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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13) 서울길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13) 서울길

    한양 도성(都城)이 지척이다.‘너덜이’(판교)를 지난 영남대로는 서울시계인 ‘달래내 고개’(서초구 원지동)로 들어선다. 괴나리 봇짐을 메고 부산 동래를 출발해 1000리를 달려온 영남 선비들에게 이 고갯길은 청운의 꿈에 부풀게 만들었을 것이다. 부지런히 걸으면 여기에서 하루 정도면 도성에 이를 수 있다.‘용인로’(龍仁路)로 불렸던 이 길에서 옛길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다만 사연을 간직한 옛 지명들만이 한양으로 가는 길임을 짐작케 할 뿐이다. 조선후기 지리학자인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경조오부도’(1861년 목판본·보물 850호)를 토대로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나각순 박사의 자문을 받아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들어왔던 옛길을 찾아 나섰다. ●한양을 지척에 둔 고갯길 달래내 고개는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옆에 난 2차선 포장도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으로 가는 길이라고 해서 ‘삼남대로’로 불렸다.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차의 정체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우리 귀에 익숙한 지명이기도 하다. 이 길은 원지동과 양재동을 거쳐 사평리(沙平里·한남대교 인근)에 있는 사평나루나 상림(桑林·반포대교 인근)에 있는 잠원나루를 통해 한양에 이르는 길이다. 달래내 고개를 넘기 직전의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천림산 봉수지’(성남시 수정구 금토동)는 한양이 지척에 있음을 알린다.‘천천현(천림현) 봉수대’로 불리는 이 봉수대는 부산 다대포를 출발한 봉수가 서울 남산으로 이어지기 직전에 있는 마지막 봉수대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왜적의 침입을 알리는 연기가 피어 올랐을 것이다. 최근 발굴돼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곳으로 현재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난 2002년 9월 경기도 기념물 179호로 지정됐다. 청계산 옥녀봉 아래 원지동에서도 옛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원지동은 조선시대 공용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는 ‘원’(阮)이 있었던 곳이라고 해서 지금도 이렇게 불린다. ●한양길 마지막 휴식처, 양재역 길은 강남대로를 따라 양재역으로 이어진다. 역(驛)은 말 그대로 역마를 갈아타는 곳으로 양재역은 한양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한강을 건너기 전에 마지막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 인근 ‘말죽거리’는 말을 타고 온 사람들이 도성에 들어가기 직전에 말에게 죽을 끓여 먹였다고 해서 붙여졌다. 양재역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때문에 심심치 않게 ‘벽서’(대자보)가 나붙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양재역 벽서사건은 명종 2년(1547년)에 일어났는데, 을사사화 직후인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빗대 “암탉이 궁궐에서 울어 나라가 어지럽다.’는 내용의 비방글이 나붙었다고 한다. 현재는 ‘양재역터’였음을 알리는 조그만 표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인근 서초구청 뒷산(양재고등학고 자리)에는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묘로 추정되는 자리가 있다. 당시 봉화 정씨 집성 묘역은 강남사거리 태극당 인근에 있었지만 영동개발에 따라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으로 이장됐다. ●한강을 건너 도성으로 양재역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린다. 한 길은 강남대로를 따라 한남대교로 이어지는 길이고, 다른 길은 교대역을 거쳐 반포대교로 이어지는 길이다. 대동여지도에 ‘사평리’로 기록된 곳은 현재 한남대교 아래로 사평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한강진 나루’에 내렸다고 한다. 현재 서초구에는 ‘사평로’(교보빌딩 사거리∼동작대교)라는 이름으로 근근이 명맥만 남아 내려오고 있다. 다른 길은 ‘상림’(桑林·뽕나무숲)이라 불리는 반포대교 아래로 여기에 잠원나루가 있어 한강을 건너 용산구 점말과 서빙고(西氷庫)로 이어졌다. 잠원나루는 지금 잠원변전소와 한신아파트 119동 샛길을 따라 이르는 곳에 위치했다고 한다. 현재 한남역 인근에 위치한 한강진(漢江津)에 내린 사람들은 단국대 앞에 있는 한남로를 따라 버티고개를 넘는다. 한강진은 나루터 겸 군사·방위초소 역할을 했으며, 좁은 의미에서 ‘한강’은 한강진을 일컬었다고 한다. ●힘겨웠던 한양 1000리 길 왕복 6차선 한남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버티고개(약수고개)는 옛날 궁궐을 지키던 순라군(巡邏軍) 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 외치며 도둑을 쫓았다. 이를 ‘번티’(番峙)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가 됐다고 한다. 남산순환도로 아랫길에도 ‘큰 버티고개’가 있었다고 한다. 세조 때에는 타워호텔 앞 언덕 위에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남소문으로 들어가 장충단길을 거쳐 도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가 일찍 죽는 등 궁중에 안 좋은 일이 잇따르자 예종 1년(1496년) 문이 철거됐다. 당시 음양가들이 “성곽의 동남쪽에 문을 내 지기가 상해 왕실의 피해가 생겼다.”며 철거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약수동 방향으로 돌아 장충체육관 앞을 지나 중구 광희동 광희문(光熙門)을 이용했다. 광희문은 태조 5년(1396년)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됐으며, 시신이 밖으로 나가는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軀門)으로도 불렸다. 당시 도성에서 장례를 치른 뒤 동쪽으로는 광희문, 서쪽으로는 서소문을 통해 시신이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또한 서빙고나루나 점말나루에서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반포로를 따라 녹사평역을 거쳐 용산 미8군 기지 내를 거쳐 남대문에 이르렀다. 녹사평(綠莎坪)은 ‘푸른 풀이 무성한 들판’이라는 뜻의 조선시대 지명으로 고종 때까지만 해도 이 일대에 잡초가 무성해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평민들은 남대문으로 출입할 수 없었으며, 서남간문이나 서소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처럼 부산 동래를 출발한 힘겨웠던 한양 1000리 길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글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서울시 시사편찬위 나각순 박사 “도로의 명칭은 지명과 함께 옛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소중한 연구자료입니다.” 지난 25년간 서울시의 역사를 연구해 온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나각순 박사는 ‘대동여지도’에 나온 옛길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서 지방으로 나가는 큰 대로는 모두 9개. 길은 영남대로로 이어지는 용인로를 비롯해 강화로, 인천간로, 시흥로, 과천로, 광주로, 양근로(가평로), 양주로, 고양로 등이다. 용인로는 영남·충북사람들이, 광주로는 강원·충북사람들이, 노량진·과천로는 충남·호남사람들이 주로 이용했다는 설명이다. 영남대로는 주로 과거를 보러온 영남 과객(科客)들과 영남 지방으로 파견·부임하는 관리, 서울에서 지방관청의 사무를 처리하는 경저리(京邸吏) 등이 주로 이용하거나 영남지역 소규모 물품의 물자수송로와 군사이동로 등으로도 이용했다고 한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모로가도 서울만…또다른 영남대로 문경새재를 넘어 경기도 여주·이천을 거쳐 넘어온 사람들 중에는 ‘광주로’(廣州路)를 이용하기도 했다. 경기도 광주시 광지원 삼거리에서 남한산성을 관통해 송파대로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가거나, 남한산성을 북쪽으로 돌아 천호대로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남한산성을 관통한 사람들은 송파대로를 따라 현재의 석촌호수에 이르러 배를 탔다.1971년 물막이 공사와 매립공사를 하기 전까지 한강의 본류였다. 현재의 한강은 샛강이었고, 잠실역에서 잠실대교까지는 여의도와 같은 하중도였다. 조선시대 행인들은 현재 서호에서 ‘서호나루’와 삼전도 나루터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 뚝섬나루터로 들어갔다. 뚝섬나루에 내린 사람들은 뚝섬길을 따라 내려와 한양대 후문에 있는 조선시대 가장 긴 다리인 ‘살곶이 다리’를 건너 왕십리를 지나 광희문에 이르렀다. 남한산성 주변을 돌아 천호대로를 따라온 사람들은 광진교 아래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광나루에서 내렸다. 이어 광나루길을 따라 능동 어린이대공원을 거쳐 한양대, 왕십리를 지나 도성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7) 신앙·사고상징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7) 신앙·사고상징

