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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15)삼국통일전쟁의 완결

    660년 여름.소정방이 이끄는 13만명의 병력을 태운 대선단은 산동반도의 성산을 출발하여 황해중부 횡단항로를 은밀하게 건너갔다.그리고 군선 100척을 거느린채 남양반도 외곽의 덕물도에서 대기하던 신라의 태자 김법민(金法敏)의 수군과 만났다.나당연합함대는 남쪽으로 항진,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사비성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그러나 백제의 뒤늦은 방어는 실패로 돌아가고,계백장군의 오천결사대 마저 황산벌을 피로 물들이며 사비성은 700년의 역사를 끌어안은채 무너졌다. 몇달후인 660년 12월 당나라 군사들은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신라는 고구려를 남쪽에서 공격하였다.그리고 이듬해 8월,왜는 대한해협을 건너 백제에 구원군을 보냈다.이것이 바로 동아지중해 국제대전의 완결편인 삼국 통일전쟁이다. 고구려와 통일 중국간 전쟁은 598년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돼 60년 이상 계속되고 있었다.한편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경기만을 빼앗고,황해중부 해상권을 장악하며 국제무대에 진출하는 등 팽창해 나가자 백제와 고구려가 견제하는 형세였다.왜는 바다 건너에서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복잡한 국제환경 속에서 당은 외교적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을 추구하면서,군사적으로는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했고 신라는 위기를 타개할목적으로 당과 연합,백제를 공격했다.결국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참전한국제전쟁으로 확대됐다. 그런데 이 전쟁은 해양질서의 대결이란 측면이 매우 강했다.외교적으로 신라와 당이 해양을 통해 동서동맹을 맺었고,고구려와 백제,왜 등은 비록 느슨한 형태이지만 남북협력 관계를 구축하였다.고구려는 동해를 건너 왜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했으며,660년 정월에는 100여명의 사신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이와같이 동아지중해에는 중국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를 축으로 황해 동해 남해를 연결한 해양십자형 동맹관계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해양은 군사전에서 절대적 역할을 하였다.백제는 당군의 원거리 해양 수송작전과 나당연합군의 금강 상륙작전으로 항복했다.그 후 신속하게 광복운동을 펼쳤으며,왜에 구원군의 파견을 요청하였다.그러나 왜는 개전 초기에는 국제전임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해양능력이 부족해 군대의 파견이 더디었다.드디어 왜왕 사이메이(齊明)는 661년 정월 고구려와 공조제제를 협의하려고 월(越:현재의 쓰루가 지방,고구려 사신들이 도착하던 장소)에 갔으며,2월에는 규슈북부에 임시정청을 설치하고 전쟁을 지휘하다가 급사했다. 사이메이왕의 뒤를 이은 텐치(天智)는 8월 군사와 무기,식량 등을 백제에보냈다.9월에는 백제의 왕자인 풍장(豊璋)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국으로 귀국해 왕이 된다.662년에는 정월부터 군사원조가 이뤄지고,5월에는화살 곡식 등 무기와 함께 군선 170척을 보냈다.이렇게 대한해협을 항해하면서 백제 광복군과 왜는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이어 663년 5월 고구려와 공조체제를 논의하였고,8월 그 유명한 백강(白江,白村江)전투가 벌어졌다.나당연합군은 주유성(周留城,州柔城)을 포위하고,함대 170척은 백강에 진을 쳤다.왜선은 1,000척이 대기하고 백제군은 왜선을수비했다.28일에 벌어진 최후의 해전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 전선 400척이불탔고 2만7,000명이 전사하는 등 완전히 괴멸되었다.드디어 주유성은 항복하고,음력 9월 백제유민들과 왜병은 차가운 북서풍에 배를 띄워 일본열도로탈출했다. 그러나 이미 7세기에는 본격적인 해양전 시대에 돌입한 만큼 일본열도 역시 당의 해상작전권 안에 있었다.당나라는 664년부터 사신과 군사를 파견해 위력시위를 벌이며 전후 보상을 요구하고,내정간섭을 시도했다.때문에 백제유민들을 중심으로 대마도에서부터 규슈지역,혼슈 서남부지역,그리고 키나이지방의 나라에 이르는 광범위한 해안지역에 산성(조선식 산성)과 태재부(太宰府)의 수성(水城),봉수 등 독창적이고 효율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했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공격했는데,이 또한 해양전적인 성격이 강했다.당군은 661년 정월과 4월 수군을 동원했으며,8월에도 소정방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구려군을 패강(浿江)에서 깨뜨리고,평양성을 포위했다.666년 12월에 편성된 이세적군의 군사작전과 편제는 군선의 사용을 분명히 보여준다.667년에는 곽대봉(郭待封)군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수군을 동원하였는데,이때 무기와 식량 등을 운반하던 선박들이 부서져 작전에차질을 빚기도 하였다.이렇게 육전과 함께 해전이 벌어지면서 당은 전쟁물자들을 배로 후방 깊숙히 운반하였다.668년 9월에 평양성은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그러나 압록강 이북의 40여성은 몇년동안 감동적인 전쟁을 계속했으며,안시성은 끝까지 항전을 하다가 671년 7월에 가서야 항복하였다. 고구려는 해양전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해양외교도 활발히 펼쳤다.전쟁도중에도 백왜연합군과 공동작전을 시도하였고,동해를 건너 왜국에 사신을 보내면서 교섭을 하였다.그러나 이미 동아지중해에는 대규모의 군선을 이용한원거리이동 상륙작전이 실시되고,해양력(SEA-POWER)이 나라운명을 결정하는시대였다.고구려는 높은 수준의 해양력을 바탕으로 한 당나라의 평양 직접공략과 후방을 이용한 나당군의 협공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80여년간에 걸쳐 벌어진 엄청난 규모의 동아지중해 국제대전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신라는 자신이 끌어들인 당군과 전투를 벌였고,670년 일본열도에선백제와고구려유민이 함께 한 ‘일본’이란 국가가 탄생한다.이로써 우리민족은 고구려가 대륙과 해양을 장악하면서 수백여년동안 누려오던 동아지중해의 중핵 조정역할을 상실한 채 주변부국가로 만족하면서 점점 해양을 멀리하게 되었다./윤명철 동국대 겸임교수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13)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598년 2월 영양왕이 이끄는 1만명의 고구려와 말갈 혼성부대가 요서지방의중심지였던 영주(營州)를 공격한다.이어 수나라의 문제(文帝)가 이끄는 30만 대군이 고구려를 수륙양면으로 침공한다.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나라를 바꾸어가며 거의 쉬지 않고 진행되다가 거의 80년만인 676년에 이르러 대단원의막을 내린다.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었던 이 전쟁에는 모든 종족과 국가들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한 국제대전이었다.전쟁의 목적도 영토확장이나 단순한 힘의 과시가 아니라 이 지역 양대질서의 대결이었고,문명의 충돌장이었다.특히 숱한 해양전이 벌어졌으며,해양질서가 본격적으로 작용한 동아지중해의 국제대전이었다. 3단계로 이루어진 이 국제대전의 서막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었다.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대륙과 한반도 중부이북,동해와 황해의 중부해상권을 장악하였다.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분단된 중국을 대상으로 실리추구를 하는 세련된 등거리외교를 추진하였고,백제 신라 가야 왜 말갈 등 주변의 국가들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등 동아지중해의 중핵조정역할을충실히 수행하였다. 또 경제적으로 요동을 중심으로 만주의 동부지역과 흥안령 산맥 등 북부지역,요서지역 등을 이어주면서 북방교역망을 형성하였고,해양을 통해서 일본열도,양자강유역의 남조정권과 교역을 하는 등 해상교역망을 운영하였으며북방과 남방을 이어주는 해상네트워크를 이용해 중계무역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가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면서 세계질서는 뿌리채 변화하기 시작했다.수나라는 운하를 파고,남방교역을 활발하게 추진해 국가의 경제를 튼튼히 하고,정치적으로도 개혁을 추진하였다.그러면서 동아시아 세계의 종주권을 회복하고,동남아,동중국해,황해,대한해협을 이어주는 등 교역의 물류체계를 장악하여 강국이 되고자 하였다. 두 강대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가 없게 되었고,서서히 전쟁의 기운이 싹터가기 시작했다.전쟁을 일으키려는 당사자는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수나라였다.강력한 국력을 지닌 고구려는 사절을 파견하는 등 외교적 제스처를 취하는 한편,내부적으로는 전쟁준비를 하였다. 598년 2월 영양왕은 친히 고구려와 말갈 혼성군을 거느리고 요하를 넘어 공격을 개시하였다.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문제는 598년 6월 30만의 수륙군을 발진시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수나라의 육군은 요하를 돌파하지 못한채퇴각하였다.주라후(周羅侯)가 이끄는 6,000명의 수군은 육군과 합동작전을목표로 산동반도 동래(東萊:현재의 래주)를 출발,요동반도를 우회하여 평양성으로 향하였다.그러나 중간에 풍랑을 만나 대부분의 전선들이 침몰하였다고 한다.그러나 그보다 주라후의 수군은 요동반도일대에 구축된 고구려의 해양방어체제에 걸려 풍비박산이 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 후 수양제(煬帝)는 대 고구려전을 더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먼저 남방의 임읍(林邑:현재의 베트남 동남부) 유구(琉球:대만)등을 정벌하고,돌궐을분할시켰으며,고창국 등 서역국가들을 지배하에 넣었다.그러는 한편 고구려에 적대적이던 백제와 신라를 끌어들이고 왜와도 외교관계를 맺는 등 고구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국내에서는 대운하를 완성해 남북을 연결시킴으로써 군수물자와 노동력의 징발을 용이하게 했고,해양전을 위한 엄청난 규모의 조선공사를 벌였다. 612년 드디어 수양제가 이끄는 세계전 사상 유례없는 113만3,800명의 대군이 북경 근처의 탁군( 郡)을 출발했다.그런데 당시 수양제는 해양전에 많은비중을 할애하였다.원정군을 좌우 총 24군 편제로 구성하였는데,그 가운데 11개 군이 수로군 편제이다.수군의 작전범위를 보면 압록강하구,대동강 하구는 물론,심지어는 한강하구인 황해중부 전체를 작전범위 속에 넣고 있다.이로서 수군은 이제 군량미의 보급뿐 아니라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장거리 이동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배후를 치는 독립작전까지도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수양제는 적함(赤艦) 루선(樓船)등 수만척의 배들을 건조하였다. 특히 주력전선인 오아(五牙)는 루(樓:다락)가 5층이고,군사 800명을 태울 수가 있었다고 한다.래호아(來護兒)가 이끄는 이러한 군선들의 규모는 길이가수백리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다.얼마나 해양전을 중시하였는가를 알수 있다. 수의 친정군은 요하전선의핵심 거점인 요동성(현재의 요양시)을 공격하였다.엄청난 군대와 신무기 등을 동원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으나 수양제는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채 퇴각하였다.한편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끄는 30만명의 별동대는 을지문덕의 고구려군에게 살수(薩水:압록강설과 청천강 설이 있다.)에서 대패,전멸했다.래호아가 이끄는 수군은 황해를 건너는데 성공하고,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대담하게 수군을 이용해 후방 깊숙이에 있는 평양성으로 직공작전을 감행한 것이다.하지만 평양성 60리밖에서 고구려군에게 궤멸당하였다.결국 고구려와 수나라간에 벌어진 격돌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났다. 다음해인 613년과 614년에도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해왔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618년에는 당나라에 멸망하고 말았다.동아지중해의 종주권과 교역권을둘러싸고 벌어진 수나라와 고구려의 1차전쟁에서 고구려가 대승을 거두었으며 국제적인 위상이 더욱 강화되었다.만약 고구려가 이 전쟁에서 졌다면 우리민족의 생존권은 이때 상실되었을 수도 있다. 이 전쟁은 해양질서가정치 외교적으로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확인시켜 주었고,이미 대규모의 선박이 동원되고,상륙작전이 수행되는 등 본격적인 해양전쟁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알려준다.이와같은 양상은 수나라를 이어받은 당과고구려의 전쟁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윤명철 동국대겸임교수
  • 다시 불붙은 ‘화랑세기’ 眞僞논쟁

