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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후 45년」 대북 배상/「북한­일 공동선언」의 파문

    ◎새로운 외교분쟁의 불씨로/「배상의미」 싸고 일 정계 논란/“한국과 균형 상실”… 대책 고심/중국·대만·필리핀과도 마찰 불가피 「가네마루 대표단」이 북한측에 약속하고 돌아온 「전후 45년의 손실보상」이 일본 국내외에 새로운 외교적 분쟁의 불씨로 등장하고 있다. 이와 함께 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총리가 김일성 주석 앞으로 보낸 「자민당 총재 명의」의 사죄서한도 형식상 명의만 당 총재 명의였을 뿐,그 내용은 「내각총리 대신으로서」 사죄한 것이 밝혀져 문제가 되고 있다. 28일 북한의 조선 로동당과 일본의 자민·사회 3당간에 조인된 공동선언 제1항은 이같은 사실을 명기했다. 『3당은 과거에 일본이 36년간 조선인민에 끼친 불행과 재난,전후 45년간 조선인민이 받은 손실에 대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해 충분히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보상해야 할 것이라고 인정한다. 자민당 가이후 총재는 김일성 주석에게 전달한 친서에서 일찍이 조선에 대해 일본이 끼친 불행한 과거가 존재했던 것에 언급,「그같은 불행한 과거에 대해서는 다케시타(죽하) 전 총리가 지난해 3월 국회에서 깊은 반성과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있는데,나도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그와 전적으로 동감이다」라는 것을 명백히 해 일·조 양국간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희망을 표명했다』 일본이 36년간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하고 보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공동선언에 나타난 「전후 45년의 손실」은 무엇을 뜻하는가,일본정부는 이의 해석과 대응방법을 놓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자민당 간부들과 야당 인사들도 『전후의 보상이란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며 의혹의 빛을 감추지 않는다. 공동선언에는 그 의미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북한측의 종래의 주장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의 한국일변도,적시정책이 북한과는 45년간의 소원한 공백상태를 빚었으며,그 결과 손해를 입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초 28일 상오중에 발표될 예정이었던 이 공동선언이 이날 하오 늦게 나온 경위도 바로 「전후 45년간」이란 대목 때문이었다. 공동선언문 작성은 27일 심야부터 시작돼 잠시 동안의 아침 휴식시간을제외하고 28일 하오 3시쯤까지 장장 16시간에 걸친 난항을 겪었다. 북한측의 논리는 전후 일본의 대북한정책이 적시정책이었으며,사죄와 보상은 식민지 통치시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그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측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사회당측은 동조했으나 자민당은 강력히 반발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난항을 겪자 28일 상오 김용순 로동당 서기를 비롯한 3당대표자회담에서 가네마루 신(김환신) 전 부총리가 『내 책임으로 넣겠다』고 결단을 내려 사실상 해결을 보았다. 지난 26일 하오 사회당측 단장인 다나베 마코도(전변성) 부위원장과 함께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을 마치고 나온 가네마루 전 부총리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동행의원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우리측의 제안에도 충분히 이해해주었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다나베 사회당 부위원장도 『김 주석의 발언에 따라 북한·일본 관계는 새로운 밝음을 맞았다』며 27일의 답례연에서 흥분을 억누르지 못했다. 제18후지산마루(부사산환) 문제를 인도적 견지에서 해결하고 45년간 닫혀있던 양국관계에 「바람구멍을 뚫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가네마루·다나베 양단장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직접 선원석방의 언질을 받아내고 새로운 우호관계 수립을 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북한방문단이 큰 성과를 올렸다고 판단했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국교정상화교섭 제의를 하게 한 「국제적 빅 뉴스」(자민대표단)까지 만들어냈다. 그런 의미에서는 『만점에 가까운 합격점을 받았다』고 대표단이 자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지만,이들을 맞은 북한측의 「계산」에는 미쳐 눈을 돌리지 못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김일성 스타디움에서의 10만 관객과 5만 군중에 의한 매스게임은 「김환 선생 환영」을 카드섹션으로 연출,일행을 감격시켰다.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을 위해 묘향산으로 가는 열차는 특별히 꾸며진 침대열차였다. 이러한 환대의 뒤에 「전후 45년간의 손실보상」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이 「전후 45년」 문제는 일본정부 자체에는 물론 여야 각 정당에도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자민당의 파벌회장인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 회장은 『45년간 일본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도대체 말도 안되는 소리. 논평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번 북한방문단의 성과는 전체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야당쪽에서도 반론은 심하다. 스카모토 사부로(총본삼랑) 전 민사당 위원장은 『전후 45년간도 사죄와 보상의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외교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어휘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양국이 민주적으로 선린관계를 구축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문제에 대해 일본 외무성측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북한과의 정부간 교섭을 벌여나가는 과정에서 일본정부의 입장을 주장할 때 식민지통치시대의 보상은 당연하지만 전후 45년간의 보상에는 응할 수 없다는 취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 이유를 외무성 당국자는 이렇게 들고 있다. 『북한은 일본이 적친정책을 취했다는 것을 보상의 근거로 보는 모양이지만 그런 근거는 없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북한도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해 적친정책을 취해오지 않았는가라고 반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무엇보다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대한국 관계이다. 한국에는 36년 만을 대상으로 보상했기 때문에 균형감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중국·대만·필리핀 등 아시아주변 제국에 대해서도 선례가 되며 외교적 분쟁의 소지가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북한측이 「45년간의 손실」을 정신적 손실이라고 주장한다면 다른 피해국들도 마찬가지 주장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쨌든 이번 「가네마루 방문단」은 정당차원의 관계개선을 급진시켜 정부를 곤혹하게 하고 있으며 가네마루 전 부총리가 북한에 남긴 「가네마루 수표」는 일본정부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웠다는 것이 도쿄의 시각이다.〈도쿄=강수웅 특파원〉
  • 북한ㆍ일 공동선언 전문

    ◎빠른 시일내 양국관계 정상화/국교 수립할때 식민지배 배상/재일 조선인의 법적지위 존중/통신위성 공용ㆍ직항공로 개설/핵위협 제거ㆍ아주평화 공동노력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 대표단이 24일부터 28일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총서기 김일성주석은 가네마루 신(금환신) 일본 중위원의원을 단장으로 한 자민당 대표단과 다나베 마코토(전변성) 중위원의원을 단장으로 한 사회당 대표단과 회견했다. 회견석상에서 가네마루단장과 다나베단장은 조선 노동당중앙위원회총서기 김일성주석에게 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자민당총재와 도이 다카코(토정다하자) 사회당중앙집행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방문기간중 자민ㆍ사회 양당 대표단과 조선노동당 사이에 몇차례에 걸쳐 3당 공동회담이 이뤄졌다. 3당은 자주ㆍ평화ㆍ친선의 이념에 입각,북한과 일본 양국관계를 정상화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양국국민의 이익에 합치되며 새로운 아시아 및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함을 인식,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①3당은 과거에일본이 36년간 조선인민에 끼친 불행과 재난 및 전후 45년간 조선인민이 입은 손실과 관련,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가이후 자민당총재는 김일성주석에게 전한 친서에서 조선에 대해 일본이 끼친 불행한 과거가 존재함에 대해 언급,『그같은 불행한 과거에 대해 다케시타(죽하) 전 총리가 지난해 3월 국회에서 심심한 반성과 유감의 뜻을 표명한 바 있는데 총리로서 나자신도 그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분명히 해 일본과 북한 양국관계 개선에 대한 희망을 표명했다. 자민당 대표단장인 가네마루의원도 조선인민에 대한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사죄의 뜻을 표명했다. 3당 대표단은 일본정부가 국교관계를 수립하는 것과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에 끼친 손해에 대해 충분히 배상할 것을 인정한다. ②3당은 일본과 북한 양국간에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해소하고 가능한한 빠른 시일내에 국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③3당은 일본과 북한 양국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정치ㆍ경제ㆍ문화 등 각 분야에서 교류를 발전시키며 우선 통신위성의 이용과 양국간에 직행항로를 개설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④3당은 재일 조선인이 차별받지 않고 그 인권과 민족적 제권리 및 법적지위가 존중돼야 하며 일본정부는 이를 법적으로 보증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3당은 또 일본당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일본여권에 기재한 사항을 삭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⑤3당은 조선은 하나이며 북과 남이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 조선인민의 민족적 이익에 합치됨을 인정한다. ⑥3당은 평화롭고 자유로운 아시아를 건설하기 위해 공동노력하며 앞으로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서 핵의 위협을 없애는 것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⑦3당은 일본과 북한 양국간의 국교수립을 실현하고 현안인 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간 교섭이 올해 11월중에 개시되도록 정부에 강력하게 촉구하기로 합의했다. ⑧3당은 양국 국민의 염원과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이익을 위해 자민당과 조선노동당,사회당과 조선노동당간의 관계를 강화하고 상호협력을 한층 더 발전시킨다는 데 합의했다.
  • 북한·일,수교협상 11월부터/8개항 공동선언 발표