    대다수의 민족문화재나 문화상징은 종교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종교는 엘리트의 고매한 종교사상이나 우리네 소박한 삶의 논리에서나 늘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의 상징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렇다고 종교라는 것이 늘 추상적인 인식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교인의 삶을 대하면서 그것이 현실의 자리에서 늘 삶의 긴박한 문제를 풀어내는 기제임을 쉽사리 확인하게 된다. 갖가지 신앙을 통해 혹은 적극적인 의례나 소극적인 금기와 꺼림을 통해 현실의 질곡과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우리의 종교문화는 인식을 넘어선 풀이의 몸짓이었다. 그러면서도 종교는 일상을 지탱할 삶의 핵심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망의 토대였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을 살면서도 아노미에 젖어들지 않는 것은 종교를 자양삼아 삶의 가치와 기틀을 굳건히 유지하기 때문이다.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신앙 및 사고와 관련된 9개의 민족문화 상징들은 삶의 궁극적인 물음과 해답을 향한 몰입과 발산이었으며, 실제로 삶의 응어리를 풀어내려는 바람이자 몸짓이었으며, 세계를 품는 안목과 가치의 본산이자 근원이었다. 분명, 우리 민족은 뜨겁고 화끈한 민족이다. 그러나 우리는 열을 내는 문화와 더불어 능동적으로 그 열을 식히고 가라앉히는, 다시말해 삶의 열기를 조율하는 냉정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선(禪)의 문화가 그것이다. 선은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가는 샤먼의 엑스터시와는 달리 정신의 몰입(엔스타시스)을 통해 마음의 번뇌를 끊고 내면의 평정을 얻으려는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이다. 치열한 일상의 어지러운 삶에 고요와 집중을 끌어들여 삶의 활력을 일으키는 선은 이제 산간의 선방의 문지방을 넘어 도시의 시민문화와 스포츠문화에까지 이르고 있다. 평상의 삶에서 문득 자기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불성(佛性)을 발견하는 각성과 몰입이야말로 현대의 정신 웰빙과도 통한다. ● 禪 - 내면의 평정을 ‘닦는 의례’ 선이 한국인의 내면을 ‘닦는 의례’라면 굿은 한국인의 ‘비는 의례’이다. 굿은 치병, 점복, 의례의 종교전문가인 무당을 중심으로 인간의 삶 속에서 얽히고설킨 문제의 근원을 궁극적으로 살피고 종국에는 그것을 풀어내는 발산의 몸짓이다. 염원을 몸으로 발산하기 때문에 굿이 벌어지는 판에는 늘 열기가 가득하다. 춤과 무악은 그 열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북과 춤으로 신명에 도달한다(‘周易’鼓之舞之以盡神)는 의미에서 고대 부여의 영고(迎鼓)나 동예의 무천(舞天)과 같은 제천의례에서 춤과 음악의 굿 문화를 발견하게 된다. 때론 그런 굿문화가 음사(淫祀)의 굴레로 위축되기도 했으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인 몰입뿐만 아니라 가무로 삶의 에너지와 열기를 역동적으로 발산하려는 풀이의 몸짓은 한국인을 뜨겁게 만드는 문화였다. 유교문화가 지성인에게 늘 마음 닦을 것(修心)을 강조하고 있을 때, 굿은 삶의 질곡에 지친 민중의 상한 마음을 달래주고(安心) 있었다. 민중의 구복적 욕망을 의례로 분출시키는 무속과는 달리, 신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인간의 성실한 의무 이행을 목표로 하는 유교문화는 외면적으로는 제물을 다하고, 내면적으로는 성의를 다하는 것이 제사에 임하는 태도임을 늘 강조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우리 유교문화의 자랑인 종묘와 종묘대제는 이러한 유교의 경건주의적인 태도를 현재까지도 지속하고 있다. 기일에 맞추어 진행된 능제사와는 별도로 납일과 춘하추동 사시를 포함해, 모두 5회에 걸쳐 종묘대제가 정기적으로 거행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히 왕실의 조상숭배의 차원을 넘어서 자연의 질서와 주기를 인간의 삶에 아로새기는 우주론적인 차원의 의미를 지닌 의례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무속의 굿문화로 삶의 뜨거움을 발산하기도 했고 선의 문화로 냉정과 고요를 되찾으며 삶의 궁극성에 몰입하기도 했으며, 유교의 경건하고도 정제된 몸짓을 통해 도덕질서와 우주의 질서를 일원화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은 세계를 바꿀 마지막 희망으로 미륵(彌勒)을 대망하기도 하였다. ● 미륵 - 염원하는 미래-희망의 상징 미륵(산크리트어 Maitreya)은 본래 미래불로서 세상에 하생하기 전까지 성불을 미룬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보살이지만 그 어떠한 명상과 기원으로도 희망을 찾지 못할 때 강력하게 요청된 한국인의 메시아였다고 할 수 있다. 미륵의 화신으로 일컬어진 화랑, 정치적인 격변기에 미륵이기를 서슴지 않았던 궁예와 고려말의 이금, 그리고 석가불을 능가하는 미륵불을 강조하며 자칭 미륵불임을 내세웠던 조선후기의 여환 등은 혼란을 일소할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 미륵에 주목했던 것이다. 한말 이후에는 미륵신앙이 영적인 천재들에게 의해 신종교의 형태(미륵불교, 용화교)로 조직되기도 하였다. 한국인은 삼국시대의 미륵반가사유상을 보면 느껴지듯이, 미래의 세계를 예지하는 미륵의 사유를 늘 떠올리면서도 한편으론 경건하고도 엄중한 석가를 능가하는 힘 있는 상징으로 미륵을 떠올렸다. 미륵은 한국의 보통사람들이 염원하는 미래와 희망의 상징이었고, 현실의 질곡과 역사의 공포를 이겨내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었다. ● 도깨비 - 특유의 해학과 재치 상징 거창하게 세상의 운세를 바꿀 미륵을 대망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이 늘 심각했던 것은 아니다. 위력이 넘치고 재주가 많은 초월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한국인의 상상력은 세상을 약간 비켜 볼 수 있는 재치와 여유를 늘 간직하고 있다. 한국인의 신앙적 정서에는 떨리는 두려움과 더불어 친근한 매혹도 함께 있는 것이다. 도깨비가 꼭 그렇다. 변신과 둔갑의 귀재이지만 허깨비로 여겨질 정도의 막힘과 허술함이 남녀노소 누군가에게나 해학 거리로 통한다. 도깨비는 벽사신앙의 상징이면서도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마저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한국인의 상상력의 소박한 유산이다.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에 마냥 조아리지 않고 특유의 해학으로 공포마저 되먹임하는 한국인의 내적인 힘에 감동하게 된다. ● 서낭당 - 성스런 공간의 형상화 한국인의 상상의 힘은 공간으로도 형상화된다. 성스러운 공간 속에서 새로운 삶의 기력을 얻고자 했던 서낭당 신앙과 새로운 신성 공간의 구획인 금줄문화는 공간에 투영된 한국인의 상징이다.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을 모시는 어엿한 공간이나 단출한 신수(神樹)와 소박한 돌무더기의 차림새에서 우리네 조촐한 일상에서 삶의 공간을 정화하고 신성화하려는 종교적 상상력을 자연스레 확인할 수 있다. 금줄도 그렇다. 꺼림과 경계 세움을 통해 공간을 구획하고 갱신시키는 것이 금줄이다. 한낱 새끼줄이 획기적으로 공간의 질을 변형시키는 엄청난 힘을 지니는 것이다. 금줄을 보면서 우리는 성역과 속역을 가름하는, 새끼줄에 얹어진 한국인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유교문화는 그저 동물적인 차원의 보은을 넘어서는 규범으로 효의 가치를 갈고 닦아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유교의 이상사회를 진전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유교는 이상적인 가치를 실현한 삶의 전형으로 선비에 주목하였다. 이른바 공부하는 사람의 이상적인 삶의 표상으로 선비가 숭앙되었던 것은 선비가 자신의 삶을 맑게 하고 또 타인의 삶마저도 정화해낼 만한 가치의 체계를 굳건하게 확립한 주체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의 중심세력이었던 사림들은 독서와 인격수양을 통해 유교의 이념과 가치를 몸에 익히고 강상과 절의에 찬 의리론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려 하였다.‘맹자’가 전하는 대로, 선비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연마하면서도(獨善其身) 자신의 연마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교화하고자 하는(兼善天下) 삶의 목표를 통해 유교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실현하는 전형이다. 이러한 선비정신이야말로 실리적이고도 현실적인 목표에 사로잡힌 조급한 현대교육의 병을 치유하는 동시에, 양심과 도덕의 완성을 추구하는 건전한 지식사회의 모델로 주목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역사에서 무속-불교-유교-서학(가톨릭)-동학(신종교)-기독교(개신교) 등이 종교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충격과 파장을 일으켜 왔건만 우리의 삶의 넓이에 포진하고 삶의 깊이에 도달한 상징으로 주목받은 것은 아직 무속(굿, 서낭당, 도깨비, 금줄), 불교(선, 미륵), 유교(효, 선비, 종묘와 종묘대제) 등의 문화로 국한되고 있다. 후발의 종교문화도 한국인의 상상과 사고의 기반에서 구체적인 현실성을 얻어간다면 우리는 보다 풍부한 민족문화의 상징을 또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최종성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사회·생활상징(중)

    한·중·일 삼국의 문화를 비교할 때 일본은 날(生)문화, 중국은 불(火)문화, 한국은 비빔밥 문화라 할 수 있다. 일본은 날 것을 주로 먹는다. 대표적인 것이 생선회이다. 소나 돼지처럼 네발 달린 동물을 주로 먹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明治)유신 이후라 한다. 중국 음식은 거의가 높은 온도에 순간적으로 데치거나 튀겨 먹는다. 물론 이는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비빔밥- 조선 3대음식중 하나로 멋·맛 듬뿍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일본처럼 날 것을 먹거나 그렇다고 중국처럼 전적으로 튀겨 먹거나 데쳐 먹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특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 음식은 비빔밥처럼 여러 가지를 섞었을 때 본래의 재료와는 다른 독특한 맛을 낸다. 그래서 한국 문화를 비빔밥 문화라 한다. 이 같은 삼국의 문화 차이는 집과 탑들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일본은 날 것을 주로 먹듯이 집들의 재료도 하나같이 나무를 써 집도 깔끔하고 반듯하다. 그래서 탑도 목탑이 주류를 이룬다. 중국의 전통 집들은 거의가 불로 구운 벽돌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탑도 구운 벽돌로 만든 전탑이 주류를 이룬다. 반면 우리나라 집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나무, 돌, 벽돌을 두루 써 탑도 목탑, 석탑, 전탑 등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문화는 한마디로 다양한 문화가 섞인 비빔밥 문화라 할 수 있다. 우리 문화의 특징처럼 비빔밥은 쌀과 달걀, 참기름, 나물, 쇠고기, 김 등 온갖 재료를 넣어 고추장에 비벼 먹는 복합음식이다. 비빔밥의 특징은 간단하게 먹을 수 있으면서도 가격에 비해 영양과 내용물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거기에 특별히 저항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없고 또 저 열량이면서도 맛과 멋의 흥취를 느낄 수가 있어, 기능성 식품 또는 다이어트식품으로도 개발이 가능하다. 비빔밥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주비빔밥이다. 전주비빔밥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탕반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의 하나로 꼽힌다. 그 이유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하에서 생산된 질 좋은 농산물의 사용과 거기에 장맛과 깊은 정성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전주비빔밥에 포함되는 자료는 무려 30여 가지에 이르며, 모두 음양오행에 근거를 두고 오색오미의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후기 고추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음식문화에 혁명을 가져온다. 강렬하고 매운 맛의 고추장은 김치와 함께 한국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고추와 소스는 여러 나라에서 먹지만 고추장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음식이다. 정작 고추를 우리나라에 전한 일본도 먹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도 부족해 매운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먹는다. 맛 중 가장 오래 기억되는 것이 매운맛이라 한다. 그래서 고추장과 김치는 중독성이 강해 한번 맛을 들이면 쉽게 잊지 못한다. 고추장은 강렬한 맛으로 그 자체로도 훌륭한 반찬이 된다. 이를 이용한 비빔밥은 물론 각종 반찬과 국, 찌개, 심지어 떡볶이에 이르기까지 사용범주는 반찬 가지 수 만큼이나 무한하다. ■ 된장 - 식물성 단백질 문화의 정수 김치와 밥처럼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된장이다. 거기에 항암효과까지 있다하여 웰빙 식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마디로 된장은 식물성 단백질문화의 정수이다. 장맛은 그 집안 음식 맛의 척도다. 그래서 ‘광속에서 인심 나고 장독에서 맛 난다.’,‘장맛 보고 딸 준다.’고 했다.‘동의보감’에 의하면 “장은 모든 어육·채소·버섯의 독을 지우고, 또 열상과 화독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된장의 주원료는 콩이다. 우리는 콩으로만 된장을 만드나 일본에서는 콩과 쌀누룩으로 빚는다. 만주어로는 장을 미순이라 하고, 우리는 메주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이를 미소라 부른다. 장은 고구려 때부터 있어와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우리의 장은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의 된장, 미소가 된다. 우리가 즐겨먹는 청국장은 삶은 콩을 짚에 감싸서 온돌 방의 뜨끈한 아랫목에 모셔놓고 발효시킨 ‘즉석된장’이다. 볏짚에 붙어 있는 야생 고초균이 번식하여 실 모양의 끈끈한 점물질을 생성하여 일종의 항생물질이 된다. 장기적으로 먹는 저장식품인 된장과는 달리 즉석된장이지만 그 영양가와 항암효과는 대단하다고 하겠다. ■ 김치 - 한국문화 상징 ‘미래의 식품’ 이제 김치를 빼놓고 한국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김치하면 한국, 한국인하면 김치라 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상징이 되었다. 김치는 배추김치를 비롯해 무김치, 오이김치, 해조류 파김치 등 가지 수가 무려 187종이나 된다. 김치의 독특한 맛과 영양학적 가치가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많은 국내외의 영향학자들에게 ‘미래의 식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더욱이 조류독감이나 다이어트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빠른 속도로 세계인의 음식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김치는 무, 배추, 오이 등을 소금에 절여서 고춧가루, 마늘, 파, 생강, 젓갈 등의 양념을 버무려 담가놓고 먹는 반찬이다. 김치에 있는 고추를 먹으면 ‘캡사이신’이라는 성분에 의해 몸의 많은 에너지를 사용토록 하여 체지방을 분해시킨다. 고춧가루가 범벅인 김치를 오래 먹으면 자연히 다이어트가 된다. 또한 김치는 담근 직후보다도 완전히 익었을 때 비타민이 가장 많이 함유된다고 한다. 그래서 김치는 채소가 나지 않는 겨울철 비타민 A,B,C 등의 공급원으로, 김치에 첨가된 부재료와 함께 다양한 영양성분을 공급해 주는 한마디로 종합 영양식품이라 할 수 있다. 불고기는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자극적이지도 않으면서 맛이 있어 누구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불고기는 일반적으로 고구려 때 고기구이인 맥적(貊炙)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어 역사가 아주 길다.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음식문화는 세계 여러 나라에도 있지만 우리처럼 양념에 저민 고기를 불로 연기를 내며 구워 먹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 삼계탕- 여름철 보양식의 백미 우리나라처럼 음식종류가 다양하고 철에 따라 체질에 따라 달리 먹는 나라도 없다. 여름철의 보양식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삼계탕이다. 삼계탕은 100일쯤 자라 볏이 돋아 제 빛을 띠어갈 무렵에 영계를 잡아 뱃속에 수삼, 마늘, 대추, 찹쌀 등을 넣어 배를 실로 아물려놓고 푹 끓여 먹는다. 삼계탕에는 허한 기를 보충해주는 인삼, 몸속의 혈액을 보족해주는 보혈(補血)식품인 대추, 양(陽)이 허한 것을 보해주는 보양식품인 닭고기 같은 요소들이 음양조화를 이루면서 서로 궁합을 맞춰 몸에 더 좋다. ■ 냉면 - 담백·고상한 민족적 풍미 삼계탕 못지않게 사랑을 받는 것이 냉면과 자장면이다. 냉면은 겨울철에는 이열치열의 음식으로, 여름철에는 그 자체 시원한 국수 맛으로, 가히 사계절음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국수틀로 뽑은 면발을 펄펄 끓는 물에 넣어 삶아 찬물에 바로 씻어내 국수사리를 만든다. 여기에 육수를 부으면 물냉면, 비벼서 먹게 되면 비빔냉면이 된다. 소고기, 돼지고기, 김치, 배, 파, 마늘, 깨소금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 냉면은 뛰어난 맛과 높은 영양가, 고상한 민족적 풍미로 입맛을 돋운다. 국수를 주재료로 한 음식은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도 많지만 냉면처럼 영양가가 복합적이고 담백한 맛을 내는 국수는 많지 않다. 소주와 막걸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술로 대중·서민문화를 상징한다. 소주는 태워서 만든 술이라는 뜻으로 증류방식에 의해 만든 술로서 노주(露酒)·화주(火酒)·한주(汗酒)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시기는 고려 충렬왕 때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일본 원정을 하기 위해 고려 왔을 때 전해졌다고 한다. 소주는 특히 몽골의 주둔지이던 개성, 전진 기지가 있던 안동, 제주도에서부터 소주 제조법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막걸리는 한국에서 개발된 전통술로 빛깔이 뜨물처럼 희고 탁하며, 도수가 낮으며 탁주(濁酒)·농주(農酒)·재주·회주라고도 한다. 고려 때에는 이화주(梨花酒)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배꽃이 필 무렵 누룩을 만든데서 유래되었다. 막걸리는 술밥에다 누룩을 섞어 빚은 술을 오지그릇 위에 #자 모양의 체다리를 걸치고 체로 막 걸러 만들었다. 막걸리라는 이름은 ‘막걸렀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정종수 국립춘천박물관장 협찬: 삼성
  • ‘조선 족보’ 콜로키움 내일 개최

