원 규모가 거액이 되면 여론의 환영 무드도 식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 정부는 북한에 대한 유엔 제재 등 강경압박 대응 방침을 고수해 왔다. 이 때문에 일본 기업들이 북한에 투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로 미국이 북한에 유화적 태도를 보이면서 일본 정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미무라 연구위원은 “일본의 상사들은 미국과의 거래에서 커다란 이익이 있기 때문에, 다 버리고 북한과 거래하겠다는 회사는 없다”면서도 “북·미 관계가 좋아지면 일본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동북아 경제협력 논의에서 일본이 소외되는 ‘재팬 패싱’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 5일 도쿄에서 만난 캐논글로벌전략연구소에 있는 외교정책연구소의 미야케 구니히코 대표(전 외무성 관료)는 “일본이 한국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고 관여하지도 않았기에 미국, 중국, 한국 등과 입장 차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미국이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동북아 경협에서 북한에 대한 일본의 지원을 위한 관계정상화는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아베 정권은 향후 납치 문제 해결을 전제 조건으로 2002년 북·일 평양선언에 기초해 북한과 국교정상화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평양선언에 따르면, 북한과 일본은 양국이 재산청구권을 포기하고 국교 정상화 이후 다양한 형태의 경제협력을 실시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북한은 과거사 보상을 위한 대일청구권으로 100억 달러 내지 300억 달러의 보상액을 요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본 공산당 도시오 우에키 홍보부장은 “동북아시아가 평화 무드로 가고 있는데 일본만 동떨어져 있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일본이 식민지 시대의 한반도 지배를 진짜 반성한다면 경제협력과 배상을 병행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글 사진 도쿄·니가타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조총련 “판문점 선언 이행에 공헌”

    조총련 “판문점 선언 이행에 공헌”

    4년마다 열리는 최대 행사 평화 국면 속 열띤 취재 열기 “민단과도 교류 확대 추진”지난 26일 오후 1시쯤 일본 도쿄 기타구 주조역 앞. 정면 개찰구를 중심으로 왼쪽에서는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 등 우익단체 사람들이 재일 조선인과 북한 정권을 비난하는 ‘헤이트 스피치’(증오연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이를 비판하는 젊은이들의 ‘반(反)헤이트 스피치’ 시위가 진행됐다. 최고 볼륨으로 틀어놓은 양쪽의 확성기 소리가 주말 오후 인파와 섞이면서 주조역 일대는 극도로 어수선한 모습이 연출됐다. 양쪽의 맞불집회가 열린 것은 이곳에서 500여m 떨어진 도쿄조선문화회관에서 오후 2시부터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제24차 전체대회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총련 전체대회는 올림픽처럼 4년에 한 번 열리는 최대 규모 행사다. 남북과 북·미 정상회담 등 일찍이 없었던 동시다발 대화 국면에 열리는 것이어서 이날 대회에 대한 안팎의 관심이 높아졌다. 일본에서도 거의 모든 주요 언론들이 현장 취재를 나왔다. 허종만 조선총련 의장은 이날 발표한 향후 4년간 중점 과제에서 “판문점 선언 이행과 북·일 평양선언에 기반한 양측 간 국교 정상화 실현에 공헌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판문점 선언’ 등을 계기로 조성된 남북 화해 분위기에 맞춰 일본에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이날 대회에 축하문을 보내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새 시대의 요구에 맞게 동포들과의 민족단합 사업을 통 크게 벌여 나가며 통일애국운동을 기운차게 전개해 통일의 새 역사를 써 나가는 데 중요한 일익을 수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선총련 관계자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아 동포사회의 단합과 자주통일을 위해 같은 걸음을 해 나가자고 민단에 호소한다”며 “우리 민족사의 전환적 국면에 맞게 새로운 전성기를 여는 획기적 계기를 만들자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어 “조선인 3세, 4세가 조선총련의 주력이 되는 만큼 전반적인 사업 체계의 이정표를 새롭게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유신정권 균열의 시작 청년학생을 기억하다

