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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조정 시급 20개과제 선정/정부

    ◎낙동강 수질개선 등 결론 빨리 내기로 정부는 부처간 이견으로 지연되고 있는 「낙동강 수질개선 대책」과 「수도권 도로교통정보시스템 구축사업」 등 20개 사업을 「부처간 협조·조정필요 현안과제」로 선정해 범정부적인 차원에서 조정하기로 했다. 총리실 관계자는 22일 『정부차원의 중요시책의 부처간 협조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는 고건 국무총리의 지시에 따라 20일 차관회의에서 20개 현안과제를 선정했다』면서 『이들 현안과제가 차관회의에서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총리가 직접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결론을 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20개 현안과제는 다음과 같다. ▲낙동강 수질개선 대책 ▲수도권 도로교통정보시스템 구축사업 ▲출산휴가비용을 의료보험 또는 고용보험에서 부담토록 하는 방안 ▲99년까지 서울 양천구 목동에 2만3천평 규모의 중소기업백화점을 건설하는 계획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종합적·체계적 관리를 위한 외국인 근로자고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정 ▲2001년까지 장애아동을 위한 20개 특수학교를 설립하는 계획▲경부고속철도 건설 ▲무궁화위성 채널 활용대책 ▲TV를 활용한 사교육비절감대책 ▲의료분쟁조정법 제정 ▲약학대학 학제개편 ▲신직업교육체제구축을 위한 직업훈련관련 법안 제정 ▲과학기술종사자 사기진작대책 ▲주민카드발급에 따른 관련법령 제정 ▲임진강 수질개선 종합대책 ▲국립중앙박물관 신축부지의 도시계획도로 노선조정 ▲조선족 동포사회의 안정적 성장지원 및 불법행위 근절대책 ▲출산휴가 비용의 공공부담 ▲한국통신의 정부출자기관으로 전환 ▲과기처산하 선박해양공학연구센터의 해양수산부로의 이관문제.
  • 조선족의 직업의식(송화강 5천리:21)

    ◎시장경제 적응못해 사표내기 일쑤/한국기업­조선족 갈등으로 비화/“핏줄보다 실리” 한족들로 인력 대체/직장 쫓겨나 날품팔아·유흥업소 전전하기도 흑룡강성 조선족들은 도시를 흔히 개성이라고 불렀다.조선족들에게 도시는 고려의 왕도인 경기도 개성쯤으로 보였는지 모른다.고려가 도읍지로 삼은 이상적 땅 개성은 도시요,도시는 곧 개성이라는 생각을 했다.그래서 도시는 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대를 이어 벼농사에 목을 매고 살아온 조선족들은 「기음 끝내면 개성 구경가자」는 말로 고달픈 생활을 달랬다. 그러니 도시로 나가 취직을 한다는 것은 곧 출세였다.10여년전까지만 해도 그랬다.개혁개방과 더불어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 중국 전역의 농촌 유동인구는 한 해에 8천만명을 웃돌았다.농촌의 유휴인력은 훨씬 더 많아 1억2천만명으로 집계되었다.유휴노동력은 해마다 1천3백만명씩 늘어나는 추세다.이들 농촌인구가 몰려드는 곳은 도시라서,도시는 만원을 이루고 있다. 도시로 나온 조선족들은 한족에 비해 취업의 문이 넓었다.그 이유는 중국에진출한 한국기업들로부터 혜택을 받기 때문이다.흑룡강성 해림시 38개 조선족촌의 조선족 2만3천400명 가운데 1천700명이 도시로 나갔다.이들 대부분은 한국계기업에 취직한 것이 틀림없다.그리고 3천600명은 해외로 나갔다는 것이다.해외 역시 한국이 대부분이어서 한국은 조선족 취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의 도시나 해외진출은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생활자체를 윤택하게 만들어 주었다.지난해 중국은행 해림 지행을 통해 조선족들이 송금을 받은 외화만도 1천80만달러에 이르고 있다.그런저런 송금을 모두 합하면 해림시에 사는 조선족 1명앞에 연간 2천800원꼴이 돌아갔다. 농촌인력의 외지 유출은 대규모 영농을 부추겼다.도시로 나간다고 땅을 떼어갈 수 없는 터라 두고온 농토는 자연히 실수요자 농민들에게 돌아갔다.그래서 한 가구가 2㏊의 농사를 짓는 것은 보통이고,5∼10㏊까지 농사를 짓는 대규모 영농가구도 수두룩했다.남는 것이 없었던 농사일이 목돈을 거머쥐는 기업농으로 바뀐 것이다. ○한국기업 도시진출 길열어 조선족들이 몰리는 도시는 북경·상해·천진·심수·광주와 동북3성의 대도시다.연해지구도 물론 포함되었다.운수가 좋아야 한번쯤 구경이나 할 도시에 조선족들이 터를 잡고 돈을 벌고있는 것이다.그런 대도시에 조선족들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은 한국기업이다. 조선족들에게 한국이라는 발전한 고국이 있다는 사실은 무척 다행스럽고,또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다.조선족의 운명은 고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그래서 중국의 한국기업과 조선족이 서로 손을 잡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처음에는 반가움과 기대감을 가지고 만났으나,지금은 여기저기서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자신의 신분노출을 꺼린 하얼빈의 한국기업 간부는 조선족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한 핏줄이라는 마음에서 조선족들을 믿고 관리를 맡겼습니다.한족들과 똑같은 일을 해도 노임을 더 주기도 했지요.그런데 조선족들은 고용을 당한 입장이라는 생각만 하고 회사의 장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더라구요.내가 밥 먹을데가 없어서 여기 와서 고생하는 줄 아느냐고 사표를 던지기가 일쑤고….개인 이익만을 챙기다 보면 조직체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조선족들의 직업관이 잘못된 쪽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군데서 발견되었다.일자리가 마음에 들더라도 봉급이 상대적으로 낮으면 취업을 거부하기 일쑤였다.너무 조급하게 윗 자리를 넘보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리를 박차버렸다.그러는 사이 한족들에게 기회를 빼앗겼다.이같은 현상을 집체경제적 문화환경에서 비롯한 잘못된 타성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다시 말하면 공유제 사회에서 큰 가마솥밥을 적당히 나누어 떠먹던 과거 분배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청도에 진출한 한국기업에서 일하는 공원 남순금은 사보에 실린 「조선족 도시취직」이라는 글에서 조선족의 직업의식을 꼬집었다.도시에 나온 조선족 근로자들이 반성할 대목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다. ○조선족 대거해고 위기에 「돈이 전부가 아니다.인생이라서 돈도 중요할 때가 있지만,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충실한 삶이다.농촌에서 배우지 못한기술을 직장에서 습득하여 그속에서 나를 찾는 가운데 민족발전을 위해 무엇인가 기여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그런데 우리 조선족은 시장경제 충격속에 정신을 못차리고 돈에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러저러한 연유로 조선족들이 한국기업에서 밀려나는 위기를 맞았다.그 자리에 한족들이 대신 들어앉기 시작했다.한국기업들은 기업경영이 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을 터득한 것이다.불필요한 인력은 해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국기업의 입장이고 보면,조선족은 딱한 처지가 되었다.한국기업에서 쫓겨난 조선족들의 진로는 뻔했다.힘깨나 쓰는 남자들은 날품팔이가 고작이고,아가씨들은 식당이나 나이트클럽 같은 유흥업소가 기다릴 뿐이었다. 그래서 도시로 나온 조선족 취업문제가 벌써 사회문제로 떠올랐다.흑룡강신문은 이 문제를 놓고 지상토론을 붙였다.여기서 문필가 이림씨는 「오늘날 조선족들에게는 올바른 직업의식 형성이 중요하다.그렇지 않고는 장래의 발전도 없고,삶이 본궤도에 오를수 없다」는 말을 했다.과연옳다.
  • 주중 대사관 영사업무 재개

    주중 북경대사관의 영사업무가 6일부터 부분 재개된다고 영사부측이 5일 밝혔다.영사부측은 황장엽 북한노동당 서기의 망명으로 지난달 12일부터 중단됐던 북경대사관의 영사업무 가운데 한국국민과 관련된 비자발급 등 모든 업무는 재개되고 조선족 등 중국인관련 업무는 상해나 청도 총영사관에서 처리하게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총영사관의 출입이 계속 통제되는 문제로 전화나 팩스밀리,우편 등을 통해 업무가 이루어지며 필요한 경우는 영사관 또는 대사관 주변으로 미리 약속한 대사관직원이 나와 관련 서류를 주고 받게 된다고 밝혔다.
  • 한국인의 두얼굴(송화강 5천리:20)

