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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자위적 핵 억제력으로 이 땅에 전쟁이란 말 없을 것”

    김정은 “자위적 핵 억제력으로 이 땅에 전쟁이란 말 없을 것”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우리의 믿음직하고 효과적인 자위적 핵 억제력으로 하여 이 땅에 더는 전쟁이라는 말은 없을 것이며 우리 국가의 안전과 미래는 영원히 굳건하게 담보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조국해방전쟁 승리의 날’(정전) 67주년이었던 지난 27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회 전국노병대회에 참석해 이같이 연설했다고 28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6·25 전쟁 이후 70년이 “결코 평화 시기라고 할 수 없는 적들과의 치열한 대결의 연속이었다”며 “우리의 발전을 억제하고 우리 국가를 침탈하려는 제국주의의 위협과 압박은 각일각 가증되었다”고 말해 엄중한 정세인식을 드러냈다. 이어 “1950년대의 전쟁과 같은 고통과 아픔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전쟁 그 자체를 방지하고 억제할 수 있는 절대적 힘을 가져야 했기에 남들 같으면 백번도 더 쓰러지고 주저앉았을 험로 역경을 뚫고 온갖 압박과 도전들을 강인하게 이겨내며 우리는 핵 보유국에로 자기발전의 길을 걸어왔다”고 핵 보유를 정당화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비로소 제국주의 반동들과 적대 세력들의 그 어떤 형태의 고강도 압박과 군사적 위협 공갈에도 끄떡없이 우리 스스로를 믿음직하게 지킬 수 있게 변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전쟁은 넘볼 수 있는 상대와만 할 수 있는 무력충돌이다. 이제는 그 누구도 우리를 넘보지 못한다”며 “넘보지 못하게 할 것이고 넘본다면 그 대가를 단단히 치르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구도 범접할수 없는 최강의 국방력을 다지는 길에서 순간도 멈춰서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미국을 겨냥해선 “제국주의”,“침략성과 야수성” 등 거친 단어를 사용했지만, 혈맹으로 일컫는 중국에 대해서는 “이 기회에 우리 인민의 혁명전쟁을 피로써 도와주며 전투적 우의의 참다운 모범을 보여준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들과 노병들에게도 숭고한 경의를 표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울러 노병들의 삶이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모든 세대의 교과서가 될 것이라며 “전체 인민이 노병 동지들을 자기의 친부모로 따뜻이 정성 다해 모시는 것을 숭고한 도리와 의무로 간직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미국 워싱턴DC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서는 한국전참전용사추모재단(KWVMF)이 주최한 헌화식이 열려 재단 이사장인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과 이수혁 주미대사, 월터 샤프 전 주한미군사령관 등이 참석했다. 6·25참전유공자회 손경준 회장과 래리 호건 미 메릴랜드 주지사의 한국인 부인 유미 호건 여사 등도 함께 했으며 코로나19 탓에 별도의 연설도 없었고 많은 사람도 초청하지 않은 채 헌화와 묵념 위주로 간소하게 진행됐다. 미국 국방부는 이날 정전 67주년을 맞아 “우리는 당시 아주 많은 것을 희생한 모든 용감한 미국인에 경의를 표한다”는 트윗을 올렸다. 앞서 6·25전쟁 발발 70주년인 지난달 25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내외가 같은 곳에서 헌화하며 참전용사의 희생을 기렸다. 정전협정은 UN군 수석대표, 공산군 대표, UN군 총사령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 각각 서명해 한국군 대표의 자리는 없었다. 우리 정부와 사회에서 정전협정 자체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씨줄날줄] 간도특설대와 백선엽/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간도특설대와 백선엽/박록삼 논설위원

    간도특설대는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로 시작해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로 끝나는 부대가(歌)를 갖고 있다. 일본이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에 의해 1938년 창설됐을 때 명칭은 ‘조선인 특설부대’였다. 부대장만 일본인이었을 뿐 병사 800여명이 조선인이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을 기점으로 만주 등지에서 대규모 항일독립군 부대의 활약은 미미했다. 하지만 동북항일연군을 중심으로 한 항일 독립운동세력의 소규모 무장 게릴라전은 활발했고, 일본은 괴로웠다. 일본의 시선만으로 보자면 간도특설대의 용맹함은 하늘을 찔렀다. 108회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체포·사살했다. 일본군의 이른바 ‘삼광정책’(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빼앗는)의 토벌작전을 최전선에서 실천했다. 임산부 살해, 노인 폭행 살해, 강간, 살인 등을 서슴지 않았다. 만주 지역 한인 사회에 몸서리쳐지는 공포를 심어 줬다.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한 백선엽(1920~2020) 예비역 육군 대장은 1993년 자서전에서 자신이 복무한 간도특설대에 대해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회고했다. 2009년 대통령 직속 정부 기구는 그가 친일파라고 공식 인정했다. 항일 독립군과 한인 동포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간도특설대 및 일본군 장교 상당수는 해방 이후 국군 지도부로 편입됐다. 미군정에서 현대식 군사 지휘체계를 익힌 간부를 찾은 탓이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해산돼 친일 잔재 청산활동이 좌절된 것도 이들을 더욱 득세하게 했다. 좌익에 반대하는 것만으로도 친일의 전력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 장군의 지위로 참전했다. 백선엽 만주군 중위 역시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직후 강제 무장 해제를 당했다. 이후 민족주의자인 고당 조만식(1883~1950)의 비서로 몇 달 일했다. ‘신분 세탁’이라는 평가가 없지 않다. 1945년 12월 만들어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 26일에 임관했다. 준장으로서 제1사단장을 맡았고, 한국전쟁 도중 5사단장 소장, 중장, 대장으로 진급했고 참모총장으로 퇴임했다. ‘한국전 영웅’으로 불린다. 지난 10일 숨진 백 전 육군 대장의 현충원 안치를 놓고 찬반이 갈리고 있다. 한 생애에 대한 공과(功過)가 너무도 극명한 탓이다. 백선엽, 친일을 평가할 것인가, 반공을 평가할 것인가. youngtan@seoul.co.kr
  • 하루키, 간토 조선인 학살 거론… 日 ‘코로나 배타주의’ 경고

    하루키, 간토 조선인 학살 거론… 日 ‘코로나 배타주의’ 경고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간토 대지진 이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거론하며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일본 사회가 폐쇄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루키는 12일 보도된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일종의 위기적 상황에서는 예를 들면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처럼 사람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그런 것을 진정시켜 가는 것이 미디어의 책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은 코로나19로 일본 사회의 폐쇄성이 강해지고 자국중심주의적인 경향이 확산되며 외국인이나 소수자에 대한 배타적 모습이 나타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간토학살은 1923년 리히터규모 7.9의 지진이 간토 지방을 강타한 후 ‘조선인이 독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확산돼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이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다. 하루키는 또 인터뷰에 앞서 이뤄진 라디오 방송 녹음에서 나치 독일의 선전·선동과 같은 메시지가 나오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1960∼1970년대 학원 분쟁 시대에 말이 혼자 걸어가고 강한 말이 점점 거칠게 나가는 시대에 살았으므로 강한 말이 혼자 걸어가는 상황이 싫고 무섭다”고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에 관한 의견을 밝혔다. 하루키는 앞서 코로나19 긴급사태 때 라디오를 진행하며 일본인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선악이나 적군·아군의 대립, 서로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기 위한 지혜의 싸움”이라며 “여기에서 적의와 증오는 불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6·25 영웅”vs“독립군 토벌” 죽어서도 눈 못 감는 백선엽

