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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NG선 수주 과정 하자없다”(국감중계:19일)

    ◎“우편검열 정치인 없고 최소범위내 실시”/“재벌기업들 증권사진출 법규위반 없어” ▷교체위◁ 체신부 및 한국통신공사 감사에서 민자·민주·국민 등 3당의원들은 제2이동통신의 사업자 선정시기와 심사기준의 공정성 등 제2이동통신 사업자선정과정의 각종 의혹설의 진상과 우편검열문제 등을 중점 추궁. 답변에 나선 송언종장관은 『제2사업자 선정을 취소한 것은 국민정서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됐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통신산업발전을 위해 사업자선정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소신엔 변함이 없다』고 대답. 제2사업권 취득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냐는 의원들의 질의에 대해서도 송장관은 『2천년대 이후엔 수요가 많을 것으로 예상돼 흑자를 볼지 모르나 사업개시 3∼4년간은 기지국 설립투자 등으로 계속 막대한 적자를 볼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 송장관은 우편검열제도 폐지주장에 대해서도 『장관부임이후 알아본 결과 검열대상은 기백명에 불과하며 정치인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했다』면서 『국가안위나 치안유지를위해 최소 범위내에서 우편검열을 실시하고 있다』고 답변. 그러나 민주당의원들은 우편검열을 실시하고 있는 우정연구소 김시용소장을 증인으로 채택하고 검열대상자의 명단을 공개해야한다고 주장해 두차례나 정회되는등 진통을 겪기도. ▷노동위◁ 서울지방노동청과 서울지방노동위원회 감사에서 MBC사태에 대한 중재결정의 공정성여부,서울택시노조 임금교섭위원 매수사건의 진상규명문제등이 중점 거론. 구천서(민자) 김말용의원(민주)등은 『서울택시 임금교섭과정에서 사측이 노조측 교섭위원에게 2억원이 입금된 통장을 건네주고 매수했다는 것이 사실이냐』면서 『노조측교섭위원 일부가 서명치않은 금년 단체교섭안은 무효로 봐야 한다』고 주장. 김정규서울지방노동청장은 이에 대해 『매수사건은 현재 수사중이며,단체교섭협약의 유효여부는 서울시 소관사항』이라며 즉답을 회피. ▷동자위◁ 한국가스공사 감사에서 LNG3호선 건조회사결정을 둘러싼 특혜설등을 집중 추궁. 신기하의원(민주)은 『가스공사가 LNG3호선 수주회사결정을 앞두고 한달여동안 외부기관의 자문을 받아 실시한 능력평가에서 신청3사중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한진을 건조사로 지정한 이유가 무엇이냐』면서 가스공사가 지난 7월11일부터 8월14일까지 프랑스의 가스트랜스사등 3개기관의 자문을 받아 실시한 건조능력평가 결과 자료까지 제시. 유인학의원(민주)도 『LNG3,4호선사업추진에는 운행사결정부터 선박건조회사지정까지 특혜로 일관,거액의 정치자금 조성의혹이 있다』면서 『이같은 대형국책사업의 결정권을 해운회사 이익단체인 선주협회와 조선공업협에 넘긴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추궁. ▷보사위◁ 국감 첫날인 이날 의원들은 의료보험운영실태문제,수입식품에 대한 안전대책,생수대책,정신질환자관리,묘지제도개선책등 주로 정책성 질의에 촛점. 이해찬의원(민주)은 『91년2월부터 92년3월까지 지역의료보험가입자중 51만7천2백여명이 이중가입자로 밝혀졌으며 이로 인해 운영지원에 사용되는 보사부 예산 1백37억여원이 이중지원된 것이 아니냐』고 질의.양문희의원(민주)도 『매년 여의도면적만큼 늘어나는 묘지문제와 7백여만기에 달하는 무연고묘지대책이 무엇이냐』고 추궁. 김병오의원(민주)은 『영안실을 몇개씩 임대,폭리를 취하고 있는 장의재벌이 있다』고 주장하고 『예를들어 C장의사 H모씨는 S병원등 4백병상 이상의 4개 종합병원 영안실을 임대,장의용품에 바가지를 씌우며 10억원이상의 매출액을 확보하고 있다』며 영안실의 폭리에 대한 대책을 추궁. 안필준장관은 이에대해 『의료보험부담문제는 수혜자는 부담이 많다고 하고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측은 진료수가가 너무 낮다고 불평하는등 문제가 없지 않다』면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이를 조화시켜나가는 노력을 계속 해나가겠다고 답변. ▷농림수산위◁ 산림청 감사에서 여야의원들은 골프장건설 등에 따른 불법산림훼손에 대해 집중 추궁하고 특히 날로 훼손되어가는 산림을 효율적으로 보전하기 위해 산림행정의 단일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촉구. 정창현의원(민자)은 『효율적인 산림행정수행을 위해서는 정부조직법을 개정해서라도 내무부·건설부·문화부 등으로 분산돼 있는 각종 산림업무를 주 관청인 산림청으로 이관시키고 농림수산부 외청인 산림청을 산림부로 격상시켜야 한다』고 주장. 이희천·이규택의원(민주)등은 『91년말 현재 국내 30대재벌그룹의 산림소유면적은 1만6천4백◎로 전체 사유림면적 4백59만6천◎의 0·4%에 달한다』며 이들 재벌들이 현행의 산림교환제도를 교묘히 악용,부동산투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 ▷행정위◁ 정무1장관실 감사에서 의원들은 중립내각출범이후 정부와 정당간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위한 역할과 기능을 어떻게 고쳐나갈 것인지를 집중 질의. 신순범의원(민주)은 『국무총리 훈령가운데 「당정협조에 관한 처리지침」은 민자당과의 협조관계만을 규정하고 있다』고 지적,『아직도 이 훈령을 고치거나 폐지하지 않고 있는 이유를 밝히라』고 요구. 곽정출의원(민자)은 『이번 대선이 바람직한 정책대결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떤 역할을 해야할 것인가』라고 묻고 『중립내각의 정무장관으로서 공명선거를 위한 소신과 견해를 밝히라』고 주문. 김동익장관은 이에대해『중립내각의 출범정신에 따라 정부는 각 정당과 등거리관계를 유지하면서 균형있는 정책협의를 해 나가겠다』고 설명. 김장관은 이어 『통일·안보·외교와 관련된 국정현안은 대통령과 총리가 정당대표들과 협의하고 정무장관은 정부와 국회상임위원회 또는 각 당의 정책기구와의 사전협조문제를 맡게 될 것』이라며 『정부와 국회,정당과의 관계를 다단계협의방식으로 정착시켜나갈 방침』이라고 답변. ▷교청위◁ 체육청소년부 감사에서 의원들은 최근 「경마부정」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마사회 부정사건과 서울평화상의 존폐여부 등을 집중 거론. 장영달의원(민주)은 『마사회의 이익금중 31억5천만원이 청소년 육성기금으로 변칙 전입되었다』며 이의 시정을 촉구. 김원웅의원(민주)도 『서울평화상이 올해부터 시상자 선정의 범위를 「스포츠에 기여한 사람」에서 「세계평화에 이바지한 사람」으로 확대했는데도 체육진흥기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위법이 아니냐』면서 『수상자 선정이 어려운 서울평화상을 폐지시키라』고 주장. 나웅배의원(민자)은 『사행심을 부추길 수 있는 마사회의 경륜·경정사업에 일본 폭력조직의 자금유입설이 나돌고 있다』며 진상을 밝힐 것을 추궁. 이진삼체육청소년부 장관은 이에대해 『앞으로 시행될 경륜·경정사업을 건전한 시민놀이마당으로 만들기 위해 제도개선을 연구하고 있으며 서울평화상도 개선방안을 연구,권위있는 상이 되도록 하겠다』고 답변. ▷법사위◁ 법무부 감사에서 의원들은 관권개입부정사건,정보사부지사건 등 의혹사건과 수사단계에서의 인권보장방안,불법체류 외국인들에 대한 대책 등을 집중 질문. 의원들은 특히 「남한 조선로동당」간첩사건과 관련,2급 군사기밀의 유출경위와 정치권인사의 개입여부 등을 놓고 공방전을 벌였다. 박희태의원(민자)은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민주당대표의 비서인 이근희씨가 어떻게 2급 군사기밀인 92년 국방예산안을 입수하게 됐는지 유출경위를 밝히라』고 질의. 이정우법무장관은 이에대해 『조선로동당 간첩단 사건은 관련자들이 범행내용을 대부분 자백하고있어 일부에서 제기하고있는 조작설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며 사건 전모는 재판과정에서 밝혀질 것으로 본다』고 말하고 김대중민주당대표의 비서가 북한 공작원에게 넘겨준 92년도 국방예산안과 국방일보에 게재된 92년도 국방예산안 개요의 차이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서면으로 제출하겠다』고 답변. ▷재무위◁ 이날 잇따라 열린 보험감독원과 증권감독원 감사가운데 보험감독원 감사는 민주당측이 정보사부지 사기사건과 관련,증인으로 채택된 하영기전제일생명사장이 출석지 않은 것을 이유로 감사를 거부해 민자당의원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파행적으로 운영. 민주당은 이날 하전사장의 국감장 불출석과 관련해 성명서를 발표,『민자당은 정보사땅 의혹 사건을 규명하려는 국민적 요구를 피하지 말고 하사장의 동행명령요청에 동참하라』고 촉구. 증권감독원 감사는 그러나 정상적으로 실시돼 신정제지 부도파문및 삼성그룹등의 증권업진출등 증권행정의 문제점과 각종 의혹에 대해 집중추궁. 박종석 증권감독원장은 『삼성,선경그룹의 증권사 인수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등 관련법규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증권관리위원회가 삼성 및 선경그룹의 증권업진출을 동의했다』면서 『신정제지의 기업주와 담당공인회계사가 짜고 회계장부를 조작했기 때문에 증권감독원은 분식회계를 밝혀내지 못했다』고 답변.