    ◎유흥업소 VIP… “조선족 돕기” 숨은 선행도/투자붐 타고 기업인·유학생 급속 증가/일부 현지처에 “흥청망청” 빗나간 행동 눈살/한편엔 심장병 조선족처녀 수술비 모금/맹인학교 운영·신기술 보급 앞장서기도 중국의 한국인들은 새로운 사회계층의 하나라 할 수 있다.중국에 대한 한국의 투자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하여 한국인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다.그들의 신분은 기업인과 기업 종사자,유학생,교수 등으로 중국속의 조선족들과는 분명히 구별되었다.모두들 주머니가 두툼하다는 공통점을 지닌 사람들이 바로 한국인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장 통이 크게 노는 부류는 유학생들이라는 이야기다.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이 몰린 지역은 흑룡강성 하얼빈시나 길림성 장춘과 같은 대도시다.이들 대도시에서 조선족이 운영하는 술집과 노래방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았다.주로 남녀가 한 쌍을 이루어 유흥업소를 찾았다.한국에서 온 유학생 남녀라기 보다는 현지 아가씨들을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얼빈 거리를 지나노라면 노래방이 여기저기 깔려있다.간판이 휘황찬란하거니와 내부시설도 제법 잘 꾸며놓았다.그러나 내부시설도 중요하지만,무엇보다 아가씨들이 많아야 장사를 우지좌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길시 한 술집에서 한국유학생과 우연히 동석을 하게 되었다.피차가 술이 얼근했던 터라 수인사를 했는데도,박군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내가 술값을 치르겠다고 했더니 막무가내인 만큼 허세를 부렸다.결국 술값은 내가 냈지만,2차는 박군이 사겠다고 우겨 자리를 옮겼다.그 자리에서 박군은 연변생활을 혀 꼬부라진 소리로 실토했다. 『연변대 예비반에 들어와서 중국어 공부를 하는 한국학생은 40명 정도가 있어요.그런데 수업에 들어오는 학생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4∼5명이 고작이에요.그 시간에 잠자야지 공부는 왜 합니까….오전 10시에 일어나서 11시쯤 아침을 겸한 점심을 먹고,오후에 다방에 가서 노닥거리다 밤이 되면 노래방을 가는 재미로 살아요.아파트 독채 얻어놓고 조선족 아가씨와 살림차린 선배보다는 건실하게 사는 거지요.유학생 회장 선배한테 혼나기도 했지만,이 생활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이겁니다』 중국에 체류하는 한국기업인들은 더러 아파트를 세얻어 식모를 두고 있다.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얼굴이 반반한 과부나 처녀를 식모로 두는 이들이 흔하다는 것이다.그리고 중국말을 배운답시고 한족여인을 불러들이는 경우도 보였다.한국여인은 여느 식모의 월급 500원에 비해 10배나 되는 5천원씩을 준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나 중국말도 배우고 현지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실은 싼값인지 모른다. ○한족과 연애하며 어학공부 그래도 기업인들은 성인이라서 보아넘길수 있다.그러나 현지처를 둔 유학생들은 꼴불견이다.장춘 어느 대학으로 먼저 유학을 온 한국유학생이 후배들에게 내뱉었다는 희떠운 큰 소리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누가 한국유학생들의 방종한 생활을 빗대어 꾸며낸 말이기를 기대하는 가운데 소개하면 이렇다. 『내가 장춘에 온지는 일년이 되었지.학교에 나가 청강한 날을 계산하면 아마 열 손가락을 다 못 꼽을거야.그래도 한어수평고시에 합격을 했지.비결이 뭐냐구? 바람을 열심히 피라는 거야.그것도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한족처녀가 좋지.처음에는 육체적인 언어만 통하지만,차츰 주둥아리가 트인다 이말이야.머리통 거머쥐고 외는 것보다 한결 수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런 작태는 한국인들의 저질적 사고와 조선족들의 물욕이 어울린 민족의 수치일 것이다.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한국인중에 그늘진 중국사회를 위해 빛을 던져주는 사람들도 있다.지난해 「흑룡강성신문」에 「대가족 속에 피어난 사랑」이라는 제목의 미담기사가 실렸다.그 기사에는 병을 앓는 조선족 처녀와 한국기업의 간부가 등장했다. 기사내용은 하얼빈쌍태전자유한회사 여종업원인 조선족 처녀 오봉화양(21)이 심장병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그러나 수술비 2만원이 없어서 죽음을 맞아야 했는데,쌍태전자 한국인 과장 주정호씨(40)가 오양 돕기운동에 나섰다.주과장 자신이 500원의 성금을 먼저 내고 회람을 돌렸다.오양의 딱한 소식은 주종영총경리까지도 알게되었다.그래서 마침내 지난해 성탄절날 수술을 받은 오양은 다시 삶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미담기사 주인공으로 등장 한국가톨릭의 하상복지회는 길림성 연길시 애단로 175호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선복지단체다.가톨릭의 성인 정하상의 이름을 빌려 설립한 하상복지회는 1994년8월 연변에 진출했다.이 복지회는 연변하상시력장애인강복센터를 설립하고 맹인학교를 꾸렸다.지난해 7월15일 이미 9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한 바 있다.한국에서 온 홍영희(42) 손인숙(42) 이명선(42) 등 세 분의 여선생들이 궂은 일을 마다 않고 일했다.한달에 한국돈 10만원에 불과한 봉급을 받지만,보람에 산다고 했다.홍영희 선생 말에서도 기쁨으로 사는 마음이 엿보였다. 『소외받은 이웃들과 함께 하는 것은 누군가가 해야할 일입니다.그런 일을 우리가 맡은 것이지요.저희는 그동안 하느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고 살았으니까,그 사랑을 나누어야지요.지금 하는 일은 하느님으로부터 이제까지 받은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우리와 함께 한 맹인들이 학교를 떠나 사회에 복귀하더라도 아무쪼록 자립하는 삶을 살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바램이라면 바램이지요.그래서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허옥(72) 선생은 흑룡강성을 위해 중국을 찾은 분이다.미국국적을 가진 그는 흑룡강성 화천현 횡두산진에 화미이탄회사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지난 83년부터 기초조사를 하고 87년에 회사를 세워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이탄과립복합비료를 생산하고 있다.그는 돈을 벌기위해 무턱대고 중국을 찾은 사람이 아니다.처음부터 애정을 갖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94년 하상복지회 진출 봉사 『저는 20살 나이를 먹을 때까지 흑룡강성에 살았습니다.부친과 함께 고용살이를 했지만,흑룡강성은 고향이나 다름 없지요.그래서 다른 여느 회사들처럼 사람을 싼값에 불러쓰고 돈이나 챙긴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버렸습니다.중국공민의 입장에서 함께 살자는 뜻을 갖고 사업에 달라붙었습니다』 가목사시 녹주효소유한회사 김상석 사장(59)역시 조선족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한국인이다.이 기업에서 생산하는 효소계열제품은 국무원경제개발센터가 공인한 중국 최초의 개발품이다.효소계열제품 개발소식이 전국에 퍼져 방방곡곡에서 기술강좌를 해달라는 초청이 쇄도하고 있다.그래서 김사장은 조선족사회 위주로 전국을 돌며 효소제품 생산을 지도하느라 여념이 없다.그렇게 해서 생산한 효소제품은 녹주효소유한회사가 전량을 사들여 수출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 외국인근로자 관리 철저히(사설)

    국내의 외국인근로자가 21만명을 넘어섰다.그 가운데 무려 60%가 넘는 12만9천여명이 불법체류자라는 당국의 집계다.우리 근로자의 험하고 힘든 소위 3D업종 기피,같은 핏줄이지만 법적으로는 중국국적 조선족으로 분류되는 중국동포문제 등 복잡한 사정이 있지만 불법체류근로자문제는 더 늦기 전에 종합적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는 판단이다. 13만명 가까운 불법체류근로자는 우리나라 전체임금근로자 1천3백21만명의 1%에 해당한다.정부가 정한 외국인근로자상한선 1%가 불법체류자로 메워진 형국이다.91년 산업기술연수생제도로 공식입국하기 시작한 동남아지역 출신 근로자는 주로 중소업체에서 염색·도금·피혁·용접 등 3D업종의 험한 작업을 맡고 있다. 그러나 합법입국한 연수생도 30%가량이 임금을 더 준다는 유혹에 빠져 지정업체를 이탈하고,체류기한을 넘겨 귀국치 않는다.이런 근로자가 늘어 해마다 1만명가량이 추방돼도 불법체류자가 13만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문제는 주민등록 등의 신원과 소재파악을 할 방도가 전혀 없는 불법체류외국인 13만명이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우리 사회의 치안과 질서유지에 커다란 위해요소가 아닐수 없다.국내 외국인범죄는 해마다 급증하고 있는 실정이다.최근 서울에 사무실까지 차려놓고 자국인 불법체류자에게 취업을 알선하거나 송금을 해주고 수수료를 챙기거나 폭행으로 금품을 갈취한 인도·파키스탄인 범죄조직 41명이 당국에 검거되기도 했다.또 절도·살인 등 외국인범죄가 해마다 늘어 96년1∼8월중 684명이 입건돼 이중 50명이 구속되고 400여명이 강제추방됐다. 불법체류자의 약점을 악용한 업주의 임금착취,여성근로자 성폭행,비참한 컨테이너 속의 집단거주 등 인권을 침해받는 사례도 적지 않아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경제가 어려워져도 3D기피현상은 변함 없어 불법체류자라도 없으면 당장 공장문을 닫아야 할 중소기업이 숱한 형편이다.이 때문에 당국도 불법체류자단속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칙적 해결방법을 찾을수밖에 없다고 본다.그간 논란을 빚어온 외국인노동자고용법 제정을 적극 검토하는 것이다.임금이 다소오르더라도 노동허가제 아래 정부가 인력을 도입·관리하는 것이다.불법체류자도 일정기간 노동허가를 주어 양성화함으로써 관리·통제가 가능해져야 한다.다만 이 가운데 포함된 4만여명의 중국동포문제는 별도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탈북자 1명 또 귀순 요청/김포공항 통해 밀입국

