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조선총독부
    2026-04-02
    검색기록 지우기
  • 구조조정
    2026-04-02
    검색기록 지우기
  • 물가안정
    2026-04-02
    검색기록 지우기
  • 명예교수
    2026-04-02
    검색기록 지우기
  • 원화 가치
    2026-04-0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107
  • 혜봉스님,「친일 불교론」 상·하 2권 펴내

    ◎일제하 불교계 친일행위 고발/「승려의 도성 출입금지」해제후 본격화/징용권장 논설 발표·군용기 5대 헌납 일제 치하 조선불교계의 친일행각을 낱낱이 파헤친 「친일불교론」 상·하(민족사간)가 나왔다. 임혜봉스님(46)이 일제하 불교간행물과 신문등 각종사료를 토대로 2년동안의 노력끝에 펴낸 이 책은 불교계는 물론 종교계 전체에 자성의 계기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이루어졌다.1장에서부터 4장까지는 일제의 조선침략이 시작된 1876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조선불교계의 친일종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했다.이어 5장은 이회광 이종욱 권상로 김태흡 등 친일 거두 승려 4인의 행적을,6장은 불교계의 창씨개명 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불교의 친일은 1895년 일본승려 사노(좌야전려)의 건의로 조선왕조의 「승려들의 도성출입금지」 규정이 해제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진단했다.이후 조선총독부는 1911년 사찰령을 반포,조선사찰을 30본사로 분할해 불교계의 힘을 분산시키고 본사와 말사의 주지 임명권을 총독에게 부여함으로써 종무행정과 불교재산은 물론 교리까지 철저히 예속시켰다는 것이다. 이 책은 조선불교의 친일행각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본격화돼 1941년에서 1945년에 이른 태평양전쟁때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당시 불교계 인사 30여명은 황도불교라는 말을 들먹이며 징병을 권장하는 논설을 171 편이나 발표했다.또 1942년에는 군용기 5대를 「조선불교호」로 이름붙여 일본군에 헌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임혜봉스님은 『이 책을 쓴 것은 개인에 대한 단죄보다는 한국불교는 물론 한국민 모두가 이같은 모멸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되겠다는 뜻』이라고 집필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책을 낸 민족사측은 『지난해 7월 이책을 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해당인물들의 후손이나 관련 인사들의 격렬한 항의와 위협으로 업무가 마비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발간이 늦어졌다』고 말했다.
  • 「민족정기 회복운동」 확산/구총독부 철거 계기

    ◎4개단체서 캠페인·강연/학계서도 일제청산 연구 활발 박은식선생등 임정선열5위의 유해봉안과 구조선총독부건물 해체결정등을 계기로 민족정기를 바로잡기위한 각종민간운동이 활기를 띠고있다. 각종사회단체와 학계등에서는 세미나,강연회,출판사업에서 연극공연,순회계몽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사등으로 일제때 왜곡됐던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위한 노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안중근의사 숭모회는 문화체육부가 지정한 「안중근의 달」을 기념하기위해 17일과 20일 두차례에 걸쳐 안의사의 애국정신과 동양평화사상등을 주제로 특별강연회를 가질 예정이다. 또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광복절인 15일 아침 전국적으로 국기바르게달기 캠페인을 벌이는데 이어 지역별로 민족정기를 끊기위해 일제가 설치했던 각종 시설물,지역역사왜곡등의 실태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한국기독청년회,흥사단등 단체들도 선열들의 독립투쟁정신을 통일열기로 승화시키기위해 15일 「남북 인간띠 잇기대회」를 개최,광복의 의미를 새롭게 돼새길 예정이며 민족정기회복과 건강한 시민사회등의 주제로 각종 강연회등 기획행사도 준비중이다. 이와함께 일제의 잔재를 씻어내기위한 학계 출판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외국어대 사학연구소 박창희교수는 일제때 일왕의 칙령에 따라 결정됐던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우리말인 「어린이학교」로 바꿔야한다며 최근 교육부에 건의문을 내 관심을 끌고 있다. 또 일제때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을 벌였으나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전기나 과거 친일행각에도 불구,광복후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은 인물에대한 고발과 해방정국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등도 쏟아져 새로운 역사조명을 기대하는 독자층을 겨냥하고 있다.
  • 문민정부 첫 광복절에 생각한다(특별대담)

    ◎친일세력 축출이 정기회복 지름길/관료사회서 온존… 국가기강 확립 걸림돌/총독부 청사 철거 현정권 임기중 실현을/임정선열 5위 봉환 역사적 쾌거/문제있는 독립유공자 재심 절실/정신대문제 등 일제만행 규명… 사죄 꼭 받아내야 15일로 광복 마흔여덟돌을 맞았다.특히 문민정부 출범 첫해에 맞이한 광복절은 여느때보다 뜻깊다.상해임정 선열들의 유해가 봉환되고 구조선총독부청사,총독관저가 철거되는 등 일제의 잔재를 일소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작업이 사실상 처음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문민정부가 처음으로 맞는 8·15 광복절의 역사적인 의미와 우리 민족이 풀어나가야 할 향후 과제를 좌담으로 정리해본다.이날 좌담회에는 김승곤광복회회장과 신용하서울대교수가 참석했다. □참석자 김승곤 광복회 회장 신용하 서울대 교수 ▲김회장=광복을 맞아 12년동안 항일운동을 하며 떠돌던 중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놀랍게도 친일파들의 권세가 여전하더군요. 더구나 극심한 좌우익 투쟁을 교묘히 이용해 친일파들은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했습니다.51년 광주의 한 신문사에 입사할 때도 독립운동사실을 숨겨야만 했을 정도였습니다. 남북분단의 비극이나 순국선열들이 지금껏 이역을 떠돌수 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껏 관료사회를 쥐고 있던 이들 친일파때문입니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몇년 되지 않습니다.독립운동가들이 그동안 제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죠.그만큼 우리 사회의 친일세력은 뿌리가 깊습니다. 이번 임정선열 5위의 봉환은 친일파들때문에 퇴색해버린 민족정기를 되살릴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또한 이를 통해 국가기강도 바로 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신교수=우리 헌법 전문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계승을 명문화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실제로 정책을 시행하는데는 문제점이 매우 많았습니다. 임정 요인의 유해 5위를 공식적으로 국내에 봉환한 것은 매우 획기적입니다.즉 민족의 정기를 학립하고 국가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전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독립정신을 계승 발전해 세계속의 한국으로 발돋움,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정신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물론이고요. 김영삼대통령이 그동안 논란속에서 미루어 왔던 구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토록 지시한 것은 확실한 용단이라 생각합니다.옛 총독관저의 철거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문제는 김대통령의 민족정기 앙양의지와는 달리 일부 세력과 관료들의 개혁의지가 부족하다는데 있다고 봅니다. ▲김회장=총독부 청사의 건립의도부터 생각해봅시다.우리 임금이 살던 경복궁안에 짓지 않았습니까.우리 민족의 맥을 끊기 위한 것이지요.창경궁에 동물원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총독부 건물은 일제의 상징입니다.해방과 동시에 가장 먼저 철거됐어야 합니다. 물론 이승만대통령때부터 역대 정권들이 철거를 고려했었지요.그러나 지금껏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이는 행정부에 있는 친일수구세력들의 방해때문입니다. ▲신교수=조선총독부를 지을당시 일본의 건축전문가들은 남산이나 서울시청자리를 주장했습니다.그러나 당시 데라우치총독이 영구 통치를선언하는 의미에서 조선왕궁의 정궁인 근정전을 헐고 짓도록 했습니다.즉 일제가 한국 식민통치의 상징을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이를 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한 것입니다.5000년 역사를 일제의 식민통치 상징에 넣어놓았으니 민족적 열등감을 「배양」시키고 일본인에게는 우월감을 조장해 왔습니다.5공때는 철거계획이 한때 검토됐으나 무산됐고 6공때도 연구됐지요.그러나 경비문제를 들고 나온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철거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관료들이 대통령을 속인 것입니다.뜯어다가 복원하는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게 반대이유이지만 이 건물은 복원가치가 없습니다.우리 고유의 유물도 아닌데 뭣때문에 복원합니까.정 아쉽다면 모형을 하나 만들어 독립기념관의 일제침략관내에 전시하면 그만이지요.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박물관의 이전시기입니다.정부에서는 2000년까지 완공한다고 발표했는데 김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97년까지 마쳐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막강한 수구세력에 의해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김회장=그렇습니다.김대통령 임기안에 이전해야 합니다.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친일세력들이 남아있습니다.김대통령이 퇴임한 뒤에 이들이 어떤 주장을 내세우며 이전에 반대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화제를 돌려 정신대문제를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최근 일본 연립정부가 우리 한국인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가 위안부로 이용한 사실을 인정한데 대해 마치 대단한 의미가 담긴 양 높이 평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본정부가 사과한 것도 아니고 그저 정신대문제에 대해 강제성이 있었다고 인정한 것을 놓고 우리 외무부가 『외교적으로 정신대문제는 청산됐다』고 밝힌 것은 성급한 것입니다. ▲신교수=동감입니다.새로 들어선 일본의 연립정부는 정신대문제와 관련해 전후청산차원이라며 「강제성」만을 인정했습니다.범죄행위에 대해 배상이나 사죄는 없는데 이는 용납할 수 없으며 일본에 휘말리는 우리의 외교정책은 자주외교 대등외교가 아니라고 봅니다.독일은 패전후 즉시 사죄하고 배상금을 물었는데 일본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김회장=정신대문제를 포함해 일제 만행에 대해 전반적인 진상규명과 일본의 전적인 사죄가 있어야 합니다. 가을로 예정된 김대통령의 일본방문에서는 분명한 답변을 일본정부로부터 반드시 받아내야 할 것입니다. ▲신교수=잘못된 과거역사의 청산은 물론 국제화시대의 대처라는 측면에서도 친일파들에 대한 역사적인 재조명이 시급합니다.민족의식이 소멸되면 강대국에 종속될 수 밖에 없지요.이완용이가 나라를 판 대가인 은사금으로 사들인 땅을 증손이 나타나 법원에 제소,여러건 승소판결을 받았지요.이는 제2의 이완용이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김구선생이 독립운동가들을 잡으러 다니던 친일파에게 암살당하고도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이러한 것들은 건국직후 친일파들을 몰아내지 못한 때문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보훈처는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포상을 받은 경우라도 친일행각에 문제가 제기되는 부분이 있으면 재심해야 합니다.그러나 그 기준은 엄격하고 과학적,합리적이어야 합니다. ▲김회장=친일파에 대한 재조명이 역사적 과제임은 분명합니다.문제는 현실적으로 친일파를 어떤 기준으로 가려낼 것인가 하는 겁니다.정부로서도 친일파에 대한 역사재조명이 무척 어려울 줄 압니다.그러나 서두르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작업을 벌여나간다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리라 기대해봅니다. ▲신교수=우리는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최근 들어선 일본 연립내각의 핵심인 오자와 이치로는 PKO법안의 초안 배경이 된 「오자와특별조사위」를 이끌어온 인물입니다.이 위원회의 조사보고서는 앞으로 국제사회가 미주권 EC권 일본권 등 3개 블록화되므로 일본이 아시아지역의 통합과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한국은 일본의 아시아정책의 개편대상중의 하나이므로 자칫 말려들면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종속될 위험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김회장=일본은 한일관계를 영원한 동반자인양 표현하고 있습니다.그러나 6백90억달러의 무역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관계가 동반자일수 있습니까.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발전을이룩할 수 있었습니다.동북아시아의 전략거점으로 일본을 택한 미국이 각종 기술원조를 아끼지 않으면서 지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성장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러나 일본은 겉으로는 동반자 운운하면서 우리나라에 기술지원을 꺼리고 있습니다.우리나라를 경제협력국이 아니라 시장으로만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이런 상태에서 양국이 진정한 협조적 관계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우리 국민의 반일감정은 정부의 입장과는 달리 그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김대통령의 가을 일본방문에서는 반드시 말뿐이 아닌 실질적인 일본의 사죄를 얻어내야 할 것입니다.이와함께 기술이전과 무역역조시정등에 대한 일본정부의 실질적인 약속을 보장받아야 할 것입니다.
  • “실명제 잘한일” 87%/갤럽 여론조사 결과

