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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권력재편… 군부 급부상/새주석단 서열

    ◎김영주 4위­강성산 8위 “건재” 북한의 김정일이 참석한 가운데 25일 평양에서 열린 조선인민군 창건 65주년 열병식에서 북한 권력의 재편을 드러내는 새로운 주석단 서열과 함께 그동안 실각된 것으로 알려졌던 강성산과 김영주가 참석해 주목된다. 평양방송이 보도한 새주석단 서열에는 호위사령관 이을설과 총정치국장 조명록,총참모장 김영춘의 서열이 지난 1월 금수산궁전 참배서열 9·10·11위에서 5·6·7위로 급부상해 군부의 권력전면 부상이 두드러졌다. 이와함께 부주석 김영주와 강성산이 각각 서열 4위와 8위로 호명돼 아직 건재함을 나타냈으나 평양방송은 주석단 서열에 강성산의 공식직함은 밝히지 않아 그가 총리직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작가 겸 평론가 이인화 이대 교수 「인간의 길」내

    ◎첨삭과 허구로 그린 「소설속 박정희」/반항아 기질 주인공의 「운명을 거부한 삶」/2∼3부 「혁명의 길」·「나의조국」 등 10권 예정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소설적인 인물입니다.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탐내볼만한 주인공이지요』 작가이자 평론가인 이인화씨(31·이화여대 교수)가 박 전 대통령을 모델로 소설 「인간의 길」을 살림출판사에서 펴냈다.현재 나온 1,2권에 이어 다음달 나올 3권으로 「인간의 길」을 마감한 뒤 「혁명의 길」과 「나의 조국」으로 이어지는 모두 3부작 10권으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우리 역사가 배출한 많은 인물 가운데 박씨만큼 자신의 운명을 극단까지 살아낸 카리스마적 존재가 있을까요.선·악 양면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인물,마키아벨리스트인가하면 휴머니스트이기도 했던 국가주의자 박씨는 고유명사를 넘어선 보통명사,인문학적 탐구대상이라는 생각입니다.역사의 굵은 능선이 된 한 특별한 인물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인간의 길」은 일제시대 만주군 장교 허정훈의 삶을 그 조부 허생원 대로부터 그려내고 있다.극양의 사주로 태어날 때부터 파멸의 운명을 예고받은 아버지 선영은 아니나다를까 동학혁명에 가담,멸문을 자초하고 폐인이 된다.정훈은 일제시대 그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나 굴종과 가난을 팔자로 받아들이는 조선인의 삶에 반발,대구사범학교로 만주군관학교로 떠돌지만 운명을 거부하는 반항적 기질때문에 무수한 죽을 고비를 넘긴다.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가 바로 베토벤은 아니잖습니까.박씨의 화신 허정훈 역시 첨삭과 허구가 따른 인물입니다.창조된 주변인물과 역사설정도 많지요.하지만 창작자의 이같은 개입은 운명을 딛고 일어선 한 초인적 인물을 더 강렬하고 장엄하게 형상화하기 위한 범위내에서 이뤄졌습니다』 최근의 박정희 재평가 분위기속에서 이 소설은 문단안팎으로 곱건 굳건 적잖은 시선을 모으고 있다.하지만 이씨는 이같은 시류가 반갑지만은 않다.사회 분위기가 지식인들의 몸사리기를 불러와 거쳐야 할 논쟁을 가로막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버트란트 러셀도 언급했듯이 우리는 악한 인간의 극단적 운명에서 더 많은 것을 암시받습니다.그런 의미에서 전범없이 흔들리는 최근의 지식인사회에 이 소설이 하나의 전망을 암시하는 기폭제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이씨는 역사적으로 충분한 평가가 선행되기를 기다리며 박씨에 대한 보다 사실적인 접근과 가치판단이 불가피할 2부 「혁명의 길」,3부 「나의 조국」 등 60년대 이후의 밑그림그리기를 21세기로 미뤘다.
  • 한국근로자에 파업 촉구(북녘 뉴스라인)

