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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농현상/개방바람 타고 돈벌이 찾아 도시로(두만강 7백리:14)

    ◎문혁이후 젊은이 떠나고 부녀자만 남아/7백가구 부동촌엔 농사꾼 한사람도 없어 연변의 조선족들은 지금 식생활에는 걱정이 없다.해방전 대지주들 보다 더 잘 먹고 산다.옛날의 지주집이래야 호주만 이밥을 먹어대고 다른 식구들은 조밥에 된장국이 고작이었다.그러나 요즘은 웬만하면 모두가 이밥을 밥상에 올려놓는다. ○옛 지주보다 더 잘살아 농촌의 소득도 높아졌다.용정시 백금향의 1인당 연간수입은 1천6백원으로 조사되었다.화룡시 숭선진은 1천3백원,두만강 연안 산골의 향진지역도 1천2백원을 웃돌았다.문화대혁명 시기 뙤약볕에서 동이땀을 이틀은 흘려야 10원을 벌었던 때에 비하면 천양지판이다.당시 편지 한통 부치는데 8원이었으니 기가 막힌 노임이었다.그래서 문화대혁명 이야기만 나오면 목청 안 높이는 사람이 없다. 『사시사철 뼈 빠지게 일하고도 굶기는 밥먹듯 했수다.쑥에 소나무 껍질에 안먹어 본 별식이 없드랬시요.그런 주제에 밭고랑 타고 앉아서 세계 혁명에 관심을 가지라고 족쳐댑데다.미친 광대놀음을 한 거디요.등소평동지 개혁개방 안했더라면 모두 굶어죽었을 겁네다』 연변지역 신문에는 농촌소식들이 왕왕 실린다.예전같이 해방전 살림에 비교하는 잠꼬대는 없어졌으나 농촌수입이 해마다 올라간다는 기사가 많아졌다.그런데 물가가 오른 것을 생각하면 농촌소득 높아진 것 만을 자랑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한다.이러한 사실은 농가와 인구가 함께 줄어드는 것을 보아도 알수 있다.화룡시 숭선진의 경우 지난 1990년 1천25가구의 농가가 지금은 9백90가구로 줄었다.호적만 숭선진에 두고 도시로 빠져나간 사람만도 6백20명이나 된다. ○초가집 한채에 1천원 두만강 연안에 임자를 잃은 밭들은 풀이 무성하고 마을마다 주인없는 집들이 쓸쓸히 서 있다.화룡시 노과진 호곡촌은 무산과 마주한 오붓한 17호 인가를 가진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3개의 굴뚝에서만 연기가 날뿐이다.그리고 화룡시 덕화진 부동촌은 독립군 안무 일가가 자리잡고 항일을 해온 유서깊은 마을로서 광복후 7백여호였다.그런데 이제는 황폐해져 농사꾼은 한 집도 없다.두만강 언덕에 자리 잡은 초가들은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대머리 모양으로 볏짚이엉이 훌렁 벗겨져 귀신 살기 알맞는 마을이 되었다.그같이 을씨년스러운 마을에 유독 한 집만이 앞마당에 닭 몇마리가 구구구 모이를 쪼고 개가 행인을 보고 콩콩 짖는다. 지나가던 걸음에 그 집을 들렀다.늙은 양주가 따뜻한 온돌에 앉아서 이불을 꿰매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니 대단히 반가워했다.아이들 소꿉장난 모양으로 개와 닭 하고 동무하며 적적하게 살아가던 양주는 낯도 성도 모르는 길손이지만 찾아온 것이 무척 기뻤던 모양이다.인간무리에서 살면 인간이 혐오스럽다가도 인간이 없는 곳에 살면 오히려 그리워 한시도 인간을 떠나 살수 없는 것이 사람인가 보다. 주인의 이름은 이성국(60)인데 화룡시에 거주하는 퇴직 노동자였다.지난해 8월 4백원에 버린 집을 사서 들었다고 한다.오랜 간염환자라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휴양삼아 와 있다는 것이었다.화룡시에 있는 자식들이 쌀이며 채소며를 날라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영감이 운동삼아 자전거를 타고 십리 밖 남평에 가서 사오기도 한다는 것이다.농사꾼들이 삶을찾아 버리고 간 산수 좋은 이 땅은 서서히 주인이 바뀌고 있다.텃밭이나 가꾸면서 여생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휴양지로 변해가고 있다. ○도시인 「별장」 구입 늘어 도문시 위자구진 하남촌은 20여호의 마을인데 2∼3년 사이에 절반정도의 초가를 도시에서 퇴직한 노인들이 차지했다.연길에서 40리 거리라 집값이 꽤나 비싸다고 하는데 한채의 초가가 1천원 내외다.마을을 통째로 산다고 해도 3만원이면 남는다.한국을 드나들면서 현대 문명에 머리가 튼 젊은 사람들은 초가를 사서 주말 별장삼아 쓰고 있다. 화룡시 덕화진 용현촌 박서양(69)노인은 일제때 울릉도에서 속아 이민을 온 사람이지만 연변의 농촌을 지키고 있다.일본인들이 만주로 가면 들판에서 해가 뜨고 지는데 감자가 하도 커서 둘이서 하나를 다 못먹는 복지라고 하는 말을 듣고 19 38년 고향을 등졌다.그런데 웬걸,무산에서 두만강을 건넜더니 하늘만 보이는 산골이었다.아름드리 나무를 베어 부지런히 농토를 개간,그런대로 배불리 먹었다. 그러다 해방에 이어 문화대혁명을 맞았다.문화혁명 시기에는 겨우 감자톨을 구워먹으면서도 거지로 빌어먹고 산다는 고향(한국)으로 돌아가지 안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고향에서 연변땅 밀림지대로 함께 이주했던 24가구가 해방 이후 거의 귀국해버린 뒤였다.혼자 남은 그는 그저 공산당 은덕에 감사했다. 『일본놈한테 속고 공산당에 속아 살다가 이 나이가 됐제.지난 90년에 고향 울릉도에 갔더니 없는게 없이 살데.나도 밥술이나 먹어 잘 사는줄 알았더니 그게 아이데.그래도 여기 살수 밖에 없제.땅파먹고 사는 사람은 땅 떠나면 몬 산다구…』 노인은 「농자천하지대본」이 다시 올 날을 기다렸다.고지식한 땅을 믿는 노인 역시 고지식한 마음으로 또 한해 농사철을 맞고 있다.
  • 백두산 동쪽기슭서 솟구치는 「두만의 샘」

    ◎해발 1천3백21m에 위치… 천지물 원지로 스며 발원지로 두만강 칠백리­민족의 한을 간직한채 억겁을 유구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이 장강은 백두산 동쪽 기슭의 관목숲속에 감추어진 옹달샘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두만강의 첫 시작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을 풀기위해 여장을 꾸려 나선 것은 지난 19일.5월 중순이지만 백두산의 날씨는 아직 초봄의 언저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었고 빗방울마저 뿌려 밀림속은 음습하기 짝이 없었다.중국 길림성 화룡시 숭선진마을을 떠나 비포장 강둑길과 산길을 달리길 7시간여.개울 폭으로 좁아진 두만강 건너편 북한쪽에서 먹을 것을 달라고 손짓하는 국경경비군인들을 만나기도 했고 「김일성 나루」「김일성 낚시터」등을 스쳐지나기도 했다.김일성이 여기서 산천어를 잡았다든가. 강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는 빗길산행 70여㎞를 강행군한 끝에 길가에서 드디어 한글과 한문으로 된 「두만강 발원지」라는 안내판을 찾아냈다.그러나 그옆 오솔길에 세워진 국경비가 발길을 막았다.비 앞에는 「중국」,뒤에는 「조선」이라고새겨져 있었다.두만강 강심이 국경이지만 최상류에 이르러서는 개울이 중국쪽(약류수)과 북한쪽(홍토수) 둘로 갈라져 그 중간지점에 국경을 그었다는 것이다. 발원지는 국경 너머 북한쪽.국내 언론에 최초로 공개될 두만강발원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면 국경을 넘어야 한다.그러나 무장한 북한경비병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낭패다.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겁나고 망설여졌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주변에 북한군인이 없음을 확인하고 국경을 넘었다.5백여m쯤 숲속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 물이 솟는 샘터들이 나타났다. 바로 두만강 발원지였다. 백두산 천문봉에서 동쪽으로 34.4㎞ 떨어진 적봉산 기슭이며 위도로는 동경 1백28도 27분,북위 42도 01분,고도가 해발 1천3백21m이니 백두산 중턱쯤 되는 곳이다. 수림속에 자리잡은 샘터주변은 그리 넓지 않은 펀펀한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었고 묵은 풀잎에 덮인 땅이 움푹움푹 패어 들어간 곳곳에서 보글보글 샘물이 솟아 올랐다.투명한 물빛에 끌려 손을 담그니 시리도록 차다.그 샘물들이 흘러 실개천을 이루고 이들이 다시 합쳐 홍토수가 되며 중국쪽에서 흘러드는 약류수와 만나 7백리 두만강굽이의 시발점을 이루는 것이다.중국과 북한은 19 62년 국경회담에서 두 개울의 합수지점부터 두만강으로 부르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동행한 조선족 김송춘씨(화룡시 숭선진 거주)는 이 발원지의 샘물은 이곳보다 위에 있는 원지에서 스며들며 원지의 물은 백두산 천지에서 비롯되므로 두만강은 결국 백두산천지의 물이 원수인 셈이라고 설명한다.발원지를 떠나 다시 숲속을 헤맨 끝에 4㎞쯤 떨어진 곳에서 원지를 찾아냈다.원지는 적봉산 서북쪽 원시림 숲속에 위치해 있으며 직경이 180m쯤 되는 원형의 아담한 호수였다. 백두산의 그림자가 잔잔히 드리우는 호수에는 들어오는 물길도 나가는 물길도 없어 천지의 물이 이곳으로 스며들며 다시 이물이 땅속으로 흘러 두만강발원지로 솟아난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원지에는 산천어와 기름개구리가 서식하고 있으며 수초가 많고 호수주변에는 들쭉꽃과 진달래가 피어있다.만족어로는 용구라고 하며 선녀들이 목욕하는 곳이라는 전설에 따라 천녀욕궁지라고도 부른다. 조선족들 사이에서는 이 호수가 옹녀늪으로 통한다.항일전쟁때 독립운동가 부인이었던 옹녀를 일본 토벌대장이 욕심내어 몸을 뺏으려하자 피해 달아나 이 호수에 몸을 던지는 순간 호수에서 무지개가 피어오르면서 옹녀가 그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하늘이 내린 물,천지의 성수를 받아 흘러내리는 두만강은 우리의 영산인 백두산 숲속에서 예나 다름없이 민족의 맥박인양 끊임없이 솟구치는 샘물로 시작하고 있었다.
  • 감숙성의 유치정책(중국내륙 한국투자 부른다:1)

    ◎5년간 토지 무료제공·소득세 감면/석유·비철금속 풍부… 개방정책 3년째/옛 실크로드… 돈황 등 문화유적도 많아/“과다 물류비용이 문제… 내수시장 노릴만” 중국이 내륙지방의 개발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중앙정부와 각 내륙지방의 성들은 외국인의 투자유치를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김상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20여명의 경제사절단은 지난 8일부터 20일까지 중국의 감숙성 사천성 호남성 등 중국 내륙의 성을 방문,투자여건을 점검했다. 중국 내륙지방의 투자여건 및 경제상황 등을 몇 차례에 나눠 엮는다. 감숙성은 중국 서북부에 있는 역사깊은 성이다.옛날 실크로드(비단길)로 유명한 돈황이 이곳에 있다.대상들이 낙타를 타고 비단을 나르던 주요 통로였다.사막으로 둘러싸인 황량한 이곳이 옛날에 번성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8천여년 전의 문화유물이 있는 유서깊은 곳.황하문명이 꽃핀 고장.감숙성은 이처럼 한때 잘 나가던 곳이지만 근대화 개발에서는 소외됐다.내륙 깊은 곳에 있는 지리적 결함 탓이다. 2백34만㎾의 수력발전소가 있지만 우선 물·전기 사정부터가 좋지 않았다.돈황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는 돈황빈관도 샤워하기에 충분할 정도는 아니다. 전력사정은 더 심하다.돈황빈관에서는 하루에 서너 차례 전기가 나갔다.엘리베이터에 갇혔던 경우도 있었다.감숙성의 성도인 난주의 난강피혁공사에서는 일요일인 지난 14일 근무를 하고 있었다.평일의 전력난 탓이다. 조선족 부모를 둔 난주대의 김경교수는 『중국 서쪽 끝에 있기 때문에 조선족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이곳에 투자하려는 기업인은 조선족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곳 노동자들의 월 평균 임금은 약 4백(4만원)∼5백위안(5만원)으로,연안지방의 절반수준이다.저임금이 최대 메리트다.과학기술 연구소는 2백여곳.31만여명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있어 중국내의 중간수준이다. 그러나 자원은 풍부한 편이다.니켈·구리·아연·안티몬·코발트를 비롯한 비철금속 10개 종류의 생산량은 중국 내 1위다.옥문유전은 중국 최대로 꼽힌다.야금 방직 기계제조 건재료 등도 풍부하다. 성내에 뻗어있는 철로 길이는 3천4백㎞.용해 포란 난청 난신선 등의 철로는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를 지나며 연운항으로부터 난주를 통해 러시아로 뻗는 철로도 있다.북경 상해 남경 광주 해구 복주 계림 곤명 성도 중경 서안 정주 등 20여 도시를 연결하는 국내 항공편이 있으며 국제선으로는 홍콩까지 가는 게 유일하다.도로의 길이는 4만㎞라고 감숙성의 자료는 밝히고 있다. 이곳 개방정책은 지난 92년 7월부터 본격화됐다.연안지방에서 외국인 투자자에게 주는 토지이용 메리트와 세금혜택보다 나은 투자 유인책을 채택했다. 지방에서 공장을 지으면 건설 후 5년까지는 토지사용료가 면제된다.외국인이 감숙성에 투자한 뒤 이윤을 얻은 시점부터 2년간은 소득세를 면제하고 3∼5년간은 50%를 감면해준다. 외국인 투자기업이 1달러를 수출하면,0.05위안(약 5원)을 보조금으로 주기로 한 것이 감숙성의 특색.내륙지방이므로 수출할 때에 물류비용이 많이 드는 점을 고려한 정책이다. 9차 5개년 계획(96∼2000년)동안 석유화학과 전자공업,면방직공업,기계공업 등에집중 투자할 계획이다.장오락 성장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철도 도로 공항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대 대성산업사장은 『물류비용이 엄청나 수출하는 업종이 진출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감숙성에서 도로나 철도 등을 이용해 연안지방의 항구로 나르려면 10일이나 걸리는 등 물류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이다.따라서 수출보다는 내수를 보고 진출하는 게 낫지만 문제는 감숙성의 내수시장 전망이다.
  • 약담배/“손쉬운 돈벌이”마약밀매 성행(두만강 7백리:11)