    지난 89년 부산에서 필사본이 발견된 이래 사학계에서 줄기찬 진위논쟁을벌여온 ‘화랑세기(花郞世紀)’가 완역,출간됐다.서강대 이종욱 교수는 5일한문 원문에 한글 번역본을 붙여 ‘화랑세기-신라인의 신라이야기’ (소나무펴냄 1만3,000원)를 출간,필사본 ‘화랑세기’를 둘러싼 진위논쟁에 새로운도전장을 던졌다.만약 이 교수의 주장대로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짜일 경우 신라사는 물론 화랑·고대 한일관계사 등을 새로 써야할 상황이어서 국내사학계에 일대 소용돌이가 예상된다. ‘화랑세기’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학자 김대문이 680년경 편찬한 것으로 화랑들의 전기(傳記)다.이 책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후대 문헌에서 인용되고 있지만 조선초에 멸실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진위논쟁이 시작된 것은 지난 89년 부산에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베껴 쓴 것으로 추정되는 32쪽짜리 필사본 일부가 발견된데 이어 95년 노태돈 서울대교수가 보다 완전한 모습의 162쪽짜리의 또 다른 필사본을 공개하면서 시작됐다. 이 두 필사본들은모두 일제당시 일본 왕실도서관에 근무하던 조선인 박창화(65년 사망)가 필사한 것으로 많은 내용은 대동소이하다.그동한 사학계에서는 이 필사본들을 두고 필사자인 박창화씨가 소설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만든 허구라는 조작설과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 맞다는 진본설로 팽팽히 맞서왔다. 이 필사본을 두고 가짜라고 주장하는 측은 우선 필사본의 내용중 화랑들과관련한 내용이 종래의 학설과 너무 딴판이라는 것.그동안 화랑은 ‘세속5계’로 상징되듯 충효를 바탕으로 한 청년 무사집단으로 인식돼 왔다.그러나필사본에 등장하는 화랑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관(神官)의 보조역할자로나와 있다. 특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들이 난잡한 섹스집단 정도로 묘사된점도 의외다. 이에 대해 완역자 이 교수는 “신라사를 유교적 도덕관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그런 식이라면 ‘화랑세기’와 유사한 내용이 포함된 ‘고려사’에 대해서도 진위논쟁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반박했다.이 교수는 특히 필사본에 등장하는 남여 400여 명의 계보가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것으로봐 원본을 보고 베낀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사본‘화랑세기’는특히 가야 멸망시기 등을 기존 사서(史書)보다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가야가 562년에 멸망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561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신라 진흥왕이 가야를 멸망시킨 후 세운창녕순수비는 561년에 건립됐다고 비문에 적혀 있다.이 책은 또 김유신이 김춘추와 몰래 정을 통해 아이를 밴 문희를 불태워 죽이려 할 때 문희를 구해준 사람이 ‘선덕여왕’이라고 기록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는 달리 ‘선덕공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뒷날 문무대왕이 된 문희의 아들은 선덕여왕이왕위에 오른 것보다 6년전에 태어났으므로 ‘선덕공주’라는 표현이 맞다.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논쟁에서 비교적 중립적 견해를 보여온 이도학한양대 강사는 “신라시대의 역사를 후대의 사서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전제하고 “기존상식이나 선입관에 위배된다고 해서 모두 가짜라고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본 가능성 쪽으로 견해를 폈다.현재 학계에서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본론보다는 가짜론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번 논쟁으로 어느 한 쪽은 치명타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7)해양의 나라 백제

    해양활동이 뛰어난 국가인 백제는 “100가(家)가 바다를 건너와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百家濟海)”는 기록도 있다.주몽의 아들인 이 집단은 압록강하구를 출발,연근해 항로를 이용하여 남하한 다음 경기만에 정착한 것이다. 형인 비류는 인천인 미추홀(彌鄒忽)에 도읍을 정했고,동생 온조는 서울에 정착하였다. 경기만 일대는 남·북한강이 서로 만나고 임진강 예성강 등이 합쳐 서해로흘러들어가는 곳이다.일본열도와 제주도에서 북상한 항로와 요동반도에서 압록강 하구를 거쳐 남하하는 연근해 항로가 마주치는 곳이자,중국의 발해만·산동에서 황해를 횡단한 항로의 종착점이다.이른바 황해교통의 십자로였다. 경기만 입구인 한강하류는 해항(海港)도시가 건설될 만한 곳이다.역사의 초기단계에는 항구나 해변 근처에 도시가 건설되지만,점차 바다와 연결되는 내륙안쪽으로 중심이 이동한다.해양폴리스로 알려진 아테네도 사실은 피레우스라는 외항을 가진 내륙 도시이다. 백제는 해양으로 뻗어나갈 천혜의 조건을 갖춘 도시국가로서 첫 출발을 하였다.고이왕은 236년에 서해 대도인 강화도에서 사슴사냥 등을 하였다.한강하구와 경기만의 핵심을 지배하였고,해양기지화하였음을 선언한 것이다.그리고 고구려가 위(魏)낙랑(樂浪)대방(帶方)등 중국세력과 싸우고 있을 때,해로를 이용해서 낙랑을 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았다.이때 이미 백제는 전 시대부터 활용되던 황해횡단 항로를 자신의 것으로 재정비하였다. 이러한 해양활동은 4세기에 이르러 한국고대사 최고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인 ‘백제 요서진출설’의 배경이 되었다. 중국의 정사인 송서(宋書,488년 간행)에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다.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점령하니,백제또한 요서를 침략하여 점령하였다.백제가 다스린 지역을 진평군(晋平郡)진평현(晋平縣)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남제서(南濟書,6세기 전반)는 더 구체적으로 “요서·진평 양군을 점거해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고 했으며,통전(通典,801년)은 그곳이 “유성과 북평의 사이(今柳城北平之間)”라고 위치까지 밝혔다.대체로 백제가 4세기경부터 요서지방을 수백년동안 다스렸다는 내용이다.그런데 정작 삼국사기와 중국의 북조계통 사서에는 기록되지않았다.때문에 조선의 실학자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실 여부를 놓고 다양한 논쟁이 벌어졌다.정말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령하고 오랫동안 다스렸을까?먼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무렵 백제 근초고왕은 북진정책을 취해 평양성을 공격,남진해오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이 결과로 경기만을 완전하게 내해(內海)화하고,그배후인 황해도 지방을 장악하였다.계속해서 전라도 해안까지 복속시키므로써 마한세력의 해양력을 흡수한 뒤 제주도와 일본열도까지 진출하였다.이렇게해서 백제는 일본열도에서 제주도,한반도 남부를 거쳐 북부까지 항로로 이어지는 물류체계를 장악하였으며,외교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면서 중국의 동진(東晋)등 국제사회와 교섭하였다.황해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중심부에자리한 것이다. 한편 대륙은 5호16국 시대로서 고구려와 북방종족,한족이 뒤엉켜 국제질서를 전면적으로 재편하고 있었다.고구려와 연(燕)나라,후조(後趙),동진,백제는유일한 네트워크인 해양력을 총동원하여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것이다.물론 사서의 기록처럼 요동을차지한 고구려를 견제하고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는 요서를 공략하는 일이절대적으로 필요하다.더구나 해양을 이용한 배후공격은 전략적으로 매우 우수하다.하지만 지리적으로 본국과 거리가 먼데,과연 그 당시 바다를 통해서많은 병력을 운송하고,주둔시키는 일이 가능했겠느냐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그런데 동아지중해에서는 그 이전부터도 근해항해나 황해를 횡단항해를 하면서 교역과 외교교섭을 하고,심지어는 군사행동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위만조선을 공격할 때 한무제 군에는 당시 최대의 능력을 보유한 해군이 전투에 참여하였다.후한의 광무제는 바다를 건너 낙랑을 평정하였다(44년).오나라와 위나라는 황해 북부에서 해전을 벌였으며,위가 일본열도로 가는 중간거점인 대방까지의 항로는 황해 중부를 횡단하는 항로였다.기록에 남아있는이 시기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매우 뛰어났다.그런데 해양문화의 특성으로 보아 경기만과 산동반도및 발해만의 해양 능력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가 황해를 횡단하고,발해만에 진입하는 일은 별로 어려운 것이아니다.이미 완전히 장악한 경기만(강화도 지역)을 출발하여 먼바다로 나가다가 산동반도와의 중간 못미쳐서 북상하면서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의묘도(廟島)열도 사이로 접어들었을 것이다.그러나 이 곳은 섬들이 점점이 이어진 지역이라 수로가 협소하고,물길이 복잡해서 항해에 어려움이 많다.더구나 장도(長島)대흠도(大欽島)등 큰 섬에 근거한 해상호족들의 저항도 만만찮았을 것이다.이러한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백제가 요서지방에 식민정권을 장기간 설치하였다면,백제의 국력은 물론 해양력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대단하였을 것이다. 요서진출설은 사료에 기록이 있고,개연성이 충분하지만 아직 해결해야될 문제가 적지 않다.그런데 해양질서는 지리상의 거리나 국력,역학관계 등이 육지질서와는 다른 특성이 있다.지중해의 패권을 수백년동안장악했고,로마와80여년 동안 포에니전쟁을 벌이다가 멸망한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 북부에 건설한 해양식민도시였을 뿐이다. 尹明喆 동국대 겸임교수
  • 건국대 신복룡교수 ‘한말 외국인 기록’ 선집 19권 출간

