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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천오층석탑 환수, 자선당 유구 찾아 온 삼성의 도움 필요“

    “이천오층석탑 환수, 자선당 유구 찾아 온 삼성의 도움 필요“

    “한국 땅을 바라보며 100년 넘게 서 있는 이천오층석탑을 외면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강제 수탈을 인정하는 꼴 입니다. 이천오층석탑은 우리 것이 명백하고 불법 반출이기 때문에 반드시 돌려받아야 합니다.” 17일 서울신문과 만난 이상구(67) 이천오층석탑환수위원회위원장은 지난 12년 간의 반환운동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며 한숨부터 쉬었다. 이천오층석탑은 고려 초에 만들어진 균형미가 뛰어난 국보급 문화재로 이천 향교옆에 자리했었다. 문화재 수집광이자 일본의 기업인 오쿠라 기하지로의 수중에 들어가 1918년 인천세관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이후 도쿄 오쿠라호텔 정원에 평양 율리사 터에서 반출한 같은 고려시대 석탑인 팔각오층석탑과 함께 외로이 서 있다. 이 위원장은 이날 “오쿠라가 경복궁 자선당 유구(기단과 주춧돌)가 1995년 12월 삼성그룹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돌아온 선례가 있다”며 “지난 12년간 불교계와 국회 등 통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진척이 없었다. 실낱 같은 희망이지만 오쿠라호텔측과 친분이 있는 삼성그룹이 이천오층석탑 반환에 나서주면 가능 할 수도 있을 것” 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또 이천오층석탑 반환으로 냉각된 한일관계 개선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경복궁 자선당은 세자가 기거하던 곳인데 1915년 오쿠라 기하치로에 의해 일본으로 헐려 가서 오쿠라호텔에서 ‘조선관’이라는 이름으로 별채로 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소실 되었다. 이후 자선당의 기단과 주춧돌은 불에 그을린 채 방치되다가 1993년 당시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가 찾아내어 다방면의 노력끝에 삼성의 신라호텔이 오쿠라호텔과 자매호텔 관계라는 인연으로 삼성문화재단이 반환 받아서 국가에 기증한 것이다. 이 위원장은 “1918년 오쿠라와 조선총독부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오쿠라는 먼저 이축한 경복궁의 자선당에 꾸밀 석탑이 필요해 평양 전차장 앞 6각 7층 석탑을 요청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사람의 왕래가 많다는 이유로 이천오층석탑을 추천했다”며 “총독부의 허가는 이천오층석탑의 명백한 일본 정부차원의 불법 반출의 증거”라고 강조했다. 이천오층석탑환수위원회는 2008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이천시민단체 32개가 발대식을 통해 환수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 위원장은 “환수위의 석탑과 고려청자 영구교환, 임대 협상 등의 노력과 32차례의 방일 협상에도 오쿠라문화재단은 이천오층석탑은 법인등록이 된 것으로 돌려주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면서 “환수위의 영구임대 제안에 오쿠라문화재단은 보물급 이상 수준의 문화재와 맞교환을 요구하는 등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여러 번에 걸친 해체·복원으로 훼손이 심한 석탑 이음 부분을 석회로 덧칠하는 등 훼손이 심각하다”며 “오쿠라재단은 석탑 보수 전문가를 보내 보수하겠다는 환수위 측 요청도 거절했다”고 분노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달 시민 모금으로 환수염원탑을 실물 크기로 제작해 시청 광장에 설치했다. 석탑의 웅장함과 멋을 이천시민에게 보여드려 후대에서라도 이천오층석탑을 환수하자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엄태준 시장은 “이천오층석탑은 일본이 아닌 바로 이곳, 이천에 있을 때 가장 어울리고,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모형탑이 세워졌다고 말했다. 글·사진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전국 유일 ‘순천 경도탑’ 철거?… 시의회 갑질입니다”

    “전국 유일 ‘순천 경도탑’ 철거?… 시의회 갑질입니다”

    “시의원들이 ‘갑질’하는 것도 아니고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전국에서 유일한 순천의 ‘경도탑’을 철거하라니요. 이건 시 공무원이 아니라 순천 시민의 한 사람으로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겁니다.” 순천만국가정원에 건립된 ‘대한민국 경도주권 순천시 탑’(이하 경도탑)을 철거하라는 순천시의회 요구에 순천시 공무원들이 잔뜩 화가 났다. 9일 공무원들은 “의회가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 수긍하겠지만, 대한민국의 ‘표준시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의미를 지닌 경도탑을 철거하라는 것은 의회의 갑질이자 권위 행정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순천시청 공무원들이 이처럼 시의회에 뿔이 난 이유는 뭘까. 순천만국가정원에는 대한민국 표준시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주권을 회복하자는 의미를 담은 경도탑이 세워져 있다. 민족 정기를 되찾자는 허석 순천시장의 공약 사항이다. ‘대한민국 표준시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시민 6000여명이 뜻을 함께하면서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 건립됐다. 국내에 딱 하나 있는 건축물이다 보니 시민들은 물론 시 공무원들도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민간인들로 구성된 경도주권찾기 시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예산 5000여 만원도 시민들이 자발적인 성금으로 모았다. 높이 5m, 폭 2.55m 크기로 한국 표준시의 역사, 경도 주권 탑의 의미 등이 새겨져 있다. 탑 상단부에 설치된 시계는 30분 더 빠르게 간다. 현재 우리나라는 동경 135도를 따라 일본과 같은 표준시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표준시는 1908년 한반도의 중앙을 지나는 동경 127.5도를 표준시로 첫 시행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하는 일본 표준시를 따르게 변경했고, 광복 이후 이승만 정부 당시 표준시 주권을 회복해 동경 127.5도를 사용하다 박정희 정권이 또다시 동경 135도로 변경해 지금에 이르렀다. ‘경도탑’은 동경 127.5도가 지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상징적 의미가 크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 우리 민족이 사용하던 표준시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천시의회 일부 의원들이 경도 탑을 철거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이영란 순천시의원은 최근 열린 임시회 5분 발언과 시정질문에서 “공유재산물품관리법에서 규정하는 공공조형물 건립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추진 절차상의 문제 등이 있다”면서 “관련 조례에는 공공조형물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치게 돼 있지만 이 같은 절차를 지키지 않았을 뿐더러 시의회와 논의 등 공론화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이 의원은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에는 1000만원 이상의 기부금품을 모집하려는 자는 행정안전부 장관·도지사 등에게 등록해야 하는 데도 경도탑 기부 단체는 이를 이행하지 않아 해당 법률을 위반했다”고 말했다. 그는 “공공조형물 설치 법령을 위반하고 공공미술의 가치와 책임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립 취지마저 의심스럽다”고 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시 공무원들은 “시의회가 억지를 부린다”며 “행정 발목잡기식으로 트집만 잡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이들은 “역사·지리·교육적 가치가 높은 경도탑을 시 예산 없이 무상으로 기부받아 연간 수백만명의 국가정원 관람객에게 공개하고 있어 큰 이익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경도탑을 보려는 관광객들도 늘고 있고, 학생들이 찾아오는 등 새로운 교육의 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순천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 탄원… 항일투쟁 외교 전선의 선구자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 탄원… 항일투쟁 외교 전선의 선구자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는 나라를 빼앗긴 약소국들을 독립의 희망에 부풀게 했다. 그런 배경에서 같은 해 8월 중국에서 민족지도자들이 발족한 신한청년당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했다. 파리에 대표로 간 인물이 김규식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김규식은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국제 정세에 밝아 적임자였다. 김규식은 파리로 떠나기 직전 결혼한 김순애와 바로 이별해야 했다. 여운형과 김순애 등은 국내외 각지로 가서 파견 경비를 모으는 한편 한국 대표의 외교활동에 힘을 실어 주려면 대규모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알렸다. 이런 활동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한 것은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 속에 만세운동이 계속되던 1919년 3월 13일이었다. 김규식의 임무는 회의석상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비망록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전승국인 일본의 방해로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를 예상한 김규식은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먼저 파리 샤토가 38호에 한국공보국을 설치했다. 각국 대표와 인터뷰를 하고 언론, 정당은 물론 사회주의 조직과도 접촉했다. 그를 통해 일제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홍보했다.●한국 독립 문제 국제적 부각… 동정 여론 형성 한국공보국은 공보국회보를 발간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탄원서’를 회의에 제출했다. 김규식이 만났던 미국 인사는 외교관이자 언론인인 스티븐 본잘이라는 사람이었다. 본잘은 한국에 호의적이기는 했지만 결정권이 없었다. 그의 대답은 “우리가 유럽에서 전범을 응징하면 나중에 국제연맹이 일본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도였다. 김규식은 좌절하지 않았다. 조르주 클레망소 강화회의 의장에게 임정 대통령 이승만 명의의 서한을 전달했다. 김규식이 파리에 머물던 4월 11일에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돼 대표단 지원사업은 임시정부로 이관됐다. 임정은 공보국을 임정 파리위원부로 개칭하고 김규식을 임정 외무총장 겸 파리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해 힘을 실어 주었다. 김규식은 4월 26일에는 ‘통신국회보’를 발간해 3·1운동 등 독립운동 소식을 알렸다. 한일합병의 무효화 등을 요구하는 20개 항목을 담은 독립공고서를 비롯한 서한을 강화회의 이사회 위원들과 각국 정부에 여러 차례 보냈다. 달걀로 바위 치기 같았지만 김규식의 다각적인 노력에 침묵을 지키던 유럽 신문들이 움직여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규식의 활동은 열강들의 외면으로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 문제를 국제적으로 부각시키고 동정적 여론을 형성하는 간접적인 성과는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사(尤史) 김규식은 1881년 1월 29일 부산 동래에서 김지성과 경주 이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구한말 선전관을 지낸 부친은 일제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누명을 쓰고 귀양을 갔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 김규식은 사실상 고아가 됐다.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지만 형편이 어려워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어린 나이에 고난을 겪었다.●16세 美 유학… 박사과정 장학생 접고 귀국길 그를 구한 사람은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였다. 그의 아내 릴리아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언더우드는 분유와 약을 들고 가마를 타고 아이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내어 삼키려고까지 했다.” 언더우드는 병든 김규식을 극진히 보살피고 입양했다. 5세 때 김규식은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학교(경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영어를 대단히 빨리 익혀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어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한 김규식은 독립신문사에 입사하고 독립협회에도 가입했다. 김규식은 16세가 된 1897년 서재필의 권유와 언더우드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동부 버지니아주 로노크대학에 입학했다. 예과를 2등으로 마치고 본과에서도 전 과목 평균 90점 이상을 받았다. 외국어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전교강연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스스로 학비를 조달해야 했지만 1903년 전체 3등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졸업한 해 가을 그는 프린스턴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 1년 만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 장학생으로도 선발됐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을 결심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김규식은 은인인 언더우드 목사를 돕는 일부터 시작했다. 언더우드의 비서와 주일학교 교장직을 맡으면서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거기에 안주할 수 없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105인 사건’을 일으켜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했을 때 투옥은 모면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심해졌다. 김규식은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결심을 굳혔다.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고자 호주로 간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때는 32세 때인 1913년 4월 중순이었다. 신규식, 박은식 등이 창설한 동제사(同濟社)가 프랑스 조계에 설립한 박달학원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중국에서의 첫걸음을 떼었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돼 임무를 마친 김규식은 임정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돼 1919년 8월 22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을 대표해 외교 활동을 벌이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사실상 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김규식은 미국 국무부 당국자들에게 독립운동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윌슨과 관리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냉대를 받았다. 구미위원부는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대중 연설이나 홍보물 배포, 신문·잡지 기고 등의 간접적 활동을 폈다. 이는 미국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1920년 3월 미국 상원에 한국 독립안이 상정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김규식은 1921년 1월 상하이로 돌아가 임정에 합류했다. 그러나 임정의 내부 갈등에 염증을 느껴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학무총장을 사임하고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창립해 한중 합작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다.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규식은 참가를 결정했다. 고비사막을 횡단하고 러시아 이르쿠츠크를 거쳐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막된 회의에 참석했다. 50여명이 참가한 한국대표단은 레닌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다. 중국으로 돌아온 김규식은 복단·동방·북양대학 교수로 일하는 한편 삼일중학을 세웠다. ●독립단체 통합 참가, 민족혁명당 국민부 부장에 1925년부터 김규식은 독립운동 계파 통합을 위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가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자 교육에만 열중했다. 1935년 7월에는 난징에서 한국독립당, 의열단 등 5당 통합으로 창당된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과 국민부 부장으로 선임됐다. 1942년에는 좌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가 임정을 중심으로 통합했다.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김규식은 충칭 임시정부로 와서 국무위원과 선전부장으로 선임됐다. 1944년에는 임정 부주석에 취임했다.광복 후에도 그의 통합정신은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으로 이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란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9월에 납북당했다. 평북 만포진까지 끌려간 김규식은 그해 12월 10일 동상과 천식 등으로 고통받으며 69세를 일기로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1989년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고모이기도 한 부인 김순애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금요칼럼] 송현동 땅 공원화와 경복궁 제모습 찾기/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금요칼럼] 송현동 땅 공원화와 경복궁 제모습 찾기/서동철 서울신문STV 사장

