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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안법·소요죄 적용… 수용시설 부족에 신속 처벌규정 신설도

    보안법·소요죄 적용… 수용시설 부족에 신속 처벌규정 신설도

    조선총독부 판사 재판… 대부분 일본인 3심제 속 고등법원 조선인 판사 1명뿐3·1운동을 주도하거나 가담한 이유로 형사재판에 넘겨진 이들은 조선총독부 사법부 소속 판사들에게 재판을 받았다. 논문 ‘3·1운동과 조선총독부의 사법 대응(장신)’에 따르면 유죄 판결을 받은 3·1운동 참가자 7816명 가운데 보안법 위반 혐의가 적용된 피고인이 5601명(71.7%)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내란·소요죄 1564명(20%), 출판법 위반(3.5%) 276명, 제령 7호 위반 161명(2.1%) 등으로 죄명이 적용됐다. 보안법·출판법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만들어져 조선인들에게만 적용된 대한제국 법령 17건에 속하는 법률이고, 내란·소요죄는 일본 형법의 내용으로 일제는 ‘조선형사령’, ‘조선민사령’을 통해 일본의 형법과 민법을 조선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3·1운동 참가자들이 너무 늘어나자 일제는 이들을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 1919년 4월 15일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제령 7호)’을 제정해 공포했다.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여 다수 공동으로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하려고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규정이다. 감옥 수용시설도 부족해지자 단순 가담자들은 즉결심판을 거쳐 태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당초 구재판소(오늘날의 약식 재판)-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4급 3심제였던 재판은 1912년 이후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급 3심제로 이뤄졌다. 일제는 조선인 판·검사는 피고인이 조선인인 사건만 취급하고 일본인이 당사자인 사건을 심리하지 못하도록 차별했다. 반면 일본인 판·검사는 수많은 조선인 피고인들을 재판했다. 1910년대 고등법원에 몸담았던 조선인 판사는 1명에 불과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일어나라” 독립 열망 불 지폈다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일어나라” 독립 열망 불 지폈다

    재심(再審). 확정된 판결의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위법행위나 중대한 하자가 있었음이 확인되면 사건을 다시 심판할 수 있다. 군부독재 시절 불법 감금과 고문에 못 이겨 토해낸 거짓 자백과 거짓 증거로 유죄판결을 받은 국가보안법 관련 피고인들은 반세기에 이르러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일제 치하에서 일제가 만든 법으로 일제 사법부에 의해 내란범·치안방해범·강도 등으로 몰린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재심이 이뤄지길 바라며, 일제의 판결문에서조차 고스란히 드러난 투사들의 독립 의지를 재구성했다.#손병희 외 47명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 일본 형법상 소요죄 “피고인들은 조선이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국을 형성하는 것을 기도했다. 조선민족 대표자 손병희 등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조선 전 도(道)에 배부했다. 민중을 선동하여 왕성하게 조선독립 시위를 일으켰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 다치가와 판사가 쓴 판결문에 담긴 공소사실 일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해 초기에 ‘3·1운동’을 주도한 48명은 일제의 판결문에 ‘치안 방해를 선동한 자’로 비교적 가볍게 규정됐다. 독립선언을 주도한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 선생은 “한때 친일파에 속했다가 병합(한일합병) 이후 자신에 대한 대우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불쾌감이 있던 자로,…(중략) 교당 신축 기부금을 반납하라는 명을 듣자 크게 불만을 품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폄하됐다. 그러나 일제는 판결문 속 “독립의 희망을 품은” 48명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불러온 힘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불온한 문서”로 지목된 독립선언문 한 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알았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판사들은 사건 관할에 관한 결정서에서 “독립 사조가 조선에 널리 퍼져 인심이 동요했고, 100만 신도의 추앙을 받는 천도교 손병희의 이름을 거명한 독립선언서는 민중 선동의 커다란 효과로 나타났다”면서 “독립만세의 소리가 도시와 시골을 뒤덮었다”고 두려워했다.●결정·판결문 4건 모두 “최후의 1인” 대목 인용 천도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획된 독립운동은 순식간에 종교와 계층을 아울렀고, 전국에 만세운동을 촉발시켜 독립의 불씨를 키워냈다. 손병희, 보성고등보통학교장 최린, 도사 권동진·오세창 등 천도교 핵심 인사들은 1918년 말부터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그해 초 미국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이 제안한 ‘새로운 전후(戰後) 질서의 14개조 원칙’ 가운데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를 빌려 세계에 조선의 식민지배 상황과 독립 의지를 밝히고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독립운동 원칙은 손병희가 세웠고 구체적인 실행은 최린이 맡았다.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최남선은 “조선은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한다”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이승훈(판결문엔 본명 이인환) 선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기독교계도 천도교와 함께하기로 했다. 1919년 2월 21일 최린은 이승훈에게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의 문제로 종교가 다르고 같음에 관계없이 합동해야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사흘 뒤 기독교계가 합류하기로 했고, 장로교 길선주·양전백 목사, 감리교 신흥식 목사, YMCA 간사 박희도 등이 이승훈과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했다. 27일엔 강원 양양의 신흥사 승려 한용운과 경남 합천 해인사 승려 백상규(백용성) 등 불교계 인사들도 동참하기로 해 종교계 연합을 이뤘다. 별도로 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법률상업학교 강기덕 등 학생 대표들도 종교계의 운동에 합류했다. 2월 27일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 1000장이 인쇄됐다. 48명 가운데 인쇄소 사장 이종일과 공장 감독인 김홍규도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헌법 문란의 문서를 인쇄(또는 방조)한 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인쇄가 끝나자마자 선언서는 서울은 물론 전남, 전북, 충북, 강원, 함경, 평안 등 전국으로 퍼졌다. 48명 중에는 독립선언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한 지 2~3일이 지나 일본 도쿄와 만주에서 체포된 교사들도 있었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로 한 민족대표들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겼다.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이들은 경찰에 자수해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일제는 독립선언서 가운데 “최후의 일각(一刻), 최후의 일인(一人)에 이르기까지 독립의 뜻을 밝혀 완성해야 한다”는 대목에 특히 주목했다. 48명에 대한 법원의 결정문과 판결문 4건에는 모두 이 대목이 인용됐다. 일제는 이 문장에서 조선의 독립 의지를 가늠했다.●일제, 3·1운동 초기 주도자들 극형 시도 일제는 독립운동에 불을 지핀 민족대표 등 3·1운동 초기 주도자들을 극형에 처하려 했다. 이들을 수사한 일제 검사는 보안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1919년 3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 예심을 청구했고, 8월 1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나가시마는 일본 형법 77조 내란죄에 해당하므로 고등법원의 특별 권한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나가시마는 “제국 영토의 일부분인 조선을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할 목적으로 전 조선인에게 교란을 선동하고 헌법을 문란하게 하는 불온한 문서를 공표함으로써 각지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게시하게 하고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일으켰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건을 심리한 고등법원 판사 와타나베, 요코다, 이시카와, 미즈노, 하라는 1920년 3월 22일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라는 표현으로 독립의사를 발표했으나, 폭동을 일으키거나 교사한 문구는 없다”며 내란죄가 되지 않는다고 봤고, 사건의 관할이 경성지법에 있다고 결정했다. 민족대표들을 강하게 처벌할 경우 조선인들의 반감을 키울 것을 우려해 일제 의회 등이 법원에 가벼운 형벌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다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사건을 맡게 된 경성지방법원 다치가와 판사는 1920년 8월 9일 “공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고등법원의 결정문에서 이 사건이 경성지법 관할이라고만 했을 뿐 경성지법에 사건을 송치한다고 밝히지 않았다”는 허헌 변호사의 ‘관할 위배’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사의 불복으로 경성복심법원으로 다시 재판이 넘어갔고, 그해 10월 20일 48명 중 37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손병희·최린·권동진·오세창·이종일·이승훈·함태영·한용운은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인쇄, 배포에 주동적 역할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치안을 방해한 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보안법 위반 혐의의 최고 형량이 2년, 출판법 위반이 1년으로 이들은 혐의별 최고 형량을 선고받았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은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3.1운동 확산의 배경 ‘고종의 국장’을 되새기다… 특별전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

    3.1운동 확산의 배경 ‘고종의 국장’을 되새기다… 특별전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