    한 정치학자가 30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근대 이후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록을 집대성,출간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주인공은 건국대 정외과신복룡(申福龍·57)교수.신교수는 집문당에서 ‘한말 외국인 기록’ 선집(전19권)을 출간한다.14권은 이미 출간됐고,나머지는 금년 여름방학 무렵에 출간될 예정이다.‘선집’에는 기록물 몇 종을 묶어서 한 권으로 엮은 것도 더러 있어 ‘선집’에 포함된 기록물 종 수는 모두 22종. 이번에 신교수가 출간한 ‘선집’은 서세동점이 시작된 18세기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우리나라를 찾아왔던 서구의 여행자·선교사·의사·탐험가·외교관·화가 등이 남긴 기록 가운데서 학술적 가치가 있는 22종을 골라 신교수가 번역·주석하여 출간한 것이다.신교수는 “이 기록들은 당시의 역사를현장에서 목격한 인물들의 1차사료라는데 의의가 있다”며 “당시의 역사·민속·종교·정치·외교 등 사회제도와 음악·미술·의학,심지어는 동물상이나 식물상을 이해하는데도 귀중한 사료”라고 설명했다. 신 교수가 외국인들의한국방문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60년대말 건국대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근대정치사를 공부하면서 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을번역하면서 부터다.73년 첫 작품으로 ‘대한제국멸망사’(H.B.헐버트)를 출간한 이후 신 교수는 꾸준히 이 일에 매달려 왔다.신교수는 그간 작업의 ‘고통’ 가운데 하나는 “촌철살인처럼 묻어나오는 필자들의 백색우월주의와그들의 눈에 비친 비하된 조선인의 모습”이었다며 그러나 “그들이 역사현장의 증인이었고 우리가 보지못한 우리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다는점에서 참고 작업을 마쳤다”고 털어놨다. 신교수는 ‘선집’ 가운데서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매켄지의 ‘대한제국의 비극’,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등 3권을 학술적 자료가치가 우수한 기록으로 꼽았다.선교사 헐버트는 고종의 요청으로 내한,육영공원의 교사를 지냈으며 헤이그밀사사건 때 밀사들과 헤이그까지 동행하기도 했던인물.1949년 이승만 박사의 초청으로 내한했다가 방한 1주일만에 별세,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뤄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영국 ‘데일리 메일’의 극동특파원으로 한국을 방문,러일전쟁에 종군했던 매켄지는 뒤이어 두 차례나 방한,의병활동과 3·1의거를 취재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대한제국의비극’‘한국의 독립운동’을 출간하였다.미국인 그리피스는 자연과학도로고조선 이후 ‘을사조약’까지의 통사를 기록했다. 이밖에도 신교수는 미국외교관 출신으로 고종의 정치고문을 지낸 샌즈의‘조선비망록’,화가출신의 새비지-랜도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또스페인의 저명한 사냥꾼 출신 베리만의 ‘한국의 야생동물’ 등을 들었다. 이 가운데 베리만은 1935년 방한,2년간에 걸쳐 조류만도 380종 이상을 포획해 갔는데 이는 당시 조류학자이던 창경원장이 파악한 350종 보다도 많은 종수다.베리만이 포획해간 조선산 야생동물들은 현재 스웨덴 자연사박물관에서보관중이다.신교수는 “베리만이 조선 전국의 산야를 다니며 시라소니·매·멧돼지·부엉이·날다람쥐·영양 등을 직접 포획하면서 기록한 그의 저서는 당시 조선의 식생·동물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것”이라며 이번에 출간한 ‘선집’이 근대제도사·생활사·예술사 등 관련학계에서 적극 활용되기를 기대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데스크 시각] 아직도 출신지 타령인가

    ‘조각(組閣) 수준’의 개각이라는 국민의 정부 제2기 내각 인사가 화제다. 누구는 어느 지역,어느 대학 출신인지도 관심의 초점인 듯하다. 장관급 개각 발표가 있던 24일.기자가 속한 정치팀은 정부의 각료 명단을정리하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김태정(金泰政)신임 법무부장관 등 일부 각료의 출신지를 어떻게 표기하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김 신임장관은 초등학교는 부산에서 다녔고 중·고등학교는 여수와 광주에서 다녔는데 부산 출신으로 할 것이냐 호남 출신으로 할 것이냐 였다.논란 끝에 주민등록상 본적지인 부산 출신으로 했다.정덕구(鄭德龜)신임 산자부장관도 마찬가지였다.출생지는 충남 당진이고 본적은 경기 시흥이었다.본적지대로 시흥으로 정리했다. 많은 사람들이 호적법상 본적과 실제 고향이 다르다.충남 예산 출신으로 알려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만 해도 예산은 부친의 고향일 뿐 이북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는 광주에서 다녔다.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학교를 다녔는지가 그리 중요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돼왔다.인사가 있을 땐 으레 ‘지역 안배’가 거론됐고 매스컴은 흥미롭게 지역분포를 소개해 왔다. 역사학자들은 조선(朝鮮)의 멸망원인을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다.이중 관료집단의 인재 등용구조의 취약점을 비중 있게 지적한다. 특히 문재(文才)를 가진 인물을 중용하는 특성을 강조한다.시(詩)적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중용되는 조선조의 과거제도가 관료집단을 구조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균형감각을 배제한 과거제도의 허점때문이었다는설명이다. 의학계에 의하면 사람의 뇌는 좌·우로 나뉘어 있어서 좌뇌는 사물을 쪼개어 분석하고 우뇌는 전체를 관조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좌뇌형 혹은 우뇌형으로 태어난다고 한다.법률가 과학자등 이성적이고 분석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좌뇌형,예술 문학 등 감성적이고직관이 발달한 사람은 우뇌형으로 분류된다. 의학계에서는 이 원리에 따라 증권분석사 회계사 등 수리·분석계통의 직업인들은 음악감상 등 우뇌활동을 보완함으로써,음악 소설 등 감성적 직업을가진사람들은 바둑 등 좌뇌활동을 촉진하는 취미생활로 두통 등 심신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그리고 이 두 개의 뇌는 연결된 신경망을통해 상호 보완,종합한다는 것이다.조선조의 경우 좌우의 균형이 필요한 상황에서 우뇌형 위주의 조직이 강조돼 조직의 활력을 잃었다는 주장이다. 요즈음의 국가·사회도 마찬가지일 듯싶다.좌뇌형의 지도자는 우뇌형의 참모를,우뇌형의 지도자는 좌뇌형의 참모를 거느릴 때 모든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감성’의 리더가 ‘지성’의 참모를 거느리면 매우 비능률적일 것 같지만 실제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논리다. 머지않아 내각은 물론 기업 인사까지 좌·우뇌형 조화가 통용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언제까지 새 각료가 발표되면 출신지역이나 따지고 있을 것인가. 金在晟 정치팀장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2)-東亞地中海 1차대전

