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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근대화위한 고종의 노력과 좌절

    조선 근대화위한 고종의 노력과 좌절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이 공포되고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한다. 사람들은 이 책임을 조선의 26대 왕 고종의 무능함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고종은 조선에 입맛을 다시던 세계 열강과 친일파들의 감시 속에서 나라를 지켜내고자 고군분투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16일부터 이틀간 오후 9시50분부터 방송되는 EBS 다큐프라임 ‘한일강제병합 100년 특별기획-잊혀진 나라 13년’은 우유부단하고 무능력하다고만 알려져 있던 고종이 조선을 근대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과 좌절을 했으며 얼마만큼의 성과를 일궈냈는지 살핀다. 1부 ‘제국의 꿈’은 1903년에서 1906년 사이 여러 차례에 걸쳐 독일 은행에 입금되었던 ‘대한제국 국고예치금 100만마르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종이 먼 외국은행에 그 많은 돈을 예금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899년 초가지붕 사이로 전차가 다니기 시작하고 호기심 많은 시민들은 전차 주위로 모여든다. 당시 종로를 달리던 전차는 도쿄보다 3년이나 빠른, 동양에서 두 번째로 부설된 승객용 전차였다. 고종은 근대적 국가로 가는 길에 방해가 됐던 신분제도와 보수파의 사상을 타파하고자 의제 개혁과 관립학교를 설립하는 등 백성들의 의식계몽에도 힘을 쏟는다. 정동에는 각국의 공사관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파란 눈의 선교사들에게 신식교육도 적극 허가한다. 고종의 자비로 만든 독립신문은 국민들의 자주정신을 일깨우게 되고 국민들은 만민공동회라는 토론의 장을 마련, 사회문제에 눈을 떠간다. 전신선과 전기를 가설하고, 철도를 부설하며 도시개조 사업을 전개하는 등 고종의 조선 근대화시키기 계획은 점점 무르익어 갔다. 아관파천 뒤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내세우고 ‘광무황제’로 즉위한다. 방송은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 유물을 출품해 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대한제국 알리기에도 적극 참여하는 고종의 모습을 전한다. 2부 ‘제국의 전쟁’은 열강에 대한 고종의 치열한 투쟁을 전한다. 세계 열강들 속에서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고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외교활동과 자주독립국가 국민의식이 중요했다. 고종은 관립외국어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재들을 근황세력으로 끌어들여 각국에 파견한다. 방송은 고종의 기밀문서를 가지고 비밀스럽게 움직이던 근황세력들과 그 뒤를 쫓던 일본 스파이의 모습을 전한다. 근황세력은 고종의 강제 폐위 뒤에 해외 독립운동에 나선다. 스티븐슨 사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까지 모두 배후에 고종이 있다는 근거 자료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한다. 해외 의병활동에 군자금을 보태고, 끊임없이 세계 열강에 밀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고종. 방송은 고종이 조선의 끝이 아닌, 항일 투쟁의 시작으로서 그의 업적을 조명한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시론] 신라기술자 구진천을 아십니까/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한국고대사 교수

    [시론] 신라기술자 구진천을 아십니까/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한국고대사 교수

    8월이면 휴가철이라 산과 들로 가지만 그래도 바닷가를 찾는 인구에 비할 수 있을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적 환경에서 바다는 생활의 방편을 넘어 친숙한 존재이다. 이럴 때면 신라 장군 이사부가 512년에 동해의 거친 파고를 헤치고 나가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점령한 사건이 의미 깊게 닿고는 한다. 울릉도에 갈 때마다 풍랑에 시달리곤 했던 필자로서는 신라인들이 어떻게 그 먼 바다까지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 경외감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런데 신라인들의 활동 권역은 우리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신라가 일본열도로 쳐들어가 왜왕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전승이 일본 측 문헌과 그곳을 다녀온 통신사들의 기행록에 함께 전해지고 있다. 5세기대 신라 고분에서는 타조나 구세계원숭이를 비롯해서 개미핥기 등과 같은 아열대 지역 동물들의 형상이 정확하게 묘사된 토우(土偶)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신라와 동남아시아 지역 교류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또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바다와 관련된 이름의 파진찬(海干)이라는 벼슬과 선부(船府)라는 관부까지 갖춰져 있었다. 그럴 정도로 신라인들은 일찍부터 바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더불어 상당한 해양 능력을 구비하였던 것이다. 당(唐)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듬해 정월에, 주적이 바뀌어 일촉즉발의 험악한 관계가 된 신라에 자석을 요구하였다. 신라는 그해 5월에야 자석 두 상자를 당에 바쳤다. 자석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지남차라는 이름의 자석을 중국에서는 기원 이전에 이미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중국에서 일찍이 개발한 자석을 당이 신라에 요구한다는 자체가 의아하다. 그렇다면 이는 이미 신라가 나침반의 원리를 터득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연안이 아닌 원양항해를 위해서는 현재의 자기 위치 파악이 중요하므로, 방향 감각은 망망대해에서 꼭 견지해야 할 일차적 전제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사부 항해의 의문이 풀릴지도 모른다. 나침반은 원양항해의 발전과 맞물려 있는 사안임을 생각하면, 백제가 동남 아시아 나라들과 교류했던 동력도 파악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당은 자석에 이어 쇠뇌(쇠로 된 발사 장치가 달린 활) 기술자인 신라인 구진천(仇珍川)을 자국으로 데려갔다. 그가 제작한 쇠뇌로 쏘면 화살이 무려 1000보를 날아갔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정 거리는 무기의 성능을 알려 주는 유력한 지표가 된다. 그런데 당은 구진천으로 하여금 쇠뇌를 만들게 하였지만 그가 만든 쇠뇌는 본국에 있을 때와는 달리 멀리 나가지 못했다. 고작 30~60보밖에 이르지 못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진천은 갖은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는 조국에 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 역량을 숨긴 것이다. 이와 관련해 중국의 수나라가 고구려에서 자국의 쇠뇌 기술자를 매수해 데려갔다며 힐책한 사건이 상기된다. 구진천의 행적은 고구려에 매수된 수나라 기술자와는 크게 대비되고 있다. 어쨌든 신라 자석을 통한 나침반 기술로 차질 없이 서해를 건너오고, 또 성능 좋은 신라 쇠뇌로 신라를 치겠다는 당나라의 속셈을 엿볼 수 있다. 이것도 이이제이(以夷制夷)인 셈이다.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빼어났던 선조들의 기술력과 그것을 지키려는 열정은 한국 현대 과학의 연원임을 생각하게 한다. 선조들은 발달한 항해술과 조선술을 기반으로 바다를 잘 이용해 광활한 세계를 체험했다. 이때 활발하게 이루어진 기술 교류를 통해 중국 일변도의 편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8세기 중엽에 신라인들이 제작한 인공산인 만불산을 보고는 중국인들은 “신라의 기교는 하늘이 준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다.”라고 격찬했다. 중국도 탐냈던 신라의 과학 기술인 것이다.
  • [열린세상]척화와 주화/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열린세상]척화와 주화/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외적이 침입했을 때 이에 맞서 싸울 것인가, 화해를 할 것인가 하는 논란은 고금을 막론하고 있어 왔다. 천안함 폭침 사건이 일어나자, 오늘날에도 여지없이 척화(斥和)와 주화(主和)로 논의가 갈렸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척화를 표방한 데 반해 민주당과 재야는 주화를 표방했다. 이명박 정부는 어뢰로 천안함을 두 동강 낸 북한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민주당에서는 그래봐야 한반도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 피차가 재앙을 당할 것이니 북한을 잘 달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척화와 주화의 대립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이러한 척화와 주화의 대립은 지난번 6·2지방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나라당 후보들은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물증이 나온 만큼 그들을 응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친북행위를 근절해야 하니, 북한에 대해 동정적인 발언을 하는 야당에 표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민주당은 득표를 위해 국민을 전쟁위험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양자가 일리가 있는 부분도 있으나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과도한 억지논리를 펴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물증이 북한의 소행으로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느니, 좌초 등 어뢰가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한 침몰일 것이라느니, 조사결과를 0.00001%도 믿을 수 없다느니 하는 논란 등이 그러하다. 병자호란 때에도 국론이 척화와 주화로 갈려서 치열하게 싸운 적이 있었다. 김상헌(尙憲)을 비롯한 척화파와 최명길(崔鳴吉)을 위시한 주화파가 그러하다. 김상헌의 논리는 조선은 위화도(?化島) 회군 이후 친명정책을 썼고 임진왜란 때도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소생할 수 있었으니, 명나라의 원수인 청나라는 곧 우리의 원수라는 것이다. 혹 나라가 망할지라도 명과의 의리를 잃어버리면 금수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재조번방지은(再造藩邦之恩)을 갚기 위해 위명(爲明)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최명길은 위명도 좋고, 대의명분도 좋지만 우선 우리나라를 보존하고 나서 할 일이지 명분을 위해 백성을 어육(魚肉)을 만들 수는 없다고 했다. 위명도 좋지만 존국(存國)부터 하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명길은 목숨을 걸었다. 단신으로 청군의 진영으로 가 침략의 이유를 따지면서 시간을 벌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란갈 수 있게 하고,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청군과 타협해 조선 조정의 항복을 이끌어 냄으로써 나라는 보전했다. 그리고는 중 독보를 보내 명나라와 내통하다가 발각되어 잡혀가 사형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김상헌도 삼전도비(三田渡碑)를 훼손했다는 헛소문 때문에 역시 청의 사형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화해했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청의 심문에 끝까지 버티는 것을 보고 이름을 얻기 위해 척화를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김상헌은 최명길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각 방법은 다르지만 나라를 사랑해서 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여야의 대결은 어떤가? 병자호란 때와 비교하면 한나라당이 척화파요, 민주당이 주화파다. 양당은 각각 타당한 논리가 있겠지만 국익을 위해, 국민을 위해 어떤 방법이 최선인가를 따져 봐야 한다. 어느 면에서 당리당략을 떠나야 한다. 호전적인 적을 앞에 놓고 자당의 유·불리를 따져서는 안 되는 주장을 일삼는다면 국가와 국민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북한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계속적으로 패악을 부리는 것을 용납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여야는 앞으로는 선거에 이기기 위해 천안함 사건을 당리당략에 이용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국익을 위해서 상호보완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잘못하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가 나라를 그르치는 빌미가 되고 망국적인 당쟁의 폐해를 재현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 다문화가정의 선배 ‘화산 이씨’는

