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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남북연석회의(새로쓰는 한국현대사:20)

    ◎김구 도착전 개최… 북서 분위기 일방적 주도/명목뿐인 대표 내세워 각본대로 인공수립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용운(조사부 〃)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는 19 48년 4월 19일 하오6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막을 올렸다.김구는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아침 평양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군중의 저지에 부딪쳤다.그의 거처인 경교장 뜰에 새벽부터 몰려든 학생·청년들은 김구에게 『북행은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것일 뿐』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다. 김구는 몸소 베란다에 모습을 드러냈다.『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칠십여년(72살)이 되었다.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이대로 가면 조선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절절하게 호소했다.그러나 군중은 끝까지 김구의 평양행을 만류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뒷담을 넘어 북행길에 나섰다. ○김규식은 참석 망설여 김구의 북행에는 아들 김신과 비서 선우진이 동행했다.김구 일행은 자동차편으로 개성,여현(지금의 판문점)을 거쳐 밤늦게 평양에 닿았다.한편 김규식은 이틀 늦은 21일 서울을 떠나 다음 날 새벽 평양에서 합류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북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이들이 민족통일을 이루고,또 민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어렵게 평양행을 결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하지만 일부에서는 다른 요소들이 작용했다는 시각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구의 경우 당시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았다는 것이다.당시 그가 북행을 결심할 무렵 한국문제는 유엔 결의에 의해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쪽으로 굳어져 있었다.이는 이승만의 의도이기도 했다.이에따라 이승만은 그 세력을 급속히 넓혀간 반면 경쟁관계에 있던 김구는 궁지에 몰리는 판이었다.결국 김구는 남북협상을 하나의 정치적 돌파구로 여겨 모험을 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비해 김규식은 끝까지 연석회의 참석을 망설인 것으로 전해진다.그는 나름대로 남북협상의 한계를 예상했지만 자신이 그동안 주도해 온 남쪽에서의 좌우합작이라는 명분의연장선상에서 부득이 평양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김구가 도착하기 몇시간 전인 19일 하오6시에 남북연석회의는 시작됐다.개회사에 이어 김일성이 「북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하고 잇따라 박헌영·백남운·허 헌이 등단해 연설하는등 회의는 북쪽의 일방적인 주도 분위기로 이어졌다.마지막 날인 4월 23일 연석회의는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미·소)양군 철퇴 요청서」「전조선 동포에게 격함」등 여러가지 결정서·성명서가 채택됐다. 이 회의에서는 남북의 56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백95명이 참가했다고 공식 발표됐다.남쪽에서 참가한 단체는 41개,주요인사는 김구·조소앙·엄항섭·조완구(이상 한독당),김규식·여운형·원세훈(이상 민족자주연맹),그리고 홍명희 민주독립당 당수등 50여명으로 파악됐다. 연석회의에 이어 26∼30일에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남북 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이 때 비로소 김구·김규식은 북쪽의 김일성·김두봉과 합동으로,또는 개별적으로 여러차례 회합을 가졌다.이 네명이 실질적으로 합의한 사항은 30일 공동성명서 형태로 발표됐다.4개 항의 내용은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 ②외국군대 철거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확인 ③조선인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④남조선 단독선거 반대 등이다.특히 각 정당은 성명서 말미에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와 이 선거로 수립하려는 단독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지지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해주서 2차모임 갖자 남한 대표들은 북에 잔류를 희망한 홍명희 등 70명을 남겨두고 5월 4일 귀경했다.남북연석회의는 대단한 성과나 거둔 듯이 보였다.김구·김규식은 5월 6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단선 반대」입장을 재천명했다.5월 8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주도로 총파업이 단행됐고 각급 학교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의사에 상관없이 총선거는 무난히 치러졌다.「총선 거부」로 공식적인 정치의 장에서 밀려난 남한의 남북협상파들은 급격히 몰락한다.「5·10 선거」가 실시된 뒤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파 정치인이나 정당들은 「단독선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다시금 발표하지만 이미 메아리없는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말았다. 한편 평양에서는 5월 25∼26일 「남북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렸다.여기서 총선저지가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소집을 결정한다.6월 11일 북한측은 남쪽의 남북협상파 인사,정당에게 6월 23일 해주에서 제2차 회의를 갖자고 전격 제의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 등 초청을 받은 인사들은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첫째 그동안 남한정국이 변해 공개적으로 해주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비공식으로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는 남한 당국의 법률 제재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돼 있었다.결국 김구·김규식은 불참을 통고했으며 북조선노동당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대회를 평양에서 강행했다.이 회의는 남한에서의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통일정부로서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남로당 지하선거 실시이 해주회의에서는 김구·김규식을 이용해 「5·10선거」를 방해하려 한 북한의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자신들의 참여없이 이처럼 엄청난 결정을 내린데 대해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쪽의 남북협상파 정치인들은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하지만 이미 「쏘아버린 화살」꼴이 됐다. 이후 남북협상의 흐름은 철저히 북한측 의도대로 잡혀갔다.명목상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8월 21일 해주에서 열렸다.이 자리에는 남로당이 지하선거에서 선출된 이른바 「남한 대표」1천여명이 나왔다.거의가 남쪽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일부 정당인사가 구색용으로 들어있었다.이들은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울 때 남한 주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선전한 것은 물론이다. 남북협상의 기운은 이로써 실질적인 막을 내렸다.남북협상의 전과정을 돌아보면 남쪽의 정치인들이 북한측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김일성의 김구·김규식 초청­연석회의 개최­5·10선거 반대 결의­제2차 대회의인민공화국 수립 결정­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등의 계획된 수순을 밟아나갔던 것이다.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의 남북협상파들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기회는 한번도 얻어내지 못했다.모든 것은 북한쪽의 뜻대로 진행됐을 뿐이었다. ◎UNTCOK 보고서/김규식 등 남대표 불러 융숭한 대접/“남에 전기공급”약속후 1주뒤 끊어 북한은 1948년 4월 19∼25일까지 열린 평양 남북연석회의를 정치적 선전기회로 철저하게 활용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당시 주한미군사령부의 「평양 연락장교 보고서」(1948년 4월 16일)등의 여러 자료는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이 보고서는 남한의 방문자들에게 감명을 주려고 북한 당국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평양시내의 도로를 보수하고 연일 시민들을 동원,청소를 하는 한편 길가의 건물에 페인트를 발랐다고 보고했는데 당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평양방송 청취기록도 이를 뒷받침했다.UNTCOK 평양방송 청취기록은 「남한 대표들이국영공장 근로자들의 열성과 한 마을의 생활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었다.여기에는 「국영공장 휴게실에서 노동자의 피아노 반주에 놀랐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어 UNTCOK 기록을 보면 연석회의 일정이 끝난 4월 25일에는 40만명이 모인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참가한 뒤에 메이데이 기념 인민군 열병·분열행사도 참관한 것으로 되어있다.어떻든 남한 대표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4월 30일에는 대동강 쑥섬에서 낚시·보트놀이와 함께 어죽잔치를 즐긴 이들은 조만식의 남한 동행을 제의만 하고 적극 매달리지는 않았다.이 물놀이는 하오4시까지 계속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상적인 시찰여행과 대접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UNTCOK의 당시 분석이다.그래서 김규식은 김일성의 4월 25일 저녁초대 연설에서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고 북한을 극찬했다.김규식은 또 「우리 민족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련의 제의를 불가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식으로 미·소 양군 즉각철수안을 지지하고 나섰다.이같은 미·소 양군 즉시 철수론은 지극히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은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이 증명하고 있다. 한편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5월 6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는데,그 안에는 북한이 남한에 계속 전력을 공급키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 「정보개요」(1948년 5월)에 따르면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그날 저녁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으며 14일 실제 전력이 끊겼다.
  • 한국과 러시아의 군사협력(사설)

    그라초프 러시아국방장관이 한국을 다녀갔다.북한군을 만들고 보호해온 옛 소련군의 후예인 러시아군 최고책임자의 첫 방한이었다.이미 민주화된 러시아의 군최고 책임자지만 그의 방한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큰 것이었으나 그는 군사교류·협력등 그보다 더중요한 합의와 약속들을 하고 갔다.한·러관계의 새로운 발전과 긴밀화를 예고하는 내용들로 환영할 일이다. 양국국방장관 회담등을 통해 이루어진 합의와 약속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조소우호협력및 상호원조조약상의 자동군사개입조항 삭제」의 대목이다.92년 옐친대통령 방한 때의 사문화선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그동안 북의 남침 경우는 효력이 없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효력이 있다는등 애매한 유보태도로 우리의 국민적 거부감을 자극해왔다. 주로 러시아군부의 거부태도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것을 러시아군부의 최고책임자인 국방장관이 「현실성없는 낡아빠진 조항이며 그 사실을 오는8월까지 북한에 전달할 것」이라고 다짐한 것이다.냉전종식과 러시아민주화에 비추어 문제조항은 당연히 삭제돼야 한다.그것은 한·러관계의 순조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장애요인의 하나였다.그라초프국방의 다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지 주시할 것이다. 그라초프국방은 정전체제준수및 북핵개발저지등 적극적인 대한지지입장을 밝히는 한편 여러가지 중요한 합의도 남겼다.「군사기밀보호협정」과 「96,97년 군사교류양해각서」서명에 이은 「방산군수협력양해각서」가서명등은 양국군사협력관계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진전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민주러시아가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유도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및 민주평화통일에 기여하는 방향의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한반도정책을 추구해주도록 촉구한다.자동개입조항 삭제및 북한에대한 일방적인 무기및 군사장비 판매자제등을 요구하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임을 강조해 둔다.
  • 「일 트로바토레」·「안중근」·「무당」/오페라 3편 5월무대 장식

    ◎일 트로바토레/김동규씨 등 유명 성악가 출연/안중근/안의사 일생 그린 한·중 합작극/무당/이 출신 작곡가 메노티의 작품 싱그러운 5월 이채로운 오페라 3편이 음악팬들의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한국오페라단의 그랜드오페라「일 트로바토레」와 MBC 창작오페라「안중근」,국립오페라단의 「무당」이 그 작품들.앞의 두 작품은 남다른 의욕의 대작으로,국립오페라단의 「무당」은 이색적인 「소극장오페라 운동」으로 눈길을 끈다. 창단7년이란 길지않은 기간동안 화려한 대작들을 내놓아 오페라계의 눈길을 받아온 한국오페라단이 오는 27일부터 6월3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이는 「일 트로바토레」는 베르디가 전성기에 작곡한 것.그의 작품중 가장 원숙한 경지에 이른 오페라로 평가된다. 이번 무대는 특히 2인1역의 더블캐스트가 주종을 이루는 국내여건에서 한 주역에 국내외 정상급 성악인 각 한명씩으로 구성,매 공연에서 이들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는 욕심을 내세우고 있다.주인공 루나백작역에 바리톤 김동규씨(라 스칼라 주역가수),만리코역에 테너 브루노 세바스치안(〃),레오노라역에 소프라노 카타리나 구드리아프첸코(볼쇼이 오페라극장의 프리마돈나),아주체나역에 메조소프라노 정영자씨가 출연한다.특히 루나백작역의 김씨는 지난91년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제31회 베르디콩쿠르에서 1등을 한 이래 라 스칼라 오페라 주역으로 활약하며 현지에서 베르디아노(베르디의 아리아를 가장 잘 부르는 성악가)로 불리고 있다. MBC가 광복50주년 기념으로 17일부터 21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이는 창작오페라「안중근」은 안의사의 일생을 담은 한중합작오페라이다.고려오페라단(단장 김수길)이 6억원의 경비로 제작한 이 작품은 지난92년 중국 하얼빈에서 제작 공연된 중국작품을 극본가(하얼빈시 문화국장인 중국인 왕홍빈)와 작곡가(호남성의 가극원인 한국인 유진구)가 우리 정서에 맞게 개작하여 국내무대에 올리게 된 것으로 고려오페라단 김단장이 지난해 중국 하얼빈 여름음악제에서 접한뒤 국내에 들여왔다.안중근의사의 일생이 그랬듯 아름답고 슬프고 뜨거운 애국심을 전하는 아리아들이 무대를 애절히 장식한다.국립극장 오페라연출가 장수동씨 연출에 테너 박성원 박치원 류재광씨가 안중근역으로 트리플캐스팅됐다. 한편 「관객을 위한 오페라」란 이름아래 20∼25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무당」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미국 메트로폴리탄에서 성공을 거둔 현대작곡가 메노티의 1947년작이다.
  • 남북협상 전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19)

