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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심사정의 ‘절로도해’(한국인의 얼굴:113)

    ◎선승 달마 전설 그림으로 묘사/손가락으로 그린 도석인물화 조선시대 후기에 활약한 현재 심사정(1707∼1769)은 도석인물화를 많이 남긴 당대의 선비화가다.그를 가리켜 꽃과 풀벌레를 잘 그린 화가라고 말한 이도 있기는 하다.그보다 후대를 산 강세황의 평이 그러하고 보면,꽃 그림 화훼나 풀과 벌레 그림 초충을 꽤나 그렸던 모양이다.그러나 오늘날 전해오는 작품은 오히려 도서인물화의 비중이 더 크다. 그의 ‘절로도해’는 독특한 화풍의 도석인물화다.파도가 출렁대는 바다위에 두건을 쓴 사람이 떠있는 것을 묘사했다.그런데 바다에 뜬 사람은 갈대잎을 밟고 서있다.바로 중국 남북조때의 선승 모습이다.그것은 살아 생전의 달마가 아니다.그가 죽고나서 자신의 고향인 남인도땅 향지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갈대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는 전설을 담은 것이다. 이 그림에서 달마는 전시대의 화가들이 그린 달마상을 약간 비켜갔다.부리부리한 서역인 눈매에서 벗어났다.눈매에서 넘치는 기력을 찾아볼 수 없다.달마가 사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전설내용을그렸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절로도해’속의 달마는 추워 보인다.볼품없는 옷자락이 해풍에 흐느끼듯 더펄대서일까….맨살의 정강다리까지 드러나 더욱 을씨년스러운 달마가 되었다. 그래도 달마의 코는 크다.두건 아래 눈썹이 짙고 수염 역시 검게 자랐다.그러고 보면 달마가 서역인 티를 다 벗지는 못했다.이런 달마를 그린 화가는 심사정 말고 아무도 없다.몸골과 입성을 그린 솜씨는 전통 동양화기법이라기보다는 얼핏 양화의 느낌이 와닿는다.이를테면 먹물이 뭉친 듯 뭉툭한 오른쪽 눈썹과 눈,옷을 처리한 선묘는 전통화법의 그림과는 사뭇 달랐다. 그 이유를 알고보면 그림을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손가락으로 그린 지두기법을 쓴 탓일 것이다.연한 갈색을 칠한 얼굴에도 더러 색깔이 뭉쳤다.지두로 묘사한 풍랑이 높은데,바다 물빛은 엷은 청색이다.종이에 먼저 물을 바르고 먹물을 칠하는 선염기법으로 처리한 반투명한 옷자락 가장자리가 너불거린다.달마가 남인도 고향으로 가던 바닷길은 험란했던 모양이다.비록 손가락 그림이긴 하나 갈대가 어줍지않다. 중국 땅에서 죽은 달마가 다시 살아서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는 이야기는 전설에 나온다.송운이라는 사람이 인도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바다에서 사후의 달마를 보았다는 것이다.〈황규호 기자〉
  • 조선후기 조영우의 ‘노승헐각’(한국인의 얼굴:112)

    ◎지친 노승이 노송뿌리에 풀석/마른 얼굴·광대뼈 탁발승 묘사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관아재 조영우(1686∼1759)은 인물화를 잘 그리기로 정평이 나 있다.숙종과 영조때에 활약한 선비화가다.겸재 정선.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후기의 선비화가 삼재로 꼽혔다.그의 인물화 솜씨는 뛰어나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그리는 일에 추천될 정도였다고 한다.그 스스로도 “산수는 정선이 한수 위이나,인물은 내가 낫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린 인물화 가운데 ‘노승헐각’은 빼어난 작품이다.비단천에 먹물로 그린 이 그림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했다.늙은 스님이 땅위로 솟아 난 노송 뿌리에 털썩 주저앉았다.화제에는 아픈 다리를 쉰다는 뜻이 들어있다.노구를 이끌고 암자로 오르는 산길을 접어 들었던 스님은 마냥 지쳤다.동냥한 곡식이 서너줌 들었을지도 모를 걸망을 내동댕이 친 것을 보면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다.앉기는 했어도 숨이 하도 가빠 헐떡거리고 있다.얼굴은 아주 깡말랐다.그래서 광대뼈가 불쑥 튀어 나왔다.이빨도 다 빠져 입이 합죽한 노승은 그야말로 기진맥진한 표정이다.오죽 지쳤으면 동냥 걸망을 벗어 던졌을까.탁발승으로 살아온 온갖 풍상을 얼굴에 가득한 주름으로 새겼다.걸망 하나를 달랑 걸머메고 구름따라 바람따라 떠 돈 늙은 운수납자다.간밤을 잔 절을 나와 또 다른 암자를 찾아 다니기를 몇 수십년을 하는 사이 어느덧 늙어버린 것이다.노승은 앉고 나서도 몸을 온통 지팡이에 내맡겼다.그래서 굽은 등이 더 굽었는데,목에 걸어놓은 굵은 알 염주조차 무거워 보인다.고개를 들어 먼 허공을 바라보는 눈매에도 기운이 없다.그래도 눈꼬리가 처진 노승의 눈에는 무슨 생각이 분명히 어렸다.그것은 우주만물이 한 모양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제행무상의 마음일 것이다.큰 소나무 장송 앞에서 덧없이 흘러간 풍상의 세월을 곱씹고 있는 노승은 이제 초조할 것이 없다는 눈치다. 수염은 서너가닥,고행으로 살아온 노승의 삶 만큼이나 빈약했다.광대뼈에 가린 귀 역시 실하지 않다.대나무 살을 엮어서 만든 모자를 썼다.가진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회흑색 먹물옷과 염주,지팡이와 걸망이 있을 뿐이다.도를 닦는데 마음을 기울인 이판이란 말로 자신을 내세울만한 스님도 아니다.그렇다고 절의 살림을 맡았던 사판은 더욱 아니다.어디 한군데 집착하지도 않았거니와 무소유로 살아온 터라 지금 탈속의 경지에 들었다.〈황규호 기자〉
  •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강명관 지음(화제의 책)