    우리나라 국민의 절대다수인 87.1%가 12일 저녁 전격 단행된 금융실명제 실시에 대해 찬성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가 금융실명제단행 다음날인 13일 하루동안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에 의뢰,전국 20세이상 남녀 1천58명을 대상으로 전화조사한 결과 김영삼대통령의 실명제 실시에 대한 평가에서 87.1%가 잘한 일이라며 찬성을 표시했고 잘못한 일이라고 평가한 사람은 3.3%에 불과했다. 잘 모른다거나 응답을 하지 않은 사람은 9.5%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조사결과에 따르면 실명제 실시시기에 대해서도 적당하다고 응답한 사람이 44.2%로 가장 많았고 ▲너무 늦었다 26.9% ▲너무 빠르다 18.8% ▲잘모르거나 무응답 10.1%의 순이었다. 특히 금융실명제가 정치개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80.8%가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답한 반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고 답한 사람 3.2%,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다고 답한 사람은 7.5%에 불과했다. 한편 구조선총독부 건물철거에 대해서는 68.4%가 잘한 일이라고 응답한 반면 잘못한 일이라는응답자는 11.9%였다.
  • “그린벨트 등 민원인 협박 강력 대처”/황 총리(국무회의:12일)

    ◎“대풍 피해복구 군 등 협조 감사”/이 내무/“구 총독부건물 조기 철거 추진”/이 문체 12일의 제37회 국무회의는 그린벨트문제등 민원처리와 관련,공직자에 대한 협박사례가 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에 대한 대책이 집중거론됐다. ○…이날 상정된 대통령령안 6건,일반안건 2건은 별 이의없이 가볍게 통과.특히 지난달 15일 국무회의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던 택지개발촉진법시행령은 건설부가 내무부·교육부의 의견을 수용,유치원부지내에 입시계 학원·체육도장·탁구장은 못두게 하는 대신 보육시설,음악·미술학원설치는 가능하도록 안을 수정함으로써 무난히 통과. 일반안건으로는 냉해로 인한 농작물방제비용으로 30억원의 예비비를 지출하는 것이 포함. ○…안건처리가 끝나자 최창윤총무처장관이 상반기 민원업무처리결과를 보고한뒤 공직자재산등록·공개절차를 설명. 이어 고병우건설장관이 『건설부가 그린벨트관련 정책을 입안하고 있는데 집단이기주의에 의한 민원인의 협박·공갈이 심하다』며 『장·차관은 물론 실무관계자 나아가 공청회참석 교수·언론인에게까지 입에 담지 못할 협박전화를 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 황인성총리는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매우 중대한 사태다』라고 규정한뒤 『정부는 단호하고 의연한 자세로 강력대처해야 한다』고 강조. 황총리는 『내무부등 관계부처는 회의를 갖고 즉각 대응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고 이해구내무부장관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발본을 다짐. ○…오린환공보처장관은 국정신문 여론조사결과 공무원부조리가 많이 근절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 황총리는 『개혁정책이 대민봉사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무적』이라면서 『그러나 아직 금품수수사례가 완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각부처가 자체정화에서 참고하라』고 당부.황총리는 또 『공직사회 일각에서 보신주의가 일고 있는데 소신껏 일하다 생긴 실수는 관대히 처리할 것』이라고 강조. 이해구내무부장관은 『태풍피해를 줄이는데 국방부등 관련부처가 적극 협조해 고맙다』고 말했고 황총리는 『이번은 재난의 사전대비라는 차원에서 모범적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보다 유기적 체제를 갖춰야 할 것』이라고 강조. 이민섭문체부장관은 『구조선총독부건물철거 국민성금이 벌써 들어오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박물관을 지은후 건물을 허는 것은 국민감정에 맞지 않는다』며 『박물관의 기능이 정지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조기철거를 추진하겠다』고 보고.황총리는 관계장관회의체를 구성,범정부차원에서의 철거추진을 지시. ○…회의 말미 황총리는 『신정부가 출범,내각이 전원교체된 지 이제 6개월이 지나 모든 것이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다』면서 『출범초기 대통령에게 보고한 업무의 추진상황,추가지시,그리고 새로 발생한 문제들을 종합평가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황총리는 오는 28일께 전국무위원이 참여하는 총리 주재의 부처별 국정평가회의를 갖겠다고 밝히면서 그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고 예고. ◇대통령령안 ▲경찰공무원임용령 ▲농어업재해대책법시행령 ▲고압가스안전관리법시행령 ▲액화석유가스의 안전및 사업관리법시행령 ▲기업활동규제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시행령 ▲택지개발촉진법시행령
  • 일 잔재 없애 민족자존심 찾기/옛 조선총독관저 철거의미와 약사

