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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얼빈의 밤」수놓은 얼음조각축제/22회「하얼빈빙등제」새달초까지

    ◎각국의 궁전·탑·불상 등 상징물 주제별로 전시/1500여작품에 형형색색 전등장치… 마치 「동화의 나라」 선조들이 호령했던 만주땅 한복판 흑룡강성의 성도 하얼빈은 인구 4백80만명의 중공업도시로 중국 10대 도시의 하나이다. 조선족이 7만명이나 되고 안중근 의사의 숨결이 살아있어 우리들에게 낯설게만은 느껴지지 않는 곳이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추위에다 공장에서 치솟는 시커먼 연기,무질서한 교통 등으로 인상은 그리 좋지 않지만 거리 곳곳의 러시아풍 건물이 이채롭다. 하얼빈의 「명동」 중앙대가를 조금 지나면 빙등제가 한창인 조린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궁전과 탑,불상 등등.저마다 웅장한 자태에 오색찬란한 빛을 발산하는 1천5백여 얼음조각작품이 한자리에 어우러져 화려하게 밤을 수놓고 있다. 하얼빈의 얼음조각축제인 빙등제는 캐나다 토론토,일본 삿포로,스웨덴 등과 함께 세계 4대 빙등제의 하나이며 빙등제의 원조로 규모의 웅대함을 자랑한다. 빙등은 커다란 얼음덩어리 하나하나에 빨강 초록 노랑 등의 전등을 장치한 뒤 형상을 조각해 놓은 것. 공원 입구에는 「남대문」이란 이름의 거대한 얼음문이 서있다.서울의 남대문과 형태마저 비슷하다. 이 작품은 인근 송화강에서 잘라온 8백㎤ 분량의 얼음덩어리와 1천8백개의 전등으로 만들어졌다.가로 20m,높이 11.5m의 당대 성루를 모방한 것이다. 당나라 건축물을 재현한 「침향정」과 물레방아는 그 화려함으로 눈길을 끈다.가로·세로 60㎝의 얼음벽돌 64개가 기둥을 이뤄 천장을 떠받치고 있고 직경 8m의 물레방아는 「침향정」의 온도를 식혀주는 일종의 냉방장치로 중국 최초의 「에어컨」인 셈이다. 「대불상」은 이번 빙등제에서 1등상을 받은 작품이다.석굴 내부에 10m가 넘는 좌불상 주위에 수십개의 각기 다른 표정의 불상이 신비감을 더해준다. 이번 빙등제는 주제별로 8개의 풍경구로 나뉘는데 제3회 동계 아시안게임을 감안해 2개구를 「아시아의 겨울성화」「아시아의 풍치」로 꾸며 아시아 각국의 상징물을 표현했다. 22회째를 맞는 하얼빈 빙등제는 지난달 5일 개막돼 얼음이 녹는 3월 초까지(하오 4시30분∼9시) 계속된다. 빙등제를 본뒤 이웃한 민족호텔내 한국식당에서 우리 음식을 맛볼 수 있다.
  • 밀입국 기도 조선족 51명 검거·31명 수배

    【부산=이기철기자】 부산해양경찰서는 16일 부산선적 오징어채낚기어선 덕성호(24t·선장 김종찬·34·부산 영도구 청학2동 217)편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던 강대호씨(44·중국 흑룡강성)등 중국교포 51명을 붙잡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넘겼다. 경찰은 또 덕성호 선장 김씨 등 선원 7명과 달아난 조선족 31명이 시내에 흩어졌을 것으로 보고 수배했다.
  • “「한­중협력」 내실다지기 주력”/정종욱신임주중대사 인터뷰

    ◎공동어업수역 문제 타결 낙관 정종욱신임주중대사는 8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한·중관계의 현안을 설명하는 한편 부임후의 활동방향등을 밝혔다. 정대사는 『한·중관계의 발전 잠재력은 매우크다』면서 『수교후 지난 3년동안 기틀이 잡힌 양국 협력 관계의 내실을 다지는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정대사는 9일 중국으로 부임한다. ­향후 중국의 정국을 어떻게 전망하나. ▲시기적으로 2∼3년안에 중국에는 예상되는 변화가 많다.우선 등소평이후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내년 7월 영국으로부터 홍콩이 반환되는 것도 큰 변수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은. ▲가장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가 어떻게 바뀌는가 하는 것이다.특히 북한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느냐에 따라 한·중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될 것 같다. ­최근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데. ▲미·중관계가 원만해야 한·중관계도 잘 풀리는 것이 현실이다.우리의 기본외교 노선은 한·미가 기반이므로 한·중관계가 한·미관계를 대체한다는 시각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안승운목사 납북사건 처리는. ▲안목사를 원상회복하라는 것이 우리의 요구다.그런데 안목사가 중국에서 선교사업을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다.중국은 한국 목사의 중국에서의 종교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안목사 사건도 그런 상황속에서 발생한 것이어서,그같은 사건이 재발할 우려도 있다.또 북한도 잠비아 대사관에서의 망명사건등으로 독이 오른 상태다. ­중국과의 어업협정 체결 전망은. ▲공동어업수역에 대한 논의가 많다.중국은 기존의 모택동라인이 있고,우리는 이승만라인이 있다.중국은 이승만라인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타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푸케트에서 공로명장관과 전기침외교부장이 어업협정을 맺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전망이 밝다. ­심양 총영사관 개설 문제는. ▲중국이 우리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알고 있다.다만 북한에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고려를 하는 것 같다.그러나 우리 관광객의 절대다수가 그쪽으로 여행을 하고,조선족도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조기 개설이 바람직하다.
  • 단동시 영화산기슭 항미원조기념관(압록강 2천리:23)

