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조선총독부
    2026-03-31
    검색기록 지우기
  • 환경 전사
    2026-03-31
    검색기록 지우기
  • 투자 감소
    2026-03-31
    검색기록 지우기
  • 니콜라스
    2026-03-31
    검색기록 지우기
  • 시장 변동성
    2026-03-3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107
  •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 풀 열쇠는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 풀 열쇠는

    ’이사지왕’ ‘환두대도’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일까. 지난해 발견한 신라시대 칼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발굴한 지 80년이 더 지난 신라시대 칼을 느닷없이 수장고에서 꺼내놓고는 이를 찬 주인공은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고 발표했다. 이 칼에서 이사지왕이라고 적힌 글자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이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왕의 인명 표기와는 대응하기 힘든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를 두고 호기심이 일었고,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박물관이 이 칼과 칼이 발굴된 경주분지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금관총을 주제로 하는 테마전을 마련한다. 오는 8일 이곳 중근세관 테마전시실에서 개막해 오는 9월 28일까지 계속할 기획전 ‘금관총과 이사지왕’에는 문제의 문자가 적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을 필두로 금관총의 다른 유물을 한자리에 모은다. 금관총은 1921년 경주의 한 민가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금관을 출토함으로써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이 대학 고고학교실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이 발굴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는 ‘금관총과 그 유보(遺寶)’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1924년 5월 ‘본문 상책’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도판 상책’이, 그리고 1928년 ‘도판 하책’이 교토에 근거지를 둔 출판사 지교도(似玉堂)에서 출판됐다. ‘본문 하책’은 예산 부족으로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 총독부가 아닌 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가 자금 지원을 해서 저자는 하마다의 이름으로 ‘경주의 금관총’이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출판사는 같은 지교도. 금관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금관총 유물들은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국립박물관에 수장돼 전해지다가 지난해서야 박물관이 환두대도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데 이어 같은 금관총 출토 다른 칼과 칼 부속구에서도 ‘八’(팔), ‘十’(십)과 같은 글자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번 테마전은 금관총의 발견 과정과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교토대학이 보관하던 금관총 보고서 원본도 나온다. 박물관 측은 “이 자료를 보면 당시 금관총 보고서가 어떻게 작성되었고 일본인 연구자는 어떤 부분에 많은 관심을 지녔는지 잘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전시실 중앙에는 금관총 유물 출토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했으며, 그 주변으로 이사지왕 큰칼과 금관총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배치한다. 전시품 중 고구려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사이호와 초두(용기의 일종)는 주목거리다. 오키나와 해역 일대에서 서식하는 고둥 일종인 ‘이모가이’로 만든 말띠꾸미개(운주<雲珠>)도 선보인다. 테마전과 연계해 11일 오전 10시~오후 6시 박물관 소강당에서는 관련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다. ’이사지왕’ ‘환두대도’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일까. 지난해 발견한 신라시대 칼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발굴한 지 80년이 더 지난 신라시대 칼을 느닷없이 수장고에서 꺼내놓고는 이를 찬 주인공은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고 발표했다. 이 칼에서 이사지왕이라고 적힌 글자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이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왕의 인명 표기와는 대응하기 힘든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를 두고 호기심이 일었고,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박물관이 이 칼과 칼이 발굴된 경주분지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금관총을 주제로 하는 테마전을 마련한다. 오는 8일 이곳 중근세관 테마전시실에서 개막해 오는 9월 28일까지 계속할 기획전 ‘금관총과 이사지왕’에는 문제의 문자가 적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을 필두로 금관총의 다른 유물을 한자리에 모은다. 금관총은 1921년 경주의 한 민가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금관을 출토함으로써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이 대학 고고학교실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이 발굴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는 ‘금관총과 그 유보(遺寶)’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1924년 5월 ‘본문 상책’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도판 상책’이, 그리고 1928년 ‘도판 하책’이 교토에 근거지를 둔 출판사 지교도(似玉堂)에서 출판됐다. ‘본문 하책’은 예산 부족으로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 총독부가 아닌 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가 자금 지원을 해서 저자는 하마다의 이름으로 ‘경주의 금관총’이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출판사는 같은 지교도. 금관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금관총 유물들은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국립박물관에 수장돼 전해지다가 지난해서야 박물관이 환두대도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데 이어 같은 금관총 출토 다른 칼과 칼 부속구에서도 ‘八’(팔), ‘十’(십)과 같은 글자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번 테마전은 금관총의 발견 과정과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교토대학이 보관하던 금관총 보고서 원본도 나온다. 박물관 측은 “이 자료를 보면 당시 금관총 보고서가 어떻게 작성되었고 일본인 연구자는 어떤 부분에 많은 관심을 지녔는지 잘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전시실 중앙에는 금관총 유물 출토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했으며, 그 주변으로 이사지왕 큰칼과 금관총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배치한다. 전시품 중 고구려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사이호와 초두(용기의 일종)는 주목거리다. 오키나와 해역 일대에서 서식하는 고둥 일종인 ‘이모가이’로 만든 말띠꾸미개(운주<雲珠>)도 선보인다. 테마전과 연계해 11일 오전 10시~오후 6시 박물관 소강당에서는 관련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가 ‘금관총 연구와 마립간기 신라 사회’를 주제로 하는 기조강연을 하는 데 이어 ▲ 일제강점기 금관총의 발견과 의의(김대환) ▲ 금관총 출토 이사지왕명 대도의 보존처리(권윤미, 이상 국립중앙박물관) ▲ 신라 적석목곽묘 연구와 금관총(박광열, 성림문화재연구원) ▲ 이사지왕명 대도와 신라 고분 출토 문자 자료(이용현, 국립대구박물관) ▲ 이사지왕과 금관총의 주인공(김재홍, 국민대) 같은 발표가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사지왕, 과연 누구인가…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는?

    이사지왕, 과연 누구인가…신라시대 환두대도의 주인 이사지왕의 정체는?

    ’이사지왕’ ‘환두대도’ ‘이사지왕’은 과연 누구일까. 지난해 발견한 신라시대 칼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왕’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발굴한 지 80년이 더 지난 신라시대 칼을 느닷없이 수장고에서 꺼내놓고는 이를 찬 주인공은 ‘이사지왕’(爾斯智王)이라고 발표했다. 이 칼에서 이사지왕이라고 적힌 글자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이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왕의 인명 표기와는 대응하기 힘든 이사지왕이 누구인지를 두고 호기심이 일었고,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박물관이 이 칼과 칼이 발굴된 경주분지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인 금관총을 주제로 하는 테마전을 마련한다. 오는 8일 이곳 중근세관 테마전시실에서 개막해 오는 9월 28일까지 계속할 기획전 ‘금관총과 이사지왕’에는 문제의 문자가 적힌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을 필두로 금관총의 다른 유물을 한자리에 모은다. 금관총은 1921년 경주의 한 민가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금관을 출토함으로써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이 대학 고고학교실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이 발굴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는 ‘금관총과 그 유보(遺寶)’라는 이름의 보고서로, 1924년 5월 ‘본문 상책’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도판 상책’이, 그리고 1928년 ‘도판 하책’이 교토에 근거지를 둔 출판사 지교도(似玉堂)에서 출판됐다. ‘본문 하책’은 예산 부족으로 결국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1932년 총독부가 아닌 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가 자금 지원을 해서 저자는 하마다의 이름으로 ‘경주의 금관총’이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출판사는 같은 지교도. 금관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금관총 유물들은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국립박물관에 수장돼 전해지다가 지난해서야 박물관이 환두대도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한 데 이어 같은 금관총 출토 다른 칼과 칼 부속구에서도 ‘八’(팔), ‘十’(십)과 같은 글자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번 테마전은 금관총의 발견 과정과 ‘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교토대학이 보관하던 금관총 보고서 원본도 나온다. 박물관 측은 “이 자료를 보면 당시 금관총 보고서가 어떻게 작성되었고 일본인 연구자는 어떤 부분에 많은 관심을 지녔는지 잘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전시실 중앙에는 금관총 유물 출토 모습을 그래픽으로 재현했으며, 그 주변으로 이사지왕 큰칼과 금관총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배치한다. 전시품 중 고구려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사이호와 초두(용기의 일종)는 주목거리다. 오키나와 해역 일대에서 서식하는 고둥 일종인 ‘이모가이’로 만든 말띠꾸미개(운주<雲珠>)도 선보인다. 테마전과 연계해 11일 오전 10시~오후 6시 박물관 소강당에서는 관련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식민사관 논란/문소영 논설위원

