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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달의 문화인물/홍대용선생/조선후기 실학자·과학사상가

    ◎세미나·유품전 등 행사 다양 문화체육부는 4월의 문화인물로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과학사상가인 홍대용선생을 선정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한다. 홍대용선생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아 서양의 과학기술을 연구하며 지구의 자전설과 우주의 무한함을 주장하였으며 과거제 폐지,농민의 최저생활보장 등 혁신적인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각자이다. 홍선생의 자는 덕보,호는 홍지·담헌,본관은 남양이다. 홍선생은 1731년 3월1일(음) 충남 천안군 수신면 장신리에서 태어나 당대 대학자인 김원행문하에서 사사하며 천문학·수학·역산학·음악·병법 등 당시에는 소홀히 여겼던 실질적인 학문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당시의 모순된 사회를 바로 잡겠다는 개혁사상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문체부는 과학의 달인 4월을 「홍대용의 달」로 정해 홍대용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한편 그의 실학사상과 과학정신을 재조명,범국민적인 과학정신 고양의 계기로 삼기 위해 과학기술처와 공동으로 한국과학기술재단,한국문화예술진흥원 등 관련단체와 함께 기념학술세미나,유품전시회,과학문화기행 등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 도읍 공주서 부여로(백제를 다시본다:1)

    ◎부여 금동용봉향로가 말하는 사비시대/풍요로운 곡창서 「사비문화」 무르익다 백제는 곧잘 잃어버린 왕국으로 간주되어왔다.그 까닭은 정사성격의 사료부족과 또 승자에 의한 문화유산파괴에서도 찾아진다.이러한 상황속에서 지난 연말 발굴된 부여 능산리 출토유물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사 연구의 한줄기 빛으로 떠올랐다.서울신문은 이를 계기로 전문학자들이 백제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장기기획물 「백제를 다시본다」를 주1회씩 연재키로 했다.금동향로가 제시하는 자료를 근거로 백제사 복원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 시리즈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넓은평야 끼고 있어 “3국중 가장 자족”/도성체제 완벽… 5부 구획에 2중 방어/국방 한창 뻗어나갈때 나·당 연합군 침공으로 비명에 저버려 일찍이 조선후기의 대실학자인 정채산은 국가의 운명이 수도의 입지조건에 의해서 크게 좌우된다고 보았다.그런만큼 반드시 요충지대를 점거하여 위압의 형세를 이루어야만 일단 위기가 닥치더라도 능히 이를 극복하여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의하면 백제의 첫 도읍지이던 오늘날의 서울은 문자 그대로 김성탕지와 같은 곳이라서 건국이래 4백93년간이나 국세를 유지했으나,한번 웅진(공주)으로 옮겼다가 다시 사비(부여)로 옮긴 뒤에는 1백85년만에 망했다고 한다.사비시대는 웅진시대 63년을 제외하면 겨우 1백22년에 지나지 않는다. ○각부는 또 5권으로 큰 들녘의 한복판에 위치한 사비도성은 확실히 한성(서울)과 같은 천연적인 요새는 아니다.그렇다고 백제의 지배층이 도성의 방어체제를 게을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지난 십수년간 백제문화권개발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된 결과 우리들은 사비시대의 도성계획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사비도성은 기본적으로 부소산성을 배후에 두고 외곽의 요해지에 부분적으로 나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이중으로 견고하게 다졌다. 그런 다음 왕궁은 부소산성밖 남쪽에 세웠다.이는 웅진시대 왕궁이 공산성 내의 광장에 구축된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옛 문헌에 의하면 사비도성의 시가지는 크게 5부로 구획되고 또한 각부는 5권으로 나누어지는등 실로정연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한다.한마디로 사비도성은 백제의 역사에서 볼 때 가장 잘 디자인된 수도였다.한국고대의 도성제 발달사상 거의 완성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공주에서 서남쪽으로 30㎞쯤 떨어진 부여로 천도한 것은 일세의 영주인 성왕 16년(서기538년)봄의 일이었다.실로 국가재흥을 목적으로 한 웅대한 경륜에서 나온 결단이었다.백제는 이보다 앞서 서기 475년 서울로부터 공주로 천도했는데,이는 고구려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는 등 급박한 국가위기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그러나 부여천도는 이와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공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는 유리한 점이 있으나 그자체는 고립된 곳이고 수도가 들어시기에는 너무나 협소했다.이 야영도시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수도를 건설하는 것이 공주시대 역대 군주들의 꿈이었다.마치 고구려가 압록강가의 산악지대인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천도하려 한 것과 같은 취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동성왕때부터 부여의 중요성에 주목한 백제의 최고지배층은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요량으로 사냥을 겸하여 자주 이곳에 들러 지세를 살피는등 전반적인 입지조건을 예의검토해왔다.금강가에 위치하면서 산으로 둘러싸인 부여지방은 방어에도 적합했을 뿐 아니라 더욱이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곳으로 비쳤다. 그리고 지리상 호남평야의 경영이나 가야지방으로의 진출에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백제조정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이 기름진 곡창지대를 적극개발함으로써 보상하려고 했다.요컨대 부여천도는 장기간에 걸친 준비작업 끝에 마침내 단행된 것이었다. ○결실못본 화평세계 이처럼 사비시대는 개막되었다.당시는 삼국간의 항쟁이 극심한 전란기였다.영토확장을 목표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삼국간의 국경선은 수시로 뒤바뀌었다.이같은 살벌한 시대풍조 속에서도 백제는 삼국중 가장 자족함을 알며 인을 실현코자 노력했다.한성시대인 근소고왕때 장군 막고해가 승승장구 고구려군대를 추격하던중 수곡성(황해도 신천)북쪽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회군을 결행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사비시대 법왕은 서기 599년 즉위하자마자 살생을 금하는 칙령을 내린다.이에따라 민가에서 기르던 매를 놓아주도록 했으며 사냥도구와 그물마저 태워버리게 했다.이는 같은 시대 신라와는 크게 대조되는 현상이다.즉 신라왕의 최고고문이었던 원광법사는 바로 이때 「살생유택」의 덕목이 들어 있는 세속5계를 제정하여 비록 조건을 달았지만 살생을 인정했던 것이다. 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궁극적인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같은 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어쨌든 백제의 지배층이 국가의 위기상황 아래서도 인을 구현하려는 열의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사비시대 화평의 세계를 실현하려던 백제인의 웅지는 끝내 결실을 하지 못했다.무왕의 야심에 찬 팽창정책과 그 아들 의자왕의 거듭된 실정은 신라를 자극했다.그래서 신라로하여금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아예 지도상에서 말살하려는 비밀외교에 열중하게 만들었다.신라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당과의 군사동맹이 체결되었고 양국 연합군은사전계획에 따라 서기 660년 전격적으로 백제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마침내 사비도성은 함락되고 백제는 그 찬란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수도의 지세를 중요시하는 정다산은 백제의 멸망원인이 사비도성의 집중성 결여에 있는 것인 양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그 방위체제는 결코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우아·격조 높은 문화 한 시대의 문화는 정치를 비추는 거울이다.흔히 이야기되고 있듯이 사비시대야말로 백제문화가 그 절정에 도달한 황금기였다.얼마전에 별세한 삼불 김원용선생은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미술은 민족이나 국가가 무기력해질 때 생기는 퇴폐나 타락의 양식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소멸되어버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백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사비시대의 백제문화 역시 쇠퇴·타락의 징후는커녕 완숙의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고 있다.결국 백제는 쇠퇴기에 접어든 끝에 멸망된 것이 아니라 한창 국력이 뻗어나갈 즈음 칼에 등을 찔려 비명에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일제가 이른바 부여신궁을 지을 목적으로 거두어들인 석재더미 속에서 백제말기 대좌평이었던 사택지적의 당탑 건립기념비석이 일부 파괴된 채로 발견된 일이 있다. 이로써 사비시대 백제문화의 우아하고도 격조높은 기품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백제말기 정치사를 해명하는 데 유력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 지난해 연말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 근처의 한 건물지에서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었다.여기서 나온 금동제 향로를 비롯한 사비시대 후기의 유물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완숙기에 접어든 백제문물의 찬란함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또 덧붙여 말하거니와 신비스러운 빛깔로 떠오른 새로운 문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를 대하면서 백제를 뒤돌아보고 재음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비시대의 문화상/출토유물 통해 「선진문화」 확인/능산리·궁남지유적발굴로 실체 드러나 사비시대 백제(AD538∼660년)의 문화상은 고분과 절터·성곽유적 등에서 출토된 매장문화재를 통해 드러난다.신라와의 각축에서 패망의 길을 걸은 백제는 외형의 문화유산을 철저히 파괴당했기 때문에 땅속에 묻힌 유물만이 겨우 백제의 잔영을 남기는 비운의 역사를 겪었다. 이 시대의 백제고분은 충남 부여군전역에 분포되어 있다.마지막 도읍지 부여를 중심으로 능산리등 13개 고분군이 대표유적으로 꼽힌다.거의가 돌방무덤(석실분)인 고분유적은 껴묻거리(부장품)라는 유물이 많이 매장되었다는 점에서 고고학이나 역사연구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사비시대 고분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처음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15년 능산리 고분군 발굴이후부터다.1917년까지 모두 6기가 발굴되었다. 능산리 고분에서 사신도벽화가 있는 1호분이 특히 유명하다.널길(선도)이 달린 굴식돌널무덤(횡혈식석실분)이 주류를 이루는 능산리 고분군에서는 금동투조식금구 등이 발굴되었다.그리고 일찍부터 왕릉으로 전해왔다.이번에 햇빛을 본 금동용봉봉래산향로도 바로 능산리 고분군 이웃에서 출토되었고,마주보고 있는 나성의 일부도 발굴되어 사비도성 방어요새가 밝혀진바 있다. 최근에는 금동향로가 출토된 능산리지역 말고도 궁남지유적 3차발굴사업이 진행되어 벼농사유적인 논유구와 함께 목각의 새와 수레바퀴 등을 출토하는 수확을 거두었다.이밖에 정림사터를 비롯,부소산성 도성내의 도시계획 유구 등이 발굴되어 사비시대 백제의 선진문화상을 속속 보여주었다.특히 사비시대 백제문화권을 전북 익산지역으로까지 확대,백제 최대의 가람 미륵사터를 발굴함으로써 불교문화의 실상을 가늠하게 되었다. 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 유적으로는 세기적 발굴이라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을 비롯,공산성과 임류각 발굴도 고고학 성과로 치부된다.이와 더불어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발굴된 한성시대(AD18∼475년)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서울 몽촌토성과 백제 초기의 건국집단의 무덤으로 보이는 서울 석촌동 돌무지무덤(적석총)도 백제연구 고고학자료가 되고 있다.
  • 「박문수 영정」 보물 지정/문체부/「묘법연화경」 등 7건도