    “6·25 영웅”vs“독립군 토벌” 죽어서도 눈 못 감는 백선엽

    해방 이전 日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 간도특설대서 활동… 한 번도 사과 안해軍인권센터 “백씨 야스쿠니 신사 가야”재향군인회 “서울현충원서 영면해야”유족 “아버지도 대전현충원 안장 만족”지난 10일 세상을 떠난 백선엽 장군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항일 독립군을 토벌했던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과 6·25전쟁에서의 공이 큰 만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선 것이다. 1920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공간인 1946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제1사단장, 제1군단장, 제7·10대 육군참모총장, 제4대 연합참모본부 의장 등을 지냈다. 1950년 4월 1사단장으로 취임해 6·25전쟁 다부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6·25전쟁 영웅’으로 불린다. 태극무공훈장과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은성무공훈장, 캐나다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논란은 해방 이전 행적에서 비롯됐다. 교직에 종사했지만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한 그는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해 조선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펼친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 패망 전까지 사회주의 계열 항일 무장 독립운동 세력인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대상으로 108차례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는 생전에 간도특설대 활동은 시인했지만, 한 번도 사과나 사죄를 하지 않았다.국가보훈처는 최근 백 장군의 병세가 악화하자 유족과 안장 문제를 협의해 왔다. 서울현충원 장군묘역은 1996년부터 만장 상태이기 때문에 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으로 지난 11일 최종 결정됐다. 법적으로는 국립묘지 안장 대상일지라도 친일 행적을 감안하면 안장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도 끊이지 않았다. 25개 독립운동가 선양단체 연합인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은 12일 “6·25 공로가 인정된다고 독립군을 토벌한 친일파를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이 나라다운 나라인가”라고 밝혔다. 군 인권센터도 “백씨가 갈 곳은 현충원이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라고 했다.반면 보수진영은 예우 차원에서 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향군인회는 이날 “6·25전쟁 시 함께 싸웠던 11만명의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서울현충원에서 영면하실 수 있도록 즉각 조치하라”고 밝혔다.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도 이날 조문 뒤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게 혁혁한 공로를 세우신 분”이라며 “뭣 때문에 서울현충원에 안장을 못 하고 내려가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여당은 조의는 표하되 안장지를 둘러싼 추가 논란은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다. 청와대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일 빈소에 조화를 보낸 데 이어 이날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 서훈 국가안보실장, 김유근 안보실 1차장, 김현종 안보실 2차장 등이 조문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 차원의 논평 없이 이해찬 대표가 빈소를 방문했다. 정세균 국무총리도 이날 조문을 마친 뒤 기자들에게 “정부는 육군장(葬)으로 (고인을) 대전현충원에 잘 모실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 정치권은 논란을 키우고자 하지만 유족들의 생각은 이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장남 남혁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아버지도, 가족도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서 “아버지도 생전에 대전현충원 안장에 만족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이며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진다. 안장식은 15일 오전 11시 30분 대전현충원 장군 2묘역에서 진행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與 침묵 속 이해찬, 오늘 ‘6·25 전쟁 영웅’ 故 백선엽 장군 조문

    與 침묵 속 이해찬, 오늘 ‘6·25 전쟁 영웅’ 故 백선엽 장군 조문

    민주, 공식 논평은 안 내기로 결정군인권센터 “현충원 아닌 야스쿠니 가야”통합 “조국 운명 지킨 분…좌파들의 준동” 더불어민주당이 공식 논평을 자제하는 분위기 속에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12일 ‘6·25 전쟁영웅’ 고(故) 백선엽 장군(예비역 육군 대장) 빈소를 찾아 조문하기로 했다. 군인권센터는 이날 백 장군을 친일 부역자라며 현충원이 아닌 야스쿠니 신사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래통합당은 식민지에서 태어난 청년이 만주군에 가서 짧은 기간 일한 것을 ‘친일’로 매도해 지워버리려는 좌파의 준동이라고 맹비난했다. 민주당 관계자에 따르면 이 대표는 이날 고위당정청 협의회를 마친 후인 오후 9시쯤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 장군의 빈소를 찾을 예정이다. 백 장군의 과거 친일 행적 논란 등을 놓고 정치권의 공방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대표는 백 장군의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본 것으로 보인다. 국회 국방위원장인 민주당 민홍철 의원은 이날 오전 빈소를 찾았다. 민 위원장은 조문 후 기자들과 만나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국방위원장 입장에서 군의 원로였고, 6·25 전쟁에 공헌을 했던 점에서 애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고 말했다.민주 “백선엽, 친일 사실 밝혀져 별세에 당 입장 안 내는 게 맞다” 민주당은 전날 밤 늦게 백 장군이 별세한 데 대해 당 차원의 공식 논평을 내지 않기로 했다. 고인이 6·25 전쟁에서 세운 공은 부정할 수 없지만, 과거 친일 행적도 분명하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당 관계자는 “백 장군이 4성 장군으로서 한국전쟁 때 공을 세운 것은 맞으나 친일 사실도 밝혀진 바 있다”면서 “별세에 대해 당이 입장을 내지 않는 게 맞다고 본다”고 전했다. 군인권센터는 지난 10일 별세한 백 장군에 대해 “백씨가 갈 곳은 현충원이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라고 12일 맹비난했다.군인권센터 “백씨 갈 곳은 야스쿠니 신사” 센터는 이날 성명을 내고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규정된 백씨에게 믿기 힘든 국가 의전이 제공되고 있다”면서 5일간의 육군장 진행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기로 한 것을 취소하라고 촉구했다. 센터는 “백씨는 일제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중위로 복무하며 일제의 침략 전쟁에 자발적으로 부역했다”면서 “이 조선인 일본군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전쟁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친일 행적에 대해 사죄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비판했다. 센터 측은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청년들에게 친일파를 우리 군의 어버이로 소개하며 허리 숙여 참배하게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면서 “육군참모총장은 육군장을 중지하고, 조기 게양으로 국기를 모독하는 일을 즉각 중단하며, 국가보훈처도 대전현충원에 백씨를 안장하는 계획을 백지화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국회는 김홍걸 의원 등이 발의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조속히 처리해 친일파를 국립묘지에서 모두 파묘해 이장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주호영 “식민지서 태어난 청년, 친일로 몰아” “美 한국 포기하려 할 때 다부동서 조국 지킨 분”“백 장관 역사서 지워버리려는 좌파들의 준동”“서울현충원 아닌 대전현충원? 이게 나라인가” 이에 대해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전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백 장군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이 아닌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데 대해 비판했다. 주 원내대표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청년이 만주군에 가서 일했던 짧은 기간을 ‘친일’로 몰아 백 장군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려는 좌파들의 준동이 우리 시대의 대세가 돼 버렸다”면서 “백 장군을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모시지 못한다면, 이게 나라인가”라고 안타까워했다. 주 원내대표는 “백 장군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초석을 다졌던 진정한 국군의 아버지”라면서 “트루먼 미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다부동에서 조국의 운명을 지켜냈던 분”이라고 강조했다. 김은혜 대변인도 12일 논평에서 정부가 백 장군을 대전현충원에 안장하겠다고 발표한 데 대해 “영웅의 마지막 쉴 자리조차 정쟁으로 몰아내고 있다”면서 “오늘날 대한민국과 국군을 만든 구국의 전사를 서울현충원에 모시지 않으면 누구를 모셔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김 대변인은 “백 장군은 6·25 전쟁 발발부터 1128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전선을 이끈 장군”이라며 “12만 6·25 전우가 있는 서울현충원에 그를 누이지 못하는 것은 시대의 오욕”이라고 강조했다. 백 장군은 지난 10일 오후 11시 4분쯤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5일 오전 7시 30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영결식이 열리며, 오전 11시 30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2묘역에서 안장식이 거행된다. 백 장군 장남인 백남혁(67)씨는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아버지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서 “아버지도 생전 대전현충원 안장에 만족했다”고 전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백선엽 갈곳, 현충원 아닌 야스쿠니 신사” 군인권센터 주장