    사관(史觀)은 역사적인 현상을 파악해서 이를 해석하는 태도와 입장을 말한다. 1910년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45년 해방을 맞은 뒤로 한국의 역사해석은 예민하고 까다롭다. 조선인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로 공부했고, 일본인 교사에게도 배웠다. 이때 조선인은 어떤 내용을 배웠을까. 일본은 조선과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내세웠으나 현실은 식민지배자로서의 일등 국민 일본인과, 피지배자로서의 이등 국민인 조선인을 나누고 차별을 당연시했다. 일본이 조선을 쉽게 지배하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인은 열등한 민족이란 인식을 의식·무의식에 심은 것이다. 이른바 ‘식민사관’이다. ‘조선인은 게으르다’거나 ‘조선인은 단결할 줄 모른다’, ‘일본의 조선 지배는 신의 뜻’, ‘조선은 당파 싸움으로 허송세월하다 망했다’는 식의 왜곡과 망언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식민사관의 대척점에 민족주의 사관이 놓여 있다. 대한제국이 망해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 신채호, 박은식이나 정인보와 같은 학자·언론인들은 일본의 조선총독부 역사왜곡에 대항해 조선 민족의 우수성과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특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던 박은식은 ‘동명성왕실기’, ‘한국통사’를 쓰며 민족혼을 고취하려고 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나 에릭 홉스봄과 같은 서양 학자들은 민족이란 근대국가들이 탄생하면서 만든 허구이자 가상의 공동체로서 이 공동체를 지탱하는 민족적 전통도 불과 100~200여년 전의 역사를 가진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에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독립한 나라들에서 민족이란 ‘가상·허구의 공동체’가 아니라 핍박과 고통을 함께 견디고 마침내 정의가 승리함을 스스로 입증한 집단으로 공고화될 수밖에 없다. 특히 제국주의 침략을 반성하지 않는 이웃나라가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각국 보수의 철학적 기반은 민족주의 사관이다. 자국민이 너무나 우수하고 뛰어나다고 미화하기 바쁘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는 자국민을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 발언의 기초도 일제의 식민사관과 그대로 일치하기 일쑤다. 책임총리로 최근 박근혜 정부가 지명한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발언처럼 말이다. 요즘 사회문화 코드로 ‘의리’가 유행이다. 의병·독립운동가에게 의리를 지키지 않으면 과연 대한민국 총리라고 할 수 있을까. 일본의 총리가 아닌 대한민국의 총리가 되려면 마땅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헌법 전문의 정신에 합당할 만한 역사의식과 정치철학, 한민족적 기상을 지녀야 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역동의 근대사 속 왜곡된 궁궐의 실체

    우리 궁궐의 비밀/혜문 지음/작은숲/290쪽/1만 5000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역사는 수난과 극복의 기록이다. 1392년 조선왕조의 탄생과 함께 만들어진 광화문은 약 200년 뒤인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 사라졌고 그 뒤 270년 동안 폐허로 존재했다. 광화문을 중건한 것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왕조의 중흥을 꿈꾸며 추진한 경복궁 중건(1868년)으로 광화문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화문은 1910년 왕조의 몰락과 함께 다시 수난기에 접어든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2년부터 일제는 경복궁을 허물고 그 터에 조선총독부 청사 계획을 수립했고 1921년부터 광화문 해체공사를 시작해 광화문을 동문인 건춘문 옆으로 이전시켜 버렸다. 그 후 광화문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화강암 기단만 남고 완전히 사라지는 비운을 맞는다. 광화문을 다시 역사의 무대에 불러올린 것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신간 ‘우리 궁궐의 비밀’은 궁궐에 대한 일반적인 교양이나 상식을 제공하기 위한 다른 저술들과 달리 근·현대사의 역동 속에서 왜곡된 궁궐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비판한다. 경복궁과 광화문에 숨겨진 사연, 인정전에 새겨진 이화 문양, 창덕궁 진선문과 금천교에 얽힌 이야기 등은 일제강점기 궁궐의 훼손 사실에 대한 비통한 기록으로 읽힌다. 특히 국보 1호 숭례문을 조선총독부가 지정했으며 지정 이유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한양으로 입성한 문이었기 때문이라는 일부 지적도 거론하면서 풀어야 할 과거사의 한 문제임을 강조한다. 아울러 지금까지 계속되는 부실 복원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예를 들어 고 이승만 대통령이 경복궁에 하향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낚시를 즐겼다는 사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향원정의 연꽃을 없애 버린 사실, 경복궁에 지어진 금산사 미륵전에 대한 이야기 등은 궁궐 복원의 문제가 복잡한 정치권력에 의해 좌우된 현대사의 굴곡을 감지하게 한다. 궁궐의 운명이 정치권력의 변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野 “총독부 관헌 같은 문창극”… 김기춘 책임론 정면 제기

    野 “총독부 관헌 같은 문창극”… 김기춘 책임론 정면 제기

    야당은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일제 식민시대 망언 파문과 관련해 총공세를 펼쳤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문 후보자를 총리 부적격자로 규정하고 ‘사퇴’를 당론으로 굳혔다. 당내 일각에서는 문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보이콧 주장까지 나왔다. 박영선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12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문 후보자가 일제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발언한 동영상을 언급하며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내정자인지 일제 조선총독부의 관헌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고 비판했다. 박 원내대표는 “이런 사람을 총리로 임명하면 우리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얼마 전 돌아가신 배춘희 위안부 할머니가 어떻게 생각하실지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께서는 답을 주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인사위원장인 김기춘 비서실장의 책임을 다시 강하게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며 ‘김기춘 책임론’을 정면으로 제기했다. 본회의에 이어 열린 새정치연합 의원총회에서도 문 후보자의 망언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안철수 공동대표는 “(박 대통령이) 문 후보자의 입장에 동의하는 게 아니라면 인사권자 입장에서 더 이상 국민 마음에 상처 주지 말고 이 인사를 취소해야 한다”며 문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했다. 김한길 공동대표도 “총리 내정자의 친일·반민족적 역사관과 국가관이 국민을 놀랍게 만들고 있다”면서 “청와대의 인사 검증은 무난히 통과했을지 몰라도 국민의 인사 검증은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걸 의원은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같은 분을 우리 총리 후보자로 모셔올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혜자 의원은 “문 후보자가 스스로 사퇴해야 하고, 인사청문회도 거부해야 한다”고 했다. 박광온 대변인은 “일본 극우 교과서보다 더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 내용이다. 국민을 모독하고 국격을 조롱했다”고 비난했다. 이어 “이번 인사는 건국 이래 최대의 인사 참사”라면서 “박 대통령은 지명을 철회하고 국민께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역색(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역색(하)

