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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공주 계룡~정안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0) 공주 계룡~정안

    충남 논산시 상월에서 공주시로 넘어온 옛길은 계룡면 경천에 다다른다. 이곳에 섰던 5일장은 한때 공주에서 가장 컸다. 저녁 때 도착한 이 시장터는 한가한 분위기에 파리만 날렸다. 이곳에서 20년째 경천철물점을 운영하는 이영수(70)씨는 “옛날에 시장이 섰을 때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면서 “10여년 전 시내버스가 들어온 뒤로 5일장이 죽었다.”고 말했다.1000평은 됨 직한 장터는 차들만 몇대 주차돼 있고 텅 비어 있다. ●마을에 승병 영규대사의 묘 그 전에는 신원사, 갑사는 물론 신도안에서 왔다고 한다. 이들 지역은 계룡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한복판인 이 시장으로 모두 몰려들었다. 장이 서면 철물점에 농기구를 사려는 손님이 들끓었다. 국밥집마다 손님이 넘쳐났고 술집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둥그런 시장 주변을 따라 죽 늘어서 있던 가게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이씨는 “그때를 기억해서인지 5일장이 섰던 2일과 7일에 떠돌이 옷장수 2명이 찾아온다.”고 씁쓰레하게 웃는다. 일제 때 경천에 면사무소가 있었으나 1930년 월암리로 이전했다. 이씨는 “정석모(전 내무부 장관) 아버지가 면장할 때 옮겼어.”라며 아쉬워했다. 옛길은 국도 23호와 갈라져 소로로 내달린다. 계룡초등학교 담을 끼고 바로 좌회전해 농로를 따라가면 유평1리가 나온다. 이 마을에 임진왜란 때 최초로 승병을 일으킨 영규대사(?∼1592년) 묘가 있다. 이 마을 출신이다. 영규는 서산대사의 제자다.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 옆 마을인 월암리로 피신했다 숨졌다. 묘는 충남도기념물 15호이다.1810년 순조 때 세워진 비석도 있다. 주민 박상희(70·여)씨는 “동네 주민들이 1년에 한번 제사를 지내준다.”고 전했다. ●‘정감록´ 흔적이 배인 땅 길은 계룡면 사무소 앞에서 국도 23호와 합쳐진다.3㎞쯤 달리면 널티고개가 나타난다. 경사가 완만하다. 이 고개에 물이 넘치면 ‘정씨 왕조’가 세워진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정감록에 나오는 왕조를 일컫는다. 널처럼 속이 비었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주민들은 ‘무넘이’라고 불렀다. 고개가 관통하는 동명리 이장 유병상(67)씨는 “정씨 왕조 얘기는 잘 모르지만 우리와 인근 마을에 농수를 대기 위해 기산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오는 관이 고개를 지나고 있다.”고 말했다. 고속도로처럼 닦인 국도를 타고 10㎞쯤 내달리면 금강 앞이다.1㎞ 전방에서 빠져 시내쪽으로 가다 보면 소학동이 나온다.‘효자향덕비(孝子向德碑)’가 이 마을에 있다. 향덕은 통일 신라 경덕왕시절인 755년 부모가 가난과 유행병으로 시달리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기록에 있는 최초의 효행사적으로 알려졌다. 왕이 향덕의 효행을 알고 벼 300석과 집 등을 하사했다. 이후 ‘효가리(孝家里)’라고도 불려졌다. 비석 앞에는 48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높이 11m, 둘레 3.3m로 매년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을 빈다. ●“귀향온 사람 나루터 건너자 목 베어” 금강변을 따라 난 도로로 1㎞쯤 넘어 가면 공주대교 앞 장기대나루가 나타난다. 공주대교 밑에 만든 게이트볼장에 있던 팔순 가까운 할아버지는 “30년 전만 해도 노를 저어 강을 건너주는 나룻배 한 척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한양에서 귀양 오는 사람들이 나루터를 건너면 목을 많이 쳤다.”며 “옛날에는 강 옆 산에 시신을 묻은 고린장터가 많았다.”고 귀띔했다. 지금은 강에 펌프장이 설치돼 있다. 나루터에는 수백년 된 팽나무가 있었다. 나룻배를 묶어두고 손님들이 쉬어가던 나무다. 교량이 건설되면서 공주대로 옮겨 심었으나 얼마 안가 죽었다. 이곳에서 시내를 지나서 7㎞쯤 떨어진 곳에 우금치가 있다. 이 고개는 전봉준 장군이 1894년 관군 및 일본군과 싸운 동학혁명전투 중 최대 격전지다. 공주대 윤용혁(역사교육과) 교수는 “주력 동학군은 이인쪽을 통해 공주로 올라왔지만 일부는 공주 구간 옛길로 진입했다.”고 설명했다. 동학혁명은 우금치 전투의 대패로 결국 실패했다. 금강을 건넌 옛길은 공주대와 신관초교를 거치지만 지금은 길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정안천 주변을 따라가던 길이 국도 23호와 만나는 곳은 조선조 숙박시설이 있었던 모란 마을이다. 얼마 안가 국도변에 붙어 있는 ‘석송정’이 나온다. 마을 이름도 정안면 석송리다. 이 정자는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내려올 때 잠시 쉬어 갔던 곳이다. 이를 기념해 지방 유림들이 세웠다. 인조가 이곳을 지날 때 지방 유림들이 백성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세금 감면을 해줬다고 한다. 훼손된 것을 1985년 공주시가 복원했다. 정자 주변에 인조가 ‘석송동천(石松洞天)’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 생가터에 비석만 잠시 국도와 헤어진 옛길은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1851∼94년)과 만난다. 그가 6세까지 산 정안면 광정리 생가터다.1884년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고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된 것처럼 생가터는 썰렁하다. 유허비와 안내판만 잔디에 서 있을 뿐이다. 10여가구가 있었다던 마을은 사라졌고 ‘감나무골’로 불리듯 붉게 익어가는 감나무 몇 그루만 서있다. 그의 묘는 충남 아산시 영인면에 있다. 김옥균 생가터에서 나오면 옛길은 곧바로 국도와 합쳐진다.3∼4분을 달리면 길은 또다시 국도와 갈라져 차령고개로 오른다. 차령산맥의 모태가 되는 지점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훈요10조에서 ‘차령고개 이남, 금강 밖은 등배(반역)의 산세이므로 그 지역 인물을 등용하지 마라.’고 한 곳이다. 지금은 국도가 따로 나 차들이 드물다. 울창한 숲만이 옛 위용을 알려준다. 차령고개 밑 정안면 인풍리 주민 조주형(67)씨는 “옛날엔 숲이 더 우거졌었다.”면서 “50년 전만 해도 천안 행정리 5일장에 가려면 고개에 도둑떼가 많아 혼자 소를 끌고 가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주변에 ‘도둑골’이라는 마을까지 있었다고 한다. 차령고개는 당초 ‘금북정맥’으로 불렸으나 일제가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차령고개는 공주와 천안의 경계 지점으로 정상에 오르자 천안시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보인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태조 이성계 금강변 신도안에 도읍 구상 충남을 가로지르는 금강은 한양을 끼고 도는 한강에 이어 항상 한 나라의 수도로 떠오른 역사를 갖고 있다. 지금도 금강변 공주·연기지역에 행정도시 건설이 추진되지만 수도로 거론된 역사는 백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는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위례성에서 건국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한강유역인 현재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고구려에 의해 개로왕이 죽고 밀리면서 백제 문주왕이 475년 다음 수도로 정한 곳이 금강변 웅진, 충남 공주다. 지금은 금강의 ‘금’자가 비단 금(錦)을 사용하지만 웅진의 곰웅(熊)자를 딴 웅수(熊水)에서 ‘곰강’으로 불리다 금강으로 변했다고 한다. 백제 중흥의 기틀을 다져놓은 무령왕에 이어 즉위한 제26대 성왕이 538년 이전한 수도는 ‘사비’이다. 충남 부여로 역시 금강변에 위치한다. 부여를 통과하는 금강은 별도로 ‘백마강’으로 불린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호국룡이 된 무왕을 낚았다는 전설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백말로 용을 낚았다고 전해지는 바위인 조룡대(釣龍臺)는 고란사 앞에 있다. 백제는 660년 사비시대를 끝으로 멸망하고 만다. 금강변이 다시 수도로 떠오른 건 조선 건국 때. 초기에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자락인 신도안을 수도로 정했었다. 금강에서 가까운 곳이다. 한양에 밀려 공사가 1년 만에 중단됐지만 아직도 주춧돌 등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이곳에서 ‘정씨 진인이 나타나 새 왕조를 세운다.’는 예언서가 등장했다.‘정감록’이다. 선조 때에 발생한 정여립(1546∼89년)난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설이 있다. 정감록의 파괴력이 지속되면서 무속인이 신도안으로 몰렸다.1975년에만 해도 상제교, 태을교 등 104개 신흥종교 시설이 있었으나 계룡대를 조성하는 ‘620사업’으로 거의 사라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금강변 공주·연기를 행정 수도로 검토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후 이곳을 행정수도로 정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일부 국민들의 반대로 ‘행정도시’로 격이 낮아졌지만 이 사업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전북 장수군에서 충남 서천 금강하구둑까지 394㎞를 흐르는 금강.2014년까지 대통령 직속기관 4개, 재정경제부, 교육인적자원부, 건설교통부, 산업자원부 등 총 49개 중앙행정기관이 들어서는 행정도시 ‘세종시’가 백제의 옛 영광을 재현할지 기대되고 있다. 공주대 윤용혁 교수는 “한반도 중심인 한강을 둘러싼 싸움에서 밀리면 다음으로는 천상 금강이 가장 적지다.”며 “대외적으로 교통이 좋은 강을 끼고 있고 넓은 평야지대 등 수도로서는 조건이 무척 좋다.”고 말했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고구려,전쟁의 나라/글항아리 펴냄

    고구려인들은 명분과 윤리를 무기로 내투(內鬪)에 몰두하던 ‘문화인’ 조선 선비들과는 달랐다. 같은 날에 태어난 두 명의 인물이 선악의 경쟁을 하는 ‘태왕사신기’를 보면 변화하는 세계를 뒤로한 채 내투에 매달리던 조선을 보는 느낌이 든다. 환상에 사로잡혀 밖의 현실로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곧 패배자의 모습이다. 척박한 숲속에서 사냥을 하고 살았던 초기 고구려인들에게 ‘박애’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양심이나 도덕·윤리에서 자유롭고, 목적을 수행하는 데서는 합리성과 현실적 유용성에 대한 판단만으로 행동하는 이런 것이 냉혹한 고구려인들의 본질이었다. 고구려에 찾아온 망명객 가운데 적의 손에 넘겨지지 않거나 살아남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언제나 그렇게 되었다. 그들은 정치에서 진실이란 윤리도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구려, 전쟁의 나라’(글항아리 펴냄)에서 나는 고대 한국인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다가서고 싶었다. 고구려는 파죽지세의 강자가 아니었다. 열악한 환경과 강적들의 틈바구니에서 일진일퇴하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던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먹고 살기 위한 약탈 전쟁을 수행하고, 중국의 흡수공작에 말려들 위험에 처한 주변 약소민족들을 이간질해야 했다. 이 책은 단순히 전쟁을 다룬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전쟁이 힘을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힘을 배가시키는지 고민하는 고구려인들을 그려내고자 했다. 주변의 유목민이 양과 말을 길렀다면 고구려인들은 그들을 ‘인간가축’화하여 자신의 기병으로 부렸다. 당이 멸망한 후 고구려의 휘하에 있었던 거란족과 말갈족(여진)이 각각 요나라(907∼1125)와 금나라(1115∼1234)를 세워 북방초원과 북중국 전체를 지배했다. 주인이 없어지자 사나워진 ‘가축’들이 번갈아가며 아시아 최대 군사강국을 세웠다. 이는 고구려가 그들을 휘하에 두고 얼마나 지능적으로 단속했는지를 여실히 말해준다. 고구려인들은 정복하고 제압한 외부인들에게 “어디 출신이야?”라고 물어본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잘할 수 있어?”라고 물었다. 자신과 다른 문화를 가진 자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용하면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 올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들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현실에 유리되는 편견을 가질 수도 없었고 편가르기를 지속할 여유도 없었다. 그것이 고구려라는 국가를 700살까지 장수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구려는 수와 당의 집요한 외침을 막아내다가 결국 과로사했다. 연개소문 이후의 권력을 둘러싼 다툼은 초기 고구려의 역동성과 일체성을 허물어뜨렸다. 환상을 가지고 고구려가 위대하다고 주장만 한다면 그것은 자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 걸음 물러나 치열하게 살아간 그들의 인간적 욕망과 순수한 삶의 의지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환상에 가려졌던 많은 이야기들이 살아서 걸어 나온다. 서영교 동국대 박사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논산 연무~상월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논산 연무~상월