    ◎옛총독부청사 헐기와 같은 맥락/미나미총독 건립… 아베까지 사용 김영삼대통령이 일제의 조선총독부였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철거토록 한데 이어 총독관저였던 청와대 구본관도 헐도록 지시한 것은 민족자존심을 되찾는다는 결단으로 평가되고있다.즉 민족정기를 살리고 민족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이며 이제 우리도 그만한 국가역량을 가졌다는 자신감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는 결코 한을 풀자는 감정적차원이 아닌 미래를 향한 정신적 기둥을 새로이 정립하자는 의미이다. 행여 의식속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식민지잔재를 차제에 털어버리고 국제화시대에 발맞춰 이를테면 일본식관행·식민지시대의 잔영을 하루빨리 청산하자는 것이 결단의 배경으로 보인다. 물론 청와대 구본관은 지난 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초대대통령(48·8∼60·4)부터 윤보선(60·8∼62·3),박정희(63·12∼79·10),최규하(80·3∼80·8),전두환(80·8∼88·2),노태우전대통령(88·2∼90·10)까지 역대 대통령이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했던 오래된 건물이다. 그러나 구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기로 한만큼 그 건물의 부속건물이자 총독이 살았던 건물도 철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데 따른 결정이다. 특히 청와대 구본관 건물은 비가 샐정도로 상당히 낡은데다 현재 식당과 의무실을 제외하고는 빈건물로 철거비용도 많이 들지않아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청와대 구본관 건물은 일제때인 37년 10월 미나미 지로(남차낭)총독이 짓기 시작하여 39년 7월 완공되어 미나미총독을 비롯하여 고이소 구니아카(소기국소),아베 노부유키(아부신행)총독이 해방되기 전까지 살았다. 해방 직후 아베총독이 건물내부를 불태웠으나 미군정청의 하지중장이 수리해 사용했다. 48년 정부수립후 이건물은 경무대로 불리면서 이대통령이 기거했고 4·19이후 청와대로 불리며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겸 관저로 사용됐다. 노대통령 때인 90년 10월에 새관저가 완공되고 91년 7월에 새본관이 완공됨으로써 구본관건물은 사실상 그역할을 마감했다. 풍수지리학자 중에는 일제가 우리민족의 기를 누르기 위해 머리격인 북한산 인수봉에는 철주를 박았고,입 부분인 근정전과 광화문사이에는 총독부청사를,목 부분에 총독관저를,심장격인 현서울시청자리에 경성부건물을 지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제 「일」자형의 조선총독부건물과 총독관저가 헐리고 나면 서울에는 「본」자형의 현서울시청건물및 동경역사를 본떠 만든 서울역사,조선은행으로 사용했던 현한국은행이 일제의 잔재로 남게된다.
  • 옛 총독 관저(청와대 구본관)도 철거

    ◎김대통령 지시… 새달까지 헐기로 김영삼대통령은 구조선총독부건물을 철거토록 조치한데 이어 조선총독관사였던 청와대 구본관을 빠른 시일내에 철거하라고 11일 박관용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청와대는 이에따라 현재 의무실과 간이식당,경호원숙소로 사용되고 있는 이건물을 9월중 철거할 예정이다. 지난 39년 7월 건립된 구본관은 미나미 지로,고이소 구니아키,아베 노부유총독이 45년까지 관저로 사용하다 해방이후에는 지난 90년 10월까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이 관저겸 집무실로 사용했었다.
  • “북한­인왕­관악산 정맥 소생”/풍수학자들은 말한다

    ◎내친김에 서울시청도 빨리 헐어야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터에 자리잡은 일제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은 하늘에서 내려다 볼때 「일」자 형태를 한것부터가 수도의 서울의 정기를 끊자는 속셈이었다. 또 백두산에서 한라산으로 치달은 우리나라 백두대간의 맥이 서쪽으로 뻗어나와 북한산∼인왕산∼관악산으로 이어지는 곳에 굳이 총독부건물을 지으려한 의도도 누누이 전해져온 우리나라의 정맥을 자르자는 의도였다고 풍수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이러한 「불순한」꾐으로 지어져 67년동안이나 서울의 심장부에서 버티어 왔던 조선총독부건물(구 중앙청·현국립중앙박물관)이 드디어 헐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국민들은 물론 특히 풍수지리학자들이 크게 환영하고 있다. 최근 풍수지리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직까지 그만둔 최창조씨는 『옛 조선총독부건물의 철거는 민족의 입을 풀어주는 쾌거』라고 찬사를 보냈다. 『풍수지리학상 일제 총독부 건물자리는 사람의 입에 해당되는 곳이다.온몸의 정기는 입을 거쳐서 밖으로 나오기 때문에 일제는 의도적으로 총독부를 경복궁 앞자리에 지음으로써 민족의 입을 틀어막은 셈이었다.이번 결정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결국 민족의 입을 풀어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악의 맥이 한강을 건너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서울시청건물(구경성부청사)은 「본」자 모양을 하고 있어 조선총독부건물의 「일」자 모양과 함께 일제의 검은 뜻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풍수학자들은 또 일제가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의 기를 꺾기위해 백운대·인수봉·만경대 주변 곳곳에 박아 놓은 수많은 쇠말뚝 가운데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들을 모조리 뽑아내야 수도서울의 옛기운이 되살아날수 있다고 주장한다.
  • 총독부청사 철거의 역사적 의미/김정열 문화부장(데스크시각)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 오랫동안 버티고 있던 오욕의 상징물이 사라지게 됐다.그동안 철거와 보존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돼온 일제 총독부청사가 김영삼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마침내 헐리게 된 것이다. 그것도 철거이후 이전복원이 아닌 완전 해체이다.민족의 숨통을 옥죄온 치욕의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의 정문을 가로막고 세워진지 근 70년만의 일이다. ○일제잔재 상징물 데라우치 마사타케(사내정의)총독과 야마가타 아리토모(산현유붕)정무총감등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이 경복궁 근정문 앞뜰에서 흙을 한삽씩 파던지며 자축한 때가 1916년 7월10일.「조선총독부신영」계획을 수립한지 6년뒤,1926년 10월1일 준공식을 갖기 10년 전의 일이다.일제 식민통치의 총본산이자 일제 잔재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의 한반도 영구지배계획의 일환으로 이같이 태어났다. 연인원 50만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해 지은 이 건물은 그 크기가 당시 영국의 인도총독부나 네덜란드의 보르네오총독부를 능가하는 4만7천평의 대지에 동서로2백42칸,남북으로 1백42칸의 규모. 제국주의의 위용을 과시 하기에 충분한 이 건물로 인해 조선왕조의 상징이던 홍례문을 비롯,강녕전·교태전·문태전과 금천의 석교며 수각등 귀중한 민족유산은 무참히 유린당해야 했다. 더구나 일제는 풍수지리설에 입각,경복궁내 근정전과 광화문 사이에 총독부 건물을 지어 민족정기를 끊고자 했음은 잘 알려진 일.서울의 주산인 북악산과 4괘중 주작의 위치인 남산을 잇는 지맥위에 산수의 교차가 이뤄지는 명당 자리에 왕궁을 짓누르는 고압적 건물을 지음으로써 민족사의 기맥을 차단하고 조선의 국맥까지 끊어 영원한 일제의 속국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청산 국민적 합의 식민통치를 영구히 고착화 하려는 일제의 이러한 음모는 총독부청사의 중앙머리부분이 일왕의 왕관을 뜻하고 있을뿐 아니라 건물의 배치가 일본의 「일」자를 본뜨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나 있다.또 북악산을 중심으로 총독부 건물 아래쪽에 위치한 경성부청(현 서울시청)은 부속건물과 연결해 보면 「본」자가 되며 총독부와 경성부청 두 건물의 위쪽에 위치한 북악산이 「대」자 모양 이어서 공중에서 보면 영락없는 「대일본」의 형상이라고 한다. 많은 학자들이 총독부 건물을 가리켜 일본인에게는 황도주의·대국주의를 고취 시키는 반면 한국인에게는 패배주의와 무력감및 열등감등 비교육적·반역사적 유물이 되어 있다고 개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여러 요인에 기인한다. 더구나 식민잔재를 청산하자는 것이 국민적 합의의 도출임을 감안할때 착취와 억압,구금과 고문을 상징하는 총독부청사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로 지적돼왔다.혹자는 이번의 해체결정이 식민통치의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무의미 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또 철거에 따른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는등 현실적인 경제여건을 들어 부정적 시각을 보이는 이도 있을 수 있다.그러나 이는 민족사 앞에 죄를 짓는 것에 다름 아니다.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사 5천년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시키려는 의도로 지어진 대표적 상징물인 때문이다. 바로 이같은 치욕의 건물에 조상들의 예지 어린 문화유산의 정수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었다.그것은 한마디로 민족문화에 대한 모독이었다. ○민족자존심 회복 일제잔재를 청산,민족의 정기를 새롭게 정립하고 얼룩진 민족사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그리고 정부가 추진하고있는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잃어버린 모습을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도 총독부청사의 해체는 불가피한 것이다.이제 그 결단이 내려졌다.잘못된 역사의 줄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취해진 이 빛나는 성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문민정부의 최대정책과제가 된 총독부철거가 가시화 될 경우 경복궁 복원은 물론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에 부합하는 새박물관 건립도 촉진될 것으로 기대된다.국혼확립의 의미를 새삼 반추해야 할 시점이다.
  • 해체되는 치욕의 역사「총독부」(사설)

