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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일민단/제2의 도약 채비/창립 50돌 맞아 대대적 사업

    ◎지방참정권 획득 역점… 대중운동 전개/교포 2·3·4세 결집,조직 재정비 계획 오는 10월 창단 50주년을 맞는 재일한국민단이 대대적인 기념행사와 함께 제2의 도약을 위한 다양한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민단은 46년 재일조선인연맹(조련)에 반대하는 반공청년조직인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과 「신조선건설동맹」등 20여단체 2천여명이 중심이 돼 「재일조선거류민단」으로 출발했다. 현재 도쿄의 중앙본부아래 49개 지방본부,3백39개 지부에 50만명의 단원을 거느리고 있는 민단은 그동안 1세교포들의 남다른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발판으로 조총련과 일본사회의 차별의식이라는 두 적과 끊임없이 투쟁하며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교포사회의 고령화와 2·3세 젊은 교포들의 조직이탈,갈수록 심해지는 재정난,급변하는 주변정세 등 적잖은 난관들로 고비를 맞고 있어 이번 50주년 기념행사가 조직을 재정비하고 교포들을 결집시키는데 촉매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민단이 올해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지방참정권의 획득.세금은 똑같이 내면서 지역주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없는 지금의 위치가 일본에서의 교포차별을 제도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조직의 역량을 최대한 쏟아붓고 있다.이를 위해 민단은 일단 국회의 지방자치법 개정심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방의회에 지방참정권을 지지하는 의견서를 채택하도록 촉구하는 한편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대중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3천3백여곳의 자치단체가운데 1천2백여곳에서 이미 의견서가 채택됐으며 올해안에 1천7백여곳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단은 또 창단 반세기를 맞은 만큼 그동안 갈등과 대립 관계로 일관해온 조총련과도 민족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인 대화와 교류활동을 모색하고 있다.이와 함께 교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2·3·4세들에게 모국방문과 민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대폭 늘려 「젊은 세대 끌어안기」에 적극 나설 계획이다. 민단 중앙본부의 신용상 단장(70)은 『1세교포들과 달리 2·3세들은 민단을 자신의 조직으로 여기지 않아 일하기가 쉽지 않다』고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민단이 1세들만의 잊혀진 조직으로 남게 될지,아니면 2·3세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게 될지 기로에 서있는 만큼 올 한해의 사업 성과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50주년 기념식은 오는 10월26일 도쿄 국립요요기경기장에서 단원·귀화동포·일본인 등 1만5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릴 예정이다.〈도쿄=이순녀 기자〉
  • 북 “4자회담 검토중”은 시간끌기다/오코노기 마사오(지구촌 칼럼)

    ◎한·미·일 3국,「대화 끌어내기」 결단 내릴때 북한·미국간 제네바기본합의는 한반도의 국제체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새로운 국제체제속에서 북한이 얻고자 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는 「한국과의 대등한 입장」,즉 미국에 의한 「2개의 한국」정책의 채택이다.사실 한국의 「중심적인 역할」을 둘러싸고 경수로건설에 관한 북·미교섭은 미국과 남북한의 「3자게임」의 양상을 보여왔다. 그러나 안전보장의 분야에서 북한은 「한국과의 대등한 입장」 이상의 것,즉 「신평화보장체제」라는 명칭의 북·미 2국간 체제를 요구하고 있다.북한은 94년4월의 외교부 성명이후 군사정전위원회와는 별도로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설치하고 그 뒤 중국대표단의 군사정전위원회로부터의 철수를 실현시켰다. 한국의 총선거를 앞두고 정전기구를 해체하라는 북한의 공세는 한충 강화돼 4월4일 인민군 판문점대표부가 「당면의 자위적 조치」를 발표했다.북한은 이어 「군사경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및 관리와 관련된 임무」를 포기했다.이러한 조치를실행에 옮기기 위해 4월5일이후 3차례에 걸쳐 북한은 공동경비구역내에서 소규모의 군사연습까지 실시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긴장은 도리어 한국내의 「반공심리」를 작동시켜 총선거에서 여당의 승리요인중 하나가 됐다.여기에 더해 4월16일 제주도에서의 회담에서 한·미 양국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행위에 공동으로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할 것을 강조했다.이와 함께 중국을 포함한 「4자회담」을 무조건,조속히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이것이 군사도발을 포함한 북한의 외교공세에 대한 한·미측의 반격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지금까지 북한의 외교방침으로 보면 4자회담제안은 원래라면 즉각 거절해야만 할 제안이다.왜냐하면 그것은 3자간의 휴전협정을 한국을 포함한 4자간의 평화협정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일단 4자회담이 개최되면 그 교섭과정에 있어서 남북한이 직접적인 당사자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은 4자회담제안을 즉각 거부하지 않았다.오히려 4월18일 「미국측의 제안에 다른 의도가 있는지,현실성이 있는지를 검토중이다」라는 외무성 담화를 발표했으며 그 뒤 여러차례에 걸쳐 미국에 내용설명을 요구해 오고 있다.식량·에너지·외화부족에 고민하는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기대하고 있어 4자회담을 쉽게 거부할 수 없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지도부가 「신평화보장체제」,특히 북·미 2국간합의의 원칙을 간단하게 포기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신평화보장체제가 공식적으로 제안된 것이 김일성·카터회담의 5주전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평화보장체제는 김일성 주석의 외교적인 「유훈」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북한이 무엇인가 대안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북·미교섭과 4자회담의 평행적 개최라는 절충안 이상의 것은 아닐 것이다. 한편 또 하나의 제주회담,즉 5월13,14일에 개최된 한·미·일 3국의 차관보급협의에서 한국은 북한에 4자회담을 받아들이도록 윽박하면서 북한에의 식량지원 및 경제제재완화에 적극적인 미국을 견제했다.그러한 조치를 4자회담과 연계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회의후의 공동발표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미·일 양국이 한국의 주장을 거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연계가 느슨해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한·미·일 2차협의 뒤에도 북한은 4자회담제안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표명하지 않고 있다.그러나 그 사이에도 실종미군 유해반환문제를 둘러싼 대미교섭을 타결시킨다든지 유엔인도문제국(DHA)에 식량원조를 요청하는 등 북한은 대미관계개선및 식량원조 획득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또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은 「북한의 식량사정이 예상보다도 악화되고 있다」는 「특별보고」를 발표했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앞으로 4자회담제안에 명확하게 회답하지 않은채 한편에서는 한국에 대한 비난을 격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에서 대미관계개선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다.얄궂은 일이지만 한국의 4자회담에 대한 집착이 북한의 대미접근을 촉진시키고 11월의 미국 대통령선거까지 연락사무소설치및 미사일교섭에서의 양보를 유도해낼지도 모른다.또 북한에 파견된 DHA조사단의현지보고가 식량원조의 돌파구가 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대미외교 및 대유엔외교가 어느 정도 진전됐을때 북한은 일본에 식량원조 및 국교정상화 교섭의 재개를 요청할지도 모른다.일본정부로서는 현재 4자회담제안에 전면적인 지지를 표명해놓고 있으며 그것이 실현되기 이전의 식량원조 및 교섭재개에 소극적이다.그러나 유엔이 식량지원을 요청하고 북·미간에 연락사무소가 상호 설치되면 그러한 태도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결국 식량문제의 심각화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북한은 기본적인 대외자세를 바꾸지 않고 있다.정부는 국민을 구제하는 책임을 마치 한국을 포함한 주변 여러나라와 유엔에 맡겨 놓은 듯하다.「북한을 국제사회에 참여시킨다」라는 목표와 「남북한간의 의미있는 대화를 실현한다」라는 목표 어느 것을 선행시켜야 하는가,그 사이에 북·미 2국간 협의와 4자회담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한·미·일 3국도 멀지않아 중요한 결단에 쫓기게 될 것이다.
  • 상해의 조선인 영화황제/스즈키 쓰네카스 지음(화제의 책)