    문화체육부는 최근 조선 영조시대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1691∼1756년)의 영정등 8건을 보물 1189∼1196호로 지정했다. 지정된 보물은 △박문수 영정 1189호△전 오자치 영정 1190호△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제30 1191호△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 제38 1192호△상교정본자비도장참법 권 제1­51193호△묘법련화경 권 제2 1194호△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 권 제9­10 1195호△묘법련화경 권 제1­7 1196호등 8건이다. 「박문수 영정」은 분무공신상으로 38세때의 모습등 2폭으로 조선후기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제30」은 고려시대 불교문화사및 인쇄술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 제38」은 동진의 불화발타라가 한역한 60권본 화엄경가운데 제38권으로 고려말의 중요한 서지학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 「묘법련화경 권 제2」는 조선시대 가장 널리 알려진 불경으로 조선초기 불서판본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묘법련화경 권 제1­7」은 조선 세조1년(1456년)에 찍어낸 것으로 초간본은 아니나 판본의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완질본이어서 서지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 사찰/해방이후 80% 파괴… 61곳 남아(오늘의 북한)

    ◎사찰문화연 밝혀/종교보다 문화재 보호차원서 보존/평양 광법사­정릉사포함 25개 고려 이전 창건/봉산 성불사등에 국보­보물급­사적 58점 보유 현존하는 북한의 사찰은 모두 61개로 해방직전 3백60여개에 비해 50년 가까운 공산통치하에서 상당수의 사찰이 파괴된 것으로 밝혀졌다.그나마 현존하는 사찰들도 종교적 측면은 배제되고 단순한 문화재보호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보존돼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들 사찰내에는 현재 북한의 국보급 유물중 38%,보물급 유물중에는 66%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사찰이 신앙의 대상이나 기도처로서의 역할보다는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회장 서의현) 부설 사찰문화연구원이 펴낸 자료집 「북한사찰연구」에서 밝혀졌다. 남북분단 50년만에 북한 사찰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로는 최초로 발간된 이 책은 북한의 현존사찰에 대한 개황을 사진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현존하지는 않지만 과거의 유명한 사찰들에 대한 소개,그리고 북한의 불교문화재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특히 북한의 사찰재산을 별도의 장으로 분류,사찰보유 토지·임야등 재산을 일제때 조사자료를 토대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현재 북한에 있는 사찰은 평안도가 26개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황해도 12개,함경도 10개,강원도 9개,경기도 3개,양강도 1개등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들 사찰중 가장 오래된 것은 고구려시대 창건으로 추정되는 평양의 광법사(AD3세기경)와 장수왕 15년(427년)에 창건된 정릉사.이들을 포함,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된 사찰은 25개.특히 이 가운데 함경북도 명천군 칠보산 개심사는 826년 설립된 발해의 사찰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은 태조 왕건이 세운 개성 안화사등 13개가 있다.이들은 영변의 서운사와 고성의 석왕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종8년(10 42년)이전,즉 고려초기에 창건됐다. 조선시대에 창건된 사찰은 영변 천주사등 11개.태조4년(13 95년)에 세운 함북 영안의 쌍계사와 세종조에 세운 북청의 광제사와 나진의 청계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후기 숙종 이후에 창건됐다.그밖에 근대 들어서 건립된 사찰은 19 20년 평양의 용화사 하나 뿐이며 나머지 사찰들은 창건 연대가 불분명한 것으로 돼있다. 한편 이들 사찰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는 국보급이 신라 효공왕2년(898년)에 창건된 봉산의 성불사등 19점,보물급 문화재는 평양의 부벽루등 35점,사적 4점등으로 모두 58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북한에서는 분단 직후인 19 45년 12월 북조선민주주의통일전선산하에 북조선불교도총연맹을 설립,본격적인 불교탄압을 시작했다.이듬해인 46년 3월부터는 토지개혁을 실시,종교단체가 소유한 토지 1만5천1백95정보(1정보 약3천평)를 무상으로 몰수했다.특히 사찰재산의 경우 5정보이상은 모두 몰수,농민에게 분배했다.더욱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여 승려를 노동현장에 부역시켰고 탁발을 금지시키는 등 북한불교를 폐허화시켰다. 북한에서 종교인은 반혁명계층으로 분류되어 특별감시의 대상이 됨에 따라 철저히 탄압을 받아왔으나 70년대 들어 김일성 주체사상에 종교사상까지 흡수,선전하면서 80년대 들어서는일부 사찰을 복원하고 고려대장경을 번역했으며 또 89년에는 김일성대학에 종교학과를 개설하고 92년 신헌법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 외형상의 변화를 보여왔다.그러나 북한당국의 종교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불교전문가들의 견해다.
  • 명분을 최고의 가치로(한국정신의 원류를 찾는다:9)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캠페인/원한국인의 실천덕목 선비정신/실생활에서는 검약·절제·청렴을 미덕으로/역사의식에서는 춘추철학과 지조를 신봉 지난 대선은 여러모로 한국현대사의 이정표를 제시하였다.우선 「신한국인」이라는 용어를 탄생시켰고 우리사회가 아무리 자본주의화했다지만 돈만으로는 안되는 심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신한국인」이라는 구호는 우리 모두 구태의연한 남루를 벗어 던지고 새롭게 태어나야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우리가 한국인으로서 살아온 지난 세월이 결코 자랑스럽지도 떳떳하지도 못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돈아닌 가치관 보여줘 과연 우리민족이 살아온 지난 세월의 자취가 그렇게 초라하고 부끄러워 타기해버려야만 하는 대상일까? 그렇다면 강대국사이에서 민족고유문화를 지키고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저력과 문화국가로서의 자부심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오히려 현재의 한국인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지나친 자기반성이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지 않을까 일말의 걱정이 앞서는 것은 노파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 역사상 미증유의 이민족 통치인 일제식민지시대에 잃어버린 민족적 자부심이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지난 몇년사이 매스컴을 통해서 전개된 한국인의 자기반성을 짚어 보는 여러 기획들이 일제치하에서 이광수가 부르짖은 민족개조론의 변형이 되지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에 「신한국인」논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대재벌의 총수가 막강한 재력과 조직력을 앞세우고 돌풍을 일으키는듯 하더니 막상 선거결과는 예상득표수에 훨씬 못 미치는 15%에 불과하였다.