    ◎조선후기 말단지배층의 갈등 고찰 조선후기의 새로운 문학담당층인 여항인의 역사적 성격과 그들의 문학을 고찰.여항인은 경제적·문화적 성장을 통해 조선후기에 뚜렷한 사회세력으로 대두한 서울의 중간계급을 일컫는 말.경아전과 기술직 중인이 주류를 이룬다.여항인은 도시의 중간계급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쵸닝(정인)이나 서구의 부르주아와 비견되기도 하지만 중세 양반사회에 대한 기생성을 완전히 청산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조선왕조 지배층의 말단을 차지한 여항인들은 승진 또한 엄격하게 제한돼 있어서 기껏해야 지방현감 자리까지밖에 오르지 못했다.때문에 그들은 늘 앙앙불락했으며 조선왕조에서도 감당하기가 어려워 교화하기 어려운 존재,곧 난화지물로 불렸다.여항문학은 이러한 여항인들의 불만의식과 갈등을 기조로 한다. 여항문학은 중세적 문학양식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그렇다고 중세문학의 보편화를 추구한 것도 아니다.지은이는 “여항문학은 양반 사대부들의 권력의 생산처인 지식과 문학의 독점을 해체하고 파괴했다.이것은 곧 중세의 해체이자 근대로의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창작과비평사 1만2천원.
  • 조선후기 윤덕희의 ‘하마선인도’(한국인의 얼굴:111)

    ◎선인과 두꺼비의 익살 그려/선 굵은 얼굴에 큰웃음 담아 도교와 불교를 도석이라고 한다.도교의 상징은 물론 신선이다.그러나 도석인물화라는 그림에서 불교의 상징은 부처가 아니다.나한이나 승려가 등장하는 것이다.그러니까 도석인물화는 도교의 신선과 불교의 나한을 묘사한 그림이다.도석인물화는 거의가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담아내어 흥미롭거니와 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의 하나가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낙서 윤덕희(1685∼1766)가 그린 ‘하마선인’이다.도교풍의 선인이 어깨에 올려놓은 두꺼비 말목을 슬쩍 거머쥐고 걷는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했다.신선은 마치 두꺼비와 말을 건네는 자태다.그리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맨발로 성큼성큼 걷고 있다.두꺼비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신선은 함빡 웃음을 지었다.두꺼비는 막상 말을 던져놓고 선인 표정을 살피는 눈치다. 이 그림의 주제는 옛날 이야기 고사에 두었다.10세기쯤 중국의 후량에 유해라는 선인이 세개의 발을 가진 두꺼비와 살았다.그가 바로 하마선인이다. 하마선인이 키운 두꺼비는 주인을 세상 어디라도 데려다줄수 있는 신통력을 지닌 영물이었다. 그런데 두꺼비는 가끔 우물속으로 달아나 버렸다.그럴 때마다 선인은 금돈이 달린 끈으로 두꺼비를 잡아 끌어냈다.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하마선인과 두꺼비가 나오는 그림을 행운의 상징으로 보고 귀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를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선인과 두꺼비의 만남은 대자연의 섭리요,자연에 순응하면서 생명체들이 어울려 사는 공존의 질서다.그리고 그림에 나타난 선인과 두꺼비의 삶에는 조화가 깃들였다.그림이 신비스러워 보이는 까닭도 비범하기 짝이 없는 두꺼비와 선인이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데 있을 것이다.참으로 기이한 그림이기는 하나 화폭에는 푸근한 정감이 어렸다. 선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다.선이 굵은 얼굴에 큰 웃음을 담았다.나이 탓도 있겠지만 얼굴 여기저기에 골 깊은 주름이 진 것은 소탈한 웃음 때문일 것이다.웃음이 너무 커서 다물지 못한 입속으로 이빨이 드러났다.그야말로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만면희색의 선인은 코주부 못지않은 코를 자랑했다.눈썹은 아직 검다.눈은 본래 컸을 법도 하나 웃음을 웃느라 좀 작아졌다.관자놀이 연저리에 좀 남은 머리칼이 아니었더라면,선과 석을 구분하지 못했을만큼 귀 역시 크다.오종종한데가 없이 기골이 장대한 선인이다.〈황규호 기자〉
  • 조선후기 이의현의 초상화(한국인의 얼굴:110)

    ◎얼굴뼈대 덮은 살갗을 중요시/검버섯 핀 노인얼굴 애써 표현 조선 후기의 초상화에는 얼굴 뼈대를 덮은 살갗을 중요하게 다룬 흔적이 보인다.이른바 육리문이라고 하는 살갗의 결을 살려 초상화를 그렸다.그리고 움푹 들어간 얼굴 뼈마디 부분의 살갗은 붓질을 거듭하여 어두운 느낌이 들도록 처리했다.그 반대로 도드라진 부분은 붓질을 덜하는 방법을 썼다.그런 화법의 살갗 표현은 물론 동양 전래의 골상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얼굴의 살갗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검버섯까지도 빼놓지 않고 그린 초상화가 있다.도곡 이의현(1669∼1745)의 초상화인데,얼굴은 온통 검버섯 투성이다.검버섯이 핀 노인 얼굴을 애써 표현한 초상이다.초상화의 주인공은 숙종과 영조 두 임금때의 문신.우리 관습적인 나이로 일흔일곱살에 세상을 떴다.초상화 오른쪽에는 그의 나이 일흔일곱살이 되던 해에 그렸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러니까 수를 다할 무렵의 노인 얼굴이다.저승꽃이라고도 말하는 검버섯이 얼굴에 가득한 이유를 알만하다.비록 검버섯이 피었을지라도,곱게늙은 노인얼굴에는 기품이 어렸다.노인이라서 눈꺼풀이 내려앉았다.그래도 곧은 성품이 아직도 눈매에 살아있다.용미형 눈썹이 점잖은데,그 언저리에서 시작한 용비형 코가 곧고 길게 내려왔다.꼭다문 입가로는 백수의 수염이 알맞게 자랐다. 옷은 관복을 차려입고 머리에는 사모를 썼다.의관을 제대로 갖춘 노인의 벼슬을 말하면 영의정을 지냈다.그러나 뒷날 경기도 양주에 머물면서 치사하여 모든 벼슬을 스스로 내놓았다.관직에서도 청론을 심으려 노력했던 탓에 사람의 신망을 크게 얻은 그는 유명한 청백리이기도 했다.이 초상화는 그런 이의현의 내면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초상화의 기본 요건의 하나는 주인공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얼굴에 담아내는 일이다.이를 전신이라고 한다.또 마음을 그린다는 뜻에서 사심이라는 말도 쓴다.우리나라에서 전신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오는 문헌은 조선초기의 ‘삼봉집’이다.그러나 이를 본격적인 이론으로 정립한 이는 조선 후기의 문신 김석주(1634∼1684년)다.사은사로 청에 다녀온 적도 있는 그는 ‘식암집’에서전신에 대한 해답을 확실히 던져주었다. 얼굴에 검버섯이 많은 이의현의 초상화는 가로 38㎝,세로 28㎝ 크기의 종이에 그렸다.최근 미국에서 수집해와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 대영박물 한국실 오늘 문열어