    한림대 한림과학원 한국학연구소(소장 한영우)는 6일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를 초빙,‘조선시대의 족보’를 주제로 19회 콜로키움을 연다. 미야지마 교수는 안동 권씨 가문의 족보를 분석한 ‘양반’이라는 저서를 통해, 상식과 달리 조선후기 양반층은 몰락한 게 아니라 소농층이 편입하면서 대거 확대됐으며 양반층의 몰락은 산업화가 시작된 60년대에나 이뤄졌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 [Book Review] 이땅 풍류주인들 전기적 초상

    16세기 조선의 문인 농암 이현보의 집은 도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분천(汾川) 강가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퇴계 이황이 우리집 산이라고 한 청량산이 바라다 보였다. 그런데 집 앞에 소나무가 하나 있어 시야를 가렸다. 주위 사람들은 소나무를 베라고 했지만 농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소나무가 있는 곳에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청량산을 바라봤다. 인간의 망령된 생각을 막는다는 뜻으로 두망대(杜妄臺)라는 근사한 이름까지 지어 붙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산과 물이 한데 어우러진 조선시대 집이나 누정, 사찰 같은 문화공간에는 하나같이 문학과 예술, 풍류정신이 살아 숨쉰다. 서울대 국문과 이종묵 교수가 10여년에 걸쳐 쓴 ‘조선의 문화공간’(전4권, 휴머니스트 펴냄)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문화공간과 삶에 대한 이야기다.‘태평성세와 그 균열’‘귀거래와 안분’‘나아감과 물러남’‘내가 좋아 사는 삶´ 등 각각의 부제가 암시하듯 조선 문인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한 편의 생생한 서사시 혹은 격조있는 풍경화로 그려낸다. 태평을 구가하던 시절, 도성 안이나 근기(近畿)지방의 명가들은 원림(園林)과 가산(假山)을 경영하며 집안에 산수를 끌어들였다. 태평성세를 누린 대부분의 유명 문인들은 사산 아래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 인왕산 앞뒤에 산 안평대군과 성임은 자신과 벗들의 글로 인왕산을 아름답게 꾸몄고, 백악은 맑은 선비 성수침이 있어 세상에 그 이름을 드리웠다. 또 낙산에는 신광한, 남산에는 김안로가 살면서 글을 지어 그 주인이 됐다. 조선 초기부터 풍광이 아름다운 한강에는 이름난 문인들의 정자가 들어섰다. 한명회의 압구정과 월산대군의 망원정은 시회(詩會) 공간으로 널리 알려졌다. 조선 초기 한강에서 가장 유명한 시회 공간은 단연 박은과 이행이 시를 즐긴 잠두봉. 부귀영화를 맛본 뒤 한강이 좋아 아예 강가에 집을 짓고 산 사람들도 있었다. 양성지와 강희맹이 그들이다. 강호로 물러난 사대부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그들이 그저 농사를 짓고 산 것은 아니다. 호미와 쟁기 대신 붓을 잡고 고향에서의 안분자적하는 삶을 그려냈다. 조선의 문화공간은 아름다운 사람과 글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조선 후기 위항시인 장혼은 “미불자미(美不自美) 인인이창(因人而彰)”이라고 읊었다.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해 드러난다는 뜻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산과 물도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뛰어난 인물을 만나고 또 그들이 남긴 글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인왕산 자락의 옥류동은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장혼이 남긴 아름다운 글이 있기에 당시 눈에 띌 수 있었고 지금도 상상 속에서나마 옥같이 맑은 개울을 그려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이렇듯 빛나는 글로 아름다운 땅의 주인이 됐다. 풍월주인(風月主人)인 셈이다. 진정한 선비라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홍대용은 목천에 자신의 과학정신을 담은 농수각을 세워 새로운 학문을 열고자 했다. 또 박지원은 현감으로 나간 안의에 ‘실학의 집’을 세우고 중국여행에서 깨달은 실학정신을 구현하려 애썼다. 책은 이들을 ‘내가 좋아 사는 삶’이라는 항목에 묶어 다룬다. 우리 옛 조상들은 와유(臥遊), 즉 누워서 유람하며 노니는 것을 즐겼다. 옛 글을 읽으면서 산수유람을 대신한 것이다. 저자는 옛 사람들의 와유처럼 이 책을 읽으며 마음 속에 상상의 정원을 꾸며보라고 권한다.‘그림의 떡’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저자는 조선 후기 대학자 성호 이익의 말을 답으로 들려준다.“마음은 불빛처럼 순식간에 만리를 가므로 사물에 기대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기억의 단서가 없으면 이것이 불가능하다.”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는 선천적 맹인은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권당 2만∼2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상주길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상주길

    경북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를 지난 옛길은 경북 상주시 낙동면으로 들어선다. 낙동은 조선시대 낙동역이 있었던 곳이다. 영남과 호남지역의 세곡이 이 곳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갔다. 지금은 낙동강변에 몇몇 여관과 술집만이 남아 있다. 낙동은 상주의 동쪽을 뜻한다. 따라서 낙동강도 상주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부치당고개 아래의 주막 백두점 낙동마을에서 8㎞쯤 올라가면 부치당고개에 다다른다. 낙동강을 건너 이곳까지 온 길손이 힘이 들어 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치당은 불현이라는 한자에서 나온 말로 절이나 암자가 있어 붙여졌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상주 향토사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절이나 암자는 보이지 않고 고개 휴게소라는 쉼터만 남아 오가는 운전자들을 맞고 있다. 부치당고개를 지나면 백두점 마을이 나온다. 조희열(58) 상주 청리초등학교 교장은 “백두점은 옛날 주막 주인중 한 명이 백발이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이는 한자의 뜻을 그대로 풀이해 놓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부티가 부치, 백두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따라서 백두점은 부치당고개 아래에 있는 주막이라는 뜻이다.”라고 주장했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있었던 병풍산성 옛길은 이곳에서 쉼터 휴게소를 지나 성골고개로 들어선다. 이 고개는 지금 25번 국도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만나는 지점이다. 고개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평평하다. 동쪽으로는 병풍산성이 있는 병풍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식산과 갑장산을 지나 백두대간으로 이어진다. 조선 광해군때 부제학을 지낸 이준이 쓴 ‘상산지’에는 병풍산성에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성골고개를 넘은 옛길은 병풍산 자락 서쪽을 휘감으며 헌신동 ‘서울 나드리길´로 접어든다. 이곳은 말 그대로 조선시대 서울로 가는 나들이길이다. 조 교장은 “지금은 주막도 없고 길도 없어 상주 사람들에겐 이 길이 잊혀진 이름이다. 하지만 구한말 지도(1895년 측량)에는 ‘서울 나드리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IC와 임진왜란때 활약한 매헌 정기룡 장군의 유물이 있는 충의사를 지나면 상주시 낙상동에 위치한 나원마을에 다다른다. 이 마을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김정동(72)씨는 “옛날에는 낙원이나 나은으로 불렸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낙상동으로 마을 이름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은 조선시대 낙원역이 있었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상주목읍지’에는 이 역에 중마 2필, 짐 싣는 말 2필, 역리 111명, 남종 16명, 여종 6명이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다. 마을 뒤 100여m 지점 산기슭에는 제사를 지냈던 마당이 남아 있었으나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면서 없어졌다. ●조형물이 없는 원흥리 솟대 낙상동 뒷산 기슭을 돌아 경북선 백원역 방향으로 가다 보면 중간지점에 넓은 평야지대가 나타난다. 새릿들 즉 원흥들이다. 강경모(55) 상주향교회 사무국장은 “이곳은 삼한시대부터 매년 한두 차례 징병과 재앙을 쫓기 위해 제사를 지낸 소도 지역이다. 제사 도중에는 죄인도 처벌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향나무 두 그루로 세워진 솟대가 있다.”고 말했다. 솟대의 높이는 큰 것은 4.1m, 밑둘레 66㎝이며 작은 것은 높이 3.7m, 밑둘레 48㎝이다. 솟대 앞에 제단으로 석상이 있다. 이곳의 솟대는 다른 곳과는 달리 조형물이 없다. 백원역에서 국도 3호선을 타고 올라가면 연봉정이 나온다. 길손들은 이곳에서 쉬었다가 원터마을로 접어든다. 여기에는 조선시대 행인의 편의를 위해 송원이라는 숙박시설이 있었다. 마을 뒷산에는 고려 전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 관세음보살입상이 있다. 당시 관세음보살상은 대부분 좌불이지만 이 불상은 단독불로 입상이라는 특징이 있다.‘상산지’에는 원터마을 뒤에는 큰 석불이 있고 그 옆에는 샘물이 바위 구멍 사이로 용출한다. 물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줄지 않고 겨울에는 더운 물 여름에는 찬 물이 솟는다고 기록돼 있다. 원터마을에서 솔티고개를 넘은 옛길은 상주시 함창읍 신덕리 용골마을 앞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태봉산 좌측 밑으로 향한다. 강 사무국장은 “태봉은 해발 105.5m의 조그마한 산이다. 조선시대 광해군 원년에 왕자의 태를 봉안하였다.1932년 태실은 도굴을 당해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고 설명했다. 태봉산 좌측에서 이안천을 건너 덕통1리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유곡도 찰방의 지휘를 받던 덕통역이 있었다. 몽골의 침공으로 안동까지 피난했던 공민왕이 전쟁이 끝난 뒤 개성으로 돌아가면서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큰 말 2필, 중 말 2필, 짐 싣는 말 4필과 역리 45명, 여종 11명이 있었다. 고종 건양 원년인 1896년에 폐지되었다. ●군사적 요지인 당교 덕통리에서 옛길은 윤직리 논을 가로질러 상주시 함창읍과 문경시의 경계다리인 당교로 들어간다. 일명 땟다리 또는 때다리라고 부른다. 이곳은 군사 작전상 매우 중요한 곳으로 여겨왔다. 최근 문경시로 편입되면서 진입도로 국도변에 ‘당교 사적비’라는 표석만 세워져 있다. 곽희상(52) 상주시 문화재담당은 “신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함락시킨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를 치려는 속셈으로 당교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그 꾀를 알고 당나라 병사들에게 취하도록 향연을 베풀고 당군을 모두 죽여 묻었다. 그래서 이 곳을 당교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조 교장은 “소정방도 이곳 전투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교 전투 이후 소정방의 행적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당나라 2인자인 소정방이 신라군에 의해 죽은 것이 망신스러워 당이 이를 은폐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당교를 건넌 옛길은 경북선을 가로질러 문경으로 넘어간다. 상주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공갈못의 유래 ‘상주 함창 공갈못에/연밥 따는 저 큰 애기/연밥 줄밥 내 따줄게/요 내 품에 잠들어라/잠들기는 늦잖아도/연밥 따기 한철일세.’ 경북 상주지방에 구전돼 오는 채련요다. 이같이 상주에는 공갈못과 관련된 노래와 전설이 많다. 공갈못은 공검지라고도 알려져 있다. 삼한시대 3대 저수지 가운데 하나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공검이라는 큰 못이 있었는 데 고려 명종 25년(1195년) 상주 사록 최정빈이 축대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못을 축조할 때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고 둑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상산지’에는 공갈못 둑의 길이가 860보이고 못 주위의 길이가 1만 6647척이라고 적혀 있다. 또 못에 물이 차면 수심이 다섯 길이나 되었다고 한다. ‘저승에 가도 공갈못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은 이승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말이 전해 내려올 정도로 공갈못의 풍광은 빼어났다.‘함창읍지’에는 이 못의 서반에는 몇 리에 걸쳐 연꽃이 피어 있으며 마치 중국의 전당호를 방불케 하는 풍취를 지녔다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예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주옥 같은 글을 남겼다. 전설에 의하면 이 못의 얼음 어느 것을 보고 흉년·풍년을 예측하였다고 한다. 또 정월 열나흗날 밤, 소들이 땀을 흘리는데 그것은 밤에 소들이 못의 얼음을 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볶은 콩 서되를 하나씩 먹으면서 말을 타고 못가를 돌아도 콩이 모자란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같이 아름다운 공갈못을 볼 수 없다. 못은 논으로 변했다. 이곳이 공갈못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외롭게 우뚝 서있는 표석과 노래비뿐이다. 이에 따라 상주시는 2010년까지 공갈못을 복원키로 하고 사업을 추진 중이다. 현재 부지매입과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2008년까지 못을 준설할 계획이다. 이 사업에는 모두 48억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상주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박지원의 정자 ‘건곤일초정’ 복원