『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이외에 무슨 기준이 있느냐』는 말이 교수사회에까지 공공연하게 통하는 현 시점에서 돈으로 승부하려던 재벌총수의 참담한 패배는 현한국인에게 잠재해 있는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의 실마리를 확인하게 한다. 그러므로 신한국인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현한국인상의 객관적인 이해·분석이 필요하고 현한국인의 원형이라할 역사속의 원한국인상을 재조명할 필요가 제기된다.흔히 전통을 단절시켰다고 진단되는 일제시대 전시기,다시 말하면 조선후기의 인간형이야말로 원한국인이며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재조명하고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밝히는 노력이야말로 한국정신의 원류에 접근하는 첩경이라 생각된다. 조선후기사회는 유교사회였다.유교는 시대에 따라 발전·변화하였는데 송나라 때에 이르러 형이상학적 우주론인 이기론을 성립시켜 성이학의 문호를 개창하였다.조선시대는 바로 이 성리학을 국학으로 수용하고 그 이념을 시대정신화한 시대였다.성리학을 공부하여 체질화시킨 학자들이 선비(사)이며 선비의 복수개념이 사림이다.이들은 수기치인을 기본으로 하여 수기의 단계에서 치열한 학문연마와 인격을 닦고나서 남을 다스리는 치인의 단계로 가는 사대부의 삶을 사는 것이 정석이었다.전자가 사의 단계라면 후자는 대부의 단계이므로 학자관료들이니 조선시대는 바로 학자관료들이 지배층이 된 시대였다.그들이 추구한 정신이 선비정신이라면 그 사회는 그것을 실천하는 장이었다. 선비정신은 의리와 지조를 중요시하는 정신이다.어떻게 인간으로서의 떳떳한 도리인의리를 지키고 그 신념을 흔들림없이 지켜내는 광조를 일이관지하게 간직할 수 있느냐가 최대 관심사였다.인간이 짐승의 무절제한 욕망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위한 방법론으로서의 인성론을 발전시킨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조선전기의 인심도심설이나 후기의 인물성동이론은 인간학에 대한 이론적 심화과정이며 정신적 가치에 대한 인식체계였다. ○조선 지식인들의 상식 인간의 본능과 물질을 최고가치로 인정하는 현대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조선시대이다.제2차 세계대전후 전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체제와 소련을 주도국으로 하는 공산주의체제로 양분되었다고 하지만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물질·물적 기초를 우선가치로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유물주의의 공통점을 내포하고 있다.특히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그에 따른 경쟁을 부추김으로써 성장하여 왔던 것이다. 바로 이 물적 기초를 추구하고 그러한 체제의 유지논리인 공리주의나 실용주의에서 도출한 실리주의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삶의 기준이라면 조선후기사회는 명분을 최우 선으로 하는 명분주의 사회였다.어떤 일을 처리할 때 그것이 나나 내가족,내가 속해있는 집단이나 조직에 이득이 되느냐 해로우냐가 현대적 판단기준의 우선척도가 된 것이다.이러한 이해관계기준은 인간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메마른 인간관계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조선시대 사람들의 판단기준은 그 일이 명분에 맞느냐 안맞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그리고 명분을 얻느냐 잃느냐는 그 지식인의 사활이 달린 지식인사회의 상식이었다. ○실리사회 탁류 휩쓸려 그러나 현대적 실리주의 가치관은 조선시대의 가치덕목들을 하나같이 평가절하하였다.명분은 핑계로,의리는 깡패용어로,선비의 기개를 뜻하던 사기는 군대용어로 전락해 버렸다.소비가 미덕이 되고 청빈은 낡아빠진 구시대의 덕목으로 조소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동기나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결과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그 시대 지식인의 사명감과 책임의식으로 대변되는 선비정신은 실제생활에서 검약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고 청렴과청빈을 우선 가치로 삼았다.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겼고 역사의식에 있어서는 시시비비의 춘추정신을 신봉하였다.그들은 「청」자를 선호하여 청의,청백이,청요(현)직,청명등의 용어를 즐겨 썼다.이러한 가치관은 지식인사회에만 유효하였던 것이 아니고 사회저변에 확산되어 일반백성들도 「염치없는 놈」이란 말이 최악의 욕으로 인식하였고 예의와 염치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할 기본덕목이 되었던 것이다.또한 상부상조의 평화공존의 성리학적 이념은 개인생활이나 농촌공동체 뿐만 아니라 국가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러한 논리로 편제되어 있던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무력으로 흔들어 놓은 일본이나 여진족의 청을 「오랑캐」라 폄하하였던 것이다.또한 이미 망한 명나라가 임진왜란때 파병한 사실을 「재조지은」이라하여 국가간의 의리도 지켜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세계관이었다.그것은 문화가치,특히 유교적 문화질서인 중화문화질서를 지키려는 의지로 표현되었고 조선이 명을 계승하여 그 문화의 정수를 답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나타났다. ○국민적 자존심 찾을때 19세기 서세동점의 세계질서 재편과정에서 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를 인정하고 거기에 적극 편입하려는 개화운동이 서양제국주의와 그에 편승한 일본세력을 인정하여 결국 친일파의 양산으로 종결되었다면,중화문화 보존논리인 위정척사운동은 시대의 흐름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일관된 자긍성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조선이 미개하다는 암시를 깔고 있는 개화사상은 일제시대에 확고한 우위성을 확보하였고 광복후에는 서양에의 일방적 경도로 인한 근대화이론과 맞물려 대표적인 근대사상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제 세계가 제국주의적 힘의 논리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모색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시급한 일은 손상된 국민적 자존심을 회복하여 한국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토대로 민족문화를 선양하는 것이다. □약력 정옥자 서울대교수·국사학 ▲1942년 강원도 춘천출생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졸업 ▲동 대학원졸업(문학박사)▲현 서울대 교수 ▲저서 「조선후기문화운동사」 「조선후기문학사상사」 「조선후기지성사」 등 다수.
  • 근현대인물 재조명 된다/창비,현대인물연구시리즈 기획