    ◎85평 규모… 신라금관 등 200여점 전시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영국 대영박물관에 한국 유물만을 독립적으로 전시하는 공간이 마련돼 10일(현지시간) 개관된다.개관식에는 영국 왕실의 글로체스터 공작을 비롯해 송태호 문화체육부장관,김정원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박물관 2층에 85평 규모로 마련된 임시 한국전시실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대여한 신라시대 금관 등 17점과 한빛문화재단 소장 범종 1점,대영박물관 소장 한국유물 200여점이 전시된다.대영박물관이 소장한 한국유물은 삼국시대 고분 발굴품과 고려청자 및 조선백자,회화,칠기,금속공예품,조선후기 민속품 등 3천200여점이 있는데 이가운데 한국실에 전시될 한국 유물은 삼국시대 토기와 신라금관,고려청자,이조백자,분청,병풍,고서적 및 지도,나전칠기 상자,고려범종,철제불상 등이 포함돼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삼성문화재단,한빛문화재단의 노력으로 성사된 이 한국실은 영구 한국실이 들어서기로 한 대영도서관의 이전계획에 따라 임시로 마련된 것.박물관 내에 있는 대영도서관이 오는 2000년 현재의 자리에서 이전하면 그안에 영구 한국실이 개설된다. 임시 한국실 개관과 관련한 부대행사가 11일부터 10월 12일까지 다양하게 열리는데 11일 사물놀이 공연에 이어 16,23,30일 전시실과 한국유물을 소개하는 강연회,10월 12일 황병기 교수의 한국음악 강연 및 공연,11월 2일∼12월 21일 일반인 대상의 강좌가 진행된다.
  • 조선후기∼현대 서예·화가 부채그림전/새달 11일까지 대림화랑

    ◎감홍도·이응로 작품 등 90여점 선보여 조선후기시대의 서화가부터 근·현대 유명 화가·서예가들의 빼어난 그림과 서예가 담겨있는 부채그림전인 선면전이 지난 29일부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대림화랑(733­3738)에서 열리고 있다.6월11일까지. 대림화랑이 그동안 수집해온 각종 부채를 비롯해 개인 소장품들이 다양하게 나와있는데 겸재 정선,단원 김홍도 등 18∼19세기 조선후기 화가를 비롯해 근·현대 한국 화단에서 굵직한 선을 남긴 유명 작가들의 작품 90여점이 선보이고 있다. 산수,화조,사군자 등이 주로 그려진 이들 부채중에는 윤두서 윤덕희 일가 3대 화가에서부터 이상범 변관식 김은호 허백련 박생광 이응로 등 근·현대 대표작가의 그림이 담겨있는 작품,그리고 김정희,조희룡,정병조,김돈희,민태호 등 조선말기와 근·현대 서예가들의 작품도 눈에 띈다.
  • 조선전기 그림속 당나귀탄 선비(한국인의 얼굴:102)

    ◎학창의에 치포관… 나들이길 여유로움 조선시대 전기의 화가 학포 이상좌(1465∼?)는 하마터면 막치의 그림을 그린 환장이로 일생을 살았을 인물이다.그림을 비록 잘 그렸다 할지라도 어느 선비의 사내종 노복이었으니까,애초에는 신분상승을 꿈조차 꾸지 못했다.그러나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이는 개인능력을 중시한 조선왕조의 합리주의적 통치이념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인물화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났다.아주 빠른 솜씨의 선묘로 인물의 특징을 그려냈다.그의 작품으로 보이는 「나한도첩(호암미술관 소장)」에서도 그의 인물화 솜씨가 잘 드러났다.1545년에는 임금 중종의 얼굴 어진까지 그렸다.그리고 이듬해 공신들 초상을 그려 원종공신 칭호를 받았다.그림을 가지고 벌떡 일어난 그는 자신의 입신출세 뿐 아니라 아들 둘과 손자 이정에게로 화업을 물려주었다. 이상좌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그림중에는 개인소장의 「기려도」가 있다.그림제목이 가르키는 대로 당나귀를 탄 인물을 그렸다.당나귀에 올라앉은 사람은 두루미 자태가 연상되는 두루마기 학창의를 입고,상투만을 가린 치포관을 쓴 선비다.나이가 들어보이는 선비의 인품은 한마디로 점잖다.수행하는 노자가 없고보면 선비는 단출한 나들이를 떠나는 모양이다. 선비네 집에서 기르는 삽살이가 주인 행차를 따라붙은 것일까.선비가 고개를 돌렸다.당나귀도 덩달아 머리를 슬쩍 돌려 흘끔 뒤를 쳐다보고 있다.그런데 선비는 워낙 점잖아서 경거망동한데가 없다.커다란 눈을 그저 물끄러미 내리깔았다.이마가 좀 튀어나와 됫박이마다.그 밑에 눈썹은 머리가 다 빠져 훤한 정수리께에 비하면 훨씬 짙었다.눈에 들어갈 빗물을 피할만한 눈썹이다. 머리칼은 치포관 사이로 몇가닥이 흘러 내려왔다.그 사이로 귀가 크게 드러났는데,반대쪽에서는 치포관의 끈이 바람에 나부꼈다.그러나 제법 자란 흰수염은 바람결을 피해 고개를 돌려서인지,잔잔하게 매달려 있다.『저 녀석이 어쩔려고 따라오나…』하는 눈치를 보이기는 했으나,쉬이 입을 열지는 않을 참이다.선비다운 풍모가 인물 여러군데에 그득그득 배어있다. 조선시대 산수인물화에는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당나귀가 곧잘 나온다.삼국시대의 역사이야기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당나귀는 행세깨나 하는 옛 사람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조선후기의 「경도잡지」는 「유생들은 나귀 타기를 좋아한다」고 적었다.말보다는 덜 빨라 별로 위험하지 않고 먹이기도 쉬워서 당나귀를 많이들 탔을 것이다. 이 그림은 인물은 물론이고,당나귀의 동작마저도 사실적으로 그렸다.그래서 이상좌의 그림은 12세기말∼13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의 중국 산수인물화의 대가 마원의 화풍을 닮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정약용의 「경세유표」 한글판 나와