    충남 당진군은 16일 조선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정조 24년(1800년)에 세웠던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을 복원했다. 건곤일초정은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있을 때 버려졌던 연못을 정비한 뒤 연못 한가운데에 돌을 쌓아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지은 30여㎡ 규모의 6각 정자이다. 인근 향교의 유생들이 찾아와 시를 읊고 학문을 익히는 등 은자의 정취가 있었던 곳이었으나 일제시대에 소멸됐다. 당진군은 지난 1월부터 1억 6000만원을 투입, 연못에 인공섬과 정자를 복원하고 돌다리를 만들었다. 군 관계자는 “조상이 남긴 문화유산이 복원되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일을 마무리짓게 됐다.”며 “인근 면천향교와 더불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당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통합교과형 강화·문제유형 다양화

    통합교과형 강화·문제유형 다양화

    15일 서울대가 발표한 2008학년도 정시모집 논술고사 2차 예시문항은 다양한 형태의 통합교과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교과서를 최대한 활용하고, 필요한 개념과 정보를 모두 준 상태에서 비판적·창의적·합리적인 사고력을 측정하는 문제를 출제해 본고사 논란도 비켜갔다. ●인문계-깊이있는 사고력 측정 인문계의 경우 지문의 난이도는 다소 쉬워졌지만, 보다 깊이 있는 사고를 요구하는 문제가 출제됐다. 문항1에서는 신형 냉장고와 비행기 개발 사업에서 투자할수록 손해가 나는 상황과 새만금 간척사업, 동강댐 건설에서 찬반양론 등 4개의 지문을 제시했다. 선택의 상황에서 어떤 기준으로 가치 판단을 할 것인가를 묻는 문제이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중장기적으로 해석하는 관점도 요구된다.1차 예시문항과 달리 수리 논술은 직접 드러나지 않았으나 논제1은 수리논리적 사고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문항 2에서는 미술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은 같지만, 형태의 표현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펴고 있는 권헌의 ‘묵매기’와 이익의 ‘논화형사’ 중 일부를 지문으로 줬다. 이를 바탕으로 대표적인 진경 산수화인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상상도인 안견의 ‘몽유도원도’사진을 제시한 뒤 차이점을 비교감상하라는 논제가 출제됐다. 문항 3에서는 조선후기와 일제시대 때의 유통과 물자 운송형태의 변화에 대한 지문과 함께 경부선 철도 구간이 표시된 김정호의 ‘동여도’ 남한강 부분을 자료로 줬다. 조선 후기의 조세금납화나 행정구역 개편, 일제에 의한 수탈 등 역사적·지리적 지식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문제이다. 문항 4에서는 인간의 고민을 표현한 문학작품들을 지문으로 주고 그에 대한 본인의 가치관을 묻는 논제가 출제됐다.6700여자에 이르는 제시문을 300자로 요약하라는 문제도 나왔다. ●자연계-과학적 기본원리 설명요구 자연계 논술은 과학적 기본 원리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현상을 설명하도록 요구하는 문제가 주를 이뤘다. 문항 1은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쌍곡선과 포물선의 기본 개념에 대한 지문을 주고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하라고 했다. 지문에서는 아르키메데스가 포에니 전쟁에서 포물면 거울로 햇빛을 모아 나무배에 불을 질렀다는 일화를 소개, 학생들이 보다 쉽게 접근하게 했다. 문항2에서는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된 미적분법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구체적으로 미적분이 움직이는 것의 구조를 밝히는 데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물었다. 문항3에서는 자기 자신에 비례해 증가 혹은 감소하는 지수와 로그의 개념을 주고 이를 신체 감각기관과 연관시켜 설명하라는 논제가 나왔다. 문항4는 사람과 자동차의 에너지 변환과정을 설명하고, 이를 다이어트와 연관시켰다. 운동에너지로 변환되지 않은 에너지가 자동차에서는 모두 열로 방출되지만, 생물체에서는 다른 형태로 변환되는 차이점을 이해하고 있는지 물었다. 문항5에서는 달팽이관에 있는 유모세포의 길이에 따라 감지할 수 있는 파장의 소리가 다르다는 점을 그림과 함께 설명해주고, 코끼리와 쥐, 사람이 감지하는 주파수의 소리가 다른 이유를 물었다. 생물체가 소리의 물리적 특성을 어떻게 인지, 구별해 내는지에 대한 이해도를 측정하기 위한 논제이다. 입학관리본부 김경범 연구위원은 “학생들이 입시 준비를 할 때 교과서를 중심으로 그 내용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를 해보고 독서를 통해 도움을 받으면 풀 수 있는 수준의 문제들”이라고 설명했다. ●교과서 지문활용이 특징 한편 입시전문가들은 서울대의 2차 논술 예시문항에 대해 교과 전반을 아우르는 문제가 많고 창의적 문제해결력을 필요로 하는 문제도 많았다고 지적했다. 종로학원 김용근 이사는 “인문계열의 경우,1차 예시문항에서는 언어적 사고력과 수리적 사고력을 ‘통합’하는 방식이었으나 이번에는 사회, 역사, 예술, 문학 등 문과 교과 내의 ‘통합’으로 변한 것과 고등학교 교과서 지문과 주제를 적극 활용한 것이 눈에 띈다.”고 평가했다. 이밖에 그림자료가 지문으로 나오는 등 언어 독해뿐 아니라 다양한 자료에 대한 해석능력을 통해 사고력을 평가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이에 따라 입시전문가들은 여러 영역의 사회문제를 다양한 방식의 텍스트와 연관하여 이해하는 연습을 할 것을 권고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51회 현충일-현충원 나팔수의 하루