    일제 총독부청사였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이 헐리게 되었다.그동안 국립박물관의 이전문제와 관련하여 식민지 통치의 상징이었던 총독부청사의 철거문제는 많은 논란을 거듭해 왔으며 정부에서 철거원칙을 세웠음에도 국립박물관의 마땅한 이전후보지를 선정하지 못해 표류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왔다. 한때 문화부에서는 용산 미8군기지를 후보지로 추진한 적도 있으며 지난 6월 민자당에서는 신축중인 용산의 전쟁기념관을 민족기념관으로 확대,개편하여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었다.그러나 용산 미8군기지 이전이 백지화되고 전쟁기념관 전용은 박물관 기능상 문제점이 많아 국박의 이전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그러다보니 총독부 청사의 철거도 흐지부지 되었다.그런데 이제 결론에 이르렀다. 김영삼대통령은 임정요인 5위의 유해봉안에 즈음하여 9일 『고뇌속에 심사숙고한끝에 아무래도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민주정기의 회복을 위하여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조속히 해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이어 김대통령은 『우리 조상의 빛나는 유산이자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를 옛 조선총독부건물에 보존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통일한민족시대에 대비하고 5천년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에 합당한 국립중앙박물관을 건립하는 문제를 정부가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경복궁의 정문을 가로막고 세워진 총독부 건물은 일제지배 36년의 산실이자 침략의 상징물이다.일부에서는 『수란의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는 철거반대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다수 국민적 정서는 철거를 찬성하고 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총독부 건물은 일제침략의 잔재 청산이라는 점에서,또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점에서도 마땅히 철거되어야 한다.광복 반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해야 할 시점이다. 또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복원을 위해서도 총독부청사의 철거는 불가피하다.일제는 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경복궁을 가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자리를 선정한 것이다. 그동안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은 대통령도 지적했다시피 5천년 민족문화의 유산이 총독부건물에 전시되었다는 점이다.식민지통치의 총본산에 우리조상들의 예지가 담긴 문화유산이 전시되었다는 것은 민족문화에 대한 모독이 아닐수 없다. 옛 총독부청사의 철거가 조속히 이루어지고 통일에 대비한 웅장하고 기능적인 새 국립중앙박물관이 하루빨리 세워지기를 기대한다.새 박물관은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기념비적인 우리시대 최고수준의 건축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옛 총독부 건물 헐어라”/김대통령 지시

    ◎민족정기 회복차원 조치/“통일대비 새 국립박물관 건립”/곧특별위 구성… 공정발표/철거잔해 이전 복원 않기로/정부 김영삼대통령은 9일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조속히 해체하고 통일에대비한 새국립박물관을 새로 건립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철거잔해는 이전복원하지 않을 방침인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통령은 이날 『광복절을 앞두고 ,그리고 민주공화정의 법통을 최초로 세운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봉환에 즈음하여 고뇌속에 심사숙고해 왔거니와 아무래도 우리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서는 조선총독부건물을 가능한한 조속히 해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여기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우리 조상의 빛나는 유산이자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를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보존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조선총독부건물의 해체와 함께 통일한민족시대에 대비,5천년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에 합당한 국립중앙박물관을 국책사업으로 건립하는 문제를 정부가 조속히 적극적으로 검토·착수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정부는 김대통령의 이같은 지시에 따라 문화체육부를 중심으로 새박물관건립및 총독부건물 해체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한뒤 빠른 시일내에 작업일정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김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우리 모두는 민족사의 잘못된 큰줄기를 바로잡아 세계속의 한국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해 이번 작업이 민족사복원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했다. 한편 청와대의 한관계자는 조선총독부건물의 해체와 새국립박물관 건립수순에 대해 『새박물관을 건립하는데 7년이 걸리는 점을 감안,문화재를 임시로 옮길 수 있는 건물을 찾아 문화재를 옮긴뒤 총독부건물을 철거할 것』이라고 말해 김대통령의 임기중에 철거가 이루어질 것임을 시사했다.
  • 민족사 바로세우기/문민정부 이념반영/일제총독부청사 해체지시 안팎

    ◎임정요인 5위 봉환과 같은 맥락/「잘살기 보다 바르게살기」를 구현/새건물 짓기까지 문화재 임시박물관 보존 몇십년간 논란의 대상이었던 조선총독부건물 처리문제가 완전해체로 결말이 났다.이전복원은 배제한 상태여서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조선총독부건물은 3∼4년내에 영원히 사라지게 됐다. 김영삼대통령은 해체와 새 박물관건립에 드는 비용을 감수하면서 치욕적인 역사의 상징을 없애 민족정기를 복원하는데 표를 던진셈이다.이번 결정이 매우 어려웠으며,임정요인 유해의 봉환에 자극받아 민족자존심의 회복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판단에서 결정되었음이 청와대의 발표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막대한 비용 감수 김대통령은 개혁과 함께 민족사를 복원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임정유해의 봉환에 쏟는 정성과 수십년간 결론을 내지 못했던 총독부건물의 해체를 경제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결정했다는 점에서 그런 김대통령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이는 잘사는 것보다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해온 김대통령의「철학」과도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청와대가 공개한 여론조사결과도 대통령이 여론에 따라 이를 결정했다기보다는 대통령 자신의 「민족정기회복 희망」이 이번결정의 주배경이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51% “철거 찬성” 여론조사결과는 철거 51.4%에 철거반대 31%,이전복원 40.6%에 이전복원 필요없다가 40.5%로 나타났다.때문에 이번결정은 현대사 재해석과 민족사복원이란 문민정부의 큰 통치이념에서 해석하는 것이 더 옳아 보인다. 정부는 새로 건설되는 박물관은 통일한국에 대비해 민족사에 길이 남을 건조물로 만들 계획이다.때문에 설계·건축에 최소한 7년이상이 걸릴 것이란 계산이 나오고 있다.이는 김대통령 임기중에 완공을 볼수 없는 역사다.정부는 새박물관건립까지 기다릴 경우 너무 시간이 오래걸린다는 점을 감안,임시로 문화재를 옮겨 놓은뒤 철거에 들어갈 계획이다. ○최소7년 걸릴듯 수순을 따지면 새국립박물관 건립을 추진하면서 문화재 임시거처마련후 철거가 되는 셈이다.이전복원은 1천억원이상이 소요돼 애당초 김대통령의복안에 들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번 결정에서도 김대통령의 국가경영목표는 잘살기보다 바르게 살기에 있음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해야 할 것 같다.
  • 전쟁기념관 건설중단/총독부청사 철거촉구/민족운동사연구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회장 조항래)등 9개 역사연구단체는 9일 공동성명을 발표,전쟁기념관 건설중단과 옛 조선총독부 청사 조속철거를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성명서에서 『남북화해와 민족동질성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전쟁기념관 건설계획은 중지되어야 하며 그 기능은 기존의 군사전문박물관으로 옮겨도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현재 짓고 있는 전쟁기념관용 건물의 활용방안은 국민여론의 수렴을 거쳐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또 『민족의 정통성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는 옛 조선총독부 청사는 하루빨리 철거되고 경복궁이 복원되어야 하며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도 마땅히 빨리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명발표에 참여한 단체는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를 비롯,한국사연구회(회장 정창렬)한국상고사학회(회장 최몽용)한국고대학회(회장 이융조)한국미술사학회(회장 문명대)한일관계사연구회(회장 하우봉)동양사학회(회장 변린석)역사교육연구회(회장 신용식)한국사회사연구회(회장 신용하)등이다. 옛 총독부청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어 정부에서도 박물관을 이전한 뒤 그 건물을 철거 또는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중앙박물관 이전장소를 결정하지 못해 계획이 주춤한 상태이다.
  • 창씨개명뒤 버젓이 일본의 밀정노릇/서훈취소 심의대상 8인의 행적