    ◎개방물결 타고 폭력배·유흥가 급속 확산/3년간 8개 조직 검거… 생아편 48㎏ 압수/한땐 아편 피워야 돈 있는 지주·호족 행세 연변의 조선족 신문 「연변일보」는 최근 연길시 공안국이 「명령 50호」라는 마약추방작전을 폈다는 기사를 크게 실었다.이 작전에서 장사꾼으로 가장한 공안원들이 헤로인 밀매자 박창호(31)등 남녀일당 4명을 체포했다는 것이다.그리고 공안당국에서는 3년동안 마약밀매 8개조직을 까부수고 생아편 48㎏과 헤로인 7백30g을 몰수 했다는 마약단속 통계숫자를 덧붙였다. 이 기사를 읽고 한동안 들어보지 못한 마약이라니,하는 의심을 품었다.그런데 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촌에 머무르는 동안 주민들로부터 실감나는 마약이야기를 들었다. ○연변일보,대서특필 그 내용인즉 숭선진 양점직원인 한명학이란 사람이 길림성 성도가 있는 장춘에서 헤로인을 팔다가 붙잡혔는데 용케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그는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나 나머지 일당은 중형이 떨어졌다는 풍문도 곁들여 여럿이서 한마디씩을 거들었다. 『열길 물속은알아도 한길 사람속 모른다더니….명학이 그 사람 얼마나 마음이 고왔니.다가 개도 안 먹는 돈이 죄지비.구차하게 살다보면 돈에 흑심 아니 생길 사람 있겠슴둥.어찌 됐거나 사람하나 버린거제』 화제는 꼬리를 물었다.고래적 옛날 일들까지도 묻어나와 화제에 올랐다.중화민국시대에 두만강 연안지구에는 흔히 약담배로 말하는 아편재배가 성행했다는 것이다.당시 아편시장은 무한정 넓었고 호족이나 지주 등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은 아편을 태워야 행세를 할 정도였다.화룡시 남평진 용연촌의 현송원(67)노인이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아편농사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옛날부터 양귀비 재배 『용연에서 밭뙈기를 부치는 사람치고 약담배 안심는 사람은 병신이었디요.정보당 30냥이나 50냥씩 현물세를 내고 약담배를 재배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해도 너무 했디.어느 핸가에는 삼도구(지금의 화룡)에서 중국사람이 현물세 받으러 온걸 최승권 툰장 충동질로 마을 사람들이 때려죽였디 않았갔시요.그래서리 순관들이 나와 조사를 합데다.툰장하고 사람이 좀 모자란 오삼학이 붙잡혀 갔는데 나중에 오삼학이 죄를 몽땅 뒤집어 썼디요.툰장 말이 내가 나가서 빼줄테니 네가 했다고 거짓으로 불게 한겁네다.툰장 최승권은 불쌍하게 죽은 오삼학이 명까지 합쳐 지지리도 오래 살다 갔디요』 만주국이 들어서면서 약담배는 금물이 되었다.간혹 깊은 산속에 양귀비가 피었지만 일단 발각되면 수갑 차고 감옥 밥깨나 축내야 했다.하지만 일제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항일유격근거지에서는 대량으로 양귀비를 심었다.약담배를 팔아 무기와 양식을 마련하기도 했고 막부득이한 경우 자살용으로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녔다.그리고 만주사변후 흩어져 산속에 들어가 구국군으로 행세하거나 토비로 된 원동북군 잔여부대의 장교들은 태반이 약담배쟁이들이었다.그들과 손잡고 싸우는데도 약담배가 기운을 냈다.19 36년 초 연변의 항일 근거지가 일제의 토벌로 해체되고 부대가 장백현 쪽으로 전이하면서 아편생산기지가 결딴나다시피 되었다.그때부터 연변의 약담배 수요는 밀수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만큼 약담배 값도 천장 높은 줄 모르고 껑충 뛰어 올랐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에도 약담배 재배는 오래 계속되었다.1952년에 일어난 실화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 숭선진 고성리촌 마준영(70)노인의 회고담은 몸서리가 쳐질 만큼 끔찍했다.마약이 곧 돈이라는 집념은 사람들을 돌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사람이 돈에 환장을 하면 못하는 짓이 없소.그게 52년도 봄이었나 기래요.기차를 타고 연길로 가는데 경찰들이 짐수색을 합데.내 맞은 쪽에 한 삼십대 아낙네가 아이를 업고 앉았는데 경찰이 오더니 다짜고짜 아이를 보자고 합데다.아마 누가 미리 고자질을 했는디….단통 아낙의 얼굴 색이 까맣게 죽더구만.아이 머리에 씌운 모자를 벗기고 멜빵 통바지를 벗기니까 뱃가죽을 실로 기워 맨 것이 보였다.경찰이 칼로 실을 끊고 아이의 뱃속에서 아편 덩어리를 꺼냈지 뭡네까.아이를 죽여서 아편을 나르는 주머니로 쓴 셈이디요.기차가 조양천역에 멎자 경찰들이 계집을 수갑 채워 끌고 갑데다.그 계집 요절 났을 겁네다』 ○아이시신에도 숨겨 이국록(63)씨는 지난 19 52년 아편장사 심부름을 했는데 성공은 커녕 아편을 뭉터기로 날렸다.가방에 큰 덩어리로 3개나 되는 아편을 넣고 용정에서 기차를 탔다.기차가 한창 속력을 낼 즈음 공안원들이 찻간 양쪽에서 검색을 하면서 조여왔다.겁이 덜컹나서 아편을 얼른 꺼내 보자기에 둘둘말아 의자 밑에 밀어 넣었다.그러고도 마음이 안놓여 몸만 빠져나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버렸다. 마약 밀매는 일종의 목숨을 건 도박이다.그런만큼 모험을 않고는 이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화룡시 숭선진 옥석촌의 김석권은 아편장사에 문리가 튼 사람이었다.사람이 체대도 크고 담량도 있어 언제나 단신으로 장사를 했다.곁다리가 없으니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 액수도 컸다.주머니를 해 단 헝겊에 손바닥만한 아편 네 덩어리를 넣고 탄띠처럼 배허벅에 두르고 간편한 몸으로 길을 떠났다.조양천에서 하룻밤 자고 장춘행 기차를 타려고 어슬녘에 기차역으로 가던 그는 등뒤로 칼을 맞고 모험으로 충만된 인생을 종말 지었다.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살인자는 칼손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위험천만한 밀수의 노고를덜었던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질서를 회복한 이후 마약에 대해 강력한 근절책을 쓰자 마약은 한동안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요근래 몇년 사이에 연변의 주먹들과 가라오케 여급들 사이에 마약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고 보면 약담배를 피우기나 한 것처럼 머리가 멍멍해진다.
  • 북한주민/중국교포/가짜친척 크게 늘어

    ◎교포,북에 친척있어야 「통행증」 받고/주민들은 중국산 생필품 싸게 구입 북한주민들이 중국교포와 「가짜친척」관계를 맺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중국연변 조선족 교포상인들에 의하면 최근 북중국경을 넘나드는 보따리 장사꾼들의 절반정도가 북한주민들과 가짜친척 관계를 형성,상호도움을 주고 받고 있다.북한주민들과 중국교포 보따리 장사꾼들이 서로 가짜친척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중국 연변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보따리 장사차 북한을 방문하려 하면 반드시 북한에 거주하는 친척이 있어야만 중국당국으로 부터 「통행증」을 발급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북한주민들은 중국 교포상인들이 방북시 자신들이 먹을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식량을 가져와 장사를 끝내고 돌아갈 때 남는 식량을 주고 가는데다 이들이 가지고 들어온 각종 생활필수품을 보다 값싸게 얻을수 있어 가짜친척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교포들과 가짜친척관계를 맺어 놓을 경우 외화벌이 사업차 중국으로 밀입국 할 경우 어느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북한주민들이 중국 교포상인들과 가짜친척 관계를 맺고 있는 주요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일부 주민들이 중국 교포들과 짜고서 허위로 친척관계를 맺고서 방북시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또 탈북 수단으로 이용함에 따라 북한은 이를 근절시키기 위해 적발된 자에대해 「입당」제한 및 강제노역 처분 등을 부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방중한국인 살해범은 조선족/통역하며 친분… 거액소지 알고 범행

    ◎석종영씨 피살사건 【북경=이석우 특파원】 지난달 22일 중국 북경에서 피살된 한국인 석종영(33)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조선족동포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주중 한국대사관 영사부는 2일 북경공안당국이 『석씨를 살해한 주범2명과 공범3명을 체포,조사한 결과 이들 모두가 흑룡강성출신의 조선족들이며 이번 범행은 금품을 털기 위해 계획적으로 석씨를 유인,저지른 것』으로 수사결과를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북경공안당국은 또 범인들가운데 주범 두명은 북경시 골동품 전문상가인 유리창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골동품매매알선과 통역등을 해왔으며 평소 알고 있던 석씨가 골동품구입을 위해 늘 현금을 지니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 보따리장사/북한에 싸구려 물건팔아 짭짤한 재미(두만강7백리:10)

    ◎북한에 싸구려 물건팔아 짭짤한 재미/세관검사 허술한 고성리엔 장사꾼 득실/“저질품 거래해 동포간 불신 조장” 우려도/김일성 사후 단속… 거래 주춤 두만강이 발원하는 상류지역 화룡시 숭선진 진소재지 고성리촌은 크고 작은 2척의 군함형국을 한 산 아래 자리잡은 오붓한 마을이다.옛날에는 두만강물이 그 군함산 밑을 지나갔다고 한다.그러고 보면 군함이 물살을 가르고 떠가는 모습을 했을 것이다. 이 마을의 노인들은 큰 군함산은 남쪽을 향하고 작은 군함산은 뱃머리를 북쪽에 두었다고 생각한다.그런데 묘하게도 그 형국이 요새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남으로 향한 큰 군함산이 조선(북한)으로 들어가는 대신 작은 군함산은 조선에서 소량의 짐을 싣고 북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다시 말하면 오늘날 북한에서 연변 땅으로 들여올 물건이 없다는 것인데 중국의 조선족 장사꾼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두만강유역 답사길에서 실제 군함산 아래 고성리촌에 몰려든 조선족 장사꾼 무리들을 만났다.고성리촌에 장사꾼들이 모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그것은 바로 해관(세관)보다 휴대물품 제한 수량이 느슨한 변방검사잠(국경검사소)이 고성리촌에 있기 때문이다.두만강유역에 자리한 연변의 4개 지역에 해관이 있지만 휴대품 검사가 아주 까다로워 변방검사잠에 장사꾼들이 몰리게 마련인 것이다. ○양강도 거래통로 폐쇄 연변에서 두만강을 건너려면 4개의 해관이나 2개의 검사잠을 거쳐야 한다.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촌 검사잠 말고도 화룡시 덕화진에도 검사잠이 있으나 강건너 북한 땅 수산에서 김일성 사망 이후 시장을 닫아버려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요즘 한창 흥청대는 고성리촌 변방검사잠은 북한 양강도 대홍단군 삼장리로 건너는 통로다.그래서 숭선진 행정부 각부서에 근무하는 인구까지 통틀어 3백명도 안되는 고성리촌의 국유여관과 개체(개인)여관은 늘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고성리촌에서 만난 김철석(51)씨는 화룡시내에 사는 사람인데 화가 머리털 끝가지 치민 말투로 투덜거렸다.두만강 국경을 넘어갈 조선족들이 하도 많아 출국걸음이 늦어지자 옛 시절을 들추어내면서 불평을쏟아놓았다. 『도대체 국경이 뭐란 말입네까.예전에 여권이래 없이도 마음대로 왔다갔다 했시요.고성리와 강건너 삼장사람들 한데 모여 이 군함산 아래서 운동회도 했댔수다.노동자가 몇 백원씩 타서 목돈 쥐어보려고 만여원어치 물건을 사 놓았는데 이 꼴이 뭡네까.되돌아갈 처지도 안되니끼리 이렇게 기다립네다.이거 원,하는 이틀도 아니고…』 중국연변의 남평·백금·도문·훈춘 등과 조선의 삼장·무산·회령·종성·경원 등은 예전부터 두나라 사람들이 상품을 거래하던 시장이었다.광복초기까지도 중국의 쌀이 아니면 두만강연안 조선 사람들이 굶는다고 했고 조선의 소금과 옷감이 없다면 중국 사람들은 염분 결핍으로 털 난 벌거숭이가 된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그만큼 두만강 양안의 경제거래는 밀접했다.용정시 개산툰진 선구에서는 계란을 팔아도 종성 장거리로 갔다고 한다.오늘도 마찬가지이다.중국의 경공업품과 양식이 나가고 대신 명태,낙지 따위 해산물들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연변 사람들의 식탁에 물고기 반찬이 푼푼이 오르지 못할 것이다.북한땅을 찾아 재미를 본 조선족들은 한국바람이 불어도 좀처럼 뜸해지지 않는다.작은 밑천 가지고 돈맛을 보기가 쉽고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고도 왕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마음먹은대로 제때 국경을 못 넘는 것이 불평이라면 큰 불평이다.여관에서 수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빽만 있으면 풀린다』는 소리도 서슴없이 해댔다.그러면서도 기다리는 사람들의 속 사정 뒤에는 모두가 목돈을 움켜 쥐겠다는 욕심이 깔려있다. 내가 숭선향에서 3일동안을 묵는 사이에 어느 한 사람은 배갈과 맥주만 1백 상자를 싣고 건너갔다.한번 장사비용이 제일 많은 사람이 17만원,제일적은 사람이 1만원이었다.보통 두세집 물건을 실으면 트럭 한대 적재함이 넘쳤다.그들이 가진 물건은 대개 연변의 싸구려였다. 옷가지들은 20원좌우의 도매품이고 담배는 「장백」「박쥐」표는 고급이고 보통 한갑에 60전씩 하는 「해란강」과 「길성」이 많다.배갈도 화룡의 「대고량」이고 고급스럽다는 것이 연변 사람들이 좋아하는 「BC」표 맥주였다.북한으로 가는 짐은 한때 천인호를 타고 한국에 갔다가 천진항에 내리는 보따리 장사꾼들의 짐만큼이나 컸다. ○북한산물품 크게 줄어 『보통 열다섯배,잘 받으면 스무배가 더 떨어지디요.길성표 담배 한갑이 조선돈 15원,입쌀 1㎏이 40원(중국에서 입쌀 1㎏이 2원)입네다.중국돈 1만원만 갖고 가도 조선돈 20만원을 만들디요.변방잠에 찔러주고 길에 널고 하는 돈까지 떼고도 남는 떼돈벌인데 누가 안하겠습네까.올 때면 해산물을 구입하는데,1㎏ 명태값이 4백원이니까 중국돈 20원입네다.중국에서 도매로 35원 이상이디요.중국에서 4백원씩 하는 생복같은 것은 조선돈으로 4천원 좌우에 살수 있습네다.해삼은 3천원인데 중국에서는 도매가격이 인민폐로 3백50원에서 일전도 곯지 않고 팔디요.2월부터 4월까지는 명태,4∼5월은 해삼,8월은 낙지철로 칩네다』 장사꾼들의 말을 들어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북한을 상대로한 한 장사는 손쉽게 돈을 버는 지름길이기도 하다.지금 중국 조선족 장사꾼들은 큰 군함산에 싸구려를 무겁게 만재해 싣고 갔다가 작은 군함산에 값진 해산물을 살짝 얹어 싣고돌아오나 예전에는 이와 반대였다.용정시 삼합진 북흥촌의 김창균(60·조선 함북도 유선군 성북리 태생)씨의 50년대 장사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회령에 가서 학교를 다닐때 일입네다.토요일이면 두만강을 건너 집에 와서 주말을 보냈디요.한번은 용정에 갔다가 한감에 12원씩하는 샤떼천 두감을 끊었댔습네다.월요일 새벽에 강을 건너가서 하숙집 아주머니한테 맡겼는데,아주머니가 청진에 가 팔아서 돈을 줍데다.그 돈으로 한달 숙비를 내고도 헝가리 신발 열켤레와 손목시계까지 사 찼지 않았갔시요.그때 헝가리 신발 한켤레가 중국에서 12원씩인가 기랬어요』 ○손쉽게 돈버는 지름길 장사꾼들이 북한으로 갖고 가는 물건은 중국의 싸구려 폐품이다.양말따위는 한두번 신고나면 실밥이 나고 몇번 빨고 나면 판나서 버려야 한다. 옷도 매 한가지다.지금은 좀 품질이 좋은 것으로 휴대한다고는 하나 별 차이가 없다.그러한 저질품을 고가로 팔아 목돈을 쥐고 어깨를 잔뜩 살리고 다니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언짢다.한두마리 지렁이가온 늪의 물을 흐린다고 돈에 눈이 어두운 얼간이들의 놀음은 동포간의 불신을 심어주고 있다.가슴 아픈 일이다.
  • 풍토병/5∼10년주기 극산병 번져 수백명 희생(두만강 7백리:9)

