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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일 TV 하이라이트]

    ●특집다큐 ‘삶의 노래,정선아라리’(오전 11시10분) 강원도의 대표적 소리이자,우리나라 아리랑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정선아라리.첩첩산중 고단한 삶을 살아온 주민들에게 아라리는 힘든 산촌 생활을 견디게 해준 에너지이자 놀이이다.마을 주민들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정선아라리를 소개한다. ●달려라 울엄마(오후 9시20분) 영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원종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대신 받은 영재는 의아해한다.한편 시골에서 개그맨이 꿈인 주희 오빠 남용이 찾아온다.그러나 남용은 주희의 구박을 받다 결국 집에서 나간다.어느날 주희와 말숙은 TV에서 사물개그를 흉내내는 남용을 보게 되는데…. ●대장금(오후 9시55분) 오겸호측의 움직임을 감지한 최 상궁은 사헌부로 향하던 민 상궁을 납치한다.결국 민 상궁은 최씨 집안에 의해 암살된다.한편 대비전으로 불려온 장금은 정윤수의 유서가 없음을 밝힌다.그런데 유황오리 사건의 전모를 밝힌 정윤수의 유서가 사헌부에 접수되고 오겸호는 다시 사헌부의 조사를 받는다. ●장군이네가 행복한 33가지 이유(오후 6시) 33명의 특별한 가족 장군이네.김성진·엄미자 부부와 중증장애를 가진 베컴 할아버지,그리고 많은 아이들.서로 남남으로 살아오던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이나 가정불화,경제적인 이유로 버려지거나 맡겨진 뒤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됐다.이들 가족의 특별한 사랑을 만나본다. ●경찰24시(오후 10시50분) 주택가에서 조선족 부부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된다.단서는 용의자의 것으로 보이는 족적과 사라진 피해자들의 휴대전화.형사들은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나선다.사건 전날 피해자가 다른 조선족과 만났던 사실이 밝혀지고 그 중 행방이 묘연한 사람이 용의선상에 떠오른다. ●퀴즈 죽마고우(오후 6시45분)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청음회관은 청각장애로 재활치료가 필요한 친구들이 함께 사는 곳이다.이곳에서 학습지원을 받고 있는 10명의 친구들과 자원봉사자 선생님들이 출연한다.본선게임은 일석이조 수화게임,결선퀴즈는 스무고개 퀴즈,교과서 퀴즈,연상퀴즈 등을 출제한다. ●백지연의 정보특종(오후 3시20분) 정부는 국가 균형발전과 학벌주의 타파를 위해 공공기관 직원을 채용할 때 특정대학 출신이 일정 비율을 넘지 않도록 ‘명문대 쿼터제’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명문대 출신의 취업을 제한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각을 알아본다. ˝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8)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하)

    문:중국의 노예로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徐:당시 청나라는 계속된 전쟁으로 만주족의 인구가 크게 감소되었지요.대부분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살다 보니 농사 지을 일손이 부족하여 토지가 황폐해졌지요.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무기만큼이나 양식이 필요했는데,그 농사를 짓기 위해 포로가 필요했지요. 그 포로들을 농장 노예로 만들어 중노동을 시켰는데,조선인들은 주로 심양 부근인 동주보(東州保),둔소(屯所),안산(鞍山),흥경,청룡,풍윤(豊閏) 지역에 집중배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조선인 노예들은 뒷날 어떻게 처리되었을까요? 徐:민족동화 과정을 거쳐 만주적(滿洲籍)에 편입되어 귀화인이 되었는데,만주씨족통보(滿洲氏族通譜)에 올라 만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청나라 포로가 된 조선인은 모두 노예가 되었을까요? 徐:소수지만 군인,지도층에 편입된 흔적도 있지만 대개는 농장노예,만주족 귀족의 노비가 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문:조선인 포로를 분산시키거나 나누어 가졌다는 말인데,혹 인신매매도 있었을까요? 徐:‘심관록’에 그런 기록이 남아 있어요.이 문헌은 심양으로 끌려 온 조선의 두 왕자가 청나라 군인들에게 포위된 채 살았던 처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조선인들이 노예로 매매되었거나 포로 가족이 돈을 가져 와서 주고 데려가는 속환(贖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문:노예라면 상품으로 매매,양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고대 오리엔트,고대 그리스·로마,식민지시대 아메리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지요.노예무역선,노예사냥,미국의 흑인노예라는 말이 그 증거지요.그런데 조선인 전쟁포로가 노예로 매매되었으며,그들이 조선족의 원류이고,오늘날 한국에 노동자로 와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 속에 그런 비극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퍽 충격적인 일입니다. 徐:심관록 기록을 그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포로가 된 사람들을 매매하려고 모여들었다.성문 밖에는 포로가 된 남녀 수만 명이 있었다.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상봉하였거나 형제끼리 서로 만나 끌어 안고 통곡하는 데 울음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잡혀간 사람을 돈을 주고 찾아가기 위하여 날마다 성문 밖에 모였다.포로가 되어 있는 자의 부모나 아내 또는 자식들이 와서 얼마면 데려갈 수 있겠느냐고 가격을 흥정하는데,값이 비싼 경우는 백냥 또는 천냥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값이 너무 높아 어이없어 통곡하면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을 데리러 올 친척이 없어 홀로 있는 사람은 세자(世子) 관소(館所)에 찾아와서 속환시켜 달라고 울고 있으니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문:세자라면 누구를 말합니까? 徐:조선 인조대왕의 큰아들 이조(소현세자),둘째아들 이호(봉림대군,효종)입니다.병자호란 때 치욕적인 패배를 한 조선의 두 왕자를 인질로 데려왔거든요.노예로 매매당할 가혹한 운명에 놓여진 조선인들이 왕자들의 처소 울타리 밖에서 살려 달라고 호소했지요.두 왕자는 노예로 팔려가는 조선인들의 절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 도움도 못주는 자신들의 처지를 아파하면서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오늘날 중국 조선족 역사에는 이같은 노예 역사의 슬픔이 숨겨져 있습니다. 문:그렇다면 조선인의 중국 이민사를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으로 여기는 견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徐:18세기 후반 이전에 중국으로 온 조선인들 대부분이 중국으로 귀화해 버렸기 때문에 조선인으로 부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람이 없었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문:귀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徐:앞에서 잠시 말씀드렸듯이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만주족이 급격하게 감소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인구를 증가시키고,군인이 될 인원을 보충하며,노예 농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그런 나머지 만주인 호적에 편입될 사람을 모집하는 정책을 발표하며,편입자 숫자대로 상을 주는 제도가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초기에는 조선인들에게 강압적으로 귀화를 시켰지요.그런 연후에 조선인들은 비참한 처지를 벗어나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하여 스스로 귀화하고 만주호적자 모집에 순응하는 자연적 귀화과정을 밟았지요. 헤이룽장조선민족이란 문헌에는 청나라 초기에 만주적에 가입한 조선인의 성씨가 42개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이들의 선조는 대부분 천총(天聰) 연간인 1627∼1635년에 청나라로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문:그러니까 17세기 초·중엽에 이미 조선인들은 국적을 바꾸어 청나라 사람이 되고 만주 씨족에 올라 만주인이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徐:설혹 그런 식으로 귀화를 하지 않고 버틴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조선인이 다른 민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고,이같은 통혼을 기초로 하여 혈연관계와 친척관계를 맺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민족에게 겹겹으로 포위되어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 조선족의 처지임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북성 청룡현 박씨(朴氏) 조선족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이 박씨들의 조상은 명나라 말 청나라 초에 중국으로 왔는데 동성동본 불혼 제도를 대대로 이어받았다 합니다. 문:한족,몽골족,만주족으로 국적을 바꾼 사람들은 그 뒤로 조선족으로의 회복이 영영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徐:아닙니다.심리적으로는 자신들이 조선인이라는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게 존속되어 왔습니다.그러다가 1982년부터 조선족으로 고쳐서 조상이 남겨 둔 민족성을 회복한 사람이 많습니다. 조선 말에서 20세기 일제 때 중국으로 와서 조선족으로 분류된 이들에게 조선은 아직도 그리운 고향입니다.참,마음이 아픕니다. 문:일제 때 두만강,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올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 중에서도 해방 후 고향으로 가지 못한 채 조선족이 된 사람도 있습니까? 徐:아주 많습니다.우리 민족을 갈라 놓은 것은 공산주의자들보다 먼저 일왕(日王)정권이었지요.한반도의 남과 북은 통일이 되면 그날로 하나가 되겠지만 중국 조선족은 다르겠지요.그러니 일제의 식민통치는 중국 조선족에게는 치유될 수 없는 원한의 상처지요. 문:저는 이곳에 오기 전에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인 카레이츠들의 삶을 둘러 볼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특히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의 지방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하바로프스크 같은 도시의 장마당이라 부르는 난전에서 조선족 장사꾼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그들은 국경의 세관에서 비자를 받고 러시아로 오는데,주로 옷장사를 하더군요.하지만 한달간씩 머물며 장사를 해도 체재비를 빼면 남는 것이 없거나 손해를 보기 십상이라 했습니다.그런 그들이 한결같이 꿈꾸는 것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만,요즘 한국에 온 조선족들의 처지가 참 어렵습니다. 러시아의 카레이츠들보다 중국의 조선족 운명이 더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둘 다 우리 민족이 안고 사는 슬픔의 뿌리인데…. 徐:한국이 잘 살게 되어야 합니다.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잘 살게 되어야만 이 아픔의 역사가 통한과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조선족,러시아의 카레이츠,일본의 조센징은 모두 350만명 정도라고 한다.이들의 삶을 생각하기 위하여 ‘동북아평화연대’등의 모임이 생겨나고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조선족,고려인들은 사는 데 어려움이 크다. 그 어려움의 한 원인이 일본의 식민통치가 저지른 잘못이며,식민통치가 옳았다는 발언을 하는 일본의 정치지도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친일파 지식인들이 숭배되기도 한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7)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상)