    ◎이익성씨,당시 「개혁안」 3권으로 풀어 써 조선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대표적인 저서 「경세유표」(한길사 펴냄)가 모두 3권으로 발간됐다. 한학자 이익성씨(86년 작고)가 우리말로 옮긴 이 책은 다산이 당시의 국가체제 전반을 비판하면서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안을 제시한 일종의 국가학 이론서.이번에 선보인 「경세유표」는 한글세대를 위해 어려운 말들을 쉽게 풀어쓴 점이 돋보인다. 강진에 유배중이던 1817년(순조 17년)에 쓰기 시작해 이듬해에 마무리한 40권 16책에 이르는 이 방대한 저서에서 다산은 「주례」의 이념을 빌어 조선후기 고질화된 지배체제의 위기를 진단한다.다산은 특히 국가재정이 궁핍하게 된 근본원인인 토지제도의 문란과 농민층을 짓누르는 조세징수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이에 대한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밝힌다.그의 개혁안의 핵심골자는 ▲토지제도를 전담하는 국가기구로 경전사를 설치하고 ▲정확한 양전을 통해 토지대장에 빠진 토지와 묵힌 토지를 밝혀내 국유화하며 ▲사적인 토지소유를 국유화함으로써 정전제의이상을 실현하려는 것으로 요약된다. 다산의 개혁사상은 무엇보다 중세사회를 지탱하는 이념적 기반으로서의 주자학적인 경제관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 한국학 총서 「나랏말씀」 1차 7권 나와

    ◎솔출판사,삼국유사·다산문선·열하일기 등 6종류 실어 한국학 관련 고전 국역작업을 꾸준히 벌여온 솔출판사가 우리 조상들의 지적 유산을 압축한 한국학 총서 「나랏말씀」(전97권) 1차분 7권을 펴냈다.98년 완간 예정인 이 총서는 한글세대의 언어감각에 맞게 한문투와 고어체의 표현을 되도록 피했으며 여러 권의 책을 단권화한 것이 특징.이번에 선보인 것은 「삼국유사」(전2권)「다산문선」「열하일기」「성호사설」「용재총화」「산림경제」 등 6종이다. 그동안 한글판이 많이 나왔지만 정본이 없었던 「삼국유사」는 우리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되는 신화서이자 역사서.우리나라 최고의 국문학 연구자료로 꼽히는 「삼국유사」의 향가 14수와 「균여전」의 11수를 부록으로 실었다.「다산문선」은 기,전,원,소,기사 등 80편의 글이 담긴 다산문학의 결정체.다산의 문학사상이 무르녹아 있는 「다산문선」에는 특히 유배생활의 외로움과 가족을 기리는 애틋한 그리움이 배어 있으면서도 실학자적인 면모가 솔직담백하게 드러나 있다.기행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중국의 성경,북경,열하 등지를 살피고 돌아와 엮은 일종의 비교문화론이다.이번 국역본에서는 총 26편중에서 「압록강을 건너며」와 「성경잡지」「역마를 달리며 적은 수필」등 3편만 뽑아 수록했다.「성호사설」은 조선후기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탁월한 정책대안이 담긴 성호 이익의 경세론.이밖에 「용재총화」는 조선초기 문신이자 학자인 성현의 필기잡록류이며,「산림경제」는 산림에 묻혀 살면서 지켜야할 생활규범과 농촌생활을 해나가는 지혜를 적은 책으로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증보해 엮은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 가운데 「집안 건사하기」「대 잇기」「아이 키우기」 등 3편의 글이 실렸다.박찬수 민족문화추진회 사무국장,송기호 서울대 교수,신승운 성균관대 교수,정민 한양대 교수,한문학자 조수익씨 등 5명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 자치단체의 문화유산 번역출간/조유전 국립민속박물관장(굄돌)

    조선 22대 왕인 정조가 생부인 사도세자 무덤이 있는 수원의 현륭원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참배하고 아울러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화성행궁에서 치룬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가 번역출간 되었다. 수원시가 화성 축성(현 수원성) 2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정신문화연구원 장철수 교수를 중심으로 각 방면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번역하여 지난 달에 펴낸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현륭원 참배에 관한 조정신료들간의 논의과정과 내용,1년여 동안의 환갑잔치 준비과정에서 절차 및 인력동원에 관한 행정체계,궁중잔치에 따른 의식,연회 및 궁중음식,궁중복식 등 실로 궁중문화에 관한 총체적인 내용을 담고있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당시 화성의 방어체계,도로,저수지 나아가 경로잔치,과거 실시,배급 등 실로 조선후기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이해하는데 지침서나 다름없다.그리고 지금까지 해석이 어려웠던 수원능행도에 관한 연구도 가능하게 되었다. 궁중문화는 당시 가장 발달된 고급문화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어 그것이 곧바로 민족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일제는 이 왕가의 재산을 몰수하여 왕궁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함으로써 면면이 이어온 우리 민족문화의 구심점을 인위적으로 말살하고자 했다.그리하여 오늘날까지 궁궐을 중심으로 한 왕궁문화는 불모지가 되었던 것이다.이제 이 책이 번역 간행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왕궁문화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이와 같이 최고수준의 조선 문화를 총체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의 번역이 무엇보다도 자치단체인 수원시에서 이루러졌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고장의 역사를 밝혀나가려는 노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이러한 노력이 바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을 한단계 높여줄 계기가 될 것이다.수원시에 찬사를 보낸다.
  • 도서출판 자유문고,「이향견문록」 해석본 상·하권 내

    ◎조선시대 민장들의 287가지 사연/1862년 문인 유재건이 엮은 여항 전기류/서민에 초점 맞춘 민중사 연구 귀한 자료 조선시대 서민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기록한 전기집 「이향견문록」해석본 상하권(이상진 옮김)이 도서출판 자유문고에서 나왔다.조선 후기의 문인 유재건이 1862년에 편찬한 「이향견문록」은 제목이 암시하듯 「이향」(백성들이 사는 동네)에서 보고들은 다양한 인물군상들의 이야기를 적은 책.현재 전하는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이나 자료들이 대부분 양반계층을 대상으로 하고있는 반면,이 책은 중인이하 서민들의 생활상을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조선시대 민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책에는 규장각에 근무했던 중인계층 서리인 엮은이가 각종 문집과 기록 등에서 채록하거나 스스로 지은 287조목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대상인물은 일반 백성에서부터 기인,신선,기생에 이르기까지 311명.비슷한 성격의 「여항전기류」인 「호산외기」와 「희조일사」가 각각 42명,85명을 다루고 있는 것과 비교할때 그 규모의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향견문록」은 손으로 직접 베껴쓴 필사본으로 모두 10편으로 이뤄져 있다.「덕과 학문이 뛰어난 인물들」「충신과 효자 효부들」「지모를 겸비한 호걸들」「가정을 일으키고 지킨 여인들」「이름을 떨친 문장가들」(상중하)「한폭의 작품과 싸운 화가 서예가들」「의사 약사 바둑 음악 점술의 대가들」「신선 도사 승려 기인들의 행적」등이 그 내용.이 가운데 중인계층의 시인,문사들의 이야기가 3편으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조선후기에는 기술직 중인인 의관이나 역관,승문원·규장각 서리들을 중심으로 한 문학 즉 「여항문학」이 특히 발달했다.이 책은 당나라 시인 고적·잠삼에 버금간다는 칭송을 들은 홍세태를 비롯해 시모임 직하사를 결성한 최경흠,「매화시 미치광이」로 불린 김석손 등 71명의 문장가들의 구체적인 작품세계와 일화를 통해 19세기 여항문학의 흐름을 면밀히 살피고 있어 주목된다.
  • 「페미니즘 소설」 활짝 피다/올 문단의 「보이지않는」 큰 수확