    전북 여산에서 1번 국도와 갈라진 옛길은 충남 논산 연무대와 닿아 있다. 이 길로 접어 들면 연무읍 고내리에 봉곡서원이 나온다. 서원 앞에 사는 80대 할머니는 “여자들이 꿈을 꾸면 옛날에 욕을 본 사람들이 나타난다며 (서원을) 옮기라고 해유.”라고 말했다. 이곳에는 최근까지 사람이 살다가 떠난 흔적이 있다. 특별하게 보이는 서원은 아니지만 이계맹 등 조선시대 때 귀향을 갔던 선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기에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논산훈련소 주변 경기도 옛말 서원 앞에는 ‘황화정(皇華亭)’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황화정은 서원에서 400m쯤 북쪽에 있던 정자다. 옛날 현감(군수)이 관찰사(도지사)를 맞고 배웅을 하던 곳이다. 황화정이 훼손된 뒤 비석만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황화정이 있던 마을은 지금 한적하고 쇠락한 농촌일 뿐이다. 예전에 전라도 지역에 속했던 마을이다. 이 마을 끝에서 옛길은 다시 1번 국도와 만난다. 곧 이어 육군훈련소(옛 논산훈련소·연무대)와 입소 대대가 나온다. 훈련소 앞에서 식당 호객을 하던 김영심(74)씨는 “훈련소도 옛날 훈련소지, 지금은 아녀. 자꾸 오그라져.”라며 최근의 경기를 전했다. 흔한 술집도, 다방도 없다. 입소병의 ‘총각딱지’를 떼주던 아가씨촌도 사라졌다. 교통이 좋아져 입소날에 부모의 차를 타고 오고 면회 때도 멀리 나가 먹는다고 말했다. 김씨와 함께 호객을 하던 70대 할머니는 “재수 있으면 하나 걸리고 공 치는 날이 많아.”라고 한탄을 했다.“밥 먹고 가슈.” 두 할머니는 끝내 객(客)의 소매를 잡아끈다. 훈련소 입소 대대 앞도 마찬가지다. 식당이 줄지어선 거리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논산은 역사상 최고 전쟁터 훈련소에서 옛길을 따라 좀더 올라가다 옆길로 2㎞쯤 빠지면 견훤 왕릉이 나온다. 이 왕릉은 기념물 26호로 연무읍 금곡리에 있다. 견훤은 완산(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세력을 키웠으나 아들 신검과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을 빚으면서 고려 왕건에게 멸망했다. 죽으면서 “완산이 그립다.”고 해 이곳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날씨가 좋으면 이곳에서 전주 모악산이 보이는 것도 이런 연유다. 논산은 후백제가 왕건과 전투를 벌였고 백제가 멸망할 때 계백장군이 신라와 싸운 황산벌이 있는 곳이다. 육군훈련소도 이곳에 있고 계룡대도 있다. 삼군본부가 있는 계룡대는 현재 계룡시에 속하지만 이전에는 논산 땅이었다. 논산지역 향토 사학자 류제협(61)씨는 “논산은 넓은 곡창지대여서 전투식량 조달이 손쉬워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치러졌다.”며 “삼국시대 때는 접경 지역이라 전쟁이 많았고 계룡대는 높은 계룡산이 둘러싼 천혜의 요새여서 들어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논산은 최대 전쟁터일 뿐만 아니라 삼국 통일을 이끌어 통일을 상징하는 고장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견훤 왕릉에서 다시 탄 옛길은 연무터미널과 개태골을 거쳐 1번 국도와 갈라져 은진향교로 향한다. 은진면 교촌리에 있는 이 향교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봄과 가을에 제향을 지낸다. 공자 등 성현 22명의 위패를 모신 향교는 평상시에 문이 닫혀 있다. 향교 안에 30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떨어진 은행 열매가 옛 정취를 이어준다. 향교에서 1㎞쯤 올라가면 망보기마을이 나온다. 고개에서 적들이 오는지 망을 보았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양이나 전라도로 갈 때 선비들이 이곳에서 쉬었다고 한다. 큰 정자나무 밑에 계단식 서낭당이 있다. “20년 전만 해도 소몰이꾼들이 정자나무 밑에서 쉬다 갔어.” 나무 밑에서 붉은 고추를 널어 말리던 70대 할머니가 넋두리처럼 내뱉었다. 이 마을을 지나면 옛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관촉사가 있다. 보물 232호 석등도 있지만 높이 18m의 국내 최대 석불인 은진미륵(보물 218호)이 서 있어 유명하다. 고려 목종 9년(1006년)에 완공된 이 석불은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구절초가 절 안에 가득 꽃망울을 터뜨려 가을 분위기를 한껏 뽐냈다. 사찰로 들어가는 계단 옆에 세워진 이승만 박사 추모비는 이 곳의 옛 정취와 달라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 추모비는 방공청년회 논산지부가 1965년 건립한 것이다. ●‘춘향전´에 7군데나 지명 나와 옛길은 다시 논산시 부적면으로 이어진다. 향토 사학자 류씨는 “전북 여산에서 충남 공주 경천까지 가는 길의 지명이 춘향전에 7군데나 나와 이 구간이 ‘춘향전 옛길’이라고 불린다.”고 말했다. 새다리도 이 가운데 하나다. 부적면 신교리 논산천에 있는 이 다리는 새로운 교량이 건설되면서 다리를 놓았던 돌이 냇가에 묻혔다고 한다. 부적면사무소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진 옛길은 지금도 넓은 논 사이를 달린다. 호남선 건널목을 건너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2리의 자연부락인 지밭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무당이 후백제를 멸망시키려 왔던 왕건의 꿈을 해몽해줘 왕건이 이를 믿고 공격, 끝내 멸망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서용호(81)씨는 “한양으로 가던 길은 농로가 됐거나 경지 정리로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푸념했다. 4∼5㎞쯤 되는 비포장 농로를 달리다 보면 노성천이 나오고 이 하천을 건너자마자 초포마을이 나온다. 이 일대 주민들은 이 마을을 ‘풀개’라 불렀다. 주소는 광석면 항월리다. 이곳은 한양을 오갈 때 반드시 거치는 마을이었다. 자연히 주막촌이 형성됐고 왈패들이 많았다.‘최장사’니 ‘팔장사’니 하는 힘센 전설적인 장사 이름이 전설로 내려온다. 주민들은 이들이 들었던 거대한 돌이 있다고 전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새로운 교량이 들어섰지만 예전 다리를 쓰던 돌들이 냇가에 흩어져 있다.20∼30년 전까지만 해도 논산장을 가려면 지나던 길이다. 주막집들은 지금 슬래브 주택으로 바뀌었다. 허름한 기와집 한 곳에서만 막걸리를 팔았다. 주민 이유영(67)씨는 “주먹 깨나 쓰던 장사들이 많아선지 ‘아사리 풀개’라고 불렀다.”면서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이곳에 5일장이 서면 노성, 상월 등 인근 동네 아이들이 무서워 오는 걸 꺼렸다.”고 회고했다. 풀개를 떠난 옛길은 노성천 옆을 따라 올라간다. 노성면으로 들어서자 교촌리 ‘윤증고택’이 맞는다. 윤증(1629∼1714) 선생은 조선시대 숙종 때 한학자로 스승 송시열 선생의 논리를 비판하는 등 성품이 대쪽 같았다. 대사헌, 우의정 등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고택은 윤증의 성품대로 간결하고 품위가 있다. 중부지역 양식에 남도풍이 가미돼 있다. 중요민속자료 190호다. 길은 이어 상월면을 거쳐 공주시 계룡면으로 들어간다. 논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부인2리 지밭마을 유래 “옛날 선비들이 한양에 말 타고 갈 때 서낭당 앞에서 내려서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대유.” 논산시 부적면 부인2리 지밭마을 주민 오영근(65)씨는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을 전하면서 대뜸 이렇게 말했다. 마을안 논 옆에 세워져 있는 서낭당은 무당을 모신 곳이다. 이 무당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의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사건과 관련이 있다. 왕건이 후백제를 치려고 개태사 근처에 진을 치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자신이 무쇠솥을 쓰고 물속에 빠지는 꿈이었다. 왕건이 “불길하다.”고 고민하자 부하들이 “이 마을에 해몽을 잘하는 무당이 있으니 한번 물어보자.”고 했다. 무당의 딸로부터 ‘흉몽’이라는 얘기를 듣고 낙심해 되돌아가던 왕건을 때마침 집에 돌아온 무당이 붙잡았다. 무당은 “길몽이다. 솥은 왕관을, 물은 등극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왕건은 무당의 말에 곧바로 후백제를 쳐 멸망시켰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뒤 무당의 은혜를 갚고자 ‘부인’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땅을 하사했다. 지금의 마을 이름도 이 작위명에서 유래하고 있다. 지밭이란 자연부락명도 ‘제사를 지내는 데 쓰는 밭’이란 뜻에서 변형됐다. 오씨는 “쳐다봐서 보이는 땅은 전부가 무당 땅이었다고 해요.”라고 전했다. 재미있는 것은 왕건이 하사한 엄청나게 넓은 토지의 일부가 지금도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 땅은 두 마지기(400평 정도)로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경작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온 쌀로 매년 대보름 전날 마을 서낭당에서 무당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요즘 서낭당 앞에는 건축폐기물이 어지럽게 쌓여 있지만 제사 때는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지낸다고 한다. 제삿날이면 일부 주민이 풍물을 치면서 서낭당으로 올라간다. 제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이다. 이 풍물소리를 들은 이웃들이 준비해놓은 음식을 하나씩 가지고 뒤따른다. 제사는 성대하다. 오씨와 함께 도랑에서 우렁이와 참게를 잡고 있던 서일웅(67)씨는 “(제사를 지내는) 그날은 주민 모두가 멸치도 안먹는다.”고 웃었다. 비린 것을 피할 정도로 무당의 제사를 신성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여년 전만 해도 제사 때면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했다.”면서 “지금도 제삿날 직전에 초상집에 갔던 주민은 서낭당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논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4) 나주 영산포~청암역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4) 나주 영산포~청암역

    전남 해남 땅끝에서 시작한 호남대로는 강진∼영암을 거쳐 나주땅에 이른다. 영암의 신북과 나주의 반남·왕곡 들녘을 지나면 영산포가 눈앞에 펼쳐진다. 봇짐을 짊어진 상인과, 말을 타고 한양에 변방 소식을 전하는 관리들은 크나큰 장애물 하나를 만난다. 바로 영산강이다. ●수많은 배 오가던 영산포 76년부터 뱃길 끊겨 영산강은 담양군 용추골에서 광주∼나주∼함평∼영암을 거쳐 서해로 빠져 나가는 115.5㎞의 물줄기이다. 영산강은 고대 때부터 내륙 수송로나 왜구의 침략로, 호남평야의 세곡(稅穀)을 한양으로 실어나르는 통로로 사용됐다. 또 고대 문화를 꽃피웠던 반남 고분군 세력과 고려 건국의 기반이 된 나주 해상 세력의 ‘모태’이기도 하다. 영산포는 ‘19세기 나주 지도’ 등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수심이 10여m로 중선배(20∼40t)와 전함이 드나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영산포는 고려말 왜구의 창궐로 흑산도 인근 영산현이 통째로 옮겨오면서 오늘날의 이름이 생겨났다. 그 이후 강변엔 자연스레 도시가 형성되고 내륙과 해상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고려때 세워진 영강동의 조창(漕倉)이 조선시대(1512년) 때 영광의 법성포로 옮겨지면서 한때 한적한 강변마을로 변했다. 그러나 1897년 목포항이 개항하고 일본 사람이 증기선을 타고 몰려든 1900년대 초부터는 또다시 내륙 포구로서 번창했다.1914년 호남선 철로가 개설되면서 정기 여객선이 끊겼지만 소금이나 젓갈 등을 실어나르는 포구로 여전히 큰 몫을 담당했다. 영산포가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1976년 영산강 하구둑 착공과 함께 뱃길이 끊기면서부터이다. 지금은 상류의 4개 댐과 하구언 건설로 바닷물 유입이 차단돼 유량이 거의 없다. 강바닥이 드러나고 둔치는 주민들의 체육시설 공간으로 변했다. 예전의 나루터 자리엔 영산대교와 영산교가 연결돼 차량들이 오간다. 영산강 뱃길연구소장’ 김창원(56)씨는 “어릴 적에 수많은 배들이 오가고 사람이 북적였다.”며 “강바닥의 퇴적토를 긁어내고 뱃길을 복원해 포구의 옛 영화를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왕건이 둘째부인 장화왕후 만났다는 ‘완사천´ 남쪽에서부터 한양을 향해 먼길을 재촉한 옛 사람들은 영산포에서 여장을 풀었다. 영산포 옛 선창 인근에 위치한 홍해원(洪海院)을 비롯해 주막과 여관촌은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으로 북적였다. 나주문화원 김준혁(47) 사무국장은 “옛 사람들은 홍수가 나 강물이 범람하거나 조수간만의 차로 강을 건너기 어려울 때 영산포에서 쉬어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영산포에서 나주읍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창동 ‘새끼내들’∼영강진(나루터)을 주로 이용했다.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 견훤을 치기 위해 나주에 왔을 때 둥구나루에 정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둥구나루는 직강화 공사 전엔 강이 둥글게 흐르는 만곡형으로 군선을 숨기기에 알맞은 천혜의 포구였다. ‘완사천(浣紗泉) 전설’도 이곳에서 생겨났다. 왕건이 영산강에 정박하던 중 무지개가 피어올라 와 그곳으로 따라가 보니 한 처녀가 샘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처녀로부터 물을 얻어 마신 왕건은 그를 둘째 부인으로 삼아 고려 2대 왕인 혜종을 낳았다. 장화왕후가 된 오씨부인 이야기이다. 이는 고대사회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격동기에 나주 호족 세력과 연합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둥구나루∼완사천은 현재 제방으로 막혀 있다.‘1989년 대홍수’때 영산강 둑이 무너지면서 이 일대 마을이 모두 침수되는 피해가 나기도 했다. ●다산 머물던 삼거리 주막집 흔적도 없이… 둥구나루는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로 유배를 가던 다산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이 헤어졌던 포구로 알려진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영산강을 건너 강진으로 향했고, 정약전은 배로 흑산도로 떠났다. 남고문을 지나 옛 나주읍성으로 들어서니 향교·관아터·정자·목사 내아(牧使內衙) 등 목사골임을 알려주는 유적이 즐비하다. 옛 사람들은 고관 대작들이 몰려 있는 읍성을 피해 한적한 원촌(院村)에서 하룻밤을 묵거나 주변의 주막에서 여독을 풀었다. 나주읍성 동문을 빠져 나와 나주원협 공판장을 거쳐 북쪽으로 1㎞쯤 가다 보면 성북동 청동마을이 나온다. 현재 70여가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옛 ‘청암역’ 자리였다. 마을회관 앞에는 지금도 말 먹이통으로 사용됐던 폭 1m, 길이 2m 크기의 구유가 놓여 있다. 김정우(66)통장은 “마을 어른들로부터 이곳에 큰 역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며 “돌로 만든 말 구유가 2개 있었으나 1개는 유실됐다.”고 말했다. 관리들은 청암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광주나 장성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과 정약전이 ‘죄인’ 신분으로 귀양올 때는 청암역에서 서북쪽으로 2㎞쯤 떨어진 일반 주막을 이용했다. 다산은 읍성 외곽인 지금의 나주시 대호동 동신대 앞 삼거리 밤나무골(栗亭)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새며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율정별(栗亭別)’이란 시를 남겼다. ‘띠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 푸르르 꺼지려는데/일어나 샛별을 보노라니 헤어질 일 참담하네(중략)….’다산이 머물던 삼거리 주막집은 간데 없고 그 자리엔 미용실과 식당이 손님을 맞고 있다. 다산 형제가 헤어진 길목은 북쪽을 향해 영산강 홍수통제소∼노안∼광주 송정리로 이어진다. 나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향토사 전문가 윤여정씨가 본 나주 영산포를 비롯한 나주는 국도 1호선과 13호선이 교차하는 교통 중심지이다.20세기 초 지금의 신작로와 철로가 뚫리기 이전에는 주로 영산강을 이용한 뱃길이 주요 교통 수단이었다. 내륙을 통과하는 길은 걷거나 말을 타고 다니던 역원(驛院)체제로 운영됐다. 고려 현종 때 목(牧)으로 지정된 나주는 조선시대 때까지 호남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로 위상을 유지했다. 이 때문에 나주 이남 지역의 옛길이 ‘목사골’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뭍으로 나온 제주도 사람들과 남해안 거주민·주둔군·관리들은 나주의 청암역과 그 주변에 산재한 원(院)집에 머물렀다. 해남의 녹산·별진역과 강진 통로역은 영암 영보역·신안역을 거쳐 나주의 청암역으로 이어진다. 호남지방 역 중 찰방이 배치된 곳은 청암역(나주)·경양역(광주)·벽사역(장흥)·삼례역(전주)·오수역(임실) 등에 불과했다. 나주가 1000여년 동안 호남의 중심지로 자리한 것은 고려 건국과도 무관치 않다. 후삼국 때 견훤이 근거지를 무진주(광주)에서 완산주(전주)로 옮기자 나주지역 토호들은 소외감을 가졌다. 이 때 궁예의 수군 장수였던 왕건은 영산강 일대에서 견훤군에 크게 승리하고 나주 호족과 손을 잡는다. 그는 호족 오다련의 딸과 혼인하고 이 지역을 근거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훗날 장화왕후가 된 오씨 부인은 왕건이 찾아 오기 며칠 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혼인 후 혜종이 태어났는데, 왕이 태어난 마을이라 해서 흥룡사(興龍祠·현재의 나주시청 터)란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오씨 부인이 빨래하던 샘인 완사천 옆에는 왕후의 비(碑)가 남아 있다. ●윤여정(나주시 신활력사업추진TF팀장·53)씨는 ‘한자에 빼앗긴 토박이 땅이름’이란 책을 펴낸 향토사 전문가.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3) 월출산~나주 영산포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3) 월출산~나주 영산포