    ◎한국전 유물 1천여점 10곳에 전시/부지 18만㎡에 연건평 1만2천㎡… 58년 건립/김일선·모택동 친필서한·명령서등도 전시/영웅실엔 전사한 모택동 맏아들 석고상도 중국과 북한이 손을 잡고 치른 한국전쟁을 통해 오늘의 단동시인 당시 안동은 영웅도시가 되었다.그로 인해 1958년 9월 중앙문화부의 비준을 거쳐 안동에 이른바 항미원조기념관이 세워졌다.이 기념관이 오늘의 모습으로 확장된 것은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 93년의 일이다.기념관의 확장은 19 83년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단동(안동)에 들른 중앙군사위 부비서장 홍학지의 주선으로 실현되었다. ○등소평 친필 든 탑 세워 항미원조기념관은 단동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영화산기슭에 있다.글자 그대로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북한)을 원조한 전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의 현판은 당시 중국인민항미원조총회 곽말약(곽말약)이 썼다고 한다.18만㎡나 되는 부지에 1만2천㎡에 이르는 건물을 지었다.그리고 지난 1953년에는 등소평동지의 친필이 든 높이 53m의 탑을 세웠다.탑높이 53m는 1953년의 정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기념관에는 10개의 전시실을 두어 한국전쟁에 관한 1천1백8건의 문물이 전시되었다.이 가운데 주목을 끈 자료는 김일성이 모택동주석에게 보낸 친필서한이다..연합군의 반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중국의 지원을 간곡히 요청한 김일성의 친필서한은 여러 자료 가운데 백미인지도 모른다.김일성 서한 옆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조직을 채근한 모택동의 친필 명령서가 나란히 진열되었다. 그러니까 대륙의 거인이던 모택동의 휘필 한점은 결과적으로 중국을 스탈린과 김일성이 합작한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그 명령에 따라 1백만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화속으로 뛰어든 것이다.장백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한 조선족 서군(65)선생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당시 중국지원군 참전상황이 잘 드러난다.19 50년 당시 장백현 공청단위원회 선전부장이던 그는 한달 훈련을 받고 중국지원군 고사포부대 제1사 제1탄소속 부중대장으로 참전했다. 『가을이 깊을대로 깊은 10월19일로 기억하지비.그날밤에 안동을 떠나 장전하구로 와서 이내 압록강철교를 건넜수다.극비의 행동이라 중국말도 못하게 했고 중국을 떠날 때 글이 있는 물건은 못 지니게 했구마.삭주를 거쳐 평안남도 북진에 도착한 것이 10월28일인가,그렇지비.그날밤 거기서 5리쯤 떨어진 영봉에서 우리 지원군과 미군이 첫접전을 붙지 않았겠슴둥.그게 운산전투였지지비』 그 운산전투에서 미군은 3일간 포위되었다.11월1일 미군이 포위망을 뚫었으나 지원군은 미군 2천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그 무렵에 지원군을 「38군」이라고 불렀는데 모택동이 「만세 38군」이라는 친필까지 내려 전공을 치하했다.그러나 지원군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특히 서군선생이 소속된 고사포부대는 박살이 났다.장비가 일본군이 쓰던 것이라 포탄이 포신에서 발사되어도 12초가 지나야 터졌다.그런 상황이어서 미군의 포격과 공습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서군선생이 소속한 고사포부대는 12월25일 압록강을 다시 건너 요령성 금주시로 철수했다.거기서 소련제37.85포로 재무장하고 이듬해 3월18일 집안을 거쳐 만포로 건너갔다는 것이다.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 비해 모든 장비가 열세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단동의 항미원조기념관에서도 확인되었다.기념관내 공군진열실에서 본 쌍방의 공군장비에서는 너무 엄청난 차이가 났다.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은 전체 전투기가 2백대도 안되었지만,연합군비행기는 1천2백대였다는 것이다. ○연합군 비해 장비 열세 1951년 3월15일 지원군 공군사령부가 안동에 창설되었다.사령원은 유진이었는데,더러 미그15기가 F84 미군기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그러나 공중전 전과는 미미한 것이어서 조선인민군과 함께 대공포화에 중점을 두었다.요령성 관전현 석호구향 보산촌에 사는 김창권(66)씨는 전쟁 때 고사기관총소대에 복무했다.방호산이 사령으로 있던 조선인민군 제5군단 12사 1연대 1중대 고사기관총소대 사수이던 그는 당시 활동상을 소상히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고사기관총소대는 대우가 달랐디요.일반전투원은 하루 배식량이 8백g이었는데 우리는 1천g이었단 말입네다.12.7㎜ 소련제 고사기관총으로 무장했는데,재수가 좋으면 적기를 명중시켰디요.함경남도 함주군에 주둔할 때니끼리 1951년 1월18일 오전쯤 됐을 겁네다.미군기 한대가 저공으로 공격해와서리 갈겼디요.그거이 명중되어 처음 한대를 잡고서리 뒤에 두대를 더 잡았디 뭡니까.그래서리 전사영예훈장 2급을 받았댔습네다』 그에게는 일생동안 무료치료에 자식의 대학진학특전 등이 돌아왔다.그러나 중국으로 오는 바람에 한때 무효가 되었으나,지난 1987년 전공을 다시 인정받아 지금은 매달 3백원씩 연금을 받는다는 것이다.그는 전쟁을 회고하기를 떴다하면 미군 비행기고,아군기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말로 대신했다.그렇듯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북한은 물론 중국쪽 국경지대에도 낙하산부대들이 투하되었다. 1952년 11월15일 백두산일대에 낙하산병이 투하되자 장백·임강·무송현이 발칵 뒤집혔다.경찰과 민병대가 동원되어 5주야를 산을 수색했다.이들에 의해 1명이 사살되고 15명을 포로로 잡았다.「장백현지」를 보면 이보다 앞서 1951년 6월29일 낙하산 침투병을 잡는 데 공헌한 장백현 12도구 사람 채후남(1888∼1974년)이야기가 인물록에 나온다.채후남은 마을에 살다 행방불명된 김형길이라는 청년이 낙하산으로 떨어져 이미 이사한 어머니를 찾아 숨어든 것을 신고했다는 것이다. ○관광·참배객 줄이어 항미원조기념관 맨 위층에 마련한 전쟁묘사공간 「청천강전역」은 스케일이 엄청 컸다.그림과 실물조각,조명과 음향이 한데 어울린 이 공간은 높이 17m,너비 1백32m나 되었다.마치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그 공간을 넋잃은 듯 바라보는 노인이 있어서 말을 걸어보았다.아니나다를까,전쟁에 참가했다는 노인이었다.자신을 평안북도 창성 태생으로 지금은 단동시에 사는 조선족 최정근(69)이라고 소개했다. 『은산전투를 마치고 청천강으로 나갔다.나는 포병이라 부근부대를 뒤따라 조을리에 이르니 전투가 끝났다고 그라데…,시체가 즐비해서 밤이면 얼어서 뻣뻣한 미군시체를 바람막이로 쌓아놓고 잠을 잤디 않았갔수.죽은 미군 신발을 벗겨 신는 것은 약과고 속옷까지 벗겨 입었으니 원….손을 옷속에 넣으면 이가 한줌씩 잡혔으니 별도리가 없었디』 전쟁은 가혹한 것이었다.항미원조기념관 영웅모범열사실에는 모택동의 맏아들 모안영의 석고상이 전시되었다.지원군사령부 근무중 미공군 폭격에 사망한 그의 유해는 북한에 묻혀 있다.어떻든 전쟁은 비극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그렇다면 항미원조기념관은 전쟁예찬이 아닌 전쟁억제에 더 큰 비중이 깔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 국경지대 북 주민 중국 탈출 줄이어/일 마이니치 보도

    【도쿄=강석진특파원】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으로부터 중국으로 탈출하는 주민이 이어지고 있다고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이 28일 두만강국경지대에 대한 르포기사를 통해 보도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이 기사에서 『강이 얼면 주민이 난민으로 중국측에 몰려들 것이라고 보도돼왔다』면서 이와 관련,『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정부 관계자는 「대량탈출」을 부정하고 있지만 단독 또는 몇명씩 짝을 지어 국경을 넘어오는 경우는 있다고 인정했다』고 전했다.
  • 북한 상품 전용판매점 북경에 “오픈”

    ◎도자기·그림·수공예품·뱀·인삼술 등 갖춰/한국관광객 겨냥… “주문땐 서울까지 우송” 북한상품 전용판매점이 북경에 최초로 문을 열었다.「평양상점」이란 이름으로 최근 조양구 조양공원안에 문을 연 이 상점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가슴에 커다란 김일성배지를 단 20대초반의 북한처녀들이 조선족과 함께 안내와 판매를 맡고 있다. 1백70여평 남짓한 이 상점은 형식상 재미교포 무역상 윤영선씨(미국 영패밀리인터내셔널)와 조선족 실업가 김성수씨의 합작으로 발족됐다.그러나 실상은 북한대사관과 김씨의 합작기업으로 주요고객은 한국인관광객이나 현지주재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지난해말 평양에서 노동당산하 대성무역상사 고위관계자와 이 사업에 합의했다고 말했다.북한대사관 무역참사관들이 사업구상 초기부터 참가했고 주창순주중북한대사의 허가와 격려도 있었다는 귀띔이다.북한측은 물건을 대고 김씨는 장소등을 제공하는 형태로 매출액의 절반씩을 나누기로 했다는 것이다.물건은 윤씨가 북한에서 수입하는 형식으로 들여와 전시된다. 이곳엔 북한에서 최고성가를 올리고 있는 만수대창작단의 도자기와 그림·수공예품을 비롯해 술·담배등 기호품,안궁우황환)등 약품과 약재류,악세서리등이 구비돼 있다.장신구 및 장식품이 하나에 3만3천원꼴로 비싸긴 하지만 북한영화 비디오테이프도 있고 각종 그림엽서 및 서적도 보인다.우리 돈 3만∼7만원정도면 그럴듯한 도자기를 살 만하고 대형금강산그림도 10만여원이면 살 수 있다.술값은 비싼 편인데 개성고려인삼술·양덕불로술(뱀술)등이 눈에 띈다. 미술천재아동 오은별의 그림이 없느냐는 질문에 『오은별의 것은 물론 다른 물건도 주문하시면 2∼3일내로 도착되고 원하면 서울 주소로 우송도 해주겠다』고 북에서온 점원이 친절하게 답한다.「평양상점」근무를 위해 이달 중순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왔다는 20대초반의 앳된 5명의 북한처녀 판매원은 북한대사관 공관에서 기거한다.이들에게 한국의 쌀지원을 아느냐고 묻자 『북에도 쌀이 많은데 무슨 쌀지원』이냐며 모른 체했다.이들은 『온 지 이틀밖에 안됐지만 조국에 돌아가고 싶다』면서 『조국통일을 위해 여기에 와 일한다』고 말했다.상점 관계자는 올 3∼4월 상점확장에 맞춰 5명의 평양처녀가 더 올 것이라고 했다. 윤영선씨는 『북한유엔대표부의 지원으로 오는 3∼5월에 뉴욕·워싱턴·LA등에서 북한상품전시회를 갖기로 결정했으며 상설매장설치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김성수씨도 『중심가 쿤룬호텔부근에 건평 2천평의 4층 건물을 임대했으며 수리한 뒤 이곳으로 상점을 옮겨 본격적인 조선상품전시·판매장으로 만들어 관광의 명소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 조선족기업가는 북한측이 도별 무역회사조직을 통해 이같은 외화벌이전문상점을 중국에 설치할 계획으로 알고 있다면서 무역관련부서의 경우 조선족과 교포등을 통한 접촉을 더욱 활발히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기구한 삶 오학증씨(압록강 2천리:21)