    ◎억류선원 석방각서 교환/일,한국에 자민당특사 파견키로 【도쿄=강수웅 특파원】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일본의 자민·사회 양당 대표단은 28일 하오 북한과 일본 양국간 국교수립의 실현과 현안인 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간 교섭이 오는 11월중에 개시될 수 있도록 정부에 강력히 작용하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전문 및 합의사항 8개 조문으로 구성된 공동선언을 조인,이날 하오 발표했다. 이 공동선언은 『노동당 및 자민·사회 3당이 자주·평화·친선의 이념에 따라 북한·일본 양국관계를 정상화,발전시키는 것이 양국국민의 이익에 합치하며 새로운 아시아 및 세계평화와 번영에 기여한다』고 전제하고 일본측의 사죄와 보상 문제,국교수립,통신위성의 이용과 직행항로 개설,재일 조선인의 권리 및 법적 지위 존중,일본 여권상의 북한제한 조항삭제 문제 등에 합의했다고 밝혔다.〈관련기사 3·4·5면〉 또 『조선은 하나이며,북과 남이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통일을 달성하는 것이 조선인민의 민족적 이익에 합치한다』고 강조했다. 이날의 「공동선언」은 당초 「공동성명」으로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북한측의 대일접근 자세를 한층 강조하기 위해 「선언」으로 바뀌었다. 제18 후지산마루(부사산환)호의 선장 등 2명을 오는 10월중 석방한다는 각서도 공동성명의 부속문서로서 교환됐다. 이들은 오는 10월10일 조선 노동당 창당 45주년 기념일을 전후해 석방될 것으로 전해졌다. 공동선언은 당초 이날 상오중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보상 문제에 쌍방의 의견이 엇갈려 하오 5시 넘어 발표됐다. 보상에 관해 공동선언은 일제 36년간의 불행과 재난에 대해서는 물론,「전후 45년간 조선인민이 받은 손해」에 대해서도 국교수립시 보상해야 된다고 선언 주목을 끌고 있다. 이날 선언에 연락사무소의 설치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로써 전후 45년간 외교적 공백을 거쳤던 북한과 일본은 일거에 접근,한국은 물론 한반도에 영향력을 갖는 미·소·중국 등 주변 제국에 새로운 파문을 던져주고 있다. 이같은 상황속에 일본의 집권 자민당의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랑) 간사장도 오는 11월의 국교정상화 교섭에 앞서10월10일 북한 노동당 창당 45주년 기념식에 참석키 위해 북한을 방문키로 이날 결정했다. 또 일본정부와 자민당은 국교정상화를 둘러싼 북한·일본간의 움직임에 강한 경계감을 갖고 있는 한국에 자민당의 가토 무쓰키(가등육월) 정부조사회장(안배파)을 특사로 파견키로 했다. 지난 24일부터 북한을 방문한 자민·사회 양당 대표단은 김일성 주석을 비롯,조선 노동당 간부들과 일련의 회담을 갖고 새로운 우호관계 수립에 인식의 일치를 보아 거의 모든 현안을 일거에 해결하는 성과를 올렸다. 자민·사회 양당 대표단은 이날 하오 8시25분 일항(JAL)특별기편으로 평양을 출발,하오 10시40분 하네다(우전)공항에 도착,일본에 돌아왔다.
  • 「주체사상의 꿈」 깨지 못했다(평양의 변화 이렇게 본다:2)

    ◎“폐쇄의 화석” 비난 모면하려 표피적 개방 추구 지난 5월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선거와 그에 따른 권력구조의 개편을 끝내고 일련의 정세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만물지중 오직 홀로 고정불변을 유지하는 존재는 없다고 한 유물론은 누구보다도 혁명적 변화의 인위적 추구에 일생을 바쳐온 김일성이 더 확신하는 진리일 것이다. 스스로의 「주체사상」이란 이념적 환상을 버리지 않은 채 개방압력에 대역함이 없이 가능한 변화를 보이려는 것이다. 남이 보기에 김일성은 맹목적 옹고집이 아니라 봄이 오면 봄옷을 챙길 줄도 아는 위인이며 어쩌면 그 솜씨가 비범하다는 평가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과욕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지난번 서울에서의 남북한 총리회담만 하더라도 북한은 총한방 쏘지 않고 상대방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어내기를 원했다. 마치 적진에 뛰어들어 한바탕 혁명투쟁이라도 벌이자는 태세로 무례하게도 거친 주장을 마구 펴놓고 상대방의 신문방송으로 하여금 이것을 전파케 하는 이익이라도 얻으려는 듯이 작태하고 있었다. 물론 반세기의 오랜 분단사에서 총리회담은 처음있는 일이니 만큼 누군들 그 의의를 평가하는데 인색했겠는가. 그러나 따지고 보면 북한의 본질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적으로 옥중의 「동지」들을 만나야 한다고 마지막까지 버티지 않았는가. 이것은 스스로의 본질과 원리를 조금도 버리지 않은 데서 나오는 행동이다. 소위 주체사상의 제1의 특징으로 꼽는 일관성의 원칙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북한은 지금 가능한 변화의 자세를 취하면서 그것으로 본질의 불변성을 지키려고 한다. 필요하다면 왕당파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전통적 수법을 버리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그 악수를 악마와의 향연이라고 속으로는 다짐하면서도 적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 공산당이다. 내달 16일부터 19일까지 평양에서 두번째 총리회담이 열리기로 일정까지 잡혀있다. 이 대좌가 악마와의 정치적 향연이 아니라 민족적 융합을 위한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북한은 주체사상의 낡은 환상부터 그들의 생활에서 떼내버려야 한다. 북한은 평양총리회담을 통해 자기네는 결코 폐쇄의 화석이 아니라는 평가를 얻기 위해 또는 서울보다는 평양이 더 평화의 세력이라는 점수를 따기 위해 어떤 대담한 민족적 용의라도 가지고 있는 듯이 행동할는지 모른다. 예컨대 미소는 다같이 한반도 분열의 책임이 있으니 이를 함께 배격하고 남북 융합으로 통일하자는 배미배소의 선언과 민족통일전선을 촉구할는지 모른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곧 범민족의 통일전선을 유도함으로써 「역시 김일성이다」는 민족적 성가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주체사상의 일관성을 가지고 변화창출이 묘를 얻자는 것인지 모른다. 북한은 이미 김영남비망록을 통해 대소도전을 시작했다. 비망록 내용에는 『한소 수교는 전체 조선인민들,특히는 남조선 인민들의 통일의지를 막는 것으로 된다. 남조선 인민들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통일열망이 고조되고 있는 시기에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면 그것은 통일에 대한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으로 된다』고 했다. 이것은 「조선혁명의 주인은 조선인민이다」를 의식하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주장의 논리는 남한인민들의 통일열망을 위해 북한은 배소투쟁을 불사하겠으니 모든 민족적 세력은 배미투쟁으로 협동하여 새로운 범민족 통일전선을 결성하자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북한은 과연 변했는가. 굳이 변하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주체사상의 일관성」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변화를 모색하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중이라고 할 것이다. 북한은 60년대 초 모택동의 반 흐루시초프체제 투쟁에 가담하여 『소련은 일부 직장을 복구건설해준 대가로 국제시장가격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설비와 강판을 비롯한 자재를 우리에게 주고 그 대신 우리에게서 수천t의 금덩어리와 다량의 고귀한 금속과 원료를 국제시장가격보다 훨씬 헐값으로 가져갔다』고 신랄히 대들었다(64년 9월7 「로동신문」). 시기적으로 보아 이 도전은 61년 9월 김일성 일인독재체제를 등장시키고 김일성에 의한 민족통일을 노골적으로 준비하는 단계에 들어간 것과 때를 같이하는 모험적인 것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러나 김일성 일인체제 확립을 위해 소련파를 제거하고 반소노선을 택했던 60년대초의 사정과 오늘날 일련의 외압에 의한 김일성 체제의 붕괴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배소노선도 불사한다는 사정은 어쩐지 유사성이 있을 것도 같다. 만일 북한이 「범민족」의 배소노선으로 「역시 김일성이다」는 식의 들뜬 민족적 감정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그 기세를 밀고 나아가겠다는 것이 범민족적 통일전선에 의한 통일투쟁이다. 북한의 최대 약점은 이름은 비록 인민공화국이지만 실제로는 전제적 군주국가라는 데 있다. 북한을 개방하라는 객관적 요청의 압력은 김일성을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김일성 스스로도 폐쇄의 한계를 느끼고 인민에게 가능한 양보를 보이면서 통치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북한의 사회문화 전반을 세심히 주목하는 사람들은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조국을 배반하지 말라」는 투의 경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체제수호의 정치사상교양사업에 열중하고 있는 광경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전개될 일련의 객관적 정세가 자기네에게 불리할 것을 내다보고 취하는 대책이다. 71년 11월 자유중국이 유엔회원국에서 추방되고 그 자리를 중공이 차지하게 될 것을 내다본 장개석총통은 「처변불경,장경자강」을 국민앞에 호소했다. 어떤 경우에도 놀라지 말고 남의 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든든해지라는 것이다. 김일성은 이점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남북 스포츠교류와 대화를 거듭하면서 민족융합의 길이 트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 아니라 북한이 대일ㆍ대미 접근으로 고립을 풀고 정상적인 국제생활에 나서는 것을 환영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폐쇄와 고립으로 몰아넣는 「주체사상」의 이념적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을 권고하는 바이다.
  • 북한국적 교포3세/일,영주권 부여 검토