    유신정권 균열의 시작 청년학생을 기억하다

    민청학련/민청학련계승사업회 지음/메디치미디어/712쪽/3만 2000원정문화가 말했다. “박정희 정권의 파쇼성이 핵심이니까, 여기에 대항하여 투쟁한다는 데 초점을 맞춰 ‘반파쇼전국학생연맹’이 좋겠네.” 김병곤이 덧붙였다. “민주 회복을 넣어서 ‘민주회복학생총연맹’ 같은 게 좋겠어요.” 황인성은 “민주 회복은 좀 약한 느낌이야. 학생뿐 아니라 근로자, 종교계, 양심세력도 동참한다는 뜻에서 학생 말고 청년학생이라고 하는 게 좋겠어”라고 말했다. 이철은 “그러면 전국적으로 동시 투쟁한다는 의미로 앞에 전국을 붙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고 하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그거 좋겠습니다.” 1974년 3월 27일 이른바 ‘민청학련’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민청학련’ 본문 329쪽) 지난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촛불 시민에 의해 탄핵당하고 ‘적폐 청산’이 사회 이슈가 됐다. 적폐의 뿌리를 따라가면 1972년부터 7년 동안 한국 사회를 장악했던 박정희의 유신 체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유신 체제에 대한 도전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79년 ‘부마민중항쟁’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항쟁을 빼놓을 수 없다.‘민청학련’은 1974년 4월 발생한 대규모 반독재 투쟁인 민청학련 항쟁의 원인, 전개 과정, 결과, 의의까지 모든 것을 정리한 책이다. 민청학련계승사업회가 4년 동안 200여명의 관련자들을 인터뷰하고 책, 신문 기사, 논문 등 80여개의 자료를 참조해 사건을 재구성했다. 1972년 유신 선포와 이에 대항하는 전국 학생 조직의 움직임부터 1975년 박정희 정권이 관련자들을 석방하기까지 850일의 기록이 온전하고 생생하게 담겼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끝으로 집권이 불가능했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헌법으로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1년 뒤인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 학생 300여명이 반정부 시위에 나서고 이를 발판으로 유신체제 아래에서 침묵하던 각계 민주화 세력이 결집한다. 위기를 느낀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명령을 내린다. 유신헌법을 부정하는 일체 행위를 금지하며, 이를 어기면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는 내용이었다.서슬 퍼런 정권의 칼날 앞에 서울대 사회학과 이철과 유인태 등은 물러나지 않고 1974년 4월 3일을 디데이로 정해 전국 동시다발적인 대학생 반대시위를 계획한다. 사전 움직임을 포착당해 항쟁은 수포로 돌아가고, 붙잡힌 학생들은 무지막지한 고문에 거짓 자백서를 쓰기에 이른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인혁당) 조직과 제일 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인 공산당원 및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용공딱지’를 붙였고, 이윽고 7월 14일 민청학련 학생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각계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 끝에 박정희는 결국 1974년 8월 23일 전격적으로 긴급조치 4호를 해제했다. 다음해인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를 통해 여정남을 제외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대부분을 석방했다. 책은 그 당시 재판 기록, 판결문 등을 참고해 민청학련 항쟁을 용공 사건으로 조작하거나 방조한 가해자들의 명단 또한 실명으로 그대로 수록했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조작한 중앙정보부 요원뿐만 아니라 당시 대법원장, 검찰총장, 국방장관 등 불법적인 체포, 구금, 고문을 막을 의무가 있었음에도 이를 방조한 이들의 명단, 수사 및 재판 담당 검사와 비상군법회의 판사 및 대법원 판사의 명단을 제시해 그들이 국가폭력 행위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낱낱이 보여 준다. 민청학련 항쟁 이후 수많은 반유신 투쟁과 부마민중항쟁이 이어져 박정희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청학련 항쟁에 담긴 정신이다. 공포의 시대, 목숨을 내놓고 민주화에 투신한 대학생들의 항거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등을 지낸 유시춘 작가가 원고를 썼다. 수많은 관련 인물의 이야기를 속도감 있는 소설 형식으로 그려냈다. 712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상당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6월 북·일 정상회담...? 아사히신문 “조총련 통해 제의”