    ◎총독부 단체에 참여… 학병지원 권유/김성주/「2·8선언」후 변절… 전국서 친일강연/서춘/친일계 신문인 「만선일보」에 몸담아/이은상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각종 훈·포장을 받았던 김성수씨등 8명에 대해 정부가 친일 여부를 정식 조사하고 있어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이들 모두가 부통령·국회의원등 고위공직을 지냈거나 언론계·문학계등에서 지도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국가사회 발전에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친일혐의가 새롭게 부각된 것은 전혀 아니다. 일부 학계인사와 사회단체등에서는 광복직후부터 이들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꾸준히 그 행적을 추적해 왔다. 다만 이승만정부 수립이후 좌­우 이념대립이 격화되면서 이승만정부가 친일여부를 가리지않고 마구 등용하는 바람에「친일파를 가려내 청산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뒷전으로 밀렸을 뿐이라고 할수있다. 따라서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재평가에 나서 이들「거물」들을 조사대상에 올린 것은 뒤늦게나마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결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반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해 관련학자·단체들이 조사·공표한 이들 각자의 친일행각을 보면 제1공화국에서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씨의 경우 1940년 10월27일 미나미 당시 조선총독이 결성한 총력동맹에 이사로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매일신보」「경성일보」등지에 학생들의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글을 실었으며 시국강연반에 들어 전국을 돌며 친일강연을 했다. 이갑성씨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였으며 초대 광복회장을 지낸 인물로 자유당정권에서 당의 최고위원과 국회의원을 지냈고 공화당 창당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상해에서 이와모토(암본)로 창씨개명한 뒤 일본의 밀정노릇을 했으며 미쓰비시사의 만주 신경출장소장,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촉탁으로 일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공적으로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윤치영씨는 초대내무부장관을 비롯,이후 역대정부에서 고위직을 누렸다. 윤씨는 그러나 독립운동을 한 시기로 인정받은 41년 12월20일 친일잡지「동양지광」이 주최한「미·영타도 좌담회」에 연사로 참석해『황국신민으로서 참전은 우리 어깨에 지워진 공정무사한 대사명』이라고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은상씨도 일제말 친일계 신문인「만선일보」에 재직한 사실이 있다. 이밖에 이번에 조사대상 8명에 포함된 서춘씨(매일신보 주필)는 이광수와 함께 2·8독립선언위원 가운데 친일파로 변절한 대표적 인물로 39년 7월 배영동지회 평의원,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지낸 외에 전국을 돌며 친일강연을 했고 승려인 이종욱씨는 총독부 지원으로 월정사 주지와 조선불교 종회의장을 지냈다. 윤익선씨는 서울 원서정 총대(현 동장)와 경성부 북부정회총대회 간사를 지냈으며 전협씨는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신임을 얻어 그의 추천으로 부평군수를 지냈으며 일진회 평의장도 역임했다. 반민족문제연구소 김봉우소장은『정부 차원에서 친일파 재조사작업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 구총독부 청사 철거계획 표류/중앙박물관 용산이전안 백지화따라

    ◎조선 정관 경복궁 완전복원도 차질 일제시대의 대표적 건물인 구조선총독부 청사(현 국립중앙박물관)를 경복궁내에서 철거하려는 방침이 벽에 부딪혔다. 건물철거에 앞서 이루어져야 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이전계획이 원점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주관부서인 문화체육부의 이민섭장관은 최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오는 97년까지 용산 미8군기지가 서울 밖으로 이전하면 그 땅 일부에 새로 국립중앙박물관을 짓는다는 계획을 세웠으나,6월초에 미군기지 이전이 백지화됨에 따라「중앙박물관 이전­옛 총독부건물 철거」등 모든 일정을 전면수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밝힌것. 이장관은 이어『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새 박물관을 먼저 지어야 청사철거가 가능한데 현재 마땅한 이전부지 마련을 못해「이른 시일내」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장관은 결국「총독부청사 철거」라는 원칙은 재확인하되 구체적인 계획추진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임을 시사한 셈이다. 옛 총독부 청사를 경복궁내에서 철거한다는 원칙은 전로태우대통령 시절 이미 국민적인 공감대 속에서 결정된것으로 볼수 있다. 광복 45주년을 맞은 90년 여름 학계및 사회단체 일각에서『일제의 상징인 총독부건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여론은 자연스럽게 조선조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일제의 잔재를 추방하는 것으로 모아진것. 중앙청 건물로 쓰이던 총독부 청사가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탈바꿈한지 3년만의 일이었다. 다만 89년 당시 학계에 논쟁이 일었던 것은 현재 위치에서 철거는 하되 그 건물을 파괴해 버릴 것인지,아니면 부끄러운 유산이긴 하나 역사적 유물이므로 이전·보존할것인지의 여부에 관한 것일 뿐이었다. 이후 새 중앙박물관 건립후보지로서 용산 미군기지 땅이 유력해졌으며 이는 지난 4월1일 이민섭장관의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공식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6월초 정부가 용산 미군기지 이전 방침을 기지예정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딛혀쳐 백지화하자「박물관이전 계획」도 자연 무산됐다. 미군기지이전 백지화이후 한때 민자당에서『현재 용산에 짓고 있는 전쟁기념관을 중앙박물관으로 전용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이는 정부측에 의해 가능성이 부인됐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자체가 불투명해져 총독부건물 철거는 더욱 불확실해진 상황이다. 한편 문화체육부는 총독부청사 철거를 전제로 오는 99년까지 경복궁을 완전복원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역시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총독부청사 철거계획이 이처럼 표류하자 학계 일부에서는『정부가 확고한 정책의지를 갖지 않는한 계획 자체가 백지화될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즉 박물관 이전장소가 조만간 결정되더라도 박물관기본설계에 2∼3년,건설공사에 3∼4년이 걸리는데다 그에 소요되는 예산이 수천억원대에 달할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철거 방침」을 표명한 현정부가 이를 이루지 못하면 앞으로 어떤 정부도「박물관 이전­옛청사 철거」를 손대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윤세주열사)

    ◎의용군 지휘… 중국 화북서 일군과 전투/중학때 연무단 조직,개천절시위 주도/일경수배 피해 망명… 조선의열단 결성/독립단체 규합… 40만명과 교전중 장렬한 최후 윤세주선생은 1901년 6월24일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강천리에서 부친 윤희규선생과 모친 김경이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성품은 겸손했으나 일본 식민지통치에 대해서는 온 생애를 통해서 저항할만큼 애국심이 깊었다. 윤선생은 국민학교때 일왕 출생 기념일에 받은 일장기를 변소에 버릴만큼 일본을 증오했다. ○독립선언서 낭독 그는 밀양의 사립 동화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김홍표교장의 영향을 받아 항일 정신을 키워갔다. 윤선생은 김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학교내의 비밀결사인 연무단을 조직했다.연무단은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됐다.그러나 윤선생의 가슴에 반일·배일사상은 영원히 남게됐다.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13일 하오1시쯤 수천명이 모인 고향장터에서 그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동지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그를 그냥 둘리 없는 일제의 당장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경찰의 수배를 피해 그는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은 그해 4월14일 부산지법 밀양지청에서 궐석재판으로 윤선생에게 징역1년6월을 선고했다. 만주로 망명한 그는 요령성 유하현에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국내의 독립운동 비밀단체인 신민회의 결의에따라 이회영형제가 세운 독립군양성 무관학교로 그는 이곳에서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그는 11월9일 죽마고우 김원봉등 13명의 학생들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구체적인 항일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의열단은 조선총독부등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원흉들을 살해 하기위한 계획을 세우고 폭탄투척자를 물색하게됐다. 19세의 그는 신철휴 윤치형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했다. 그러나 윤선생일행은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국내동지 50여명과 함께 체포됐다. 5년4개월의 감옥생활을하고 27년 출옥한 그는 중외일보 기자·경남주식회사사장으로 위장,독립운동에서 손을 뗀 양 조용히 지내다가 32년 여름 다시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 ○폭탄투척자 물색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방법도 세련되어갔다.그는 『과거에는 열정과 용기만을 갖고 싸웠으나 앞으로는 혁명적 인생관과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재무장, 정확한 혁명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그는 32년 10월20일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단 제6대(약칭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에 입교,33년 4월21일 1기로 졸업했다.독립운동전선의 행동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때였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연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한뒤 해외독립운동단체들을 참가시켜 그해 11월10일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을 결성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안병조·김두봉·김규식·윤기섭·최동오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이 단체는 33년 7월5일 독립운동가들이 소망하던 민족혁명단을 탄생시키는 모체가 됐으며 그는 이 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그는 또 민족혁명당이 일군에 무력으로 대항하기위해 만든 중국과 제휴해 만든 조선의용대에서도 핵심부서인 편찬위원회 주간이 돼 선전공작 활동을 벌였다.그러나 독립운동의 효과는 호전되지 않고 일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갔다.독립운동을 적극 협력해주던 중국 국민당 정부도 38년 10월25일 무한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부터는 중공군과의 내전에만 심혈을 쏟았다. 그는 직접 조선의용대 지대를 이끌고 중일전투에 참가했다.41년 4월에 그는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황하를 건너 화북을 향해 북상해갔다.그는 마침내 태행산 항일 근거지에 도착,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중공 8로군과 함께 항일 무장활동에 열중했다.그는 모든 대원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지휘자로 존경을 받았다.42년2월 일본군은 4만명의 군대를 동원,태행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5월에는 20개사단 40만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조선의용군은 불과 3천∼4천명에 불과했다. ○“끝까지 투쟁” 유언 일본군은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본격적인 군사작전을 폈다.5월29일 항일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대에 탈출로를 확보하고 탈출할 것을 명령했다.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확보하기위해 두 산봉우리를 조선의용군이 공격,전군이 탈출할 때까지 사수하기로 했다.작전개시 5시간만에 탈출로를 확보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진 그를 발견했으나 이미 중태였다.6월3일 그는 석굴에서 숨을 거두었다.『단결해서 적을 사살하기 바란다』는게 동지들에게 남긴 그의 유언이었다.선생의 나이 41세였다. 선생이 전사한 뒤 1주년이된 43년 6월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군은 합동으로 윤선생의 추도회를 가졌다.대한민국정부는 80년 윤세주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반민족연 김봉우소장 「친일파 99인」 3권 완간(인터뷰)