  • 40년만에 마련된 새형법시안을 보면

    ◎민주화시대 걸맞게 개인존엄성 보호 초점/사회변화따른 신종범죄 처벌을 명문화/국가법익보호 치중한 일형법 잔재씻어 40년만에 새로 마련된 형법 개정시안은 일본 형법을 본뜬 현행 형법을 전면 개정한 것으로 이 안이 국회의 심의를 거쳐 통과되면 우리 손으로 만든 제대로 된 형법이 비로소 갖춰진다는 데 큰 뜻이 있다. ○95년부터 발효될듯 우리의 기본법은 정부수립후 대부분 일제때 쓰던 일본의 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제정된 것으로 우리 사회의 현실과 가치관 및 풍습의 변화에 따라 개정의 필요성이 커졌으며 민법과 민사소송법 등은 이미 부분적으로 개정돼 시행되고 있다. 국민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기본법인 형법 또한 지난 85년 형사법 개정특별심의위원회가 구성돼 전면 개정작업에 들어간지 7년만에 개정시안이 마련된 것이다. 최신 법이론과 판례·학설을 반영,선진제국의 제도에 비해 손색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개정시안은 공청회 등 마무리 절차를 거쳐 5월초에 개정안으로 확정된뒤 7월에 국회로 넘겨져 통과되면 부칙규정에 따라 2년 후인 95년부터 발효된다. 새 형법 개정시안은 현행법에 52개조항을 신설하고 39개 조항을 삭제했으며 1백1개조항을 수정,모두 4백개 조문으로 늘어났으며 내용면에서도 모든 범죄의 형량이 다시 조정되는 등 대폭 개정돼 사실상 형법의 재탄생이라 할 수 있다. 법무부가 밝힌 개정의 기본방향은 ▲기본권 보장에 관한 헌법정신의 구현 ▲신형법이론에 맞춰 범죄론을 재정비 ▲형벌제도와 형량의 정비 ▲경제·사회·윤리적 여건변화에 따른 범죄의 변동 반영 ▲폭력행위처벌법등 형사특별법의 흡수통합등이다. 특히 국가법익보호에 치중했던 과거의 법체계를 고쳐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개인의 존엄성을 부각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같은 개정방향에 따라 컴퓨터관련범죄와 도청행위,다른 사람의 자동차 불법사용,음식물에 독물을 넣는 행위,인질관련범죄등 신종범죄의 처벌규정을 명문화했다. 또 사형제도의 신중한 운영을 위해 「사형의 선고는 특히 신중히 하여야 한다」는 선언규정을 두는 한편 현주건조물방화치상죄등 10개 범죄의 사형조항을삭제했다. 아울러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난 점등을 고려,15년이던 유기형의 상한을 20년으로(가중처벌때는 25년을 30년으로) 늘렸으며 경제적 여건의 변화에 따라 벌금형의 상한액을 2백만∼3천만원으로 대폭 올리는등 현실감각에 맞게 재조정했다. ○간통죄도 폐지 원칙 이밖에 보호감호와 치료감호를 형법에 전면 도입,보안처분제도를 형법에 규정하는 세계적 추세에 따랐으며 보호관찰·사회봉사명령제도를 성인에까지 확대,재범의 방지를 위한 방안을 마련했다. 가장 논란이 많았던 간통죄는 일단 ▲개인간의 윤리문제로 세계적으로 폐지추세에 있고 ▲성이 사생활 문제로 법이 개입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협박이나 위자료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이유로 폐지한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국민감정등을 고려,공청회에서 여론을 수렴한 뒤에 최종결정한다는 방침이다. ◎형법개정시안 무엇이 달라졌나/컴퓨터 사기·대화비밀침해죄등 추가/“사형제도 신중 운영” 10개범죄서 없애/보호관찰·사회봉사 확대·재범방지책 마련/자격상실형 삭제·유기징역 20년으로 늘려 ▷기본권 보장◁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어떠한 행위도 벌하지 않는다는 죄형법정주의 선언 ▲세계주의 추세에 따라 외국인이 외국에서 범한 항공기납치와 통화위조죄도 처벌 ▲전시 폭발물제조·사용죄 삭제등 국가주의·전시형법적요소 배제 ▲인질 치사상죄등 7개 결과적 가중조항을 신설하고 현주건조물 방화치사상죄등 모든 결과적 가중범에 대한 법정형을 치상과 치사로 구분하는등 범죄구성요건 세분 ▷범죄론의 재정비◁ ▲농아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하는 규정 삭제 ▲스스로 범행을 실행한 자는 정범으로 처벌한다는 정범 규정 신설및 간접정범도 정범임을 명시 ▲특수 교사·방조죄에서 형의 가중규정 삭제 ▲신분범의 종류및 처벌기준 명확화 ▲형을 정할 때는 책임을 기초로 한다는 책임주의 선언 ▷형벌제도의 개선◁ ▲자격상실을 형의 종류에서 제외하고 42개 조항의 자격정지 병과규정삭제등 형종류 축소 ▲유기징역형의 상한을 15년에서 20년으로,가중형 상한을 25년에서 30년으로 높임 ▲무기수의 가석방에필요한 복역기간을 10년에서 12년으로 연장 ▲강도치사,폭발물 폭발치상,폭발성물건 파열치사상,현주건조물 방화치상,현주건조물 일수치사상,교통방해치사상,음식물 혼독치사상죄등 10개 죄의 사형조항 삭제 ▲특별법의 강도강간,인질살해,항공기납치·치사죄 등의 사형은 형법에 도입 ▲벌금의 하한액을 5만원으로 인상 ▲사문서위조,공무집행방해,무고,직무유기,체포·감금등 16개 조문에 벌금형 추가 ▲집행유예와 선고유예를 선고할때 보호관찰 처분을 함께 선고할 수 있도록 규정 ▲가석방때 보호관찰을 반드시 받도록 규정▲유예기간동안 범한 죄로 유예종료후 실형이 확정될 때도 집행유예 실효▲유예기간동안의 죄로 1년이하의 형을 선고할때 다시 집행유예 선고 가능 ▲벌금형에 대한 집행유예제 도입 ▲집행유예 선고때 사회봉사명령·수강명령 함께 선고 가능 ▲실형을 받은뒤 형집행 종료 또는 면제후 3년안은 물론 종료·면제전의 재범자도 누범에 포함(현재는 집행종료후 3년안에 범한 자로 한정) ▷사회현실변화 반영◁ ▲간통죄,혼인빙자간음죄,영아유기죄,해상강도죄,병역·납세거부를 목적으로 한 단체조직죄,상습범 일률가중규정 삭제 ▲대화비밀침해죄,자동차 불법사용죄,자동판매기·공중전화등 편의시설 부정이용죄,컴퓨터를 이용한 사기죄 신설 ▲가스·전기·방사성물질등 방류죄,환경오염죄,과실로 수돗물등에 독물을 섞거나 방류해 환경을 오염시키는 죄 신설 ▲공공기관이나 개인의 전자기록을 위조·행사하는 죄 신설 ▲복사문서도 문서로 간주 ▲약취·유인·인질죄를 저지른 범인이 피해자를 석방했을 때는 형량 감경 ▲미성년자의 약취·유인죄 및 미성년자 간음죄의 대상을 18세 미만의 사람으로 축소 ▲비밀 침해죄,업무상 방해죄,재물 손괴죄,공무상 비밀침해죄,공용서류 무효죄의 대상에 전자기록을 포함 ▲비밀 침해죄와 공무상 비밀침해죄에 기술적 수단을 이용한 비밀침해 처벌규정 신설 ▲주거침입죄의 대상에 「저택」을 삭제하고 「항공기」를 추가 ▲피의사실 공표죄에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때에는 벌하지 않는다」는 위법성 조각사유 추가 ▲주거침입죄,신체수색죄,자동차 불법사용죄및 손괴죄를 피해자의 처벌의사없이 처벌 할 수 없는 반의사 불벌죄로 규정 ▷특별법과의 재조정◁ ▲사회보호법의 보안처분제도를 옮겨 규정하는 보안처분 장신설 ▲형의 집행을 종료하거나 집행이 면제된 날로부터 자격정지 이상의 형을 받지 않고 법에 정한 기간이 경과하면 형의 선고는 실효한다는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의 당연 실효제 도입 ▲항공기 운항안전법의 항공기 납치·운항방해 납치 치사상죄를 옮겨 규정 ▲폭력행위 처벌법및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의 일부 조항을 편입=흉기를 휴대한 공동범행,체포·감금치사상죄,약취·유인 치사상죄,친고죄가 아닌 특수강간·강제추행,뺑소니차량등 ▲형법 제17장 아편에 관한 죄를 마약법에 옮겨 규정 ▲복표 발매죄를 사행행위 단속법에 규정 ▲아동 혹사죄를 아동복지법에 규정 ▷편성및 용어의 정비◁ ▲형법의 구성을 총칙,개인,사회,국가적 법익 순으로 변경(현행법의 각칙은 국가,사회,개인적 법익순임) ▲총칙 3장의 공범을 정범과 공범으로,제16장 식용수에 관한 죄를 공중의 보건에 관한 죄로,제12장 신앙에 관한 죄를 신앙과 사체에 관한 죄로 명칭을 변경 ▲용어와 문장을 쉽게 바꿈=심신장애→정신장애,부녀→여자,수괴→주모자,유서→용서,공술→진술,장식→장례식,기관→보일러,신서→편지로 고침.또 소훼하여→불태워,침해하여→물에 잠기게 하여,폭발물을 사용하여→폭발물을 폭발시켜,간수하는→관리하는으로 바꿈