    ◎북한으로 피신… 강제송환돼 감옥생활 11년/79년 출옥후 개가한 아내 수소문해 재결합/독립군 출신 부친도 반동으로 몰려 개죽음 요령성 단동시 조선족소학교 아파트에서 신경질환으로 만년을 보내고 있는 오학증(64)선생은 기구한 운명을 산 사람이다.그 격변의 대륙에서 조선족 누구인들 정치이데올로기에 휘말려 모진 삶을 살지 않았을까만,그의 인생역정은 남달리 불행했다.그의 일생은 대륙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비극의 드라마 그것이었다. 『제 아내와는 두 번을 장가 든 셈이디요.그래서리 아이들도 제대로 못 키우고….이자 나같이 사는 사람들이 다시 없도록 평안한 세상이 돼야 합네다.지난일들을 생각하면 다가 악몽이야요』 한 아내에게 두 번을 장가갔다는 말이 의아스러웠다.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는데,자신이 반우파로 몰려 감옥살이 하는 동안 아내가 살길이 없어서 한족 홀아비한테 개가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그가 1979년 1월 감옥에서 나왔을 때 아내는 이미 남이 되어 있었다.개가한 아내가 사는 곳을 수소문해서 한족영감에게 애걸복걸했다.그렇게 찾아온 아내다.그는 우파누명이 벗겨져 본래의 자리인 소학교로 돌아와 정년을 넘기고 지금은 학교가 내준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다시 살고 있다. 그는 요령성 환인현 사전자 태생이다.부친은 평북 구성 사람인 오성오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1930년대 독립군 해산과 더불어 관전현 보달원에서 교편을 잡았다.해방이 되자 부친은 교장 자격으로 손수 학교를 꾸리면서 일본 메이지대 출신 전봉천을 초빙해와 같이 일했다.그무렵 팔로군이 보달원에 들이닥쳤다.그리고 나서 이내 미국식 현대무장을 갖춘 국민당 군대가 밀고 들어왔다.부친이 교사로 초빙한 전봉천은 국민당 편에 서서 한국교민회를 조직했다. 『제 부친께서는 장래의 시국을 예견하신 것 같았습네다.국민당에 붙어서 보달원에 출장온 전봉천선생에게 이런 말을 했디요.이 사람아 자중하게.국민당이 기세당당하게 왔디만 조만간 팔로군이 또 올 것이라고….아니나 다를까 1947년이 되면서 국민당이 꺾이고서리 농촌 전체가 공산당 일색이 되고 토지개혁을 착수했디요.나도 당시 아동단에 참가하지 않았겠습네까.팔에 빨간천을 두르고 목창 개지고 보초도 서고…』 ○통화사범학교 진학 오씨네 일가의 비극은 이 때에 닥쳐왔다.공산당은 국민당과 가까운 사이였던 부친의 독립군 경력과 반동 전봉천과의 관계를 문제삼았던 것이다.『아무개가 반동이다.죽이는 것을 동의하는?』라고 물으면 반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슬 시퍼런 시대였다.부친은 공산당에 체포되어 몽둥이를 맞고 세상을 떴다.마을사람 김희묵은 빈농이었지만 억울하게 죽었다.옷을 깨끗이 차려입고 나온 통에 그를 부농으로 착각한 공산당이 조리질을 돌려 죽여버렸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오학증선생의 어린시절은 불우할 수밖에 없었다.중학교 입학자격마저 잃었다.철저하게 계급을 따진 공산주의사회는 가갸 뒷다리도 모르는 빈농의 자식들 위주로 신입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그러니 학교 꼴이 말이 아니었다.공산당도 할 수 없이 중학교 시험제를 채택하게 되어 어린 오학증에게도 중학입학의 길이 열렸다.밭에서 가을일을 하다 학교로 달려가 시험을 치러 홍광중학에 들어갔다.한국전쟁이 터져 거의가 지원군으로 나갔지만 나이가 어려 면제를 받고 통화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사범학교 졸업이후 첫 부임지는 지금의 단동인 안동시 북광소학교.학교 당조직에서 자신이 중점 육성대상자가 될만큼 열심히 일했다.그러다가 1957년 반우파투쟁이 일어났다.교육정책을 바꾸어 한족과 조선족의 연합교육을 실시하는 바람에 교육의 질이 형편없게 떨어졌다.곧은 성질을 가진 오학증선생은 이를 시정해야 된다고 건의했다.그 건의가 화근이 되어 우파로 낙인찍힌 것은 물론 부친의 청산을 암암리에 보복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라는 모략까지 따라 붙었다. ○당국에서 이혼 강요 그에게 내려진 일종의 형벌은 혹사를 통해 정신을 바로잡게 하는 이른바 노동개조.월급은 취소되고 하루 1원57전을 받는 건축공사장에 끌려다녔다.1957년 1월에 결혼하고 신접살림을 차린 지 다섯달이 안되어서 일이다.비단공장에 들어가기로 되어있던 아내의 일자리도 취소되고 말았다.죽지못해 살기를 4년여 성상,1961년 우파 너울이 벗겨져 교사로 다시 복직되었다.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고 1966년 문화혁명이 기다리고 있었다.그해가 중반에 접어든 6월22일 출근길에 자신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보았다.그러지 않아도 신경쇠약에 걸려있던 터라 병원진단서를 붙이고 학교를 쉬었다.그런 어느날 학교에 들어온 군대표로부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다음날 학교에 꼭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아무래도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날 관전현으로 올라가 압록강을 건넜다.북한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가 북한으로 도망친 것을 눈치챈 학교는 이를 당국에 고발했다.곧 북한당국에 연락되어 1주일간 신의주에서 구류를 살았다.그리고나서 중국으로 강제송환된 그는 15년형을 받았다. 『아내가 감옥으로 면회를 왔습데다.아들 둘 하고 세 돌이 난 딸애를 업고 왔디요.철딱서니없는 어린 딸이 제가 먹던 싸구려 과자를 쥐고 쇠창살 사이로 넣어주는데 고만 눈물이 쏟아집데다.두번째 면회때는 아내가 혼자와서 이혼을 제기하길래 거절했더니 대성통곡을 하고 애들의 앞날을 봐서리 이혼해달라는 것이었디요.그후에 감옥소 소장이 저를 대신해서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강제 이혼하고 말았수다』 아내 김성란(61)씨도 평북 벽동 사람이다.시집을 가면 죽어도 그 집에서 귀신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터라 도리를 모를 까닭이 없었다.아이가 학교에 가면 새끼반동이라고 따돌리고 당국에서도 이혼을 강요해 별 도리가 없었다.막상 이혼을 하고 났더니 문화혁명 이후의 관행대로 산골로 내몰았다. 열세살과 일곱살짜리 아들.세살짜리 딸과 함께 내팽개쳐진 곳은 한족들만이 우글거리는 봉성현 백기공사산하 지리대대.살길이 아득했다. 그의 아내는 고생으로 살아서인지 나이보다 훨씬 늙었다.남편옆에 앉아 훌쩍훌쩍 울기를 여러차례하고 나서 겨우 말문을 열었다.그 표정은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신경질환으로 고생 『제가 못된 여편네디요.아이들 하고 죽지 못해 한 일이디만….기래도 두 해를 버티다 한족 홀애비 백국영을 만나 재혼했습네다.저녁이면 아이들을 재워놓고 한참씩 울다가는 한족 영감옆에 누어잤디요.그런데 11년만에 무죄석방된 저 양반이 그 산골을 찾아왔디 뭡네까.저는 간염에 걸려 다 죽어가는 터디였디요.저 양반이 하루를 살더라도 복혼하자고 그럽데다.저도 한 마음이었수다.한족 영감도 인생들이 가여웠던지 저를 놔 주었디요』 그들이 재결합한 지도 어언 19년이 되었다.이산부부의 후유증은 아물지 않아 자신은 신경질환을 앓고 큰아들은 뇌종양으로 병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대륙의 몇차례 큰 바람은 이들 가족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었는지도 모른다.
  • 밀입국 중 교포 부산서 또 도주

    【부산=김정한기자】 14일 하오 4시20분 쯤 부산시 중구 중앙동 부산항 1부두에서 한·중 정기여객선 자옥란호(1만6천t)를 타고 입국한 중국 교포 김광일(26)씨가 입국심사장으로 가던 중 달아났다. 이에 앞서 지난 해 11월 30일 부산지방 경찰청이 검거해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인계한 조선족 불법체류자 이동춘(44)씨 등 5명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다음날 상오 4시30분 쯤 5층 조사실의 유리창 철망을 뜯어내고 달아났었다. 부산 출입국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인원부족으로 입국자 등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어렵다』고 말했다.
  • 간첩의 중국교포 위장 밀입국(사설)

    해안경비에 구멍이 뚫렸다.밀입국자들이 탄 배가 영해를 통과해 들어와 사람을 풀어놓아도 아무 저지를 받지 않는다.밀입국자중에는 북한공작원까지 조선족으로 위장해 들어와 국가안보마저 위협받고 있다.지금부터라도 우리 영해의 감시체계를 강화해 국가주권과 안보가 침해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부산지검이 중국에서 보내온 서신제보에 따라 조선족을 대거 밀입국시켜온 알선조직을 적발해 조사한 결과 밀입국자중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 특수공작원의 잠입혐의가 커 이들을 추적하고 있다.제보에 따르면 북한은 휴전선을 통한 간첩남파가 어렵자 이들을 밀입국자로 위장시켜 잠입시킨다는 것이다.제보에 명시된 간첩혐의자 5명은 밀입국조직이 지난해 남해안을 통해 밀입국시킨 87명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돼 간첩침투의 가능성이 높다. 밀입국조직은 그동안 여러 차례 중국에서 밀입국희망 조선족 수백명을 모집해 선박편으로 한국에 데려온 것으로 드러났다.문제는 이들이 해안으로 밀입국자를 실어날라도 한번도 검문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해상경비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당국이 그동안 적발한 불법입국 북한인의 수가 30여명이며 파악되지 않는 인원은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10월 부여에서 생포된 간첩 김동식은 두 차례나 서귀포 해안을 통해 서울까지 침투해 각계인사를 포섭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준 바 있다.특히 새벽에 괴선박의 출현을 신고받은 경찰은 뒤늦게 현장을 둘러보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아 해상경계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중국과 국교정상화 이후 밀입국 중국교포가 크게 늘어나고 있지만 해상에서 검거된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도 해상경계의 허술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바다의 경계가 철통 같아야 육지의 안보가 확보될 수 있다.육지에서 잠적한 밀입국자를 검거하기 위해 소동을 벌이기에 앞서 해안경비를 철저히 해 침투경로를 차단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 영원한 의병장 의암 유인석(압록강 2천리:20)