    ◎1차 전봉준·김원봉연구 펴내/조봉암·홍명희·여운형도 계획 그동안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혹은 이데올로기적 편향 때문에 소홀히 다루어져온 한국 근현대사의 인물들에 관한 새로운 조명이 시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창작과 비평사가 새롭게 기획한 현대인물연구시리즈의 제1·2권으로 최근 발간한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우윤)과 「김원봉연구」(염인호)는 주로 문헌자료에 의존했던 기존의 평전들과는 달리 학문적으로 전공한 젊은 학자들이 직접 현지답사와 인터뷰등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인물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이와함께 진보당의 조봉암,일제시대 노동운동가 이재유,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끈 민족지도자 여운형등에 관한 연구서도 곧 선보일 예정이다.이 작업은 역사인물의 체계적 연구를 통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봉준의 연구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의 원인에 대해 단순히 삼정문란이나 지배층의착취,그리고 양반·토호들의 횡포에만 초점을 맞춘 종래의 시각에서 벗어나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이를 토대로한 사회변동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라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했다.특히 주도면밀하고 조직적인 운동전개로 근대 민중운동 역량의 일대폭발을 가져온 전봉준의 역할을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그의 인간적 면모도 부각시켰다. 민족주의자 약산 김원봉의 연구는 그의 고난에 찬 투쟁사와 사상을 하나의 일관된 틀로 체계화한 국내최초의 연구서이다.그는 남한에서는 19 48년 월북했다는 이유로,북한에서는 민족해방운동사의 정통성을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에만 한정시키는 또다른 이데올로기적 제약으로 남북한 양쪽에서 배척당해 역사의 뒤켠에 매몰된 인물이었다.이 책에서는 그가 이끈 의열단·민족혁명당·인민공화당등의 활동을 다각적으로 구명,그가 민족독립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민족주의자였으며 그러면서도 민중의 이익을 일관되게 추구한 진보주의자였음을 밝혀내고 있다.
  • 지식산업사 「한국문학통사」(책의 해/우리가 만든 책:2)

    ◎출판사 자천도서 시리즈/구석기∼근대문학 망라/2만질 팔려 「독자 학술서 외면」 징크스 깨 조동일교수(서울대)의 「한국문학통사」(82년 11월 초판발행)는 한국학및 한국주변학전문출판사로 권위있는 지식산업사(대표 김경희)가 자신있게 대표작으로 내세우는 노작이다. 이 책은 82년 초판 1권이 나온 이래 6년동안의 후속작업끝에 5권 분량으로 완간됐으며 이후 89년 1월 수정·증보된 제2판을 찍어 냈다.지금까지 2만질이 나가 학술서적은 잘팔리지 않는다는 출판계의 오랜 징크스를 깨뜨렸다.또 이 책이 일구어낸 한국학분야에서의 업적은 86년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88년 중앙학술대상수상으로 증명됐다. 초판이 나온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는 「한국문학통사」는 해방후 한국학연구의 최대성과로 손꼽힌다.패러다임이 독특하고 비단 문학만이 아니라 국사학,사상사,철학등 각 장르를 감싸 안고 있다.지난날의 문학은 곧 역사이고 사상이고 철학이기 일쑤이므로 사회적 성격과 문화적 의미까지 찾아 내면서 문학의 보편성을 특수성과함께 다루고자한 지은이의 의도가 함축됐다.이 저서를 통해 흐트러져 있던 우리 국문학사가 비로소 제모습을 갖췄으며 세계문학편제속에 한국문학을 자리매김하게 했다는 찬사를 받는 것도 이때문이다.이 방대한 연구작업을 통해 문학의 범위,갈래,시가의 형식과 율격,시대구분의 방법,시대구분의 실제,고대·중세·근대문학으로의 구분등 한국문학사이해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와 대상으로 볼때 제1권은 구석기서부터 고려전기까지 1천수백년을 대상으로 원시문학,고대문학,중세전기문학을 다루고 있다.제2권은 조선전기까지의 중세후기문학을 취급하고 있으며 제3권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문학중 조선후기를,제4권은 1860∼1918년까지의 문학사를 다뤘다.마지막 제5권은 1919년이후의 근대문학편으로 나눴다.지은이는 이같은 시대배분이 문학의 성장과 발전을 실상대로 나타내는데 적합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우리 문학사의 시대구분을 새롭게 하는 작업의 전모라고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30권에 달하는 국문학관련 저술를 낸바 있는저자는 1945년 해방이후 문학을 다룬 제6권의 발행을 계획하고 있으나 보아야 할 작품이 많고 문학사의 분단극복작업등 어려움 때문에 뒤로 미루고 있다고 밝힌다.저자는 그러나 「한국문학과 세계문학」「한국문학의 갈래이론」등을 통해 자신의 연구결과를 다양하게 제시한 바있다. 지식산업사 김경희사장(55)은 『이 책은 학술적인 업적이면서 일반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쓰고 풀어서 설명하는데 힘을 쏟은 작품』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 『또 번거러운 주를 달아 글의 흐름을 끊지 않고 있으며 참고논저및 보충설명도 본문과 별도로 실는등 독자를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밝혔다.
  • 문헌안의 거북선 사실입증 첫걸음

    ◎이순신장군의 「한산도대첩」 등 실증/거북선 실물 인양 가능성 크게 높여/「귀함 별황자총통」 인양의 의미 임진왜란 당시의 대포였던 별황자총통(총통)의 발견은 조선조 전사(전사)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특히 문헌상에만 기록돼 있어 실체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총통이 거북선의 주포였음이 확인됨에 따라 가까운 시일안에 거북선의 잔해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까지 갖게 하고 있다.황자총통발견의 의의와 사료로서의 가치·인양과정등을 알아본다. ▷전문가 평가◁ 이번에 발견된 별황자총통(별황자총통)에 대해 문화재 전문위원 조성도씨(해군사관학교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전사는 물론 조선후기의 무기발달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국보급으로 평가했다. 거북선에 장착됐던 것으로 보이는 이 총통의 현장실측평가작업에 참가했던 조씨는 『그동안 거북선에 관한 사료(사료)는 상당수 있으나 거북선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 총통의 가치를 설명했다. 그는또 『이 총통에 새겨진 제조연대와 발견장소가 임진왜란때의 거북선과 왜국 수군이 싸우던 격전지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제까지 남아있는 조선조의 보물급 대포 16종보다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제작시기만 보더라도 기존의 대포들과는 달리 이 총통은 당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해 제작연도를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다. 게다가 「거북선에 장착됐다」는 내용의 명문이 남아 있어 지금까지 문헌상으로만 보존돼오던 거북선의 실체를 입증해주고 있다. 총통이 발견된 해저지점에 대해 그는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 이순신장군이 한산대첩을 거둔 곳이며 이장군의 뒤를 이은 2대 수군통제사 원균이 일본군에 대패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 총통에 새겨진 귀함황자경적선 일사적선필수장이라는 내용의 칠언시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조선수군의 굴하지 않는 정신을 후세에 남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4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총통이 거의 원상태로 남아있는 것에 대해 『발견지점에는 모래 자갈층이 30㎝두께의 퇴적층을 이루고 있어 부식을 막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 바다는 조개·기타 유기물질에 의해 퇴적속도가 빨라 침몰된 거북선도 원래 모습을 그대로 지닌채 퇴적층속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인양경위◁ 고색이 창연한 황자총통에는 귀함이라는 총통의 소속함정과 만력 병신(만력 병신·1596)이라는 제조일시가 명기되어 있어 거북선의 주포임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확인됐다. 해군은 지난89년 노태우대통령의 지시로 그해 8월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을 해군사관학교에 창설,3년동안 심해잠수요원과 탐사정·소해정·시추장비등을 투입해 탐사작업을 벌인 결과 이번에 거북선과 관계되는 실증자료를 처음으로 발굴하게 됐다. 발굴단은 그동안 8차례에 걸친 정밀탐사를 통해 거북선이 매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1백87㎦의 해역중 30%인 54·5㎦를 탐사완료하고 앞으로는 한산도와 당포 근해를 집중 탐사할 계획이다. 발굴관계자들은 이번에 총통이 발견된 한산도해역은 임진왜란당시 대해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총통이외의 다른 유물들도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거북선은 모두 3척이며 임진왜란이 끝난뒤에도 10여척을 건조한 기록이 있어 당시 수군이 활동하던 남해와 서해에는 거북선이 분명히 매몰되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발굴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이미 4백년이 지났으며 침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도 없고 당시의 해안선도 항구의 축조와 매립 등으로 크게 바뀌어 바닷속의 거북선을 인양하기란 한강밑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일 만큼이나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탐사반원들은 총통발견을 계기로 거북선발굴작업이 크게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외국에서도 지난 60년대에 덴마크와 네덜란드에서 1천2백년전의 바이킹배 3척을 인양한바 있고 70년대에는 영국에서 6백년전의 목제군함을 원형그대로 인양한 적이 있다. ▷총통◁ 총통이란 고려시대와 이조시대때 왜구를 격퇴·섬멸하기 위해 무기로 사용했던 화전·화통·화포등의 화기를 총칭한다. 「공민왕5년(1356)에 총통을 사용해 전을 발사했다」는 고려사 병지의 기록으로보아 14세기 전반부터 이미 유통식 화기인 총통이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원나라에서 전래된 총통은 이조 세종때 서북변경 개척의 적극화로 각종 화기와 화약의 수요가 급증하게 됐고 이에대한 제조기술이 향상되면서 조선화포중에서 가장 큰 천자총통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화포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화포의 이름을 체계적으로 정리,조선 특유의 형식으로 규격화하는 일이 진행됐다. 총통의 구경에 따라 가장 큰것은 천자,그다음이 지자,현자,황자로 나누었다. 천자문의 맨처음 구인 천·지·현·황순서로 크기를 정한 것이다. 구경 15∼16㎝의 천자총통과 13∼14㎝인 지자총통은 현재 육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2∼13㎝인 현자총통은 해사박물관,구경 11∼12㎝의 황자총통은 현충사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발견된 황자총통에 「별」자가 있는 것은 총통의 위력을 강화한 「특」이라는 뜻이다. 황자총통의 사정거리는 약8백보(1천21m)이며 철환과 화살 또는 유황으로된 화염탄등을 실탄으로 사용할 수 있다.
  • 조선시대회화전/고서화감상전/고미술명품전 “풍성”