  • 여야,주말 「유세전」가열/민자 김 대표

    ◎유망농가에 2억∼3억 집중지원/「문제지도난」등 치안부재 비난/민자 김 대표 여야는 주말인 15일 당 수뇌부들이 참석하는 지구당 창당및 개편대회를 갖고 당조직정비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지원유세를 계속했다. 【완주=김현철기자】 민자당의 김영삼대표최고위원은 이날 하오 전북 임실·순창(위원장 최용안)완주(위원장 신동욱)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지역감정해소외 농정공약을 제시하며 호남지역의 교두보 확보를 위한 지지를 호소했다. 김대표는 특히 야당의 관권선거의혹제기에 대해 『나는 평생을 공작정치와 정보정치에 시달려 온 사람으로 공작·정보정치는 내가 가장 저주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김대표는 또 『앞으로 민자당은 농업자금지원을 「생계유지형」에서 「기업화지원형」으로 전환,유망 농가에 대해서는 중소기업육성시책과 같은 차원에서 농지구입,시설현대화,영농자금 등을 2억∼3억원까지 집중 지원,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갖출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강릉=구본영기자】 김종필최고위원도 이날 상오 강원도 강릉지구당(위원장 최종완)개편대회에 참석,『강원도는 우리에게 전력과 깨끗한 물을 공급해 주고 외화를 획득하도록 관광지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지역』이라고 전제,『강릉의 발전은 물론 국가발전을 위해서도 민자당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대구=한종태기자】 박태준최고위원은 이날 대구지역의 지구당을 순시하며 『지난 13대총선에서 안정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서 『이번 선거에서는 겸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민주당의 김대중공동대표는 15일 서울 관악갑·구로병·송파을지구당 창당및 개편대회에 참석,『정부와 여당이 야당 출마자들에게 압력과 탄압을 가해 출마를 포기하게 하는등 권력남용을 통한 선거개입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김대표는 치안문제와 관련,『정부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서가 의심을 받고 대학입시문제가 도난당하는 등 심각한 치안부재현상을 겪고 있다』면서 『민주당이 이번 총선에서 과반수이상을 확보해 수서사건등 3대 의혹사건 등에 관해 청문회를 열어 비리를 밝히고 문민정치를 열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 “탈법각본의 주역”정회장·장 전비서관/검찰수사서 드러난「수서의혹」

    ◎한보,8백억이상 챙겨… 상당액 로비에/녹지풀기엔 여·야 의원이 결정적 도움 수서지구 택지특별 분양사건 수사는 12일 검찰이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인 한보그룹 정태수회장을 소환,철야조사를 벌이는 한편 서울시의 고건·박세직 전 현직시장을 참고인으로 불러 특별분양 결정과정에 대해 조사하는 등 절정에 오르고 있다. 검찰은 이에앞서 건설부의 김대영 차관과 이동성 주택국장,서울시의 윤백영 부시장과 김학재 도시계획국장 등 관계공무원 및 한보주택의 강병수 사장과 한근수 자금담당전무,여지리 비서실상무 등 핵심임직원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정치권 및 관련부처 등에 거액의 뇌물성로 비자금을 제공한 혐의를 구체적으로 파악,이날 소환된 사건 중심인물을 대상으로 사실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에따라 앞으로 거액의 뇌물을 받고 서울시에 특혜분양 결정을 내리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지목되고 있는 국회 건설위 청원심사소위 의원 3∼4명과 지역구의 청원을 소개한 이태섭의원(민자) 및 이번 사건에서 외부압력의 중심역할을 한 혐의를받고 있는 장병조 전 청와대 문화체육담당비서관에 대한 수사와 사범처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들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 된다면 이번 사건은 대체로 일단락 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수사결과로는 이번 사건이 한보그룹 정회장의 집요하며 치밀한 계획에 따라 포섭된 강사장과 장 전 청와대비서관 등이 함께 엮어낸 한편의 「탈법드라마」로 보여지고 있다. 즉 정회장이 서울시 주사보로 출발해 주요요직을 두루거친 동향의 강사장을 주택사장으로 영입해 서울시에 대한 로비를 맡기고 스스로 하키협회장이란 직함을 이용해 올림픽조직위와 체육부에 근무한 장 전비서관을 포섭,서울시 뿐아니라 건설부와 정당·국회의원들에게까지 로비겸 압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는 온갖 편법으로 조성된 정회장의 로비자금에 입법부와 행정부 등의 권력층이 한데 어우러져 제6공화국들어 최대의 부정사건을 일으킨 셈이 된 것이다. 이처럼 정회장과 강사장,장 전비서관은 지난 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서로 친숙하게 돼 이번 사건의 모든 것을 모의하고 추진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회장은 지난 84년부터 하키협회장을 맡은뒤 해마다 5억원을 들여가며 아시아경기대회 남녀우승,서울올림픽 여자 준우승 등 한국하키를 세계정상급으로 올려 놓으면서 체육계의 실력자가 됐다. 체육부장관과 올림픽조직위원장을 지낸 박서울시장과는 이때 자연스럽게 알게돼 지금까지 친분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강사장은 당시 서울시 올림픽준비단장(1급)으로 올림픽업무를 맡고 있었으며 장 전비서관 역시 83년 체육부의 과장에서 올림픽조직위원회 기획국장으로 발탁돼 박시장 및 정회장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다져올 수 있었다. 고향이 경남 진양으로 정회장과 동향인 강사장은 지난 76년부터 81년사이 서울 성북·관악·영등포구청장을 지낸고 본청 환경녹지국장·산업경제국장,재무국장 등을 역임한 토박이 「서울시청 사람」으로 통한다. 정회장은 강사장이 지난 83년 산업경제국장때 노량진수산시장의 강제인수에 개입한 혐의를 받고 88년 「5공비리」 수사때 서울시를 떠나자 다음해 4월 한보주택 사장으로 전격 기용했다. 장 전비서관 역시 올림픽조직위에서 체육부로 복귀한 뒤 청와대 비서관으로 승승장구하자 더욱 친분을 두터이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정회장이 문제의 수서지구 자연녹지를 4명의 임원명의로 사들인 시기도 지난 88년 4월부터 89년 11월까지로 이들과 만나던 때와 일치해 주목되고 있다. 