    기원전 108년 최초로 한족(漢族)이 세운 한나라 무제가 동방의 한 국가를공격했다.1년여동안 공방전을 벌이다가,결국 그 나라는 내부분열 때문에 멸망하였다.한족과의 대결에서 위만조선이 패배한 것이다.우리들은 이 전쟁에대해 몇가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한나라는 한반도 안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수백년동안 식민지를 경영한 것으로 알고 있다.그러나 그렇지가 않다(이 전쟁은 육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병선이 동원된 수륙 양면작전으로 이루어 졌다). 또 중국인들의 표현대로 천자가 정벌한 것이 아니라 양대 세력이 육군 해군을 동원,황해의 패권을 둘러싸고 격돌할 수밖에 없었던 국제대전이었다.위만조선이 세워지기 이전의 고조선은 해양활동이 활발했다.고조선의 영토는 대체로 요동반도에서 서한만을 거쳐 남으로 내려와 대동강유역까지 이르고 있으며,자연스럽게 황해북부와 발해만의 일부를 활동영역으로 했다.그 지역은이미 6,000∼7,000여년전의 선박유물이 발견되고,5,000년전부터 해운업이 발달했다. ‘관자(管子)’란 책에 의하면 기원전 7세기경 고조선은 산동반도에 있었던 제(齊)나라와 교류했다.물론 해양력을 바탕으로 했다.그들은 한반도 남부와도 교류를 했을 것이다.고조선 영토에는 큰 규모의 고인돌도 많고,대련의 강상(崗上) 루상(樓上)무덤과 같은 돌무덤도 있다.필자가 조사한 강상무덤은기원전 1,000년 전반기 대표적 무덤인데 바로 바닷가 근처에 있다.서한만에서 연안항해를 해서 요동만을 거쳐 산동반도로 남진하거나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교통로를 장악하는 최고의 전략적인 거점이다.이곳에 묻힌 고조선사람은 해상호족임이 틀림없다. 춘추전국시대 양자강유역에 있던 월나라사람들은 산동성까지 올라가 전선 300여척을 배치하고 제와 충돌하며 황해의 제해권을 노린다.진나라 등은 멀리 바다로 동남아까지 무역활동을 하였다.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려고 동남동녀 3,000인과 함께 동방으로 파견한 서복(徐福:徐市)은 대규모로 무역을 하거나 식민지개척을 목표로 한 일종의 국가해양사업이었다. 그런데 한나라와 위만조선이 각각 새로 건국하자 두 나라 사이에는 황해북부의 해양권을 둘러싸고 격돌하게 되었다.한나라는 동남아지역,인도지역과교역할 목적으로 기원전 112년에 양복(楊僕)에게 10만의 수군을 주어 현재의 광동,광서,베트남 북부지역인 남월을 정벌하고,9군을 설치하는데 이때의 수군 장군인 양복이 후에 위만조선을 공격한다.‘사기(史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후한서(後漢書)’등에 의하면 기원전 2세기엔 동남아,인도양 동부의 나라들과 왕래했으며,항해노정까지 기록돼 있다. 한나라는 더욱 해상활동에 박차를 가하여 간접적이지만 양자강과 산동,한반도 북부 해안을 중간센터로 월남북부에서 일본열도까지 연결되는 하나의 교역권이 형성되었다.한반도 남부의 소국들은 일본열도의 소국들과 활발하게교역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아지중해권에 포진한 한나라와 한반도,일본열도가 교섭을 하기 위해서는 연안항해를 하건,근해항해를 하건 반드시 위만조선의 해역권을 통과할수 밖에 없었다.때문에 한나라의 무제는 요동과 만주,한반도 북부를 포함하여 육지와 해상에서 보다 확실하게 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위만조선에 회유와 압박을 가했다. 건국초기에는 한과 정치적 타협을 하며 소극적이었던 위만조선은 점차 강해지자 이러한 권리를 빼앗길 수가 없었다.결국 두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난다.전쟁이 시작되자 한나라는 수륙양면작전을 구사했다.누선을 거느린 양복은 제나라의 수군을 거느리고 산동으로부터 발해를 건너갔고,육군은 5만여명이 요동에 출격했다.이때 수전이 벌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사서는 해전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그러나 왕검성을 공격한 것은 수군이다.왕검성은고대 수도가 늘 그렇듯이 바닷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해항도시(海港都市)였고,1차 접전은 바다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중국의 기록에는 수군은 여러번 싸움에 패하고 군사를 잃었으며,성을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고 되어있다.그 후 전쟁은 수륙양면으로 1년여를 끌다 결국 위만조선의 내분으로 막을 내렸다.이 전쟁에 동원된 한의 군선은 세계최고의 수준답게 철을 이용하였으며,배 위에는 몇층의 루실(樓室)이있는 큰 배를 비롯하여 공격선 정찰선 등 각종전함이었다.이러한 최고의 해양능력을 전쟁에 동원한 한과 장기간 항전했던 위만조선의 국력과 해양활동능력은 당연히 뛰어났을 것이다. 1년에 걸쳐 황해북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질서의 대결,한민족과 중국의 한족 세력간에 벌어진 군사적 대결은 동아지중해전적 성격을 띠는 최초의 국제전이었다.이후 황해는 한나라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내해적인 성격이 강해졌다.반면 각국들은 활발하게 교섭을 하여 황해문화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황금의 바다인 황해는 고구려 백제가 등장할 때까지 수백년동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尹明喆 동국대 겸임교수
  • [김삼웅칼럼] 5·18 진혼곡

    소돔과 고모라시는 의인 열사람이 없어서 멸망했다지만 까레시는 여섯명의의인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 현대사의 군사정권시대에 광주민주항쟁이 없었다면,그들 의인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 현대사는 정신적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되었을지 모른다. 마치 사육신의 의혈(義血)이 조선왕조의 건강성을 유지해온 역설과 비유될수 있겠다. 군사정권시대에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다.그들은 대부분이 일방적인 사법살인·암살·테러·의문사·고문치사의 희생자들이다.그러나 광주항쟁은 폭력집단에 맞서 싸우다가 희생된 차이가 있다. 오늘(18일)은 광주민주항쟁 19주년이다.학살자와 부상자·‘시민군’이 살아 있는,그래서 어느 측면 현재진행형의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이를지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동시대인들에게 194명의 사망자와 1,059명의 부상자를 낸광주학살은 불의와 폭력이 판치는 반이성의 시대로 각인된다. 고려 100년 동안 11명의 무신이‘칼로 칼을 갈고,피로 피를 씻는’폭력의논리가 지배한 이래 8백년 후 이 땅에서는 또다른 무인시대가 열리면서 반이성의 광란이 칼춤을 추었다. 고려 무신들은“문관(文冠)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남김없이 죽이라”면서 학살을 일삼았고,나중에는 어용문인들만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현대의 무인정권도 비슷했다.무자비한 학살과 양심세력을 묶어놓고 그들을 추종한 반민세력과 어용문사들이 한시대를 주름잡았다. 아카시아꽃 향기로운 80년 5월,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고 꽃 한송이 꺾지 못하는 여린 학생과 시민들이, 대검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찍어 죽이는학살자들을 상대로 무장항쟁에 나선 것은 나약한 시대의 양심의 불꽃이고 저항의 횃불이었다. 돌이켜보면 동학의 피울음,의병의 한맺힘,독립군의 애국혼,4·19의 민권의식이 합쳐서 마침내 광주민주항쟁의 불꽃이고 횃불이 되었던 것이다.우리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민족혼이요,당당한 저항의 맥박이었다. “내 손에 숨진 그들은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었습니다.어떤 벌이라도 달게받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그동안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비밀경찰 책임자로킬링필드 대학살의 실무총장 두크(본명 카잉케프예프)가 최근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한 말이다.그는 20년 만에 정체를 드러냈다.기독교인으로 변신한 이 학살자는‘죄값을 받겠다’고 뒤늦게나마 참회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스페인내전의 장본인 프랑코는 독재와 학살을 참회하면서 내전 당시 전몰자의 계곡에서 사망한 수십만명 장병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대사원을 세우고,숨지기 전에 그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지금‘전몰자의 계곡’은 용서와 화해의 성지가 되었다. 얼마 전 5·18 관련 단체 회원 250여명이 당시 진압부대를 차례로 방문하여 용서와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부상자회와 구속자회·유족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가해자들을 용서하고 화해의 손길을 편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광주항쟁의 민주와 평화정신의 맥락을 거듭 살피게 된다.가해자들이 여전히 5·18을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폭동으로 규정하고‘폭동 진압’ 자긍심을 느낀다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용서와 화해의 손길은 바로 까레의 의인정신과 연결된다 할 것이다. 5·18 당시 현장에 달려간 뉴욕타임스 기자는“광주시민들에게서 느낀 첫인상은 폭동(Violence)이 아니라 봉기(Insurrection)였다.나의 판단은 광주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보면서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다”고 썼다.민중봉기·민주항쟁을 폭동으로 호도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자들은 역사에대한 바른 안목을 갖고 뒤늦게나마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캄보디아의 두크나 스페인의 프랑코보다 못한 학살자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지역색 조장이‘오역죄(五逆罪)’라면 양민학살과 참회를 모르는 죄는 무슨죄에 해당될까.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박정희 전대통령의 기념관건립지원을 통해 역사적 용서와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이 기회에 5공세력도 피해자들이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펼 때 진정으로 참회하면서 지역화합과 IMF극복에 동참해야 한다.그리하여 20세기의 불행했던업보를 모두 풀고 화합의 새 세기를 맞아야 한다.광주의 영령들도 그러길 바랄 것이다.
  • [외언내언] 북한 군사우위정책 /장청수 논설위원

    4월25일은 북한 인민군 창건 67주년 기념일이다.북한은 48년 2월8일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당초 이날을 창군일로 기념해 오다가 지난 78년부터 김일성(金日成)이 만주에서 조직했다는 반일인민유격대 결성일인 32년 4월25일로 바꿨다.알려진대로 북한 인민군은 6·25동족상잔을 일으킨 주력군으로 또는 북한 사회주의 존립의 보루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같은 북한군의 위상과 역할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金正日)체제 출범이후에도 지속돼 무소불위를 자랑하고 있다.김정일체제 출범 이후 ‘군대는 곧 인민이고 국가이며 당’이라고 역설함으로써 기존의 당우위에서 군사우위정책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체제고수를 위한 군대의 중요성을 거듭강조하는 등 북한군의 제고된 위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북의 이같은 군사우위정책은 올해 신년공동사설에서도 명백히 나타나 있으며 김일성생일인 이른바 태양절을 기해 군장성 79명을 대거 승진시킨 것은군사우위성을 잘 보여준 대목이다.북한의 이같은 군사중시 정책은 김정일이군에대한 지속적 관심과 배려를 표명함으로써 경제난과 식량난으로 위축된군의 사기진작을 통해 절대적 충성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군부에 대한 카리스마가 약한 김정일로서는 군부를 장악하지 못하면 체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선택한 통치 전략으로 이해된다. 김정일체제 출범과 맞물린 북의 군사우위정책은 과다한 군사유지비로 북한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북한 군부가 권력의 핵심을 장악할 경우 한반도 안보에 위기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로 인식된다.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도 군사우위정책은 포기돼야 한다.총칼로 유지되는 정권은 총칼에 의해 멸망한다는 것은 세계사적 교훈이다.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도 결국 비극적 종말을 고할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며 이는역사의 필연이다.현 시점에서 북한당국이 선택해야 할 중요한 과제는 무리한 군사우위정책을 포기하고 남북당국간 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보장을 제도화하는 일이다.그리고 과다한 군사비 지출과 군사적 모험주의를 중단하고남북관계 개선과 교류협력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그 길이 바로 북한의 체제말기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승정원일기 국보 지정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우리 기록문화의 꽃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사진)가 국보로 지정됐다. 문화관광부는 9일 국보지정심의분과위원회(위원장 고병익)의 심의를 거쳐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승정원일기 3,243책을 국보 제303호로 지정했다고 밝혔다.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지금의 대통령 비서설)에서 매일 취급한 제반문서와 사건 등 국가 기밀을 기록한 것이다.임진왜란 이괄의 난으로 이전의 일기는 모두 손실됐고,인조 원년 계해년(1623년) 3월12일부터 순종 융희 4년(1910) 8월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날까지 288년간의 분량만 남아있다.엄밀히 말해 지금 남아있는 ‘승정원일기’라는 이름의 기록은 1623년부터 1894년 갑오경장때까지의 3,045책만 해당되고이때 승정원이란 기구가 폐지됐기 때문에 이후에는 승선원일기나 궁내부일기,비서감일기,규장각일기(이상 198책)라는 이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저자와의 대화]’한국열국사 연구’출간 윤내현교수