    ●이중도시 서울, 북촌·남촌에서 강북·강남으로 양분화 조선 내내 사대문 안 북촌과 남촌의 양촌 체제가 공고했다. 그러나 대한제국기 고종이 중국의 천자나 일본 천황과 같은 황제에 오르는 이른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선언하고서 북촌 체제의 중심인 경복궁을 버리고 서촌에 위치한 경운궁(덕수궁)으로 정궁을 옮겨 가면서 상황이 변했다. 건국 500년 만에 나라의 중심이 백악(북악)을 중심으로 한 북촌에서 종로를 넘고, 청계천을 건너 서울시청 쪽으로 이전한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 이러한 정치권력의 공간이동은 이후 식민지 시기와 한국전쟁,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시대에는 없던 태평로를 서울의 경제 중심지로 만들었다.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경복궁 안에 건립돼 정치권력은 북촌으로 회귀했지만, 자본주의의 꽃인 경제권력은 태평로에 남았다. 확장된 경제권력이 1970년대 한강을 넘어 강남과 여의도를 향해 중심이동하기 전까지. 강남으로의 팽창과 더불어 서울은 2000년 전 한성백제의 수도 한강 이남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와대는 강북에 남았지만, 자본주의 권력의 원천인 경제자본과 대의기관인 국회가 강을 건너가 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의 서울이 강북 사대문 안이었다면, 대한민국의 서울은 강남이 됐다. 사대문을 남북 체제로 나누는 경계의 역할을 하던 개천(청계천)이 복개되면서 남·북촌이 하나로 통합되는가 했더니 급기야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과 강북으로 양분돼 버린 것이다. 서울의 남북 경계선이 청계천에서 한강으로 옮겨 간 셈이다. 도시사학 분야에서 ‘이중 도시’(Dual City)의 개념은 식민지를 경험한 도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박찬승(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식민지 도시는 토착 집단에 대한 외래 집단의 지배 공간이었고 양자의 문화적 이질성은 사회적, 공간적 격리로 나타났다. 대체로 토착민들의 자생적 주거지는 전통적·전근대적 성격을 띠었고, 식민권력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주거지는 근대적·서구적 성격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식민지 권력은 외래 식민집단의 주거지를 토착민들의 열악한 주거공간과 분리시켜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주거지로 만들어 식민권력의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고 문명에 의한 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양분 정치적 기획의 산물인가, 체제경쟁의 산물인가 조선시대 한양도성이 북악 아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를 잡은 북촌, 낙산 아래 동촌, 인왕산 아래 서촌 그리고 남산 아래 남촌과 청계천변 중촌이 서로 아우르는 모습을 보였다면 식민 시기 경성은 일제의 의도적인 정치적 기획의 산물로서 남·북촌 체제로 양분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동·서·남·북촌을 중심으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어울린 사색붕당(四色朋黨)이 식민지 사관의 혐의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다른 풀이도 있다. 안창모(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는 “청계천을 품에 안고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인구 10만명을 수용하는 계획도시로 출발한 한양이 60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한강을 품에 안고 외사산으로 둘러싸인 인구 1000만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외견상 인구는 100배 이상 증가했고, 면적도 30배 이상 확대됐다. 600년 시차를 가진 조선의 한양과 한국의 서울은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존재했다”고 말했다. 현재의 서울은 계획됐다기보다는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급증하는 인구를 수용하려는 방편으로 확장됐고 결과를 추인하는 방향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이 도시의 물리적 성장과 변화 배경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남북 분단과 강남 개발은 서로 얽혀 있다. 비록 도시화와 산업화의 결과이지만 1976년 건설된 잠수교로 말미암아 한강은 서해 뱃길이 끊어지면서 자연 울타리가 됐다. 유사시 30만~40만명이 대피할 수 있는 요새화 차원에서 뚫린 3개의 남산터널과 정부청사의 과천이전 등은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이 서울의 도시구조 변화에 남긴 대수술 자국이다. 경부고속도로와 한남대교(제3한강교)의 건설로 강남이 개발돼 현대 서울의 모습이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 두 개의 도시로 나뉜 것도 결국은 남북 체제경쟁의 산물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은 어떻게 분열됐을까 서울은 식민시기 어떤 분열과정을 거쳤을까. 일본인의 서울 진출과 일본인 거류지의 형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답이 보인다. 일본공사관은 1880년 서대문 밖 천연동 청수관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임오군란 때 소실되자 1884년 교동 박영효 저택에 공사관을 지어 사대문 깊숙이 진출했으나 같은 해 갑신정변 와중에 또 타버렸다. 1885년 남산 아래 예장동으로 옮긴 뒤부터 식민지배 권력의 본거지가 됐다. 남산과 일본을 잇는 역사의 끈은 질기고도 질겼다. 일본 사신이 묵었던 왜관(동평관)이 조선 초 자리 잡았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7년 동안 진지를 구축한 왜장대가 있었다. 개항기 조선과 대한제국 조정은 일본공사관을 사대문 안에 들이지 않으려고 애썼고, 사대문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개천을 건너지 못하도록 했다. 삼강오륜에서 부부유별(夫婦有別) 따지듯 북남유별(北南有別)을 따졌지만, 결과는 남북 역전으로 나타났다. 남촌은 식민지 조선의 새로운 메인스트리트였다. 조선 신궁(남산식물원)이 일본 정신을 상징했고, 통감부(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헌병사령부(남산한옥마을)가 무력통치를 상징했다. 일본인 거주 지역인 충무로, 진고개 일대는 본정통(本町通)이라고 하여 조선의 유일한 동서 간 대로인 종로를 대신했다. 일제는 황토마루(黃土峴)를 광화문통, 구리개(을지로)를 황금정(黃町), 명동을 명치정(明治町), 소공동을 장곡천정(長谷川町), 다방골(茶洞)을 다옥정(茶屋町)으로 멋대로 바꿔 버렸다. 남촌에는 조선은행(한국은행)과 경성우체국(중앙우체국)이 들어서고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과 히라타(平田) 등 대형 유통업체가 진출해 상권을 장악했다. 2~4층의 현대식 상점 진열대에는 일제와 서구 외제 상품이 휘황찬란한 전등불 아래 진열됐다. 도로는 포장되고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식재됐다. 광고탑과 마네킹, 네온사인이 불야성을 이뤘다. 본정통은 식민지 서울이 아니라 도쿄를 여행하는 듯했다. 지금의 강남 격이다. 한국인이 상권을 쥐고 있던 종로통은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1935년 시인 임화는 ‘다시 네거리에서’라는 시에서 “번화로운 거리여/내 고향 종로여/웬일인가/너는 죽었는가/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라고 외쳤다. 별건곤 1930년 6월호에서 김화산은 “달리는 차, 매연, 여자의 스커트, 자욱한 연애, 주머니 속의 1전짜리 동전, 비애, 주점, 여자에 대한 증오, 정거장, 잡다한 사상을 가진 군중, 쇼윈도, 밤의 샹들리에와 카페의 홍수, 길에 버려진 영화광고지…”라면서 남촌의 화려함을 묘사했다. 당시 경성은 전차 120여대, 자동차 250여대(관용차와 자가용 제외), 승합차 70대, 버스 40대가 뒤섞여 달리는 혼잡한 대도시였다. 식민지 통치권력과 외국 자본에 의해 서울 사람은 서울의 객이 돼 버렸다. 1936년 행정구역 확대에 따라 경기도 고양군과 시흥군, 김포군이 서울로 각각 편입됐다. 고양군 용강면(오늘의 공덕동, 아현동)과 연희면(신촌), 은평면(홍제동), 숭인면(성북동, 청량리), 한지면(이태원, 서빙고)이 서울 땅이 됐다. 시흥군 영등포와 노량진, 상도동이 서울에 포함됐다. 서울의 팽창은 인구 집중과 더불어 지역 분화를 재촉했다. 동소문 일대 주택지대를 문화촌이라고 했고, 광희문 밖 신당동에는 달동네가 형성됐다. 정동 일대에는 서양인촌이, 용산 일대에는 공업촌, 서울역과 봉래동 일대에는 노동촌, 다동·청진동·관철동 일대에는 기생촌 등 특수촌이 형성됐다. 홍제동, 돈암동, 아현동에는 경성부가 운영하는 토막 수용 시설이, 종로와 본정통, 명치정, 장곡천정에는 다방과 카페, 영화관 같은 유흥업소가 밀집했고, 쌍림동에는 유곽이 있었다. ●서울·지방 나누듯 서울도 신분 따라 거주지 나눠져 전우용은 ‘서울은 깊다’에서 “서울(사대문)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오촌(동·서·남·북·중촌)과 양대(윗대·아랫대), 자내(성밖 거주지)와 오강(한강변 거주지) 지역의 문화가 달랐다. 18~19세기 양반문화만 놓고 보아도 동서남북 사촌이 다 달랐고, 그들 사이에는 쉬 해소될 수 없는 차별의식과 적대감이 가로놓여 있었다”고 분석했다. 서울은 조선 500년 내내 유일한 도시였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한양이라는 도시와 나머지 지방으로 나눠졌다. 중엽 이후 서울과 지방의 인적 교류가 막히면서 경인(京人)과 향인(鄕人)의 차이가 벌어졌다. 지방 출신이 벼슬길에 오르는 것조차 어려웠다. 말씨와 문체가 다르다는 이유로 시골 선비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영조 대 이후 지방 출신을 과거급제자에 할당할 정도였다. 심지어 고종 때 서울내기 군관이 시골뜨기 예조좌랑(교육부 사무관급)을 멸시하고 구타하는 하극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라가 서울과 지방으로 나눠졌듯 서울도 나눠졌다. 궁궐 주변인 북촌과 동촌, 서촌에는 고관대작과 그들의 시중을 드는 아전, 겸인배(집사)들이 살았다. 남산 아래에는 쇠락한 양반이나 무반이 거주했고, 인사동과 청계천 주변에는 역관이나 의관, 화원 같은 중인들이 중촌을 이뤘다. 상민은 윗대나 아랫대 혹은 사대문 밖 자내, 오강에 터전을 잡았다. 거주 지역에 신분과 지위, 직업 정보가 새겨졌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우린 아직 일본의 문화재 식민지다

