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조선족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암 위험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정몽준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이영표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 용인시
    2026-08-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654
  • 위조달러 조직 연루 주러 북 외교관/손성필 대사 비서 유력

    【모스크바=류민 특파원】 모스크바 중국인과 중국계 조선족동포들을 상대로 거액의 위조달러화를 유통시키는데 북한인쪽 중개인으로 알려진 「북한외교관 안모영사」는 현재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의 비서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모스크바 소식통들이 11일 밝혔다. 모스크바 소식통들은 이날 『중개인 한금철이 밝힌 안영사라는 외교관의 인상착의를 들어볼 때 주요행사 때마다 현재 손성필 대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통역비서중의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본사가 입수한 북한인쪽 중개인 안모영사의 전화번호도 현재 손성필대사의 통역인겸 비서로 활동하고 있는 안모씨의 전화번호와 일치하고 있다.
  • 러 위조달러 중개인 한금철씨 일문일답

    ◎“북 외교관이 소개… 위폐인줄 몰랐다”/“큰 사업하는 사람”… 환전알선·통역 부탁/모두 구화폐… 전문가들도 식별 어려워 북한외교관이 포함된 달러위폐유통조직을 중국교포들에게 소개한 한금철씨는 9일 경찰 출두직전 본사기자와 만나 『나는 단순히 소개해준 사람일 뿐 위폐유통조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다음은 한씨와의 일문일답. ­어떻게 가짜 달러의 환전을 소개해주었나. ▲가짜인줄은 전혀 몰랐다.평소 잘 아는 사이인 북한대사관의 안모 영사가 하는 일이니 믿고 소개해주었다. ­안영사와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나. ▲안영사는 모스크바에서 사업을 하는 내 동생이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이다.그와는 동생사무실에서 자주 만나 술을 마시기도 했을 정도로 친하다. ­동생은 무슨 사업을 하나. ▲동생은 길림성 대외무역공사 연변분공사를 맡고 있고 또 모스크바에 사무실을 갖고 있다.1년전쯤에 동생으로부터 안영사를 소개받아 자주 만나왔다.(이 동생은 환전한 달러가 위폐임이 드러난 직후 중국으로 출국) ­환전제의는 누가 했나. ▲안영사로부터 처음 전화가 왔다.안영사는 「잘 아는 사업가가 있는데 현지화인 루블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안영사와 동행한 「사업가」들의 인적사항은. ▲30대 중반·후반의 북한말씨를 쓰는 사람들로 보였다.안영사가 「가나를 오가며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 그렇게 믿었다.이들은 내가 중국인 상인을 소개해 준다고 하니까 「중국말을 모른다」면서 나에게 통역을 부탁하기도 했다. ­북한인들이 가지고 온 돈이 가짜라는 것을 언제 알았나. ▲피해자들이 돈을 마지막으로 바꾼 하루 뒤인 4월3일 나의 숙소로 몰려와 「바꾼 돈이 모두 가짜」라며 안영사 일행을 찾아내라고 했다.내가 안영사에게 전화를 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안영사의 연락처는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번호임이 확인됨).피혜자들은 나를 자신들의 숙소인 「모단」여관의 지하실에 가두었다.나는 하루동안 감금돼 있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빠져나왔다.이 사이 피해자의 일부가 경찰에 신고한것 같다. ­북한인들이 가짜달러화를 어딘가에서 대량으로위조한다고 하는데. ▲피해자들은 위조달러가 전문가들도 감별기 없이는 진위를 가리기 힘들 정도라는 말을 했다.달러는 모두 구화폐였으며 1백장씩 묶음으로 가지고 왔는데 돈다발에는 가끔 진짜달러가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다. ­피해자는 어떤 사람들이며 피해규모는. ▲옷도매상을 하는 중국인 상인들이 집단으로 모여사는 레잔스키 프로스펙트의 「모단」에서 20여명이,중국국적의 조선족 동포 밀집촌인 판필로바 18번가 여관의 중국인·조선족상인 10여명등 모두 30여명은 넘는 것같다.
  • 북한군 초소 초병과 대화(북녘국경지대 지금은…:2)

    ◎“지구전체 깨부술 무기 갖췄다” 초병 큰소리/“전쟁나면 평양 유리한장 안깨지고 승리” 허세/“못살고 있는 것 아닌가”에 “그럭저럭 살면되지”/“남조선이 무슨 힘으로… 경수로 미서 준다” 오인 북한의 판문점 무력시위로 군사분계선에 감돌고 있는 팽팽한 긴장감은 중국­북한 국경지역에서 만난 북한군 초병과의 대화에도 짙게 배어 있었다. 국경지역 초소의 북한군 초병은 서울신문 취재팀과의 「국경의 대화」에서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전쟁이 일어나면 미국까지 소멸시킬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국경의 대화는 중국 길림성 개산둔 앞 두만강 건너 50m쯤에 있는 북한군 초소의 초병과 이루어졌다.대화는 취재팀이 한국에서 왔다면 응할 것 같지않아 조선족 안내인을 통해 이루어졌다. 초병은 한반도 전쟁 얘기가 나오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마치 준비라도 돼있었다는 듯 북한 선전기관과 똑같은 말을 쏟아냈다.『전쟁이 나면 평양이 잿더미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갑자기 목청을 높이며) 무슨 헛소리야.우리가 싸움을 하면 평양의 유리한장 안깨지게 하고 이길수 있다』고 말했다.『우리는 지구의 땅덩어리를 모두 깰수 있는 군사장비를 갖추고 있다』고 큰소리 친 그는 『남조선에서 우리에게 싸움을 걸고 있다.그렇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미국』이라고 강조했다. 양강도 대흥단이 고향이라고 밝힌 그는 북한의 경제상황이 외부세계에 비해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너네 못살고 있는 거 아는가』라는 질문에 『왜 몰라』라고 강한 사투리로 말했다.『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실정에 따라 그럭저럭 살면 된다』고 대답,북한주민들이 오랜 경제난속에 체념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시사했다.『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묻자,『(썩은 옥수수 묶음을 비스듬히 깔고 누우며) 보다시피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 등으로 국경에서는 밀무역이 성행하고 있다.북한군 초병도 밀무역을 적극적으로 적발하지는 않고 있었다.그러나 북한 초병은 『중국과 밀무역을 하다 붙잡히면 3년동안 강제노동을 해야한다』고말했다.하지만 국경에서 밀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3년동안의 강제노동 위험보다는 하루하루의 삶이 더 절박해 보였다. 그는 북한에 제공되는 경수로가 한국형이 아니라 미국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그는 『남조선이 무슨 맥(힘)이 있어 경수로를 제공해.남조선은 다 남의 나라 경제지.제 나라 경제가 어디 있어.우리는 미국 경수로 받기로 했어』라며 한국형 경수로 제공은 전혀 상상도 못하는 듯 했다.북한 초병의 말은 북한 당국이 경수로 제공은 미국이 한다고 거짓말하고 있음을 증언한다.정보가 통제된 북한주민들은 신포에 미국형 경수로가 건설될 것으로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북한군 초병은 어깨에 총을 메고 초소 밖으로 나와 염소를 끌고 한가롭게 왔다갔다 하기도 했다.그는 『염소는 초소에서 기르는 것이며 심심해서 끌고 다닌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그는 『노동신문은 허위보도를 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그는 『당보는 허위지만 꼭 있어야한다.당보는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오랜 국경근무를 통해얻은 지식으로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음을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듯 했다.그는 18세에 참군(입대)해서 8년동안 국경에 근무해오고 있다고 밝혔다.『군복무기간은 10년이지만 10년도 잠깐이라구.2년만 있으면 집으로 돌아간다』고 그는 말했다.그러나 교대시간은 비밀이라며 말하지 않았다. 그는 『평양 학생들이 데모하는 거 아는가』라고 묻자 『데모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회의』라고 대답했다.그때 사진기자가 멀리서 사진을 찍으려 하자 그가 갑자기 욕을 하며 일어나 총을 들고 뛰어왔다.40m의 강폭을 사이에 두고 30분간 계속된 국경의 대화는 북한 초병의 위협속에 끝났다.북한초병은 사진찍는 것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잠시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러나 국경은 다시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갔다.하지만 그것은 불안한 평온이었다.〈중국 화용에서=김규환·김명환 기자〉
  • 북 위조달러 조직 「러」서 적발/외교관 연루… 1백만불 환전사기