    고조선 분열 이후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정립되기전까지 한민족은 고대국가 틀을 갖춘 열국(列國)으로 나뉘어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지배했다는학설이 나왔다.이는 이 시기에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지 못한 부족사회들이난립하고 있었다는 기존의 학설을 깨는 것으로,학계의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단국대 사학과 윤내현교수(尹乃鉉·60)가 최근 내놓은 ‘한국열국사연구’(지식산업사·3만원)는 이러한 사실을 방대한 중국과 일본,한국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고조선 분열 이후 부터 삼국이 정립되기까지(기원전 1∼4세기)의 역사이다.이 연구는 지난 82년부터 시작한 한국고대사 연구의 완결판인 셈이다. 윤교수는 80년대 이후 ‘한국고대사신론’‘고조선사’등을 저술,한국 고대사에 대한 기존 학계의 통설을 깨왔다.윤교수로부터 기존 고대사 연구의 문제점과 새로운 연구의 의미,기존 학계와의 논란가능성 등을 들어본다. ▒열국시대의 성격과 중요성은 다른 학자들은 이 시기(기원전 1세기∼4세기)를 ‘원(原)삼국시대’로 보고 있다.이는 이 때 있었던 나라들이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지 못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하지만 이미 국가의 틀을 갖춘 고조선의 뒤를 이은 나라들이 국가 이전의 사회로 후퇴했다는 것은 논리가 안맞는다.고구려 백제 신라 동부여 읍루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국 대방국 삼한가야 등 열국은 왕이 통치하는 고대국가 틀을 갖추고 있었다.또 이들은 중국 요서지역까지 포함한 고조선 고토(古土)를 완전히 수복했고,백제는 중국 동부 해안과 왜열도 일부지역에 진출,지배권을 행사하기도 했다.바로 열국시대때 한민족은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에 위력을 떨친 것이다. ▒‘삼국시대’란 용어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현재의 한국사 개설서들은 고구려 신라 백제와 동시대에 가야가 있었음에도 이를 외면한채 ‘삼국시대’라고 부른다.정확히 말해 ‘사국시대’라야 맞고 그 이전은 ‘열국시대’라야 맞는다.가야를 뺀 ‘삼국시대’는 큰 오류다.이는 일본 학계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일본인들은 4세기 중기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해 그 지역을지배했다고 주장한다.따라서 가야를 일본사에 넣어야 한다며 이 시기를 삼국시대로 부르고 있다.하지만 임나일본부는 한반도가 아닌 일본 망산현 지역에 설치돼 있었다. ▒서한(西漢)의 한민족 지배를 부정하는가 한국 고대사 왜곡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대목이다.서한이 한사군을 한반도와 그 이북에 설치해 한민족을 수백년간 지배했다고 하지만 한사군은 위만조선이 멸망한 요서지역에 설치됐을 뿐이다. ▒자신의 연구가 객관적이라는 근거는 모든 역사는 사료가 바탕이 돼야 한다.나는 본래 중국 고대사가 전공이다.따라서 중국 사료들을 두루 섭렵할 수있었다.한민족 관련 기록이 있는 ‘후한서’‘삼국지’‘진서’‘송서’‘남제서’ 등 방대한 중국 사료 및 고고학 자료,‘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등 우리 고대사 자료 등을 비교,분석한 결과이다. ▒북한 사학자 ‘리지린’의 연구를 베꼈다는 혹평도 있다 연구 결과가 비슷하다고 베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조선 중심이 평양이 아닌 만주에 있었다는 리지린 학설은 이미 정인보·신채호선생이 주장했던 바이다.정인보·신채호 선생은 1940년대에 ‘조선사연구’‘조선상고사’등을 통해 그런 주장을 폈다.이는 내 연구의 일부에 불과하다.다른 점이 더 많다.
  • 새 천년 맞을 장기계획 세워야

    금년은 20세기의 마지막 해일 뿐 아니라 내년에 새 천년의 시작을 앞두고있다.역사의 기록을 보면 유럽의 경우 중세기에 맞이한 서기 999년에는 그해 마지막 날이 심판과 멸망의 날이 될 것이라는 종말론이 풍미하였다고 한다.터무니없는 소동이기는 했지만 천년이 넘어가는 시점에 그만큼 민감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기 원년은 고조선 말기였고 999년은 고려 건국초기였다.당시는 서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새 천년을 맞는 데 별 감회를 느끼지 못하였다.서기 1000년 이후 혁신과 개척의 연속이었던 서구와는 대조적으로 고려와 조선의 900여년은 수구적이고 변화에 둔감했던 시기였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70여세로 볼 때 우리가 서기 2000년을 맞는 시점에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희귀한 일이라 할 수 있다.어느 순간이 지난다고해서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 같은 자연적인 돌변현상은 있을 수 없지만 새천년을 맞는다는 사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정서적인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해가 바뀌기만 해도 큰 감회를 느낀다.12월 말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에 타종하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지난해를 회상하고 새해첫 날의 일출을 보면서 각오를 새롭게 하기도 한다.비록 달력이 시간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구분해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한 해가 저물고 세기가 바뀌는데 무관심하다면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우리의 통상적인 행태에 비추어 앞으로 1년후 천년이 넘어가는 순간을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맞이할 것이며 얼마나 요란한 행사들이 있을 것인지 지금부터 호기심과 설렘을 느끼게 한다. 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지난 1년을 되돌아보고 나름대로 새해 설계를 한다.이것은 개인이나 기관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관행이라 할 수 있다.금년은 지난 천년을 마감하는 해인 만큼 이러한 반성과 계획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광범하고 깊이 있게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연구와 행사들이 줄을 잇겠지만 결코 의례적인 활동에그쳐서는 안된다.천년의 갈림길에서 인류문명의 흐름을 조망하고 우리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 중지를 모아야 할 때이다.무엇보다도 위정자들이 투철한역사의식을 가지고 국정에 임해야 한다.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층이 자신의 재임기간 동안 가져다 줄 이해득실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역사에 책임진다는 자세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60년대 이후 일곱 차례에 걸쳐 5개년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해 왔으며 15년 내지 20년 이상의 장기구상도 여러 차례 작성한 바 있다.그러한방식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발전목표를 설정하고 그달성을 위해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경제의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가져온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연속적인 5개년계획체제는 김영삼 정부에 와서 사실상 종료되었다.계획경제체제가 갖는 폐단은 시정해야 하겠지만 자율화라는 구실로 정부가마땅히 해야 할 기능조차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총체적 위기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고 국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중장기 기획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특히 금년에는세기의 전환점에서 천년을 내다보는 밀레니엄계획을 수립하여 우리 세대가 인류문명의 방향설정에 이정표를세운 것으로 기록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 金三雄 칼럼-방울새와 조개 노리는 어부

    ”삼한이 나날이 서로 싸우니 백만창생이 고통 속에 지새웠네.신라·백제는 어찌 몰랐던고,입술이 다치면 이빨이 시린 것을.수당(隨唐)이 방울새와 조개 모두를 노리는 어부인데도.” 조선 초기 재상을 다섯번이나 지낸 문인 서거정(徐居正)이‘삼국사를 읽고’란 글에서 개탄한 내용이다. 지금 일본 보수세력은 북한의 금창리 핵시설 의혹과 광명성 1호 발사를 계기로 군사첩보위성 도입과 전역미사일방위(TMD)체제를 서둘고 있다.최근 일본 언론은‘노동미사일 실전배치’‘대포동미사일용 지하기지 건설’ 등을대서특필하면서 한반도 위기설을 제기한다. 연립정권을 발족한 집권 자민당과 자유당은 유엔평화유지군(PKF)에 대한 자위대의 참가동결 해제에 합의하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분담금(10%)도 거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이른바‘강성국가 건설’노선과 미사일개발이 일본 보수세력에 명분을 주고 재무장의 기회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이와 관련,최근 중국 외교부대변인은 일본의‘평화헌법 준수’를 촉구하면서 급속한 우경화에 우려를 나타냈다.한·미국방장관은 연례안보협의회에서 북한에 핵의혹 해소와 미사일개발 중단을 촉구하고,한·일국방장관회담에서는 양국 국방당국간 핫라인 개설과 해군합동훈련에 합의했다. 북한의 모험주의적 현실 인식이 일본의 재무장과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부른다.북한은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을‘반통일 대결론’으로 치부하면서 계속‘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론’을 제기한다. 북한 입장에서는 햇볕정책에 호응하는 것이 사는 길이다.‘햇볕’이란 용어가 거북스럽다면 화해정책이면어떤가.문제는 대결 아닌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공존의 길을 찾자는 것이다. 북한은 한국과 화해협력의 바탕에서 당국자간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한국정부가 상호주의원칙에 융통성을 보이면서 비료,종자 등 농산물자의 지원 계획을 밝히고 성의를 보였다.북한도 상응하는 자세로 나와야 한다. 북한이 신년사에서 먹는 문제 해결을 공식 언급할 정도로 식량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상태다.우리가 지원할 씨감자나 슈퍼옥수수 등이 파종 시기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햇볕정책이북한체제가 당면한 위기를 넘기는 좋은 기회인 데도 이를 대결론으로 받아들이면서 강경론을 펴는 것은 북한 스스로는물론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하다.오로지 일본에 구실을 줄 뿐이다. 남북한은 고려의 삼한 통일 이후 1,300년 동안 봉건왕조와 일제식민지를 함께 겪은 민족공동체다.분단 반세기 만에 북한은 300만 기아자,남한은 170만실직자라는 지극히 어려운 공동위기 시대를 맞게 되었다.그리고 미국과 일본에서는 한반도 위기설이 나돌게 되었다. 과거 신라는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북한은 소련과 중공을 끌어들여 6·25전란을 일으켰다.지금 한국은 미·일과 협력하여 북의도발에 대비하고 있다.역사에 부끄러운 원교근공(遠交近攻)정책을 끝내기 위해서는 북한이 변해야 한다.‘민족’이란 접두어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화해협력의 길에 나서야 한다.북한은 변화를 통해 대통령이 제기한 핵의혹과 미·일 수교 등 일괄타결론이 성사되면 경제건설에 큰 도움을 받을 수있을 것이다. ‘극단의 시대’를 쓴 영국의 에릭 홉스봄은베를린장벽 붕괴시점을 20세기종점으로 시대구분한다.유일한 냉전지대 한반도는 언제까지 20세기로 남을것인가.지금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4자회담이 평화체제 구축과 긴장완화의 전기가 됐으면 한다.남북당국은‘방울새와 조개 모두를 노리는’어부를경계해야 한다.
  • 부패척결과 국민의식/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서울광장)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로마문화의 위대성을 지적하는 의미다. 그런 로마가 망한 것이 무슨 이유인가.부정부패와 퇴폐·타락 때문이었다. 북송(北宋)의 왕안석은 신법(新法)을 통해 국가 부강을 제시했다.그중 주목되는 것은 부패척결이 선행되어야 나라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고 하면서 부정 공직자는 상하 구분없이 철저히 색출,엄벌하고 백성(국민)도 부정부패의 연결 소지를 근절해야 한다고 역설한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찬란했던 신라의 멸망이나 고려의 최후,조선조의 피침(被侵) 등도 따져보면 총체적 부정부패가 주요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결국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한 나라가 최후를 맞았던 근본 이유중 부정부패가 그 으뜸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문제가 돼왔음에도 해결하지 못한 부정부패를 어떻게 척결하여 대외적으로 한국의 신인도를 올릴 수 있을까. ○규제완화로 ‘관행’ 차단 첫째,각종 규제를 과감히 완화하여 원천적으로 국민들이 담당 공직자와 업무상 은밀한 교섭·거래를 할 필요가 없도록 해야 한다.담당자가 칼자루를 쥐고 눈을 크게 뜨며 관련 서류를 몇번이고 다시 고쳐오게 한다든가 접수를 거부·지연시키는 등 공포적 분위기를 표출해서 ‘부정거래’를 유도하는 듯한 과거의 관행을 이제는 완전 차단해야 한다.각종 규제가 안 풀리기 때문에 공직자에게 아쉬운 거래를 부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허가 등 업무를 민영화해서 중하위직과의 상담 자체를 제도적으로 격리할 필요도 있다.많은 규제가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왕안석의 신법에서 지적됐듯이 부정부패를 일삼는 무리를 적발하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일벌백계주의로 엄히 처벌하여 이런 부정한 일을 범하면 개인적으로 크나큰 불이익이 돌아온다는 자각심을 심어놓아야 한다.이 점은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지적한 바 있다. 부정부패 관련자들을 얼마간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해서 회개케 하는 것도 중요하다.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로비에 천재이기 때문에 상하 담당자와 막후 교섭으로 잠시뒤 원상복귀하는 사례를 목격하곤 한다.기소유예·보석·가석방·주거제한 형식으로 일단 풀려나 거리를 활보하는 파렴치한들을 볼 수 있다.뇌물받은 것을 숨겼다가 복역하고 나와 다시 잘 살 수 있다는 삐뚤어진 생각이 이런 악순환을 연출시키는 것이다. ○일벌백계주의 처벌을 셋째,아무리 공직자가 청렴하게 양심적으로,법대로 하려 해도 국민이 공직자를 악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는 경향도 있다.뇌물을 주어야 일이 잘 되고 빨리 된다는 빗나간 이기주의를 갖고 있는 국민의 의식이 개혁되거나 발상의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어느 정부이건 깨끗한 사회,맑고 명랑한 순리의 사회를 만들 수 없다.국민들이 정당한 절차와 방법에 따라 일을 처리하려는 생각이 정착되어야 된다. 국민의 정부에서 마침 중하위 공직자에 대한 부패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매우 적절한 시기에 핵심적으로 착안한 것이다.위의 세가지 부정부패 척결 제안은 올바른 역사의식이 온 국민들에게 확산될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 안중근 이토 총살(秘錄 南柯夢:27)