    중국영화사상 유례없는 황금기를 누리며 「동양의 할리우드」라고 불렸던 1930년대 상해.그곳을 무대로 「영화황제」라는 칭송을 받으며 최고의 배우로 활약했던 조선인 배우 김염(중국명 친옌)의 일대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린 책. 거장 손유 감독의 「풍류검객」으로 영화계에 정식 데뷔,톱스타가 되기까지의 개인적 일화뿐 아니라 문화혁명기의 농촌해방과 수용소생활 등 당대의 암울했던 시대사도 가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이 책은 김염의 삶이라는 창을 통해 1930년대 중국 인기배우들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덤으로 엿보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첫 아내 왕인미와의 결혼과 이혼,주은래 수상으로 하여금 그를 「중국의 부마」라고 부르게 한 중경시대 이래의 톱스타 진이와의 결혼생활 등 결코 순탄찮았던 김염의 생애가 극적으로 그려진다. 오늘의 홍콩,상해,북경,대만 등의 영화는 그 뿌리를 모두 30년대 상해영화에 두고있다.그런 만큼 30년대 상해 영화계의 주인공 김염의 삶을 조명한 이 책은 현재의 중국어권 영화를 한 은막스타의 개인사를 통해 우회적이지만 재미있게 이해하게 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실천문학사.이상 옮김.6천8백원.〈김종면 기자〉
  • 김정일,서부전선 군부대 방문(북녘 뉴스라인)

    김정일은 군창건 64돌(4월25일)을 맞아 지난 25일 서부 전선 「대연합부대」 지휘부를 방문,전투태세 강화에 관한 과업을 제시했다.김은 이날 부대 사령관의 안내로 작전지휘실,통신결속소를 비롯한 여러 전투단위를 돌아보고 『조선인민군을 필승불패의 혁명무력으로 더욱 강화발전시키는 강령적인 과업들을 제시했다』고 중앙방송이 26일 보도했다.김은 이어 지휘부의 사무실,회의실 등을 둘러본 뒤 군협주단과 공훈합창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여자 레슬링 멀지않아 도입 계획 북한주민들은 조만간 여자레슬링경기를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북한의 조선레슬링협회 유승만 서기장은 최근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레슬링선수권대회에 참석,『세계적으로 여자레슬링이 실시되고 있는 데 우리나라에서도 가까운 시일안에 하게 될 것』이라면서 『현재 그 준비와 협의를 다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암 조기진단·검진체계 개발 주장 북한은 최근 난치병인 암을 조기에 진단하고 검진하는 체계를 개발했다고 정무원 기관지인 민주조선 최근호가 보도했다.국가과학원 의학과학연구원에서 개발했다는 이 검진체계는 장소와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데다 시약원료가 흔한 것이라고 민주조선은 소개.그러나 구체적인 내용과 검진방법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예술인 경제선동대 조직… 현장 파견 북한은 최근 근로자들의 노동의욕 고취를 위해 정무원산하 문화예술부 주관아래 예술인으로 구성된 경제선동대를 조직,기업소와 건설현장에 파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최근호는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사회주의경제건설에 참여시키기 위해 피바다가극단,평양교예단,국립연극단들로 경제선동대를 운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조선인민군 창건일/북,「국가명절」 지정

    북한은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조선인민군창건일(4월25일)」을 「국가적 명절」로 지정하고 해마다 이날을 휴일로 정한다고 발표했다고 통일원이 이날 밝혔다. 이로써 북한의 이른바 「국가적 명절」은 양력설과 김일성생일(4·15),김정일생일(2·16),정권창건일(9·9),노동당창당일(10·10)등 9개가 됐다. 통일원은 북한이 인민군창건일을 「국가적 명절」로 격상한 배경과 관련,『현재 북한이 군을 중심축으로 해 위기관리체제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면서 『특히 군부의 지지확대를 통해 김정일의 권력기반을 더욱 견고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덧붙였다.
  • “평화협정 노린 북 도발 지속될 것”/칼 킨더만(지구촌 칼럼)

    ◎한·미·일 긴밀협력만이 한반도안정 이바지 동북아에는 올봄들어 두가지의 정치적 위기가 형성돼 있다.그것은 한반도 정전협정에 대한 북한의 공격과 대만에 대한 중국의 위협이다. 이들 위기는 직접적인 연관관계는 없지만 분단국가에서 발생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한반도와 중국 양안사이의 긴장은 동북아의 안보체제에 파급을 미칠뿐더러 미국의 동북아정책에도 영향을 끼친다. 북한은 국제법에 따라 지난 53년 체결된 정전협정의 조항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겠다고 발표했고 이에따라 국제사회의 관심은 온통 한반도에 쏠려있다.북한은 지난 4일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 및 관리와 관련한 임무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동북아 양대위기 형성 게다가 양형섭 최고인민회의의장은 같은날 정전협정은 북한과 미국간 평화협정으로 대체돼야 한다고 주장했다.북한의 관심은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평화협정체결에 있다고 북한 외무장관은 누차 말해왔다.따라서 북한의 이번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북한은 한국의 북방외교와 중국 및 러시아와의 수교,유엔 동시가입으로 굴욕을 당했고 미국과의 핵협상으로 실질적인 보상을 얻어냈다.북한당국은 이제 한국의 어깨를 뛰어넘어 미국과 관계개선을 이루려는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미국이 북한과의 평화협정 논의를 줄기차게 거부해왔기 때문에 북한은 평화협정이 체결될때까지 휴전협정을 대체할 수 있는 「잠정협정」체결을 공식 제의해 놓고 있다. 무장군을 비무장지대(DMZ)에 잇따라 투입하기에 앞서 북한은 체코와 폴란드의 중립국감시단이 북한 영토를 떠나도록 했다.남한에는 스위스와 스웨덴의 중립국감시단이 남아있는 상태다.휴전협정을 무력화하려는 북한의 전략은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이번 행동도 이런 목적을 이루려는 의도에서 나온 「신경전」인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총선결과를 보면 남한의 유권자들은 북한의 위협적인 발언과 행동에 그다지 실감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중립국감시단의 스위스대표인 뮐러씨는 한 독일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전쟁의 위험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러,북 주장 동조안해 남한이 자신들보다 한수위인 북한의 미사일 발사능력에 걱정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남한의 미사일 방어체제도 상당히 개선돼 있다.한·미·일 3국이 동북아 정책을 보다 잘 조정하는 것이야말로 심리적 혼란상태에 있는 남북한 관계를 다시 안정시키는데 상당히 기여할 것이다.중국도 러시아도 혼란을 야기하는 북한의 주장에 동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불안한 북한 권력 엘리트들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중국은 대만에 대해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두가지 목적을 노렸다.하나는 이등휘 총통이나 중국으로부터의 대만 독립을 외치는 민진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이는 실패했다.대만유권자들은 이총통(54%)과 민진당(21.1%)을 지지했다.두번째는 중국·대만관계에 더이상 개입하지 말라고 미국에 대해 경고하는 의미도 있었다.그러나 미국은 2대의 항공모함을 대만근해에 보냈다.그리고 전세계 6백32명의 기자들이 5천년 중국정치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총통선거를 취재했다.이처럼 대만이 전세계의 관심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중국당국을 화나게 만들었다. ○중의 무력시위도 실패 중국은 대만의 민주화가 계속되는데 자극을 받았다.왜냐하면 대만의 민주화는 대만화를 가속하는 것이 분명한 까닭이다.대만은 장개석과 장경국 총통의 통치하에서 수십년동안 독재체제를 겪어왔다.하지만 집권 국민당은 야당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중국본토 출신 주민들의 숫자가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도 전국민의 87%를 차지하는 유권자들로부터 정치적인 파워를 인정받았다. 통일전의 독일과 남북한의 현상황과 비슷하게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주권과 대표성을 요구하고 있다.중국은 이에대해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면서 대만의 요구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그뿐 아니라 대만이 항복해올 것을 요구하고 대만이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내세운다.대만이 민주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비해 중국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들에게 이롭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미국은 중국·대만에 등거리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대만문제가 군사적 무력방식으로 해결되는데는 반대하고 있다.
  • 러의 북 달러위조범 적발이후 수사방향