    우린 아직 일본의 문화재 식민지다

    문화재는 누구의 것인가/아라이 신이치 지음/이태진·김은주 옮김/태학사/256쪽/1만 5000원2011년, 조선총독부가 강탈해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실의궤(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가 89년 만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해 간 도서가 145년 만에 돌아왔다. 조선 말기와 일제시대에 약탈된 우리 문화재의 소재가 확인돼 우리 정부가 요구하면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약탈 문화재는 누구의 것인가’는 일본의 전쟁 범죄와 책임 문제를 주요 연구 주제로 삼아온 아라이 신이치 일본 스루가다이대 명예교수 겸 일본 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대표가 조선 말기와 식민지 시기에 일본으로 반출된 한국의 문화재에 관해 쓴 책이다. 원제는 ‘식민주의와 문화재-근대 일본과 조선을 통해 생각한다’. 그는 2011년 4월 조선왕실의궤 등 귀중 도서 반환에 관한 한·일 협정을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가 심의할 때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그 자리에서 “반환 문제는 식민지 지배 청산을 위한 기본틀이며, 역사자료 등 문화재는 그것이 태어난 환경이나 배경에 두어야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있으므로 조선왕실의궤도 조선왕조 문화의 상징으로서 원래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진술했다. 저자는 일제의 문화재 약탈이 어떻게 시작됐고 진행됐는지를 추적했다. 첫 무대는 1875년 9월 강화도였다. 그때 일본은 이노우에 요시카 함장의 지휘 아래 조선의 귀중 도서들을 노획해 갔다. 이후 1894년의 청일전쟁에 편승해 일본은 궁중의 재화와 보물들을 마구 약탈했다. 일본 궁중 고문관 겸 제국박물관 총장인 구키 류이치는 전시 문화재 수집 지침을 정부와 육해군 고관들에게 전달했다. 평시에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명품을 얻을 수 있으며, 평시에 비해 중량 있는 물품을 운반할 방법이 있다는 등 군이 주도하는 문화재 약탈의 이점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일본의 학계와 정치인, 군이 일체가 되어 국가적 사업으로 문화재 약탈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일제의 목표는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미술품까지 약탈, 수집함으로써 ‘동양미술 유일의 대표자’ 지위에 서는 것이었다. 청일전쟁 선전포고 직전인 1894년 7월 23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궁중의 재화, 보물, 역대 제왕의 진기한 물건이나 법기(法器), 종묘의 주기(酒器)류를 모조리 챙겨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조선이 수백년간 축적해 온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아간 것이다. 개성과 강화 부근의 고려 고분은 폭격을 맞은 것처럼 처참하게 파헤쳐졌고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자기를 포함한 고미술품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한 뒤 발군의 것들을 골라 일왕에게 갖다 바쳤다. 오사카에는 조선에서 나온 고물(古物)을 거래하는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일제의 기상학자인 와다 유지는 우량(雨量) 측정기인 측우기를 일본으로 빼갔다. 이후 1923년 이 측우기는 영국에 기증돼 현재 런던 과학박물관에 있다. 일제가 학술조사라는 이름으로 시행한 고적(古跡) 조사는 한국의 문화재를 더욱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빠트렸다. 낮은 등급 판정을 받은 경희궁이 헐렸고, 고분묘 조사는 결과적으로 사굴이나 남굴 풍조를 심화시켜 유적들을 괴멸시켰다.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일본으로 반출된 한반도 문화재가 6만 1409점이 넘을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일본 내에서 개인이 수집해 소장하고 있는 한국 문화재만 해도 30여만 점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정설로 통한다. 2000년대 들어 국제사회에서 약탈 문화재 반환 사례가 부쩍 늘었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에우프로니오스의 항아리를 포함해 21점을 이탈리아에 반환했다. 영국은 20만년 전 돌도끼와 기원전 7000년대의 토기, 동전 등 2만 5000점의 유물을 이집트에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도 약탈 문화재의 일부를 반환했다. 책에는 한·일 간 문화재 반환 문제에 대한 참고 사항들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해외 여러 나라들의 문화재 반환 사례, 국제법적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반환 움직임, 문화재 반환과 식민지 청산의 현재적 의미 등을 두루 짚어볼 수 있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개성상인의 ‘홍삼로드’ 개척기

    개성상인의 ‘홍삼로드’ 개척기

    향대기람/공성구 지음 /박동욱 옮김/태학사/188쪽/1만 2000원 1928년 4월 30일 개성삼업조합의 조합장인 개성의 거부 손봉상, 부조합장 공성학과 그의 사촌 공성구 등은 미쓰이사의 직원 아마노 유노스케와 홍삼 판로 시찰을 떠난다. 이들은 6월 10일까지 홍콩과 타이완의 주요 지역을 돌며 동아시아 곳곳에 퍼져 있는 미쓰이 지사를 방문하고 지역의 명승지를 관광한다. 공성구는 42일간의 행로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 ‘향대기람’(香臺紀覽)을 남겼다. 예부터 아시아 지역에서 고려인삼의 명성은 자자했다.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인삼에 관한 이권을 장악했던 이유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전매국이 홍삼과 관련한 권한을 보유하다 1914년 이후 미쓰이물산에 독점 판매권을 줬다. 이 때문에 당시 개성상인들은 홍삼 판매를 위해 미쓰이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개성상인들의 동아시아 시찰도 그렇게 이뤄졌다. 개성에서 시작된 여정은 부산과 시모노세키, 대만, 홍콩, 마카오, 상해까지 이른다. 그들은 곳곳에서 격랑의 근대 동아시아 역사와 마주한다. 5월 14일에는 타이베이에서 독립운동가 조명하가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를 독검으로 찔렀다. 그 기간 중국 산둥성 지난에서는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혁명군이 무력 충돌해 중일전쟁을 촉발한 ‘지난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 각지에서 배일감정이 최고조에 달해 엔화를 거부하고 일본인을 공격하는 통에 육지에 오르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무덤덤하다. 반면 곳곳에서 열린 미쓰이 지사 초대의 연회는 분위기까지 상세하게 기록하면서도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심지어 일본과 타이완의 신사에 꼬박꼬박 참배했다. 이들의 관심사는 신문물과 현대 문명에 집중됐다. 시모노세키에서 타이베이 항으로 가는 배에서는 선장에게 특별히 부탁해 배의 내부를 구석구석 시찰하기도 한다. 타이완에서 원시림의 거대한 목재를 운송하는 철도시설이나 운송 수단에 주목하는 등 조선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운송 및 교통수단, 도로, 기계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주요 도시의 인구와 주요 산업을 점검하며 홍삼 판매량을 계산하기도 하는 철저한 상인의 모습을 보였다. 번역을 맡은 박동욱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교수는 “개성상인인 그들의 관심사는 정치나 역사보다 경제와 시장이었다”며 “책은 근대 한문학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 일제강점기에 홍콩과 타이완을 여행하면서 일기 형식으로 상세한 묘사를 남긴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문헌사·역사적 사료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박 교수는 평가했다. 책은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엮어 이해를 돕고 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한반도의 호랑이 어떻게 사라졌나 일본인의 사냥기