    광화문광장에서 국립민속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있는 삼청동 방향으로 올라가려면 동십자각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야 한다. 그런데 사거리 한복판에 있는 동십자각이 어떤 건물인지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도무지 무슨 역할을 했던 건물인지 짐작조차 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동남쪽 모서리를 지키던 망루였다. 서남쪽 모서리에는 서십자각이 있었다.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 담장과 정부서울청사 북쪽의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엘리베이터 사이쯤에 있었다. 서십자각은 1926년 지금의 세종로사거리에서 당시 조선총독부 청사와 통의동을 거쳐 효자동에 이르는 전차 지선이 생기면서 철거됐다. 동십자각도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됐겠지만 섬처럼 고립됐을망정 헐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정부와 서울시는 수없이 ‘경복궁 제모습 찾기’를 외치면서 많은 노력을 했고 적지 않은 성과도 있었다. 지금도 서울시는 광화문 앞에 월대를 복원하겠다면서 교통의 흐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도 그렇고, 서울시도 그렇고 동십자각을 경복궁 담장에 다시 잇고 서십자각을 복원해야 경복궁 제 모습 찾기가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런데 서울시가 대한항공이 갖고 있는 경복궁 동쪽 송현동 땅의 공원화를 추진하면서 변수가 생겼다. 서울시는 대한항공이 먼저 토지주택공사(LH)에 이 땅을 팔면, 서울시가 다시 LH로부터 땅을 넘겨받는 일종의 삼각 거래를 추진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경영정상화를 위해서는 매각대금을 빨리 넘겨주어야 하지만 서울시는 당장 목돈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생각한 고육지책이 아닐까 싶다. 동십자각을 경복궁 담장에 잇지 못한 것은 삼청동으로 가는 도로가 기존의 절반인 2차로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교차로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1970년 삼청동과 성북동을 잇는 삼청터널이 생기고, 이후 삼청동이 문화의 거리로 떠오르면서 교통량은 늘어날 대로 늘어났다. 그러니 누구도 동십자각을 잇자는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LH가 참여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송현동 땅 공원화는 그저 대한항공 부지의 공원화로 끝낼 일이 아니다. LH가 신도시 개발이나 도시 재개발을 추진하듯 이 일대 정비에 나선다면 경복궁도 제 모습을 찾고 송현동 땅도 공원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땅뿐 아니라 대한출판문화협회, 법련사, 금호미술관 등 경복궁의 동문 건춘문에 이르는 삼청로 동쪽을 모두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하라는 것이다. LH는 이 지역 건물과 토지를 모두 매입해 동십자각을 다시 경복궁에 잇고 송현동 땅은 공원화하는 사업을 추진하면 된다. 건물이 수용된 사람이나 법인에는 경복궁 쪽으로 줄어든 길을 넓히면서 뒤로 물린 적정 면적의 땅을 다시 살 수 있는 권리를 주면 된다. 이런 방식이라면 공원화가 가능한 송현동 땅의 넓이는 다소 줄어들겠지만 그야말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동십자각이 제 모습을 찾은 다음에는 당연히 서십자각을 복원해야 한다. 정부서울청사에서 청와대를 잇는 효자로는 지금도 교통량이 많지 않다. 지금 이 길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청와대를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의전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 서십자각 복원은 동십자각 제 모습 찾기에 비하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송현동 땅 공원화는 서울시 사업이지만, 경복궁 제 모습 찾기가 더해지면 정부가 나서야 한다. 늦지 않게 문화재청과 LH의 관리감독 부처인 국토교통부, 서울시가 협의체를 가동하기 바란다. 다시 강조하자면 사실상 경복궁 복원의 마지막 기회다.
  • 일제 때 옮긴 해치상 표지석, 원위치서 1m 이상 떨어져

    일제 때 옮긴 해치상 표지석, 원위치서 1m 이상 떨어져

    광화문광장에 있는 해치상 표지석이 실제 해치상이 놓였던 위치보다 1~1.5m 떨어져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미국의 웨이퍼마스터스사와 디지털 이미지 분석 기법을 활용해 해치상의 위치를 복원한 결과 서편에 있는 해치는 표지석보다 동북 방향으로 약 1.5m, 동편 해치는 서북 방향으로 약 1m 떨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왔다고 14일 밝혔다. 해치상은 본래 광화문의 월대 앞 양쪽에 각각 세워져 있었으나 1920년대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 과정에서 광화문과 함께 철거됐다. 이후 광화문은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쪽으로 옮겨졌고, 해치상은 총독부 청사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5년 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광화문이 복원되면서 해치상의 원래 위치로 추정되는 곳에 표지석을 세웠다.이번 연구는 1900년대 초반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과 같은 구도로 현재의 광화문 일대를 사진 촬영하고, 북악산과 광화문 등 사진에 나타난 피사체의 좌표를 위성항법시스템(GPS)으로 측량한 뒤 사진상의 위치 좌표를 분석하는 방법을 썼다. 오차율은 약 2.5%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연구 결과를 광화문 월대와 해치상 복원 구상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조선 공업의 산실… 대형 솥단지만 남긴 ‘영등포 맥주史’

    조선 공업의 산실… 대형 솥단지만 남긴 ‘영등포 맥주史’