    ◎김구·김규식 잇단 제안… 하지,“북 음모” 비난/평양,인민군창설 선포… 「정치 제스처」 드러나 남한에서 남북협상론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어 머리를 들었다.1948년1월26일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를 제안한 김구의 담화로 시작되어 다음날 같은 맥락의 김규식의 담화로 이어졌다.남한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도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미군정의 반응은 냉랭했다.미군정사령관 하지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는 비난과 함께 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김일성,18일전 선제안 우리는 여기서 하지의 불편한 심기를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는 일찍이 북한이 제안한 사안으로 김일성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 사실에 주목했을 것이다.특히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이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를 제안하는 담화가 나오기 직전 1월8일의 김일성의 발언에 주목했다. 김일성은 이 발언에서 『전민족적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미제국주의를 추종하지 않는 우익민족주의세력,특히 김구와 대담하게 합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김일성은 1월13일 자신의 발언과 부합되는 내용의 편지를 김구와 김규식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남한의 좌익세력들도 물론 가세했다.2월초 홍명희의 비밀방북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인 것이다.그는 북한에 머물면서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이면통합활동을 벌이기로 합의하고 서울로 돌아왔다.그리고 나서 김구·김규식·조소앙·여운홍등과 접촉했다. 홍명희는 이보다 앞서 1947년11월에도 북로당위원장 김두봉의 편지를 통해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할 것과 광범한 세력과의 연대로 통일전선을 강화해야 된다는 주문을 받았다.이 시기에 공산주의진영의 민전도 남북을 부지런히 넘나들었다. 이 무렵 북로당은 대남연락부장 임해(임해)를 서울로 밀파했다.남한의 정치상황을 체크하고 2월25일 평양으로 돌아갔다.그는 민전확대회의에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제의는 애국적 결단』이라고 극찬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소련의도와 먼 거리 북로당은 이 보고를 토대로 남북협상 주요대상의 연합을 적극 모색한다는 정치노선을 채택한다.주요대상은 과거 반탁진영에 속한 우익세력 가운데 단정에 반대하는 그룹을 지칭한 것이다.북한이 남북연석회의를 정치적 공작차원에서 계획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남북협상 움직임은 사실상 이율배반적 정치제스처에 지나지 않았다.남북협상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2월 북한은 이미 작성해놓은 헌법초안에 대한 지지결의대회를 확산시키고 있었다.그리고 인민군 창설까지 선포하고 난 뒤였다.이러한 북한의 정치행보는 북한을 볼셰비키화하는 소련의 뚜렷한 목표를 따른 것이어서 수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울에 온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장 메논이 두 이데올로기의 장단점을 취사선택한 한국적 정치조직의 탄생을 기대한 적이 있다.그러나 북한을 볼셰비키화하려는 소련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유엔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 이유도 여기 있다. 유엔총회가 유엔감시하의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한 것은 1948년2월26일이다.그러니까 북한이 서둘러 취한 일련의 조치,헌법초안에 대한 이른바 전인민적 토의와 지지결의라든가 인민군창건 선포등이 있고 나서다. 2월10일에는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하는 임시헌법초안이 공포되었다.이렇듯 북한은 정권수립과정을 재빨리 밟아나갔다.그들대로의 단독정권의 기틀을 남한보다 먼저 다져놓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북한에 독자적 공산주의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민족자결원칙에 충실한 민주적인 동시에 민족의 분열을 막는 구국적 대책이라고 선전했다. 김일성은 인민군창설을 정식으로 선포하는 열병식 연설에서는 「북조선 민주기지에 의거한 무력통일」의도를 처음 드러내 보였다.이때 남로당은 북한정권수립을 지원하기 위한 2·7폭동을 일으켰다.김일성의 열병식 연설에 나타난 민주기지에 의한 무력통일은 당시 남한의 2·7폭동과 맞물린 것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이어내려오는 북한의 통일전략이다.남북의 역량을 3으로 볼 때 남북혁명세력을 2,나머지 1을 남한의 보수세력으로 계산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이를 가리켜 흔히 「1+1/2전략」이라 부른다. 소련이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반대하면서 미·소 양군의 철수를 주장한 이면에도 이 전략이 깔려 있었다.미·소 양군이 철수하고 한반도문제를 한국인에게 자율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소련의 주장은 북조선공산당(북로당)과 북조선인민위원회,남한의 남로당을 포함하는 좌익세력을 신뢰한 데서 비롯됐다. 1948년3월9일 북한의 민전 중앙위원회에 참석한 김일성은 소련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그는 소련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는 투쟁을 광범위하게 펼치자고 선동했다. 이러한 남북의 정치상황 속에서 3월25일 북한의 9개 정당과 단체이름으로 내놓은 성명문이 평양방송의 전파를 탔다.「남조선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 고함」이라는 성명문이었다.조국의 민족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남한 정당·사회단체들을 4월19일 평양에서 여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초청한다는 형식으로 발표되었다.그 속에 포함된 남한인사는 좌·우·중간파 15명이었다. ○북,대외적 선전거리로 어떻든 북한은 정부수립으로 가는 모든 절차를 갖추어놓은 상태에서 남북협상을 절호의 선전기회로 삼았다.이 성명이 나온 이틀 뒤인 3월27일 「소범위 지도자연석회의」소집에 동의한다고 김일성과 김두봉이 연서했다. 김구가 주도한 한독당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자주연맹은 자신들의 협상제의를 전적으로 무시해버린 북한태도에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북한 민전이 사실상 단독결정으로 준비하고,또 개최할 남북연석회의에 초청객으로 참가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심했다.결국은 참가를 결심했고,김일성과 김두봉이 연서한 남북연석회의 초청편지는 2월27일 밤 김구와 김규식에게 전달되었다.이 편지는 공개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북로당 연락부 요원이 직접 가지고 내려와 좌익계열의 성시백을 통해 전달했다.편지내용은 흰 인조견에다 썼다고 한다. 북한은 남북연석회의 소집을 발표한 나흘 후인 3월28일부터 평양에서 북로당 제2차 대회를 열었다.이 날짜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석회의에 앞서 북한의 정치세력을 과시하는 한편 회의에서 기선을 잡자는 술수를 깐 것이다. ◎“북,남공산주의자에 「단선 방해」 지령”/UNTCOK작성 「공당 활동」/“미군 철수” 주장… 정세분석 협조도 거부/우익계 대동청년단 등에도 “붉은 손길” 한반도정치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서울에 들어온 19 48년의 봄은 혼란스럽게 다가왔다.남북총선을 위해 입북하려는 한국임시위원단을 저지한 북한은 남한 단독선거를 방해하려는 온갖 투쟁수단을 동원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최근 미국에서 기밀이 해제된 UNTCOK 관계문서를 입수,이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이 문서는 48년1∼3월 사이의 한국인의 정치활동을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처(G­2)와 방첩대(CIC)의 정보보고및 평양의 대남방송내용을 통해 분석한 것이다.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UNTCOK의 임무를 혁명적 방법으로 반대한다고 전제한 이 문서는 모스크바와 평양의 지령에 의해 군대철수를 주장하고 있다고 적었다.이어 남한의 정세를 기록하기 위해 좌익계열의 허헌 등 4명을 UNTCOK에 나오도록 초청했으나 이를 거부했다는내용도 보인다. 그리고 38선이 지나가는 경기도 옹진반도의 공산주의활동을 소상히 기록했다.공산주의자는 성인인구의 10%에도 못미치지만 우익에 극력하게 침투,효과적인 간첩행위를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추어냈다.또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있는 우익계 대동청년단과 민족청년단체에까지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2·7폭동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했다.이 2·7폭동은 주모자들의 검거로 행동반경이 위축되는 듯하다가 3·1절과 3월25∼29일 사이에 재개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서에는 소련에 의해 통합된 임시헌법의 초안내용,인민군의 창군행진,남한단독선거에 반대하는 군중의 숫자를 평양방송이 연일 선전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이와 더불어 평양방송이 3월25일 방송한 북한 민전의 남북연석회의 제안내용을 전하면서 이 역시 소련의 전략으로 평가했다. 끝으로 북한사람들은 한반도를 소련이 지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확신있게 분석하고 남한에 장차 수립될 단독정부가 장래 통일을 실현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덧붙였다.이는 6·25 당시 남하한 인구를 보면 실증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 중 소수민족의 터전(운남성을 가다:2)

    ◎“마약 몸살”… 중독자계독소 85곳/“수감자 75%가 국교생∼25세 남녀” 충격/곤명시선 헤로인·아편 채소처럼 거래/인민해방군 동원 단속작전… 한해 3600㎏ 적발 『마약에 빠져들면 나와 가정,나라가 망한다』 『마약 젖은 내모습에 부모님이 슬퍼한다』 10대에서 20대 초반 처녀들이 제식훈련을 받으며 외치는 구호소리다.구호에서 알 수있듯 이곳은 신병훈련소가 아니다.일찌감치 마약에 찌든 젊은이들을 비롯한 마약중독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이른바 「곤명시 강제 계독소」.운남성내 85개 마약중독자 강제 수감치료소 가운데 하나인 이곳은 개방의 여파로 몸살을 앓는 운남성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계독소에는 11살 어린이부터 59세 초로의 노인까지 6백여명이 수감돼 있다.이 가운데 75%가 25세 이하의 젊은층.특히 국민학교 고학년과 중학생등 어린 층에서의 마약확산 문제는 운남성의 가장 큰 사회문제이자 발등의 불로 떠올랐다. 곤명 강제 계독소의 장옥조소장은 『강력한 마약퇴치 운동 결과,계독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수가 크게줄었다』고 말한다.그러나 장소장의 설명과는 달리 운남성의 마약 문제가 그렇게 장미빛만은 아니며 마약중독자는 실제로 늘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우려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마약을 구하는 일이 너무도 쉽다는 데 있다.수감생들에 따르면 곤명에선 기차역 주변과 골목길,교외 등 어디에서나 쉽게 살 수 있다.『마약 구하기란 시장에서 채소 사는 것 만큼이나 쉽다』는게 수감생들의 말이다.시내의 가정집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비밀 거래소로 변했다. 운남성 공안청 마약단속반 진존의 일급 경독(경정에서 총경사이의 직급)은 마약이야말로 국경무역과 외국의 자유왕래가 가져온 대표적 부작용이라고 핏대를 올리면서도 단속에는 한계가 있다고 한숨을 내쉰다.1g의 헤로인이 북경에선 1천위안(약 10만원)을 넘는데 이곳에선 3백∼4백위안 정도라 하는 것만 봐도 이곳의 마약범람 정도를 짐작케 한다. 국경무역의 활성화와 외지인 특히 관광객의 대거유입으로 운남의 현금동원 능력이 다른 대도시 시민에 비해 못지 않다.더욱이 통계수치에 잡히지 않은 부정한 수단의 회색수입이 많다.이같은 점이 개혁·개방에 따른 운남의 활기를 보여주는 긍정적 측면이라면 이곳의 마약붐을 부추긴 원인이 된 것은 부정적 측면이다.중독자들이 한달에 마약을 위해 쓰는 돈은 1천∼6천위안 가량.공무원들의 한달 봉급이 5백위안 정도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돈이다.마약을 위해 몸을 파는 여염집 처녀들의 이야기가 드문 일이 아닌 것도 운남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 지난 한햇동안 운남성 공안당국이 적발한 마약밀매 사건은 모두 4천7백60여건.2천7백80㎏의 헤로인과 8백71㎏의 아편을 압수하고 구속자만도 6천3백12명이 넘는다.적발된 양은 2백80만명이 1회씩 사용할수 있는 분량.운남성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미얀마,태국,베트남 북부 등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에선 한해 2만5천여t의 헤로인이 생산된다. 운남성 공안청 부청장겸 마약단속위원회 강보생비서장은 주로 버마,라오스 등에서 만들어진 헤로인이 국경을 통해 들어와 광동과 상해로 운송된 뒤 미국과 일본,한국,유럽 등지로 판매된다고 말하면서 이곳이 마약운송의 주요 관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마약판매상들이 더욱 조직화되고 일부 조직은 전투용 무기까지 보유하고 있어 『마약단속은 이제 생명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 되고 있다』고 설명한다.세계경찰 가운데서 가장 자국국민들의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중국 공안도 지난해 8명이 단속현장에서 마약밀매조직원들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했다.단속과정에서 중기관총류 20여대와 2백50여정의 총기류,수백개의 폭탄이 압수되기도 했다. 이때문에 지난해 서쌍판납 지역에선 군대까지 동원된 군사작전이 벌어지고 주도 경홍부근의 커피공장을 가장한 아이스(마약의 일종)제조공장이 발견되기도 했다.지금도 마약상 토벌에는 인민해방군이 직접 동원된다.이곳의 마약상들은 미얀마와 태국북부의 마약조직과 연결된 「다국적군」들로서 토벌작전은 총격전이 아니라 중화기가 사용되는 전투라고 한 공안관계자는 귀띔한다. 마약과 함께 무기밀매상들이 활기를 치는 운남은 마약의 운송로 뿐아니라 군사용 중화기를 포함한 총기류가 1년에 5만정 이상씩 들어오는 무기밀매의 루트이기도 하다. 마약이 가져오는 또 하나의 문제는 에이즈의 확산.마약복용자들 대부분이 「복용의 효과」를 위해 연초 형태보다는 주사 방식을 선호하고 있고 주사기를 돌려쓰고 있기 때문에 에이즈 감염의 주요원인이 되고 있다.윤락여성들의 마약중독과 이들 사이의 빠른 에이즈 확산도 이곳의 고민거리다.곤명시 공안국 단문용부국장은 운남성의 에이즈환자는 1천1백여명이라고 밝혔다.물론 이는 공식적인 통계며 감염자는 최소 2∼3배 이상 될 것으로 추산된다. 운남성 정부는 마약중독자가 증가하자 2천명으로 구성된 마약특별단속반을 운영하고 있고 중독자들을 위한 626제독제라는 치료제를 개발,수많은 임상실험을 거쳐 지난 2월부터 양산하기도 했다.이곳이 동남아의 골든트라이앵글이라는 점에서 UN과 세계보건기구 등도 운남의 마약전쟁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경제적 지원까지 제공하고 있다. 운남성 공안청 마약단속위원회의 유곤처장은 『마약이 이미 자신의 안방까지 밀고 들어오지는 않았는지 자신의 자녀들은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는교육도 이곳 마약위원회의 활동』이라고 소개했다.그는 마약이야말로 우리시대의 특급전염병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강보생 비서장은 세계기구들과 협조 아래 운남성은 지난 4년간 5천만위엔(약 50억원 가량)을 마약과의 전쟁에 쏟아넣었다고 소개했다.그는 『마약은 어느 한 나라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서로 유기적 관련을 갖는 세계화된 문제가 됐다』며 『관련국들과의 협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한국측 초대작가 9인의 면모/무등벌서 세계적 미술축제