    북한 노동신문은 28일 한국 각 산업체의 봄철 임금협상을 앞두고 『근로인민들의 살길은 투쟁뿐이다』『완강한 투쟁으로 본때를 보여야 한다』 등 선동성 구호를 외치며 근로자들의 파업과 투쟁확산을 부추겼다. ○수출품 많이 만들기 운동 북한은 30일 각 도 무역관리국의 수출품생산기지 조성사례를 부각선전하면서 각지 무역관리국 근로자들에게 수출품을 많이 생산하기 위한 투쟁을 벌여나갈 것을 촉구했다. ○차량 연료절약 사례 선전 북한은 최근 잡관목 등 흔한 원료를 이용,농기계와 각종 운반차량 연료를 제조한 사례를 선전하며 각 군 및 생산단위들에 이를 본받아 연료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집단체조 7백여회 공연 북한은 해방후 지난 50년간 「노동당의 기치따라」 등 50여편의 집단체조를 창작,7백70여회의 공연을 가졌다고 평양방송이 30일 보도했다. ○인민군 열병식메달 제정 북한은 최근 조선인민군 창건65주(4·25)를 앞두고 인민군 「열병식 기념메달」을 새로 제정했다고 관영 중앙통신이 31일 보도했다. ○임흥지구 644세대 건설 평양 중앙방송은 최근 평양 금수산기념궁전 인근에 위치한 임흥지구에 6백44세대분의 주택이 건설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FAO와 수해지원 합의 북한은 1일 유엔 산하기구인 식량농업기구(FAO)와 농업부문의 홍수피해 지원문건에 합의했다고 관영 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남북 종교단체 회의 제의 북한은 최근 한국의 각 종교단체들에 편지를 보내 종교단체들간 접촉을 갖고 「남북 및 해외 정당·단체 연대회의」소집문제를 토의할 것을 제의한 것으로 중앙방송이 3일 보도했다. ○유휴 자재수집 할당제로 북한은 최근 원료와 자재난으로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는 실정임을 고려해 직장이나 작업반·개인별로 일정량의 유휴 자재 수집량을 할당,완수할 것을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일제 조선인관리는 항일운동 동참하라”/일서「제2독립선언문」발견

    ◎「33인」중 한사람이 작성 일제시대 관리로 봉직하던 조선인 관리들에게 조선독립의 선언적 의미를 전달한 「조선인 관공리에게 경고」라는 문건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발견된 선언문은 일본 교토대 대학원에 파견교수로 나가 있는 김문길 교수(부산외대 일본어과)가 최근 오사카 인권박물관에서 발견한 것.국한문혼용체로 가로 55㎝,세로 20㎝의 창호지에 붓으로 적혀 있다. 선언문 내용은 당시 조선인 관리들에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관리들 스스로 관직을 버린 뒤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독립선언문이 일본정부를 대상으로 했다면 이 선언문은 조선인 관리를 대상으로 한 제2의 독립선언문인 셈. 이 선언문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33인중 한 사람(성명미상)이 작성했고,부산과 경남지역에서 많이 배부됐다고 기록돼 있다.
  • 황장엽 망명­56년 저서 「사회발전사」