따라서 검찰수사 또한 이 점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즉 건설부의 택지개발고시가 89년 3월21일 이었으며 한보측은 1년전부터 자연녹지이던 이 땅을 사들였다는 점이다. 이는 서울시 관계자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그뒤 공개경쟁입찰로 분양되어야 하는 공영개발택지가 26개 특정주택조합에 특별분양되는 과정에 또한 거액의 뇌물과 외압이 개입된 이혹을 낳기에 충분한 것이다. 검찰은 한보측이 처음부터 투기를 목적으로 자연녹지를 사들여 뇌물과 권력의 힘을 빌려 26개 주택조합에 특별분양해 주면서 조합측으로부터 3백40억원을 받고 이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다시 대출을 받는 등 8백억∼9백억원 이상의 이득을 남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돈 가운데 상당액이 로비자금으로 활용됐으리라는 것이 수사를 맡은 검찰의 견해이기도 하다. 특히 자연녹지를 택지로 푸는데는 민자당의 K의원과 평민당의 L의우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전비서관은 바로 이들 의원에게 로비활동을 벌여 여·야당 및 건설부·서울시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고 지역구출신인 이태섭의원(민자)의 소개로 주택조합측이 제출한 청원을 받아 들여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건설부의 유권해석이 내려지고 서울시의 특별분양 불가방침이 뒤바뀌어 허가가 나간 것으로 검찰은 밝히고 있다. 검찰은 이날까지 관련 공무원과 한보측에 대한 수사를 대체로 마무리 짓고 설날 전날인 14일까지 장 전비서관 및 국회의원 등에 대한 수사까지 매듭짓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수사를 서둘러 매듭짓다가 『수사가 미진하다』는 의혹을 남기지는 말아야하며 그야말로 「성여없는 수사」로 모든 사실을 명백히 밝혀 환부를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여론이다. ◎“의혹 규명 1주일”… 특감 결산/한보 「양도차익금」의 행방 못밝혀 아쉬움/장 전비서관 압력여부 구체적 언급 없어 노태우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지난 6일부터 수서특혜 의혹사건을 특별감사해온 감사원은 특감 1주일만인 12일 그동안의 감사결과를 노대통령에게 보고함으로써 감사활동을 사실상 매듭지었다. 감사원의 특감실시결과는 대체로 ▲26개 주택조합에 대한 서울시의 택지특별 공급결정(1월21일)의 부당성 판정 ▲장병조 전 청와대비서관의 서울시 등에 대한 압력행사 확인 ▲한보그룹의 기업정상화 자금의 변칙사용 및 탈세적발로 요약된다. 이같은 감사활동에 따라 감사원은 택지공급결정의 전면 재검토를 서울시에 공식 통보하고 장 전비서관과 한보에 대한 감사자료 일체를 검찰에 이첩했다. 감사원은 그러나 서울시 택지공급결정의 부당성 판정에 따른 이유 이외는 그 내용을 일체 발표하지 않음으로써 이번 사건에 대한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키는데 매우 미흡했다. 물론 감사원의기능이나 업무의 성격에 비추어 행정상의 잘못이나 제도상의 문제점 적출에 중점을 두는 것이긴 하지만 이번 의혹사건 외압설의 장본인인 장 전비서관에 대한 압력행사 여부에 대한 구체적인 감사결과를 밝히지 않은 것은 국민의 의혹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감사원은 주택공급결정이 부당하다고 판정하면서 그 이유로 ▲공영개발의 취지에 어긋나고 86만명의 청약저축예금 가입자와의 형평서 위배 ▲각 주택조합의 설립인가 적법성 하자로 들고 있다. 감사원이 결론적으로 택지특별 공급결정에 잘못이 있다고 보는 것은 이들 26개 조합이 모두 수서지구에서의 토지소유 기득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26개 조합중 12개 조합은 건설부의 공영택지개발 지구고시(89년 3월21일) 이후에 조합설립을 인가받았기 때문에 공영택지개발지역인 수서지구에는 원천적으로 주택을 지을 수 없고 고시이전에 인가를 받은 14개 조합중 11개는 수서지구 이외 지역을 사업예정지로 하여 인가받았으므로 이들이 수서지구에 주택을 짓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이며 나머지 3개 조합은 수서지구내 건축을 전제로 인가는 받았지만 고시이후에 이곳의 토지를 매입했기 때문에 토지소유의 기득권이 있다고 볼 수 없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서울시 등에서는 주택설립예정지 기재 등은 일종의 형식절차인데다 사후변경도 가능하다는 입장이어서 이같은 감사원의 판정결과는 관련 당사자들의 이의제기 등에 따라서는 사법적인 판단에 맡겨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장 전비서관에 대한 「압력행사」 사실유무와 관련,감사원은 지난 8일 장씨를 7시간동안 추궁했으나 서울시에 민원이첩 공문을 작성하면서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하는 문안을 넣은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진술을 받아낸 것 이외는 특별히 규명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감사원 당국은 『민원처리에 따른 언행과 주변정황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직권남용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압력행사의 일부 사실은 일단 확인됐다』고 밝혔다. 물론 형법상의 직권남용부분은 검찰이 구체적으로 밝힐 사항이겠지만 적어도 감사원은 특별감사를 마무리 하는 이날 시점에서는 「압력행사」 여부에 따른 감사의 진전내용을 국민들에게 밝혔어야 옳았다고 생각된다. 한보에 대한 기업정상화 자금변칙 사용 및 수서지구 땅 양도차익 탈세감사 내용도 지난 10일 발표사항 이외에 더 추가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한보그룹이 지난 87년 4월 계열회사의 부족자금 해소를 위해 조흥·상업·서울신탁은행으로부터 한보상사·개포지역 비업무용 부동산(5만평)의 매각 등 자구노력을 조건으로 87년 5월부터 12월사이에 5백81억원의 구제금융을 받았으나 비업무용 부동산을 그 뒤에도 처분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이 자금중 4백81억원을 정태수회장 개인앞으로 빼돌려 서울·경기지역에 부동산투자를 했다는 사실을 밝혔었다. 또 한보가 지난 89년 11월 수서지구 땅 4만7천7백10평을 주택조합에 넘기면서 평당 58만원에 취득하여 같은 가격으로 팔아 양도차익이 없는 것으로 신고되었으나 실제로는 평당 1백48만원에 매각,4백27억원의 양도차익이 발생해 여기에 해당되는 법인세 특별부가세 1백28억원을 탈세한 것도 밝혀냈다. 그러나 정회장이빼돌린 자금이나 양도차익으로 생긴 자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를 밝히는 자금행방의 추적작업은 매우 부실해 이번 사건의혹의 최대관심인 로비자금의 조성과 그 사용내역을 밝히는데 있어 감사기능의 벽을 확연히 드러나게 해주었다. 감사원이 못다 풀은 「압력」과 「로비」는 검찰이 수사에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됐지만 이번 사건에 대한 의혹을 풀기위해 처음부터 감사원의 감사활동과 검찰의 수사를 병행하지 않고 시간적으로 시차를 두어 조사를 하게한 것은 이날의 특별감사결과를 보아서도 아쉽기 짝이 없다.