    ◎복잡 다면성의 삶속 여성의 문제 접근 활발/「염소를 모는…」·「블루 버터플라이」 등 주목받아 96년 문단의 보이지않는 수확의 하나로 뭐니뭐니해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페미니즘 소설의 약진이다.90년대 들어 하나둘 나타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여성주의 문학이 올들어 폭죽터지듯 만개했다. 여성의 시각으로 억압의 체험을 들춰내는 이같은 소설이 새삼 주목받는 것은 여성문제에 한층 다채롭게 접근,심화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예전의 작품들이 변두리로 밀린 여성문제를 끌어내기 위해 자의식 강한 여성의 극단적 얘기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면 요즘은 삶의 복잡한 다면성을 인정하고 여성문제도 그 속에서 풀어내려는 현실적 접근이 부쩍 늘었다. 올 하반기엔 전경린씨의 주목받은 창작집 「염소를 모는 여자」,차현숙씨의 첫 장편 「블루 버터플라이」와 소설은 아니지만 공지영씨의 산문집 「상처없는 영혼」 등이 여성주의적 시각을 강하게 드러내며 주목받았다.최근 1∼2주동안만도 이청해씨의 신작소설집 「숭어」,김민숙씨의 장편 「시간이 마술을 걸어온다면」,이경자씨의 「황홀한 반란」 등이 페미니즘 성황을 이뤘다.얼마전엔 남성작가 김원우씨도 가부장제하에서 일부일처제의 허위의식을 벗긴 「모노가미의 새얼굴」이라는 장편을 내놓아 여성억압이 더이상 여성소설가들만의 고유소재가 아님을 보여줬다. 이처럼 양이 축적되면서 페미니즘 소설들도 개성의 편차를 다양하게 드러내고 있다.무엇보다 날선 공격성과 턱없는 피해의식이 수그러들고 여성문제를 삶의 무한히 복잡한 갈등의 하나로 접근하려는 다원주의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블루 버터플라이」는 부부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은 남녀 두쌍을 정신분석 상담실로 끌어들여 남성위주의 왜곡된 성통념에 다치는 것은 여성과 남성 모두라는 사실을 무의식 층위에서 파헤친 점이 독특했다.「염소를 모는 여자」의 경우 까만 우산을 받치고 염소를 몰며 아파트를 뛰쳐나오는 기혼녀라는 한국문학사상 드물게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낳았다.이청해의 신작 작품집 「숭어」에 실린 단편들은 배운 여자들의 예각적 자의식이기일쑤였던 여성문제가 소시민의 삶으로까지 내려와 부대끼는 모습을 푼푼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페미니즘 소설의 「공세」수위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자 역으로 경계어린 반작용도 커지고 있다.작가 이문열씨는 「세계의 문학」 가을호부터 연재를 시작한 신작장편 「선택」에서 조선후기 한 양반집 아낙을 내세워 「여성해방론자」들을 강하게 질타하고 있고 작가 유순하씨도 산문집 「참된 페미니즘을 위한 성장」을 펴내 페미니즘에 대한 훈계를 보탰다.성격은 좀 다르지만 아버지가 가정에서 죽은 이름이 돼버렸다며 아버지의 권위를 되찾자는 소설들이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한 것에도 이같은 경계심리는 깔려있을 법하다. 아무튼 안팎에서의 이러저런 도전앞에서 페미니즘 소설은 더 깊은 문학성과 정치한 방법론으로 인간보편의 문제를 끌어안는 주류문학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전환기에 놓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 조선시대 교육내용 “한눈에”/서울대 30일부터 규장각 자료전시회

    『요즘에는 인재를 뽑을때 성적만을 중시하고 도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학식이 높고 행실이 올바르다 해도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그 도를 시험할 방법이 없다』­이이의 독서론. 『천·지를 배웠으면 일월 성신 산천 구릉 등도 배워야 하는데 천자문은 이같은 응용력을 기르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태워 없애야 한다』­박지원의 담총외기. 서울대 규장각이 개교 50주년 기념으로 오는 30일부터 다음 달 12일까지 마련한 「규장각 자료로 보는 조선시대의 교육전」에 전시된 내용들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후기의 실학자 유형원은 반계수록의 학교사목에서 국가개혁에는 반드시 교육개혁이 뒤따라야 한다며 각 읍에 1차 학교를 설립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에도 뜨거웠던 교육열 못지 않게 교육개혁이 국가적인 과제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후기 국왕들의 학습내용을 수록한 열성조계강책자차제에 따르면 교육을 가장 중시했던 영조는 세자시절 소학·대학 등을 수학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44권의 경전을 아침·점심·저녁 하루 3차례 신하들과 학습했다. 또 윤최식의 일용지결에 따르면 당시 선비들은 계명이라고 일컬은 새벽 2∼4시부터 하루 16∼18시간을 자기수양과 독서에 몰두했다.
  • 운현궁 복원(외언내언)