    ◎조선/정선·이등 등의 진품90점 공개/고서/퇴계·율곡서간문·민화등 다채/당대의 화풍·변천사 본격 조명기회 하한기 화랑가에 볼거리를 제공하는 수준높은 고미술명품전이 인사동의 두 화랑에서 마련된다. 대림화랑이 15∼25일에 펼치는 「조선시대회화전」과 학고재가 매년 여름에 꾸미는 특별기획 「고서화감상전」(23일∼8월31일)이 그것들로 고서화에 관한 한 오랜 경륜과 식견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진 두 화랑대표가 자신있게 내놓는 전시회다. 이들 전시회는 양도소득세법 시행을 앞두고 고미술품들이 개인 수장고에 묻혀 그 빛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처럼 마련된 명품전이어서 고미술애호가들의 갈증을 풀어줄 것같다. 대림화랑의 「조선시대회화전」은 화랑대표 임명석씨가 10년전부터 추진해 오다가 비로소 결실을 맺은 대규모 기획전이다. 조선시대 명서화가들의 미공개작품을 조선왕조 초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망라하는 것으로 90점이 공개된다. 이중 왕실출신의 화가 이징의 「수묵화조도」,은호 이함의 「쌍응도」,동국진경산수의 대가로 평가되는 정선의 「해주허정도」,조희용의 「백매도」,장승업의 「영모절지도」,김규진의 「장생오우도」등 대부분이 미공개 진품들이다. 미술사가 안휘준교수(서울대 고고미술사학)와 허영환교수(성신여대 동양미술사)의 고증을 거친 이 기획전은 당대의 화풍과 변천사를 학문적 토대위에서 본격적으로 조명하는 뜻깊은 자리이기도 하다. 대림화랑은 또 이 전시회와 함께 태조원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시대 화가들의 교유기,작품일지등을 다룬 70쪽분량의 연표와 전시작품의 해설과 원색도판을 실은 2백10쪽의 대형화집 2천부를 발간했다. 학고재의 고서화 감상전은 「여름미술관­품위있는 글씨,소담한 옛그림」이란 제목으로 마련되는데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특별히 겨냥해서 꾸며진다. 어른은 물론 학생들도 관심있게 고미술을 접하게 하자는 취지아래 학고재대표 우찬규씨는 교훈적인 글씨와 재미있는 내용의 민화들을 주로 장만했다. 출품작은 여섯부류로 구성되어 조선중기에서 구한말,근대에 이르는 화가들의 그림과 조선후기 서예인들의 서예작품과 조선시대 명현 대신 문인들의 간찰,조선후기의 민화,무낙관그림,청나라의 서화등이 망라된다. 1백36점의 출품작중에는 퇴계와 율곡의 서간문에서부터 김옥균 박영효등의 작품,근대6대가인 청전,의재등의 작품,중국화가 장대천등의 작품들이 고루 있다. 옛정취 물씬 풍기는 품위어린 글씨와 소담한 그림속에서 모처럼 무더위를 잊을 수 있는 귀중한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미·일·불등 돌며 고문서 찾기… 한국학 발전 이바지 이우성씨

    ◎“해외유출 고서적 수집­정리에 보람”/주로 임진왜란·구한말에 대량반출/국내선 찾아볼수없는 희귀본 수두룩/박제가 산문집등 27종32책 찾아 발간(저자와의 대화) 『우리 선조가 쓴 책들을 복사본으로나마 다시 들여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미국 관계자들이 쉽게 응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해외로 유출된 우리 고문서들을 다시 수집해 들여와 한국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해온 이우성씨(68·전성균관대 교수)가 최근 제5차분으로 3종5책을 출간했다.이로써 그의 호인 벽사(누벽외사)를 따 이름붙여진 「누벽외사해외수질본총서」(아세아문화사 펴냄)는 모두 27종32책으로 틀을 갖췄다. 『표면적으로는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으나 특히 일본의 경우는 한국에도 없는 것을 자기들만 갖겠다는 욕심이 있는 듯했습니다』 이씨가 영인본으로 펴낸 책들은 심의·윤현·홍한주·정원용·안석경 등 조선 초·중기의 이름있는 학자들의 문집도 있지만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많다.이번 5차분은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의 한 사람인 초정 박재가의 시문집 및 관계자료들을 묶은 「초정전서」와 조선 성종조의 문인학자인 사숙재 강희맹의 문집을 묶은 「사숙재집」,조선후기의 학자 좌소산 서유본의 시문집「좌소산인문집」 들이다. 이씨는 앞으로 남겨진 최대 과제로 세종때 70∼80권 분량으로 만들어진 「치평요람」의 재간행을 꼽았다.「치평요람」은 서울대 규장각에 30∼40권 분량이 남아있는데 일본 「동양문고」가 보관중인 50∼60권과 함께 보완하면 원래의 형태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치평요람」에는 세종 이전의 정치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을 망라하여 싣고 있는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없는 사실도 실려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책들이 해외로 많이 유출된 것은 임진왜란 시기와 구한말·일제초입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우리나라 특유의 호화로운 활자본들이 수없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요토미(풍신)로부터 도쿠가와(덕천)에게 인계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존경각·봉좌문고 등 일본 각처의 장서속에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전 활자본 하면 희귀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웬만큼 유서있는 장서라면 으레 그 활자본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씨는 『활자본으로서 뿐 아니라 그 책 자체가 국내에서 아주 없어져서 책이름조차 잊어버려진 것들이 일본에서는 지금 그대로 전해져 오는것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구한말·일제초의 대량 유출도 주목할 만하다.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왕조실록등을 공공연하게 반출했으며 외국학자들의 손으로 수집·구매해 가져간 책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그 이전 병인양요때에는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고문서를 약취해갔다. 『해방후 미국쪽으로 흘러 나간 책들도 적지 않은데 여기에는 학술적으로 중요한 각종 잡록·비사 및 수기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중 상당량이 미국 국회도서관·하버드대합불연경도서관·캘리포니아대극동도서관·콜롬비아대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친필로 된 수사본 그대로 유출되어 국내에서는 그 부본조차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 이씨는 30년동안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로 강의 및 연구를 계속하다 3년전 정년퇴임했다.이씨는 은퇴뒤에도 집근처인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에 「실시학사」를 차려 놓고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안병직·김진균·강만길교수 등과는 「다산연구회」를 결성,정약용의 「목민심서」 전7권(창작과비평사 펴냄)을 펴냈으며 30대의 대학원생 10여명과는 「다산경학세미나」를 주1회씩 열고 있다. 또 그는 지난 90년 한·중·일 3국의 학자들을 초청,「국제실학학술대회」를 여는데 앞장섰다.올 10월 제2차 대회가 중국 산동성 제남시 산동대에서 열린다. 이씨 개인적으로는 통일신라에서 개항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중세사를 집필할 계획을 갖고 있다.사회·경제사에 중점을 둘 것이지만 인간중심의 딱딱하지 않은 역사를 쓰겠다는 포부다.
  • 무크지 「사람과 과학」 창간/과기청년회,정보·분석기사등 게재