    한반도의 호랑이 어떻게 사라졌나 일본인의 사냥기

    정호기(征虎記)/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지음 이은옥 옮김/이항·엔도 기미오·이은옥·김동진 해제/에이도스/216쪽/2만원 야생 호랑이가 한반도에서 사라진 주요 이유로 해로운 맹수들을 퇴치해 세상을 편안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해수구제(害獸驅除) 정책이 지목된다. 조선총독부의 ‘조선휘보’에 따르면 1915~1924년(1917·1918년 통계 누락)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으로 호랑이 89마리, 표범 521마리가 사살됐다. 통계에서 두 해가 누락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 기간에도 일제의 한국호랑이 소탕작전이 강도를 더했으면 더했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정호기’(征虎記)는 1차 세계대전 때 선박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일본인 사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가 1917년 11월 20일 도쿄를 출발해 부산으로 입국해 한 달간 조선에 머물며 벌인 호랑이 사냥기록이다. 야마모토는 사냥에 동행했거나 후원한 사람들에게 기념선물로 나눠 주기 위해 사냥 기록과 일기를 엮어 비매품 한정판으로 책을 만들었다. 한국 호랑이의 자취를 추적해 온 한국범보전기금이 일본의 인터넷 고서점에서 가까스로 구했다. ‘정호기’에는 사냥기록을 순차적으로 담은 희귀한 사진 97장을 비롯해 사냥지역을 표시한 지도 2장, 사냥과정 기록, 야생동물의 서식 상황, 포획방법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호랑이 관련 자료가 전무한 국내 상황에서 귀중한 사료다. 야마모토는 강용근, 이윤회, 백운학 등 조선에서 이름을 날리던 포수들을 비롯해 몰이꾼 150여명을 동원했으며 모두 8개 반으로 조를 짜 함경도, 강원도, 금강산, 전라도 등지에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일본과 조선의 언론사 기자들도 특파원 형식으로 초대돼 정호군의 활약을 즉각 알렸고, 사냥이 끝나고 경성의 조선호텔과 도쿄 제국호텔에서 열린 호랑이 고기 시식회에는 당시의 실력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야마모토가 조선반도에서 호랑이 사냥 이벤트를 벌인 이유에 대해 이항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등은 책 해제에서 “겉으로는 총독부의 해수구제 정책과 같은 맥락이지만 실제로는 대자본가의 개인적 소영웅심의 발로, 부의 과시, 일본군 사기 진작,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 확산 등 복합적 의도가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가난한 인쇄공에서 대자본가로 출세해 조선 반도에 호랑이 덫을 놓았던 야마모토는 1차 대전 종전 후 찾아온 세계적 불황으로 몰락해 1927년 4월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도쿄 제국호텔에서 시식회를 연 뒤 10년 후의 일이었다. 한편 이 교수 등은 야마모토 사냥팀에 의해 함경도에서 잡힌 뒤 박제된 호랑이를 교토의 도시샤 고등학교 표본관에서 92년 만에 찾아냈다. 야마모토에 관한 인물정보를 수집하던 중 그가 사냥한 호랑이와 표범을 박제해 자기 모교에 기증했다는 내용을 파악하고 해당 고등학교를 방문, 표본을 찾아내 DNA 시료 채취에 성공했다. 현재 이 교수팀은 채취한 DNA 시료로 한반도 호랑이의 계통분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조선인 징용노동자 80만설’ 日 경찰자료서 사실로 확인

    일제가 ‘노무 동원’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산업시설에 강제 연행한 조선인이 약 80만명이라는 설을 뒷받침하는 일본 경찰 자료가 새롭게 확인됐다. 일제 강제동원 연구의 권위자인 다케우치 야스토(57)는 8일 일본 내무성 경보국(현 경찰청) 이사관을 지낸 다네무라 가즈오(1902~1982)가 소장하다 국립공문서관으로 이관한 자료를 인용, 일본이 1939년부터 1944년 9월까지 조선인 59만 9306명을 강제 연행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 자료는 1999년 8월 일본 국립공문서관을 통해 공개됐지만 내용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가 다케우치의 노력으로 방대한 분량의 자료 안에 담긴 내용들이 알려지게 됐다. 자료에 따르면 일제가 강제 연행한 조선인은 1939년 7만 9660명, 1940년 8만 7133명, 1941년 7만 5155명, 1942년 12만 2262명, 1943년 11만 7943명 등 총 48만 2153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1944년의 경우 총 29만명을 조선에서 데려온다는 계획이 명시돼 있으며 실제 연행자 수는 4∼9월분(11만 7152명)만 나와 있다. 이 자료에는 1944~1945년 강제 연행된 조선인 숫자가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1944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약 15만명이 동원된 것을 비롯해 1944∼1945년 총 30만명이 동원됐음을 보여 주는 조선총독부의 관련 자료가 있는 점 등으로 미뤄 ‘노무 동원’ 형태로 끌려간 조선인 강제연행 피해자 수는 약 80만명에 달한다고 다케우치는 지적했다. 다케우치는 “인터넷에서 ‘강제 연행은 없었다’, ‘징용 피해자는 소수다’라는 등의 그릇된 선전이 있지만 이번 자료를 통해 1943년 말까지 50만명 가까운 조선인 노무 동원이 있었고, 1944년에는 29만명의 노무 동원이 계획된 점을 알 수 있다”면서 “이 동원이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강제적이었다는 점과 경찰에 의해 감시되고 있었다는 점 등을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씨줄날줄] 도굴(盜掘), 과거 복원 가로막기/서동철 논설위원

    ‘세키노 박사 일행이 대동강변을 발굴하여 수백 점의 귀중한 부장품이 출토되자, 개성 부근에서 고려자기를 도굴하던 무리들이 낙랑고분에 눈을 돌리면서 1924~1925년 최악의 난굴시대(掘時代)가 전개됐다. 심한 경우 관립학교 선생이 백주에 당당하게 인부를 데리고 고분의 봉분 한복판을 위로부터 파 들어가 눈부신 부장품을 끄집어 내기도 했다.’ 이구열 선생의 ‘한국 문화재 수난사’에서 인용된 증언의 일부다. 도쿄제국대 교수를 지낸 세키노 다다시는 일본정부의 지시에 따라 1902년 당시 조선의 문화재를 조사해 1904년 ‘한국건축조사보고’를 내놓는다. 그는 1915년부터 1935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전국을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내놓는 작업도 주도했다. 일제의 침략을 위한 정지작업이었던 그의 조사 결과는 당시 한창 날뛰고 있던 도굴꾼들에게 매우 친절한 ‘가이드 북’ 역할을 했다. 도굴(盜掘)이란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문화재를 약탈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옛 무덤을 몰래 파 들어가 유물을 가로채는 좁은 의미로 해석한다. 우리나라에서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은 일제강점기에 본격화됐다. 이전에는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면 천벌을 받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돈에 맛들인 도굴은 광복 이후에도 성행했지만, 최근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굴 감소의 원인을 알고 나면 허탈해진다. 파헤쳐지지 않은 큰 무덤이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의 본질은 귀중한 유물이 아니라 역사의 재구성을 위한 자료 제공이다. 그렇기에 학술 발굴을 빙자한 일제강점기의 보물찾기식 발굴은 도굴이나 다름없다. 세상을 떠난 한국고고학의 태두 김원룡 선생이 공주 무령왕릉의 유물을 하룻밤 사이에 모두 수습하고는 ‘흥분 속에서 내 머리가 돌아 버린 것’이라며 평생 자책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국립공주박물관을 새로 세워야 했을 만큼 엄청난 유물이 나왔지만, 역사의 재구성을 위한 실마리가 훼손됐다는 것은 큰 손실이었다. 경북 구미와 칠곡 일대에서 233점의 도자기를 도굴해 유통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탐침봉으로 땅속의 문화재를 확인하는 수법을 썼다고 한다. 이제는 산속의 작은 무덤까지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것이다. 작은 무덤의 소박한 유물이 역사를 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한 사례는 적지 않다. 후손들에게는 집안 내력을 재구성하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수도 있다. 도굴꾼이 문화재 보호단체 대표라니 어이가 없다. 옛 무덤이 과거의 복원을 위한 정보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봤을까.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이방인 눈으로 기록한 일제 시대 한반도 풍경