  • 김 총무­중진의원 연쇄회동 언저리

    ◎“중간보스 체제구축” 민정계 잠수활동/「지역 분할관리」→「협의체 운영」 구도/민주계 비주류에도 「프로그램」 협조 요청/독자세력 갖춘 월계수회의 향배가 변수 정치권이 「뇌물외유」 사건에 이어 서울 수서지구 택지분양 의혹사건이라는 새로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가운데 김윤환 민자당 총무가 이러한 침체된 분위기를 활용,민자당의 민정계 중진의원과 민주계 「비주류」 중진들과 연쇄회동을 갖고 당내 정지작업을 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 김총무는 이들과의 회동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있는 각종 정치현안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한데 불과했다고 모임의 의미를 애써 평가 절하하고 있으나 민정계의 단합방안에서부터 향후 정국운영계획 등 차기대권구도와 연관된 주요정치 일정문제를 치밀하게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김총무의 최근 이같은 잠행은 향후 정치권의 풍향변동에 따라 생각밖의 영향력을 미치면서 점차 가시화될 조짐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김총무는 최근 민정계의 이춘구 이한동 이종찬 심명보 오유방 이태선의원 등 중진들과 민주계의 비주류중진인 신상우 황낙주의원 등과 잇따라 오찬회동을 갖고 3당 통합이후 자신이 구상해온 「정치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이들의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총무는 특히 민정계 중진의원들과의 모임에서 민정계가 단합하려면 노태우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되 박태준 최고위원을 노대통령의 「대리관리자」로서 받들면서 6공들어 당 3역을 역임한 중진급 의원들이 지역을 할당,분할관리하는 체제로 민정계를 이끌어가는 방식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말하면 이종찬(서울),이한동·정동성(경기),심명보(강원),이춘구·박준병(충청),김윤환(경북),정순덕의원이(경남) 지역별로 민정계 의원들을 분할관리하되 이들 중진의원들간에는 「협의체」로서 운영한다는 것이 김총무의 구상이다. 특히 김총무의 이같은 구상은 지난달 28일 박태준 최고위원이 청와대에서 노대통령과 단독회동했을 당시 「정식」으로 보고됐으며 어느정도 내낙을 받았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민정계가 3당 통합직후한때 채택했다가 계파간에 알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중도포기했던 이같은 형태의 단합방식을 다시 수용한 이면에는 계파내 불만의 소지를 최소화시키는 측면외에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측의 세력확장 작전에도 대비한 사전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민정계 지도부는 지난해말이래 「8인 그룹」의 활동이 가속화되면서 민정계가 각각 당직자와 비당직자를 중심으로 한 주류·비주류로 양극화될 조짐을 보이고 계파내에서 「8인 그룹」의 대표성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자 대표성문제와 계파내 이탈을 최소화하는 방안으로 김총무식의 단합방식이 다시 공감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단기적인 계파단합목적 외에도 김대표측이 펴고있는 「여권의 생리상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김대표 주변으로 흡수될 수 밖에 없다」는 시간벌기 작전에 맞서 「집단안보체제」로 대응한다는 전략도 깔린 것이라는 분석이다. 즉 대표측의 시간벌기 작전에 대비해 민정계측도 그물망형식의 방어망을 구축,「버티기 작전」으로 맞선다면 결국 김대표측이 상대적으로 초조해질 수 밖에 없으며 먼저 「도발」을 시도하든가 「에러」를 범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계산이다. 어차피 「정치도의적」인 측면에서 민정계가 민주계를 먼저 자극할 수 없는 형편인 이상 세확보에 초조감을 느낀 민주계측이 먼저 선공을 가하도록 유도한 뒤 이를 민정계의 공동방어로 무력화시키고 중진그룹의 합의체에서 차기 주자를 내세운다는 고등전술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장기적인 기획아래 김총무는 민주계 비주류 중진들과의 회동에서 앞으로 민주계와 김대표측과 전개될 「일전」 이후의 협력관계를 타진할 것으로 관측된다. 설혹 민정계와의 「일전」 이후 김대표측이 당의 울타리를 벗어나 반발하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그에 동조하는 세력을 최대한 삭감하기 위한 사전포석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민정계의 이같은 단합방식에 대해 독자적인 세력군을 형성하고 있는 월계수회측과 「서명파」측의 대응도 만만찮은 실정이다. 이들은 지역대표로 나설 중진의원들이 비록 당 3역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갖췄지만 공천권,정치자금,인사 등 「조직」을 거느리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할 주무기가 거의없는 「빈털털이」라는 점을 들어 『누가 과연 그들을 중간보스로 인정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들은 외형적인 기준만으로 「허수아비」 중간보스를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 실제 영향력이 있고 의원들의 사후를 보장할 수 있는 「실세」들이 중간관리자로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김총무식의 민정계 단합방식의 성패는 단기적으로 이같은 불만을 어떻게 흡수하면서 각지역 의원들을 그 지역을 대표하는 중진의원의 영향권내에 묶을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또 14대 총선 공천권을 둘러싸고 김대표측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까지 일방적으로 수비자들만 견지할 수 밖에 없는 민정계가 어느 정도의 구심력을 발휘,김대표의 원심력에 휘말려들지 않고 집안단속에 성공하느냐는 점을 이번 구도의 성패를 좌우하게 되었다.
  • 전과누락 의혹 규명 철저히(사설)

    전과누락 의혹은 규명되어야 한다. 그 자체가 범법행위라는 차원을 넘어 조작행위 여부가 확인될 경우 법집행의 근본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이 공권력의 중추인 검찰이나 경찰에 의한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 심각성이야말로 엄청난 것이어서 그러하다. 어느 한쪽의 실수로 인한 것이라고 해도 쉽게 용납될 수가 없다는 것도 이때문이다. 따라서 의혹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이번의 의혹사건은 근본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하나는 조직폭력배의 두목급들은 평소 권력층의 비호를 받고 있고 그 결과로 이번과 같은 전과누락이 가능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세간의 의혹이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정치인들을 비롯한 사회 유력인사들과의 폭력유착설이 심심찮게 들려왔다는 데서 이같은 의혹은 더욱 신빙성을 갖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는 인천지역 출신의 국회의원과 지역 저명인사들의 석방탄원까지 있었음을 볼 때 그런 오해의 소지는 충분하고 그런 데서 결과가 주목되는 것이다. 더욱이 대범죄 전쟁의실효를 위해 국가적인 총력대응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부각된 이번과 같은 의혹이야말로 보다 빨리 해명될 때 그나마 오해의 폭을 줄이게 된다고 본다. 그럴 때 실추된 명예도 회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번의 사건 자체만을 보아도 우리의 전과조회체계의 허술함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하는 사실이다. 신속한 신원확인이 재판에 있어 전제되는 것이라고 볼 때 1∼2개월이나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칫 법집행의 오류를 낳게 하는 것은 물론 기본적으로 행정의 전산화ㆍ과학화 추세에도 역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피의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속이는 고의적인 것이거나 또는 경찰의 입력실수이건 조회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결과가 틀리게 나오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누범자들은 주민등록 자체를 기피하는가 하면 분실을 구실로 또는 변조 등의 방법을 통해 끊임없이 당국의 눈을 속이고 있다. 이번의 사건에서도 범인은 나이를 허위진술함으로써 전과 사실을 감추려 했고 이런 범법행위가 관계기관의 비호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게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혹인 것이다. 따라서 관련 검찰이나 경찰은 그동안의 과정을 충분히 조사해 원인과 책임소재를 가려내야 할 것이다. 단순한 행정적인 착오에 의한 것이었다면 나름대로 문제를 보완하고 그렇지 않고 의도적인 것이었다면 상응한 조치가 있어야 될 것이다. 그에 앞서 누구나 이해되는 조사과정이 있어야 하고 규명은 제3자적인 기관에서 맡아줄 것을 당부한다. 불신풍조의 증폭을 막기 위해서도 빠른 시일 안에 그것도 철저하게 이뤄지기를 거듭 바란다. 그러면서 2명의 국회의원의 석방탄원 의혹도 사실여부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고 여긴다. 본인들은 모르는 사실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정치인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막중하다는 데서 해명이 납득되는 조사가 있어야 될 것이다. 사회지도층의 책임있는 행동이 더없이 요구되는 때여서 그러하고 폭력과의 유착은 근절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과가 주시의 대상이 된다고 본다.
  • 외언내언

    88년부터 89년에 걸쳐 일본 정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이 이른바 리크루트 스캔들. 한다한 거물들이 이 비리사건에 휘말려들었고 마침내 다케시타(죽하등) 총리가 사임하기에 이른다. ◆미공개 주식을 양도받아 공개 후 막대한 이득을 챙긴 것이 이 리크루트사건. 그런데 사건이 터지자 이에 연루된 정계의 거물들은 한결같이 발뺌을 했다. 『비서가 개인적으로 한 일이니 나와 관계가 없다』가 대체적인 발뺌론. 「오야붕­고붕」(윗사람ㆍ아랫사람)의 의리가 철저한 일본사회인만큼 비서들은 비서들대로 발뺌론을 합리화시킨다. 『보스는 전혀 모르는 일로 내가 경솔했다』면서. ◆하지만 이런 발뺌론­발뺌론 합리화 발언은 더욱더 여론을 악화시킨다. 최고재판소에서 『값이 오를 것이 뻔한 상장 전 주식도 뇌물』이라는 판결이 내려지고 다케시타 총리의 비서 아오키(청목이평)는 자살을 하고. 일본에서의 이런 종류 스캔들에는 으레 비서가 총알받이로 된다. 「제2의 록히드사건」이라 불린 79년의 그러먼 신예기 의혹사건 때도 「고붕」들의 자살사건은 잇따랐다. 그렇다고 「오야붕」들에게서 「도의적 책임」까지 떨어져나가는 것은 아니다. ◆현직 국회의원들도 끼인 저명인사들의 폭력조직 두목 석방 탄원서 제출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물의를 빚고 있다. 이름이 오른 두 의원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고 그중 한 의원은 「실무자」가 도장을 찍었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정말로 모르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임이 모면되는 것은 아니다. 요 임금은 『백성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책임은 내게 있다』(백성유과 재여일인)고 했지만 국회의원의 「아랫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 뽑아쓴 「손발」이 아닌가. 그래서 「백성의 잘못」과도 달라진다. ◆주목되는 점은 「전과12범」이 「초범」으로 조회되었다는 사실. 「큰 힘」이 작용한 것일까,아니면 사무상의 실수 때문일까. 아무튼 「범죄와의 전쟁」 속의 불쾌한 뉴스다.