    전남 영암은 ‘소금강’인 월출산(해발 809m) 자락에 휘감겨 있다. 귀양길에 재를 넘던 윤선도가 “미운 게 안개로구나.”라고 탄식했듯, 기암괴석 봉우리는 늘상 구름 속에 노닌다. 월출산은 해남·강진·장흥쪽 길목이어서 나그네 쉼터로 그만이다. 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 일본에 천자문을 전한 왕인박사,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최지몽이 월출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한다. 천년 고찰 도갑사, 왕인박사 유적지에는 산의 정기를 받으려는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는다. ●덕진 할머니의 돌다리 30여m 복원 한때 기선(汽船)이 드나든 포구였던 영암천은 1981년 영산강둑이 바닷물을 막으면서 작은 시냇가로 오그라들었다. 옛날 영암천은 덕진포로 불렸다. 포구 양쪽 언덕배기에 나그네들의 여정을 풀어주는 주막이 즐비했다.‘덕진’은 이곳 주막의 주모 이름이다. 그가 평생 모은 300냥으로 1000척(尺·303m) 되는 돌다리를 놨다고 전한다. 당시 돌다리 모습이 하천에 30여m 복원됐다. 앞에는 덕진 숭덕비가 세워졌다. 조만국(78·덕진면 장선리) 영암노인대학장은 “해마다 5월5일 단오날에 덕진면장 주관으로 면민들이 덕진 추모제를 지낸다.”고 말했다. 조씨와 함께 나온 노인들은 “왕건과 견훤이 사생결단을 벌인 곳이 덕진포 전투이고 이 싸움에서 이긴 왕건이 금성(나주)에 입성해 통일 발판을 마련한다.”고 말했다. 영암천 앞 벌판 한가운데쯤이 영보역이다. 이 역은 통일신라 멸망으로 경주로 가는 길이 쇠락하면서 조선 초에 덕진면 영보리에서 영암읍으로 옮겨왔다. 그래서 지명 그대로 영보역이다. 당시 영보역 자리에는 영암 공설운동장이 들어섰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모이게 하는 기능은 같지만 영보역을 기억하는 주민도, 푯말도 없다. 다만 영암산림조합 뒤편 마을인 역리 1∼4구가 역이 있었다는 명맥을 잇는다. 영보역에서 나주 영산강 앞까지는 28㎞(70리길)다. 오가는 데 가파른 고갯길이 없고 낮은 구릉이다. 옛길도 국도 13호선(나주∼강진)과 겹치는 등 엇비슷하다. 길 양쪽 들판 여기저기에 벼농사용 물을 가둬두는 인공 저수지가 보인다. 옛길을 짚어가는 주변 마을에는 ‘원등’이라고 불리는 곳이 적잖았다. 원님이 말을 타고 가다 발을 쉬게 하던 곳이다. 마을회관에서 수박을 먹던 문재현(73·신북면 이천리)씨는 “어렸을 때 원등에서 놀다가 땅을 파보면 깨진 기왓장과 주춧돌이 나왔다.”고 기억했다. 세월 속에 정자는 오간 데 없고 구부러진 소나무 대여섯 그루만 풍상을 견디며 자리를 지킨다. 영암군 문헌에는 이천리에 있던 부소원에서 나그네들이 쉬어갔다고 했다. 그래선지 마을 노인들은 옛길을 그런대로 잘 기억했다. 노인들은 “원등에서 100m쯤 아래로 가면 양반들이 타고 가던 말에게 물을 먹이던 방죽이 있고 그곳을 말 물통이라고 불렀다.”고 입을 모았다. 이곳에서 백제와 신라군이 맞붙어 싸웠다는 전설 같은 말도 곁들였다. 이곳은 수백년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연꽃과 억새 등으로 뒤덮인 손바닥만 한 방죽이었다. 영암휴게소 건너편 대방제(저수지)에서 조금 올라간 곳이다. 동네사람들은 나그네들이 행장을 추스른 뒤 방죽 둑길을 따라 한양길을 재촉했다고 덧붙였다. 이 언덕배기 옆으로 난 국도 13호선도 옛길처럼 오르막이다. 영보역에서 12㎞(30리)쯤 온 지점이니 주막거리가 있었을 법하다. ●100여년 전 새로 생긴 고을 ‘신북면´ 지금은 주유소를 겸한 영암휴게소가 주막집을 대신하고 있다. 비탈길이 평지로 바뀔 즈음엔 100여년 전에 새로 생긴 고을이라는 뜻의 신북면이 있다. 면 소재지인 월평리에서 ‘보해마트’를 하는 류진문(74)씨는 생생한 기억을 되살렸다. 류씨는 “13호선 바로 옆 연안주유소 뒤로 산비탈 길이 있었는데 달구지가 다닐 만큼 넓었다.”고 했다. 신북면 소재지에서 4㎞쯤 서쪽으로 가면 경주 왕릉에 버금가는 나주 반남 고분군이다. 반남면 자미산(해발 98m) 좌우 1.8㎞ 안에 무덤 35개가 흩어져 있다. 고대국가 형성 이전에 영산강을 지배하던 세력들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일제가 4트럭 분량 유물을 마구 도굴하고 덮어버렸다고 한다. 이천∼호산∼월평을 지나 6∼7㎞를 더 가면 나주시 세지면 죽동리와 왕곡면 신원리로 접어든다. 국도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신가리가 있었다. 신가리1구 한재근(77)씨는 “말이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을 때 여기에 신안역이라는 역촌이 자리했다.”고 말했다. 포장도로가 신원리1구 마을 한복판을 뚫고 지나면서 마을이 나눠졌다. 나주 신원리 보건진료소는 길 아래쪽에 있다. 지금부터 200년 전에 생긴 이 마을을 사람들은 ‘쌍다리’라고 부른다. 면장을 지낸 황치봉(74·신원1구)씨는 “원님이 말을 타고 한양 다니기 좋게 쌍다리를 놨다는 말을 들었다. 영산강 흘러드는 만봉천의 작은 고랑에 어른 키만한 돌 2개로 놓은 쌍다리를 본 적이 있다.”고 전했다. ●원님이 지났던 쌍다리 77년 사라져 이 마을 노인회관 앞 회관 건립 표지석에는 ‘1977년도에 원님이 지났던 쌍다리가 경지정리로 사라졌다.’고 적었다. 또 마을에서 해마다 겪는 홍수를 피하기 위해 농악놀이와 함께 꼭 거문고를 타서 액운을 막았다고 한다. 그래서 신원리는 ‘거문고 금’자를 써서 금동마을로도 불린다. 지금은 영산강 제방으로 물길이 틀어져 마을 앞은 논으로 변했다. 논둑에 서서 고개를 빼들면 양산리와 장산리 들판이 다가선다. 흐르는 땀을 닦고 선들바람을 쐬니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이 반긴다. 영암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장보고와 평생 동지 정년 선암마을 앞뒷집서 출생 “영보역은 통일신라 말까지 수도인 경주로 가는 가장 큰 길목으로 내동마을 뒷산인 옥녀봉 능선 야트막한 자락을 넘으면 영암 금정면으로 이어집니다.” 신희범(74·호남의병 연구가·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씨는 이 길(영보리∼경주간)은 지금으로 치면 고속도로 나들목만큼이나 우마차와 사람들 왕래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영보역 주변에는 동헌과 객사, 주막, 난전, 술집 등으로 번잡했다. 여기에다 길을 재촉하는 외지인들이 뒤엉켜 시끌벅적했다.6·25전쟁 때는 이 길 옆으로 작전 도로가 났다. 지금은 광주∼완도간 고속도로 건설 예정지다. 하지만 조선시대 초 영보역은 덕진면 영보리에서 지금의 영암읍내로 옮겨갔다. 지금은 ‘원조’ 영보역도, 그후 이전한 영보역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덕진면 내동·강곡 등 12개 마을을 통틀어 영보리로 일컫는다. 대부분 거창 신씨, 전주 최씨 일문이 산다. 신씨는 “1967년에 마을 덕진포 앞에서 배수로 공사를 할 때 쏟아져 나온 배 뻘판 등이 마을 앞까지 바다였음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박인규(76·송석정 마을)씨는 “지금은 간척지로 논이지만 어릴 적에 마을 이름을 선창마을 또는 선창머리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내동마을 앞에는 오늘날 학교인 영보정(永保亭·지방기념물 104호)이 400년 된 소나무(나무둘레 2.8m)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곳 학도들이 1931년 형제봉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630년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두 집안이 화의를 다지며 같이 세웠다. 처마 밑 ‘영보정’이란 현판은 조선 명필 한석봉이 쓴 것이다. 이곳 출신인 신희남(1580년 강원 관찰사)이 그의 스승이다. 신씨는 이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장보고(본명 궁복)와 그의 평생 동지인 정년이 이곳 선암마을 앞뒷집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지금껏 장보고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출신지가 ‘해도인(海島人)’으로만 기록돼 있을 뿐이다. 신씨는 “예부터 이들 두 사람 때문에 선암마을은 무장골로 불렸다. 당시 덕진포는 완도까지 관할했는데 장보고는 마을 앞 덕진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한 뒤 이 마을은 동백나무가 많은 천민 집단인 ‘동백소’로 전락했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암 동쪽 15리 지점에 동백소가 있다’라고만 적었다. 영암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6) 인조반정의 외교적 파장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26) 인조반정의 외교적 파장 Ⅲ