    고종(1852~1919)은 1919년 1월 21일 새벽 덕수궁 함녕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일혈로 알려졌지만 항간에는 일본인 혹은 친일파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또 고종의 국장(國葬)은 조선총독부가 임시로 설치한 장의괘(葬儀掛)가 주도하면서 3년여에 걸쳐 장중하게 진행되는 조선왕실의 국장에 비해 축소되고 변형됐다. 나라를 잃고 일제의 식민 통치에 억눌려 있던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국내외에서 큰 관심을 불러모았던 고종의 국장은 이후 항일독립운동에서 중요한 항쟁으로 꼽히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전국 확산에 영향을 미친 고종의 국장을 다시 살펴보는 전시가 열린다. 3월 1일부터 31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1층 전시실에서 열리는 소규모 기획전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이다. ‘고종의 승하’, ‘고종의 국장’, ‘고종의 영면’ 등 3개 주제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서는 고종 황제의 초상, 고종의 국장 절차를 기록한 의궤, 고종 국장 사진첩, 고종 황제 국장을 보도한 이탈리아 주간지, 고종의 능을 조성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등 총 15건의 작품이 소개된다. 국장 절차를 기록한 ‘이태왕전하어장주감의궤’(李太王殿下御葬主監儀軌), 고종 국장 때 대여(大輿·국상 때 쓰던 큰 상여)와 의장 행렬을 담당한 민간 단체가 남긴 ‘덕수궁인산봉도회등록’(德壽宮因山奉悼會謄錄) 등에는 고종의 장례가 일본식으로 진행되면서 격하된 사실이 드러나 있다.또 고종의 국장을 촬영한 경성일보사에서 발간한 사진첩에는 고종의 생전 모습을 비롯해 승하 발표 기사, 함녕전에 마련된 빈전(殯殿·국상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의 관을 모시던 전각), 고종이 잠든 홍릉 등이 담겼다. 고종 승하 당시 제작된 어보와 옥책을 통해 당시 왕실 의례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1899년부터 1989년까지 간행된 이탈리아 주간지 ‘라 도메니카 델 코리에레’(La Domenica del Corriere) 1919년 6월 8일 발행본 1면에는 고종 국장 행렬을 묘사한 삽화가 인쇄되어 있는데, 조선인의 모습을 이국적으로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새달 21일에는 ‘고종 국장과 1919년의 사회’라는 주제의 특별 강연회도 열린다. 이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고종 국장 과정을 분석해 대한제국 황실 의례가 국권 침탈 이후 어떻게 바뀌었는지 설명하고,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고종 국장 이후 억눌린 민중의 한이 3·1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3·1’ 혁명·촛불·메타역사·여성… 구국의 100년 다시 읽다

    ‘3·1’ 혁명·촛불·메타역사·여성… 구국의 100년 다시 읽다

    3·1운동 100주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100년간 3·1운동은 숱한 분석의 대상이었으나 최근 들어 학계에서는 민족 대 반민족, 수탈 대 저항 등의 낡은 이분법적 구조에서 벗어나 다각도로 재조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다양한 주체들을 재조명하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미치는 영향을 재구성하는 일 등이다. 출판계에 쏟아지고 있는 다양한 기념 저작들을 4가지 키워드로 알아봤다.●3·1운동인가, 3·1혁명인가 3·1운동에 관한 학계의 첨예한 논쟁거리 중 하나는 ‘3·1혁명론’이다. 책 ‘3·1혁명과 임시정부’(두레)에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인구의 10분의1 이상이 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군주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민주공화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며 3·1운동에 ‘혁명’이라는 ‘정명’을 붙여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학, 문학, 종교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 8인이 머리를 맞댄 책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창비)에서는 보다 심화된 논의가 이뤄진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정치적인 목표로 내걸었던 대한독립이 3·1운동으로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으로 부를 수 없다는 입장(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조교수)과 ‘3·1운동보다 규모가 작았던 1919년 이집트 독립운동에도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입장(김학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교수) 등이 맞부딪친다. 혁명을 새로운 시대에 대한 지향이나 욕망, 유토피아에 대한 해방감, 그걸 표현하는 축제로 봐서 3·1운동이나 촛불에도 모두 ‘혁명’을 붙일 수 있다는 의견(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도 있다. ● ‘촛불’ vs 촛불 100년 역사를 뛰어넘어 오늘날 ‘촛불’과의 연계를 시도하는 모습도 눈여겨볼 만하다. 책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에서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촛불시위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과 3·1운동의 ‘내가 대표다’라는 선언 사이에 100년의 차이가 있지만 3·1운동은 공화와 주체의 자각이라는 측면에서, 촛불은 그 정치 원리의 구현이자 정점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언론인 손석춘씨가 펴낸 소설 ‘100년 촛불’(다섯수레)은 촛불은 갑자기 출현하지 않았으며, 3·1운동을 기점으로 한 100년의 역사가 만들어 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계약직 노동자로 평범한 삶을 영위해 온 소설 속 화자는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에 함께 참여한 시아버지로부터 대한민국 역사 속 굵직한 인물·사건들과 얽힌 4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600쪽가량의 두꺼운 책에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역사적 사건들이 촘촘히 담겼다. ●메타역사적 관점에서의 비평적 3·1운동 읽기 한국역사연구회가 3년의 준비 끝에 펴낸 ‘3·1운동 100년’(전5권·휴머니스트)은 메타역사적 관점에 따라 비평적 역사 읽기를 시도했다. 3·1운동의 기억이 남과 북, 한국과 일본이라는 공간에 따라, 그리고 정치적 변동에 따라 그 위상과 해석이 달라지는 역사적 주제임에 주목한 것이다.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가 갖는 과장된 측면을 짚어내고, 해방 직후 사회주의자들과 북한, 일본의 3·1운동에 대한 인식 흐름을 살폈다. 정설화되고 있는 ‘고종독살설’에 대한 문제제기와 ‘3·1운동=서울 파고다 공원’이라는 상식을 깨는 북부 지방 도시들의 만세시위 등 3·1운동 사건사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 준다. ‘3·1운동 100년’에서는 당대를 겪은 다양한 주체들의 시선을 담았다. 도쿄 유학 중 혁명을 꿈꾸며 귀국한 청년, 경남 산청 출신의 유림 청년, 서울 한복판에서 3·1운동을 비판한 YMCA 총무 윤치호, 시위 탄압을 진두지휘한 일본군 사령관, 서양인 선교사 등 여러 관점에서 3·1운동을 재구성했다.●소외 됐던 여성에 대한 조명 문학에서는 그간 조명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여성 문학, 페미니즘 문학에 주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2014년부터 ‘김말봉 전집’을 발간해 왔던 소명출판은 이번에 7, 8권을 내놨다. 기자로 활약했던 김말봉(1901~1961)은 ‘보옥’이라는 필명으로 193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동아일보에 연재한 ‘밀림’, 조선일보에 연재한 ‘찔레꽃’ 등이 히트를 하며 일약 통속소설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이번에 출간된 책에는 김말봉의 단편소설과 미완성 장편, 시, 수필, 칼럼, 기사 등이 수록됐다. 그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신조를 가진 대중소설가임과 동시에 1940년대 공창폐지위원장으로 여성 인권 신장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신여성, 운명과 선택’(에오스)은 1910~1940년 한국 근대문학에 불꽃을 피운 여성작가 7인의 선집이다. 백신애, 이선희, 나혜석, 강경애, 김명순, 임순득, 지하련 등 해방 이전 사망했거나 해방 이후 월북해 상대적으로 빛을 못 봤던 작가들이 중심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3·1운동 100년]베이징서 활동 독립운동가 253명 발굴… 유적지 지도로 제작 답사

    [3·1운동 100년]베이징서 활동 독립운동가 253명 발굴… 유적지 지도로 제작 답사

    작년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 조직 손정도 선생 조선어 설교한 충원먼교회 고려기독교청년회 독립운동 근거지로 김산 전기소설 ‘아리랑’ 쓴 스노 부인 집 ‘중안빈관’에 아리랑 한글 안내판 걸기로 홍성림 회장 “우리의 역사 스스로 찾아야”중국에는 여덟 곳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경제 개발에 밀려 독립운동 유적지들이 제대로 조명조차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한국인들은 지난해 3·1절을 계기로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라는 시민단체를 조직했다. 아직 회원이 채 100명이 되지 않는 작은 조직이지만 4년 전부터 이어 온 역사 연구에 대한 열정과 내공만은 상당하다.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열리는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뒤 3월 한 달 동안 베이징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따라 밟는 답사를 세 차례 진행할 예정이다. 베이징에서 열리는 독립운동가 루트 답사에는 대구 지역의 항일 역사 연구단체도 참가한다. 지난 2일 진행된 답사에서는 베이징에서 가장 오래된 감리교회인 충원먼교회(崇文門堂)를 찾았다. 여기서 1911년 기독교계 독립운동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손정도 선생이 전도사 시절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위해 설교를 시작했다. 손 선생이 나라 잃은 조선인을 모아 모국어로 설교한 이래 조선어 설교의 역사는 108년 동안 이어졌으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교회는 손 선생뿐 아니라 1920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감리교회 동아시아 대표총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이 회의 이후 고려기독교청년회가 설립돼 베이징 항일독립운동 활동의 근간이 됐다. 올해는 마오쩌둥 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 수립을 선포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로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책을 통해 공산당을 서방 세계에 알린 에드거 스노 부부의 베이징 거주지에는 기념관이 건립됐다. 스노 부부가 1935~37년 살았던 중안빈관(中安賓館)은 2008년 중국 언론 북경만보에 실린 기사를 토대로 이곳이 스노 부부의 옛 집터란 사실이 밝혀졌고, 2011년에는 호텔 한편에 전시 공간이 마련됐다. 하지만 스노의 부인인 님 웨일스가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산을 만나 쓴 전기소설 ‘아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는 앞으로 한국어와 중국어로 웨일스와 김산, 그리고 아리랑에 대한 안내판을 만들어 벽에 걸기로 중안빈관 측과 협의했다. 사업회가 그동안 발굴한 베이징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253명에 이른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행적지 31곳을 포함해 베이징의 독립운동 유적지는 지도로 제작됐으며 현재도 계속 정보가 새롭게 추가되고 있다. 홍성림(52)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장은 27일 “우리의 역사를 스스로 찾지 않으면 누가 돌아보겠는가”라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왜 선조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주제에 대해 접근해 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나 답사가 개별적인 인물이나 사건 중심으로 이뤄진 것 같다”면서 “역사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흐름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글 사진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3·1운동 100년]3·1운동, 中·인도 등 전파… 전 세계 식민지국가 ‘횃불’이 되다