    지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 안으로 편입시켜 그들의 역사화를 시도하고 있다.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중국의 이런 태도를 비난하며 반발하고 있다. 그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에는 조선족이라 불리는 200여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그들의 생김새,언어,전통,음식은 한국인들과 닮은 데가 많다.한글과 한문을 함께 사용하는 문자생활,조상 제사하는 방법과 장례 풍속 등의 문화생활도 유사한 데가 있다. 그들의 국적은 중국이며 자식들은 중국인과 똑같은 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다.특히 동북 3성이라 일컫는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조선족들은 한글과 한국 역사를 함께 가르치는 조선족 특유의 교육제도를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그들은 가난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일한다.돈을 벌기 위해서다.그런데 참 서럽다.한국인의 지독한 차별대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문제로 중국에 대해 분노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고구려 땅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들을 차별대우하는 한국인의 태도 사이에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조선족은 한국 슬픔의 한 원류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태도와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태도는 중국과 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며 조선족은 분명 한국 슬픔의 한 원류다.동북 3성이 아닌 중국의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조선족들도 많은데 이들은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한족(漢族)·몽골족·만주족 등으로 귀화했는데,이들 사는 곳을 두고 조선족들은 관내(官內)로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교포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1992년부터 꽤나 긴 시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만주와 북만주,일본의 총련과 민단사회를 두루 방문 여행했다. 특히 동북 3성인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여행은 러시아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카레이츠와 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갖게 했다.당시 나는 조선족의 기구한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족 역사학회’ 이사 서명훈(徐明勳) 선생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그의 아파트로 방문했다. 1992년 여름에서 1998년까지 사이에 있었던 20여 차례의 여행기록을 토대로 하여 그 이후의 변화된 사정들을 전화 취재와 자료로 보완하면서 한국 슬픔의 뿌리를 들추어 본다. 문: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徐:글쎄요.조선족 역사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적이 없어놔서….시작은 조선에서였지만,과정은 후금(後金),청(淸)나라,중국을 거쳐왔기 때문에 각 나라와 시대의 한 부분 또는 토막에 묻혀 있어서…. 문: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보시는지요. 徐:중국에서 출판된 어떤 조선인 이민사에 관한 기록에 보면 19세기 중엽 또는 19세기 말엽부터였다고 하더군요.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조선족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중국과 조선 역사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일찍이 17세기부터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민을 왔음이 확인됩니다. 문:중국과 조선의 역사 기록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을는지요. 徐:청대통사(淸代通史),헤이룽장이민개요(黑龍江移民槪要),성정회람(省政回覽),한국이민사연구(韓國移民史硏究),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태조고황제실록(太祖高皇帝實錄),청사고(淸史稿),청조사료총간(淸朝史料叢刊),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명청사료(明淸史料),만문노로(滿文老櫓),심관록(沈館錄),조선통사(朝鮮通史),선양일기(沈陽日記),랴오둥문헌미략(遼東文獻微略),중국동북농업사,팔기통지(八旗通志),지린통지(吉林通志),헤이룽장조선민족 등이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그런데 이 자료들 중에는 겨우 몇 마디,몇 글자로밖에 쓰여 있지 않은 것도 있는데,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뭐랄까요,중국역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문제는 바로 그 점입니다.한 두 글자로라도 적혀 있다는 것 말입니다.소위 조선인의 중국 이민을 연구한다는 이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역사란 많고 풍부한 자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淸에 잡힌 조선포로 1만3000명 귀환 기록 없어 문:17세기부터 중국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면 구체적인 시기나 원인을 알 수 있습니까. 徐:17세기 초 조선과 청국 사이에는 수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지 않습니까.1627년 1월13일 후금(後金)의 황제 황태극이 3만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한 일이 있었지요.한국에서는 정묘호란이라 부르지요. 그 후 1636년 3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그해 12월9일 만주군,몽골군,한군을 합한 12만 대군으로 재차 조선을 공격했는데 병자호란이 그것입니다.패한 조선에서는 수천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정묘호란 때의 포로가 4986명이었고,병자호란 때는 3000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또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명나라를 지원하려고 파견되었던 조선군 1만 3000명 중에서 5000명이 후금에 투항하여 포로가 된 일도 있었지요. 이렇게 보면 이미 1618년에서 1636년에 이르는 18년 동안에 무려 1만 3000여명이라는 많은 조선 군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는데,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들은 결국 청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었겠지요. 문:전쟁 포로를 이민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徐:그 점이 조선족 역사의 특성입니다.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에서 살게 된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하는데,중국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경우지요.앞에서 살핀 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끌려와서 주로 노예신분이 되어 살았습니다. 둘째는 납치된 사람들입니다.즉 후금은 만주 땅에다 나라를 세운 뒤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에서 사람을 납치해 와서 노비로 삼았지요.현재 랴오닝성의 흥경노성(興京老成) 밖에 있는 고려촌이 그 증거입니다. 셋째는 중국으로 피신해온 사람들이지요.정치범이나 일반 형사범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대표적인 경우로 1625년 인조반정 때 이괄(李适)과 함께 처형당한 한명렴(韓明廉)의 아들 한윤(韓潤)과 조카 한의(韓義)가 후금으로 피신하여 후금의 군인 간부가 된 일이 있지요.한윤,한의는 뒷날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길 안내를 맡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정여립 모반사건 때 화를 피해서 온 정(鄭)가 성씨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굶주림 피해 국경넘어 中동북3성 정착 넷째는 유민(流民)들입니다.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은 자주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에 와서 정착했습니다.17세기 조선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봉건통치 계급의 참혹한 착취를 피하거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는 일이 빈번했지요. 토지가 넓고,인구는 매우 적으며,압제와 수탈과 부역이 적은 중국 쪽으로 피해서 살고 싶은 욕망이 크게 작용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족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이들 유민이었습니다.살아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경 탈출을 한 이들이 본격적인 중국이민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들에 관한 일은 1628년,1631년,1635년,1639년,1686년의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중국의 책임자가 조선의 왕에게 국경을 봉쇄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단속해 달라는 강력한 항의가 주를 이루고 있지요. 다섯째는 혼인정책에 의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조선의 공주가 청나라 왕실과 결혼하거나 조선 대신들의 딸,손녀가 청나라 왕실 귀족들과 혼인한 일이 많았습니다.조선의 공주나 대신들의 딸들이 청나라로 시집을 오게 되면 이들을 따라서 오는 조선인이 많았지요.이들은 친인척들끼리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비교적 높은 벼슬을 유지하면서 중국화되었지요. 그 외에 청나라 때에는 조선에서 여자들을 데려와 혼인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조선에서는 벼슬아치들의 첩실 몸에서 난 어린 딸들을 주로 보내주었지요.이들도 뒷날 중국화했습니다. 문:그러면 포로 등 다섯 부류로 나눠진 조선인들이 중국에 와서 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요. 徐:그들의 직업은 크게 나누어 가장 많은 숫자가 농사짓는 노예였고,더러는 귀족 가문에 소속된 노예도 있었고,팔기군(八旗軍)의 병사도 있었으며,매우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사회 상층부 인물도 있었습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17)조선족의 뿌리를 찾아서(상)