    명 조정이 인조반정을 ‘찬탈’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조선의 새 정권을 승인하기로 결정한 것은 분명 자신들이 처한 수세(守勢)를 염두에 둔 결단이었다. 명 조정은 마치 ‘모문룡의 은혜’ 때문에 인조를 책봉하는 것처럼 포장했다.‘자격이 되지 않는 인조를 승인하는 과정에서 모문룡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강조함으로써 조선으로 하여금 모문룡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에 나서도록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後金과의 대결 열기가 고조되다 모문룡 또한 선수를 쳤다. 그는 1623년 4월, 서울로 사람을 보내 인조에게 망의(衣)와 옥대(玉帶)를 선물했다. 그것은 모두 국왕을 상징하는 물품이었다. 당시는 명 조정이 아직 인조를 책봉하기로 결정하기 한참 전이었다. 인조에게는 분명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 고무되었던 것일까? 인조는 명나라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명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모문룡이 보낸 응시태(應時泰), 시가달(時家達)은 물론 명 조정이 파견한 맹양지(孟養志)를 접견했을 때, 후금에 대한 적개심을 피력하고 장차 있을 명의 정벌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신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은 ‘백성들이 군신(君臣)의 대의는 잘 몰라도 임진년에 명나라가 베푼 재조지은(再造之恩)에는 감격하고 있다.’면서 후금을 치는 데 동참해야 한다고 했다. 반정공신 이귀(李貴)는 한술 더 떴다. 그는 “모문룡과 합세해야만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고 한 뒤, 자신이 직접 가도( 島)로 가겠다고 나섰다. 모문룡을 감동시키고 서울로 초청하여 인조와 만나도록 주선하겠다고 했다. 이처럼 친명(親明) 분위기가 높아가고 있던 상황과 맞물려 후금에 대한 적개심과 자신감은 고조되었다. 인조는 서북변의 방어를 책임질 도원수(都元帥)에 무장 장만(張晩)을 임명했다. 그러면서 ‘유사시 장만은 선봉을 이끌고, 자신은 뒤에서 3군을 거느리고 후금에 대한 친정(親征)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1623년 4월24일, 도원수 장만이 임지인 안주(安州)를 향해 출발하는 날이었다. 인조는 모화관(慕華館)까지 거둥하여 그를 환송했다. 당시 인조는 융복(戎服) 차림이었다. 모화관에는 조정의 백관들과 종실(宗室)들까지 모두 도열해 있었다. 인조는 장만에게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했다.“명령을 어기는 자는 이것으로 처치하라.”는 주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명을 도와 후금을 정벌하겠다는 조선의 의지만큼은 결연했다. 이윽고 6월1일, 명의 등래순무(登萊巡撫) 손원화(孫元化)는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자문(咨文)을 보내 왔다. 비변사는 “우리는 지금 군사를 징발하고 양식을 마련해 군문(軍門)의 영을 기다리고 있다.”며 “모문룡과 합세해 요동을 회복하겠다.”는 내용으로 답신을 보냈다. 과거 비슷한 상황에서 광해군이 취했던 애매한 태도와는 영 딴판이었다. 이같은 조선의 태도에 고무되었는지 모문룡은 “조선과 합세해 요동을 정벌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흘리고 있었다. ●책봉례 주관 明환관 은 13만냥 뺏어 조선에서 후금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가고 있던 1625년 6월, 명의 태감(太監) 왕민정(王敏政)과 호양보(胡良輔)가 서울로 들어왔다. 명 조정이 인조를 조선 국왕으로 인정하는 공식적인 책봉례(冊封禮)를 주관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새 정권의 숙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모두 환관(宦官)이었던 왕민정과 호양보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조선에 왔다.1624년 2월, 명 조정이 인조를 책봉하기로 결정했을 무렵부터 명의 환관들은 입맛을 다셨다. 조선으로 서로 가겠다고 다투었다. 두 사람이 선발된 것은, 당시 명의 실권자나 마찬가지였던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수만 냥의 은을 뇌물로 바쳤기 때문이었다. 명의 천계(天啓) 황제는 두 사람에게 은 3000냥을 여비로 하사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은을 징색하여 원한을 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본전을 뽑으려고’ 덤볐다. 왕민정 등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매일 1만 냥씩의 은을 달라고 요구했다. 조선 조정이 접대를 위해 준비한 한강 유람 등의 일정도 거부했다. 오로지 은이었다. 조정은 그들을 위해 양화진(楊花津) 등지에 선박을 미리 대기시켜 놓았다. 그들이 유람을 거부하자 배를 강제로 차출당했던 어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갔다. 이들이 은 5000냥으로 인삼 500근을 구입해 달라고 하자 호조판서 심열(沈悅)은 개성부(開城府)로 하여금 바꾸어 주게 하였다. 개성 유수(留守) 민성징(閔聖徵)은 방법을 고민하다가 결국 가호(家戶)마다 강제로 징수했다. 제때 납입하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체포되었고, 그 때문에 개성부의 옥이 가득 찼다. 독촉과 닦달 때문에 결국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왕민정 등은 인삼을 얻은 뒤에는 지불했던 은을 유유히 회수했다. 조선 조정은 접대를 위해 은 13만 냥을 준비했다. 조선 내부의 은만으로는 모자라 모문룡에게 빌린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13만 냥이란 액수는 광해군대 조선에 왔던 환관들이 수탈했던 양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무리인 줄을 알면서도 왕민정 등의 요구를 들어주었다.2년 가까이나 끌어왔던 책봉을 마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광해군대의 ‘과거’를 비판했지만 인조정권 역시 명의 태감들이 자행한 수탈을 피해 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지워지지 않은 ‘흔적’ 왕민정 등이 와서 책봉례를 거행함으로써 인조는 공식적으로 ‘조선 국왕’이 되었다. 인조와 새 정권은 이제 정통성을 확보했다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명 조정 일각에서는 여전히 인조를 삐딱하게 보는 시선이 존재했다.1627년(인조 5) 명의 예부상서는 북경에 왔던 조선 사신 일행에게 미묘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광해군의 생존 여부와 인조가 조선 팔도를 확실하게 지배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당황한 조선 사신 김지수(金地粹)는 인조가 조선 내에서 만인의 추대를 받았다는 것과 명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을 거듭 환기시켜야 했다. 인조반정을 삐딱하게 보는 명의 태도는 역사서 속에도 흔적을 남겼다.1623년 조선에서 정변이 일어났음을 기록했던 명의 ‘희종실록(熹宗實錄)’과 사찬(私撰) 사서(史書)인 ‘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에는 여전히 인조반정을 ‘찬탈’로 기록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인지했다. 병자호란 직전 북경에 갔다가 우연히 ‘양조종신록’을 구입한 고용후(高用厚)는 ‘찬탈이라는 기사를 보는 순간 머리털이 거꾸로 서고 간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후 조선 조정은 명 조정을 상대로 교섭하여 ‘찬탈’이라는 용어를 제거하려 했으나 1644년 명이 멸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찬탈’ 운운하는 기사를 고치는 것은 효종대 이후에도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수정하지 않을 경우, 인조의 뒤를 이은 역대 왕들은 전부 ‘난신적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찬탈’이라고 적어 놓은 당사자인 명은 사라지고 없었다. 조선 조정은 하는 수 없이 청(淸)을 상대로 교섭에 나섰다. 그런데 그것은 그다지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에도 조선은 여전히 청을 ‘오랑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오랑캐’에게 명나라 시절에 만들어진 ‘과거의 흔적’을 지워 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청 또한 조선의 수정 요청에 그다지 기꺼운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현종대 이후 역대 왕들은 대대로 청 조정에 변무사(辨誣使)를 보내 사정했고,‘양조종신록’ 기사의 수정 작업은 영조 대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하지만 ‘희종실록’의 기사는 끝내 고치지 못했다. 자신들의 전략적 필요 때문에 인조를 책봉하긴 했지만, 인조반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명의 이중적 태도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중국, 백제·신라도 자국사 편입 시도”

    ‘신라는 진나라 유민이 세웠고, 백제는 고대 중국의 변방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이다.’ 동북공정의 출발점인 ‘고대 중국 고구려역사 총론’(2001년, 중국 헤이룽장교육출판사, 이하 총론)에 적혀 있는 내용이 공개됐다. 고구려연구회 회장을 지낸 서길수 서경대 교수가 ‘중국이 쓴 고구려 역사’(여유당 펴냄)라는 이름으로 번역한 총론에는 중국 학계에서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와 백제까지도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고 있는 사실이 담겨 있다. 집필진은 ‘고대 중국 고구려 역사 속론’(2003년, 이하 속론)과 마찬가지로 동북공정의 주축 역할을 맡은 마다정(馬大正)·양바오룽(楊保隆)·겅톄화(耿鐵華)·리다룽(李大龍)·권혁수(權赫秀)·화리(華立) 등 6명. 서 교수에 따르면 총론에는 ▲고구려는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예맥족이 건국했고 ▲고구려 멸망후 고구려인 대부분이 중국으로 귀속했으며 ▲신라는 진나라 유민이 세운 중국의 번국(蕃國·제후국) 가운데 하나일 뿐더러 ▲중국 소수민족인 부여인이 세운 백제도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다. 서 교수는 중국 스스로 고구려를 일컬어 해동삼국(海東三國) 가운데 하나로 거론한 점, 중국 어떤 정사(正史)에도 없는 ‘고구려본기’가 삼국사기에는 있는 점, 고구려인은 스스로를 천제의 아들(天帝之子)이라고 자부한 점, 독자연호를 사용한 점 등을 근거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와는 다른 독자적인 역사라고 주장했다. 신라와 백제까지 자국사에 포함시키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서 교수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전 중국 총리가 40여년전인 1963년 6월28일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 당시, 역사왜곡 및 고대 정권의 한반도 침략을 사과한 내용을 소개했다. 특히 63년 8월부터 65년 7월까지 중국과 북한이 공동고고학발굴대를 구성해 고구려와 발해사 유적을 발굴한 선례를 중국측이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생의 역사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책꽂이]

    ●석류나무 그늘 아래(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미래M&B 펴냄) 파키스탄 출신의 영국 좌파활동가인 저자가 아랍 역사를 알리기 위해 쓴 역사소설.1990년 1차 걸프전 당시 BBC 방송의 한 논평자가 “아랍인에게는 문화가 없다.”고 말한 데 격분해 구상했다는 ‘이슬람 3부작’ 가운데 제2편이다. 제1편 ‘술탄 살라딘’은 십자군 전쟁의 영웅 살라딘의 행적을 통해 이슬람 역사를 이야기했다. 이 책에서는 800년간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무어인의 비극적인 멸망사를 그린다.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카스티야 연합왕국이 스페인 최후의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를 점령하며 이슬람 탄압을 본격화한 1490년대 이베리아반도가 무대다.1만 3000원. ●쌀과 소금의 시대(킴 스탠리 로빈슨 지음, 박종윤 옮김, 열림원 펴냄) ‘14세기 만약 유럽지역이 멸망했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세계사를 재구성한 대체역사소설.14세기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유럽의 전체 인구는 3분의1가량 줄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유럽 인구의 99%에 달했다는 전제하에 중국과 이슬람세계가 주도하는 역사를 전개한다. 제목 ‘쌀과 소금의 시대’는 동양권의 삶, 동양이 헤게모니를 잡은 시대를 상징한다. 작가는 ‘붉은화성’‘녹색화성’‘푸른화성’ 등 화성3부작으로 권위있는 SF문학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받았다. 전2권 각권 1만 4500원.●순교자의 나라(박도원 지음, 예담 펴냄) 한국 천주교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801년의 신유박해와 1839년의 기해박해다. 이 두번의 박해는 자생하던 조선 천주교를 뒷걸음치게 했을 뿐 아니라 서학(西學)으로 불리던 근대문명과의 접촉도 차단했다. 이 소설에는 우리나라에 가톨릭 신앙의 씨앗을 처음 뿌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1800년 정조의 돌연한 죽음 이후 남인 시파와 노론 벽파의 정쟁에 휘말려 조선 천주교인들은 정치적 희생양이 된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관대했던 남인들은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남인을 두둔한 정조가 죽자 노론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매도하고 천주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다. 신유박해의 시작이다. 전4권 각권 9500원.●그들도 한때는 인간이었다(막심 고리키 지음, 서은주 옮김, 큰나무 펴냄) 러시아 자연주의 작가 막심 고리키(본명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슈코프)의 소설. 도시로 대변되는 중심부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일탈적 삶을 통해 인간성 실추의 문제를 다뤘다. 주인공 쿠발다 대위가 운영하는 여인숙에 모여든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소설의 기둥을 이룬다. 저자의 예명 고리키는 ‘견디기 어려운’ ‘신랄한’이란 뜻.8500원.
  • [어린이책꽂이]