    이방인 눈으로 기록한 일제 시대 한반도 풍경

    “경복궁 남쪽 시내의 북서부는 관가이다. 이곳에는 화강암으로 지은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다. (중략)남쪽으로 유럽인 거주지와 개신교 선교회의 일부, 영사관 구역이 이어진다. 삼각형의 시청광장과 남대문로의 커브 지역에서 경복궁 지역과의 건축양식 차이가 더 커진다. 이 지역에 인접해 단층의 옛 한국(조선) 상점들, 2층의 일본인 상점들과 여러 층의 미국식 또는 유럽식 건물들이 있다.”(412쪽·1933년 어느 날 서울 중심가의 풍경) 벽안의 이방인이 바라본 1930년대 한반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독일인 지리학자 헤르만 라우텐자흐(1886~1971)는 1933년 무려 8개월간 한반도에 머물며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제주까지 구석구석을 뒤져 꼼꼼한 조사를 벌였다. 장장 1만 5000여㎞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이 기록은 고스란히 그의 저서 ‘코레아: 일제 강점기의 한국지리’(푸른길)에 담겼다. ‘논쟁의 여지 없는 지지(地誌)의 대가’라 불릴 만큼 그의 기록은 방대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당시 서울(경성)의 모습. ‘시가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두 직선의 폭넓은 동서 도로가 가옥의 바다를 횡단한다. 이들 도로는 네 개의 폭넓은 남북 도로와 교차한다…. 이 도로들을 따라서 전차노선이 있고 동아시아 도시들의 특징인 수많은 전봇대들이 낮은 가옥들의 지붕 위로 높게 서 있다.’ 일본인들이 남산의 전망 좋은 서사면에 메이지 천황을 봉헌한 조선에서 가장 높은 신사(조선신사)를 지었다든가, 남산 사면과 산록에 일본인 거주 지역이 있고 한강변 교외에 한국인 어부와 뱃사공이 몰려 산다는 내용들이다. 또 당시 통계를 인용해 서울의 인구는 39만 4592명이라고 전한다. 한국인(71%), 일본인(28%)의 순이었는데 일본인 인구비는 13%에서 20여년 만에 곱절 이상 늘었다. 이마저도 당시 경기 지역 일부가 서울에 편입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저자가 “도심의 실제 일본인 인구 구성비는 은폐됐다”고 증언할 정도였다. 라우텐자흐의 기록은 추상적인 마르코 폴로의 견문록 등과는 차이가 난다. 그는 낡은 고물 포드자동차로 8900㎞, 열차나 선박으로 4500㎞를 이동했고, 도보 여정만도 1600㎞에 이르렀다. 사진을 찍고, 암석과 토양, 식물의 견본을 수집했으며, 정부간행 지형도와 지질도, 수백 권의 소책자를 챙겨 독일로 가져갔다. 그렇게 여행에서 수집한 자료와 1000여 종의 참고문헌을 분석해 한국 지지의 표준서를 만들었다. 저자는 “한국에 관해 유럽 언어로 된 저작물은 드물 뿐더러 지리학 전문서는 전혀 없었다”고 회고했다. 애초 포르투갈의 지리를 연구하던 저자는 비슷한 위도 상의 유라시아 대륙 끝의 한반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연구에선 압록강~두만강 선이 한반도의 경계를 비교적 잘 드러내는 선이라거나 간도 지방 인구의 80%가 한국인이란 상세한 이야기를 전한다. 또 일본 야요이 문화의 조상들이 한국에서 유래했고 당시 금속가공물품이 한국에서 수입됐다는 견해도 전한다. 선사시대에 만주-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퉁구스계 종족이 이주했을 것이란 추론도 내놓는다. 하지만 그는 한반도 남부가 고대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식의 식민사관에 동조하며, 조선은 소국이면서 불행한 지리적 위치에 놓였고 늘 기구한 국가적 운명을 맞아 왔다는 편견을 드러낸다. 당시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인 학자가 조선총독부의 도움을 얻어 행한 연구의 결과물이란 한계 탓이다. 책은 1945년 독일 쾰러 출판사에서 처음 발간됐으나 국내에는 소수의 지리학자에게만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1988년 슈프링어 출판사에서 영역본이 발간됐고 이후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독일어 원본을 한국어로 완역한 것은 저자들(김종규·강경원·손명철 교수)이 처음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일제강점기 강제 폐사 천년고찰 대견사 복원

    천년 고찰 대견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대구 달성군은 유가면 비슬산 해발 1000m 지점에 대견사를 복원해 다음 달 1일 문을 연다고 25일 밝혔다. 대견사는 신라 헌덕왕 때인 810년 창건됐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조선 광해군과 인조 대에 중창됐다. 1900년 영친왕 즉위와 대한제국 축원을 위해 중수된 뒤 동화사 말사로 편제됐다가 일제강점기인 1917년 강제 폐사됐다. 당시 대견사의 대웅전이 일본 쪽으로 향해 대마도를 끌어당기고 일본의 기를 꺾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총독부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강제로 없앴다는 것이다. 대견사는 삼국유사의 일연 스님이 승과 선불장에 장원급제한 뒤 초대 주지로 부임해 22년 동안 지냈으며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구상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체 사찰 부지 3633㎡에 대웅전을 비롯해 대견보궁, 선당, 산신각, 종무소, 요사채 등의 건물을 폐사 당시의 원형대로 최대한 복원했다. 특히 대웅전의 대들보는 지름 60㎝에 길이 10m인 강원도산 소나무 황장목으로 만들어졌다. 수령이 500년 됐고 한 개 가격이 2000만원에 이른다.달성군 관계자는 “일제에 의해 파괴된 문화유산을 복원한다는 의미에서 3월 1일 개산식을 열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경북 문화재 밀반출史 발간

    해외로 밀반출된 지역의 문화재 실태를 담은 책이 발간돼 문화재 환수운동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는 ‘경북지역의 문화재 수난과 국외반출사’라는 책자를 발간했다고 6일 밝혔다. 1150쪽 분량으로 2년여의 작업 끝에 나온 이 책은 1900년대 초 일본이 진행한 경북도내 고적조사 경과와 발굴 유물의 반출 과정을 담고 있다. 경북지역 문화재가 일본으로 본격 유출되기 시작한 것은 1902년이라고 이 책은 기술하고 있다. 당시 일본 건축가이자 미술사학자인 세키노 다다시 일행이 경주 등에서 반출한 유물을 도쿄대 건축학과 전람회에 전시했다. 1909년에는 경주 서악리 석침총 출토 유물을, 1910년에는 고령 주산 일대의 고분 출토품과 대가야 왕궁지에서 수집한 유물을 각각 전시했다는 것. 일본은 식민통치를 위한 자료 조사 차원에서 유물을 조사하다 연구 목적이란 명목으로 일본으로 유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1916년부터는 발굴 유물을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소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조사자가 마음대로 사유화해 빼돌렸다. 특히 골동품상과 수집가가 반출한 문화재는 학자가 반출한 수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이 책은 불국사 다보탑, 석굴암 등 석조문화재를 비롯해 경주, 군위, 영주, 안동, 문경 등의 주요 사찰 문화재의 반출 실태도 다루고 있다. 또 1947년 대구달성공원에서 개관한 이후 운영 문제로 사라진 대구시립박물관의 설립과 폐관 과정, 당시 시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국보급 유물의 국내외 반출 경위도 담았다. 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는 지난 8월에도 문화재 반출과 관련한 도민의 증언을 채집해 정리한 ‘잊을 수 없는 그때’도 펴낸 바 있다. 박영석 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 회장은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 문화재가 가장 많은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훼손과 반출이 이뤄졌음을 추적 조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일제 문서 ‘광업·미곡’ 펴내… 14년 해제 작업 마무리