    ◎1904년 화룡현 일대 1백여명 참변/여우우는 새벽엔 으례 사람 죽어나가/오염된 두만강물 타고 북한쪽 전염병도 확산 화룡에서 숭선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차안은 떠들썩했다.술잔을 얼근히 걸친 한 50대 남자는 유난히 큰 소리를 쳤다.그 취객에 입에서 콜레라라는 말이 연신 튀어나왔다. ○한국서 약품지원 제의 『맨 처음에는 감기인줄 알았지 뭡네까.열이 나고 메스꺼워 토역질도 하고….그래서리 주사를 맞고 약도 먹었지만 차도를 안보이더라 이 말입네다.그제야 쥐병(출혈열)이라는 예감이 들어 병원을 찾았디요.웬걸,병원에서 검사를 하더니 다짜고짜 격리시키고 중앙에 보고를 한다 뭣을 한다 난리를 칩데다.알고보니 호열자(콜레라)였는데,숭선에만 환자가 셋이라고 기래요』 숭선행 버스에서 주어들은 이야기는 함경도에 돈다던 콜레라가 두만강을 건넜다는 것이다.그리고 북한에 콜레라가 너무 심해서 한국이 약품지원을 제의했다는 말까지 나왔다.또 두만강물은 병을 옮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었다.북한땅 대홍단군 전분공장이 감자썩은 물을 마구 흘려버리고 무선철광이 쏟아붓는 폐수도 합류한 두만강물을 더 이상 마실수 없다고 열을 올렸다. 연변의 화룡지역은 역사이래로 지방풍토병이 유행하여 재난이 심했다.그것은 극산병,또는 지방성 심근병이라고 했다는 것이다.청나라 기록에는 「누런물을 토하는 병이 유행했다」는 내용이 보인다.19 04년 화룡현 와룡호 한 곳에서만도 개척민 1백명이 죽어나갔다.그래서 이 일대를 「시체골」이라 했고 타령조 노래까지 구전될 정도였다. 밤에 여우가 캥캥 울어대는 날 새벽에는 으레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했다.여자들이 더 많이 목숨을 잃었다.부동골에서는 한해 겨울을 났더니 젊은 아낙들이 40여명이나 죽었다는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물을 토해내다가는 밤을 넘기지 못하기가 일쑤였다.매일 밤마다 여우가 울어대고 사람이 죽어나가자 성한 사람들도 실성거렸다.성황당을 찾아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병을 잡지는 못했다. ○손톱부터 죽어가는 병 극산병은 5∼10년 주기로 고봉으로 닥쳐 무려 천여명씩의 목숨을 앗아갔다.19 44년 오늘의 화룡시 덕화진 고산촌 우복동 60여호 2백여명 중 1백8명이 세상을 떴다.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인 19 57년 전후에는 극산병과 함께 천연두와 홍진이 겹쳐 찾아왔다.화룡시 숭선진 고성리촌 김봉용(72)노인이 회고하는 극산병은 무서운 병임에 틀림 없었다. 『내 옥석에 있을때 일입네다.소문을 듣고 가보니 금방 시집을 온 새각시가 배를 붙들고 죽는다고 고아대고 있었다.남편은 먼데,나가 안오고 시부모들과 같이 있는데 노인들은 어쩔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합데다.그때 침깨나 놓는 의원이라구는 시만 상촌에 한분이 있어서 달려가서 모셔왔디요.의원은 극산병이라면서 속수무책으로 앉아만 있습데다.환자는 애고대고 죽는다고 광기를 쓰는데 이거 야단이 아닙네까.손톱이 하나씩 색이 죽는데 바른 손이 끝나니 왼 손으로넘어 가더라 이겁네다.명색이 의원인데 보고만 있을수 있냐고 하니 한다는 소리가 엉뚱하기라니….듣자니 극산병은 하신에서 온다는데 젊은 아낙을 벗겨 볼수도 없지 않느냐고 대듭데다.물에 빠진 사람 짚오리도 잡는다고 하신을 보이고도 완쾌된다면 대수냐고 내가 주동해서 아낙을 짓누르고 다짜고짜 치마를 들추고 반쓰(팬티)를 벗겨 내렸디요.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하신을 벌려보니 음질속에 좁쌀알만큼씩한 것이 잔뜩 돋아 있습데다.의원이 침으로 마구 쪼았디요.달거리 때처럼 피가 흘러나옵데다.소랭이(대야)를 대고 피를 받았디요.사람이 죽은듯 늘어지기를 한 시간쯤이 지났나….환자가 물을 찾습데다.한 바가지 물을 들이키더니만 언제 앓았더냐 싶게 일어나 앉는 걸 봤디요.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 여자들은 배만 아프다하면 속곳들을 훌렁 벗었디요.내 평생 마누라말고 다른 여자 살을 섞은 적은 없어도 웬간한 바람쟁이보다는 여자 하신 구경은 더 했수다』 ○미역훔쳐 삶아 먹어 극산병은 여지껏 병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토질이 문제라는 사람도 있고 가난이 근원이라는 말도 들린다.지방마다 치료 방법이 조금씩 달랐다.그러다가 1957년께 극산병이 돌 때에는 인민공사시절이었는데 귀동냥으로 병의 원인을 대강 알게되었다.극산병은 수토병으로 혈액순환이 안되면 죽게된다는설명을 현의사로부터 전해 들었던 것이다. 화룡시 덕화진 남평촌 두만강에서 사는 조선족들의 생각으로는 미역이 혈액순환에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그러나 인민공사시절이라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판국에 미역을 어디서 구하랴.궁리 끝에 한밤중 두만강을 건너 북한땅 함북 무산의 수산사업소를 쳐들어갔다.죽는 사람들 살리고 보자는 일념에서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수산사업소에서는 조선족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쌀여섯되와 미역 몇잎을 얻어왔다. 그리고 나서는 간덩이들이 부어 감옥소 갈 작정을 하고 무산에 가서 창고를 털었다.수레에 싣고 와서 집집에 나누어 주었다.마을 전체가 한군데서 해먹고 사는 집체식당 때라 집에서 음식을 해먹으면 경을 치는 시절이었지만 그날 만큼은 집집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북한에서 수산물을 몰래 가져오다 변방부대(국경수비대)에 들켰다.마침 부대연장(중대장)이 조선족이어서 『내가 눈감아 줄테니 위에서 물어오면 딱 잡아 떼라』고 일러주었다. 아니나 다를까,밀수조사를 나왔다.이경화 구장도 모르쇠를 댔다.그래서 그해 겨울을 그럭저럭 무사히 보낼 수 있었고 캥캥대던 여우 울음소리도 뜸해졌다.해산물이 명약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쥐처럼 먹고 소처럼 일했던 당시 조선족들에게 해산물은 명약 구실을 했을 것이다.당시 여우가 울어대던 시절에 유행했다는 타령 한가락을 떠올리면서 수성진에 다시 콜레라가 돈다는 사실이 끝내 못마땅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극산병 열이 걸리면 아홉이 숨 지나니 주검은 산과 들에 쌓이고 일가 식솔 영 이별한다네 황폐한 옥토 풀이 무성하고 가난한 농사꾼 애간장 다 타네 한 많은 우리 살림 언제 펴날고 따사로운 해볕 쪼일 그 날을 고대하네』
  • 미 석학 스칼라피노 교수(인터뷰)

    ◎“북,남측 영향력 증대 우려 「한국형」 거부”/협상 파국때도 군사제재는 어려울듯/남북한 정상회담 가까운 장래 성사 난망/평양 세대교체중… 「경제변화」 최대 현안 한반도및 동북아문제 전문가인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76·미 캘리포니아대)는 2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북한 정상회담이 가까운 장래에 이뤄지기는 어렵다면서 남북간 신뢰회복 조치가 통일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인터뷰 내용을 요약,소개한다. ­북·미간 경수로회담이 막바지 진통을 겪고 있다.어떻게 보는가. ▲확실한 결과를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북한은 한국형 경수로 모델 성능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북한에 대한 남한의 영향력이 증가되는데 따른 반발을 우려하기 때문이다.서로간의 체면을 세우는 타협은 항상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분명한 것은 북한이 21일 이후 핵연료를 재장전한다면 미국의 반발이 심할 것이라는 점이다.단계적으로 작년 합의에 접근해 위기를 극복하기를 바란다. ­경수로회담이 파국을 맞는다면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지않을까 우려된다.그럴 때 미국은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조치로까지 밀고갈 것인가. ▲유엔제재 노력도 여러가지 가능성중 하나지만 제재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군사공격 가능성은 상정하기 어렵다.아무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다른 국가들의 일치된 협조를 얻기도 어렵다.한·미·일 등 핵심국들이 북한의 개방노력에 대한 투자지원 등을 동결하는 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의도에 대해 보수·진보 양진영간에 상당한 시각차가 있다.북한이 이미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어떻게 보는가. ▲북한이 핵무기를 생산했다는 확증은 없다.미국정부는 북한이 핵폭탄 1∼2개 이상을 생산할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공식 발표했고,중국과 러시아의 전문가들은 북한의 핵무기 생산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기다려 보자. ­클린턴 정부가 대북한정책에서 너무 약하고 양보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연장에만 급급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의견이 분분한게 사실이다.보수파들은 북한과의 핵합의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보다 강경한 태도를 요구한다.클린턴 정부는 완벽한 합의는 아니지만 가능한 대안을 찾은 것이다.유엔제재를 이끌어내려던 노력은 초기단계에서 중국의 반대로 문제를 드러냈다.한국과 일본도 찬성은 했지만 내가 보기에 한국은 극단을 피해 중간서 맴돌았고,사회당까지 포함된 일본연정 내부에도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미국이 NPT체제 유지 등을 위해 범세계적인 접근방식을 취하고 한국이 국내및 지역적 접근을 해 접근시각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해할 수 있는 차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합의됐던 남북 정상회담이 북한 김일성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무산됐다.남북한에 문민정부와 젊은 지도자가 등장해 남북한 교류 확대가 기대됐으나 북한은 조문 문제 등을 이유로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향후 남북한 정상회담및 교류확대 가능성은. ▲남북 정상회담이 가까운 장래에 성사될 수 있을 것같지는 않다.북한의 노동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이 임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상회담은 어렵다.북한의 정치진전 추세를 좀더 지켜봐야 한다.그렇다고 북한의 정치상황이 불안하다고 할 이유는 없다.진화가 일어나고 있다.단순한 부자간 권력이양이 아니다.폭넓은 세대교체다.젊은 층은 교육을 더 받았고 기술지향적이며 경제변화를 추구한다.그러면서도 의회민주주의가 아니라 현정치체제를 유지하길 원한다.북한의 현안은 경제변화이며 산업사회를 따라잡으려는 노력이 시작됐다.그것이 북한 지도층에 주어진 도전이다. ­미·북한간 연락사무소 개설이 합의됐고 미·일간 수교협상이 시작됐다.북한 개방에 미칠 영향은. ▲경수로 교착상태가 해결되면 북한은 미국,일본과의 관계개선에 촛점을 맞출 것이다.북한은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러시아·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북한이 미국·일본과 수교하면 시장경제 접근과 경제지원 혜택 뿐 아니라 한국과의 협상에서도 힘을 가질 수 있다. ­한국 통일에 대한 미·일·중·러 등 주변 4강의 입장은. ▲모두가 북한의 붕괴를 원치 않는다.한국도 북한의 붕괴를 원치 않을 것이다.4강 모두 남북한이긴장완화,경제·문화 교류,군축 등의 과정을 거치는 점진적 길을 걷기를 바란다.물론 차이는 있다.중국은 항상 두개의 한국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왔다.북한을 완충지대로 유지하기 위해 피와 돈을 투자한 중국이 동북지방에 조선족이 많고 남한 인구가 북한보다 많은 상황에서,특히 한국주도의 통일을 원하는지는 불확실하다.러시아도 한국통일을 원하는지는 불분명하다.러시아는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버린 과거정책을 후회하고 영향력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일본은 두개의 한국 입장 쪽으로 갈 것같다.통일한국이 일본과 적대·경쟁적인 관계가 될 것으로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미국은 통일한국을 잠재적 위험국가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평화적·점진적 통일에 반대하지 않는다.북한태도에 달려 있다. ­한국의 바람직한 통일 방식은. ▲북한이 붕괴할 것 같지는 않다.민중혁명은 불가능하다.예측가능한 미래까지는 안정을 유지할 것이며 중장기적으로는 기본적인 경제·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느냐 여부에 달려있다.무력통일 가능성도 없을 것같다.북한이 선제공격을 하면 큰 피해는 입힐 수 있지만 결국 한·미 군사력,특히 해·공군력에 의해 파멸할 수밖에 없다.북한정권은 기본적으로 현실적이어서,스스로 이같은 자살행위를 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그렇다면 경제·문화적 유대를 증진시키고 군축과 두 정치실체간 신뢰회복 등 중요문제를 계속 협상해나가야 한다.북한이 고립상태에서 빠져나와 타국과 접촉하면 북한 자체의 다양성과 지역국가들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 수 있다.통일한국의 구체적인 법적,제도적 장치가 어떻든간에 두사회 내부의 진화,특히 북한의 개방이 중요하다.통일이 단기간내에 이뤄지리라고 보지는 않는다.상당기간 소요될 것이다.
  • 김현희씨·여금주양이 말하는 남과 북/서울신문 첫 합동인터뷰