    ◎연루된 북 외교관 소환 불가피/북한인 사업가 셋 신원확인·위폐출처 등 초점/피해자 대부분 불법체류… 환전규모 파악 난제 북한외교관이 개입된 모스크바 달러위폐 유통사건은 11일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모스크바지부 위폐수사팀에서 조사를 맡은 것으로 전해졌다.같은날 FSB의 한 관계자는 『한 지부의 인지사건으로 중국인 한명의 신병을 확보해놓고 있다』고 밝혔다.북한인을 중국인들에게 소개해준 한금철씨(41·연변거주)를 두고 하는 말이다.한씨의 여권은 지난 4일 FSB 모스크바지부의 위폐수사팀이 압수한 것으로 최종확인됐다. 수사당국은 북한대사관의 안모영사를 통한 북한인 사업가 3명의 신원확인,위조달러의 출처,위폐유포 범위를 비롯한 피해규모 등 세갈래에 수사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수사당국은 우선 한씨의 진술을 토대로 관련돼 있는 북한대사관의 안모영사(33세 가량)를 적당한 시기에 조사할 수밖에 없다.안씨는 대량의 위폐를 중국인과 중국국적의 조선인에게 판 문제의 사업가 3명을 데리고 현장에 나타난 장본인.따라서 안영사를 불러 그들의 신원을 캐면 문제가 쉽게 풀릴 것이지만 안씨의 소환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안씨가 현직 주재관으로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안씨의 소환에는 외교절차상 다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여기에 최근 복원되기 시작한 러시아·북한과의 관계를 다시 소원하게 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러시아 수사당국의 수사의지도 변수로 작용될 것으로 보인다.안영사가 출두해 『나도 단순히 소개만 시켰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안영사가 단순히 「소개」만 해주었다 하더라도 이 역시 중대한 불법행위이자 엄청난 외교적 실수다.환전소와 은행을 통해서만 환전하도록 돼 있는 러시아연방법을 어기고 불법거래를 주선했기 때문이다.최소한 외교관의 추방 사유에도 해당된다는 것이 관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달러의 출처와 관련,중국인과 조선족피해자들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진짜돈같은 가짜』라고 입을 모은다.그만큼 정교해서 수년동안 환전상을 해 온 이들도 위폐와 진폐를 섞어놓으면 감별못했다고피해자들은 주장한다.국제적이고 조직적인 위폐달러 인쇄·유통조직이 개입돼 있지 않았다면 이같은 사건은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도 수년동안 비공식적인 환전상을 해온 중국인등이 『큰 돈을 바꾸는데 확인하지 않고 환전했다』는 것은 믿기 힘든 구석도 있다.이에 대해 피해자들은 『대사관 직원이 소개한 사람들이라 무조건 믿었다』고 말했다.환전 방식은 중국인들의 집단거주지인 「모단」아파트 310호의 한 중국인 중개인방에서 20여명이 각자 가지고 온 루블을 현장에서 이들 안씨 일행의 달러와 바꿨다는 것이다. 수사의 큰 장애물은 바로 피해자들이 너도 나도 「내가 피해자」라며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돈을 바꿔준 사람들이 대부분 여러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대부분 불법체류자들이며 소득만큼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데다 러시아에서 불법환전을 하다 적발되면 징역형을 각오해야 하는 점이 피해자를 속타게 하고 있다.피해자들은 이 때문에 자신이 바꿔준 환전규모를 쉬쉬하는 상황이다.이를 비집고 북한인들이 거액의환전사기행각을 벌인 것이다.〈모스크바=류민 특파원〉
  • 북 판문점 무력시위와 우리측 대응 일지

    ▲3월29일 북한=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 『문제는 전쟁이 일어나겠는가 말겠는가가 아니라 그 시점이 언제인가가 하는 데 있다』는 담화 발표. ▲4월2일 북한=손성필주러시아대사 『조선반도는 지금 전쟁전야와 같은 팽팽한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이런 조건하에서 인민군대는 사회주의 조국의 보위를 위해서 궐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발언. ▲4월4일 하오5시 북한=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 명의 『조선인민군은 정전협정에 의하여 지닌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및 관리와 관련한 임무를 포기한다』고 평양방송및 중앙방송 통해 발표. ▲4월4일 하오8시 정부=긴급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어떤 도발행위라도 감행한다면 한·미 연합방위태세에 의거,즉각적이고 단호하게 응징하겠다』고 발표. ▲4월4일 밤 주한유엔군사령부=성명을 통해 『북한이 정전협정을 파괴하려는 분명히 위험한 조치』라고 유감 표명. ▲4월5일 북한=양수섭 최고인민회의 의장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 나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평양방송 통해 연설. ▲4월5일 정부=대북정보감시태세를 「워치콘(WATCH CONDITION)3」에서 「워치콘 2」로 15년 만에 격상. ▲4월5일 북한=하오6시쯤 북한군 1개중대 1백20명을 박격포와 기관총 등으로 무장시킨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북측지역으로 투입,2시간30분만에 철수. ▲4월6일 정부=김영삼대통령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 소집 『북한의 어떠한 도발행위에도 단호하고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확고한 안보태세를 갖추라』고 지시.
  • 정전위 허가없인 무기휴대 금지/DMZ 유지·관리 임무

    북한이 정전협정 무효화를 위해 거부키로 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 및 관리와 관련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지난 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총사령관과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사이에 체결된 정전협정상의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에 관한 제1조는 1항에서 『적대행위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와함께 6항에서 『쌍방은 모두 비무장지대내에서 또는 비무장지대로부터 또는 비무장지대를 향해 어떠한 적대행위도 감행하지 못한다』고 못박았다. 협정은 1조 9항에서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에 관계되는 인원과 군사정전위의 특정한 허가를 얻은 인원 외에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이 비무장지대에 들어감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비무장지대 출입을 제한했다. 특히 10항은 비무장지대에 허가를 받고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의 총수를 1천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제한하고 민사행정경찰 외에는 군사정전위의 허가없이는 무기를 휴대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11항은 이러한 제한과 금지에도 불구하고 군사정전위와 보조인원,공동감시소조 및 소조의 보조인원,중립국감독위와 보조인원,중립국 시찰소조 및 소조 보조인원,군사정전위로부터 특별허가를 받은 인원,물자 및 장비등에 대해선 비무장지대 출입과 지대내 이동의 자유를 허가했다.
  • 국방부 성명 전문/북한측 담화 전문

    북한은 4·4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대변인 명의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 및 관리와 관련된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며 이 조치의 일환으로 판문점 공동구역과 비무장지대에 출입하는 북한인원과 차량이 모두 식별표지를 착용치 않도록 할 것임을 발표하였는바 이는 곧 정정협정의 효력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번 북한측 발표는 지난 3월29일 북한인민무력부 차수 김광진이 휴전협정은 한계점에 달하였으며,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언동한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이는 정전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새로운 군사도발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현 정전협정이 일방적으로 폐기 또는 수정될 수 없으며,남북한간의 합의를 통하여 항구적 평화체제로 전환될 때까지는 엄격히 준수되어야 함을 재차 분명히 한다.북한은 또한 자신의 입장이 국제적으로 전혀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북한이 더이상의 무모한 정전협정 파기행위를 중지하고 정전협정관리기구에 복귀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협력을 위한 노력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며,만약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하여 어떠한 도발행위라도 감행한다면 우리는 한미연합 방위태세에 의거하여 이에 대해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응징할 것임을 밝혀둔다. ◎북한측 담화 전문 지난 3월29일 발표된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이 담화에서는 우리인민군대가 군사분계선 남쪽에서 전쟁전야에만 볼 수 있는 심상치 않은 군사적 움직임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대치하여 응당한 자위적 조치들을 취하게 될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완충지대로 전환시킨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합리적인 제안을 내놓고 그 실현을 위해 인내성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남조선당국자들은 상전인 미국의 비호밑에 우리의 제안을 한사코 반대하고 북침격발기를 당김으로써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에 더이상 기대를 가질 수 없게 하였다. 남조선의 군사당국은 비무장지대안에 핵무기와 자동무기를 반입하지 못하며 천명이상의 군사인원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 정전협정의 요구를 무시하고 탱크와 각종 구경의 포·핵무기들을 대량 반입하고 수많은 무장인원들을 끌어들여 전개하였다. 남조선 괴뢰들의 무분별한 책동은 지이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불과 1백m 거리에 있는 비무장지대안의 경계초소에 대규모 군사시설물을 공개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금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은 완충지대로서의 자기의 고유한 의무를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는 북침을 위한 무장지대로 하나의 새로운 공격출발진지로 전변되었다. 이러한 정세에서 우리도 정전협정에 규제되고 있는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와 관련한 조항을 일방적으로 더이상 준수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자제력과 인내성도 한계가 있다. 조선인민군판문점대표부는 위임에 의하여 비무장지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상황에 따르는 자위적 조치를 당면하여 다음과 같이 취하기로 하였다는 것을 공포한다. 첫째로 조선인민군측은 정전협정에 의하여 지닌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 및 관리와 관련한 자기의 임무를 포기한다. 둘째로 조선인민군측은 상기임무를 포기하는데 따르는 조치로서 판문점공동경비구역과 비무장지대에 출입하는 우리측 인원들과 차량들로 하여금 제정된 모든 식별표식을 착용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책임은 정전협정을 난폭하게 유린하면서 비무장지대에서의 행동질서를 무법천지로 만든 자들이 지게 될것이다. 1996년 4월4일 개성
  • 북 “비무장지대 무시하겠다”/우리측 “정전협정 파기 절대 불용”