    ◎본사특파원,중개 조선족 접촉 확인 【모스크바=류민 특파원】 모스크바 주재 북한외교관이 낀 대규모 미 위조달러 유통조직이 러시아 연방보안당국에 포착돼 조사받고 있는 것으로 10일 알려졌다.〈관련기사 21면〉 이같은 사실은 북한인들의 위조달러화 유통을 도와주다가 경찰에 소환된 중국계 조선족동포 한금철씨(41·연길거주)를 출두직전 기자가 자택에서 만나 확인한 결과 밝혀졌다.중개를 했던 한씨는 현재 러시아당국에 여권을 압수당했으며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한씨는 『지난 3월말과 4월초 평소 알고 지내던 북한대사관의 안모영사(30대중반)가 북한인 사업가 3명을 데리고 와 달러를 루블화로 바꾸는데 도와달라고 해 이들을 모스크바에서 일하는 중국인 상인들과 중국국적의 조선족들에게 소개해주었다』면서 『그러나 이들이 바꾸어간 1백여만달러가 거의 가짜로 판명났다』고 밝혔다. 한씨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하오 안영사로부터 『아프리카의 가나를 오가며 사업을 하는 일행3명과 함께 갈테니 달러를 사려는 사람을 소개해달라』는 전화를 받고 안씨일행을 모스크바시내 레잔스키가(가)에서 중국인상인들에게 소개했으며 이튿날까지 15∼20명의 중국인 상인들이 각자 1만∼10만달러씩 모두 80여만 달러를 안씨일행으로부터 환전했다는 것이다.
  • 회색도시 혜산(북녘국경지대 지금은…:1)

    ◎황폐한 민둥산 아래 혜산이/홍수에 씻긴 계단밭 심각한 식량난 상징/압록강 빙판서 중국인과 먹거리 “암거래”/초병감시 피해 빨래터서 아낙네들 물건 흥정/오징어·명태 서너마리 입쌀·담배 등과 맞마꿔/“왜 양말 안신느냐”에 “건강해서…” 신경질적 답변 중국 국경에서 바라본 북한의 국경도시 혜산은 극심한 식량난과 경제난을 겪고 있는 오늘의 북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혜산은 중국 길림성 장백현에서 불과 2백m.우중충하고 낡아빠진 건물로 가득찬 회색빛 도시 혜산은 역사의 시계가 정지한 듯한 북한의 오늘을 상징하고 있었다. 연길시에서 자동차로 18시간.혜산은 압록강건너 바로 코앞에 나타났다.인구 3만명의 양강도 도소재지.그러나 중국의 도시와는 달랐다.중국의 도시들은 경제개발등으로 활기에 넘쳐있으나 혜산은 도소재지임에도 불구하고 활력과 생명력을 잃어버린 도시처럼 보였다.밤이 되자 혜산은 중국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휘황찬란한 간판은 물론이고 전깃불조차 찾기 어려운 적막의 도시로 변했다. 혜산을 더욱 초췌한모습으로 만든 것은 「황폐한」뒷산이었다.한톨의 양식이라도 더 생산하기 위해 밭으로 개발한 뒷산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앙상한 모습이었다.자연의 본래 모습을 잃은 「개발된 산」은 홍수의 원인이 되어 오히려 식량난을 부채질하는 역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장백현 국경다리에서 4㎞쯤 떨어진 오연포 공업구.오연포와 바로옆에 있는 혜산시를 왕래하는 북한사람은 대부분 등에 배낭 같은 것을 지고 있었다.중국인 팽덕리씨(여·47)는 『그들이 지고 있는 것은 먹을 양식』이라고 말한다.그녀는 『옥수수나 감자면 좋은 편이고 칡뿌리나 풀뿌리도 있다』고 설명한다. 장백현 강둑에서는 자주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그러나 그것은 흥에 겨운 낭만적 휘파람 소리가 아니다.강둑 군데군데 모여있는 3∼5명의 사람이 밀무역을 하기 위해 북한인을 불러내는 생존을 위한 휘파람 소리다.팽씨는 『밀무역이라야 북한인은 명태나 낙지(마른 오징어를 지칭) 서너마리를 내놓고,중국사람은 입쌀(현미) 2∼3㎏과 담배 몇갑을 주는 정도의 물물교환』이라고 말한다. 하오 2시.국경다리에서 오연포에 이르는 압록강 얼음위에는 사람이 10여명씩 군데군데 모여 떠들썩하다.1백m도 안되는 강폭 얼음위에 밀무역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북한의 아낙네들이 얼음을 깨고 만든 물웅덩이 앞에 앉아 빨래를 하거나 물깃는 시늉을 한다.그 주위를 10여명의 중국사람이 둘러싼다.북한 초병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다.그 안에서 물물교환식 밀무역이 이루어진다.세계는 컴퓨터 판매가 이루어질 만큼 정보화 시대로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북한의 국경에서는 원시적 물물교환이 중요한 삶의 하나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북한 초병의 감시의 눈을 피해 20대 북한 여인이 흥정을 한다.가난에 찌든 모습의 그녀는 양말도 없이 얇은 비닐신만 신고 얼음위에 앉아있다.『왜 양말을 신지 않았느냐』고 묻자,『건강해서 신을 필요가 없다』고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인다. 그 옆에서도 한 아낙네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빨래」를 하고 있다.오른손으로 방망이질을 하면서 왼손으로는 품속에서 낙지를 얼른 꺼내 보이고는 품속에 다시 넣었다.그런 동작을 서너차례 반복한뒤 그녀는 빨래를 머리에 이고 돌아갔다.『그녀의 동작에는 언제,어디서 다시 만나자는 암시가 있다』고 조선족 곽모씨(37)는 설명했다. 그녀가 돌아간 후 「아기」를 업은 다른 아낙네가 강을 건너온다.사람들이 다시 그녀를 둘러싼다.그러나 그녀가 업은 것은 아기가 아니다.밀무역할 명태나 낙지를 아기처럼 위장한 것이다.거래가 이루어진뒤 그녀는 다시 국경을 넘는다.밀무역을 하던 조선족 이모씨(32)는 『저렇게라도 밀무역하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축에 든다』고 말하고 『밀무역해봤자 손해볼 때가 많지만 북한주민이 불쌍해 계속한다』고 털어놨다. 국경에서 밀무역을 하는 북한인은 대부분 여자들이다.하루 하루 고달픈 생활의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북한 아낙네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밀무역을 한다.그러나 국경초소에 있는 북한군의 감시의 눈도 밀무역은 눈감아줄 때가 많다고 한 조선족은 말했다.먹을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란다. 가난이 일상화된 북한인의고달픈 생활.영하의 날씨는 그들의 삶을 더욱 고달프고 춥게하는 듯했다.그러나 국경에도 멀지않아 봄은 찾아올 것이다.국경의 봄은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되겠지만 북한사람의 생활에는 「봄」이 찾아올 것 같지않다.국경도시 혜산은 내일도 한 겨울일 것 같다.〈장백현(중국)=동북아기획취재팀 김규환 기자〉
  • 밀입국 조선족 1백26명 검거

    【부산=이기철 기자】 법무부 부산출입국관리사무소는 6일 해상을 통해 밀입국을 시도하던 중국교포 김용식씨(39·중국 길림성거주)등 1백26명을 적발,출입국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조사 중이다. 김씨 등은 5일 상오 1시35분쯤 부산 기장군 기장읍 월전마을앞 해안에서 통영선적 유자망어선 광봉호(77t)를 타고 밀입국을 시도하다 해군 제3함대 경비정과 울산 해경에 의해 검거됐다.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또 이 배의 선주와 선장·선원들의 신원파악에 들어가는 한편 이들의 밀입국을 주선한 밀입국알선조직이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조사 결과 이들은 한사람당 중국돈 4만∼5만원(한화 4백만∼5백만원)을 주기로 하고 지난달 29일 하오 10시쯤 중국 대련항에서 출발,공해상에서 광봉호로 옮겨 승선한 것으로 밝혀졌다. 출입국관리사무소 관계자는 『현재까지 적발된 조선족 밀입국단 중 이번이 최대 규모』라며 『이들의 정확한 입국경로를 조사한 뒤 모두 중국으로 강제퇴거조치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일 야쿠자­북 공관­국내조직 연계/국제 히로뽕밀조단 적발