    ◎을미항일투쟁 실패 후 보달원에 은거/제천서 궐기… 한때 원주·단양일대 석권/청·러시아 방해로 의병활동 재기 좌절/한족들이 기념비·허묘세워 충절의 넋기려 요령성 관전현일대에는 19세기말부터 조산팔도의 의병들이 몰려들었다.이른바 서간도로 불리는 이 압록강유역은 일찍 항일의병은 동의 요람을 이루었다.그 지도자는 의암 유인석(1842∼1915)이었는데,1896년에는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 땅을 밟았다.1895년의 을미의병운동이 국내에서 실패하자 부득이 서간도로 들어온 것이다. ○작년 정부서 건립 그가 오래도록 살았다는 관전현 보달원은 이름그대로 가는 길이 멀었다.관전현 현성에서 80㎞나 되었으니,걸어가자면 먼 길이었을 것이다.지금도 승용차로 4시간이 걸린다.막상 보달원에 도착하고 나서 그가 숙영지로 삼았다는 고령지를 찾아가는 길은 더욱 멀었다.자동차로 고개를 넘어 혼하를 건넌 뒤 환인현 사첨자향으로 들어가 또 강을 따라 올라갔다.그리고나서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천신만고 끝에 고령지에 도착했다.유인석선생이 인솔한 의병들이 처음 자리를 붙이고 가솔들을 데려와 살았다는 고려구 골짜기가 동쪽 먼 발치로 보였다.의암 유인석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보기 위해 마을사람들을 따라 좁은 골짜기를 한참 올라갔을때 평평한 산언덕이 나왔다.거기서 천연의 바위를 기석으로 삼아 세운 의암기념비를 만났다.지난해 95년 5월 관전현 현정부에서 세운 이 비석은 너비 1m,높이 70㎝로 그리 크지는 않았다. 유인석선생은 본래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지만 18 95년 학맥을 따라 충북 제천 장담으로 거처를 옮겨 활약한 조선의 거유다.18 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그해 을미년 12월24일 제천에서 3천의병을 일으킨 그는 한때 제천·충주·원주·단양지역을 석권했다.그러나 관군에 밀려 서북지방인 황해도·평안도로 이동했다.서북지방에서 재기활동도 결국 실패하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숨어든 곳이 만주땅 서간도에 해당하는 요녕성 관전현 보달원이었다. 유인석선생과 보달원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그의 의병부대가 환인현 현재 서본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이후 오랜 유랑과망명생활을 하고 다시 돌아온 곳이 부달현이었기 때문이다.의병운동이 청국정부와 러시아정부의 방해로 좌절되자 보달원 방취동에 물러앉아 있었던 것이다.의병활동의 기회를 눈여겨보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한 그는 방취동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춘천 태생 조선의 묘비 그가 말년을 살았던 방취동은 비석이 서 있는 자리에서 서쪽으로 2∼3㎞정도 떨어졌다.지금은 인가가 없고 인적도 끊겼는데,그가 「우주문답」을 저술했다는 산굴과 집터만이 남아있었다.그리고 보달원 사람들이 아직도 유인석묘소로 고집하는 무덤 하나가 자리잡았다.19 30년대 유인석선생의 증손이 유해를 고향땅 강원도 춘천으로 이장했는데 무덤이라니….당시 후손이나 독립운동가들이 여기 살아 잘못 옮겨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보달원의 한족들이 유인석선생의 허묘를 실제의 묘소로 우기는 까닭을 늦게야 터득했다.허묘를 모를까 만은 그를 오래 우러러 추모하기 위한 고집이라는 것을….평안도 출신 독립운동가 김경도의 아내 최씨가 일본 영사관원에 능욕을 당하고 자결했을 때 그가 글을 지어서 써 준 묘비까지 문물(문화재)로 지정할 정도였다.그 묘비 「조선열부해주최씨표적비」는 지금 환인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지난해 6월29일 관전현 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는 유인석학술사상연구소를 세웠다.평북 벽동군 태생인 최신화(67)선생을 소장으로 한 이 연구소에는 13명의 연구원을 두었다.그리고 유인석선생의 사촌형 유홍석선생 증손이자,현재 한국광복회 강원도지부장인 유연익씨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이밖에 관전현 역사지명지판공실 상진생주임과 같은 한족 학자들도 연구소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유인석사상학술연구소는 중국 당대 역사상 첫 한국인 대상의 연구기관이다.연구소는 관전현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유역에 남아있을 유인석선생 반일활동사료를 발굴하고 있다.그러나 연구에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그의 문집을 아직 입수하지 못했다.그래서 연구소장 최신화선생은 그 안타까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유인석선생의 필적과 주석하셨던 고장은 국가 문물이 되었습니다.그런데 문집은 우리가 못 구했디요.선생께서 별세하신 뒤 문하생들이 문집을 정리해서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고 기래요.어떤 경로를 통해 그리 갔는지 몰라도 그 문집을 지금은 절강성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습네다.「의암문집」은 54권 29책이나 되디요.절강성도서관에 연락했더니 복사나 해가라고 기래요.부끄러운 말입네다만,복사비 5천불을 마련할 길이 없습네다』 지난해 5월 세번째 중국을 찾아온 광복회 강원도지부장 유연익선생이 기념사업에 써 달라고 노자에서 1천2백달러를 내놓았다.그도 1934년 요령성 무순시에서 태어나 무척이나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이다.사촌동생 유인석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와 항일운동에 참가한 유홍석의 증손인지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증조부로부터 부모까지를 일제의 손에 잃었다.기구한 운명을 산 독립운동가 후손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한국인 대상 첫 연구소 그는 지난 1994년 중국 방문길에 부친 유돈상의 묘소를 찾아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독립군으로 싸우다 일제에 체포되어 무순감옥에서 숨진 부친의 시신을 할머니 윤희순이 거두어 묻었다는 무순시 용봉 남산이 도시로 변해있었기 때문이었다.다행히 할머니 윤희순의 묘소는 당시 장례에 참석했다는 한족 영덕수(87)노인의 도움으로 찾아냈다.그리하여 남편과 자식을 중국땅에서 다 잃은 할머니의 골회는 고향 춘천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어떻든 강원도 춘천 가정리 유씨 일가들은 항일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걸었다.그런 가운데도 유인석선생은 충절을 지키면서 학덕을 쌓았다.오늘날 중국에서 그를 기리는 것을 보면 유인석선생이야말로 죽어서도 살아있는 불멸의 인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 북,일서 쌀 20만t 수송 재개/일 추가지원 않을듯

    북한은 지난해 10월 일본으로부터 지원받고도 가져가지 않았던 추가지원 쌀 20만t의 잔여분을 수송하기 시작했다고 정부의 한 당국자가 8일 밝혔다. 이 당국자는 『북한측이 최근 일본 니홋카 항에 보관중이던 20만t 추가지원 쌀 잔여분의 수송을 시작,현재 10만t 가량을 선박에 싣고 갔다』면서 『북한측이 쌀 재고량 유지에 어느정도 압박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그러나 『일본정부는 북한이 당장 식량부족으로 위기를 맞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면서 『따라서 일본정부의 추가적인 쌀지원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중국이 최근 평양대사관과 청진총영사관,교환 학생,중국국적 조선족의 북한거주 친·인척등을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현시점에서 북한의 식량수급에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 중,한국인 10명 구속수감/작년 3∼10월

    ◎조선족 한국밀항 알선혐의 【북경=이석우특파원】 중국에서 한국인 10명이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한국밀항 알선 혐의로 구속 수감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주중한국대사관은 7일 최구열씨(56·서울)등 한국인 10명이 1만∼5만위안(5백만원)씩의 돈을 받고 조선족 2백여명을 한국에 밀항시키려다 구속되고 1명이 수배된 것으로 요령성 대연공안당국이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이들 가운데 최씨와 박성철(44·마산),장덕용(50·부산),송호세(35·사천),강기덕씨(42·서울)등은 지난해 3월부터 5월말까지,한국인 선원들인 이철근(32·부산),김재환(30·울산),진운한(42·포항),조성환,공만석씨(44·사천)등은 지난해 10월말 각각 조선족 밀항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은뒤 재판에 회부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연길에서 발행되는 연변일보는 최근 『한국밀항을 위해 대연부근에 모인 조선족이 3천명에 이르고 이중 5만위안을 브로커들에게 건넨 사람만도 1천명에 이른다』고 보도,앞으로도 한국밀항을 둘러싼 잡음이 계속될 것임을 시사했다.
  • 조선성씨 집성촌(압록강 2천리:19)