    ◎긴급안보회의/한미 연합방위 의거 강경대응/군사분계선 유지·관리 포기 선언/DMZ 북쪽지역 무장화 가능성/북 담화 북한이 4일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와 관리에 대한 임무를 포기하겠다고 전격선언한데 대해 정부는 새로운 군사도발 가능성을 밝힌 것이라고 해석 북한측의 정전협정 파기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경 입장을 천명했다.국방부는 특히 북한이 비무장지대의 무장화 등 군사적 모험주의를 행동으로 옮길 여지가 있다고 보고 군경계태세를 강화하는등 만반의 대응태세를 갖추고 있다. 북한은 4일 『조선인민군측은 정전협정에 의하여 지닌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 및 관리와 관련한 임무를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통일원에 따르면 북한은 이날 「조선인민군판문점대표부」 대변인 명의로 발표한 「담화」를 통해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와 관련한 조항을 일방적으로 더이상 준수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비무장지대의 지위를 유지할수 없게 된 상황에 따르는 자위적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정전협정상의 임무를 포기하는데 따르는 조치로 『판문점공동경비구역과 비무장지대에 출입하는 북한측 인원들과 차량들로 하여금 제정된 모든 식별표식을 착용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이날 담화에서 『남조선의 군사당국은 비무장지대안에 핵무기와 자동무기를 반입하지 못하며 천명이상의 군사인원이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 정전협정의 요구를 무시,각종 구경의 포,핵무기들을 대량 반입하고 수많은 무장인원들을 끌어들여 전개하였다』고 주장했다. ◎협정준수 강력 촉구 정부는 4일 북한이 비무장지대 유지 및 관리와 관련된 임무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데 대해 『정전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새로운 군사도발을 감행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서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날 저녁 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에서 권오기 통일부총리 주재로 열린 긴급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가 끝난뒤 박용옥 국방부정책실장을 통해 발표한 성명을 통해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하여 어떠한 도발행위라도 감행한다면 한미연합방위태세에 의거 즉각 단호하게 응징할 것』이라면서 『북한은 더 이상 무모한 정전협정 파기행위를 중지하고 정전협정 관리기구에 복귀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협력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박실장은 또 『현재의 정전협정은 일방적으로 폐기 또는 수정될 수 없으며 남북한간의 합의를 통하여 항구적 평화체제로 전환될 때까지는 엄격히 준수되어야 한다』면서 『북한은 자신의 입장이 국제적으로 전혀 호응을 받지못하고 있음을 인식하라』고 충고했다. 박실장은 『현재 국방부가 동계훈련활동을 강화중이므로 추가적인 조치는 필요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하고 『그러나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북의 태도를 주시해가며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북한의 태도와 관계없이 우리측은 정전협정의 규정을 준수할 것』이라고 말하고 『북한도 정전협정규정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고 재차 촉구했다.〈이도운 기자〉
  • 「비무장지대 의무 포기」 담화 각계 반응

    ◎느닷없는 북 위협에 “경악”/모험주의적 군사행동 도발 우려/총선 앞두고 안보태세 강화 절실 초저녁 급보에 국민들은 한결같이 놀랐다.그리고 걱정했다.그러나 여유는 있었다. 북한은 4일 퇴근 무렵 기습적으로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 이름으로 휴전 이후 가장 강력한 톤으로 남한에 대한 군사도발을 공언했다. 국민들은 갑작스런 북한의 도발에 얼떨떨해 하면서도 『북한의 속성으로 보아 국지적인 도발의 가능성이 있는만큼 총선을 앞두고 안보태세를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정화 의원(국회외무 통일위원·신한국당)은 『북한이 비무장 지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남북한의 직접 대결구도를 형성하겠다는 협박으로,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노리는 전술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는 『김정일 체제가 유훈통치를 계속하고 있고,군부가 대남 유화정책을 거부하는 상태에서 국지전 형태의 모험주의를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재향군인회의 김정식 홍보부장(51)은 『북한이 적극적인 도발로 긴장을 유도하는 것은 자신들의 체제붕괴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며 『공갈을 통해 체제의 위기를 넘기려는 술책이지만,우리는 의연하게 평소의 안보태세를 점검하면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병욱씨(32·회사원·경기 이천시 부발읍)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조운씨(27·한양대 사학과4년)는 『휴전선으로부터 양쪽 4㎞의 지역은 「비무장」이라는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겠다는 것은,파국을 앞둔 공멸작전』이라고 내다봤다. 심현경씨(31·주부·서울 도봉구 창동)는 『남북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하다』며 『정부는 철저히 사태를 파악해서 북한의 의도에 적극적으로 대응,국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박용현 기자〉
  • 일 야쿠자­북 공관­국내조직 연계/국제 히로뽕밀조단 적발

    ◎중서 2백억대 제조… 국내 반입/3명 구속·3명 수배/부산지검 【부산=김정한 기자】 일본 폭력조직 야쿠자 및 북한공관원 등과 연계해 중국에서 2백억원대의 히로뽕을 밀조,국내로 밀반입한 일당 6명이 검찰과 안기부에 적발됐다. 부산지검 강력부(부장검사 최재원)는 4일 중국산 히로뽕 6.3㎏(시가 2백억원상당)을 밀조한 뒤 국내에 밀반입하려던 연락책 정현준씨(57·동영무역상사 대표·부산시 사하구 신평동 럭키무지개타운 1동 103호)와 운반책 김창규씨(60·덕은무역 전무·”” 괴정4동 1081의 1),자금책 이대근씨(40·무역업·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35의 1)등 3명을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히로뽕 6.3㎏을 압수했다. 검찰은 또 히로뽕제조책 이수영씨(54·무직·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947의 9)와 조선인인 제조보조 김성호씨(30·중국 요령성 반금시),김정언씨(50) 등 3명을 수배했다. 검찰에 따르면 히로뽕제조책 이씨는 지난해 8월 중국 요령성 심양시 고려호텔에서 정·김·이씨 등 3명과 만나 히로뽕을 밀조해 한국등지에 판매키로 하고 지난 1월 중순 밀조책 이씨의 현지처인 김영애씨(27)의 집(요령성 반금시) 창고에서 중국산 염산에페드린을 원료로 히로뽕 6.3㎏을 만든었다. 운반책 김씨 등은 이어 히로뽕을 수입품컨테이너 속에 숨겨 한·중 정기컨테이너선인 조양상선 소속 조양랜드호(1만2천8백10t급)에 싣고 지난달 17일 부산항을 통해 밀반입하려다 첩보를 입수한 수사기관에 적발됐다. 검찰수사결과 이들은 지난해 8월 북한무역업체들과 거래하고 있는 조선족 무역상 박정호씨(36·중국 광동성 광주시)의 알선으로 북한영사관 직원에 부탁,독일산 염산에페드린 4백㎏을 북한을 통해 중국으로 반입한 뒤 히로뽕 3백㎏(시가 9천억원상당)을 제조,일본 야쿠자조직에 팔려다 북한내부사정에 의해 미수에 그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순도가 뛰어난 독일산 염산에페드린을 구입하기 위해 북한상대 무역상인 박씨에게 8억원을 지급하기로 하고 북한 무역회사가 독일로부터 적법하게 수입하는 것처럼 신용장을 개설했다.
  • 6·25때 미군이 압수,노획/북 극비문서 대거 공개

    ◎일 공산당기관지 전 평양 특파원 【도쿄 연합】 6·25때 북한에 진주한 미군이 압수,노획했던 방대한 분량의 북한 극비문서들이 15일 한 일본인 연구가에 의해 공개됐다. 일본 공산당기관지 아카하타(적기)의 전평양특파원(72∼73년) 하기와라 료(추원료·59)씨가 미 워싱턴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굴한 이 문서들은 45년 8월부터 51년 6월까지의 북한 당·정·군 극비지령등 내부 문건이다. 이들 압수문서 가운데는 베일에 싸여온 북한 보안·사법기관의 극비문건을 비롯,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이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49년 중반 조선계 중국군 3만명을 극비리에 조선인민군에 편입시키는 단계에서부터 남침을 획책했던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문건등이 대거 포함돼 있다. 특히 남침관련 극비 문건으로는 당시의 남침이 5단계를 밟아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절대비밀」,개전 직후 「남침 증거」로 미군이 공표했던 「전투명령 1호」 원본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 문서에 따르면 점령 소련군은 해방 직후 기근상황에 있던 북한에 당시 연간 쌀수확량의 25%인 20만t(1백40만석)의 공출을 지시한 사실(평안북도 인민위원회 사법부 「사업보고서」·46년 4월)이 새롭게 드러나 있다.
  • 일제 한국인 60만 전시 징용/민족문제연 일 정부자료·문헌 분석