    ◎“진한 화장 짧은 머리… 평양패션 서양화”/“KBS듣고 남쪽 잘 산다는 것 알았어요”/“외화벌이 남자와 결혼하는게 여성의 꿈”/김/“요즘도 북한의 가족 찾는 꿈 꿔요”/여/“영어에 깜깜… 학교공부 힘들어요” 『현희언니,정말 만나고 싶었어요』 『나도 금주양이 보고 싶었어요』 15일 한국 프레스센터 20층 동백실에서 첫 대면한 김현희씨(34)와 여금주양(21)은 한동안 포옹을 풀지 않았다. 김현희.올해로 서울생활 9년째를 맞는 그가 북한탈출 귀순자를 만난 것은 김만철씨에 이어 두번째.그러나 여성 귀순자를 만나기는 여양이 처음이었다. 검은 블라우스 위에 베이지색 재킷차림의 김씨와 체크무니 재킷차림의 여양은 흡사 친자매같았다.지난해 4월30일 사회안전부 대위출신인 아버지 여만철씨(49)등 일가족 5명과 함께 동남아를 거쳐 귀순한 여양은 서울에 오기 전까지 김씨가 누구인지를 몰랐다고 한다.그도 그럴 것이 북한에선 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해 일절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여양은 서울에 온 뒤 비디오 「마유미」와 그의 고백록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를 읽고 나서 김씨의 아픔을 알게 됐고 언니가 가여워 울었다고 한다. 『화면을 통해 봤을 때와 달리 가까이서 보니 정말 언닌 젊고 예쁘네요.언니가 똑똑하고 예쁘지 않았으면 공작원으로 뽑히지도 않았을 텐데…예쁘게 태어난게 「원수」인 것 같아요.아마 언니가 남쪽사람으로 북한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벌써 죽었을 거에요』 ○93년 평양 많이 변해 김씨와 여양의 연령차는 13살.그러나 나이차보다 더 큰 간극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시차 7년이었다.김씨가 마지막으로 평양을 떠난 87년까지 북한여성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먹고 사는 일이 전부였다.그러나 여양이 전하는 그 뒤의 북한,특히 여성사회엔 미미하나마 나름대로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88년 처음 평양에 갔을 때는 그곳 여자들이나 내가 사는 함흥여자들이나 별로 다른게 없었어요.그러나 93년 다시 평양에 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달라진 여자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머리모양이 짧아졌을뿐 아니라 브래지어 바람에 속이 훤히 드려다보이는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더라니깐요.거기다 화장도 서양식으로 진하게 하는 등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한 느낌을 받았어요』 여양이 전하는 북한의 이성교제 역시 김씨의 재북시절과는 많이 달라진듯 했다.김씨가 공작원 교육을 받던 87년엔 남녀가 대동강변을 손을 잡은채 돌아다니는게 「첨단 데이트」에 속했다는 것.그러나 요즘엔 남녀가 껴안은채 밀어를 나누는 모습을 대동강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고 여양은 말했다. 밝고 활달한 여양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던 김씨는 여양이 가족과 함께 자유를 찾은 사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북한이 어떤 사회인데,일가족이 고스란히 탈출할 수 있었다니 정말 천행에요』.김씨는 여양 일가의 귀순보도를 대하면서 함남 요덕 「2951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가족생각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이젠 가족생각도 희미해졌다』고 말한 김씨는 『가끔씩 여동생 현옥이와 남동생 현수가 나타나 큰 누나 때문에 식구들이 고생을 하게 됐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내가 스웨터 등 보따리 꾸려들고 우리가족을 찾아가는 꿈을 꾸기도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가 지난 91년 3월 여의도침례교회서 세례를 받은후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 의해 목숨을 잃은 무고한 KAL858기 희생자들에 대한 속죄와 아울러 가족들의 무사함을 하느님께 빌기 위해서라고 한다. 올해 중앙대학교 유아교육과에 입학한 여양이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은 그가 북한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판자집과 거지 천국」에 판자집과 거지 대신 하늘을 찌를듯이 솟은 빌딩숲과 흘러 넘치는 경제적 풍요였다고 한다.여양은 북한에서 KBS 사회교육방송등을 통해 남한이 잘 산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알았지만 이렇게 잘사는 줄은 몰랐다고 한다.북한에선 라디오를 구입하면 의무적으로 안전부에 등록하도록 돼있고 안전부는 채널을 납땜,남한방송청취를 원천봉쇄한다고 한다.그러나 일단 등록만 하고 나면 추후검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수의 주민들이 몰래 고정납땜을 뜯어내고 남한방송을 듣고 있다는 것.특히 친한 학생들끼리는 남한방송에서 들은 내용을 서로 주고 받기도 하는데 그 가운데는 『남조선에선 거리 청소부도 집에 전화를 매놓고 산다』는 얘기도 들어 있다고 한다.놀랍게도 여양은 친척이 중국에 있는 남학생으로부터 6·25가 남침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고 밝혔다. 북한당국이 주민들에게 북조선이 「지상의 낙원」임을 끝없이 세뇌하고 있지만 정작 북한주민들은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잘산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다고 여양은 말했다.북한주민들은 주로 「귀국자」나 중국연변의 조선족,러시아벌목공들로부터 바깥 세상정보 특히 남한정보를 듣고 있는데 러시아벌목장에서 일하다 귀국하는 벌목공의 경우 품질이 좋은 남한치약을 압수당하지 않기 위해 「MadeinKorea」란 글자를 긁어낸채 갖고 들어온다고 한다.여양은 그래도 평양에서 만든 치약은 품질이 괜찮은 편이지만 지방산 치약은 흰 치분을 물에 반죽해놓은 정도여서 대부분의 가정에선 소금으로 이를 닦고 평양치약은 손님 접대용으로 모셔놓는다고 말했다. ○6·25는 남침 들었다 북한청소년들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여양은 『북한 청소년들은 꿈을 위대하게 갖지 않는다』고 말하고 요즘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장사에 나서 돈을 벌겠다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최근들어 북한에서 군복무기피현상이 확산되고 있다고 전한 여양은 이같은 풍조 역시 돈을 벌어 잘살아보겠다는 청소년들의 가치관과 무관치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김씨가 『그전엔 김일성과 조국을 위해 청춘을 바치겠다』며 입대를 자원하는 청소년들이 많았다고 말하자 여양은 『이젠 어쩔 수 없어 군에 가는 경우가 더 많다』며 김일성종합대학의 경우 전엔 고등중학교 추천 70%,군추천 30%로 신입생을 받아들였으나 이제는 고등중학교 추천 30%,군추천 70%로 그 비율을 바꿔 청소년들의 군입대를 회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양은 젊은이들의 군입대를 기피하는 이유는 영양실조로 인한 질병과 사망,핵문제와 관련한 국제사회의 제재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맨먼저 죽게 될것이란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했다.물론 군인은 일반 주민에 비해 훨씬 많은 식량(1일 800g)이 지급되지만 변변한 부식없이 쌀 30%,잡곡 70% 비율로 지은 밥만 먹곤 엄청 강도가 높은 훈련을 감당못해 영양실조에 걸리는 장병이 적지 않다는 것.이런 소문이 쫙 깔리는 바람에 젊은이들이 그럴듯한 구실이나 꾀병을 이유로 입영을 기피하고 있다는 것이다.여양은 인민군의 요양소는 대부분 영양실조로 쓰러진 군인들을 수용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의 젊은이들이 군입대를 기피할 목적으로 자주 써먹는 방법은 신검수검 직전에 엿을 잔뜩 집어 먹고 혈압을 올려 고혈압환자로 위장하거나 X레이 촬영시 러닝셔츠속 가슴팍에 담배곽에서 떼낸 은박지를 붙여 필름에 폐결핵 환부가 나타나도록 위장하는 것 등이라고 한다. 서울생활 1년을 맞는 여양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햄버거.『북한에선 돼지고기도 꿀처럼 먹었는데 여기와선 너무 자주 먹는 탓인지 이젠 신물이 났다』는 여양.그러면서 그는 『사람의 입이 참으로 간사한 것 같다』고 했다. 이미 4권의 고백록과 2권의 번역서를 낸 김씨가 독서에 취미를 가진 반면 여양은 TV시청을 즐기는 편이다.여양이 즐겨 보는 드라마는 KBS­2TV의「딸부잣집」과 SBS의 「이 여자가 사는 법」.김씨 역시 즐겨보는 TV프로로 「딸부잣집」과 뉴스프로를 꼽았다. 강연이나 신앙간증에 나서는 틈틈이 책을 읽고 쓴다는 김씨는 최근에 펴낸 「이은혜,그리고 다구치 아예코」를 얼마전에 구입한 컴퓨터로 썼다면서 『요즘엔 컴퓨터가 생활의 또다른 즐거움으로 추가됐다』고 말했다. 한편 얼마전부터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다는 여양의 가장 큰 고민은 학교공부다.특례입학으로 진학은 했지만 영어에 깜깜한데다 교과과정이 북한과 다르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한다.또하나,여양을 괴롭히는 건 미팅이다.얼마전 같은 대학 법대생들과 그룹미팅을 가졌을 때 마음에 쏙드는 남학생을 발견,「찍었는데」 그 남학생이 다른 여학생을 파트너로 정하는 바람에 요즘 「열을 받고」있다는 것이다. ○청소년 군기피 확산 여양은 나이로 보면 분명 X세대지만 부를줄 아는 노래가 주로 가요곡집의 앞쪽에 실린 노래들 뿐이어서 노래방 가기를 꺼린단다.그러나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요즘 독한 마음 먹고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이상적인 남성상을 『비록 자판기 커피일망정 함께 나누며 나를 기쁘게 해주는 남자』라고 밝힌 여양은 같은 또래의 여대생들이 브랜드옷을 고집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며 『몸에 잘맞고 색깔만 잘 받으면 됐지 메이커가 무슨 상관이냐』는 의젓함을 보였다. 서울엔 미인이 많은 것 같다는 여양 말에 김씨는 아마도 식생활이나 환경 탓일 것이라고 설명.북한여성들도 성형수술을 하느냐는 질문에 여양은 『돈을 주고 병원에서 쌍꺼풀수술을 하는데 시술수준이 낮은 탓인지 3년 못가 풀린다』고 말하고 수술이 잘못돼 고등중학교 학생이 할머니로 변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자주 벌어지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북한여성들의 꿈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김일성종합대학이나 평양외대를 졸업,외화벌이 기관에서 근무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두사람이 똑같았다.여양은 그래서 『요즘 북한여성들 사이에선 시집 잘가는게 대학 15곳 다닌 것보다 낫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생지옥」에서의21년의 생활을 마감하고 자유를 마음껏 호흡하게 된 여금주양.그는 이제 배고픔과 유일사상체제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난 것이다.더는 금요노동에 나오라는 지시도 받지 않게 됐으며 영농철 두달간의 노력동원으로부터도 해방이 됐다.어디 그뿐인가.스스로 능력을 키우고 노력만 하면 원하는 것을 움켜쥘 수 있는 가능성의 문앞에 바짝 다가선 것이다.그래서 여금주양은 이제 행운의 여신과 손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다. ○인세 고스란히 저금 그러나 같은 북한에서 태어났어도 평생 벗지 못할 무거운 멍에를 지고 있는 김현희씨.그는 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불행의 끝이 어디인가를 가늠하지 못한채 오늘도 번민과 죄책감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그는 10억원에 가까운 출판인세를 한푼도 쓰지 않은채 고스란히 저금해놓고 있다.KAL기 희생유족들과 합의가 이뤄질 경우 그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는데 쓰기 위해서다.자유의 땅 대한민국에서 거듭 자유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북한의 억압속에 신음할 가족생각에 하루도 눈물 마를 날이 없는 김현희.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 두 여인에게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준 이 불행한 시대상황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하루 빨리 청산해야할 공동의 빚이 아닐는지.여양은 4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서면서 『언니,외롭거나 마음이 아플 때면 제게 전화 하세요』라며 김현희씨를 다시 껴안았다.
  • “죽음의 향연”… 6·25(두만강 7백리:8)