    [3·1운동 100년]3·1운동, 中·인도 등 전파… 전 세계 식민지국가 ‘횃불’이 되다

    1918년 11월 첫 번째 세계대전이 끝났다. 당시 인류의 4분의 3 정도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혹은 반(半)식민지 주민이었다. 1919년 1월 우드로 윌슨(1856~1924) 미국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패전국(독일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등) 식민지들은 다소나마 독립의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처럼 승전국(영국, 미국, 일본 등)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은 열강의 힘에 눌려 해방을 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때 우리 민족이 일본을 상대로 대담하게 독립을 선언했다. 3·1운동을 통해 승전국 식민지 가운데 맨 처음 혁명의 횃불을 들어올린 것이다. ●대한민국 뿌리 되는 임시정부 수립 미국 뉴욕타임스는 3월 13일자 기사에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 나갔다. 수천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밝혔다. 비슷한 시기 AP도 “조선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한다’고 명시됐다”고 보도했다. 3·1운동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있어 감리교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의 헌신이 컸다. 3·1운동은 한반도 안팎에서 임시정부의 탄생을 이끌었다. 독립선언서 첫 구절에 “이제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다”고 밝혀 뜻있는 이들이 주권 기관을 세워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곳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 등 세 곳이었다.노령정부는 독립전쟁을 치르기 좋은 위치였지만 일본의 공세에 노출돼 있었다. 상하이정부는 정치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국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성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지켜 정통성이 컸지만 조선총독부가 자리잡은 서울에서 활동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세 정부는 힘을 모으고자 통합에 나섰다. 수개월간의 논의 끝에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3곳의 통합을 선언했다. 앞서 상하이정부는 4월 11일 생겨났는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언했다. 더이상 왕이나 신분제는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상하이정부는 대한민국의 시원(始原)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통합 임정’은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여러 번 해체 위기를 겪었다. ‘식물 정부’로 전락해 명맥만 유지하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임정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27년간 외교 노력과 의열투쟁을 병행하며 독립운동의 총괄체로 자리매김했다. 독립운동사 거두인 조동걸(1932~2017) 국민대 명예교수는 “왕족이나 정부 계승자도 아닌 이들이 민중의 뜻으로 임시정부를 세워 30년 가까이 제국주의 국가와 투쟁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대한민국이 임정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수차례 밝혔다. 1987년 국회는 9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정에 있다고 다시 한번 천명했다. ●中 “3·1운동은 5·4운동 본보기 역할” 우리나라가 올해를 3·1운동 100주년으로 기념하듯 중국도 5·4운동 100주년의 해로 기린다. 1차 세계대전 뒤 일제는 중국 베이징 군벌정부에 패전국 독일이 점령했던 산둥반도를 조차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이를 막아내고 반제국주의·반봉건 투쟁에 나섰는데, 이것이 5·4운동이다. 3·1운동은 5·4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사실은 중국의 문헌자료에도 잘 나타난다.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베이징에서 발행된 ‘매주평론’(1918년 창간된 문화사상잡지)은 같은 달 16일자를 3·1운동 특집호로 꾸몄다. ‘조선 독립의 소식’을 싣고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서를 소개했다. 3·1운동의 시위 상황을 객관적으로 해설하고 분석했다. 이 내용은 베이징대 학생들을 강타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들던 잡지 ‘신조’(4월 1일자)에 ‘조선 독립운동의 새로운 교훈’과 ‘조선 독립운동의 감상’이라는 논문이 실렸다. 신조는 1919년 1월 창간된 월간지로 훗날 5·4운동의 주동자가 된 푸쓰넨, 뤄자룬 등이 편집책임자였다. 특히 푸쓰넨은 3·1운동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중국인에게 호소했다. 그는 “조선의 3·1운동이 ‘세계혁명사에서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3개의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고 강조했다. 바로 ‘무기를 들지 않은 혁명’과 ‘불가능한 것을 알고도 한 혁명’, ‘순결한 학생혁명’이다. 푸쓰넨의 호소에 마음을 움직인 학생들은 5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에 나섰다. 이날 발표된 베이징학생선언문에서는 “조선이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일어섰다. 일본이 산둥지역을 뺏으려 하니 우리 중국인도 일어서자”고 호소했다. 이날의 운동이 주요 도시에 파급돼 5·4운동으로 퍼져 나갔다. 리궁중 중국 난징대 교수는 “3·1운동은 중국의 거울이 됐다. 독립국가 개념 형성의 중요한 촉매였다”며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의 본보기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전반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동남아시아·중동 민족운동에도 기여 3·1운동은 중국뿐 아니라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동지역 민족운동에도 기여했다. 인도에서는 3·1운동의 비폭력 방법을 적극 채택했다. 인도 국민회의파는 1919년 4월 5일 ‘사타야 그라하 사브하’(진리 수호)운동을 비롯한 비폭력 독립 운동에 나섰다.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남아프리카에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국해 비폭력 투쟁을 시작했다. 1929년 3월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인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도 3·1운동의 영향을 잊지 않았다. 그는 ‘동방의 횃불’이라는 시를 써 조선인에게 헌사했다. “아시아의 황금시기에/한국은 횃불이었지/그 횃불 이제 다시 타오르길 기다리네/동방에 광명을 비추기 위해.” 1919년 3월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도 과도입법위원들이 독립선언을 한 뒤 워싱턴DC에 독립사절단을 파견했다. 같은 해 3~6월 이집트에서도 독립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학생과 농민을 중심으로 완전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퍼져 나갔다. 이집트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1919년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3·1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 식민지들이 자신들의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5·4운동, 인도 국민회의파 독립운동, 필리핀과 아랍지역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이들 운동을 주도하던 정당과 단체가 그대로 성장해 독립국가 재건의 주역이 됐다”고 설명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日, 세계 평화주의 흐름 오판해 동아시아를 수렁에 몰아”

    “日, 세계 평화주의 흐름 오판해 동아시아를 수렁에 몰아”

    진보적 언론으로서도 이례적 보도 평가 아베 개헌 추진·군비 확장에 경종 의미 “조선 전역서 비폭력으로 日군경에 맞서 독립선언서는 아시아의 미래도 통찰” 마이니치신문도 “日에 저항한 독립운동”‘3·1운동에 대한 일본 군경의 탄압은 극도로 가혹했다. 강덕상(재일사학자)의 ‘현대사 자료 조선2편’에 따르면 ‘3분간 사격에 51명 즉사’라는 내용이 군 보고서에 적히기도 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27일 1개면을 할애해 100년 전 한국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의 역사와 의미, 당시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등을 다룬 특집기사를 실었다. 아사히는 ‘기로의 1919년…동아시아 100년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통해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딛고 세계에는 평화주의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 흐름을 잘못 파악해 오판을 함으로써 동아시아를 수렁으로 몰아넣었다고 지적했다. 아사히가 상대적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하다고는 해도 일본 언론으로서는 이례적인 보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헌법에 자위대를 명기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추진하고 막대한 방위비를 지출하며 군비 확장을 꾀하고 있는 아베 신조 정권에 대한 경종의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던 100년 전을 상기시킴으로써 아베 정권에 반성과 각성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아사히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조선 민중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빼앗긴 채 헌병의 감시 아래 침묵을 강요당했다”며 “이에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심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고 수십만명이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했다. 이어 “독립운동은 조선 전역으로 확산됐고 민중들은 비폭력 정신을 내걸고 일본 군경에 맞섰다”고 소개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무자비한 탄압에 나서 그해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희생자는 사망 7509명, 부상 1만 5961명에 달했다고 박은식 선생의 ‘조선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해 전했다. 아사히는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치인과 학자에게 보낸 독립운동가 임규(1867~1948) 선생에 대해서도 다뤘다. 임규 선생은 3·1운동 당일 밤 자신이 일본어로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들고 도쿄역에 도착한 뒤 이를 200통 복사해 당시 총리 등 정치인, 학자, 언론사, 대학 등에 보냈다. 아사히는 독립선언서 내용 중 ‘2000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4억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는 대목을 들며 “독립선언서는 아시아의 미래도 통찰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아사히는 “그러나 조선의 이런 외침이 일본 사회에 퍼지지는 못했다”며 ‘역사평론’이라는 잡지가 독립선언서를 게재해 일본의 독자들에게 알린 것은 패전 후인 1948년이었다고 설명했다. 아사히는 동아시아를 전화에 빠뜨린 일본의 책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고양되고 ‘부전(不戰)조약에 의해 전쟁을 불법화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러한 신조류를 잘못 읽었고 결국 그것이 동아시아를 불행에 빠뜨렸다”고 썼다. 마이니치신문도 이날 문답형 기사를 통해 “한국의 3·1운동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 저항해 전국적으로 퍼진 독립운동”이라고 설명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3·1운동 100년] 평화행진 첫날부터 발포한 日, 만행·사망자 조직적 은폐·축소