    【도쿄 연합】 일본정부는 대 북한 관계개선책의 일환으로 한국적이아닌 재일 조선인들에게도 3세 영주권을 인정하는등 재일 한국인과 같은 법적지위를 부여키로 했다고 아사히(조일)신문이 24일 밝혔다. 이 신문은 자민ㆍ사회 양당 대표단의 북한방문과 때를 맞춰 법무성이 연내 관계법을 고친다는 방침 아래 곧 구체적인 검토작업에 착수할 예정이라면서 개정법은 지난 4월 한국측과 합의한 재일 한국인 법적지위 개선방안을 토대로 협정 3세 이하에 대해 영주권보장,지문날인 폐지,중대사범에 한한 강제퇴거조치 등을 상당부분 적용하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 “한­소 수교는 한반도통일 역행”/대소 항의 「김영남비망록」 내용

    ◎“북한­소 동맹조약 유명무실화” 경고/“소련제 무기 수입 중단” 거센 반발도 북한은 지난 2일 김영남­셰바르드나제 소 외무장관회담때 한­소 수교가 「두개 한국」의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통일역행 행위이며 지난 61년 7월 체결된 북­소 동맹조약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되게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항의한 것으로 정무원 기관지 민주조선 19일 자가 보도했다. 내외통신에 따르면 이 신문은 김영남­셰바르드나제간 회담에서 한­소 수교문제와 관련해 논의된 내용을 공개하면서 이 자리에서 김영남은 한­소 수교가 ▲한반도 분단현실을 인정하며 ▲소련이 북한과 첫 외교관계를 수립한 국가이고 한반도 분열에 책임있는 나라로서 한반도에 「두개 한국」이 존재함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한국의 북방정책을 실현시켜 북한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소련과 한­미간의 「3각 결탁관계」를 형성하며 ▲북­소 동맹조약을 유명무실화 할 뿐 아니라 ▲한국민들의 통일의지를 막는다는 점을 들어 강력히 항의한 것으로 전했다. 김영남은 특히 한­소 수교시 소­북한간 동맹조약에 의거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온 무기를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강조,소련으로부터의 무기수입 중단을 경고한 것으로 이 신문은 덧붙였다. 북한은 김영남의 이같은 항의내용을 비망록으로 작성,회담이 끝난 후에 소련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조선지는 소련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아 최근호(12일자)가 한소 수교는 『한소 양국 뿐 아니라 북한에도 이로운 일이며 소련은 자주국가 이므로 북한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힌데 언급,이는 『소련이 두개 조선 조작책동에 말려드는 것』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다른 지역 동맹국의 이익마저 침입하면서 일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김영남이 셰바르드나제에게 전달한 6개 항목의 비망록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실로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면 조선의 분열된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조선반도에서의 긴장상태와 북남사이의 불신과 오해의 근원은분열상태 그 자체에 있다. 따라서 조선의 분열을 조장시키는 것은 통일의 전제조건으로 되는 평화와 긴장완화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대결과 긴장격화를 초래하게 된다. 둘째로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가지는 것은 다른 나라들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가지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함께 조선을 분열시킨데 책임있는 나라이다. 또한 소련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었을때 맨 처음으로 우리 공화국을 조선 민족의 유일한 합법적 국가로 인정한 나라이다. 그러한 소련이 이제와서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은 조선에 「두개 조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분열주의,명실공히 통일에 역행하는 행동으로 된다. 셋째로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남조선 당국자들의 북방정책을 실현시켜주는 것으로 된다. 북방정책의 본질은 남조선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우리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킬 뿐 아니라 미국의 전략대로 「교차승인」을 실현하여 조선을 영원히 두개 조선으론 분열시키려는 것이다. 소련이 이것을 모를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는 데로까지 나가는 것은 공공연히 통일에 역행하는 것으로 된다. 넷째로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주의제도를 뒤집어 엎으려는 미국과 남조선의 공동음모에 가담하여 「3각 결탁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된다. 이렇게 되면 남조선 당국자들은 소련이 저들의 편에 가담한 것을 코에 걸고 더욱 우쭐하고 교만해져서 우리를 독일식으로 흡수ㆍ통합하려 할 것이다. 이것은 통일을 위한 북남대화를 파탄에로 이끌고 남북대결을 가일층 격화시킬 것이다. 다섯째로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조­소 동맹조약은 스스로 유명무실한 것으로 되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동맹관계에 의거했던 일부 무기들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선반도에서 군비경쟁을 격화시키게 되고 조선반도 정세를 극도로 첨예화시키게 한다. 더 나아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전반적인 정세를 첨예화시키게 될 것이다. 여섯째로 전체 조선인민들,특히는 남조선 인민들의 통일의지를 막는 것으로 된다. 남조선 인민들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통일열망이 고조되고 있는 시기에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설정하면 그것은 통일에 대한 조성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으로 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나쁜 일이라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행한다면 조선반도에서의 긴장완화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평화와 안전의 견지에서 보다 조­소 두나라 인민의 이익의 견지에서 보나 그 누구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 「남북 정상대좌」 예고의 청신호/이경형 정치부차장(남북초점)