    ◎조선족 선원수첩 소지 국가안전기획부는 김포공항을 통해 밀입국한 북한인 한 명의 신병을 확보,정확한 신원과 북한 탈출 경위 등을 조사중이다. 안기부는 자신이 탈북자 강철호(29)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중국동포 이영호(28) 명의의 선원수첩을 소지하고 입국,공항경찰대에 귀순을 요청했다고 2일 밝혔다. 강씨는 북한을 탈출한 뒤 중국을 떠돌다 우리나라에 온 것으로 알려졌으며,안기부는 북한인으로 신원이 확인될 경우 인도적 차원에서 귀순을 허용할 예정이다.
  • 조선족 유학생 포항공대서 첫 박사학위

    ◎김영호·이재씨 입학 4년만에 영광 중국 교포 유학생 2명이 포항공대에서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화제. 19일 하오 포항공대에서 열린 「96학년도 학위수여식」에서 김영호씨(32·호학과)와 이삼재(여·31·화학공학과)씨가 국내 조선족 유학생 가운데 처음으로 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은 북경 이공대학과 길림대학에서 각각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93년 3월 포항공대 박사과정에 입학한 뒤 4년만에 얻은 영광이다. 전공분야는 김씨가 「고혈압 치료를 위한 효소억제제 연구」이며 이씨는 「원유중 질소와 황을 제거하는 촉매연구」이다.
  • 수분하시의 조선족(송화강 5천리:19)

    ◎러시아상대 보따리 무역… 변경 상권 장악/몇년새 수천명으로 불어… 절반이 연변출신/꼬리 문 러시아행… 호텔서도 비자업무 대행/“러시아 돈 조선족이 다 번다” 한족들 푸념/「러」 불법체류 조선족 경찰에 돈 뜯기기 일쑤 흑룡강성 수분하시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가까운 도시이다.수분하유역의 땅이어서 지명도 수분하가 되었다. 삼차구에서도 그리 멀지않은 60㎞ 거리인지라 수분하에서 택시를 탔다.본래는 자그마한 산골 향진이었던 수분하는 몇해 사이에 도시로 변했다.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인데다 개방바람이 불어 필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한족 택시기사는 묻지도 않는 말을 연신 지껄여댔다.택시기사는 수분하를 자주 들락거려서인지,수분하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그래서 정보를 미리 알려준다는 투로 말을 계속했다.내가 조선족임을 알아차리고 아부성 말도 잊지 않았다. 『조선족들 대단합니다.러시아 돈은 조선족들이 다 긁어오니까요.한족들이 따라가기는 벅찬 상대가 조선족입니다.조선족 장사꾼들 따라서 안 다닌 데가없어서 내 잘알고 있습니다.어디 그뿐입니까.노모츠(러시아 사람을 한어로 부르는 별명)들은 조선족을 강아지 따라다니듯 붙어다닌다 이 말씀입니다.수분하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조선족이지요』 수분하는 비좁은 골짜기에 들어앉은 도시이다.그래서 집들이 언덕빼기를 기어올라가며 들어서기 시작했다.수분하에 도착한 때가 저녁이어서 언덕빼기에 촘촘히 자리잡은 집 창문 마다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마치 거대한 빌딩처럼 보였다.그런 수분하의 밤 풍경을 얼핏얼핏 지나치고 여관을 잡았다.수분하시 화원로 남2로가 17호 화룡여관에서 수분하시의 첫 밤을 맞았다. 수분하의 조선족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몇 가구가 살았다.그런데 개방바람이 불면서 조선족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러시아쪽을 바라보고 몰려온 조선족이 지금은 수천을 헤아리게 되었다.그중에도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 절반을 차지한다는 이야기이다.연변조선족자치주가 가까운 탓도 물론 있다.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과 일찍 교류한 연변 조선족들의 상흔이 더 크게 작용한데있을 것이다. ○산골마을에 개방바람 화룡여관 주인 주정숙씨(56)도 외지에서 들어온 조선족이다.교편을 잡다 1990년에 퇴직을 하고 제자의 권유로 여관을 시작했다.단돈 3천원을 들고 와서 방 두개로 숙박업에 뛰어들었다.토박이들보다 뜨내기가 더 많아서 집집마다 방을 세놓았던 시절이어서 방이 늘 모자랐다.그래서 큰 집을 새로 얻어 지금의 화룡여관을 다시 냈다.한달에 수천원 수입올리는 일은 떼놓은 당상이라고 했다. 지난해 수분하시가 러시아와 거래한 무역량은 60억원에 이르고 있다.이같은 거래와 걸맞게 하루평균 600∼800명의 러시아인들이 수분하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많은 때는 1천200명까지 몰려든다니 과연 국경도시 다웠다. 그 이유는 중국의 상품이 미국·일본·한국제에 비해 질이 떨어지기는 해도,싼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그리고 전국에서 7천여명의 상인이 몰려들어 성시를 이루자,수분하시에서는 대형종합도매시장을 개설했다.도매시장에는 전국 20여개 성·시에서 만든 경공업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러시아로 넘어가는 사람들역시 들어오는 사람들 못지 않았다.수분하시 변성호텔은 러시아비자를 받기 위해 서성대는 사람들로 붐볐다.이 호텔에서는 아예 비자 수속업무를 대행한다는 글발과 함께 수속비 액수까지 써붙여 놓았다.3∼30일간의 단기비자는 3천원,장기비자는 4천원으로 되어 있다.호텔과 여관은 비자수속 대행 말고도 주문한 물건이 러시아로부터 도착하면,이를받아 전달해주는 일도 맡아 처리했다.또 어느 열차 아무개 승무원편에 현금을 부쳤다는 전갈전화가 호텔로 오면 돈을 받아놓았다가 전해주기도 했다. ○작년 거래량 60억원 달해 화룡여관에 투숙한 동안 러시아로 장사를 떠나는 사람들을 여러명 만났다.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에서 왔다는 김성씨(46)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는데,러시아 장삿길이 두번째라고 했다.훈춘시 장령자통상구를 두고 먼 수분하까지 왔느냐고 물었더니,그는 피식 웃었다. 『장령자 통상구야 북조선 장사라 재미가 없구마.여간한 밑천과 빽 없어서는 장사 못하지비.큰 회사들도 펑펑 망하는 판에 우리같은 새비(새우)들다리 편 자리 어디 있겠슴둥.그래서 러시아 장사로 나섰지비.수분하는 멀어도 수속이 간편하고 휴대물품 제한이 별로 없구나』 중국과 북한의 수출입은 해마다 줄고 있다.연변조선족 자치주의 경우 한 때에 3억7백32만달러였던 수출입총액이 지난해는 1천만달러 수준으로 크게 줄었다.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이 요구하는 양곡과 식품,식용유,설탕 등에 대한 수출허가를 제한해버렸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북한에서 사들여올만한 상품이 거의 없어서 북한과의 장사는 한풀 꺾이고 말았다.그 대신 러시아 장사로 돈을 제법들 챙기고 있다. 러시아장사는 재미가 짭짤했다.옷과 신발,화장품 따위를 갖고가서 도매로 넘기면 20%,소매를 하면 70%가 떨어진다는 것이다.러시아에 들어가서 한달에 4천∼5천원을 버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다만 문제가 있다면 번 돈을 달러로 바꾸어가지고 다시 중국으로 들여오는 일이다.러시아에서는 외화반출을 법적으로 금하고 있는 터라 몰래 가지고 올 수밖에 없다.중국에서 국제열차를 운행하는 날을 택해서 중국인 승무원을 통해 빼내오거나,여자들 은밀한 구석에 감추어 해관을 통과하는 등 별별 수단이 다 동원되었다. ○대북거래는 매년 줄어 돈을 버는 재미 못지않게 늘 위험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것이 러시아장사다.귀국채비를 하느라 달러를 바꾸어 놓고 여관잠자리에 들었다가 목숨을 빼앗기거나,러시아인 장사꾼을 따라나섰다가 돈을 털리는 일은 비일비재했다.그래서 홀몸으로 간 여인네들은 남자장사꾼들을 의지하게 마련이었다.그런 남녀의 만남은 곧 임시부부가 되었다.「님도 보고 뽕도 딴다」는 말이 러시아장사길에서 실제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로 장사하러 간 조선족들 가운데는 불법체류자들이 많다.그런 연유로 해서 러시아 미니츠(경찰)의 밥이 되기 일쑤였다.미니츠는 중국에서 온 장사꾼들이 몰린 장마당을 돌면서 수시 여권검사를 하는 것 까지는 좋았으나,온갖 트집을 다 잡아 피를 말렸다.그런때마다 경찰비라는 돈을 찔러주면 미니츠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듯 먼 하늘을 바라보며 지나갔다.내리 잘하다가 대접이 한번이라도 소홀하면 경찰에 붙잡혀가 갇히거나 몇백만루불의 벌금을물어야 하는 봉변을 당했다. 러시아에는 중국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들 살고있다는 것이다.블라디보스크에 5천명,우스리스크에 4천여명이 사는 것으로 어림했다.그런데 거의가 중국의 조선족이다.또 러시아에서 대대로 산 한인의 후예들도 많아 조선족 장사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연변사람 박문수씨(37)는 러시아의 한인3세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던 일을 몇번이고 자랑했다. 『미니츠는 깡패와 단짝 이구마.우스리스크에 팅(정)사사라는 한인 깡패두목이 있었지비.조선족을 만나면 고향친구 만난 것처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지비.나도 경찰에 잡혔는데 그 사람이 손을 써서 풀려나지 않았겠슴둥』
  • 국제마약조직 무더기 적발/대만 폭력조직 연계…7개파 42명 구속