    ◎봉성­본계현일대 서·문씨들 “오순도순”/이주후 300여년 걸려 서가보·박보촌 등 형성/동성동본 혼인기피… 다른민족 아내로 맞아/조상숭배 대단… 혼례전 선조묘소 절하고 예식치러 요령성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왕래하자면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회랑이다.그래서 오가는 길에 주저앉아 눌러살기도 하고 일부러 찾아와 자리를 잡기도 했다.동아시아 역사와 무관치 않은 요령성 이유민은 대를 두고 많은 후손을 남겼다.오늘의 조선족과 크게 구별되는 이유민의 역사는 꽤 오래되어 요령성에는 조선 성씨를 가진 유명한 집성촌이 더러 있다. 서씨와 문씨가 많이 사는 요령성 봉성현의 서가보,박씨의 못자리판인 본계현 산성자향의 박보촌이 대표적 집성촌이다.박씨의 경우는 박보촌 말고도 개현 진둔향의 박가구가 또 있다.이들이 집성촌을 이룬 것은 약 3백∼3백50여년이 된다고 한다.그러니까 이유민으로 들어온 선조로부터 약10∼11대손이 조선 성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봉성현 서가보의 문씨 선조가 요령성에 첫발을 들여놓은 시기는 17세기 중엽이었다.서가보의 문씨가 현재 보존하고 있는 「문가씨보서」의 머릿말을 보면 내력을 잘 밝혔다.시조는 문서였는데 본래 조선인이었다는 것과 압록강에서 1백20리 떨어진 옥상좌동(평안북도 땅)에서 세세대대를 살았다고 기록했다.그리고 문씨 시조 문서가 청나라 순치연간(1644∼61년)에 시험을 치러 역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적었다. ○청나라 역관신분 정착 문서는 역관이 되었을 때 나이는 30살이었고 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인 요령성 봉성현 봉황성에 배치받았다.6품 통역관 직책으로 조선사절의 신분을 조사하는 일을 담당했던 그는 늘 후덕한 인상을 풍겼다.그리고 김씨와 나씨,박씨 등 세 부인 사이에서 아들 셋을 두었다.그 후손들은 1911년 신해혁명까지 한 자리에서 세습 통역관의 대를 이었다.이들이 봉성일대에 여러 문가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봉성현에서 진장을 지낸 윤희봉(35)씨 이야기에 의하면 문씨와 서씨 말고도 여러 조선 성씨를 가진 만족(만주)이 요령성에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현재 단동시 조선족문화관장인 그는 조선 성씨를 가진 민족의 생활상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만족들 중에는 최씨와 김씨,백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디요.집성촌은 아닙네다만,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네다.술자리에서 더러 자리를 같이 하면 자기 조상이 아무개 누구라면서 조선족 만난 것이 반갑다고 난리를 칩데다.그들 조상도 대개 문씨네 조상과 같은 시기에 건너온 사람들이디요.그러나 문씨와 서씨네 만큼은 조선의 냄새가 덜 합네다.문씨네는 초상을 당하면 흰상복에 삼띠를 두르고 여자들은 머리를 풀어 흰댕기를 매더란 말입네다』 그리고 본계현 삼성자향 박보촌에는 40가구가 박씨들이었는데 전체주민의 40%를 차지했다.박보촌은 만족어로 쌍하스마후다.17 25년부터 그렇게 불렀으니 3백년의 이주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청나라 초에 박대와 박오가 땅을 부친 것이 동기가 되어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박보촌의 맥을 잇고 있다.지금 박보촌에 자리잡은 박씨네는 박오의 후손이라고 한다. 청나라 가경연간(1796∼1821년)에 만든 「박씨족보」는 박씨 자신들이 조상신을 모신다는 사실을 기록했다.이는 한족이나 만족이 모시는 신보다 하나가 더 많은 것이다.이 마을 박문수(89)노인은 어렸을 때 자신이 실제로 본 조상신을 기억해냈다.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통 넓은 바지차림을 한 노인이었다고 했다.노인이 기억한 조상신상이라는 것은 아마도 영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보촌 박씨네들의 조상숭배 의식은 혼인풍속에도 나타났다.그들은 혼례를 올리기 이전에 먼저 고구려 고분에 재배분향하고 이어 박씨 조상묘소에 절을 올리고 내려와 예식을 치른다.혼례 전에 찾는 고구려 고분은 박보촌에서 3백여m 떨어진 산성유적 꼬우리광즈(고려방자)안에 있다.박씨의 조상들이 이주해온 이역타국에서 민족의 뿌리를 찾고자 노력한 흔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김·백씨 만족도많아 박보촌 박씨들은 장례식 축문에서도 고구려를 떠받들었다.첫 구절에 「당나라 백만 대군이 침입하매 연개소문이 이를 무찔러 쫓아버렸도다」(당국백만대군입침 연개소문격이지퇴)라는 말이 나온다.고구려의 영광을 예찬한 이 글은 후손들에게어떤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족보에는 동성동본끼리의 혼인 흔적이 전혀 없다.한족과 만족의 잡거지역에 살았던 터라 다른 민족을 아내로 맞았다.그럼에도 조선족 전통음식인 된장과 간장을 집집마다 담갔다.또 옷과 이불 호청에 풀을 빳빳하게 먹이는 습속도 그대로 간직했다.어른을 공경하는 전통예절 역시 철저히 지켜 집안 어른의 밥상은 작은 소반에 따로 차렸다. 조선의 성씨인 박씨가 많기로는 개현 진둔향 박가구가 단연 으뜸이다.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89가구 2백87명을 헤아렸다.심양∼대련을 잇는 일망무애한 요동평원에 자리한 이 마을 이웃에도 고려산성과 같은 고구려유적이 있다.조선의 글과 그림이 있는 옹기와 조선의 낫과 호미,3백근짜리 동종이 마을에 전해내려왔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다.지금은 돌절구 방아확 하나가 남아있다.그 절구마저도 깨진채 절반쯤 땅속에 묻혔는데,무심한 빗물이 확을 가득 채웠다. 마을 어귀에는 화강함 비석 하나가 서 있다.청나라 연호로 가경14년(1809년)에 박씨 가문의 6대손 박동국을 기리기 위해 아들 4형제가 세운 것이다.박경청이 보존하고 있는 족보를 훑어보았더니 모계도 4대까지는 조선족 이름을 적었다.그후로는 한족이나 만족의 이름이 섞여 나왔다.마을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면 한어로 『나도 조선족』이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을어귀에 박씨 비석 중화민국시기에 이 마을에 사는 형씨들이 마을 이름을 박가구 대신 형가구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인 적이 있다.박씨들은 현에 진정하는 등 반대운동을 벌여 마을 이름을 지켰다는 것이다.한번은 좀 떨어진 다른 조선족 마을에서 안노인 둘이서 고사리를 꺾으러 박가구까지 갔는데 마을 박씨들이 집으로 불러들여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그리고 조선족 안노인들이 꺾어온 고사리나물 보따리를 10여리나 되는 정거장까지 등짐으로 날라다 주는 따뜻한 인정을 베풀었다. 요령성 조선 성씨들의 집성촌에서는 지난 1982년 중국 총인구조사 당시 조선족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벌였다.그 결과 서가보,박보촌,박가구에 사는 조선 성씨를 가진 사람들 모두가 정부의 비준으로 조선족 대열로 들어왔다.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어서 그들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이 우러났다.
  • 주변4강의 남북한 정책/중·일 전문가의 교차 분석