    [3·1운동 100년] 평화행진 첫날부터 발포한 日, 만행·사망자 조직적 은폐·축소

    “서울에서 발생한 일이다. 어린 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이 칼로 그의 오른손을 잘랐다. 오른손이 잘린 학생은 다시 왼손에 국기를 들고 더욱 높은 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그의 왼손마저 잘랐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한 서양인이 사진을 찍어 남기려다가 헌병에게 끌려갔다.”(1919년 4월 12일자 중국 국민공보) “체포된 한인들은 밤낮으로 잔인한 고문을 당한다고 한다. 한인 가운데 죽은 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서울에서 50마일(약 80㎞) 이내 무수한 촌락이 불탔다. 시체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1919년 5월 19일자 국민공보)●시위 확산 3월 말부터 조준 발포… 희생 급증 일제는 3·1운동에 나선 조선인들을 총칼로 탄압했다. 그들의 눈에 태극기를 든 시위대는 식민지 체제를 전복하고자 선량한 조선인들을 선동하는 폭도에 불과했다. 만행과 학살이 일상이 됐다. 총을 든 일본군과 경찰, 시위 주동자에게 다가가 몸에 색분필을 발라두는 조선인 밀정까지 뒤섞이면서 만세운동은 시작과 동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곤 했다. “파리채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단호한 처치만 필요할 뿐”이라던 한 일본 경찰의 외침 속에 3·1운동을 대하는 일제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26일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3·1운동 참가 인원 가운데 사망자는 최대 934명으로 집계된다. 일제가 파악한 사망자 553명보다 두 배 가까이 많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놓은 7483명, 박은식(1859~1925)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분석한 7509명에는 크게 못 미친다. 이와 관련해 국편 측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망자수가 최소 934명이라는 것”이라며 “자료의 오류 수정과 추가 발굴 등의 연구가 진행되면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사망자수에서도 알 수 있듯 일제의 만행은 도를 넘었다. 3·1운동 첫날인 1919년 3월 1일부터 발포가 이뤄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점이 최근 연구에서 드러났다. 만세운동이 격화된 3월 말~4월 초 사이에 사망자가 집중됐다는 사실도 재확인됐다. 실제로 3월 1일 평양에서 주민 5000여명이 참가한 시위를 기록한 외국인 자료에는 “총상 환자 5명이 병원에서 숨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같은 날 평북 선천에서도 시위 중 체포된 11명의 학생 가운데 3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들은 가혹한 태형으로 중상을 입고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시위 첫날부터 무자비한 폭행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는 “아무래도 서울 시내는 외국인이나 선교사 등 보는 눈이 많아서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발포가 조심스러웠을 것”이라면서도 “(더는 서양인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결심한) 3월 말부터 사람을 직접 조준 발포가 잦아졌다”고 말했다. 국편이 파악한 3·1운동 관련 사망자 934명 가운데 47.6%(445명)가 3월 28일~4월 6일 사이에 몰려 있다. 서울에서는 사망 추정자가 3명에 불과하지만 외국인이 거의 없던 평안도에서는 423명이나 됐다.●日軍 4만여명 준계엄체제… 2만 6713명 검거 3·1운동이 대부분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진행됐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수가 늘어난 것은 시위가 사그러들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총독부가 강경 대응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수시로 총독 명의의 유고(諭告·담화문)를 발표했다. 3월 7일에는 “허튼소리로 인심을 흔드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4월 10일에는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정부에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으니 화를 입지 말도록 하라”고 최후통첩성 발언을 내놨다. 일본 군경의 총기 사용을 용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일본측 발포가 없는 날은 7~8일에 그쳤다.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은 “1919년 3월 11일쯤 일본 육군성 차관이 만세운동 초기 진압에 실패한 것을 두고 조선총독을 질책했다”면서 “무력 탄압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 내각의 명령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3·1운동 기간 중 최악의 사태로 꼽히는 ‘제암리 학살 사건’도 일본의 강경 진압이 최고조에 달한 1919년 4월 15일 발생했다. 보병 79연대 중위 아리타 도시오는 “화성 발안장 만세운동의 주동자를 검거한다”며 제암리 마을에 들이닥쳤다.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뒤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놓으며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일본 군경은 아이마저 찔러죽였다. 일제는 만행의 증거를 없애고자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으로 제암리에서만 23명이 목숨을 잃었고 인근 지역 참살까지 포함하면 사망자가 30명을 넘는다. 고주리에서는 일가족 6명의 목을 쳐서 죽인 뒤 시신을 토막 내 짚가리 위에 올려놓았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조선군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우쓰노미야 다로가 쓴 일기에는 “일본군이 약 30명을 가두고 학살과 방화를 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처분하면 간단하지만 이렇게 되면 학살을 자인하는 꼴이 돼 제국의 입장에서 불이익이 크다. 이 때문에 간부회의에서 조선인들이 저항해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적혀 있다. 일본 스스로도 정당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사건을 일으킨 아리타 중위는 재판에 회부됐지만 4개월 뒤 무죄로 풀려났다. 4월 초 일본에서 조선으로 추가 파견된 ‘임시조선파견보병대대’도 조선 민중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3·1운동 확산의 원인 가운데 하나를 병력 부족으로 본 일본 내각과 조선총독부의 이해가 맞물린 것으로, 6개 대대 4200명 규모였다. 3·1운동 발발 당시 일본군 2개 사단이 상주해 3만~4만명가량 군이 있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1919년 4월 일본군은 최대 4만 5000명까지 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임시파견대대는 1905년에 개발된 근접 전투용 무기인 ‘38년식보병총’과 기관총,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양희 연구원은 “임시파견대대는 시장에서 무장을 한 채 훈련을 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려는 조선인들에게 겁을 주는 행동이 잦았다”며 “일제가 3·1운동에 대해 준계엄 체제로 대응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내부 자료를 보면 3·1운동 시작부터 4월 30일까지 약 두 달간 검거된 조선인은 2만 6713명이었다. ●3·1운동 약화 유화책 펼쳐… 단속·감시 체계화 일제는 3·1운동을 약화시키고자 무력 진압 외에도 의료선전 활동, 시장 개시(開市) 독려 등 유화책을 썼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부상당한 이들을 무료로 진료할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 서울시내 유력 상인 40여명을 설득해 상점을 다시 열게 하는 등 조선인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로는 경비인력을 늘리면서 3·1운동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를 이어갔다. 3·1운동 이전 1만 3230명 수준이었던 경찰 수는 1921년 2만명을 넘어섰다. 일제의 단속과 감시가 더욱 체계화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일주일에 2~3편 묶어 변칙 상영 美 유니버설사 ‘명금’ 등 큰 인기

    일주일에 2~3편 묶어 변칙 상영 美 유니버설사 ‘명금’ 등 큰 인기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조선인 거리의 영화관 우미관과 단성사의 영화 프로그램 중 가장 인기를 끈 것은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 등이 제작한 연속영화였다. 특히 조선인 신파극단의 연쇄극이 공개되기 1년 전인 1918년 우미관에서는 1년 내내 서구 연속영화가 상영됐다. 연속영화는 탐정소설류의 내용을 기반으로 만든 활극 장르인데, 2롤(20분 정도) 분량을 1편으로 구성해 전체 12편에서 24편 정도로 길게 만드는 영화다.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지금의 드라마처럼 일주일에 한 편씩 상영하되 한 편의 마지막에 위기일발의 장면(cliffhanger)을 구성해 1편을 본 관객은 최종편으로 갈 때까지 매주 영화관에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연속영화의 대표적인 작품은 유니버설사의 ‘명금’(The Broken Coin)(1915·22편)인데, 조선에서도 1916년 우미관에서 상영돼 연속영화의 유행을 만들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일주일에 한 편씩 상영하지 않고, 일본과 마찬가지로 2편 혹은 3편씩 묶어서 공개했다. 미국에서 연속영화의 위상이 장편극영화에 덧붙여 상영하는 부록 같은 존재였다면, 일본과 조선에서는 주인공 격의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위험에 처한 주인공의 모습을 연달아 세 번이나 볼 수 있는 변칙 상영이었다. 조선인들은 서구의 연속영화를 보며 영화적 감각을 키워 나갔고, 조선영화의 개척자들은 연속영화의 영화적 기법과 조선인 관객들이 열광하는 부분을 되새기며 연쇄극의 영화 장면을 만들었다. 이렇게 조선영화계는 극영화 제작에 한 걸음씩 다가갔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3·1운동 100년] “3·1독립운동 정신은 아베가 명심해야 할 지향점”

    [3·1운동 100년] “3·1독립운동 정신은 아베가 명심해야 할 지향점”

    “3·1독립운동 정신이야말로 또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일본의 틀을 개조하려는 아베 신조 총리가 명심해야 할 평화의 이념이자 지향점입니다.” 야노 히데키(68)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자 보상 입법을 위한 일한공동행동’ 사무국장은 “3·1운동 100주년은 한국뿐 아니라 오늘날 일본에 있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과거도 현재도 역사에 냉담” ‘강제연행·기업책임 추궁 재판 전국네트워크’, ‘식민지 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등에 몸담으며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 및 배상을 촉구해 온 그는 3·1운동의 뜻과 이상을 기리고 이를 자국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 왔다. 다양한 3·1절 100주년 기념행사 및 집회가 그의 아이디어로 기획됐다. 지난 20일 도쿄 지요다구의 도쿄구정회관 사무실에서 야노 사무국장을 만났다. 그는 “일본에서 3·1독립운동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게 사실”이라며 “교육당국이 근현대사 중 한국 식민지배 등 침략에 관련된 부분은 입시문제로 일절 다루지 않는 등 수법을 통해 교육현장에서 배제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야노 사무국장은 “군사적 대치가 초래한 엄혹한 사회구조를 강요당했던 남북한이 이제 그것을 바로잡아 동아시아에 평화를 실현하려 하고 있는데, 일본은 과거도 현재도 되돌아보지 않은 채 역사에 냉담한 태도를 지속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3·1운동은 잘못된 정부 바로 잡을 희망·의지” ‘3·1운동이 일본에서 반드시 기억돼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그에게 묻자 2가지로 요약했다. “첫 번째는 잘못된 정부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입니다. 2016~2017년 연인원 2000만명에 가까운 한국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박근혜 정권을 종식시켰습니다. 저도 ‘촛불혁명’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았습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헌법1조가 노래가 되고 함성이 되는 것을 보니 가슴이 벅차오르더군요. 잘못된 위정자에 대한 단죄를 국민들의 힘으로 이뤄 내는 것을 보면서 그것의 원점이 3·1운동이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오늘날 일본에 반드시 필요한 가치입니다.” 두 번째는 ‘평화의 이념’이라고 했다. “지난해 평창동계올림픽의 화합을 시작으로 4월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통해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임을 남북이 분명히 했습니다. 아시아 평화 정착의 디딤돌이 놓여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북한을 적대시하고 있고, 한국과의 관계도 나쁘게 몰아 가고 있습니다. 중국, 러시아와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군사력은 계속 강화하고 있습니다. 사실상의 항공모함 보유를 선언한 게 대표적입니다. 3·1선언은 ‘동양평화의 실현’이라는 시대의 요구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본은 100년 전 그때와 유사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3·1절 100주년 행사 이후 변화 기대” 그는 “3·1절 100주년 행사를 통해 많은 것이 한 번에 성취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의 양심세력에 대한 우익의 위협이 한층 거세질 것도 분명하다고 했다. 그러나 “변화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니가타의 한 대학에서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 등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학생들로부터 감상문을 받았는데 ‘강제동원 같은 문제를 전혀 몰랐다가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됐다’, ‘우리가 이웃나라에 이렇게까지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상상도 못했다’, ‘당시 피해자들에게 이제라도 꼭 보상을 해 줘야 한다’, ‘왜 일본의 매스컴은 이런 걸 보도하지 않는가’ 등 반응들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들이었습니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3·1운동 100년] 100년 뒤 촛불행진… 일본서 뜻있는 평화운동 이어진다