    ◎「광주 비엔날레」준비 한창/30∼60대 고른 분포… 활동영역 다양/한국미술 현주소 국내외 소개 큰 기대/경주서 워크숍 갖고 주제토론도 광복 50주년과 「95 미술의 해」에 개최되는 한국미술 최대의 행사이자 국내 최초의 국제 비엔날레인 광주비엔날레(9월20일∼11월20일 광주중외공원 문화벨트)가 한국측 초대작가 선정으로 그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 및 오세아니아 담당 커미셔너인 유홍준(미술평론가·영남대교수)씨가 공개토론회(4월1일·서울 가람미술관)를 거쳐 선정하고 제9차 집행위원회의 인준을 거쳐 지난달 21일 최종 확정한 한국작가는 안성금 김명혜 김익령 김정헌 임옥상 서정태 신경호 홍성담 우제길씨 등 9명.설치 도예 한국화 서양화 각 분야에서 확고한 개성으로 당당하게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작가들이다.연령층 또한 30대 중반에서 60대까지 골고루 분포돼 있고 활동영역이 다양해 한국 미술문화의 현주소를 국내외에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권에서 유일한비엔날레로 창설된 광주비엔날레.그 역사의 맨 첫장을 장식하게 될 이들은 4∼5일 경주 불국사관광호텔에서 워크숍을 갖고 어떤 방법으로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인 「경계를 넘어」에 부합되는 작품을 제작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모색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홍익대 동양화과 출신으로 지난 86년 도불,일본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안성금씨(37)는 다양한 소재의 벽을 위주로 설치작품을 선보일 계획.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 설치도 계획하고 있다. 서울대 조소과와 뉴욕 프랫인스티튜트를 졸업한 김명혜씨(35)는 조각적 영역에 기술공학을 접목시킨 참신한 아이디어의 설치작품으로 관심을 모으는 신예 작가.그는 냉전이 와해되면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경계를 다시 찾아놓고 나서 그것을 넘겠다는 생각으로 입체작업을 구상중이다. 서울대 선후배 사이인 김정헌(49)임옥상(46)신경호(46)씨는 한국현대정치의 어두운 면을 정면으로 다뤄 제도권 미술에 충격을 던진 대표적인 민중미술 작가들.김씨는 「경계」를 넘어설 수 있으려면 좀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스러움에 초점을 맞춘 평면과 설치를 계획하고 있다.『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경계를 가진 나라』라는 임씨는 경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토대로 한 설치 및 평면을 선보일 계획이다. 상징주의 수법을 현실감 있게 끌어안는 작업을 보여온 신씨의 경우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5·18 광주항쟁을 다룰 예정이다. 빛과 어둠의 대비로 드라마틱한 조형세계를 연출해온 우제길씨(53)는 「마음의 경계」를 넘는 방식으로 빛에 초점을 맞춘 설치와 입체작업을 택했다.또 광주라는 지역적·정치적 특성을 견지하면서 민중의 삶과 애환을 작품에 형상화해 온 홍성담씨(40)는 평면작업을 기본으로 비디오 설치를 추가,경계가 무너지지 않고 있는 90년대의 현실을 짚어볼 계획이다. 서정태씨(43)는 한국적 정서와 미감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신선하게 구성해 나가고 있는 작가.그는 사람들의 사이를 경계짓는 내면적 갈등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작업방식으로 표현해 보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호주전시관계로 이번 워크숍에 불참한 김익녕씨(60)의 경우 관객과 작품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방법으로 포용력 있는 현대도예 설치를 구상중이라고 알려왔다. 이처럼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이나 해석은 각기 달랐지만 참가 작가들의 공통된 의지는 『광주비엔날레의 창립전 출품작가로서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작품을 선보이겠다』는 것이었다.
  • 대도시 지하시설물 실태·관리 문제점 점검

    ◎땅속 정보 “깜깜”… 주먹구구 매설공사/10여년전 도로대장에 의존 굴착공사/서울하수관 9m간격 구멍… 관리 엉망/가스배관 매설업체 150여곳이 무등록/서울/관련사 안전요원 47명중 20명 무자격/부산/하루 수십곳식 “화약고” 파헤쳐… 주민 불알 캄캄한 땅 속에는 수많은 관들이 거미줄처럼 묻혀있다.그러나 한눈에 알 수 있는 도면이 없다.그래서 땅을 잘못 파다가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이를 실증한 대구 가스폭발 사고를 계기로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의 지하 시설물 실태와 관리의 문제점을 점검해 본다. 지하에는 도시가스관,상·하수관,전기·전화선,지역난방관 등 수많은 관이 묻혀 있다.가장 위험한 것은 도시가스관이다.전국에 깔린 도시가스 배관망만 9천4백58㎞로 서울∼부산 간을 22번 왕복하고 남는다.3백63만가구가 도시가스를 쓴다. 그러나 도시가스 회사의 안전관리 수준은 극히 낮다.시공에서부터 보수유지,안전관리에 이르기까지 허점 투성이다. ○하루 15곳 파헤쳐 하수관과 빗물관도 엉망이다.전국의 하수관은 4만8천6백25㎞.설치한 지 10년이 지난 것이 3분의 1이 넘는다.1만㎞에 이르는 서울의 하수관은 9m 꼴로 구멍이 뚫렸거나 가스관 등 다른 배관이 뚫고 지나간다.다른 관들을 묻으면서 공사비를 아끼려고 마구 관통해 버린 결과다. 서울에서 91년 이전에 묻힌 가스관은 쉬 녹슬기 쉬운 재질로 돼 있다.따라서 하수에 오래 노출되면 금방 망가진다.91년 이후에는 물이나 부식에 강한 폴리에스터관으로 바꿨다.하지만 공장이 많은 지역에서는 금속을 녹이는 화공약품을 하수도에 몰래 버리는 일이 잦아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런 땅 속을 아무렇게나 파다 보니 사고가 일어난다.지난 해 서울의 도로굴착은 모두 8만여건.겨울철인 12∼2월과 장마철인 7∼8월에 굴착이 금지되는 것을 감안하면 25개 구청별로 하루 평균 15곳을 파헤치는 셈이다. 최근에는 케이블TV 매설 등으로 대도시에서 하루에도 수십곳씩 동시 다발적으로 땅을 파고 있다. 문제는 굴착 절차에서부터 생긴다.시공업자가 구청에 굴착 및 복구 신청서를 내면 구청은 현장 조사를 하고 신청자에게 지하 매설물이 있는 해당 기관과 협의토록 지시한 뒤 승인한다.그러나 구청의 조사는 하나마나다. ○부실시공 허다 전에 언제 굴착이 있었고,중복 굴착을 통제하는 기간을 넘기지 않는지를 확인하는 게 고작이다.시공자와 해당 기관과의 협의도 형식적이다. 가스관의 경우 시공자는 가스 배관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문제를 가스회사와 협의하고,이설이 어려우면 노출된 배관의 입·출구에 긴급 차단장치를 설치하고 방호 설계도 철저히 해야 한다.현장에서는 가스관 파손을 막기 위해 불도저 등 중장비의 운전 조작을 신중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수칙을 지키는 시공자는 거의 없다.결국 굴착은 신청업체 마음대로 이뤄진다. 반면 땅 밑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볼 수 있는 종합적인 지하지도와 지하정보시스템(GIS)은 없다.각종 지하 배관을 어떻게 어디에 묻을 것인지에 대한 기본 계획도 없다.적당히 편의에 따라 마구 파고 뚫어 전력선이나 통신선을 묻고,또 다시 도시가스관을 묻는다.이러니 가스관이 하수관을 관통할 수밖에 없다. 서울시 도로시설과 관계자는 『주먹구구로 공사를 하다 보니 지하 미로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지하지도 없어 가스회사·한전·한국통신 등이 자체 관망도를 갖추고 있기는 하다.그러나 정작 매설물 공사 때는 협조가 이뤄지지 않는다.소관 시설물의 위치 정도만 다른 기관의 공사 도면에 대충 표시해 준다.위치가 틀린 경우도 많다. 서울시내 25개 구청 중 종로·중구 등 9개 구청에 매설물을 확인한 도로대장이 있다.그나마 지난 84∼89년에 작성된 개괄적인 지하 족보에 지나지 않는다.89년 이후 새로 묻힌 각종 매설물에 대한 현황은 아예 없다.서울시가 지하정보시스템 계획을 세우면서 구청별 도로대장 작성을 89년 중단했기 때문이다.나머지 16개 구청은 땅 속에 관한 한 장님이나 다름 없다. 지난 달 30일 서울 영등포구 주택가 골목에서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다 40㎜짜리 가스관을 부수는 사고가 났다.현장 소장은 공사 직전 영등포구청에서 하수도 도면과 지하매설 도면을 받았으나 워낙 부정확해 가스관을 발견치 못했다고 한다.이런 사례는 셀 수도 없다. 부실 시공도 허다하다.한국가스안전공사의 통계를 보면 지난 77년부터 지난 해까지 7백42건의 가스 사고 중 35%인 2백60건이 부실시공의 틀에 넣을 수 있는 「시설 미비 및 불량제품」 때문에 발생했다. 가스회사와 수용가를 연결하는 배관은 1.2∼1.5m의 깊이로 도로 지하에 묻혀 있다.차량 진동과 각종 공사로 파손 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다. 가스배관 매설공사의 시공업체도 영세하기 짝이 없다.서울의 경우 3백50여 군소업체들이 난립해 있다.이 가운데 1백50여곳이 무등록 업체다. 가스관 연결 부위를 용접하지 않고 볼트로 죄는 경우도 많다.시간이 흐르면 차량 진동 때문에 헐거워져 서울 아현동에서와 같은 누출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충격을 덜기 위해 배관 위에 30㎝ 두께로 깔게 돼 있는 모래와 위험물 표지도 하지 않고 흙을 덮는 경우도 다반사다. ○안전점검 형식적 인력과 장비가 턱없이 모자라니,안전점검 역시 형식적으로 진행된다.도시가스회사는 6개월∼1년에 한차례,가스안전공사가 연 1회씩 정기적으로 점검하고,해빙기와 장마철엔 특별 점검을 한다. 부산의 경우도시가스 회사 자체의 안점점검 요원이 47명이지만 이 중 자격이 있는 안전관리자는 27명에 불과하다.제조소 2곳과 가스압력조절용 정압시설 1백62곳,5백31㎞에 이르는 배관을 관리하기에는 역부족이다.감독기관인 가스안전공사의 인력도 3명 뿐이어서 사실상 예방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가스가 새더라도 즉각 감지할 안전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정압소 말고는 자동감지기가 한 곳도 없고 배관에서 가스가 새면 주민 신고가 있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신고를 받고 출동하더라도 장비가 휴대용 탐지기 3∼4대 뿐이어서 누출 여부와 정확한 누출 지점을 가려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대구 사고에서 증명됐다. 신고→도시가스 상황실에서 외근 직원에게 연락→외근 직원 현장 도착→누출 지점 확인→수동식 밸브 잠금의 절차를 거치며 적어도 30분이 걸린다.이 시간이면 초속 20m 이상의 빠른 속도로 새 나오는 가스가 이미 수십만t이다.정전기로도 폭발하는 화약고가 되는 셈이다. ◎전문가가 본 사고예방 대책/각 공사 공정별 확인·감리 시급하다/「지형 공간 정보체계」 전담부서 설치를/유복모 지형공간 정보학회장 최근 빈발하고 있는 각종 사고의 원인은 지형공간정보체계(GSIS)에 관한 전담부서의 부재와 책임측량사(QS)제도가 도입되지 않은데 큰 원인이 있다. 도면이나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특성자료와 위치자료를 연계시키는 지형공간정보는 국가차원의 계획이나 분석 뿐만 아니라 지자체에서 다루는 각종 시설물,도면,대장 등에 관한 확인,분석,보수 및 유지관리 등에 이용되고 있다.각종 시설물 공사에 있어서 사전조사,착공,시공,준공 뿐만 아니라 준공후 경년변화 및 안전에 관하여 각 공정별 확인 및 감리 등을 책임측량사의 서명으로 공사를 마무리하는 QS제도가 오래전부터 영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에서 정착되어 운영되고 있다.우리나라는 상하수도 사업본부,한국통신,한국전력,도시가스 공급회사의 업무 특성상 각각의 관련 시설물은 관련기관에서 각각 관리하고 있어 자기소관이 아닌 각 시설물에 대한 위치,제원 및 유지보수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사항들을 통합 관리할 수 있는지형공간정보체계의 전담부서가 없으며 시설물공사시나 사고시 정확한 측량값을 도외시하거나 전문성이 별로 없는 기술자에 의해 처리되므로 마치 정확한 진단을 거치지 않은 수술과도 같이 역할분담이 결여된 기술운영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지하시설물의 사고원인으로는 첫째,지하매설물측량에 의한 정확한 지하시설물지도가 없다는 점이다.도시가스 시설물의 관리를 위해서는 적어도 5백분의1 이상의 대축척 도면이 필요한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관련자들의 무지로 인해 1천2백분의1 도면을 확대하여 5백분의1인 것처럼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지도도식규정에 위배되는 것이다. 둘째,지하시설물에 대한 정보가 빈약하다는 것이다.지하시설물의 매설 초기에는 매설된 위치나 각종 관련 정보들을 도면이나 대장 상에 기입하지 않더라도 담당자가 그 내용을 알기 때문에 각종 사고 발생시 즉시 대처할 수 있다.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지하시설물 또한 도시의 팽창에 따라 급격히 증가하고 변화하게 되며,관련자 또한 교체되어 변경된 사항에 관한 내용이 체계적으로 전달되지 않게 됨에 따라 각종 시설물 정보의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셋째,시설물을 종합적으로 완결성 있게 관리할 수 있는 전문공무원에 의한 전담부서가 없다. 현재 각 기관들에 의해 시설물 정보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그러나 그 시행 계획상의 단견으로 인해 지리정보체계(GIS),토지정보체계(UIS),도시정보체계(UIS),도면자동화 및 시설물관리(AM/FM)등의 용어를 내세우며 거시적인 통합보다는 각 기관 내에서 소요되는 관리체계의 구축에만 급급하고 있다.따라서 각기 수평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정보구축의 노력을 연계시킬 필요성이 요구되어 최근 통합된 정보체계인 지형공간정보체계가 대두됨에 따라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제공되고 있다.
  • 총무처의 행정제도 개선 주요내용