    ◎1935∼45년 미병 21만·정신대 20만 포함/일서 기록한 최소치… 보상 유효기준 될듯 일제가 전쟁을 치르면서 동원한 한국인은 얼마나 될까.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한햇동안 일본 정부기록과 문헌들을 분석해 최근 발표한 「일제의 전시(1935∼45)인력수탈」연구결과는 전쟁터로 강제동원된 한국인의 수를 제시한 첫 종합적인 분석결과라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특히 이 숫자는 일본 기록에 나타난 한국인 동원의 최소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일 양국간에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보상측면에서도 유효한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제가 전쟁중 전쟁터로 직접 동원한 한국인은 육군특별지원병과 징병,학도지원병,해군특별지원병 및 해군,군속,여자 정신대 등 최소한 60만3천3백85명.1938년부터 1943년까지 동원된 육군특별지원병 1만7천명을 비롯해 1944년 징병 21만명,학도지원병 4천3백85명,해군특별지원병 및 해군 동원 2만2천명,군속 15만명,여자 정신대 20만명 등으로 돼있다. 이가운데 육군특별지원병은 1938년 2월 2일 칙령 제95호로 공포돼 4월 3일부터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제도에 따라 동원된 병력. 1944년 7월 일본 내무성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육군특별지원병은 1938년부터 1943년까지 6년동안 모두 1만7천6백64명으로 돼있다.1938년 입소자가 4백6명,1939년 6백13명이었다가 2차세계대전 발발후인 1940년부터 급증해 1940년 3천60명,1941년 3천2백8명,1942년 4천77명,1943년 6천3백명으로 늘어갔다. 이 육군특별지원병의 강제성은 1941년 일제관헌이 실시한 지원자 동기조사에서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조사에 따르면 자발적 지원이 5만1백84명인데 비해 관 종용이 7만9천6백72명으로 나타나 일제 관헌측이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지원보다는 일제의 종용에 의해 지원했다고 응답한 사람이 훨씬 많았음을 알수 있다. 일제의 징병제도는 1943년부터 시행됐는데 1944년 8월 제85회 제국의회설명자료에 따르면 1944년 7월말까지 신체검사를 받은 총인원수는 20만6천57명에 이른다.후생성 복원국도 동원자수를 육군 18만6천9백80명,해군 2만2천2백90명 등 총 20만9천2백70명으로 보고 있어 1944년 당시 조선인 징병자 총수는 약20만∼22만명 정도로 집계된다. 또 1943년 10월 20일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 시행에 따라 조선인 전문학교 및 대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을 소집해 특별간부로 채용한 학도병(학병)도 1943년 10월부터 1944년 1월 20일까지 4천3백85명이나 됐다.일본제국의회와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강제 입대한 학병은 조선내에 9백59명,잠시 귀국중인 일본 유학생 1천4백31명,일본 잔류학생 7백19명,9월 단축졸업생 9백41명,취직중인 졸업생 3백35명 등 모두 4천3백85명으로 이 수치는 1944년과 1945년도 입대자를 제외한 최소치에 불과하다. 이밖에 1943년 5월 12일부터 실시된 해군특별지원병제도에 따른 해군 동원도 1944년 5월까지 9천6백29명 (제86회제국의회 설명자료)을 포함해 총 2만2천2백90명(공안조사청의「재일조선인개황」)이나 됐으며 군속(군요원 징용)도 육군 7만4백24명,해군 8만4천4백83명 등 15만4천9백7명(공안조사청의「재일본조선인개황」)에 달했다. 특히 여자정신대(군위안부)의 경우 지금까지 국내외 연구자료에 따르면 20만명이 강제동원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이른바 「여자정신대근로령」이 발동된 것은 1944년 8월부터.그러나 군위안부의 경우 1932년 3월과 1937년 12월의 상해파견군,1941년 7월 관동군 등 파견군에 의한 군위안소가 그 이전부터 설치됐고 일본 육군성의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등 종군위안부정책의 통제와 지도관련 문건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만주사변 직후부터 정신대 동원이 시작되어 1944년부터 일반화된 것으로 봐야한다는게 이 연구결과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봉우소장은 『이번 연구결과에 나타난 일제의 한국인 동원은 단지 일제말 전시하라는 특정 시기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서 『강제노무동원이나 군관계 동원에 포함되지 않았던 어린아이나 여성,학생에 대한 무차별 동원을 포함한 일제치하 모든 시기의 한국인 동원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가 실시돼야 할때』라고 말했다.
  • 조선의용군 이홍광 지대(압록강 2천리:26)