    51회 현충일-현충원 나팔수의 하루

    회색도시 서울 한 가운데 43만평의 조용한 숲속에 자리한 국립현충원. 일반인들에겐 현충일에나 북적거리는 별 존재감이 없는 곳이지만 전당대회나 선거같은 굵직한 이벤트를 앞둔 정치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김지훈 일병은 국립현충원 군악대 소속 트럼펫 연주자다. 김일병의 부대는 양악대, 국악대(취타대), 팡파르대가 하나의 대대로 이루어져 현충원내에 주둔을 하고 있다. 바깥에서 ‘손님’들이 오면 부대 막사에 대기하고 있던 그는 정복차림으로 현충탑 앞으로 달려가서 진혼나팔을 분다.“연주는 셋이서 하는데 한 명이 솔(낮은 솔)-미-도 하고 연주하면 다른 두명이 같은 선율을 돌림노래로 따라 합니다.” 헌화. 분향행사 외에 각종 국빈행사등에서 활약을 하는 김일병의 일과는 아침 6시 기상나팔로 시작된다. 오전에 그날의 행사지침을 받으면 하루의 대부분을 연습과 대기로 보낸다.“연못과 산책로가 아름다운 현충원이 바로 옆에 있어도 나들이를 못합니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행사 출동을 나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생이 큰 만큼 보람도 크단다.“국가와 국민이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국내최고의 군악대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뿌듯함뿐만이 아니라 도서벽지에서 찾아온 어린이들에게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청와대, 전쟁기념관등의 외부행사를 마친 금요일 오후, 김 일병은 오랜만에 현충원 산책을 나섰다. 현충일을 앞두고 국립묘지는 공원으로 탈바꿈한다. 도시락을 먹고있는 유치원생들, 먼저간 전우를 그리워 하며 군가를 부르는이, 장군묘역 주변에 만개한 장미꽃 향기를 맡으며 데이트 하는 청춘 남녀... 그들을 바라보던 김 일병은 문득 자신에게 비치는 따사로운 오후 햇살의 느낌에 감사한다. 또한 이 느낌은 호국영령이 있었기에 가능한것임을 깨닫는다. 현충원에는 6.25전쟁에서 산화한 수많은 영령들의 묘역이 있다. 하지만 50년 세월이 흘러 현재는 발길이 뜸해진 쓸쓸한 모습이다. 그래서 현충원에서는 ‘한사람 한송이 헌화운동’을 하고 있다. 전사자 묘역을 뒤로 한 김일병은 현충원 끝자락에 있는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발걸음을 옮긴다. 조선후기 재상으로 유명했던 오성과 한음이 소년시절 머물면서 공부했다는 유래가 있는 곳이다. 김일병은 호국영령들께 묵념을 올리고 기도한다. 그리고 이내 트럼펫을 분다.“항상 낭만으로, 싱그러운 향기로, 그리고 정성을 다해 치장한 모습으로 저를 보살피듯이 이 나라도 살펴 주소서” ‘현충원 나팔수’의 진혼곡에 지장사 용마루로 날이 저문다. 글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 대웅전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 대웅전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서울 종로구 견지동 45번지) 대웅전. 일제치하 불교 총본산으로 세워져 지금은 조계종 직할교구본사 본당의 위상을 갖는 건물이다. 조선시대 억불숭유책에 따라 막혀 있던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용되면서 불교계의 중지를 모아 건립된 불당으로, 단일 목조건물론 국내 최대 규모. 조선후기 전통사찰 불전과 궁궐 양식이 혼합된 대웅전에는 일제에 시달렸던 우리 민족의 한과 암울했던 시절 불교중흥을 위한 불교계의 염원이 함께 서려 있다. ‘4방에 계단을 둔 단층 석조 기단위 정면 7칸, 측면 4칸의 평면에 외부 22개의 평주, 내부 12개의 고주를 세워 다포계 단층 팔작지붕을 얹은 155.7평 규모의 남향 불전.’ 조계사 대웅전 앞에 서면 법당은 물론, 기단과 공포(拱包, 처마 끝을 받치는 기둥머리에 맞추어댄 나무쪽)의 크기에 압도당한다. 조선후기 불교 건축양식에 충실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며 조선왕조의 궁전보다 더 장대하고 화려한 외양을 갖추고 있다. 우선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기단. 높이가 160㎝에 이르는 단층 석조인데 경복궁 근정전을 포함해 어느 궁전의 기단보다도 높다. 다음은 공포. 외부 5출목, 내부 7출목으로 짠 다포계로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덕수궁 중화전 등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궁전보다 안팎으로 2출목씩이나 더 많을 만큼 장중하다. 대웅전 천장 높이는 자그마치 8.5m. 대웅전 디자인을 비롯해 곳곳에 스며있는 궁궐 양식도 눈길을 끈다. 외벽 큰 기둥을 받친 장초석은 경복궁 집옥재(1873년)의 것과 비슷하며 기단 전면에 일렬로 배치한 석조 동물상 중 해태상도 궁정에서만 볼 수 있는 전통이다. 불전에 궁궐양식을 쓴 것은 당시 불교계가 얼마만큼 이 건물을 중시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웅전 건립을 맡았던 도편수와 부편수는 모두 궁궐 재건공사를 지휘했던 인물들이다. 특히 도편수 최원식은 1920년대 창덕궁 대조전 재건 공사를 총지휘한 도편수로 대웅전 건립을 위해 경복궁과 덕수궁을 여러 차례 시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설계 담당이며 관리직들은 모두 이왕직(李王職) 영선과 소속 일본인으로 돼 있었으나 사실상 대웅전 건립은 모두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불상을 모신 불단도 폭 14.57m, 높이 2.3m의 초대형. 지난 2004년부터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하면서 강원도 홍송으로 교체했다. 불단 크기에 비해 불상은 왜소한 편. 불전 건립때 도갑사의 것을 개금해 모신 것인데 오는 10월쯤 대웅전 동편에 들어서는 영산전으로 옮겨지며 대신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등 17자 크기의 대형 삼존불이 봉안된다. 석가불좌상 뒤편, 즉 후불벽에는 1978년 새로 봉안된 천불도와 목각탱이 걸려 있다. 대웅전 정면은 전혀 벽이 없이 모두 장엄한 꽃판문과 꽃판창으로 처리했는데 벽 안쪽에는 천부중·신중, 바깥쪽에는 최근에 그려진 불전도가 장엄되어 있다. 바닥은 원래 다다미가 깔려 있었으나 최근 불단과 함께 강원도 홍송으로 바꿨다. 그런데 조계사의 원래 이름이 ‘태고사’였고 대웅전도 증산도 원류인 민족종교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十一殿)’을 옮겨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먼저 태고사는 일제하에서 한국불교를 지켜내려는 당시 불교계의 눈물겨운 노력이 담긴 이름. 일제의 민족말살책에서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가 불교계를 통제하려는 사찰령을 시행한 데 이어 본격적으로 칼을 들이댄 게 바로 총본산 건립이다. 식민지 시절인 만큼 불교계의 통일기관인 총본산 설치에 총독부의 입김이 작용했을 터이지만 나름대로 한국불교의 맥을 지키기 위해 불교계가 뭉쳤다.1935년 8월 전국 31본산주지회의 이후 ‘조선불교선교양종종무원’이란 대표기관을 설치한 데 이어 한국불교 1번지의 위상을 갖는 사찰을 세운다는 원칙아래 인근 각황사 교당 개축에 뜻을 모은 것이다. 각황사는 지금의 조계사 옆 수송공원에 있던 한국 최초의 불교 포교당. 이 각황사를 헐어 지금 조계사 자리로 이전한다는 것이었는데 새로 대웅전을 건립하고도 그 명칭을 확정짓지 못하다가 고심끝에 한국불교의 법통을 태고 보우에서 찾는다는 뜻에서 삼각산(현 북한산)의 태고사로 정해 총독부에 신청한 것이다. 태고사는 전국승려대회 이후 소유권 다툼이 법정으로 비화한 끝에 1975년 6월에야 명칭이 조계사로 변경되었다. 그러면 왜 하필 보천교 십일전을 옮겨왔을까. 아무래도 당시 신도가 12만명에 불과했던 불교계 형편상 기존 건물을 옮겨짓는 것이 비용절감에 긴요했고 무엇보다 보천교가 일제에 강하게 맞서 일제에게도 위협적인 종교란 점에 착안했던 것 같다. 조계사 대웅전은 단순히 불교의 한 가람에 머물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천교는 한때 신도가 200만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컸다.1928년 당시 전북 정읍의 보천교 본소는 2만평 부지에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 내장사 대웅전 같은 건축물이 45채나 들어섰을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특히 십일전은 일제가 남산에 설치한 조선신궁(神社)에 대응해 지은 건물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주 차경석이 사망한 뒤 일제는 대대적인 보천교 말살에 나서 결국 십일전을 강제로 헐값(1만 2000원, 당시 쌀 한 가마 값은 5원30전)에 사들였는데 불교계가 이것을 매입해 옮긴 것이다. 대웅전 기둥과 대들보는 십일전의 것을 그대로 옮겨 세웠으며 형태도 사실상 십일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계사 대웅전이 낙성된 것은 1938년 10월25일. 건립엔 총 17만원이 소요됐으며 기술자는 목공 7000명, 와공(瓦工) 200명을 포함해 6500명, 인부는 6만 5000명이 동원됐다. 당시 만해 한용운은 ‘총본산건설의 재인식’(1938년 ‘불교’ 신제17집)이란 글에서 대웅전의 규모를 말하면서 “만일 이 건물을 신축하자면 최소한도 100만원은 초과치 아니하면 안 되겠다고 하니 얼마나 훌륭한 집인가.”라고 적고 있다. 그야말로 19∼20세기를 통틀어 한국 최대의 건축불사(佛事)였던 셈이다. 조계사는 지난 2004년부터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하면서 “전통사찰 양식에 충실한다.”는 원칙을 세워 기둥과 지붕 등 기본 골격과 구조물은 변형하지 않기로 했으나 실제로는 많은 부분이 바뀌어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고 있다. 우선 천장을 민반자로 완전히 바꾸면서 천장에 있던 그림들이 모두 철거됐고 자개 장식의 불단도 완전히 바뀌었는가 하면 새로 봉안될 3존불 위에 전통양식의 닫집을 설치하면서 기존의 장식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이강근(48) 경주대 교수(미술사학)는 “전통사찰 양식도 중요하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 문화재의 구조물들을 교체하는 것은 역사인식의 결여를 보여주는 큰 오류”라고 말한다. 이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시작으로 4년 안에 조계사에는 종각과 보제루·영산전이 새로 들어서 환골탈태하게 된다. 경내에 있는 여관 현대장도 헐려 그 자리에 24시간 개방형 시민선방이 세워진다. 조계사 주지 원담(48) 스님은 “조계사는 서울 중심에 위치한 대표적인 신중도량으로 한국불교의 견인차 역할을 계속 하게 될 것”이라며 “그러나 한국불교 1번지의 위상에 맞지 않게 사찰 형태가 초라하고 급하게 지은 대웅전도 전통 사찰양식에서 비켜난 부분이 많아 해체보수를 통해 한국불교 고유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kimus@seoul.co.kr
  • “원효는 반전주의자였죠”

    “원효는 반전주의자였죠”

    “일연의 ‘삼국유사’도, 춘원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도 원효를 무책임하게 오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원효의 삶과 사상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소설가 한승원(67)이 부처님오신날(5월5일)을 즈음해 한국 불교의 큰 스승, 원효의 일대기를 그린 전작 장편소설 ‘소설 원효’(전 3권, 비채)를 펴냈다.3년 전, 조선후기 선승이자 한국 차의 중시조인 초의선사를 다룬 책을 출간한 바 있는 작가는 “‘초의’보다 먼저 구상한 작품인데 공부가 부족한 탓에 이제야 집필을 끝내게 됐다.”고 말했다. 원효는 신라시대 불교 대중화와 불교사상 융합에 힘쓴 정토교의 선구자로 한국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화왕계’의 저자인 설총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원효는 불안정한 시국에 여자 생각이 동해 과부 요석공주와 동침한 파렴치한 승려입니다. 또 이광수는 원효가 도술로 도적을 제압하고, 신라 젊은이들에게 삼국통일 전쟁에 기꺼이 몸을 던지라고 부르짖었다고 썼습니다.” 원효의 저서는 물론 수많은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원효의 행적을 좇아 경산 불등마을과 경주 남산 등을 수차례 취재한 결과를 근거로 작가는 이들 기록에 강한 반론을 제기한다. 반전주의자였던 원효를 제거하기 위해 신라 집권자들이 그를 파렴치한 승려로 몰았으며,2차 세계대전 중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광수의 소설도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에 참여하도록 충동질하는 데 원효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원효는 반전주의자이자 세계주의자였고, 일심(一心)·화쟁(和諍)·무애(無碍)를 실천한 ‘불국토주의자’였다.”면서 “분단의 아픈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이 나라를 분단되게 한 강대국이 치르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군대를 파견하는 현 상황을 돌아보게 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소설 원효’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를 한자의 뜻말과 이두를 섞어 쓴 ‘삼국유사’의 표기를 따르지 않고 뜻을 그대로 한글로 표기했다. 이를테면 김춘추의 큰딸 ‘고타소(古陀昭)’는 ‘예삐’로, 원효의 할아버지 ‘적대공(赤大公)’은 ‘불커’로 썼다.“예전에 국어교사 시험 준비할 때 공부했던 걸 활용해봤다.”며 웃었다.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우리 전통과학 뒤집어보기

    서양의 근대과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과학을 연구하고 생활화했을까. 혹자는 우리 전통과학의 역사에서 과연 ‘과학’이라 할 만한 것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에선 과학적인 것으로 칭송받는 우리의 몇몇 유물들도 따지고 보면 값싼 국수주의의 산물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 과학 유물들의 과학성이 서구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진다는 얘기다. 서울대 국사학과 문중양 교수는 이런 자기비하적인 의구심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서구식 잣대로 우리 과학을 재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펴낸 ‘우리 역사 과학기행’(도서출판 동아시아)은 서양 근대과학과는 사뭇 다른 패러다임의 우리 전통과학 세계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우리 전통과학을 그것이 처한 특정한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복원한다. 고대 신라인들의 하늘에 대한 관념은 우리와 어떻게 달랐는지, 조선 건국을 주도한 사대부들이 어떤 의도로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천문도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세계지도를 국책사업으로 만들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저자의 표현대로 “그들의 세계관 속에 푹 빠져 봐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첨성대, 석불사 석굴, 훈민정음, 앙부일구, 금속활자, 거북선, 수표교, 혼천시계, 천하도 등 열여덟 가지 주제를 정해 각 유물에 담긴 의미를 짚어간다. 저자에 따르면 첨성대는 단순한 천문대가 아니다. 첨성대의 기능에 관해 처음으로 언급한 문헌은 15세기말 ‘신증동국여지승람’. 여기에 이후천문(以候天文) 즉 ‘천문을 물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외형상 전혀 천문대일 것 같지 않은 첨성대가 천문대로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역사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 역사 기록은 첨성대가 근대적인 의미에서 ‘천문을 관측’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천문에 대해 묻던’ 구조물임을 분명히 한다. 천문을 묻는 행위는 단지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일 뿐만 아니라 풍년을 기원하고 천변재이로부터 무사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활동까지 포함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첨성대는 1500년전 신라인들의 염원을 담은 상징적 조형물 또는 그 염원을 풀기 위한 일종의 제단이었다는 설이 힘을 얻게 된다. 임진왜란의 일등 공신은 거북선이 아니다(?). 우리에게 거북선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러나 ‘거북선 신화’에만 빠져 있을 뿐 정작 그 거북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어떻게 싸웠는가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의 수군은 이미 판옥선이라는 우수한 군함과 막강한 화력의 화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거북선은 그 가공할 위력의 판옥선에 덮개를 씌워 ‘돌격용’ 군함으로 조금 개량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거북선은 뚜껑이 덮인 밀폐된 구조였기 때문에 기동성과 전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돌격선으로서 적의 예봉을 꺾는 임무를 수행했을 뿐 조선 수군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판옥선이었다. 임진왜란 동안 거북선이 단지 3∼4척밖에 만들어지지 않은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는 것. 요컨대 이순신 장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거북선이 아니라 조선 수군의 대형 화포와 1555년에 개발한 판옥선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신비스럽고 미신적이기까지 한 원형 천하도(天下圖)를 통해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들여다보는가 하면, 서양 천문도와 전통 천문도를 단순히 혼합한 것에 불과한 혼천전도(渾天全圖)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기도 한다.17세기 이후 그려진 조선의 이 ‘황당무계한’ 천하도가 비록 객관적인 지리정보를 전해주진 않지만, 그런 천하도의 등장 자체가 유가의 정통적 세계인식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지적이다. 이학박사 출신의 사학자라는 독특한 지적 배경을 갖고 있는 저자가 내리는 과학유물에 대한 평가는 일견 낯설고 거북스럽게 비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전통과학의 패러다임이 서구 과학의 그것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전제 아래 우리 과학문화를 평가하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은 적극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과학문화유산에 대한 어설픈 지적 분장(扮裝)이 아니기 때문이다.1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575)-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1)