    6월 북·일 정상회담...? 아사히신문 “조총련 통해 제의”

    일본이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를 통해 북한에 북일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이에 북한도 6월에 두 나라 사이의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가 일본 언론에서 나왔다.아사히신문은 29일 서울발 기사에서 북한 관계 소식통을 인용, 최근 북한 노동당이 당 간부를 대상으로 배포한 교육 자료에 ‘6월초에 북일 정상회담 개최가 있을 수 있다’는 언급이 있었다고 전했다. 해당 자료는 북한 노동당이 당 간부에 대해 정치 교육을 하는 자리에서 제시된 자료로,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외교 수완을 치켜세우면서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5개국에 대한 외교 방침을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료는 대일 정책에 대해 “일본 정부가 최근 조선총련을 통해 북일 정상회담 개최 의사를 북한측에 타진해 왔다”면서 북일 정상회담이 6월 초 평양에서 개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당 자료에는 일본인 납치문제나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침이 적혀있지 않았다. 아사히는 북한 매체가 최근 일본에 대한 비판을 반복하고 있다며 “안보문제의 상대가 미국이지만, 대규모 경제지원을 바랄 수 있는 상대는 일본뿐이라서 북한이 (비판을 통해) 일본에 대한 교섭 조건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다른 북한 관계 소식통의 말을 전했다. 북한 내에서는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하면 200억~500억(약 21조6000~54조1000억원) 달러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고 있다고 아사히는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특파원 칼럼] 조총련 학교에 자녀 보내는 한국인들/이석우 도쿄 특파원

    [특파원 칼럼] 조총련 학교에 자녀 보내는 한국인들/이석우 도쿄 특파원

    일본에 와서 정착한 지인이 중학생 아들을 조총련 산하 조선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일본 학교에 보내면 한국어를 배우지 못해 아예 일본 사람이 돼 버릴까 걱정이 돼서 그랬다고 했다. 재일교포 출신 부인은 한국말을 못해 집에서도 일본어를 쓰는 탓에 한국말을 배울 곳이 조선학교밖에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계열인 한국학교는 일본 전역에 4개로, 정원을 다 합쳐 봐야 2100명뿐이다. 50만명을 넘는 재일한국인 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그나마 대기자가 많아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총련계 학교는 80여개가 넘고, 학생 정원도 한국학교의 3배가 넘는다. 지인은 북한을 미화·찬양하는 데다 아들의 교우 관계가 조총련 학교 인맥들로 엮이고 굳어지는 것이 꺼려진다며 고민하고 있었다. 지인처럼 자녀를 조선학교에 보내는 재일 한국인이 적지 않다. 어떤 조선학교는 한국 국적자가 학생 전체의 절반을 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북한 체제를 선전하고, 그들의 전략과 교육 이념에 따라 운영되는 곳에서 ‘우리 아이들’이 인격과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대학교까지 있는 조선학교는 조총련 사회의 기둥이다. 조총련이 생각 외로 잘 버텨 나가는 까닭에도 학교의 건재함이 있다. 학교 선후배, 동창 인맥은 조선학교 출신들을 제약하고 움직이는 원천이다. 최근 조총련의 한 간부가 “도쿄에서 주요 행사가 있을 때 7만~8만명 정도 모으는 것은 일도 아니다”라며 자랑한 것도, 빈말만은 아닌 배경에도 조선학교가 있다. 우리말을 잘하는 조선학교 출신들에 비해 한국 국적의 민단 계열 자녀들 가운데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이런 가운데 재일교포와 1970년대 이후 일본에 정착한 뉴커머(신정주자) 자녀 세대들의 일본 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속도라면 30~40년 뒤면 한국 국적을 유지한 민단 출신 재일교포들은 찾아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민단과 재일교포들처럼 뜨거운 애국심으로 조국에 기여하고, 헌신한 예는 세계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주일 한국대사관 등 일본 내 한국 공관 9곳을 이들의 기증이나 모금으로 세웠다. 서울의 올림픽회관, 올림픽공원 체조장과 수영장, 테니스장, 미사리조정경기장 등도 이들이 보내 준 돈으로 지어졌다. 1963년부터 1년 6개월 동안 한국에 반입된 재일교포 투자액은 1억 달러 이상으로 당시 한국의 1년 수출 총액 5400만 달러의 2배가 넘었다. 1998년 외환위기 때 그들은 15억 달러를 보냈고, 한국 국채 300억엔어치를 사들이며 모국 송금 운동을 벌였다. 올가을 창립 72주년을 맞는 민단도 거대한 조직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해지면서 존재감을 잃어 가고 있다. 1952년 이후 재일 한국인의 일본 국적 취득은 35만명을 넘었지만, 앞으로는 그 비율이 더 높아질 것이다. 재일교포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 한국인 디아스포라 사회의 축과 같은 존재다. 이들의 소중한 네트워크와 에너지를 어떻게 지구촌 시대, 한국의 힘으로 이어 나갈 수 있을까. 재일교포 3세 이상이 전체 교포의 54%를 넘어선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태도와 정책도 달라져야 한다. 국적에 관계없이 한국인의 뿌리와 정체성을 지닌 재일교포, 재일 한국인의 존재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한 부분이다. 이들의 교육 문제와 정체성 유지가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모두의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jun88@seoul.co.kr
  • 일본 도쿄 조총련 건물에 총격…남성 2명 체포