    ◎중국인민군 조선족군맥의 뿌리/항일투쟁은 물론 중국 해방투쟁에 동참/주로 토비소탕 참여… 장개석군과도 혈전/의용군 1지대로 출발… 전사장군 이름으로 바꿔 오늘날 중국대륙의 조선족은 중국공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떳떳한 요소들 몇가지를 지니고 있다.특히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닦은 동북 조선족들은 항일투쟁은 물론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도 동참했다는 사실을 가장 큰 요소로 지니고 있다. ○조선족출신 장군만 28명 그리고 단일민족으로 여러 민족들과 함께 생활하고 교류하는 가운데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이 된 것도 그 요소의 하나일 것이다. 조선족은 중국의 해방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위해 전과를 올리고 공적을 쌓았다.1946년부터 1949년까지 희생된 조선족 지휘원과 병사는 3천5백50명에 이른다.그 시기에 숱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중국인민해방군의 조선족장군이 28명이었으니 조선족의 활약상은 알만한 일이다.중국인민해방군 전총후군부장 조남기 상장,전 공군부사령원 이영태 중장,전 모집단군 정위정술주 소장,전 성군구 정위 옥종환 소장 등이 그들이다. 옥종환 장군(65)은 지금 요령성 심양시에 살고 있다.일본이 허수아비로 세운 만주국 국무총리 자택 옆에 지은 자그마한 2층 양옥이 그의 집이다.1933년 고향인 경남 통영군 연초면 천곡리에서 부모등에 업혀 길림성 통화현대천원촌 신개령으로 이주해왔다.나이 열다섯살에 이미 참군한 그는 남전북전 빗발치는 탄우속을 넘나들었다.불치의 암으로 두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쾌활하고 소탈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내 전우들은 꽃다운 나이에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웠습네다.그분들에 비하면 오래 산 셈이야요.그러나 후회는 없다고 생각합네다.올바른 길이라면 가시밭 불길이라도 걸어갔으니까….나처럼 어린시절부터 전장에 뛰어드는 불행한 시대는 다시 오지 말아야 합네다.내 시대에 흘린 피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을 하디요』 옥장군 댁을 찾은 날이 마침 토요일 하오여서 군시절 수하의 조선족 장병 등 많은 손님들이 몰려들었다.그 집의 인심을 읽을 수 있을 듯한데,부인께서 손수 차린 상이 들어왔다. 오징어볶음에 토장을 풀고 고사리를 넣은 개고깃국이며 김치와 깍두기가 입맛을 돋우었다.채소는 부부가 텃밭에서 가꾼 것이라고 했다.부인은 해마다 김치를 많이 담근다면서 명절날이면 집을 떠나온 조선족 장병들을 초청하기 때문에 여간 많이 담지 않고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 조선족 장군들의 뿌리는 거의가 이홍광지대에 두고 있다.이홍광지대는 일본군에 대항한 조선의용군의 한 부대로 19 45년 9월 하순 연안을 떠나 동북에 도착한 팔로군소속 조선인들도 뒷날 이 부대에 합류했다. 본래는 조선의용군 제1지대였으나 1946년 2월23일 이홍광지대로 개칭했다.조선의용군은 총부를 심양에 두고 북한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다.그러나 소련군이 막아버려 동북3성 조선족 집거구로 파병되었다. 이홍광지대로 개칭되기 이전의 제1지대는 압록강 유역인 남만,제3지대는 흑룡강성 일대인 북만,제5지대는 연변,제7지대는 연변을 제외한 길림성 일대에 자리잡았다.제1지대가 이홍광지대로 개칭될 무렵의 지대병력은 1천2백명에서 자그마치 5천명으로 늘어났다.처음에는 토비소탕 임무를 맡았다가 그 다음에는 장개석 국민당군과 대항하는 피나는 열전을 벌였다. ○동북해방군에 편입돼 국민당군과의 전투는 아주 치열했다.당시 모택동의 팔로군에서 넘어와 이홍광지대에 배속된 주재덕선생(2월22일자 11면 참조)의 증언을 들어보면 중국 해방전쟁에서 조선족 활약은 컸다. 『내가 이홍광지대 제1영 제3련의 연장(중대장급)으로 있을 때 조성두라는 전사가 배치돼 왔디요.그 사람 나이가 스물두살인가 기랬는데 오자마자 전투가 벌어졌지 뭡네까.1947년 2월28일로 기억되는 그 전투는 휘남현을 포위공격하는 일이었디요.현성에는 국민당군 한 개의 정규사단과 보안부대,지방군 몇개 중대가 버티고 있어서 한치도 진군할 수가 없었습네다.단장(연대장)은 진군하라고 다그치고….그래서 나는 폭파대를 조직하고 조성두한테 진공명령을 내렸읍네다』 국민당군 토치카와의 거리는 직선으로 1백70m.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없는 민둥산에는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조성두는 눈 쌓인 민둥산을 포복자세로 기어올랐다.국민당군 토치카 50여m까지 접근한 조성두는 날아온 총탄에 명중되었다.10여분이 흘렀을까.조성두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눈위로 피가 흥건히 배었다.조성두는 필사의 포복으로 토치카에 다달았다.그리고 지뢰를 안은채 토치카로 기어들어갔고 이내 폭음이 진동했다.그는 중국인민해방군사에 빛나는 사실상의 첫 폭파영웅이었다. 이홍광지대는 이어 조선의용군에서 동북해방군에 편입되어 독립4사로 있다가 제164사로 들어갔다.활동지역도 동북지방에서 멀리는 장강을 넘어 해남도로까지 확대되었다.단동시 영예군인요양원 원장직에서 정년으로 퇴직한 송재조(68) 선생은 본래 경북 성주 사람인데 해남도에 상륙했던 동북해방군 출신이다. 『나는 1946년 5월에 참군하여 동북해방전쟁을 겪고 곧바로 남하했디요.여주반도에 이르러 몇 달을 두고 해남도를 칠 준비를 했드랬습네다.똑딱선 한 척도 없고 모두가 나무배였드랬는데,그거이 중국해방군 첫 해군이었디요.1950년 나무배를 타고 해남도 등륙전(상륙전)에 참가했더니 국민당군 비행기가 가만두지 않더란말입네다.다행히 살아서 등륙은 했으나 섬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말았수다.며칠 안되어 다리가 썩더니 구더기가 꼬입데다.그래서리 다리를 잘라버렸디요.스물세살 때 기랬습네다』 ○이홍광장군 석상세워 그러면 이홍광지대에서 보이는 이홍광이라는 인물은 누구인가.이홍광(1910∼35년)의 본명은 이의산이다.경기도 용인 태생으로 항일연군 제1군 독립사를 이끌었다.양세봉장군과 연합작전을 펴기도 했던 그는 1935년 5월의 한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요령성 환인현 흑할자밀영에서 35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그러니까 남만일대에서 소문난 항일 명장이었다. 이홍광의 이름으로 조선의용군에 이홍광지대가 생긴 이후 압록강유역 중국땅에서 그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졌다.어떤 조선족 마을은 홍광촌이라 했고 요령성 관전현과 길림성 반석현에서는 조선족 학교를 건립한 뒤 각각 홍광중학교로 학교 이름을 지었다.그리고 반석현 홍광중학교 운동장과 요령성 신빈현에는 이홍광의 석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이홍광지대의 군맥은 중국 뿐 아니라 북한군에도이어졌다.이홍광지대 제1임지대상 김웅은 인민군 제1군단 군단장이 되었다.1950년 전쟁을 일으키고 서부전선을 맡아 서울로 들어간 인물이다.또 이홍광지대 정치위원장이었던 방호산은 제1군단 6사단장을 거쳐 군사과학원장을 맡기도 했다.
  • 간도특설부대(압록강 2천리:25)

    ◎만주 군관출신 한인배치… 일제,대륙침략 악용/열하·하북 지역 팔로군 소탕이 주임무/해방후 귀국인사들 장군으로 출세가도/당시 소대장 마쓰모토소위는 박 전 대통령 설도 중국 동북지방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었을 뿐 한반도와 연결되었다.그래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정학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특히 일제는 그 강점기에 중국 동북지방에 허수아비격의 만주국을 세워 통치수단으로 한국인까지 끌어들였다.그런 연유로 만주국 군부에도 한국인이 대거 참여했다. 그 만군군사조직에는 간도특설부대가 있었는데 목단강성 제6군관구의 지휘를 받았다.처음에는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1939년 조선인특설부대로 창설했다가 그 뒤에 간도특설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이 부대는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활동지역을 오늘의 길림성 일부지역인 간도 일대에서 열하와 하북지방으로 확대했다.전쟁말기의 주임무는 공산당의 팔로군 소탕이었다. 그러니까 만군에 들어간 한국인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해 싸운 셈이다.요령성의 성도심양에서 만난 주재덕(76)선생은 간도특설부대에서 근무한 조선족이다.1943년말부터 특설부대에서 정보를 담당했던 그는 지금 중국해방군 동북관리국 요령성 경제개발합작총공사 부총리로 일하고 있다.일본의 침략을 위해 그것도 공산당의 팔로군 소탕 일선에 섰던 인물이 요직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것이다. ○제6관구의 지휘 받아 그러나 이면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깔려있다.그가 털어놓는 인생역정은 파란만장했다.간도특설부대 정보요원에서 팔로군으로 투항,공산당 입당,전범으로 체포,석방이라는 명암의 세월을 살았다.이제야 양지로 돌아온 그는 간도특설부대 시절을 회상했다. 『특설부대는 대대병력을 가지고 있었디오.대대장은 중좌나 소좌였는데 보직은 일본인에게 돌아갔습네다.소대장은 준위에서부터 소위·중위들이 맡았댔디요.그 하위지휘관인 소대장만큼은 조선사람에게 줬지 뭡네까.모두가 창씨 개명을 해서 조선사람일지라도 일본식 성으로 불렀습네다.해방이 되고나서 한국에 돌아가 모두 장군이 됐다고 기래요.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고…』 대통령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그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키가 작고 야무지게 생겼던 마츠모토 소위였다고 말했다.소대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한국에서 나온 박정희관계 책들을 보면 그가 간도특설부대 소대장으로 복무했다는 기록은 없었기 때문이다.그가 만주군관학교 시절 창씨개명을 했을 때도 마츠모토가 아니라 다카시라는 성씨에 마사오라는 이름을 써서 한문으로 고목정웅이었다.그래서 일단 아귀가 맞지 않는 다고 생각하면서 주선생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특설부대에 들어가서 반년쯤 훈련을 받자 부대가 열하성으로 들어갑데다.조선말은 물론이고 중국말에 일본말까지 잘 하는 날 더러 정보반에 근무하라고 기래요.거기 근무하면서 가는 곳마다 대동아공영권건설을 역설해댔디요.포로를 심문할 때면 매도 대고….내손으로 사람도 죽였수다.한번은 팔로군과 접전이 붙어 멀리서 총을 쏘았더니 하나가 고꾸라집데다.그리고 심문하던 포로가 도망을 치길래 권총으로명중을 시켰디요.팔로군 정찰원 사광화·장립귀·등우룡은 총살 직전 정보반에 쓰겠다고 살려주기도 했디요.나쁜 일만 한 것은 아닙네다』 ○43년 열하성으로 이동 간도특설부대가 활동무대를 간도에서 열하성으로 옮긴 것은 1943년말의 일이다.그 무렵에는 목단강성에서 이동해온 만주군 보병 제8단 본부가 역시 열하성에 주둔하고 있었다.한국에서 나온 여러 저술을 보면 당시 만군 소위였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만군 보병 제8단에 배속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만군 제8단도 간도특설부대 처럼 모택동휘하의 팔로군 토벌이 주임무였다.그러나 간도특설부대와 임무가 같았을 뿐 박정희소위가 특설부대에 근무했다는 대목은 없다. 그러면 주재덕 선생의 증언에 착오가 있는 것일까,아니면 한국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가려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어떻든 주재덕 선생이 들려주는 만군시절 박정희소위 행적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심지어는 박정희소위가 한때는 팔로군으로 투항할 뜻까지 품었다는 것이다. 『팔로군 포로를 오래 심문하다 보니 내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한다는 생각이 듭데다.그래서 포로로 잡힌 팔로군 정찰원을 통해 하북성 팔로군 이운창 사령한테 투항할 뜻을 전하는 편지를 몰래 보냈디요.그리고 나서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는 회신이 팔로군 정보망을 돌아서 왔디요.혼자 고민하다 조선사람인 가네카와 중대장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더니 동의하더란 말입네다.중대장 말이 내가 내부는 책임질테니 계속 팔로군과 접촉하라고 명령합데다.그러나 집단투항은 일본 헌병이 방해가 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네다.다만 나는 1944년 8월 하북성에서 혼자 투항할 수 있었디요.마츠모토 소위는 단기교육을 가서 부대에 없었던가 기래요』 ○팔로군으로 투항 속출 그래서 특설부대요원 주재덕은 1944년말에 팔로군이 되었다.팔로군에 겨누었던 총부리를 일제쪽으로 돌린 그는 해방을 맞고서 팔로군 이홍광지대 중대장으로 올랐다.그리고 공산당에 가입해 많은 공을 세웠다.1949년 모택동과 주재덕의 명령에 따라 이홍광지대가 북한으로 건너갈때 그는 심양에 그냥 남았다.심양에서 대퇴(제대)한 이후 요령성 본계로 들어가 화학공장을 맡아 경영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하더니 그에게 곧 불행이 닥쳐왔다.연변 공안당국에서 경찰을 보내 그를 체포해버린 것이다.1958년 연변법정이 내린 판결서는 어마어마한 벌을 내렸다. 「죄범 주재덕은 1943년 4월10일 만주국 간도특설부대에 들어가 정보반에서 1년4개월 근무하는 동안 하북성 팔로군을 토벌하는 등 일제의 주구로 갖은 악한 죄를 범하여 법에 의해 총살한다」는 것이었다.그는 25년간 전범으로 감옥에 살다가 문화대혁명 이후 탄원서를 내어 1983년 무죄석방되었다. 『사형판결은 청천병력 같은 것이었디요.죄를 졌다해도 투항해서 혁명을 위해 숱한 공을 세웠으니끼리 지난 일은 묵과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네다.석방되어 나왔을 때 내 나이 예순세살이었수다.만약 내가 팔로군에 투항하지 않고 특설부대 요원들과 어울려 한국에 갔더라면 별 하나는 달았디 않겠습네까』 한국으로 간 특설부대 요원들은 출세가도를 달렸다.제1중대장 가네카와라는 김 아무개는 한국군 중장까지 올라갔고,경찰출신이었던 기포중대장 히로카와는 소장이 되었다는 것이다.특히 소대장으로 가장 유명했던 마츠모토 소위는 바로 박정희대통령이었다는 고집을 그는 끝내 버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 하나를 더 곁들였다.간도특설부대는 해방소식도 모르고 팔로군과 접전을 벌였다는 것이다.특설부대 요원들은 뒤늦게 무기를 버리고 동북으로 가는 길에 조선의용군부대를 만나 의용군에 가담하려다 심사가 두려워 개별적 고향에 돌아갔다고 했다.
  • 재미 일본어연구가 박병식씨 서울신문 뉴스넷 보고 기고