    ◎탕! 하얼빈 1번플랫폼 충성… 일제원흉 즉사/이토 러시아 가던길서 사망/명치천황으로선 두손 잃은셈/“삼천리강토 원수 갚았을뿐” 安의사 죽음앞서도 당당/여순감옥서 순국땐 구슬비마저 기차 30분 넘도록 안화 낙심하며 돌아서는데 그때 도착하는 모습이 그래서 막 뛰어가…(安의사 회고中) 1909년 10월26일 오전 10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이 나라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강탈한 이토는 특별열차로 중국 만주의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그때 원수 이토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안중근의사는 뒷날 회고하기를 “이토 그놈을 가딱하면 놓칠뻔 했네. 그놈의 기차가 아침 9시 도착인데 9시30분이 되어도 오지 않아서 그만 걸어서 돌아서는데 다리있는데 오니까 아! 그때 기차가 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막 뛰어가 그놈을 쏘아 죽였네 그려”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해서 일제침략의 거물 이토를 하얼빈역 1번 플랫홈에서 쏘아 죽였다. 이것을 우리는 안의사의 이토 총살이라 부르고 있다. 전 통감 이토(伊藤)는 저희 나라의 일로 러시아에 가게 되었다. 하얼빈역에 잠시 내렸는데 갑자기 총성이 울리더니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아! 동양의 패권을 쥐었다는 자가 끝난 것이라. 이토가 끝났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끝났다는 이야기이다. 이토는 한국민에 대해 원수일뿐 아니라 일본인에 대해서도 원수인 것이다. 금년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 79주년이 되는 해인데 안의사가 외쳤던 ‘동양평화’는 과연 이루어졌는지 의심스럽다. 안중근은 이토를 죽인뒤 조용히 잡혀가면서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으니 충의는 당당하고 의리는 빛났으며 위엄있는 풍도는 늠늠하니 뉘 감히 그를 꺾을 사람이 있겠는가. 안중군 의사는 당년 32세의 젊고 젊은 나이에 의거를 결심했는데 그의 참뜻은 아직도 후손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지은 ‘장부처세가(丈夫處世歌)’는 이렇게 외친다. 동포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만세 만세 대한독립이로다. 안중근,그는 누구인가. 아무도 그 당시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얼빈에서 총을 쏜 소년은 뉘 집의 아들이었던가. 칼을 집고 바다를 건너갔다고 하는데 그의 선대는 알지못하겠으나 성은 안씨요 이름은 중근(重根)이라 하였다. 아이시절부터 칼 쓰기와 공차기를 좋아 했고 장성해서는 비분강개하고 활협(闊狹)의 의지가 강하여 남을 잘 도왔다. 또 나라일을 걱정하고 그 지략이 커서 사소한 일은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이토가 러시아땅에 들어가는 기회가 있음을 미리 알고 그 길목에 숨어 있다가 이토의 얼굴이며 신장의 처수까지 알아두기 위해 이토의 사진 한장을 얻어 오래 익힌 뒤 즉시 단총(육혈포)으로 방포(放砲)해 그자의 가슴을 바로 맞추어 즉사케 하였으니 아! 위대하고 장하도다 안중근 의사의 공판투쟁은 참으로 용감하고 씩씩하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저들의 법률에 따라 조선사령부에 호송되어 며칠동안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은 청천백일과 같아서 한결같이 정정당당했고 끝내 굴하지 않고 말하기를 “대장부 사내가 되어 한번 죽음은 당연한 것이거늘 어찌 이처럼 고달프게 문초하는가. 원래 조선에서는 사람을 죽인 자에 대해서는 죽음으로 갚게 되어있다. 어찌 한치라도 사심이 있겠는가” 하였다.심문관이 또 묻기를 “너와 같이 공모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하였다. 안중근이 대답하기를 “조선의 이천만 동포가 모두 같이 공모자다”고 했다. 또 묻기를 “누가 너에게 이런 불법적인 일을 가르쳤는가” 하자 “하늘이 가르쳤다. 누가 가르쳤겠는가.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법대로 하라. 이토로 말하면 우리 삼천리 강토를 늑탈하고 오백년 종사(宗社)를 멸망케 하였으니 내가 그 원수를 갚은 것이다. 나는 귀국의 원로를 죽여 조선의 수치를 씻었다. 그러나 귀국은 나를 살인죄로 죽이려 들 것이니 구차스럽게 문답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조용히 죽음에 임했다. 이토는 일본 근대사에 있어서 제일가는 위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래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만엔짜리 일본 지폐에 그 얼굴이 찍혀 나왔다. 이토의 이력에 대해선 벌써 온 세계 역사책에 기록이 돼있으니 더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방(列邦)과 교섭하는데 있어 이토같은 거물이 어디 있겠는가. 그같은 인물이 죽었으니 명치천황으로서는 두 손을 모두 잃은 것 같았다. 이토의 지략은 독일의 비스마르크나 미국의 워싱톤 보다 못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명치 천황의 혁명이 아니었다면 어찌 동서양 패권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옛날 제나라때 관중(管仲)과 안자(晏子)는 제후에게 패도(覇道)를 써 임금에게 신임을 받았으나 이토의 경우는 달랐다. 예로부터 영웅은 시대를 잘만나 공을 이루는 법인데 이토는 명치천황의 악정(惡政)을 혼자 자기 사업으로 전용(專用)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 공로가 많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역사에 안의사와 같은 이가 또 있으니 바로 창해역사(滄海力士)다. 그는 조선인이었는데 박랑사중(博郞沙中)에서 철퇴를 던져 진시황을 저격했으나 다음 수레를 잘못 맞춰 온누리의 영웅으로 불려왔으며 진(秦)나라가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지금 안중근도 한번 단총을 쏘아 패권을 쥐고 있던 주인공을 꺼꾸러져 죽게 했다.그러나 일본은 점점 강해지고 조선은 반대로 멸망하니 이것이야 말로 일은 사람이 꾸미고 성패는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안의사는 죽음에 임하여 태연히 웃으면서 말하기를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먼저 일본이 정략을 고쳐야 한다. 시간이 지나서 기회를 잃으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欲保東洋 先改政略 時過失機 追悔何及)”고 했으니 이 얼마나 앞 날을 꿰뚫어본 탁견인가. 안중근의사는 마침내 1910년 3월26일 10시 구슬비가 나리는 가운데 만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날 푸른 하늘은 답답한 듯 하고 백일(白日)이 침침하며 숙숙(肅肅)한 기운이 육대주에 충만하였으니 두공부(杜工部 즉,杜甫)가 지은 시에 “영웅의 가슴에 눈물이 가득하다”고 한 것은 안중근이 나오는 것을 미리 알고 지은 시가 아니었던가. 그 친척들이 시체를 거두어 고향산천에 반장하였으나 그 뒤에는 적적하여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이토는 안의사를 만나 잘 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명성 또한 빛을 잃었을 것이다. 이토의 만장(挽章) 영웅을 쏘아 죽이자 만국이 놀랐다/하늘이 그로 하여금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함일세/이로써 열강의 교섭은 끝나고/명치는 울어서 눈물이 쏟아지겠지 그러나 안의사의 죽음만큼귀중한 일은 없었다. 안중근의 만장 하얼빈의 총소리가 오대주를 진동하였으니/안중근의 기개가 천추에 관통하였네/지난해에 충의를 다한 자 누가 있었던가/자기 한몸 죽여가며 나라근심 보답했네.
  • 적과 내통하는 반역아들/金三雄 주필(時論)