    ◎연총리 청와대 예방은 체제인정의 징표 1990년 9월6일. 이날은 한반도분단 45년사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에 기록될 것이다. 대한민국 국가원수인 노태우대통령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연형묵정무원총리로부터 정중한 인사를 갖춘 예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해방의 감격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가운데 수백만의 피를 몰고온 동족상잔의 처절한 참극 그리고 그 이후의 백만무력의 대결…. 서로가 서로를 쓰러뜨리지 않고는 생존의 위협을 벗어날 수 없는 두 체제가 이날 비로소 상대방의 체제를 사실상 인정하는 행동을 실증해 보인 것이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기,대한민국의 국가원수를 상징하는 봉황새의 대통령문장기가 나란히 꽂혀 놓여있는 청와대 본관 소접견실에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연총리는 노대통령에게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고 노대통령은 손을 내밀며 연총리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번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강총리」대신 한사코 「강수석 대표선생」이라고 호칭을 하던 연총리는 이자리에서 「대통령께서」를 연발했다. 그는 김일성주석의 노대통령에 대한 안부를 전한 뒤 『대통령께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어 대단히 감사합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이 대표단 전원을 접견,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그는 「대통령께서」라는 존칭을 한반도 빠뜨리지 않았고 자리를 일어설 때는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을 주석님께 그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날 연총리의 공개적인 노대통령 예방은 바로 대한민국 체제의 인정을 행동으로 보였다는 그 상징성 때문에 앞으로의 남북 관계개선의 대장정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18년전인 지난 72년 「7ㆍ4 공동성명」 직후인 같은해 12월 북한의 박성철부수상(공동위원장대리)이 박정희대통령을 예방했지만 당시는 비공식,비공개예방이었기 때문에 이번 공식예방과는 그 성격을 근본적으로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이날 소접견실에서 강총리와 김종휘 대통령외교안보보좌관이 배석한 가운데 북측의 연총리를 약 20분가량 접견,북한 김일성주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구술했다.북측의 기록원자격으로 개별면담에 수행한 최봉춘 총리보좌원 겸 연락관은 노대통령의 솔직하고도 허심탄회한 메시지를 기침소리하나 빼놓지 않고 기록해나갔다. 서로가 서로를 거부했던 남북 정상간의 「시간차 필담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오는 10월16일부터 3박4일간 열릴 평양 2차회담에서 강총리가 김일성주석을 예방,이날 연총리의 청와대 예방과 같은 절차로 면담하게 되면 노대통령과 김주석간의 남북 정상대화는 가속력을 더해갈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한 두 정상이 직접대화를 갖는 날도 그리 멀지 않는 시기에 현실화될 것이다. 노대통령은 이어 대접견실로 자리를 옮겨 연총리를 비롯한 우리측 회담대표 7명과 노재봉비서실장,이현우경호실장,이수정 공보수석비서관이 배석한 가운데 북한회담대표 7명과 림춘길총리책임보좌관,최봉춘총리보좌원,이헌(기록원) 등 10명을 접견한 뒤 남북 관계개선과 평화통일에 대한 소신과 포부를 피력했다. 노대통령의 나직하면서도 자신에 찬 목소리는 대접견실을 압도해 나갔다. 『이번 회담이 분단 45년을 종식시키고 통일의 문을 여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수천년 한핏줄을 이어온 겨레가 더이상 갈라설 수는 없다』 『동서독의 통일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고 미소가 냉전체제를 붕괴시키는 등 세계가 화해의 질서로 가는 마당에 우리 선조가 살아왔고 우리가 살고 있으며 후손들이 세세손손 살아갈 이 한반도만을 분단으로 놓아둘 수는 결코 없다』 통일을 향한 간절한 소망과 뜨거운 동포애가 물씬물씬 풍겨나오는 노대통령의 말을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대표들은 자세를 가다듬고 경청했다. 이번 서울회담에서 남북한은 뚜렷한 합의를 도출해내지 못했지만 이날의 「청와대예방」으로 분단의 두꺼운 얼음이 이미 깨지기 시작했다는 신호를 7천만 동포에게 분명히 전달하고 있었다.
  • 외언내언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에는 호칭이상의 의미가 있다.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며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하고 경멸하기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칭을 둘러싸고 때로는 싸움도 벌어진다. ◆가령 「배비장전」에서의 애랑과 정비장을 보자. 이별하는 마당에서 갖은 아양으로 정비장을 우려먹는 애랑. 이빨까지 빼어 바칠 정도 아니던가. 처음에는 그 호칭이 「나으리」이다. 그 다음에는 「여보 나으리」. 그 다음에는 「여보 당신」이 된다. 「수호전」속의 요부 반금련도 그렇다. 호랑이 때려잡은 시동생 무송을 유혹하려면서 술자리를 마련,처음에는 법도대로 부르다가 나중에는 「여보 당신」해버린다. 호칭이라는 게 그렇게 무섭다. ◆우리와 중국의 경우를 보자. 지금의 중국이라는 표현은 몇해전까지의 중공을 가르킨다. 우리가 중공이라고 불렀을 때는 상당부분 적의와 격하가 있었다. 그랬기에 가까워지면서 중국이라 부른다. 상대적으로 자유중국은 격하되어 버렸고. 대만정부라고들 부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얼마전의 일본 신문을 보자니까일부 층에서 중국을 「지나」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강영선이란 화교가 멸칭이라며 울화를 터뜨리고 있었다. ◆이제 「강수석대표선생」과 「연총리」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강총리는 꼬박꼬박 연총리라 부르는데 「연수석대표선생」은 꼬박꼬박 강수석대표 혹은 강선생이라 부른다. 「두개의 조선」이 아니니까 「두개의 총리」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인 듯하다. 말하자면 이쪽의 정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호칭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속의 어떤 단체를 이끄는 「수석대표선생」을 대한다는 의도적 정치색을 짙게 풍긴다.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대목이다. ◆「연수석대표선생」의 기조연설을 들으면서 「남조선인민」들이 처음에는 갸우뚱했다가 나중에 웃어버린 일­. 「반괄호」 「쌍괄호」 「삼각」따위 문장부호까지 읽는 것 때문이었다. 융통성 없고 틀에 박힌 남행길이었음은 그것 하나로도 드러난다. 다음에 만나서도 또 「강수석대표선생」이라 부를 것인지.
  • 「북한법령집」 첫 완간/대륙연

    ◎분단이후 만들어진 법규1천건 수록/8백쪽짜리 5권… 영ㆍ일어판도 계획 법령을 통해 해방이후 40여년동안의 북한의 통치와 행정을 상세히 알아볼 수 있는 북한법령집이 4일 재단법인 대륙연구소(회장 장덕진)에서 출간됐다. 2백자 원고지 3만장의 방대한 분량인 이 북한법령집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들어선 1945년 8월이후 제정되거나 보충되어온 법령 1천1백95건과 자료 2천7백2종류가 실려있으며 4×6배판 8백쪽짜리 5권으로 출간됐다. 지난2년 남짓동안 북한문제를 다루는 각급 정부기관,대학,공ㆍ사립 북한연구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북한발행의 신문ㆍ연감ㆍ교과서ㆍ공보 및 북한방송 청취기록 등의 자료와 일본의 친북한 교포단체인 조총련과 북한이 세워 운영하고 있는 「조선대학」 또는 일본 각 대학 연구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북한간행물 등을 수집해 법령부분만 모았다. 자료수집을 위해서는 북경대 모스크바대 연변대 일본 등지에 연구팀을 파견하기도 했다. 편찬위원은 지난69년 「북한법령연혁집 제1집」에 이어 「북한법령집 1∼4권」을낸 정경모씨를 비롯,최달곤교수(고려대 법대),김남식씨(평화연구소 연구원),이병석씨(대륙연구소 연구이사),허경교수(연세대 법대),신영호교수(단국대 법대),박승기씨(전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등이다. 이 법령집출간에는 모두 1억여원이 들었으며 그동안 정책적인 이유때문에 보류되었던 각종 법령까지 모두 수록돼 있어 앞으로 북한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과 일본 가제출판사에서는 이미 영어와 일어판으로 출판할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대륙연구소 장회장은 『북한과는 언젠가 통일이 될 것이고 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고 전제,『이제 북한에도 어떤 규정과 근거를 가지고 어떻게 지금까지 통치가 이뤄졌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발간이유를 설명했다.
  • 이례적 호칭 “북한정부”/이건영 정치부기자(오늘의 눈)

    「새로운 남북관계」 「양국 정부」 「체제ㆍ실체 인정」 「정도」. 남북 고위급회담 우리측 대변인인 홍성철통일원장관이 3일 기자간담회를 하면서 사용한 용어들이다. 특히 지금까지의 남북관계에 있어 생소하기까지한 「양국 정부」라는 용어가 정부 고위당국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이 회담에 임하는 우리측의 입장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향적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북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치 않고 분단 45년을 끌어온 시점에서 우리가 먼저 북한을 실체인정의 호칭인 「정부」로 부른 사실 자체에서 우리 정부의 탈냉전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사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얼마전만 해도 북한을 북괴로 호칭하고 도저히 상종불가능한 존재로 터부시해왔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북측,북한으로 바꿔 불렀으며,나아가 김일성을 김일성주석으로 호칭하다가 이번에는 북한을 정부라고 표현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홍장관은 이 말의 의미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는 대한민국이고 북한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고 부르고 있다. 따라서 이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며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 듯 설명했으나 그의 위치와 그동안 정부가 수차례 전략회담을 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정부내에서 북한에 대한 새로운 개념정립이 시도되고 있음을 시사해줬다. 가볍게 볼 때에는 북한을 자극시키지 않고 오는 10월16일 평양에서 개최예정인 2차 남북 고위급회담의 개최보장을 받아내려는 전략차원의 의지표현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홍장관의 간담회 내용을 곱씹어보면 정부의 자세는 분명히 변해 있었다. 홍장관은 『이제부터 남북관계는 선전적 차원이 아니라 정도로 가야 한다』고 했으며 『지난 45년동안 전화 한통,편지 한장 못보내는 1천만 이산가족들의 문제를 서로가 풀지 못할 때 인도적 견지에서 볼 때 잔인한 민족이라는 내외의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정부가 최근 반공 현수막을 철거하고 나선 것도 상호이해의 바탕 마련을 위한 한 수순으로 보여질 때 홍장관의 「양국 정부」 발언은 끝내기 수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번 회담에서는 여러 면을 고려할 때 당장 가시적인 성과의 도출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다. 그동안도 몇번 시작은 있었지만 그것은 참다운 시작이 아니었다. 서울회담이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진정한 첫걸음이 되길 정부당국과 함께 기대해본다.
  • 서울 총리회담의 의의와 전망