    ◎공장설립서류 264종서 107종으로 감축/석유수출입 등록제로… 주유소 개방추진/동구권 일부국가 무사증입국 허가방침/자동차 사고로 멸실땐 폐차서류 없어도 등록말소 허용/준농림지 공장 용지 50%까지 증설허용/학원설립 등록제로 일원화… 수요기준 폐지/외국기업 국내주식 발행 완전자유화 방침 2일 국무회의에서 확정된 올해 행정제도개선 종합계획은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규제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정부가 올해 개선을 추진할 과제는 파급효과가 크고 다수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40건의 중점과제와 2백7개의 개별과제를 합쳐 모두 2백47건.상반기에 78건,하반기에 1백56건을 완료하고 나머지 13건은 96년이후 단계적으로 개선할 계획이다.올 1·4분기 동안 이미 13건이 개선됐다.개선작업을 통해 폐지 또는 정비되는 행정규제 및 민원사무는 올 한해만 모두 8백12건에 이른다.중점과제와 개선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쟁 제한적 법령·제도의 개선(공정거래위원회)=보험업법·자동차운수사업법 등 50여개 법령을 대상으로 경쟁제한조항을 삭제 또는 수정.대한행정서사회 등 60개 단체 소속사업자의 사업활동에 부담을 주는 관련규정 및 정관을 정비. ◇유가 및 석유산업 자유화(통상산업부)=원칙적으로 석유제품의 국내가격을 완전 자유화.다만 서민용 연료인 LPG는 경쟁연료인 LNG가 고시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점을 감안,유가자유화 뒤 1∼2년 뒤에 시행하는 것을 검토.석유수출입에 대한 허가제를 등록제로 변경.석유정제업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꿈.현재 외국인투자를 50%까지 허용하고 있는 석유정제업과 주유소등 석유유통업의 동시개방을 추진. ○음반수입 추천제로 ◇영화·출판 및 음반·비디오산업의 규제 완화(문화체육부)=외국영화의 원판수입 복사프린트 제작허가제를 폐지.국산영화 수출때 추천제를 없앰.극영화 상영때 뉴스영화 상영 의무제를 폐지.영화업 등록요건을 16㎜이상 극영화 제작자에서 35㎜이상으로 완화.현재 1편으로 제한하고 있는 미등록 영화사의 연간 제작 편수를 2편으로 확대.합작영화 제작때 출자비율과 국내촬영 의무비율을 각각 30%이상에서 10%이상으로완화.음반·비디오물 휴업 또는 폐업 미신고때 부과하던 과태료를 폐지.음반·비디오물 수출때 추천제와 복제때 허가제,비디오물 제작때 신고의무를 폐지.음반·비디오물 수입허가제를 추천제로 완화.음반·비디오물 반입허가 범위를 5장 이내에서 10장 이내로 확대.음반·비디오물 제작업등록 처리기간을 30일에서 20일로 단축.등록증 재교부 수수료를 폐지.외국간행물 수입업등록 처리기간을 7일에서 5일로 줄이고 수입업 변경등록 처리기간을 5일에서 3일로 단축.외국간행물 수입추천 처리기간을 10일에서 7일로 단축.외국간행물 수입실적 매분기 보고를 매반기(반기) 보고로 완화. ◇낙농업관련 제도 개선(농림수산부)=▲우유등록제 ▲젖소등록상황 보고제 ▲젖소의 특수공제 가입을 위해 필요한 사항의 명령제도 ▲등록한 젖소의 태사·분만 신고제 및 소유자 이동신고제 ▲생유 거래에 관한 분쟁조정 신청조항 ▲낙농지대 안에서의 토지형질변경 등 허가제 ▲낙농규모 제한 ▲사업실시 의무제 ▲토지이용 허가제 ▲임차국유지 전대 ▲권리양도 허가제 ▲담보 허가제 ▲허가없이 사업을 한 사람등에 대한 벌칙조항 ▲낙농진흥기금 관리에 필요한 명령조항 ▲특수가축공제 가입상황 보고제 ▲낙농지대의 지정·고시를 위한 낙농심의회의 심의절차를 폐지.생유의 규격·가격을 생산자·관련단체·유업체가 자율적으로 협의해 결정하도록 위탁. ○휴대폰 사업자 지정 ◇통신사업진입규제 완화(정보통신부)=데이콤의 사업에 시외전화서비스를 추가 지정.주파수공용통신사업(TRS)의 아날로그 전국사업자 지정은 한국항만전화의 사업구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으로 대신.디지털 전국사업자를 허가.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춘 개인휴대통신사업(PCS)자 1명을 허가.무궁화위성을 이용한 국내 위성방송사업은 올 상반기 기본방침을 확정해 허가. ◇해운경영 자율화(해운항만청)=외항화물해운업의 사업제도를 면허제에서 등록제로 전환.선박의 매매·임대차·용대선을 인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부정기 원양면허사업자의 부정기 근해사업을 허용.정기 원양면허사업자의 정기 근해사업을 허용.자신이 소유한 선박뿐아니라 점유하고 있는 선박도 빌려줄 수 있도록 선박대여업의 업무범위를 확대.용대선 신고와 운임 신고등 업무를 선주협회등 사업자단체에 위탁. ◇학원의 설립·운영 규제 완화(교육부)=학원 설립때 등록과 인가의 이원 구조를 등록제로 일원화.학원설립 수요기준을 폐지. ◇대학원교육제도 개선(교육부)=석사과정에 입학하면 박사과정까지 이수할 수 있도록 석·박사과정을 통합. ◇외국인투자환경 개선(재정경제원)=1단계로 외국인의 국내 주식(주식연계증권 포함) 발행을 자유화하고 국제기구의 원화표시 채권발행을 자유화.2단계로 외국기업의 원화표시 채권발행을 자유화. ◇해외직접투자제도 개선(재정경제원)=해외직접투자제도의 자유화 폭을 확대하고 절차를 간소화. ◇사증발급절차 개선(법무부)=▲문화예술(D­1)가운데 한국국제교류재단 등의 초청을 받은 사람▲무역경영(D­9)의 자격 가운데 조선및 산업설비 제작감독을 위해 파견돼 근무하려고 하는 사람▲연구(E­3)의 자격 가운데 기업부설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려고 하는 사람▲동반(F­3)의 자격 가운데 등록외국인과 동거 목적으로 입국하는 배우자에 대한 체류기간 1년이하의 단수 사증 발급권한을 재외공관장에게 위임.사증발급인정서 발급대상에 문화예술(D­1) 취재(D­5) 종교(D­6) 상사주재(D­7) 무역경영(D­9)의 자격에 해당하는 사람을 포함. ◇무사증 입국허가제도 확대(법무부)=무사증 입국이 제외된 35개 국가 가운데 체류관리상 문제점이 적은 동구권 일부 국가에 대해 무사증 입국을 허가.무사증 입국허가기간을 30일 범위 안에서 탄력적으로 운용. ○1회 체류기간 늘려 ◇외국인 체류허가제도 개선(법무부)=1회에 부여할 수 있는 최장 체류기간을 6개월∼3년에서 1∼5년으로 확대. ◇외국인 재입국 허가제도 개선(법무부)=긴급하거나 부득이한 사유로 출국한 외국인에 대해서는 공항·항만 소재 출입국관리소에서 재입국을 허가.외국에서 여권을 분실한 외국인이 입국할 때 입국심사관이 재입국허가사실을 확인해 입국 조치. ◇공장입지 규제 완화(건설교통부)=공업단지 지정·개발 등의 행정처리기간을 3백50일에서 1백40일로 단축.공업단지 지정·개발 및 공장설립때 구비서류를 2백64종에서 1백7종으로 감축.시·도지사의 지방공단 지정 권한을 30만㎡미만에서 1백만㎡미만으로 확대.공업배치 및 공업생산시설이 부족한 전남·전북·강원·충남에 있는 공단 가운데 일부를 지방중소기업 특별지원지역으로 지정해 법인세·소득세·지방세를 감면하고 지방중소기업 육성자금을 우선 지원.아산공단의 미분양 해소를 위해 대기업 입주제한을 해제.준도시지역 가운데 시설용지지구의 공장설립 규모제한을 폐지.준농림지역에서 기존 공장용지의 50%까지 공장 증설을 허용. ◇택지소유 상한제도 완화(건설교통부)=택지소유상한법령상의 허용기준면적을 상향 조정. ◇택지개발방법 완화(건설교통부)=시·도지사에게 위임된 택지개발 예정지구에 대한 경미한 변경지정 및 택지개발계획 승인 범위를 60만㎡미만에서 3백33만㎡미만으로 확대.택지개발지구 안에 토지를 소유한 주택업체가 택지를 마음대로 매각할 수 있는 소유기간을 1년 이상에서 3개월 이상으로 완화.큰 평형 주택에서 작은 평형 주택으로 사업계획 변경을허용.기존 용적률 범위를 넘지 않을 때는 개발계획의 승인없이 가능. ○신용융자 제한폐지 ◇금융 규제완화(재정경제원)=증권분야 주간 간사회사 지정 취소제와 해외증권 발행때 우선주 발행의무를 폐지.신용융자 가격제한을 폐지.외국인 투자기업 주식에 대한 외국인 취득한도예외 승인제를 신고제로 전환.증권사 상호 변경인가제를 폐지.투자신탁회사의 출장소 지점승격 인가제를 신고제로 전환.증권회사의 자본금 증액명령과 증권거래소의 유가증권 상장승인을 폐지.보험회사의 유상증자에 대한 인가제를 폐지.초과사업비에 따라 보험회사의 점포설치 제한을 폐지.보험회사 점포설치 한도 및 모집인 도입한도를 없앰.보험회사의 다른 사업 경영제한 완화.지방 생명보험회사의 주주자격 및 지분한도제한 완화. ◇수출입통관제도 개선(재정경제원)=세관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개선. ◇식물 방역및 검역제도 개선(농림수산부)=방제비용의 민간부담을 폐지.방제용 기구의 ▲대여신청·심사제 ▲수령증 제출 ▲대여기간 연장신청제 4멸실보고제 ▲보상조항 ▲반납의무조항 ▲반납명령제 ▲반납위약금 납부제를 등을 폐지. ◇수출승인제도의 단계적 완화(통상산업부)=수출승인 면제범위를 수출자동승인 품목으로서 대금결제방법상 별도의 규제가 없는 경우의 일람불신용장방식의 2만달러이하의 수출에서 일람불신용장방식 전부 및 기타 방식의 3만달러이하의 수출로 확대.수출승인 사후관리 면제범위를 수출대금의 미결제 금액 5천달러미만에서 3만달러미만으로 확대. ◇무서류 수출통관 신고대상 확대(관세청)=EDI(서류없는 수출통관제도) 대상을 넓혀 수출대상 금액이 5만달러이하인 경우만 신고대상으로 하던 것을 수출자동승인 품목에 대해서는 금액제한을 철폐. ◇중계무역 활성화를 위한 제도 개선(관세청)=절차를 간소화. ◇수입물품검사 생략범위 확대(관세청)=수출입 업체별 통관고유번호를 부여해 업체별 성실도에 따라 검사를 차등화.수입신고물품의 품명과 규격을 표준화해 위법 가능성이 높은 최소한의 물품만을 검사. ◇복합운송주선업체계의 일원화(건설교통부)=해상화물운송주선업을 복합운송주선업으로 일원화.자본금 요건을 완화.요금신고제를 폐지. ◇비관리청 항만공사시행제도 개선(해운항만청)=대규모 프로젝트사업을 제외한 비관리청 항만공사의 시행허가권한을 지방청에 위임.실시계획승인 신청기한을 6개월이내에서 1년이내로 연장. ◇건설 제 기준의 민간이양(건설교통부)=학회·협회등의 단체에게 건설기준 제·개정권 및 판권을 이양. ◇건설업 면허체계 개선(건설교통부)=건설공제조합 출자 및 협회가입 의무를 완화.매년 1회 실시하는 면허주기를 폐지. ◇자동차및 건설기계관리제도 규제 완화(건설교통부)=교통사고·화재 등으로 자동차가 사실상 멸실되었을 경우에는 폐차증명서류가 없더라도 말소등록을 허용.자동차를 매수한 사람이 이전등록을 하지 않을 경우 차를 판 사람도 말소등록을 신청·말소할 수 있도록 개선.자동차등록번호판을 도난당한 사람도 새로운 번호를 신청·변경할 수 있도록 허용.도로주행빈도가 적은 불도저 등 17종의 건설기계의 형식승인제를 신고제로 완화.건설기계 형식 확인검사를 민간기관에서도 할 수 있도록 개선.오토바이 형식신고 구비서류 가운데 설계도를 생략.오토바이 형식신고 수리기간을 25일에서 7일로 단축. ◇일정 규모이상 규사채취시 환영영향평가 적용(환경부)=해안의 규사 체취를 위한 공유수면 점용허가신청 면적이 동해안은 2만㎡,서·남해안은 3만㎡이상인 경우에는 환경영향평가 대상사업으로 지정.해안모래를 골재로 채취할 경우 단일허가 신청사업으로서 골재채취 면적 25만㎡이상,용량 1백만㎡이상일 때는 환경영향평가 대상사업으로 지정. ◇배출시설 조업정지처분 곤란 사업장에 대한 과징금제도 도입(환경부)=조업정지에 상응하는 과징금 부과제도를 도입해 업주에게 조업정지 또는 과징금 선택권을 부여. ◇운행차 배출가스 검사대행자 징수제 폐지(환경부)=운행차 배출가스검사대행자 정수제를 폐지. ◇KS표시허가제도 개선(공업진흥청)=표시허가자의 허가(승인)증 게시의무규정을 임의규정으로 완화.허위문서를 작성한 사업자에 대한 과태료 부과범위를 축소. ◇전기용품안전관리제도 개선(공업진흥청)=1종 전기용품의 제조구분별시설기준 가운데 「도금 또는 도장두께측정기」를 삭제.전기용품 기술기준을 IEC(국제전기전자기술위원회) 규격에 부합하도록 개선.지나치게 세분화된 1종 전기용품의 형식승인을 위한 형식구분기준을 통합. ◇특허·실용신안제도 정비(특허청)=특허법 조약안에 대한 우리측 입장을 올 상반기 개최 예정인 제2차 외교회의에 최대한 반영. ◇소방행정 개선(내무부)=▲소방설비공사업 면허갱신제도 ▲위험물 제조소등의 용도폐지 및 지위승계 신고 ▲소량 위험물 저장·취급 신고▲알킬알루미늄·알킬리듐 운반 신고 ▲위험물 임시저장 취급승인 ▲소방시설 점검업 휴·폐업 신고 ▲소방기기제조업 상속및 휴·폐업 변동 신고▲소방설비공사업 상속및 휴·폐업 신고 ▲예방규정제정 인가및 공동방화관리규정 신고 ▲청원소방원 배치신청을 폐지.건축허가 동의 대상범위를 연면적 4백㎡이상에서 6백㎡이상으로 축소.소방설비공사 시공자의 신고사항 가운데 비상벨·자동화재 탐지설비·피난설비 등 경미한 소방시설을 제외.연면적 33㎡이상 소방 대상물에 대해 매년 1회이상 실시하던 소방서의 화재예방검사를 민간전문업체에 점검용역을 주었을 때는 면제.소방호스결합금속구등 16개 품목을 소방용 기계·기구 검정대상에서 제외.방화관리자 선임 대상을 6백㎡이상에서 1천㎡이상으로 축소하고 1·2급 방화관리대상을 통합. ◇기상사업 민간참여 추진(기상청)=특수 기상정보서비스를 민간 기상사업자가 공급할 수 있도록 허용.
  • 조각가 오광섭씨 밀랍주조전/무장 로봇 등 문명비판작품 20점 내놔