  • 중산층이 목소리 높여야 한다/김대환 이화여대교수ㆍ사회학(서울시론)

    ◎갈등과 대립의 「안전판」 역할 맡을 때 「중산층의 반항」이라는 시쳇말이 곧잘 되뇌어진다. 이 말은 산업화ㆍ대중화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중산층의 좌절과 불안 및 위기의식과 일맥상통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서둘러 결론부터 앞세운다면 산업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중산층은 확산되고 건실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안정되고 건강한 사회가 된다. 왜냐하면 중산층은 문자그대로 자본가계층=지배층과 근로노동자계층=피지배층 등 이해가 상충되기 쉬운 대좌적인 두 세력사이에서 조정하고 중화하는 완충기능을 함으로써 산업평화를 통한 사회안정의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인종,다양한 문화,복잡다단한 이해관계로 얼킨 미국과 같은 거대한 대중사회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런대로 최소한의 질서는 유지되고 있다. 그것을 지탱시키는 힘은 무엇일까. 다름 아니라 바로 중산층의 비대와 온존이 그 밑받침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중산층 또는 중간계급이라는 낱말 대신에 곧잘 테크너크랫이라는 표현으로도 불린다. 우리는 그 말을 기술관리계층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 미국인들은 산업경제 뿐아니라 심지어는 정치분야에까지도 과학과 기술과 조직관리 및 운영에 있어 능란한 테크너크랫들의 기능화와 합리화를 통해 그 능률화를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곧 기술가정법치주의 및 제도를 뜻하는 테크너크라시이다. 데모크라시와 함께 즐겨 쓰여지는 이 낱말은 미국공황이 있었던 1920년대말의 경제위기와 사회혼란을 수습하고 극복하는 사조와 시류에서 연유된 것이며 그 구체화는 바로 뉴딜정책에서 음양으로 투영케 되었다. 이 말은 어찌보면 잔꾀만 일삼고 권모술수로 시종하는 등 적지않게 허망하기까지 한 우리의 정치작태와 견주어 생각해 볼때 많은 것을 시사받게 한다. 그같은 테크너크라시의 담당계층과 중심세력은 다름아닌 중산층 그들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의 중산층도 양적으로 확대되고 질적으로 건전하게 육성 발전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건전한 생활기풍과 참신한 생산의욕과도 직결되며 국가사회의 명운과도 긴밀히 연관된다 하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중산층에 관한 마르크스 및 반마르크스주의의 진부하기도 한 계급이론의 당위성 여부를 다룰 겨를은 없지만,우리의 경우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차원에서 중산층의 지위가 포약화되고 있고 그 존재의미가 적지않게 희석화되고 있음이 현실이고 그 정도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지난 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의욕적이고 야심적인 산업화ㆍ근대화의 물결에 휩싸여 기업가와 더불어 중산층은 기술을 개발하고 기업을 관리하고 시장을 개척하고 수출을 증대시키는데 큰 몫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가는 상응하지 못했었다. 그 뿐더러 3년전의 6ㆍ29 이후,자유화의 거센 바람속에서 일기 시작한 열 띠고 뭉쳐진 노동운동은 중산층의 존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것 아니더라도 정체적인 사회적 성격이 강한데다 적지않게 보수적이고 체제순응적이기도 한 것이 중산층이다. 그들 중산층은 대학교육의 대중화에 따른 고학력인력의 증폭과 함께 그 성향과 행동을 더욱 묘한 것으로이끌어 가게했다. 어쨌든 중산층은 관료행정사회에서 조직과 기능의 핵심이 되고 있고,경제산업사회에서 경영보조적인 위치에 있긴 하지만 실은 그들이 갖는 지식과 과학과 기술은 가히 중추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기에 상당하는 사회적인 인정감도 정신적ㆍ물질적인 보상도 받지 못하는 속에 아침부터 밤까지 혹사만 당하고 있다. 그 와중에서 그들은 자기분열을 하면서 부동한채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실의까지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에의 반발로 그들의 의식세계는 때로는 급진화ㆍ과격화로 급선회하게 된다. 물론 그 반면 보수퇴영화의 성향도 적지않게 있다. 그 나머지 그들은 생산면에서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것보다는 소비면에서 쾌적ㆍ안이ㆍ향락을 추구하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의 존재의미에 대한 강한 자의식이나 주체적인 자각보다는 다만 돈을 많이 벌고 자기지위를 높이는데만 급급한채 치열한 경쟁속에 파묻히게 된다. 그들은 외형적인 면에서 한편으론 자본가계급을 뒤쫓아가면서 허탈해야 하고,다른 한편으로는 뒤쫓기는 위치에서 근로노동계층과 구별되기를 원한다. 이런 상황들은 그들로 하여금 지극히 소시민적인 소비성향을 조장시키게 되며 그같은 심의의 표출은 생활방식 즉,주택 자동차 생활용구를 통해 스스로의 심리적보상을 얻으려들게 한다. 중산층은 이율배반과 자기모순속에 회의에 빠진다. 남보다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하면서 쌓아올린 과학과 지식과 기술과 인격의 축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산층은 직장의 상하관계나 위계질서속에서 스스로의 능력과 기량을 짓눌린채 살아가는 수도 있다. 그들은 자본가처럼 흥청망청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그렇다고 해서 근로노동자처럼 조직력이나 단체교섭권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행정 및 산업경영의 경우를 보자. 간부나 중역진은 윗사람이나 기업오너의 동정만 살피면서 무사안일하게 자리유지에만 시종 한다. 마치 다수의 병졸이 죽는 속에 얻어진 공로는 오직 장성 한 사람만 차지한다는 「일태장공 만골고」라는 개탄의 시구처럼 우리사회는 돼가고 있다. 그같은 행정 및 기업풍토속에서 어찌 자발적인 창의성이나 행정능력기술개발 시장확대가 기대될 수 있을까. 각설하고 중산층은 체질적으로 유약하고 조직적으로 취약하다. 그렇다고해서 대중 산업사회의 구조와 기능이 그들의 그같은 허약점만 악용한다면 중산층은 분노끝에 자위를 위한 반항을 시도케 될 것이다. 반항의 양태는 여러가지로 나타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되는 날 그것은 예상치 못한 그러면서 놀라운 사회불안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처음 공개된 마쓰시로 「제2대본영」

    ◎한인원혼 떠도는 「일제」발악의 현장/지하호 13㎞… 「본토결전」위해 극비공사/한인노무자 7천명 강제동원… 천여명 사망/맨발ㆍ맨손으로 발파작업… 하루3∼5명 희생당해 【마쓰시로 연합】 일본이 패망 직전 일왕의 임시 거처와 전시최고사령부(대본영) 구축을 위해 한국인 노무자들을 강제 동원,극비리에 건설하던 「마쓰시로 대본영」 내부가 22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본군의 「제2대본영」으로 불리는 마쓰시로 대본영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 11월11일 상오 11시 대규모 발파작업을 시발로 도쿄 북서쪽 6백㎞지점의 나가노(장야)현 나가노시 마쓰시로읍 일대 3개 야산의 땅밑에 구축하던 지하호로 당시 현지 경찰과 헌병들조차도 공사사실을 모를만큼 철저히 은폐돼 왔던 곳이다. ○3개 야산에 구축 태평양전쟁말기 사이판섬 함락(44년 7월) 등으로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본격화되면서 일본군 수뇌부가 도쿄 대본영을 폐쇄,이른바 「본토결전」태세를 갖추기 위한 배수진으로 마련됐던 이 대본영에는 최소한 한국인 노무자 7천여명이 지하갱도굴착,발파작업 등에 강제 동원돼 1천여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이 패망하기 하루전인 45년 8월 14일까지 9개월동안 계속된 대본영 건설공사에는 당시 돈으로 2억엔이라는 엄청난 예산과 연인원 3백만명이 투입돼 패전으로 공사가 중단될 때까지 총연장 13㎞의 지하호가 완성(공정률75%)됐으며 발파등 가장 위험하고 힘든 막장작업에는 강제징용된 한국인들이 동원돼 하루 3∼5명씩 목숨을 잃은 것으로 생존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요미우리(독매),아사히(조일)등 일본 취재진 50여명과 함께 이날 처음으로 한국탐사팀과 취재진에 공개된 대본영지하갱도 안에는 당시 한국인 노무자들의 참혹했던 상황을 짐작케 하는 낙서,유류품 등이 곳곳에서 발견됐으며 지상에 세운 소위 일왕침실은 완공된 상태로 보존돼 있었다. 무학산,상산 등 해발 1백∼2백50m 높이의 3개 야산 지하에 파들어가던 대본영에는 왕궁,참모본부,왕족학습원,군사령부,정부행정기관 및 언론사가 들어설 수 있도록 돼 있다. ○곳곳에 한인 유류품 총연장 13km의 지하호는높이 3m,폭 3m의 통로가 바둑판처럼 뚫려 있었으며 지질이 단단한 암반이어서 어떠한 공습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는 것이 이곳을 공개한 관계자들의 설명이었다. 현재 대본영의 지상건물과 갱도 일부는 지진관측소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완공된 상태의 일왕 침실은 10평 크기의 일본 고유 다다미방으로 공습위험이 있을 경우 대피하도록 별도의 지하궁전이 마련돼 있었으나 이곳은 공개하지 않았다. 대본영 부근 시노노이 아시히 고교 지하호 연구회가 펴낸 조사서와 와다 노보루(화전등)의 저서 「송대 대본영」에 따르면 한국인 노무자들은 무학산지하호 부근에 78동,상산 지하호 부근에 1백29동등 모두 2백40여개동의 급조막사(반장)에 20∼30명씩 나뉘어 기거하면서 거의 유폐된 상태에서 기계ㆍ노예처럼 혹사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당시의 증언자나 자료가 거의 없어 사망자 숫자 등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노예처럼 혹사당해 다만 하루 3∼5명씩의 한국인 노무자들이 발파사고,갱붕괴사고 등으로 실려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으며 일왕침실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특정공사가 끝나면 20∼30명씩 집단으로 한밤중에 끌려나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극소수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최소한 1천여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일본신주대 학생들이 최근 작성한 보고서 등 마쓰시로 대본영에 관한 조사서들은 『특히 일왕의 임시거처에 동원된 한국인의 경우 등 뒤로 수갑이 채워져 어딘가로 끌려갔으며 이들이 산중에서 총살돼 매장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건설현장에 동원됐다가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본영 부근에 살고있는 유일한 한국인 생존자인 최태소씨(68ㆍ본적 경남 합천군 가야면 이천리)는 이날 현지 취재에 동행,자신이 직접 굴착했던 곳을 일일이 기억해내며 참담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최씨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침목이 깔려있던 흔적과 천장,벽에 무수히 뚫려 있는 다이너마이트 발파용구멍 등을 가리키며 45년전의 공사현장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해냈다. ○사담땐 죽도로 구타 최씨가 규수지방에서 거주하다 건설현장에 끌려온 것은 24살 때인 1944년 10월말쯤. 지금은 논ㆍ밭으로 변해버린 상산지하터널앞 광장에는 수백채의 조선인 숙소가 빽빽히 들어찼고 그때부터 최씨는 줄곧 인근 마을에서 건설공사 현장 잡역부로 일하면서 거주해왔다고 회상했다. 최씨등 한국인 노무자들이 주로 맡았던 일은 하루 12시간씩 맨발 맨손으로 낙반 가능성이 있는 곳이나 막장 등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 『한창 나이였던 덕분에 죽을 고비를 겪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최씨는 『50∼60대 한국인 노무자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중노동이나 사고로 숨졌다』고 말했다. 최씨는 또 『일본인 작업반장들은 1개조 4명으로 점조직처럼 구성된 작업반원들이 다른 조 사람들과는 물론 반원들끼리도 사담하는 것을 일체 금지시키고 이를 어겼을 경우 몽둥이 죽도 등으로 무참히 구타했다』며 『지금 징용자수나 사망자 수가 유곽도 잡히지 않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실제인력 더 많을듯 지난 87년 8ㆍ15해방 42주년을기념해 한국인 강제징용 사실을 다룬 「머나먼 여행」이라는 책을 발간했던 하루카 나루타비씨(50ㆍ여)는 마쓰시로 대본영 건설현장에 동원됐던 한국인 징용자수와 사망자수을 좀더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날 현지취재에 동행했던 하루카씨는 『4살때인 1944년 10월초 부모를 따라 마쓰시로로 이사했다』며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로는 하루 평균 한국인 노무자 5∼6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하루카씨는 『현재 알려진 7천∼1만명의 한국인노무자 투입은 실제보다 훨씬 축소된 것』이라며 암반 굴착작업이 하루에 1∼5m씩 진행된 것으로 미루어 볼때 9개월동안 동원된 인력은 이보다 훨씬 많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하루카씨는 『현재 일본정부는 강제연행자에 대한 공식적인 문서가 다 소각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어디엔가 명부가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일본정부의 정확한 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마쓰시로 대본영 건설의 진상을 파헤치는 요체』라고 강조했다.
  •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증언 속기록