    ◎중서 본 일정책/서선 중 현대국제관계연 부주임/동북아주도권 잡으려」등거리」유지/대미 견제외교로 영향력 강화 폭석 한반도가 일본식민통치의 질곡에서 벗어난 지 50년이 지났으며 적대관계였던 한·일 두나라의 국교정상화도 30년이 지났다.냉전종식후 국제관계에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일본의 한반도정책은 동북아의 안정·번영에 의미를 더하고 있다. 냉전종식후 일본은 한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북한관계도 개선하겠다는 동시관계 발전정책과 한반도의 안정유지정책을 구사하고 있다.이를 통해 한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한반도정책의 기본목표다. 이런 두나라 관계는 일부 인사들의 망언으로 잡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군사협력부문까지 확대되고 있다.최근 두나라는 방위방면의 정기 관계자회의에 대한 기본협약에 합의했다. 일본은 또 대북한 관계에도 두드러진 성과를 얻어냈다.91년부터 북한과 수교회담을 진행,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두나라 수교협상이 핵문제로 중단됐지만 북한과의 관계개선 및 수교에 대한 일본정부의 기본입장은 변치 않았다.일본정부는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북한정국은 안정됐으며 정권이양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판단을 신속하게 내렸다.이같은 정세판단의 맥락아래 북한에 대한 식량원조를 제공,새로운 정권이 경제곤란을 극복하는 데 돕고 있다. 이러한 외교 행보에서 한국과 동반자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려는 것이 일본의 한반도 외교정책의 기본입장임을 확인할 수 있다.그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일본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리,전망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군사전략적인 차원에서 한반도를 러시아와 중국으로 가는 발판이며 대륙세력의 위협을 저지하는 방파제로 생각해 왔다.한반도를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방어선으로 생각한 것이다.이러한 기본인식아래 일본은 안전확보를 위해 한국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미국·한국·일본의 삼각 군사 안보체제를 강화해 나갈 것이다. 두번째 기본전략은 한반도의 안정을 유지해 나갈 것이란 점이다.이것은 여러가지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그중 하나는 한반도의 현재 상태가 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이는 한반도의 현상유지 정책으로 표현된다.특히 남북한의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일본이 원하는 한반도의 안정이다. 거시적으로 일본 외교는 이미 변하고 있다.그것은 「대국외교의 추진」으로 요약된다.일본은 그동안의 소극적이고 미국 추종적인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동북아 신질서 건립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모색하고 있다.일본은 한국과의 관계강화를 통한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대한 견제를 모색하는 동시에 북한과의 관계강화를 통해 한반도의 발언권을 높이려 하고 있다.일본은 북한시장의 잠재력을 인정,북한시장 터 다지기에 열중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한반도외교의 바람은 순조롭게 전개될 수 있을까.어떤 의미에서 일본의 「2차대전의 종전 처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일본은 아직도 전쟁 범죄자라는 사실은 물론 교과서왜곡을 통해 국내 역사를 왜곡하고 침략역사를 부정하는 등 한반도 및 아시아인들의 경계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게다가 일본의 한반도외교는 기본적으로 미국·한국이라는 기본적인 제약요인 아래 수행할 수 밖에 없다.이점에서 일본의 대북한 관계개선도 미국이라는 변수에 어느정도는 종속돼 있다.특히 한국의 정국이 대변혁기에 있고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고조돼 있는 지금 대북문제와 관련,일본은 모험은 피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우호가운데 투쟁,합작가운데 마찰」속에 부단히 발전하고 있다고 요약된다.일본은 앞으로 한국과의 정치,안보부문의 합작을 부단히 강화해 나갈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과 북한 관계는 더 밝다고 전망된다.일본은 북한과 국교수립을 위한 회담을 계속 진행시켜 나갈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북한·일본 회담에서 일본정부가 미국·한국이라는 제약요인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일본은 핵문제와 관련,북한에 압력을 가하고 남북대화에 있어선 북한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배상문제에 있어선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이 받아들인 바로 그러한 모델을 채택하도록 밀어붙일 것이다.이런 점에서 아직은 일본과북한의 국교수립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일서 본 중정책/이노구치 다카시 국(유엔)대학 부학장/남북한균형 유지… 북붕괴 방지 주력/경제이익 오려 사안따라 협력·경계 중국의 대한정책은 몇가지 관점에서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그만큼 한­중관계는 역사적으로도,군사적으로도,또 경제적으로도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우선 역사적으로 한중관계는 현재의 북한의 대부분과 중국의 동북,내몽골 등이 때때로 전략적으로 긴밀히 관련되어 전개돼 왔다는 점이다.금방 떠오르는 것은 한국전 당시 중국의 군사개입이다.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은 중국동북에도 폭격을 소규모로 단행했었고 맥아더원수는 동북지방의 핵공격조차 계획했었다. 여기에 역사를 조금 더 거술러 올라가면 제국 일본에 의한 중국동북 신민지화는 조선의 식민지 방위를 구실로한 것이었다.더 소급해 올라가면 몽골의 원나라 군대 및 만주족의 조선개입,수·당시대의 군사분쟁은 모두 이들 지역을 한 덩어리로 해서 다투어졌던 것이다. 독같은 이유로 중국은 북한이 붕괴한다거나 극도의 불안정화를 경험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같은 조선족은 중국동북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고 중국동북지역은 공업화로 약진하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또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중국은 대한정책에서 현상유지를 강하게 희망하고 있다. 94년 북한의 핵의혹이 미국 등으로부터 강력히 기대되어지면서도 이것을 회피해 오히려 저자세로 시종한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군사적으로는 북한·한국·일본이 핵무기를 소유한다거나 또는 군사대국이 되는 것을 중국은 바라고 있지 않다.중국은 경제발전에 의해 많은 문제의 해결을 꾀하고 있다.그 노력이 군사분쟁의 발생에 의해 중단까지는 아니더라도 늦어지는 것조차 결코 바라지 않는다.중국의 국경에서 평화가 계속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중국으로서 커다란 이익이 된다.말할것도 없이 평화라고해도 중국이 본 중국류의 평화다.주권의 주장,대국의 위신옹호 등으로 보아 필요하다면 군사력의 행사에 대해서 그다지 주저하지 않는것도 중국이다.현재 관찰되는 대만해협 남사군도에서의 중국의 완강한 태도는 이를 증명한다.79년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도 그 예다. 셋째 경제적으로 보아 북한을 장래의 것이라 치더라도 한국은 현재 중국에 있어 경제적으로 중요한 파트너이다.한국자본의 중국 동북,화북,산동반도 등에의 진출은 상당한 수준이다.중국동북을 경유해 북한에 진출하는 전망도 보이고 있다.중국은 북한이 붕괴한다든지 모험적인 대외행동으로 질주하지 않는 한 한국과의 경제교류를 우선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중국으로서 국경에 있어 평화는 중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한정책은 다면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경제발전을 위한 평화로운 국경의 유지에 전력을 기울이겠지만 주권과 위신에 강하게 집착하는 경향도 때로 나타나곤 한다. 북한이 예를 들어 21세기의 제1사분기에 붕괴하게 될 때 중국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우선 붕괴를 방지하려고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그러나 가령 그것이 불가피하게 되면 다음으로는 한국과의 협조관계를 수립하려 할 것이다.한국주도의 한반도에 있어 민족통일이 중국동북의 조선족의 민족분리주의에 용기를 불어넣지 않는 한 이러한 제2의 시나리오에는 반드시 강한 저항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그러나 세번째로 중국동북의 조선족의 분리주의를 촉진하는 기운이 보이면 중국은 한국주도의 한반도통일에 전면적으로 반대해 올것이다. 세번째 시나리오의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중국은 스스로 경제발전의 템포를 가속시키려 할 것이고 북한의 붕괴를 막는데서 이익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완충지대로서의 북한의 의미가 중국에 있어 강하게 있는 한 북한의 붕괴는 가능하다면 저지하고 싶은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중국의 대한정책은 한반도를 둘러싼 다른 대국인 미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기본적 정책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근본적으로 4대국은 한반도의 영토변경,국경변경을 바라지 않는다.즉 현상유지다.한반도에 있어서 외교와 안전보장의 기본틀을 미국이 주도해 가는 한에 있어 중국의 대한반도 외교가 적극화하지 않을 것이다.오히려 미국주도의외교적 협조에 편승할까 말까를 놓고 한반도를 둘러싼 다국간 외고가 당분간 전개돼가지는 않을까.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의 경제대국화와 군사대국화가 21세기 제1사분기까지 급속히 진전돼 동중국해(서해)에 있어서도 중국해군이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에 대해서는 자유항행,자유무역의 구도에 장애를 미치는 형태로 전개될 것인가.그러한 시나리오하에서는 중국은 현상유지 대국으로부터 현상변경대국으로 이행해 가기 위해서 전혀 다른 대한정책을 전개하게 될 것이다.
  • 어선 야간입출항 금지/하오 8시∼새벽 4시

    ◎간첩침투·조선족 밀입국 막게/오늘부터 내년 4월까지… 위반땐 조업금지 대간첩대책기구인 민·관·군 통합방위본부(의장 김동진 합참의장)는 28일 하오 합동참모본부 회의실에서 안기부 경찰청 해운항만청 등 정부 관련기관의 실무자회의를 갖고 군 동계작전태세기간인 내년 4월까지 해안감시 및 경계태세를 강화하기로 했다. 통합방위본부는 취약시간대인 하오 8시부터 다음날 상오 4시까지 8시간동안 어선의 입·출항을 강력히 통제하고 이 시간대에 몰래 입·출항하는 선박에 대해서는 항만청 등을 통해 조업금지 등의 조치를 내리기로 했다. 합참의 한 관계자는 해안 경계강화는 ▲북한의 간첩선 침투 ▲조선족으로 위장한 간첩 침투 ▲조선족의 밀입국 등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 부자마을 영수촌(압록강 2천리:18)