    이탈리아 카라라 미술학교에서 조소와 판화를 전공한 조각가 오광섭씨(31)가 12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신사동 예화랑(542­5543)에서 초대전을 연다. 특히 이번 전시는 그가 지난 80년대부터 탐색해 온 밀랍주조에 의한 정교한 브론즈 기법의 작품만을 모은 이른바 「밀랍 주조전」으로 과거 소담한 은유의 세계와는 달리 보다 격렬한 표정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를테면 인간의 무모한 지적능력 앞에 맥없이 사라져가는 자연의 훼손된 모습이라든가 상대적으로 비인간화 된 인간의 삶과 비극적 양태들,또는 불확실한 지구촌의 미래,자멸의 길을 걷고있는 인류문명에 대한 공포와 분노,비판의 메시지를 보다 강도있게 다룬 작품을 내보이는 것. 오씨의 근작들은 따라서 종래의 작품보다 은유의 방법이나 처리방식에서 한층 복합성을 띠고있는 것이 특징이다.무장 로봇,불구자,목에 칼이 채워진 삐에로 등의 형태적 관계를 통해 인류문명을 신랄하게 비판한 「문명제국」 등 20여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 민필호 선생/임정 국제승인위한 외교활동 헌신(이달의 독립운동가)

    ◎상해서 성장… 독립군 연락임무·피신 도와/대만주재 초대총영사로 한·중 우호 힘써 『대한민국의 유일한 생존의 길은 우리나라가 왜 이국의 병탄(병탄)을 당하게 됐는가하는 역사적 원인을 똑똑히 깨닫는 것이다』 이 어록은 독립운동가 석린 민필호 선생(1898년2월27일∼1963년4월14일)이 1945년 임시정부 주석 판공실장으로 재임할 당시 미국의 임정승인을 위해 단합할 것을 촉구하면서 가진 연설가운데 일부다. 선생은 독립운동가인 형 제호선생의 영향으로 1911년 소년기때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교육을 받으면서 독립운동가로 성장했다.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박달학원에 입학,박은식·신채호·조소앙 선생 등으로부터 영어·역사등을 배우면서 독립의식을 마음속에 싹틔웠다. 나중에 임정 국무총리 신규식선생의 사위가 된 선생의 가계에서는 신규식선생·형 제호선생과 선생 자신을 포함해 아들·딸·조카·사위등 모두 9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선생의 사위는 전고려대총장인 김준엽 박사다. 후에 임정의 국제승인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1921년 신규식선생의 광동중국호법정부 방문길에 수행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임정국무총리겸 외무총장인 신규식선생은 임정의 승인과 경제원조 협상문제 임무를 띠고 임정특사로서 파견된 것이다.광동호법정부는 중국총통 중산 손문선생이 이끌고 있었다. 신규식선생은 손총통과 직접 만나 임정의 호법정부 승인을 통보하고 호법정부가 임정을 승인할 것과 군사학교에 한인입학을 허용해줄 것,적당한 지역을 빌려줄 것,차관을 제공해줄 것등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손총통은 호법정부는 임정을 승인한다고 즉석에서 답변,중국이 임정을 승인한 첫 국가가 됐다. 이어 신규식선생과 함께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신규식선생이 1922년 과로로 순국하자 이동령·노백린·김구·이시영선생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마침 선생의 집은 상해 프랑스조계에 위치해 독립운동가들은 이 곳을 회동장소로 활용하곤 했다. 선생은 1932년 이봉창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을 벌인데 따라 일제헌병의 수색이 잦아지자 이 집을 동지들의 피신활동을 돕는 아지트로 사용했다. 선생은 일단 김구선생을 절강성으로 피신시켰으며 이동령선생등은 항주로 대피시켰다. 선생은 일제 때문에 상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장개석정부 특무기관의 도움으로 이름을 「임동반」으로 바꾸고 남경교통부직원으로 신분을 위장,독립군과 청년동지간의 연락임무를 수행했다.선생은 이동안 일본의 외교·군사암호 36종을 연구,해독한 공로로 중화민국 육해공군 광화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선생은 1940년 5월 김구선생과 함께 활동을 재개,임정의 판공실장·외무차장·의정원의원직을 맡아 임정의 국제적 승인등 외교와 경제활동에 헌신했다.선생은 우선 중국정부의 협조를 받아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에 있던 임정청사를 칠성강 연화지의 여관건물로 이전시키고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받도록 주선했다. 선생은 마침내 일제가 1945년8월 패망하자 임정요인의 귀국준비에 돌입,김구주석과 장개석총통과의 면담을 추진해 장총통으로부터 임정요인들의 환국을 위한 지원을 얻어냈다. 선생은 1945년 11월5일 김구주석등 임정요인들이 중국 국민당측이 제공한 비행기편으로 환국한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안전등을 위해 장개석 국민당정부와 계속 접촉했다. 선생은 1948년 모택동에 밀린 국민당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이동,1949년8월 대만주재 대한민국 초대총영사로 임명돼 2년동안 일했다. 선생은 1957년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한·중문화협회를 창설,한·중우호도모를 위해 각종 활동을 펼치다 1963년4월14일 숙환으로 서거했다. 선생은 자신의 외교경험을 모은 「한·중외교사화」등의 저서를 남겼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 경주 영묘사 출토 기와인물상(한국인의 얼굴:22)

    ◎도톰한 입술·광대뼈 “전형적 신라인”/눈·코·입 윤곽 뚜렷… 콧마루 긴 들창코/만면에 웃음… 온화한 여성적 이미지 우리나라 고대유물 중에는 인물상이 들어간 기와가 있다.흙인형 인물상처럼 흙으로 빚은 얼굴이다.다만 흙인형과 같이 인체 또는 머리부분 전체윤곽을 형상화한 조소와는 달리 양각의 릴리프형식을 빌려 얼굴을 표현했다.인물상 기와로는 삼국시대의 영묘사와 미륵사 절터 출토품,통일신라시대의 황룡사 절터 출토품 등이 전해 내려온다. 이들 유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얼굴은 경북 경주시 성건동 영묘사 절터에서 나온 인물상 기와다.흔히 「신라인의 얼굴」로 회자되어 요즈음의 각종 서적이나 유물도록 표지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상은 수막새 기와 마구리에 들어있다.얼굴 왼쪽의 볼 밑부분과 턱이 일부 떨어져 나갔으나 인물을 알아보기에는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는다.뒷부분에는 수키와 흔적을 남겨 절집의 지붕을 이는데 실제 사용된 기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얼굴은 활짝 밝다.눈 언저리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어 더욱 밝아보인다.맑게 갠 서라벌 하늘을 배경으로 휘청하니 굽은 절집 지붕에 썩 어울렸을 막새기와의 얼굴.다른 귀신얼굴의 기와(귀면와)와는 대조를 이룬 온화한 얼굴이거니와 여성적 이미지를 강하게 풍긴다.눈과 코,입의 윤곽이 뚜렷하다.눈꺼풀이 두꺼워 보이나 흉하지 않고,조금 벌어진 입술이 도톰하다. 콧마루를 위로 서서히 올려 눈썹과 연결시켜 놓아 코가 유난히 길다.자연스럽게 내놓은 콧구멍은 그 기다란 코를 부드럽게 잡아주어 얼굴인상 전체가 순한 모습으로 다가온다.광대뼈가 살짝 도드라진 이 얼굴은 오늘도 길에 나가면 만날 수 있는 인물이다.대가람추녀 끝에 매달려 잡귀를 물리쳤다(벽사)는 막새기와속의 얼굴이 그토록 잔잔할까.그 해답은 인물상 기와가 나온 영묘사의 역사적 분위기를 통해 얻어내야 할 것이다. 영묘사는 당대의 신라 고승 양지의 작품이 가장 많았던 절이다.선덕여왕대에서 문무왕대에 걸친 7세기 중반쯤에 활동한 승려로 추정되는 양지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온다.이들 사서는 재예를 겸비한 그가 영묘사불사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기록했다.특히 영묘사에서 그가 장육삼존상을 만들 당시 장안의 선남선녀가 다투어 흙을 날랐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양지는 그 불사현장에서 노래(공덕가)를 지어 선남선녀들에게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왔도다/왔도다/공덕을 닦으러 왔도다」라는 내용의 노래다.예술적 감각은 물론이고 높은 수행력으로 덕이 가득했던 양지의 불사에 자진해 나온 많은 사람들은 공덕가를 합창했을 것이다.여기서 양지는 모든 불사의 공덕을 이들 민중에게 돌렸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영묘사 출토 막새기와의 인물상은 민중의 한 사람인지 모른다.또 민중 모두를 뭉뚱그려 표현한 전형적 신라인의 얼굴일 수도 있다.그래서 막새기와 속의 얼굴에는 민중의 힘을 빌려 재난을 막고자 한 뜻이 담겼을 것이다.
  • 북한 청진·나진·웅기 3개항/소에 30년간 양도했었다

    ◎「47년 김일성 지시문·협정서·비준서」 국사편찬위 입수 확인/“북정권 초기부터 소예속 입증”/전문가 북한이 지난 1947년 소련에게 함경북도 청진·나진·웅기등 3개 항구를 30년동안 양도(조차)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문서들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다.이 문서들은 북한 공산정권이 초기부터 소련에 예속됐음을 결정적으로 증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서들을 검토한 국편은 북한 역사에 대한 그동안의 해석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했다.해당문서는 ▲북한·소련 양국이 체결한 「3개항 양도·양수 협정서」 ▲김일성이 협정을 비준한 「비준서」등으로 모두 북한 당국이 공식 작성한 것들이다. 이 문서들에 따르면 양국은 청진·나진·웅기등 3개항을 주고받을(양도·양수)목적으로 1947년 3월25일 합작회사인 「조소해운주식회사」(일명 모르트란스)설립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동맹 외국무역성」과 「북조선인민위원회」간에 체결한 이 협정에서 양국은 『북조선에 있는 항구와 부두시설및 설비를 이용하기 위하여 조소해운주식회사를 창립한다』고 그 목적을 분명히 적었다.또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각종 부대시설을 포함해 청진등 3개항을 이 회사에 『30년간의 기한부로 대여한다』고 명시한 이 문서는 회사의 실무 책임자인 총지배인은 소련측에서,부지배인은 북한에서 각각 임명하는데도 합의했다. 이 협정은 그해 10월7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비준을 받음으로써 효력이 발생한 것으로 돼 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명의로 된 이 비준서는 『청진·나진급 웅기항 양수양도위원회(청진·나진급(및)웅기항 양수량도위원회)의 양수도에 관한 협정을 비준함』이라고 쓴 뒤에 김일성의 직인을 선명히 찍었다. 그동안 이에 관한 사료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그해 6월28일 「함북인민위원회」에 보낸 「북조선인위(북조선인위) 지시 제74호」공문이 있었으나 『협정서에 따라 소련에게 3개항을 양도하라』는 1백여자의 간단한 문구에 불과,양도의 성격·조건·과정과 실행여부등 구체적인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었다.그러나 이번에 협정서와 비준서가 발견됨으로써 관련사실이 명확히 입증됐다. 따라서 학계는 이번에 발견된 문서들이 북한정권의 성격을 규명하고 북한­소련 관계를 정확히 밝히는 데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았다.이 문서들은 1950년 10월 한국전쟁 당시 북진하던 미군이 평양에서 빼앗은 북한당국의 기밀서류 더미로 워싱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 「노획문서」로 분류돼 있다. 북한문제연구소 김창순이사장은 『북한이 3개항을 30년간 양도한 것은 북한이 실제로 소련의 식민정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강조했다.김이사장은 최근 진보주의 학자들 사이에서 북한의 「인민위원회」를 민족자주정부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자료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역사해석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했다.
  • 「조소해운주식회사」 관련문서 발굴 의미

    ◎북 3개항 조차/소의 트루먼독트린 대응조치/북 47년 6월이전 단정체제 확립 입증/“미소공위 결렬로 분단” 종전인식 뒤집어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체계를 정립함에 필요한 각종 사료의 조사·수집·보존·편찬및 발간 등을 통해 국사연구의 심화와 체계적인 발전에 기여해 왔다.「조소해운주식회사」관련자료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 국외사료조사위원 방선주박사가 최근 기밀해제시켜 보내준 비할 데 없이 가치가 높은 사료다. 이들 사료를 포함한 「북한필사문서」들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계속 간행중인 「북한관계사료집」에 넣어 연구자들이 이용하도록 배려할 것이다.본격적인 정리 분석에 앞서 「조소해운주식회사」관련 극비문서의 발굴을 통해 검증할 수 있게 된 몇가지 사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새사실 검증 단초로 「조소해운주식회사 창립에 관한 협정서」에 의하면 북한의 인민위원회는 소련의 무역부와 1947년3월25일 조소해운주식회사 창립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그 주된 내용은 청진·나진·웅기의 세 항구를 30년간 양도한다는 것이다.이미 북한의 인민위원회는 1948년9월9일 북한정권의 공식 수립 이전부터 「단독정부」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행정체계 확립 확인 「북조선위 지시 제74호」를 통해서는 1947년6월28일 이전에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지방 인민위원회간에 실질적인 행정체계와 계통이 확립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또 소련군정과의 관계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1946년 초까지도 북한사회를 좌지우지하던 소련군정의 직접 개입의 흔적이 이들 문서에서는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상의 사실을 통해 소련점령군은 이 시기에 벌써 북한지역에 「단독정부」를 이식시키고 이들을 앞세워 전체 한반도의 소비에트화를 위해 배후에서 활동했다는 점을 검증할 수 있다. 둘째 미국과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이 크게 변화하는 1947년의 시점에서 소련의 한반도정책의 목표가 본질적으로 무엇이었나를 확인시켜 준다.지금까지 연구자들은 1945년 말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나온 이래 1947년 제2차 미소공위가 진행되던 시기까지를 냉전 분위기가형성되고 있었지만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문제에 대해 협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던 것으로 인식하였다.1947년10월18일 공위 제62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정책을 바꾸었고,그것이 한반도의 분열상태를 영구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고 보았던 것이다. ○자유체제 유지 역점 그러나 「조소해운주식회사」관련 극비문서의 발굴을 통해 드러났듯이,소련은 1947년3월25일 청진·나진·웅기등 세 항구를 새로운 방식으로 「조차」하고 있다.이것은 1947년3월12일에 발표된 미국의 「트루만독트린」에 대한 소련측의 직접 대응이었던 것이다. 미국 외교사에서 『혁명적인 사건』으로 불린 「트루만독트린」의 주요 내용은 공산화될 위험에 처해 있는 지역에 경제군사지원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또 세계 각국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나라들에게 경제군사지원을 하여 소련의 팽창주의를 봉쇄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부동항획득 서둘러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의 연합동맹국이었던 소련에 대해서 정면대결을 명백히 선언하자,소련은 제정러시아 때부터 추구해 온 한반도에서의 부동항 획득을 서둘렀다.김일성은 극동지역에서 정치경제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세 항구의 양도를 1947년10월7일에 최종 비준하였다. 이날 소련공산당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공산당 대표들은 바르샤바에서 모임을 갖고 「코민포름」을 결성하고 있었다.이때부터 대립적인 동서 양블록이 체제화 되었다. 그 결과 자주적인 힘만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우리민족의 처지에서는 미·소 양국의 극단적 대치의 영향을 그대로 받을 수 밖에 없었고,한반도는 양 진영의 이데올로기 각축장이 되었다.
  • 점령군의 실리 챙기기(새로쓰는 한국현대사:12)