    지금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 안으로 편입시켜 그들의 역사화를 시도하고 있다.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중국의 이런 태도를 비난하며 반발하고 있다. 그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에는 조선족이라 불리는 200여만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그들의 생김새,언어,전통,음식은 한국인들과 닮은 데가 많다.한글과 한문을 함께 사용하는 문자생활,조상 제사하는 방법과 장례 풍속 등의 문화생활도 유사한 데가 있다. 그들의 국적은 중국이며 자식들은 중국인과 똑같은 교육을 받는 사람이 많다.특히 동북 3성이라 일컫는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조선족들은 한글과 한국 역사를 함께 가르치는 조선족 특유의 교육제도를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그들은 가난 때문에 한국에 와서 일한다.돈을 벌기 위해서다.그런데 참 서럽다.한국인의 지독한 차별대우 때문이다. 고구려 역사문제로 중국에 대해 분노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고구려 땅에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들을 차별대우하는 한국인의 태도 사이에는 이중성이 존재한다. ●조선족은 한국 슬픔의 한 원류 중국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태도와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태도는 중국과 한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며 조선족은 분명 한국 슬픔의 한 원류다.동북 3성이 아닌 중국의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조선족들도 많은데 이들은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한족(漢族)·몽골족·만주족 등으로 귀화했는데,이들 사는 곳을 두고 조선족들은 관내(官內)로 들어간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교포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1992년부터 꽤나 긴 시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만주와 북만주,일본의 총련과 민단사회를 두루 방문 여행했다. 특히 동북 3성인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의 여행은 러시아와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카레이츠와 한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갖게 했다.당시 나는 조선족의 기구한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족 역사학회’ 이사 서명훈(徐明勳) 선생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그의 아파트로 방문했다. 1992년 여름에서 1998년까지 사이에 있었던 20여 차례의 여행기록을 토대로 하여 그 이후의 변화된 사정들을 전화 취재와 자료로 보완하면서 한국 슬픔의 뿌리를 들추어 본다. 문: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분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徐:글쎄요.조선족 역사라는 것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적이 없어놔서….시작은 조선에서였지만,과정은 후금(後金),청(淸)나라,중국을 거쳐왔기 때문에 각 나라와 시대의 한 부분 또는 토막에 묻혀 있어서…. 문:언제부터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보시는지요. 徐:중국에서 출판된 어떤 조선인 이민사에 관한 기록에 보면 19세기 중엽 또는 19세기 말엽부터였다고 하더군요.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조선족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중국과 조선 역사 기록을 잘 살펴보면 일찍이 17세기부터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민을 왔음이 확인됩니다. 문:중국과 조선의 역사 기록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을는지요. 徐:청대통사(淸代通史),헤이룽장이민개요(黑龍江移民槪要),성정회람(省政回覽),한국이민사연구(韓國移民史硏究),동삼성정략(東三省政略),태조고황제실록(太祖高皇帝實錄),청사고(淸史稿),청조사료총간(淸朝史料叢刊),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명청사료(明淸史料),만문노로(滿文老櫓),심관록(沈館錄),조선통사(朝鮮通史),선양일기(沈陽日記),랴오둥문헌미략(遼東文獻微略),중국동북농업사,팔기통지(八旗通志),지린통지(吉林通志),헤이룽장조선민족 등이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그런데 이 자료들 중에는 겨우 몇 마디,몇 글자로밖에 쓰여 있지 않은 것도 있는데,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뭐랄까요,중국역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문제는 바로 그 점입니다.한 두 글자로라도 적혀 있다는 것 말입니다.소위 조선인의 중국 이민을 연구한다는 이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역사란 많고 풍부한 자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淸에 잡힌 조선포로 1만3000명 귀환 기록 없어 문:17세기부터 중국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면 구체적인 시기나 원인을 알 수 있습니까. 徐:17세기 초 조선과 청국 사이에는 수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지 않습니까.1627년 1월13일 후금(後金)의 황제 황태극이 3만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한 일이 있었지요.한국에서는 정묘호란이라 부르지요. 그 후 1636년 3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그해 12월9일 만주군,몽골군,한군을 합한 12만 대군으로 재차 조선을 공격했는데 병자호란이 그것입니다.패한 조선에서는 수천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정묘호란 때의 포로가 4986명이었고,병자호란 때는 3000명의 포로가 청나라로 끌려왔습니다. 또 1618년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명나라를 지원하려고 파견되었던 조선군 1만 3000명 중에서 5000명이 후금에 투항하여 포로가 된 일도 있었지요. 이렇게 보면 이미 1618년에서 1636년에 이르는 18년 동안에 무려 1만 3000여명이라는 많은 조선 군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는데,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그들은 결국 청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었겠지요. 문:전쟁 포로를 이민으로 볼 수도 있을까요. 徐:그 점이 조선족 역사의 특성입니다.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에서 살게 된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하는데,중국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경우지요.앞에서 살핀 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끌려와서 주로 노예신분이 되어 살았습니다. 둘째는 납치된 사람들입니다.즉 후금은 만주 땅에다 나라를 세운 뒤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에서 사람을 납치해 와서 노비로 삼았지요.현재 랴오닝성의 흥경노성(興京老成) 밖에 있는 고려촌이 그 증거입니다. 셋째는 중국으로 피신해온 사람들이지요.정치범이나 일반 형사범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대표적인 경우로 1625년 인조반정 때 이괄(李适)과 함께 처형당한 한명렴(韓明廉)의 아들 한윤(韓潤)과 조카 한의(韓義)가 후금으로 피신하여 후금의 군인 간부가 된 일이 있지요.한윤,한의는 뒷날 정묘호란 때 후금의 길 안내를 맡기도 했지요. 그 외에도 정여립 모반사건 때 화를 피해서 온 정(鄭)가 성씨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굶주림 피해 국경넘어 中동북3성 정착 넷째는 유민(流民)들입니다.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은 자주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방에 와서 정착했습니다.17세기 조선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봉건통치 계급의 참혹한 착취를 피하거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는 일이 빈번했지요. 토지가 넓고,인구는 매우 적으며,압제와 수탈과 부역이 적은 중국 쪽으로 피해서 살고 싶은 욕망이 크게 작용했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족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가 이들 유민이었습니다.살아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경 탈출을 한 이들이 본격적인 중국이민자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들에 관한 일은 1628년,1631년,1635년,1639년,1686년의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중국의 책임자가 조선의 왕에게 국경을 봉쇄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단속해 달라는 강력한 항의가 주를 이루고 있지요. 다섯째는 혼인정책에 의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조선의 공주가 청나라 왕실과 결혼하거나 조선 대신들의 딸,손녀가 청나라 왕실 귀족들과 혼인한 일이 많았습니다.조선의 공주나 대신들의 딸들이 청나라로 시집을 오게 되면 이들을 따라서 오는 조선인이 많았지요.이들은 친인척들끼리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비교적 높은 벼슬을 유지하면서 중국화되었지요. 그 외에 청나라 때에는 조선에서 여자들을 데려와 혼인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조선에서는 벼슬아치들의 첩실 몸에서 난 어린 딸들을 주로 보내주었지요.이들도 뒷날 중국화했습니다. 문:그러면 포로 등 다섯 부류로 나눠진 조선인들이 중국에 와서 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았을까요. 徐:그들의 직업은 크게 나누어 가장 많은 숫자가 농사짓는 노예였고,더러는 귀족 가문에 소속된 노예도 있었고,팔기군(八旗軍)의 병사도 있었으며,매우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사회 상층부 인물도 있었습니다.˝
  • 250억대 북한 필로폰 밀반입