    ◎“강경진압ㆍ과격시위가 광주사태 도화선”/합수부 설치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계획/정 총장,「김재규 관련조서」 4차례 고쳐/광주특위 ▷6ㆍ29선언◁ 어느 시대,어느 정치사회를 막론하고 이면사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때 그때 속속들이 알려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동안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또 지금 어떻게 추진되어 정치발전과 국가이익에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그 경위나 배경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이면의 얘기들은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소상히 밝힐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국민 여러분의 양해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간첩조작사건등◁ 선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지게 마련입니다. 실무진에 의해 이뤄진 일인 경우 대통령에게 보고될 수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임대통령으로서 답변할 수있는 부분을 총괄적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간첩조작사건 등은 실무진들이 조작했는지 않았는지 제가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또 물리적으로 답변준비시간이 짧아서 거기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가 없으므로 답변하지 못한 점을 양해바랍니다. ▷10ㆍ26에서 12ㆍ12까지◁ 1979년 국내 정국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로 정치ㆍ사회적으로 매우 어수선하고 경제도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박 대통령시해사건으로 18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절대권력이 일시에 무너져 국가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공백상태와 행정체제의 마비는 국민들의 충격과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시해사건이 권력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지절러졌다는 점에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10월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예상되는 북한의 군사적 책동에 대비하여 전군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상계엄선포와 동시에 계엄지역내에서의 수사업무를 일원화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구 계엄법 제11조와 비상계엄업무의 구체적인 시행지침인 「육군계엄시행계획」과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계엄사령관 직속하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운용하게 되었습니다. ▷합수부설치 배경◁ 본인은 1979년 3월 국군 보안사령관이 된 뒤 을지연습을 실시해본 결과 전쟁 발발시의 보안사령부의 역할 및 임무수행과 관련,여러가지 미비점이 발견되어 보완책의 강구를 각급 참모에게 지시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시 전국계엄상황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조직이 실제상 군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 바,이러한 상황을 가정하여 각급 정보수사기관을 조정 통제해야 할 비상계획수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상계획의 일부로서 합수부안이 평소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0ㆍ26사건 직후 실시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으므로 정부조직은 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고 주요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 되어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준비했던 합수부계획이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여 국방장관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합동수사본부는 기존의 수사기관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기구로 구성한 것이 아니고,당시에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로 나누어져 있던 수사업무를 조정 통제하여 계엄하에서 수사기능과 활동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62 당시 김재춘방첩부대장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공화당 사전조직 및 4대 의혹사건 등 중요한 사건들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김재규 체포 경위◁ 대통령시해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에 국무위원 및 군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며 사건현장을 목격한 김계원씨가 먼저 노재현국방장관과 정승화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노 국방장관은 곧 저를불러서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며 정승화총장을 만나 세부사항에 대한 지침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정 총장실에 가보니 정승화총장은 본인에게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에 보호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나는 당시 헌병감 김진기장군과 협의하여 김 장군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국방장관실로부터 참모총장실로 유인해 나오도록 하여 그곳에서 보안사수사관을 시켜 김재규를 체포토록 하여 보안사 안가로 이송,보호 조치케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10월26일 24시경이었습니다. 얼마 후 안가의 수사관들로부터 김재규가 틀림없는 범인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안가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김재규를 보안사 수사분실로 이송하여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가 27일 새벽 02시30분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정승화는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시킨 사람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밀고 있었으나 내가 1군사령관인 정 장군을박 대통령께 강력히 추천해서 총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김재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총장을 범행장소에서 36m 떨어져 있는 궁정동 안가에 대기시켰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계획은 박 대통령을 암살하고 비상계엄을 선포케 한 다음 군사혁명으로 유도해 정 총장을 비롯해 군고위층을 조종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거하여 수사관들은 정승화총장이 김재규의 공범 내지 방조범 아니면 배후의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10월27일 11시께 본인에게 정 총장을 연행 수사해야겠다는 건의를 해왔습니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면 증거를 인멸시켜 버릴 우려가 있고,수사 진행을 방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릴 염려마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수사관들로서는 정승화에 대해 많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사통제ㆍ조정 필요◁ 어째서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이 할일없이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근처에 두시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느냐는 것이고,근접한 위치에서 수십발의 총성이 들려왔는데도 대통령이 근처에 있는 줄 알면서 당장 진상을 알아보려고 안한 것은 30여년 군에 복무하여 군의 최고직위까지 오른 사람의 습성으로 보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고 피묻은 셔츠바람에 맨발로 달려온 김재규를 목격했으면서도 경위도 알아보기도 전에 같은 자동차를 탔다는 것,김재규는 여섯발을 장전한 권총으로 다섯발을 쏘고 한발이 남은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있었으니 김재규의 몸에서 화약냄새가 났을 것임에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차 안에서 김재규가 수행원의 상의와 구두를 빌려 입고 신고하는 동작이 있었는데도 그냥 넘겨버렸고,육군본부에 도착하고서도 별다른 조치없이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군 이동을 한 것 등으로 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었고 당시 저 자신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처음엔 수사관들의 건의에 구두승인을 내렸다가 나라의 전반적 정세에 생각이 미쳐 그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분간은 계엄령의 질서하에 국내 치안확립이 시급한 일이었고,북한 남침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인데,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지 일곱시간밖에 안된 정 총장을 연행하는 사태가 생기면 혼란을 더욱 격화시키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도피의 우려도 희박하고 증거인멸을 한다 해도 그 범위는 뻔할 것이니 정세가 안정된 후에 수사를 전개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도 있어 그대로 수사관을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신보도와 국내언론을 통해 시해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되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나돌게 되자 정 총장은 자신이 스스로 조사를 받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자청에 따라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4일간 합수부 조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실에 출두하여 매일 두시간 정도 정 총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산관들은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위압감을 조성함으로써 순리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하여 전후 4차례에 걸쳐 수정시키기도 했습니다.심지어 그는 조서를 총장실로 가져오라고 해서 자신이 조서내용을 직접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승화총장의 10ㆍ26시해사건관련 의혹이 짙어만 갔습니다. 많은 억측이 유언비어가 되어 항간에 범람했습니다. ▷10ㆍ26,쿠데타로 판단◁ 이런 상황에서 저는 수사의 총책임자로서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합수본부장으로서 대통령시해사건이야말로 중대한 사건인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에 성역이 없다는 신념하에 정확한 전모를 신명을 걸고 밝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남은 작업은 정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여 그 의혹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흑백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 군 자체의 기강이 흔들리는 동시 마침내는 군이 분열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1월께 본인은 모든 상황을 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건의하였더니 「좀 더 두고보자」고 했고 그후 최 대통령에게 건의드렸더니 『국방장관과 상의하라』고 말씀하셔 본인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 총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내부에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조사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한 노릇이었습니다. 목숨을 걸어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구국적인 소신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평상시 본인은 미국의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이 영원한 미궁에 빠져버린 것을 미국의 수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본인이 운명적으로 시해사건수사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을 때에 저 개인의 신상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기필코 이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히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본인은 김재규의 수사과정에서의 진술이 미국이 개입되었다는 통설,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육군참모총장이 범행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 등을 취합해서 쿠데타가 아니면 쿠데타에 준하는 사건이라고 당시로서는 판단할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정 총장 자신의 말대로 오비이락격으로 그가 시해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건 그분의 불운이라면 불운일 것입니다. 