    결혼이주자가 급증함에 따라 귀화 외국인들에 의한 새로운 성씨가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이미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외국인이 한반도에 정착했고 이로 인해 생겨난 귀화 성씨가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문명교류연구소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씨 280여개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30여개가 귀화 성씨이다. 이 가운데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귀화 성씨로 화산 이씨(花山 李氏)를 꼽을 수 있다. 800년의 역사를 가진 화산 이씨는 최근 늘어나고 있는 다문화가정의 선배격이라 할 수 있다.  화산 이씨의 선조는 베트남 최초·최후의 독립 왕조였던 리(Ly·李)왕족의 후예다. 시조인 이용상(李龍祥)은 리 왕조의 7대왕 고종의 동생으로 조카가 왕위를 찬탈당한 뒤 왕족 몰살을 피해 배를 타고 표류하다 황해도 옹진에 불시착해 일가를 꾸렸다. 그는 몽골이 침략했을 때 앞장서 싸운 공을 인정받아 고려 고종으로부터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해졌다. 현재 36대까지 내려왔으며 총 1000여명이 살고있다.  리 왕조는 이용상이 탈출할 즈음인 12세기 중반 중국계(진씨 왕족)에 의해 멸망한 뒤 베트남에서는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져왔다. 하지만 8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한국에 후손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가 베트남을 찾았을 때 베트남인들은 “왕족이 돌아왔다.”며 크게 환대했었다. 지금도 화산 이씨는 주한 베트남 교민 모임이 있을 때 교민자격으로 초청받고 있다.  화산 이씨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이상준 골든브릿지금융그룹 회장이 꼽힌다.  6차례에 걸친 창업과 폐업을 거듭했던 이 회장은 2000년 10억원을 밑천으로 세운 골든브릿지를 세웠고 현재 총 자본금 1900여억원에 5개 계열사를 거느린 금융그룹으로 키워냈다.  그는 2005년 “베트남 왕족의 후예로서 두 나라의 교류를 증진시키고 싶다.”며 한국 증권회사 최초로 베트남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2007년 베트남 정부는 이 회장의 혈통을 공식 인정, 내국인 대우를 하고있다.  1960년대 활동을 시작한 화산 이씨 종친회의 초대회장 고(故) 이월령씨와 2대 회장인 이상협씨 등도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민간 교류 증진에 이바지한 인물들이다.  화산 이씨 종친회 이희연 회장은 “다문화 시대를 맞아 양국이 ‘사돈의 나라’로서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며 “양국간의 경제·문화·사회적인 교류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화산 이씨 외에도 여진족 출신 장수 이지란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청해 이씨(靑海 李氏), 화산 이씨보다 90여년 먼저 고려에 들어온 베트남 왕족 출신 정선 이씨((旌善 李氏) 등도 대표적인 귀화 성씨이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왕실행사 쓰던 ‘비단 꽃’에 바친 한평생

    왕실행사 쓰던 ‘비단 꽃’에 바친 한평생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생명을 소중히 여겨 살아있는 꽃을 함부로 꺾지 않고 주요 행사가 있을 때는 비단으로 만든 꽃인 채화로 장식했다. 왕실이 멸망하면서 명맥이 끊길 뻔한 채화를 재현하는 데 황수로(76) 궁중 채화 연구소장은 50여년의 인생을 바쳤다. 황 소장은 외가가 왕실의 후손이었고 외할아버지가 고종 때 궁내부주사를 지내 궁중문화에 익숙했다. “궁중 문화는 한국 예술의 최고봉인데 의례, 음식, 음악 등은 복원됐지만 꽃은 유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재현되지 못했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세저포로, 가을에는 금은사를 엮은 비단에 쪽·홍화 등 천연 염색재료로 색깔을 내어 밀랍을 바르고 노루털로 꽃의 암술과 수술을 만든 것이 바로 채화다. 황 소장이 2005년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2007년 미국 UN 본부에서 채화를 전시했을 때 각국 정상 부인들과 반기문 사무총장은 그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밀랍을 발라 그 향을 맡은 벌과 나비들이 실제 꽃인 줄 알고 날아들기도 했다. 황 소장은 TV 사극에서 아무렇게나 만든 꽃을 머리에 꽂거나 세트장에 장식해 놓은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27일에는 서울 삼청각에서 순조의 지당판(池塘板)을 200년 만에 처음으로 재현했다. 덕분에 국립국악원은 궁중 예술 무대를 완벽하게 꾸밀 수 있었다. 지당판은 꽃으로 만든 무대다. 처용무는 이 지당판을 빙빙 돌며 추게 된다. 비단을 손으로 재단하고 다듬이로 두드려 인두로 일일이 지져서 붙여 만든 채화를 만드느라 50여년간 황 소장의 손은 성할 날이 없었다. 비단으로 만들다 보니 꽃은 스러져 남아 있지 않지만 채화를 만든 기록은 자세하게 남아 있어 황 소장은 최근 이를 복원해 ‘아름다운 한국 채화’라는 책으로 펴냈다. “궁중 채화는 알지 못하고, 종이로 만든 꽃은 무당을 연상시키다 보니 사람들이 꺼립니다. 한국의 꽃 문화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해 너무 아쉽습니다.” 숙연한 마음이 저절로 드는 장엄미를 가진 한국 채화의 아름다움을 일본의 전통 꽃꽂이인 ‘이케바나’처럼 세계에 알리는 것이 황 소장의 남은 소망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도포 입고 갓 쓴 예수 보셨나요

    도포 입고 갓 쓴 예수 보셨나요

    개항기에 처음 기독교를 접한 조선인들의 손에 성경보다 많이 들려 있던 책이 있었다. 영국의 우화 작가 존 버니언(1628~1688)이 쓴 종교 우화 소설 ‘천로역정(天路歷程)’이 그것. 조선인들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하늘의 도시’로 향하는 고난의 순례 여행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영성을 키워 나갔다. 그런데 17세기 영국 작가가 쓴 책이 성경보다 자연스럽게 조선인 신자들 사이로 퍼져 나간 이유는 뭘까. ‘천로역정’이 우화 형식으로 쉽게 교리를 전달한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한국적 색채를 입혀 거부감을 없앤 삽화의 매력 덕분이기도 했다. 천로역정은 첫 출간 때부터 곳곳에 삽화를 넣었다. 1895년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이 한국어로 번역할 때, 이 삽화 역시 번역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당시 활동하던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이 그림을 맡았는데, 그는 조선의 사정에 맞춰 주인공 ‘크리스천’을 갓 쓰고, 도포 입은 모습으로 재탄생시킨다. 그렇게 한국적으로 태어난 삽화는 총 42장. 삽화가 모두 들어간 책은 현재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만 1종이 남아 있다. 최근 이 박물관이 기산의 삽화 42점에 해제를 붙인 영인도록 ‘텬로력뎡’을 발간해 100여년 전 조상들이 봤던 천로역정을 그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있게 됐다. 한국판 천로역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예수의 모습이다. 제11화에 등장하는 ‘기름을 불에 붓는 예수’의 모습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전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예수조차 도포를 걸치고 갓을 쓴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성령의 불을 끄려고 물을 붓는 마귀의 반대편에서 불을 키우는 기름을 붓고 있다. 이뿐 아니라 12화에 등장하는 천사는 날개옷을 입은 선녀로 그려져 있고, 19·20화 ‘멸망의 도시’의 주인 아폴리온과 대적하는 주인공 또한 한국군 장수의 모습으로 그렸다. 악마 아폴리온 역시 불교식 탱화(幀畵·불당 벽에 걸어둔 그림)에 나오는 마귀의 모습을 하는 등 삽화 전체에서 유불선(儒佛仙)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출렁이는 과거사·인적 청산 문제