    [3·1운동 100년] 100년 뒤 촛불행진… 일본서 뜻있는 평화운동 이어진다

    지난 24일 오후 2시 일본 도쿄 분쿄구 구민센터 3층 강당.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일본 시민단체들이 주관한 ‘2·24 도쿄집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열기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당초 주최 측은 많아야 300명쯤 모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일반인과 학생을 포함해 500명이나 몰려 일부 참석자들은 앉을 자리를 구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와타나베 겐주 일한민중연대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일본이 평화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직시하고 식민지주의로부터 벗어나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사를 기획한 ‘3·1조선독립선언 100주년 캠페인’은 이날 3·1운동을 비롯해 위안부·징용노동자 피해 등을 다룬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라는 제목의 1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공개했다.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등이 나올 때에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도노무라 마사루 도쿄대 교수, 와타나베 미나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관장 등이 3·1운동의 의미와 일본군의 전시 성범죄에 대해 강연을 했고, 조선학교 학생들이 일본 정부의 고교 무상화 정책에서 제외돼 차별받고 있는 오늘날 현실에 대한 고발도 이어졌다. 도쿄조선고급학교 합창단 학생들이 ‘고향의 봄’을 부르고 이어 참석자들과 ‘아리랑’을 부를 때에는 모두가 하나가 됐다. 한일 관계가 극도로 얼어붙은 가운데서도 3·1운동 100주년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들이 일본에서 이어지고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와 군비 확장 등에 대한 우려가 전후 어느 때보다 팽배해 있는 최근 상황에서 일본의 뜻있는 단체와 학자들은 이번 100주년을 일본의 잘못된 방향에 경종을 울리고 이를 되돌리는 에너지로 활용한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3·1운동 정신을 되새기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아닌, 바로 일본과 일본인의 전쟁 없는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다. 3·1절 100주년 당일인 3월 1일에는 도쿄 신주쿠역 광장에서 ‘릴레이 토크·촛불 액션’ 행사가 열린다. ‘조선학교 차별’, ‘헤이트 스피치’(일본 우익 등에 의한 한국인 혐오 발언), ‘강제징용 피해자’, ‘위안부 피해자’ 등 다양한 과거와 현재의 현안에 대한 릴레이 토크와 촛불행진이 이뤄진다. 100년 전을 생각하고 향후 100년을 생각하자는 의미의 ‘2019년 3·1 100자 선언’ 행사도 마련됐다. ‘3·1운동 100주년에 일본에서 응답한다’는 부제의 100자 선언은 3·1독립선언서를 꼼꼼히 읽어 보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인의 입장에서 앞으로의 새로운 100년을 구상해 100자로 요약해 보는 이벤트다. 3·1독립선언서를 읽고 생각하게 된 것, 과거 침략역사에 대한 반성, 한국인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 등이 주제다. 지난 13~16일에는 일본 학생·사회인과 한국 학생 등이 함께 참여한 ‘역사 스터디 투어’ 행사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제암리 학살현장 등 3·1운동 및 일제강점기 관련 유적지들을 둘러봤다. 2001년 일본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개관한 도쿄 신주쿠 고려박물관에서는 지난 6일부터 ‘3·1 독립운동 100년을 생각하는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유관순기념관, 아우내장터, 독립기념관, 제암리순국박물관, 서대문형무소 등을 통해 모은 자료를 분석해 3·1운동 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고 있다. WAM은 오는 3월 1일부터 내년 3월 말까지 ‘조선인 위안부의 목소리를 듣는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라는 제목의 특별전을 도쿄 신주쿠 니시와세다 전시관에서 연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3·1운동 100년] 100년 전 촛불혁명… 평범한 민초들이 독립만세 외쳤다

    [3·1운동 100년] 100년 전 촛불혁명… 평범한 민초들이 독립만세 외쳤다

    “우리는 지금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인이 자주민이라는 점을 선언한다.”(3·1 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손병희(1861~1922)와 이승훈(1864~1930), 한용운(1879~1944) 등 29명이 경성(서울)의 유명 요리집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으로 모였다. 이갑성(1889~1981)은 조선총독부에 사람을 보내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종일(1858~1925)은 참석자들에게 독립선언서 100여장을 펼쳐 보였다. 한용운이 만세 삼창을 하고 독립선언을 마치자 출동한 경찰들이 민족대표들을 모두 체포했다. 이처럼 3·1운동은 대부분 민족대표 33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들이 조선 독립 혁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3월 1일 시작된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 수개월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동자와 학생, 기생 등 평범한 조선의 민초들에게 이념이나 귀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이들이야말로 3·1운동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서울 만세시위 3만명 참가… 평양서도 수천명 “만인이 죽더라도 백만인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죽음을 불사하겠소.”(만세열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인쇄소 직원 인종익이 경찰 조사에서 한 말이다. 이처럼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하고 3월 1일 만세 시위를 알린 것은 인종익과 같은 민중이었다. 독립선언서는 2월 11일 기초가 완성돼 20일부터 이종일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됐다. 2월 28일부터 함경남도 원산, 전라북도 군산,황해도 해주, 평안북도 평양, 경기도 개성 등 전국 각지로 보내졌다. 3월 1일 새벽 경성에는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집회가 열릴 것’이라는 벽보가 거리 곳곳에 붙었다. 중학생들은 시위가 예정된 오후 2시에 맞춰 학교에서 파고다공원으로 모였다. 이들은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고 행인에게도 배포했다.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을 하고 있을 때 인근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남대문통(중구 남대문로)과 의주통(종로구 의주로)을 거쳐 미국영사관, 대한문으로 거리 행진을 했다. 당시 일제 헌병 자료에는 “시위에 모인 사람이 3000~4000명”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판결문 등에는 “파고다공원 앞 군중 5000”이라는 표현이 나온다.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해질 무렵까지 이어졌다. 시위대는 파고다공원 앞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졌다. 한쪽은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가 만세를 외치고 독립 연설을 시작했다. 다른 시위대는 미국총영사관 앞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경성우편국 앞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고 의주통에 있는 프랑스영사관에서는 영사관 직원에게 조선 독립이 가능한지를 묻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방향으로 가던 3000명 정도의 시위대는 본정통(중구 충무로)에서 행진이 막혔다. 일제가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6시 30분쯤 마포 전차 종점 시위를 마지막으로 서울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는 잠잠해졌다. 질서 정연하게 행진한 평화 시위였다. 경찰서나 각국 영사관 앞에 멈춰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보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날 서울의 만세 시위에 약 3만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3월 1일 서울 시위 참가자 규모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일제 군경의 개람표에는 4000명, 일람표에는 1만명으로 기록돼 있다. 헌병대에서 작성한 문서에는 “종로의 3000~4000명의 학생에 군중이 함께해 수만에 이르렀다”고 기술돼 있고, “이날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 십만에 달한다”고도 적혀 있다. 일제는 이날 시위에 참가하거나 인쇄물을 배포한 주동자 134명을 체포했다.이날 만세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DB)에 따르면 3월 1일 하루에만 전국에서 22건의 단체행동(시위·휴학·휴교·파업)이 있었다. 함경남도 원산과 평안북도 선천, 평안남도 평양·안주·진남포, 경기도 개성 등에서 5만 2000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평양에서는 2000~5000명이 만세 시위에 참석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총에 맞아 부상당한 이들 가운데 최소 5명이 병원에서 숨졌지만 일제의 명령으로 사인을 총상으로 기재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시위대는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독립가를 불렀다. 일제 소방대원들은 시위대에 물을 쏘고 갈고리를 휘둘렀다. 부상자가 나오자 분노한 시민들이 돌을 던졌다. 평양에서만 112명이 검거됐다. ●수개월 1700여건 단체행동에 103만여명 3·1운동은 단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민중은 단체행동(시위·휴학·휴교·파업)을 이어 갔다. 2일에도 전국적으로 13건이 발생했고, 3일(42건), 4일(23건)에도 계속됐다. 3월 4일 늦은 밤. 서울 시내 각지에 ‘경고 이천만 동포’라는 문서가 붙었다. 5일 남대문 부근에서 시위를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5일 오전 8시 남대문역 앞에서 학생들이 독립 만세 운동을 시작했다. 1만여명이 참여한 시위에서 학생과 시민은 붉은 수건을 팔에 두르거나 구한국기(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남대문시장과 조선은행, 종로 보신각으로 행진했다. 대한문 앞에서 대기하던 경찰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해 수백명이 체포됐다. 부상자도 속출했다. 저항의 방법은 시위만이 아니었다. 3월 1일부터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 관립, 공립, 사립학교와 전문학교 학생 다수가 학교에 출석하지 않고 동맹휴교에 나섰다. 또 서울의 전차 차장과 운전수는 3월 8일 오후부터 3월 10일 자정까지 동맹파업을 했다. 학생들은 휴학이나 휴교로,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일제의 폭거에 맞섰다. 3월 한 달(3월 1일 제외)간 민중의 단체행동 1025건, 참여 인원 66만 1311명이었다. 4월에도 저항은 이어졌다. 4월 한 달간 651건의 단체행동에 모두 31만 4778명이 참여했다. 3·1운동 기간 전체로 보면 시위·휴학·휴교·파업 1732건에 모두 103만여명이 참여했다. “조선 사람이니 독립을 하려고 한 것이오.” 3월 5일 서울에서 벌어진 학생 주도의 만세 시위에 참여한 보성법률상업학교(현 고려대) 학생 강기덕(1886~?)은 왜 독립 운동을 하려고 했는지를 묻는 검사의 심문에 이렇게 답했다. 민중이 3·1운동에 참여한 이유 역시 강기덕과 다르지 않았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학과 교수는 “3·1운동을 비롯해 독립 운동 관련 판결문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농민과 학생, 노동자”라고 설명했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지도 세력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바로 민초 자신들”이라며 “몇 달간 1000회가 넘는 시위를 지속적으로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이름 없는 이들의 헌신 덕분”이라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신파극·서구 영화 활극 요소 버무린 연쇄극에 관객들 ‘매료’