    儒林(575)-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1)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1) 그러나 자리만을 놓고 보면 율곡은 가장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응시한 셈이었다. 왜냐하면 율곡의 자리는 과장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으로 현제판까지 다가가 다른 유생들이 다 보고난 뒤에야 시험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또한 답안지를 다 작성한 후에도 가장 늦게 시험지를 제출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답안지를 빨리 내는 것은 조정(早呈)이라 하였는데, 조선후기의 과거관련 사료를 보면 이 조정의 폐단을 수없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왜 거자들은 답안지를 한결같이 빨리 내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모든 과거시험이 주관식이었고, 주관식 답안지는 다 읽어보기 전에는 평가할 수 없으며, 또 채점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기 잡가인 ‘한양가(漢陽歌)’에는 남보다 빨리 시험지를 제출하고 제출한 답안지를 한데 묶어 채점하는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 장 들고 두 장 들어 차차로 들어간다 백 장이 넘어서는 일시에 들어오니 신기전(神機箭) 모양이요, 백설(白雪)이 분분하다 수권수(收卷數) 몇 장인고 언덕 같이 뫼 같구나 사알 사약 무감 별감 정원사령 위장군이 열 장씩 작축(作軸)하여 전자관(塡字官) 전자(塡字)하고 주문(主文) 명관(命官) 시관(試官) 앞에 수없이 갖다 놓네 차례로 꼰을 적에 비점(批點) 치고 관별(貫別)한다 그 외의 낙고지(落考紙)는 짐짐이 져서 낸다.” ‘한양가’에 나오듯 ‘언덕 같고 뫼 같은’ 엄청난 양의 시험답안지를 꼼꼼히 읽어보고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채점관의 눈에 들고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남보다 빨리 납권(納卷)하는 것이 상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시험장을 ‘시위’라 하고, 시험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을 ‘납권’이라 하였는데, 과거시험장 안에서 ‘시위납권’할 때의 유생들은 평소의 안정된 걸음걸이는 찾아볼 수 없고 조금이라도 남보다 빨리 내기 위해서 경솔하고 천박하게 미친 말 같이 날뛰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유생들이 선접꾼을 고용해서 현제판에서 가까운 자리를 선점하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특히 알성시(謁聖試)의 경우에는 한층 더 심하였다. ‘알성시’는 임금이 성균관의 명륜당 앞뜰에서 직접 보는 부정기적인 과거시험으로 창덕궁의 춘당대(春塘臺)에서 보는 전시(殿試)와 더불어 임금이 직접 친림(親臨)하는 특별 시험이었다. 원래 ‘알성시’란 임금이 성균관을 찾아 문묘에 술잔을 올리고 공자를 비롯한 성인들에게 배알(拜謁)을 하는 ‘알성’의식을 치를 때 그 기회를 이용해서 왕이 직접 참가하는 과거시험이었던 것이다. 그 후 나라의 큰 경사가 겹쳤을 때 시행하는 증광시(增廣試). 심지어는 왕이 온천목욕을 갔을 때 그곳 현지에서 치르거나 정조의 경우 화성 행궁에서 치른 외방별시(外方別試) 등 인재등용이란 과거 본래의 목적보다는 외방유생들에게도 국경(國慶)의 기쁨을 나누어 주고 변방에 있는 유생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서 거행됐던 별시였던 것이다.
  • 분당 토지박물관 ‘명품 유물’ 전시

    분당 토지박물관 ‘명품 유물’ 전시

    ‘삼국시대 순금불상에서 고려시대 청동향완, 조선시대 물가정보자료까지.’ 최근 리모델링작업을 마치고 재개관한 경기도 분당 토지박물관(관장 조유전)에서 볼 수 있는 희귀한 유물들이다. 고문서와 생활유물이 어우러진 복합전시관으로 변모함으로써 국토개발의 역사는 물론, 사회·경제·문화 등 각 시대상을 이해하기 쉽게 꾸몄다. 특히 상당수 명품 유물들이 수장고를 탈출, 모습을 드러내 감상의 즐거움을 더한다. 가장 눈에 띄는 유물은 조선시대 물가정보가 자세히 기록된 일기책인 ‘심원권일기’. 울산에 살았던 중인 신분의 심원권이 1870년부터 1933년까지 무려 64년에 걸쳐 농업, 천문, 기상, 땅값, 쌀값 등 생업경제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을 일기로 기록했다. 특히 15일마다 한번씩 시장에 나가 보고 들은 물가가 모두 기록돼 조선후기에서 식민지시대까지 계량경제사 연구를 위한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재산분배 풍습이 담긴 고문서인 ‘만력15년명(1587년) 분재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조선전기 아들·딸 구별없이 모든 자녀에게 재산을 공평하게 나눠준 균분상속 전통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희귀한 고문서들의 전진배치와 함께 나무로 만든 피리와 거문고, 박 등 악기와 말, 노새,18점에 이르는 인물상으로 구성된 고려시대 ‘목제명기’도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현존하는 고려시대 향완 중 가장 큰 규모로 확인된 ‘청동은입사향완’이 수장고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와 함께 삼국시대 희귀한 순금불상인 ‘금제여래입상’과 통일신라시대 ‘보상화문전’, 조선초기 백자인 ‘백자철화상감연화문소병’ 등도 새롭게 볼 수 있다. 1997년 한국토지공사 산하로 개관한 토지박물관은 2만 5000여점에 달하는 토지관련 자료를 수집, 소장하고 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행정도시 ‘200년 고문서’ 첫 기증

    행정도시 ‘200년 고문서’ 첫 기증

    행정중심복합도시(이하 행복도시) 건설 예정지역인 충청남도 연기군 금난면 반곡리에 거주해온 여양(驪陽) 진씨(陳氏) 집안에 200여년간 전해 내려온 고서 및 문서 450점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됐다. 특히 이들 고문서는 지역 환경사 및 상장례 등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지역 풍속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될 전망이다. 행복도시 예정지역 33개 마을을 대상으로 의식주·세시풍속·의례 등 현지 민속조사를 벌여온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홍남)은 행복도시 예정지에 포함된 반곡리 마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여양 진씨 후손인 진병갑(73)·진병돈(57) 형제로부터 고문서 135건 450점 일체를 넘겨받았다고 20일 밝혔다. 행복도시 예정지에서 유물 기증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지역 식수조림 등 환경정비 과정을 담은 ‘반곡식목서’.200여년 전 특유의 식물집단이 파괴된 사실을 비롯, 환경보호지역과 대상, 나무를 잘랐을 때 받는 징벌 등도 자세히 담겨 있다. 지역의 상장례에 관한 다양한 내용도 고문서 여기저기에서 확인된다. 가문의 안장(安葬)과 관련된 풍수문서인 ‘장택지’30여점과 이장을 위한 매지문서도 다수 기증됐다. 장택지에는 당시 장례를 치를 때 풍수뿐 아니라 장지의 위치와 날짜·시간 등이 기록됐고, 하관을 직접 보면 안되는 자손들의 간지 등도 적혀 있다. 묘 위치와 시간, 사람관계 등이 조선후기 장례문화의 중요한 요소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반곡리 화산 아래 지은 정자인 ‘일행정’에 대한 기록을 담은 ‘일행정기’와 ‘중수일행정기’, 문중 묘실의 유래를 담은 ‘불목동여양진씨묘실신건기’, 조상의 지역사회 활동 등을 담은 문집인 ‘위정집’과 ‘위정집략초’,‘화잠소창’ 등도 기증됐다. 김시덕 학예연구관은 “행복도시 내 유물을 수집하려는 골동품상의 손에 넘어갔다면 흩어졌을 법한 가문의 유물 일체를 기증받아 한 세트로 연구, 보존할 수 있어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김홍남 관장은 “행복도시 민속조사 결과, 훼손·멸실 위기의 문화유산을 보존할 수 있는 ‘생태박물관’ 건립이 시급하다.”면서 “생태박물관이 세워지면 기증받은 유물들도 그곳으로 옮겨져 고스란히 보존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진씨 형제는 21일 반곡리 진병갑 5대조 선영에서 조상이 물려준 유물을 잘 보존하기 위해 기증한 연유를 조상에 알리는 고유제를 지낸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32)선비들의 차 문화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32)선비들의 차 문화