    [한·일 100년 대기획] 출렁이는 과거사·인적 청산 문제

    지난해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계기로 그동안 잠복해 있던 친일파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특히 기존에 독립유공자로 분류됐던 장지연 등 20여명의 이름이 이 사전에 올랐지만, 국가보훈처가 이에 대한 입장표명을 보류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보훈처 관계자는 19일 “친일인명사전의 관련 내용을 검토하고 공적 자료 등과 비교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본적으로 보훈처는 보훈대상 후보의 공적 사항만을 검토하는 곳이어서 친일행위를 평가할 권한이 없다.”고 말해, 논란에 휩싸이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강점기역사 체계적 극복 실패 친일파 처벌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친일’에 대한 명확한 기준점을 제시하지 못한 광복 이후 우리 역사의 한계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36년간의 암흑기를 체계적으로 극복해내는 데 실패했다. 일제는 한·일병탄 후 한국인의 동화를 표방하며 ‘내선일체’를 강조했다. 내지(일본)인과 반도인을 차별하면서도 황국신민으로서 국민적 일체감을 강조했다.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교육률이 급등하면서 동화도 가속화됐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인 출신 교사, 보통문관시험을 거친 하급행정관료·경찰의 비율도 급격하게 올라갔다. 지원병·징병 형태로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참전한 한국인만도 20만명이었다. 참전을 독려해 친일파로 지목된 춘원 이광수도 “조선 민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한 행위였다.”라고 했다. 이런 현실은 광복 이후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인적 청산에 장애가 됐다. 친일파·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반민족행위자 등을 인적 청산의 대상으로 개념화했지만,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더구나 친일청산 문제는 미군정 지배와 근대화 시대를 거치며 경제성장에 떠밀려 제대로 된 논의나 통합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간간이 학계를 중심으로 친일청산 문제가 거론됐지만, 민족주의 관점에서 시작된 인적청산 과정은 “역사학적 영역에 속한 부분을 정치적 논리로 재단할 수 없다.”는 반대 논리에 부닥쳤다. 최근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 등의 친일인명사전 등재 문제도 이런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있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 교수는 “광복 직후 객관적 사실에 따라 어떤 수준까지를 친일로 할 것인지 하는 잣대를 마련하지 못한 한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면서 “시대상황을 감안하지 못한 엄격한 잣대가 민족을 둘로 갈라놓을 수 있다.”고 했다. ●“인적청산 정치논리로 재단 안돼” 친일청산의 한계는 정권마다 출렁인 한·일 관계에도 원인이 있다. 제헌국회는 1948년 10월 친일파 처벌에 대한 의지를 최초의 특별검사로 불리는 반민특위 조직으로 구체화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사회 주류층을 형성해온 친일파를 흡수한 이승만 정권이 그들을 처벌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반민특위는 출범 1년만에 공소시효 단축과 특위 폐지의 외압에 시달렸다. 친일세력의 특위위원 암살 음모, 김구 선생 암살 등으로 특위는 사실상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조사대상 7000여건 중 221건만 기소하고 12건에 대해 유죄판결을 이끌어냈지만, 그나마도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5·16을 통해 장기집권에 돌입한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인 반일 감정을 토대로 19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을 이끌어내며, 한·일병탄의 무효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일본의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조약 문구로 ‘실패작’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과 미국의 지원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미국에 의해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지목된 일본과의 친선이 필요했다. 군 출신인 전두환·노태우 정권 역시 과거사 청산에는 큰 결실을 맺지 못했다. 각각 일본 역사교과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지만 과거사 청산, 한·일 관계 개선보다는 경제 개발 자금 조달 창구인 일본을 압박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됐다. 방일을 통해 아키히토 일왕에게서 각각 “진심으로 유감”, “통석의 염(念)”이라는 사과를 받아냈지만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따랐다. ●“한·일 미래지향적 신뢰구축을”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는 한·일 간 최대 이슈였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와 관련,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에게서 처음으로 식민지배 인정과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뜻을 받아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 새로운 물줄기를 열었다. 시민 중심의 과거사 청산 운동에 불을 댕겼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군사정권을 거치며 정치·경제 논리에 파묻혔던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논쟁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는 54년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한 하토야마 내각의 전향적인 과거사 인식 전향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과거사 청산문제가 보·혁 갈등으로 비화하면서 또다른 한계에 직면해 있다. 양 교수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선 과거사에 결부해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사이가 되어선 안 되고, 그렇다고 과거를 잊어버리고 진실을 왜곡한 채 이뤄지는 것도 옳지 않다.”면서 “양국 모두 대내외적으로 진실된 인식을 바탕으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규 김정은기자 cool@seoul.co.kr
  • “연행도는 김홍도 작품 화성 건설과 직접 연관”

    “연행도는 김홍도 작품 화성 건설과 직접 연관”

    단원 김홍도의 연행도(燕行圖)는 수원 화성 건설용? 지난 4월 세간에 알려진 조선시대 사행(使行·사신 행차) 그림 연행도가 김홍도의 작품이 확실하며, 정조가 공을 들였던 화성 건설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연행도는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해 올봄 공개했다. 공개 당시 단원의 그림으로 추정됐으며 조선시대 사행그림 가운데 최고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정재훈(43)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는 이 같은 내용의 ‘연행(燕行) 길에서 본 중화(中華)문명’이란 논문을 17일 서울대 신양인문학술정보관에서 열리는 인문연구 심포지엄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정 교수는 논문을 통해 “연행도가 김홍도의 작품일 뿐 아니라 그가 정조 13년(1789년) 연행사(조선이 청나라에 보낸 사신단)를 따라간 것 자체가 정조의 명령에 의해 수행되었고, 당시 최고 현안이었던 화성 건설과 직접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그 근거로 13폭짜리 연행도의 주된 소재가 명의 멸망, 청의 등장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라는 점과 조선 사신들이 주로 방문한 곳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 점 등을 들었다. 그림에 나오는 조양문이나 산해관, 동라성, 정양문 등은 모두 성곽 제도와 관련된 장소다. 즉 화성 건축에 필요한 정보와 그에 관련된 곳을 상세하게 그렸다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다. 정조 13년은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화성으로 옮기는 천장(天藏)이 결정된 해다. 김홍도가 동지사행에 포함되기 한달 전의 일이었다. 따라서 새로 읍성을 옮겨야 하는 시급한 상황에서 중국의 성곽 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정 교수는 “실제 수원 화성은 김홍도가 그려온 산해관의 동라문이나 조양문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었고, 벽돌을 활용해 지은 것도 중국성의 특징을 받아들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김홍도의 중국행은 알려진 것처럼 서양화법에 대한 연구목적보다 화성 건설에 앞서 중국 베이징(북경)을 참고하기 위한 정조의 의도가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김홍도가 정조의 특별화원으로 규장각(자비대령화원)에 속해 있으면서 정조가 요구하던 그림을 그린 사실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예측가능한 일이었다는 설명이다. 정 교수는 “동지사행에 참여하기 바로 전 해인 정조 12년 가을, 정조의 특명으로 금강산 등 관동지방을 유람하며 ‘금강사군첩’을 남긴 것은 동지사행의 사전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2012’ 돌풍 CG의 힘?

    ‘2012’ 돌풍 CG의 힘?