    ◎45년 만의 「고위대좌」… 남북대화 새 장 기대/“통일기반 조성” 상호 의중 탐색 예상/군축ㆍ통행 등 교류방안 깊이있게 논의 남북한사상 초유의 총리회담인 남북고위급회담이 30일 하오 3시 판문점중립국감독위 회의실에서 3차 책임연락관 접촉에서 확정됨에 따라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이날 접촉에서는 북측 대표단의 서울 체류일정의 세부일정을 협의수정했으며 이제 연형묵정무원총리를 비롯한 북측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남북한총리의 역사적인 대좌가 이뤄지게 됐다. 이번 고위급회담은 지난 85년 12월의 제10차 남북적십자회담이후 4년9개월여만에 열리는 남북간의 공식 회담이다. 특히 남북 쌍방의 총리가 분단 45년만에 처음으로 공식 대좌한다는 점에서 분단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상징적 의미도 크다. 우리측의 강영훈총리와 북측의 연형묵정무원총리는 이번 회담에서 남북간의 첨예한 정치ㆍ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과 인적ㆍ물적 교류를 비롯한 다각적인 교류ㆍ협력문제를 논의할 것인 만큼 남북 관계개선과 통일을 향한 기반조성이라는 실질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 물론 남북 쌍방은 이번 회담에서 서로의 의중을 확인하는 탐색전을 벌일 것으로 관측되기 때문에 합의를 도출해 낸다거나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남북 쌍방의 책임있는 고위당국자가 남북문제와 관련된 포괄적인 의제를 논의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민간차원에서 주로 인도적인 교류문제를 다뤄온 적십자회담을 비롯한 과거의 남북대화와는 전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따라서 회담이 열릴 경우 책임있는 남북당국간에 그동안 다뤄지지 못한 다양한 현안들이 폭넓게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1차 서울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앞으로 몇차례의 고위급회담이 열러 쌍방이 남북문제에 대한 상당한 의견접근과 어느 정도의 합의를 도출해낸다면 쌍방은 최고위급 회담,즉 노태우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의 남북 정상회담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이같은 상황을 종합해볼 때 이번 고위급회담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고위급회담은 우리측 강총리가 지난 88년 12월28일 북측에 제의한이래 모두 8차례의 예비회담을 갖고 1년9개월여 만에 힘겹게 성사된 것이다. 강총리는 당시 북측의 정치ㆍ군사회담 주장을 대폭 수용,▲상호비방ㆍ중상 중지 ▲상호존중및 불간섭 ▲다각적인 교류협력 실시 ▲군사적 신뢰구축 ▲남북 정상회담개최문제 등을 논의하자고 제의했으나 북측은 수차례에 걸쳐 예비회담을 일방적으로 연기해 왔다. 북한측이 정치ㆍ군사문제라는 의제가 구미에 당기기도 했지만 경제적 문제ㆍ후계체제 구축 등 내부의 난관에도 불구,고위급회담에 응해 나온 것은 동구의 개방및 소련의 대북개방압력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지배적인 분석이다. 이는 6공이후 중점추진해온 우리 정부의 북방정책의 궁극적인 결실이기도 하다. 이번 제1차 서울 본회담에서는 이산가족들의 남북자유왕래를 비롯한 인적교류의 실현과 서신교환및 남북 물자교역 등 통행ㆍ통신ㆍ통상협정 체결문제가 중점 거론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측 정부는 3통협정체결이야말로 북한을 개방의 장으로 유도,통일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다는 판단아래 3통협정체결은 반드시 관철시킬 전략을 세우고 있다. 특히 남북한의 유엔가입문제는 남북 당국간에 가장 많은 설전을 교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측 정부는 이번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이 남북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매우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판단아래 북한측을 설득시킬 방침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북한측이 계속해서 이를 거부하고 비현실적인 남북한의 단일의석 유엔공동가입을 고집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 가입분위기를 국제적으로 조성해 나갈 계획이다. 반면 북한측은 지난 7월26일 제8차 예비회담에서 합의문에 서명한이후 노동신문 사설,유엔아보리에 회담서한발송,8ㆍ15범민족대회무산 이후의 일련의 조짐등에서 고위급회담을 연기 또는 무산시킬 움직임을 보여왔으며 그 주된 이유가 우리측의 유엔단독가입 저지였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북한측은 이번 고위급회담에서 유엔단독가입을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위급회담에서 가장 첨예하게 부각,남북대표간 격론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의제는 군비통제 즉 군축문제이다. 우리측 정부는 「군축은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상호 군사력및 군사비의 공개,이에대한 검증등의 상호신뢰구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북한측이 군축에 얼마나 관심을 쏟느냐는 것은 우리측은 대표 7명 가운데 군대표가 정호근합참의장 1명인데 비해 북측은 김광진 조선인민군대장(인민무력부부부장)ㆍ김영철소장 등 2명을 포함시킨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북한이 이날 밝힌 대표단중 연형묵정무원총리와 군대표 2명이외의 안병수 조평통서기국장ㆍ백남준 정무원참사실장(예비회담단장)ㆍ김정우 대외경제협력사업부차관ㆍ최우진외교부순회대사(예비회담대표) 등은 우리측 대표가 모두 차관급 이상으로 구성된 데 비해 상대적으로 격이 상당히 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이들이 전문적인 「남북회담꾼」임을 생각해 볼 때 이번 회담을 실질토의보다는 정치선전장으로 활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전망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아무튼 오는 9월4일 북측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해 공식회담을 갖게 되어야 2차 고위급회담 성사여부와 향후 남북대화의 방향이 가름지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1차 서울회담이 성사된다고 남북 관계개선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징후가 바로 나타나리라는 기대는 금물이라는 것이 남북문제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 남북 총리회담 서울개최 확정/연락관접촉/4∼7일 3박4일 일정합의