    ◎“친일인사에 대한 종합 심판서죠”/총독부·경찰서 자료 토대… 정확도 자신 『역사상 식민지 치하에서 벗어난뒤 반역자를 처단하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이처럼 사회 전반에 기강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이 책은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친일파에 대한 심판서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제하 분야별 주요 친일인사에 대한 친일이력서라고 할수 있는 「친일파 99인」 전3권(돌베게간)을 최근 완간한 반민족문제연구소 김봉우소장(46)은 『친일 인사에 대한 최초의 심판서가 이제서야 처음 나온데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 책은 분명 민족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연구 결과입니다.그러나 자기 부정성에 대한 연구는 자기 사랑과 자기 긍정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당연한 욕구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친일파 99인」은 제목 그대로 일제하의 각계 인사 99명에 대한 친일 기록이다.정치와 경제,사회·문화 등 3권으로 묶여진 이 책에는 이완용과 송병준,박영효에서 부터 이능화,김활란,황신덕,모윤숙,현제명에 이르기까지 각계인사들의 친일기록이 담겨있다.이 책은 또 박흥식과 김기창 등 아직 생존하고 있는 인사들의 친일기록까지 싣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연구소의 목표는 사실 「친일 인명사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2만5천명에 달하는 친일인사의 기록을 사전으로 남긴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지요.그래서 사전을 만들기 위한 예비작업을 겸해 사전을 만드는데 대한 국민적 동의를 구한다는 목적에서 이 책을 기획하게 됐습니다』 반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파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지난 19 91년2월 발족됐다.「친일 인명사전」역시 임선생이 당초 소규모로 구상했던 것을 연구소가 발족된뒤 의욕적으로 범위를 크게 넓힌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을 위해 처음에는 친일인사 2천명을 추렸지요.다시 2백명을 고른뒤 다시 종합적인 점검을 거쳐 마지막으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친일인사 99명을 골라냈습니다.99명을 골랐다는데 대해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미완의 작업을 뜻한다고나 할까요.1백명을 골랐다면 친일인사선별작업이 어느 정도 완료됐다는 느낌을 줄수 있으니까요』 이 책이 발간된뒤 책에 실린사람들의 후손으로 부터 어느 정도의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연구소측이 책의 내용의 정확도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생존하고 있는 인사들로 부터는 아무런 반발이 없었다는데 있다고 했다.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내용은 개인적인 진술이나 소문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나 경찰서 등 관청에서 발간한 자료를 기초로 했기 때문이다. 반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책의 완간에 이어 이미 「친일 인명사전」과 「친일파 총서」를 펴내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이 작업은 과거에 있었던 친일인사 규명작업에 대한 공포와 가능성에 대한 회의,시간적으로 너무 늦지않았느냐는 역사인식에 대한 무지를 극복해 나가기 위한 것입니다.그래야 민족의 자주성이 회복되고 주체성도 비로소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김소장은 「친일파 99인」이 많이 팔려 앞으로의 작업에 국민적 격려가 되고 경제적으로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면서 웃었다.
  • 도예가 황종례씨(이세기의 인물탐구:23)