    신파극·서구 영화 활극 요소 버무린 연쇄극에 관객들 ‘매료’

    1919년 10월 27일 조선인 거리의 영화관 단성사에서 조선인 신파극단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가 처음 상연됐다. 바로 이날을 한국영화의 기점으로 삼아 올해 10월 27일을 한국영화 100주년으로 기념하는 것이다. 연쇄극은 연극 무대를 중심으로 영화의 스크린이 결합한 공연 방식이었다. 왜 온전한 영화가 아닌 연쇄극을 한국영화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일까. 당시 연쇄극이 어떻게 무대 위 배우들의 공연과 영화의 필름을 연결하고 있었는지, 우선 상연 공간의 모습을 그려 보기로 한다. 먼저 배우들이 등장한 무대다. 정의의 주인공은 조력자인 신문기자의 도움으로 악인의 계략을 알게 된다. 전모가 드러난 악인이 줄행랑을 치고 주인공은 이를 뒤쫓는다. 그 순간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옥양목 천으로 만든 스크린이 내려온다. 무대에서 본 인물들이 영화에서 보이니 관객들은 감탄한다. 악인이 자동차를 타고 도망가는데 주인공 역시 자동차를 이용해 추격전을 벌인다. 저 멀리 신문기자가 부른 경찰차까지 3중의 추격전이 벌어진다.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편 무대에 있던 배우들은 스크린 뒤로 자리를 옮겨 실감 나게 대사를 입히고 있다. 당시는 소리가 없는 무성영화였기 때문이다. 막다른 길에 달한 악인이 차에서 내려 도망가자 주인공이 그를 붙잡고, 이제 격투가 시작되려 한다. 이때 다시 조명이 켜지면서 스크린이 올라간다. 무대에는 다시 주인공과 악인이 나와 있고, 둘은 악단의 효과음에 맞춰 격투를 벌인다. 관객들은 쉴 새 없이 탄성을 지른다. ●조선영화의 선구자 박승필·김도산·임성구 만약 지금 이런 공연을 본다고 해도 무척 흥미진진할 것 같지 않은가. 조선인 신파극단의 연쇄극은, 아직은 조선인들이 만든 극영화가 등장하지 않았던 시기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최적의 오락이었다. 당시 조선 극장가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비극과 활극이 결합된 신파극이 유행하고 있었고, 눈을 뗄 수 없는 활극 장면이 숨 가쁘게 몰아치는 서구의 연속영화(serial film)가 조선인 관객들을 매혹시키고 있었다. 바로 이때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등장한 것이다. 즉 조선인 연쇄극은 일본의 신파극과 서구 영화의 활극 요소를 버무려 조선식으로 토착화한 공연이자 영화였다.1919년 10월 단성사 무대에서 상연된 ‘의리적 구토’는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일까. 조선 최초의 연쇄극을 제작하고 유행시킨 주역들은 바로 단성사의 경영자 박승필, 신파극단 혁신단의 임성구 그리고 신극좌의 김도산이다. 조선 흥행계의 대부로 불린 박승필(1875~1932)은 일제시기 대중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908년부터 광무대 운영을 맡으며 전통공연과 신파극을 무대에 올렸고, 1918년 4월 단성사의 경영권을 인수해 그 해 12월 개축한 후 조선인 영화상설관으로 개관했다. 일본 흥행사들의 틈바구니에서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그는 단성사를 기반으로 서구영화를 소개하며 조선영화 제작을 도모하고 있었다.조선의 신파극 시대를 연 임성구(1887~1921)는 남촌의 일본인 극장 고토부키자(壽座)의 신파극 무대에 영향을 받아 1909년쯤 한국 최초의 신파극단인 혁신단을 조직했다. 가정 비극에 활극을 버무린 공연을 단골 레퍼토리로 올렸던 그는, 비극 연기뿐만 아니라 검극에도 능해 장안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사실 그의 혁신단은 단성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특히 1918년 8월에는 개축 전 단성사 무대에 혁신단 9주년 기념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의리적 구토’의 연출과 주연을 맡았던 김도산(1891~1921)은 1911년쯤부터 혁신단의 배우로 신파극을 시작했다. 1917년 직접 개량단을 조직해 활동하다 1919년 신극좌를 창립해 단성사의 박승필과 손잡고 조선의 연쇄극 시대를 이끈다.바로 이들이 조선인 최초의 연쇄극 제작부터 이듬해 연쇄극의 유행까지 불과 2년 사이의 숨 가쁜 흐름을 만들어냈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 1904년 처음 시작된 연쇄극이 1916년쯤부터 영화 비중이 높아져 1918년에 크게 유행한 것과 비교하면, 조선에서는 상당히 압축적으로 진행됐다. 처음부터 영화를 지향한 연쇄극이었던 점도 특기할 만하다. 박승필은 왜 연쇄극을 제작한 것일까. 1918년 조선의 극장가에는 서구 연속영화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 12월 단성사를 영화상설관으로 재개관한 박승필 역시 미국의 단편 코미디영화나 연속영화를 상영했고, 이에 덧붙여 조선인 신파극 공연을 주요 프로그램으로 꾸리고 있었다. 연속영화의 활극적 요소에 열광하는 조선인 관객들을 목도한 그는 우선 연쇄극 방식을 이용해 조선영화 제작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연쇄극을 만들기 위해 박승필은 단성사에 외화를 공급하는 일본의 덴카쓰(天活) 영화사를 활용했다. 1919년 6월 그는 김도산을 덴카쓰 계열의 오사카 소재 극장으로 파견해 전기응용극(관객의 사실적인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무대에 하늘과 바다 같은 이미지를 영사해 입체감 있는 배경을 만들어 주는 방식의 연극)과 연쇄극 공연을 배우게 한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김도산은 9월 전기응용극을 무대에 올린 후, 10월에는 ‘의리적 구토’의 흥행을 시작으로 ‘시우정’(是友情), ‘형사의 고심’까지 연쇄극 상연에 성공하게 된다. 당시 연출은 김도산이, 배우는 그를 비롯한 신극좌 단원들이 맡았지만, 촬영은 일본에서 불러온 덴카쓰의 촬영기사가 참가했다. 필름 카메라를 다루고 프린트를 만드는 기술까지는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성사의 연쇄극이 조선인 관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데 성공하자, 김도산의 선배인 임성구도 뒤를 잇는다. 1920년 4월 단성사 무대에 올라간 임성구의 ‘학생절의’(學生節義)는 더 진화된 연쇄극으로 평가받았다. 연극 무대의 실연을 줄인 반면 서양 활극영화를 지향한 영화 필름의 분량이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이후 김도산 역시 박승필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신파연극과 연쇄극을 열정적으로 무대에 올리다 1921년 7월 3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사인은 연쇄극 촬영 시 몸을 아끼지 않고 활극 연기를 하다 입은 부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비록 연쇄극의 영화 장면이 연극의 막과 막 사이에 영사된 부분적인 필름이긴 했지만 그는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이자 영화에 출연한 첫 번째 주연으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인 연쇄극은 한국의 첫 영화 제작 ‘의리적 구토’의 상연 전날인 1919년 10월 26일자 매일신보의 소개 기사를 보자. “근래 활동사진이 조선에 많이 나와 애극가의 환영을 비상히 받았으나, 첫째 오늘날까지 조선인 배우의 활동사진은 아주 없어서 유감 중에 (중략) 이번 단성사주 박승필씨가 오천여원의 거액을 내어 신파신극좌 김도산 일행을 데리고 경성 내외의 경치 좋은 장소를 따라가며 다리와 물이며 기차, 전차, 자동차까지 이용하여 연극을 한 것을 처처(處處)히 박은 것이 네 가지나 되는 예제(藝題)인 바 모두 좋은 활극으로만 박았으며 (중략) 서양사진에 뒤지지 않을 만하게 되었고”라는 기록은 조선인 연쇄극이 처음부터 영화 매체를 지향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의리적 구토’와 함께 상영된 실사 필름 ‘경성 전시(全市)의 경’도 주목해야 한다. 연쇄극 본편에 앞서 서울 도심 곳곳을 기록한 필름을 상영한 것이다. 조선인 연쇄극을 처음 경험한 조선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1919년 10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연쇄극 상연 첫날부터 조선인 관객들이 물밀 듯이 들어온 상황과 함께 다음의 내용을 전한다. “영사된 것이 시작하는데 우선 실사로 남대문에서 경성 전시의 모양을 비치우매 관객은 노상 갈채에 박수가 야단이었고, 그 뒤는 정말 신파사진과 배우의 실연 등이 있어서 처음 보는 조선 활동사진임으로 모두 취한 듯이 흥미 있게 보아 전에 없는 성황을 이루었더라.” 당시 조선인 관객들에게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영화 장면과 실사 필름 ‘경성 전시(全市)의 경’이 조선의 첫 영화로 받아들여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발효되면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 조선이 됐다. 그리고 1919년 병합조약 무효와 독립을 선언하는 3·1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거행됐고, 이를 계기로 중국 상하이에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활동’이 강하게 요구되는 시기였다. 같은 해 10월 27일 단성사의 박승필과 신파극단 신극좌의 김도산이 추진하던 최초의 연쇄극에, 조선 사람이 기차, 전차, 자동차 위에서 조마조마한 활극을 펼치는 ‘활동’이 스크린에 펼쳐졌다. 1919년 이렇게 조선의 ‘활동사진’ 즉 조선영화는 시작됐다. 조선 사람들은 때로는 혼란스럽게 급변해 버린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때로는 그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조선영화라는 근대와 대면했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비, ‘자전차왕 엄복동’ 시사회 후 취중 심경고백 “최선 다했다”