    ◎전체회담 5∼6일 두차례/연형묵 북총리,노대통령 예방할 듯/신변보장각서 전달… 북측,대표 7명등 88명 참석 남북한 고위급회담의 서울 1차 본회담개최가 확정됐다. 이에따라 남북쌍방은 분단 45년 만에 처음으로 총리회담을 갖게 됐으며 북한대표단은 지난 85년 12월 제10차 남북 적십자본회담의 서울개최이후 5년 만에 서울을 다시 방문하게 된다. 쌍방은 30일 하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고위급회담을 위한 제3차 책임연락관 실무접촉을 갖고 북한대표단의 9월4일부터 7일까지 3박4일간에 걸친 서울체류일정을 확정했다. 우리측의 김용환책임연락관과 북한측의 최봉춘연락관은 이날 접촉에서 회담개최 5일전에 교환키로 한 당초 합의사항대로 북한측 대표단의 명단및 사진ㆍ신변안전보장각서 등의 교환,그리고 회담장 겸 숙소,회담횟수및 운영방법 등 북한측 대표단의 서울체류일정을 최종 결말지었다고 남북 대화사무국이 이날 밝혔다. 우리측은 이날 접촉에서 강영훈국무총리 명의로 된 신변안전보장각서를 북한측에 건네줬으며 북한측은 연형묵정무원총리등 대표단 7명,수행원 33명,기자단 48명 등 모두 88명의 북한측 대표단 일행의 명단과 사진을 우리측에 전달했다. 기자단은 원래 50명으로 합의됐으나 북한측은 개인사정에 의해 서울방문을 취소한 기자 2명의 명단과 사진을 우리측에 전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 고위급 1차 본회담에는 우리측에서 강총리를 수석대표로 홍성철통일원장관,정호근합참의장,이진설경제기획원차관,김종휘청와대외교안보보좌관,이병룡국무총리특별보좌관,임동원외교안보연구원장 등 7명의 대표가 참석하며 북한측에서는 연총리를 단장으로 김광진조선인민군대장(인민무력부 부부장),안병수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백남준정무원참사실장(예비회담단장),김정우대외경제사업부 부부장,최우진외교순회대사(예비회담대표),김영철조선인민군소장(예비회담대표) 등 7명이 참석한다. 쌍방은 북한측 대표단의 서울체류일정과 관련,북한대표단의 숙소및 회담장을 서울 강남구 인터콘티넨탈호텔로 정했으며 5일 상오 10시 제1차 전체회담을 공개로,6일 상오 10시 제2차 전체회담을 비공개로 각각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연총리등은 서울체류기간동안 청와대로 노태우대통령을 예방할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으며 중앙박물관등 주요시설을 관장할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측은 또 연총리를 비롯한 북측 대표단에게 승용차 10대를 제공하고 수행원및 기자단에게는 대형버스를 제공하는 한편 국무총리ㆍ국회의장ㆍ서울시장 등 3인이 주최하는 북측 대표단 환영만찬을 갖기로 했다. 북한측 대표단은 4일 상오 10시 우리측 지역에 들어오고 7일 상오 10시에 떠나는데 모두 판문점을 경유하는 육로를 이용하게 된다. 남북 쌍방은 이번 회담에서 「정치ㆍ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는 문제와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시하는 문제」라는 포괄적 단일의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한 만큼 유엔가입,군축문제,교류협력 등 남북간 모든 현안을 폭넓게 거론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측은 특히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방안을 북한측에 설득시킬 방침이며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해 남북 군사당국자간 직통전화설치 및남북 상호불가침협정체결을 제의하는 한편 교류협력을 활성화한다는 차원에서 통행ㆍ통신ㆍ통상 등 3통협정의 체결 및 60세이상 이산가족의 자유왕래,이를위한 적십자 본회담의 조속재개등을 북측에 제의할 계획이다.
  • 방북 중국 국방부장/북한 통일노력 지지

    【도쿄 AFP 연합】 진기위 중국국방부장은 2개의 한국을 통일하려는 북한의 투쟁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확인했다고 북한 관영 중앙통신이 24일 보도했다. 중앙통신은 이날 북한을 방문중인 진 부장이 지난 23일 평양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우리는 미군의 남한 철수와 외세의 간섭없는 조선인민들 자신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지지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했다. 진 부장은 『조선은 조선인민들에 의한 지속적 노력의 결과로 반드시 통일될 것이며 남과 북으로 갈린 같은 피를 나눈 조선민족은 분명히 같이 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중국인민과 군은 중국과 북한의 우호관계와 군사적 유대를 발전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 징용 7만9천5백78명/일,“최종 명부” 한국 전달

    ◎알려진 70여만의1할… 외교쟁점 될지도 【도쿄=강수웅특파원】 일본정부는 지난 5월 노태우 한국대통령의 방일때 요청받았던 한국인 강제연행자 7만9천5백78명의 명부를 7일 발표했다. 이 명부는 노동성 보유등 중앙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6만7천6백9명 분과 지방단체의 3천8백54명,민간인 8천1백15명 분으로 7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강제연행자의 1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이 명부를 최종 결과로 간주,이날 외교루트를 통해 한국측에 공식 전달했는데 한국여론은 이 명부공표에 크게 반발할 것으로 보여 이 문제는 앞으로 한일관계에 새로운 불씨가 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 명부는 노동성 지하창고에 있던 이와테(암수) 나가사키(장기)현 등 16개 현의 6만6천9백41명이 중심이 된 것으로 일본의 입국경위는 관의 알선,징용이 4만9천1백82명,자유모집 7천2백17명,불명 1만5백42명 등이다. 이 명부는 지난 46년 당시의 후생성 노동국장 명의로 조사한 「조선인 노동자에 관한 조사」 결과이다. 중앙행정기관으로서는 이외에 방위청 방위연구소에서 조선인 작업원 6백60명의 명부가 발견됐다.
  • “동구사태 북한에 영향 못미쳐”/북한대표단 일문일답

    ◎독일통일방식 한반도에 적용 못해/북한서 반체제란 생각할 수도 없어 【오사카=강수웅특파원】 제3차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에 참석중인 북한측 대표단은 4일 하오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의 주민들도 동유럽의 사태와 동서독 통일 등을 잘 알고 있으나 이같은 사태는 북한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북한의 사회주의는 주체사상이 구현된 사람중심의 사회주의로서,견고하고 생활력이 강한 주의이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독일식 통일방식은 조선에는 통할 수 없고 조선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대표단은 또 『한소 정상회담도 잘 알고 있으며 내정에 관한 문제여서 간섭할 생각은 없으나 조선문제를 놓고 큰 나라를 찾아 다니거나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사대주의』라고 비난하고 『사대주의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조선문제는 조선인들끼리 만나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 대표단은 『북한에는 반체제인사는 존재할 수 없다』고 못박고 『북한은 자주권을 존중해 주고 조국통일위업에 반대하지 않는국가라면 어떤 나라와도 친선을 맺는다는 기본입장을 세워 놓고 있으므로 미국ㆍ일본과도 관계를 개선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북한 대표단 회견에는 참가자 11명중 석창식(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앙위 부위원장) 김철식(사회과학원 부원장) 김석형(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고문) 박승덕(사회과학원 주체사상 연구소 실장) 이형철(군축 및 평화연구소 실장) 등 5명만이 나와 1시간여에 걸쳐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당초 1백50명의 대표단을 파견한다더니 왜 11명밖에 오지 않았나. 따라서 이산가족 상봉도 한가족밖에 못하지 않았는가. ▲석창식=대표단 규모는 회의 목적과 관련해 생각해야 한다. 남한에서도 처음에는 3백명이 온다고 했다가 30명,1백명으로 규모가 바뀌지 않았는가. 왜 남쪽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가. 북한에서는 지금 다른 학회도 많이 열리고 있고 범민족대회등 준비를 염두에 두고 구성하느라 그렇게 됐다. 이산가족문제는 예상하지 않았다. 학술대회에서 가족상봉은 복잡하지 않은가. 그러나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김석형선생은 가족들과 매일 만나고 있다. ­이번 남북한 학자들의 대화와 접촉에서 어떤 수확이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김철식=이번 대회의 수확에 대해 추가한다면 과거의 오해와 불신이 많이 풀리고 서로의 이해를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열렸던 한국ㆍ북한ㆍ미국의 군축세미나에서 나온 한국측 군축안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형철=역사적인 3자간 군축회의 였다. 한국측 제안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으나 만나서 토론한 것 자체가 성과였다. ­북은 주체사상 방법론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남한에도 자유로운 여러 방법론이 있다. 남북한 공동의 조선학연구가 가능하겠는가. ▲김철식=주체사상 방법론이야말로 가장 과학적이고 정확한 방법론이다. 그러나 남의 방법론도 받아들일 것이다. 방법론은 많아도 진리는 하나이므로 낙관하고 있다. (회견을 마칠때쯤 되자 김석형이 마이크를 들더니 철근콘크리트 장벽을 제거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며 임수경ㆍ문익환을 석방하라고 큰소리를 지르고 회견장을 일어섰다)
  • 민단­조총련 「35년 대립」청산의 첫 걸음