    ◎중서 2백억대 제조… 국내 반입/3명 구속·3명 수배/부산지검 【부산=김정한 기자】 일본 폭력조직 야쿠자 및 북한공관원 등과 연계해 중국에서 2백억원대의 히로뽕을 밀조,국내로 밀반입한 일당 6명이 검찰과 안기부에 적발됐다. 부산지검 강력부(부장검사 최재원)는 4일 중국산 히로뽕 6.3㎏(시가 2백억원상당)을 밀조한 뒤 국내에 밀반입하려던 연락책 정현준씨(57·동영무역상사 대표·부산시 사하구 신평동 럭키무지개타운 1동 103호)와 운반책 김창규씨(60·덕은무역 전무·”” 괴정4동 1081의 1),자금책 이대근씨(40·무역업·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35의 1)등 3명을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히로뽕 6.3㎏을 압수했다. 검찰은 또 히로뽕제조책 이수영씨(54·무직·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947의 9)와 조선인인 제조보조 김성호씨(30·중국 요령성 반금시),김정언씨(50) 등 3명을 수배했다. 검찰에 따르면 히로뽕제조책 이씨는 지난해 8월 중국 요령성 심양시 고려호텔에서 정·김·이씨 등 3명과 만나 히로뽕을 밀조해 한국등지에 판매키로 하고 지난 1월 중순 밀조책 이씨의 현지처인 김영애씨(27)의 집(요령성 반금시) 창고에서 중국산 염산에페드린을 원료로 히로뽕 6.3㎏을 만든었다. 운반책 김씨 등은 이어 히로뽕을 수입품컨테이너 속에 숨겨 한·중 정기컨테이너선인 조양상선 소속 조양랜드호(1만2천8백10t급)에 싣고 지난달 17일 부산항을 통해 밀반입하려다 첩보를 입수한 수사기관에 적발됐다. 검찰수사결과 이들은 지난해 8월 북한무역업체들과 거래하고 있는 조선족 무역상 박정호씨(36·중국 광동성 광주시)의 알선으로 북한영사관 직원에 부탁,독일산 염산에페드린 4백㎏을 북한을 통해 중국으로 반입한 뒤 히로뽕 3백㎏(시가 9천억원상당)을 제조,일본 야쿠자조직에 팔려다 북한내부사정에 의해 미수에 그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순도가 뛰어난 독일산 염산에페드린을 구입하기 위해 북한상대 무역상인 박씨에게 8억원을 지급하기로 하고 북한 무역회사가 독일로부터 적법하게 수입하는 것처럼 신용장을 개설했다.
  • 조선족간부의 어제·오늘(압록강 2천리:28)

    ◎문혁후 거의 복권… 조선족 자립에 앞장/부빈사업 보조금… 인삼재배 등 부업 장려/경제문화교류협 창립… 요령성­남한중기 교량역도/문혁때 간첩누명 옥고… 민족의식 새로이 한국과 같은 나라는 단일민족국가라서 국가와 민족이 공통의 의미를 갖지만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그래서 요직을 차지한 간부들은 자신의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을수 없다.더구나 소수민족의 간부가 자기민족의 이익을 도외시하면 욕보따리를 등에 지니고 다니기 십상이다. ○의사차출 무료진료 요령성 관전현 전 부현장 김창영(67) 선생은 민족문제를 염두에 둔 좌우명까지 가지고 있다.그는 본래 평안북도 초산태생으로 교원을 지내다가 현 공청단위원회 서기로 있을 무렵 문화대혁명을 맞았다.조선간첩의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터득한 것이 민족문제였다.누명을 벗고 나와 지난 70년대말 현 부현장이 된 그는 조선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해냈다. 『관전현은 산골이라 지금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디요.그러니 70년대와 80년대는 오죽했겠습네까.1982년도인가 기래요.영전진 비구촌에 갔더니 조선족 10여호가 사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디요.목불인견이란 말이 실감납데다.집이란 거이 비막이 바람걸망도 안되고 옷은 조각보 저리가랄 정도로 남루했디요.병이 나도 약이 있나….물 한모금 제대로 마실 우물 조차 변변하지 않더란 말입네다.소 여물 썰 작두가 없어서 식칼을 썼으니 할말이 없디요』 그는 농촌을 돌아보고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부빈사업을 직접 틀어쥐었다.현정부 산하의 각 부서와 향과 진간부들에게 지시하여 가난한 집 몇가구씩을 떠맡겼다.그리고 자신은 비구촌을 손수 챙겼다.비구촌을 책임진 그는 위생국장을 불러 의사를 차출,무료진료는 물론 수리국에서 돈을 대어 상수도를 놓았다.은행 대부금을 끌어 농사 이외의 부업을 장려하는 다종경영을 부추기기도 했다. 진강향 녹강촌에도 조선족 10여가구가 살았는데,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매 한가지였다.털면 먼지밖에 나올 것이 없는 가난 뿐이었다.김창영선생은 당시 부현장 직책을 빌려 1만5천원의 보조금을 내려보냈다.그돈으로 인삼을 재배하고 그물을 사 민물고기를 잡았다.마을 강에서 서식하는 이른바 해방고기라는 지조공어를 일본에 전문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비옥한 땅과 수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사람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그 격동의 시기가 지나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나름대로 구상했다.단동시 통전부에 있다가 1986년 퇴직한 김인형(69) 선생도 그런 사람이다.한때는 잘나가는 당원으로 승승장구하는 촉망되는 인물이었으나 문화대혁명에 된서리를 맞고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단동시에 예배당 건립 그는 경상북도 의성 태생으로 1930년 길림성 반석현으로 이주해온 이후 혁명에 참가했다.1950년에는 지원군에 들어가 요동성 재정청 군비관 주임과 원을 맡았고,이후에는 안동지구 당위원회 감장위원 겸 농업감찰과 과장으로 일했다.이 때에 문화대혁명을 만나 졸지에 조선간첩의 누명을 쓰고 꼬박 10개월간 감옥에 갇혔다 나와서는 오늘의 향에 해당하는 양목공사로 쫓겨가 2년간 노동개조를 당했다. 『문화혁명이 끝나서 통전부 부부장을 맡고 보니 오십고개를 넘었더란 말입네다.팔팔한 나이 덧없이 까먹고 일할 시절이라야 칠팔년밖에 안남았습데다.기래서리 지나간 세월보다 곱배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디요.문화혁명이 끝나고 나서 조선족을 위해 큰 일을 세가지 했다고 자부합네다.그거이 보람이라면 보람이디요』 그가 문화혁명 이후 단동시 통전부에 자리를 잡고 처음 한 일은 조선족의 우파 낙인을 벗겨주는 것이었다.그래서 무장부 부부장 직책 이외에 단동시 당위원회 우파평반사무실 주임 자리 하나를 더 맡았다.우파평반이란 우파의 누명을 벗긴다는 뜻인데,그는 우파로 몰려 농촌으로 쫓겨간 사람들을 다시 도시로 불러들였다. 그가 문화대혁명 이전의 제자리로 돌려놓은 사람들은 꽤 많다.조선족학교의 출중한 교원이었던 이철과 오학중,사정부 민족과에 있던 이화의와 단동시 청년단위원회 소년부장 홍두표가 그들이다.이화의의 경우 민족사업을 했다는 이유로 민족분열주의자로 몰려 옥살이와 노동개조를 당했다.허무한 정치투쟁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이들은 다시 단동시로 돌아와 일정한 보상도 받고 옛날의 일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단동시에 예배당을 세우는 데도 공헌했다.단동시로 이름이 바뀌기 이전 단동시내에는 두곳에 예배당이 있었다.역전과 제2중학교 옆에 있던 두 예배당은 문화대혁명 때 건물을 빼앗기고 교인들도 강제 해산되었다.그가 문화대혁명 이후 몸담았던 통전부라는 부서는 통일전선사업부의 준말로 종교및 기타 단체를 관장했기 때문에 이들 예배당을 세워주었다.상급 정부에 건의하여 64만원의 자금을 타내어 예배당을 재건했던 것이다. ○한족에도 우리말 보급 문화대혁명 뒤에 단동시에서 사라진 조선족 고중의 문을 다시 열게 한 사람도 김인형선생이다.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중이 단동시에 있었으나 문화혁명 때 관전현으로 내몰렸다.이에 따라 단동시와 다른 현에서는 중학교까지는 지방 조선족학교에 보내고 교육의 질이 낮은 산골 관전현 조선족 고중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다.그래서 조선족 아이들이 한족 고중에들어갔다. 그는 관전현으로 옮긴 조선족 고중을 다시 단동으로 유치하기로 결심했다.결국 시 당무위원회 재가를 받아 지난 1982년 국가로부터 60만원의 자금을 받았다.그리고 압록강 기슭에 3층짜리 교사를 지었다.또 각지에서 실력있는 교원들을 초빙하고 교원들의 주택과 가족들의 일자리도 마련해주었다. 중국의 조선족 제1대 간부들은 비록 나이가 들어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더라도 민족을 위해 일하는 이들은 많다.요령성 민족사무위원회 정법처 처장 자리에 있을 때 요령성 조선신문 복간과 조선민족과학기술보급회 창립에 공헌한 우철희(65) 선생은 지금 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상근 부이사장겸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이 협회는 요령성내 1백40개 시와 3천여개 기업과 연계를 맺고 한국의 중소기업과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민간차원에서 발해대학,조선족실험직업학교,심양세종조선어학교 등을 꾸려왔다.심양세종조선어학교에서는 조선어를 모르는 청년과 학생들,외사와 무역부문에서 일하는 한족에게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고 있다.이미 초급반과 고급반을 졸업한 사람이 5백여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 조선족여성 상대 신종 결혼사기/흑룡강성 최진숙씨 서울신문에 호소