    ●교과서와 함께 읽는 우리 근현대사(원병조 지음, 주니어김영사 펴냄) 간도는 만주의 지린성 동남부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옛날 고구려와 발해 때부터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지만, 거란족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오랫동안 북방 유목민족의 터전이 됐다.17세기 들어 청을 건국한 여진족은 간도 지방을 신성시하면서 이 지역에 여진족 외에 다른 민족이 들어와 사는 것을 금했다. 때문에 이 지역은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됐고,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땅이란 뜻에서 간도(間島)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 역사만화책에는 이처럼 밀도있는 배경지식이 가득 실렸다.9900원. ●국어 실력이 밥먹여 준다-초등낱말편2(김경원 등 지음, 열린박물관 펴냄) ‘돌’이 낱말 머리에 붙으면 어떤 뜻이 될까. 이때 돌은 바위나 돌멩이를 가리키지 않는다. 돌배, 돌미나리, 돌삼(야생인삼)처럼 논이나 밭에서 가꾸지 않은 야생식물을 낮잡아 말할 때 돌이 붙는다. 돌과 비슷한 구실을 하는 말이 ‘개’다. 개떡, 개나리, 개비름 등 별로 좋지 않은 것, 질이 낮은 것, 함부로 된 것을 일컫는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개나리도 나리 중에서 꽃이 작아 볼품이 없다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생각의 힘을 키워주는 국어풀이사전.8900원. ●식물의 힘(카트린 바동 엮음, 김동찬 옮김, 푸른나무 펴냄) 서양에 기독교가 생겨나기 이전의 종교였던 드루이드교 사람들은 숲 속에 있는 늙은 떡갈나무 아래로 가 금도끼나 금낫으로 겨우살이를 베어 왔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며 겨우살이의 신성한 능력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시어머니 방석’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둥근 공모양의 공선인장은 1m이상 자란다. 이 선인장의 열매는 튜나(tuna)라고 불리는데, 과즙이 많아 사막을 지나는 나그네들이 목을 축이기도 한다. 경이로운 식물들에 관한 이야기가 눈길을 끄는 책.9500원. ●빛나는 우리 발명품(햇살과나무꾼 지음, 해와나무 펴냄) 1231년부터 1259년까지 고려는 몽골에 여섯차례나 침략을 당했다. 그러자 고려 사람들은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군을 몰아내기 위해 세상의 모든 불경을 목판에 새겼다.200자 원고지 25만장이 넘는 분량이다. 흙과 불이 빚어낸 고려시대의 푸른 도자기 고려청자도 자랑거리. 청자는 흙으로 빚어 800도에서 한번 구워낸 다음 철 성분이 든 유약을 발라 1300도 정도에서 한번 더 구워 만든다.‘옛 물건으로 만나는 우리 문화시리즈’ 가운데 한권.1만 3000원.
  • [씨줄날줄] 成忠과 允忠/이용원 수석논설위원

    전쟁기념관이 ‘4월의 호국인물’로 백제 장군 윤충(允忠)을 선정하면서, 그가 백제 말기 해군을 이끌고 당나라를 공격해 월주(越州) 일대를 점령한 사실을 공적의 한 부분으로 꼽았다. 윤충이란 이름도 귀에 선데, 바다 건너 당나라 땅까지 공략했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윤충과 그의 형 성충(成忠)에 관한 기록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가장 상세히 남아 있다. 성충·윤충 형제는 성이 부여(扶餘)씨로 백제의 왕족이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이 등극해 형 성충에게 나라를 다스릴 방책을 물었다. 성충은, 신라가 왕 교체기의 혼란을 노려 가잠성(현 괴산)을 공격하겠지만 성주인 계백 장군이 능히 지켜내리라 예상했다. 아울러 그 틈을 타 백제군이 대야주(현 합천)를 공격하면 큰 승리를 얻으리라고 했다. 신라군이 가잠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은 즉시 동생 윤충을 대장군 삼아 대야주를 기습케 했다. 이 싸움에서 김춘추의 딸과 성주인 사위가 피살됐고, 옛 가야 땅 40여성이 백제에 귀속했다. 가잠성은 물론 끄떡없었다. 성충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성충·윤충 형제의 활약은 계속된다. 성충은 당이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전쟁을 할 것이므로 그 사이에 중국 강남(양자강 이남)을 점령해야 한다고 의자왕에게 진언했다. 이에 따라 윤충은 선단을 이끌고 가 월주(현 紹興·소흥) 일대를 점령한 뒤 여기에서 군사를 키우며 강남 전역을 도모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의자왕이 간신배·무녀의 꾐에 빠져 윤충을 소환하자 윤충은 분에 못이겨 죽고 말았다. 월주 땅은 곧 당나라에 도로 빼앗겼다. 성충 또한 의자왕에게 간하다가 옥에 갇히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의자왕에게 제갈공명·관우나 다름없던 성충·윤충 형제가 사라진 뒤로 백제는 멸망의 수순을 밟아나갔다. 백제가 중국 땅에 영토를 확장했다는 학설은 ‘요서경략설’을 비롯해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단재가 언급한 ‘의자왕 시대의 월주 경영’은 그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 성충·윤충의 충성심을 기리는 것과 함께 ‘월주 경영’의 실체를 상세히 밝히는 일은 이 시대에 역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이 떠맡아야 할 책무가 아닌가 한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열린세상] 300/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세스의 수십만 대군을 테르모필(뜨거운 문)의 협곡에서 저지했던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와 300인의 전사.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침공을 맞았을 때,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가 멸망하거나, 아니면 스파르타의 왕이 죽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헤라클레스의 후예는 물론 후자를 운명으로 선택한다. ‘300’은 바로 이 전설적인 전투를 다룬 영화다. 아니나 다를까, 페르시아의 후예들이 이 영화를 보고 발끈했다고 한다. 이란 대통령의 문화정책 보좌관은 “이 영화가 역사적 진실을 왜곡했을 뿐 아니라 이란을 모욕하고 있다.”고 말했고, 이란의 유력한 신문들 역시 “할리우드가 이란에 전쟁을 선포했다.”거나,“미국의 대외정책을 정당화했다.”고 주장하며 격앙된 입장을 보였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며 나 역시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대사는 미국의 전투적 우익들이 즐겨 사용하는 어법. 스파르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런 대사들의 바탕에 ‘가상의 적을 향해서는 선제적, 공격적으로 대응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 깔려 있음을 모르고 이 영화를 보려면 정치의식이 어지간히 무뎌야 한다. “파병을 해야 한다.”는 왕비의 대사는 수렁에 빠진 이라크 미군을 위해 병력을 증파하라는 주문일 수도 있고, 크세르세스의 후예들을 혼내주기 위해 페르시아만에 군대를 보내야 한다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전쟁 대신 외교적 해결을 주장하는 이는 적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테론 의원이 되고, 자국 군대가 밖에서 싸우는 상황에서 반전운동을 하는 이들은 페르시아군에게 우회로를 알려준 배신자 에피알테스가 될 판이다. 영화 ‘300’에 깔려 있는 멘탈리티는 이라크전 4주년을 맞아 워싱턴 거리로 몰려나온 찬전론자들의 피켓 위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힘을 통한 평화를”,“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다”,“자유주의자들은 적을 돕고 있다”. ‘300’의 바탕에 깔려 있는 무의식은 이 전투적 우익들이 들고 나온 피켓 위에 적혀 있다. 대한민국의 어느 모자라는 평론가는 이 영화에 “병역 기피자들이 반드시 봐야 할 영화”라는 평으로써 우울하던 내게 오랜만에 폭소를 선사해 주었다. 페르시아 전쟁을 ‘동양의 전제주의에 대한 서양 민주주의의 승리’로 해석하는 틀은 역사가 깊은 편견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민주주의 역시 노예제에 기초해 있었다. 거기서 자유민들 사이에서나마 민주주의가 존재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선진적 현상이라기보다는 문자문화의 도입이 늦어 구술문화 단계에 있었던 그리스 사회의 후진성의 결과였다. 그게 나중에 운 좋게 인류의 훌륭한 문화유산이 된 것일 뿐. 영화 속에 스파르타인들이 아테네인들을 ‘게이’라고 무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사를 들으며 전쟁으로 지켜야 한다는 미국의 그 ‘자유’가 과연 아테네를 닮았나, 스파르타를 닮았나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약한 아이를 죽여 버리는 스파르타의 관습은 나치 독일의 우생학을 닮았고, 일곱 살부터 전투훈련을 시키는 스파르타의 제도는 유치원 아이들에게 소총 들고 달리게 하는 북조선 군사문화를 닮았다. ‘자유’를 생명으로 한다는 미국이 이제 와서 스파르타의 전체주의를 국가의 이상으로 여기게 된 것은 매우 이상한 역설이다.‘300’은 컴퓨터 생성 이미지로 된 새로운 유형의 정치의식, 즉 역사와 신화가 한데 어우러진 디지털 시대의 ‘판타지형 정치의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그냥 백인우익 마초 근성을 비웃으며 디지털 기술의 미학성을 즐기면 될 일이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Ⅱ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해서여진과 몽골의 연합군마저 물리친 누르하치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하다, 호이파, 울라 등 해서의 여러 부족들을 강온(强穩), 양면으로 통제하여 가장 강한 예허부(葉赫部)를 고립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당시 해서여진이 누르하치에게 맞서려면 4부 사이의 단결이 절실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 사이의 알력 때문에 누르하치에 대해 연합전선을 펼 수 없었다. 하다, 호이파, 울라는 차례대로 누르하치에게 각개격파되었고, 혼자 남은 예허는 결국 명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예허의 그 같은 전략을 꿰뚫었다. 그는 해서여진을 공략하는 동안, 자신을 견제했던 명에 몸을 낮추었다. 명의 견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여 명분을 축적하고, 내실을 다졌다. 결정적인 기회를 엿보기 위해 숨고르기를 했던 것이다. ●하다와 호이파를 멸망시키다 1599년 하다의 국주(國主) 멩게불루는 예허와의 갈등으로 전쟁을 하게 되자 누르하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멩게불루가 셋째아들을 볼모로 보내자 누르하치는 2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하다를 원조하려 했다. 다급해진 예허는 개원(開原)에 주둔한 명군 지휘부를 움직여 멩게불루를 질책했다. 누르하치와 동맹을 맺은 것을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멩게불루에게 자신을 딸을 아내로 주었다. 멩게불루는 예허의 요구를 받아들여 누르하치와의 동맹을 철회했다. 누르하치와 예허, 명 사이에 끼여 있는 약소국의 ‘눈치보기’였다. 격분한 누르하치는 하다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멩게불루를 사로잡았다. 그러자 명이 개입했다.1601년 명의 만력제(萬曆帝)는 사신을 보내 누르하치를 질책하고, 하다의 유민들을 멩게불루의 아들 우루구다이(武爾古岱)에게 반환하라고 강요했다. 누르하치는 명의 요구에 따라 유민들을 송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허가 하다를 공격하여 우루구다이를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누르하치는 명에 서신을 보내 항의했다. 자신이 하다를 격파한 것은 문제삼고, 예허의 침략은 그냥 넘어가는 이중적 태도를 따졌다. 하지만 명에 대해 정면으로 반발하는 것은 삼갔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호이파를 정벌하는 과정도 하다의 경우와 유사했다.1607년 9월, 호이파의 신료들이 모반하여 예허로 귀순하자, 국주 바인다리는 누르하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7명의 볼모를 보내왔다. 그러자 예허는 바인다리에게 “누르하치에게 볼모 보낸 것을 취소하면 귀순한 자들을 송환하겠다.”고 제의했다. 바인다리는 예허에게 속아 누르하치에게 다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누르하치는 결국 정벌에 나서 바인다리 부자를 살해하고, 호이파를 병합했다. 예허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울라 격파와 조선에 미친 파장 누르하치와 예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해서 부족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살아남았던 것은 울라였다.1596년, 울라에서 내분이 일어났을 때 누르하치는 자신이 억류하고 있었던 부잔타이(布占泰)를 송환하여 국주로 즉위시킨 바 있다.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의 은혜에 감사하여 혼인 관계를 맺고 동맹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는 수시로 향배를 바꾸어 배신과 복종을 반복했다. 부잔타이는 국주가 된 이후 모두 7차례나 누르하치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누르하치 또한 자신의 딸을 포함한 세 명의 여인들을 부잔타이에게 아내로 주어 다독였다. 부잔타이는 끝내 누르하치와 예허 사이에서 양단을 걸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누르하치가 압박하여 곤경에 처하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조선에 손을 내민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610년, 누르하치의 압박 때문에 위기에 처하자 부잔타이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직첩(職帖)을 하사해주고 교역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울라의 세력은 두만강 너머까지 미치고 있었는데 광해군(光海君)은 부잔타이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그에게 직첩을 주고, 관복을 하사했다. 광해군의 의도는 그들을 회유하여 두만강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을 탐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해군의 의도는 맞아떨어졌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보면 당시 조선 조정은 누르하치와 해서 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변의 추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1610년 2월14일의 경우,‘이 오랑캐가 겉으로는 누르하치와 화해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사이가 좋지 않은 형상이 있다. 예허와의 중간 길이 끊기고, 교역의 통로가 막혔기 때문에 우리나라 변방에서 교역하기 위해 우리의 의도를 떠보는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참으로 정확한 정세 판단이었다. 광해군과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정보를 기초로 누르하치의 실체를 명확히 인식했다. 나아가 곧 닥쳐올 ‘누르하치와 명의 대결’이라는 파장에 대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팔기제(八旗制)를 완성하다 누르하치는, 향배가 무상했던 부잔타이를 공격하여 1613년 마침내 울라부를 멸망시켰다. 예허만 빼놓고 해서여진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이윽고 1616년, 국호를 아이신(金)으로 고치고, 칸(汗·한)으로 즉위했다. 바야흐로 12세기 한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아구다(阿骨打)의 위업을 계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지배하는 종족이 다양해지고,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통치 체제가 필요했다. 주목되는 것은 바로 팔기제(八旗制)였다. 팔기제는 니루(牛)라는 만주족 고유의 조직에서 기원했다. 만주인들은 수렵 등을 나갈 때 10명을 한 조로 삼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뽑아, 그를 니루라고 불렀다.‘니루’란 ‘큰 화살’을 뜻한다. 누르하치는 성년 남자 300명을 1니루로,5개의 니루를 1자란(甲喇)으로, 다시 5개의 자란을 1쿠사(固山)로 편제했다.1쿠사는 결국 7500명인 셈인데 그것을 한자로는 기(旗)라고 했다. ‘기’는 군사조직이자 정치, 사회조직으로 모든 만주인은 예외 없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각 기에는 고유한 깃발이 있는데 황색, 백색, 홍색, 남색만으로 제작된 것을 정기(正旗), 황색, 백색, 남색 깃발에 홍색의 테두리를 두른 것과 홍색 깃발에 백색의 테두리를 두른 것을 양기(旗)라고 한다. 1616년 누르하치는 본래 4기였던 것을 8기로 확충했다. 해서여진을 통합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귀순해 오는 한족과 몽골족이 늘어나면서 한군팔기, 몽골팔기가 등장했다.“나가면 병사가 되고 들어오면 인민이 되는(出則爲兵 入則爲民)” ‘군민일체’,‘군정일체’의 팔기제의 효용성은 엄청났다. 평소 일상 생활과 전쟁에 동시에 대비할 수 있게 편제된 팔기제 아래서 후금(後金)의 백성들에 대한 통제력과 전투 능력은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당시 쇠망의 조짐이 뚜렷했던 명군이, 조직화된 팔기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 팔기는 1644년, 청이 베이징으로 입성한 뒤에도 중원(中原)을 제압하고 통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중원 장악 이후, 팔기에 소속된 사람들을 기인(旗人)이라 불렀는데 그들은 별도의 호적에 편입된 특수 신분이 되었다. 그들은 기지(旗地)라 불리는 토지를 하사 받고, 그들만을 위한 독자적인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중원 입성 이후 기인들은 오로지 만주어를 익히고 궁술(弓術)을 연마하여 관리나 군인으로 등용되었다. 다른 농공상의 직업을 갖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특권도 컸지만 의무도 명확했다. 기인들에게 만주어를 익히게 하고, 궁술을 연마시킨 것은 결국 만주족이 지닌 정체성과 야성(野性)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수십만에 불과한 만주족이 1억 이상의 한족을 270여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비책이기도 하다. 요컨대 1616년, 팔기제를 완성하면서 누르하치는 명과 일전을 겨룰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던 셈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中 동북공정은 패권주의 역사관 요동·한반도 하나의 역사로 봐야”