    일본 도쿄 조총련 건물에 총격…남성 2명 체포

    23일 새벽 일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중앙본부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고 NHK가 보도했다.보도에 따르면 이들 남성 2명은 이날 오전 4시쯤 차량으로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조선총련 중앙본부 인근에 도착, 출입문을 향해 권총을 수 발 쐈다. 총알은 출입문에 맞았고 인명피해는 없었다. 현장에서 경계활동을 하던 경시청 기동대원이 이들을 건조물 손괴 혐의로 붙잡아 자세한 경위와 동기를 조사 중이다. NHK는 수사 관계자를 인용해 남성 2명은 우익단체 관계자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교도통신은 이들이 조선총련 중앙본부 출입문 앞에서 건물을 향해 권총을 수 발 발포했다면서 부상자는 없다고 보도했다. 통신도 경찰을 인용, 현행범으로 체포된 남성 2명이 우익단체 관계자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지상 10층·지하 2층의 조총련 중앙본부는 북한의 일본 공작거점 및 대사관 역할을 해온 곳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혐한 한창일 때 만든 인권위…차별 발언 금지법 이끌어”

    “혐한 한창일 때 만든 인권위…차별 발언 금지법 이끌어”

    “민단이 없었더라면 헤이트스피치(특정집단에 대한 공개적 혐오·차별 발언) 금지법안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혐한 활동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2014년 민단 내부에 만든 인권위원회의 활동, 그리고 일본의 시민단체와 정치인 등의 협력이 더해지면서 2016년 관련 법률이 일본 국회에서 탄생한 것입니다.”오공태(71)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중앙단장은 민단 활동의 성과에 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22일 퇴임하는 그를 21일 일본 도쿄 아자부주반 민단 중앙본부에서 만났다. ▶6년 재임간 가장 큰 어려움이 있었다면. -이명박 전 대통령 말기부터 한·일 관계가 나빠지면서 힘든 일이 더 많아졌다. 양국 관계가 나빠지면 재일한국인들의 삶이 먼저 고달파진다. 역사문제를 정치화시키지 말고, 물밑에서 조용히 풀 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다. 과거사 문제로 양국이 미래를 놓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사사키 미키오 일한경제협회 회장의 말처럼 한·일이 손을 잡으면 둘이 아니라 셋, 넷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현재 한·일 관계는 어떻다고 보나. -깊어진 불신 등 여전히 좋지 않은 상황으로 본다. 북한 핵·미사일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양측이 이를 표면화하지 않을 뿐이다. “북한은 납치를 일삼고, 사람을 죽이고, 한국은 약속(위안부 합의 등)을 지키지 않는 나라”란 식의 폄훼가 심해졌다. 표면적인 차별은 없지만, 폐쇄적인 일본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벽은 여전하다. ▶올해 72주년을 맞는 유서 깊은 민단도 교포 참여율이 떨어지며 약화되고 있다. -재일교포 1세대는 차별받고 살았고, 나 같은 2세대는 고생하는 아버지, 어머니 등을 바라보며 자랐다. 3세대부터는 그걸 모른다. 벌써 4~5세대가 나오고 있다. 정체성 유지를 위해서는 한국 학교를 더 만들어야 한다. 대기자가 줄을 서 있고, 우리말을 배우게 하려고, 아이들을 조총련계 조선학교에 보내기도 한다. 