    ◎한인이 위장서류결혼뒤 알선료만 챙겨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에 사는 조선족 최진숙씨(42·여)는 한국에 취업하려고 위장결혼을 했다가 돈만 뜯긴 딱한 사정을 24일 서울신문사에 편지로 호소했다.이른바 코리안 드림의 피해자다. 최씨는 남편과 사별하자 그동안 진 빚을 갚기 위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한국행을 결심했다.인민학교 교사직도 그만두었다. 한국행 비자를 받으려면 친·인척의 초청이 있어야 한다.초청자가 없는 조선족으로선 한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수소문 끝에 한국 국적의 위장결혼 브로커 전명선씨를 만나 박기화씨(42)를 소개받았다.박씨는 한국의 호적 등 결혼에 필요한 서류를 지니고 있었다.지난해 8월 중국 당국에 박씨와 결혼한 것처럼 신고했다. 어렵게 빌린 중국돈 4만1천위안(4백10만원)을 전씨에게 알선료로 주었다.중국의 교사 월급이 3백위안이므로 무척 큰 돈이다.한국에 가기만 하면 모두 갚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함께 한국으로 가기로 한 날 공항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그 뒤로도 영영 무소식이었다. 빚에 쫓기자 멀리 떨어진 언니 집으로 숨었다.매달 5%씩 이자는 불어난다.박씨가 나타나지 않아 이혼도 할 수 없게 됐다. 취업알선 사기범들에 당한 대표적 케이스다.위장결혼으로 국내에 취업한 조선족 여성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자 중국에서 위장결혼을 알선해 주고 돈만 챙겨 달아나는 수법이다.국내 입국까지 책임지던 종전에 비해 보다 악랄해진 것이다. 경찰청의 인터폴 관계자는 『최근 이같은 정보들을 접수,현지 대사관을 통해 피해자를 파악 중이며 중국 공안당국과의 공조수사를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김경운 기자〉
  • 남한 생필품 북에도 들어간다/중국통해 이산가족에 보내져

    ◎의류·식품이 주종… 감기약·건전지도 많아/고기구하기 힘들어 「인스턴트 스프」 인기/옷은 질감 좋으면 의심… 조잡한 무늬 보내 남한의 생필품들이 이산가족들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보내진다.물론 중국을 거친다. 스웨터·청바지·내의·양말 등 의류와 라면·밀가루·식용유 등 의류와 식품이 주종이다.항생제와 감기약 등 약품,화장품,이불호청,건전지도 있다. 실향민인 김진원씨(가명·66·서울 은평구 녹번동)는 17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극소수 이산가족들이 중국에서 다량의 생필품을 인편이나 소포로 북의 가족에게 보내고 있다』고 털어놓았다.김씨도 그 중의 하나이다.북에는 누이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고기를 구하기 어려운 북의 가족들은 특히 국산 인스턴트 수프를 제일 반긴다』고 말했다. 북한의 세관검사와 외사부의 검열을 따돌리기 위해 남한산임을 알 수 있는 표시나 포장은 모두 없앤다.옷도 너무 화려하거나 질감이 좋으면 의심을 받기 때문에 조잡한 무늬의 싸구려라야 한다. TV·냉장고·라디오·재봉틀·자전거 등공산품은 생산지를 속일 수 없고 운반도 어렵기 때문에 「피발시장」이라 불리는 도매시장에서 중국산을 사서 보낸다. 무역업을 하는 김씨는 지난 93년 6·25 때 헤어진 북한의 부모와 누이의 소식을 들었다.92년9월 남북교류협력 부속합의서가 채택돼 제한적이나마 서신교환과 상봉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압록강 근처 단동에서 북한을 오가는 조선족 상인들을 통해 50여년 전의 황해도 개성시 주소를 내밀고 가족들의 생사를 수소문했다. 그러던 중 부모님은 세상을 떠났고 누이는 고향에,큰 조카는 평양에 산다는 편지를 받았다.그 뒤 편지를 주고 받으며 모두 11차례 중국으로 건너가 생필품과 달러를 보냈다. 북한의 조카는 『안전원,외사부 지도원,도당 간부 등의 뇌물 요구가 늘고 있으나 주위에서는 「중국에서 물건이 온다」며 부러워한다』고 인편으로 알려왔다. 남한의 이산가족은 단동 뿐 아니라 두만강변 도문(도문)에도 진을 친다. 김씨는 『끊임없이 돈과 물건을 보내달라는 것을 보니 경제사정이 무척 나쁘다고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며 『올해 셋째 조카가 시집을 가는데 누이로부터 「시댁에서 매우 귀한 휘발유를 혼수로 가져오라고 해 걱정」이라는 편지를 받고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 독립운동가 양세봉 장군(압록강 2천리:27)