    ◎“조국위해 몸바쳐라” 조선족 징집/인민군에 편입… 2달 훈련받고 출전/연합군 폭격에 화룡시 일대 “쑥대밭”/돌아온 포로들 “차라리 남쪽에 남았더라면” 중국에 사는 전 북한의 인민군 부소대장이상 퇴역 군인들이 불합리한 대우에 항의하여 서명운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오늘 중국에 자리잡은 인민군 퇴역 군인들은 거의 모두 중국 인민 해방군 출신이다.이들은 본래 중국 내전의 공로자들인데 1949년 모택동과 주덕의 명령에 좇아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였다.이들은 6·25전쟁에서 주역 노릇을 했지만 퇴역하여 중국으로 돌아온 후 농민이 아니면 공장 노동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이에 비해 중국 지원군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은 간부대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자연 분통이 터질 일이기도 했다. ○두달간 훈련받다 출전 이들은 연변 자치주 정부의 지지를 받아 대표를 파견하여 중앙에 신소,끝내 승소하였다.모든 조선인민군 부소대장이상 퇴역 군인들은 현재 간부대우를 받고 있고 자식들도 취직시켰다. 화룡시 승선진 고성리촌의 김성묵(70)은 1947년 중국 내전에 참전,1950년 4월 조선으로 나가 인민군 7사단에 편입되었던 사람이다.중국군의 군사민주에 젖어 있던 그들은 인민군 명령제에 잘 습관이 되지 않았다.소련군인식으로 다리를 꼿꼿이 펴고 행군하고 총도 왼쪽에 메야 했다.돌격시에는 꼿꼿이 서서 달렸다.두달동안 훈련을 받다가 전쟁에 휘말려 들었다고 한다. 『6월25일 새벽 맹렬한 포사격을 끝내고 국군진지로 돌격해보니 여자 방송원 한사람만 남았습데다.참말로 포탄 값도 못한 셈이디요.인민군들이 물밀듯 탕크를 몰고 서울에 들어가니끼리 우리를 소련군인줄로 알았다고 기래요.인민군이 탕크에서 나오자 깜작 놀라는 눈치였읍네다.내가 소속된 사단은 이천에서 국군의 반격을 받아 쌍방이 숱한 사망자를 냈수다.국군 포탄이 대피호에 떨어지면서 부상을 당했는데 팔이 끊어지고 다리를 상했디요.평양 웽그리아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다가 매일 20리씩을 걸어서리 평양에서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넜지 뭡네까.유수현에서 치료를 받고 다시 이듬해 3월에 전쟁에 참가했디요.그 전쟁 말도 말라우요』 연합군의 인천상륙으로 후퇴한 북한 인민군은 중국경내로 전이했다.겨울에 두만강을 건너 온 인민군은 연변의 화룡·용정 등에 집중하여 사민들 집에 10여명씩 거주했다.중국에 친척이 있는 백성들도 강을 건너 피란을 했고 그외는 산속에 땅굴을 파고 살았다.그해 음력 10월1일(상사날)미군 비행기가 무산을 처음으로 폭격했고 이틀 후에 두번째로 폭탄을 내리부었다.화룡시 덕화진 천증백노인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상황이 잘 떠오른다. 『첫 폭격을 당한 무산에서는 17살 최호림학생이 죽었디요.비행기는 중국쪽에서 선회하여 조선쪽으로 꽂히면서 대두병같은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포를 갈겨댔지 뭡네까.비행기가 어찌도 낮게 떴던지 자루 긴 올개미로 잡아댕기면 떨어질것 같습데다.조선쪽에서 폭파하는 진동에 중국쪽 마을 유리며 문짝이 떨어져 나갔디요.공습 사이렝이 울리면 조선 사람들이 새까맣게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왔는데 그러면 중국 쪽에서는 못오게 막더라 이 말입네다.사람들은 울면서 같이 삽시다고 손이 발이되게 빌어댔디요』 ○온마을 온통 울음바다 화룡시 승선진 고성리와 조선의 삼장은 한 마을이나 다름없어 폭탄세례를 당했다.한족 한사람이 수레를 몰고 가다가 폭탄에 맞아 죽었는데 유일하게 재수 없는 사람이었다.승선진 소학교 운동장에는 땅에 박힌 불발탄이 70년대에까지 있었다.그것은 반미 교육의 증거로 오래오래 써먹었다.천증백노인의 회고담을 계속 들어보면 연변의 조선족들도 6·25전쟁에 많이 시달렸다. 당시 민심은 황황하기 짝이 없었다.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식구들이 살아 있을 때 먹는다고 가축들을 잡아 얼려두고 먹어댔다.군인 모집이 나오면 적령 청년들은 물론 온집안이 숨이 후줄근했다.참전하면 영광이라고 온마을이 나서서 환송했지만 참전당사자와 가족들은 상사가 난 집 모양으로 울음바다였다.용정시 백금향의 박창묵(67)은 당시 6·25전쟁에 참전한 조선족의 한 사람이다.『나는 국민당군과 싸우다 47년에 부상을 입고 대퇴했수다.그후에 연변 통역학교를 다닐 때에 조선전쟁이 터졌디요.하루는 주장이자 우리 학교 교장인 주덕해동지가 와서 조선전쟁의 준엄한 형세를 이야기하면서 청년들은 국가를 위해 몸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동원을 하데요.총알에 죽을 팔자거니 생각하니 눈앞에 아뜩합데다.우리 학급은 33명인데 여성 6명을 빼고 몽땅 잡혀갔디요.결국 절반이 죽었디만….다행이 지원군에 편입되어 통역을 맡는 통에 살아왔디요.물론 싸움판이었습네다만,안전지대에서는 남한 구경을 하고다녔디요. 마을에 열사증이 내려오면 군인가속들은 잔뜩 긴장해서 촌장과 말다툼하기 일쑤였다.국가를 위해 죽는 것은 영광이요 뭐요 하고 말꼭지를 떼면 개나발을 불지 말고 이름부터 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일단 희생자를 알게 되면 가속들은 기절해 버리고 다른 가속들도 자기의 불행처럼 여겨 통곡을 했다.화룡시 용화향 상화촌에서만도 한국전쟁에 나갔다가 12명이 목숨을 잃었다.이번에 찾아온 화룡시 노과진 노과촌의 김진수(65)는 동해바다 함포사격에 부상을 입고 1952년 9월23일에 붙잡혀 거제도에서 포로로 있다가 정전후 1954년 8월5일 포로 교환에 넘어왔다.포로병을 반역자처럼 대했던만큼 문화대혁명시기까지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고 살아왔다.지금은 매달 소대장급으로 3백50원의 연금을 받고있지만 알코올중독으로 흐리멍텅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남에 떨어져 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괜히 돌아와서 고생을 했수다.부암에서 나와 같이 참전했다가 포로되었던 남원준과 이동준은 한국에 남았었는데 지금 꽤 잘 사는가 봅데다.나한테 편지가 왔댔소.보고 싶다면 보여주갔수다』 ○약혼녀… 다른데 시집가 화룡시 노과진 노과촌의 조창렬(84)노인의 둘째 동생 봉룡(1926년생)은 1945년 중국내전에 참군했다가 용케 살아났으나 한국전쟁에 나가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전사했다.그는 결혼날까지 받아놓고 미처 성례를 이루지 못하고 군에 갔었다.매년 두번씩 오던 편지가 한 이년 끊기더니만 하루는 문득 열사증이 왔다.약혼자가 돌아와 머리를 얹어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미혼녀는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열사증과 함께 무흘금 2백80원을 줍데다.지금은 매달 45원씩의 돈을 부모 대신내가 받고 있디요.동생 목숨 값이라 생각하니 돈을 받아 쥘 때마다 가슴이 미여집네다』 벌써 미수를 바라보는 조창렬노인은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동생의 열사증 앞에서 한숨을 지었다.
  • 항일투사들의 유택(두만강 7백리:7)

    ◎나철·김교헌·서일 선생 묘 새 단장/강양안 마을마다 혁명열사비 우뚝 솟아/한·중수교후 관심 높아져… 모국이장 한창 연길시 사수에서 북쪽 골짜기로 20리가량 올라가노라면 금불동이라는 마을이 있다.이 마을이 등지고 있는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면 자그마한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안에 유달리 깨끗이 가꾼 묘소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묘지속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누구도 그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서 왔으며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길이 없다.다만 숨을 거둘 당시 19살이라는 것과 조선족 항일독립군 젊은 전사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마을에서 연세가 높은 이상헌(79)노인은 그 무명의 젊은 전사가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정황을 소상히 기억했다. 『꼭 쉰 일곱해전 일입네다.뒷산에서 드문이 총소리가 들려오더니만 일본놈들과 자위단들이 어린애 같이 앳된 새파란 청년을 끌고 마을로 들어왔디요.그 놈들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내다 보는 앞에서 청년을 신문합데다.이름을 물으니까 「항일독립군」이라고만 기래요.그 날 왜놈 장교의 군도에 목이 잘려 죽고 말았디요.하도 기막히고 딱해서 유체를 마을 사람들이 묻어주었댔습네다』 ○무명열사 묘지는 쓸쓸 두만강 양안 마을마다 양지 바른 언덕위에는 혁명열사비가 세워졌지만 산 언덕 공동묘지에 임자 없이 쓸쓸히 있는 독립투사들의 묘지는 풍우의 시달림에 자취를 잃었거나 훼손되어 가고 있다.용정시 삼합진 안미대골로 얼마간 들어 가다가 화선 누비골에 있는 묘지앞에는 돌비석 하나가 쓸쓸히 서 있었다고 한다.비석에는 김병덕 지묘라고 씌어있었다.부근 마을 사람들은 독립군 대장의 묘라고 했다.똑같은 항일투사의 묘지이다.하지만 계급투쟁 세월에 그 누군들 감히 돌볼 수가 있었으랴.몇해전 김병덕의 묘지는 파엎어졌고 대리석 비석도 도난을 당했다.오소리가 묘지에 굴을 뚫고 보금자리를 꾸민 것을 발견한 부근의 사람이 묘를 헤치고 오소리를 잡아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 항일열사들의 시신은 일찍 북한으로 이장되었다.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때 친선을 다졌던 터이라 이장이 쉬워 1950년대말에서 60년대 사이에 시신이라도 두만강을 건넜다.이에 비해 한국에 가까운 연고를 둔 항일열사들은 상대적으로 대접이 소홀했다.특히 문화대혁명 당시 항일유적이나 열사들의 묘소가 큰 수모를 겪었다.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오늘날은 사정이 달라져 항일열사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 그 넋이라도 살아서 가장 슬퍼하다가 다시 기뻐했을 열사가 있다면 나철,김교헌,서일 선생일 것이다.한국 대종교의 3종사로,또 항일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이들의 묘소는 화룡시 삼도구 청호촌에 있다.지금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가 항일역사유적지로 지정한데다 한국의 대종교가 묘역을 정화했기 때문에 제법 볼품이 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청산리전투를 총지휘 이 묘역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패거리와 추종자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 수난을 겪었다.비석을 모두 내동댕이 쳐서 청호촌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 댓돌로 쓸 정도였다.문화혁명이 가시고 뜻있는 사람들이 묘비석을 찾아내 세웠지만 김교헌선생의 묘비는 끝내 못찾았다.그래서 몇해전에 묘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대종교는 독립군조직 서로군정서를 만드는데 주역을 담당했고 서안선생은 그 총재로 1920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였다. 지금은 일본인들까지 유골을 찾으려 두만강변의 연변땅을 방문하고 있다.물론 침략자로 두만강을 건넜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얼마전에 한 일본 여인이 용정시 백금향으로 와서 자기의 오빠 묘를 찾았다.묘지 자리를 상세히 그린 지도까지 들고 온 일본 여인을 마을 노인들이 안내했다.묘가 있었다는 장소는 본래 일본 삼림경찰의 묘역이었다.1940년 홍기하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본경찰은 둘 뿐이었다는데 목숨을 살려 평정대 마을까지 이르렀다가 그중 하나가 병으로 죽어 그곳에 묘를 썼던 것이다.그런데 봉분이 사라져서 어방으로 묘자리가 짐작은 가도 딱 짚을 수는 없었다. 독립군 김덕형의사는 웅진,나진 등 두만강 연안의 조선을 다니며 군자금을 모았던 사람이다.1921년 경술년 토벌 때 어느날 저녁 군자금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 북흥에 있는 집으로 들어 왔다가 일본군 토벌대의 포위에 걸려희생되었다.그가 죽은 후 식구들은 군자금을 독립군에 전달할 수 없었다.많은 액수의 군자금은 그 집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다.김덕형의 아들 두 형제는 시름없이 공부를 하였다.광복이 나고 1947년 토지개혁을 하게 되자 생활이 유족했던 그 일가는 청산을 당해 러시아제 금장표 재봉틀마저 빼앗겼다.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던 재봉틀은 얼마전에 고장이 나서 고철로 팔아버렸다.그집 큰 아들은 북한에 들어가 죽고 작은 아들 김성록은 지금 한국에 산다.6·26전쟁 때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혀 북한에 온 김성록은 중국의용군으로 참전했던 북흥의 조선족 친구가 만난 일도 있다.그는 한국군 대좌(대령)군함(계급장)을 달고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정부 보훈처에서는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안화춘 선생의 도움으로 중국내 애국선열들의 묘소를 이장하고 있다.안화춘 선생은 갖은 노고를 아끼지 않고 이 땅을 메주 밟듯 하고 다닌다.이번 두만강 답사길에서 연변 도처에서 희생된 선열들의 자취를 잡을 수 있었다.조창렬노인이 들려준 경신년 대토벌 당시 상황도 그 한토막이다. ○선열들 발자취 곳곳에 부암동에서 독립군 한창준과 이씨가 체포되어 불에 타 죽었댔습니다.시체를 감장하려니 누가 누구인지 가릴 수가 없었디요.일제 놈들은 의병대장 최덕균과 남상윤(남풍수로 불림)선생도 모진 고문을 했다고 기래요.눈에다가 고춧물을 부어 넣고 신문을 했으니끼리 죽을 수 밖에….』 선열들의 비장한 최후는 눈물 없이는 들을수 없었고 일제와 주구들의 만행은 의분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가 흔히 북간도라고 부르는 독립운동의 무대 연변은 이렇듯 많은 항일투쟁의 사연을 안고 있다.나는 옛 용정 대성중학교(현재 용정시 제2중학교)앞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에 새겨진 시 한구절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무수한 선열들처럼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시련이 아닐 수 없다.
  • “재일교포 「반쪽발이」라며 멸시”/귀순 오씨가족 일문일답

    ◎탈북자 늘자 감시·통제 심해져/북 선전에 회의… 아들이 탈출 권유 ­귀순동기는. ▲명선씨=북한에서의 생활은 더이상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특히 자본주의 국가에서 생활해 온 부모들의 영향도 컸으며 남한방송을 듣고 북한의 선전이 거짓이라는 점을 알았다.북송교포라는 신분도 동기로 작용했다. ­탈출을 언제 결심했나. ▲명선씨=탈출은 지난해 8월쯤으로 군생활하다 만난 친구 철만이에게 더 추워지기 전에 가자고 말했다.그러다 그해 9월5일 함경남도 금야로 출장간다며 철만이를 만나 최종결심했다. ­탈출에 어려움은 없었나. ▲오씨=아들이 함경남도로 출장간다고 집을 비운뒤 한달간 나타나지 않자 안전부 보위부등에서 아들의 행방을 조사했으나 평소 내가 당에 열성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러다 아들이 탈출을 권유해 주저하지 않고 감행했다. ­고향출신인 여만철씨의 탈출소식은 알고 있었나. ▲명선씨=보위부등에서 흘러나와 알았다.고향의 대부분 사람들은 여씨가 남한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에 잘됐다는 반응이었다.그러나 그후부터 주민을 감시하는 인민반등을 통해 감시가 철저해 졌고 규율도 엄격했다. ­김일성의 사망때 주민들이 정말 슬퍼했나. ▲명선씨=북한에서는 자기감정을 제대로 표현할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마음속을 알수 없다.개인적으로는 죽었다는 말이 정말인지,거짓인지도 모르겠고 슬픈지 기쁜지도 몰랐다.다만 공장에서는 집단적으로 꽃다발을 준비해 동상앞에 찾아가 시키는대로 엎드려 절한 것으로 안다. ­북한에도 세대차이가 있나. ▲철만씨=큰 차이는 잘 모르겠다.다만 늙은이들은 일제시대를 거쳐 자본주의를 알고 있어 인생에 대한 회의로 가득차 있다는 느낌이었다. ­탈출 소감은. ▲초미씨=땅에 떨어져도 흙이 묻지 않는다고 거짓선전에 속아 살아온 북한생활은 다시 떠올리기 싫다.탈출한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다. ◎작년 12월29일 새벽 압록강 도착/기다리던 밀항 나타나자 “살았다”/긴장의 탈출 순간 『걸리면 마지막이다』 가난과 굶주림,「반쪽발이(재일교포출신)」라는 멸시속에서 삶을 연명하다 북을 탈출한오수룡씨 가족들은 탈출을 감행하던 순간의 긴장감을 이 한마디로 대신했다. 지난해 12월29일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인 새벽 5시50분쯤 오씨 일가족 5명은 평북 신의주시 압록강변 갈대숲을 숨을 죽이며 헤쳐나갔다. 오씨 아들 명선씨는 큰딸 인화(4)를 업고 둘째 딸 수화(2)를 안은 아버지와 어머니 김초미씨를 인도했다. 명선씨는 이미 3개월전인 9월17일 친구 박철만씨와 함께 압록강을 자동차 튜브를 이용,압록강을 건너갔다가 부모님을 모시러 3개월여만에 죽음의 땅을 다시 넘었던 것이다. 명선씨는 북의 생활은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품어오다 군대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철만씨가 같은해 9월5일 함남에서 장사차 자기 집에 들르자 탈출 결심을 털어놓았다. 철만씨는 명선씨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함남에 있는 부모와 처자식 걱정에 명선씨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민하다 다음날 꿈도 희망도 없는 북한땅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 명선씨는 함흥으로 출장간다는 핑계를 대고 철만씨와 함께 같은달 17일 어둠을 틈타 내의와 양복·구두를비닐봉투에 넣고 자동차튜브를 이용,압록강을 건너 중국 단동에 이르렀다. 『중국말도 못하는데다 수상한 사람으로 오인받을 것을 우려,잠도 자지않고 거닐었지요』 그후 명선씨는 하얼빈·대련등을 전전하다 친절한 조선족 사람을 만나 그 의 도움으로 생활하다 부모님을 자유의 품으로 모셔올 계획을 세웠다고 회상했다. 명선씨는 밀선을 타고 부모님이 계시는 신의주 집에 몰래 숨어들어 『고향으로 가고픈 한을 풀자』면서 부모님과 떠날 시각을 정한뒤 이웃들의 눈을 피해 다른 곳에서 쉬다 부모와 합류,목숨을 건 탈출길에 나선 것이다. 이때 오씨의 가족들은 산책하듯이 집을 나섰다. 막상 명선씨가 가족을 데리고 약속장소에 도착했을때 기다려야 했던 밀선은 보이지 않았다.명선씨는 강으로 뛰어들어 배를 찾았다.10분쯤 지나자 밀선이 나타났다. 『밀선이 우리쪽으로 오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군요.그때 다 죽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명선씨는 방향을 틀어 오던 배를 오해한 것이었다. 명선씨 일행을 태운 배에 지옥의 땅을 뒤로하고 살을 에는듯한 추위속에서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져 나갔다.
  • 중국산 히로뽕원료 3백㎏ 밀수/7백만명에 투약 가능…선원등 넷구속