    한국과학기술청년회가 회지 성격의 부정기 간행물 「사람과 과학」창간호를 펴냈다. 한국과학기술청년회는 젊은 과학기술자들이 한국사회속에서 나름대로 올바른 과학기술운동을 하겠다며 지난 91년8월에 창립한 단체.회원들은 그동안 통신문제연구회 한글전산화연구회 과학기술정책소위등 4개소모임을 중심으로 월례발표회를 개최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 「사람과 과학」은 지난 1년간 회원들이 수행한 지적 작업의 결과이자 앞으로의 활동방향을 예고해주는 이정표로 보여진다. 「사람과 과학」은 「과학과 기술,과학기술자들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주제로 표방하고 있으며 이에따라 잡지내용도 대중에게 과학기술의 실체를 알기쉽게 설명하는 정보적 내용과 주요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분석적 내용등 크게 두가지로 구성됐다. 과학사산책 「근대산업의 발전에서 전자산업의 발달까지」,민족과학의 뿌리를 찾아서 「조선후기실학자들의 과학기술관」,세계의 과학 「북극상공 성층권오존의 감소」등은 비교적 쉽게 읽을수 있는,전자에 속한 내용들이라 할수 있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선정 과정과 그 문제점」「정부출연연구소의 기능재정립및 운영효율화방안에 대해」는 요즘 과학기술계 최대이슈를 나름대로 분석한것으로 젊은 과학기술자 일각의 이 문제에 대한 시각을 엿볼수있게 한다.필자들은 「제2이동통신사업자선정은 시스템의 국산화방향이 확정될때까지 연기돼야 한다」「정부출연연구소개편은 민간대기업의 기술집중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재고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이밖에 「한미과학기술협정을 바라보며」,「국제정세의 변화와 남북과학기술 교류협력 전망」「국제환경협약을 살펴본다」등 젊은 과학기술자들의 사회를 향한 관심을 읽을수있는 글들이 다수 실렸다.(도서출판 대동 펴냄,3천4백원)
  • 새봄 화랑가에 고미술향기 “가득”

    ◎학고재·덕원미술관,조선시대 서화·도자기명품전 기획/학고재/이징/「난죽병」등 미공개작 70점 전시/덕원/백자·분청 소개… 국보급도 선보여 평소 접하기 힘든 조선시대 서화,분청,백자등 명품들을 보여줄 대규모 기획전 2개가 새봄 인사동 화랑가에 마련돼 고미술품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오는 27일 개막되는 학고재의 「조선후기 그림과 글씨전」(3월7일까지)」그리고 3월23일부터 한달간 열릴 덕원미술관의 「조선시대명품전」이 화제의 전시회. 이 두 전시회는 학고재대표 우찬규씨나 덕원미술관 대표 이헌씨 모두 고미술계에서 그 안목을 인정받고 있는 화랑주들이란 점에서 볼 만한 전시회로 기대를 모은다.특히 대규모 미술관을 개간하면서 소장품의 일부를 선보이는 덕원미술관의 이씨는 민간인으로선 최고로 꼽히는 고미술품소장자 가운데 한 사람이어서 주변 수장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기도 하다. 학고재의 「조선후기의 그림과 글씨」전의 출품작 70여점은 모두 미공개작이며,국내 회화사 연구에 종요한 자료가 될 명품들이다. 17∼18세기 조선시대후반의 문인화와 서원화들이 망라되는 이 전시회를 위해 학고재의 우씨와 미술평론가 이태호(전남대)유홍준씨(영남대)가 1년여간 애장가들을 찾아 출품을 권유했으며 두 평론가가 전 작품에 대한 해설과 논문을 작성,원고지 6백장 분량의 1백70쪽짜리 도록을 발간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것들 모두 의미있는 수작이지만 그중 3점은 국보급의 문화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은 「명품중의 명품」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지금까지 기록으로만 알려져온 허주 이징(1581∼?)의 「난죽병」과 겸재 정선의 것으로 전해지는 「장주묘암도」,이주진의 초상화등이 그것.이 가운데 이징의 「난죽병」은 조선시대 「문헌상의 명화」로 꼽히는 걸작이며 「장주묘암도」는 영조의 어명으로 그린 명품이고,이주진의 초상화는 초상화왕국이라 불리우는 조선시대에서도 최고의 초상화작가로 인정되는 작가의 작품이어서 가치가 뛰어나다. 이밖에도 윤두서의 「석공도」,강세황의 「난초와 대나무」 김명국의 「도석인물화첩」등이 출품된다. 이 전시회는 최근 국내외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고미술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판매는 않고 보여주는 전시회로 그친다. 한편 인사동 네거리에 5층규모로(전시장 넓이 5백여평) 최근 문을 열어 화랑가의 새 명소로 부각되고 있는 덕원미술관이 마련되는 「조선시대명품전」에는 대표 이헌씨가 지난 30여년간 모아온 고미술품가운데 조선시대것만 골라 백자 73점,분청 38점,서화 47점을 내놓는다. 국보를 포함한 상당수의 지정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이씨는 조선시대 백자나 분청에 남다른 식견과 안목을 지니고 있는데,이번에 선보이는 것들은 그가 자랑하는 애장품들이다. 형태가 특이한 「청화백자산수문대수주」가 이번 출품작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으로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같은 형태의 백자보다도 5㎝ 정도가 높은 47㎝크기의 명작이다.또 물고기가 먹이를 물고 있는 독특한 문양의 분청 「청음각어문변호」 김홍도의 서화 「죽호도」등 웬만한 고미술전에서는 만날 수 없는 진기한 명품 1백50여점이 전시된다. 지난 19일부터 현대화중심의 개관기념전을 열고 있는 덕원미술관은 1층은 고미술품 상설전시장,2층은 현대미술 전문의 기획초대전시장,3∼5층은 대관 미술관으로 운영할 계획으로 있어 전시장 부족상태인 미술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조선실록」·「대장경」 한글완역은 괄목(북한 문화실상:4)