    서울 마포경찰서는 23일 중국의 범죄조직 삼합회 하부조직 삼진회로부터 250억원대의 북한산 필로폰을 사들여 전국에 유통시킨 국내 판매 총책 이모(57·사업)씨와 운반책 박모(39·무역업)씨,지역판매책 정모(27·무직)씨,소매책 김모(29·건설업)씨 등 17명을 마약류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또 엄모(40·유통업)씨 등 알선판매책과 투약자 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경찰은 시가 125억원어치의 필로폰과 대마,1회용 주사기 51개 등 압수했다. 이들은 지난해 2월 초부터 9월까지 중국 푸젠(福建)성의 조선족 출신 공급책 이모(40·수배)씨로부터 3차례에 걸쳐 시가 250억원어치의 필로폰을 8100만원에 사들여 이 가운데 절반가량을 국내 점조직을 통해 유통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이들이 사들인 필로폰은 18만명이 한꺼번에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이다.삼진회는 북한 등지에서 필로폰 등을 사들여 한국,일본,유럽 등 전세계에 밀수출하는 국제범죄조직으로 알려져 있다.경찰조사 결과 이들은 필로폰을 옥장판용 옥돌 자재 등에 숨겨 화물선에 실어 인천항을 통해 몰래 들여왔다. 마포서 마약반장 박정욱 경위는 “조선족 출신 공급책 이씨를 잡기 위해 중국 공안내 마약수사 전담반에 수사공조를 요청하고 국가정보원,서울세관 등 관계기관과 연계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채수범기자 lokavid@˝
  • 기고/ 中의 고구려사 왜곡을 바라보며

    중국에는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성어가 전해진다.위선적 우호선린(友好善隣)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말 역시 우호선린 관계의 지속이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이 자주 사용한 전통적 대외전략이다.이러한 대외관계의 특징은 현대에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중국사회과학원이 주체가 된 ‘동북프로젝트(東北工程)’라는 국책사업이 진행되고 있다.이는 역사연구를 통해 우리 민족의 뿌리인 고구려를 중국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작업이다.중국이 틈만 나면 강조하는 우호선린 관계의 또 다른 이면을 엿볼 수 있다.우호관계를 아무리 강조해도 선린관계로의 발전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중국은 인근에 위치한 여러 국가들이 경계하는 대상이다.베트남,인도,러시아,일본을 비롯해 지금은 중국에 속해 있는 티베트 역시 중국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갖고 있다.인근 국가들이 갖고 있는 반감의 원인은 단지 국가간의 이해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중국의 국민성에서도 그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추악한 중국인(醜陋的中國人)’의 저자 바이양(柏楊)선생은 현대 중국의 국민성도 전통적 국민성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중국이 개방되고 외국기업의 대 중국투자가 급증하고 있는 현재도 중국인의 자기중심적이고 보수적인 국민성은 별로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이를 국가 규모로 확대시킨다면 자국중심주의가 될 것이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부터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며,중국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역사”라는 억지주장을 펼쳐왔다.현재의 중국 영토를 잣대로 사용하는 궤변이다.나아가 주변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무시하는 중화(中華)주의적 세계관의 표출인 것이다.중국인의 민족성 가운데 또 한가지 위험한 것은 ‘집요함’이다.자신의 적에 대해서는 분묘라도 파헤치고,원한은 3대를 걸쳐서라도 반드시 갚는다는 섬뜩한 집요함이 있다. 5년 동안 연구비만 200억 위안(약 3조원)을 투입하는 ‘동북프로젝트’가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20년 이상 수백편의 논문을 통해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계속해왔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이는 자신의 억지주장에 대해 더욱 정교한 이론적 틀을 갖춰가려는 작업으로 판단된다.나아가 한국의 고대사를 폄하함으로써 남북통일 이후 예상되는 국경·영토분쟁에 대비하고,최근 불거지는 ‘북간도 문제’를 제압하려는 국가 차원의 전략이기도 하다. 현안이 되고 있는 타이완문제,티베트문제와 동일한 선상에서 집요하게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중국의 태도에 두려움을 느낀다.중국의 이러한 움직임에 우리의 정부나 학계는 뒤늦게 심각성을 인식하고 중국교과서를 분석하고 북한과의 공동대응,국제연대를 모색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대응방법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조선족 문제 하나도 중국의 눈치를 보는 마당에 강력한 대응을 할 수 있겠느냐는 자조섞인 비아냥이다.사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약한 자의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강한 자에 대한 도전의 의지가 부족하다. 일본이 동방의작은 섬나라에서 멈추지 않고 세계적 강자로 부상한데는 지속적으로 강자에 도전하는 국민적 의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일제가 실증사학이란 명분으로 한민족사를 축소·왜곡한 영향이 아직도 우리 학계에 남아 있다는 핑계는 본질적인 반성이 아니다.차제에 고구려사에 대한 논리적·실증적 연구를 펴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고대사 연구진 양성 등 전문인력 확보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지원도 절실하다.아울러 강자에 대한 도전의지를 갖고 정부가 보다 강력하게 대처해주기를 바란다.우리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에서도 중국과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는 대만정부의 담력과 지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윤태 동덕여대교수 중국학
  • ‘北공증서’ 법적효력 첫 인정

    법원이 ‘북한판 동의보감’의 출판권 침해를 둘러싼 민사소송에서 북한 공증기관이 제시한 공증서의 법적효력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이번 판결은 증거부족이란 결정을 내린 검찰의 결론을 뒤집은 것으로,북한측과 맺은 계약을 둘러싼 다른 소송에서도 북한 공증서가 증거로 채택될지 주목된다. 여강출판사 사장인 이모(52)씨는 지난 93년 12월 중국 선양(瀋陽)시 조선족 문화예술관 부관장인 윤모씨를 찾았다.조선족 문화예술관은 ‘북한판 동의보감’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를 대리해 출판계약을 맺는 기관.이씨는 1만달러에 15년간 남한에서 동의보감을 출판하기로 계약을 맺고 지난 94년 남한에서 책을 펴냈다.그러나 지난 99년 12월,법인문화사를 운영하던 김모씨가 국내 한의학과 교수 20여명이 번역한 것처럼 꾸며 ‘동의보감 대역본’을 출판함으로써 송사가 시작됐다. 검찰은 이에 대해 2000년 12월 “이씨가 북한의 출판권을 위임받았다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결정했다.이씨는 이에 맞서 김씨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3년간 진행된 법정 공방의 핵심은 이씨가 조선족 문화예술관과 맺은 출판권 계약이 유효한지 여부.2000년 9월 북한 공증기관인 ‘평양시 공증소’는 “북한판 동의보감의 저작권자는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이며,대리권은 조선족 문화예술관이 갖는다.”는 공증서를 보내왔다.국가정보원과 통일부도 사실조회를 통해 “평양 공증서가 위조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결국 서울지법 민사합의12부(부장 조관행)는 24일 “출판권 계약이 유효하다는 점이 인정된다.”면서 “김씨뿐 아니라 불법행위에 가담한 한의학과 교수들은 공동으로 73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정은주기자 ejung@
  • 책/우리에게 다가온 조선족은 누구인가