    구한말 흥선대원군은 격변의 소용돌이속에서 영광과 패배를 부침한 풍운의 정객이었다.고종황제의 아버지로서 국태공이 되기 이전까지 이하응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서 살아남기 위해 장안의 건달로 주정뱅이 생활로 세월을 보냈다.둘째아들이 12살에 왕이 되자 대원군은 10년동안 정권을 잡고 조선천지를 뒤흔들었다.그러나 며느리인 민비와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청나라에 강제호송되는 수모를 겪었기도 했다. 창덕궁 맞은편에 있는 운현궁은 바로 대원군의 사저.고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치렀던 곳이고 대원군이 서릿발 같은 개혁정치를 단행했던 곳이다.고종이 즉위하자 본래있던 운형궁의 대대적 증축공사가 이루어져 주위 담장길이가 수리나 되었다.대원군의 명성만큼이나 운현궁은 커졌다.그러나 그뒤 일제시대와 6·25를 겪으면서 운현궁은 쇠퇴하고 많은 건물이 없어지거나 훼손되어 겨우 본채5동과 회랑만 남게 되었다. 서울시는 지난 4년동안 퇴락한 운현궁 본체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복원작업을 끝내고 26일 일반에게 공개키로 했다.개관과 더불어 고종과 민비의 가례식을 당시 그자리에서 재현하기로 했다.꼭 130년만에 재현되는 국혼의례인 셈이다.운현궁의 회랑에는 대원군의 유품을 전시할 것이라고 한다.뛰어난 지략가인 대원군은 서화에 비범한 솜시를 보여 그의 난초그림은 「석파란」이라하여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다. 운현궁은 19세기 조선후기 사대부의 집으로 으뜸가는 고건축물로 꼽힌다.지금 그 원형이 모두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본채의 모습은 조선시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전해준다.얼마전 복원된 창덕군 낙선재와 더불어 새로운 볼거리가 생긴 것이다.600년된 고도에서 5대궁을 빼고는 옛건물을 찾아볼 수 없는게 서울이다.운현궁의 복원은 그래서 더 값지다.〈반영환 논설고문〉
  • 「대모」 홍성덕씨 자전에세이집 내

    ◎“「여성국극」은 한국판 뮤지컬이죠”/전통가락+춤사위·연기=무한한 가능성/60년대 들어 사양길… 정부·기업 지원 절실 『여성국극이 한때의 옛 이야기로 잊혀져가고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습니다.시대에 맞지않는 요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국극은 우리의 전통가락과 춤사위,연기가 어우러진 「한국판 뮤지컬」로 현대감각만 살리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장르인데 말이죠』 「여성국극의 대모」로 불리는 홍성덕씨(56·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이사장)가 자전에세이집 「내뜻은 청산이요」(한뜻)를 냈다. 조선후기 창악인들의 단체인 「협률사」단장이던 아버지와 판소리 명창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4세때 동편제의 달인 강도근 선생에게 수궁가를 배우면서 본격적인 소리꾼 인생을 살게된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가팔랐던 예술가로서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지난 51년 임춘앵의 여성국극단인 「동지사」가 창단되면서 여성국극은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그러나 60년대초부터는 사양길에 접어들어 이제는 존재 자체가 희미해진 형편이에요.돌이켜보면 집과 패물을 팔아 공연하기 예사였고,기껏해야 가설무대가 전부였어요』 같은 전통예술인 판소리의 경우 62년 국립창극단이 생기고 64년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정부의 배려로 활기를 찾고 있는데 비해 여성국극은 여전히 무관심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쇠퇴의 길을 걷게된 한 요인.『여성국극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국극인 스스로의 혁신노력이 있어야겠지만 정부의 지원 또한 절실합니다.가까운 예로 1912년에 창단된 일본의 여성극단 다카라즈카(보총)는 정부와 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속에서 세계유수의 극단으로 성공하지 않았습니까.우리 여성국극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나아가 그는 일본의 다카라즈카 극은 비교적 근대적인 성격의 연극양식이지만 여성국극은 고전 판소리를 모태로 한 일종의 전통극인 만큼 한층 시선을 끌만한 문화상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한국 공연단체로는 처음으로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여성국극 「내뜻은 청산이요」 초청공연을 가진데 이어 최근미주 9개도시 순회공연을 마친 홍성덕씨.그는 『우리 전통문화의 세계화 작업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인의 의무요 사명』이라고 말한다.
  • 동양화가 박대성(이세기의 인물탐구:104)