    ◎학술/쉽게풀어 대중화 치중… 전문성 결여/북방사 연구,한국사 공백부문 메워/「고조선」·「발해사」 연구는 독보적 업적 북한에서의 학술활동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적인 연구보다는 대중적인 정리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따라서 상당한 수준의 고전국역 성과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의 대중화 작업과 함께 구·신석기 청동기문화에서부터 조선후기 실학사상 연구에 이르기까지 집약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 물론 이와같은 연구경향에는 북한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히 내재돼 있지만 북한의 거의 독점적인 북방사연구는 한국사의 공백부분들을 채우고도 남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60년대이후부터 지난 90년까지 보고된 북한의 구석기관련 유적은 20여개소에 이르며 남한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고인류인골과 동물골들이 서북지방의 석회암지대에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어 한반도의 홍적세 고인류의 거주방식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때문에 북한의 고고학연구는 남한의 석기·토기연구와는 달리 고생물학적·고인류학적인 측면에 주력하고 있다. 북한의 신석기유물은 두만강연안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방과 대동강유역 압록강유역등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특히 두만강 연안의 유물은 신석기문화 편년의 기준이 될만큼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북한의 고조선연구 역시 북한학계의 독점적 업적에 속한다.리지린의「고조선연구」(64년),김용간 황기덕 공동명의로 발표된 「기원전 천년기 전반기의 고조선문화」(67년)등의 저서는 그 대표적인 작업이다.또한 중국과 북한에서 발굴된 토기·무덤·장식무늬등 고조선유물은 고조선영역과 고고학적 연대와의 연결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후한서」「삼국지」등을 근거로 부여의 건국시기와 영역을 밝힌 북한의 부여연구역시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고 있으며 고구려의 적석총과 적토석실분등 고분과 산성 사지의 독점적인 연구도 두드러진다. 정책적으로 주요연구의 하나로 정해져 일찍부터 진행돼온 발해사연구는 62년 발표된 박시형의 「발해사연구를 위하여」라는 논문을 출발점으로 한다.이논문은 발해사를 한국사안에 편입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논증을 시도한 최초의 논문이며 한말 계몽사가들이후 단절된 발해사연구전통을 다시 잇는 최초의 논문이라는 점에서 남북한을 통틀어 매우 의미가 큰 글로 꼽힌다.이렇게 출발한 북한의 발해사연구는 북한이 60년대초 중국에서 발굴한 자료를 기초로한 고고학적 연구결과인 주영헌의 「발해문화」(1971)로 완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의 조선사연구중 가장 괄목할만한 부분은 실학사상 연구인데 이는 실학사상을 우리나라의 유물론적 전통으로 받아들여 사회개혁의 이론적 기초로 삼았기 때문.최익한의「실학파와 정다산」(1955)을 비롯,김석형등의「다산 정약용탄생 2백주년기념논문집」(과학원 철학연구소 1952)등 연구저서가 풍부하다. 한편 북한의 고전국역 사업은 과학원고전연구실을 중심으로 지난50년대부터 진행돼 왔다.홍기문 류수 리용학 김상훈 리철화 김찬순 등의 학자들이 중심이 돼 이미 완역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팔만대장경 고가요집 고대전기설화집 한시선집 박지원·김시습의 작품선집등이 국역됐다. 「철저히 원문중심」원칙 아래 완역된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주없이 쉽게 풀어 썼으며 인명·지명·관명할 것없이 한문을 전혀 안쓴 명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역사의 대중화작업은 역사서술의 평이화와 한글화작업으로 뒷받침되고 있다.우리 학계에서 참고할 만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친 대중화와 한글전용 고집으로 역사적 용어의 의미가 상실된 경우도 많은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오늘의 혼돈상황 극복의 길/정옥자교수 인터뷰(서울신문 새해특집Ⅲ)