    ◎재만조선군 총사령… 20년대 항일전 주도/노구대전투 등 승리 이끌어… 군관학교도 설립/해방직후 평야서 유해모셔… 서울선 훈장 추서/조선족은 요령성 신빈현에 흉상 건립해 추모 요령성 신빈현 왕청문향 조선족학교 운동장에는 항일독립운동가 양세봉(1896∼1934년)장군의 석상이 서 있다.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생애를 마감한 그의 석상은 지난 1989년8월29일 낙성되었다.신빈현과 왕청문 지방정부,북경과 동북3성의 50여개 단체대표 5백여명이 낙성식에 참석했다.중국 인민대표대회 대표이자 중국인민해방군 전 40집단군 정위였던 정순주소장,중국 공안부 심계실장 서세명의 아들 서철 등 굵직굵직한 조선족 인사들이 나왔다. 장군의 동상은 중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의 모금으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큰 뜻을 지닌다.석상 건립을 발기한 사람은 신빈현문화관 전정혁(41)씨인데,그는 자전거를 타고 장군의 활동무대였던 옛 흥경땅 신빈현 일대를 모두 누볐다.석상건립을 제의하면서 장군의 항일운동사료도 함께 수집했다.그 결과 신빈현 당위원회 전 부서기 최선죽(63)선생 같은 조선족이 발벗고 나섰다.요령조선문신문,길림신문,국가민족사무위원회,연변대학,연변조선족사학회,흑룡강조선말방송,민족출판사가 후원을 자청했다. 조선족의 의견이 집약되자 공직에서 정년퇴직한 노년층 조선족이 주동이 되어 모금운동에 뛰어들었다.동북3성은 물론이려니와 북경 천진 등지를 메주 밟듯 누볐다.침대차 한번 타지않고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대합실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신빈현 조선족문화관 전 관장 김순화 선생이 무순시 제1조선족중학교에서 양세봉장군의 독립투쟁업적을 강연하고 돌아온 이후 학생들이 2천8백87원을 모아 보냈다.중국 전역의 50여개 조선족단체와 1천4백여명의 개인들이 석상 건립비로 맡겨온 돈도 10만원에 달했다. ○3·1운동직후 독립군 투신 중국의 조선족 뿐 아니라 중국에 와 있는 한국인도 성금을 내놓았다.중국에 주재한 한국한화집단 북경판사처(대표 신영수)와 동북농업대학 초빙교사(교환교수)인 한국 사진작가 유은규선생과 그의 일본인 부인 도타이쿠코여사도 동참했다.그럭저럭 모두17만5천원이 모금되어 심양 노신미술학원 조각학부 주임 전금택선생에게 조각을 맡겼다.그래서 기단을 포함한 높이 5·4m의 양세봉장군 흉상이 제막되었던 것이다. 양세봉장군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이다.서봉,윤봉이라고도 불렀는데 호는 벽해다.1919년 3·1운동 직후 평안북도 삭주 천마산을 근거로 한 천마산대 독립군에 첫발을 들여놓았다.다음해 압록강을 건너가 광복군총영을 거쳐 1923년 육군주만참의부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으로 활약했다.1929년 재만 각 단체가 통합하여 국민부를 조직했을 때는 국민부 소속 독립군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이 되었다.그리고 조선혁명군을 개편하여 총사령이 되어 일본군이 차지한 영릉가성과 흥경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는 혁명군을 보충하기 위한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노구대전투와 쾌대모자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1932년 일본경찰의 밀정 박창해의 계략에 빠져 두도구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치열한 전투끝에 전사했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해방이후 북한 당국이 평양으로 데려갔다.한국에서는 그의 빛나는 독립운동의 업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고 한다.장군의 직계 가족들은 평양으로 갔지만 동생 양시봉의 부인과 자녀들은 지금 요령성 청원현 북삼가촌에 살고 있다.양시봉의 부인이자 장군의 계수인 김화실(85)할머니는 시숙 양세봉의 행적을 어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똑똑히 기억해냈다.열세살 나던 1924년에 양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할머니는 아직도 총기가 대단했다. ○일 밀정 계략에 빠져 전사 『흥경 진코우츠로 시집을 왔디요.위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에다 청춘과부가 된 시숙모가 아들 둘을 데리고 얹혀 삽데다.그리고 시숙 양세봉장군은 독립운동을 하느라 집에 계시지 않고 큰 형님만 함께 사셨디요.거기에 둘째 시숙 내외·시누이·우리 내외를 합해 열두 식솔이 우굴댔단 말입네다.강지주네 밭 닷새갈이를 소각했지만 입에 풀칠하기 바빴디요.그 잘난 살림에 독립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래 들락거렸으니 사는게 말이 아니었습네다』 양씨 일가의 집은 당시 독립군의 연락처이자 비밀숙박처였고,믿음직한 후방 기지였다.독립군이 묵는 날이면 없는 살림에 한 끼니라도 더 따뜻하게 대접할 요량을 대고 삼동서가 애를 썼다.맏시숙 양세봉은 모처럼 집을 찾을 때면 의레 걸레 같은 양말을 한짐씩 가지고 왔다.며칠을 몇밤을 새워 꼬매 다시 보내곤 했다.매년 겨울철에는 반입한 무기를 산골짝에 감추었다가 해동하면 독립군부대로 보내는 일도 양씨 일가가 맡았다. 그런 어느 날 양세봉이 느닷없이 집에 들렀다.만주 사변이 일어난 1932년 일이었는데,가족이 여러패로 나누어 빨리 피신하라고 재촉했다.양세봉이 편지를 써주어 청원현 소산성에 사는 이영준을 찾았다.그의 도움으로 소산성에 자리를 잡았으나 그해 양세봉장군은 전사했다.전사 소식을 들은 동생 양시봉은 명주 20자를 사가지고 흥경으로 가서 형의 시신을 고구려산성 기슭에 고이 묻었다.일본군이 장군의 아들을 인질로 잡으려고 또 눈에 쌍심지를 켜 양씨 일가는 40원에 소를 팔아 종손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일군 묘파고 시신 목잘라 고구려산성 기슭에 양세봉장군의 시신을 모셨을 당시 정황을 기억하는 노인한분이 아직도 생존해있다.신빈현 왕청문향 고려산촌의 김효순 할머니가 그분이다.독립운동가 김두선의 딸인데 아버지는 양세봉장군의 휘하에 있었다고 술회했다.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독립군 연락을 자주 다녔디요.양세봉장군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안되어 일본놈들이 들이닥치더구만.그놈들은 아버지를 나무에 매어놓고 장군의 묘소를 대라고 족쳤디요.아버지가 말을 듣지 않으니끼리 어머니한테도 매를 댔수다.결국은 알아내어 묘를 파서 장군의 시신을 끄잡아 냈습네다.기리고 아버지더러 도끼로 시신의 목을 치라고 다그칩데다.아버지는 막무가내를 댔디요.하는 수 없는지 놈들이 제손으로 목을 쳐서 보자기에 싸가지고 내려 가면서 아버지에게 총질을 했지 뭡네까.아버지도 비명에 돌아가셨디요』 양세 봉장군의 유해는 지금 고려촌 고려산성 기슭을 떠났다.해방 이후 북한에서 모시겠다고 파갔다.김효순 할머니 증언대로 두개골이 없는 유해였다고 한다.이제 양세봉 장군의 살아 생전 모습을 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야 손가락 몇개를 꼽을정도가 되었다.얼마전 개주시 쌍천안촌에서 만났던 양세봉장군의 비서 박윤걸 노인도 이번 여행길에서는 만나지 못했다.그토록 출간을 기다렸던 「양세봉 장군 회고록」을 손에 쥐지 못한채 지난 91년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 정신대 할머니 “눈물의 망향가”/중국거주 칠순의 이춘도씨

    ◎15살때 갖은수모… “죽기전 고향 가봤으면…”/국내단체 초청… 가족·친지없어 허가 안나 일제때 중국에 정신대로 끌려간 열다섯살 조선 처녀가 고희의 노인이 돼 귀국을 갈망하고 있다.그러나 고향으로 가는 길은 50년 전처럼 순탄치 않다. 중국 신강성 합밀시에 사는 이춘도 할머니(69).어릴 적 이름은 금순이.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15살이던 44년 수원역 뒷산에서 나무를 하다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기차로 만주에 도착한 뒤 몇차례의 탈출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무한으로 옮겨졌다.일본군 34군과 제5야전보충부대·병기공장 등에서 모진 수모를 겪었다. 고통을 참다 못해 동료 4명과 자살을 결심했다.서로 상대방의 가슴과 팔에 자기이름을 새겨넣고 강물에 몸을 던졌지만 혼자만 살았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팔뚝에 당시 숨진 4명 가운데 가장 친했던 「이옥주」의 이름이 남아 있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됐다.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몰랐다.식모살이와 농사일로 근근이 살아가다 중국 청년과 결혼했다.중국정부의 변방지원정책에 따라 신강성으로 이주,정착하면서 새 삶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가 남긴 상처는 가시지 않았다.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끝내 이혼을 당하고 조선족인 장금자씨(54·여)의 도움을 받으며 지금껏 홀로 살아왔다. 이 사정을 접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지난 연말 2주일의 일정으로 이할머니를 초청했다.하지만 당국은 신청서를 반려했다.국내에 가족이나 친척이 없다는 이유였다. 정대협측은 『지난해 5월 이할머니와 같은 처지인 강묘란할머니(73·중국 상해시)가 국내로 초청돼 영주귀국절차까지 밟고 있다』며 정부의 일관성 있는 정책을 요구한다. 이할머니는 오욕으로 얼룩진 과거를 회상하는 증언의 말미에 이렇게 호소했다.『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고향에 가보고 싶습니다.』
  • 밀입국 조선족 1백5명 적발/여수 해경

    【여수=남기창 기자】 5일 하오 2시쯤 전남 여천군 삼산면 손죽도 북서방 1·5마일 영해상에서 조선족 1백5명을 태우고 밀입국하려던 중국 선적 60t급 연어운호가 여수해경에 적발됐다. 해경은 수산청과 불법어로에 대한 합동단속 과정에서 중국인 선원 2명을 포함해 조선족 남자 92명·여자 13명 등 1백7명이 타고 있던 이 배를 적발해 이날 하오 8시30분쯤 여수항으로 예인,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이들을 넘겼다.
  • 「위장결혼 조선족」 처리 “골치”