    “백선엽 갈곳, 현충원 아닌 야스쿠니 신사” 군인권센터 주장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믿기 힘든 국가 의전”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해 육군장(葬)을 거쳐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인 가운데, 현충원 안장과 육군장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군인권센터는 12일 성명을 내고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규정된 고 백선엽 씨에게 믿기 힘든 국가 의전이 제공되고 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센터는 육군이 백 장군의 장례를 5일간 육군장으로 진행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기로 한 데 대해 취소할 것을 촉구했다. 군인권센터는 “백 씨는 일제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중위로 복무하며 일제의 침략 전쟁에 자발적으로 부역했다”며 “이 조선인 일본군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전쟁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친일 행적에 대해 사죄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비판했다. 센터는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청년들에게 친일파를 우리 군의 어버이로 소개하며 허리 숙여 참배하게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며 “백 씨가 갈 곳은 현충원이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라고 강조했다. 이어 “육군참모총장은 육군장을 중지하고, 조기 게양으로 국기를 모독하는 일을 즉각 중단하며, 국가보훈처도 대전현충원에 백 씨를 안장하는 계획을 백지화해야 한다”며 “국회는 김홍걸 의원 등이 발의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조속히 처리해 친일파를 국립묘지에서 모두 파묘해 이장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빈소엔 여러 정치권 인사, 전·현직 군 관계자 추모 이어져 백 장군은 지난 10일 오후 11시 4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5일 오전 7시 30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서 영결식이 열리며, 오전 11시 30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2묘역에서 안장식이 거행된다. 11일 마련된 백 장군의 빈소에는 여러 정치권 인사들과 전·현직 군 관계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미래통합당 신원식 의원, 원희룡 제주도지사, 이철우 경북도지사 등도 조문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과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 대사도 빈소를 찾았다. ‘나라지킴이운동본부’ 등 일부 보수단체는 전날 오후 8시쯤 서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 앞에 ‘백선엽 장군 분향소’라는 이름의 천막 6동과 테이블 등을 설치했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백선엽 장군 별세 6·25 전쟁 영웅인가 친일파인가(종합)

    백선엽 장군 별세 6·25 전쟁 영웅인가 친일파인가(종합)

    국군 창군 원로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10일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그는 ‘친일파’로, ‘6·25 전쟁영웅’으로도 불린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당시 각각 정반대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①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6.25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은 6.25 전쟁 초기 국군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승리를 이끌며 북한의 남침에서 조국을 구한 ‘전쟁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전투에서 백 장군이 패퇴 직전인 아군을 향해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고 말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 전투 승리로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할 수 있었고, 백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평양 진군의 선봉에 나섰다. 1951년엔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저지했고, 같은 해 겨울에는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벌였다. 백 장군은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불과 33살의 나이로 한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합참의장 등을 지낸 뒤 1960년 예편했다. ② 간도특설대 복무 이력…친일반민족행위자 분류백 장군에게 ‘친일파’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는 해방 이전에 일제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이력 때문이다. 그는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하고, 조선인 독립군 토벌대로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친일·반민족 행위를 조사·연구하는 시민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백 장군은 1943년 12월 간도특설대 기박련(기관총·박격포중대) 소속으로 중국 팔로군 공격 작전에 참여했다. 일제 패망 때 그의 신분은 만주국군 중위였다. 간도특설대는 일제 패망 전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을 대상으로 108차례 토공 작전을 벌였고,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 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한다. 백 장군은 생전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적은 있지만, 독립군과 직접 전투를 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지만 백 장군이 1983년 일본에서 출간한 ‘대(對)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라는 책에는 간도특설대 활동이 반민족 행위였음을 시인하는 취지의 기술이 담겨있다. 이 때문에 백 장군은 2009년 정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백 장군이 독립군을 직접 토벌했는지의 진실은 결국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2년 남짓의 간도특설대 경력은 백 장군에게 친일파라는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③ 현충원 안장 논란…국립대전현충원 안장 예정백 장군의 친일 전력 때문에 백 장군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는 주장이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오면서 현충원 안장 찬반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전현충원을 관리하는 국가보훈처는 유족 요청 등의 특별한 사유가 없을 경우 현행법에 따라 백 장군을 대전현충원에 안장할 계획이다. 미래통합당은 11일 “백 장군의 인생은 대한민국을 지켜온 역사 그 자체였다.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위대한 삶”이라고 애도했다. 김은혜 대변인은 논평에서 “살아있는 6·25 전쟁 영웅, 살아있는 전설,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들이 가장 존경하는 군인. 백 장군을 지칭하는 그 어떤 이름들로도 감사함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김 대변인은 백 장군의 친일 행적과 관련한 현충원 안장 논란을 겨냥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전설을, 이 시대는 지우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그 책속 이미지] 노인은 ‘아기’ 인형을 꼭 껴안았다

    [그 책속 이미지] 노인은 ‘아기’ 인형을 꼭 껴안았다

    “너희 엄마 아빠는 어디로 갔니. 이제 나랑 같이 살자.” 노인은 아기 인형을 꼭 껴안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침대 주변은 온통 갓난아기 사진으로 도배했다. 과거 일본군 위안부 때 생긴 병 탓에 아기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아기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다. 조현병이 걸린 이후엔 결국 아기 인형을 실제라고 생각했다. 1922년 조선인 ‘이수단’으로 태어나 일본군에 끌려가 ‘히토미’가 됐고 2016년 5월 중국인 ‘리펑원’으로 생을 마감한 한 여성의 이야기다. 책은 아시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21인의 목소리를 담았다. 끌려감, 감금, 성폭력, 버려짐.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온 이들의 사진이 그저 먹먹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日아사히 “일본정부, ‘군함도’ 어두운 역사 겸허히 직시하라”

    日아사히 “일본정부, ‘군함도’ 어두운 역사 겸허히 직시하라”

    일본 정부의 약속 파기에 따라 한국 정부가 메이지 시대 산업 유산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취소를 추진 중인 가운데 아사히신문이 9일 ‘세계유산대립, 부(負)의 역사 직시해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자국 정부에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아사히신문은 “5년 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에 관한 전시를 놓고 일본과 한국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며 그 원인에 대해 “태평양전쟁 당시 징용공에 대해 일본 측이 충분한 대응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는 2015년 조선인 강제노역 시설 7곳을 포함한 23개 장소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한 것과 관련해 이를 소개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도쿄도 신주쿠구)를 지어 지난달 15일부터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당초 약속했던 것과 달리 군함도 등에서 있었던 착취와 억압 등 실상은 숨긴 채 강제노역이 없었다는 일부 증언을 부각시키는 등 외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 취소를 포함한 대응을 요구하는 서신을 유네스코에 보냈다. 아사히는 문화유산 등재 당시 일본 정부는 ‘(군함도 등에서의) 희생자를 기억으로 남기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으나 하시마에서 한반도 출신자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는 증언 등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 내용이 한국의 반발을 사고 있다고 전했다. 사설은 “한반도 출신자의 노무 동원에 폭력이 수반되는 경우가 있었다거나 가혹한 노동을 강요한 것은 당시 (일본) 정부의 공문서 등에서 드러났고, 일본 내 재판에서도 피해 사실이 인정됐다”며 “그런 사실도 충분히 설명하면서 당시 일본 국가정책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올바른 전시의 형태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사히는 “어느 나라든 그동안 걸어온 길에 빛과 그림자가 있고, 이웃나라와의 관계도 복잡하기 마련”이라며 “좋고나쁨에 상관없이 역사적 사실에 겸허하게 마주하며 미래를 생각하는 책임이 있는 것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사히는 “메이지 이후의 일본은 많은 노력과 희생 위에 눈부신 공업화를 이뤘다”면서 그러나 “어두운 측면으로부터 눈을 돌린다면 유산은 빛이 바랠 것”이라고 사설을 맺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씨줄날줄] 日 극우 약진