    ◎소 북한서 산업설비 마구 뜯어갔다/「일제 군수공장은 소 전리품」 정령 앞세워/북 식량난속 곡식 6백여만섬 빼내가기도/미는 동척땅 경작시키고 소작료 30% 징수 광복과 함께 한반도 남북에 각각 진주한 미·소 양국은 자국의 이데올로기를 대행할 정치세력 구축과 이를 뒷받침할 경제구조 재편에도 심혈을 기울였다.미국은 궁극적 목표인 반공국가 수립을 위해 남한사회를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성하려 했고,소련은 사회주의 체제 달성을 서둘렀다.특히 소련은 북한지역 몇몇 항구를 장기 조차한다든지,일제가 남긴 공업시설을 빼앗아가는 등 경제 실리를 노골적으로 챙겼다. ○연 수십억원 거둬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설립한 대표적인 경제관련 기관은 남쪽의 「신한공사」(The New Korea Company)와 북쪽의 「조소해운주식회사」였다.이 두 회사의 설립 목적과 업무를 보면 양국이 한반도에서 시도한 경제정책의 실상이 무엇인지 뚜렷이 드러난다.미·소는 「한반도에 남은 일본관련 재산은 전리품」이라는 시각을 갖고 이를 직접 관리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이 회사들은 형식상 독립회사의 틀을 갖추었지만 실상 미·소의 직영기관과 다름없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신한공사는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자산을 인수하는 형식으로 1945년 11월12일 출범했다.처음 지위는 군정청의 부속기관이었지만 46년 2월21일 관계법령 제정에 따라 독립회사로 탈바꿈한다.신한공사는 동척의 토지대장과 지적도를 이용,45년 말부터 이듬해 봄까지 전국에서 토지조사를 벌여 해당 토지 대부분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지역 농민들이 큰 반발을 보였는데 이는 지역인민위원회가 일본인 토지를 주민들에게 이미 분배한 뒤였기 때문이다.아무튼 46년 2월말까지 신한공사는 논·밭·산림을 합해 34만7천여 정보의 토지를 보유하게 됐다.이같은 면적은 사실상 일본인이 남긴 토지의 대부분이었다. 신한공사는 이 땅을 55만4천여 농가에게 경작시키고 수확고의 30%를 소작료로 징수했다.그 결과 신한공사는 매년 십수억원의 수입을 올렸으며 47년에 가서는 15억1천여만원이나 거둬들였다.여기서 인건비등 경비를 제외하고도 신한공사는 5억8천여만원의 순익을 남겼다.당시 신한공사는 남한 전체 경지면적의 13·4%,생산고의 25%를 차지했다.그 농지를 소작하는 농가는 전체의 27%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신한공사에 대해 『일제의 식민지 수탈과 다름없다』는 비난이 갈수록 거세게 일었다.이에 미군정은 48년 4월 신한공사를 중앙토지행정처로 이름바꾸고 귀속토지를 농민에게 불하하기 시작했다. ○합법 가장해 착취 신한공사는 명목상 독립회사였으나 미군정 직영기관에 불과했다.자본금 1억원을 단독 출자한데다 미군 장교에 한정한 사장 임명권과 회사 해산권을 군정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를 입증한다.더욱이 관계법령에 『사장은 미국의 이익에 관계 있는 정책문제를 결정하는 전권을 갖고 있다』고 규정,그 성격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북한 경제를 조종한 소련의 수법은 더욱 교묘했다.그럼에도 구소련은 그동안 해방직후의 북한­소련 경제관계를 『소련이 사심없이 일방적으로 원조한 것』이라고 선전해 왔다.즉 식량 원료 연료등을 북한에 무상 제공했다는 것과 전문가 파견을 통한 산업복구 지원,북한유학생 유치에 따른 인력양성등 은혜를 베풀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소장의 북한노획문서들을 보면 소련은 매우 적극적으로 북한지역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으로 돼 있다.다만 공산주의 사회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소련측 입장은 46년 1월28일 작성된 「북한에 조소합작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문제에 대한 소련인민위원회의 정령(정령)」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이 문서는 소련이 전력·흑색금속·유색금속·화학·기계제작·민간항공·석탄·시멘트·어업·철도·해상운수등 모든 산업 분야에서 북조선과 합작회사를 설립한다는 지침을 담았다.곧 「회사 합작」이라는 형식을 통해 북한지역 물자를 마음껏 가져가겠다는 의도였다. 소련은 우선 지침 첫항에서 「북한지역에 있는 일본 군수물생산 관련기업들은 우리의 전리품이므로 소련정부의 재산」이라고 밝혔다.그리고 일본 기업중 일부를 북한에 넘겨주되,대부분은 합작회사로의 전환의도를 분명히 보였다.특히 발전소·흑색금속·유색금속·화학등 주요 분야 합작회사는 소련측에서 주식의 51%를 소유한다는 조항은 수탈 그것이었다.회사의 업무집행 역시 소련이 임명한 지배인에게 맡기기로 했다.이같은 지침에 따라 설립된 합작회사가 조소해운주식회사(모르트란쓰)와 조소석유정련주식회사이다. 소련이 모르트란쓰를 세운 목적은 청진·나진·웅기등 3개 항구를 30년동안 북한으로부터 조차하는 데 있었다.양국은 47년 3월 25일 이 회사 설립에 따른 협정을 맺었다.협정서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전권대표 홍기주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동맹 외국무역성」전권대표 코스토레프스키가 각각 서명했다.홍기주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출신으로 김일성 세력에 가담해 당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인물이다. 협정서에 따르면 합작비율은 5대5이다.그러나 자본금을 내지 않는 대신 소련은 화물선 3척과 여객선 1척을,북조선은 3개 항구및 그 부대시설을 회사에 30년동안 각각 임대하는 출자형식을 취했다.소련이 배 4척을 내놓은 대가로 북조선은 3개 항을 내놓았다.이 협정은 실로 엄청난 불균형을 내포했다.또 3개 항구이외의 북조선 항구를 조차할 경우 이 회사에 우선권을 준다는 조항이 포함돼 소련이 나머지 항구도 양도받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소련이 청진 등 3개 항을 군사적·상업적으로 어떻게 활용했는지,30년만에 조차가 끝났는지,또는 연장됐는지는 관련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다.다만 소련군이 광복 2년이 채 안돼 북쪽의 주요항구들을 「합작」명목으로 장기양도받은 사실은 전통적으로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야심을 그대로 실현한 것이다. 이밖에도 소련은 북에 진주한 직후부터 각종 산업시설·식량·원자재를 강제반출했다.45년에만 수풍발전소의 발전기 3대를 비롯해 ▲원산 조선석유회사의 기계 일체 ▲함흥 본궁화학의 6만㎸변압기 ▲청진 일철공장과 미쓰비시제련소의 기계 일체등 주요 설비는 몽땅 뺏어갔다.또 진남포제련소에서는 금 2t과 아연 4백t,동 3백t을,조선은행 원산지점에서는 현금 3천만원을 소련재산화했다.북쪽 땅에서 식량부족이 매우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45년에 2백44만섬,46년에 2백90만섬의 곡식을 빼내갔다. 2차세계대전 종식을 계기로 한국사 전면에 등장한 미·소 양국은 정치는 물론 경제 분야에서도 민족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이 틀림없다. ◎「한소해운」 창립 협정서 서울신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발굴한 「조소해운주식회사 창립에 관한 협정서」전문을 싣는다.19 47년 3월 북한이 청진,나진,웅기항등 3개 항을 소련에 넘겨주기로 한 이 협정서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은 현행 맞춤법에 따라 옮겼고,「조쏘」와 같은 고유명사의 약자도 「조소」 등으로 고쳐 게재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동맹 외국무역성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양국간의 경제관계의 발전과 강고를 목적으로 본협정서 체결을 위하여 정식임명한,즉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동맹 외국무역성은 자기 전권대표로서 코스토레프스키를,북조선인민위원회는 자기 전권대표 홍기주를 파견하여 하기와 같이 협약함 제1조 협정체결 쌍방은 평등한 원칙에서 해운의 관리와 경계및 본협정제5조에 지적한 북조선에 있는 항구와 부두시설및 설비를 이용하며 해상수송과 교통을 조직할 목적으로 평양시에 조소해운주식회사(약칭 모르트란쓰)를 창립함.본회사는 본협정에 첨부하는 별지 정관(첨부서류 제1호)에 의하여 운영함.본회사 창립자는 다음과 같음.소련측…화태국립해운국 극동국립해운국(솜흐락드)전동맹연합회 원동운수공사등.조선측…흥남지구어민공장 북조선석탄관리국임 제2조 조소해운주식회사의 주식자본은 2천8백만원으로 정하되 그 내역은 아래와 같음.가.기선조차요금 조선화폐 1천4백만원은 본협정서 제4조에 의하여 소련측이 납입하는 자기주식자본에 충당함.나.부두시설조차요금 1천4백만원은 본협정서 제5조에 의하여 조선측이 납입하는 자기주식자본에 충당함.주식자본금의 결정에 있어서 가,나에 지적한 임차요금의 평가는 19 38년도의 시가로 계산함.회사발전에 의한 주식자본금은 쌍방의 결의에 의하여 증액할 수 있음.이 경우에 조소주주의 균등 참정권은 불변함.회사 이익금은 쌍방투자액의 비율에 의하여 분배함.회사 전주권은기명주권임.주권의 양도는 이사회의 만장일치 결의에 한하여서만 행할 수 있음 제3조 회사창립후 1개월이내에 쌍방에서 각 일천만원을 납입하여 합계 2천만원의 예비자본금을 조성함 제4조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동맹 외국무역성은 회사에 대하여 본협정서에 첨부하는 별지목록(첨부서류 제2호)에 의한 화물선 3척과 객선 1척을 30년간의 기한으로 대여함.전기기선의 조차료는 소련측의 본회사에 대한 출자금으로 충당함 제5조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본회사에 대하여 본협정서에 첨부하는 별지목록(첨부서류 제3호)의 창고,관할구역,상항건물및 일철공장을 포함한 청진항과 전 부두,창고건물을 포함한 나진항및 계선장,창고건물등을 포함한 웅기항을 30년간의 기한부로서 대여함.전항 항구건물등의 조차료는 조선측의 본회사에 대한 출자금으로 충당함 제6조 본협정서 제4조에 기재된 기선및 제5조에 기재된 항구건물의 1년간 조차료와 30년간 조차료 총액의 결정은 본사 창립까지 창립자간에서 이를 19 38년도 가격에 의하여 정함.본협정서 유효기간인 30년간의 총조차료 결정에 있어서 협정 일방(소련 혹은 조선측)의 납입금이 본협정서 타방의 납입금을 초과할 때는 쌍방납입금을 균등하게 하기 위하여 후방은 6개월내에 차액을 현금으로 혹은 금액에 해당하는 물품으로 납입함 제7조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웅기,나진,청진 각항의 운영과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대책을 강구하며 자비로서 항도유지에 필요한 수리·준설공사를 수행할 것.제1항 기재의 제항외에 타항구에 관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본회사에 대하여 조차에 관한 우선권을 부여함 제8조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동맹 외국무역성은 본회사에 대하여 본회사 선박이 소련항구에 입항할 시에 소련정부로 하여금 입항징수금에 대하여 최하조건을 적용하도록 대책을 강구할 것 제9조 본회사의 사업운영에 있어서 협정 쌍방은 동등하게 참여함.이사회에는 각방이 동수로 이사 2명씩 선정하고 이사장에는 조선측의 이사가 차에 임하고 부이사장에는 소련측 이사가 차에 임함.집행직무는 소련측에서 임명한 총지배인과 조선측에서 임명한 부지배인에게 일임됨. 제10조 본회사는 사업수행상 조선 국영회사와 동등한 권리와 우대를 향수함.북조선인민위원회는 본회사 창립및 등록에 관한 세금 징수금및 정리를 포함한 추후 회사변동에 관한 일체등록에 대하여도 세금및 징수금을 면제함. 제11조 본회사 사업상 외국에서 선박시설자재등의 구입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외국화폐는 본회사 운영중 수지한 외국화폐에서 특별 지장없이 꺼내 사용할 수 있음.북조선중앙은행에서 외국화폐의 매매를 행할 때는 타회사에 적용하는 최하조건을 동등하게 향유함. 제12조 이사회에서 회사운영상 이의가 발생할 때는 결정적 해결은 본협정 체결자가 행함 제13조 본회사 창립자들은 본협정에 서명하는 동시에 쌍방이 서명일로 부터 15일이내에 북조선 소요기관에 등록할 것 제14조 본협정서의 유효기간은 본협약 서명일로 부터 30년간으로 정함.30년 경과전에 본회사를 청산할 때는 쌍방간의 협약에 의하여 이를 행할 수 있음.30년 경과후 회사 전재산은 조선에 속함 제15조 본협정은 쌍방 서명일로 부터 효력을 발생함 제16조 본협정서는 19 47년 3월25일 평양시에서 노문(노문)과 조선문 각 2장씩 작성함.노문과 조선문은 동등한 효력을 유(유)함 북조선인민위원회 전권대표 홍기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동맹 외국무역성 전권대표 코스토레프스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 연극연출가 임영웅(이세기의 인물탐구:71)