    ◎“독도는 어원으로도 한국 땅”/조선인들,울릉도·독도 포함해 우산국으로 불러/일본의 죽도(다케시마)는 우산국 이두음의 일본식 발음 독도를 부르는 일본식 이름 「다케시마(죽도)」는 우리말에서 비롯됐으며,따라서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태도는 근본적으로 허구임을 지적한 주장이 나왔다.현재 미국에서 한일고대사를 연구하는 박병식씨(66)는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전송되는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에서 독도 관련 보도를 접한후 21일 서울신문 도쿄특파원실에 보낸 기고문에서 다케시마가 독도의 조선시대 표기 가운데 하나인 「무릉」에서 나왔음을 설명했다.박씨는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나와 한일고대사를 연구하다 지난 8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그곳에서 「야마토언어와 고대조선어」,「일본어의 비극」등 일본어 어원을 활용해 한일고대관계를 밝힌 논문·책 20여종을 냈다.그의 기고문을 간추려 소개한다. 일본인들은 17세기 초 독도를 「마쓰시마(송도)」로 불렀고 나중에는 「다케시마(죽도)」라고 불러왔다.바윗덩어리나 다름없는 섬,소나무나 대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 섬을 일본인들이 소나무섬(송도)또는 대나무섬(죽도)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일본인이 독도를 다케시마나 마쓰시마로 부른 까닭을 어원으로 따져보면 그들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허구임이 드러난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은 섬이다.그래서 울릉도에 속한 섬쯤으로 여겨졌고,조선 중기 「독도」라는 이름을 따로 갖기까지는 울릉도가 곧 독도 이름이었다고 볼 수 있다.「삼국사기」에 나오는 울릉도의 첫이름은 「우산국」으로 우리말을 한자로 표현한 이두이다.우산국의 「우」는 「우/오」라는 우리말 발음을,「산」은 「마/무(뫼의 옛말)」라는 뜻을 각각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또 울릉도의 「울」은 「우/오」,능은 「리/라」를 의미한다.곧 「우산」은 「우마」,「울릉」은 「우리/우라」라는 말을 한자로 쓴 데 지나지 않는다.우리 옛말에서 「우/오」는 「위(상)」또는 「크다(대)」는 의미이고,「마」는 「뫼(산)」를 뜻한다.또 「리/라」는 「신성함」을 나타냈다.따라서 「우마(우산)」는 「(바다에 우뚝 선)큰산 같은 섬」,「우리/우라(울릉)」는 「크고(또는 높고)신성한 섬」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일본 「대일본지명사서」에도 『울릉도를 조선사람이 「우마」라고 불렀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 섬의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등 조선 중기이후 역사책·지도에서 「무릉」이라고도 표기됐다.「무」는 「무(마)」,「릉」은 「리/라」이니 「무릉」도 결국 「무리/무라=신성한 산」이란 의미로 「우산」 「울릉」과 별차이가 없다.이 「무릉」에서 일본이름 「마쓰(송)」와 「다케(죽)」가 나왔다.「무리(무릉)」란 발음은 일본으로 건너가 「마르」,다시 「마쓰」로 바뀌었다.「마쓰」를 일본 한자로 표기한 것이 「송」이다. 「무릉」은 또한번 재주를 넘는다.이번에는 일본인들이 한자음대로 읽어 「다케루」라 한 것이다.「다케루」는 「다케」로 발음이 줄었고,이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죽(다케)」다.정리하면 「마쓰시마」의 「마쓰」는 「무릉=무리」란 우리말 발음에서,「다케시마」의 「다케」는 한자말 「무릉」을 저들 한자음대로읽은데서 나온 이름으로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나무 한그루 변변히 없는 섬 독도가 한때는 「마쓰시마(송도)」로,지금은 「다케시마(죽도)」로 불린 원인을 일본인들이 안다면 지금처럼 억지주장을 되풀이하지는 못할 것이다.이름으로 봐도 독도는 엄연한 우리땅이다.
  •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진상/전재진·무카이 미도리 편역(화제의 책)

    ◎폭침당시 우리측 피해자·일 승무원 증언 등 수록 태평양 전쟁당시의 일본군 위안부는 국제법 위반이므로 일본은 법적배상을 해야한다는 유엔인권위원회 특별보고관의 보고서가 최근 나와 큰 관심을 끌었다.위안부 문제는 오랜 쟁점으로 조명받았다는 점에서 그래도 나은 경우.일제에 의한 조선인의 부당한 희생중엔 알려지지 않은 일들도 너무나 많다. 이 책은 이처럼 그늘에 묻힌 일제수난사의 하나인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을 다루고 있다.이는 해방 10일뒤인 지난 45년 8월24일 일본 북단 혼슈의 오미나토 항을 출발한 우키시마호가 교토 근해에서 폭발사고로 침몰한 사건.배에는 시모키타 지역 등 징용 한국인 3천7백25명이 부산행 귀국선인 줄로만 안채 승선해 있었다. 책에서는 당시의 정황을 자세한 사건일지로 정리하면서 기뢰를 잘못 건드린 「단순 촉뢰사고」라는 일본측 주장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기뢰 위치를 알리는 기밀해도 하나 없이 항해사의 거부에도 강제로 출발시킨 점,당초 목적지인 부산과 멀리 떨어진 교토근해로 접어든 점 등으로 미뤄계획된 학살에 더 가깝다는 것.현지주민,일본인 승무원,우리 피해자의 증언도 수록했다.지은이는 시모키타 지역문화연구소 우키시마호 사건 증언을 추진하는 회장이다.옮긴이 전씨는 지난 12월 뒤늦게 결성된 진상규명위원회 회장.가람기획 8천원.
  • 단동시 영화산기슭 항미원조기념관(압록강 2천리:23)