    ◎「인민공사」 설립… 제철 등 20개 공장 직영/이익금 주민복지에… 식량­주택 싼값 공급/병원·유치원 무료… 농민에 퇴직금 실시/340 가구 “한가족”… 범죄자엔 촌민자격 박탈 요령성 심양시 우홍구 조화향 영수촌.그 전설적인 인물 황용세가 살았다는 20간 벽돌 기와집은 폐허의 기념물마냥 간신히 몸꼴을 지탱하고 서 있다.이에 비해 길을 마주하고 자리한 5채의 아파트는 마냥 산뜻했다.그리고 가로수가 늘어선 아스팔트길 한 가운데를 분리선 대신 화단으로 꾸며 마을 인상은 정갈했다. ○1인당 연소득 5천원 영수촌은 하남성 탑하시 임경향 남가촌과 더불어 중국에서 소문난 공산주의 마을이다.남가촌처럼 「모택동 사상으로 모든 것을 통솔하자」는 따위의 요란한 표어가 내걸리지 않았을뿐 영수촌은 인민공사중심으로 뭉쳐있다.중국대륙전체가 모택동의 극단적 사회주의는 멀리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나가는 마당에 웬 인민공사란 말인가.신기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을 3백40호 1천3백여명의 인구 가운데 조선족은 1백50호 6백여명이고 나머지는 시버족과 몽골족이 차지했다.인민공사 자산은 논 7백무(2만1천평),양어장 5백무(1만5천평),양식장 3군데,양계장과 양돈장이 각각1군데로 되어있다.이밖에 전구공장,신발공장,강철제련공장등 20개 기업을 운영중인 인민공사는 특수전구공장 하나만을 한국기업과 합작했다.그러니까 개인소유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영수촌청사는 제법규모가 컸다.장백현이나 관전현 청사와못지 않은 5층건물이었는데,촌지부 당무실에는 가죽소파까지 갖추었다.벽에는 심양시에서 내어준 「모범촌」이니 「문명촌」이니하는 따위의 인정서와 부유한 마을이라는 뜻의 「소강촌」이라는 증서가 붙어있다.평안북도가 선대의 고향인 촌 당지부 김광일서기가 마을을 찾아온 나그네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난 78년 개혁개방정책이 나와서리 82년까지 심양시 모든 농촌에서도 개체화를 실시했디요.그런데 영수촌은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것입네다.지금 우홍구 양식국장으로 가 있는 한족인 서정봉서기가 위에서 지시한 도급제를 마다하고 인민공사를 지켰디요.그 무렵에 마을 소득은한사람 연평균 1백80원밖에 안됐댔습네다』 중국 전역에 개혁개방이 한창일 때 삼양시에 건축붐이 일었다.서정봉서기는 이른바 사원(모택동시대에 농촌을 인민공사화 하고 농민을 사원이라고 불렀음)들을 이끌고 사방에 널린 모래를 파서 외지에 팔았다.1982년 한해에 모래를 판 돈 30만원을 들여 인철공장을 세웠다.공장을 가동한 첫 해에 1백30만원의 이윤을 올려 그 돈으로 주물공장,육식품 가공공장 등을 세우는데 재투자했다. ○대학생 전원이 조선족 그리고 공업수익을 농업분야에도 투자하여 볍씨 발아실,육모실,이앙기,수확기,탈곡기를 갖추는 등 영농기계화를 서둘렀다.지난해 영수촌의 농공업 총생산량은 8천여만원으로 1인당 연간 5천원꼴의 소득을 올렸다.현재 농업에 종사하는 사원은 전체 노동력의 6%를 웃도는 30명이다.80년대 까지만해도 공장일을 선호했으나 기계화영농을 실현한 이후는 사정이 달라졌다.어디서일을 하든 매달 4백∼5백원꼴의 노임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도시 사람들에 비해 돈쓸 이유가 별로 없다.식량의 경우 탈곡이 끝나면 국가 수매량을 팔고나서 나머지는 창고에 입고한 뒤 가공비나 보관비 없이 일정한 분량을 싼값에 배급받는다.또 주택은 아파트를 지어 시가의 33%를 쳐서 사원들에게 분양했다.본래살던 단층집들은 1간당 3천원을 보상해준 터라 오히려 아파트에 입주하고도 돈이 남았다.아파트도 여유가 많아 3개씩 가진사원도 여럿 있다. 겨울 난방비는 올해부터 1㎡당 4원을 책정했다.지난해 2원 보다는 비싸다고 하나 도시지역 18원에 비하면 거저다.그리고 병원도 공사에서 직영,치료비가 없는데다 소학교는 물론 탁아소와 유치원도 무상으로 운영하고 있다.다만 유치원도 무상으로 운영하고있다.다만 유치원에서는 식비 10원을 받는다.마을에 사는 학생들이 대학을 가는 경우는 연간 5백원의 장학금을 주는데,대학진학생 15명은 모두가 조선족이라 조선족들의 긍지가 대단했다. 중국에서 보기가 드문 농민퇴직금제를 도입한 이 마을은 촌에 호적을 둔 주민들이 나이만 차면 퇴직금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현재 퇴직인원은 1백20명으로 한해에 지급되는 퇴직금은 7만∼8만원에 이른다.그리고 지난 91년도에 18∼45살에 이르는 주민들을 모두 양로보험에 가입시키고 촌에서 보험금 40%를 보조해오고 있다.또 위지할곳이 없는 노인들에게는 돈을 대어 유료양로원에 보내는 것도 이 마을의 자랑이다. 토지나 기업을 집체화한 것은 물론 모택동의 공산주의를 모델로 한 것이다.다만 영수촌의 집체화는 모택동이 계급투쟁을 앞세워 경제를 소홀히 한데서 온 총제적 빈곤에서 탈피했다는 점이 다르다.그러니까 튼튼한 경제기초 위에서 촌민의 복리를 우선하고 있는 영수촌은 모택동시대와 등소평시대의 장점을 혼합한 제도적 창신을 실현한 것이다.시장경제를 전적으로 배척한 전통사회주의도,그렇다고 몇몇이 기업을 독점한 전통자본주의도 아니었다. 김서기는 뼈 있는 말을 던졌다.『세상의 길은 많디요.부득부득 외통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없습네』라고….그러면서 자신의 마을을 자랑이라도 하듯 육유의 시 한구절을 읊조렸다. 「산이 첩첩/물이겹겹/길 없나했더니/버드나무 우거지고 매화만발한 곳에/또 마을이 있네」 영수촌의 여러민족은 한집안처럼 화목하다.절도나 도박등 나쁜 풍속은 물론 다른 형사범죄가 없는 마을이다.하남성 탑하시 임경향의 공산당마을 남가촌은 모택동 저서를 한달에 한번씩 학습하면서 자아비평을 통해 마을을 정화한다고 하나 영수촌은 그런 일을 하지않았다.영수촌에서는 다만 마을 기풍을 어지럽히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물리고 연속적으로 못된일을 저지르거나 형사처벌을 받는 사람은 촌민자격을 박탈하고 있다. ○개인도 승용차 소유 김서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점심시간이 기울었다.김서기와 함께 당서기와 촌장의 정용차인 일제 도요타 승용차에 올랐다.이 마을에는 80여대의 자동차와 트랙터를 가지고 기동운수대를 운영하고 있다.그리고 공장마다 몇대씩의 트럭과 승용차를 보유한 이외에 10여가구의 촌민들은 개인소유 승용차를 굴린다는 것이다.외길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향수촌의 실상을 보는 것 같았다.
  • 한·중·일 「동북아 백색 삼각지대」로/중거점 히로뽕 밀매단 실태

    ◎현지 조선족과 결탁,거점 확보/조직 국제화… 일 야쿠자도 가담 25일 검찰에 적발된 「중국거점 국제히로뽕밀조·밀수단」사건은 우리나라가 더이상 마약거래의 변방국이 아님을 여실히 입증한 것이다.특히 지난 10월 미얀마의 마약왕 쿤사가 이끄는 세계최대 마약조직인 「샨 연합혁명군(SURA)」과 연계한 국내조직원이 수백억원대의 헤로인을 팔려다 적발된 데 이은 대규모사건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찰은 이날 발표에서 중국·한국·일본 등 동북아 3개국을 「백색 삼각지대」로 일컬었다.즉 헤로인밀조 및 밀수출지대로 이미 국제적 명성을 얻은 태국·미얀마·라오스를 잇는 「황금의 삼각지대」와 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을 잇는 「황금의 초생달지대」에 이어 국제마약거래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번 사건 수사결과 그동안 관계당국의 단속강화로 국내입지가 어렵게 된 히로뽕 제조기술자들이 단속이 허술하고 히로뽕원료도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중국으로 대거 건너가 현지의 조선족과 결탁,밀조공장을 차리는 등 활발하게 현지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현재 중국 현지에는 한국인과 조선족이 주축이 된 10여개의 대규모 히로뽕밀조조직이 당국의 감시망을 피해 성행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검찰은 밝혔다. 지리적으로 이들 조직의 1차 타깃은 한국일 수밖에 없다.따라서 앞으로도 중국·일본 관계당국과의 공조수사 등을 통해 체계적이면서도 장기적인 단속이 절실한 실정이다. 특히 야쿠자조직원이 밀매에 가담하는등 이번 사건에 일본폭력조직단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더욱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내 최대야쿠자조직인 「야마구치구미」와 「이나가와가이」소속 조직원이 중국 밀조조직으로부터 히로뽕 1㎏을 샘플로 받아가는 등 다량의 히로뽕을 밀매키로 계약을 체결한 사실에 비춰 검찰은 일본 폭력조직이 국내 마약조직과의 연계를 끈질기게 시도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검찰은 한·중·일을 잇는 국제히로뽕밀조조직의 실태가 처음으로 드러난 이번 사건수사의 성공요인으로 각국 수사당국의 치밀한 공조수사와 3개월에 걸친 끈질긴 기획수사를 꼽고 있다. 검찰은 지난 8월 일본 도쿄경시청 약물대책과로부터 『한국인 6명이 히로뽕 50㎏을 야쿠자에게 판매했다』는 첩보를 처음으로 입수했다.검찰은 이에 따라 두 나라 당국과 지속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중국 수사당국은 심양·장춘 등 현지의 밀조공장을,한국 검찰은 중국과 일본을 연계하는 밀수출경로를,일본경시청은 이들 밀매단과 야쿠자간의 거래내용을 중심으로 수사를 펼쳐왔다. 검찰은 특히 일본야쿠자에게 밀수출하려는 히로뽕이 포항을 경유,일본으로 가는 과정에서 미국 마약청 한국지부 직원을 재미교포로 위장시켜 이를 전량 매수하는 데 성공하는등 수사과정에서 「공작수사기법」(Sting Operation)을 적극 활용,총조직원 77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35명을 일시에 검거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편 오래전에 퇴직하기는 했지만 전직경찰관 3명이 이번 사건범행에 조직적으로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 백두산 천지/북,「종합탐험대」 탐사결과 공개