    서울 영등포가 서울에 편입된 것은 1936년이다. 조선총독부의 ‘대경성 도시계획’에 따라 경기도 시흥군 북면에서 갈라져 나온 영등포읍이 경성부의 출장소가 된 것이다. 영등포역은 남경성역으로 한동안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이미 명실상부한 ‘조선 최대의 공업지대’로 떠오른 영등포였다. 서울사람들에게 한강 남쪽의 중심이 영등포라는 인식이 뚜렷했다. 서울신문과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이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의 제20회 주제는 ‘영등포의 추억’이다. 해설자로 나선 한이수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영등포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그는 ‘진짜 강남’은 영등포라고 강조한다. 가수 문희옥의 ‘서울의 거리’가 나온 것이 1989년인데, 그때까지도 지금의 강남은 ‘영동’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강남초등학교는 상도동에 있고, 강남교회는 노량진에 있으며, 강남맨션도 영등포에 지어졌다고 한다. 당산역 앞 래미안아파트가 강남맨션 자리라고 설명한다. ●110일 만에 쌓아올린 윤중제 투어는 서울 지하철 여의도역 1번 출구 앞에서 시작됐다. 여의나루길을 따라 여의도샛강 쪽으로 걷다 보면 짙푸른 그늘을 드리우는 가로수가 인상적이다. 나무도 여의도 개발의 역사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탓이다. 여의도를 둘러싼 윤중제는 1967년 불과 110일 만에 쌓았다고 한다. 여의도 개발은 1966년 발표한 ‘대서울 도시기본계획’에 따른 것이다. ‘대경성 도시계획’이 인구 110만명의 도시를 상정했다면 ‘대서울 도시기본계획’의 목표 인구는 550만명이었다. 땅이 필요했고, 비행장으로 쓰다 방치돼 있던 여의도는 적지였다. 개발 과정에서 밤섬을 파괴한 것은 윤중제를 쌓기 위해 골재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개발지의 규모를 키울수록 강폭이 줄어드는 만큼 한강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불가피했을 것이다.윤중로를 건너 윤중제 아래로 내려서면 샛강생태공원이다. 샛강공원의 길이는 6㎞ 남짓이라고 한다. 1997년 조성 당시 사진을 보면 인공 공원의 모습이 뚜렷했는데 이제는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갈대가 무성한 자연습지의 모습을 상당 부분 회복하고 있다. 샛강공원에 사는 생물들의 바이오리듬을 깨지 않으려 밤에도 불을 켜지 않는다고 한다. 놓아 기르는 비단잉어가 아닌 야생의 누런 토종잉어가 떼 지어 헤엄치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 지도사의 어린 시절 샛강은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이 됐다고 한다. 하긴 필자도 그 시절 경복궁 경회루며 창경궁 춘당지로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던 기억이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에 있던 서울운동장 야구장도 겨울이면 바닥에 물을 가둬 스케이트장을 만들었다. 경회루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어묵이며 떡볶이를 사 먹었으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샛강공원에서 여의도와 신길동을 잇는 샛강문화다리로 올라선다. 문화다리는 샛강의 곡선을 거스르지 않도록 곡선으로 지어졌다. 문화다리를 하늘에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봐도 학이 날개를 편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문화다리 전망대에 서니 여의도의 동쪽은 금융가의 고층 건물이 즐비하다. 반면 서쪽은 국회의사당과 KBS를 비롯해 나지막한 건물만 보이는 게 새삼스럽다. ●강점기 일본인 모여 살았던 영등포 문화다리를 건너면 지하철 1호선 신길역이다. 투어단은 영등포로 지하에 놓인 굴다리를 건넜다. 영등포 토박이가 아니면 잘 알기 어려운 샛길이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에는 다세대주택이 많이 들어섰지만, 일제강점기 지은 일본식 주택도 눈에 띈다. 이 일대는 과거 수해 상습 피해지역이었던 영등포 일대에서 비교적 지대가 높은 편에 속한다. 영등포가 공장지대가 되면서 일본인들이 이 주변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물론 일본인들이 몰려들기 전에도 일대 언덕은 사람이 사는 지역이었다. ‘방학곳지 부군당’의 존재도 이런 사실을 알려준다. 부군당이란 마을의 수호신을 모셔 놓은 신당을 말한다. 주로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마을굿당을 이렇게 불렀다. 방학곳지라는 이름의 유래가 궁금하다. 서울지명사전에는 샛강 나루터에 돌출된 바위가 있어 바위곶이라고 했던 것이 방학곶이나 방학곳이로 변했다고 설명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암곶(바위곶이)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주변 나루터는 방학호진이라고도 불렸다. 한강 본류의 마포앞을 서호, 압구정 앞을 동호라고 했듯 일대 여의도 샛강은 방학호라 부른 듯하다. 이번 투어에서 찾지는 못했지만 주변에는 ‘방학호진 터’를 알리는 표석도 2016년 세웠다고 한다. 서울 시내의 부군당은 대부분 사라진 상황에서 방학곳지부군당은 그래도 굿당 하나는 남아 있다. 하지만 마당도 없이 굿당만 달랑 철재 울타리에 갇혀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부군당은 방학나루를 건너는 사람들의 뱃길 안전을 비는 역할도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상습 수해 지역에서 물난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기원이 더 절실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동네에는 윤정승이 한강물이 넘치는 바람에 물살에 휩쓸렸을 때 잉어가 나타나 등에 태우고 강기슭에 내려주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후 후손들이 한 해 3차례씩 부군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부군당 옆에는 이런 설화를 담은 벽화도 그려져 있다. 영등포문화원은 이 설화를 ‘잉어가 사람 구했네’라는 마당놀이로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추억으로만 남은 한국 맥주의 역사 부군당 골목을 나서 신길로를 건너면 영등포공원이다. 오비맥주가 있던 자리로 공장이 1997년 경기 이천으로 옮겨가자 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에는 1933년 만들었다는 대형 담금솥이 있다. 맥아와 홉을 끓이는 데 썼던 대형 솥이다. 조금 더 서쪽으로 걸어가 영등포역을 지날 무렵 왼쪽에 나타나는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는 오늘날의 하이트맥주인 크라운맥주 공장이었다. 과거 기차를 타고 주변을 지날 때면 크라운맥주 공장의 왕관 모양 상징물이 눈길을 잡아끌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맥주의 추억’은 남아 있지 않다. 일본 삿포로에는 ‘삿포로 팩토리’가 있다. 1876년 지어진 삿포로 맥주공장이 이전하자 1993년 건물 일부와 굴뚝을 살려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굴뚝은 삿포로를 상징하는 명물이 됐다. 우리도 이런 방식으로 맥주 공장을 보존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없지 않다. 오비맥주의 전신은 소화기린맥주, 크라운맥주의 전신은 대일본맥주로 오늘날 아사히맥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삿포로의 경우와 다른 것은 영등포의 맥주 역사가 한국 맥주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일본 맥주의 식민지 진출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등포 맥주 역사의 흔적이 솥단지 하나만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안타깝다. 개인적으로 오비맥주 공장이 있던 영등포공원에서 크라운맥주 공장이 있던 방향으로 걸으면서 상상 속에서 맥주냄새가 진동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른바 ‘맥주 문화 거리’로 이보다 좋은 입지조건과 스토리를 갖고 있는 장소가 또 있을까. 영등포공원도 좋고 골목길도 좋다. 작은 ‘맥주 역사박물관’을 하나 세우면 어떨까. 그리고 오비 공장에서 크라운 공장으로 이어지는 맥주의 거리를 조성하는 것이다. 영등포역에 내려 타임스퀘어가 보이는 광장의 반대편으로 나서면 바로 나타나는 골목이다. 지하철이 닿는 수도권 주민 전체가 고객이 될 것이다.●441개 쪽방에 500명 주민 거주 답사단은 크라운맥주 공장 터 앞에 놓인 구름다리로 철길을 건너 영등포역 북쪽으로 간다. 계단을 내려서면 ‘쪽방도우미봉사회’의 무료 급식 봉사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영등포 쪽방촌이다, 441개 쪽방에 500명 남짓한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이 간신히 몸을 누일 수 있는 크기의 방이 대부분이다. 1960년대 형성됐던 집창촌이 퇴락하면서 저소득계층의 월세방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부분 공동화장실과 공동샤워장을 쓰며 절반이 넘는 주민이 휴대용 가스버너로 취사를 해결한다. 그러니 영등포 쪽방촌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음에도 원형 보존보다는 큰 폭의 생활환경 개선이 필요하다. 쪽방촌에서 경인로로 나서면 영등포역 방향에서 비스듬하게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볼 수 있다. 영신로다. 이 길을 따라 영등포역 고가도로가 놓여 있다. 영등포에는 과거 기와공장과 벽돌공장만 있었지만, 1911년 지대가 높아 물난리 피해가 적었던 당산동에 조선피혁 공장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영등포역에서 조선피혁을 잇는 철도 인입선이 건설됐는데 영신로는 이 철도부지를 따라 난 길이다. 그 철길 초입의 서쪽은 대선제분 터다. 1940년 세워진 일청제분 밀가루공장이 전신이다. 대선제분은 영등포공장 설비를 2013년 아산공장으로 옮겼는데 1만 8963㎡ 넓이의 공장터와 곡물저장고를 비롯한 건물 일부는 조만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한다. 영신로의 동쪽이 타임스퀘어다. 초입에는 집창촌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신세계백화점, 이마트, 메리어트호텔, CGV아트홀이 몰려 있는 첨단 복합 유통단지가 자리잡고 있으니 그 불균형이 놀라울 뿐이다. 경방이 운영하는 타임스퀘어는 이 기업의 전신인 경성방직이 있던 자리다. 경성방직은 일제강점기 면방직업계에서 한국인이 세운 유일한 대기업으로 1923년 영등포 사옥과 공장을 완공했다.투어는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타임스퀘어의 경성방직 사무동을 둘러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사무동 건물은 지금 젊은이 사이 이른바 ‘빵지순례’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빵집 ‘오월의 종’이 쓰고 있어 하루 종일 손님으로 북적인다. 근대문화재 활용의 모범사례가 아닐 수 없다. 필자를 비롯한 일행 몇몇은 투어가 끝나고 영등포소방서 옆 중국집 송죽장에서 짬뽕이며 짜장면을 먹었다. 송죽장은 오래된 가게지만 젊은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는 명소가 됐다. 이렇게 영등포의 문화적 저력은 간단치가 않다. 글 서동철 문화재 위원 해설 한이수 서울도시문화지도사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다음 일정 - 제21회 몽마르뜨 공원 가든길 ●출발 일시 10월 17일(토) 오전 10시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단독] 친일파 박흥식 평택땅… 정부, 37년 전에 알고도 방치

    [단독] 친일파 박흥식 평택땅… 정부, 37년 전에 알고도 방치

    대표적 A급 친일 기업인의 토지 수만㎡가 해방 80년이 다 되도록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사실이 서울신문 취재로 드러났다. 5일 서울신문 취재 결과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 기업인이자 조선총독부와 결탁해 우리 국민의 일본군 지원 등을 독려한 A급 친일·반민족행위자 박흥식(1903~1994) 명의로 된 토지 1만 6000여㎡가 1940년 8월 29일 취득 당시 그대로 남아 있다. 경기 평택시 오성면 안화리에 있는 이 토지는 현재 왕복 4차로인 국도 38호선 서동대로 창내삼거리에서 농협연합장례식장 구간 약 750m 사이에 있다. 후손들이 상속 등기하거나 등기 후 제삼자에게 매각할 경우 국가가 골치 아픈 송사에 휘말릴 수도 있어 국유화가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밝혔다. 국토교통부는 1983년 6월 도로 확장과 2011년 상수관로 매설, 지난 7월 통신관로 매설을 위한 도로점용 허가 절차를 받으면서 박흥식 소유 토지의 존재를 알 수 있었으나, 현재까지 국유화 절차를 밟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택시 역시 1995년 5월 행정관할구역 변경 때 등 박흥식 토지가 국도에 편입돼 있는 사실을 여러 차례 알 수 있었으나, 그냥 지나쳤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안동하 변호사는 “현존하는 박흥식 등 친일 세력들의 토지는 국가로 서둘러 귀속시키지 않으면 후손이 상속 등기해서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제삼자에게 매각해 복잡한 소유권 다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박흥식은 해방 후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경기 하남시 배알미동 팔당대교 남단 부근 임야 46만여㎡ 등을 출연해 재단법인 흥한재단을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이 토지 중 일부는 1990년, 1997년, 2018년에 각각 일부 분할돼 개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때 토지 일부를 산 최모씨가 팔당댐 인근 유명 경양식집과 진입로 문제로 다퉈 지역사회에 큰 화제가 됐었다. 이에 대해 국토부 산하의 서울지방국토관리청 관계자는 ‘도로점용허가 때 토지 소유자(박흥식)에게 동의를 받기 위해 연락을 했는지’, ‘국유화 대상 여부에 대해 검토했느냐’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박흥식은 일제 침략 전쟁을 지원할 비행기를 생산하는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사장이었고, 조선 최대 전쟁지원단체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를 맡았었다. 그는 해방 후 1949년 반민특위 1호로 체포되는 등 A급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혔으나 이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이경우의 언파만파] 한글날과 관련한 상식