    ◎한국전 유물 1천여점 10곳에 전시/부지 18만㎡에 연건평 1만2천㎡… 58년 건립/김일선·모택동 친필서한·명령서등도 전시/영웅실엔 전사한 모택동 맏아들 석고상도 중국과 북한이 손을 잡고 치른 한국전쟁을 통해 오늘의 단동시인 당시 안동은 영웅도시가 되었다.그로 인해 1958년 9월 중앙문화부의 비준을 거쳐 안동에 이른바 항미원조기념관이 세워졌다.이 기념관이 오늘의 모습으로 확장된 것은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 93년의 일이다.기념관의 확장은 19 83년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단동(안동)에 들른 중앙군사위 부비서장 홍학지의 주선으로 실현되었다. ○등소평 친필 든 탑 세워 항미원조기념관은 단동시 한복판에 우뚝 솟은 영화산기슭에 있다.글자 그대로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북한)을 원조한 전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의 현판은 당시 중국인민항미원조총회 곽말약(곽말약)이 썼다고 한다.18만㎡나 되는 부지에 1만2천㎡에 이르는 건물을 지었다.그리고 지난 1953년에는 등소평동지의 친필이 든 높이 53m의 탑을 세웠다.탑높이 53m는 1953년의 정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기념관에는 10개의 전시실을 두어 한국전쟁에 관한 1천1백8건의 문물이 전시되었다.이 가운데 주목을 끈 자료는 김일성이 모택동주석에게 보낸 친필서한이다..연합군의 반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중국의 지원을 간곡히 요청한 김일성의 친필서한은 여러 자료 가운데 백미인지도 모른다.김일성 서한 옆에는 중국 인민지원군 조직을 채근한 모택동의 친필 명령서가 나란히 진열되었다. 그러니까 대륙의 거인이던 모택동의 휘필 한점은 결과적으로 중국을 스탈린과 김일성이 합작한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그 명령에 따라 1백만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화속으로 뛰어든 것이다.장백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한 조선족 서군(65)선생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당시 중국지원군 참전상황이 잘 드러난다.19 50년 당시 장백현 공청단위원회 선전부장이던 그는 한달 훈련을 받고 중국지원군 고사포부대 제1사 제1탄소속 부중대장으로 참전했다. 『가을이 깊을대로 깊은 10월19일로 기억하지비.그날밤에 안동을 떠나 장전하구로 와서 이내 압록강철교를 건넜수다.극비의 행동이라 중국말도 못하게 했고 중국을 떠날 때 글이 있는 물건은 못 지니게 했구마.삭주를 거쳐 평안남도 북진에 도착한 것이 10월28일인가,그렇지비.그날밤 거기서 5리쯤 떨어진 영봉에서 우리 지원군과 미군이 첫접전을 붙지 않았겠슴둥.그게 운산전투였지지비』 그 운산전투에서 미군은 3일간 포위되었다.11월1일 미군이 포위망을 뚫었으나 지원군은 미군 2천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그 무렵에 지원군을 「38군」이라고 불렀는데 모택동이 「만세 38군」이라는 친필까지 내려 전공을 치하했다.그러나 지원군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특히 서군선생이 소속된 고사포부대는 박살이 났다.장비가 일본군이 쓰던 것이라 포탄이 포신에서 발사되어도 12초가 지나야 터졌다.그런 상황이어서 미군의 포격과 공습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서군선생이 소속한 고사포부대는 12월25일 압록강을 다시 건너 요령성 금주시로 철수했다.거기서 소련제37.85포로 재무장하고 이듬해 3월18일 집안을 거쳐 만포로 건너갔다는 것이다.미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 비해 모든 장비가 열세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단동의 항미원조기념관에서도 확인되었다.기념관내 공군진열실에서 본 쌍방의 공군장비에서는 너무 엄청난 차이가 났다.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은 전체 전투기가 2백대도 안되었지만,연합군비행기는 1천2백대였다는 것이다. ○연합군 비해 장비 열세 1951년 3월15일 지원군 공군사령부가 안동에 창설되었다.사령원은 유진이었는데,더러 미그15기가 F84 미군기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그러나 공중전 전과는 미미한 것이어서 조선인민군과 함께 대공포화에 중점을 두었다.요령성 관전현 석호구향 보산촌에 사는 김창권(66)씨는 전쟁 때 고사기관총소대에 복무했다.방호산이 사령으로 있던 조선인민군 제5군단 12사 1연대 1중대 고사기관총소대 사수이던 그는 당시 활동상을 소상히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고사기관총소대는 대우가 달랐디요.일반전투원은 하루 배식량이 8백g이었는데 우리는 1천g이었단 말입네다.12.7㎜ 소련제 고사기관총으로 무장했는데,재수가 좋으면 적기를 명중시켰디요.함경남도 함주군에 주둔할 때니끼리 1951년 1월18일 오전쯤 됐을 겁네다.미군기 한대가 저공으로 공격해와서리 갈겼디요.그거이 명중되어 처음 한대를 잡고서리 뒤에 두대를 더 잡았디 뭡니까.그래서리 전사영예훈장 2급을 받았댔습네다』 그에게는 일생동안 무료치료에 자식의 대학진학특전 등이 돌아왔다.그러나 중국으로 오는 바람에 한때 무효가 되었으나,지난 1987년 전공을 다시 인정받아 지금은 매달 3백원씩 연금을 받는다는 것이다.그는 전쟁을 회고하기를 떴다하면 미군 비행기고,아군기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말로 대신했다.그렇듯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북한은 물론 중국쪽 국경지대에도 낙하산부대들이 투하되었다. 1952년 11월15일 백두산일대에 낙하산병이 투하되자 장백·임강·무송현이 발칵 뒤집혔다.경찰과 민병대가 동원되어 5주야를 산을 수색했다.이들에 의해 1명이 사살되고 15명을 포로로 잡았다.「장백현지」를 보면 이보다 앞서 1951년 6월29일 낙하산 침투병을 잡는 데 공헌한 장백현 12도구 사람 채후남(1888∼1974년)이야기가 인물록에 나온다.채후남은 마을에 살다 행방불명된 김형길이라는 청년이 낙하산으로 떨어져 이미 이사한 어머니를 찾아 숨어든 것을 신고했다는 것이다. ○관광·참배객 줄이어 항미원조기념관 맨 위층에 마련한 전쟁묘사공간 「청천강전역」은 스케일이 엄청 컸다.그림과 실물조각,조명과 음향이 한데 어울린 이 공간은 높이 17m,너비 1백32m나 되었다.마치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그 공간을 넋잃은 듯 바라보는 노인이 있어서 말을 걸어보았다.아니나다를까,전쟁에 참가했다는 노인이었다.자신을 평안북도 창성 태생으로 지금은 단동시에 사는 조선족 최정근(69)이라고 소개했다. 『은산전투를 마치고 청천강으로 나갔다.나는 포병이라 부근부대를 뒤따라 조을리에 이르니 전투가 끝났다고 그라데…,시체가 즐비해서 밤이면 얼어서 뻣뻣한 미군시체를 바람막이로 쌓아놓고 잠을 잤디 않았갔수.죽은 미군 신발을 벗겨 신는 것은 약과고 속옷까지 벗겨 입었으니 원….손을 옷속에 넣으면 이가 한줌씩 잡혔으니 별도리가 없었디』 전쟁은 가혹한 것이었다.항미원조기념관 영웅모범열사실에는 모택동의 맏아들 모안영의 석고상이 전시되었다.지원군사령부 근무중 미공군 폭격에 사망한 그의 유해는 북한에 묻혀 있다.어떻든 전쟁은 비극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그렇다면 항미원조기념관은 전쟁예찬이 아닌 전쟁억제에 더 큰 비중이 깔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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