    벌써 360만이다. 영화 비수기로 통하는 11월, 그것도 여름에 빛을 발한다는 재난 영화임에도 ‘2012’의 성공 가도를 막을 수 없었다. 지난주와 이번주 국내 스크린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900여곳을 확보하며 거센 흥행몰이를 했다. 하지만 뭔가 찜찜하다. 재난의 규모만큼이나 시나리오의 구멍도 큰 아쉬움 때문이라고 할까. 사실 재난 영화에서 철학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 수 있다. 안 그래도 고달픈 현대인들이 영화를 매번 심각하게 볼 이유는 없다. 스트레스라도 확 날려주는 걸로 족하다. 하지만 재난 영화도 영화다. 내용 전개에 개연성이 없다든가 손발이 오그라드는(?) 노골적인 휴머니즘으로 점철돼 있다면 아쉬움이 남는 건 당연하다. 적어도 “돈만 있으면 나도 만들겠다.”는 관객의 비아냥이 나오지는 말아야 한다. ‘2012’가 그렇다. 이 영화는 기존 재난 영화의 기본 ‘공식’을 그대로 따랐다. 재난 영화의 공식은 단순하다. 우선 재난을 겪을 표본집단을 산출한다. 보통 ‘가족’이 사용된다. 다음으로 온갖 컴퓨터 그래픽(CG)로 치장한 재난으로 표본집단이 겪는 위기를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가족 혹은 이웃을 위한 숭고한 희생을 통해 휴머니즘을 이야기한다. 재난 영화가 이 틀을 벗어나기란 어렵다. 다만 시나리오를 통해 다른 재난 영화와 차별성을 부여할 수 있는 부분은 마지막 절차인 휴머니즘이다. 이 휴머니즘을 어떻게 독창적으로 구현할지, 그 안에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어떻게 담아낼까가 감독이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기교다. 이런 면에서 ‘2012’의 휴머니즘은 구태의연하다. 지나치게 직설적이다. 가령, 양심적인 지질학자 헬슬리 박사(치웨텔 에지오포)가 구조선에 사람을 더 태울 수 없다는 당국자를 비난하며 ‘우리는 하나’라는 식으로 각국 정상들을 설득하는 장면이나 미국 대통령의 자기 희생 등은 너무나 많이 봐온 장면들이다. 자기만 살려고 했던 러시아 출신 기업가의 비극적 최후는 기원전에도 통했다던 ‘권선징악’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쉽게 말해 시나리오를 너무 쉽게 만들었다. 엄청난 자본을 쏟아부은 CG로 치장된 이 영화는 작품성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중소영화 제작자들의 힘을 빼놓는다. 하지만 막강 CG의 힘은 시나리오의 한계를 어느정도 상쇄하고 있는 분위기다. 사실 ‘2012’는 대단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인류 멸망 시나리오 가운데 가장 피부에 와닿는 ‘자연재해 종합세트’라 부를 만 하다. 인도양 쓰나미와 태풍 카트리나, 쓰촨성 지진을 경험한 우리에겐 너무나 현실감있는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 올해 국내 영화계를 강타한 또 다른 재난영화가 있다. 1000만 관객을 끌어모으며 한국의 재난영화사를 다시 쓴 ‘해운대’가 그것. ‘해운대’ 역시 재난 영화의 공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차이가 있다면 표본 집단을 산출하는 과정이 구구절절하다는 것. 해운대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이웃들 삶의 긴 나열, 여기에 쓰나미라는 위기 소재를 대비시키되 재난은 영화 말미에 짧게 나타날 뿐이다. 우리 이웃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위트있게 꾸며내는 데 중점을 뒀다. 물론 이들의 평범한 삶과 재난의 개연성을 연결하는 부분이 어색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재난 영화의 영원한 주제인 휴머니즘을 조금은 달리 표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6년 개봉한 ‘괴물’은 재난 영화가 휴머니즘 말고도 풀어낼 스토리가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괴물의 탄생과 위기 해결 과정 속에 담긴 당국의 무능함과 정보 독점자의 야속함(?), 그리고 봉준호 감독 특유의 해학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단골 손님인 가족 휴머니즘도 빼놓지 않았다. 할리우드 재난 영화에 이런 ‘냉철한 통찰력’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신라 명기’ 전화앵 묘 성역화 추진

    한국 최초의 기생으로 추정되는 울산의 명기 전화앵(900~1100년 사이 생존 추정) 묘에 대한 발굴과 묘역 보존 성역화 사업이 추진된다.울산 울주문화원은 23일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 57 일원의 전화앵 묘로 추정되는 곳에서 ‘신라명기 전화앵 묘 발굴 고유제’를 지냈다.전화앵은 신라가 멸망할 당시의 기생으로, 새로 건국한 고려에까지 이름이 알려졌을 정도로 춤과 노래가 뛰어난 예기였다. 그는 신라 멸망 후 망국의 한을 품고 절개를 지켜 추앙을 받았다고 소개돼 있다.이날 고유제는 전화앵의 묘로 알려진 이곳을 발굴, 그의 유물을 찾기 위해 기원하는 의식으로 진행됐다. 1996년 처음 발견된 전화앵 묘는 1530년(중종 25년) 이행, 홍언필이 완성한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 열박령편에 ‘열박령은 경주 남쪽 30리에 있고 동도(東都·현 경주)의 기녀 전화앵이 묻힌 곳’이라고 기록돼 있다.울주문화원은 고유제를 지낸 뒤 곧바로 울산발전연구원 측과 함께 묘에 대한 발굴에 들어갔다. 이날부터 시작된 발굴은 일주일 이내에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된다.변양섭 울주문화원장은 “전화앵 묘 발굴에서 유물이 나오면 묘역 보존을 위한 성역화 사업을 추진한다.”고 말했다. 한편 울산지역의 대표적인 문화단체인 울산학춤보존회는 올해로 8년째 전화앵 추모제를 열고 있다.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씨줄날줄] 고조선室/김성호 논설위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권력을 쥔 승자 입장에서야 오점을 지우려 드는 게 뻔한 일. 진실과 괴리된 승자 기록이 정설로 통하는 것은 비극이다. 우리의 삼국유사, 삼국사기만 봐도 기술이 판이하고 후대에선 그 역사적 편차를 입맛에 맞게 이용한 편린 또한 적지 않다. 다행히 역사왜곡을 바로잡자는 뒤늦은 노력이 있지만 왜곡된 역사에 대한 함구는 씻지 못할 죄악이다. 진실을 외면한 ‘승자 기록’ 차원에서 볼 때 우리에게 고조선은 분명한 아픔의 역사임을 부인키 어렵다. 2007년 개정 국사교과서에도 “BC 2333년 건국됐다.”고 명백히 실체를 인정하는 고조선.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명칭을 처음 썼다지만 동국통감, 해동이적, 동국역대총목 등 우리 문헌과 중국의 사고전서, 조선세기 등도 건국연대를 BC 2333년으로 명기하고 있다. 요령지방에서 태동해 대동강유역의 왕검성을 중심으로 강력한 국가를 세웠고 철기문화의 위만조선을 거쳐 BC 108년 멸망 후에도 한반도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기록들은 명확히 전하는 것이다. 많은 사료들이 고조선을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명백히 기술함에도 이 땅에서 오랫동안 그 실체를 인정받지 못한 건 모순이다. 아무래도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지배했던 강력한 고대국가의 위상을 애써 지우려 든 일제의 왜곡과 그에 편승한 식민사관 탓이 크다. ‘동북아의 모든 역사를 중국 영역 아래 둔다.’는 동북공정의 중국에도 눈엣가시. 북한 학계를 비롯해 국내 일부 학자들은 고조선 영토의 청동기문화를 BC 30세기까지 거슬러 잡고 있다. 황하의 청동기 연대인 BC 22세기보다 훨씬 이전이니 중국이 고조선을 애써 축약함은 당연할 것이다. 한국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실체를 바로 보자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국사관, 식민사관에 치우쳤던 주류학계는 떨떠름한 입장. 고조선을 향한 일반의 인식도 여전히 실체와 많이 동떨어진 느낌이다. 그런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이 보란듯이 고조선실을 설치해 어제 선보였다. 기존 원삼국실 속의 작은 부분으로 들어 있던 고조선을 별도의 전시실로 독립시킨 것이다.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식 다음날 이뤄진 ‘고조선의 독립’에 찬사를 보낸다.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通史로서의 우리역사 오롯이 복원

    通史로서의 우리역사 오롯이 복원

    수천년 전 고조선의 기억을 오롯이 담고 있는 기록과 유물이 제 이름을 되찾았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은 개관 100주년을 맞아 통사(通史)로서 우리의 역사를 완벽하게 복원하게 됐다. ●랴오닝식 동검 등 고조선 유물 100여점 한자리 국립중앙박물관은 3일부터 기존의 ‘원삼국실’이라는 이름을 해체하고, 고조선실을 새롭게 만들어 시민들에게 공개한다. 식민사관의 잔재이자 일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만 쓰이던 이른바 ‘원삼국실’에 있던 나머지는 ‘부여·삼한실’로 이름을 바꿔 진한·변한·마한 등의 유물로 세분화된다. 고조선실에 들어서면 가장 앞 줄에서 고조선의 표지적 유물이 될 수 있는 랴오닝(遼)식 동검(銅劍)이 관람객들을 맞는다. 비파형 동검이라고도 하는 랴오닝식 동검은 한반도에서만 80여점이 발견됐으며 같은 청동기 시대의 다른 칼과 달리 몸통과 칼날이 분리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고조선 동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시실은 ‘고조선의 형성’, ‘기원전 5세기 무렵 고조선의 변화’, ‘기원전 4세기 이후 고조선의 발전’, ‘고조선의 멸망과 문화의 파급’ 네 부분으로 나뉘며, 고조선 유물 100여점과 관련 유물 등 200여점이 전시된다. ●가평 달전리서 발굴된 동검·쇠검 첫 공개 평안북도 의주 동굴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미송리식 토기’ 역시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다. 납작한 바닥에 아가리가 벌어지는 형태를 갖고 있는 미송리식 토기는 복제품이다. 또한 경기도 가평 달전리에서 발굴된 한국식 동검, 쇠검 등은 이번 고조선실 개관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유물이다. 기원전 1세기로 추정되는 고조선계 무덤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송의정 박물관 고고부장은 “고조선 멸망 이후 유민들을 통해 그 문화가 남쪽으로 내려왔음을 증명함과 함께 이미 철기가 쓰이기 시작했음에도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동검을 계속 사용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번 고조선실을 통해 정치적 실체를 가진 국가로서 고조선을 다시 한번 우리의 역사로 인정함과 동시에 고조선에서부터 조선까지 완벽한 통사 형태로 일단락하게 됐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안중근 의사의 생생한 옥중 신문기록