    ◎국적 얻은뒤 잠적… 올들어 80여병 적발/처벌 가볍고 추방할 법적근거도 없어/취업뒤 중국가족까지 초청… 사회 문제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한 조선족 교포 부녀자들의 위장 결혼을 막을 수 있는 법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사법 당국이 위장 결혼을 통해 국적을 얻은 조선족 교포들을 적발,사법처리하고 있지만 이미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을 추방할 법적 근거는 전혀 없다.국적법은 대한민국 남자와 결혼하면 곧바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선족 교포들은 국적을 얻은 뒤 곧 별거하거나 잠적해 공장과 식당 등에 취업한다. 미국이나 일본의 국적을 얻기 위해 내국인이 위장 결혼하던 종전과 달리 대한민국 국적을 따려는 외국인이 늘어나는 추세에 맞춰 국내법도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지검은 올들어 중개인을 통해 위장 결혼한 조선족 교포 80여명을 적발했으나 법적 처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서울지검 형사2부 김상봉검사는 지난달 17일과 21일 조선족 교포 민순애씨(38·여)와 문양숙씨(43·여)를 공정증서 부실기재 혐의를 적용,처음으로 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형법 228조(공정증서 원본의 불실기재)는 공정증서 원본에 허위의 사실을 기재하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백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을 뿐 국적을 박탈할 근거는 없다. 결국 조선족 교포들은 형이 확정돼도 잠시만 고생하면 국적을 취득,합법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더욱이 공정증서 부실기재죄는 집행유예가 내려지는 것이 보통이어서 구속되더라도 1∼2개월이면 풀려난다. 검찰의 관계자는 3일 『5백여만원을 써 위장 결혼,국적을 취득한 조선족 교포는 취업한 뒤 중국의 가족들마저 초청하고 있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며 『가사소송법상 혼인무효 소송의 경우 중혼일 때는 국가가 원고가 될 수 있지만 초혼일 때에는 당사자나 법정대리인,4촌 이내의 혈족만 소를 제기할 수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해외 교포와 위장 결혼한 대한민국 남자가 혼인무효 청구소송을 내 승소하면 국적을 박탈할 수 있으나,조선족 교포는 이미 중국 국적을 포기한 상황이기 때문에 무국적자로 남아외교문제로 비화될 우려마저 있다. 미국의 이민법은 외국인이 결혼사기 혐의나 2년 이내에 이혼할 때는 강제 퇴거시킬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 조선의용군 이홍광 지대(압록강 2천리:26)

    ◎중국인민군 조선족군맥의 뿌리/항일투쟁은 물론 중국 해방투쟁에 동참/주로 토비소탕 참여… 장개석군과도 혈전/의용군 1지대로 출발… 전사장군 이름으로 바꿔 오늘날 중국대륙의 조선족은 중국공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떳떳한 요소들 몇가지를 지니고 있다.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닦은 동북 조선족들은 항일투쟁은 물론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도 동참했다는 사실을 가장 큰 요소로 지니고 있다. ○조선족출신 장군만 28명 그리고 단일민족으로 여러 민족들과 함께 생활하고 교류하는 가운데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이 된 것도 그 요소의 하나일 것이다. 조선족은 중국의 해방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위해 전과를 올리고 공적을 쌓았다.1946년부터 1949년까지 희생된 조선족 지휘원과 병사는 3천5백50명에 이른다.그 시기에 숱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중국인민해방군의 조선족장군이 28명이었으니 조선족의 활약상은 알만한 일이다.중국인민해방군 전총후군부장 조남기 상장,전 공군부사령원 이영태 중장,전 모집단군 정위정술주 소장,전 성군구 정위 옥종환 소장 등이 그들이다. 옥종환 장군(65)은 지금 요령성 심양시에 살고 있다.일본이 허수아비로 세운 만주국 국무총리 자택 옆에 지은 자그마한 2층 양옥이 그의 집이다.1933년 고향인 경남 통영군 연초면 천곡리에서 부모등에 업혀 길림성 통화현대천원촌 신개령으로 이주해왔다.나이 열다섯살에 이미 참군한 그는 남전북전 빗발치는 탄우속을 넘나들었다.불치의 암으로 두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쾌활하고 소탈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내 전우들은 꽃다운 나이에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웠습네다.그분들에 비하면 오래 산 셈이야요.그러나 후회는 없다고 생각합네다.올바른 길이라면 가시밭 불길이라도 걸어갔으니까….나처럼 어린시절부터 전장에 뛰어드는 불행한 시대는 다시 오지 말아야 합네다.내 시대에 흘린 피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을 하디요』 옥장군 댁을 찾은 날이 마침 토요일 하오여서 군시절 수하의 조선족 장병 등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었다.그 집의 인심을 읽을 수 있을 듯한데,부인께서 손수 차린 상이 들어왔다. 오징어볶음에 토장을 풀고 고사리를 넣은 개고깃국이며 김치와 깍두기가 입맛을 돋우었다.채소는 부부가 텃밭에서 가꾼 것이라고 했다.부인은 해마다 김치를 많이 담근다면서 명절날이면 집을 떠나온 조선족 장병들을 초청하기 때문에 여간 많이 담지 않고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 조선족 장군들의 뿌리는 거의가 이홍광지대에 두고 있다.이홍광지대는 일본군에 대항한 조선의용군의 한 부대로 19 45년 9월 하순 연안을 떠나 동북에 도착한 팔로군소속 조선인들도 뒷날 이 부대에 합류했다. 본래는 조선의용군 제1지대였으나 1946년 2월23일 이홍광지대로 개칭했다.조선의용군은 총부를 심양에 두고 북한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다.그러나 소련군이 막아버려 동북3성 조선족 집거구로 파병되었다. 이홍광지대로 개칭되기 이전의 제1지대는 압록강 유역인 남만,제3지대는 흑룡강성 일대인 북만,제5지대는 연변,제7지대는 연변을 제외한 길림성 일대에 자리잡았다.제1지대가 이홍광지대로 개칭될 무렵의 지대병력은 1천2백명에서 자그마치 5천명으로 늘어났다.처음에는 토비소탕 임무를 맡았다가 그 다음에는 장개석 국민당군과 대항하는 피나는 열전을 벌였다. ○동북해방군에 편입돼 국민당군과의 전투는 아주 치열했다.당시 모택동의 팔로군에서 넘어와 이홍광지대에 배속된 주재덕선생(2월22일자 11면 참조)의 증언을 들어보면 중국 해방전쟁에서 조선족 활약은 컸다. 『내가 이홍광지대 제1영 제3련의 연장(중대장급)으로 있을 때 조성두라는 전사가 배치돼 왔디요.그 사람 나이가 스물두살인가 기랬는데 오자마자 전투가 벌어졌지 뭡네까.1947년 2월28일로 기억되는 그 전투는 휘남현을 포위공격하는 일이었디요.현성에는 국민당군 한 개의 정규사단과 보안부대,지방군 몇개 중대가 버티고 있어서 한치도 진군할 수가 없었습네다.단장(연대장)은 진군하라고 다그치고….그래서 나는 폭파대를 조직하고 조성두한테 진공명령을 내렸읍네다』 국민당군 토치카와의 거리는 직선으로 1백70m.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없는 민둥산에는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조성두는 눈 쌓인 민둥산을 포복자세로 기어올랐다.국민당군 토치카 50여m까지 접근한 조성두는 날아온 총탄에 명중되었다.10여분이 흘렀을까.조성두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눈위로 피가 흥건히 배었다.조성두는 필사의 포복으로 토치카에 다달았다.그리고 지뢰를 안은채 토치카로 기어들어갔고 이내 폭음이 진동했다.그는 중국인민해방군사에 빛나는 사실상의 첫 폭파영웅이었다. 이홍광지대는 이어 조선의용군에서 동북해방군에 편입되어 독립4사로 있다가 제164사로 들어갔다.활동지역도 동북지방에서 멀리는 장강을 넘어 해남도로까지 확대되었다.단동시 영예군인요양원 원장직에서 정년으로 퇴직한 송재조(68) 선생은 본래 경북 성주 사람인데 해남도에 상륙했던 동북해방군 출신이다. 『나는 1946년 5월에 참군하여 동북해방전쟁을 겪고 곧바로 남하했디요.여주반도에 이르러 몇 달을 두고 해남도를 칠 준비를 했드랬습네다.똑딱선 한 척도 없고 모두가 나무배였드랬는데,그거이 중국해방군 첫 해군이었디요.1950년 나무배를 타고 해남도 등륙전(상륙전)에 참가했더니 국민당군 비행기가 가만두지 않더란말입네다.다행히 살아서 등륙은 했으나 섬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말았수다.며칠 안되어 다리가 썩더니 구더기가 꼬입데다.그래서리 다리를 잘라버렸디요.스물세살 때 기랬습네다』 ○이홍광장군 석상세워 그러면 이홍광지대에서 보이는 이홍광이라는 인물은 누구인가.이홍광(1910∼35년)의 본명은 이의산이다.경기도 용인 태생으로 항일연군 제1군 독립사를 이끌었다.양세봉장군과 연합작전을 펴기도 했던 그는 1935년 5월의 한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요령성 환인현 흑할자밀영에서 35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그러니까 남만일대에서 소문난 항일 명장이었다. 이홍광의 이름으로 조선의용군에 이홍광지대가 생긴 이후 압록강유역 중국땅에서 그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졌다.어떤 조선족 마을은 홍광촌이라 했고 요령성 관전현과 길림성 반석현에서는 조선족 학교를 건립한 뒤 각각 홍광중학교로 학교 이름을 지었다.그리고 반석현 홍광중학교 운동장과 요령성 신빈현에는 이홍광의 석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이홍광지대의 군맥은 중국 뿐 아니라 북한군에도이어졌다.이홍광지대 제1임지대상 김웅은 인민군 제1군단 군단장이 되었다.1950년 전쟁을 일으키고 서부전선을 맡아 서울로 들어간 인물이다.또 이홍광지대 정치위원장이었던 방호산은 제1군단 6사단장을 거쳐 군사과학원장을 맡기도 했다.
  • “조선족통해 「잘사는 남한」 확신”/귀순 북 주민 김영국씨 회견