    고구려사는 과연 어느 역사에 귀속시켜야 하는가. 응당 한국사이다.하지만 ‘고구려는 중국 역사의 일부다.’(중국 동북공정),‘고구려사는 만주사의 하위 개념이다.’(일제 ‘만선사학’) ‘고구려사 해석은 요동사로 풀어야 한다.’(김한규의 ‘요동사’)는 등의 학설은 고구려사를 다시 생각케 한다. 최근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드라마 ‘주몽’이 막을 내렸다. 역사적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주몽은 고구려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크게 증폭시킨 것이 사실이다.우리 고대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도 확산됐다.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서해문집 펴냄)는 이번 봄호에서 ‘고구려사의 귀속문제’를 집중검토했다. 국민 모두 당연히 우리 역사로 알고 있는 고구려사에 대해 지금까지 제기된 여러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한국사 편입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한국외대 여호규 교수는 중국 동북공정의 허구를 역사적 사실관계 등을 거론하며 조목조목 비판했다.그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현재의 중국 영토’라는 전통적인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기준마저 폐기하고, 중국 왕조의 판도가 가장 넓었던 과거 불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중국사의 범주를 최대한 확장하려는 극단적인 패권주의 역사관”이라고 규정했다.여 교수는 “고구려의 된장과 김치, 온돌은 한민족의 삶속에서만 살아 숨쉬는 등 현재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사를 온전히 계승한 역사체는 한민족뿐”이라면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그는 “고구려의 외연은 멸망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확장됐다.”면서 “고구려는 여러 족속을 아우르면서 광활한 영역을 운영했던 한민족의 대제국이었다.”고 부연했다. 고려대 박찬흥 연구교수는 고구려사를 만주사의 하부구조로 전락시킨 일제 ‘만선사학’을 비판적으로 해부했다. 일제의 만주공략이 시작되던 1905년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만선사학은 일제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돼왔다. 일본의 ‘한반도 남부경영론’과 함께 한국사를 타율적인 역사로 전락시킨 것. 만선사학은 고구려 건국 주체세력인 고구려족이 부여족의 일파이고, 모두 만주민족이기 때문에 만주사와 조선사는 하나라는 주장이다. 박 교수는 “일제가 아무리 고구려사의 위대함을 찬양했더라도 그것은 만주사에 포함되는 고구려사가 갖는 위대성일 뿐”이라면서 “만선사학에서의 고구려사 인식은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4년 김한규 교수가 제기한 ‘요동사’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요동사는 만주, 요동으로 불리는 현재 중국의 동북지방이 전통적으로 한국이나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고, 따라서 이 공간에서 명멸한 고구려는 별도의 역사공동체로 봐야 한다는 이론이다. 조법종 우석대 박물관장은 ‘요동사의 입장에서 보는 고구려사의 문제점’이라는 논문에서 “요동을 한반도와 다른 역사공동체로 보는 시각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주장했다.조 교수는 그 근거로 ▲한반도-요동반도의 동일한 고고학적 문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동일한 언어 사용 ▲고조선-삼한-삼국역사 계승인식 등을 제시했다. 그는 “요동사는 학문적으로 창작된 가상의 역사체”라고 일축했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9)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Ⅰ

    앞에서 언급한 대로 명의 지배 아래 있던 여진족은 크게 건주, 해서, 야인의 세 종족으로 구분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했던 종족은 해서여진이었다. 해서여진은 다시 예허부(葉赫部), 하다부(哈達部), 호이파부(輝發部), 울라부(烏拉部) 등 네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졌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무렵까지 가장 강한 부족은 예허부였다. 이렇게 여진족이 서로 갈라져 있던 상황 아래서 명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인 ‘이이제이(以夷制夷)’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고만고만한 여진 부족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만듦으로써 패자(覇者)의 출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1583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던 누르하치는 1589년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건주여진 내부에서 누르하치라는 ‘패자’가 등장하자 ‘견제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누르하치와 해서여진의 격돌로 나타났다. ●누르하치, 해서연합군을 물리치다 1593년 6월, 예허부의 지배자였던 부자이(布齊)와 나림불루(納林布祿)는 누르하치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누르하치가 불손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부자이는 하다부의 지배자 멩게불루(蒙格布祿),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萬泰), 호이파부의 지배자 바인다리(拜音達 )를 끌어들였다. 누르하치를 치기 위한 원정군에는 해서여진 뿐 아니라 몽골의 코르친(科爾沁)부족 등도 가담했다. 모두 아홉개 나라, 대략 3만 가까운 병력이 누르하치를 치기 위해 연합군을 구성했다. 누르하치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당시 한창 뻗어 오르고 있었던 그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자카( 喀)라는 험준한 요새에 진을 쳤던 누르하치의 건주군은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요리했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부자이를 비롯하여 연합군 4000여명을 죽이고, 말 3000필, 갑주 1000개를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布占泰)를 생포했다. 아홉개 나라의 연합군으로도 누르하치를 제압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던 몽골족 가운데서 누르하치에게 귀부(歸附)하는 종족이 나타났다. 연합군에 가담했던 코르친 부족과 다른 몽골부족 칼카부(喀爾喀部)가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복종을 다짐했다. 코르친과 칼카 몽골의 귀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몽골과 건주여진의 관계는 비록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건주여진이 더욱 성장하여 후금(後金), 청(淸)으로 변신하고, 중원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몽골과의 제휴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훗날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산하이관(山海關)을 우회하여 베이징의 명나라 황궁(皇宮)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의 협조 덕분이었다. 곧 몽골 부족이 만리장성 외곽에서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같은 인연 때문에 명을 멸망시킨 이후 청은 이번원(理藩院)을 설치하고, 열하(熱河)에 행궁(行宮)을 두어 몽골족을 우호적으로 통제하려고 시도하는데 그 단초는 바로 누르하치 시절에 마련되었던 것이다. ●해서여진, 누르하치에게 손을 내밀다 해서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친 뒤부터 누르하치는 만주 전체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자신감이 넘친 누르하치는 1595년 6월, 군대를 이끌고 호이파부를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은 부잔타이를 주물러 울라부의 내정(內政)에까지 관여했다. 1596년 7월, 울라부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만타이와 그의 아들이 피살되었다. 누르하치는 억류하고 있던 부잔타이를 송환했고, 부잔타이는 형의 뒤를 이어 울라국의 국주(國主)로 즉위했다. 누르하치에게 은혜를 입은 부잔타이는 누이 후나이를 건주여진으로 보냈고, 누르하치는 그녀를 동생 스르가치(舒爾哈齊)와 혼인시켰다. 당시 누르하치는 해서와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공격하는 한편, 그들 부족과 혼인을 맺어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양면적인 전략을 폈다. 실제 누르하치의 첫째 부인인 나라씨(納喇氏)는 예허 출신이다. 누르하치는 16명의 부인들과의 사이에 모두 16남8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이렇게 많았던 것은 바로 혼인정책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커지자 해서여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1597년 예허, 울라, 하다, 호이파부는 일제히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부도했음을 사과한 뒤 우호를 다시 맺자고 요청했다. 누르하치는 느긋하게 이들과 화약(和約)을 맺었다. 바야흐로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로 떠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명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명은 개입하여 누르하치를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었다. 바로 이 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했기 때문이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던 것이다. 잠시 랴오양(遼陽), 광닝(廣寧) 등지로 물러나 있던 명군은 대거 조선으로 들어갔고, 명 조정의 관심은 온통 일본군에게 쏠렸다. 이나바 이와기치가 ‘누르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떠벌렸던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해서여진과 화약을 맺어 여유를 얻은 누르하치는 1598년 1월,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몽골의 안출라쿠(安楚拉庫)를 공격하여 1만여에 이르는 인축(人畜)을 획득했다. 정복 전쟁을 통해 인구도 늘고, 재물도 늘었다. 임진왜란 시기 누르하치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누르하치, 내실을 다지고 정체성을 강조하다 이미 말했듯이 누르하치는 뛰어난 군사지휘관일 뿐 아니라 탁월한 상인이기도 했다. 그는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모피와 인삼의 유통로를 장악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명나라라는 대시장(大市場)과 연결되었다. 처음에는 명 상인들을 통해 소금, 직물 등 생필품이 유입되다가 점차 은(銀)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은 여진족 내부에서 화폐로 유통되었고, 유통경제에 눈을 떴던 누르하치는 1599년 만주 지역에서 금은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수렵과 채집 위주의 여진족 경제에 변화가 일어났고, 화폐의 확보를 위해서 주변국과의 무역의 중요성은 점점 커져갔다. 어느 집단이나 국가든 규모가 커지고 힘이 강해지면 자의식도 따라서 커지게 마련이다. 임진왜란 무렵, 누르하치는 자신이 통일한 건주 부족을 만주(滿洲)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만주’의 어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문수(文殊)’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만주는 ‘문수보살의 도(徒)’를 의미한다. 누르하치는 이제 ‘만주’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해서나 야인여진은 물론 명에 대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어했던 것이다. 정체성을 찾고 싶은 열망은 문자(文字)를 만들려는 노력으로도 나타났다.1599년 누르하치는 만주 문자 개발에 착수한다. 당시까지 만주는, 서신을 주고받는 등의 일상생활에서는 몽골 문자를 사용했다. 명이나 조선 등과 주고받는 외교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했다. 누르하치는 이같은 현실에서 몽골 문자를 토대로 만주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석촌동에 남아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에 만주어, 한문, 몽골어 등 3개국 문자가 같이 쓰여져 있는 것은 이같은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났다.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자 명군 역시 철수를 시작했다. 명은 다시 만주로 감시의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로서는 ‘좋은 시절’이 끝난 것을 의미했다. 명의 압력이 누르하치에게 미칠 기미가 보이자 당장 세력판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약을 맺은 이후 잠시 잠잠했던 하다와 예허가 누르하치에게 다시 싸움을 걸었다. 만주와 하다, 예허, 명 그리고 궁극에는 조선까지 얽힌 격변의 또 다른 막이 올랐던 것이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 일본 만선사가들이 본 병자호란, 누르하치, 그리고 만주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 일본 만선사가들이 본 병자호란, 누르하치, 그리고 만주 Ⅱ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등장은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일본의 대륙 침략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만선사가였던 이나바 이와기치는 1937년 자신의 회갑을 맞아 쓴 글에서 ‘자신은 학문을 위한 학문을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지나 문제’에 자극을 받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려고 만주와 청의 역사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시대적 요구’란 다름 아닌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조선과 중국 침략의 당위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만선사가들은 ‘일본이 옛날부터 만주와 맺었던 각별한 인연’을 거론하고, 일본의 대륙 침략은 ‘침략’이 아니라 ‘새로운 동아시아를 건설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강변했다. ●일본과 만주의 인연 강조 이나바 이와기치를 비롯한 만선사가들에게 대부(代父) 역할을 했던 인물은 나이토 고난(內藤湖南)이었다. 아키타(秋田)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오사카 아사히(朝日)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내는 등 주로 언론계에서 활동했다. 그는 1903년 만주를 시찰하고 돌아와 러시아와 일전(一戰)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고,1905년 러일전쟁 승리 이후에는 외무성의 촉탁으로 만주에서 행정조사 업무를 담당했다. 이어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의 고문이 되어 대륙 경영의 방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나이토는 교토(京都)제국대학에 사학과가 개설된 1907년부터 동양사 담당교수로 강의하는 한편 정세파악과 사료수집을 목적으로 여러 차례 조선과 중국을 방문했다.1925년에는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일본의 만주침략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관학자(官學者)이자, 이른바 ‘교토 지나학(支那學)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의 영향 아래서 이나바 이와기치와 같은 만선사가가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이토는 1905년, 이나바가 ‘만주발달사(滿洲發達史)’를 출간하자 서문을 써주었다. 그는 그 글에서 “부여는 남만주철도의 종점인 창춘(長春) 서쪽의 눙안(農安) 지역에 있었으며”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일본과 지나의 세력이 처음으로 조선과 만주 방면에서 접촉했고, 그때부터 일본은 만주에 대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고 썼다. 나이토는 또한 발해가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부여가 남만주철도 종점 부근에 있었던 사실, 고대 일본이 고구려·발해와 접촉했던 사실 등을 일본과 만주 사이의 ‘인연’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만선사가들은 또 다른 ‘인연’도 끄집어냈다. 임진왜란 중인 1592년 12월, 함경도를 점령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공격했던 적이 있다.1936년,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는 이 사실에 주목하여 ‘가토의 공격은 흉포한 야인들에게 일본의 무위(武威)를 과시한 것’이라고 했다. 이나바 또한 이 사례를 일본이 만주와 맺은 각별한 인연으로 강조한다. ●만주사변과 이나바의 청(淸)찬양 1931년 9월18일, 봉천(奉天-선양)에 있던 일본 관동군은 중국 군벌 장학량(張學良)의 병영을 기습하여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관동군은 순식간에 창춘, 지린 등지를 점령하고 이듬해 2월까지는 진저우(錦州), 치치하얼(齊齊哈爾), 하얼빈 등 만리장성 바깥의 만주 전체를 손에 넣었다. 관동군은 1931년 11월, 톈진(天津)에 머물던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宣統帝)를 비밀리에 뤼순(旅順)으로 옮겼다. 푸이는 1932년 3월1일, 만주국(滿洲國)의 집정(執政)이 되고,1934년에는 황제로 즉위했다. 관동군은 치밀한 각본에 의해 만주를 탈취,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만주국이 건국되자 이나바도 바빠졌다. 만주를 탈취한 데 대한 국제여론이 나빠지자 이나바는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냈다.1934년, 이나바는 ‘만주의 역사가 경(經·날줄)과 위(緯·씨줄)가 맺어지면서 전개되어 왔다.’고 전제한 뒤, 역사상 만주에서 ‘경(-주체)’의 역할을 담당한 것은 몽골족과 만주족이지 결코 한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나바는 특히 청을 만주 역사의 주역으로 평가했다. 이나바는 또한 청의 강희대제(康熙大帝)야말로 ‘300년 동양평화’의 기초를 다진 성군(聖君)이라고 찬양했다. 강희제가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견제했던 것을 들어 그를 ‘대제’ ‘성군’으로 치켜세웠다. 만주의 안녕, 나아가 동양 평화의 기초는 만주족이 놓은 것이지 한족과는 관계가 없다는 인식이었다. 여러 민족의 ‘경위(經緯)작용’을 통해 발전해 온 만주의 역사에 이제 새로운 주체가 나타났다. 이나바는 그것이 바로 일본 민족이라고 강조했다. 만주국은 만주의 역사에 새롭게 등장한 ‘경’이므로 ‘위’에 불과했던 한족의 지나는 그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일본은 더욱이 강희대제의 핏줄을 이은 푸이를 황제로 앉혔으므로, 만주국의 등장은 ‘침략’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한 대업의 계승’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나바, 중일전쟁 그리고 한국사 이나바는 만주사변 직후 교토제국대학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논문은 통과되어 1934년 서울에서 출판되었다.‘광해군시대(光海君時代)의 만선관계(滿鮮關係)’가 바로 그것이다. 400쪽에 이르는 이 책에서 이나바는 조선과 만주의 관계사를 개관하고, 임진왜란 직후 명·청이 대립하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 애썼던 광해군을 찬양했다. 나아가 서인(西人)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킨 것을 비판했다. 이나바는 왜 광해군을 찬양했을까? 물론 명청교체기(明淸交替期)에 광해군이 보인 외교역량은 볼 만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나바가 당시의 조선을 과연 독자적인 주체로 보았을까 하는 점이다. 광해군이, 이나바가 그토록 좋아했던 청과 청의 시조인 누르하치와 사단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찬양한 것은 아닐까? 이나바의 광해군 평가는 조선사를 만선사관의 틀에서 보려는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37년 7월, 일본군은 베이징과 톈진, 상하이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중일전쟁의 시작이었다. 만주사변 때와는 달리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하여 항일(抗日)저항을 선언하고, 전쟁은 중원 전체로 확산되었다. 중일전쟁을 일지사변(日支事變)이라 불렀던 이나바는 다시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 냈다. 역사상 한족이 아닌 이민족들이 중원에 들어가 새로운 왕조를 세웠던 사실과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황하와 양자강 유역까지 전선을 넓히자 이나바는 ‘이민족의 중국 통치는 한족의 발달을 촉진시켰다.’는 언설을 들고 나왔다.1939년에 나온 ‘신동아건설(新東亞建設)과 사관(史觀)’이란 책에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북위(北魏)의 예를 들어 ‘이민족의 중국 통치는 퇴폐한 풍조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썼다. 일본군의 침략을 ‘퇴폐한 중원’을 정화시키는 ‘방부제’로 정당화한 것이다. 이나바의 언설은 계속된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군이 조선에 들어왔고, 그 틈을 타서 누르하치가 만주지배를 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1934년 관동군은,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폐위된 선통제를 만주국의 황제로 앉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누르하치의 ‘은인’이고, 관동군은 푸이의 ‘은인’이 되는 셈이다. 나아가 누르하치의 후손들이 중원으로 진격하여 ‘강희대제의 위업’을 이룬 것처럼 일본군도 이제 ‘새로운 동아시아(新東亞)’를 건설하기 위해 중원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선사관에 의해 한국사의 자주성은 부인되었다. 한국사는 그저 일제가 집어삼킨 만주 역사의 부속물일 뿐이었다. 세월이 흘러 만주는 중국으로 돌아갔고, 다시 세월이 흘러 중국은 강대국으로 재림하고 있다. 이번에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사의 범주를 축소시키려 덤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만선사관과 동북공정이 지닌 패권적 아카데미즘을 넘어서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학자들의 분발과 위정자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백제부흥’ 아닌 ‘백제복국’이 맞다