    살랑거리는 바람에 온기가 실려 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깨어나는 햇살이 마치 솜털구름처럼 포근하다. 흐르는 물은 굳게 닫혔던 문을 활짝 열어젖히듯 포효하며 콸콸 흐른다. 어디선가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묵은 장작을 켜켜이 쌓아놓은 뒷간인가, 엊그제 하얀 명주수건으로 곱게 닦아놓은 차솥에서인가, 아니면 자우홍련사 작은 연못에서인가, 그렇다. 살아 있는 것들이 환희롭게 깨어나는 소리다. 바람과 햇볕과 물을 어미의 자궁으로 삼아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하는 것 역시 기쁨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존재로도 고귀한 것이고 축복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온 우주와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은 소중한 존재다.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굳었던 대지의 가슴에 불을 놓고 북으로 북으로 향하는 바람처럼, 그 어느 곳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골고루 내리쬐는 햇살처럼 자신을 환희롭게 행복하게 바라봐야 한다. 차의 살림살이 역시 마찬가지다. 간장종지보다 더 작은 찻그릇 속에서 우리는 온 우주를 담아내는 자신의 살림살이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같은 살림살이를 살아온 분들이 바로 한 잔의 차에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의 큰 도를 담아온 선비들이다. 이른바 군자다도이다. 선비다도의 핵심은 바로 수신과 수양의 길이다. 이색의 시 한구절은 그같은 선비다도의 핵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작은 병에 샘물을 길어/깨어진 노구솥에 노아차를 달이네/귓바퀴가 갑자기 밝아지고/코로는 차향을 맡네/별안간 눈에 가린 편견이 없어지니/밖으로 보이는 데는 티끌이 없구나/혀로 맛본 후 목으로 내려가니/살과 뼈가 똑발라 비뚤어짐이 없도다/마음은 한 뙈기 좁은 밭/밝고 깨끗하니 생각에 그릇됨이 없네/어느 겨를에 천하 다스리는 일에 생각이 미치겠는가/군자는 마땅히 집안을 바르게 해야 하리.” 선비들의 차 생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시다. 차를 끓이기 위해 손수 물을 뜨고 귀한 노아차를 달여 먹으며 밝고 깨끗하고 그릇됨이 없는 삶을 생각하는 선비들의 차 문화는 수신과 제가, 치국의 근본을 담아내는 또하나의 문화적 그릇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을 공부한 선비의 개념은 지식인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알고 출발해야 한다. 유교문화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감 속에 깃든 고리타분하고 현상유지적인 것이 아닌, 학식과 인품을 갖춘 지식인을 선비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비는 당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식인 그룹이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선비문화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알려져 있다. 백제·신라도 건국 초기에 선진적인 사상과 문화 중 하나였던 유교를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선비문화는 우리 문화의 삶과 철학을 지탱해온 기둥 중 하나였다. 선비들의 차문화가 절정을 이뤘던 때는 고려 300년간 쯤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선비문화의 발판이 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무신란이다. 무신란을 지켜본 선비들은 도성을 떠나 산과 물이 좋은 곳을 찾아 은거하며 차 생활을 즐기게 된다. 무신란은 고려시대 선비 차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왕실과 귀족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던 화려한 차문화는 쇠퇴하게 되고 은거에 들어간 선비들을 중심으로한 차문화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변화는 음다 풍속에서부터 시작됐다. 귀한 단차를 갈아 말차를 마시던 음다 풍속에서 만들기 쉬운 잎차를 즐기게 된다. 그에 따라 다구도 변화를 했다. 유차를 담는 고급 찻그릇인 ‘다구’보다 맑은 탕차도 겸해서 담을 수 있는 ‘다완’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지배그룹으로부터의 소외는 물적 토대로부터의 소외로 이어졌고 당시 수입해 공유했던 값비싼 단차를 맛볼 수 없었다. 은거에 들어간 선비들은 우리나라에서 손쉽게 제조하고 구할 수 있는 아차(芽茶) 즉, 잎차를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잎차의 선호는 그에 따라 다구의 변화도 함께 가져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시대 차인들은 좋은 찻자리에 초대받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다석(茶席)’‘다연(茶筵)’‘명석(茗席)’‘명연(茗筵)’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찻자리는 초대장을 미리 받아야 했으며 손님의 자격에 따라 앉는 자리도 달라졌다. 당시 찻자리의 손님 자격으로는 ‘청덕과 영명, 즉 명예를 갖춘 사람’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유교적 규범에 따라 다례에도 철저하게 규범과 절도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 찻자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바로 ‘다담(茶談)’이었다.‘다담’이란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로 당시 사상적·철학적·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지식 기량과 수양 깊이를 나눠보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찻자리는 자격과 규범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선비다도를 대표한 차인은 이색이다. 성균관 대사성·대제학 등을 지낸 이색은 차를 전문적으로 구해오는 ‘가동(家童)’과, 전다하는 전문 노비가 있었을 정도로 차의 명인이었다. 차의 불꽃을 잘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차를 끓이는 법을 공부하며 연구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색은 ‘다종(茶鐘)’‘화자’(꽃무늬 오지찻잔),‘노아’‘영아’‘다탑’(차마시는 평상)등 차 용어도 만들어 전파시켰다. 이색은 육우의 ‘다경´ 속 시들을 섭렵하며 차 문화 공부도 했다. 이색의 차생활은 당시 고려시대 선비차인들의 보편적인 차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좋은 찻자리에 초대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차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했으며 그에 따른 지식적 기반도 축적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선비들의 차생활은 훗날 조선시대를 건국하는 이념적·물적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역사적 아이러니다. 선비들은 차의 청덕(淸德) 정신을 매우 애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 나무를 사람을 맑게 하는 청인수(淸人樹)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헌공하는 차를 청공이라 부를 정도로 차의 청덕을 중요시했다. 차의 청덕은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지향했던 선비들의 삶의 문화와 잘 부합되었다. 서거정은 그같은 삶을 실천한 대표적인 선비다인이다. 대사헌을 두번이나 역임하고 육조판서를 두루 지낸후 6대에 걸쳐 임금을 모시며 45년간 공직에 머문 서거정은 지붕에 구멍이 난 초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선비 다인 중 차끓이는 일과 차 맛내기에 달인으로 불리는 서거정은 70편이 넘는 다시를 남길 정도로 깊은 차생활을 영위했다. 청빈한 공직자의 초상으로 불리는 청백한 삶을 산 서거정은 “비와 바람은 이미 지붕을 뚫었고/시와 글씨는 부질없이 집에 가득하네/조용히 가는 글씨를 쓰고/한가롭게 게 눈차를 끓인다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비와 바람을 피할 수도 없는 구멍뚫린 초가집에 살며 다리 부러진 쇠솥과 금 간 찻잔을 쓰며 청빈한 삶을 산 서거정 모습은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때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행복과 차생활이 어디에 있음을 일깨운다. 참으로 멋스럽고 멋스러운 삶속에 자신의 삶을 최고로 극대화시킨 차인 서거정의 삶은 아련한 아픔과 경탄스러움을 던져준다. 선비 다인들의 검박한 차살림살이는 ‘다실’에서 볼 수 있다. 작고 소박한 초가집을 지어 그것을 ‘소실’‘소재’‘소려’‘소루’라 부르기도 했으며 기와가 아닌 억새나 짚을 엮어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초당’‘모옥’‘모암’‘초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인 허균의 ‘누실명’은 이같은 선비들의 차살림살이를 잘 말해준다. 작은 다실에서 청빈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이상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여긴 허균은 “사방은 아홉자 크기의 단칸방으로서, 책을 갖춰두고 차 마시고 향 피우며 지내는데, 남들은 누추하다고 하나 심신은 편안하다. 누추하다고 함은 몸과 이름이 썩어버림을 말하니 군자를 지향하는 내가 사는 방은 누추하지 않다.”고 적고 있다. 허균처럼 대부분의 선비다인들은 차에 그 어떤 부와 명리보다도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비차 문화의 핵심은 바로 청빈의 덕을 통해 개인과 가족, 국가의 경영을 영위하는 지혜를 쌓는 데 있었다. 자연과 벗삼으며 버림을 통해 세상을 얻는 미학을 터득한 선비들의 차 생활은 진정한 차의 살림살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오늘 우리들에게 잘 일깨우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인 자하 신위는 “많은 여인을 거느리고 밥 먹는 것은 아무리 즐거워도 색·향·미가 뛰어난 차보다 못하다. 좋은 차는 좋은 사람과 같아 자신에게 웃음을 준다.”고 적고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끼니는 굶주림을 겨우 면할 뿐인데. 차를 병처럼 좋아하는 것이 부끄럽다.” 차는 좋은 삶의 양식과 같아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살찌게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부끄럽게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한 혜안을 준다. 차가 우리삶에 있어서 우주처럼 넓고 광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지암 암주 ■ 조선시대 법정의 다례의식 우리 차문화사에 있어서 차례는 단순한 생활양식이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지닌 채 발전해왔다. 죄와 법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왕과 신하들이, 또한 사헌부에서 사형 등 중형을 지닌 죄인들의 죄를 판결하거나 사면할 때 차를 통해 엄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고려시대에 왕과 신하들은 죄인을 사형시키느냐 아니면 섬에 유배를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 함께 다례의식을 행했다. 그당시 실제로 행했던 다례의를 살펴보자. 다례가 시작되기 전 왕이 내전의 남쪽 행랑에 앉고 신하들이 재배한 후 제자리를 잡는다. 다례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차를 담당하는 다방참상원이 각종 다구들과 차를 보관하는 별채에서 차를 들고 들어온다. 칠품원의 관직을 가진 내시가 뚜껑을 연다. 집례가 전의 앞기둥 밖으로 올라와서 왕과 마주보고 절 한후 차를 권하고 놓은 뒷전 아래로 내려온다. 다음은 문무고관대작들에게 차를 올린다. 원방의 8품 이하 벼슬아치가 다례를 담당한다. 집례가 다시 전에 올라가 엎드려 차를 내어갈 것을 청한다. 붉은 붓과 먹을 든 주대원(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관원)이 들어와 “단필로 참형을 결정하시되 유인도에 들어갈 자를 제외하소서.”라고 아뢴다. 형이 결정된 후 왕과 문무 고관대작들에게 차를 권하고 신하들은 다시 재배를 한다. 다례가 끝난후 신하들은 왕이 술과 과일을 하사한다는 분부를 전달받고 차례로 나간다. 다례의에서 형을 결정하기 전 왕과 신하들은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탁한 말차를 마셨으며, 중형 결정 후에는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탕차(湯茶)를 마셨다. 고려시대에는 또 죄를 사면해주는 ‘사면다례’도 행해졌다. 고려 때 왕은 중요한 죄인을 사면할 때 죄를 사면하는 공식 의례를 행했다. 이때 의례에 동참하는 행렬에 행로와 휴대용 화로를 든 군인인 다담군사 4명이 함께한 것을 볼 때 중요한 사면의식 때도 차례는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사헌부의 다시(茶時)도 차를 단순한 행다를 넘어선 문화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거정은 ‘사헌부 제좌청중신기´에 “부의 청에서는 두 가지 일을 하였다. 그 하나는 다시이며 또 하나는 제좌이다. 다시란 다례의 뜻을 취한 것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 대관은 다만 임금에게 간언하는 책임만 맡았고, 관청의 일반적인 일은 다스리지 않아서 하루에 한번 모여 차 마시는 자리를 베풀고 헤어졌다.”고 적고있다. 사헌부 감찰을 엮임했던 정극인도 “대관들이 다 모이지 않아서 임금을 뵐 때가 되지 않았으면 잠시 물러나 있기를 청하여 아뢰고 차를 점다하여 시장기를 메웠다. 그러므로 감찰은 다시라는 두 글자를 들고 들어가서 임금께 아뢰었다.”고 말한 것을 볼때 차를 마시는 일이 지금처럼 단순한 휴식이 아닌, 하나의 업무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태종실록´에서는 각 관청에서 사헌부의 검사를 청할 때 전날 다시에 통보하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에서도 간단한 업무를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흠흠심서´에서 “감찰이 다시라는 패를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고 가면 비록 대관을 만나더라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적고있다. 이는 다시가 간단한 업무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다시는 모든 관아에서 철저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다시의 본뜻이 상실되어갈 뿐만 아니라 행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민족은 매우 신중한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중요한 죄의 결정을 신중하게 하기 위해 차를 마시며 지나온 판결을 되짚는 것은 올바름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되짚는 신중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차는 올바름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엄정하고 평등한 정신을 내재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차를 단순한 음료의 도구를 벗어나 인간의 근원적인 평등성을 추구하는 삶의 철학으로 승화시켜낸 위대한 족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차는 민족공동체의 건강한 삶을 운용하는 삶의 뿌리로서 각인되고 있다.
  • [책꽂이]

    |실용| ●성공적인 부모 리더십(짐 테일러 지음, 노혜숙 옮김, 더난출판 펴냄) 아이를 ‘성취형 인재’로 키우기 위한 부모의 기술을 소개.‘꿈의 코스’로 불리는 마라톤 서브스리(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내에 완주하는 것)를 달성했을 정도로 도전적인 저자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바로 ‘포지티브 푸싱(positive pushing, 긍정적 강제력)’, 즉 아이의 성공을 위해 밀어붙일 필요가 있을 땐 확실히 밀어붙이라는 것이다.1만원. ●위인과 천재는 어머니가 만든다(유안진 지음, 다시 펴냄)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머니를 만들어 주셨다.” 유대 격언집에 있는 말이다. 유대인들에게 어머니는 ‘창조의 여신’이다. 물론 유대인 가정에서는 전통적으로 아버지가 호주이며, 교사라는 말과 아버지라는 말이 똑같이 ‘호루마’일 정도로 아버지의 위엄과 권위는 절대적이다. 책은 보통 아이를 위인과 천재로 키워내는 유대인의 특별한 가정교육을 소개한다.8500원. ●한국인의 부자학(김송본 지음, 스마트비즈니스 펴냄) 역사학자 강만길은 그의 저서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에서 “개성상인은 봉건사회 천년 동안 실질적인 시장의 주역이며 ‘전위세력’이다.”라고 했다. 이 책엔 이같은 ‘천년 부자’ 개성상인의 상혼을 비롯해 조선 실학자의 경영해법, 장돌뱅이의 지혜가 녹아 있다. 한국인의 상인정신을 연구해온 저자는 세상에 바로 서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 있으니, 그것은 곧 인무신불립(人無信不立, 신의가 없는 사람은 바로 서지 못한다)과 가난한 자의 빈 주머니라고 강조한다.1만 6000원. ●40대 남자의 생활혁명 프로젝트(이시형 지음, 청아출판사 펴냄)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직업을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독설가 버나드 쇼의 말이다. 운명이겠거니 생각하고 즐겁게 일하자. 처칠이 91세까지 장수한 것도 낙천적 기질과 함께 일을 즐겼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5월5일은 ‘international no diet day, 즉 다이어트에 신경쓰지 않고 먹고 싶은 대로 먹는 날. 미국인들은 이 날 체중계를 부숴버리고 파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다닌다. 비만이 그만큼 절박한 이슈라는 얘기다.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가 들려주는 생활혁명 지침서.1만원. ●브랜드 자산의 전략적 경영(데이비드 아커 지음, 이상민 등 지음, 비즈니스북스 펴냄) ‘브랜드 자산(brand equity)’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개념화한 저자(버클리대 하스 경영대학원 명예교수)의 대표적 저서. 브랜드 자산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브랜드 충성도를 비롯해 브랜드 인지도, 지각된 품질, 브랜드 연상 등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를 전략적으로 구축하고 관리하는 일련의 브랜드 경영활동을 통해 브랜드 에쿼티가 증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2만 5000원. ●탄수화물 중독증(잭 캘럼 등 지음, 인창식 옮김, 북라인 펴냄) 탄수화물 중독증, 즉 ‘신드롬 X’라는 신종 유행병으로 인해 당뇨병과 심장병이 크게 번지고 있다.‘신드롬 X’는 슈퍼 박테리아 같은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제 탄수화물 함량이 높은 음식들을 먹음으로써 촉발되는 병이다. 흰 설탕과 흰 밀가루, 흰 쌀, 그리고 이들을 이용한 가공식품으로 대변되는 정제 탄수화물은 빠르게 소화돼 혈당과 인슐린 수치를 급격히 끌어올린다. 설탕과 정제 곡류, 가공식품이 부른 신종 유행병에 대해 설명.1만 2000원. |유아·아동| ●에드와르도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존 버닝햄 글·그림, 조세현 옮김, 비룡소 펴냄) 평범한 아이 에드와르도는 어른들의 섣부른 판단에 자꾸만 심술쟁이 못된 아이로 변해가는데…. 어른아이 모두 칭찬과 격려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그림책.4세 이상.8500원. ●둘이 많다고?(안네게르트 푹스후버 글·그림, 김경연 옮김, 풀빛 펴냄) 두 아이를 둔 엄마곰, 세 아이를 둔 아빠사자, 아이 넷의 엄마 두더지…. 저마다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특별한 느낌을 얘기한다. 엄마아빠에게 모든 아이들은 다 특별하고 소중한 인격체. 5세 이상.9000원. |초등·청소년|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가네코 미스즈 글, 서승주 옮김, 소화 펴냄) 지은이는 일본의 동요시인. 엇비슷한 내용의 창작동화집, 서구의 번역동화 대신 단아한 정서가 돋보이는 일본의 동시집 한권 아이에게 권해보면 어떨까. 이국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 시집이 어른아이에게 두루 읽힐 만하다. 초등 고학년 이상.6000원. ●지식은 힘-환경(장수하늘소 글, 김효진 그림, 언어세상 펴냄) ‘지식은 힘’시리즈 세번째. 지구의 미래를 위해 지켜야 할 환경과 관련한 정보들이 수두룩하다. 사회 과학 실과 도덕 체육 등 초등 교과서에 나오는 테마 101가지를 퀴즈 형태로 설명한다. 초등3년 이상.9000원.
  • 해방 전후사 공부 편집위원 1명뿐…日정당화 선입견 빠져