    ◎56년 「환절기」로 입신… 「완벽 무대」추구/작자의도 밀도있게 접근… 깊이있는 연기 도출/「고도를 기다리며」 초연땐 하루 19시간 맹연습/집팔아 지은 산울림소극장 개관 10돌 맞아 기념공연 막 올려 마른나무 한그루가 텅빈 공간에 물음표처럼 서있는 무대,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이 공허한 대지위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란 무엇인가.신인가 죽음인가 행복인가.고도는 그 무엇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일 수도 있다.시간과 공간이 단절된 상황속에서 이 연극은 언제나 시작되고 끝나면서 또 어디서나 생길수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69년 12월,한국일보 소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됐을 때 그것이 베케트의 난해한 부조리극이라는 이유만으로 관객은 이미 긴장되어 있었다.그러나 우려는 기우였다.연출가 임영웅은 관념과 현학이 넘치는 난삽의 「고도」를 시감의 템포로 도해시켰고 객석은 시종 웃음을 터뜨리며 서구 연극의 새로운사조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수 있었다.이후 「고도」는 「손색없는 명작」으로 정착되어 89년 프랑스 아비뇽과 다음해 고도의 본고장인 더블린 연극페스티벌에서 「한국의 고도는 과연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호평을 받았다.이보다 앞서 88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 왔던 세계적인 극평가 마틴 애슬린(미스탠퍼드대 교수)은 「베케트의 희극성과 비극성이 섬광처럼 교차된 마지막 장면은 특히 작가의 의도에 밀도있게 접근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진작부터 세계무대의 진출과 입신을 예고해 주었다. ○속물근성 찾을 수 없어 널리 알려지다시피 임영웅의 연출에선 잡다한 상업성이나 분칠한듯한 속물근성은 찾아볼수 없다.관객을 의식한 연희성과 상투적인 작위성은 배제된다.부조리극이든 블랙 코미디든 혹은 뮤지컬이나 관념적인 추상언어라 할지라도 인간 심리의 바닥없는 심연에 끈질기게 파고들어 캄캄한 내부에 도사린 모순과 갈등을 명징하게 그려낸다.예를들어 77년 화사한 비애가 전신에 스며드는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이나 87년 「영국 애인」등은지금도 잊을수없는 정미한 무대로 기억된다. 그에게선 예술가 특유의 동심과 기벽과 기행은 찾아볼 수 없다.번뜩이는 재치나 직감력을 기대할 필요도 없다.만약 그런 의외성과 파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보수적인 체질속에 숨겨진 진보적 감각」은 그의 탄탄한 자존심의 틀에 갇혀 쉽사리 노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출가 임영웅을 떠올릴 때마다 프랑스 연극계의 거장이며 「황소의 뿔」로 불리는 장 루이바로를 연상케 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닐것 같다.바로가 그의 부인이자 연극 동반자인 마들렌 르노와 그들의 소극장을 세워 레퍼토리 극단으로 활동한 것처럼 그도 그의 부인인 오징자 교수(서울여대 불문과)와 함께 소극장운동의 전범으로 존재하면서 오교수는 극단 산울림의 희곡번역과 기획등에 참여하고 있다.그리고 연극을 「인간에 의한 공간예술」로 승화시킨 점과 비록 작은 일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는 섬세한 감지,한번 결심한 것은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황소고집등은 바로와 비슷한 노선을 그려나가고 있다.연극의 문제는 무엇보다 「얼음덩어리와도 같은 객석의 침묵」을 깨뜨리는 일이며 결국 얼음을 녹여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그의 연극을 보면 관객은 원로 여석기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단순한 인사가 아닌 진심의 경의」와 진정한 감동으로 박수갈채를 보내게 된다. 그의 연극행로는 물흐르는듯 순조롭진 않았다. ○음악가부친 재능 이어 휘문고시절 동랑 유치진의 「사육신」연출을 계기로 연극연출을 지망하게 되었고 56년 극단 신협의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임희재작)로 연출데뷔,박진 이해랑에 이은 국립극단 연출을 거쳐 「정서적인 플롯과 사실적인 언어가 거부된」 오태석의 「환절기」를 「오서독스하면서도 감각적인 논리성」으로 형상화하여 연출가로서의 극명한 위치를 다졌다. 그의 예술적 재능은 음악가였던 부친 임태식씨와 음악계의 원로 지휘자인 숙부 임원식씨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할수 있다.13살에 부친을 잃은 창백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나 조모와 숙부의 따뜻한 보호아래 그는 음악 문학 연극에 접할수 있었고 동랑 유치진 이해랑과의 만남이 실질적인 연극의 촉진제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무리 비극적인 작품이라도 그는 작품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별빛 희망과 인간미의 향기를 절차탁마로 가꾸어낸다.그런만큼 탐구정신과 선별의 명철로 작품분석에 침몰하여 자신이 완전히 이를 소화해야만 비로소 배역을 정하고 스태프를 구성한다. 연습때는 연기자의 동선 하나 조명의 밝기,음향의 정확성에 주도면밀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로잰듯 확실하고 투명해야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완벽주의는 결벽과 맞먹게 마련이어서 그의 연출노트는 개칠한 흔적없이 추가사항들을 빈틈없이 정리해 놓고 있다.「고도」초연때의 하루 19시간의 연습 강행군으로 「사자」란 별명이 따르기도 했으나 그의 속마음은 만년소년에다 청담을 잃지 않는 순수성이 두드러진다.혹독한 연습과 훈련에 의해 수많은 배우들이 그의 연극을 거쳤고 관객이 그의 연극에 안심하는 것처럼 그들도 극단 산울림 출연을 자랑삼고 있다. 그러나 영광의 이면은 언제나 어두운 곡절과 고뇌가 감춰진다.연극이 생계를 해결하는 직업이 될수 없다는 실망과회의에 빠져 그는 한때 연극을 포기하고 방송 프로듀서로 돌아간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어쩌면 「마지막 작품」이 됐을지도 모를 「쥬라기의 사람들」(이강백작)로 82년 대한민국 연극제에 참가,연출상 수상기념으로 2개월간의 해외연수길에서 그는 연극은 세계 어디서나 힘들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귀국길에 오르자 남들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소극장을 짓는다는 참으로 엉뚱한 결단을 내려 주위를 놀라게했다.집을 팔고 빚을 얻어 누구라도 감히 꿈꿀수 없는 소극장 신축을 서둘렀고 85년 3월 숱한 수난끝에 탄생된 것이 지금의 홍대앞 산울림소극장이다.1년여 이상 극장을 짓느라고 가뜩이나 과로로 균형을 잃은 몸이 더욱이나 기울어진 자세가 되자 그와 절친한 평론가 유민영은 「걸어다니는 피사의 사탑」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실제로 움직이는 연극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여 묘한 「시니컬 포퍼먼스」가 느껴진다. ○연극상 수상만 43차례 이제 극단 창단 25주년과 소극장 개관 10주년을 맞은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피와 땀과 노력의 결정인그의 아지트에서 10년을 하루같이 앙코르 공연을 제외한 26편의 신작공연과 43차례의 연극상 수상,40만 관객을 동원하고 있으나 남보기완 달리 극장운영에 따른 고충속에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그때도 그를 격려하듯 동랑연극상이 주어졌고 상을 받는 자리에서 그는 다시는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 두려운듯 「죽을때까지 연극을 하겠다」고 재삼재사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개관 10주년기념공연으로 지난 16일부터 윤석화의 일인극 「딸에게 보내는 편지」(아놀드 웨스커작)를 필두로 극단 산울림의 신작 창작시리즈를 차례로 선보이고 맨 마지막에 명편 「고도」를 무대에 올리게 된다. 비튜겐슈타인의 말처럼 그는 수많은 남의 인생을 연출하고 있지만 자기자신의 인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 자신의 인생은 결국 연극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고도」란 무엇인가.그가 살고있는 현재이며 또는 불확실성의 미래이고 영원한 의문부호일 수도 있다.그러나 지난 25년간 고도와의 외로운 투쟁끝에 「임영웅식 연극」을 성취한그로서는 아마도 고도가 무엇인지 그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그래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연보 ▲1934년 서울출생 ▲1948년 휘문고를 거쳐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졸업 ▲1956년 극단 신협 ‘세일즈맨의 죽음’(아더밀러)조연출겸 무대감독, ‘꽃잎을 먹고사는 기관차’(임희재작)데뷔연출 ▲1958년부터 세계일보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1963년 동아방송 드라마프로듀서 ▲1966년 예그린악단 뮤지컬연출 ‘살짜기 옵서예’등 ▲1968년 국립극단연출 ‘환절기’등 ▲1969년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초연 연출 ▲1970년 극단 산울림 창단 ▲1973년 한국방송공사 입사 ▲1985년 산울림 소극장 신축개관 ▲1989년 프랑스 아비뇽페스티벌 ‘고도를 기다리며’초청참가 ▲1990년 더블린 연극페스티벌 참가 ▲1991년 한국연극연출가협회 회장 ▲1992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백상예술대상 연출상및 특별상(69·72·86·95년),서울신문 문화대상및 연출상(70년),서울연극제 최우수연출상(82·85년),한국 연극영화 예술상 특별상(85년),대한민국연극제 대상(82·85년),김수근문화상(86년),동아연극상 연출상(86년),서울시 문화상(87년),대한민국문화예술대상(87년),이해랑연극상(92년),동랑연극상(94년)등 ‘전쟁이 끝났을 때’‘환상살인’‘인종자의 손’‘덤웨이터’‘위기의 여자’‘홍당무’‘코뿔소’‘꽃피는 체리‘‘블랙 코미디‘‘마리테레츠는 말이 없다’‘밤으로의 긴여로’‘여우와 포도’‘하늘만큼 먼나라’ 뮤지컬 ‘배비장전’‘꽃님이’‘대춘향전’등
  •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걸작 건축감상:13)