    ◎94년 헤엄쳐 두만강 건너… 옷공장서 일해/탈북주민들 연변 등지에 숨어 귀순 엿봐 【포항=이동구 기자】 중국서 정박중이던 부산 중앙상선 소속 전진호(1만7천t급·선장 손현주)에 몰래 승선,지난 25일 하오 포항 신항부두로 귀순한 북한주민 김영국씨(21)는 『북한의 상당수 주민들이 이미 두만강을 도강,연변 일대 농촌지역에 숨어 지내면서 한국으로 귀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26일 상오 포항신항 제11선석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당국은 이들 주민들을 검거하기 위해 2천여명의 공작원들을 연변등지에 파견,검거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를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 주민을 통해 여러차례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귀순동기·경로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귀순 동기는. ▲북한에서 한국의 라디오 방송과 중국을 오가는 친·인척들을 통해 남한이 자유스럽고 잘사는 나라라고 확신을 했기 때문이다. ­귀순 경로는. ▲지난 94년 5월 두만강을 헤엄쳐 중국으로 들어간 후 중국연길시와 천진시의 옷공장·여관등에서 종업원 생활을 해오다 지난 22일 신강항에 정박해 있는 전진호에 승선했다.전진호를 타기 전 1년9개월 동안 여러차례 한국대사관에 찾아가려고 했으나 북한 송환등이 우려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북한주민의 생활 실상은. ▲계속되는 식량난으로 몇개월씩 식량배급이 중단되는 경우가 흔한데다 겨울옷마저 모자라 추위에 시달리는 등 최악의 상황이다.이때문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는 주민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가족과 장래희망은. ▲평북 정주군 오산 노동자구에 부모님과 형·누나·동생 등 5명이 살고있는데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게 될 것 같아 걱정이다.기술을 배워 유능한 기술자가 되고 싶다.
  • “조선족 위장 북한 공작원 침투 경계를”/황동규(공직자의 소리)

    지금 북한은 경제난과 식량난 및 고위층을 포함한 탈북사태등으로 체제유지에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따라서 북한은 내부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남 무력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지난해부터 급증한 대규모 군사훈련 횟수와 휴전선 가까이 전투기를 집중배치한 사실등으로 뒷받침된다. 더욱이 북한은 지난해 임진강과 부여지역에 무장간첩을 침투시킨데 이어 최근 중국 교포 밀입국자를 가장한 공작원 침투를 기도,남한 사회의 혼란을 야기시켜 이를 탈출구로 삼으려는 듯한 인상도 주고 있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북한은 현재 중국에 공작거점을 설치,대규모 공작원을 조선족 신분으로 위장해 밀입국 준비를 하고 있다.이들의 침투경로는 주로 해상이라는 지적이다. 이처럼 해상 침투에 열을 올리는 것은 중국교포 해상 밀입국자 숫자가 엄청난데 편승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지난 한햇동안 해상으로 들어오다 군경에 검거된 밀입국자는 20여건에 4백60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는 전년의 5건 1백여명에 비해 5배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밀입국자수는 더욱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그것은 밀입국자들이 최근들어 국내알선책과 연계해 공해상에서 우리 어선으로 바꿔 탄뒤 한밤에 침투,적발에 어려움이 크기 때문이다.특히 중국교포 밀입국자 가운데 북한공작원이 섞여있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일부 국내밀입국 알선책들은 돈에 눈이 멀어 이들을 수송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행위는 단순히 불법행위에 그치지 않고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 모두는 국가안보에 일익을 맡는다는 자세로 밀입국 알선책이나 국내 수송책들을 관계기관에 신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또 해안 거주 어민들은 밀입국 선박이 침투하기 쉬운 심야 취약시간대(하오 10시∼새벽 4시)에는 가급적 선박의 입출항을 삼가고 수상한 선박을 보면 즉각 신고해주기를 기대한다. 안보는 군경만의 몫이 아니라 전 국민이 파수꾼이 될 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 조선족 위장결혼 알선 브로커 등 60여명 적발/22명 구속

    중국 교포 부녀자를 국내 독신 남자와 위장 결혼시키는 수법으로 불법 취업시킨 브로커와 위장 결혼자,알선업자 등 60명이 검찰에 적발됐다. 서울지검 동부지청 형사4부(조창구 부장검사·정연호 검사)는 23일 주영순씨(30·여) 등 위장결혼 알선 브로커 7명을 공정증서 원본 부실기재 혐의로 구속하고 강태형씨(61) 등 브로커 2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조명상씨(46·행상) 등 위장결혼자 9명도 같은 혐의로 구속하고 위장결혼자 35명을 수배했다. 불법체류 중인 중국교포들을 취업시켜주고 돈을 받은 「호남종합인력」 대표 강호진씨(37) 등 무허가 취업알선업자 6명을 직업안정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이들을 통해 중국교포 15명을 고용한 (주)아산 제조담당 이사 선경석씨(44)를 불구속 입건했다. 주씨 등 브로커들은 지난 해 6월 결혼상담소에서 중국교포 이모씨(여)에게 내국인 채모씨를 소개시켜주는 등 지금까지 모두 42쌍의 위장결혼을 알선,1인당 5백만원씩 모두 2억1천여만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 「하얼빈의 밤」수놓은 얼음조각축제/22회「하얼빈빙등제」새달초까지

    ◎각국의 궁전·탑·불상 등 상징물 주제별로 전시/1500여작품에 형형색색 전등장치… 마치 「동화의 나라」 선조들이 호령했던 만주땅 한복판 흑룡강성의 성도 하얼빈은 인구 4백80만명의 중공업도시로 중국 10대 도시의 하나이다. 조선족이 7만명이나 되고 안중근 의사의 숨결이 살아있어 우리들에게 낯설게만은 느껴지지 않는 곳이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추위에다 공장에서 치솟는 시커먼 연기,무질서한 교통 등으로 인상은 그리 좋지 않지만 거리 곳곳의 러시아풍 건물이 이채롭다. 하얼빈의 「명동」 중앙대가를 조금 지나면 빙등제가 한창인 조린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궁전과 탑,불상 등등.저마다 웅장한 자태에 오색찬란한 빛을 발산하는 1천5백여 얼음조각작품이 한자리에 어우러져 화려하게 밤을 수놓고 있다. 하얼빈의 얼음조각축제인 빙등제는 캐나다 토론토,일본 삿포로,스웨덴 등과 함께 세계 4대 빙등제의 하나이며 빙등제의 원조로 규모의 웅대함을 자랑한다. 빙등은 커다란 얼음덩어리 하나하나에 빨강 초록 노랑 등의 전등을 장치한 뒤 형상을 조각해 놓은 것. 공원 입구에는 「남대문」이란 이름의 거대한 얼음문이 서있다.서울의 남대문과 형태마저 비슷하다. 이 작품은 인근 송화강에서 잘라온 8백㎤ 분량의 얼음덩어리와 1천8백개의 전등으로 만들어졌다.가로 20m,높이 11.5m의 당대 성루를 모방한 것이다. 당나라 건축물을 재현한 「침향정」과 물레방아는 그 화려함으로 눈길을 끈다.가로·세로 60㎝의 얼음벽돌 64개가 기둥을 이뤄 천장을 떠받치고 있고 직경 8m의 물레방아는 「침향정」의 온도를 식혀주는 일종의 냉방장치로 중국 최초의 「에어컨」인 셈이다. 「대불상」은 이번 빙등제에서 1등상을 받은 작품이다.석굴 내부에 10m가 넘는 좌불상 주위에 수십개의 각기 다른 표정의 불상이 신비감을 더해준다. 이번 빙등제는 주제별로 8개의 풍경구로 나뉘는데 제3회 동계 아시안게임을 감안해 2개구를 「아시아의 겨울성화」「아시아의 풍치」로 꾸며 아시아 각국의 상징물을 표현했다. 22회째를 맞는 하얼빈 빙등제는 지난달 5일 개막돼 얼음이 녹는 3월 초까지(하오 4시30분∼9시) 계속된다. 빙등제를 본뒤 이웃한 민족호텔내 한국식당에서 우리 음식을 맛볼 수 있다.
  • 간도특설부대(압록강 2천리:25)