    중국에서 제조한 히로뽕을 국내로 몰래 들여오거나 대만의 폭력조직 「죽련방」과 연계해 히로뽕을 밀수입하는 등 중국·일본·대만 등 6개국에 거점을 둔 마약조직 7개파 조직원 54명이 검찰에 무더기로 적발됐다. 서울지검 강력부(서영제 부장검사)는 17일 「양동식파」 총책 양동식씨(56) 등 42명을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하고 윤모씨 등 3명을 입건했다.「박대령파」 총책 박정렬씨(66)등 6명은 수배하고 하미드씨(27) 등 이란인 3명은 강제출국 조치했다. 양씨는 지난해 2월 교도소 수감동료였던 이해수씨(65·구속)등 3명을 중국 천진에 보내 현지 조선족으로부터 히로뽕 원료 1.8㎏을 구입,국내로 몰래 들여온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는 지난해 9월 중국 위해시에 밀조공장을 차린 뒤 히로뽕 2.5㎏을 제조,친동생인 박승렬씨(60·약사·구속)를 통해 국내에서 팔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 “황은 이야기 통하는 지도자”/중 각계의 황장엽 평가

    ◎개혁·개방에 긍정직인 드문 이념가/망명은 노선오무에 경고 메시지 중국의 지도부와 지식인들은 일단 황장엽의 망명을 동정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중국의 언론매체들은 한줄도 그의 한국영사관 도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그러나 위성TV와 단파라디오를 통해 알려졌고 지식인 사회의 화제가 되고 있다. 우선 이들에게 황장엽은 8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개혁개방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온 「이야기가 통하는」 지도자이며 이념가로 평가돼 왔다.학자이며 북한노동당의 고위간부로서 강택민 주석 등 중국 지도부와 쌓아온 폭넓은 친분도 호감을 갖게 하고 있다.중국지도부 및 지식인들이 친근감을 갖고 대할수 있는 몇 안되는 북한의 지도급인사로 평가돼 왔다는 것이다. 그는 63년 조선노동당 부부장급 간부로서 중국을 왕래하기 시작했으며 90년11월 중국방문때에는 강택민 주석과 회담하기도 했다.94년1월에도 중국을 공식방문했다. 중국당국은 그의 돌연한 한국영사관 망명에 경악하면서도 그가 갖고있는 정보의 수준에 관심을 갖고 있다.중국정부가많은 그의 직함중에서 노동당 비서국 비서직에 무게를 싣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국가운영을 위한 각종 정보가 취합되고 결정되는 비서국에서 그는 이념과 교육분야를 책임져왔다. 학자로서도 황장엽은 조선족 학자 등 중국내 학자와 교류가 넓다.특히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를 비롯,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등과 「조선학학술대회」 등 학술토론회를 두나라에서 번갈아 개최하는 등 비교적 많은 교류를 가져왔다.오랜동안 좌경적이던 중국내 조선족 지식인사회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고 한 조선족 교수가 평가했다. 이 점에서 그의 한국행을 위한 북한탈출은 조선족지식인들의 북한과의 거리를 넓힐 것으로 전망된다. 북경대 김모 교수(국제정치)는 그의 행동을 항거의 의미를 담은 분신자살과 같은 행동이라고 지적했다.그같은 지도자의 한국행 결행은 획일화된 북한사회에서 체제한계와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며 역사적으로 잘못된 노선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그의 탈출을 해석했다.
  • 북 감시차량 철수 관심 증폭/황장엽 망명 6일째 북경표정

    ◎우리측 영사업무 마비로 민원 지체/“기업도 몰래 촬영” 한국주재원 불안 황장엽 비서의 북경주재 한국영사관 망명사건으로인한 삼엄한 경비때문에 영사 업무가 6일째 완전 마비되고 있다.이 때문에 17일 아침부터 영사관 건물 밖에는 여권을 잃어버린 한국여행객,서울행 조선족,국제결혼하려는 한국인과 중국인 등 1백60여명이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웠다. ○24일께 업무재개 검토 특히 대사관측은 앞으로 1주일후인 24일에나 아시아선수촌에 있는 공보원에서 업무를 재개할 수 있도록 검토하고 있으나 북한의 테러위협과 중국 당국과의 협의때문에 그것도 장담할수 없다고 밝혀 갈길 바쁜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하고 있다. 영사관의 한 관계자는 영사업무 중단으로 1백50여건의 결혼업무와 2천여건 정도의 비자가 발급되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 흑룡강성 목단강에서 왔다는 박모씨(여·23)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날짜까지 받아놓았는데 더이상 늦춰지면 결혼식을 연기해야 할 판이라고 울먹였다. ○…북한은 17일 하오늦게 한국영사부 외곽에 대기해있던 북한대사관차량을 별안간 모두 철수,대사관으로 복귀.북한은 지난12일 하오부터 황장엽 비서가 귀순해 있는 삼리둔 동3가 한국영사관 외각에 요원들이 승차해 있는 5∼10대의 북한대사관소속 차량을 배치,한국측의 동태를 밀착 감시하며 압박해왔으나 이날 하오 늦게부터 돌연 차량들을 대사관으로 모두 귀환시켜 이같은 결정에 관심을 집중케했다.이날 북한대사관 대강당 등은 밤늦게까지 불이 켜있는 등 모종의 대규모 회의 및 모임을 가졌다고 한 조선족 기업인이 전언.이날 상오 북한의 주창준대사는 당가선 중국외교부 부부장과 면담을 가졌다. ○…북한대사관측은 이번 사태와 관련,모스크바·유럽 등지의 공관으로부터 인력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북한대사관 앞에 있던 40대 중반의 한 북한남자는 14일 주 모스크바대사관에서 북경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영문도 모른채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또 외교관으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자도 유럽에서 왔다고만 짤막하게 소개. ○쓰레기 2t 나와 눈길 ○…이날상오 9시25분쯤 영사부 건물 앞에 청소용 트럭이 도착,4명의 인원을 동원해 10분간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운반.쓰레기는 2t트럭 한대분을 거의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아 12일부터 영사부 건물에 상당수 인원이 24시간 비상근무했음을 입증. 이어 상오 11시쯤 한진의 컨테이너 차량1대가 이 건물에 도착,이번 사태의 장기화에 대비해 필요한 집기 등을 들여놓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자아냈다. ’○…북한사람으로 보이는 3명이 카메라로 한국기업 사무실 출입구를 몰래 촬영하고 사라졌다. 이들 3명은 이날 상오 10시30분쯤 대사관이 있는 북경시 조양구 건국문외대가 국무빌딩 12층의 모 한국회사 북경사무소의 출입문 사진을 찍은후 이 회사의 중국인 여직원이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아무런 대꾸없이 사라졌다는 것.이 회사는 북한의 K무역회사와 화학섬유 등의 임가공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한국기업으로 북한측이 한국기업에 대해서도 불안감과 심리적 압박감을 주려는 의도에서 이같은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 황장엽 망명­주북경공관 표정