    ◎두단체 “연락기구 설치”합의의 뜻/신데탕트 기류속 조총련내 인식 변화 반증/남북한 당국의 영향력 커 자율대화엔 한계 재일한국거류민단(민단ㆍ단장 박병헌)과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ㆍ중앙상임위의장 한덕수)는 1일 「조국의 평화통일 촉진을 위한 대화에 협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두 단체간에 연락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민단과 조총련이 이같이 대화를 갖고 합의케 된 것은 지난 55년 조총련 결성 이후 처음있는 일로서 박성우 민단기획실장등 4명이 조총련 사무실을 방문,백한기 사무국장등과 회동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날 합의는 반목과 질시를 거듭해온 양 기구가 불신의 벽을 허물고 협조체제를 마련한 획기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남북한 대화에도 도움을 줄 뜻있는 일로 여겨진다. ○남북대화에 큰 도움 지난달 17일 조총련측은 한덕수 중앙상임위의장 명의로 ▲조총련과 민단의 8ㆍ15 범민족대회 참가 ▲8ㆍ15를 전후해 재일동포 예술의 밤,체육교류모임 개최 ▲이같은 공동행동을 중앙은 물론 지부ㆍ거주지 등 하부조직에서도행할 것 ▲이같은 문제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정상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연락기구 설치를 제의했다. 민단은 이에 대해 18일 ▲조총련 간부ㆍ동포의 고향방문 ▲민단 대표단의 평양방문과 조총련측 대표단의 서울방문을 판문점을 경유해 실현할 것 ▲북경아시안게임 공동응원 등 3개항을 제의했다. 1일 양측은 양측제의를 상호 검토한 끝에 연락기구 설치부분에 합의를 본 것이다. 물론 거슬러 올라가면 재일동포 사회에 깊은 분열을 가져 온 양 기구가 대화의 창구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은 이전부터 산견돼 왔다. 민단 박병헌 단장은 지난달 1일 서울신문과의 회견에서 조총련과의 조건없는 대화용의를 표명했었다. 또 조총련측에서는 올해 1월 채택한 활동목표와 지난 5월 조직결성 35주년 중앙대회 보고를 통해 ▲재일동포의 권리옹호투쟁을 강화하고 ▲8ㆍ15 범민족대회가 성공리에 소집되도록 주력하며 ▲최근의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따른 조총련내의 인식전환을 배경으로 조국통일과 애국사업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조성키 위한 대외사업을 강화하기로 「과업」을 설정했다. 즉 민단과 조총련은 상호대화와 협조체제 구축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을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국제적인 동서 화해무드 ▲남북한 사이에 조심스럽게나마 진행되고 있는 대화 움직임 ▲그리고 조총련 내부,특히 조총련계 상공인들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점등도 양기구간의 대화 채널마련에 이바지한 배경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지난 55년 조총련이 결성된 이래 불신과 상호비방의 벽을 쌓아 온 양기구가 대립청산의 계기가 될지도 모를 연락기구를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의미있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화해 낙관하긴 일러 우선 1일의 합의내용을 보면 양측 7개항 제의 가운데 단 한가지 연락기구설치만이 합의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양측은 이날 대좌에서 나머지 상대방 제의는 사실상 모두 거부 또는 보류했다. 또 양기구는 각각 남북한 당국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있기 때문에 자율성을 갖고 문제를 풀어나가는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다만지난 35년간 반목과 질시로 일관해 오며 의사전달은 우편으로나 하던 과거를 거두어들이고 대화의 창구를 마련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화해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는 평가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강석진기자〉
  • 휴전 37돌ㆍ범민족대회 계기로 본 어제ㆍ오늘

    ◎“냉전ㆍ대화의 장”… 두얼굴의 판문점/화해ㆍ도발ㆍ긴장 엇갈린 「국권의 사각지대」/북측,남북교류 구실로 정치선전장화 기도 휴전협정이 조인된지 37년,그동안 판문점은 동서이념 대결과 남북분단의 상징으로 뉴스의 초점이 돼왔으며 최근에는 활발해진 남북대화와 함께 개방여부를 놓고 또 한차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1953년 7월27일 상오 10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미육군대장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발효와 함께 군사분계선이 지나는 휴전회담 회담장을 중심으로 직경 8백m의 원을 그려 유엔군과 공산군의 공동경비구역으로 삼은 것이 오늘의 판문점이다. 세계 각국의 언론에 「하늘 아래 둘도 없는 기묘한 장소」라고 불리운 판문점은 북위 37도57분20초,동경 1백26도40분40초,한국도 북한도 아닌 국권의 진공지대이다. 휴전이후 37년동안 4백50여차례의 군사정전위원회 본회담이 열렸으나 합의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논쟁과 설전만 계속해왔다. 북한의 선전과 도발,생떼,어거지가 본회담의 주류를이루던 판문점은 때로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팽팽한 긴장의 현장이었으나 7천만 민족의 통일의 염원이 결려있는 곳이며 남과 북의 유일한 대화통로여서 늘 뉴스의 초점이 되어 왔다. 당초 휴전회담은 1951년 7월10일 공산군의 통제지역인 개성에서 시작됐다. 공산측의 제의에 따라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정한 유엔군측은 휴게소건물이나 회의장건물이 모두 공산측의 장악아래있어 심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많은 압박을 받았다. 1951년 10월25일 유엔군측은 당시 남북군사분계선상에 있던 판문점을 새로운 회담장소로 제의,공산측의 합의를 받아 옮겼다. 초가집과 판잣집 4채 밖에 없던 주막거리 판문점은 일약 유엔군과 공산군의 고위장성을 실어나르는 헬리콥터와 내외신 보도진들이 몰려드는 뉴스의 현장이 되었다. 대형 천막 4개를 급히 세우고 이속에서 회담은 계속 됐다. 2년여동안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이곳에는 천막대신 목조건물이 세워졌고 53년 7월27일 역사적인 휴전협정이 이곳에서 조인됐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현재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안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을 비롯,유엔군측의 자유의 집ㆍ평화의 집ㆍ일직 장교실ㆍ초소ㆍ막사 등이 들어서고 공산측에도 판문각ㆍ통일각ㆍ경비본부초소ㆍ막사 등과 중립국 감시위원회 회의실 등 10여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가 열리는 남북의 회담장은 군대 막사형인 단층의 목조건물로 20여평밖에 되지 않는다. 회담장 한 가운데 녹색 커버를 씌운 테이블이 놓여 있으며 테이블위로 국토를 양분하는 비극의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있다. 군사분계선을 앞에 놓고 유엔군과 공산군의 장군급대표 5명이 『안녕하십니까』나 『또 만납시다』라는 인사말도 없이 37년간 수사학적인 말의 전쟁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단뒤로는 비서장을 비롯한 보좌관과 한국어ㆍ영어ㆍ중국어 통역 등 20여명씩의 수행원들이 회의장을 가득 메운다. 군사정전위가 열릴때마다 유엔군대표들은 서울을 출발,헬리콥터나 차량편으로 임진강의 자유의 다리를 건너 회담장으로 가고 공산측은 하루전에 평양을 출발,개성에서 1박을 한뒤 4천m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대신 북쪽에 새로 놓은 다리를 지나 판문점에 도착한다. 유엔군측의 자유의집은 65년 9월30일 준공됐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공산측도 2층 건물인 판문각을 준공했다. 80년 6월20일에는 자유의 집옆에 연건평 1백40평의 남북총리회담장 건물이 준공됐고 89년 12월20일에는 남북회담장소로 사용할 3층의 백색건물 「평화의 집」을 준공했다. 71년 8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과 72년 7월의 7.4공동성명으로 판문점에서 남북조절위원회가 열리면서 판문점은 휴전이후 두절된 남북대화의 통로가 활짝 열리는듯 했었다. 그러나 73년 8월28일 북한의 일방적인 남북대화중단 선언으로 판문점은 또다시 냉전과 설전의 싸늘한 분위기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남북회담이 중단된지 3년뒤인 76년 8월18일 북한의 경비병 30여명이 도끼와 몽둥이 등으로 미군장교 2명을 살해한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 판문점은 숨막히는 긴장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도끼만행사건이전에도 59년 1월27일 소련 프라우다지 평양특파원 이동준씨 귀순,67년 3월22일 이수근위장탈출,75년 6월30일 미군장교 구타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수없이 일어났다. 80년대에 들어 남북대화가 재개되면서 판문점은 남북회담장소로 변해 84년 11월15일 남북경제회담과 85년 7월23일 남북국회회담을 위한 예비회담 체육회담 등이 계속해 열렸다. 85년 9월20일에는 남북고향방문단 2백여명이 이곳에서 출입사열을 거쳐 교환방문했으며 84년 수재때에는 북한이 제공한 수재구호물자 쌀 7천1백96t,의약품 7백59상자가 이곳을 통해 전달되기도 했다. 휴전뒤 37년동안 1백55마일의 군사분계선중 유일하게 총칼대신 탁자가 놓여진 이곳에서는 상스러운 욕설에서부터 고도의 이념논쟁에 이르기까지 수억만 단어가 3개국 언어로 구사되면서 때로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주는 장소로,때로는 분노와 실망을 안겨주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 판문점 통과 어떻게 하나