    임계순 지음 현암사 펴냄 조선족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우리는 어떻게 조선족을 기억하고 있는가.1982년 중국이 조선족의 고국 방문을 허용하고,1992년 한중수교로 한국이 조선족에 취업문호를 개방한 이래 조선족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존재가 됐다.그러나 급격한 교류는 적잖은 후유증을 남겼다.조선족자치주에서는 ‘코리안 드림’으로,한국에서는 ‘불법체류’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가깝지만 먼’ 사이가 되고 만 것이다. 국내 최고의 중국통으로 꼽히는 한양대 사학과 임계순(사진·59) 교수가 쓴 ‘우리에게 다가온 조선족은 누구인가’(현암사 펴냄)는 그런 안타까운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처방전의 성격을 지닌다.저자는 조선족 150년의 역사를 훑으며 조선족과 한국 사회가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생긴 반목을 해소하고 상생의 길을 열어갈 것을 제안한다. 조선족은 현재 200여만 명으로 지린성·랴오닝성·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에 97% 이상이 모여 산다.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열 세번째로 인구가 많은 ‘유력 민족’이다.중국 동북지역은 한반도에 인접해 있어 고대부터 우리와는 밀접한 역사적 관계를 맺어 왔다.고구려와 발해가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일대에 걸쳐 있었던 만큼 10세기 초까지 중국 동북지역의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동부는 우리 선조들의 활동무대였다.중국 학자들은 물론 이 지역을 중국 북방 소수민족이 활동한 공간으로 본다.조선족은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공산당과 국민당이 서로 차지하려 다퉜던 동북지역에서 공산당을 지지하고 해방전쟁을 도와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에 기여하면서 중국의 공민이 됐다.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이라는 격동기를 거치며 조선족은 자치주 나름의 정체성을 가꿔왔다. 책은 조선족의 역사를 ‘조선족’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1952년부터가 아니라 한족(韓族)인 ‘조선인’이 중국 동북지역에 살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 다룬다.1712년 청과 조선 사이에 국경이 정해졌지만 중국 조선족 선조들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역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청 조정의 봉금정책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조선인의 황무지 개간은 묵인됐다.저자는 조선인의 동북지역 이주를 국경선을 넘어 잠입한 시기(1860∼1904),자유이민 시기(1905∼1930),강제집단이민 시기(1931∼1945)등 3단계로 나눠 살핀다. 저자는 조선족의 삶과 사고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한다.한중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족 중에는 ‘이민의식과 정착의식’‘손님의식과 주인의식’이라는 이중적인 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1950년대 일부 조선족들은 ‘조선은 민족의 조국이고,중국은 인민의 조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론’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조선족 2·3세,즉 40대 이하의 사람들은 어엿한 중국의 공민으로서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조국관을 보인다.여기서 저자는 “조선족에게 한국은 어디까지나 ‘고국’일 뿐,그들이 진정 생명을 바쳐 지키고자 하는 ‘조국’은 중국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조선족 문제를 보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눈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옌볜 조선족자치주를 포함한 중국 동북지역은 한국과 중국,일본이 접촉하는 완충지대다.중국은 동북지역에서의 소수민족 분쟁을 우려해 옌볜 자치주 일대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는 한편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귀속시키기 위한 ‘동북공정’프로젝트까지 추진하는 등 외교·역사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그런 점에서 중국 동북지역 개척의 주인공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의 공신인 조선족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륙의 모랫바람에 묻힌 한민족의 흔적을 하나하나 들춰내는 저자의 작업은 21세기 동북아 시대를 이끌어가야 할 우리로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다.조선족의 삶과 사고방식,고난의 역사를 꼼꼼히 살핀 이 책은 중국에 진출하고자 하는 기업인이나 국가정책 입안자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도 관심을 갖고 읽을 만하다.1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국제플러스/ 中 동북3성 국유기업 구조조정 추진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중국의 옌볜(延邊)자치주를 비롯해 조선족이 몰려 사는 랴오닝(遼寧)성,지린(吉林)성,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북 3성 경제진흥 계획은 서부대개발과는 달리 대규모 국유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추진될 방침이다. 동북 3성 지도자들은 8일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합동 기자회견에서 노후한 중공업 기반인 이 지역을 재정 해결을 위한 국내 최대의 시금석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 중국축구단 16명 돌연 잠적

    중국인 1명과 조선족 교포 15명 등으로 구성된 중국축구선수단이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뒤 잠적,경찰이 소재 파악에 나섰다. 7일 경찰에 따르면 대구시축구협회 김모(48) 전무가 협회의 초청으로 지난 6일 낮 12시 한·중 여객선인 ‘대인호’ 편으로 인천항제1여객터미널로 입국한 중국축구선수단 16명 전원이 잠적했다고 신고해왔다. 나이가 20∼36세인 선수단은 중국인 부단장을 제외한 15명이 모두 조선족 교포이고,단장을 비롯해 6명의 임원과 10명의 선수들로 구성돼 있다.이들은 중국 옌지(延吉)시 체육고와 서타축구학교 소속 선수들로,7∼30일 국내를 순회하며 S고교팀 등과 친선경기를 가질 목적으로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S고교측은 중국축구선수단을 초청한 적도,전지훈련통보를 받은 적도 없다며 대구시축구협회측에 밝혀왔다. 경찰은 이들이 취업 등의 목적으로 사전에 국내 알선책과 연계돼 치밀한 계획하에 입국한 후 도주한 것으로 보고 행방을 쫓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
  • 나눔세상/ 함께 일군 400억 나눔도 함께

    한 병원 주인이 “죽은 뒤 가져갈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자산가치 400억원대의 재산을 흔쾌히 내놓았다.의료법인 전남 여수 성심종합병원의 명예이사장으로 물러난 박순용(朴順龍·사진·61)씨다. 박씨는 “병원은 직원들과 이곳을 이용해준 지역민들의 것”이라며 16년동안 병원을 튼실하게 키워온 직원들에게 돌려줬다. 여수시청에서 가까운 둔덕동에 자리한 이 법인은 평가액만 잡아도 473억여원이나 부채는 64억원에 불과하다.연간 매출액이 200억여원으로 3년 전부터 해마다 7억원 이상 순이익을 내는 알토란같은 병원이다.지하 1층,지상 5층에 295개 병상이 있는 본관동과 종합검진센터·간호학원·장례식장·어린이집 등 4개 별개동이 있다.이곳에서 전문의 20명,간호사 100여명 등 직원 268명이 일한다. 재단이사장은 유춘식 신경외과 과장,병원장은 정대관 내과 전문의로 바뀌었고 병원 직원 등 7명으로 된 재단이사회에서 중요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박씨는 직원들이 당분간 운영 정상화를 들어 재촉하는 바람에 잠시동안 명예이사장을 떠맡았다.서울에서 전기공사 관련 자재업으로 돈을 모은 박씨는 지난 88년 부도가 난 이 병원을 인수하면서 고향(전남 나주)이 아닌 여수와 인연을 맺었다.이후 병원시설 투자에 350억여원을 쏟아 부으면서 친절하고 신뢰받는 의료기관으로 우뚝섰다. 평소에도 그는 좋은 일로 분주하다.해마다 불우이웃돕기와 섬지역 의료사업비 등으로 2억여원씩을 내놓고 중국 조선족 동포학교에도 1000만원을 기탁했다.지금은 달동네에 연탄과 쌀을 대주기 위해 2억여원의 목돈을 마련중이다.틈이 나면 색소폰 연주 실력을 살려 마을 노인회관을 찾아 함께 즐기기도 한다.부인(51)과 1남1녀도 박씨의 고귀한 뜻을 존중해 힘을 실어줬다. 여수 남기창기자 kcnam@
  • 조선족3234명 “15일까지 자진출국”

    서울 조선족교회는 오는 15일 정부의 자진출국 시한을 앞두고 3234명의 중국동포가 자진 출국하기로 했다고 4일 밝혔다. 중국동포 1500여명은 이날 오후 서울 구로구 조선족교회 앞에서 귀국결의대회를 갖고 체불임금이나 전세 보증금 문제 해결에 정부가 나설 것을 촉구했다. 조선족교회는 출국을 원하는 중국동포들의 명단을 5일까지 추가 접수해 정부에 전달하고 6개월 뒤 고용허가제에 따른 재입국 보장을 요구할 방침이다. 이 교회 이은규 목사는 “5일부터 각자 비행기나 배편으로 중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세상 바꾸는 ‘100원’

    “거리의 노숙자들이 내민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25일 오전 11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쌍굴다리 밑에서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서울다일교회 신도와 노숙자,독거노인 등 1300여명이 참석한 거리예배가 끝날 무렵,굶주리는 캄보디아인들을 위해 쓰일 기금을 모으는 모금함이 돌기 시작했다.그러자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노숙자와 독거노인들이 선뜻 주머니를 털어 작은 정성을 모았다. 청량리 인근 쪽방에서 혼자 사는 조성구(73)씨는 바지 주머니를 몇 번이나 뒤져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밀었다.“젊은이 이것밖에 없는데…”라며 미안해하는 그에게 자원봉사자는 “어르신,무슨 말씀입니까.너무 감사합니다.”라며 미소로 화답했다.1급장애인으로 다일공동체의 도움을 받고 있는 권점용(38·동대문구 전농1동)씨도 기꺼이 모금에 동참했다.권씨는 “외국의 없는 사람들을 돕겠다는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야 한다.”면서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그들보다는 사정이 낫다.”고 말했다. 이날 모은 돈은 모두 192만 3170원.끼니를 무료급식에 기대어 살고 있는 이들이 모은 금액으로는 결코 적지 않은 액수다.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는 “거리노숙자나 독거노인들에게 100원은 가진 이들의 100만원과 비교할 수 없는 큰 돈”이라면서 “낮은 이들의 정성은 나눔에 인색한 세상 사람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이날 거리예배는 지난 88년 다일공동체 최 목사와 5명의 노인·노숙자가 모여 성탄절 예배를 드리며 시작된 이후 16번째로 열렸다. 한편 이날 서울 곳곳에서는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성탄예배가 줄을 이었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향린교회,이웃사랑교회 신도 200여명은 오후 3시 서울 세종로 한국통신 앞에서 ‘고난받는 이와 함께하는 평화기원 성탄절 연합예배’를 가졌다.구로구 조선족교회와 경기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에서는 외국인노동자와 함께 하는 성탄예배가 열렸다.또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소속 신도 5000명은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평화기원 성탄절 연합예배’를 갖고 성탄의 참뜻을 기렸다. 유영규기자 whoami@
  • 전용일씨 국내정착 어떻게/이르면 3주후 가족과 ‘새삶’