    ◎북,공작원 200∼300명 급파… 긴장 고조/저격대비 황 비서방에 방탄철판 설치/중,북경한인교회 예배 일시중지 권유 북경의 한국총영사관 부근에서 15일 북한 대사관 소속 승용차 한대가 또다시 경찰저지선을 돌파하고 총영사관으로 진입하려다 공안의 저지로 무산되는 사태가 있어 이곳 한국 당국자들과 공안원들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는데 이로인해 중국공안은 방탄차 한대를 추가로 배치,방탄차가 모두 2대로 늘었다. 북한측은 한국 총영사관 부근에 승용차 5대 가량을 상시 주차해 놓고 망원경 등으로 24시간 동태를 감시하며 수시로 위협 시위를 벌여 이곳에 몰려든 내외신 기자들이 돌발사태에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편 공안이 경찰저지선을 1백∼3백m로 계속 확대하고 있는 것은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북한 특수공작요원들의 로켓포 및 가미카제식 차량폭탄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또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50여명의 중국 공안부 소속 인민무장경찰요원들이 15일 새벽 한국으로 망명을 신청한 황장엽이 보호받고 있는 북경주재 한국총영사관 주변 도로에 추가로 배치돼 긴장감이 더욱 고조. ○…김정일의 55회 생일을 하루 앞둔 15일 황장엽의 한국망명 저지를 위한 북한 협상실무진이 탄 북한 고려항공 JS 151 여객기는 예정보다 30분 늦은 상오 10시쯤 북경 수도공항에 도착. 러시아제 일류신기로 도착한 승객중 북한 협상대표단 실무진은 5∼6명으로 정장에 회색 바바리코트로 복장을 통일,한눈에 대표단임을 표시. ○…한국대사관 영사부측은 북한의 요원들이 계속 주중 한국공관에 몰려들고 두차례에 걸쳐 진입을 시도하는 등 심상치 않다는 판단에 따라 만일의 사태에 대비,황비서와 김덕홍의 안전을 위해 이들이 묶고 있는 방안에 방탄용 철제판을 덧붙여 대비. 북한은 이들 교섭 실무진 이외에도 황장엽이 망명을 신청한 12일부터 동북 3개성에 있던 공작원 등 200∼300명을 북경에 파견,북경주재 한국대사관·총영사관 등을 감시하며 한국측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생일을 하루 앞둔 북경 북한대사관은 15일 황장엽의 망명에도 불구,김정일의 생일선물 준비등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라고 북한상사원들과 거래관계인 한 조선족 기업가가 전했다. 이날 북경 수도공항에선 「사133­」번호판의 북한대사관 차량들이 생화와 선물박스를 봉고트럭 수대에 실어 고려항공으로 실어나르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중국 공안당국은 15일 북경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신변 안전조치의 하나로 매주 일요일 북경 한인교회의 예배가 드려지는 북경시 조양구 양마하교노 21세기반점 측에 16일에는 한국인들에게 예배장소를 제공하지 말도록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안당국은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 망명사건으로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 다수의 한국인들이 일시에 한 장소에 모일 경우 위험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이같이 권유한 것으로 보이며 호텔측은 이에 따라 교회 관계자들에게 그 내용을 통보했다.
  • 황장엽 망명 수양딸이 다리역/국내접촉인사 밝혀

    ◎2∼3차례 내한… 정부고위인사와 만나/망명 이틀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지난 12일 한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한 황장엽비서와 「여광무역」총사장인 김덕홍씨와 가장 빈번하게 접촉한 국내 인사는 대북교역 전문업체인 「씨피코 국제교역」의 노정호 사장(34)으로 밝혀졌다. 노사장은 14일 서울 종로구 내자동 사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1년에 4,5차례 중국에 갈 때마다 이틀에 한번꼴로 김총사장과 만났다』며 『김총사장은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자상한 면이 있으며 한국 사정에도 무척 밝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김총사장은 만날 때마다 황비서 얘기를 하는 등 그를 무척 존경하는 것 같았다』고 전하고 『김총사장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지난해 9월 사업차 중국을 방문했을 때였다』고 말했다. 노사장은 그러나 『김총사장과 서신교환 등을 하며 형제처럼 지낸 것은 사실이나 사업과 안부에 관한 게 전부였다』며 황비서의 망명의사를 담은 편지를 국내에 전달했다는 항간의 추측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노사장은 지난 94년 1월 북한교역 전문회사인 씨피코를 설립한 뒤 중국을 드나들다 95년 1월 김총사장을 북경에서 처음 만났다.거래업체이던 중국의 M유한공사의 조선족 박모씨(35·여)의 소개로 알게 됐다. 박씨는 지난 92년 5월 김정일의 50회 생일때 축하단으로 평양을 방문했다가 황비서를 만나 수양딸이 됐다.황비서와 노사장을 연결시켜준 인물도 박씨였다.황비서는 김총사장을 통해 망명신청 이틀전인 지난 10일 상오 10시쯤 연길에 있는 박씨에게 전화로 『빨리 안전한 베이징으로 피신하라』고 알려 피신시킬 정도로 혈육이상의 정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사장은 황비서가 박씨에 대해 지닌 애틋한 정의 증거로 중국 심양에서 박씨의 배웅을 받으며 평양으로 돌아온 다음날인 95년 3월18일자로 황비서가 박씨에게 보낸 안부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다.황비서는 『새벽 3시에 역전에 나온 너의 모습이 내 머리속에 계속 남아 나에게 기쁨과 고무로 된다』고 회고하면서 『사려깊은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 법,빨리 뛰는 자는 자빠지는 법이라는 격언이 있다』며 딸에 대해 느끼는 조바심을 간절하게 표시했다. 박씨는 지난 여름을 포함 지금까지 2∼3차례 한국을 방문,우리측 정부 고위 인사와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 국경마을 「삼차구」의 새바람(송화강 5천리:18)

    ◎통행증 없이 왕래… 변경무역 도시로/중·러 장사꾼 몰려 여관 식당 “우후죽순”/아낙은 옷장사 남편은 집안살림 신풍속도/조선족이 일군 옥토… 30년대 강제추방 시련도 중국에는 변방검사소가 모두 234군데에 있다.검문소 기능을 가진 변방검사소 가운데는 공항소 50군데,항구소 119군데,육지소 62군데,검사본소 3군데가 포함되었다.그런데 흑룡강성에는 15군데나 되는 변방검소가 들어섰다.중국의 대외개방정책에 따라 흑룡강성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중국에서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로 나가는 길목일뿐 아니라 러시아와도 곧바로 연결할 수 있는 지역이 흑룡강성이다. 흑룡강성은 특히 러시아와 3천45㎞나 되는 긴 국경선을 이루었다.그래서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러시아의 도시 20여개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또 중국에서는 국경지대 24군데에 통상구를 설치했다.그런데 조선족진인 동녕현에도 통상구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조선족 유일의 이 통상구는 동녕현 삼차구에 들어앉은 동녕통상구이다.수로와 육로를 통해 곧바로 러시아와 연결되었다. 그 동녕통상구가 있는 삼차구로 가기위해 목단강시에서 버스를 탔다.수분하로 가는 아스팔트길을 달리다 수분하 10㎞를 앞두고 마록구쪽으로 굽어들었다.험준한 산악도로를 넘어 벌판에 들어서자 동녕현성이 나타났다.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7㎞를 더 달려 삼차구에 닿았다.수분하와 후부투하가 합수하는 삼각지대라고 해서 삼차구라는 이름이 붙었다.흑룡강성의 강남으로 불리는 삼차구는 기후가 좋아 목화와 고구마농사가 잘 되었다. ○“흑룡강성의 강남”으로 불려 삼차구는 얼마전 만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변경지대였다.90년대 들어서야 개방되었다.변경통행증이 없으면 차에도 못 올랐던 시절이 있었다.지금은 자유자재로 오갈수 있을 만큼 세상이 달라졌다.머리털이 나고 처음 밟아보는 땅이라 그런지 감개가 무량했다.더구나 우리민족이 일찍 개척한 땅이 아닌가.선조들의 개척정신이 새삼스럽게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경북도 경원군 송하면 사람 이창호일가가 맨 먼저 삼차구에 들어와 첫 괭이를 박았다.지금으로부터 100년을 훨씬 더거슬러올라가는 1882년의 일이다. 1923년 기록을 보면 삼차구 조선족은 324가구에 2천125명으로 되어있다.동녕현 조선족은 1930년 1천40호 5천200명에서 1935년에는 1천433호 7천703명으로 늘어났다.현재는 9천여명으로 현 전체인구(2만1천명)의 48%를 차지했다.삼차구는 만주국 시절 얼마동안은 현 소재지이기도 했다.그러나 1937년 장고봉전투에서 진 일제가 구 소련의 요구를 들어주는 바람에 현 소재지를 동녕으로 옮겼다.일제는 국경선으로부터 10㎞이내에 마을을 두지않기로 한 요구를 받아들여 삼차구의 주민들을 강제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목단강,영안,해림 등지로 뿔뿔이 떠나버렸다.광복이 되어 다시 모여들었는데 바로 오늘을 사는 삼차구 조선족들이다.삼차구진 소재지 마을은 동녕현 소재지 못지않게 흥청댔다.길 양쪽에 음식점과 여관들이 촘촘하고 소학교 뒤 공터에는 장이 섰다.장마당에는 팔고사는 사람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그리고 큰길로는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컨테이너 트럭과 택시들로 해서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불과 3∼4년전까지만 해도 한적했던 마을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이다. ○1991년 조선족자치진 지정 국경은 마을 끝자락을 지나갔다.개울이나 다름없는 강에는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콘크리트 다리가 있고,양쪽 다리끝에는 두나라 변경검사소가 자리잡았다.국경에 다리를 놓은 지도 10여년 밖에 안되었다.처음에는 중국쪽 주민들과 러시아쪽 주민들 사이에 물물교환으로 시작한 거래가 지금은 덩치가 커졌다.사사로운 민간무역이 통크게 발전하더니,80년대 두나라 친선관계가 강화되면서 개방이 급속도로 가속화했다. 삼차구는 1991년에 조선족자치진이 되었다.지난해는 주민 1인당 연간평균 2천476원을 올렸고,올해는 3천원을 내다보고 있다.농사수입보다 변경무역이 더 큰 수입원이다.동녕통상구가 열리면서 천지개벽과 같은 현실을 맞는 것이다.삼차구가 자치진이 되었던 해는 밀수가 판을 치던 때라 돈을 긁어모았다.밀수꾼들이 몰려와 헛간에도 손님이 들 정도여서 여관과 식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지금은 밀수길이 막혔지만,경기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국경의장사꾼은 대개 두 부류이다.밑천이 든든하면 옷장사고,작은 밑천으로는 채소나 과일장사를 한다는 것이다.옷장사는 여자들 몫으로 삼차구 부녀주임 박정금은 지난해 몇만원이나 되는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러시아 우스리스크까지도 멀지않다.드나드는 옷장사가 여자들 몫이라,부부역할이 뒤바뀌었다.그래서 남자들이 집안살림에 매달리는 가정이 많아졌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삼차구는 개혁개방 덕분에 살기좋은 고장이 되었으나 새 풍속도가 생겨난 셈이다.돈도 돈이지만 옛날 분위기에 비하면 삼차구는 별천지가 되었다.을씨년스러웠던 시절을 삼차구에서 보낸 백원만씨(63)의 말을 들어보면 삼차구는 무시무시한 국경지대였다.처음에는 교편을 잡다가 형이 사는 삼차구로 와서 경찰에 들어간 그는 오랫동안 파출소장을 지낸 인물이다. 『내 여기서 11년간 경찰질 할 때는 중·소관계가 팽팽했던 시절이었수다.구 소련땅에 친척이 살아도 간첩으로 몰렸지비.별별일이 다 있었수다.중·소관계가 악화한 1969년에는 밤낮 비행기가 뜨고 하루에도 몇번씩 공습경보가 내리지 않았겠슴등.국경넘어서 달리는 소련군 탱크 소리에 모두가 겁에 질렸지비.기리고 1979년 중국이 월남을 쳤을 때도 삼차구 코앞에까지 소련군이 집결했었수다』 그러고 보면 삼차구는 많이 달라졌다.문화대혁명 시기 러시아어를 하면 간첩이었는데,지금은 러시아어가 대접을 받고있다.백원만씨 딸도 노어전문학교를 나와 무역회사에 입사,시집밑천을 벌써 모아놓았다고 했다.
  • 안보·통일외교 강화 급하다(박화진 칼럼)