    ◎유엔사에 통고… 본인 여부 확인/85년 고향방문땐 양측서 사열 남북한 동포들이 판문점을 통해 자유로운 통행을 하기 위해서는 휴전협정상 협정당사자인 유엔군 사령관과 공산군(조선인민군·중국의용군)대표자의 판문점통과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판문점 개방을 선언했기 때문에 별도의 합의는 필요가 없게 된 셈이다. 휴전협정이후 판문점에 대한 경비와 운영은 유엔군이 맡고 있기 때문에 내외국인의 판문점 통과와 출입은 우리정부가 유엔군사령부에 사전통보해야 한다. 유엔군은 공산침략으로부터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통보를 한번도 거절해본 적이 없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는 판문점에서 공산군측의 일직장교와 정전위원회 수석대표의 비서장회의등을 통해 공산측과 접촉하며 이곳의 안전과 경비에 대한 업무를 협의한다. 1976년 8월18일 북한의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반경 4백m 총면적 15만평의 판문점 경내는 유엔군과 공산군의 공동경비구역으로 피아 각 35명의 장병(장교 5명 사병 30명)들이 10여개의 초소에 나뉘어서 공동근무를 했었다. 그러나 도끼만행사건으로 남북의 팽팽한 긴장이 계속되며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자 공동경비구역을 남북으로 나누어 양측 장병들이 서로 섞이지 않게 분할경비하기로 합의했다. 본회의장 건물 중간에 너비 50m,높이 5m의 콘크리트선을 만들어 공동경비구역안에 「국경아닌 국경」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판문점이 개방된다고 해도 남·북한의 모든 민간인이 이곳을 통과해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85년 9월21일 남북 고향방문단의 경우 우리측은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 임시로 사열실을 설치,간단한 통과사열을 했었다. 북한측의 손성필위원장을 비롯하여 기자단·수행인원·예술단·고향방문단의 순서로 시작된 사열에서 북한측 방문단은 양측 적십자사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진·이름·출생지·부모이름·헤어질 당시 주소와 직장·직위·상봉대상자료가 첨부된 서류 등을 확인한 뒤 평화의 집에 마련된 휴게실로 들어와 우리측 안내를 받았다. 한국측고향방문단원들도 북측으로부터 이와 똑같은 사열을 받고 북한측 건물인 판문각을 통해 북측으로 이동했다. 앞으로 구체적인 방북신청및 통과절차등이 마련되겠지만 남·북한이 모두 판문점 개방을 선언한 지금 앞으로는 왕래절차가 양측의 승인을 받고 통과증만 가지면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이전보다는 훨씬 간단해질 전망이다.〈김원홍기자〉
  • 일 해군징용 한인명부도 발견/1천여명 신상기록

    【도쿄 연합】 일본 후생성이 강제로 끌어온 한국인 육군 군인ㆍ군속의 명부를 보관해온 사실이 밝혀진 데 이어 구 복원부가 작성한 해군 징병자 명부와 사망자 명부 등도 일부 남아 있음이 민간단체의 조사에 의해 확인됐다고 아사히(조일)신문이 7일 보도했다. 일본 변호사연맹과 조총련으로 구성된 「조선인 강제연행진상조사단」이 찾아낸 「조선출신 사몰원육군및 해군군인군속 어유골 등 봉안명부」라는 표제의 명부는 후쿠오카(복강)지방 복원부와 오지방 복원부가 패전후에 작성한 것으로 1천6백70명의 이름과 사망장소ㆍ사인ㆍ사망상황ㆍ본적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 남로당총책 박갑동씨의 「체험적 6ㆍ25론」

    ◎“공산주의로 잘 산다는건 꿈” 뒤늦게 자각/휴전 임박해서 박헌영과 함께 연금생활/후퇴길에 평양보고 “거지공화국” 실망 6ㆍ25 동란당시 38선 이남지역 남로당 지하총책이던 박갑동씨(72)가 27일 한국전쟁기념사업회(회장 이병형)주최로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6ㆍ25 40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6ㆍ25체험담을 발표했다. 박씨의 체험담 요지는 다음과 같다. 50넌 6월 25일은 일요일이어서 나는 남로당 비밀아지트에서 쉬고 있었다. 아지트를 경비하는 사람이 외출후에 돌아와 전쟁이 터져서 피난민들이 미아리고개로 넘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순간 『김일성 이놈이 죽일놈』이라고 말하고 전신에 힘이 모두 빠져나갔다. 28일 새벽에 북한군이 탱크를 몰고 서울시내에 들어왔다. 나는 서대문 교도소에 갇혀있는 동지들을 구하기위해 나서며 비서에게 지하당원은 소공동 조선정판사빌딩에 모이도록 지시했다. 교도소에 갔다가 정판사빌딩에 가보니 비서 혼자 서있으면서 이승엽이 평양에서 전권을 가지고 서울시청에 와 당의 명령을 듣지않는 박갑동을 총살시키겠다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이승엽을 만나러 서울시청에 가서 정태식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이가 매우 화를 내고 있어 주위사람들이 말리고 있으니 잠깐동안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때부터 김일성과 이승엽에게 밉게 보여 지위가 점점 낮아져갔다. 나는 복간된 해방일보 논설위원으로 명맥을 유지해가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북으로 쫓기게 되었다. 유엔군이 북쪽에 가기도 전에 북쪽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인민위원회를 습격하고 약탈하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북쪽은 상당히 추웠는데 대부분의 북한사람들이 얇은 여름옷을 입고 이불도 못덮고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이놈의 나라가 인민공화국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거지공화국이 아니면 간부공화국』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김일성이 5년동안 사회주의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회주의의 실상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평양에 도착해서 소위 인민시장에 가보았다. 국영상점 이외에 협동조합상점과 개인상점도 있었는데 생필품이 부족했다. 고무신점에 가보니 여자고무신이 두 종류 있었는데 하나는 흰색이고 하나는 회색인데 주인이 흰색은 남한제품이라며 품질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포목점에 가보니 옥양목은 짜지 못하는지 조악한 광목밖에 없었다. 국영정육점에 가보니 점원이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과 손으로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개인정육점에 가니 20세가량되는 처녀아이가 쇠고기1㎏을 정확히 한번에 잘라주는 것을 보고 국영상점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개인상점은 매일 매일 무거운 과세를 함으로써 국영상점을 우대했다. 국영상점 점원은 공무원이기때문에 손님에게 친절할 필요도 없고 많이 판다고 월급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니 성의가 전혀없었다. 사회주의 경제는 상품생산과 유통시장이 존재하는 경제가 아니었다. 상품이란 소비자가 소중한 돈을 주고 사고싶은 물품을 사는 상행위가 기본이어야 하는데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욕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최저 최소의 생필품을 국가가 배급을 해주는것이 현실이었다. 휴전이 가까워지자 북한은 남로당계 인사를 출당하는 대대적인 숙청을 해 나는 박헌영과 함께 체포되어 56년 3월까지 감금생활을 했다. 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비판을 한뒤 석방되어 북경을 경유,공산권에서 탈출했다. 57년에 북경에 갔다. 중국은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대국주의ㆍ제국주의였다. 조선인민을 자기들이 도와서 미제국주의를 타도했다는 자부심으로 전국이 덮여있었다. 유엔군이 중국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국경을 지키기 위해 출병했다는 것이다. 세계강대국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지구상에는 하루도 전쟁이 그칠날이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약소민족의 서러움과 비애를 느꼈다. 모택동의 소수민족정책이라는 것도 자세히 보면 일본제국주의가 만주국을 통치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소련은 명목적이나마 공화국을 수립해주고 연방으로 묶어 통치하지만 중국은 소수민족의 공화국은 금지하고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 50년대 후반의 중국 공산주의는 정말로 「독점」「독선」「배신」의 연속이었다. 나는 공산주의가고상한 도덕이며 인도주의라고 믿어왔는데 실제로 공산주의가 실천되는 현장을 보니 정치적으로는 중세기 암흑세계이고 경제적으로는 기술이 낙후하여 자본주의 생산성에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독립을 해서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기위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는데 공산주의 국가 북한과 중국에 가서 앞날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내자신이 부끄러워서 일본에 망명하여 성명을 바꾸고 일개 노동자로 일평생을 살아가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일본에 망명하여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속이고 고무공장 노동자를 몇해 하면서 숨어서 살아왔다. 당시 오키나와는 미군점령하에 있어 일본경찰이 본적을 조회할 수 없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나와있는 것이 정말 부끄럽다. 선조가 남겨주신 유산으로 일본유학까지 해서 당시로서는 조선최고의 인텔리의 한사람이 그 능력을 옳게 발휘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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