    [씨줄날줄] 日 극우 약진

    지난 5일 일본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고이케 유리코(67) 지사가 59.7%의 득표율로 압승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압도적 우세 속에 고이케 지사는 가두유세 없이 온라인 선거운동만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현역 지사의 강점을 살려 매일 코로나 상황을 TV 브리핑한 게 유일한 선거운동이었다. 큰 실수 없이 코로나를 극복하고 있는 지사를 도쿄도민들이 갈아치울 이유는 없었다. 고이케의 이집트 카이로대학 졸업증서가 가짜라고 의혹을 제기한 베스트셀러 ‘여제(女帝) 고이케 유리코’라는 논픽션이 막판 변수였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선거 결과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따라서 관심은 등외 후보의 부침에 쏠렸다. 그중에서도 무려 17만 8785표를 획득해 5위를 한 극우 중의 극우 ‘일본제1당’의 당수인 사쿠라이 마코토(48)의 약진은 적지 않은 일본인에게 충격을 줬다. 2016년 도쿄도지사 선거에도 출마했던 사쿠라이는 당시 11만 4000표를 얻는 데 그쳤다. 이번에 무려 6만표 이상 득표를 늘려 호사가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사쿠라이는 혐한의 기수다. 2006년 재일한국·조선인의 특별영주권 폐지 등을 요구하는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을 만들었다. 각지에서 혐한 시위를 주도하고 차별을 조장해 왔다. 이번 선거에서도 코로나19를 ‘우한 폐렴’, 중국인을 비하하는 의미의 ‘시나인’, 중국 정부를 ‘중공’이라 부르며 중국인 관광객 입국 거부나 배척을 호소했다. 극단적인 주장에 동조한 일본인들이 늘어난 것은 일본 침체에 따른 우경화 추세가 강화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극우 분열에 의한 일시적 현상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평론가 후루야 쓰네히라는 “도쿄에서 극우 세력이 증가했다기보다 극우 내분으로 한층 과격한 사쿠라이에게 잠시 표가 몰린 것”이라고 해석했다. 초극우의 확장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의견은 시즈오카 현립대학의 오쿠조노 히데키 교수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불만이 쌓여 있는 상황에서 도시부에서 일시적으로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득표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초극우의 약진 속에 야당의 지리멸렬도 눈에 띄었다. 야당 단일 후보를 내지 못하고 완패하자 지지율 하락으로 고민하는 아베 신조 총리 측이 ‘때는 지금’이라며 중의원을 해산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선거를 치러 연립정권이 지금의 의석만 확보해도 아베 총리의 재신임이 이뤄진다. 내년 9월에 끝나는 자민당 총재 임기를 다시 연장하는 시나리오가 가동될 수도 있다. 혐한 극우의 기세등등과 아베의 임기 연장 가능성 그 어느 것도 달갑지 않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日, 코로나 사태 편승한 ‘자숙경찰’ 활개… 되살아난 국가주의

    日, 코로나 사태 편승한 ‘자숙경찰’ 활개… 되살아난 국가주의

    지난 4월 코로나19 긴급사태 발령 이후 일본에서는 ‘자숙경찰’이라는 이름의 민간 자경단이 정부·자치단체의 방역수칙에 따르지 않는 사람과 업소들을 찾아다니며 경고와 위협 등 사적 통제를 가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법적 근거에 따라 경찰 등 공권력이 외출과 이동의 통제에 나섰던 미국, 유럽 등과 달리 아무런 권한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남에게 강요하며 곳곳에서 살풍경을 연출해 냈다. 아베 신조 총리 집권 이후 뚜렷해진 보수우경화 흐름과 맞물려 과거 국가주의를 연상시키는 자숙경찰의 횡포는 가뜩이나 가라앉은 일본 사회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전쟁을 겪었던 세대 가운데 일부는 어릴 적 ‘국민정신총동원’과 ‘국민의용대’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지금 일본에는 초유의 바이러스 위기에 편승해 등장한 과거의 망령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람이 늘어 가고 있다. #1. ‘빨리 가게 문 닫고 긴급사태 종료 때까지 집에서 얌전히 잠이나 주무세요. 다음에 또 (영업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면 경찰에 신고합니다.’ 지난 5월 13일 저녁 일본 오사카시 주오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고이즈미 유히(34)는 이런 종이가 가게 입구 유리문에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겁을 했다. 고이즈미는 아베 총리가 4월 7일 코로나19 긴급사태를 선언했을 때에는 바로 휴업에 들어갔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려고 월말에 영업을 재개했다. 그랬더니 자숙경찰의 협박장이 날아온 것이다. 고이즈미는 “미용실은 당국이 지정한 휴업 대상 업종이 아닌데도 이런 일을 당했다”며 “자기만의 도덕률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2. 기후현에 사는 30대 여성 A씨는 슈퍼마켓에서 식료품을 사서 자기 차에 싣고 가다가 봉변을 당했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낯선 남자가 다가와 창문을 두드렸다. 창을 열자 그는 “아이치현에서 온 차량이네. 이렇게 (우리 지역으로) 놀러 오면 안 돼”라고 윽박질렀다. 자숙경찰이었다. A씨는 그에게 “아이치현에 살다가 2년 전 기후현으로 이사하면서 차 번호판을 바꾸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남자는 “그럼 번호판을 빨리 바꿔라.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했다. A씨는 “그날 집으로 가면서 창문에 돌이라도 날아오는 건 아닐까 싶어 벌벌 떨면서 운전했다”고 말했다. #3. 일본에서 가장 큰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차이나타운의 여러 음식점에 지난 3월 중국인을 비방하는 우편물이 일제히 발송됐다. 발신자가 없는 봉투에는 빨간 글씨로 ‘중국인은 쓰레기다! 세균이다! 악마다! 빨리 일본을 떠나라!’라고 적힌 A4 용지가 들어 있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코로나19 감염자가 한 명도 안 나온 상태였다. 상점가 관계자는 “생명의 위협에 대한 공포가 일부 일본인들의 밑바탕에 있는 차별적 감정을 끌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긴급사태 발령이 이어지는 동안 자숙경찰들이 곳곳에서 행사한 ‘거짓 공권력’과 ‘거짓 정의’,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는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공권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수십만, 수백만명의 코로나19 대량 감염을 막을 수 있었다며 ‘일본식 모델’을 자화자찬하는 목소리가 일본 내에서 나오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강제’가 아닌 ‘자제’, ‘명령’이 아닌 ‘요청’, ‘지시’가 아닌 ‘부탁’에 의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차이나타운 중국인 비방 우편물 발송도 다노 다이스케 고난대 교수(역사사회학)는 “권위에 대한 복종과 이단에 대한 배척을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 구조야말로 파시즘의 특징이라는 점에서 자숙경찰의 행동은 파시즘과 근본적으로 맥이 닿아 있다”고 아사히신문에 말했다. 고자이 도요코 불교대 교수(의학사)는 “정치가와 언론이 코로나19 감염방지 대책을 ‘바이러스와의 싸움’ 등 전쟁에 빗대면서 싸워야 할 상대도 싸울 방법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의 적개심을 높였고, 이것이 지나친 상호 감시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고 진단했다.전체를 따라야 한다는 강박증이 커지면서 정부 방침을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이는 사례도 나타났다. 지난 5월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의 시립중학교는 정부가 가구당 2장씩 배포한 이른바 ‘아베노마스크’의 착용을 학생들에게 사실상 강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학교 측은 등교 준비물 알림장에서 ‘아베노마스크 착용 확인’, ‘아베노마스크를 잊은 학생은 별도의 교실에 남는다’고 통보했다. 국가 정책인 만큼 좋든 싫든 무조건 따르라는 의미였다. 아베노마스크를 다른 곳에 기부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설치됐던 수집함이 ‘당초 마스크 배포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곳곳에서 철거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피해는 경제적 약자와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집중됐다. 도쿄의 최대 환락가 중 한 곳인 신주쿠 가부키초는 코로나19 확산 취약 지역으로 지목돼 집중적인 감시 대상이 됐지만, 고급 음식점들은 영업을 해도 멀쩡했고 규모가 작은 음식점, 주점들이 자숙경찰의 타깃이 됐다. ●“정치가와 언론이 사람들 적개심 높여” 재일 한국인 등 외국인에 대한 차별도 두드러졌다. 사이타마현에 있는 조선초중급학교·유치부에는 지난 3월 이후 한동안 “여기가 싫으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앞으로 가만두지 않겠다” 등 협박성 전화와 이메일이 빗발쳤다. 사이타마시가 관내 유치원과 보육원 등 어린이 관련 시설에 비축해 두었던 마스크를 나눠 주면서 조선학교는 제외한 것이 계기가 됐다. 조선학교 측이 “마스크 지급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 행위”라며 항의하자 일부 일본인들이 헤이트 스피치로 반격했다. 당시 사이타마시의 한 공무원은 “조선인에게 마스크를 주면 다른 곳에 팔아먹을지도 모른다”는 모욕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는 당국의 대응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오사카부 등 일부 자치단체들이 휴업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친코점들의 명단을 공개한 게 대표적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곳이니 사적인 제재를 당해도 싸다”고 당국이 공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TV프로그램에 나온 유명인사들은 거친 언사로 파친코점들을 비난하며 ‘공공의 적’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는 “자숙경찰이라는 현상이 이번에 비로소 처음 나타난 게 아니라 일본 사회에 잠재해 있던 소수자 차별 등 추악한 부분이 코로나19 위기를 통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마이니치신문에 말했다.●日사회 잠재해 있던 소수자 차별 수면 위로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논픽션 작가 가토 나오키는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들이 어떤 대상을 찍어서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상태로 변하는 것은 일본 역사에서 자주 나타난 현상이었다”며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이와테현 이시노마키시에서 “중국인들이 강도짓을 한다” 등 유언비어가 돌자 실제 도쿄에서 현지로 무기를 들고 달려간 우익단체의 사례를 들었다. 자숙경찰이 만들어 낸 현상이 과거 전시 체제의 ‘국민정신총동원’ 시절을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정신총동원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본 정부가 국민들에게 ‘국가를 지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국민정신’을 요구하며 시작한 국가주의 캠페인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사치는 적이다’, ‘석유 한 방울은 피 한 방울’ 등 구호를 내걸고 국민들에게 ‘멸사봉공’을 강요했다. 저명한 원로목사 다이라 오사무는 “전체와 다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엄하게 다그치는 현재의 분위기에서 국민정신총동원의 기치 아래 영혼의 자유 없이 무조건 국가에 따를 것만을 강요받았던 전쟁 때 기억이 떠오른다”며 “가치관이나 입장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혐한시위’ 후보, 도쿄지사 선거서 4년 전보다 6만표 더 얻어