    ◎예술혼 담긴 「귀얄문양」 대가/탁월한 기품·여성스런 섬세함 한획으로 표출/망망대해·일렁이는 갈대숲 등 깊은맛 일품/32세 “늦깎이” 입문… 남을 의식않고 제작에만 몰두 벽제의 하늘은 아름답다.청자의 비색처럼 영롱하다.산자락에 걸친 구름은 분청사기의 문양인듯 엇비슷 비껴있다.이곳이 바로 현대도예에서의 일인자 위치를 지키는 도예가 황종례씨의 작업실이다.절간같은 고요,사람의 기척이라곤 별로 없이 작가 혼자서 흙으로 성형하고 소성한 도예에 그림을 그릴 뿐이다. 그가 벽제에 온것은 72년 초봄이다.그때까지만 해도 진흙구덩이가 푹푹 패이는 삭막한 황무지였으나 도심에서는 가마를 가질수가 없어 일찌감치 이곳 정착을 서둘렀다. 그리고 드넓은 터에 장작을 때는 흙가마와 기름을 때는 현대식 가마를 갖추었다.그로서는 가마를 갖게된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그동안 축적한 것을 이뤄나가면 그만이다. 새벽 6시면 그는 벌써 작업실로 내려온다.직접 흙을 반죽하고 까다로운 여러 공정을 거쳐 유약칠과 채식에 들어가 한 획으로 문양을 넣기 시작한다.물론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의 도예에서의 특징은 귀얄문양이다.그는 이 과정에서는 거의 몰아의 경지다.느긋하고 너그러워 호들갑스러운 데가 전혀 없으나 이때만은 비호처럼 날쌘,귀신같은 솜씨를 발휘한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그 순간을 포착하기 힘들다.그때도 그의 얼굴표정에는 온화한 여유가 만만하다. 처음에는 힘없는 붓이 자꾸 흙에 달라붙어 기면의 흡수에 비해 둔한 붓놀림이 따르지 못하자 유화붓을 쓰거나 강도가 센 페인트 붓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귀얄만으로 능란하게 그림을 구사하게 되었다. 귀얄문의 특징은 그릇의 표면이나 내면에 속도감있게 붓자국을 내며 돌리지않으면 습기있는 기면이 당장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단숨에 그릴 수 있는 기량과 기술이 필요하다.그릇의 한면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미리 구상해두었던 그림을 일순간에 성립하는 식이다. ○분청사기에서 힌트 옥색하늘이 아득히 푸르르고 망양한 바다와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숲,희미한 새벽 서광과 붉게 타는 낙조등 도예기가 보여주는 회화세계는 화선지에서와는 다른 그나름대로의 참신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다.안료의 농도에 따라 얼마든지 절묘한 표현을 자유자재롭게 만들어 나갈수 있는 것도 한 장점이다. 물론 이런 필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그는 60년대 초부터 청전 이상범에게 붓놀림과 먹의 농담이용법,옥산 김옥진에게 사군자,오당 안동숙에게 풀 나무 산과 바위를 사사하면서 수년간 자기표현을 위한 기초적 탐색을 감행해 왔다. 그의 귀얄무늬는 물론 분청사기에서 쓴 귀얄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고려상감(상감)같은 상감을 이용한 화장법을 거쳐 분청사기의 귀얄무늬를 추상적 회화로 모색해 나갔다. 그 시절의 그런 그릇에 왜 귀얄 붓자국을 썼는가,시간틈틈이 골동품가게나 박물관을 기웃거리며 관계서적과 도록을 빌려다가 밤을 지새워 연구하기도 했다. 발이나 호·기에다 투각수법의 무늬로 부분장식을 표현하거나 단일색인 소문백자의 경우엔 부드럽게 흐르는 몸체에서 무한한 품위가 배어나왔다. 더구나 화사기에서 쓰이던 회청·회회청의 코발트색깔은 지금도 창조하기 힘든 기발한 색조임에 스스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꽃잎흩날리는 비화문이며 풀잎 나뭇잎 얼킨 초엽문의 활달한 율동감,살얼음이 깨어진 듯한 빙렬등은 현대도예에서도 시도해 봄직한 분방한 방법임에 틀림 없었다. 황종례의 그릇의 형태는 비교적 큼직하고 대담한 편이다.쑥쑥 뻗은듯 휘어진 곡선을 지니면서 탁발한 기품과 여성적인 섬세함을 담고 있다.너무 작아 조잡하거나 너무 우람하여 넘치지 않는다.야무진 티나 인위적인 기교는 없다.꾸미지않은 순결함속에 오랜 전통을 바탕에 둔 든든한 경륜의 실력이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안심과 환희를 안겨준다. 도예의 기물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악하자 이번엔 좀더 새로운 세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시도에 앞장 섰다.무한한 가능성에 비해 시간이 짧기만 했다. 몇사람 되지않는 창작도예에서 「독자성」을 두루 인정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도예의 길은 멀고 그리고 어렵다』고 말한다. ○성취가 일생 과제로 고전하여 어렵게 이룬것만큼 높이 평가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도무지 그런 울결(울결)과 방종에서 벗어나 흔연한 자세다. 남에게 관심을 갖거나 남을 의식하지도 않는다.그런 자자분한 세상사에 눈돌릴 겨를이 없다.예술가의 자세란 작품에 밀착하여 새 세계에 도전하는 일,그리고 성취만이 평생의 과제이며 목적이다. 그는 인건비등으로 다투는등 사람들에게 시달리기도 싫어 인부들과 손을 끊고 몇년전부터는 흙만드는 일을 직접하고 있다. 12번째 개인전을 연후 수많은 해외전시에 참가,틈틈이 86년 13번째의 개인전을 앞두고 준비해온 1천여점의 작품을 하루 아침에 망친 사건이 있었다. 어느때보다 실험작품이 많아 스스로 기대에 부풀었던 그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허허!」 한바탕 웃는 것으로 이를 단념해 버렸다.이미 끝난것에 집착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원인은 간단하다.필요한 양을 정확하게 혼합하는 과정에서 인부들이 물과 흙의 분량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이를 지켜보지못한 자신의 불찰로 돌렸다.광주나 이천에 나가면 만들어진 흙을 얼마든지 사다 쓸수 있는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직접만들어 쓰려다가 생긴 이 낭패가 그로서는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그후론 아직 결혼전인 차남(영학씨·조각·상명여대 출강)이 어머니를 돕고 있다.엎친데 덮친격으로 같은 시기에 그의 도예일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던 부군 이진우박사(전 영동피부과 제일의원)가 몸져 눕는 바람에 한동안 간호에 매달리느라 이럭저럭 작업을 미룰수 밖에 없었다. 황종례씨는 고려청자의 재현이라는 전통도예를 가업으로 가진 황인춘씨를 부친으로 역시 원로 도예가인 황종구씨(전 이대교수)가 그의 오빠다. 어릴때 영등포 대방동에 있던 그의집 과수원속에 부친의 가마가 있었고 그는 그릇을 빚고 건조시키고 조각하고 백토칠에다 다시 이를 벗겨내고 유약등 까다로운 작업을 지켜보는 유년시절에도 하나의 사기나 파와(파와) 한쪽을 어루만지면서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옛 고려왕조·이조왕조의 생활이 따뜻하게 전해졌다고 기억한다. 그후 국민학교 1학년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가족이 강제로 개성에 이주,일인들이 선죽교부근에 마련해준 연구소에 살면서 호수돈여고에 다녔다. 미대진학을 꿈꾸며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스승이던 유달영선생의 가르침은 「버려진 제것에 대해 눈뜨라」는 것이었고 특히 졸업을 앞두고 「청년이어 일어나라」는 교훈은 그에게 「나도 무엇인가 나의 일을 하겠다」는 의욕을 심어주었다. 집안형편이 극도로 어려웠으나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있는 이대미술학부에 진학,어릴때 손바닥 감촉으로 느꼈던 사기의 온기를 못잊어 대학졸업 9년만인 32살때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도예를 전공했다.그때도 부군이 그의 협력자가 되어주었다. 대학원 졸업전인 61년에 첫 개인전,청자의 태토에 백토로 분장하고 그곳에 단숨에 귀얄문을 그려내는데 매력을 느낀것은 68년 6번째 개인전때부터다. ○“독보적 존재” 평가 「청·백자의 선이 아무리 탁발하다 해도 이를 단순히 재현하는데 그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조작적이고 기교적이 아닌,이른바 이조자기에서 볼수 있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멋』을 담아 새롭게 선보였다. 실내장식품에 지나지 않던 도예를 널리 일상생활에 참여시킨일종의 도예의 활성화 시도였다. 『몇 안되는 창작도예를 만드는 도예가중에서 독자적인 색유사용으로 새 경지를 개척해 왔다는 점에서 황종례는 현대도예에서 단연 독보적 존재』라는게 미술평론가 박래경씨의 평이다.1천여점 작품실패로 9년간 미뤘던 13번째 개인전은 오는 13일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리게 된다. 흰색으로 시작됐던 그의 귀얄문은 더욱 다양한 아름다운 색깔로 변모되었고 매끄러운 표면은 입체감과 함께 품위있는 추상회화로 조형효과를 이뤄내고 있다. 청자빛 하늘과 파도치는 바람,흩날리는 꽃잎등 조선시대의 사람의 감정과 미의식을 담은 그의 현대적도예 세계는 그의 성격처럼 온유하고 따뜻하여 번거로움과 무질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인정과 사색,그리고 은은한 기쁨을 넉넉하게 뿌려주는 안식의 경지다. □연보 ▲1927.12.9 서울출생 개성호수돈녀고 26회 졸업 ▲1945.∼1950.5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 미술학부 서양화과(학사) ▲1959.9∼1962.2 이화녀자대학교 대학원(도예전공·석사) ▲1963∼19 81 이화녀자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 출강 ▲1965.3∼1966.2 상명녀자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조교수 ▲1975.3∼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공예미술학과 교수 ▲1961.12 도예개인전(서울중앙공보관) ▲1963.10 도예개인전(〃) ▲1964.11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6.5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7.8 도예개인전(미팔군전시장) ▲1968.8 도예개인전(일본,경도 조화랑) ▲1971.9 도예개인전(신세계백화점 전시장) ▲1975.4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78.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81.1.20 도예개인전(미국 뉴욕) ▲1982.1.29 도예개인전(미국 로스앤젤레스) ▲1984.4.24∼4.2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61∼1983 대한민국 미술전 출품 ▲1968.7∼1981 대한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디자인 포장센터)심사위원 ▲1973 한국현대도예작가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5 전국공예가 초대전(미술회관)문예진흥원 주최 ▲1976 여유도예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7 역대 국전수상작품전(국립현대미술관) ▲1979 한·중·일 국제도예전 초대출품(일본명고옥) ▲1979 한국도예가회 창립전(신세계 미술관) ▲1979 한국미술전람회(뉴질랜드) ▲1980.9.27 한국도예가전 회원전 2회(신세계미술관) ▲1980 국전 초대출품(국립현대미술관) ▲1980.7.10∼7.16 도예2인전 일본 매일신문사 주최(일본 동경도 대환백화점) ▲1981 한국도예가회 회원전 3회(신세계미술관) ▲1982.3.6 도예2인전(일본 구주 복강시) ▲1983 도예2인전(일본 대판시) ▲1984.3.15∼3.20 도림전 출품 ▲1981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81∼1990 현대도예전 일본 순회전(10연간) ▲1982 제1회 대한민국미술제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82 서울신문사도예공모전 초대출품·심사위원,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출품(미국) ▲1982 한국현대도예가 회원전 9회(신세계미술관) ▲1983 한독수교 100주년기념출품(독일) ▲1983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68.8 국제미술교수협회 주최 도예세미나(일본,경도) ▲1975.5 한국도예특강 초대(일본 요업시험소) ▲1980.2 자유중국 교육시찰 ▲1983.8.2∼8.20 한일교류전 출품및참가(일본 구주)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주최 ▲1983.12 MBC초대전 출품(MBC별관 전시관) ▲1986.9 한국현대도예가회 일본 전시 ▲1987.6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출품 ▲1987.8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출품및 참가(일본 구주) ▲1987.9 서울신문사주최 도예공모전 심사및 초대출품 ▲1989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및 운영위원장 ▲1988 대한산업미술가 협회 이사장 역임 ▲1990 서울현대도예비엔날례 초대출품 ▲1991 대한민국 미술협회 부이사장 ▲1992 서울 공예대전 출품 ▲1993 벨기에 앤트워프 박물관 주최 ▲1993.3.26 한국도예문화 특별전 출품 ▷작 품 집◁ 황종례 도예작품집(미진사간) ▷수상◁ 국무총리상·국전 초대작가상·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현재◁ 경희대 수원캠퍼스 출강·대한미술산업가협회 회원·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이사
  • 경복궁 복원(외언내언)