    매국노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이완용과 송병준처럼 외적에게 나라를 판무리가 있는가 하면 적국에 빌붙어 모국을 침략하는 국적도 있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맏아들 男生은 대표적 국적의 하나다. 동생들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리자 당나라로 도망쳐 적군을 이끌고 와서 형제를 치고 모국을 멸망시켰다. 내외의 정세를 간파한 연개소문이 사망하기 직전 아들 3형제에게 “너희 형제는 서로 사랑하기를 물과 물고기처럼 하거라. 화살이 합치면 강하고 이를 나누면 부러진다”(환단고기)는 유언까지 남겼지만 권력에 눈이 먼 자식들은 골육상쟁끝에 남생의 반역으로 가문과 나라의 멸망을 불러왔다. 조선조 연산군때의 姜弘立은 명나라 원군 요청을 받고 오도원수(五道元帥)에 임명된 장수였다. 임진란 당시 명나라의 은고를 입은 조정은 그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삼아 후금(後金)의 징벌에 나섰다. 그러나 명(明)·조(朝)연합군은 일패도지하고,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했다. 일설에는 당시 정세를 꿰뚫은 연산군이 기회를 보아 후금에 합세하라는 밀지 때문이었다고는하지만, 문제는 그후 일어난 일이다. 후금 정벌에 나섰던 강홍립이 적군의 선봉장으로 모국을 친 것이다. 일신의 이해로 적국에 빌붙고 적병을 끌어 모국을 치는 반역행위는 그러나 옛 역사 이야기만은 아니다. ○용공음해 뒤편서 적과 내통 지난해 대선은 과거 어느 선거에 못지않은 이른바 ‘사상논쟁’으로 시종했다. 김대중 후보에 대한 용공음해가 핵심 쟁점이었다. 당시 여권이 총동원되어 융단폭격을 가했다. 북측과 가깝지 않으냐는 음해였던 것이다. 이런 이면에서 지금 재판중인 권영해 안기부장이 벌인 용공조작은 ‘적과의 동침’을 주제로 하는 한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상대를 용공으로 매도하면서 뒤편에서 벌인, 적과 내통하는 파렴치성과 반국가행위는 용서받기 어려운 범죄다. 입만 열면 반공과 안보를 떠드는 자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적과도 서슴지 않고 내통하는 범죄는 이적행위 바로 그것이다. ○북한군에 총격요청이라니 그나마 이런 행위는 ‘적대적 공조’ 관계의 고전적 수법이라 한다. 권력에 환장한 자들이 ‘선거용’으로북한군에게 판문점에서 총격을 요청했다니, 이들의 타락과 반국가 행위가 어디까지일지 망연할 따름이다. 그것도 이회창 후보의 친동생과 비선그룹에서 자행된 음모라는 데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과거 선거때나 주요시국이면 어김없이 벌어진 안보사건이 모두 이렇게 북한과 내통하여 ‘짜고 친 고스톱’이었단 말인가. 김현희의 대한항공기 폭파사건과 15대 총선때 판문점북한군총격사건도 ‘적과 내통’한 각본이었는가? 검찰은 북한군총격요청사건을 한점 의혹 없이 규명해야 한다. 배후를 밝히고 사실로 드러나면 관련자 모두를 외환(外患)죄로 엄벌해야 한다. 단순히 선거에 이기기 위해 우리 아들 딸들에게 총을 쏘라고 거래한 반역자들, 자칫 전쟁으로까지 치달을지 모를 도박을 벌인 모험주의자들을 뿌리뽑아야 한다. 국기를 흔드는 엄청난 이적행위가 관련자들의 ‘고문’ 주장으로 희석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피의자들에게 고문을 했단 말인가. 고문이 자작극이거나 허위로 드러나면 그 교활성도 단죄해야 한다. 북한군총격요청사건은 매국 이적행위다. 결코 ‘고문’ 문제로 양비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고구려 멸망의 아픔과 정묘호란의 비극을 되풀이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 예리한 필봉 휘두른 항일언론인/9월의 독립운동가 張道斌 선생

    ◎대한매일신보 시절 반일 언론의 선봉/일제의 행각 발로 뛰며 낱낱이 기사화/국사연구 몰두… 황국사관 정면 반박도 “국가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을 모아 이룬 것이오. 국정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이 그 일(국정)을 자치(自治)하는 것이오. 애국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이 그 몸(국가)을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라. 고로 민권이 흥(興)하면 국권이 세워지고 민권이 멸(滅)하면 국권이 쓰러지니 윗 사람이 압민(壓民)하는 권리에 힘쓰면 그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오,국민된 자가 그 권리의 신장에 힘쓰지 아니하면 그 몸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張道斌의 대한매일신보 논설중에서)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1888∼1963)선생. 타고난 문재와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일생을 언론활동과 역사연구에 몸바쳤던 애국자다. 반일·항일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 기자겸 논설위원으로 언론계 활동을 시작해 일제하에서 날카로운 필봉을 날리며 이름을 떨쳤다. 망명과 귀국을 거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굽힐줄모르는 지조와 의식을 발휘했던 빼어난 애국자·민족주의자이기도 하다.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난 張선생은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신동 소리를 들었던 인물. 소문을 들은 평양감사의 추천으로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에서 수학했다. 선생은 여기서 교편생활을 했던 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와 인연을 맺어 총무인 梁起鐸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됐고 申采浩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을 맡아 친일내각과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를 신랄하게 비판해 미움을 받았지만 영국인 裵說이 사장을 맡아 항일의 강한 논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의 폭압이 더해가면서 신문압수와 검열이 심해졌으나 선생은 일제의 행각을 발로 뛰며 낱낱이 기사화한 장본인으로 이 시절 미국에서 돌아온 安昌浩의 신민회 비밀회원으로 가담했다. 이 때 金九·李昇薰·李商在·尹致昊 등 애국지사들과 교분을 쌓아 나중 망명생활 때 큰 도움을 받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직후 필진들이 묶여 들어가고 신문사의 명맥이 끊어질 때까지 필봉을 늦추지 않았다. 밤엔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면서 국사연구에 몰두, 사학자의 발판을 다졌다. 선생의 사관은 당시 팽배해 있던 황국사관과 사대주의사관을 정면으로 반박해 우리의 독립적인 역사의식을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결국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행 망명길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까운 신한촌에서 다시 申采浩를 만나고 독립투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신병으로 安昌浩가 초청한 미국행을 포기하고 1916년 귀국했다. 평북 영변의 서운사에서 요양한 뒤 처음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역사서적 ‘국사’를 저술했다. 1919년 귀경후 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해 허가를 받았으나 돈이 없어 운영을 양도했다. 하지만 1926년까지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을 발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때 출판사 고려관을 설립,‘조선사요령’‘조선위인전’‘조선역사록 등 숱한 책자를 편찬했다. 1927∼45년은 고적답사를 통한 역사연구에 전념하던 시기. 일제말기 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부하고 고향 근처의 심산에 은둔하며 역사서적 집필에 전념했다. 그는 후학양성에도 뜻이 컸다. 1947년 한국대학을 설립한데 이어 1948년 단국대학을 설립,초대학장을 맡았다. 1949년엔 육군사관학교 국사학교수로 일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러나 단국대 명예교수로 강의를 가던 길에 짐수레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1년간 병원에서 고생하다 1963년 76세의 일기로 운명했다. 지난 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98년 9월 국가보훈처가 지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그의 후손들/高合 회장 致赫씨 등 5남1녀/모두 재계·학계 뿌리내려 저명 선생은 늦은 나이인 33세에 평북 영변의 기독교 집안 출신 金淑姿씨(1979년 타계)와 결혼,5남1녀를 두었다. 선생의 은둔생활과 구국운동에 따라 부인 金여사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모두 재계·학계에서 뿌리를 내린 유명인사들이다. 장녀 致豊씨는 지난 60년대 결혼후 도미,76년 작고했고 장남 致榮씨는 신동아손해보험 상임이사·고려다이아몬드공업 대표이사를 지낸뒤 92년 별세했다. 삼양식품을 창설한 차남 致德씨도 지난 88년 작고했고 3남 致健씨는 신화다이아몬드공업 회장·고려합섬 이사를 거쳐 현재 BBC 영어연구원 고문이다. 고려합섬을 창업한 4남 致赫씨(고합그룹 회장)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81년 산운학술문화재단(현 고려학술문화재단)을 설립했고 막내 致順씨는 중앙대 사회과학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 순명황후의 恨(秘錄 南柯夢:18)