    평북 운산군에는 352㎢에 달하는 넓은 광업지역이 있었다. 이곳이 당시 동양 최대 금광이었던 ‘운산금광’이다. 1895년 미국인 모오스가 조선 왕실과 채굴 계약을 하고 40년 이상 운영하다가 1939년 일본광업주식회사에 넘겼다. 운산금광 매매 과정에는 일본 대장성이 깊이 개입했다. 금광 매매 금액은 3000만원(817만 5000달러)이었으며 3회로 분할 송금하되 대장성이 송금을 승인하고 편의를 제공하기로 해 매매 계약이 체결됐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제문서 해제’의 마지막인 ‘광업·미곡편’에 실려 있다. 국가기록원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선 수탈 정책의 실상을 보여 주는 ‘일제문서 해제’ 작업을 마무리했다고 25일 밝혔다. 지난 2000년부터 고어체·흘림체 일본어로 돼 있는 조선총독부 문서를 풀어 ‘경무(警務)편’을 낸 뒤 외사편, 이재편, 학무편, 법무편 등을 매년 발간해 일제 정책의 실상과 의미를 이해하는 기초 자료를 제공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광업·미곡편’은 열네 번째 책자다. ‘미곡’과 관련해서는 1930년대 조선과 일본에 풍년이 들자 쌀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미곡창고를 건설하고, 조선 쌀을 일본으로 대량 방출하는 것을 방지하는 정책을 폈다고 기록돼 있다. 이번에 발간된 해제집은 국공립 도서관과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등에서 볼 수 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열린세상] 징용 피해자문제에 대한 정치적 준비를/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열린세상] 징용 피해자문제에 대한 정치적 준비를/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경색된 한·일관계를 풀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바이든 미국 부대통령은 한·일관계의 진전을 희망했다. 한국의 여론도 한·일관계를 더는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일본조차 악화된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한국과의 분위기 전환에 내심 기대를 걸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만간 나올 징용피해자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은 과거사문제에 대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심지어 정부와 전문가 사이에서는 ‘한·일관계가 파탄’할 것이라는 위기감마저 있다. 2012년 대법원은 일본의 조선총독부하에서 이뤄진 반인도적, 불법적인 행위에 의한 피해는 응당 배상을 받아야 하며 개인의 대일 보상 청구권은 여전히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이어 2013년도에 서울고등법원, 부산고등법원, 광주지방법원에서 잇따라 일본기업에 징용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내렸다. 현재 상황은 일본 기업이 불복하여 대법원에 재상고심을 신청한 상태며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나올 대법원의 판결도 2012년 대법원 판결의 기본 취지를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문제는 대법원의 판결이 정부의 기존 방침과는 달리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은 1965년 청구권협정에 포함돼 있지 않고, 게다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조약과는 별도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이 식민지 시대의 불법성을 주장한 점에서는 한국정부의 과거사 대일방침과 동일하다. 그러나 제국 일본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서는 우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을 일괄 방식으로 받았기 때문에 1965년 협정에서 개인 청구권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정부는 1974년 ‘대일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청구권자금 일부를 사망자에 한해 지급한 바 있다. 그리고 2005년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 대책 민관 공동합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위안부 피해자, 사할린 피해자, 그리고 원폭 피해자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에 법적인 책임을 추궁하지만 징용자 보상, 미불임금 등의 문제는 정부가 보상한다는 원칙을 천명한 바 있다. 이 결정에 따라 2007년 정부는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희생자 지원법’을 제정하여 징용자 등에게 지원금을 지급해 왔다. 따라서 앞으로 나올 대법원 판결은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대일 과거사 정책과는 모순될 가능성이 크다. 그 파장은 한국의 대일외교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면서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선 대법원 판결은 일본 내 혐한 감정을 더욱더 확대시켜 과거사 문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우익은 지금까지 해왔던 반성과 사죄를 부정할 계기로 삼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위안부 문제조차 부정할 것이다. 또한, 2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강제징용 피해자 및 상속인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소할 경우 일본 기업들은 투자를 꺼리게 돼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 정부는 법적으로 대응 조치할 것이며 그 결과 한·일 갈등은 극에 달할 수 있다. 우리의 고민은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면서도 기존의 대일 정책과 일치된 해법을 찾아내는 데 있다. 해법 방향은 지금까지 정부 정책의 일관성을 지키면서 일본으로부터 타협을 얻어내는 정치적인 결단만 남아 있다. 그렇다고 정치적인 결단이 우선되면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면서 외교적인 교섭을 해야 하며 그 시기를 모색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지금부터라도 해결을 위한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본과 정치적인 타결을 위해서라도 시민단체, 전문가, 그리고 정부가 함께 과거사문제에 대한 타협의 명확한 기준을 정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선행될 때 정치적 결단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 [씨줄날줄] 신춘문예 홍역/문소영 논설위원

    ‘신춘문예 홍역’을 치르느라 밤잠을 못 자고 있을 것이다. 작가 지망생들의 이야기다. 전국의 주요 신문사들은 2014년 신춘문예 응모작을 12월 초순에 마감한다. 마감을 앞두고 신춘문예의 좁은 문을 뚫고자 하는 작가들은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고 있을 것이다. 신춘문예는 1925년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홍명희(1888~1968)씨가 ‘신춘문예’라는 명패를 내걸고 독자들의 문학작품을 소개한 것을 효시로 잡기도 하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1914년 12월 시작한 ‘신년문예 모집’을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지금이야 작품을 공모하는 잡지 등 지면이 풍성하지만, 일제 강점기만 해도 신춘문예가 작가 데뷔의 희귀한 관문이었다. 시인 백석(1912~1996)과 서정주(1915~2000), 소설가 김동리(1913~1995)가 신춘문예 출신이다. 출판사들이 성장하면서 작가 등용문이 지난 100년 사이에 수많은 문예지로 확장됐고 상금도 최대 1억원으로 늘었다. 그래서 아직도 쥐꼬리만 한 상금을 주는 신문사의 신춘문예 공모가 과연 필요하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문인이나 평론가들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답한다. 문·사·철(文史哲)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마당에 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이야말로 ‘21세기 장원급제’로서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일차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활발하게 활동하면 상대적으로 쉽게 문단과 독자로부터 인정받게 된다고 설명한다. 신춘문예야말로 최근 몇 년간 유행했던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개 오디션과 비슷한 대목도 많다. 원고지에 연필로 힘을 줘 써내려간 작품이 있는가 하면, 10대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70세를 훌쩍 넘긴 응모자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당선이 목표가 아니라 참여가 목적인 작품들도 없지는 않다. 응모자가 누구라도 문학으로 밥 벌어 먹기 힘든 것을 뻔히 아는 시대에, 문학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놀랍기만 하다. 마감시간을 지나 직접 헐레벌떡 들고온 원고나, 뒤늦게 도착한 우편물을 예심 전에만 도착하면 슬쩍 묵인하고 넣어주기도 하는 이유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신춘문예 응모작이 늘어난다는 속설이 있다.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글을 쓰면서 자신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고통을 치유한다는 것이다. 그 속설대로라면 경제·사회적으로 ‘갑(甲)질’이 횡행했던 올해, 2014년 신춘문예 응모작은 부쩍 늘어났을 것이다. 오늘 밤에도 작품을 고치고 또 고칠 응모자들 모두에게 ‘당선’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배달되는 불가능한 희망을 꿈꿔본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자살 공화국’ 일제 식민통치 때 시작됐다

    ‘자살 공화국’ 일제 식민통치 때 시작됐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올해로 8년 연속이다. 2012년 한 해 자살자는 1만 4779명, 하루 40여명꼴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자살의 위험에 취약할까. 그리고 언제부터 자살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병리적 현상이 된 것일까.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는 신간 ‘자살론’(문학동네)에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자살의 성격과 원인, 문화적 표상 방식 등을 과거부터 계보화해 추적하면서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둔감한 삶을 양산하는 냉혹한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책은 ‘자살의 근대’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에서 자살의 문화적 변화를 분석한다. 국내의 자살 연구는 이제 막 ‘미개척’ 단계를 벗어난 수준으로, 특히 문화사적 접근은 새로운 시도여서 주목을 끈다. 천 교수는 “19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니면서 늘 시대적으로 죽음의 문화 안에서 살았다는 생각을 해 왔다”면서 “최근 수년 새 노무현 전 대통령과 톱스타 최진실 등 유명인의 자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연쇄 죽음, 저소득층의 생계형 자살 등을 목격하면서 나 자신을 비롯해 우리 사회가 자살에 너무 무지하고, 무심하다는 걸 절감하고 본격적인 연구를 하게 됐다”고 했다. 식민지 시기의 문학과 문화 연구자인 그는 1910~30년대 언론 보도와 조선총독부 통계 자료, 근대 소설 등을 텍스트로 삼아 자살의 양상과 원인, 서사의 변화 등을 분석했다. 책에 따르면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식은 근대 이행기이자 식민지 시대였던 1910년대를 전후해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조선 시대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있었지만 유교적 봉건 이데올로기에 따른 명분이나 도덕심이 주요 원인이었다. 여성의 경우 열녀 이미지와 정절을 지키기 위한 ‘명예자살’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10년대에 들어오면서 ‘염세’, ‘정신착란’, ‘신경쇠약’ 등 내면적 요인이 자살을 해석하는 새로운 코드로 등장했다. 이광수의 ‘방황’(1918),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 같은 초기 근대 소설은 우울과 결부된 죽음 충동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자살의 봉건 시대가 지나고 근대가 도래한 것이다. 천 교수는 자본주의 경제가 만드는 문제상황, 친밀성의 구조와 젠더 관계의 변동, 그리고 자살을 대하는 국가와 미디어의 태도가 ‘자살의 근대’의 사회·문화적인 요소들이라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자살통계를 집계해 정기적으로 신문 기사 자료로 제공했는데 ‘정신착란’, ‘생활 곤란’, ‘병의 고통’, ‘가정 또는 친족과의 불화’ 등을 자살의 원인으로 표상했다. 더욱이 자살자 수의 증가를 문화 진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 간주함으로써 식민통치의 허점과 모순을 은폐했다. 천 교수는 “모든 자살의 원인은 복합적이어서 한두 가지로 말해지기 힘든데 이런 분류 자체가 그 시대 자살 문화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천 교수는 “근대의 자살은 자율적 개인이라는 근대인의 것일 뿐 아니라 미디어와 국가 기구의 것이기도 하다”면서 “자살예방 정책이 많이 증진되기는 했지만 생계형 자살 사태를 야기하는 신자유주의 등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변화시키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문화 In & Out] 부실 복원 논란 숭례문 국보 1호 해제론 ‘고개’