불운이라 해서 수사의 객관성과 냉정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용의자를 제외하고 수사를 마무리지었다간 의혹은 의혹대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 결과는 결국 수사책임자의 직무태만이란 원성으로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직무태만이란 비난이 겁나서가 아니라 정 총장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키는 동시,정 총장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본인은 정 총장을 수사할 적기를 포착하기 위해 정국의 추이를 주시하는 한편 군부내의 여론을 수집하였습니다. 11월 중순경부터 중진 장성들과 접촉을 계속하였는데 그 가운데 정 총장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장군도 끼여있었습니다. 당시 황영시 1군단장,차규헌수도군단장,유학성국방부군수차관보,노태우9사단장 등을 한분한분 찾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런데그분들은 하나같이 10ㆍ26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어떤 고위층도 예외일 수 없으며 빨리 흑백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육군 최고책임자의 관련혐의는 군의 단결과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하루속히 결판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의 신념과 군전체의 총화가 일치된 것으로 느끼고,12월 초순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새로 발족한 후 김재규재판과의 관련으로 보아 정 총장에 대한 수사를 연기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12월12일 임무를 결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2월12일로 날짜를 잡은 것은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휴일 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지을 작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본인은 총리공관으로 최규하대통령을 찾아뵙고 정승화총장을 연행하여 조사하겠다고 보고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혐의만으로도 정총장이 계엄사령관과 참모총장직에 부당하다는 것을 설명드리고 정 총장을 조사한 결과 그가 계엄사령관 및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경우,그 공백을 대통령께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대통령의 사전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수부장의 포괄적인 고유권한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본인은 합수부 수사요원을 총장공관으로 보내 정 총장에게 수사에 협조하도록 전한 후 모셔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정 총장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강제연행을 하게 되었고 정 총장이 총장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헌병에게 발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수사요원이 희생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야기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인은 그날 밤 18시30분 경복궁에 있는 30단으로 평소 정 총장과 가까운 관계인 군의 중진 장성들과 그밖의 몇몇 장성들을 초청해 놓고 있었습니다. 정 총장이 시해사건과 고의이건 아니건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군내부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으로 군 지휘계통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내리도록 허심탄회하게 건의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사결과 예편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30단에 모인 장성들이 총장공관에까지 따라가서 조용히 예편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신중을 기한 것은 정 총장이 일단 예편하기로 결심하였다가 혹시 울컥하는 감정으로 군을 동원하여 보안사를 공격하고 수사요원을 체포하여 하극상 사건으로 몰아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려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소를 보안사가 아닌 30단으로 정한 것은 본인이 정 총장의 감시하에 있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보안 유지를 위해 저의 사무실이 아닌 바로 인접한 30단의 단장실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상했던 대로 연행과 관련된 무력충돌 직후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면서 수도권의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 총장 측근의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 등이 탱크를 포함한 중무장부대를 동원하여 청와대 지역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합수부는 수사기관으로서 전투병력이 없는 상태이고 부대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될 것이므로 주요부대 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제를 당부하는 등 충돌을 피하도록 적극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정 총장측근에서 계속 위협을 가해왔기 때문에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가운데 제한된 규모의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긴급대응의 조치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일각에서 또는 미국측에서 이 사태를 계획적인 거사가 아니었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태는 돌발적이었습니다. 당시 30단에 모였던 장성들이 병력을 출동시킬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태를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또한 본인에게 대한 전보발령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있는 모양이지만,본인은 그 당시에는 일체 그와 같은 일은 들안 바가 없습니다. 본인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의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는 쿠데타가 어디 있겠으며 만약 쿠데타였다면 왜 본인이 그 직후 바로 권력을장악하지 않았겠습니까? 본인은 그 당시로서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과거 고 박대통령으로부터 정치입문 권유를 몇차례 받은 바 있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군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12ㆍ12사태는 당시 시해사건에 대한 최고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발생◁ 광주사태는 10ㆍ26 이후 지속된 극심한 사회혼란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지극히 불행한 사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태발생 당시 정보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초기 단계에는 쌍방간에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며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계엄사령부에서 무력진압을 계획중이라는 정보보고를 들은 바 있었으나 이처럼 엄청난 비극으로 확대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읍니다. ▷광주참극 상상 못해◁ 당시 광주 일대는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 등의 정보기관들이 모두 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보책임자였던 본인도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갖지 못하였고 현지 주둔부대인 광주계엄분소에서 계엄사에 보내는 보고를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극히 혼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부재의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보안사에서는 서울에 있던 광주출신의 한 장교가 자진해서 현지에 잠입,단편적 정보를 계엄사를 통해 보내오기도 하고 또 당시 보안사의 간부를 현지로 실정 파악을 위해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여러가지로 정확한 상황판단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정보에 기초하여 본인은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으며,시민을 상대로 한 사태수습을 군 작전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정보책임자로서의 의견을 계엄사의 지휘관들에게 전달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커다란 인명피해를 낸 이 비극적 사태의 원인에 대하여 본인은 무어라 한두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당시 계엄하에서 광주사태 이전에 서울 등지에서도 각종의 시위가 있었으나 평온을 되찾은 반면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다만 본인은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이 사태가 초동 진압단계에 있어서의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일부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부대 파견ㆍ작전◁ 당시 광주사태와 관련된 계엄업무는 전국적인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계엄사령관이 주재하는 계엄관계관 일일회의에서 보고되고 논의되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앙정보부장서리인 본인은 그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군지휘계통상의 간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본인은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으며 당시의 계엄사령관 이희성장군은 그분의 강직한 개인적 성품으로 보아도 지휘선상에 있지 않은 본인이 군작전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 공수부대는 5ㆍ18계엄확대조치의 일환으로서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 대전 전주 지역에도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병력을 광주 전주 대전에 각각 3백여명 규모의 일개 대대씩 파견하였고 서울지역 8개 대학에도 6개 여단병력 9천6백여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엄군의 증강은 광주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광주지역에 특별한 상황을 예상하여 투입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지 지휘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파견 배속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군지휘의 이해부족에서 제기된 의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 지휘체제가 이원화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압니다만 이 또한 일반적 군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부대라 하더라도 일단 타부대에 작전 배속이되면 그 배속을 받은 지휘관은 즉각적으로 그 부대를 장악해서 지휘할 책임이 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작전상 승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시의 현지 지휘관이 군 경력상 특수부대에 대한 지휘경험이 전무하여 원활한 작전수행에는 차질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해가 갑니다만 배속된 부대가 현지 지휘관의 지휘통제에 불응했다는 주장은 군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본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위권행사문제◁ 자위권의 행사문제는 초기에는 군인 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이 되며 현지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위권의 발동은 최악의 상황에서만 현지 지휘관의 사태판단에 따라 제한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며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상급사령부나 계엄사령부 등의 군 고위층에서는 신중론이 우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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