    [이경우의 언파만파] 한글날과 관련한 상식

    1910년대부터 조선총독부는 일본어 교육을 늘려 갔다. 학교 교과서도 모두 일본어로 제작했다. 3·1운동 이후 1921년 주시경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가 만들어졌다. 조선어연구회는 일제에 맞서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훈민정음 반포 480돌을 맞는 1926년에는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해 기념했다. 한글날의 시초다. ‘가갸날’이란 이름은 일상에서 한글을 배울 때 쓰던 방식에서 가져왔다. 예전에는 ‘가갸거겨고교…’ 하는 식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배웠다. 날짜는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했다. 실록에는 1446년(세종 28년) 9월(음력) 훈민정음을 반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가갸날을 9월의 마지막날로 정하게 된 것이다. 연구회는 1927년 기관지 ‘한글’을 창간했는데, 이해부터 ‘가갸날’은 ‘한글날’로 바뀌었다.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됐다. 이 원본의 서문에 훈민정음 반포일이 ‘정통 11년 9월 상한’이라고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 직후 이 기록에 따라 한글날을 다시 바꾸게 된다. 음력 9월 상순의 마지막날인 10일을 양력으로 바꾸면 10월 9일이다. 이날을 한글날로 확정해 지금까지 기념해 오고 있다. 북한에선 ‘한글’이 ‘조선글자’인데, 줄여서 ‘조선글’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북한의 ‘한글날’은 ‘조선글날’이다. 날짜도 ‘조선글날’은 우리와 달리 1월 15일이다. ‘조선왕조실록’ 1443년 12월 30일자의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음력 12월을 양력으로 바꾸었다.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일을 기준으로 했고, 조선글날은 창제일을 바탕으로 했다. 일제강점기 한글을 지키고 알리는 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과 같았다. 한글을 배우는 것은 곧 ‘우리말’을 배우는 것이었고, 한글을 적는 것은 ‘우리글’을 쓰는 것이었다. 말과 글이 문자, 곧 한글이기도 했다. 이런 시기를 지난 한글은 하나의 문자가 아니라 한국어로 오해하게 하는 일도 낳았다. 문자인데도 ‘영어를 한글로 번역한다’는 표현을 범하곤 한다. 2007년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총회에서 특허협력조약(PCT) 공식 공개언어로 채택된 건 한글이 아니라 한국어였다.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도 한글이 아닌 ‘훈민정음(해례본)’이었다. 9일은 한글날. 한글은 민주적인 소통과 연대의 도구이자 상징 같은 것이기도 하다. wlee@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국내 최초 개업의 박일근과 제생의원

    [근대광고 엿보기] 국내 최초 개업의 박일근과 제생의원

    앞선 회에서 한국 최초의 개업 의사 박일근을 언급한 적이 있다. 위는 박일근이 경성 무교정 4번지(현 서울 무교동 효령빌딩 근처)에 제생의원 건물을 신축한 기념으로 진료비는 안 받고 약값을 절반 깎아 주겠다고 한 1918년 7월 매일신보 광고다. 진료 과목은 내과, 외과, 화류병(성병)과, 안과, 소아과로 돼 있다. 매일신보 1936년 1월 12일자에는 ‘양의(洋醫) 원조 박일근씨’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박일근이 처음 병원을 연 것은 1898년 4월이다. 기사는 양의를 “생사람의 갈비를 끊어 내거나 또는 창자를 끊어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게 되는, 즉 재생의 은인”이라고 했다. 박일근은 1889년부터 8년 동안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 의학강습소에서 의학을 공부한 것으로 돼 있다. 이 기간은 국내에 의학 교육이 태동할 무렵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교육기관은 제중원 의학당이다. 1886년 3월 설립돼 선발된 학생 16명에게 의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제중원은 1885년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다. 그러나 1890년 무렵 예산 부족 등으로 교육이 중단돼 정식 졸업생은 없었다. 이후 1897년에 교육을 다시 시작했고 1900년 9월 제중원 의학교가 설립돼 1908년 6월 박서양, 김필순 등 7명이 1회로 졸업했다(연세대 의대 전신인 세브란스의학교로 이름이 바뀜). 한편 1899년에는 관립 의사 양성 학교인 ‘의학교’(서울대 의대 전신)가 설립됐다. 교장은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이었다. 정부는 학생들에게 국비를 지원했지만 의술을 천하게 여기던 당시의 풍조 탓에 지원자가 적어 8년 동안 졸업생이 36명뿐이었다. 1907년 일제의 간섭으로 의학교는 대한의원 교육부가 됐고, 1909년에는 대한의원 의육부(醫育部) 부속학교로 개편됐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됐고 부속학교는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로 바뀌었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가 설립돼 의학강습소는 폐지되고 재학생은 전문학교에 흡수됐다. 그런데 박일근이 말한 일본 유학 기간에 구마모토에는 의학교가 없었다고 한다(황상익, ‘근대 의료의 풍경’). 그렇다면 의학 교육을 받은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박일근은 어디서 어떻게 공부하고 40년 동안 의사로 활동할 수 있었을까. 조선총독부는 박일근의 학력을 인정하지 않고 의사 아닌 의생(醫生) 면허증을 주었다고 한다. 박일근은 처음에 청진동에서 개업했다가 무교동으로 옮겨 25년 이상 진료했다. 이후에는 현재 외교통상부 청사 근처인 도렴동으로 병원을 이전, 진료를 계속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다시 광복 펴다

    다시 광복 펴다

    일흔다섯 해를 맞은 광복절을 앞두고 잊힌 독립운동가를 기억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만화라면 좀더 다가가기 쉬울듯하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함께 일본의 만행을 잊지 말자는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을 시로 풀어낸 재외 한국작가의 시집, 해방 후 혼란을 극복하지 못해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원자폭탄을 재건에 활용한 일본 등 주목할 만한 책을 다양한 장르로 추려 봤다.●잊힌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라 ‘의병장 희순’은 조선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의병장 윤희순을 다룬 만화다. 한양 선비 윤익상의 딸로 태어난 그는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으로 가문의 남성들이 의병에 참여하자 후방에서 식량 조달과 군자금 모집, 탄약 제조 등을 맡았다. 이어 여성 의병단인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노학당’을 운영하며 항일 전사를 양성했다. ‘조선독립단’을 조직해 무장투쟁에까지 나선 윤희순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렸다. 민족의 암흑기에 이국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짧은 생애를 마친 김산(본명 장지락)은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린다. 신문기자인 님 웨일스가 1937년 중국에서 김산을 만나 불꽃같이 살았던 그의 삶을 기록했고, 1941년 미국에서 ‘아리랑의 노래’로 출간했다. 1984년 국내에 번역된 책을 박건웅 작가가 신간 만화 ‘아리랑’으로 다시 냈다. 의학을 공부하다 혁명을 위해 이국을 누비며 투쟁한 식민지 조선 청년의 고뇌와 투쟁이 깊은 울림을 준다. 잊힌 독립혁명가들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이가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영화 ‘밀정’(2016)을 비롯해 다양한 각도로 그의 삶을 재조명하지만, 월북 행적 때문에 논란도 많다. 허영만 작가가 ‘독립혁명가 김원봉’으로 약산의 삶을 만화로 복원했다. ‘정의(正義)로운 일을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는 뜻으로 붙인 의열단의 탄생과, 그들의 일제에 맞선 폭력투쟁, 광복 이후의 삶까지 생생히 담았다. ●여전히 생생한 피해자·가해자 증언 열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에밀리 정민 윤은 대학 시절 논문을 작성하다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접하고 이를 시로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 35편을 담은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은 남성성, 군국주의, 제국주의, 전쟁, 인종차별을 다룬다. 특히 7명 위안부의 증언을 시로 풀어낸 2장 ‘증언´에서 일제의 만행을 시로써 고발한다. 위안부로 시작한 그의 시는 현대에 벌어지는 성차별, 성폭력에 관한 여성들의 이야기까지 닿는다. ‘악한 사람들’은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실험하고 죽인 731부대를 소환했다. 이제서야 “그때를 후회한다”고 하는 전범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악을 타자화하면 결국 타인을 악으로 만들게 된다”고 주장한 저자 제임스 도즈는 인간을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조직적, 구조적, 심리적 과정을 분석한다. ●해방 이후 한국과 일본에 주목하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한국 현대사의 첫날인 1945년 8월 15일부터 조선총독부 청사에 성조기가 게양되는 9월 9일까지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역사 다큐멘터리다. 일본 패망과 조선 해방을 직감한 여운형의 전화로 시작하는 해방 전야부터 송진우와의 좌우합작 시도까지 단 하루가 1부, 해방 이튿날부터 9월 9일까지 ‘분단’에 이르는 25일을 2부로 구성했다. 저자는 75년 전 가장 밝았던 광복, 그날 이후 25일간은 어둠이 빛을 삼켜 가는 시간이었다고 결론짓는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일본은 흔히 ‘잿더미’로 상징된다. 매년 3월에 열리는 도쿄대공습 추도식 전이나 8월 ‘종전의 날’이 다가올 때마다 미디어에서는 패전 당시에 촬영된 불탄 들판 사진 등 ‘잿더미’를 끌어온다. ‘‘잿더미’ 전후공간론’은 암시장으로 대표되는 당시 일본 사회와 각종 문학 작품을 통해 일본이 피해자 이미지를 부각하고, 동시에 ‘일본인은 이 비참함에서 다시 일어섰다’라는 서사를 생산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미화한 이미지가 우리와 같은 피해자들의 현실을 가린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셰익스피어 작품 최초 소개 광고