    ‘혐한시위’ 후보, 도쿄지사 선거서 4년 전보다 6만표 더 얻어

    지난 5일 실시됐던 일본 도쿄도 지사 선거에서 혐한(한국 혐오) 시위를 조직해 왔던 극우 후보가 4년 전 선거 때보다 6만표 넘게 득표 수를 끌어올렸다. 6일 도쿄도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사쿠라이 마코토 전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 회장은 전날 실시된 도쿄지사 선거에서 17만 8784표(득표율 2.92%)를 얻어 5위에 올랐다. 사쿠라이는 2016년 7월 치러진 도쿄지사 선거에서는 11만 4171표(득표율 1.74%, 5위)를 받은 바 있다. 4년 만에 치러진 이번 선거에서 6만 4613표를 더 얻은 것이다. 순위는 그대로였지만 득표율도 약 1.2%포인트 끌어올렸다. 그는 재일한국·조선인의 특별영주권 폐지 등을 요구하며 2006년 극우단체 재특회를 설립한 인물이다. 재특회를 동원해 혐한 시위를 주도하는 등 일본에서 반한 감정을 부추기고 차별을 조장해 비판을 받아 왔다. 전문가들은 사쿠라이의 득표 상승이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외국인에 대한 차별 의식과 배타적 분위기가 강해진 것으로 표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혐한 시위 문제를 오랫동안 추적해 온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씨는 사쿠라이가 17만표 넘게 획득한 것에 대해 “이 정도로 표를 모을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일본 사회의 배타적인 분위기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야스다씨는 코로나19 확산 속에서 조선학교 마스크 지급 차별 논란과 ‘재일한국인·조선인에게는 코로나19 지원금을 주지 말라’는 등의 주장이 나왔던 사례를 언급하며 “우익 후보에 대한 위기감이 부족했다. 자유주의 진영에도 책임이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으로는 이번 선거에서 사쿠라이 후보가 코로나19를 ‘우한폐렴’이라고 하는 등 중국인에 대한 차별 의식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예전처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점도 거론하며 “배타성을 감춘 것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도 분석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구보씨의 경성 한바퀴… 소외된 인생들의 도회 항구속으로