    ◎청한­적요가 배인 시인같은 화가/한때 전국산천 스케치… 실경산수” 화풍지켜/인위·조작이 없는 소쇄한 화격에 선모심이… 희부연 연묵과 엷은 보라빛이 먼산을 이루는 가운데 가늘고 섬세한 수목사이로 청명한 물줄기가 운문율처럼 퍼져 있다. 사방이 온통 겨울을 재촉하는 계절의 끝에서 수면에 비친 스산함은 청한과 적요의 시를 흩뿌린다. 인적이 끊긴 촌가며 물가에 매어둔 빈 뱃전에도 긴휴면이 스며들어 보는 이의 가슴에 뭉클한 시심을 던진다. 소산 박대성의 수묵담채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소산은 시인같은 화가다. 실제로 화면에 시를 직접 써넣기도 하고 그가 좋아하는 카비르의 구절들을 어슷어슷 배경속에 수놓기도 한다. 「저 황홀한 피리소리를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모른다. 누구의 피리소리인지는, 여기 등불하나가 타고 있다. 불꽃의 심지도 기름도 없이 연꽃 한송이가 꽃피어난다」 그의 작품은 간경·산뜻한 선묘가 특징이다. 묵광의 묘취를 한껏 펼쳐 마치 폭우가 쏟아지고 난뒤의 산자수명을 깊은 사유로 그려내고 있다.그중에서도 지난 94년 1천2백호 대작으로 일컬어지는 「성산포 일출봉」은 갈대가 휘날리는 일대장관을 「풍죽처럼 소화한」 호방한 화면이 일품이다. 이 한폭의 대작을 위해 그는 겨울태풍이 그칠줄 모르는 성산포에 머물면서 배를 타고 몇차례나 섬주변을 돌기도하고 봉우리의 성격을 소상하게 파악한후 「의젓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기상을 포착해냈다」고 말한다. ○추경·초동 즐겨 그려 1천호에 손댄 것은 경주 계림의 고목을 그린 「고목의 정원」이 처음이다. 수백년 풍상속에 의연히 서있는 계림의 노목은 그의 넘치는 화심을 움직여 「미의 내용을 구명하는 작업」에 철저하게 몰두할수 있게했다. 진한 먹을 튕겨서 쓰는 갈필대신 산마호라는 장봉을 써서 큰 그림을 그릴때의 일필휘지의 붓길과 은은한 번지기(휘염)로 변화가 풍부한 산의 형세를 제압한 것이다. 드넓은 공간에 그의 소재들을 들어앉히는 동안 『집사람이 먹을 갈아주는데 정말로 한도 끝도 없이 갈았다』고 웃는다. 부인 정미연씨는 생명이 집결된 누드화로 주목받는 서양화가다. 지방에서 활동하던 소산이 중앙화단에 부상된 것은 78년 제1회 중앙미술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고 다음해 대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그때 심사위원의 한사람이던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새로운 작가, 역량있는 신인을 발견한다」는 대전의 취지대로 「그의 그림은 우선 한눈에 새로웠다」고 못밖는다. 소산의 출현은 「신선한 충격」과 「커다란 수확」으로 화단에 받아들여졌다. 그는 주로 늦가을 풍경이나 초동을 즐겨 그린다. 평론가 유홍준은 그의 추경을 보고 「고담한 필묵과 스산한 운치의 적막감이 오늘날 박대성 작품의 미점」임을 상찬해 마지않는다. 작가자신도 아일과 풍요보다 쓸쓸함에 깃든 자연의 천리속에 고격이 숨어있음을 터득하고 있다. 그의 초기그림들은 까슬까슬한 붓자국을 들어낸 석묵으로 소슬한 한국의 산천이 안고 있는 정취를 섬세하게 표출해낸다. 그러나 88년 호암미술관이 초대한 대작전에 이은 최근의 작품들은 벽오동과 청오동, 청람이 넘실대는 바다와 수목에 산호색과 비취색 호박색을 장식하여 화사미를 보인다. 전경은 우람창울하고 원경은 생략과 절제로 짙고 엷고 가늘고 굵은 선과 색채가 상조되는 것이 눈에 띈다. 특히나 그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현실적 시각은 빠른 붓의 속도와 날카로운 선획으로 스케일이 장대한 대작을 성취하였고 이는 「이제까지의 실경산수의 일반적 유형에서는 맛볼수 없는 다른 화격을 이끌어낸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에대해 오광수는 하나의 형식이나 틀에 안주해버리는 우리 미술풍토에서 「부단하게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그의 자세는 「조선후기의 진경산수와 청전 소정을 중심으로하는 근대산수에 이은 「제3세대」로 정의를 내린다. 그는 새로운 동양화풍으로 화단의 시선을 집중시켰을뿐만 아니라 독학으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가 그림을 공부한 것은 청대초기의 화집인 「개자원화전」이 바탕을 이룬다. 경북 청도 한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3살때 부모를 잃고 왼손마저 다치자 고향의 빼어난 경관을 사생하는 것으로 그는 외로운 시절을 보낸것 같다. 학력은 중학교 졸업이 전부이고 형과 누나들의 도움으로 17세되던해 부산으로 내려가 서정묵화숙에서 사사, 부산동아대가 주최한 국제미전 입상과 21세때 국전 첫입선을 비롯해 연속 8회 입선이 그의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국전서 연속 8회 입선 그러나 연이은 국전입선후에는 당연히 특선이 따르기 마련인데도 학맥 인맥이 없는 그는 번번이 도외시되었고 여기에 한맺힌 그는 「뭔가 최고가 돼야 한다, 실력으로 이 모든 것을 설욕하겠다」는 의지로 전국을 떠돌면서 혼자서 산천을 스케치해 나갔다. 『그림이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에 자다가도 놀라서 벌떡 일어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는 고백에는 여전히 저항이 들어가 있다. 그가 화가로서 행운을 잡은 것은 대구매일신문 화랑개관기념 초대전이다. 대구의 양대산맥으로 일컬어지던 주경과 서동균 등 어느 한쪽을 선택할수 없었던 신문사측이 그에게 기회를 주었고 이 전시를 계기로 대만과 일본초대전에서 그의 그림은 「소산화」로 크게 호평되었다. 당시 대만의 원로화가 양우명은 그의 그림을 「청전 이후」로 비유하면서 대만에 머물 것을 극구 권유했으나그는 중앙화단이 있는 서울에 정착했다. 그리고 뒤늦은 나이인 35세때 효성여대 회화과 출신인 정미연씨와 결혼, 부인의 그림자같은 내조가 「시대감각에 걸맞는 현대한국화」를 구축하는데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자녀는 딸만 둘. 성격은 내성적인 편으로 일체의 그룹활동이나 단체전에 가담하지 않는다. 그가 평창동에 화실을 마련한 것은 10년간의 팔당시대를 거친 90년초부터다. 북악터널 못미처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소산의 화실은 선비의 화숙처럼 은일하게 숨겨져 그의 정원과 화실은 하나같이 명품이다. 안방에서 내다보면 북악산 줄기가 사방으로 둘러치고 추분이 머잖은데도 연과 소나무와 죽의 푸르름은 작가의 초일한 화경인듯 시들줄을 모른다. 소산은 독특한 실험정신과 물결치는 소재의 전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는 화풍」을 지켜 기를 앞세운 작업보다 광활한 대자연을 테마로한 서정적 세계로 자기변신을 이루고 있다. 창일한 개성과 영롱한 구슬빛이 감도는 소산의 그림앞에 서면 인위와 조작이 없는 소쇄한 느낌, 거르고거른 영매의 화격에 선모심을 금치못하게 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에 한구절의 시를 품게한다. □연보 ▲1945년 경북 청도출생 ▲66년 국전 18회부터 25회까지 8회 연속입선 ▲68년 부산동아대 국제미전입선 ▲70∼80년 국내서 8차례 개인전개최 ▲74∼75년 태만 공작화랑초대개인전 ▲75년 대구매일신문사 화랑개관기념초대 개인전 ▲76년 일본 후쿠오카(복강) 선화랑개인전 ▲78년 제1회 중앙미술대전 「추학(추학)」으로 장려상수상 ▲79년 제2회 중앙미술대전 「상림(상림)」으로 대상수상 ▲80년 「계간미술」이 선정한 「새시대 9인전」,한국 화랑협회초대 「12인전」출품 ▲81년 국립현대미술관주관 「한국미술,81년」「한국현대수묵화전」 신세계미술관선정 「청년작가 10인전」초대출품 ▲82년 경기도 남양주 팔당정착 ▲84년 샘터화랑초대 「박대성·황창배 2인전」 ▲85년 국립현대미술관초대 「현대미술초대전」출품,가나화랑전속 ▲86년 대구매일신문사 화랑초대 「박대성·강대철 2인전」,도쿄 후지갤러리개인전 ▲88년 서독 쾰른시 파리나갤러리 초대전,중앙일보주관 「박대성 작품전」(호암미술관)에 대작 1백여점전시(3월9일부터 30일간) ▲89년 윤범모와 중국문화기행 ▲90년 백두산 만주일대여행,가나화랑초대 제15회 개인전 ▲94년 실크로드 기행전(동아갤러리),개인전(가나화랑)
  • “고문서토대 국학연구 본격화”