    [근대광고 엿보기] 셰익스피어 작품 최초 소개 광고

    ‘영국 대문호 사옹(沙翁) 만년 대저(大著) 사극 마구베스.’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극장 ‘유락관’에서 공연한다는 1917년 7월 11일자 매일신보 광고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이 국내에 제대로 소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광고 속의 맥베스는 1917년 미국 존 에머슨 감독이 만든 무성영화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에 사망했으니까 사후 301년 만이다. 1906년에는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 번역본에서 ‘세이구스비아’로 처음 언급됐다고 한다. 이후 셰익스피어는 ‘索士比亞 (색사비아)’, ‘酒若是披霞(주약시피하)’ 등으로도 표기됐다. 유락관은 1915년 9월 경성 중구 본정(本町) 1정목(一丁目), 지금의 명동 밀리오레 자리에 세워진 일본인 전용 상설영화관이었다. 남촌으로 불리는 당시의 명동과 충무로 지역은 일본인 거주지이자 상권의 중심지였다. 이 광고가 한글과 한자로 제작된 것을 보면 특정 계층의 한국인들도 유락관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광고에 설명자, 즉 변사 3명이 소개되어 있는데 모두 일본에서 활동하던 일본인이다. 관람료는 1등석 2원, 2등석 1원, 3등석 50전이다. 당시에 쌀 한 가마니 가격이 5원 안팎이었다. ‘200만 원의 작품을 사소한 50전으로 관람할 수 있다’고 과대 홍보하고 있다. 제작비가 200만 원이었까. 倫敦(윤돈·런던)에서 최저 2파운드, 紐育(뉴육·뉴욕)에서 최저 10달러, 도쿄 제국극장에서 5원의 관람료를 받는 작품이라고도 했다. 일본인 극장은 두 개가 더 있었다.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경성고등연예관은 1910년 현재의 서울 을지로 옛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들어섰는데 1915년 세계관으로 개칭됐다. 다른 하나인 대정관은 지금의 중구 인현동 1가에 있었다. 대정관을 세우고 운영한 일본의 니타상회가 나중에 경성고등연예관을 사들이고 유락관까지 세워 세 극장을 모두 운영했다. 유락관은 관객 정원이 1000여명에 이르던 남촌의 대표 극장이었다. 1918년부터는 희락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영화를 상영했고 1945년 광복 직후 소실돼 없어졌다. 지금도 밀리오레가 있는 땅의 지가가 전국에서 가장 비싸듯이 희락관이 있던 곳은 당시에도 입지가 가장 좋은 곳이었다. 길 건너 남산 기슭은 왜성대라고 불리던 곳으로 경복궁 자리로 옮겨가기 전까지 조선총독부 청사가 있었다. 그 주변 예장동 일대는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여서 일인들에게 접근성이 좋은 곳이었다. 부산에도 유락관이 있었다. 일본인 전관거류지(全管居留地·일본인이 모여 사는 마을)가 확대되면서 1922년 동구 좌천동에 유락관이 들어섰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광명동굴 미개방 구간 406m 추가 개방

    광명동굴 미개방 구간 406m 추가 개방

    경기 광명시 광명도시공사는 한국 100대 대표 관광지 테마파크 광명동굴의 미개방 구간 3곳 길이 406m를 추가 개방했다고 7일 밝혔다. 이에 따라 광명동굴은 총 길이 7.8㎞ 중 2.4㎞가 일반에게 개방됐다. 추가 개방된 구간은 광부의 길 206m, 황금광차길 80m, 말발굽길120m 이다. 이곳은 광물을 실어 나르던 광차 레일,다이너마이트 발파구멍,선녀탕,실제 광부의 낙서 등 채광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60년 전 노다지를 꿈꿨던 광부들이 새긴 낙서를 보존한 소원의 벽에는 ‘취업하련다’, ‘돈많이’…같은 글귀에서 힘든 노동의 시간을 버티게 한 광부들의 꿈을 엿볼 수 있다. U자 형태인 ‘말발굽길’도 새로 공개됐는데 벽을 뚫는 착암기, 발파 구멍을 배경으로 추억도 남길 수 있다. ‘황금광차길’에선 채광 작업 때 사용한 광차와 레일을 그대로 재현했다. 박승원 광명시장은 “코로나에 지친 시민들의 시원한 휴식공간으로 광명동굴에 오시면 큰 힘이 되실 겁니다. 주변 상권에도 엄청나게 큰 힘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광명동굴은 광명시 가학동에 있으며 2011년 개장한 동굴 테마파크이다. 폐광산인 가학광산을 이용했으며, 가학광산은 1912년 일제 강점기의 조선총독부에 의해 개발된 광산으로 1972년에 폐광되었다. 경기도·경기관광공사와 협약을 맺고 테마파크로 개발했다. 광명동굴은 현재 웜홀 광장, 동굴 예술의 전당, 동굴 아쿠아 월드, 황금 폭포, 동굴 식물원, 황금 궁전, 근대 역사관, 동굴 지하세계, 동굴 지하 호수, 판타지 웨타 갤러리, 와인동굴 등의 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2015년 4월 4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유료 개방한 이후 4년여 만인 지난해 5월 누적 관람객 500만명을 돌파한 바 있다. 광명도시공사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지난 2월부터 광명동굴 운영을 중단했다가 지난달 22일 재개장했다. 저녁 8시까지인 야간개장은 다음 달 20일까지 이어지고, 코로나 안전수칙에 따라 시간당 1500명만 입장할 수 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씨줄날줄] 귀한 전세/전경하 논설위원

    [씨줄날줄] 귀한 전세/전경하 논설위원

    전세에 대한 첫 기록은 1910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관습자료보고서’에 있다. “전세란 조선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가옥 임대차 방법”이라며 “차주가 일정 금액(집값의 반액 내지 7~8할)을 소유자에게 기탁하면 별도 차임을 지불하지 않고 반환 시 기탁금을 돌려받는다”고 설명돼 있다. 현재의 전세 방식과 같다. 전세가 언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보편화된 시기는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60년대로 모아진다.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농촌에서 도시로 대거 인구가 이동해 주택 수요가 급증했다. 수출주도형 정책에서 주택건설, 임대주택시장 등은 후순위였다. 주택시장이 민간, 집주인이 주도하는 시장이 된 이유다. 전세는 집을 살 때 모자라는 목돈을 마련하는 통로였다. 금융시장이 발달하지 않아 개인이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는 것은 어렵고 신용융자는 개념조차 익숙지 않았던 시절 전세금은 사적 금융 형태로 보편화됐다. 현 정부가 말하는 ‘갭투자’인 셈이다. 세입자 입장에서 전세금은 집주인에게 준 ‘무이자 저축’이지만 집값의 70% 안팎으로 일정 기간 안정적인 거주를 보장받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전세의 보편화에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각기 다른 경제적, 사회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금리 시대가 되면서 전세가 줄어들고 월세가 늘어난다는 보도가 종종 나왔다.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2006년 전체 가구의 22.4%가 전세였지만 지난해 15.1%로 줄어들었다. 대신 반전세에 해당하는 보증부월세는 같은 기간 15.3%에서 19.7%로 늘어났다. 집주인이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일 경우 은퇴 이후 매달 현금이 들어오는 월세를 선호하고, 은행 예금 금리가 1%대인 상황에서 월세를 받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임대차3법’ 시행으로 전세가 귀하다 못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전세가 사라지면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현 정부의 ‘투기 근절’ 목표는 달성할 수 있다. 투기와 함께 목돈을 모아 집을 사는 투자의 사다리도 사라진다. 매달 일정액을 모아 집을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액을 빌려 집을 사고 수십년에 걸쳐 갚은 장기주택담보대출이 보다 일반적일 것이다. 해외에서는 이런 상품이 발달돼 있지만 국내는 그렇지 않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부동산과 금융을 분리하는 ‘금부(金不) 논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부동산은 금융과 맞물려 돌아간다. 우리나라 장기금융시장의 발전이 미흡한 것을 전세가 대신해 왔는데 전세가 사라지니 장기금융시장 발전이 시급해졌다. 공공임대 공급확대 대책은 갖고 있는지 더 궁금하다. lark3@seoul.co.kr
  • 송파강 일부 석촌호수·새벽배송 원조 송파장… 원래 강북에 속했대요