    50년 만에 귀환한 국군포로 전용일(72)씨는 이르면 3주 후쯤부터 남한의 가족들과 새 삶을 살 것으로 보인다.정부 합동조사단의 세밀한 조사를 거친 뒤 그리운 가족들과 설(내년 1월22일)을 함께 지낼 수도 있다.일반 탈북자들이 남한사회 정착을 위해 거치는 ‘하나원’에서의 2개월짜리 교육과정도 생략할 것 같다. 합동조사단 신문 기간은 3∼4주.그동안 외부인사와의 면회,전화통화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지만 전씨의 경우 가족들과의 면회가 허용될 가능성도 있다. 경북 영천에 거주하는 동생 수일(64)씨 등은 조만간 상경해 정부 당국에 용일씨와의 조기 면담을 요청할 계획이다. 전씨가 조사받을 내용에는 포로로 잡힐 당시 상황에서부터 북한에 정착한 이후의 모든 행적이 포함된다. 포로로서 북한에서 겪은 어려움에 상응한 보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행적 조사가 다른 탈북자들과는 달리 보다 세밀하게 이뤄질 것이란 게 정부측 설명이다. 조사를 받는 동안 정부는 전씨의 호적을 회복하고 주민등록증도 발급해줄 계획이다. 거주지는 전적으로 전씨의 선택사항이다.일반 탈북자의 경우 서울 거주 선호도가 높아 제비뽑기 방식으로 거주지를 결정하지만 전씨는 본래 한국민이었던 만큼 본인의 의사에 달려있다. 이미 귀화한 국군포로들이 대체로 가족,친인척이 있는 연고지를 택했는데,전씨도 누나 영록(78),남동생 수일씨,여동생 분일(58)씨 등이 살고 있는 경북 영천이나 대구에 정착할 가능성이 높다. 전씨에 대한 훈장수여도 논의되고 있다.정부 관계자는 “전씨가 입국 직후 ‘50년간 한국군을 위해 복무했다.’고 밝힌 점으로 미뤄 투철한 애국심을 갖고 북한 생활을 견뎠던 것으로 추정된다.” 면서 “그러나 조사 결과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합동조사단은 이와 함께 전씨와 함께 입국한 최응희(67·여)씨 신분도 조사중이다. 최씨가 탈북자인지,조선족인지 불투명한 상태다.탈북자일 경우 통일부에 통보하고 탈북자에 준하는 정착금과 정착에 필요한 절차를 밟게 되지만 조선족일 경우 법무부 소관으로 두사람의 결혼 여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최씨는 24일 공항에서 “지난 10월 전씨를 중국에서 만나 한국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고만 밝혔었다. 전씨가 북한에서 결혼한 부인은 지난 92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수정기자 crystal@
  • ‘비자 장사’ 前홍콩영사 구속 265명에 2억 받고 부정발급

    홍콩주재 한국총영사관에서 비자발급을 담당한 영사가 불법 비자를 발급해주고 억대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확인됐다.검찰은 1년여에 걸친 홍콩 수사당국의 계좌추적 작업을 토대로 비자발급 브로커와의 유착 정황을 포착했으며 홍콩 외에 다른 동·서남아 재외 공관에 대한 비리 첩보도 입수,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서울지검 외사부(부장 閔有台)는 18일 한국입국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일부 중국동포와 중국인에게 비자를 발급하고 2억 6300여만원을 받은 전 홍콩주재 한국총영사관 영사 이정재(52·본부 대기발령)씨를 특가법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했다. 이씨는 홍콩주재 영사로 재직하던 2000년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브로커 황모씨와 이모씨가 대리신청한 조선족 고모씨 등 265명에게 비자를 발급해주고 황씨 등으로부터 36차례에 걸쳐 모두 176만 4000홍콩달러(한화 2억 6300여만원)를 받은 혐의다.이씨는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참고인들에게 허위진술을 부탁하고 자신의 계좌에 입금된 돈을 전액 인출해 빼돌린 뒤 “돈이 입금된 계좌는 다른 사람에게빌려준 것”이라고 증거인멸까지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관계자는 “이씨가 비자를 내준 입국자 대부분이 불법체류자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시론] 서희장군을 다시 생각한다

    요즈음 화제의 영화 가운데 황산벌이 있다.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쟁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어 유행어까지 낳았지만,김유신과 소정방의 기세 싸움도 볼 만하다.강압적인 소정방과 이에 저항하는 김유신의 모습에서 1300년 뒤 오늘의 우리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다.주변국을 아랑곳하지 않는 중국인의 오만불손한 태도가 고구려사 빼앗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를 중국사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되었다.그런데도 이른바 ‘동북공정’이 새삼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하나는 종전에는 학자 개인이나 지방정부 차원에서 논의되었지만 이제는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5년간 지원하는 1500백만위안의 연구비 가운데 3분의2를 중국 재정부에서 출연하고,재정부 부장(장관)까지도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다. 둘째는 국경을 넘어 우리 영토까지 넘보고 있다는 사실이다.중국은 소수민족의 분리운동을 차단하기 위해서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있는 과거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규정해왔다.그런데 이제는 고조선과 한사군,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지는 한반도 북부의 역사가 모두 중국사라고 주장하면서,신라에서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만 한국사에 속한다고 강변하고 있다.신라계 정권인 고려와 조선이 각기 고구려와 고조선을 도용해서 국호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고 있다.이전에는 조선족 단속에 골몰하며 만주 역사는 중국사라는 논리를 내세웠는데,이제는 공격적으로 한반도 북부까지 넘보겠다는 심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고구려사 빼앗기는 역사학에서 벗어나 정치와 외교의 문제로까지 비화된 느낌이다.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마땅한 손발이 없다.고구려 유적을 중국과 북한이 절반씩 가지고 있으니 이 금역의 역사를 다루는 연구자가 많을 리가 없다.더구나 중국 간행물을 종합적으로 수집하는 기관조차 없다.우리 사회는 맑은 날에 궂은 비에 대비하는 지혜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발등의 불부터 끄지 않을 수가 없다.첫째는 북한을 도와서 고구려 벽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시키는 일이 다급하다.중국은 북한측이 등록해버리면 설득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중국내 고구려 유적을 전쟁하듯이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북한을 배제하려 획책하고 있다.내년 전반기에 판가름날 이 싸움에서 지면 우리는 후손에게 두고두고 고구려를 잃어버린 죄인이 될 것이다. 둘째는 연구기관의 설립이다.그것도 자료 수집을 중심으로 하는 기관이 시급하다.이번 중국의 정책도 신문기자가 먼저 알아서 학자들에게 알려줬다.중국의 학술동향을 싣고 있는 광명일보마저 국내 어디서 구독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지금 중국의 교과서를 분석한다거나 고구려사가 한국사인 근거를 찾는다고 분주하지만,즉흥적인 대응보다는 연구자를 키울 수 있는 장기적인 안목과 연구 기반 조성이 절실하다. 이 마당에 저 유명한 서희 장군의 담판이 떠오른다.993년 거란 소손녕이 쳐들어와서 “고려는 신라 땅에서 건국한 나라이니 우리 영토인 고구려 땅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자,그는 “그렇지 않다.우리나라는 고구려 후계자이다.그래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을 국도로 정했다.경계로 말하자면 오히려 요동지방이 우리 땅이니 누가 침범을 했다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론을 제기하여 소손녕의 군사를 돌리고 거꾸로 압록강 유역을 개척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냈다.100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우리 눈 앞에 다시 재현되고 있다.항복론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자진해서 담판에 나섰던 서희 장군은 지금 양평 부근에 잠들어 있다.그러한 지혜를 가진 후예가 지금 절실하다. 송 기 호 서울대교수 국사학
  • “귀국땐 연행” 中동포 술렁