    ‘피고가 평소에 적대시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전에는 별로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최근에 한 명 생겼다.’ ‘그게 누구인가.’ ‘이토 히로부미이다.’ ‘이토 공작을 왜 적대시하는가.’ ‘그 이유는 많다. 즉 다음과 같다.(중략)이상의 죄목에 의해 나는 이토를 살해했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직후 체포된 안중근 의사가 10월30일 하얼빈 일본국 총영사관에서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에게 받은 1차 신문 조서의 일부다. 안 의사는 이토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이토가 조선의 왕비를 살해했고, 한국에 불리한 조약을 강제로 체결했으며, 무고한 한국인들을 살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교란시킨 점 등 열다섯 가지의 ‘죄목’을 언급했다. 그리고 ‘만약 이토가 살아있다면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토가 사망한 이후 일본은 충분히 한국의 독립을 보호하여 실로 한국은 부강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밖의 동양 각국의 평화 또한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이기웅 엮음, 열화당 펴냄)는 검찰관 신문조서와 공판시말서에 기록된 안 의사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투철한 의지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책에 실린 ‘검찰관 신문조서’는 일본 관동도독부 뤼순감옥에서 1909년 10월30일부터 이듬해 1월26일까지 모두 11회에 걸쳐 진행된 안중근에 대한 신문기록과 그의 두 동생 안정근, 안공근에 대한 참고인 신문기록이다. 그리고 ‘공판시말서’는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1910년 2월7일부터 14일까지 재판장 마나베 주조 심리로 6회에 걸쳐 열린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도하에 대한 공판기록을 번역해 실었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초판 발간 10년 만에 새롭게 출간된 이번 개정판에는 안 의사의 공판 관련 자료 및 사진 자료를 추가해 자료집으로서의 외양을 좀 더 충실히 했다. 특히 영국 화보 신문 ‘더 그래픽’이 1910년 4월16일자에 게재한 찰스 모리머 기자의 ‘안중근 공판 참관기’는 외국인의 눈으로 본 공판의 생생한 기록으로서 눈길을 끈다. 영국인 기자는 ‘그는 이미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 정도가 아니고 기꺼이, 아니 열렬히, 자신의 귀중한 삶을 포기하고 싶어 했다. 그는 마침내 영웅의 왕관을 손에 들고 늠름하게 법정을 떠났다.’고 썼다. 1만 2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명량대첩 재현 국경·지역 뛰어넘어 400년 갈등 깨다

    400여년 전 임진왜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한·중·일’ 장군들의 후손이 명량해전 전투 현장에 모였다. 전남 진도와 해남 사이 울돌목 바다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판옥선 12척(공식기록)으로 왜선 133척을 격파한 대승을 기념해 전남도와 해남군, 진도군이 명량해전축제(9~11일)를 공동으로 마련했다. 한산대첩축제를 개최하는 경남 통영시도 삼국의 평화를 위해 축제에 우정 참가했다. ●한·중·일 장수 후손들 한자리에 10일 오전 진도대교 위에서는 명량해전 당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패들이 상여 3기에 안치됐다. 이날 이 충무공 후손은 물론 명나라 진린 장군의 후손, 일본 구루시마 미치후사 장군 후손, 난중일기에 기록된 ‘민초 전사’ 오극신·양응지의 후손, 관광객 등이 참여해 국화꽃 1000송이를 다리 아래 울돌목으로 일제히 던졌다. 이어 이번 축제의 백미인 명량해전을 재현하는 행사가 한 편의 영화처럼 연출됐다. 축제라고 해도 영화 ‘신기전’과 ‘해운대’의 특수효과팀, 스턴트팀이 참여해 화약과 폭죽 등을 터뜨려 사실감을 더했다. 조선 수군의 판옥선과 일본군의 아타케부네(안택선) 등을 대신해 작은 어선 100여척을 동원하고 수군으로 분장한 300여명이 직접 물로 뛰어들기도 해 관람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울돌목에서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면서 거센 물살 흐름이 일시 정지되자 판옥선과 왜선이 전투대형으로 갈라서더니 이내 뒤엉켜 연막탄을 쏘아올렸다. 배에는 형형색색의 깃발 500여개가 내걸리고 곳곳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명량해전은 모함 끝에 다시 해전에 나선 이 충무공이 막강한 왜군을 유인해 좁은 벽파진(폭 280~320m)을 통과하는 왜선을 일자진 공격으로 격파한 대첩이다. 총공격에 나선 왜군은 6명의 장군 중 구루시마 장군이 현장에서 전사하는 수모를 겪었다. ●국화 1000송이 띄워 희생자 넋 기려 구루시마 장군의 후손인 무라세 마키오(69·구루시마현창보존회 사무국장)는 “울돌목은 선조의 안타까운 혼이 서려 있는 곳”이라면서 “그러나 이번 축제의 주제처럼 한국과 일본 모두가 평화와 상생을 잊지 말고 서로 도우며 잘살아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린 장군의 후손이자 귀화인 진방식(70·전 교육자)씨는 “할아버지는 명나라의 조선구원군 수군도독으로 500여척을 이끌고 강진, 완도 해전에 참여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고 전했다. 진린 장군의 후손은 그의 유언대로 명나라가 멸망하자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 황조마을에 정착했다. ●133척 해전 재현 다큐멘터리 보는 듯 난중일기에 나오는 오극신의 후손 오상민씨는 “울돌목 전투에서 충무공을 도와 왜선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운 할아버지를 기억해 축제 현장에서 헌화와 제례를 할 수 있어 의미 있고 고맙다.”고 강조했다. 이번 축제에 통영시는 초등학생 50여명을 보내 군점무(군대 점호를 춤으로 엮음)를 무대에 올렸다. 축제 마지막 날인 11일 진도대교에서는 상여 5기에 수백여장의 만장 행렬이 뒤를 따랐다. 망자의 혼을 달래는 진도 씻김굿은 보는 이들을 숙연케 했다. 진도군 전체 786개 마을에서는 마을별 역사와 전설 등을 적은 깃발 786개를 진도대교에 내걸어 주민참여형 축제다운 모습을 보여 줬다. 진도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진실’ 잃어버린 한국史

    역사 기술이 객관성을 의심받을 때가 더러 있다. 당대의 권력자나 역사가의 자의적인 해석과 판단에 따라 쓰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론 역사를 바라볼 때 비판의식이 필요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한국사를 볼 때는 더욱 그렇다. 이 시기에 우리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된 데다 당시 역사학자-일제 식민사관에 근거한-의 줄기가 지금까지 질기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우리의 역사는 조선 후기 노론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철학으로 주류 역사학의 오류를 꼬집는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조선왕 독살사건’, ‘세상을 바꾼 여인들’ 등 30여권의 저서를 내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온 그는 신작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역사의아침 펴냄)에서 고대사, 삼국사기, 조선후기사, 항일투쟁사 등 4대 한국사의 왜곡을 집중 분석한다. ●한국 고대사 복원이 왜곡 시정의 출발 한국사 왜곡에는 일제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두 사관의 뿌리는 하나다. 조선 후기 집권당이었던 노론의 상당수 인사는 일제의 대한제국 점령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지배층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런 가문 출신의 일부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식민사관 전파에 일조했고, 해방 후에도 사학계 주류를 장악한 결과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한국사를 구성하는 주요 관점이 됐다는 설명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가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고 했던 것은 한국 주류 사학계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말이다. 저자는 한국사의 4대 왜곡을 바로잡는 출발점을 본래 고조선의 역사적 위치를 복원하는 지점에 둔다. 보통 우리는 고조선에 대해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라고 배운다. 그러나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단군조선이 기원전 24세기에 건국됐다.’고 말한다. 청동기시대는 만주지역에서는 기원전 15~13세기에, 한반도에서 기원전 10세기에 전개됐다. 일연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만주까지의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식민사관에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조선을 신화의 영역으로 치부하고,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사군(漢四郡)’도 논란거리다. 중국 고대 한나라 무제(BC 141~87)는 고조선 우거왕과 조한전쟁을 벌여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4개의 행정구역 ‘한사군’을 만들었다는 게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이다. 사마천은 ‘사기’의 조선열전에 조한전쟁을 적으면서도 ‘한사군’이 주둔했던 지역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는다. 후세에 ‘사기’ 본문 뒤에 덧붙인 주석에 구체적으로 한사군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기’의 조선열전에는 ‘사군’으로, 흉노열전에서는 ‘이군’으로 나와 기록이 서로 맞지 않는다. 한사군의 명칭 자체가 수수께끼인 것이다. 그런데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정부가 세운 동북아역사재단(옛 고구려연구재단)의 ‘낙랑문화연구’에서 “제7차 교과 과정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한사군의) 존재 자체와 의미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서술…삼한 등과 같은 주변 집단들의 역사적 변화 발전 양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는 실정이다.”라고 적었다. 정부 연구기관이 존재여부가 불투명한 한사군의 존재를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했다. ●식민지배 정당화를 위한 역사가 한국사 주류? 저자는 고대사 왜곡의 원인을 일제 조선총독부 등이 1907년부터 한반도와 만주 전역을 점령하기 위해 진행한 연구에서 찾는다. 일제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와 이케우치 히로시, 도리이 류조, 세키노, 이마니시 류 등이 이 연구에 뛰어들어 조선 역사를 만주 역사의 한 부분으로 만들고, 고구려 유적을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 유적으로 재창조했다. 한국사를 식민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도록 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삼국사기’가 김부식이 조작한 가짜라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도 그무렵 나왔다. 쓰다는 ‘조선역사지리’ 등의 저서에서 고대 한반도 북부에는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 78개 소국들이 우글거렸다고 적었다. 그래야 소국들을 통합할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이 시기 한반도 남부에 신라와 백제라는 강한 고대 국가를 언급하고 있으니 삼국사기가 조작됐다고 주장해야만 하는 이유다. 주류역사학계의 고대사 인식체계가 일본 식민사관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면, 조선 후기사에는 노론사관이 있다. 저자는 노론사관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조작해 내고, 효종의 북벌에 시종일관 발목을 잡은 송시열이 북벌의 화신이며 실학의 이용후생학파(중상학파)를 노론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또 일제 식민사관에 경도된 역사학자들이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사까지 소멸되도록 한 이유 등을 조목조목 짚어 내며 흔히 알려진 역사의 정설을 뒤집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국가 연구기관의 실태도 샅샅이 파헤친다. ●한국사 바로잡기는 동북아 평화의 시작 이런 주장은 주류 사학계를 비난하거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저자는 “한 세기 전 일제 식민사학에 의해 공격받았던 한국사는 지금 그 식민사학을 토대로 한 중화 패권주의 사학에 의해 다시 공격받고 있다.”면서 “동북아의 진정한 평화는 침략적 역사관을 상호 호혜적인 평화적 역사관으로 전환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면 동북공정은 자연히 무력화되며, 이러기 위해서는 한국사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면 그의 역사관 역시 편향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할 수 있다. 저자가 내놓은 광범위한 자료와 섬세한 분석은, 학창시절 무조건 외운 한국사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1만 5000원. 최여경기자 kids@seoul.co.kr
  • [도시와 산] (20) 안동 학가산