    송파강 일부 석촌호수·새벽배송 원조 송파장… 원래 강북에 속했대요

    같은 길을 걸어도 누구에게나, 언제나 같은 세상은 아니다. 서울의 과거를 찾아 색다른 미래를 바라보게 만들어 주는 서울미래유산 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그 말이 실감 나게 다가온다. 몰랐던 역사를 알고 나니 같은 거리도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9회 ‘잠실의 추억’ 편이 지난 25일 잠실 일대에서 진행됐다. 장마철 비구름이 잠시 숨을 고르는지 신기하게도 해가 반짝하고 맑은 바람이 불어 걷기 좋은 날이었다. 이날 답사의 출발지점인 잠실 지역은 지상 123층, 높이 554.5m로 대한민국 최고층 건물인 롯데월드타워를 비롯해 초고층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서울의 마천루를 상징한다. 그런데 잠실의 현재 지형이 불과 반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예전의 그림과 사진 자료 등 물증들을 보고 또 봐도 참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이다. 이 지역은 원래 뚝섬과 연결된 강북에 속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잠실 쪽 한강은 ‘잠실도’라는 섬이었고, 그 섬을 에워싸며 한강의 샛강인 신천강과 송파강이 흘렀다.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시민들의 쉼터가 된 석촌호수는 송파강의 일부였다.‘잠실’이라는 지명은 조선 초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잠실도회가 설치돼 있던 데서 유래한다. 1930년대만 해도 잠실섬에는 온 섬에 뽕나무가 무성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채소밭이 됐다가 1971년 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으로 물막이 공사를 하면서 육지로 변했다. 이때 송파강의 일부가 남고, 그 유로가 바뀌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가 석촌호수다.면적 21만 7850㎡, 평균 수심 4.5m 깊이의 호수는 송파대로를 기준으로 동서로 같은 모양의 동호와 서호로 나뉘었다. 1981년 호수 주변에 산책로와 쉼터 등 공원이 조성됐다. 동호는 새벽 조깅코스와 주변 시민들의 휴식처, 산책로로 이용되고 서호에는 롯데월드의 매직아일랜드와 서울놀이마당이 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호숫가를 산책하는 가족, 건강 달리기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도심공원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 준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됐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바로 이를 두고 한 얘기일 것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이 그린 ‘송파진’을 보면 사람들이 모래사장에서 강 건너편 송파진을 바라보고 있다. 저 멀리 남한산성도 보인다. 나루터에는 배들이 정박해 있고, 나룻배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건너고 있다. 그림 속 유유자적한 한강이 지금의 석촌호수가 된 것이다. 잠실역 3번 출구에 서서 바라보면 예전엔 그 풍경일 테지만 저 멀리 보이는 산 말고는 그림 속 송파진을 상상하기 어렵다. 눈앞에는 서울미래유산 석촌호수가 있을 뿐이다.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혀 걷다 보면 피할 길 없는 치욕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삼전도비(三田渡碑·사적 제101호)다. 삼전도는 1439년(세종 21년) 신설된 나루터로 한강나루, 노들나루와 함께 경강삼진(京江三津)의 하나였다. 원래 삼밭나루로 불렸던 삼전도는 한양에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고 영남로를 지나는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교통의 요지였다. 1636년 12월 청 태종은 대군을 이끌고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거하다가 결국 청나라 군대가 머물던 한강가의 나루터인 삼전도로 나와 항복의식을 행했다. 항복의 조건은 청과 조선이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내고, 통혼하며,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등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들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 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적은 비석을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다. 인조 17년 세운 삼전도비는 제목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다. 비석 앞면의 왼쪽은 몽골글자, 오른쪽은 만주글자, 뒷면은 한자로 쓰였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비의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침략국 황제를 칭송하는 비문의 내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임금의 명에 의해 글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백헌 이경석은 글을 배운 게 천추의 한이라며 피를 토하듯 괴로워했다고 한다. 높이 3.95m, 폭 1.4m의 한 덩어리로 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비석을 매일 바라봤을 백성들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삼전도비의 수난도 끊이지 않았다. 조선 임금이 항복했던 나루터인 삼전도에 비석을 세웠지만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이 지배권을 상실하자 더는 굴욕적인 비석을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며 사람들은 이 비석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 민족의 굴욕을 상기시키기 위해 건져다 다시 제자리에 세웠다. 해방 후 주민들은 청나라가 만들게 하고 일본이 도로 세운 치욕적인 비석을 나라를 되찾은 마당에 그냥 둘 이유가 없다며 땅속에 묻어 버렸다. 1963년 홍수로 삼전도비가 드러나자 사적으로 지정하고 석촌동으로 옮겼으며 1981년 문화재 명칭을 ‘삼전도비’로 바꿨다. 석촌호수 주변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은 2010년이다.삼전도가 조선 전기에 교통의 요지로 역할을 했지만 조선 후기 들어서는 송파나루가 더 중요해진다. 송파나루는 한양에서 강원도, 광주, 이천으로 가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었다. 서울 외곽을 지키는 송파진(松坡鎭)을 설치할 정도로 중요한 이곳은 사람의 왕래뿐만 아니라 한강을 타고 물자의 이동도 활발했던 곳이다. 궁궐이나 집을 짓는 데 사용되는 굵고 튼튼한 나무들이 강원도에서부터 뗏목으로 송파나루까지 왔다. 송파나루 옆에 있는 송파장은 조선 후기 전국 15대 향시에 꼽힐 정도로 번성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한양 내에 있던 시전을 위협할 정도였다. 서울 주변의 일반 상인들이 시전 상인들의 독점을 피해 삼남지방이나 관동지방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을 이곳에서 미리 사들여 많은 이익을 남기는 도가의 근거지가 됐기 때문이었다. 전국의 산해진미가 모이는 송파장에서는 우시장이 특히 유명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즐겼다는 ‘효종갱’은 송파장에서 그날 잡은 소의 고기와 삼남에서 올라온 전복 등 해산물, 각종 채소를 넣어 끓인 해장국이다. 밤새 푹 끓인 효종갱을 독에 담아 식지 않도록 명주에 싸서 품에 안은 채 말을 타고 달려 사대문이 여는 시간에 맞춰 당도한 뒤 주문한 사대부 집에 배달했다고 하니 이게 바로 새벽 배송의 원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송파장에서는 한양과 경기의 유명한 연희자들을 초청해 큰 규모의 산대놀이를 공연하곤 했다.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는 서울놀이마당 전수회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루터 기능은 1960년대까지 뚝섬과 송파를 잇는 정기선이 운항돼 명맥을 유지하다가 강남 개발과 샛강 매립으로 사라졌지만 그 흔적을 석촌호수 동호 남단 송파대로 쪽에 ‘송파나루터’가 새겨진 표석으로 남겼다. 번성했던 송파장과 관련해 경기도 암행어사 이건창의 활약이 전해 오고 있다.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활동하던 시절 송파에 들러 신분을 속인 채 장터의 장사꾼들을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듣고 용기를 북돋아 줬다. 그가 떠나고 난 뒤 이건창의 신분을 알게 된 상인들이 그의 공덕과 행적을 기려 1883년 5월 장터 입구에 비석 ‘이건창영세불망비’를 세웠다. 비석은 을축년(1925년) 홍수로 유실됐다가 1979년 발견돼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다. 그 옆에는 을축년대홍수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을축년 대홍수는 1925년 7월 16일부터 3일간 계속돼 수도권 지역에 300~500㎜의 많은 비를 뿌렸다. 이 폭우로 한강과 임진강이 범람해 647명의 사망자와 당시 조선총독부 예산의 58%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냈다.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은 한강변의 이촌동, 뚝섬, 송파, 잠실, 신천리, 풍납동 일대였다. 송파나루터 일대는 특히 피해가 극심해 송파장터 마을이 다 떠내려가고 마을 주민 전체가 지금의 송파동 일대로 이주했다. 수마의 무서움을 체험한 송파 나루터 주민들은 홍수 이듬해에 홍수 피해를 잊지 말고 대비하자는 의미로 기념비를 세웠다. 가락로에 있는 석촌동 고분군은 가락동·방이동 무덤과 함께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다. 일제강점기에 처음 조사가 실시됐으나 270여개에 이르는 돌무덤은 이미 원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 가장 큰 규모의 기단식 돌무지무덤인 3호분이 그나마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고 있었으나 1983년 절반이 잘려 나가는 등 보존과는 거리가 멀었다. 뒤늦게나마 역사적 가치를 깨닫고 발굴 작업이 이뤄지고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잠실과 송파나루 길 답사를 마무리한 곳은 2013년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된 가락시장이다. 을축년 대홍수로 가락동으로 옮겨간 옛 송파시장의 의미를 되살리는 가락동농수산물시장에서는 수산, 축산, 청과 등 전국 최고의 식재료가 거래된다. 특히 싱싱한 수산물이 자랑이다. 펄펄 뛰는 참돔을 회로 떠서 먹으니 쫄깃한 식감이 지극히 훌륭하다. 치욕의 역사를 간직한 삼전도비를 보며 찝찝했던 기분도 어느새 사라지고 입안에는 진한 바다향이 감돈다. 글 함혜리 칼럼니스트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10회 삼청동 ●출발 일시 : 8월 1일 오전 10시 출발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 태화관 광고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 태화관 광고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장소인 서울 인사동 태화관이 그 전인 1916년 1월 요리점으로 개업했다는 광고다. 태화관 자리는 조선 전기 중종 반정에 가담해 정국(靖國) 공신 2등에 책록된 구수영이 살던 곳인데 태화정(太華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중종은 이곳에 순화공주를 위한 집을 지어 주었고 순화궁이라 불렸다. 조선 후기에는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거처가 됐다가 1907년 궁내부대신 이윤용이 차지했다. 이윤용은 순화궁을 1911년 동생 이완용에게 넘겼고 이완용은 1913년 옥인동에 대저택을 짓고 이사하며 임대해 주어 태화관(太華館)이라는 여관이 됐다. 이것을 홍순학이 인수해 요리점으로 바꾼 것이다. 홍순학은 태화관 요리점을 열기 전에 상업회의소 주임 서기로 일했다고 한다. 태화관은 친일 인사들과 조선총독부 고관대작들의 모임 장소로 애용됐다. 그런데 태화관에 1918년 벼락이 떨어져 건물 안에 있던 고목이 둘로 쪼개졌다. 주인인 이완용이 놀라 팔려고 내놓자 광화문 네거리에서 명월관을 경영하던 안순환이 인수해 명월관의 별관으로 운영했다. 이름도 한자가 다른 태화관(泰和館)으로 바꿨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지방에 있던 김병조,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4인을 제외한 29명이 이곳에 모였다. 원래 대표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 했다. 그러나 그 전날 서울 재동 손병희의 집에서 논의한 끝에 탑골공원에서 거사를 벌이면 자칫 군중의 과격한 행동을 야기해 유혈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에 따라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보하라고 했다. 일경 80여명이 출동해 태화관을 포위한 가운데 한용운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나머지 대표들이 제창한 뒤 연행에 응했다. 대표들은 일경이 태화관에 인력거를 가지고 오자 자동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결국 민족대표들은 택시 일곱 대에 나눠 타고 경무총감부에 가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얼마 후 태화관에 불이 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장소인 보성사는 화재로 소실됐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일제의 방화로 추정된다. 그 뒤 태화관은 궁정 양악대 출신들이 만든 우미관 양악대와 단성사 양악대가 자주 출연하는 장소로 인기를 끌다가 1921년 미국 남감리교회에 인수돼 태화여자관으로 탈바꿈했다. 남감리교회는 이곳을 전도 사업과 여성 교육 공간으로 사용했다. 현재는 12층짜리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건물(태화빌딩)이 들어서 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영원의 식물, 신문의 쓸모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영원의 식물, 신문의 쓸모