    북한붕괴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노동당 국제담당비서 황장엽의 귀순을 보며 우리통일·안보정책에 대한 독일등 해외지도자들의 충고를 떠올리게 된다.『북한이 당장 붕괴되더라도 주변국 도움없는 한반도 안보·통일은 불가능하다.한국은 북한지배계층의 「대남공포」를 줄이고 그들을 포용하는 방안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경험으로는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이 노력이 부족하다는 충고인 것이다. 『한반도통일을 위해선 우선 국제적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한다.독일통일과정에서 느낀 것은 주변국 도움없는 통일은 불가능 하다는 사실이었다.통일은 결코 한나라의 문제가 아니다.독일외교의 핵심은 신뢰구축 정책이었다. 독일통일을 경계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우선 프랑스와의 화해를 추구했고 유럽연합(EU)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회원이 됐으며 옛소련·동구와의 협력정책을 추구했다.그결과 유럽국경을 변경할 수 있다는 헬싱키조약을 얻어낼 수 있었다.한국도 주변국을 설득하는 작업을 펼쳐나가야 한다』 독일 통일외교 주역 겐셔 전 외상의 충고다. ○주변국 설득작업 계속해야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가장 큰영향을 받게 될 이웃은 중국이다.중국이 반대하는한 한국통일은 불가능하다.중국과의 관계강화가 중요한 것이다.그러나 미국과의 유대 또한 당연히 확실하게 다져야 한다.독일통일이 미·영·불 동맹체제 위에서 가능했듯이 한국통일도 미·중·일 특히 미국과의 확고한 동맹관계가 없다면 불가능하다.그리고 프랑스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주었기 때문에 독일의 참회가 쉽게 이루어질수 있었다.일본에 대해서도 한국이 먼저 프랑스와 같은 이웃이 되어준다면 통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슈미트 전 총리의 권유도 겐셔의 그것과 비슷한 내용이다. 독일내무성 동·서독 문화통합 실무책임자인 아커만씨는 한걸음 더나아가 주변국뿐아니라 내부의 두려움도 완화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특히 통일상대인 북한지배계층의 「대남 공포」를 완화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이대목에 대해선 클라크 미 일본학회회장의 글이 보다 구체적이다.통일후 독일에선 과거 동독지배계층에 대한 보복사례가 거의 없었다며 한국도 통일후의 운명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는 북한의 일반주민은 물론,특히 지배계층에 대한 최대한의 관용을 약속하는 조치를 선언한다면 통일은 훨씬 앞당겨 용이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북 주민 대남공포 해소를 통일선진국 독일과 맹방 미국 지도자들의 이같은 충고에 접하면서 우리는 그동안 통일 촉진이 아니라 정반대의 지연노력을 해온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그리고 우리의 통일은 외부의 그누구도 거부할수 없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도 일깨우게 된다.대중 관계는 큰진전을 보인 것이 사실이나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의 경계심을 완화하는 노력은 너무도 소흘했던 느낌이다. 국회일부에서 있었던 「백두산 찾기운동」이라든가 혹은 연변조선족 중국인을 상대로한 민족주의감정 고취 등은 중국의 경계심을 완화는 커녕 자극한 사려깊지 못한 행동이 아니었던가.서독의 폴란드·동독 국경수용에 비교되는 통일후의 한·만 국경준수선언 같은 것은 중국의 경계심 완화에 큰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지연시키는 행동 자제 그러나 지나친 중국접근은 미·일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부작용을 수반한다.우리사회 진보계층이나 일부언론의 무책임한 반미 분위기 고취는 결국 우리통일을 지연시키는 결과가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대북관계 등에서 미국의 행동이 옛날같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현재와같은 대일 자세가 우리통일에도 도움이 되는 것인지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과거사반성 문제 등에 대한 시각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수 있는 것이다.감정이나 정서보다는 현실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일·중·러 등 주변4강을 모두 만족시키는 일은 불가능 하겠지만 우리통일에 대한 그들의 경계심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장기적이고 사려깊은 노력과 정책의 우선순위에 따른 추진은 우리통일과 안보의 필요불가결한 전제조건임을 독일지도자 등의 충고는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아울러 북한주민들에 대한 배려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황장엽 등의 귀순은 그런 노력의 강화를 재촉하는 경고의 하나라 할수 있다.〈심의·논설위원〉
  • 북 “탈북자 막아라” 「얼음함정」 설치

    ◎압록강·두만강에 3∼5m 간격 구멍 뚫어/장애물도 설치… 중국 3성엔 색출조 ㅍ견 북한당국은 주민의 탈출사태를 막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의 얼음을 3∼5m 간격으로 깨 해자를 만들고 장애물까지 설치했다고 탈북자조직임을 자처하는 「북조선인민의 생존과 민주를 위한 탈출자연합전선(북민전)」이 9일 밝혔다. 「북민전」은 이날 일부 북경주재 한국언론사 사무실에 보낸 A4용지 2쪽 분량의 유인물을 통해,북한이 학생규찰대요원과 가두인민반 노인으로 구성된 규찰대를 국경일대에 2∼3중으로 배치해놓고도 마음을 놓지 못해 얼어붙은 강물에 해자와 장애물을 설치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이와 함께 중국 동북3성(길림·요령·흑용강성)에 200명에 달하는 위장탈북자를 보내 탈북자를 추적,연행하는 한편 탈북자를 도운 현지 한국인 및 조선족 동포에게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북민전」은 덧붙였다. 「북조선인권투쟁선언문」이라는 북경 「북민전본부」 명의의 이 유인물은 이 조직이 기존의 「탈북자민권협회」,「탈북자반석동지회」 등의 조직과 구성원을 한데 묶어 새롭게 결성된 것이라고 밝히고 국내외적인 「김정일정권계승반대운동」 등 북한의 세습독재체제에 결사항거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 김송죽 소설 「번개치는 아침」(송화강 5천리:17)