    구보씨의 경성 한바퀴… 소외된 인생들의 도회 항구속으로

    소설가 박태원(호 구보, 1909~1986)은 1934년 8~9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했다. 26세의 주인공 구보가 하루 동안 경성 중심부 곳곳을 배회하며 보고 겪은 일들을 묘사한 중편 소설이다. 작가가 곧 작품 속 주인공이 되어 일제강점기 서울의 모습, 그리고 식민지 지식인의 감성을 그린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의 절친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은 ‘하융’이란 필명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박태원의 1934년 여름, 경성 주인공 구보는 경성의 명문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을 갔다 귀국했으나 일정한 직업 없이 도시를 떠도는 룸펜 지식인이다. 유학 시절 실연의 아픔을 간직한 채, 귀국 후 아직 미혼으로 모친의 속을 썩이는 노총각이다. -당시 혼인 연령은 남자 평균 21세, 여자 17세였다. 구보의 집은 다옥정(현 중구 다동)에 있었으며, 어느 여름날 약속도 목적지도 없이 오전에 집을 나서 한밤중 귀가로 소설은 끝난다. 그 사이에 구보가 쏘다닌 경성부 내 주요 지점들을 당시 이름으로 열거해 본다. 화신상회 네거리, 경성운동장, 조선은행, 경성부청, 덕수궁 대한문, 경성역, 조선호텔, 황금정 등. 이 가운데 대한문은 위치가 변한 채로,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경성부청(서울시청 서울도서관), 경성역(옛 서울역사) 건물이 남아 소설을 기억시킨다.1930년대 서울은 거대 근대도시로 변화 중이었다. 1920년대 30만명이었던 인구가 1935년 65만명으로 늘어 일본에서도 7번째 규모가 되었다.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청사를, 덕수궁 앞에 경성부청사를 지어 식민도시의 통치 중심을 만들었다.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과 조선저축은행 본점(옛 제일은행 본점)이 1935년에 완공되니, 구보는 그 공사 중인 현장을 보았을 것이다. 구보가 즐겨 탔던 전차는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 도입했으며 총 13개 노선을 운행했다. 1934년 시내에 전화 180개선을 증설하는데 1300여명이 신청했다는 통계도 있다. 일본인 인구가 28%로 일본 자본의 진출이 급속히 늘었는데 주로 소비 유흥시설에 집중되었다.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관)과 조지야백화점(현 롯데영플라자 터) 등 5대 백화점이 식민지 수도의 소비를 부추겼다. 일본인들은 청계천 남쪽에 거주지를 꾸렸는데 다방 카페 요정 등 유흥시설도 조선인은 북쪽, 일본인은 남쪽을 장악하게 되었다. 김두한의 전설과 같이, 종로파 조선 건달들이 혼마치(本町, 현 명동)의 일본 야쿠자들과 대립했던 지리적 사정이었다. 화신백화점의 유통왕 박흥식, 전국 금광을 개발한 광산왕 최창학, 그리고 도시형 한옥 붐을 일으킨 건축왕 정세권 등 조선인 자본가도 등장했다. 유례없는 경제적 호황의 시대였다. 그러나 구보에게 경성은 소비 지향적이고 저급한 유흥에 휩싸인 속물의 도시였다. 안주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는 고독과 상실의 도시였다. 왜 그런지 박태원도 몰랐을 것이다. 1930년대 초 경성의 번영이란 지극히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세계 경제대공황을 겪은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등 침략전쟁으로 경제부흥을 꾀했다. 일시적 호황에 중독되어 1937년 중일전쟁을,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소설 발표 불과 3년 후 연재했던 신문은 강제 폐간되었고 일제는 전시 체제에 돌입한다. 구보가 어렴풋하게 감지한 이유 모를 불안의 실체였다.●구보가 예외적으로 오래 머문 경성역 3등대합실 구보는 중요 건축물들의 외관만 바라보며 스쳐 지나갔다. 그의 관심은 건축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고현학(考現學, 현재를 다루는 고고학)적 풍경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읽고 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작업이다. 예외적으로 경성역 내부에 들어가 오랜 시간 머무르게 된다. 이곳의 3등대합실은 익명의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다. “경성역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와 친하여야 한다.” 1899년 최초로 개통된 경인선 철도는 노량진과 인천 구간이었다. 이듬해 서대문역까지 연장하면서 남대문 간이역을 세우는데, 바로 경성역의 전신이다. 현재의 구 서울역사는 1925년에 완공된다. 그 크기와 완성도가 동양 1,2위를 다투었다 할 정도로 수준 높은 건축물이다. 대륙 침략의 야심을 품은 일제는 극동 지역 철도망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성역은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의 기착점으로 각기 일본, 중국, 러시아로 통하는 중심 기지였다.도쿄대 교수인 쓰카모토 야스시가 설계자로 알려졌는데, 일본 건축계의 대부 다쓰노 긴고의 수제자였다. 긴고는 도쿄역사를 설계했고 이미 서울에 조선은행 본점(1912)을 설계한 실력자였다. 경성역의 전체 구성은 르네상스식이지만 중앙 돔은 비잔틴식, 양 옆 삼각형 박공벽은 신고전주의풍이다. 또한 붉은 벽돌(타일)과 화강암을 섞은 외벽 장식은 이미 암스테르담역과 도쿄역에서 사용했던 형식이다. 굳이 말하자면 여러 양식을 혼합한 절충식이라 할 수 있다. 인상적인 요소는 중앙 정문 위에 설치된 아치 창이다. 큰 반원 아치를 두 개의 기둥으로 나눈 디오크레티안 창이라 하는데, 고전주의 건축의 대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즐겨 써서 팔라디오 아치라고도 부른다. 경성역사의 건축적 모델은 스위스 루체른의 옛 역사(1896)라고 한다. 지난 세기에 불타 없어지고 정면의 팔라디안 아치만 남았지만, 경성역과 쌍둥이로 불릴 정도로 유사했다. 내부 공간은 제국의 계급질서에 따라 구성했다. 크고 높은 중앙홀이 있고, 좌우로 3등대합실과 1,2등대합실이 나뉘어 자리했다. 1,2등대합실 옆에는 여성 고객을 위한 부인대합실, 그리고 귀빈대기실이 있었다. 이 구역들은 출입이 통제되고 역장이 직접 접대하게 배치되었다. 반면 3등대합실은 중앙홀뿐 아니라 외부 광장에서도 자유롭게 드나들게 개방되었다. 구보 역시 광장에서 바로 들어와 대기 중인 익명의 승객들을 읽어냈다. 그러다 동창을 만나 장소를 이동해 차를 마신다. 1,2등대합실 안에 있던 티룸으로 추측되는데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이다. 2층에는 조선 최초의 대형양식당이라는 ‘더 그릴’이 있었다. 40여명의 국내외 셰프와 웨이터가 은그릇에 ‘경양식’을 담아 서빙했던 이 식당은 근대 경성, 국제 경성의 상징공간이 되었다.●식민지 도시와 타자의 건축 현존하는 조선은행 본점은 르네상스식 몸체에 바로크 돔을 얹은 견고한 건축이다. 골조는 철골과 콘크리트 구조이며 외벽에 육중한 화강석을 붙여 발권은행의 권위를 과시했다. 좌우 대칭의 완벽한 비례, 5개의 탑이 만드는 장대함, 고대 신전용 기둥 등은 식민지 경제 통치의 만신전을 만들기에 충분한 요소들이다. 여기서 현재의 소공로를 지나면 곧 경성부청사를 만나게 된다. 조선총독부 건축과에서 설계 공사한 건물로 르네상스식 구성에 장식이 없는 근대적 외벽을 가진 건물이다. 부청사 앞에는 교통광장(로터리)을 만들었고, 그 옆에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이 있었다. 구보는 소설에서 경성부청사를 ‘정력가형 육체를 가진 위압적인 장년’으로, 덕수궁은 ‘자신을 외면하는 영락한 옛 동창’으로 은유했다.구보가 접한 경성의 근대건축들은 하나같이 서구 고전주의 양식이다. 세부적 형태가 르네상스식이던 바로크식이던 그리스식이던 크게 보면 그렇다. 대칭과 비례, 법칙과 질서를 강조했던 건축양식이다. 19세기 유럽을 풍미하고 서구 열강의 제국화를 통해 전 세계에 유포된 제국주의 양식이다. 후발 제국주의 일본은 구라파 따라잡기의 끝판으로 고전주의 건축들을 식민지 수도 곳곳에 세웠다. 사라진 조선총독부가 대표적인 건축이다. 경성의 근대화란 고전주의화, 제국주의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조선적 전통이란 덕수궁에 대한 묘사대로 “빈약한 너무나 빈약한” 것이었다. 현 한국관광공사 사옥 자리에 있던 박태원의 생가는 중문과 대문이 있는 전통 한옥이었다. 대문을 나서 청계천을 지나면 곧 화신백화점 등 일본풍 유럽풍 건축이 즐비한 시가지다. 조선적인 것은 과거고 일본적인 유럽풍은 현재였다. 상반된 시공간이 공존하는 경성은 구보를 유혹하는 동시에 소외시켰다. 일제 강점시대에 저항(독립투쟁)과 순응(친일매판)의 삶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다수 조선인들은 소시민적 욕망과 소외의 회색지대에서 살았다. 구보는 그런 분열된 삶 속에서 타자화된 도시와 건축을 떠돌았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고이케 도쿄도지사 연임… 우클릭 세진다

    고이케 도쿄도지사 연임… 우클릭 세진다

    고이케 유리코(68) 일본 도쿄도지사가 인구 1400만명의 거대 도시를 앞으로 4년간 더 이끌어 가게 됐다. 일본 수도 행정의 보수우경화 색채가 한층 더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고이케 지사는 5일 치러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지난 4년간의 도쿄 대개혁이 높이 평가받았다. 앞으로 코로나19의 2차 확산 방지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번 선거에는 역대 가장 많은 22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나 고이케 지사의 적수는 없었다. 연립여당인 자민당·공명당은 직접 후보를 내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고이케 지사를 지원했다. 고이케 지사에게 맞설 만한 후보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력(이집트 카이로대 졸업) 위조 의혹의 구체적인 내용과 사람 됨됨이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여러 사례가 폭로됐으나 대세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방송 앵커 등을 거쳐 1992년 일본신당 소속으로 정계에 발을 들인 그는 여러 번의 당적 변경을 거쳐 자민당에 입당, 2007년 첫 여성 방위상을 지냈다. 2016년 아베 신조 총리와의 불화 끝에 자민당을 탈당해 치른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처음 당선됐다. 코로나19 위기 국면은 고이케 지사에게 순풍이 됐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던 중앙정부의 아베 총리보다 더 능숙하게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평가를 유권자들로부터 받았다. 재선 성공에 따라 과거사 부정 등 그의 우경화 행보는 한층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최대 우익단체 ‘일본회의’ 소속인 그는 위안부 강제 연행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도 참배하는 인물이다. 그는 역대 모든 지사가 해 왔던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도식에 대한 추도문 전달을 2017년부터 중단했다. 이에 더해 올해에는 9월 1일 추도식 행사 자체를 무산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7년 중의원 선거 때에는 ‘희망의 당’이라는 이름의 신당을 창당하면서 입당 희망자에게 ‘외국인 참정권 부여에 반대한다’는 협정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사설] 한반도 긴장상태 풀 북미 대화 성사돼야