    2004년 일본 도쿄대 종합연구박물관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1904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된 신문에 관한 아카이빙 전시였다. 다소 평범해 보이는 이 전시가 식물학계에서 특별하게 회자되는 것은 전시 작품 중 식물학자의 신문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식물학자의 글이나 기사가 게재된 신문이 아니라, 식물학자 마키노 도미타로가 식물 표본을 만들면서 이용한 흡습지로서의 신문이다. 지난날 내가 일했던 국립산림생물표본관의 표본실 장에는 식물 표본이 가득 쌓여 있었다. 연구자들이 전국을 돌며 조사하고 채집한 식물은 표본제작실을 거쳐 수분이 빠진 납작한 표본이 되고, 이것은 식물의 시공간적 증거로서, 또 연구자들의 연구 데이터로서 활용됐다.표본제작실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신문이었다. 흡습성이 뛰어나고 곰팡이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나는 식물을 그리다가도 채집을 갔던 동료가 돌아오면 채집 봉투에 가득 담긴 식물들을 신문지에 하나씩 고이 끼워 두고, 다음날 또 그 다음날 다른 새 신문지에 갈아 끼우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짧게는 반년, 길게 수년이 지나면 식물은 수분이 다 빠진 상태가 되고, 이것을 라벨과 함께 흰 시트에 붙이면 온전한 표본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표본은 색은 변할지언정 형태를 유지한 채 길게는 수백 년간 보관될 수 있다. 어릴 적 좋아하는 책 사이에 네 잎 클로버나 고운 단풍잎을 끼워둔 기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그 페이지를 펴면 단풍잎은 수분이 다 빠져 빳빳해져 있다. 마른 잎은 수십 년이 지나도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식물을 가장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 식물 표본을 만드는 방법이다.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식물 표본은 1500년대 이탈리아 약초가이자 예술가인 라르보 시보가 제작한 표본 책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표본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도화지 하나에 식물을 하나씩 붙인 게 아니라, 책 형태로 페이지마다 채집한 식물 표본을 붙여 엮었다. 이 식물 표본은 인류가 식물을 연구한 최초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약용식물 목록이다. 표본 책에는 현재도 우리가 차로 즐겨 마시는 타임과 요리 재료인 향신료 오레가노 같은 허브식물, 그리고 수선화, 아네모네와 같은 관상용 구근식물 표본이 500년이 지나도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책 형태로 제작됐던 표본이 지금과 같은 개별 표본으로 제작 방법이 바뀐 것은 표본 책이 새로운 식물을 추가하거나 수정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현재 세계의 모든 식물연구기관에서는 각 나라의 신문지를 흡습지로 이용해 개별 종이 형태로 표본을 제작한다. 식물학자 마키노도 마찬가지였다. 고치 현립 마키노 식물원에는 생전 그의 방 풍경이 재현돼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 벽을 가득 메운 높이 쌓인 신문지다. 신문지를 들춰 볼 순 없었지만, 생전 그의 방에 있던 신문지 사이에는 그가 채집한 식물이 건조되고 있었을 것이다. 식물 중에는 그가 명명한 느티나무와 파초일엽도 있었겠지.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모든 식물은 각자의 기준표본과 그 외 무수한 표본을 갖고, 그 표본이 되기 전 모두 신문지 사이에서 건조의 시간을 보냈다. 마키노의 신문이 재발견돼 전시될 수 있었던 것은 마키노 표본을 소장하고 있던 도쿄대 종합연구박물관 관계자가 표본을 정리하면서 수많은 박스 안 마키노의 표본과 흡습지인 신문지를 발견하면서부터다. 그렇게 정리된 신문지는 5000여점이나 됐고, 신문 중에는 우리나라 조선총독부 기관지로서 1945년 종간된 경성일보도 있었다. 이 신문 목록은 ‘마키노 신문 목록’이란 이름으로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서 인정받았다. 식물세밀화를 그릴 때 나는 그릴 대상인 식물을 조사하고 채집한다. 그렇게 채집한 식물을 다 그리고 나면 표본으로 만들기 위해 식물을 신문지 사이에 누른다. 그래서 내 작업실 서랍에는 그간 집에서 구독해 보던 일간지부터 내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이 보내준 대학신문, 길에서 하나씩 받아온 광고 신문이 서랍 하나를 가득 메운다. 종이 신문이 사라질 날이 올까 두려워 나는 더 열심히 신문을 모아왔다. 며칠 전 채집한 표본의 신문을 갈다가 전나무가 끼어 있던 신문 면에 커다랗게 쓰인 ‘담대함’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마키노의 신문처럼 중요한 역사적 사료는 되지 못할지언정, 이 메시지가 내게 식물을 더 열심히 기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 주었다. 식물은 언제나 작고 흔하고 평범한 것의 소중함을 알려 준다. 그러나 식물을 건조하기 위한 흡습지인 날짜 지난 종이 신문의 소중함까지 알려 줄 줄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근대광고 엿보기] 아지노모도 한국 진출 5년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아지노모도 한국 진출 5년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1915년 9월 13일자에 실린 이 광고를 보면 일본의 조미료 ‘아지노모도’(味の素·아지노모토)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한일병합 직후로 보인다. 거의 첫 번째 광고로 보이는데 공진회에 협찬한 광고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조선총독부가 식민 통치 5주년을 기념해 일제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마련한 문물 전시회다. 자신들이 조선의 문명화를 이뤘다고 홍보한 이 행사는 전각의 대부분을 파괴한 뒤 경복궁에서 열렸다. 광고에는 아지노모도가 발매 5년이 돼 순풍을 타고 앞으로 나아간다고 돼 있다. 아지노모도를 개발한 사람은 도쿄대 교수 이케다 기쿠나에다. 1908년 어느 날 저녁을 먹던 이케다는 “여보, 이 국물이 도대체 무슨 국물인데 이렇게 맛이 있소?”라고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은 다시마 국물이라고 대답했다. 맛을 내는 하얀 가루 아지노모도는 이렇게 탄생했다. 다시마 국물의 성분을 분석한 끝에 이케다는 ‘글루탐산나트륨’(MSGㆍmonosodium glutamate)이라는 조미료를 발견해 이를 아지노모도라고 이름 붙여 이듬해 상품으로 만들어 냈다. 아지노모도가 일본을 휩쓸고 한국 시장까지 점령해 이케다는 돈방석에 앉았다. 한국에서 처음 발매됐을 때 작은 병 하나가 40전이었는데 쌀 1㎏에 16전 하던 시절이었으니 매우 비쌌다. 처음에는 일본 본토에서도 아지노모도의 원료가 뱀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잘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뱀 뼈로 만들었다는 얘기는 그 후로도 국내에서도 있었고 아이들은 아지노모도를 ‘뱀가루’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인 특유의 국물 음식 문화에 맞게 현지화를 시도해 1920년대부터 아지노모도는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일제강점기 최대의 광고주가 됐다. 설렁탕집, 냉면집, 중국집 등 음식점이 생기면서 독점 납품한 화학조미료 아지노모도는 급성장을 거듭했다. “이것만 있으면 이 세상 음식은 자유자재로 모두 맛있게 할 수 있습니다.” “양(洋)의 동서를 불문하고 음식 솜씨 좋다고 칭찬받는 부인은 반드시 아지노모도의 애용가지요.” “명절 음식은 아지노모도를 쳐서 맛있게 하십시다.” 아지노모도만 치면 모든 음식의 맛이 좋아진다는 과장된 광고로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광복 후 아지노모도가 물러가고 조미료의 대명사 미원(味元)이 국내 기업에 의해 발매됐는데 원(元)의 일본식 발음이 소(素)와 같은 ‘모토’라고 한다. 미원은 한때 미풍과 사활을 건 대결을 펼쳐 이겼다. 한국 아지노모도가 2018년 기준으로 32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아직도 아지노모도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혼다시’(가다랑어포로 만든 조미료)라는 제품이 가장 많이 올라 있다. sonsj@seoul.co.kr
  • 전남도와 경남도 ‘해상경계선’ 관할 구역 놓고 공방

    전남도와 경남도 ‘해상경계선’ 관할 구역 놓고 공방

    전남도와 경남도의 바다 관할권 기준은 해상경계선일까? 등거리 중간선일까? 전남도와 경남도가 바다 해역 소유권을 놓고 10년 넘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 바뀔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어서 두 지자체는 보다 넓은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이와관련 헌법재판소가 지난 9일 전남·경남 해상경계 권한쟁의 심판 최종 공개변론을 마쳐 향후 결과가 주목된다. 지방자치단체 관할구역은 1948년 제정된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처법’과 ‘지방행정기관의 명칭 위치 및 관할구역에 관한 대통령령’에 따라 정해졌다. 이 규정에는 ‘1948년 8월 15일 당시 관할구역 경계가 기준이 되며, 해상경계 또한 이에 따라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전남도 어업인들은 국토지리정보원이 발행한 국가기본도(지형도)상의 도 경계선을 해상경계선으로 인정하고 지금까지 어업활동을 해왔다.이 지형도에는 1918년 조선총독부가 설정한 전남도와 경남도간 해상경계가 반영돼 있다. 해방 당시 존재했던 지방행정 구역이 법률에 따라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이후 해상경계와 관련해 헌법재판소는 2011년 ‘1948년 8월 15일 당시 존재하던 관할구역의 경계가 지방자치단체간 원천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하지만 경상남도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현 해상경계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전남도와 경남도의 해상경계 다툼은 2011년 7월 ‘바다의 경계는 없다’고 주장하며 전남해역을 침범해 조업한 경남선적 기선권현망어선들을 여수시와 여수해경이 수산업법 위반으로 검거하면서 시작됐다. 이 사건에 대해 2015년 6월 대법원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한 지형도상 해상경계를 도(道)간 경계로 보아야 한다’며 전라남도 구역을 침범한 어선들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으나, 경남측 어업인과 행정기관은 이를 부인하고 그해 12월 권한쟁의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경남도는 “기본적으로 전남과 경남 간 해상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대법원이 수산업법 유무죄를 가리면서 도간 해상 경계로 인정한 국토정보지리원의 경계는 단순히 지형도상 섬 구별을 위해 임의로 그은 선으로 도간 경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남도는 도서인 ‘세존도(남해)’ 혹은 ‘갈도(통영)’ 기준 등거리 중간선을 새로운 경계선으로 확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해 도간 어업 분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등거리 중간선은 전남도 유인도와 경남도 유인도를 일직선으로 그은 중간선을 말한다. 경남도가 주장한 세존도를 할 경우 2만 3000㏊, 갈도가 기준이 되면 1만 3000㏊의 전남 바다가 경남도 소유가 된다. 공교롭게도 2015년 7월 헌법재판소는 서해 죽도 인근의 상펄어장을 둘러싼 충남 홍성군과 태안군 간의 권한 다툼에서 새 기준인 ‘등거리 중간선’ 원칙을 적용했다. 두 지자체가 해역을 반으로 나누라는 결정을 내렸다. 경남도가 헌재 결정을 다시 요청하게 된 큰 계기가 된 셈이다. 이와관련 전남도는 “100년 이상을 지켜온 전남도민과 어민들의 삶의 터전은 현행대로 유지해야한다”고 일축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충남지역의 등거리 중간선은 도내 같은 지역이어서 기준이 될수 있어도, 지자체간 구역 결정은 현행처럼 해상경계선이 기준이 돼야한다”며 “헌재가 경남도의 권한쟁의 심판청구를 각하해야한다”고 촉구했다. 권오봉 여수시장은 지난 7일 전남·경남 해상경계 권한쟁의 심판 최종 공개변론을 앞두고 헌법재판소 앞에서 시위 중인 전남 어업인들을 찾아 ‘1인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다. 무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루쉰·예로센코 옆 ‘자유 영혼’ 공초를 만나다