    ◎「반제품」 들여온 4명도 함께 중국산 히로뽕 제조원료인 염산 에페드린과 히로뽕 반제품을 대량으로 몰래 들여온 밀수입업자 8명과 히로뽕 투약사범 9명 등 모두 17명이 검찰에 무더기로 적발돼 14명이 구속됐다. 서울지검 강력부(김승년 부장검사)는 31일 7백만명에게 투약 가능한 히로뽕 완제품 2백10㎏(도매시가 1천억원 상당)을 제조할 수 있는 분량의 히로뽕 원료 염산에페드린 3백㎏을 중국에서 밀수한 우미오(40·선원·부산 영도구 영선동 2가)씨 등 4명과 히로뽕 반제품 15㎏을 들여온 선원 박영길(44)씨 등 4명을 향정신성 의약품관리법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우씨는 94년 12월 중국 위해항에서 제약회사로부터 유출된 염산에페드린 3백㎏을 조선족의 소개로 구입한뒤 중국선박에 싣고 서해 소흑산도 북방 7마일 해상에서 이른바 「해상박치기」수법으로 한패인 김종한(49·구속)씨가 몰고온 배에 옮겨 싣고 부산 영도항에 입항,금정구 남산동 전상민(31·구속)씨 집에 숨긴 혐의를 받고 있다.
  • 혈육의 정/연변은 남북이산가족 “만남의 장소”(두만강 7백리:6)

    ◎거의 조선족이 알선… 70년대부터 재회 급증/한달간 머물며 “못다한 정”나누고 여행도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허리가 잘려 두 동강이 난 고국 어느쪽의 혈육이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다.남북의 혈육들이 이념적 갈등 때문에 고국땅에서 서로 만날 수 없는 현실과 대조를 이룬다고나 할까.조선족들의 이런 처지는 남북으로 갈라진 혈연들의 상봉을 주선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속된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에 조선족들이 끼어들게 마련인 것이다. ○문혁이전엔 엄두 못내 그러나 남북 혈연들의 상봉을 주선하기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문화혁명 이전에는 상봉을 주선하기는 커녕 조선족 자신들조차도 남한에 혈연,특히 이름깨나 난 혈연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었다.문화혁명 당시에는 이런 꼬투리만 잡혀도 호된 투쟁을 받았다.남한에 혈연을 둔 것도 죄가되어 실제 곤욕을 치른 조선족들도 많다. 용정시 백금향에 들렀을 때 백금발전소 최몽필 문화잠장으로부터 생소한 이야기를 들었다.지금은 고인이 된 박정희 대통령의 6촌 계수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발전소에 살면서 좀 떨어진 향 소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밥을 지어준다는 그 여인의 이름은 윤순옥(64).막상 만났더니 오랜 고생 탓인지는 몰라도 노쇠한 그늘이 역역했다. 그녀는 24살이 되던 해에 12살이나 더 먹은 박용태(함북 길주군 태생으로 72년 작고)의 후실로 들어왔다.후취 장가를 들 무렵 3살난 아들이 있었다.박용태의 부친은 박관일,박관세,박관선 3형제였는데 그녀의 주장대로라면 박정희 대통령과 5촌이 되는 사람들이다.보학도 배우지 않았거니와 족보도 확인하지도 못한 나로서 그렇다 아니다를 논할 처지는 못 되지만,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방송국에 편지 부탁 그녀의 말에 따르면 박용태는 박정희 대통령과 군관학교 정문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관하고 있었다.신사복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형제분이 찍은 사진이었다.밤이면 이불 속에서 사진을 보이면서 박정희라고 이야기 할 때 그녀는 모골이 송연했다.그때만 해도 적국의 대통령과 인척관계가 된다는 사실만이라도 감옥 밥을 무던히 먹을 죄였던 것이다.벽에 걸어둔사진틀 뒤에 몰래 보관하고 집식구들끼리만 돌려 보곤 했다. 그러다가 문화혁명 시기에 우연히 사진이 치보주임 최홍운씨의 눈에 띄었다.최 주임은 박정희라는 것은 몰랐지만 해방전 박용태의 신사복차림을 보고는 소각해버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귀띔해 주었다.그러나 박씨는 사진을 농속에 깊숙히 감추어 두었다.만약 당시 최주임이 고자질을 했더라면 박정희와의 관계는 뒤로 제쳐놓고도 투쟁을 받았을 것이다.1972년 박씨가 세상을 뜨자 사진을 불살라버렸다. 한중수교가 이루어 진 후 일가 친척 없이 고독하게 살아온 그녀는 한국 KBS사회교육방송국에 친척을 찾아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냈다.그런데 박정희 대통령과 친척이라고 선을 달아 줄 것을 요구한 편지가 꽤나 된다면서 그녀의 혈육을 찾는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주지는 못했다.사회교육방송국에서 종종 보내온 책자와 편지를 지금도 보배처럼 보관중인 그녀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아쉬움이 많다. 『령감은 고생만 하다 너무 일찍 가셨디요.기런 북새통을 살다보니 박대통령 사진도 못 남겼수다.다가저의 불찰이디요.저는 박씨 가문에 들어온 사람이라 남이라면 남일테지만….자식들한테 혈육도 모르고 지내게 하는 거이 가슴 아픕네다』 그러나 두만강을 사이 두고 한동안 친선을 유지해온 중국과 북한은 사정이 달라 혈육간의 왕래가 비교적 잦았다.용정시 대소과수농장의 방승섭(68)은 여기서 김일성주석으로 호칭하는 그의 처형 아들이었다.다시 말하면 김일성주석의 본처 김정숙의 언니가 바로 방승섭의 모친이다.70년대 초 두 나라 정부에서 교섭하여 방승섭부부,어머니,두 아들과 딸하나를 데려갔다.1986년 대소과수농장의 관치성농장장은 조선을 방문하는 기회에 청진시 칠세대에 사는 방씨 댁을 찾아갔다.고향 사람을 만났다고 후한 접대를 해주었다.방씨 부인은 3년 전에 대소과수농장을 찾아온 적도 있다. 용정시 지신(일제시기 화룡현 다라즈)의 출신이고 항일투쟁에 차가했다가 현재 조선인민군에서 장군이 된 김광협의 친척들은 50년대와 60년대에 북한으로 이주했다.김광협의 7촌 조카 김상호는 1946년 참군하여 조선으로 나간 후 소련 유학을 하고돌아와 조선인민군 공군 부사령이 되었다고 한다.김상호는 어머니와 일가친척을 모두 모셔갔다. 연변에 살던 김광협의 친척들은 소작농으로 가정 살림이 째지게 가난했다.세발의 막대를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살림인지라 김광협의 동생은 한쪽 눈이 먼 여성을 아내로 맞았다.동생 일가가 평양에 도착하던 날 김광협은 처 유명옥과 함께 역으로 마중을 나왔다.제수를 보는 그의 마음은 참 딱했을 것이다.그런만큼 그는 제수를 끔찍히도 아꼈다고 한다.순 농군으로부터 국가 간부가 된 동생은 처하고 불화했는데 그 일 때문에 형님한테서 모진 꾸지람을 들은 다음부터 가정화목을 지켰다는 것이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 노인들의 이야기다. 김광협의 6촌 형님 김병협은 북흥촌 이기희씨의 고모부이다.그 이씨가 회령 사탕공장에 있을때 들었다는 이야기는 김광협 일가의 생활상을 짐작케 한다. 『그러네까 64년도 일입네다.김광협 6촌형의 딸,내게는 고종사촌 되는 누이가 두만강을 건너 평양 갔다 오는 걸음에 우리집에 들렸댔습네다.그 고종4촌 말이 김광협 집 앞대문엔 보초가 다섯이나 서 있더라고 기래요.삼촌을 집에 모신 김광협은 아침 문안을 꼭 드리고 식사도 독상을 대접하더랍데다.김광협은 식구들과 식당칸에서 밥을 먹으면서 요리가 나오면 모처럼 온 조카딸에게 연신 넘겨주었다는 거디요.조카딸도 화룡영화관 해설질을 하던 남편과 함께 나중에 평양으로 불러들였디요』 ○남북 오누이 극적 상봉 그러한 북한과의 일변도 왕래가 변화를 일으켜 딴판을 맞고있다.중국의 조선족은 이념의 벽을 뛰어넘어 남쪽의 혈육과도 정을 통하게 되었다.두만강을 훌쩍 건너는 것보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우회하는 먼거리에 남한이 있을지라도 무척 가까워졌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의 일이다.중국 조선족 한 분은 북과 남에 사촌형제들이 있다.그해 북에 건너가 4촌 여동생한테 남에 사는 형한테서 온 편지를 전했다.편지를 받아쥔 여동생은 흐느껴 울었다.얼마나 그립던 오빠였던가!여동생의 남편은 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되어 남으로 밀고 내려갔다. 그분은 얼마있다가 남한의 사촌형님 집으로 갔다.형을 만난 그는 깜짝 놀랐다.형님이 앞을 못보는 장님이 되었던 것이다.6·25전쟁 당시 국군에 있었던 형은 어느 한 전투에서 인민군의 총에 맞아 소경이 되었다는 것이다.어찌 보면 매부의 총에 부상을 입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타의에 의해 혈육간에 살생을 해온 우리 민족처럼 뼈에 사무치는 한을 가진 민족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분은 여동생과 형님이 중국에서 만나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그러자 형님은 『소경인 내가 볼수도 없는 신세이고 만나면 여동생한테 서러움만 더 줄것이니 친척 동생더러 대신 가서 만나라』고 했다.결국 친 오누이의 만남은 무산되었지만 다른 혈육이 중국에서 뜻깊은 눈물의 상봉을 가졌다.그들은 만 한달간 한 집에 머물면서 한 많은 회포를 풀었다.그래서 두만강가는 이래저래 눈물 마를 날이 없는 모양이다.
  • 가고 온 사람들(두만강 7백리:5)

    ◎광복­6·25이후­문혁때 귀향 줄이어/60년대말까지 쉽게 도강… 65% 다시 연변에/“지금은 갈수 없는 땅”강 건너 바라보며 눈물 ○보따리 이고 강 건너 끼룩 끼룩 끼루룩…. 한떼의 기러기가 일찍 얼음이 녹은 강 한구석을 박차고 북한땅을 멀리 돌아 날아간다.걸음을 멈추고 강 건너 마을을 바라보았다.한낱 짐승들도 자유로이 넘나드는 강.그렇지 못한 우리에게 두만강은 늘 한을 던져준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옛날 선조들이 불렀다는 「월강곡」을 되뇌어 보았다.나라의 독립을 위해 개척민에 뽑혀 산길을 찾아 나선 선조들은 밀물처럼 강을 건너왔다.그리고 또 광복 후 이주 당사자들과 후손들은 고국이 그리워 피땀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다시 강을 되건너 썰물같이 대거 고국으로 돌아갔다. 첫번째 귀향은 광복 당시였다.일제의 말발굽에 짓밟혔던 나라가 독립을 맞자 조선족들은 보따리를 싸지고 두만강을 건넜다.당시 귀향민들은 두가지 부류다.대부분의 사람들은조상들이 묻힌 땅을 찾아 귀향했다.어떤 사람들은 북한의 고향을 찾았지만 살수가 없어 이남으로 곧장 월남했다.광복이 되자 연변과 북한의 공산당 정부는 일제주구 청산부터 시작했다.훈춘의 대지주이고 대동아전쟁때 비행기를 헌납하고 동경에 가서 천황의 접견을 받은 한희삼은 물론 다른 지주와 친일파들은 처단 당했다.항일부대 토벌에 공로가 있는 용정의 박도끼는 북한으로 도망가서 숨어 있다가 청진에서 잡혀 총살당했다고 한다. 화룡현 신선대 대장 김일로는 일제가 연길공원에 동상까지 만들어 세웠던 김동환 다음으로 가는 주구였다.1940년 3월25일 일본인 산림경찰대장과 함께 자기의 병졸들을 휘몰아 독립군을 추격하다가 홍기하에서 매복습격을 받아 1백20여명의 졸개를 잃었다.김일로도 졸개들을 호령하다가 벌린 입으로 탄알이 꿰뚫고 지나갔지만 요행히 목숨은 건졌다.이남으로 건너간 그는 여생을 편히 보내다가 수원에서 일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번째 대 귀향은 1956년부터 1962년까지였다.한국전쟁(6·25)이후의 일인데 전후복구 지원을 위해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들어갔던 것이다.화룡시 용화향 상화촌에서만도 49호가 나갔다.그리고 인민공사가 시작되면서 굶어 죽게 되자 다시 살길을 찾아 북으로 건너갔다.용정시 삼합진 북흥촌의 최태경 일가는 19 62년에 함경북도 연사군으로 이사했다.최씨의 막내 딸 최해옥은 연사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중 5학년 때 평양으로 뽑혀갔는데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서 「꽃파는 처녀」에서 주인공 꽃분이 역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인재들이 많이 갔다.중국에서의 반우파투쟁이 지식인들을 잡는 운동이나 다름이 없고 민족심을 가진 사람들은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되는 판국이라 떠나들 갔다.유명한 시인 주선우,작곡가 정진옥,소설가 김동구,아동문학가 채택룡 등 문학예술계 인사들도 떠나갔다.용정시 삼합향 승적 신재룡은 길림성 공업학원 학생이고 축구를 잘 했다.지금 그는 조선체육대 교수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너왔다 도로 가고 용정시 삼합향 북흥촌 이기희(54)는 연변대학을 다니다가 2학년 때인 1961년 7월 북한에 들어가 만 6년을 살고 다시 돌아왔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북한에 살다가 다시 연변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다. 『당시 회령의 사탕공장건설은 연변에서 건너간 귀향민이 대부분이였댔습니다.나는 대학을 다니던 사람이라 공무직장에 배치 받았디요.직장장의 이름을 딴 김희진작업반에 배치합데다.그때 국가 철도상이자 함북도 건설사업소 소장으로 파견나왔던 김주봉이 하루는 우리 공장에 와서 연설을 하면서 「중국에서 하루에 백오십명씩 건너오고 또 매일 백여명씩 되넘어갑니다.조국에 왔으면 참답게 살아야지 이것이 뭡니까」라고 비판을 했디.어떤 날 출근하면 많은 사람이 없어집데다.알아보면 중국으로 돌아간거디요.67년 7월에 나도 가정을 데리고 도강을 했으니 아마 이튿날 내 자리가 비어 야단이었을 것이 뻔합데다.이북으로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중국에서는 호구를 붙여주지 않다가 67년 9월 정부에서 한꺼번에 복적시켰댔시요』 세번째 귀향은 문화대혁명시기이다.용정시 대소과수농장만 해도 항일에 참가했던 사람들 70여명 모두가 귀순 분자로 투쟁을 맞았으니 2백50호 중에 70호가 적이된 셈이었다.그중 10여호가 북한으로 도망갔다.용정시 백금향 백금촌 차덕균은 일제시기 동경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다.일본에서 공부한 사실이 간첩조건이 되어 투쟁을 맞았다.모진 매를 견디다 못해 온 가족이 북한으로 갔는데 떠나던 날 큰 딸이 친척 집에 가고 없어서 두고 간것이 생이별이 되었다. 용정시 개산툰진 선구촌 사이섬에서 총 사격을 받고 수백명이 종성으로 집체도주 한 일이 대표적 사건이다.선구촌 문영기(54)씨도 그 사건에 끼었던 한사람이다.캉다(강대)요 홍색이요 하는 조직간에 말로하던 시비질이 주먹질,돌팔매질,몽둥이 싸움으로 번졌다. ○“북에 남아라”만류도 1967년7월29일 연길 캉다에서 개산툰에 와 개산툰 캉다와 합세하여 홍색을 쳤다.싸움은 공장울안에서 일어났는데 쌍방은 돌멩이를 던지고 창으로 찔렀다.홍색에서는 열세에 몰리자 해관의 총을 내다 불질을 해댔다.캉다패들은 결국 선구 대안 두만강 복판 사이섬으로 쫓겨나고 말았다.8월2일 홍색은 사이섬을 포위하고 투항하라고 공포를 놓았는데 총소리를 들은 북한땅 종성 사람들이 강변으로 나와 어서 건너오라고 소리를 쳤다.3백여명이 모조리 강을 건너갔으나 여자 하나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북한에서는 대우를 제법 해주었다.그러면서 돌아가면 잘못 된다고 북한에 남으라는 선전을 했지만 몇사람 이외에 모두가 두달 후 되돌아왔다.주모자들은 감옥에 들어가 1년씩 구류를 사는 것으로 그쳤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당시의 일들이 억울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그때 북한으로 건너가 거주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와서 손해배상을 받아갔다.용정시 삼합진 승지촌 김광진은 지방 자위단에 있었다는 죄로 투쟁을 당하다 죽었다.그래서 온 가정이 야간 도주하여 회령으로 건너갔다가 지난 92년에 아들 김상연이 와서 용정시 민정국에 상소,3만원(인민폐)을 보상받았다고 한다. 현재 화룡시 덕화진 남평촌의 내 숙부(유인상·77)는 낮이면 두만강가에 나가 건너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지으시기 일쑤다.내 고모가 60년도에 조선 청진으로 간 이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조카들은 60년대 초에 다녀갔고 몇해전까지는 편지라도 오갔는데 벌써 5년째 소식조차 모르고 있다.앞길이 멀지 않은 숙부는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부친(유민상·84년 별세)께서도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말끝마다 외우시다가 한많은 세상을 뜨셨다.
  • 고난의 시절/대약진 운동·문혁때 갖은 고초(두만강 7백리:4)