    중국동포의 집과 조선족교회 등 국내 중국동포 지원단체들 사이에 ‘귀국 동포의 중국 공안 연행설’을 놓고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중국동포의 집측이 조선족교회 서경석 목사측이 벌인 국적회복 운동의 부작용이 심각하다고 지적한 데 따른 것이다.이에 따라 국내에 머물고 있는 중국동포들은 실체를 모른 채 잔뜩 긴장하고 있다. ●단체간 티격태격 조선족교회 담임목사인 서경석 목사는 14일 “국적회복운동을 벌이고 있는 중국 동포 5000여명이 모두 연내에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면서 “이들의 입국 과정에서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는 지켜보면 알 것”이라고 밝혔다.그는 “중국동포 3명 연행설은 전혀 근거없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는 “조선족교회를 통해 국적회복을 신청하고 단식까지 한 동포 가운데 100여명이 이미 중국에 돌아갔지만,아무 문제없이 입국했다는 연락이 오고 있다.”면서 “오늘도 선양(瀋陽)으로 돌아간 동포로부터 ‘무사하다.’는 전화가 왔다.”고 주장했다. 서 목사는 “일부 동포가 1000위안(약 15만원) 정도 벌금을 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그는 국적회복 헌법소원과 관련,동포 1인당 10만∼15만원씩 걷은 것에 대해 “모두 4억여원을 모아 신문광고비 등으로 3억여원을 사용했다.”며 15일 정확한 내역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중국동포의 집,재외동포연대추진위,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등은 지난 11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2층 식당에서 “중국 공안이 지난 8일 중국 칭다오(靑島)에 도착한 중국동포 9명 중 국적회복운동에 동참했던 3명을 연행,압송해 갔다.”고 주장했다.또 중국동포의 집 김해성 목사는 조선족교회에 대해 “민족적인 시각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냐.”고 비판을 제기했다.이들 단체는 외국인노동자 문제의 틀 속에서 중국동포 문제를 다뤄왔다.따라서 이번 연행설은 이들 단체간의 이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근심스러운 중국동포들 중국 동포 250여명이 농성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연합회관 현관 앞에는 휴일인 14일 중국동포 100여명이 삼삼오오 모여 걱정스러운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40대 여성 중국동포들은 “잘 살라고 자치구 하나를 아예 조선족한테 줬는데 하루아침에 국적을 바꾸겠다고 하니 괘씸했겠지.”“그래도 벌금이 얼마인데 너무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그러자 옆에 있던 50대 남성은 “말 조심해,이 사람아.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쩌려고…”라며 입을 막았다. 근처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농성중이던 150여명의 중국동포들 얼굴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중국 옌볜(延邊)에서 교사를 하다 지난 99년 입국했다는 중국동포 김모(50)씨는 “공안의 조사는 옛날 한국의 안기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무섭다.”면서 “한달 전 국적포기각서를 쓸 기회가 있었는데 겁이 나 안쓴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국동포를 지원하는 종교인연합인 재외동포법개정특별위원회 김종헌(32) 사무국장은 “이번 조치는 중국 정부의 위기감을 방증하는 것으로 중국내 동포들의 지위까지 위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주중 대사관에 상황 파악을 지시했다.”면서 “그러나중국 공안 당국이 중국동포들을 체포했다 하더라도 경위·진상 조사를 위한 것이지,처벌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유영규 유지혜기자 wisepen@
  • 고구려역사 지키기 학술대회/고구려史 뺏기면 고조선도 뺏긴다 학계 공동대응 방안 모색

    ‘정치적 목적에 이끌리는 불순한 중국학계의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겠다.’‘고구려를 넘어 고조선까지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 정부의 의도를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고구려 역사를 자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국책사업,이른바 ‘동북공정’에 한국 학자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고 나섰다.9일 오후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대책 학술발표회’.한국고대사학회,한국사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역사관련 17개 학회가 모여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시도를 한목소리로 성토하는 한편 거국적인 공동대응과 남북공조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날 모임은 그동안 학회 혹은 개인이 개별적으로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문제점과 심각성을 주장해온 것과는 달리 학자들이 실천적인 대응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 첫 공식모임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정부에 대해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심포지엄에 들어간 학자들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의 허구와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냈다.참석자들은 일단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바탕을 둔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족을 중심으로 57개의 소수민족을 같은 테두리에 넣으려는 큰 목적아래 남북통일 후 불거질 영토문제에 쐐기를 박으려는 사전조치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우리 학계는 중국 ‘동북공정’의 요체를 ▲고구려인의 뿌리는 고대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고구려 건국지역 및 기본 관할범위가 중국 경내이고 ▲고구려는 중원 왕조의 책봉을 받은 종속관계로 정리했다.따라서 ▲수·당의 고구려 원정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변방 할거세력 통제이며 ▲고구려 멸망 이후 대다수 유민이 한족(漢族)으로 편입했으며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며 역사적 연속성·상관성이 전무하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참석자들은 “우리민족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농경을 영위하던 예맥족과 한족을 근간으로 형성되었고,이들은 고조선 멸망 이후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서 다양한 정치체제를 이루다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으로 정립되었고,통일신라와 발해를 거쳐 고려로 통합되었다.”며 중국의 논리를 정면 반박했다. 참석자들은 학술발표회를 마친 뒤 기존 한국고대사학회의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대책위원회’를 모든 학회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대책위로 확대 개편해 정부 차원의 공식 대책기구가 마련될 때까지 중국 정부에 대한 대응과 여론 확산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가기로 했다. 김성호기자 kimus@ ■“北 고분군 세계유산 등록 적극 지원을” 학술대회에서 가장 첨예한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역시 북한 고구려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록.내년 6월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열릴 유네스코 문화유산위원회에 북한이 제출한 평양의 고구려 고분군과 중국의 지안(集安)지역 고구려 유적이 함께 등록신청될 예정이지만 현재로서는 북한 고분군이 열세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이날 참석자들은 중국에 비해 열악한 상황에 있는 북한 고분군의 등록을 위해 남한측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의견들을 내놓았다.무엇보다 남한측이 기술 및 재정 지원과 함께 문화유산위원회에 고구려 고분군의 정체성과 고유 문화성을 적극 알려야 하는 것으로 집약했다. 북한 고분군이 배제된 채 중국의 고구려 유적만 등록될 경우 현재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목표가 그대로 달성되는 셈.고구려 역사의 중국사 편입에 지금보다 훨씬 힘이 실리게 된다. 우선 중국이 지안 일대의 유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있는 것과 달리 북한은 여건상 손을 못대고 있는 실정.따라서 고분군,특히 벽화고분에 대한 항온·항습 처리 등을 위해 북한에 전문가를 파견해야 하며 아울러 주변 정리사업을 북한과 함께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성호기자 ■주요 발제 요약 ●최광식 고려대 교수 중국은 1980년대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내세워 소수민족정책에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더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들이 대거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동북지방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1년 한국 국회에서 재중동포의 법적지위에 대한 특별법이 상정되자 중국당국은 조선족 문제와 한반도 통일과 관련된 문제 등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특히 2001년 북한이 고구려의 고분군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신청하자 국가적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기획해 추진한 것이다.동북공정의 고구려사 왜곡은 고구려사뿐만 아니라 발해사와 고조선사까지 왜곡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2000년밖에 되지 않으며 공간적으로 한강 이남에 국한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만주지역에 대한 관심이 저조하였으며 그에 대한 연구는 일천하다.따라서 연구센터를 설립하여 고대 동북아시아에 관한 역사와 지리 및 민족문제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구려의 역사는 남과 북 어느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이므로 남북공조를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지켜낸다면 남북공조의 모범적 사례가 될 것이다. ●공석구 한밭대 교수 중국학계가 고구려사를 파악하는 기본적인 논리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다.그런데 중국,북한에 각기 나뉘어져 있는 고구려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중국학계는 논리적 문제점을 드러냈다.중국학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또 다른방안을 제시하였다.이러한 방안도 고위금용(古爲今用·옛것을 왜곡해 오늘에 활용한다는 뜻)의 시각 하에서 당시의 고구려사를 편입하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만주지방의 고구려사는 중국의 영토 안에서 건국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할거정권이 세운 지방사로서 파악하고 있다(통일적다민족국가론).따라서 현재 북한 영토 안에 있었던 고구려사,즉 평양천도 이후의 고구려사는 과거 고대중국의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리이다.결국 중국학계는 역사인식의 근본적인 바탕으로 내세운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논리적 근거를 스스로 폐기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는 현재를 위하여 과거의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뿐만 아니라 현 중국 영토 안에 존재하였던 고구려사를 인식하는 시각마저도 사료의 자의적인 해석과 무리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이 부분은 앞으로 구체적인 연구를 통하여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박경철 강남대 교수 고구려는 국가형성기 이래 환경적 여건의 취약성을 군사적 팽창정책으로 상쇄하면서 전형적인 ‘전제적 군사국가’를 지향했다. AD 4세기 말 이래 하나의 왕국의 단계로 넘어서서,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 제국적 지배구조에 입각한 다종족국가로 웅비하였다. 고구려는 국초 이래 지속적으로 추진한 군사적 팽창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천하지뇌(天下之腦)’에 해당하는 동몽고 문제에 접근하여 독자적 생존권과 패권의 보존 및 확산을 위한 대륙정책을 관철해나가고자 했다.그러나 수·당제국은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지배질서에 입각하여 안보를 보장하려는 세계정책을 강행하려 했다.곧 고구려와 수·당의 70년 전쟁은 고구려의 대륙정책과 수·당의 세계정책이 정면충돌하면서 빚어낸 동아시아 국제전쟁이었다. 그럼에도 중국학자들은 수·당이 고구려에 보낸 조서(詔書)를 근거로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하고 있다.조서의 상투성과 수사성을 감안하지 않은 즉흥적인 정책적 역사인식의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모든 자료들은 고구려의 수·당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서조차 책봉·조공제도가 가동되고 있었음을 적시하고 있다.화이론과 책봉·조공론이 갖는 허구성의 일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임기환 한신대 학술원 연구원 중국 역사학계는 고구려가 시종일관 중원 왕조와 종속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주장하면서,그 근거로 조공·책봉 관계를 들고 있다.고구려왕이 책봉을 받았다는 것은 곧 중원 정권의 관리임을 뜻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책봉의 형식만 글자 그대로 해석할 뿐이지,책봉의 역사적 성격은 간과하고 있다. 사실 조공·책봉 관계는 중외(中外)관계의 한 유형이며,중국적 세계질서를 규정하는 양식의 하나이다.특히 남북조시대 중국세력이 분열되어 주변국가에 대한 규제력이 약화된 상황에서는 책봉·조공은 실질적인 종속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외교관계의 한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책봉·조공제는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서 적용된 외교형식이기 때문에,유독 고구려만 이를 근거로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기도 하다.중국이 백제나 신라,왜 등과 맺은 책봉·조공 관계와 하등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고구려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피책봉국이지만,독자적으로 자신의 세력권 안에 여러 국가나 세력 집단을 포함하고 있으며,독자적인 천하관을 갖고 있다.중국학계와 같이 중원 왕조의 신속국(臣屬國)이란 해석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는 관념이다. 정리 서동철기자 dcsuh@
  • 서울 가리봉동 조선족타운 르포/ 中동포 대거 빠져나가 상가 곳곳 문닫아 인적없는 ‘유령도시’로