    [도시와 산] (20) 안동 학가산

    백두대간에서 힘차게 뻗어 나온 문수지맥이 남쪽으로 내달리다 마지막으로 불끈 치솟았다. 경북 안동과 예천군 경계에 있는 학가산(鶴駕山·882m)이다. 산세가 수려하고 하늘로 비상하는 학을 닮아 이렇게 불린다. 안동과 예천주민들은 학가산을 그야말로 진산과 명산으로 여긴다. 산다운 산이 없는 가운데 홀로 산의 풍채를 지녔고, 이 속의 영험한 기를 받아 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영남 인물의 반은 안동·예천에 있다고 했다. 주민들은 이를 오로지 학가산의 덕택이라 믿으며 산에 기대어 산다. 지난해 6월에는 학가산 자락의 안동·예천 땅이 나란히 경북의 새천년 도읍지로 결정되는 경사를 맞으면서 학가산은 주민들로부터 더욱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0여년간 학가산을 연구하는 안동 길주초교 장두강 교장은 “학가산은 영남의 거령(巨靈), 가장 영적인 산”이라고 평가했다. ●농암·퇴계 등 수많은 인재 배출한 진산 학가산은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곳이다. 신라시대 의상 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능인 대사가 학가산에서 법문에 정진한 이래 조선 초까지 불교가 번성했던 곳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학가산 남쪽 자락에는 안동에서 가장 컸다는 광흥사를 비롯한 사찰과 암자가 200여개나 됐다. 사찰 등이 화재로 많이 소실된 지금도 ‘팔(8)방 구(9)암자’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학가산은 봉화와 안동 땅의 청량산과 더불어 ‘산수(山水) 문학’의 보고다. 한국국학진흥원 임노직 수석 연구위원은 “청량산이 퇴계 산수문학의 단일 성지라면 학가산은 예천, 영주 등 경북 북부지역의 수많은 유학자가 산의 골골을 돌아다니며 산수문학을 즐긴 곳”이라고 설명했다. 영남의 각종 문집에는 학가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주옥 같은 시 1000여편과 유산기(기행문) 30여편이 전해진다. 학가산의 문인으로는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은둔의 선비였던 청음 김상헌 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이처럼 학가산은 절경과 함께 문학이 흐르고, 불교의 문화와 정신이 골짜기마다 배어 있다. 고려 공민왕(1330~1374)의 흔적도 엿볼 수 있다.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안동에 몽진 온 공민왕이 쌓은 것으로 알려진 학가산성이다. 성은 허물어지고 터만이 휑한 모습이다. 공민왕은 두 차례나 침입한 홍건적을 전멸시켰지만 국력을 쇠퇴시켜 왕조의 멸망을 재촉한 원인의 하나가 됐다. ●꼬불꼬불해서 행복한 광흥사 코스 인기 안동 쪽 산행코스는 모두 14개다. 광흥사 코스를 택하면 산행의 즐거움과 묘미가 더한다. 정상까지는 2시간 정도. 산 들머리인 천주(天蛛)마을까지 30여분 거리인 등산로는 숲이 울창하다. 흙길은 기름져 비단길같이 부드럽다. 풋풋한 흙냄새와 신선한 공기, 이름 모를 숱한 풀벌레 소리가 어우러져 오감이 즐겁다. 평탄한 길은 꼬불꼬불 나 있어 정겹다. 마치 낙원 같다. 길섶에서 만난 윤삼숙(50·여·안동시 옥동)씨는 “등산객들은 이 구간을 ‘행복한 길’이라 한다. 산행을 전후해 몸을 푸는 구간으로는 이만 한 곳이 없다.”며 즐거워했다. 어느새 ‘하늘 거미’ 뜻이 있는 천주마을에 다다른다. 10여가구가 사는 하늘 아래 첫 동네다. 이 마을의 한 노파는 “마을에는 하늘거미가 앞산 복지봉과 뒷산 학가산에 거미줄을 치면 중앙이 마을이 된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들려줬다.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 식복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의미란다. 마을에서 산 정상까지는 선물 보따리가 널렸다. 등산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원시림과 기암괴석, 분재처럼 자란 노송은 길손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놓는다. 정상부에 오르면 능인 대사의 이름을 딴 능인굴이 나온다. 능인이 수행과 포교를 하면서 살았다는 거대한 자연 석굴이다. 굴 막장의 항상 마르지 않는 석간수는 길손에게 반가운 존재다. 학가산의 압권은 단연 정상에서의 조망이다. 정상인 국사봉에 서면 사방이 탁 트인다. 산 아래 무수한 산은 올망졸망 멋을 부리고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줄기가 간간이 시야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청량산과 일월산이, 서쪽, 남쪽, 북쪽으로는 예천, 의성, 영주의 때묻지 않은 산야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장관이다. 경북의 새 천년 도읍지가 들어설 안동 풍천면과 예천 호명면 일원은 용틀임 중이다. 안동시 산악연맹 이홍영(54) 이사는 “전국의 산 정상에서 사방이 모두 바라다보이는 곳은 학가산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산자락엔 온천·메밀밭 등 온통 즐길거리 학가산 자락은 각종 즐길거리가 풍성하다. 산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을 수 있는 학가산 온천은 알칼리성 중탄산나트륨 온천으로 첨가물을 쓰지 않는다. 메밀 꽃이 피는 가을이면 산자락의 안동 북후면 신전리 일대는 온통 하얀색으로 변하다. 메밀밭이 자그마치 20㏊에 달한다. 이 마을 입구를 지키는 수령 400여년의 이른바 ‘김삿갓 소나무’는 또 다른 볼거리다.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삿갓이 신전리 석탑사에 들렀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쉬어간 뒤 나뭇가지가 삿갓 모양으로 변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가을이면 신전리와 이웃한 옹천리 일원에서는 ‘안동 학가산 산약(마) 맛 축제’도 열린다. 학가산 예천 북쪽 계곡 140만㎡엔 자연휴양림이 터를 잡았다. 안동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학가산 세 이름 안동 “도심 품은 배산” 영주 “앞산 같은 안산” 예천 “해가 뜨는 동산” 경북 안동과 예천, 영주의 중심에 있는 학가산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명칭과 해석이 제각각이다. 이들 지역의 읍지 등은 학가산 혹은 하가산(下柯山·아랫가지 산)이라 하며 안동의 서쪽 40리, 영주의 남쪽 40리, 예천의 동쪽 31리에 있다고 했다. 안동 8경 중 제5경 학가귀운(鶴駕歸雲)편에는 학가산영조삼군(鶴駕山影照三郡)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학가산의 그늘이 (이들) 세개 군에 드리운다는 것이다. 18세기 영주 출신의 뛰어난 문필가 송정환은 학가산의 관점에 따라 “안동에서는 작(爵)이 되고, 영주에서는 문(文)이 되고, 예천에서는 부(富)가 된다.”했다. 이는 풍수 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안동에서는 벼슬하는 사람, 영주에선 글쓰는 선비, 예천엔 부자가 많이 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날 학가산 구역도 상에는 안동과 예천에 걸쳐 있다. 총 면적 1557㏊의 53%인 826㏊가 안동, 나머지 731㏊는 예천 땅이다. 또 지역마다 산의 위치에 따라 안동은 학가산이 도심을 감싸고 있다 해서 배산, 영주는 앞산이라 안산, 예천은 해가 뜨는 산이라 해 동산이라 한다. 산 정상의 생김새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 영주에서는 평평해서 선비봉, 안동에선 울퉁불퉁해 문둥이봉, 예천은 인물이 수려하다 하여 인물봉으로 부른다. 이렇듯 소백산을 명산으로 하는 영주를 뺀 안동과 예천은 서로 학가산을 자기 고장의 명산이라 주장하며 자랑한다. 심지어 안동과 예천은 각각 학가산 정상(예천쪽 870m, 안동쪽 882m)에 표지석을 설치하는 등 산을 둘러싼 자존심 싸움까지 벌이고 있다. 학가산 자연휴양림 관계자는 “몇 년 전 예천 쪽에서 학가산 정상에 표지석을 세웠으나 이후 안동 쪽에서 이를 몰래 허물어 표지석을 다시 세우는 등 지역간 신경전이 만만찮다.”고 귀띔했다. 안동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안중근 의거 中의 반일 애국주의 교과서”