    비, ‘자전차왕 엄복동’ 시사회 후 취중 심경고백 “최선 다했다”

    가수 겸 배우 비(정지훈)이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개봉을 앞두고 심경을 고백했다. 비는 25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엄복동 하나만 기억해주세요. 진심을 다해 전합니다. 밤낮으로 고민하고 연기했습니다.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했습니다. 저의 진심이 느껴지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만큼 영화가 재밌다는”이라는 글과 함께 ‘자전차왕 엄복동’ 스틸 사진을 게재했다. 당초 비는 “술 한 잔 마셨습니다. 영화가 잘 안 되도 좋습니다. 하지만 엄복동 하나만 기억해 주세요. 진심을 다해 전합니다. 영화가 별로일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글을 남겼으나 자신의 의도와 다른 해석이 이어지자 글을 수정하며 “그만큼 영화가 재밌다는”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 공식 언론시사회 직후 혹평들이 나오자 속상한 마음에 해당 글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자전차왕 엄복동’은 일제강점기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조선인 최초로 전조선자전차대회에서 승리를 거두며 암울했던 조선에 희망이 되었던 잊혀진 실존 인물 엄복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타이틀롤을 맡은 비는 자전거 타는 실력을 높이기 위해 지구 반 바퀴에 달하는 거리를 달리며 연습에 매진한 것은 물론 39도가 넘는 폭염과 싸우며 영화를 촬영하는 등 이 영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후문.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감독 김유성)에는 비를 비롯해 강소라, 이범수, 민효린, 김희원, 이시언, 고창석 등이 출연한다. 오는 27일 개봉.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봉건군주제 뛰어넘은 3·1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씨앗되다

    봉건군주제 뛰어넘은 3·1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씨앗되다

    급작스런 고종 서거… 3·1운동에 도화선복벽주의 아닌 왕정 극복한 민족자결주의 19세기말 독립협회 등 민주공화정 꿈꿔 수많은 임정 탄생… 세 키우기 위해 통합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돼 있다. 정부는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수립일인 4월 11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1919년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임정의 의미를 기리자는 취지다. 19세기 말부터 우리 민족은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을 서서히 키워 나갔다.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3·1운동으로 이를 분출했고 상하이에 임정을 세워 계승했다. ●3·1만세운동 도화선이 된 고종의 죽음 “사실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궁정 자체에 있었다.” 1910년 중국의 대표적 개혁가 량치차오(1873~1929)는 사라진 대한제국을 두고 이렇게 개탄했다. 그는 “오늘날(20세기 초) 입헌국에서 군주는 정치적 책임이 없고 약정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전제국가는 이와 다르다. 국가의 운명이 전부 궁정 한 곳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이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하지 못해 망국에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강제로 병탄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육군 대장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 행정과 입법, 사법권을 모두 장악했다. 우리 역사의 최대 암흑기였던 36년간의 일제 통치기간이 시작됐다. 1919년 1월 21일 고종(1852~1919)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한반도 전체가 충격과 비통에 휩싸였다. 건강 하나만큼은 ‘완전체’에 가깝던 그가 돌연사하자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성난 민초들이 고종의 서거를 애도하고자 서울로 향했다. 이런 움직임이 3·1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하지만 이들이 ‘복벽주의’(나라를 되찾아 왕을 다시 세우겠다는 주장)를 내세운 것은 아니다. 되레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새 나라는 대한제국(조선)을 계승하되 국가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24일 “3·1운동 당시 고종에 관한 구호가 아예 없었다”면서 “1911년 중국 신해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공통점은 황제로 상징되는 절대 권력을 부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민족은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왕정을 완전히 극복했다. 3·1운동은 과거 봉건군주제를 넘어선 것이기에 가히 ‘혁명’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강조했다. ●1896년 독립협회 때부터 민주공화제 열망 우리 민족은 대한제국 멸망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을 키워 나갔다. 1896년 조선에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만들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자주독립과 천부인권 존중, 한글 사용 등을 강조했는데, 배후에는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를 포함해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만들어 조선인에게 영어와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이승만(1875~1965)도 이 학당의 학생이었다. 독립협회는 종종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만민공동회는 관민공동회로 이어지며 국정개혁의 대원칙을 결정하기도 했다. 미국의 한인들이 발간한 신한민보 1910년 7월 6일자 사설에는 독립협회 정신을 계승해 “현 정부(대한제국)가 일본에 투항한 지 오래됐는데,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해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선언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 병합 뒤 국내외 망명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1911년 12월 연해주 한인들은 항일 결사체인 권업회를 세웠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했다. 1917년 12월에는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세워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다.1915년 3월 중국 동포들은 상하이에서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1917년 7월 박은식과 신채호, 김규식 등 독립운동가 14명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 공화정제로 운영되는 임시정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도 3·1운동을 준비한 천도교를 중심으로 임시정부수립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을 계기로 수많은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는 힘을 모으고자 하나로 통합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임정의 시작이다. 김정인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회’ 기획소통분과위원회 위원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한 임정의 임시헌장은 정당성의 기원을 3·1운동에서 찾고 있다”고 밝혔다. 1920년 1월 임정 신년축하회 연설에서 내무총장 안창호는 민주공화국 탄생의 감격을 이렇게 전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나요? 있습니다. 과거에는 황제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2000만 국민이 모두 황제요. 제군 모두가 황제란 말입니다. 황제란 무엇이오? 주권자의 이름입니다. 지금은 제군이 모두 다 주권자외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3.1운동 100주년 기념 행사 풍성...부산 서구 한달간

    “3.1운동 100주년,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겠습니다” 부산서구는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3월 한달 간 다양한 행사를 편다고 22일 밝혔다. 부산 서구에 따르면 3월 1일 오전 10시30분 구덕운동장 내 버스주차장에서는 ‘서구와 함께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구덕운동장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 11월 23일 제2회 경상남도 학도 전력 증강 국방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조선인 차별대우에 항거해 일으킨 ‘부산항일학생의거(일명 ‘노다이사건’)’가 일어난 역사적인 곳이다. 기념식은 구덕운동장 내 버스주차장에서 열리는데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재현하는 ‘서구민 선언문’ 낭독, 서구여성합창단의 3.1절노래 제창, 만세삼창 등이 있을 예정이다. 식전행사로는 풍물패의 길놀이, 페이스페인팅, 태극풍선 배부 등이 마련된다. 기념식이 끝난 뒤에는 300여 명의 참석자들이 구덕운동장 정문을 출발해 동대신로터리, 동아대 부민캠퍼스에 이르는 1.5㎞ 구간에서 3.1운동 당시의 만세삼창 재현, 태극기 몹 등 거리퍼레이드에 나선다. 서구 및 서구자원봉사센터 홈페이지에 ‘시민 참가 신청 창구’를 마련해 오는 28일까지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며, 참가 학생들에게는 자원봉사활동 시간을 제공한다. 또 동대신2동 중앙공원 내 부산광복기념관 일원에서는 문화행사 ‘그날의 함성! 100년의 기억’이 3월 한 달간 열린다. 개막식은 3월 1일 오후 2시 거행되며, 부산시립예술단과 함께하는 문화공연, 광복기념관 투어, 초·중·고생 대상 ‘나라사랑 태극기 만들기’ 체험 이벤트 등이 있을 예정이다. 이밖에 매주 토요일 오후 1시에는 부산시립예술단의 문화예술공연, 매주 토·일요일 오후 2시에는 ‘독립, 희망을 노래하다’ 테마기획 영화제가 열리고, ‘나에게 보내는 독립엽서, 광복우체통’ 무료발송 이벤트, ’캘리그라피로 만나는 독립운동가 어록‘ 야외 특별전시회가한 달 내내 진행된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日에 수탈·학살당한 홋카이도 소수민족 ‘울분의 역사’