    ◎만주 군관출신 한인배치… 일제,대륙침략 악용/열하·하북 지역 팔로군 소탕이 주임무/해방후 귀국인사들 장군으로 출세가도/당시 소대장 마쓰모토소위는 박 전 대통령 설도 중국 동북지방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었을 뿐 한반도와 연결되었다.그래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정학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특히 일제는 그 강점기에 중국 동북지방에 허수아비격의 만주국을 세워 통치수단으로 한국인까지 끌어들였다.그런 연유로 만주국 군부에도 한국인이 대거 참여했다. 그 만군군사조직에는 간도특설부대가 있었는데 목단강성 제6군관구의 지휘를 받았다.처음에는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1939년 조선인특설부대로 창설했다가 그 뒤에 간도특설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이 부대는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활동지역을 오늘의 길림성 일부지역인 간도 일대에서 열하와 하북지방으로 확대했다.전쟁말기의 주임무는 공산당의 팔로군 소탕이었다. 그러니까 만군에 들어간 한국인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해 싸운 셈이다.요령성의 성도심양에서 만난 주재덕(76)선생은 간도특설부대에서 근무한 조선족이다.1943년말부터 특설부대에서 정보를 담당했던 그는 지금 중국해방군 동북관리국 요령성 경제개발합작총공사 부총리로 일하고 있다.일본의 침략을 위해 그것도 공산당의 팔로군 소탕 일선에 섰던 인물이 요직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것이다. ○제6관구의 지휘 받아 그러나 이면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깔려있다.그가 털어놓는 인생역정은 파란만장했다.간도특설부대 정보요원에서 팔로군으로 투항,공산당 입당,전범으로 체포,석방이라는 명암의 세월을 살았다.이제야 양지로 돌아온 그는 간도특설부대 시절을 회상했다. 『특설부대는 대대병력을 가지고 있었디오.대대장은 중좌나 소좌였는데 보직은 일본인에게 돌아갔습네다.소대장은 준위에서부터 소위·중위들이 맡았댔디요.그 하위지휘관인 소대장만큼은 조선사람에게 줬지 뭡네까.모두가 창씨 개명을 해서 조선사람일지라도 일본식 성으로 불렀습네다.해방이 되고나서 한국에 돌아가 모두 장군이 됐다고 기래요.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고…』 대통령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그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키가 작고 야무지게 생겼던 마츠모토 소위였다고 말했다.소대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한국에서 나온 박정희관계 책들을 보면 그가 간도특설부대 소대장으로 복무했다는 기록은 없었기 때문이다.그가 만주군관학교 시절 창씨개명을 했을 때도 마츠모토가 아니라 다카시라는 성씨에 마사오라는 이름을 써서 한문으로 고목정웅이었다.그래서 일단 아귀가 맞지 않는 다고 생각하면서 주선생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특설부대에 들어가서 반년쯤 훈련을 받자 부대가 열하성으로 들어갑데다.조선말은 물론이고 중국말에 일본말까지 잘 하는 날 더러 정보반에 근무하라고 기래요.거기 근무하면서 가는 곳마다 대동아공영권건설을 역설해댔디요.포로를 심문할 때면 매도 대고….내손으로 사람도 죽였수다.한번은 팔로군과 접전이 붙어 멀리서 총을 쏘았더니 하나가 고꾸라집데다.그리고 심문하던 포로가 도망을 치길래 권총으로명중을 시켰디요.팔로군 정찰원 사광화·장립귀·등우룡은 총살 직전 정보반에 쓰겠다고 살려주기도 했디요.나쁜 일만 한 것은 아닙네다』 ○43년 열하성으로 이동 간도특설부대가 활동무대를 간도에서 열하성으로 옮긴 것은 1943년말의 일이다.그 무렵에는 목단강성에서 이동해온 만주군 보병 제8단 본부가 역시 열하성에 주둔하고 있었다.한국에서 나온 여러 저술을 보면 당시 만군 소위였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만군 보병 제8단에 배속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만군 제8단도 간도특설부대 처럼 모택동휘하의 팔로군 토벌이 주임무였다.그러나 간도특설부대와 임무가 같았을 뿐 박정희소위가 특설부대에 근무했다는 대목은 없다. 그러면 주재덕 선생의 증언에 착오가 있는 것일까,아니면 한국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가려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어떻든 주재덕 선생이 들려주는 만군시절 박정희소위 행적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심지어는 박정희소위가 한때는 팔로군으로 투항할 뜻까지 품었다는 것이다. 『팔로군 포로를 오래 심문하다 보니 내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한다는 생각이 듭데다.그래서 포로로 잡힌 팔로군 정찰원을 통해 하북성 팔로군 이운창 사령한테 투항할 뜻을 전하는 편지를 몰래 보냈디요.그리고 나서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는 회신이 팔로군 정보망을 돌아서 왔디요.혼자 고민하다 조선사람인 가네카와 중대장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더니 동의하더란 말입네다.중대장 말이 내가 내부는 책임질테니 계속 팔로군과 접촉하라고 명령합데다.그러나 집단투항은 일본 헌병이 방해가 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네다.다만 나는 1944년 8월 하북성에서 혼자 투항할 수 있었디요.마츠모토 소위는 단기교육을 가서 부대에 없었던가 기래요』 ○팔로군으로 투항 속출 그래서 특설부대요원 주재덕은 1944년말에 팔로군이 되었다.팔로군에 겨누었던 총부리를 일제쪽으로 돌린 그는 해방을 맞고서 팔로군 이홍광지대 중대장으로 올랐다.그리고 공산당에 가입해 많은 공을 세웠다.1949년 모택동과 주재덕의 명령에 따라 이홍광지대가 북한으로 건너갈때 그는 심양에 그냥 남았다.심양에서 대퇴(제대)한 이후 요령성 본계로 들어가 화학공장을 맡아 경영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하더니 그에게 곧 불행이 닥쳐왔다.연변 공안당국에서 경찰을 보내 그를 체포해버린 것이다.1958년 연변법정이 내린 판결서는 어마어마한 벌을 내렸다. 「죄범 주재덕은 1943년 4월10일 만주국 간도특설부대에 들어가 정보반에서 1년4개월 근무하는 동안 하북성 팔로군을 토벌하는 등 일제의 주구로 갖은 악한 죄를 범하여 법에 의해 총살한다」는 것이었다.그는 25년간 전범으로 감옥에 살다가 문화대혁명 이후 탄원서를 내어 1983년 무죄석방되었다. 『사형판결은 청천병력 같은 것이었디요.죄를 졌다해도 투항해서 혁명을 위해 숱한 공을 세웠으니끼리 지난 일은 묵과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네다.석방되어 나왔을 때 내 나이 예순세살이었수다.만약 내가 팔로군에 투항하지 않고 특설부대 요원들과 어울려 한국에 갔더라면 별 하나는 달았디 않겠습네까』 한국으로 간 특설부대 요원들은 출세가도를 달렸다.제1중대장 가네카와라는 김 아무개는 한국군 중장까지 올라갔고,경찰출신이었던 기포중대장 히로카와는 소장이 되었다는 것이다.특히 소대장으로 가장 유명했던 마츠모토 소위는 바로 박정희대통령이었다는 고집을 그는 끝내 버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 하나를 더 곁들였다.간도특설부대는 해방소식도 모르고 팔로군과 접전을 벌였다는 것이다.특설부대 요원들은 뒤늦게 무기를 버리고 동북으로 가는 길에 조선의용군부대를 만나 의용군에 가담하려다 심사가 두려워 개별적 고향에 돌아갔다고 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