    해방 전후사 공부 편집위원 1명뿐…日정당화 선입견 빠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재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인식’(인식)간 논쟁 포인트는 생각만큼 까다롭지 않다. 단순하게 말해 한국의 성장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이다. 그렇기에 핵심은 결국 경제다.‘재인식’ 필진 가운데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눈에 띄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정희 평가를 두고 이 교수와 팽팽히 맞서고 있는 장상환 경상대 교수를 만났다. ▶‘재인식’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됐다는 평이 있다. -출판사의 전문성 부족이 아쉽다.‘재인식’의 논문은 오래된 것들이다. 그러면 편집위원의 말만 들을 게 아니라 수정과 보완을 요구했어야 했다. 전문성이 없으니 편집위원들 말에 휘둘렸다. 학자들도 그렇다. 해방전후사를 다룬다는데 편집위원 4명 가운데 이 시대를 공부한 사람은 김일영 교수 뿐이다. 박지향 교수는 영국사를 공부했고 이번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에 대해 쓴 글은 서양사로 바꾸기 전인 90년대 초에 쓴 글이다. 김철 교수는 국문학 전공이어서 사회경제사 위주인 책의 성격과 맞지 않다. 이영훈 교수는 경제사를 했다지만 조선후기 전공자다. 주장과 입장이 무엇이냐를 떠나 책의 격조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 없다. 한마디로 이들이 모여 책을 편집했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다. ▶‘인식’에 농지개혁에 관한 글을 썼는데. -원래 남한의 농지개혁이 불완전했다는 얘기는 있었다. 해방 뒤 땅이 145만정보 있었는데 분배된 건 60만정보였다. 당시 정확한 통계 같은 게 없으니 “농지개혁이 안됐다.”“지주제가 남아 있다.”는 식의 말이 나왔다. 그래서 ‘식민지반(半)봉건제’ 같은 말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당시 내가 직접 농촌을 다니면서 조사해보니 전혀 달랐다. 분배되지 않은 85만정보 가운데 60만정보는 방매(放賣)됐다. 어차피 농지개혁이 있다니까 지주들이 제 값 안받고도 막 팔아치웠다는 거다. 이런 주장을 담은 내 글이 ‘인식’에 실렸다. 그런데 ‘인식’이 농지개혁을 완전 실패로 규정했다는 주장은 어이없다. 심지어 ‘재인식’에 실린 농지개혁 글은 외려 그런 나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내용이다. ▶‘재인식’하겠다면서 ‘인식’은 모르고 있다는 얘기인가. -아까 전공자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래서 디테일하지 못하고 전체적인 상(像)만 가지고 있다. 그러니 허점이 많고 대단히 거칠 수밖에 없다. 이영훈 교수 역시 일본 경제사 논리를 많이 따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일본을 정당화하는 선입관에 젖어 있다고 봐야 한다.‘재인식’에 글 쓴 일본 학자들도 ‘그 때 그 시절에는 다 그랬다, 왜 유독 일본만 문제냐.’는 식으로 글을 쓴 것 아니냐. ▶그러면 한국의 빠른 성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국의 근대화에서 제일 중요한 이슈는 사실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농지개혁으로 지주가 없어지고, 신분제가 무너지고, 자산소유상의 평등이 진전되고, 신분과 재산의 속박에서 벗어난 개인들이 교육열을 통해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것이다. 이제 나만 똑똑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거다. 그래서 한국의 농지개혁은 중요하다. 여기서 뺄 수 없는 게 한국전쟁이다. 농지개혁에 이은 한국전쟁은 남한의 봉건잔재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일본은 천대받는 부락민이, 영국은 우대받는 귀족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게 전혀 없다. 동시에 우리는 오랜 중앙집권의 역사로 사회를 조직해본 경험이 있다. 싸고 똑똑한 노동력이 넘쳐나고 국가경영의 역사적 경험이 있었다. 한국의 빠른 근대화는 이런 것들로 설명해야 한다. ▶지나치게 단선적인 논리라는 평인데. -어느 학술대회에서 박정희시대의 공과가 5대5 된다고 했더니 이영훈 교수는 9대1,8대2라고 말하더라.‘먹고 살게 해줬으니 다른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흑백논리로 접근할 게 아니라 여러요소들간 경중의 차이를 따져야 한다. 그래야 생산적 논쟁이 가능하다. 글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책꽂이]

    ●그는 지도 밖에 산다(제임스 캠벨 지음, 김유경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1959년 미국의 49번째 주가 된 알래스카. 면적(153만 694㎢)은 미국에서 최대이고 인구(62만여명)는 아이오밍 주에 이어 두 번째로 적다. 특히 알래스카의 북동부 내륙지역은 산맥과 툰드라로 이뤄진, 세계에서 가장 기후 변화가 심하고 추위가 혹독한 곳이다. 우리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척박한 땅에도 사람은 산다.‘알래스카 최후의 변방인’으로 불리는 하이모 코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책은 그의 ‘선택받은’ 삶의 기록이다.1만 2800원. ●신선전(갈홍 지음, 임동석 옮김, 고즈윈 펴냄) 동진시대 갈홍이 ‘포박자’ 내편을 완성한 뒤 신선들에 대한 기록을 모아 편찬한 10권의 지괴(志怪)소설이자 신마(神魔)소설. 도교문학을 대표하는 이 책에 실린 신선 중 유향의 ‘열선전’과 중복되는 인물은 용성공과 팽조 두 사람뿐. 나머지는 갈홍이 직접 수록해 선보이는 신선들이다. 책에는 실존인물도 등장한다. 도가가 한나라 때는 ‘임금된 자의 통치술’로 일컬어졌고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는 종교로서도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를 이해할 만도 하다.1만 8000원. ●우리 민족의 놀이문화(조완묵 지음, 정신세계사 펴냄) 줄다리기·횃불싸움·놋다리밟기 등 마을 전체 구성원이 참여하는 공동체적 놀이, 줄타기·농주(弄珠)같은 개인기예, 태껸·활쏘기·검술 등 전쟁기술에서 발전돼 나온 전통무예 등을 다뤘다. 신라 29대 임금인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이 함께 뛰는 모습을 통해 오늘날 축구와 같이 발로 공을 차는 놀이인 축국(蹴鞠)을 설명하는 등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곁들였다. 민족유희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국내 첫 전통스포츠사.1만 5000원. ●루 살로메(프랑수아즈 지루 지음, 함유선 옮김, 해냄 펴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의 작가 루 살로메의 이지적인 용모에서 풍겨나오는 오묘한 매력은 늘 주위에 정신적·육체적 동반자들을 불러모았다.21세 때 니체를 만나 그의 절망적인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36세 때는 연하의 릴케를 통해 진정한 낭만을 향유했으며,50세 때부터는 프로이트와 애정어린 우정을 지속했다. 프랑스 최초의 여성 장관이자 언론인이었던 저자는 마력의 뮤즈이자 팜므파탈인 루 살로메의 삶의 동력을 자유를 향한 영혼의 고투라는 시각에서 재현해낸다.1만 2000원. ●혁명과 문학의 경계에 선 아나키스트 바진(박난영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바진(巴金)의 문학과 사상을 조명. 중국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루쉰에 비견될 만한 탁월한 작가라는 시각이 있지만, 그의 허무주의적이고 아나키즘 성향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다. 수원대 동양어문학부 교수인 저자는 “중국에서의 바진에 대한 평가는 모순점이 있다.”며 “탁월한 작가로서 바진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측면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따라 바진의 아나키즘을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중국 연구가들의 당위적 측면이 그것”이라고 지적한다.1만 7000원. ●발해고(유득공 지음, 정진헌 옮김, 서해문집 펴냄)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발해사를 체계화시킨 조선후기 실학자 영재 유득공의 저작을 완역. 유득공은 고려가 발해까지 우리역사에 넣어 남북국사를 쓰지 않았던 점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발해영토를 되찾으려 해도 근거가 없어져버렸다며 통탄한다. 유득공은 우리나라의 통일은 신라에서도 고려에서도 조선에서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다. 신라와 발해가 양립한 남북국시대 이후 발해의 영토는 대부분 여진에 넘어갔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통일이 아니라는 것이다.8500원.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웅진씽크빅 펴냄) 황금색 드레스를 입고 앉아 책을 읽는 여인을 그린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여인’, 책을 읽으며 루이 15세를 기다리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을 그린 프랑수아 부셰의 초상화, 반 고흐의 ‘아를의 여인(지누 부인)’,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 방’ 등 책읽는 여자들의 그림을 통해본 독서의 역사.1만 3800원.
  • 개·대보름 새 세시풍속 공개

    살랑살랑 꼬리치는 푸른 다리 위 하얀 개/쇠우리에 가둔 듯 복숭아 가지로 목줄 걸었네/사방문을 향해 짖게 하며 주술을 행하니/산하의 모든 귀신들 위험에 두려워 떠네(상원리곡 중) 병술년(丙戌年) 우리 민족의 4대 명절 중 하나인 정월대보름(12일)을 앞두고 개와 정월대보름에 관한 새로운 세시풍속 기록이 공개돼 눈길을 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최근 조선후기 12편의 시집에 수록된 시 310수를 번역해 펴낸 ‘조선대세시기Ⅱ’를 통해서이다. 이 책에는 조선후기 문인 김려가 정월대보름의 다양한 풍경을 읊은 ‘상원리곡’ 25수가 담겨 있다. 이 중 19번째 시는 복숭아 가지로 목줄을 만들어 개에게 채운 뒤 채찍질하며 사대문으로 내몰아 돌림병을 쫓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박물관측은 “개띠 해를 맞아 개에 대한 새로운 기록이며, 처음으로 소개되는 정월대보름 세시풍속 자료”라고 설명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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