    문재인 대통령이 그제 유럽연합(EU)의 샤를 미셸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과의 화상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대선 이전에 북미 간이 다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데 한국은 전력을 다할 계획”이라면서 “나는 인내심을 갖고 남북미 간 대화 모멘텀 유지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도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 문 대통령은 북미 대화 재개의 촉진자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힌 셈이다. 미 행정부가 11월 대선을 4개월밖에 남겨 두지 않은 상황에서 외교 이벤트를 열기가 쉽지 않다는 게 외교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는 등 재선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선거에 도움이 된다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제3차 북미 정상회담을 시도할 가능성도 여전히 있어 보인다. 우리로서는 미국 정권 교체기에 한반도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북미 간 정상회담이 성사됐으면 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12월 28일부터 31일까지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제 세상은 곧 멀지 않아 조선인민공화국이 보유하게 될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신년사로 발표됐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북한이 노동당 창건일인 10월 10일쯤 3000t급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공개해 미 대선까지 미국과 남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때마침 대북 실무협상을 총괄하는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 특별대표가 이르면 7일 방한한다. 한국 정부의 중개로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를 북한에 전달할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북미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며 북한이 도발을 피하고 협상에 복귀할 것을 촉구했다. 비건 대표의 방한을 계기로 북한은 한반도 상황을 악화하는 행동을 자제하고, 미국은 유엔 경제제재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과 남북한 경제 교류를 촉진시키는 방안을 내놓는 등 북미 대화가 진전됐으면 한다.
  • 이용수 ‘반일종족주의’ 집필진·류석춘 교수 고소

    이용수 ‘반일종족주의’ 집필진·류석춘 교수 고소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징용 피해자와 그 유족 등 11명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포함한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 집필진과 최근 일본 우익잡지에 기고문을 실은 류석춘 연세대 교수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하기로 했다. 소송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도 참여한다. 이들은 2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영훈 등 집필진은 일본군 위안부는 매춘부, 강제징용은 조선인의 입신양명 기회라는 주장을 담은 ‘반일종족주의’ 를 출간해 일제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및 그 유가족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면서 “이를 반성하기는커녕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이라는 후속을 내놓았다”고 비판했다. 또 일본 우익잡지 ‘하나다’(hanada) 8월호에 기고문을 실은 류 교수에 대해서는 “류 교수가 기고문에서 주장한 ‘징용은 대부분 자발적이었고, 위안부는 취업 사기’라는 내용 등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연세대는 ‘발전사회학’ 강의 중 ‘위안부 망언’ 논란에 휩싸인 류 교수에 대해 이달 중 교원징계위원회를 다시 열기로 결정하고, 이런 사실을 류 교수에게 통보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하기로 했던 이 할머니는 병원 입원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 가와사키시 혐한시위 처벌 日 첫 조례, 50만엔 벌금 부과

    가와사키시 혐한시위 처벌 日 첫 조례, 50만엔 벌금 부과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가 혐한(嫌韓)시위를 처벌하는 조례를 다음달 1일부터 시행한다고 연합뉴스가 30일 보도했다. 혐한 시위를 반복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50만엔(약 56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한 ‘가와사키시 차별 없는 인권 존중 마을 만들기 조례’인데 혐한 시위를 비롯한 헤이트 스피치(혐오 연설)를 처벌하는 일본 내 첫 조례다. 일본의 다른 지방자치단체로 확산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조례는 특정 민족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거나 혐오감을 부추기는 언동이나 메시지 공표를 반복하거나 반복할 우려가 있으면 시장이 이를 중단하도록 권고할 수 있도록 했다. 길거리와 공원에서 확성기를 이용해 발언하거나 현수막과 간판을 내거는 행위, 소책자를 배포하는 행위 등을 모두 규제한다. 권고에 응하지 않으면 중단 명령을 내리고 위반하면 벌금을 물릴 수 있다. 벌금형 수위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처벌을 가능하게 한 첫 법규인 만큼 혐한 시위에 억제 효과가 이전보다 커질 것으로 재일 교포들은 기대하고 있다. 혐한 시위 중단 명령을 어기고 헤이트 스피치를 하는 개인이나 단체의 이름과 주소를 공표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조례는 또 인터넷의 혐한 콘텐츠로 인해 가와사키 거주자 등이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면 시가 확산 방지 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가와사키시는 지난 4월부터 이에 근거해 인터넷 관련 사업자에게 차별 조장 콘텐츠의 삭제를 요청하거나 게시자를 확인하기 위한 피해자의 정보 공개 청구를 지원하는 등 대응하고 있다. 조례 제정을 위해 앞장선 재일 한국인 3세 최강이자(47) 씨는 연합뉴스 인터뷰를 통해 두려움을 이기고 헤이트 스피치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재일교포들만의 힘으로는 어려웠다며 “처음에는 무서워서 달아나기도 했지만 역시 용납해선 안되는 일이었다. 많은 시민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털어놓았다. 2016년 혐한 시위 피해 구제를 요구하는 신고서를 법무성에 제출한 것을 계기로 몇년 동안 헤이트 스피치와 끈질기게 맞서 온 최씨의 노력이 열매를 맺은 셈이다. 그는 헤이트 스피치를 용서하지 않는 가와사키 시민 네트워크와 함께 활동하며 시민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최씨는 “20차례에 걸쳐 학습 모임을 열었고 매번 시민 200명 정도가 참석해 국제인권법, 표현의 자유, 타국 사례 등을 공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혐한 시위 세력 앞에서 항의하거나 혐한 시위 주도하는 인물에게 연락처를 주고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최씨는 “우리들을 향해 ‘바퀴벌레’, ‘구더기’, ‘조선인을 내쫓아내라’, ‘공기가 오염되니 공기를 들이마시지 마라’고 말했다”며 헤이트 스피치가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헤이트 스피치가 발생하는 순간, 그 때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시위 일정이 다가올 때도 고통을 느끼게 하며, 시위가 끝난 뒤에도 재발 우려 때문에 불안에 시달리게 하는 등 피해가 장기간 이어진다고 털어놓았다. 혐한 시위 규제가 ‘표현의 자유를 해친다’는 일각의 반발에 대해 최씨는 “헤이트 스피치는 생각의 차이 혹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일방적인 가해와 압도적인 피해가 있을 뿐”이라며 “‘죽어라’고 얘기하는 사람과는 논쟁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헤이트 스피치를 억제하기 위해 ‘본국(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향한 대응 추진에 관한 법’이 제정돼 2016년 6월 시행되면서 혐한 시위에 맞서는 움직임에 탄력이 붙었다. 법원이 헤이트 스피치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거나 시가 혐한 시위 단체의 공원 사용을 불허하는 등 당국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온라인으로 확산하는 헤이트 콘텐츠가 문제다. 최 는 “학습 모임 등의 이름으로 헤이트 시위를 하고 이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등 형태를 바꿔 차별을 즐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례는 인터넷의 혐한 콘텐츠에 대응하는 규정도 두고 있지만 일개 기초지방자치단체가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관련 업체와 연계해 지침을 만드는 등 국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면서 “가능한 사람이, 가능한 곳에서, 가능한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헤이트 스피치나 차별을 근절하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사설] 확대 G7에 한국 포함 반대하는 일본, 옹졸하다

    일본 정부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확대해 한국을 참여시키는 구상에 관해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고 교도통신이 어제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문재인 정권이 남북 화해를 우선시하며 친중국 성향을 보인다’고 문제 삼았으며 일시적 참석은 상관없다고 한 것이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전화 회담에서 G7에 대해 “G11이나 G12 체제로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며 한국을 참여시키고 싶다”며 공식화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G7 회원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서 반대할 것이라는 예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역사 문제를 제기할 것을 경계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올해 첫 국회 연설에서 한국에 대해 “기본적 가치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중요한 이웃”이라고 했다. ‘한국과 긴밀한 연대’라는 짧은 언급이 전부였던 지난 6년과 비교하면 관개 개선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아베 총리의 발언과 달리 최근 도쿄 총무성 제2청사 별관에 군함도(일명 하시마)의 강제 노역을 은폐하는 전시관을 개관하는 등 여전히 반성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일본은 2015년 7월 하시마 탄광 등 메이지 시대 산업시설 23곳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조선인 등의 강제 노역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정보센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확대 G7 정상회의를 대하는 아베 정부의 옹졸함은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1년이 지나도록 철폐하지 않는 행태로 이어진다. 일본은 역사 문제에 대한 자기반성은 물론 북한 미사일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한국의 중요함을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한일 관계의 신뢰는 좀처럼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 日언론 “한국의 군함도 시비는 악의적인 정치공작”...도넘은 적반하장