    日에 수탈·학살당한 홋카이도 소수민족 ‘울분의 역사’

    지난 15일, 일본 정부가 홋카이도의 소수민족인 ‘아이누 민족’을 ‘원주민’으로 인정하는 법률안을 발의했다. 아이누 문화를 활용한 지역진흥책을 위한 교부금 창설도 법률안에 포함됐다. 아이누 민족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일본 북부와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는 쿠릴 4개 섬 등 러시아 극동에 거주해 온 소수민족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 왔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철광석을 중심으로 온갖 수탈의 대상이었다. 이번 조치가 아이누 민족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일본 정부의 숨은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다. 쿠릴 4도(일본명 북방영토)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영유권 분쟁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어느 아이누 이야기’는 아이누 민족의 불행한 역사와 되풀이되고 있는 슬픈 오늘을 조명한 책이다. 저자 오가와 류키치는 1935년 조선인 노동자와 아이누 민족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30년대 노동자 모집 광고를 보고 홋카이도로 갔지만, 자신의 역할이 강제 징용된 사람들을 감시, 구타하는 일임을 알고 집단 탈출을 시도한다. 탈출한 그가 은거한 곳이 바로 아이누 마을이었는데, 거기서 오가와 나쓰코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류키치의 아버지는 그를 찾아 한국에서 온 가족을 따라 떠났고, 모자는 아이누 마을에 남겨졌다. 홋카이도는 대대로 아이누 민족의 세거지였고, 윌터 등 서너 개 소수민족이 더불어 살았다. 이곳에 흔히 야마토라 불리는 일본 민족의 마수가 뻗치기 시작한 것은 1870년 이후다. 일본은 홋카이도를 개발해 각종 자원을 ‘개척’이라는 미명 아래 수탈했다. 1930년대 들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선이 확대되면서 광물 등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주요 기지가 됐고,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에게는 무덤과 같은 곳이 됐다. 자원만 수탈당한 것이 아니다. 숱한 아이누 민족이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다. 1983년 홋카이도 대학교 동물실험실에서 처음 아이누족의 유골이 발견됐고, 이후 1995년에는 무려 1000여 구의 유골이 발견됐다. 대부분 아이누족이었고, 윌터를 포함한 소수민족과 조선 동학군 유골도 이곳에서 발견됐다. 홋카이도 대학이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열도 등에서 발굴해 모아둔 유골로 알려졌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도 함구하고 있다.어머니와 이부(異父) 형 슬하에서 자란 류키치는 아이누 민족의 정체성을 하나씩 몸에 익혔다. 아이누로서의 자각이 강한 사나에를 만나 1962년 결혼하면서부터는 민족에 대한 자부심도 갖게 됐다. 1970년대 초반부터 아이누 민족의 권리 찾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그는 1983년 무렵에는 아이누 민족 운동가들과 더불어 홋카이도 대학과 일본 정부에 아이누 민족 유골 수습과 학살 경위를 밝힐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1997년에는 ‘홋카이도구 토인보호법에 기반한 공유재산재판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해 아이누 민족의 권리 보호를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아이누 민족은 일본의 일원이면서도 숱한 박해와 고난의 나날을 보냈다. 류키치는 소수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민족적 차별과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웠던 아이누 민족의 모멸감을 울분을 토하듯 써내려간다. ‘어느 아이누 이야기’는 일본의 소수민족 문제를 세계에 증명하는 하나의 좌표가 될 만한 책이다.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세계와 연결되는지 ‘어느 아이누 이야기’는 작지만 큰 울림을 전해 준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3·1운동 100년, 그날 만세 외친 ‘보통 영웅’들의 숨겨진 이야기

    3·1운동 100년, 그날 만세 외친 ‘보통 영웅’들의 숨겨진 이야기

    “산 자, 죽은 자가 함께 7년의 큰 가뭄에 비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기다려 온 것은 조선 독립의 네 글자인 고로 영험한 하늘이 조선 독립 선언의 기회를 준 것이니 조선민족 중 정신병자 외에 독립만세의 선동을 하지 않을 자 누가 있겠는가.”(서형묵·농업·43세) “나의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목적 및 행위는 정의와 인도에 따른 것이니 죄로 인정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동양인의 조선민족의 당당한 행위이고 공명정대한 목적이므로 죄에 대해 불복하고 상고한다.”(김수영·교직원·37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판결문에 담긴 일부 내용이다. 3·1운동 과정에서 체포돼 재판을 받은 평범한 조선인들이 법원에 상고 이유를 밝힌 것이다. 판결문에서 보듯 평범한 시민들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 역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100년 전 나라를 위해 발벗고 싸웠던 ‘보통 영웅’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마련된다. 22일 개막하는 특별전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보여 주는 자료 200여점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3·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인생을 보여 주는 1부 ‘1919년을 가슴에 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과 활동 공간을 조명한 2부 ‘임시정부 사람들 조국을 그리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애쓴 한인들과 그 후손들의 모습을 조명하는 3부 ‘고향, 꿈을 꾸다’로 구성된다. ‘1919년 고등법원 판결문’을 비롯해 일제의 탄압 실상을 알리며 전 세계 기독교인에게 지원을 요청한 ‘대한민국 야소교회 대표자 호소문’, 1919년 8월 21일 중국 상하이에서 창간된 임시정부 기관지인 ‘상하이판 독립신문’ 등 다양한 자료를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9월 15일까지 서울 중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日 오키나와서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 추도식

    日 오키나와서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 추도식

    한국과 일본, 대만 등지의 시민연대 ‘동아시아공동워크숍’ 회원들이 16일 일본 오키나와 북부 모토부초의 한 주차장에서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 추도식을 열고 있다. 이곳에는 1945년 1월 군수물자 보급선에 탔다가 폭격으로 사망한 강제동원 조선인 김만두(당시 23세)씨와 명장모(당시 26세)씨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평화디딤돌, 일본 동아시아시민네트워크와 소라치민중사강좌, 오키나와 유골발굴단체 ‘가마후야’ 등이 준비작업을 거쳐 내년 1월부터 김씨 등의 유골 발굴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모토부초 연합뉴스
  • 계산서 용지에 쓴 일기…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의 또 다른 모습

    계산서 용지에 쓴 일기…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의 또 다른 모습

    “어떤 조선인 경찰이 와서 나의 몸을 수색하였다. 이에 내가 질책을 하면서 물러가라고 하였다. (중략) 이로부터는 단지 한 번 죽을 마음만 있어서 혹 며칠 동안을 밥을 먹지 않기도 하였으며, 혹 대나무 젓가락을 가지고 귀 사이를 스스로 찌르기도 하였다.” “조사를 할 시간이 되면 7권으로 장정된 책자를 펼쳐 놓고서 물었다. (중략) 내가 본국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 하나하나 기재되어 있었으며, 항주 및 북경 등에서 한 일에 대해 내가 잊고 있었던 것도 그들은 오히려 기록해 놓고 있었는데 이런 일들은 모두 나로서는 기억할 수 없는 것이었다.”독립운동가 이규채(1890~1947)가 죽기 몇 해 전 자신의 삶의 궤적과 독립운동 여정을 기록한 일명 ‘이규채 연보’에 담긴 내용이다. 1920년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내고, 이후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던 이규채는 만주지역 항일 무장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한 상점의 계산서 용지 32장 분량에 적힌 ‘이규채 연보’는 이규채가 자신의 상세한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한 덕분에 다른 자료에서는 볼 수 없는 현장감이 뚜렷하다. 독립운동 당시 목숨을 수시로 위협받던 일부터 일제의 혹독한 감시를 피해 다니면서 느낀 고단함,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예를 들면 1932년 쌍성보 전투에 참여했던 이규채는 왼쪽 손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전투가 끝난 한참 후에 곁에 있던 사람이 알려줘서야 알게 됐다고 적었다. 중국 청나라 말기 민간 비밀결사단체인 대도회(大刀會)를 만나 수색을 당할 당시 ‘일본의 정탐꾼’으로 오인당해 몸이 묶이고, 그 끈을 말 안장에 매달고 말을 달리게 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것만 같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밖에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생매장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일, 지난날 함께 활동했던 이민달(李敏達)이라는 자의 밀고 때문에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일, 체포된 이후 일본 영사관에서 조사받을 당시 일본 경찰이 7권 분량 책자를 펼쳐 놓고 신문한 일 등 당시 이규채가 겪었던 역경과 고뇌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그간 독립운동사 자료는 ‘전투에서 누구를 처단하고 거사를 행했다’는 식의 활동 내용이 중심이지만 ‘이규채 연보’는 이규채 자신이 마적을 만나서 물건을 털리거나 목숨을 빼앗길 뻔한 이야기 등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면서 “사람들이 모르는 독립운동의 상세한 여정과 독립운동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규채 연보’에는 이규채가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규채의 손자 이성우씨는 “이 자료에 1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분들이 많다”면서 “민족문제연구소나 독립기념관 등의 기관에서 무명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기념하는 탑을 만드는 등의 실천적인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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