    “안중근 의거 中의 반일 애국주의 교과서”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하얼빈 의거는 조선의 독립 의지와 일본의 침략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올해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거가 한·중·일 등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을 재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안중근 의거의 국제적 영향’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연다. 손염홍 건국대 교수가 미리 배포한 발표문 ‘안중근 의거와 중국의 반제 민주운동’에 따르면 안중근 의거 직후 중국 혁명파와 입헌파의 평가는 엇갈렸다. 그러나 5·4운동이 끝나고 신민주주의 혁명기에 들어가면서 안중근 의거는 반일 애국주의 교육의 상징으로 부상하고 교과서로 활용돼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 혁명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박은식이 1914년에 발간한 ‘안중근’ 전기는 안중근 의거가 단순히 한국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한·중이 연대해 반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가 됐다고 손 교수는 분석했다. 안중근은 1907년 가을부터 1909년 10월까지 러시아 한인사회를 두차례 순방하며 동의회와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는 등 러시아지역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러시아에서의 안중근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재해석’에서 “안중근의 거사는 한인단체들이나 한민학교의 연설회, 연극 등의 행사에 단골 주제로 등장해 러시아 지역 한인들의 항일의식과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다.”고 했다. 안중근 의거에 대해 일본 사회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이규수 순천향대 교수는 “일본 언론계는 안중근에 대해 ‘미친 개’라는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고, 안중근으로 상징되는 조선인의 저항에 대해서도 ‘괴물’ ‘마물’이라는 극단적인 멸시감을 유포했다.”면서 “이토 공을 죽인 한국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언론의 비호를 받으면서 더욱 확산되었고, 이후 한국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안중근 의사의 업적에서 그가 주창한 ‘동양평화론’을 빼놓을 수 없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자서전을 탈고한 뒤 ‘동양평화론’ 집필을 시작했으나 끝맺지 못했다. ‘안중근 의거와 동양평화론의 현대사적 의의’를 주제로 발표하는 윤경로 한성대 교수는 ▲뤼순의 개방 ▲한·중·일 3국 평화회의 구상 ▲공동은행 설립 ▲공동 군단 설립, 교육 ▲상공업 발전 ▲로마 교황으로부터 3국 독립보장 등을 동양평화론의 핵심으로 요약했다. 윤 교수는 “오늘의 유럽공동체(EU)와 같은 아시아 경제공동체를 100년 전에 이미 구상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탁견이자 예지”라면서 “안중근 의거와 동양평화론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를 위한 평화운동이며, 이 점이 안중근 의거의 현대사적 메시지”라고 말했다. 심포지엄에서는 이 외에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가 ‘안중근 의거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기조연설하고, 장석흥 국민대 교수가 ‘안중근 의거의 국제성과 그 영향’을 주제로 발표한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 방광석 고려대 교수, 윤선자 전남대 교수 등이 토론자로 참여하고,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주도로 종합토론이 이어진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新아시아시대-한국의 도약] “한국의 재도약 시대이념 재창조에 달려 있어”

    [新아시아시대-한국의 도약] “한국의 재도약 시대이념 재창조에 달려 있어”