    ◎1957년 대약진/조선족 농토 모두 국유화… 군사훈련 시켜/1966년 문혁/5만여 동포 간첩·반혁명분자 몰아 고문 고난의 시대와 오늘 요즘 연변의 향진 일선 간부들은 저녁이면 술에 곤죽이 되어 돌아온다.그리고는 아침에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출근하기가 일쑤여서 위와 간을 버렸다고 한다.그 이유는 상부에서 지시는 내려오고 농민들은 치받아 중간에서 농민들을 달래느라 술을 마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래서 간부질(노릇)하려면 술재간을 키워야한다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런 것이 모두 세월 탓이다.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간부들에게 대든다는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화룡시 남평진 유신촌에 사는 유택모(68)노인은 요새 간부들을 미더워 하면서 개혁개방의 시대에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 ○개혁시대 보람 느끼며 『간부들도 우리네 사정을 알고 위에는 슬슬 거짓말도 하는것 같습데다.우리에게 이롭게 하자는 거디요.고생 끝에 낙이라고 좋은 세월이야요.그리고 등소평 동지는 정말로 감사한 분이십네다.개혁개방을 하니 얼마나 좋습네까.문화혁명 때에 가을을 해도 두달씩 했고 온 하루 뼈 빠지게 일 해도 5전(벼 한근이 9전이였다)수입이였디요.보리고개를 넘기 바쁘게 식량이 떨어지고….도거리(땅을 개인한테 나누어 줌을 이르는 말)를 하니 일년내내 하던 일도 세네달이면 되고 산량이 많이 나고 정말 옛날 지주보다도 훨씬 잘살게 됐디뭡네까.농한기면 버섯이며 약재들을 캐서 팔아 목돈을 쥐기도 하디요.작년에 송이를 따서 열흘 사이에 큰 돈을 벌었다구요.문화혁명땐 자본주의 복벽을 방지한다고 버섯은 고사하고 닭알 한알 팔지 못하게 했으니 원…』 그러나 불모지를 가꾸어 먹고 살만하게 된 조선족 들에게 지난날 불행은 크게 두번 찾아왔다.중국의 조선족들이 못자리판을 이룬 연변에서 「대약진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57년이다.이 때에 간부들은 요즘과 같은 선의의 거짓말이 아닌 진짜 거짓말을 식은죽 떠 먹듯 내뱉았다.모든 개인의 재산을 국유화하면서 3년안에 영국을 따라잡는 다고 말대포를 펑펑 쏘아댔다.그 거짓말을 참말로 알아들은 연변 사람들은 몇년 후 차를 사게 되면누가 운전을 할 것이냐를 너나 없이 걱정할 정도였다.꿈도 참 야무졌다. 대약진 운동에 따라 향을 인민공사,촌을 대대,자연부락을 소대로 조직했다.또 농민군사화를 위해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온 마을이 집체식당에서 끼니를 꾸렸다.당시 생활은 집체화여서 먹는 것은 물론 잠자리 까지도 합숙화를 시도했다.농기구의 기계화 명목으로 손수레 바퀴축에 마구잡이로 베어링을 넣었다.제대로 굴러갈 턱이 없었는데,약진운동은 마치 그 손수레 같은 것이었다. 화룡시 덕화진 천중백(65)노인이 회고하는 당시 연변 농촌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수운 꼴이 많다.그러나 어디 웃음인들 웃을 여력이 있었겠는가….하여튼 그 절박했던 어려운 시절의 사연을 귀담아 들어 보았다. 『하루 진종일 일을 하고도 밤이 이슥해야 잠을 잤디요.밤에는 학습과 논쟁(토론)을 하라고 기래요.눈을 비비면 새벽부터 군사훈련을 시켰댔는데,농촌사람들이 제대로 할리 만무 아닙네까.아 글쎄 「우로 돌앗」하면 오른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꾸만 위켠으로 돌아 두만강을 향합데다.훈련 받는데서 보면 위켠에 두만강이 있었댓시요.기리니끼리 농사일도 안되고….해봤자 내 일이 아니니까 건성건성이었디요.그런데 명령은 주살나게 떨어져 정신차릴 틈도 없습디다』 ○“3년내 영추월”외쳐 대약진 운동은 허상에 불과했다.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위에서 농사땅 깊이갈이(심경)를 명령하면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한 곡식을 그대로 둔채 흙을 덮어버렸다.그리고 나서 다음해 씨앗을 뿌리면 곡식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땅속에 썩지도 않은 콩대 등이 그대로 깔려있으니 흙이 들떠 곡식이 자랄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보고는 늘 전량 완수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위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맞장구를 쳤다.깊이갈이를 해서 1㏊당 36만근의 수확은 거뜬할 것이라는 맞장구였다.36만근이 수확기에 가서는 결국 1만근도 안되게 줄지만,콩꼬투리 하나 남기지 않고 실어가버렸다.먹을 양식이 남지 않았다.그래서 이삭이라도 주워올까 하면,또 명령이 떨어졌다.발갈이요,추비요 하고 다그쳐 제것이라고는 곡식 한톨 가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1966년 5월부터 대륙을 휩쓸어 버린 이른바 문화대혁명은 「대약진 운동」을 뺨쳤다.연변에서 문화대혁명 당시 반혁명분자,간첩,우파,지주,부농,나쁜 분자,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반동적 지식분자 등의 혐의로 투쟁을 받은 사람은 무려 5만여명이었다.간부,인테리는 모두 투쟁 대상이었다.외국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거나 편지거래가 있었다면 간첩이고 심지어는 말 한마디 잘못해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용정시 삼합진 북흥의 한인수는 사람들이 목에다가 충(모택동한테 충성한다는 뜻으로 심장을 상징하는 복숭아형 빨간 판에 충자를 쓴 패쪽)자를 메고 다니는 것을 보고 『병아리 잡아 먹는 개처럼 패쪽은 왜 메고 다니는가』라고 해서 반년동안 투쟁을 당했다.그리고 한 무식한 할머니는 모택동의 어록「최저한도의 지식분자」를 「쇠좃 한동이」로 잘못 알고 외우다 1년동안을 욕보았다.한어를 모르는 송석봉은 모두들 한어로 구호를 부르는데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가 엉겁결에 『나두…』하고 한마디 외쳤다가 한달동안 끌려다녔다.송석봉의 별명은 지금도「나두」다. 투쟁수단의 가혹정도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매는 약과,납을 녹여서 먹이고 쇠를 달구어 물리고 널판에 못을 박고 그 위로 걷게하고 온돌방에 가두어놓고 물 한모금 안주고 불을 때서 데우는 등의 고금 고문수단이 총동원 되었다. ○자살하는 사람 속출 용정시 대소과수농장의 조창선은 불찜질을 당한 그날 밤 두만강 건너 벼랑밑에 가서 목을 매고 자살했다.시체가 발견되었는데도 죽은 사람의 허리띠가 조선 상표가 붙은 것이라는 것을 트집잡아 중국 사람이 아니라고 못가져 오게 했다.결국 조선에 사는 친척들이 매장을 했다.지금도 묘는 강 건너에 있다. 문혁 당시 주도권을 잡고 사람잡이에 날뛴 사람은 대개 일자무식의 농민,노동자,군인이었다.그들은 노농병선전대라는 이름으로 농촌과 도시의 공장과 직장을 쥐고 흔들었다. 그들의 무지의 실례가 하나 있다.당시 소수민족의 언어를 한어화하였는데 조선말도 한어를 기준으로 고쳤다.연변인민출판사로 들어온 노동자선전대는 조선말 고유어를 한어로 고치는데 요일도 한어화 하여 성기로 고칠것을 주장하고 나섰다.요일이 성기로 되면 월요일은 성기일,화요일은 성기이,일요일(성기일)은 또 월요일과 똑같은 성기일이 될것인데 어떻게 가를 것인가 하는 문제에 걸려 결국 포기되었다.만약 이런 걸림돌이 없었더라면 문화혁명 10년동안의 3천6백55일은 모두 성기로 변했을 것이다.
  • 골동품 수집 붐(두만강 7백리:3)

    ◎“한국인에 팔면 큰돈 번다”달려들어/연변주변엔 고대유물·발해고분 널려/달러 갖고 강 건너가 북 유물 밀반출도 화룡에서 숭선까지는 90㎞가 떨어졌다.노과진에 이르고 나서부터 국도는 두만강을 따라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다.가면서 오른쪽은 절벽이요 왼쪽은 두만강인데 벼랑 중간 못미쳐서 펌프물을 자아내듯 하는 작은 폭포가 조용히 떨어지고 있다.얼핏 보기에 엉덩이를 길쪽에 돌려대고 소변을 보는 형상이다.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이 절벽을 외설스럽게 개 무슨바위라고 불러왔다.그러나 요즘은 그냥 개바위라는 점잖은 이름을 붙여놓았다. 1993년8월 이 바위 밑으로 국도를 낼 때 세개의 완전한 공룡화석을 발견했다고 한다.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먼 옛날 연변땅에 털코끼리가 산 것으로 되어 있다.그런만큼 공룡화석 발견은 고고학연구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됨직한 일이었다.그 공룡화석이 숭선진 남석촌 최진을씨한테 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연변박물관에서 팔라고 해도 한국사람한테 비싼 값으로 팔기 위해 거절했다는 이야기와 함께….나는 물어물어 최씨를 찾아갔다. 최씨는 뒤울안에서 허름한 종이상자를 들고 나오더니 그 속에서 공룡이빨화석 한조와 턱뼈 하나를 꺼내 보였다.이빨의 길이는 40㎝,너비는 10㎝,높이가 15㎝이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밭고랑같이 패어들었다.두 이빨 사이 거리는 40㎝정도였다니 주둥이의 크기가 한아름이 실했을 것이다.턱뼈는 너비가 15㎝,길이가 22㎝,굵기가 7㎝나 됐으나 완전하지 못했다. 『이나마 건진 거이 다행입네다.도로 일꾼들이 막무가내 바수어대는 걸 빼앗아왔디요.큰 일을 치를 뻔했수다.일꾼들 말을 들으면 애초 크기는 10m가 넘었다고 기래요.허리가 휘유둠한 거이 똑 올챙이 같았다고 합데다』 ○공룡이빨 소중히 보관 최씨가 공룡화석을 발견했다는 전갈을 듣고 도로 작업현장에 달려갔을 무렵에는 이미 화석이 몇 동강 박살이 난 뒤였다는 것이다.뼈를 가루내어 먹으면 만병통치라는 말에 공룡화석은 해머로 맞고 불에 그을리기를 여러 차례.그렇게 서너시간 수난을 겪었다.최씨는 가까스로 턱뼈 일부와 이빨 몇점을 건졌다.그런데 최씨는 이화석을 한국인 골동품상에 팔면 큰 돈을 번다는 확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연변 도처에서는 석기시대 돌도끼·돌자귀 등으로부터 철기시대 유물,그리고 발해시대 유물들을 주워올 수 있었다.내가 태어나 22년을 살아온 화룡시 서성진 북대촌에는 발해시기 무덤들이 수없이 많았다.70년대초까지만 해도 발해 선조들의 해골이 대굴대굴 굴러다녔고 도자기며 동거울이며 장식품들이 발길에 차일 정도였다.화룡시 용화향 상화촌 유인철이란 사람이 자연보석구슬을 얻었다.유리알처럼 투명한데 하늘에 대고 보면 기와집 앞으로 강이 나타난다.빙빙 돌리면 강물이 흐르고 돌리는 속도가 빠를수록 물살이 세찼다.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잃어버렸는데 아마 두만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떨어뜨린 것 같다고 했다. 상화촌에서는 갑옷을 주워왔는데 그때 공교롭게도 마을에 병이 성했다.노인들이 갑옷을 파왔기 때문에 옛 장수가 노하여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해서 점쟁이를 불러다 방책을 하고 갑옷을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상화촌 허정윤(64)노인은 돼지우리를 짓느라 돌각담을 파헤치다가 석기를 발견했다.돌이 좋은지라 숫돌로 썼는데 물에 숫돌을 넣으면 「웅…」하고 벌이 이사하는 소리를 내더란다.유물들이 큰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올해 찾아보았더니 없어졌다고 아쉬워했다.역사유물에 대해 이만큼이라도 깨닫게 해준 것은 한국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중 수교뒤 붐 일어 1992년부터 한국의 골동품 장사꾼들은 중국대륙을 휩쓸고 다니며 골동품에 대한 계몽운동을 일으켰다고 할까….옷보따리를 꿍쳐메고 두만강을 건너가 명태며 오징어며를 힘겹게 지고 가서 팔던 일부 조선족은 골동품을 밀수하기 시작했다.강건너 북한땅 민간에 수장되어 있는 오랜 병풍이며 도자기며 심지어는 장롱 따위도 들여왔다.그리고 나서 고려 청자·조선 백자·고서화 등이 한국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어떤 한국인은 호주머니를 두둑히 채워와서 조선족을 도와준답시고 자금을 대주기도 한다.자금이 많든 적든 한국인이 돈을 대고 중국 조선족이 몸을 던지게 마련이다.돈을 받은 조선족 선봉장들은 달러를 가지고 강을 건너가서는 골동품을 사온다.이런 물건들은 야밤 두만강 도하작전으로 옮겨지기도 하지만 통 크게도 백주에 해관을 통해 운반되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한국의 G실업(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13 D빌딩) 대표라는 김모씨(43)는 19 94년 벽두부터 연변을 넘나든 한국의 골동품상인.그의 말에는 미더운 구석이 하나도 없다. 『벌써 20여년간 골동품과 벗해 살아왔다구.한국에서 나만큼 골동품을 잘 아는 사람도 드물다고 봐야겠지.몇해전에 우리 집에 도난사건이 나 귀중한 골동품 40점을 잃어버렸다구.그 다음부터 골동품과 멀리 했었어.이번에 다시 시작한 것은 국회의원으로 계시는 우리 신우형님의 정치자금 때문이지 뭐야.김영삼 대통령이 실명제를 실시하면서 정치인들이 곤경에 빠졌어.골동품으로 차기 국회의원 선거비자금을 마련해야 할 상황이라구』 ○일본경유 대거 유입 골동품 장사꾼들은 대개 사기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연길시 하남가의 한 사람은 북조선으로 친척방문을 갔다가 조선시대 백자를 사왔다.그런데 한국인한테 팔려고 감정을 해보니 한국에서 요새 만든 물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골동품 붐이 일자 한국의 골동품 장사꾼들이 가짜를 만들어 일본을 경유하여 북한으로 보내 중국에 팔았다는 것이다.가짜가 어찌나 횡행하였든지 세계적 명품의 바이올린도 연변에 3개나 굴러다녔다. 하여튼 골동품 붐은 한국인,중국 조선족,북한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갈등과 반목을 몰고오고 있다.
  • 외국 농업인력 수입 검토/인력난 축·수산업 투입