    ◎독수공방 20년 후사 없어 坤宮 미움사/純宗 음양이치 잘몰라 빈궁 침실 발길 끊어/보다못한 嚴妃 영친왕 시켜 억지合房도 허사/종묘 주춧돌 28칸 반… 나라운수 예언한듯/33세에 쓸쓸히 승하하자 四廟에 큰불 조선왕조가 멸망한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제의 침략 때문이었다.그러나 우연하게 왕실안에 이변이 거듭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중의 하나가 조선왕조 최후의 임금인 순종(純宗,1907∼1910)에게 후사가 없었다는 일이다.순종은 명성황후가 어렵게 나은 외아들이었는데,불행히 여자를 몰랐다. 하루는 어린 영친왕이 함녕전으로 뛰어오더니 순종의 옷소매를 잡고 빈궁(嬪宮=순명황후 민씨)한테 가시자고 졸랐다.본시 순종께서는 음양의 이치(남녀관계)를 잘 모르셔 허송세월만 하고 계신지라 엄비(영친왕의 생모)께서 걱정하시던 끝에 어린 영친왕을 시켜 순종을 억지로 빈궁의 침실로 모시게 했던 것이다. 순종은 영친왕이 이끄는대로 따라가다가 빈궁 침실을 두어걸음 남겨두고 돌아서고 말았다.그러자 어린 영친왕이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엄비가 나타나 순종에게 꼭 한번만 빈궁에게 가보시라고 권했다.순종이 난처해서 멈칫거리고 있을 때 빈궁이 직접 나와서 순종을 자기방으로 모셨다. 순종이 방에 앉자마자 미리 준비해뒀던 주안상이 들어왔다.상궁과 나인 모두가 밖으로 나가 일이 잘 되기를 기원했다.그러나 방안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빈궁으로서는 시집온지 20년만인 이날 처음으로 화촉을 밝히는 것이었으니 운우의 기쁨이 얼마나 그리웠겠는가.그러나 순종께서는 앉은 자리가 뜨뜻해지기도 전에 일어나시더니 함녕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선원계보’에 보면 순명황후 민씨는 민태호의 딸로서 11살(임오 1882년)때 태자비로 간택되어 33살(갑진 1904년)에 승하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그사이 22년 동안을 처녀의 몸으로 지냈다고 하니 그야말로 청상과부보다 못한 쓸쓸한 일생이었다. 이후에도 밤다다 11시경이면 순종이 빈궁의 침소를 찾았으나 아들을 낳을 희망은 전혀 없었다.도대체 우주만물이 모두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가 있겠는가. 가령 한 마을에 아리따운 처녀가 있어 향수를 뿌리고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린 뒤 웃는 낯으로 남자를 바라본다면 아무리 군왕이라 하더라도 쏠리게 마련이고 여색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어찌 순종께서는 이것을 모르시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순종의 이같은 행동은 국가의 운명과도 관계되는 일이다.왜냐하면 당초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종묘의 주춧돌을 놓을 때 28칸반으로 정했는데,이로 미루어 본다면 이 나라의 운수는 가히 움직이기 어려운 일인가. 조선왕조 건국시에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활약이 컸다.그래서 많은 일화가 남아있는데 그중 하나가 종묘다. 정도전이 종묘의 칸수를 28칸 반으로 정하고,‘창엽문(蒼葉門)’이란 액자를 단 것은 그가 미리 500년 후의 일을 예측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남가몽·8,4월15일자 참조) 최근 장안에 다음같은 동요가 유행하고 있는데 그 가사는 이러하다.‘어제 불고 그저께 분 바람은/러시아 군대의 대포소리요/지금 방금 떨어지는 달은 빈궁전하의 운명이로다’(昨日再昨吹去風 露國軍隊砲聲也 方今時今落來月 嬪宮殿下運命也)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순명황후께서 승하했는데 이때 장안에 위와 같은 동요가 나돌았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대한제국사의 한 단면이다.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화는 순명황후 민씨가 시어머니 명성황후에게 미움을 사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는 얘기다.이것 또한 전혀 새로운 사실이다. 본래 곤궁(坤宮=명성황후)이 살아계실 때 며느리인 빈궁과 뜻이 맞지않아 서로 원수보듯 하였다.매일아침 저녁으로 빈궁이 대전과 곤궁께 문안인사를 드릴 때 원삼에 띠를 두르고 사배(四拜)를 올리셨다. 그때 순명황후는 문지방 밖에 서서 물러가라는 명이 떨어질 때까지 서서 기다려야 했다.간혹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서 있거나 밤이 늦도록 서서 벌을 받을 때가 있었다고 하니 그 고통은 형언할 수없는 일이었다.거기다 남편인 순종이 음양의 이치를 알지 못했으니 순명황후의 운명은 기구하기만 했다. 무릇 음식과 남녀의 이성관계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데독숙공방(獨宿空房)하며 낙을 모르고 지내기를 20년이나 되었으니 그 쓰라린 고초를 무엇으로 다 형용하리.차라리 왕비가 되기보다 사가의 부인이 된 것만 못하지 않았는가.이리하여 1904년(甲辰 고종 41년) 10월 보름 경운궁 강태실(康泰室)에서 승하하셨으니 향년 33세였다. 순명황후 민씨가 죽자 곧바로 계비 윤씨를 태자비로 봉했는데 윤택영(尹澤榮)의 12살난 딸이었다.그러나 동궁(순종)전하께서는 처음에 친영(親迎)을 마친 뒤로는 한번도 들르시지 않았으니 지난 날의 빈궁과 지내듯 담담하게 허송세월하게 되었다.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겠는가.세상사람들이 말하기를 “순종은 고자”라고 했는데 과연 그랬을까.나는 오해라고 생각한다. 정환덕은 순종이 고자가 아닌 이유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본래 국법에 따르면 동궁의 바지밑에는 소변보는 구멍이 있고 오줌눌 때는 가까이 있는 내시로 하여금 요강(溺器)을 바치게 하였다.그때 내시는 황공하옵게도 동궁의 성기를 엿보게 되고 요즘 소리로 양기가 발동하여 힘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늠할수 있었다.또 털이 검고 무성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하였다.그런데 어찌 고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혹시 성기가 미리 발동하는 조루증은 아닌지 모르겠다. ‘마땅히 동해야 할 때 동하지 않고 동하여서는 아니될 때 동했던 것(當動而不動 不當動而動)’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것이다.어찌 되었건 그 생리를 알 수 없다.대저 신하된 도리로 감히 입을 열지 못할 일인 줄 알면서 입을 연 것은 오로지 진실이 그렇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서이다.누가 감히 순종을 고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순명황후가 나이 설흔세살에 한 맺힌 일생을 마칠 때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났다.그것은 서울의 사묘(四廟)에 큰 불이 난 것이었다. 당초 명성황후 생전시 북묘를 세우고 이어 광무 6년(1902년)에 동묘를 세워 서울에는 모두 동서남북 4묘가 있었다.그런데 1904년에 큰불이 일어났고 그때 장안의 시민들이 모두 달려들어 불을 껐던 것이다.그래서 안에 모셔 놓았던 신상(神像)은 무사히 불길을 피했는데 사당은 전소하고 말았다. 지금 동대문밖 숭인동에 사묘중의 하나인 동묘가 남아있다.이것은 본래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2년) 국난극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 일종의 무묘(武廟)였다.성균관을 일명 ‘문묘(文廟)’라 했고,사묘는 외침을 막아주는 무신의 사당이었다.하필이면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순명황후가 돌아가신 1904년에 사묘가 불이 나고 덕수궁에도 불이 났는지,지금도 사람들은 일제가 저지른 방화로 믿고 있다.어찌 되었건 화재사건은 한많은 순명황후가 죽으면 일어난 사건이었고,그래서 모두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이다.
  • ‘한국사 이야기’ 1차분 4권/한길사­이이화씨 기획

    ◎우리 민족의 뿌리는? 北國 발해는?/객관적 시각의 한국通史/매년 4권씩 총 24권 발간/2003년까지 완간 계획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지낸 재야 사학자 이이화씨(61)가 5,000년 우리 역사를 24권의 책에 담는 방대한 통사 저술의 첫 결실로 ‘한국사 이야기’(한길사) 1차분을 내놓았다.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고구려 백제 신라와 가야를 찾아서’‘삼국의 세력다툼과 중국과의 전쟁’‘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등 네 권. 모두 우리 역사의 시원과 틀이 형성되어 가는 고대사 부분에 해당한다. 지난 94년 한길사측과 이씨가 10년 프로그램으로 공동기획한 ‘한국사 이야기’는 우리 역사 전체를 체계적으로 다루는 일반 독자 대상의 대중 역사서다. 앞으로 매년 네 권씩 펴내 2003년까지 완간할 계획이다. ‘한국사 이야기’는 80년대 이후 우리 역사학계에서 보편화된 민중사 중심의 서술방식과 최근의 새로운 역사서술 기풍인 생활사·문화사 중심의 서술 방식을 택한다. 또 문화인류학이나 고고학의 성과 등 역사학 이외의 주변 학문 성과도 최대한 반영,종합적인 역사 시각을 갖도록 했다. 이를 위해 이씨는 프랑스 아날 학파의 연구 성과를 비롯 몽고메리의 ‘전쟁사’,푹스의 ‘풍속의 역사’등 많은 2차 자료들을 활용했다. 그동안 한국사 서술은 지나치게 아전인수격으로 이뤄진 측면이 없지 않았다. ‘900여회에 걸친 외침(外侵)을 물리쳤다’거나 ‘거대 중국인 수나라와 당나라를 멸망하게 했다’는 등 ‘우리’의 관점에서만 역사를 해석해 온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우리 역사를 동아시아의 보편사라는 틀 속에서 객관적으로 살핀다. 이씨가 이 책들에서 특히 힘을 기울인 것은 지금까지 우리 역사서술에서 가장 취약했던 발해 역사를 복원하고 한국 고대사를 올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삼국시대 이후 통일신라를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은 우리 역사 무대를 한반도 주변으로만 국한시키는 등 지정학적인 오류를 낳았다. ‘남국 신라와 북극 발해’라는 제목은 이러한 학문적 각성을 반영한 것이다. 이씨는 ‘통일신라’보다는 ‘후기 신라’나 ‘남국 신라’가 역사용어로더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나올 책들은 고려시대(5권∼8권),조선전기(9권∼12권),조선중기(13권∼16권),근대(17권∼20권),일제시기(21권∼24권) 등을 다룰 예정. 지난 4년간 사회활동을 모두 끊고 전라북도 장수의 연화분교와 김제 월명암 등지에서 ‘한국사 이야기’ 저술에만 몰두해온 이씨는 현재 고려시대사를 쓰고 있다.
  • 발해사 연구 도서·논문 잇따라 출간

    아직도 상당부분 베일에 쌓인 발해의 영토와 정치·경제문화를 집중적으로 규명한 수십권의 연구도서 및 논문이 최근 북한에서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민주조선 최근호에 따르면 간행된 연구도서 및 논문들은 ‘발해사 연구’,‘대조영과 발해국’,‘발해의 역사와 논문’,‘발해사 문답’,‘동해안 일대의 발해유적 연구’등이며 북한 사회과학원 소속 역사학자들이 집필한 것으로 밝혀졌다.이 신문은 발해사 연구도서들이 북한 고고학계의 과학적인 연구성과에 기초,“발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폭넓고 깊이 있게 서술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특히 전7권으로 구성된 ‘발해사 연구’는 “발해가 건국 이후 멸망할 때까지 독자적인 대내외정책을 실시한 독립국가였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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