    ◎북만일대 조선족 삶과 투쟁 생생히/비적의 약탈에 맞서 결성한 무장지위대/후일 공산군부대 편입… 국민당군 토벌나서/항일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반동으로 찍혀/중국 문혁시기 혹독한 핍박·고초겪어 흑룡강성 화천면 성화향 성화촌에 사는 김송죽 선생(59)은 퇴직교원이다.자식들은 모두 대학을 나와 하얼빈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나가있다.그래서 두 내외가 넓은 한족식 집을 지켰다.그는 80년대 초에 처녀작 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을 발표한데 이어 90년대 초에는 장편실화 「혈전」을 내놓았다.이미 문명을 얻은 그는 요즘 「관동의 밤」이라는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처녀작 「번개치는 아침」은 그의 부친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광복직후 조선족부대가 비적과 싸운 투쟁의 역사를 그렸다.국민당군 별동대 성격의 비적은 광복직후 북만일대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공산당을 적으로 싸워야했던 당시 국민당에 북경에서 먼 북만은 사실상 통치지역 밖이었는지 모른다.그런 탓에 국민당을 돕는답시고 나선 별동대속에는 만주국시절 헌병이나 경찰관도끼여있었다는 것이다. ○피땀어린 농토 등지고 유랑 그리고 실제 국민당 비호를 받았다.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상장 사문동과 제1집단군 총사령 상장 이화당,국민당 동북 정진군 총지휘 중장 장우신이 별동대를 조종했다.당시 그들의 횡포를 고발한 노래말에 「사(사문동),이(이화당),장(장신우)은 불지르고 살인하니」라는 내용이 들어갈 정도였다.북만일대의 주민들은 이들에게 등을 돌렸다.공산당이 일찍 뿌리를 내린 이유도 이들 때문이었다. 이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마을이 불타버리고 주검이 들판을 덮었다.더구나 조선족은 늘 사냥의 대상이 되어 무참한 죽음을 맞았다.그런 일로 해서 조선족들은 피땀으로 일군 땅을 버리고 다시금 유랑을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이 무렵 조선족 선각자들이 일어났다.무장자위대를 만들어 마을을 지켰던 것이다.그러고 나서 얼마있다가 공산당 군부대에 속속 편입되었다. 그러한 무장자위대 가운데 맨 먼저 공산당 군부대에 편입한 조선독립대대는 1945년 11월25일 연안에서 주덕해와 손을 잡았다.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개편한 조선독립대대는 다음해 4월28일 하얼빈에서 국민당군과 싸웠다.하얼빈이 국민당군 손에서 떨어져나오자 당기관과 발전소,송화강철교,비행장 경비를 담당했다가 국민당군 토벌에 나섰다.1946년 9월2일 하얼빈시 향방구 사리툰전투에서는 제3지대 소속 조선족 21명이 전사했다. 김송죽 선생의 부친이자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모델 김병념은 광복직후 동북민주연군에 참가했다.제1연대 조선족대대인 제2대대 5중대 1소대에 배속되었다.소대에서 3반장 직책을 맡은 그는 1946년 가을 대대를 따라 흑룡강성 화남현 발전소로 이동했다.그해 11월6일 주변정찰을 나갔다가 국민당군 병력과 교전이 붙었다.그 전투에서 김병념은 대대참모 김해정 등과 함께 전사했다.그리고 얼마뒤인 11월20일 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사문동이 붙잡혔다.사문동은 12월23일 벌리현에서 총살되었다. 김송죽 선생은 소년시절을 부대에서 보냈다.부친 김병념이 전사한 이후에도 모친이 부대 재봉대에서 군복을 짓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냥 영내에서 살았다.그러다 부대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모친과 함께 벌리현에 남았다.할아버지 김석길이 아직 생존해있던 때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애국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요,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엄하게 자랐다. ○소년시절 군부대서 생활 할아버지 김석길은 1884년 평남 수난 태생이었는데,1912년부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연고로 지명수배를 받자 제자 9명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집안과 휘남을 거쳐 왕청에 와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북로군정서의 일원이 되었다.그리고 1925년 신민부에 들어갔다.1928년에는 김좌진 장군이 파견한 의란현에서 이도강 등에 4개의 학교를 세웠다. 김송죽 선생이 스무살 나던 해인 1958년에 할아버지 김석길은 흑룡강성 화남현에서 세상을 떴다.그러나 독립운동에 참가한 민족의사들은 대접을 못받고 있다.항일운동을 했으면서도 공산당이 이끈 투쟁대열에 서지 않은 사람은 모두가 배제되었다.오늘날 흑룡강성 항일열사 가운데 민족독립운동가는 한 사람도 없다.물론 김석길 같은 분들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후손들은 오히려 모진 핍박을 받았다.더구나 문화대혁명시기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겪어야했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김송죽 선생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이유로 반동민족주의자가 되었다.그의 죄목은 반동민족주의자 말고도 역사반혁명분자의 아들,반혁명집단의 두목,반당분자,반사회주의분자 등 10가지에 이르렀다.부친 김병념이 국민당군과 투쟁한 사실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부친이 광복전 강제로 끌려가 철도경호대에 있었다는 사실만 들추어 혁명열사가 계급의 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김송죽 선생 자신이 써놓았던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원고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비적토벌을 내용으로 한 것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갔으나,김동철·김해정이 조직한 조선족부대를 문제로 삼았다.김동철과 김해정은 본래 항일연군 8군에서 일제와 싸웠다.그러다 1939년 군장 사문동이 일제에 투항하자 숨어있다가 광복과 더불어 조선족부대를 창설했던 것이다.그 뒤에 동북민주연군 제1연대 제2대대에 편입되었던 조선족부대가 1949년북한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반동으로 몰았다.문화혁명 당시 중국에서는 북한을 수정주의로 보았던 터라 조선족부대는 반동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 틈틈이 습작 그는 옹골진 4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모진 매를 맞고 이른바 돌림투쟁을 숱하게 당했다.그래도 푸른 대나무처럼 곧게 살라는 뜻에서 지어준 자신의 이름(송죽)에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감옥생활 4년을 버티었다.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소설 「번개치는 아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1965년 탈고하고 하얼빈 조선족문화관에 원고를 보내놓은 상태에서 날벼락을 맞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출판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내 문학수업은 어떤 의무감에서 이루어졌디요.청소년기를 할아버지와 함께 하면서리 독립운동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서 그걸 언젠가 정리한다는 생각을 했습네다.할아버지 유언도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과 비적의 횡포를 역사로 기록하라는 것이었디요.할아버지한테 듣고,어렴풋하나마 어려서 실제 보아왔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에서 소설을썼던 것이외다.1957년 벌리중학을 나와 농사일 틈틈이 그런 꿈을 키우면서 실제 습작을 해왔디요.할아버지 유언과 내 꿈은 실로 오랜만에 이루어졌습네다』 김송죽의 「번개치는 아침」은 1983년에 출판되었다.원고를 탈고한지 꼭 18년만에 햇빛을 본 것이다.그에게는 물론 가족사를 문학적으로 정리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안겨주었다.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속에서 차츰 멀어지고 있는 조선족들의 삶과 투쟁을 복원한 대서사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요즘 탈고한 장편소설 「관동의 밤」도 북만의 독립운동사를 형상화한 것이다.자그마치 75만자나 되는 작품을 출판할 길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 김영진씨 “김일성 처남과 사돈아니다” 해명/기자회견장 이모저모

    김영진·유송일씨 귀순일가 8명의 30일 기자회견은 입국당시 무성했던 각종 의혹에 대한 질문이 쏟아져 청문회를 방불케 했다. ○질문때 마다 바짝 긴장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탈북 및 입국과정상의 각종 의혹에 대한 질문이 이어져 북한의 경제난 등이 주로 다루어졌던 지금까지의 귀순기자회견과 사뭇 다른 모습.특히 격렬비열도에서 해경에 구조될 당시의 구체적 정황과 김씨의 아들 해광군이 썼다는 일기장에 대해 질문이 쇄도. 김씨 등은 질문때마다 바짝 긴장하며 「해명성 답변」을 계속. 안기부 관계자들은 추궁성 질문이 빗발치자 『나중에 물어보라』고 여러 차례 제지하며 1시간30분만에 기자회견을 종료. ○귀순당시 옷입고 등장 ○…김씨와 유씨 등 귀순자들은 이날 상오 10시 정각에 회견장인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입장. 이들은 지난 22일 인천항에 도착할 때와 마찬가지로 건강한 모습에 조선족이 사줬다는 옷을 입고 나왔다. 안기부 관계자는 『귀순 과정의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 일부러 귀순당시의 옷차림으로나오도록 했다』고 설명.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김씨 등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혹이 완전 해소되기에는 미흡했다는 반응. 참석자들은 ▲귀순자들이 해경 경비정에 옮겨타기 1시간 전에 이미 안기부가 이들의 신상명세를 발표를 한 점 ▲북한 안전요원을 피해 신분을 숨기고 다니면서도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은 점 ▲인천항 도착당시 말쑥한 표정과 옷차림 ▲김해광군이 썼다는 편지의 정체 등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 이에 대해 안기부 관계자는 『탈북과정상의 의혹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피력. ○빨리 귀순하려 해본 말 ○…당초 김일성의 처 김성애의 둘째 동생인 김성갑과 사돈지간인 것으로 알려졌던 김영진씨는 김성갑과는 거의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씨는 『높은 사람을 안다고 하면 남한에 빨리 귀순할 수 있을 것 같아 일부러 김성갑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며 『그러나 족보를 따져보면 10촌과 연관이 있기는 하다』고 해명.
  • 작년3월 어둠 뚫고 두만강 건너 북경도착/두가족 탈출­귀순 경로