    ◎농림수산부/중국 조선족 위주로 선발 정부는 농업분야에서도 외국의 인력을 산업기술연수생 형식으로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농림수산부 관계자는 8일 『농촌의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현재 주어소제조업체에서 활용하는 산업기술 연수생의 형태로 외국의 인력을 들여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수입할 경우 농번기와 농한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벼나 채소 농사보다는 축산이나 도축장·수산 등 연중 작업이 가능한 분야에 활용할 계획』이라며 『농·수·축협 및 양돈협회 등을 통해 업계 및 농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파악한 뒤 수입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수요가 많을 경우 수입의 규모와 방법 및 시기등을 법무부 및 노동부 등의 관계부처와 협의할 계획이다. 농림수산부느 주로 동남아 국가의 인력을 활용하는 일반 제조업체와 달리 말이 잘 통하고 농작업의 형태가 우리와 비슷한 중국의 조선족을 활용할 방침이다. 한편 농림수산 분야의 취어자는 지난 83년 4백31만5천명에서 93년 2백84만5천명으로 10년사이 1백47만명(34.1%)이 줄었으며,오는 98년에는 2백29만명으로 줄 전망이다. 또 취업인구 중 60세 이상의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중도 93년 31%에서 98년에는 32%로,2004년에는 40%로 계속 높아져 농업의 생산성이 떨어질 전망이다. 현행 산업기술 연수생의 체류 기간은 1년이며,1년을 연장할 수 있다. 지난해 중소제조업체에 3만명이 베정됐으며 이중 지난 연말까지 1만8천8백16명이 입국했다.
  • 강사이 오가던 인정(두만강 7백리:2)

    ◎60년대초엔 북한냉면 먹으러 수시 왕래/물길러 오가던 아낙네들 문화혁명뒤에 사라져/용정 백금발전소 전기는 아직도 상계리에 공급 화룡시 용화향 상화촌 김 노인은 마을 앞 강건너 북한 땅인 무산군 화평리(화평리­옛 이름은 봇더기)에 사는 조카잔치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어느날 강에 나갔다가 강 건너에서 목욕을 하는 조카를 보았다.아무 날 잔치를 한다고 높은 소리로 알리더라는 것이다.그런데 미처 출국 수속을 하지 못해 갈 수 없었던 그는 잔치날 강언덕에 서서 형님 집을 바라보며 눈물을 지었다는 이야기다. ○가깝고도 먼 이웃땅 참으로 두만강 양안의 마을은 가까우면서도 멀다.거리로 계산하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고 국법으로 따지면 멀다.그러나 철조망을 치고 콘크리트 담벽을 쌓은 무인지대를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눈 한반도 군사분계선에 대면 두만강은 보통강이라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두만강은 국경선 구실을 변변히 못했다.강 양쪽의 사람들은 거추장스러운 통행증이나 여권 따위는 필요도 없이 왕래를 했다.용정시 개산둔진 선구촌 사람들은 냉면 먹으러 대안의 종성으로 다녔다고 한다.개산둔에 가야 식당추념들을 할 수 있었는데 20여리나 떨어졌고 국수맛도 엉망이었다.그래서 가까운 강건너로 가면 걸음도 덜고 입맛도 돋굴 수 있었으니 진짜 꿩 먹고 알 먹기였다.더구나 종성의 냉면은 함경도에서도 제일이어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고 할 정도였다. 연변 텔레비전방송국 아나운서 박홍섭씨는 어릴 때 삼촌을 따라 강을 건너 친척 잔치에 참가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한달을 놀다가 돌아오려니 그만 얼음이 풀리기 시작했디 뭡네까.교두로는 감히 올 수는 없고 그렇다고 강이 다 풀리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디요.그래서 두껍고 긴 널빤지를 가져다 량켠 얼음우에 걸쳐놓고 허리에 바줄을 동여매고 건너왔댔시요』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중국과 북한관계가 냉랭해지면서 국경선은 쌀쌀한 냉기를 풍기기 시작했다.그러나 1970년 주은래총리가 북한을 방문한 후 완화되긴 했다.겨울이면 두만강에서 아이들은 함께 썰매나스케이트를 타는 경우도 있다.말하자면 중국과 북한의 국제경기라 하겠다. 용정시 백금향 동광촌 제3촌민소조(옛명 현암동)는 10여호 오붓한 마을이다.몇년 전까지만해도 이 마을에서는 두만강물을 길어 음료수로 했다.겨울에 강이 얼면 아예 대안의 북한 상계리에 건너가 물을 길어왔다.온 마을이 물동이를 이고 지게를 지고 국경을 넘어 이국으로 간다.그들은 하루에도 수차례씩 출국했다간 입국했다.아마 중국에서 출국 수가 가장 많았던 사람을 꼽으려면 이 마을 아낙들일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동삼 내내 펄럭거리고 다니자니 미안하기 짝없더만요.상계리 분들이 얼굴한번 찡그리는 일없이 반겨 줄수록 죄송했디요.그래서 가끔 사탕,과자며 과일이며 떡을 가져다 드리곤 했는데,그러면 상계리 분들은 「이러지 마시라우요.엎음 갚음이랍니다」고 기래요.「우리가 쓰는 전기가 백금발전소의 전기 아닙니까」라면서….물고생을 무던히도 했디요.그때는 언제면 집에서 물을 받아 먹나고 학수고대했는데….정부에서 이런 사정을 알고 뽐프를 놓아주어서야물동이를 팽개치게 되었다구요.그런데 정작 물고생을 덜고 나자 상계리의 고마운 분들이 그리워집디다.물을 긷는다는 핑계로 국경을 넘나들었는데 이젠 세울 명목을 잃은거디요. 동광 마을 김씨가 들려준 국경을 드락거릴 시절의 회고담이다. 북한 땅 상계리와 서쪽으로 마주한 용정리 백금향 안개골에 들어선 백금발전소는 7백리 두만강에서 유일무이한 발전소다.1960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리처 이호성과장이 안개골을 답사하고 발전소 건설구상을 구체화했다.그해부터 착수한 공사는 만 10년이 걸려 지난 1970년 5월부터 정식 발전을 시작했다.그런데 상계리는 조개형국으로 된 언덕이 북으로 뻗어내려 두만강이 병풍처럼 둘러선 두렁바위(둘러선 바위라고 해서 불려진 이름)를 핥으며 10여리를 굽이 돌아간다.강을 따라 전깃줄을 늘리려면 인력과 물력 낭비가 엄청나 사전에 북한측과 협의하고 곧바로 조개언덕으로 전선대를 세우게 되었다.그 보상으로 상계리와 상계리에 있는 북한 공전소에 무상으로 전기를 공급한다. ○안개골이 전기골로 백금발전소 퇴직간부 서현석(67·경상북도 영천군 고견면 태생)씨는 『예전에 안개골은 이름 그대로 늘 안개에 묻혀 있었수다.발전소가 세워진 후로 안개골은 별무리가 내려 앉은 격이 되었지.안개골이 전등골로 탈바꿈한 셈이우다』라고 말했다. 누누천년 이 땅을 적시며 흘러온 두만강은 우리 민족의 발목을 잡는 테였다.재난을 덮어씌우고 혈육간의 이별을 주고,그래서 아리랑고개 다음 가는 눈물이 강이 아니였던가! 하지만 반 만년의 찬란한 문화를 창조해온 우리는 끝내 두만강을 정복하고 두만강문화를 창조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문명시대가 열리면서 두만강 푸른 물이 누렇게 혼탁해졌다.그래도 두만강연안 사람들은 여전히 동방예의지국의 배달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백금향 백금촌 제2촌민소조 박길남(함북 무산군 풍경면 소학동 태생)노인을 찾아갔을 때 그 집에서는 꿩고깃국에 햇 이밥으로 후더운 접대를 했다.연변에서 평강벌 입살이 제일미라 만주국시기 공품이었다고 하지만 백금의 입쌀도 못지 않았다.최몽필잠장은 이밥맛이 어떠냐고 묻고는 수입해온 종자라고 부언했다. 『백금은 연변에서 해발고가 가장 높고 서리가 빨리 내려 논벼산량이 많이 떨어지는 땅입네다.그런데 백금 제4촌민소조 분이 어느 해 가을 강을 건너가 조선(북한)논에서 잘 영근 벼이삭을 몰래 가져 왔댔습니다.이듬해 그것을 심었는데 그 품종이 지금 백금에 많이 퍼진겁네다.서리가 빨리오는 고산지대에 맞는 우량품종을 수입 한 걸로 봐주시라요.그 다음부터 좋은 소출을 내게 되고 맛도 훨씬 좋아졌고…』 ○봄이면 과일꽃 만개 지난해 11월 25일 나는 우리 민족의 후더운 정을 한가슴 지니고 용정시 대소 과수농장을 찾았다.시루형국의 두개의 시루봉사이 안침진 곳에 터를 잡고 강건너 오국산성을 바라보며 오순도순 모여 앉은 대소 과수농장은 봄이면 과일꽃속에 묻히고 가을이면 싱그러운 사과향기에 젖어 말 그대로 아름다운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된다.현재 1천7백명의 인구에 4백여명 노동자를 가진 이 농장의 과수밭은 4백50㏊.국광,홍성,진홍,계광 등 20여가지 사과품종의 총산이 4백50만근이라고 했다. 광복전에 대소 땅은 거의가 이씨 성을 가진 지주 차지였다.천성이 부지런한 이씨 지주는 북한땅 길주에서 사과묘목을 사다가 아래 시루봉과 웃 시루봉줄기가 만나는 움푹지고 양지바른 비탈에 심었다.그리고 식구들과 소작인들을 총 동원해서 사과밭을 가꾸었다.사과원을 만들면서 이씨지주의 며느리는 일에 지쳐 죽기까지 했다.이씨지주는 며느리의 묘를 사과밭속에 썼는데 지금도 임자 없는 묘가 쓸쓸히 남아있다.그러나 광복이 나고 공산당이 토지개혁을 하면서 지주를 청산하자 자기가 심은 사과가 열매를 맺는 것도 보지 못하고 이씨지주는 몰래 떠나버렸다. 1964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덕해 제1대 주장이 대소로 시찰을 왔을 때 촌에서는 이씨지주과원의 사과를 대접했다.홍조를 띤 처녀의 볼마냥 탐스러운 사과를 받아든 주장은 대대적으로 사과원을 꾸려볼 구상을 했다.그는 요녕성 개현에서 초빙받아온 과수전문가 관치성(만족)을 대소에 파견하여 농장을 세웠다.이씨지주의 대담한 시도가 없었더라면 오늘 날 두만강변에 사과원이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몇해 전에 대소과수농장허경진(46)부농장장이 20여리 떨어진 백금향에 초빙되어 가 30㏊ 땅에 사과나무를 심었지만 매서운 강바람에 겨울을 나면 얼어 죽어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일이 있다. 대소 맞은 쪽 대안 마을은 북한 함북 회령군 상수리다.그들은 강 하나 사이두고 대소에 사과꽃이 만발한 것을 볼 때마다 승벽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어느 해엔가 그들은 대소의 사과묘목을 떠다가 옮겼다.한해 겨울을 났는데 무사했다.신심이 생긴 회령군에서는 과수지도원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여 시찰을 했다.원래 회령군에는 1천여㏊의 살구나무와 다른 과일나무가 있을 뿐 사과는 없었던 것이다.1985년 가을 대소에서는 묘목을 대량 보내고 이듬해 4월 22일 대소과수 농장에서 관치성,허경진,김수돈(57)등 책임자와 기술자들이 회령으로 건너갔다.그들은 회령군의 6개 이를 순회하며 기술지도를 했고 자동차로 접수를 싣고 가서 접목 등 지도를 해주기도 했다.85년부터 88년까지 4년동안 대소과수농장에서는 묘목과 접수를 무상으로 지원했다. 1988년 회령군에서는 세 상자의 사과를 따가지고 대소과수농장으로 와서 감사드렸다.1993년 여름에는 대소에 친척이 있는 상수 사람이 친척앞으로 편지를 보내 과수농약을 보내달라고 했다.농장지도부에서는 토론하고 밤을 타서 농약상자들을 둘러메고 강을 건너 주었다.이치로 따지면 국경을 사사로이 넘나드는 것은 불법이다.하지만 후더운 인간애앞에서 그런 것들이 때로는 무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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