    ◎엔타시스양식의 과학적 설계기법 탁월/착시현상까지 보정… 인간 공학적 건축 완성/내부엔 금·상아로 만든 아테나여신상 세워/기원전 5세기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기둥만 46개 작열하는 태양과 코발트빛 바다.그리스인은 그들의 신(신)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다.문명의 역사를 열어보면 무형의 신의 모습을 헤아리며 인간 자신을 신 앞에 봉헌할 때 집회의 장소로서의 종교건축이 무수히 만들어졌다.그러나 인간이 만든 신,그리스인의 영웅이자 그들이 가꾸어 온 우주라는 꿈의 본질을 추구하는 의식에서는 신을 위한 무대가 준비되고 그들 고유의 장소가 마련되었다.그들을 바라보는 인간은 인간의 땅에서 축배를 들었다. ○자신들이 신을 만들어 그리스의 신전 건축은 곧 신의 「집」이고 신의 「터」였다.교회에서는 예배를 보는 교인의 무리가 한 지붕 밑에서 신과 교감하지만,그리스인은 신전을 배경으로 노천에 모였다.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굳게 믿었다.그리스인의 신은 그들 자신이 만들었다는 필자의 단언은 그들의 분노를 샀을 것이다.그러나 그들이 올림포스산의 주신 제우스를 진지하게 만나고 있을 때,우리 외지인의 눈에는,제우스의 너무나 재미있는 불멸의 투쟁사가,그리고 디오니소스의 광란이 거대한 한편의 드라마로 펼쳐보인다. 희랍공화국.발칸반도 최남단의 국가로서 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불가리아와 면하여 있다.무려 1천4백여개의 섬이 한반도의 절반 남짓한 국토의 5분의1을 차지하고 있으며 반도의 삼면은 이오니아해와 지중해,그리고 에게해가 감싸고 있다.2천9백17m의 올림포스산을 최고봉으로 하여 반도의 척추라 할 수 있는 핀도스 산맥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뻗쳐있다.국토 곳곳의 활화산은 아직도 그 열기를 머금고 있어서 1953년에는 수백명이 사망하는 지진의 재앙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기원전 2500년 무렵 크레타 섬에는 청동기문화가 꽃을 피웠다.그들의 청동기시대에는 문자가 존재하였고,금속문화가 단지 계급의 형성과 문화라는 차원이 아니라 문명의 창조적인 확대를 가져오는 전기가 되었다.이러한 사실들은 20세기에 이르러 건축가에 의해 고대문자의 해독이 가능해짐으로써 알려지게 된 것이다.그들의 문화는 그 문화의 실증적 유물을 수없이 남기고 있지만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문학을 통해서 그리스인이 마음껏 펼쳐보여준 꿈의 정서이다. 그들의 신화가 갖는 독특함의 하나는 신화가 곧 일상의 진리이며 역사적 사실이기도 해서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꿈인지 애매하다는 것이다.트로이 전쟁처럼 서사시로 묘사된 유명한 사건이 실재하였는가 하면 여신을 범하려하거나,신에게 누명을 씌우고 신의 특권을 갈취하여 신을 속이는 인간의 죄상이 나타난다.초조함과 안타까움의 끝에 잃어버린 사람들을 다시 찾는 모험이야기나,죽은 아내 에우뤼디케를 현세로 데려오기 위해서 죽음의 땅을 여행한 오르페우스,그리고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투쟁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신과 인간의 공동작품 헬레네의 자손이라고 믿었던 그리스인들은 건축자원이 가장 탁월한 땅에서 살았다.온화한 기후와 풍요한 나무,가공이 손쉬운 석재,그리고 반도라는 지리상의 특성에서 비롯된 산과 바다,군사와 무역이라는 변화있는 환경에서 피어난 그들의 건축은 서양건축의 고전이 되었다.앞서 말한 문화적 깊이와 금속세공의 감각,이집트와의 교류등 다양한 체험과 기량은 목조에서 석조로 이어지는 비례감각과 양식의 발달을 주도하였다.이들은 정열과 재능을 쏟아넣어 우아하고 장중함이 넘치는 걸작인 신전건축을 남겼다.바사이의 아폴로신전,올림피아의 제우스신전,파이스툼의 헤라신전,그리고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그 불후의 명작이라 일컬어진다. 파르테논신전은 아테나 여신의 전당으로 아크로폴리스 구릉에 서 있는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작품이다.수많은 신전 가운데서도 특히 「파르테논」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그 뛰어난 예술성과 정통성 때문일 것이다.「익티누스」와 「칼리크라테스」의 설계로 건조된 하얀 대리석의 신전 내부에는 금과 상아로 된 아테나 여신상이 있다.오랜 세월로 조각품과 장식면이 크게 훼손되었지만 기본구조는 원상태 그대로 남아있다.건물의 높이는 31m에 달하며 폭은 70m에 이르고 있는데 직사각형의 주변에동서로 8개,남북으로 17개의 기둥이 열주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파르테논은 그 웅장함과 함께 세심한 벽면 장식에 있어서도 그 무엇과 견줄 수 없는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신과 거인,그리스인과 아마존인들간의 싸움을 그린 부조가 치밀한 조소적 외관을 이룬다. ○인간공학적으로 완결 그러나 파르테논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이러한 미적요소들,그리고 건축적 웅장함을 뛰어넘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다.그것은 우리가 단지 재능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파르테논에 집약된 설계기법이다. 이른바 엔타시스 양식이라 불리는 기둥의 「배흘림」을 비롯하여 인간의 눈에서 발생하는 착시를 보정하기 위한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기둥을 세웠을 때,균일한 폭의 기둥이 수직으로 반복 배치되어 중앙부가 가늘어보이는 현상에 대응해서 기둥 중앙부를 배부르게 하고,기둥의 상부는 가늘게 뽑아 올림으로써 보는 사람의 위압감을 해소하였다.또한 기둥뒤가 건물외벽으로 막혀있는 곳과 벽이 없이 트여 있는 경우에 발생하는 기둥간격에 대한착각을 고려하였다.기둥사이로 하늘이 보이면 기둥은 가늘고 상대적으로 간격은 멀어보이게 마련이다.그들은 물리적 치수에 집착하지 않고 착시를 보정하여 균등한 간격을 느낄수 있도록 간격을 조절하였다.또한 이러한 고려는 처마면에서도 나타난다.수치적인 수평선은 실제로는 중앙부가 처진듯한 착각을 일으킨다.따라서 그들은 거대한 돌을 맞추어 나가면서 중앙부를 미세하게 들어 올렸다.수치로는 중앙부가 배부른 모습이지만 보는 이에게는 수평으로 보이는 것이다.또한 신전앞에 모여드는 군중의 시선 방향을 고려하여 처마길이를 조절함으로써 가까운 곳의 길이가 확대되어 보이는 현상까지를 보정하였다. 이러한 착시(opticalillusion)는 가히 환상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다.그들은 신전건축을,신을 위해 지으면서,사실은 기적과 같은 인간중심의 배려를 하였고 그것을 인간공학적으로 완결시켰다.현대건축에서도 이러한 착시보정까지를 고려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메커니즘과 공해에 찌든 우리로부터 어쩌면 고대의 작열하는 태양과 푸른바다는 영원히떠나버렸는지 모른다.하지만 땅과 건물이 오직 경제적 실체 이상도 이하도 아닌 현실속에서 인간과 신과 함께 즐기는 신전건축에 바친 고대인의 지혜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은 다시 정리하지 않아도 낭만적 여담보다는 웅변으로 전해져 온다.
  • 본사,「소대표지원… 공산당 지침」 발굴/랭던보고서

    ◎미군정청 입수… 좌익 투쟁정책 수록 )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19 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때 조선공산당이 소련대표단과 동일노선을 걸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긴급입수 했다.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이 소장한 이 문서는 미국대외정책(FRUS·1946년)에 들어있는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이 마셜 국무위원에게 보낸 보고서의 첨부물인 노획문서.당시 좌익의 선전및 시위는 소련대표를 지원하기 위해 중앙집중화한 형태로 조직된 공산당에 의해 통제되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첨부물들은 미 군정청 대공정보부대 장교들이 46년 5월께 입수한 것이다.조선공산당 부산시와 인천시인민위원회가 같은 해 3월말부터 4월3일까지 미소공동위와 관련,각 지역 지부 당원들에게 지시한 선전및 투쟁정책을 고스란히 담고있다.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지지한 조선공산당은 이 문건을 통해 반민주적 정당과 조직및 개인이 포함된 친일파 반역자는 철저히 배제돼야 한다는 당 기본노선을 밝혔다.그리고 임시정부 구성 협의대상이 선정되면 미국측이 최우선 해결과제로 내세우는 38선 철폐를 비롯,경제·행정적 문제등은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소련대표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인물속성도 소련측과 대동소이하게 박헌영 여운형 허헌 김두봉 김일성 이주하 최무정 김원봉등은 임시정부 협의대상으로 최적격자로 분류해 놓았다.이어 이승만 김구 안재홍 김성수 조완구 조만식 장덕수 조소앙은 배제돼야 할 반동인사,김규식 김병로 홍명희 등은 찬·반탁이 명확지 않은 중도파로 못박았다. 이와 더불어 팸플릿과 영상물 뿐만 아니라 신문·잡지등 간행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과 모든 조직과 인민을 총동원,미소공위에 결의문과 청원서·서신등을 보내는 운동전개등 투쟁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서울신문 발굴 「공산당 지령문」을 보고/“추측 입증한 가치있는 사료”/당시의 정황과 일치… 신뢰도 높아/김창순 북한문제연구소 이사장 해방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협상에서 조선공산당이 소련의 입장을 옹호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가 발견되기는 처음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신문사가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조선공산당 지령문은 상당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1945년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서도 이 문서는 상당한 신뢰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남한 공산당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것이 46년 1월2일이고 당시 남한 공산당 책임자였던 박헌영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인 46년 1월과 4∼5월쯤에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했다.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북한 공산당 그리고 남한 공산당의 역할에 대해 논의한 바가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소련군 사령부가 조선공산당에 대해 사실상 모든 지휘 감독 권한을 행사한 시점이기도 하다.소련이나 북한의 직접적인 문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공산당이 소련과 일사분란하게 보조를 맞추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특히 해방 당시 수집한 정보보고와 각종 문건들을 정리 분석한 첫 문서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끈다.이 문서에서 보여주는 투쟁방법등은 오늘날 북한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선전선동과 맥락을 같이한다.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북한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최팔용선생/3·1운동전 「2·8독립운동」 주도(이달의 독립운동가)

    ◎주일 한인유학생 학우회서 맹렬 활동/일제 고문·투옥생활 후유증… 32세 순국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또 국가·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하는 것은 아니다』 1918년4월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중이던 당남 최팔용(당남 최팔용)선생이 도쿄 YWCA에서 열린 「와세다대 동창 웅변대회」에 참가해 외친 내용이다. 선생은 이같은 신념 아래 1919년2월8일 2·8독립선언을 주도,일제에 의해 투옥됐다가 32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일제 때 있었던 3대 독립선언 가운데 하나인 이 2·8독립선언은 간도에서 조소앙 선생등이 2월1일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에 이어 두번째 나온 것으로 20여일 뒤의 3·1독립선언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리 남당읍에서 태어난 선생은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 신학문 습득을 위해 일본 유학을 하던중 항일의식을 갖게 됐다. 일본 와세다대 정치과에 입학한 선생은 일본한인유학생 학우회에 가입,일제의 민족차별을 몸으로 겪으면서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키워나갔다. 일본한인유학생 학우회는 도쿄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1927년10월27일 조직된 단체로 민족주의사상을 고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선생은 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을 통해 갖가지 글을 발표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선생은 이후 『윌슨이 민족자결론을 내세운 지금 우리가 조국광복을 부르짖기에 가장 좋은 기회니 우리도 이 기회에 일어나자』고 학지광 편집위원 최승만에게 제의,비밀리에 동지규합에 나섰다.당시 선생을 비롯한 학생들은 일본에서 간행되고 있는 영자지에 『미국에 있는 한국인대표 이승만과 민찬호등이 일제의 침략행위를 알리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는 기사와 조일신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거류 한인들이 독립운동자금으로 30만원의 거액을 모금했다』는 기사가 게재된 것을 보고 고무돼 있던 상황이었다. 학생들은 이어 1918년12월28일 유학생망년회에서 「민족자결론에 의한 한국독립론」을 주제로 의견을 나누고 이듬해 1월6일 도쿄에서 학우회 주최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운동방법을 숙의했다. 웅변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민족자결대원칙에 입각해 우리 민족은 반드시 자주독립을 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젊은 학생들이 앞장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선생은 이 대회에서 송계백·전영택등과 함께 10명의 실행위원으로 선출돼,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방법을 구체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선생등은 우선 독립선언문과 민족대회소집청원서,그리고 독립과 관련한 결의문을 작성,일본 조야와 외국공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선생등은 이에 따라 독립선언문을 비밀장소에서 등사판으로 작성하고 거사 하루전인 2월7일 밤 와세다대 부근에 후배들을 불러놓고 『내일 붙들려가면 언제 나올지 모른다.여러분은 우리의 뒤를 이어 잘 싸워달라』고 당부했다. 2월8일 날이 밝자 선생등은 독립운동서를 각국 대사관·국회·조선총독부와 각 신문사·저명인사등에게 우송,거사에 돌입했다.선생등은 이어 하오2시쯤 YWCA에서 6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학우회총회를 열었다. 선생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단상에 올라 「조선청년독립단」발족을 선포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독립선언문은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침략을 강행했으며 한민족은 독립을 요구할 당연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회의가 끝난 뒤 가두행진을 펼치려 했으나 일경이 회의장주변을 둘러싸고 가두진출을 막아 충돌 끝에 대부분 체포됐다. 선생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일경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재판에 회부돼 1년전후씩 금고형을 선고받았다.송계백의 경우 옥중 순국했으며 선생은 수형생활 9개월만인 1920년3월26일 만기출소했다. 선생은 그러나 옥중에서 체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2년여 뒤 세상을 떠났다.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소장부부 윤화사/고속도서 차 전복

    【대전=이천렬기자】 8일 상오 1시10분쯤 대전시 유성구 방동 호남고속도로 (회덕기점 22㎞지점) 커브길에서 01­육군­1009호 프린스 승용차(운전병 김종원 상병·22)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4m아래 논으로 굴렀다. 이 사고로 차에 타고 있던 육군본부 동원참모부장 조희태 소장(55·서울 서초구 잠원동 58의22 신반포 17차 아파트 334동 904호)과 부인 서춘자씨(54)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운전병 김씨가 크게 다쳤다. 조 소장부부는 지난 7일 하오 모친상을 당한 고향 친구를 문상하기 위해 전북 고창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경찰은 조 소장부부가 탄 차량이 급커브길인 사고지점에서 과속으로 달리다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숨진 조소장은 ROTC 3기생으로 91년 육군소장으로 승진했다. 발인 10일 상오 9시 대전 육군본부 영안실.장지 서울국립묘지.(042)550­1744∼5.
  • 포항공대 11.3대1 경쟁/동국대 조소과 46대1 최고

    ◎4개대원서마감/오늘 마감 서울대·고대 정원 넘어/내일까지 막판 눈치 심할듯 전기대 1백27개 대학 가운데 포항공대 등 4개대학이 4일 맨 먼저 원서접수를 최종 마감한 결과 서울대등 명문대와 입시일이 달라 복수지원이 가능한 포항공대가 11대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고 입시일 9일에 논술고사만을 치르는 동국대도 9.2대1의 높은 지원율을 나타냈다. 또 5일 원서 접수를 마감하는 서울대와 고려대는 인기학과를 비롯한 상당수 학과에 소신지원자들이 몰려 정원을 넘어섰으나 6일까지 접수하는 연세·서강·이화여대 등 대부분 서울소재 대학은 접수창구가 한산해 막판 눈치작전이 예상된다. 포항공대는 1백80명모집에 2천33명이 지원,평균 11.28대1을 기록한 가운데 재료금속 13.3대1,수학 12.7대1,기계 11.8대1 등 10개 전학과가 상당히 높은 지원율을 보였다. 94학년도 입시에서 19.2대1의 높은 지원율을 보였던 동국대는 4천7백32명 정원에 4만3천5백97명이 원서를 내 9.2대1의 경쟁률에 조소학과가 46대1로 최고 경쟁률을 나타냈고 연극연기학과 44대1 등 높은 지원율을 보인 학과가 많았다. 또한 이날 접수를 마감한 서울교대는 개교이래 최고인 15.7대1,인천교대는 9.7대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는 등 교육대학에도 많은 지원자가 몰렸다. 한편 5일 접수를 마감하는 서울대는 4일까지 5천45명 정원에 7천92명이 지원,1.41대1의 전체 경쟁률에 법학과 1.93대1,정치학과 2.11대1,경제학과군 1.34대1,의예과 1.73대1,물리학과 1.07대1,컴퓨터공학과 1.06대1 등 인기학과와 중문과 등 어문계 학과에 지원자들이 몰려 1백8개 모집단위 가운데 93개가 정원을 넘어섰다. 83개 학과에서 4천4백51명을 모집하는 고려대는 원서접수 이틀째인 이날 4천6백10명이 지원,평균 1.04대1의 경쟁률에 47개학과가 미달됐다. 학과별로는 의예과가 3.47대1로 가장 높았고 법학과 1.83대1,경영학과 1.14대1,경제학과 0.79대1,정치외교학과 1.44대1,전자공학과 1.07대1 등이었다. 4일 접수를 시작한 연세대는 건축공학과(1.28대1)와 성악과(1.53대1),주거환경학과(1.08대1) 등 5개 학과만 정원을 넘겼을 뿐 대부분이 정원을 채우지못해 평균 경쟁률 0.55대1로 지원자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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