    日언론 “한국의 군함도 시비는 악의적인 정치공작”...도넘은 적반하장

    일본 정부의 약속 파기에 따라 한국 정부가 메이지 시대 산업 유산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취소를 추진 중인 가운데 일본 우익언론이 “악의적인 정치공작”으로 매도하며 “(한국에 대한) 지나친 배려는 (일본의) 국익을 해치는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산케이신문은 28일자 ‘군함도: 한국은 역사왜곡을 멈춰라’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한국 정부는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나가사키시 하시마 탄광의 전시 등에 대해 한반도 출신 근로자들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문제시하고 있다”며 “인도주의에 반하는 강제노동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을 반영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썼다. 일본 정부는 2015년 조선인 강제노역 시설 7곳을 포함한 23개 장소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한 것과 관련해 이를 소개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도쿄도 신주쿠구)를 지어 지난 15일부터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당초 약속했던 것과 달리 군함도 등에서 있었던 착취와 억압 등 실상은 숨긴채 강제노역이 없었다는 일부 증언을 전시하는 등 외려 역사를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 취소를 포함한 대응을 요구하는 서신을 유네스코에 보냈다. 산케이는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물과 관련해 “당시 탄광노동이 어디에서나 그랬듯이 가혹한 조건하에 이뤄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으며, 노동자 가운데는 일본인 외에 한반도 출신자가 있었다는 것도 명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유네스코에 대해 한국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주장을 강요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이미지 실추를 노린 한국의 자세는 악의적인 정치공작”이라고 했다. 산케이는 “일본 정부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것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될 때 한국 측에 양보해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만든다고 약속한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폈다. 이어 “지나친 배려는 국익을 해치는 것”이라는 말로 주장을 마무리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궤변 늘어놓는 日우익신문 “한국, 역사왜곡 멈춰…징용은 합법”

    궤변 늘어놓는 日우익신문 “한국, 역사왜곡 멈춰…징용은 합법”

    산케이 “임금 줬다…한국, 악의적 역사왜곡”ILO “일제 강점기 징용은 불법 노동” 확인산케이, ILO 판단과 정반대 주장 “정치공작”우익 성향의 일본 신문 산케이가 일제 강점기 조선인 징용 현장인 하시마(일명 ‘군함도’) 등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라는 한국의 문제 제기에 대해 “역사 왜곡”이라며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산케이는 국제노동기구(ILO)가 이미 일본의 조선인 징용에 대해 불법 노동이라고 밝혔음에도 한국이 일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 거짓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정치공작을 하고 있다는 궤변을 늘어놨다. 산케이 신문은 28일 군함도 등 세계문화유산 등재 현장에서 벌어진 조선인 징용 피해를 일본 측이 왜곡한 것에 맞서 한국 정부가 세계유산 등재 취소를 포함한 대응을 요구하는 서신을 유네스코에 보낸 것과 관련해 ‘한국은 역사 왜곡을 그만두라’는 제목으로 사설 형식의 논설을 실었다. 산케이 “가혹한 탄광 노동 조건 언급,‘한반도 출신 있었다’ 명시해 문제 없다” 산케이는 징용이 강제노동은 아니며 임금을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산케이는 한국 측의 비판은 잘못됐다면서 “국민징용령에 근거해 1944년 9월 이후 일을 한 한반도 출신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측이 말하는 것과 같은 강제노동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또 “임금 지급을 동반한 합법적인 근로 동원에 지나지 않으며 내지인(일본인을 의미)과 마찬가지로 일한 것”이라고 강변했다.이어 “세계문화유산 등록은 바쿠후(무사 정권 시절의 통치기구)나 한(에도시대의 통치기구)이 시행착오를 하면서 조선 등 산업화를 시작한 1850년대부터 산업화가 일단락한 1910년까지의 기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앞선 대전(태평양 전쟁)의 종전이 임박했을 때의 탄광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썼다. 군함도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에 관해서는 “당시 탄광 노동이 어디서든지 그러했듯이 가혹한 노동 조건에 있었다는 것은 정확하게 전시하고 있다”면서 “노동자는 내지인과 함께 한반도 출신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명시했다”며 문제가 없다는 인식을 강조했다. 산케이는 “문화재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유네스코에 대해 한국이 사실을 왜곡한 주장을 강요하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면서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이미지 실추를 노린 한국의 자세는 악의가 있는 정치 공작”이라고 해석했다. 신문은 군함도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이 쟁점이 됐을 때 한국 정부가 유네스코에 배포한 책자에 홋카이도에서 일한 일본인 노동자 사진이 한반도 출신 징용 피해자로 잘못 소개된 일이 있었다고 지적하며 한국 정부의 대응을 비난했다. 역사 문제에서 식민지 지배와 전쟁에 대한 사죄·반성과는 거리를 두고 우익 세력과 닮은 꼴 주장을 펼쳐 온 산케이의 이날 논설은 국제기구의 판단과는 동떨어진 것이며 일본 정부가 스스로 밝힌 것과도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ILO “일본이 한국에 준 ‘국가간 지불’,피해자 상처 치유하기에 충분치 않다” 예를 들어 국제노동기구(ILO)는 일제 강점기 징용이 사실상 불법 노동이라는 견해를 이미 오래전에 밝혔다. ILO가 1999년 3월 펴낸 전문가위원회 보고서에서는 일본이 2차 대전 중 한국과 중국의 노동자를 대거 동원해 자국 산업시설에서 일을 시킨 것이 ‘협약 위반’(violation of the Convention)이라고 적시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징용이 강제 노동을 규제하는 ILO의 29호 협약에 어긋난다는 판단인 셈이다. 당시 ILO는 동원된 피해자 개인의 배상을 위한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 지급한 자금 등 이른바 ‘국가 간 지불’이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군함도 등 조선인 징용 현장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한 2015년 7월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 정부 대표도 강제 노역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사토 구니 당시 주 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일본은 1940년대에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돼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로 노역했으며(forced to work),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도 징용 정책을 시행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처를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9살에 간 군함도 생존자 “몽둥이로 맞는강제 징용자 비명 잊을 수 없어” 증언 2017년 10월 70여년 전인 1939년 9살의 나이로 일본 나가사키현 군함도에 가 지옥 같던 6년의 시간을 보낸 군함자 생존자 구연철(87·부산)씨는 끔찍했던 그때를 회상하며 “몽둥이를 맞으며 고통스러워하던 강제 징용자 비명을 잊을 수가 없다”며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리기 위해 계속 증언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씨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먹고 살길이 막막해 군함도에 ‘모집 광부’로 지원해 가족과 함께 살기로 했다. 구씨는 부산에서 관부 연락선을 탄 뒤 사흘여 만에 군함도 관리사무실에서 아버지와 재회했지만 충격적인 모습에 눈물을 쏟았다고 전했다. 양복과 넥타이를 맸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일본의 전통 남성 속옷인 훈도시만 입고 온몸에 석탄 가루를 뒤집어쓴 모습만 있을 뿐이었다. 어린 소년의 눈에 비친 20대 전후의 조선인 청년들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다. 관리사무소와 식당 주변에서 이들이 수시로 몽둥이 등에 맞는 장면을 목격하고 거친 비명을 거의 매일 들으며 학교와 집을 오갔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콩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인 콩깻묵 찐 것을 밥 대신 먹었다. 구씨는 “배가 고파도 먹을 게 없어 찐 콩깻묵을 먹어야 했고 어김없이 설사가 계속됐다”고 말했다. 사는 곳은 더 비참했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은 일본인들이 사는 번듯한 주거시설의 지하에 살았다. 구씨는 “주거공간에는 통풍이 안 돼 습기가 가득했다”고 증언했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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