    백제는 660년 신라와 당나라 군대의 기습적인 협공을 받고 항복했다. 하지만 백제 세력은 곧 이어 왜(倭)에 머물고 있던 풍 왕자를 국왕으로 옹립하여 국가체제를 수립한 뒤 조직적으로 나·당군에 항전한다. 그동안 이런 움직임을 백제부흥(復興)운동, 나·당군에 항전하던 세력을 백제 부흥군(復興軍)이라고 부르는 것이 대세였다. 하지만 ‘백제 부흥’이라는 용어는 왜가 천황권의 역사적 승리를 과시하고 미화시키기 위해 편찬한 ‘일본서기’ 속의 천하관에 보이는 용어이기 때문에 쓰지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최근 발간된 ‘전통문화논총’ 4호에서 “‘일본서기’는 임나제국이나 임나 재건과 관련하여 한결같이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서 “왜의 역할과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과시하는 구절에서 ‘부흥’이 나타나는 만큼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백제 부흥의 개념은 나라가 망한 뒤 국권을 되찾는 투쟁으로, 한 국가가 쇠퇴했다가 다시 흥기하는 개념의 부흥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면서 “당시 백제의 움직임은 당나라와 신라가 강점하고 있는 자국 영토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일종의 독립투쟁”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차라리 ‘부흥’보다는 ‘삼국사기’에 보이는 ‘흥복(興復)’이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면서 “전체적인 큰 틀에서 볼 때 부흥운동은 복국운동(復國運動)으로, 부흥군은 복군군(復國軍)으로 일컫는 것이 일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백제가 멸망한 뒤 주민들이 국권회복 투쟁을 전개한 것을 부흥운동으로 일컬은 것은 1923년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조선상세사(朝鮮上世史)’에서 쓴 것이 가장 오래된 용례”라면서 “하지만 이전에 사용한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 여진족과 만주1

    [병자호란 다시 읽기] (2) 여진족과 만주1

    조선 사회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남긴 병자호란의 발발은 16세기 후반∼17세기 중반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이른바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여파가 조선으로 밀어닥친 결과였다. 명청교체의 주역은 여진족(女眞族)이었다. 그들은 병자호란 7년 뒤인 1644년 베이징을 접수하고 마침내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 병자호란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먼저 여진족과 누르하치의 성장과정을 살펴본다. ●여진족, 만주, 그리고 한국사 여진은 상고 시기 숙신(肅愼),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던 퉁구스 계통의 소수민족이다. 그들의 발상지이자 활동무대는 우리가 보통 만주(滿洲)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중국 동북지방이었다. 만주란 과연 어떤 곳인가? 많은 한국인들은 만주 하면 먼저 고구려를 떠올린다. 동시에 그곳은 독립운동가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말을 달리던 벌판이기도 하다. 해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지안(集安)을 찾고, 백두산 천지(天池)에 오른다. 한국인들은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을, 그리고 천지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고구려의 영광’을 추억한다. 한국인들에게 이렇듯 각별한 의미를 지닌 만주는 지난 1000년 동안 그야말로 풍운의 땅이었다.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뒤 만주는 한국인들과는 멀어졌다. 이후 19세기까지 만주에서는 거란, 여진, 몽골, 한족, 그리고 다시 여진족의 순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만주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가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1945년 이후에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격전이 벌어진 뒤, 만주는 중국 땅이 되었다. 만주에서 일어나 대제국 청을 세운 여진족은 오늘날의 중국에 커다란 선물을 남겨 주었다. 청나라가 차지했던 광대한 땅이 고스란히 오늘날 중국의 영토로 계승된 것이다. 명나라 시절, 한족 지식인들은 여진족을 야만인이자 ‘금수(禽獸)’라고 멸시했다. 하지만 청은 1644년 명을 접수한 이래 영토를 확장하여 신장(新疆), 티베트, 내몽골 지역을 자신들의 판도 속으로 집어넣었다. 청나라의 지배 아래서 중국의 영토는 과거 명나라 시절보다 거의 40% 가까이 불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1644년 베이징을 접수할 무렵, 여진족의 인구는 대략 50만, 한족의 인구는 1억 50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이후 여진족은 자신들보다 300배 가까이 많은 한족들을 300년 가까이 지배한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이자, 동시에 여진족과 청조 지배층의 정치적 역량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오늘날 만주에서는 700만 정도의 여진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고유의 말과 문자를 말하고,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상 한족에게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조선은 비록 병자호란에서 청에 항복했지만 한(韓)민족은 여전히 살아남아 독자적인 국가와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 태종 홍타이지가 지하에서 이같은 사실을 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병자호란은 비록 치욕의 역사였지만, 중국의 무시무시한 동화력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자부심만은 우리의 ‘엄청난 자산’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글을 이어간다. ●아구다(阿骨打)의 추억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신빈(新賓)에 있는 만족(滿族) 자치현(自治縣)에 가면 허투아라(赫圖阿拉)라는 성이 남아 있다. 이곳은 바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장차 청 제국을 건국하는 기반이 되었던 흥경노성(興京老城)의 옛터이다. 왕궁이 있었던 곳의 면적은 기껏해야 우리나라 시골의 여느 초등학교 넓이 정도에 불과하다. 최근 과거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집무했던 한왕전(汗王殿)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왕성(王城)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한 허투아라성의 모습은 16세기 후반까지 중화제국 명의 지배를 받으며 만주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들의 초라한 상황을 상징한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먼 조상들은 결코 초라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한 이후 여진족들은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만주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거란족은 요(遼)를 세워 10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만주와 화북일대를 차지하는 제국이 되어 남쪽의 송(宋)과 각축을 벌였다. 1115년 그런 와중에 여진족 내부에서는 아구다(阿骨打)라는 영걸이 나타났다. 그는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아울러 나라를 세웠는데 국호를 금(金)이라고 했다. 훗날 누르하치도 나라 이름을 한때 대금(大金)이라 지칭했는데, 사람들은 보통 후자를 아구다가 세웠던 금과 구별하여 후금(後金)이라고 부른다. 아구다의 금은 이후 더욱 세력을 키워 요를 멸망시키고 1127년엔 한족 왕조 송을 양자강 남쪽으로 밀어냈다. 송의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은 금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남송(南宋)은 금에 세폐를 바쳐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한족들에게는 굴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금은 비록 1234년 몽골에 의해 멸망했지만, 이후 한족들에게 아구다와 금의 존재는 기억 속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368년 중원에는 다시 한족 왕조 명(明)이 들어섰다. 중원을 지배했던 몽골족의 원(元)나라는 베이징을 버리고, 북으로 도주하여 고비사막 방면까지 쫓겨갔다. 명은 다시 만주 쪽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다.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하라 1279년 남송 멸망 이후 거의 백년 만에 중원을 되찾아 한족들의 자존심을 회복한 명의 여진정책은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여진족을 통제하되 그들을 너무 강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게 ‘섬세하게’ 길들이는 것이었다. 명은 흩어져 있는 여진족들 사이에서 과거 아구다와 같은 패자(覇者)가 출현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렇게 되면, 여진족이 다시 커다란 세력으로 뭉치게 될 것이고 송나라가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되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진족들을 뿔뿔이 흩어진 상태로 방치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명은 북으로 도망간 몽골의 원나라(보통 北元이라 부름)를 여진족을 이용하여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명은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을 고려한 셈이다. 그러려면 여진족이 어느 정도까지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로 명의 여진정책은 일종의 ‘딜레마’였다. 명은 고심 끝에 14세기 후반부터 만주의 여진족들을 분할지배 방식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명은 랴오허(遼河)를 기준으로 서쪽, 즉 오늘날 랴오닝성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요동도사(遼東都司)라는 기구를 설치, 지역의 한족들을 직접 통치했다. 그리고 요동도사가 관할하는 산하이관(山海關) 부근부터 관전(寬奠)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변장(邊牆)이라 불리는 담을 쌓았다. 여진족들은 이 담을 넘어 서쪽으로 올 수 없었다. 랴오허 동쪽, 오늘날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에는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구를 두어 여진족을 통치했다. 그 아래에는 위소(衛所)라는 기관을 두어 여진족 출신을 우두머리로 임명하고 자치를 허용했다. 하지만 위소의 우두머리를 임명할 때나, 여진족 내부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에는 명의 지휘부가 개입했다. 여진족의 자치를 허용하되, 여진족 유력자들을 명의 행정체계에 포섭하여 통제하는 전형적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였다. 건국 직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명의 여진정책은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기간 동안은 명 내부의 정치가 그런대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만력제(萬曆帝)의 정치적 태만과 무능, 그에 더하여 임진왜란과 같은 명 외부의 격변까지 맞물리면서 여진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 이 무렵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던 누르하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눈을 통해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이 매주 목요일 연중기획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편집자 주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돼지´에게 무릎을 꿇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안추원의 비극을 책임질 것인가? 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한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선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린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베이징에 입성한다.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선양의 거주민들에게 베이징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이징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안추원은 절망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2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성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 영의정까지 올라 안추원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오판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안추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비극’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오늘날.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돌아본다. 꼭 10년전 ‘IMF 외환위기’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0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필자 한명기 교수는 ▲1962년생 ▲1985년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졸업 ▲1997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박사) ▲1998∼2001년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현재 명지대 사학과 교수.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논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광해군’(2000) 외 다수 ●청태종 송덕비(위 사진)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
  • [책꽂이]