    8일부터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2차 합동단속이 시작되는 가운데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조선족 타운’에 ‘연쇄 도산’ 한파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지난달 17일 1차 단속 이후 중국 동포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상점들이 영업 부진으로 문을 닫고,그 여파로 물품을 대주던 식료품점과 수입업자도 연쇄적으로 도산하고 있는 것이다. 상인들은 법무부 단속 직원들과 생존권 대책 마련 간담회를 갖는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연쇄 도산 비상 7일 오후 가리봉동 ‘조선족 타운’은 ‘유령 도시’를 연상시켰다.붉은색 중국어 간판이 즐비한 500여m의 거리에는 주말인데도 인적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거리 곳곳에서는 셔터를 내린 중국 상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인근 가리봉 시장은 상인들의 한숨과 푸념으로 가득찼다.부동산중개업소에는 매물정보 쪽지만 잔뜩 나붙어 있었다. 가리봉 상인협회에 따르면 단속 이전 이곳에는 3만여명의 중국 동포가 북적거리며 하루 평균 3억∼4억원의 돈을 소비,이 지역 상권을 먹여 살렸다.그러나 지금은 하루에 수천만원 정도만이 유입되는 것으로 추정돼 심각한 생존 위기를 맞고 있다.상인협회 김용인 회장은 “중국동포가 한꺼번에 사라진 뒤 250여개의 상점 중 20여곳이 영업 부진으로 문을 닫은 상태”라고 말했다. ●매출 평소 20%이하로 떨어져 중국음식점 ‘삼팔교자관’을 운영하는 강용근(46)씨는 “단속 이전에는 하루 평균 180여만원의 매상을 올렸는데 지금은 하루 4만∼5만원도 어려워 차라리 문을 닫는 게 낫다.”고 말했다. 중국음식점 ‘신요’ 김모(44·여) 사장도 “당장이라도 문을 닫고 때려치우고 싶지만,누가 이 상황에서 인수하겠느냐.”고 하소연했다.3개월 전 8000만원의 빚을 내 중국식료품점을 열었다는 이광수(48)씨는 “중국식당들의 주문이 없어 매출이 평소의 20% 이하로 떨어져 이자도 갚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상인들 발 동동,법무부 “법대로” 지난 5일 오후 가리봉동 ‘동포사랑교회’에서는 이 지역 상인 80여명과 법무부 서울출입국관리소 문화춘 조사3과장간의 간담회가 열렸다. 상인들은 생존권 대책 마련과 함께 마구잡이 단속에 항의했지만,법무당국은 “법대로 할 수밖에 없다.”며 물러서지 않았다.중국 동포 아내와 함께 중국식 꼬치구이전문점 ‘풍무뀀점’을 운영하는 국옥현(44)씨는 “1차 단속 이후 매출이 평소 10%도 되지 않아 중국의 장인·장모로부터 오히려 용돈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상인 김모(47)씨는 “기준 없는 단속으로 합법적인 외국인등록증을 가진 중국 동포들마저 이 거리를 떠나고 있다.”면서 “실적을 올리기 위해 관할 경찰서가 아닌 다른 지역 경찰까지 찾아와서 단속을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항의했다. 이에 대해 문 과장은 “고용허가제 시행으로 합법적인 중국 동포가 들어오는 내년 8월까지 참고 기다리면 상권이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표 기자 tomcat@
  • 불법체류 中동포 특혜 없다/법무부 “헌소 확인증 상관없이 단속”

    법무부는 헌법소원을 낸 5000여명의 불법체류 중국동포를 단속에서 제외하거나 체류연장을 위한 특혜조치를 베풀지는 않을 것이라고 7일 재확인했다. 법무부가 ‘헌법소원 확인증’이 단속 예외 요건이 될 수 없다고 밝혀 단속과정에서 시민단체와 충돌이 예상된다. 첫 개방형직인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에 임명된 이민희(45) 신임 국장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불법체류 상태의 중국동포는 권리행사가 제한돼 국적회복 신청이 타당치 않으며 원칙적으로 불법체류 외국인과 똑같은 단속 대상”이라고 밝혔다. 이 국장은 “헌법소원을 제기했다고 체류자격을 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우며 법 체계상 맞지 않다.”고 말했다.이어 “‘동포’라는 이유로 동정 여론이 있지만 출입국 업무에서는 냉정히 판단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특히 “지난달 29일 조선족 교회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전면적인 시혜조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권문제를 고려해 중국동포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였다.”고 대통령의 발언을 둘러싼 논란에 선을그었다. 서울 조선족교회측은 그동안 정부와 중국동포의 국적회복을 위한 합의가 있었으며,헌법소원 확인증 소지자는 단속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주장해 논란이 됐다. 이 국장은 “독일은 산업발전을 이유로 무분별하게 외국 근로자를 받아들였다가 각종 사회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면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불법체류자가 집단 거주촌을 이루고 2세를 낳으면 우리 체제가 복지문제 등 그들을 포용할 태세가 돼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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