    ◎선비정신 되살려야 한다/옛날의 「철저성」과 「검약」 다시 배워야/아집보다 대의·미래지향의 통찰 필요/시속 영합않고 시비 분명히 가리는 자세 긴요 물질문명의 발달이 극도에 이르고 사람의 지혜가 하늘꼭대기를 향해 끝간데를 모르고 달려가고 있는 오늘날,전통사회의 덕목이었던 「선비정신」을 들먹인다는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지 않는 일로 보일 수도 있다. 아니 그보다도 더 나아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연 선비정신은 이미 오늘날에는 쓸모없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으며 이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일까. 이에 대해 뜻있는 많은 사람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뿐만아니라 오늘날 우리사회의 많은 문제,특히 지식인계층에 팽배해 있는 혼란·방황·무정견·몰가치 등 여러 현상을 극복하는 방도를 선비정신에서 찾아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정옥자교수(50·서울대 국사학과)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조선후기지성사」(일지사 간)란 저서를 펴내기도 했던 그는 가치판단과 윤리의식이 마비된 오늘날 우리 사회(특히 지식인 계층)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로지 선비정신의 회복밖에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를 만나 선비정신에 대해 들어본다. 『선비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오늘날 우리 지식인들의 실상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은데 저도 물론 그 속에 포함됩니다만 한마디로 실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썩은 냄새를 풍기는 이 시대에 지식인이라 해서 예외는 없다는 듯이 함께 부패하고 타락하는 군상들이야 이미 지식인이기를 포기했으니 언급할 가치조차 없겠지요. 그러나 그래도 일말의 기대와 관심을 모을만한 지식인들의 행태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니 바로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는 그러한 지식인의 예를 끝도 없이 나열한다. 지식전달자 이상의 역할은 아예 사양해버리고 단지 지식의 기능공으로 전락한 대학교수를 비롯해 이전투구의 정치상황속에서 스스로 도구화를 자처하는 지식인,비판의식조차 위험시하고 무사안일의 타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지식인,방향성을 상실한 채 현실도피의 무기력을 냉소로 위장하는 지식인 등…. ○지식인의 사명 상실 『오죽하면 이러다가는 지식인 전체가 이대로 안락사하는 것이 아니가 하는 위기의식까지 느끼겠습니까. 이들은 이미 이상과 도리를 펼쳐 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기본자세까지도 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개인과 가족,집단과 영역의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당장의 이득을 위해서는 신념도 수시로 변해버리니 국민에게 심한 상실감만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지식인의 보편적 양태가 양심과 진보를 표방하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예외없이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 또한 스스로의 이득이나 기득권확보를 위해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상황이 불리할 때는 눈 딱감고 모른체 하다가도 상황이 호전되는 기미만 보이면 누구보다 앞에 나서서 목청을 높이는 불철저성이나 시류에 편승해서 한몫 보려는 사이비성 등이 다 이에 속한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좌절감과 신념의 결핍,그로 인한 방황과 표류,그리고 도피와 단절 등이 저 자신을 포함한 이 시대 지식인들이 어쩔 수 없이 공통적으로 몸에 붙이고 다니는 병균과 같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행태들이 지식인의 본래 모습인가 하는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통사회 지주역할 이러한 회의 끝에 결국 그는 그 대안을 전통시대의 지식인­선비속에서 찾아냈다. 선비정신이 비록 단절되어 버린 과거의 가치관이었지만 그것을 현대적 입장에서 승화시켜 수용한다면 이 시대의 모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지식인 사회가 이렇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의 전통사회를 지탱시켜온 선비정신이 갑자기 단절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서릿발같은 기개와 대쪽같은 지조,그리고 청빈으로 대표되는 선비정신이 조금이라도 살아있었던들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월등히 깨끗하고 활기찬 사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선비정신이 단절된데는 세가지 원인이 있다고 분석한다. 첫째는 19세기 후반부터 밀어닥친 서양제국주의의 힘의 논리이며,둘째는 이를 토대로 한 일제의 식민사관,그리고 셋째는 망국으로 인한 주체의식의 상실과 자기비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정신문화는 서양의 실용주의에 의한 물질문명과는 그 기본성격이 달라 일괄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인데도 결과적으로 그 힘의 논리가 물리적 우세를 차지하게 되자 마침내 힘의 유무를 우선순위에 두게된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정신문화 역량을 일찍이 감지한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이를 깎아내리고자 힘의 논리만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해석했던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하루아침에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하자 극도의 좌절감과 자기비하에 빠져 모든 책임을 전통의 선비문화에 돌린 나머지 그 정신까지도 철저하게 평가절하했던 것이지요』 ○왕조 멸망으로 단절 결국 이렇게 하여 불과 1세기도 채 안되는 근대까지 우리사회의 버팀목이었던 선비정신은 여지없이 말살되고 오늘날에는 마치 아득한 옛날의 일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미국의 프런티어정신이나 일본의 사무라이정신이 오늘날까지 그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쉬어 그들을 지켜주고 그들의 힘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거기에 대응할 정신적 지주가 없음을 안타까워 한다. 그래서 더 늦기전에 우리도 우리의 선비정신을 오늘에 맞게 되살려 우리 스스로를 다잡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혼돈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옹골차고도 청렴한 선비정신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선비의 역할과 모습은 조금씩 달랐지만 「철저성」과 「검약」으로 대표되는 그 근본정신은 언제나 한결같았다고 말한다. 『서릿발같은 기개와 대쪽같은 지조는 바로 이 「철저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아갈 때와 물러갈 때를 분명히 알았고 결코 시류에 영합하거나 돈과 권력의 도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치가 도리를 벗어나든지 권력자가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리를박차고 나옵니다. 사필을 들었을 때는 선과 악을 직필함으로써 어떠한 권력의 부정과 불의도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검약은 청빈을 자랑으로 여기게 했고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부귀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지조를 지키게 하여 늘 확고한 비판정신을 가질 수 있게 했습니다』 ○보다높은 가치 추구 그리하여 선비정신은 각 시대마다에서 그 사회의 양심이요 지성이며 인격의 기준으로 인식되었고 심지어 생명의 원동력인 원기로까지 여겨졌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비정신은 지식인으로 하여금 현실적·감각적 욕구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하여 상승하기를 추구하는 가치의식을 갖게 해주며 그 신념을 실천하는데 꺾이지 않는 용기를 주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전통사회에서 선비정신이 빛을 발하면 사회 전체가 원기왕성해지고 반대로 선비정신이 퇴색하면 사회전체가 침체해지고 타락하는 현상을 보여왔습니다. 이 때문에 지식인들은 사회의 침체기에 이를 때마다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려고 노력했지요.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조선후기의 실학입니다』 그는 조선후기의 듯있는 지식인들이 침체된 지식인 사회를 실학으로 극복했듯이 오늘날 우리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를 바꿔놓기 위해서는 개혁의 의미로서의 또다른 실학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것을 바로 외래의 것이 아닌 우리 고유의 선비정신을 되살리는데서 찾자는 것이다. 『우리는 참 나쁜 버릇이 한가지 있습니다. 바로 모든 문제를 일본이나 서구 등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나은 외국의 경우에 비교해서 해결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저들과 우리는 문화적 배경이나 처해 있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른데도 저들의 경우와 맞으면 합리적인 것으로 보고 그렇지 않으면 애써 그들의 경우에 맞추어 억지로 합리화 시키려는 경항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문화적인 미신이라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합리주의는 그들의 실용주의에서 온 것이며 실용주의는 궁극적으로 물가가치기준에 다름 아니지요. 만약 이 방향으로만 치닫다 보면 결국 우리 사회는 정신이피폐해져 돌이킬 수 없는 윤리적·도덕적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 징후는 이미 우리 주위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늘 도리보다 실리가 앞서기 때문에 염치없는 일을 버젓이 해놓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우리의 것인 선비사상으로 자기혁신을 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뼈깎는 자기반성을 그는 선비정신의 발현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인들이 부단히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아집보다는 대의를 앞세우는 인격수양을 통해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선비정신을 되찾은 지식인 사회는 우선 대의를 앞세우기 때문에 눈앞의 작은 실리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개 되며 사소한 일로 서로 질시·반목하여 대세를 그르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는 불요불굴의 정신과 예리한 통찰력이 생겨 혼돈의 시대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국민적 화합과 협력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이득이 있고 없음보다 도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때문에 사회의 도덕성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며 사람들마다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함으로써 방황은 그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철저성 때문에 시시비비,즉 옳은 것은 어떤 경우라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언제라도 그르다고 함으로써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는 건전한 비판환경이 정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지만 지식인들의 각성여부에 따라 멀지않은 장래에 반드시 실현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 국사학자 김용덕씨

    원로국사학자인 김용덕 중앙대 명예교수(69)가 12일 상오 7시35분 서울 중앙대부속 필동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김씨는 개성 출생으로 경성대 사학과 졸업후 배재중교사 육사교관을 거쳐 62년부터 중앙대교수로 재직하며 「조선후기 사상사연구」「한국문화사신론」 등의 저술을 남겼다. 발인은 14일 상오 9시 서울 서초구 잠원동 11의 8 자택. 연락처 542­0064.
  • 한국어 능숙… 「열하일기」 읽는 지한파/주한 소영사처장 예레멘코

    ◎한반도문제 정통… 한ㆍ소관계 중요역할 기대 당초 예정일보다 5개월 늦게 지난 17일 서울에 지각 부임한 로엔그림 예피모비치 예레멘코 초대 주한소련영사처장은 35년동안의 외교관생활을 대부분 한반도 관계분야에서 근무해와 소련 외무부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지한파이자 한국통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60세인 예레멘코처장은 특히 지난 53년 모스크바대학 동양학부 조선어학과를 졸업한 후 잠시 중앙공산주의 청년동맹 조선어 통역원으로 근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55년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의 3등서기관으로 첫 외교관 임지 발령을 받을 때까지 3년동안 동양학연구소에서 조선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선생의 「열하일기」 연구에 몰두할 정도로 한국을 잘 알기 위해 꽤나 노력한 인물. 이같은 배경을 가진 까닭에 55년을 필두로 64년에서 67년까지,69년에서 71년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10여년간 평양에 근무하면서 깨우치기가 어렵다는 한국어의 구어체와 문어체를 거의 완벽하게 통달했다는 후문. 이는 그가 김포공항 기자회견에서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우리 외무부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물론 그가 사용하는 한국어는 전부 북한말씨로 여러 곳에서 표현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어 45년 넘게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남북간의 문화적 이질감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예레멘코처장은 평양대사관에서 3등서기관,2등서기관,1등서기관과 참사관으로 계속 승진했으며 외무부본부에 근무할 때도 조선과장,조선ㆍ몽고부부장,조선부부장,조선ㆍ한국부장 등을 두루 거쳤다. 그가 처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맡았던 조선ㆍ한국부장의 지위는 외무부과장과 부국장 사이의 직책으로 알려져 차관급인 공노명 주소영사처장의 격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렇더라도 한국문제에 정통하면서도 학구적인 그의 면모로 볼 때 그가 현직급이상의 상당한 역할을 할 것이란 게 외교소식통들의 대체적인 분석. 그는 또한 외교관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지난 60년 언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가 외교관으로서의 실무,즉 해외순환근무보다는 본부 근무를 통한 학문연구에 치중한 것으로 보이는 측면도 따지고 보면 이 때문이다. 비교적 마른 체격에 수더분한 인상을 갖고 있어서인지 시골 농부를 연상시키지만 한소수교및 경협문제등 양국간의 예민한 현안에 대해서는 노련한 직업외교관답게 「외교적 수사」로 문제의 핵심을 피해나가는 솜씨를 보였다. 그는 특히 모스크바 주재 우리 외교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마다 이들에게 각별한 신경을 써주는 자상한 일면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레멘코처장은 부인과의 사이에 출가한 무남독녀를 두고 있으며 근무가 끝난 뒤에는 외손주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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