    ◎대사관서 망명 거부해 10개월간 유랑생활/조선족 도움으로 밀항선 타 서해서 구조돼 김영진·유송일씨 가족은 각각 지난해 3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간 뒤 10개월여동안의 유랑생활을 거쳐 지난 22일 꿈에 그리던 남한 땅을 밟을수 있었다.이들은 모두 현지 조선족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두 가족은 귀순때까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김씨 일가의 탈북 장정은 지난해 3월19일 고향인 평남 문덕군을 떠나 국경에서 가까운 함북 무산 외할머니댁으로 가면서 시작됐다.기회를 엿보다 24일 상오 3시30분쯤 어둠을 뚫고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땅에 발을 디딘 이들의 목표는 오직 북경에 있는 한국대사관이었다.망명신청을 하면 모든게 해결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생활비 등 치밀한 사전준비를 못했던 이들은 주로 조선족 집들을 전전하며 반 구걸 생활을 했다. 갖은 고생 끝에 5월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갔지만 대사관측은 외교문제 때문에 망명신청을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날품팔이와 식당잡부,벌목공 등으로 근근이 연명하면서기회를 엿보던 중 현지 조선족이 소개한 「박사장」의 도움으로 지난 1월21일 밀항선을 탈 수 있었다. 유씨는 어머니 이의순씨(65)와 부인 이영순씨(39) 등 가족 5명을 이끌고 김씨 가족보다 보름 가량 이른 3월4일 함북 청진을 떠났다. 24년간 군에서 복무했던 유씨는 군복차림에 제대증명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원들의 감시 눈길을 피해 어렵지 않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얼어붙은 두만강을 걸어서 건넌 뒤 곧장 중국 심양으로 향했다. 심양에서 조선족 동포들의 집을 전전하며 숙식을 해결하던 유씨도 북경의 한국대사관을 찾아갔지만 거절당했다. 유씨는 북경역 앞에서 앞으로의 거취를 놓고 부인과 심하게 다퉜고 부인은 그 길로 헤어져 돌아오지 않았다.6월23일에는 어머니마저 힘든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가족들을 잃고 체념상태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유씨에게 지난 7일 그동안 도움을 주던 조선족 동포가 찾아와 중국 청도에서 21일 밤 남한행 밀항선이 출발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한 배에 탄 김씨 가족과 유씨 가족 8명은 강풍과 파도속에서 항해를 계속한 끝에 다음날 낮 인천 서남방 75마일 격렬비열도 해상에서 한국 해경정에 의해 구조됐다.두 가족의 10개월간의 대탈주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순수 조선족마을 성화향(송화강 5천리:16)

    ◎두레농사 지혜로 집체농장시대 열어/만주국시절 일 군량기지화 위해 개척한 옥토/1946년 동북각지 조선족 제2의 삶터로/한몸되어 일군 성화농장 성공사례 영화제작/“농사만이 살길” 신품종 개발·황무지 개간 박차 흑룡강성 화천현 성화조선족향은 조선족 말고는 다른 민족이 전혀 없는 순수한 조선족향이다.연변을 포함하여 한 사람의 타민족이 끼지않은 조선족은 없기 때문에 전국 유일의 순수 조선족향인 것이다.이 향의 이름인 성화는 불꽃이라는 뜻이다.중국 건국 초기 첫 집단농장이었던 성화조선족향의 경험이 전국에 불길처럼 번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명실상부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성화는 가목시에서 15㎞거리다.삼강평원 서쪽에 위치한 성화는 토양이 비옥하고 수원이 풍족하여 만주국 시절인 1936년 일본 무장개척단이 첫 발을 붙였다.일제는 삼강평원을 군량기지로 만들기위해 중국인 쿠리들을 동원,능당백하라는 물길을 내고 송화강물을 끌어들였다.그리고 방대한 토지를 규격화한 논으로 개간했으나 1945년 일제가 패망하는 바람에 그 좋은옥토가 묵어나고 말았다. ○개척 초기 335가구 이주 일본인들이 떠나고 나서 성화향 농토를 다시 일군 사람들은 바로 조선족이다.1946년 공산당이 흑룡강에서 토지개혁을 하는 과정에 동북각지의 조선족을 불러들였다.임구현에서 60가구,계동현에서 85가구,벌리현에서 120가구,길림성 돈화현에서 70가구가 이사를 와서 오늘의 성화향 4개 마을을 이루었다.그 때에 돈화현에서 소작을 살다가 성화로 이주한 김백산이 마을을 이끌어 두레농사를 시도한 것이 점차 확대되어 1951년 성화농장을 탄생시켰다. 모두가 객지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이라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터였다.그래서 민족고유의 농촌사회 미풍양속이었던 두레는 성화농장 발전을 부축했다.오랜 세월을 두고 혼자 농사를 지어온 한족들에게는 조선족 두레농사가 신기할 뿐이었지만,중국에는 마침 새 바람이 불었다.구 소련의 콜호스경험이 막 이식됐던 때라 성화농장은 공산주의 사회의 깃발이 되었다.1951년 동북 영화촬영소는 성화농장을 영화로 찍어 「전국 첫 집체농장」으로 소개했다.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농장 주석 김백산은 전국 노력모범이 되었고,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뽑혔다.1962년 김백산이 세상을 뜨자 이재근(77)이 뒤를 이었다.벼 우량품종을 육종하여 전국에 보급시킨 이재근은 전국집체농장 당서기에 이어 3·4·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에 올랐다.그도 역시 전국노력모범이 되었으니 성화농장의 명성은 전국에 뜨르르했다. 오늘의 성화농장은 6개 마을 1천400가구 5천815명으로 구성되었다.첫 두레농사때 335가구가 참여했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있다.지금은 교육기관으로 국민학교 4개,중학교 1개가 들어섰다.의료기관으로 현급 조선족병원 하나를 가지고 있다.전체 경작면적은 2천761㏊로 1㏊당 평균 7천㎏의 벼를 거두어 1인당 3천원꼴의 소득을 올린다는 것이다.농사꾼 수입으로는 상당한 수치다. 조선족향 성화향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면 지금도 타민족이 한 사람도 살지않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논농사에만 매달려 농자천하지대본을 고집하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그런 이유로 해서 향의 중점시책 역시 논농사를 통해 부유한 농촌을 건설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향에 성화벼연구소를 설치한 이유도 여기 있는데,벼육종가 이재근 밑에서 일을 한 농민 김병천(42)을 중심으로 성화향에 적합한 신품종 볍씨개발에 나섰다. 그래서 성화향에서는 마을 남쪽 독산아래 황무지에 또 눈을 돌렸다.광복전 일인들이 손을 댔다가 버려둔 이 황무지를 논으로 개간하려면 공사비가 엄청나게 소요되어 그동안 엄두도 못냈었다.그러다 향에서 지난해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성화향 안창선 향장은 독산아래 황무지개간을 서둘러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벼 우량품종 전국에 보급 『우리 속담에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는 말이 있디요.개혁개방 이후 더러 한눈을 판 사람들이 있지만,모두 자리 보지 못하고 다리를 편 꼴이었디 뭡네까.무슨 기업이요,장사요 하고 애를 썼디만 헛물만 켰수다레.우리는 벼농사라는 장기를 버리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디요.그래서 황무지 개간을 추진한 것입네다』 그 독산아래 황무지 개간은 지난해 이미 착수되었다.흑룡강성농업개발공사가 300㏊의 황무지를 논으로 만들어 이를 성화현에 20년동안 임대하는 조건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모두 3백60만원의 공사비가 들어가는 개간사업의 노력은 향에서 도맡았다. 흑룡강성에는 아직 개발할 황무지가 많이 있다.삼강평원은 가장 유망한 개간 적지인데,30여년 동안 2백90만㏊가 개간되었다.아직도 이용할 수 있는 토지 자원이 1백7만㏊에 이른다고 한다.최근에는 삼강건설관리국이 일련의 우대정책을 내놓고 외국자본과 국내농가의 투자개발을 유치하고 있다.이미 12개 성,44개 현에서 투자의사를 밝혔다.그리고 해남이방실업투자유한회사는 개간계약을 맺고 2만㏊의 황무지를 사들였다. 이들 기업뿐아니라 농가 단위의 삼강평원 진출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흑룡강성 14개 현·시를 비롯,길림성과 요령성 농민 1만여명이 삼강평원 땅을 임대받아 농사를 짓고 있다.대부분의 농가가 가구당 한 해에 평균 3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린다는 것이다.논농사를 잘 짓기로 소문난 성화향 조선족의 가구당 평균소득에 비해10배가 더 많은 것이다.그래서 성화현에서는 독산아래 300㏊를 개간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일고있다.안창선향장의 말에서도 삼강평원으로 진출하고 싶은 의도가 보였다. 『우리도 새로운 야망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네다.성화향과 여건이 비슷한 수릉현 수중향 송가촌 100가구 농가는 삼강평원으로 들어가 벌써 성공했디요.가구당 1년 평균소득이 3만5천원 꼴이나 되고,13가구는 10만원의 순수익을 올렸다고 기래요.그들이 개간한 논이 1천500㏊라니,자신들이 두고 온 송가촌 하나를 더 건설한 것이디요.그런데 우리는 아직 고향을 떠날 엄두도 못낸다 이겁네다.성화향을 개척한 우리 윗세대 어른들에 비하면 오기가 없다고 하겠디요.우리 성화향 사람들도 이제 넓은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네다.그거이 윗어른들의 개척정신을 재창조하는 길이기도 하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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