    루쉰·예로센코 옆 ‘자유 영혼’ 공초를 만나다

    한국 근대시의 선구자 공초 오상순(1894~1963) 시인을 재조명한 평전이 출간됐다. 이승하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가 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나남출판)이다. 자신도 시인인 이 교수가 그린 선배 문인 오상순은 ‘자유’ 그 자체다. 오 시인은 1920년대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폐허’의 창간 동인으로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허무혼의 선언’, ‘폐허의 제단’, ‘허무혼의 독어’처럼 허무를 소재로 쓴 시를 다수 발표하며 허무주의자로 알려졌다.그러나 책에 묘사된 인간 오상순은 허무주의자라기보다는 현실에서 해탈한 도인에 가깝다. 우주 원리를 탐구해 마침내 죽음의 번민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도를 깨치면 죽고 사는 게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 공초는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늘 있는 진여실상(眞如實相)의 존재’(129쪽)를 꿈꾸었다.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 한 권의 책도 내걸지 않았으며 재물과 지위, 아내와 자녀, 거처에 대한 욕심까지 모두 내려놨다. 공초에 대한 재평가는 그의 일본 유학 당시(1912~1917)와 1920년대 초반 중국 체류 행적과 관련이 있다. 젊은 시절 오상순은 일본과 중국, 한국, 구 만주 지역을 왕래하며 각국의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베이징에 있는 저우쭤런의 집에 기거하면서 중국의 문호 루쉰, 러시아 출신 아나키스트 예로센코 등과 만났다. 루쉰의 동생인 저우쭤런의 일기, 조선총독부 조사 기록, 에스페란토 대회 후 루쉰, 저우쭤런 등과 찍은 사진 등을 보면 공초가 에스페란토, 아나키즘 등 신문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책에는 수주 변영로가 쓴 오상순 관련 수필과 공초의 유고도 함께 수록했다. 책이 만들어진 과정은 더욱 의미 있다. 저자인 이 교수의 대학 시절 스승은 공초숭모회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며 늘 공초를 스승으로 모셨던 구상(1919~2004) 시인이다. 공초 생전에 비서 역할을 했던 박호준씨의 딸인 박윤희씨는 이 교수의 제자로 한중일을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교류했던 공초의 행적을 논문에 썼다. 2010년 백혈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제자의 노고를 이 교수가 평전에 상당 부분 옮기며 그를 추모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구보씨의 경성 한바퀴… 소외된 인생들의 도회 항구속으로

    구보씨의 경성 한바퀴… 소외된 인생들의 도회 항구속으로

    소설가 박태원(호 구보, 1909~1986)은 1934년 8~9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다. 26세의 주인공 구보가 하루 동안 경성 중심부 곳곳을 배회하며 보고 겪은 일들을 묘사한 중편 소설이다. 작가가 곧 작품 속 주인공이 되어 일제강점기 서울의 모습, 그리고 식민지 지식인의 감성을 그린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의 절친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은 ‘하융’이란 필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박태원의 1934년 여름, 경성 주인공 구보는 경성의 명문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을 갔다 귀국했으나 일정한 직업 없이 도시를 떠도는 룸펜 지식인이다. 유학 시절 실연의 아픔을 간직한 채, 귀국 후 아직 미혼으로 모친의 속을 썩이는 노총각이다. -당시 혼인 연령은 남자 평균 21세, 여자 17세였다. 구보의 집은 다옥정(현 중구 다동)에 있었으며, 어느 여름날 약속도 목적지도 없이 오전에 집을 나서 한밤중 귀가로 소설은 끝난다. 그 사이에 구보가 쏘다닌 경성부 내 주요 지점들을 당시 이름으로 열거해 본다. 화신상회 네거리, 경성운동장, 조선은행, 경성부청, 덕수궁 대한문, 경성역, 조선호텔, 황금정 등. 이 가운데 대한문은 위치가 변한 채로,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경성부청(서울시청 서울도서관), 경성역(옛 서울역사) 건물이 남아 소설을 기억시킨다.1930년대 서울은 거대 근대도시로 변화 중이었다. 1920년대 30만명이었던 인구가 1935년 65만명으로 늘어 일본에서도 7번째 규모가 되었다.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청사를, 덕수궁 앞에 경성부청사를 지어 식민도시의 통치 중심을 만들었다.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과 조선저축은행 본점(옛 제일은행 본점)이 1935년에 완공되니, 구보는 그 공사 중인 현장을 보았을 것이다. 구보가 즐겨 탔던 전차는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 도입했으며 총 13개 노선을 운행했다. 1934년 시내에 전화 180개선을 증설하는데 1300여명이 신청했다는 통계도 있다. 일본인 인구가 28%로 일본 자본의 진출이 급속히 늘었는데 주로 소비 유흥시설에 집중되었다.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관)과 조지야백화점(현 롯데영플라자 터) 등 5대 백화점이 식민지 수도의 소비를 부추겼다. 일본인들은 청계천 남쪽에 거주지를 꾸렸는데 다방 카페 요정 등 유흥시설도 조선인은 북쪽, 일본인은 남쪽을 장악하게 되었다. 김두한의 전설과 같이, 종로파 조선 건달들이 혼마치(本町, 현 명동)의 일본 야쿠자들과 대립했던 지리적 사정이었다. 화신백화점의 유통왕 박흥식, 전국 금광을 개발한 광산왕 최창학, 그리고 도시형 한옥 붐을 일으킨 건축왕 정세권 등 조선인 자본가도 등장했다.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의 시대였다. 그러나 구보에게 경성은 소비 지향적이고 저급한 유흥에 휩싸인 속물의 도시였다. 안주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는 고독과 상실의 도시였다. 왜 그런지 박태원도 몰랐을 것이다. 1930년대 초 경성의 번영이란 지극히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세계 경제대공황을 겪은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등 침략전쟁으로 경제부흥을 꾀했다. 일시적 호황에 중독되어 1937년 중일전쟁을,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소설 발표 불과 3년 후 연재했던 신문은 강제 폐간되었고 일제는 전시 체제에 돌입한다. 구보가 어렴풋하게 감지한 이유 모를 불안의 실체였다.●구보가 예외적으로 오래 머문 경성역 3등대합실 구보는 중요 건축물들의 외관만 바라보며 스쳐 지나갔다. 그의 관심은 건축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고현학(考現學, 현재를 다루는 고고학)적 풍경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읽고 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작업이다. 예외적으로 경성역 내부에 들어가 오랜 시간 머무르게 된다. 이곳의 3등대합실은 익명의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다. “경성역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와 친하여야 한다.” 1899년 최초로 개통된 경인선 철도는 노량진과 인천 구간이었다. 이듬해 서대문역까지 연장하면서 남대문 간이역을 세우는데, 바로 경성역의 전신이다. 현재의 구 서울역사는 1925년에 완공된다. 그 크기와 완성도가 동양 1,2위를 다투었다 할 정도로 수준 높은 건축물이다. 대륙 침략의 야심을 품은 일제는 극동 지역 철도망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성역은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의 기착점으로 각기 일본, 중국, 러시아로 통하는 중심 기지였다.도쿄대 교수인 쓰카모토 야스시가 설계자로 알려졌는데, 일본 건축계의 대부 다쓰노 긴고의 수제자였다. 긴고는 도쿄역사를 설계했고 이미 서울에 조선은행 본점(1912)을 설계한 실력자였다. 경성역의 전체 구성은 르네상스식이지만 중앙 돔은 비잔틴식, 양 옆 삼각형 박공벽은 신고전주의풍이다. 또한 붉은 벽돌(타일)과 화강암을 섞은 외벽 장식은 이미 암스테르담역과 도쿄역에서 사용했던 형식이다. 굳이 말하자면 여러 양식을 혼합한 절충식이라 할 수 있다. 인상적인 요소는 중앙 정문 위에 설치된 아치 창이다. 큰 반원 아치를 두 개의 기둥으로 나눈 디오크레티안 창이라 하는데, 고전주의 건축의 대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즐겨 써서 팔라디오 아치라고도 부른다. 경성역사의 건축적 모델은 스위스 루체른의 옛 역사(1896)라고 한다. 지난 세기에 불타 없어지고 정면의 팔라디안 아치만 남았지만, 경성역과 쌍둥이로 불릴 정도로 유사했다. 내부 공간은 제국의 계급질서에 따라 구성했다. 크고 높은 중앙홀이 있고, 좌우로 3등대합실과 1,2등대합실이 나뉘어 자리했다. 1,2등대합실 옆에는 여성 고객을 위한 부인대합실, 그리고 귀빈대기실이 있었다. 이 구역들은 출입이 통제되고 역장이 직접 접대하게 배치되었다. 반면 3등대합실은 중앙홀뿐 아니라 외부 광장에서도 자유롭게 드나들게 개방되었다. 구보 역시 광장에서 바로 들어와 대기 중인 익명의 승객들을 읽어냈다. 그러다 동창을 만나 장소를 이동해 차를 마신다. 1,2등대합실 안에 있던 티룸으로 추측되는데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이다. 2층에는 조선 최초의 대형양식당이라는 ‘더 그릴’이 있었다. 40여명의 국내외 셰프와 웨이터가 은그릇에 ‘경양식’을 담아 서빙했던 이 식당은 근대 경성, 국제 경성의 상징공간이 되었다.●식민지 도시와 타자의 건축 현존하는 조선은행 본점은 르네상스식 몸체에 바로크 돔을 얹은 견고한 건축이다. 골조는 철골과 콘크리트 구조이며 외벽에 육중한 화강석을 붙여 발권은행의 권위를 과시했다. 좌우 대칭의 완벽한 비례, 5개의 탑이 만드는 장대함, 고대 신전용 기둥 등은 식민지 경제 통치의 만신전을 만들기에 충분한 요소들이다. 여기서 현재의 소공로를 지나면 곧 경성부청사를 만나게 된다. 조선총독부 건축과에서 설계 공사한 건물로 르네상스식 구성에 장식이 없는 근대적 외벽을 가진 건물이다. 부청사 앞에는 교통광장(로터리)을 만들었고, 그 옆에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이 있었다. 구보는 소설에서 경성부청사를 ‘정력가형 육체를 가진 위압적인 장년’으로, 덕수궁은 ‘자신을 외면하는 영락한 옛 동창’으로 은유했다.구보가 접한 경성의 근대건축들은 하나같이 서구 고전주의 양식이다. 세부적 형태가 르네상스식이던 바로크식이던 그리스식이던 크게 보면 그렇다. 대칭과 비례, 법칙과 질서를 강조했던 건축양식이다. 19세기 유럽을 풍미하고 서구 열강의 제국화를 통해 전 세계에 유포된 제국주의 양식이다. 후발 제국주의 일본은 구라파 따라잡기의 끝판으로 고전주의 건축들을 식민지 수도 곳곳에 세웠다. 사라진 조선총독부가 대표적인 건축이다. 경성의 근대화란 고전주의화, 제국주의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조선적 전통이란 덕수궁에 대한 묘사대로 “빈약한 너무나 빈약한” 것이었다. 현 한국관광공사 사옥 자리에 있던 박태원의 생가는 중문과 대문이 있는 전통 한옥이었다. 대문을 나서 청계천을 지나면 곧 화신백화점 등 일본풍 유럽풍 건축이 즐비한 시가지다. 조선적인 것은 과거고 일본적인 유럽풍은 현재였다. 상반된 시공간이 공존하는 경성은 구보를 유혹하는 동시에 소외시켰다. 일제 강점시대에 저항(독립투쟁)과 순응(친일매판)의 삶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다수 조선인들은 소시민적 욕망과 소외의 회색지대에서 살았다. 구보는 그런 분열된 삶 속에서 타자화된 도시와 건축을 떠돌았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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