    ◎바닥곤충·조류 등 희귀생물 35종 서식/물맑아 용존산소 풍부… 겨울철 온천물로 성장/10년전 풀어놓은 산천어 대량 번식 해발 2천m가 넘는 고지인 백두산 천지에도 바닥곤충 6종과 조류 29종등 휘귀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최근 통일원이 공개한 북한의 「천지종합탐험대」의 탐사결과이다.천지에는 이밖에도 물속식물 38종과 북한이 10년전 풀어놓은 산천어들이 대량 번식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북한 중앙방송은 이같은 탐사결과를 상세히 보도하면서 천지에 서식하고 있는 산천어들을 김정일이 「천지 산천어」로 명명했다고 선전했다.이 방송에 따르면 이들 산천어들은 길이가 최대 70㎝에서 보통 40∼50㎝로 일반 하천의 산천어보다 크기가 3배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천지에 방류한 산천어들이 기대 이상의 성장속도를 보이고 있는 배경에 대해 북한측은 『물이 맑아 햇볕 투과율이 높아 용존산소가 풍부한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이들 산천어들은 번식기인 9월에 4천∼6천개의 알집을 10m 깊이의 천지 바닥에서부화한다는 소식이다. 더욱이 온천물로 인해 산천어들이 좋아하는 8∼12℃의 수온을 유지할 수 있어 금상첨화라는 얘기다.둘레 14.4㎞,깊이 3백84m인 천지는 19억5천5백만㎥나 되는 엄청난 저수량을 자랑한다. 이 저수량중의 30%는 바닥샘물과 천지 밑바닥 2군데서 솟는 온천물이라는 지적이다.나머지 70%는 눈녹은 물등 외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물이다.알에서 갓 부화된 어린 산천어들은 수온이 떨어지는 겨울철에도 온천물로 인해 성장하는데 지장이 없다는 게 탐사단의 분석이다. 북한당국은 그러나 이번 탐사결과 발표에서 한때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괴물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중국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연변방송이 천지에 공룡을 닮은 괴물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수차례 보도한 이후 지난해 외신들이 「백두산판 네스」의 존재 가능성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바 있다. 한편 천지 물속 뿐만 아니라 천지 주변 지표에도 1백91종의 곤충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이들 곤충들은 백두산의 강한 바람에 의해 천지 표면으로 실려와 산천어들에게 좋은 먹이가 된다는 분석이다.
  • 「벼농사의 대부」 황용세(압록강 2천리:17)

    ◎황무지 수십만평 논으로 개간/중국 장작림 군벌 정부의 수리국장 설득/수로공사 지원받아 혼하물길 끌어들여/장작림 위기때 군량미 500가마 보내 보답 「만주땅 넓은 들에/벼가 자라네 벼가 자라/우리 가는 곳에 벼가 있고/벼 자라는 곳에 우리가 있네/우리가 가진 것 그 무엇이냐/호미 바가지 더 있는가/호미로 파고 바가지로 담아/만주벌 거친 땅에 볍씨 뿌려/우리네 살림 이룩해 보세」 중국 조선족에게 유전되던 1920년대 민요다.이 노랫말처럼 중국 동북땅 어디를 가나 논이 있는 마을을 들어서면 조선족이 살았다.그러니까 중국의 동북지역인 만주의 벼농사 효시는 조선족인 것이다.방죽 만들어놓으면 물고기 생긴다고 물이 있는 황무지에는 으레 조선족이 몰려들어 벼농사를 지었다. 압록강유역의 벼농사도 역사가 꽤 오래되어 거의 한 세기에 이르고 있다.18 95년 요령성 집안 팔왕조촌에서 처음 시작했다.이어 무순일대에서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와 포가둔에 자리잡은 송병주·김만리가 처음 논에 볍씨를 뿌렸다.19 06년에는 평안북도 벽동사람인 김시정이 시작한 이래 19 23년에는 심양일대로 벼농사가 번져 5천ha의 개간답에서 해마다 15만섬의 벼를 거두었다. ○연간 순수익 6∼7만원 오늘날 요령성에서도 벼농사 하면 조선족이 꼽힌다.요령성 안산시의 삼대자조선족진 형양기조선족진에 사는 박행관(37)씨는 소문난 벼농사꾼이다.자그마치 5백무(약 1만5천평)나 되는 논을 빌려 광작을 하고 있는 그는 요령성의 우수한 청년농민 10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해마다 비료값과 품삯이 뛰어오르고 국가의 수매가격이 보잘 것 없는데도 불구하고 연간 6만∼7만원의 순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요령성의 조선족 농촌을 도는 동안 새로운 인물 한분을 주목하게 되었다.벼농사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황용세라는 인물이다.해방 이태전에 작고했는데,그의 아들인 수복(수복·63)노인이 심양시 우홍구 조화향의 영수촌에 살고 있다.수복노인은 황용세의 넷째아들이다.맏이와 둘째는 중국에 살다가 고인이 되었고 서울에 살던 셋째는 영수촌을 다녀간 이후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수복노인은 유일하게 남은 황용세의 아들인 셈이다.영수촌에서 처음 만난 수복노인은 거두절미하고 아버지 황용세의 마지막 죽음부터 장황하게 털어놓았다.아버지의 죽음이 원통하다는 이야기였다. 『이 마을에서 십여리 떨어진 마전자마을에 수레거(차)자를 쓰는 차씨네가 살았다.그런데 논물을 가지고서리 우리집과 그집이 크게 다툰 적이 있었습네다.마침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일군 헌병대에 근무하는 차씨네 아들이 있어서리 우리를 걸고 넘어졌습네다.우리 아버지가 팔로군이었다는 것이었디요.그래서 아버지는 감옥에 들어가 숱한 매를 맞고 석달만에 나왔디만 곧 돌아가셨지 뭡네까.차씨네는 광복이 나자 한국으로 들어갔디요.헌병대에 있던 아들은 한국에서 장관을 지냈다고 기래요』 황용세는 드라마틱한 일생을 살았다.1990년 평북 벽동에서 태어나 한일합병 이듬해 부친을 따라 요령성 홍경헌 홍묘자로 이주했다.이후 봉천(오늘의 심양)교외로 이사했다가 농사를 짓기 위해 아주 눌러앉은 지역이 조화향 영수촌.개간할 황무지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주위 늪지대 물을 끌어올릴 재간은 없었다.그래서 수십리 밖 훈하(혼하)의 물을 끌어오기로 결심했다.그러나 수로를 내는 데 필요한 자금은 막상 한푼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중국 동북지방을 장악한 봉천의 군벌인 장작림(18 73∼1928년)정부 수리국에 「수전개발에 관한 청구서」를 냈다.수리국장은 성공이 불투명한지라 깔아뭉갰다.황용세는 수리국장을 직접 찾아나섰다.보잘 것 없는 조선족 농사꾼을 만나줄 리 만무했다.황용세는 생각다 못해 화려한 마차를 타고 집에서 나서는 수리국장의 출근길을 네활개를 펴고 누워서 막았다. ○수리국장 출근길 막아 그의 생떼질은 주효했다.수리국장은 황용세를 자기 사무실에서 만나준 것이다.수전개발의 타당성을 인정한 수리국장은 그 자리에서 서류를 작성했다.자금은 수리국에서 대고 공사를 실패할 경우 황용세가 죽음까지도 감수한다는 서약서를 붙였다.공사를 착공했을 때 한족지주들이 봇도랑을 낼 땅을 내주지 않는등 방해했으나 장작림 군벌정부에서 군대를 풀어 결국 완공했다.깊이 2m,너비 10m의 봇도랑으로 물이 흘러들어 영수촌일대 황무지는 옥토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1924년 북경의 군벌 오패부(오패부·1872∼1939년)가 3개군단을 풀어 장작림을 치는 사건이 일어났다.황용세는 조선족이 만주에서 살려면 장작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군량미 5백가마를 장작림군벌에 보냈다.중국인 지주와 자본가가 두 군벌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을 때여서 황용세의 군량미 기부는 장작림의 환심을 샀다.감동한 장작림은 『그 고려인 대표를 만나야겠다』고 해서 황용세를 불러들였다. 황용세는 회색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차림으로 장작림을 만났다.훤칠한 체구의 황용세는 당당했다.그가 황씨라는 것과 요령성 홍경현 산골에 살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장작림은 더욱 감격하고 말았다.왜냐하면 장작림이 비적 두목시절 다른 패거리에 쫓겨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밭에서 들일을 하던 황용세 부자가 감춰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그이후 중국 동북3성 도독이 된 장작림은 홍경현을 참빗질하듯 황씨 부자를 찾았지만 찾아내지 못했다.그런 판에 황용세를 만났으니 장작림의 기쁨이 컸다. 장작림은 황용세에게 소원을 물었다.황용세는 의형제를 맺는 것이라고 했더니 장작림은 껄껄 웃었다. 『내,자네 나이 보다 열여덟이 많으니 아버지뻘이 아니겠는가.내 큰아들 학량과 의형제를 맺도록 하세』 장작림이 아들 학량과 황용세의 결의형제의식은 대단했다.당시 「성경일보」도 이를 크게 실었다.황용세의 세력도 막강해져 동북3성 실력자가 되었다.1928년 장작림이 일본군 소행으로 폭사하고 나서 학량이 동북군 총사령관 자리에 올랐다.그리고 1936년 장개석을 서안에서 감금하는 서안사변을 일으킨 학량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붙잡혔다.그런 와중에 몰락한 황용세는 친일파 차씨네와의 불화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새옹지마라고나 할까.황용세의 몰락은 공산당이 심양을 해방한 1948년 이전에 가문을 알거지로 만들었다.그래서 성분을 해방전 3년까지 본다는 공산당도 황용세의 아들들을 빈농으로 분류했다.
  • 조선족 한국행 밀항 주선 한국기업인 등 20명 체포/중국

    【홍콩 연합】 중국 공안당국은 길림성,흑룡강성,요령성 등지 거주 조선족 농민들을 한국으로 조직적으로 밀항시켜온 한국의 대중 투자 기업 대련시 동아해운공사 대표 김동진,대련시 김부수산공사 대표 손운태 등 한국인 20명 이상을 체포했다고 홍콩의 중국계 신문 대공보가 14일 보도했다. 김씨와 손씨 등 이들 한국인 20여명은 조선족 농민들 4백여명으로부터 1인당 인민폐 4만원에서 5만원까지(일반노동자 10년이상 월급)를 받고 20여차례에 걸쳐 한국행 밀항을 불법 조직해 체포됐다고 이 신문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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