    ●일본론(다이지타오 지음, 박종현 옮김, 소화 펴냄) 일본의 봉건시대에 모든 토지는 번주에게 귀속됐고, 농민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없었으며 성을 갖지 못하고 칼을 차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3000년전 중국의 제도와 흡사한 것으로, 천황·구교·번주·무사로 구성되는 통치계급을 제외한 사람들에겐 완전한 인격이 인정되지 않았다. 중국 ‘천택보’ 기자를 지낸 저자는 이처럼 비교론적 관점에서 일본과 일본인의 특성을 살핀다.‘신권적 미신과 일본의 국체’‘존왕양이와 개국진취’‘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의 글이 실렸다.7200원. ●백색국가 건설사(박진빈 지음, 앨피 펴냄) 어느 시대건 화두는 개혁이다.19세기말∼20세기초 ‘젊은 제국’으로 세계사의 무대에 급부상한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흔히 ‘혁신주의’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 미국의 개혁정책 속엔 향후 미국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특징들이 모두 담겨 있다.‘백색국가’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당시 주요 행사장 중 하나였던 ‘백색도시’에서 가져온 말. 미 제국이 지향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표상한다. 미국 혁신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다룬 역사교양서.1만 3800원.●멸망하는 국가(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열대림 펴냄) 일본 닛케이BP사의 웹사이트에 연재된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의 미디어 소시오폴리틱스’ 중에서 의미있는 글들을 골라 묶었다.‘지(知)의 거인’으로 불리는 저자는 “정치가에게 야스쿠니 문제는 단지 ‘마음의 문제’인가?”라며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외교를 강하게 비판한다.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호리에 다카후미의 라이브도어 사건, 천황 후계자를 둘러싼 여성 천황·모계 천황 용인 문제, 고이즈미의 아베 신조에 대한 총애의 역사 등을 다뤘다.1만 8000원.●삼라만상을 열치다(김풍기 지음, 푸르메 펴냄) 한시와 에세이의 접목을 시도한 책.24절기 자연의 운행을 담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한시 작품들을 골라 엮었다. 도연명, 구양수, 두보 등 중국의 시인들과 이달, 유방선, 이규보, 정약용 등 우리나라 문인들의 시편 80여 편이 실렸다. 책의 제목은 조선시대 문인 김구의 ‘문에 붙일 입춘 글귀를 쓰다(題立春帖戶)’의 한 구절을 번역한 것이다.1만 1000원.●매천야록(황현 지음,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펴냄) 구한말 3대 문장가 가운데 한 명인 매천 황현이 1864년(고종1년)부터 1910년(순종4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비판적 관점에서 서술한 책. 그는 임금이건 충신이건 가리지 않고 엄격하게 비판해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 즉 매천의 붓 아래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말까지 낳았다.1910년 56세때 일제에 의해 끝내 나라가 강탈당하자 그는 자신이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지식인으로서의 도덕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절명시 네 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1만 4500원.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고 은 시인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고 은 시인

    불현듯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언어가 없는 인간세상을 말이다. 우선 ‘사랑한다’고 못하겠지. 또 ‘미안하다’는 말을 못해 엉뚱한 싸움판도 벌어지겠지. 이래저래 오해와 진실이 마구 뒤엉켜 결국은 멸망? 지구상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과연 몇개나 될까. 학자들에 따르면 6000여개는 족히 넘는다. 또 2주에 걸쳐 하나씩 소멸된다고 한다. 이는 지구 생태계 또는 작은 부족의 멸종과 비례한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민족의 상처와 영혼을 켜켜이 담으며 살아온 우리 언어. 남북 분단 60여년, 겨레의 언어 역시 그 세월만큼 간격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남쪽에서 사용하는 ‘전업주부’를 ‘가두녀성’으로,‘도넛’을 ‘가락지빵’으로,‘반딧불이’를 ‘에디벌레’로 각각 다르게 사용한다. 또 계산기 하면 남쪽에서는 전자계산기를 연상하지만 북한에서는 컴퓨터로 통한다. 아울러 ‘해커’를 ‘헤살꾼’으로 ‘스파게티’를 ‘구멍국수’ 등으로 사용하며, 전문·학술용어의 경우 그 차이의 정도는 훨씬 심각하다. 만약 남북 의사가 같이 수술대에 있다면 시술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아마 제주도에서 함경도의 방언까지 몽땅 비교한다면?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지난 1970년대초였다.7·4 공동 성명과 적십자 회담 등을 위해 6·25이후 남북 당국자가 처음으로 만났다. 남측 요원이 회담장에서 서비스를 하던 북한 여성에게 “아가씨”라고 했더니 정색을 하며 “접대부로 불러주세요.”라고 당황케 했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남과 북이 분단된 후 언어차이를 처음으로 실감케 한 사례였다. ●겨레말은 남한 표준어·북한 문화어·방언 합친 말 1989년 3월이었다.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 언어의 이질감을 얘기하면서 ‘통일대사전’을 공동으로 편찬하자고 했다. 이후 논의가 중단되다가 2004년 12월 13일 금강산에서 남북 편찬위원들이 만나 결성식을 가짐으로써 본격적인 출발을 하게 됐다. 이후 지난해 2월 편찬위 1차정기회의(금강산)를 시작으로 그동안 7차례에 걸친 실무접촉을 가졌고 오는 2012년까지 30만여 어휘를 담은 남북한 단일사전, 즉 ‘겨레말큰사전’을 펴내기로 했다.‘겨레말’은 남한의 표준어, 북한의 문화어, 그리고 남북의 방언을 합친다는 뜻이다. 현재 남측과 북측은 각각 방언조사 등 편찬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글날을 앞두고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고은(73) 시인을 만났다. 장소는 서울 마포에 위치한 편찬사업회 사무실. 지난달 말 제7차 편찬위 평양회의에 다녀온 직후였다. 어느 정도 진척이 됐을까. 그는 “현재 ‘ㄱ’과 ‘ㄴ’ 부분을 끝냈다면서 남북 모두 관심이 높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ㄱ’의 경우만 하더라도 올림말이 6만 9000여개에 달했단다. 남쪽은 10여군데에 대한 방언조사를 끝냈고 북측도 다섯군데를 조사해 서로 CD로 자료를 교환했다. ●우리말은 세계 10위권 유지하는 민족어 남과 북에서는 현재 ‘표준국어대사전’(50만 9000여 어휘 수록)과 ‘조선말대사전’(33만여 어휘)이 주로 쓰이고 있지만 이 사전들은 현장조사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이 두 사전에서 공통적인 것과 다른 것 20만개를 뽑고, 이들 사전에 올라 있지 않은 10만개를 새로 추가시키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최근 조사된 호복이(전북지방, 흠씬 익도록 삶거나 끓이는 모양), 큰아베(경북, 할아버지), 쪼시락허다(전남, 하찮다) 등이 될 수 있다. “언어란 세월이 지나면서 소멸 또는 변질되지요. 우리 근대사 이후 겨레 언어가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연해주, 중앙아시아, 만주 일대는 물론 60년대 이후 미국으로 가지고 간 언어도 조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얼마전 사할린 징용자 위령제에 다녀왔다.”면서 30년대 후반부터 우리 동포가 약 15만명이 이주했는데 현재는 3만명밖에 안된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 순수 언어도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남과 북 각 지역의 방언과 향토어 속에 우리 말을 찾아내는 작업도 병행된다고 부연했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로 우리 겨레말을 집대성하는 일이며, 우리 후손들이 만나야 할 ‘대사전’이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때문에 2012년 이후에도 계속 보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작업에 참여하는 남측 편찬위원들은 학자나 교수들이 대부분이지만 북한의 경우 사회과학원 소속 연구원에서 직접 관장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글은 세계 문자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문자입니다. 또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프랑스어보다 많은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갑니다. 러시아어도 푸슈킨 이후 주목을 받았고 독일어는 괴테의 ‘파우스트’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우리말도 근대문학 이후 표현력이 아주 좋아졌다고 강조했다. 그 이전의 양반들은 주로 한문 중심이었다는 것. 예를 들어 편지를 쓸 때에도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시옵고….’라는 식이었다. 결국 활발한 신문학 운동은 모국어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등 대국어들이 횡행하는 오늘날에 우리말이 세계 10위권을 유지하게 된 것도 대단한 민족어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고 이사장은 이런 우리글이 다음 세대에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많다. 인터넷상에 계속 퍼지는 언어와 영어 등의 영향으로 우리 언어가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겨레말 큰사전을 통해 방향타를 잡고 또 자국어 보존을 위한 정책도 꾸준히 펼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울러 “말이란 한 시대가 지나면 사라진다.6·25 이후만 보더라도 우리말이 많이 달라졌다.”면서 고대시와 지금이 다르듯이 현재 사용되는 우리말이 나중에 고어로 남게 되고 일부는 공중에 흩어져 소멸된다고 했다. ●남북, 문화행위로써 우선 동질성 회복해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당시 세종대왕은 몽골과 여진 지역에도 학자를 파견했다. 또 티베트어 연구는 물론 산스크리스트어를 사용하는 승려도 참여시키는 등 세계적 언어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고 했다. 실제로 몽골에 가면 당시 사신이 다녀갔다는 자료가 현재 남아 있다는 얘기를 몽골학자한테 전해들었다고 귀띔했다. 또 세종은 여진과 말갈족들을 끌어들이는 등 이주정책을 펼쳤는데 놀랍게도 아직까지 함경도 지방에 경상도 사투리가 남아 있단다. “아마 당시 한글창제 작업은 중국 몰래 했겠지요. 한자(漢字)와 다른 문자를 따로 만든다는 것은 천자(天子)를 자처하는 입장에서 볼 때 불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공표도 조심스럽게, 즉 보다 쉽게 민중에게 뜻을 전달하기 위한 글이라는 식으로 중국을 달랬지요. 또 비로소 한자 지배의 구속에서 벗어나 최초로 민중문자와 민족언어를 가졌다는 역사적 의미도 있습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 겨레말 편찬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쏟는 고 이사장. 세상에 놀러오지는 않았다고 강조하는 그는 “남북은 정치·군사적 문제만이 아닌 먼저 문화행위로써 서로 동질성을 회복하고 스며들다 보면 통일도 가능해진다.”고 역설했다. 이어 “겨레말에 의탁하여 살아온 지난 역정을 바쳐 ‘이젠 죽을 수 있다. 이제 죽어도 된다.’라는 몇년 뒤의 궁극적 감회를 예감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km@seoul.co.kr ■ 고은이 걸어온 길 ▲1933년 군산 출생(본명 고은태), 군산고 중퇴 ▲52년 입산,10년간 승려생활(법명 일초) ▲58년 조지훈 등의 천거로 ‘현대시’에 ‘폐결핵’ 발표로 등단 ▲60년 첫 시집 ‘피안감성’ ▲62년 환속, 재야 운동가로 활동 ▲74년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 출간. 제1회 한국문학상 ▲86년 ‘세계의 문학’에 ‘만인보’ 연재 ▲89년 제3회 만해문학상 ▲90년 민족문학작가회장 ▲99년 미 하버드대 연구교수. 버클리대 초빙교수 ▲2004년 제4회 베를린문학페스티벌 자문위원 ▲05년∼현재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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