    91년 경복궁 복원10개년계획에 따라 경복궁공사가 시작됐을때 일본의 근대 건축사 연구모임인 명치연구회는 「총독부 건물은 아시아 근대건축사상 매우 가치있는 건물이니 허물지 말고 보존해 달라」는 건의를 했었다.「매우 가치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매우 미묘했던」이 요청에 대해 「그렇게 가치있다면 일본으로 가져갈 일이지」하는 국내 반응이 있었다. 경복궁 완전복원결정과 함께 정부는 그동안 걸림돌이 돼왔던 구총독부 건물을 드디어 헐어버리기로 한 모양이다.그러나 철거­해체는 몰라도 뒤이어 「이전­보존」이 왜 거론돼야 하는지 이 시점에서 다시한번 되짚어 볼 일이다. 일제는 한민족의 선대왕조에 대한 향수를 말살하기 위해 경복궁을 헐고 그자리에 이나라를 침략하여 점령했다는 증거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우뚝 세웠다.우리는 일제가 지은 이 건물을 헐어 버리고 경복궁을 본래의 자리에 당당하게 복원시키겠다는 것이다.한데 총독부건물 이전­보존이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이 건물을 상징적으로 남겨놓고 이를 바라볼 때마다 일제 강점하의 치욕의 역사를 상기하며 민족 정기를 일깨운다는 말은 논리의 모순에 지나지 않다.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 시커먼 돔을 쓰고 도도하게 서있는 일제잔재의 망령속에 민족의 유장한 얼과 숨결,조상의 슬기,향기 담긴 국보급 보물들을 진열하고 있는 것도 수치스러운 노릇이다.한국의 국립박물관은 하늘을 행해 치솟아오르는듯한 우리 고유의 담단의 건물이 바람직하다. 치욕의 역사를 인정하는 방법은 경복궁을 새로 짓고 「이 자리에 19 26년10월 일본 재등실(사이토)총독때 조선왕조의 맥과 한국민족 정기를 끊으려던 총독부건물이 들어서 있었다」는 기록만으로 충분하다.총독부 건물도 「사진 한장」이면 그만이다. 일본건축가들이 보기에 「매우 가치있어 보이는」 건물이 우리가 보기엔 「민족적 자존심을 몹시 건드리는 건물」에 지나지 않아 이전­보존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그런 비용이 있다면 새로운 국립박물관이나 지을 일이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2)

    ◎암흑속의 공로/언어탄압에도 우리말 지켜와/한국최초의 여기자 1920년에 선발/인신매매 비리 등 추적… 언론기능 수호 한일합방후 그 제호에서 「대한」을 떼버리고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한 매일신보(1938년부터 매일신보로 개제,이하 「매신」으로 통칭)는 일제의 한국병탄을 합리화하는데 이용됐다.민족의 존재를 부인한 언론으로 오욕의 역사를 대변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그래서 민족주의적 입장의 신문사 연구학자들 가운데는 일제통치하에서 민족지가 존재하지 않던 1910∼20년,1940∼45년의 두 시기를 「무신문기」로 분류하는 이도 있다. ○일제치하 1차사료 그러나 정진석교수(외국어대)는 그의 저서 「한국언론사」에서 ▲민족지가 없던 시기의 1차사료 ▲민족지와의 비교 대상 ▲우리 언론인및 문인들의 피난처및 발표지면 제공등의 이유를 들어 매신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매신은 비록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보도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지만 사회·문화 보도에 있어서는 문제점을 적시,총독부의 그릇된 정책을 일깨우기도 했다.그리고 일제말기 우리글 말살정책하에서 유일한 한글매체로 우리글 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신은 또 조선 동아의 강제폐간으로 오갈데 없어진 당시 언론인들의 은신처로 제공돼 그들이 해방후 민족정론을 펼칠수 있는 기반을 닦을수 있도록 했다.특히 최초로 기자공채제도를 도입,여기자를 채용하는등 부분적으로는 신문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도 부인할수 없는 것이다. 매신은 인재의 폭넓은 등용을 위해 최초로 기자공개채용을 실시했다.이는 당시 아는 사람의 소개등으로 신문기자가 되던 관행으로는 혁신적인 것이었다.매신의 첫 기자채용은 1918년 이다.이무렵 홍란파와 유지영이 매신에 합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들은 후에 음악도로 이름을 날렸는데 당시 신문사는 시인 소설가뿐 아니라 음악·미술학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예술인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그후 기자공채가 지상에 보도된 것을 중심으로 보면 20년7월,29년8월,35·36·38·39·40년 1월에 이뤄져 비교적 정기적으로 이뤄졌음을 알수 있다. 40년 이후에도 여러차례 견습기자를 모집했다.매신보다는 10여년 늦은 민간지는 조선일보가 1930년에 처음으로 기자를 공채했으나 그나마 지속시키지 못했던데 반해 매신은 공개채용의 제도화와 함께 타사와의 활발한 기자교류도 시도했다.당시 기자채용의 자격요건은 전문학교 졸업자로 초기에는 30세미만이었으나 40년부터는 27세로 연령을 낮추었다. ○인재를 폭넓게 등용 기자공채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여기자 공채였다.매신 20년 7월2일자에는 부인기자를 채용한다는 사고가 실려있다.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 탄생을 알리는 신호같은 것이었다.당시의 사고는 부인기자의 채용이유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부인계의 해방을 위해 가정개량및 부녀개조의 완벽을 기함에는 현숙박학한 숙녀의 책임있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시세의 요구」때문이라고 강조했다.또 응시자격은 ①가장있는 부인 ②20세 이상 30세 이하 ③고등보통학교 졸업정도 이상으로 문필취미가 있는 부인등으로 못박았다. 이무렵은 조선과 동아가 창간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때다.그때까지 유일한 우리말 신문으로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던 매신은 경쟁상대들의 출현으로 편집국을 개편하고 그들과의 차별화와 새로운 이미지를 심기위한 노력을 기울였다.여기자채용은 그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지만 여자들의 문밖출입마저 철저히 금하고 있던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 여성의 기자직 진출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때 뽑힌 여기자가 이각경이다.지금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로 알려져온 최은희(1924년 조선일보 입사)보다 4년이 앞섰다.1897년 2월 서울에서 출생한 이각경은 한성여자고등학교(현경기여고) 기예과와 사범과를 나와 2년간 교편생활을 하다 매신에 입사,9월5일 정식으로 발령을 받았다.그녀는 9월14일자부터 기사를 쓰기 시작해 「부인기자의 가정방문기」「축첩에 대한 이해」「위생에 대한 주의」를 비롯,가정·여성·아동·교육문제등 수많은 기명기사를 남겼다. 총독부기관지로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신의 기자들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파헤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30년대말 「기생 박애란 음독자살사건」은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권번기생 출신인그녀는 24세때 돈많은 지주의 소실로 가게 되었다.그러나 그녀는 따로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끝까지 거절하자 기생어미가 그녀를 창녀굴에 팔아넘기려 했다.그러자 머리물들이는 약을 입에 털어넣고 자살한 사건이었다.매신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신매매가 공공연하게 허용되고 있는 사회비리에 초점을 맞춰 심층보도했다. ○사회의 문제점 고발 그 결과 한달후 총독부령으로 전국적인 인신매매행위 엄단이 공포되었고 현재 빚에 묶여있는 기생이나 창녀들을 무조건 해방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지기에 이르렀다.또 「용인보통학교 생도구타사건」도 비슷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용인 어느 학교 3학년생이 수업료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인 교사에게 매를 맞고 늑골이 부러졌는데 이를 항의하던 생도의 아버지도 교장에게 구타를 당한 사건이었다. 생도가 서울 의전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독자의 제보를 받고 뛰기 시작,사건의 전모와 학생체벌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보도를 했다.결국 보도가 나간지 얼마 안돼서 그 교장과 교사가 파면되었으며 각급학교에 생도들에 대한 체벌을 경고하는 지시가 내려졌다. ○40년대 45만부 발행 매신은 40년대들어 일제의 우리 언어말살정책에 따라 각급학교에서 우리말을 못가르치게 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일체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시킨 상황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켜나간 유일한 매체였다.이때문에 전쟁중 45만부에 달하는 엄청난 부수 신장을 가져오기도 했다. 매신은 또 조선 동아가 폐간당하자 해고된 수많은 언론인들에게 호구지책이든 호신지책이든 일종의 피난처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매신은 전쟁중 어려운 시기에도 자체 감원이나 감봉없이 사원들을 안정시켰다.그리고 오갈데 없어진 언론인들을 포용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이무렵 매신에 들어온 대표적 언론인들은 백철 정비석 정현웅 이관구 우승규 서승효 김규택 조풍연 곽복산 조경희 노천명 이홍식 박종수 홍종인씨등이다.이들은 광복후 대한민국의 문화·언론계를 이끌어나간 인재들이기도 했다.매신은 이들이 좌절하지 않고 때를 기다릴수 있도록 피난처를 제공해준 것이다. 매신이 총독부기관지라는 굴레속의 언론이라는 사실은 결코 숨길수 없다.그러나 일제통치 기간중 한번도 중단됨없이 우리말 신문의 위치를 지키는 가운데 많은 역할들을 수행해 왔다는 점에서 그 존재가치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한국언론사」(정보석·나남 1990) 「언론비화 50편」(한국신문연구1978) 「한국언론인물사화」상·하(대한언론인회 199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