    [문화 In & Out] 부실 복원 논란 숭례문 국보 1호 해제론 ‘고개’

    대한민국의 ‘국보 1호’는 숭례문(남대문)이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짓기 시작해 3년여 만에 완공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한국사람들의 성격은 무척 급했던 모양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숭례문은 불타지 않았다. 그리고 서울 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란 점을 인정받아 1962년 국보 1호로 지정됐다. 요즘 이 숭례문이 또다시 핫이슈가 됐다. 5년 3개월여의 복원공사가 부실·졸속이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단청의 균열·박락에서 비롯돼 부실 자재의 사용과 원칙 없는 전통 공법의 적용까지 공사 과정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급기야 대통령까지 나서 “철저히 의혹을 규명하라”며 기름을 부었다. 기실 국보 1호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 반세기 동안 끊이지 않았다. 일제가 1934년 숭례문을 ‘조선고적 1호’로 지정한 것을 왜 그대로 받아들였냐는 주장이 거셌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이던 1996년에는 ‘일제 지정 문화재 재평가위원회’가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국보 1호 교체를 심각하게 검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인 2005년에는 감사원이 나서 문화재청에 국보 1호의 변경을 권고하기도 했다. 당시 문화재청장은 “숭례문이 대표성과 상징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국보심의분과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고적 1, 2호로 숭례문과 흥인지문(동대문)을 지정했다. 해방 이후 숭례문은 국보 1호, 흥인지문은 보물 1호로 명맥을 이어왔다. 반면 서쪽의 돈의문과 북쪽의 홍지문은 사라졌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두 문을 통해 한양성에 입성한 기록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게다가 대문을 떠받드는 건 일본식 문화라는 지적도 불거졌다. 2000년대 여론조사에선 국보 1호를 훈민정음해례본(국보 70호)이나 석굴암(국보 24호)과 맞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요즘 물밑에선 다시 국보 1호 해제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숭례문이 과연 ‘대한민국의 얼굴’이냐는 논란에 방점이 찍혔다. 복원 과정에서 기와와 단청, 성벽의 석재가 완전히 새것으로 바뀌었고, 목재는 절반가량이 교체됐는데 어떻게 옛 유적과 같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화재로 문화재적 가치가 손상된 문화재는 자연스럽게 국보나 보물에서 해제됐다. 2005년 화재로 녹아버린 강원 양양의 낙산사 동종(보물 479호)이나 1984년 불탄 전남 화순 쌍봉사 대웅전(보물 163호)이 그렇다. 의미 없는 국보의 지정 번호를 폐기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지정 번호는 가치순이 아닌 단순 관리 번호에 불과하며, 일제의 잔재인 ‘문화재 보호법’(1962년)에 따른 것이다. 일본마저도 국보의 번호를 없앤 상태다. 전 세계에서 국보에 번호를 매기는 곳은 남북한뿐이다. 2008년의 화재가 아니었다면 숭례문은 ‘국보 1호’란 타이틀을 뗄 운명이었다. 문화재청은 화재가 나기 한 달 전 국보와 보물에 일련번호를 없애는 방향으로 문화재 등급·분류체계 개선을 추진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섰듯 제대로 문화재를 복원하고 관리하는 것은 중대사안이다. 국보 1호 문화재의 지위에 이런저런 ‘뒷말’이 따라붙는 건 개운찮은 일이다. 국민적 공론화를 통해 상징성과 문화재적 가치 등을 충분히 고려해 문화유산의 좌표를 제대로 설정하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올해 마지막 한국사능력시험 작년보다 쉬웠다

    올해 마지막 한국사능력시험 작년보다 쉬웠다

    일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한국사능력자격시험(이하 한국사능력시험) 응시가 필수가 됐다. 지난해부터 국가직 5급 행정직·외무직 공무원 시험 및 입법고등고시에 도전하는 수험생은 한국사능력시험 2급 이상(고급)을 받아야 한다. 법원행정고등고시 지원자도 올해부터 2급 이상 성적이 필요하다. 중등교원임용시험도 올해부터 3급 이상(중급) 시험에 합격해야 지원 가능하다. 앞으로 국가직 7, 9급 공무원 시험에서도 공통 필수과목인 한국사 과목이 한국사능력시험 성적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마저 나올 만큼 공시생들에게 한국사능력시험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올해 한국사능력시험은 총 4번(제18~21회) 치러졌다. 이 중 마지막 시험인 제21회 한국사능력시험이 지난달 26일에 시행됐다. 출제된 고급 문제를 시대별로 구분한다면 조선시대 관련 문제가 13문제로 가장 많았다. 이어 남북국시대(통일 신라부터 발해 멸망까지의 시기)에서 8문제가 출제됐다. 일제강점기와 근대사에서는 각각 7문제가 나왔다. 중급 문제도 비슷했다. 고급 문제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문제가 최다(14문제) 출제됐다. 일제강점기(8문제), 근대·남북국시대(각 7문제) 문제가 그 뒤를 이었다. 권용기 에듀윌 한국사 강사는 “고급과 중급 모두 전체 50문제 중 전근대 시기와 근대 이후 관련 문제가 각각 3대2의 비율을 일관되게 유지했다”고 평가했다. 앞서 실시한 세 차례 시험과 같은 출제 경향을 보였다는 설명이다. ☞<정책·고시·취업>최신 뉴스 보러가기 하지만 한국사능력시험이 여러 공무원 시험에 활용되는 만큼 지난해를 기점으로 고급, 중급을 통틀어 문제 난도가 낮아졌다는 것이 권 강사의 분석이다. 그는 “특히 고급 시험에서 문제 수준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면서 “행정고시(국가직 5급 행정직 공무원 공채)와 외무고시가 2급 이상 합격자에 한해 응시 자격을 부여하다 보니, 자칫 오랫동안 공부한 수험생의 발목을 한국사능력시험이 잡는 것은 아닐까 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려가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권 강사는 올해 고급 문제에서 가장 어려웠던 문제로 33번 문제를 꼽았다.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의 가상 회고록을 지문으로 제시했는데, 이준 열사가 죽은 해(1907년)로부터 4년 뒤에 볼 수 없는 건축물을 파악하는 문제였다. 정답은 조선총독부(1번)였다. 총독부 건물은 1926년에 완공됐다. 건물 모양과 완공 연도를 정확하게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였다. 권 강사는 “이렇듯 고급 문제는 중급 문제와 달리 연도를 정확하게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가 제법 많다”면서 연도 학습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급에서는 39번 문제를 꼽았다. 청일전쟁, 갑오개혁이 있었던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을 묻는 문제였다. 동학농민운동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험생은 문제에 주어진 두 사람의 대화에서 특정 시대를 유추해야 했다. 권 강사는 “중급 문제는 함정이 없기 때문에 기본 개념에 충실하면 거의 정답을 맞힐 수 있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