민단계열 학교는 4개뿐이고, 정원도 2100명인데, 조총련계 학교 학생은 6000명이 넘는다. ▶민단 활성화를 위한 묘책은 있나. -대통합이 답이다. 1960대 이후 일본에 와 정착한 ‘뉴커머’에 귀화자까지 참여하는 새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 한인회 조직들도 참여하고, 일본에 10만명이 넘는 조선족으로 불리는 중국 동포들도 다 안아야 한다. 49개 지방본부 등 전국 179개 지부를 돌아보고, 현장에서 교포들을 만난 결론이다. ▶민단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화해 생각은 없나. -일본에 사는 한국인은 모두 다 같이 가야 한다. 조총련이 북한에 대한 맹종 자세를 버리고, 변화한다면 손을 잡을 것이다. 그들의 변화를 기대한다. ▶퇴임 후 계획은. -재일한국인들을 위해 계속 일하겠다. 현재 도쿄한국학교 이사장, 한일축제한마당 한국 측 대표 등도 맡고 있다. 소원이 있다면 재일동포들이 조국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와 그 뜻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주일대사관 등 재일한국공관 9곳은 재일교포들이 마련해 모국에 기증했고, 1988년 서울올림픽 때 100억엔 모금, 1998년 외환위기 때 15억 달러 송금 등 우리의 마음은 늘 조국을 향해 있었다. 글ㆍ사진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靑, 한ㆍ미 연합군사훈련 축소 검토

    WP “펜스 ‘北 원하면 대화’ 시사”中, 평창서 北김영남과 접촉 확인조선신보 “대화 중 핵실험 없을 것” 남북 정상회담의 환경을 조성하고자 한국 정부가 미국에 한·미 연합군사훈련 축소를 제안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2일 “한·미 연합훈련을 축소하려면 미국과 협의해야 하고, 미국이 움직이려면 북·미 사이에 소통이 있어야 한다”면서 “선(先) 북·미 대화, 후(後) 군사훈련 논의 순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북·미 소통이 우선이라는 전제를 달긴 했으나, 이는 청와대도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한 차례 연기한 한·미 연합훈련을 축소해 시행하는 방안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검토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주목된다. 북한도 핵·미사일 도발을 중단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 온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이날 “북남 대화와 관계 개선의 흐름이 이어지는 기간 북측이 핵실험이나 탄도로켓 시험발사를 단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타당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한·미 연합훈련 축소와 핵·미사일 도발 중단이 동시에 이뤄진다면 평창올림픽 이후 대화가 탄력받을 수 있다. 대북 강경 노선을 걷던 미국이 전향적 자세를 보이면서 북·미 대화도 진전 조짐을 보이고 있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북한이) 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대화를 하겠다”고 말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중국 한정 정치국 상무위원이 방한 기간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는 등 중국 측 움직임도 활발하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만이 남북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은 아니다”라면서 “전제조건은 만나서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미·대북 ‘특사 외교’를 가동할 수도 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대미 특사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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