    “‘화혼양재(和魂洋才)’와 ‘중체서용(中體西用)’, ‘동도서기(東道西器)’ 중 최고의 가치는 동도서기입니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한(韓)’을 내세우지 않고도 정체성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에서 마주한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傳史·61) 교수는 투박한 한국어로 또렷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40년 넘게 한국과 동아시아에 관한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지한파(知韓派)답게 “현재의 한국사회는 16세기에 형성된 500년 주기의 역사순환과 19세기 말 형성된 100~150년 주기의 순환이 모두 생을 마감하는 대전환기에 놓여 있다.”며 “동도동기(東道東器)와 같은 새로운 시대이념을 만들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한국사회는 지식인이 방향성을 잃으면서 더 큰 혼란을 겪고 있다.”며 “지식인과 민중의 활발한 현실참여는 유교적 전통의 하나로 한국사회의 발전동력”이라고 분석했다. →구한말 일본은 성공, 중국은 절반의 실패, 한국은 낙오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외형만 놓고 풀이한 단선적 해석이다. 조선은 중립국가 변신 등 다른 가능성도 열려 있었다. 한국은 선진문명 수용의 오랜 역사를 지녔다. 19세기 유럽문명이 왔을 때 잠시 움츠렸지만 조선 초기만 해도 당시 최첨단이던 중국문명을 200~300년간 점진적으로 꾸준히 받아들여 재창조했다. 일본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약점이 오히려 19세기 유럽문명을 받아들일 때 발빠른 대응을 낳았다. 오늘날 중국이나 한국을 실패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최근 한반도 정세가 19세기 말과 유사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근대 이행기를 재점검해 답을 얻어야 한다는 말도 나오는데. -일부 학자마저 역사적 유추를 즐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단선적 이해는 오히려 역사의 오용을 가져온다. 역사학은 어떻게 시대를 이해하느냐에 대해 여러 얘기를 한다. 미래의 방향을 예측하려면 사회과학과의 협력이 필요하다. →19세기 조선이 중국 중심 조공체제를 버리고 ‘만국공법적’ 질서를 수용했다. 21세기 한국은 냉전질서가 쇠퇴하며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질서를 수용하고 있다. -오늘날과 19세기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19세기에는 신문명을 받아들이면 부국강병할 수 있다는 벤치마킹 모델과 희망이 존재했다. 반면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시장만능주의는 희망이 없다. 사회가 어떻게 된다는 분명한 목표도 없고, 소수만 성취하고 다수가 패배자가 되는 무한경쟁 상황이다. 19세기 유럽문명이 가졌던 의미와 신자유주의의 비전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해법은. -새로운 시대 이념이 필요하다. 16세기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역사주기가 시작된 것은 사회혼란과 관련이 깊다. 앞서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생긴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주자학이 생겼다. 원나라가 등장하며 세계 규모의 경제활동도 이뤄졌다. 고대 진·한 시대 이후 두 번째 중국문명이 탄생한 것이다. →답은 주자학의 부활인가. -(웃음) 복고는 아니다. 주자학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인간의 평등성을 전제로 사회질서를 잡으려던 주자학은 적어도 18세기 말까지 가장 합리적 사상이었다. 이에 입각한 국가·사회체제도 선진적이었다. 그런데 주자학은 동아시아에서 내재적으로 극복되지 않고 버려졌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됐지만 근대 이후 오히려 주자학적 뿌리가 깊게 되살아났다. 주자학의 진짜 극복은 미완의 과제이다. 주자학적 전통의 형성과정까지 소급해 선조가 이루지 못한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게 21세기 동아시아의 공통된 과제이다. →신아시아적 질서는 무엇인가. -주자학은 신아시아적 질서가 될 수 없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 나도 새로운 차원에서 공동선이나 인간관계 재창조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주자학적 사회구조가 500년 생을 마감하는 요즘 새 이념이 나오지 않으면 사회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 일본에선 과거 생각지 못했던 끔찍한 범죄가 매년 급증하고 있다.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희망을 주는 역사적 유산을 자주 접했다. 이 유산을 제대로 인식하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한다는 방향을 잡아야 한다. 지금 한국사회는 자긍심을 갖고 발전시킬 자산을 기르지 않고, 자산이 아닌 부분을 오히려 과대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발전전략은. -구한말 일본의 화혼양재, 중국의 중체서용, 조선의 동도서기 가운데 동도서기를 최고의 가치로 본다. 이는 유연한 주체성으로, 국민국가 건설의 표어로는 다소 약하지만 매개적 정체성으로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동도서기라는 구호를 새로운 각도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도서기가 오늘날 적용가능한가. -동도(東道)란 관념은 16세기 전환기 때 생긴 것이다. 19세기 후반 동도라는 것도 유교·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국가사회 체제이다. 조선사회가 갖고 있던 이념을 기초로 국가사회체제를 유지하면서 유럽의 기술문명에 대응하자는 내용이다. 이런 면에서 21세기 한국은 새로운 단계의 동도동기라고 할까, 가장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새로운 정신·기술문명을 구성해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향성을 찾자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강점을 주변국과 비교하면. -19세기 후반까지 보편적 이념을 갖지 못한 일본과 달리 조선은 주자학 등 보편적 문명을 활용, 국가체계를 완성한 경험을 지녔다. 역사적 경험의 차이라고 할까, 한국은 문명주의적 사고방식이 일본보다 강하다. 영어교육이나 유학열풍 등 한국사회는 ‘문명화 신앙’마저 지녔다. 중국의 경우 문명의 중심에 오래 서있어 자아관이 너무 강하다. 중국이 더 팽창해 국제질서에 혼란을 초래할 때 오랜 관계를 맺어온 한국만이 이를 통제할 수 있다. →한국 사회운동을 어떻게 보나. -구한말에도 개화파와 독립협회, 동학운동까지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 한국은 지금도 (사회운동이) 활발하다. 경험을 지닌 만큼 앞으로도 (긍정적 방향으로) 계속될 것이다. 반면 일본은 거의 사라졌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한국은 광복 이후 4·19혁명부터 최근 촛불집회까지 시민 스스로 움직였고, 정치를 변화시켰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 자유민권운동이 있었지만, 이후 100년간 경험하지 못했다. →한국 지식인의 역할은. -영향력이 예전보다 약해졌다. 자신감 자체도 상실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헤매고 있다. 특히 뉴라이트 지식인들이 그렇다. 진보진영 연구자도 마찬가지로 근시안적 현실만 보고 있다. 이전 지식인들은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일면 유교적 전통의 영향으로, 유교적 정치제도와 과거제가 자리잡지 못한 일본에선 보기 힘든 모습이다. 또 동남아에선 지식인의 무게감과 운동의 방향성이 눈에 띄지 않는다. 동남아의 민중운동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느낌마저 든다. →국내 정책결정 과정에서 바뀌어야 할 점은. -앞서 말한 대로 너무 단기적으로 보고 있다. 당면과제만 바라본다. 장기적 마스터플랜 없이 단기적 처방만 찾으면 답이 안 나온다. →역사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나. -그렇다. 역사의 사이클은 단기, 중기, 장기적으로 몇 가지 추이를 보인다. 공교롭게도 요즘은 그런 복잡한 사이클이 모두 겹치는 중대한 변화의 시기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19세기 후반은 물론 16세기도 동아시아 역사에 큰 전환기였다. 전자가 100~150년 주기라면 후자는 500~600년 주기이다. 이 생명주기 곡선이 요즘 모두 쇠퇴기에 놓였다. 단적 사례로 동아시아 친족제도를 들 수 있다. 500여년 전 주자학적 통치구조와 함께 형성된 친족제는 사회·문화적 요인과 함께 인구감소로 사라지고 있다. 인구 재생산이 불가능한 탓이다. 전쟁이나 재해를 포함해도 역사상 이처럼 장기적으로 인구가 감소하기는 처음이다. 사회구조 자체가 변화하고 외부에서 노동력과 인구를 충원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미야지마 교수는 일본 교토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했다. 한국사와 동아시아비교사로 교토대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카이(東海)대, 도쿄도립대 교수를 거쳐 1983년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로 발탁됐다. 동양문화연구소 최초의 비도쿄대 출신 교수다. 연구소장으로 재직하다 2002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치와 된장국을 좋아하는 지한파로, 부인도 한국인이다. 저서로 ‘양반’, ‘조선과 중국:근세 오백년을 가다’, ‘동아시아 근대 이행의 세 갈래’ 등이 있다.
  • [서울광장] 실패한 역사에서 길을 찾는다/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실패한 역사에서 길을 찾는다/오일만 논설위원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늘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국가정책의 집행에서도 정책의 취지와 현실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정책에 내재된 현실적 이해 관계가 얽혀 있어 상황은 복잡해진다. 이념적 색채까지 보태지면 정책의 본질과 국익보다는 당파 이기주의가 부각된다. 역사를 돌아 보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를 어렵게 하는 정책이 적지 않았다. 비정규직 파동을 지켜 보면서 떠오른 것이 11세기 후반 북송조(北宋朝)의 신법·구법 논쟁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논쟁 가운데 하나다. 고갈된 재정난 타개를 위해 농민과 소상인들을 보호하고 육성하려던 왕안석(王安石·1021∼1086)의 신법은 지주·관료·종친 등 구법파들의 이익과 정면 충돌한다. 피비린내 나는 신·구파의 권력투쟁으로 이어지면서 1127년 북송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 후세 역사가들은 “신법의 이상은 높으나 현실의 벽을 넘기가 어려웠다.”고 평했다. 신·구법 싸움에서 간과할수 없는 교훈은 정책집행의 일관성 문제다. 조선조의 사색 당파처럼 재상(국무총리격)이 속한 정파에 따라 신법이 폐기됐다 부활하는 일이 반복됐다. 정책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다음 정권의 향배를 살피면서 적당히 처신하는 풍토가 만연했다. 법 집행에 활기가 떨어졌고 신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우리의 노동정책도 이런 전철을 밟고 있지나 않은지 우려된다. 노동부는 참여정부가 제정한 비정규직 법안 시행과 후속 조치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노동시장 유연성을 강조해 왔다. 이 장관의 이런 철학이 노동부의 소극대응으로 이어지고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정치 문화를 고려할 때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정책이 오락가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반면 성공한 정책은 분명 이유가 있다.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민심의 지지와 실천 가능한 현실성, 그리고 효율적인 정책집행이 삼위일체가 돼야 한다.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보자. 극좌 노선인 문화 대혁명의 광기가 휩쓴 직후라 실용노선에 대한 인민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지도자의 전략·전술도 탁월했다. 무엇보다 일관성있게 정책을 집행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반면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 운동은 철저한 실패작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조급증이 문제였다. 15년 안에 영국의 강철 생산량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현실성이 결여됐고 의욕이 앞섰다. 2004년 3월에 제정된 ‘성매매 방지법’ 역시 이상이 현실을 앞지른 사례가 될 것이다. 성 충동이 인간의 본능인 이상 매매춘을 법으로 근절하기는 어렵다. 시행 5년을 맞아 성매매 시장은 더욱 음습해졌고 사회적 비용은 폭증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금주법 역시 종교적 이상을 법률로 강제했지만 ‘알코올의 욕구’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비정규직 문제 역시 이상과 현실의 해법이 혼재됐고 한국적 모순과 갈등이 얽히고 설킨 사안이다. 여당은 당장의 해고사태 방지와 노동시장 유연성이라는 현실에 초점을 맞췄고 야당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근원적 해법을 중시하고 있다. 비정규직법이 당파적 이익이 아닌 성공한 정책이 되기 위해선 여야 모두 역사가 남긴 실패의 교훈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어린이 책꽂이]

    ●몽당분교 올림픽(김형진 글, 책먹는아이 펴냄) 몽당분교의 운동회는 ‘올림픽’이라고 비웃음을 산다. 탈북 아동 만덕이, 필리핀에서 온 호세피노, 한국·태국 혼혈아 솜차이,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나이지리아 부모를 가진 영애 등 6개국 7명의 어린이가 전교생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을 꼬집는 한편 아이들에게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지혜를 주는 책. 3~4학년용. 9500원. ●포그마운드(수잔 셰이드 글·존 불러, 주니어랜덤 펴냄) 한때 지구를 호령했던 인간들이 불모의 황폐한 땅을 남겨 놓은 채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라진 인류를 찾아나선 줄다람쥐 셀로니어스의 탐험을 통해 들려주는 환경오염과 파괴의 이야기. 만화와 소설을 번갈아 배치한 재미있는 구성이 아이들의 구미를 당길 만하다. 세 권짜리 시리즈. 초등 고학년 이상. 각 9500원. ●Why? 한국사(이근 글·극동만화연구소 그림, 예림당 펴냄) 초·중·고등 교과서에서 뽑은 역사 지식을 만화로 쉽게 풀었다. 구석기시대부터 조선 멸망까지를 5권에 담았다. 흥미진진한 모험담으로 꾸며 자연스럽게 역사에 빠져들게 한다. 알짜배기 정보를 담은 팁박스를 삽입, 만화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부모들의 마음도 살 듯. 곧 나올 6권부터는 경제, 의학 등 주제별로 역사의 범위를 넓힌다. 각 1만원. ●나의 형, 빈센트(이세 히데코 글·그림, 고향옥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와 나눈 애틋한 형제애는 유명하다. 테오의 시선에서 새롭게 풀어낸 고흐의 이야기. 유년시절의 기억, 가족애, 화가로서의 고민과 열정이 담겨 있다. 20년 가까이 고흐의 발자취를 밟아온 작가답게 고흐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인상적이다. 1만 1000원. ●표해록(방현희 글·김태헌 그림, 알마 펴냄) 조선 선비 최부의 중국 견문록을 현대의 언어로 새롭게 다듬은 책. 아버지상을 당해 제주에서 고향 나주로 가던 중 비바람을 만나 일행 42명과 함께 14일간이나 표류한 끝에 남중국에 상륙한 뒤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여섯 달의 여정을 담고 있다. 중국을 바라본 열린 시선, 중국 관리 앞에서 당당했던 그의 기개가 많은 가르침을 준다. 초등 고학년 이상. 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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