    ◎정신문화연구원,제4기 진흥연구사업 계획 발표/「장서각」 고자료 등 단순 수집정리서 탈피/번역·주석작업 중점… 실질적 뒷받침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하 정문연·원장 이영덕)이 고전적 조사연구와 고문서 수집을 토대로 영인본 발간 등 국학자료의 본격적인 출판을 골격으로 한 제4기(97년 5월31일까지) 국학진흥연구사업 계획을 발표해 눈길을 끈다. 국학진흥사업은 정문연이 지난 93년부터 교육부의 특별지원아래 장서각자료 연구를 비롯,전국에 흩어진 고문서와 근대사자료를 수집·발굴·정리하는 정문연의 가장 핵심적인 연찬사업.이가운데 「장서각 고자료 연구사업」은 구 왕실도서관이었던 장서각의 도서가 어떻게 수집 보관돼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조명과 함께 그 장서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작업이다.지난 해까지 조선후기 실학자였던 이재 황윤석(이재·1729∼1791년)의 초서로 된 일기를 탈초,정리한 「이재난고」 두권을 발간했으며 장서각 소장 금석문 탁본자료 정리와 함께 장서각 도서의 해제를 준비해와 「장서각의 역사와 자료적 특성」,「구결자료집」등 국학연구에 귀중한 새 자료들을 발굴 정리해 출판했다.또 「고문서 조사연구사업」은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고문서를 수집 정리해 소장자 중심으로 「고문서집성」을 발간하는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보완할 수 있는 생활자료의 의미를 갖는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지금까지 20여만점을 수집해 이가운데 극히 일부 자료만 영인,출판해놓고 있다. 정문연이 제4기에 추진할 사업들은 이같은 작업의 연속선상에서 실질적으로 한국학 연구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자료제공측면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우선 「고전적 연구조사」에서는 지난해 집필된 해제원고를 정리보완해 간행하는 한편 장서각 소장 금석문 탁본자료를 영인,인쇄해 상세한 해제를 붙여 두권으로 간행한다는 계획.이와 함께 장서각 자료중 희귀본,유일본으로 지목된 「희현록」「석운일기」「예기대문언속」「낙점)」「증보 만병회춘」중 두권을 택해 영인하면서 구두와 해제를 붙여 출판하고 「이재난고」 3권을 간행,탈초한다. 「고문서 조사연구」사업으로는 충청남북도와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의 서원 향교 사찰및 사가에 소장된 고문서 전적류를 최대한 조사·수집·정리하며 이미 조사된 전남과 경상남북도에 대한 추가조사를 벌여 3만여점을 조사·수집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또 수집자료를 평판작업과 분류·목록·문서번호 부착과정을 거쳐 마이크로필름화해 출판작업에 대비한다는 계획이다. 정문연 정구복(자료조사실장)교수는 이와 관련,『지금까지의 국학진흥 사업이 주로 고문서 수집차원인 1차사업에 치중해왔으나 이같은 작업이 한국학 연구의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위해선 본격적인 해제와 번역,주석작업이 뒤따라야 한다』면서 『정부와 대학,지방 향토사학자,사가의 적극적인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현대감각으로 읽는 ‘고전2편’

    ◎김원우씨 「숨어사는 즐거움」/김성동씨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숨어사는 즐거움」­조선중기 허균의 선풍도골 독서노트/「사람답게 사는 즐거움」­루소의 「에밀」을 연상케하는 교육고전 「현대감각으로 고전을 새롭게 읽는다」 경쟁으로만 치닫는 각박한 시대,일상의 늪에 빠져 지향점을 잃고있는 현대인들에게 차분한 성찰의 기회를 마련해주는 두 권의 수신교양서가 동시에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중견소설가 김원우씨와 김성동씨가 우리 고전을 토대로 펴낸 「숨어 사는 즐거움」과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이 그것으로 모두 솔출판사에서 나왔다. 「숨어사는…」은 조선중기의 문신 허균의 시문집「성소부부고」의 부록인 「한정록」을,「사람답게 사는…」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들어있는 「사소절」을 각각 대본으로 삼았다. 「숨어사는…」은 마흔둘의 나이에 병을 얻어 관직을 포기한 허균이 옛 선비들의 한적한 삶의 풍경을 적은 일종의 독서노트.속세를 떠나 숨어사는 사람들의 일화와 기이한 행적,잠언,성찰등이 실려있다.하지만 이 책은 은둔의 삶을 살았지만 퇴영적이거나 패배주의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유유자적하는 가운데서도 선풍도골을 잊지 않았던 옛 사람들의 삶의 적극성에 초점을 맞춘다.김원우씨는 『요즘 정서와 동떨어진 이야기나 번쇄한 고사 등은 과감히 생략했으며,쉬운 한글로 풀어쓰되 한문 특유의 맛을 탕감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엮은이의 소감을 밝힌다. 「사람답게 사는…」은 『소절(작은 예절)을 지켜야 대절(큰 예절)을 닦을 수 있고 대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해준다.나아가 『남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자기 집을 망치고,여자를 가르치지 않으면 남의 집을 망친다.그러므로 미리 가르치지 않는 것은 부모의 죄이다.고식적인 사랑만을 베풀면 오래도록 근심과 해를 끼치게 된다』는 경구로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교육고전으로 꼽히는 이 책은 여러 면에서 루소의 「에밀」을 연상케한다. 이와 관련,편자인 김성동씨는 『사람들은 루소가 지은 「에밀」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루소와) 같은 시대에살았던 조선의 이덕무가 지은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모른다.루소의 「에밀」이 자코뱅당의 정신적 안받침이 되어 프랑스혁명의 불씨가 되었을 때,조선에서는 이덕무의 이 책을 읽고 있었다』고 말한다.〈김종면 기자〉
  • 양반/미야지마 히로시 지음(화제의 책)

    ◎일 학자가 본 조선조 양반제도 조선시대 양반제도를 일본인의 시각에서 고찰한 교양서.일본의 대표적인 한국사 연구자 가운데 한명인 지은이(도쿄대 교수)는 「양반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부터 출발해 양반계층의 형성과정과 경제적 기반,일상생활 등을 차근차근 짚어간다.안동 권씨 권벌가문의 가계보,분재기(재산상속 문서)등 옛 양반가 고문서와 「쇄미록」「미암일기」등 사대부계급의 일기를 기본사료로 활용,실증적 가치를 더해준다. 그동안 통념상 양반은 생산활동과는 완전 유리된 기생적인 존재로 간주돼 왔다.그러나 이러한 양반상은 조선후기에 성립된 것으로,조선전기의 재지양반층은 노비를 지휘 감독하며 직영지를 경영하던 농업 경영자였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이 사회 전체에 스며든 것이 18세기 이후라고 밝히고 있는 지은이는 이 책에서 전통과 근대의 관계에 특히 주목한다.19세기 후반 이후 근대를 놓고 볼때 유교적 전통은 소멸의 길을 걷긴 했지만 강화된 측면도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보인다.일제 강점기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연구에서도 드러나듯 근대적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었을 때 문중재산의 구별 또한 한층 명확해졌음을 지은이는 그 한 예로 들고 있다.도서출판 강,노영구 옮김,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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