    ◎초기이론 김일성 우상화 내용 없어/정치·경제 등 민주적 절차를 강조/남녀평등론 등 개혁 필요성 역설 북한의 사상적 지주이자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북한의 정치사상을 집대성한 학자로 널리 알려진 황장엽비서의 초기 이론전개에는 김일성 우상화나 신격화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민주적 절차를 강조했던 것으로 13일 미의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황의 저서 「사회발전사」에서 밝혀졌다. 황은 1956년 김일성대학 철학강좌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은 물론 일반 지식층의 정치학습용 교재로 펴낸 이 책에서 북한건설의 견인차가 될 4요소를 「인민정권」「인민군대」「조선노동당」「김일성 원수」 순으로 지적했으며 정치 경제 문화 등 각분야에서의 생활이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개조되는 것과 이를 위한 남녀평등권 노동법령 등 일련의 민주주의 개혁이 필요함을 역설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정치의 「고전」으로 알려진 이 책은 170페이지 분량으로 도쿄 천대전구 부사견에 위치한 조선노동당의 도쿄 소재 출판사인 학우서당에서 출판된 것으로김정일을 비롯,노동당 역사연구소장 강석승 등 50,60년대 황의 강의를 들었던 현 북한지도층들이 재학당시 교재로 배운 책으로 알려져 있으며,특히 40년동안 저자의 사상적 고뇌가 정치적 망명이라는 「백기투항」으로 결말지어진데 대한 북한정치사상의 과오를 비교해볼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류사회는 어떻게 발생하였으며 발전하여 왔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제1장 「인류사회의 발생과 인류의 첫사회­원시공동체사회」,제2장 「계급사회」,제3장 「사회주의 사회 및 공산주의 사회」의 3개 장으로 나뉘어 국가사회 발전과정을 설명했으며 북한의 건설은 마지막 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황이 최근 망명과정에서 편지와 석명서 등을 통해 밝힌 사상적 동요 내용들과 이 책에 나타난 그의 초기 견해들을 비교해 본다. 〔북한과 같은 1인 독재,세습체제가 없다〕:부르좌들과 그의 앞잡이들은 인류역사는 어떤 위대한 인물(왕이나 영웅)이 변화 발전시킨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이것은 통치계급의 지배를 강화하며 근로 대중의 힘을 무시하고 그를 억제해 보려는 수작이다. 〔북한은 사회주의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정반대로 전체 근로 인민들이 행복스럽게 살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 명백하다. 〔북한은 노동자와 농민이 굶주리고 있다〕:우리의 투쟁은 정치,경제,문화 각방면에서 거대한 성과를 거두었고 공화국 북반부에서 인민들의 물질문화 생활수준은 나날이 향상되어 갔다. 〔북한은 봉건주의나 마찬가지다〕:자본가들이 영도한 부르좌혁명은 철저하게 봉건적 잔재를 숙청할수 없었으며 노동자와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그들의 혁명적 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봉건세력들과 협력하게 됐다. 〔북한은 무자비한 탄압과 허위와 기만으로 충만된 암흑의 땅이다〕:공산주의 사회에 가면 문화가 최고도로 발전하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본질적 차이가 없게 된다.특히 기계가 고도로 발전되어 적은 시간 일을 하고도 더많은 생산물을 얻을수 있으며 따라서 여유시간을 즐길수 있게 된다. 한편 황은 이 책에서 소련에 대해 『사회주의 사회를 이미 완전히 건설한 소련 인민은 현재 벌써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길에 들어서고 있다』면서 최고의 이상향으로 소개해왔기 때문에 그같은 소련의 붕괴는 그의 이론을 뿌리채 흔드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임이 분명하다. 또한 북한이 인민민주주의를 건설할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튼튼한 민주기지가 있고 김일성 원수의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한 인민군대와 조선인민을 승리에로 조직 동원하는 조선노동당과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원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에는 『제국주의자들이 제아무리 낡은 자본주의제도를 옹호,유지하려고 최후의 발악을 다하여도 그 멸망은 피할수 없으며 사회주의 진영은 반드시 승리하고 착취없고 행복스러운 근로자들의 사회인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가 전 지구상에 건설될 것은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 북 “탈북자 막아라” 「얼음함정」 설치

    ◎압록강·두만강에 3∼5m 간격 구멍 뚫어/장애물도 설치… 중국 3성엔 색출조 ㅍ견 북한당국은 주민의 탈출사태를 막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의 얼음을 3∼5m 간격으로 깨 해자를 만들고 장애물까지 설치했다고 탈북자조직임을 자처하는 「북조선인민의 생존과 민주를 위한 탈출자연합전선(북민전)」이 9일 밝혔다. 「북민전」은 이날 일부 북경주재 한국언론사 사무실에 보낸 A4용지 2쪽 분량의 유인물을 통해,북한이 학생규찰대요원과 가두인민반 노인으로 구성된 규찰대를 국경일대에 2∼3중으로 배치해놓고도 마음을 놓지 못해 얼어붙은 강물에 해자와 장애물을 설치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이와 함께 중국 동북3성(길림·요령·흑용강성)에 200명에 달하는 위장탈북자를 보내 탈북자를 추적,연행하는 한편 탈북자를 도운 현지 한국인 및 조선족 동포에게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북민전」은 덧붙였다. 「북조선인권투쟁선언문」이라는 북경 「북민전본부」 명의의 이 유인물은 이 조직이 기존의 「탈북자민권협회」,「탈북자반석동지회」 등의 조직과 구성원을 한데 묶어 새롭게 결성된 것이라고 밝히고 국내외적인 「김정일정권계승반대운동」 등 북한의 세습독재체제에 결사항거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 관동대지진때 일군도 조선인 학살

    ◎당시 계엄사령부 작성 조사표 발견/집행부대·살해방법 등 상세히 기록 【도쿄 연합】 6천여명 이상의 조선인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군도 조선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육했음을 보여주는 계엄사령부 작성 조사표가 18일 도쿄도청 공문서관에서 발견됐다. 교도(공동)통신에 따르면 이 조사표는 길이가 약 45㎝,너비 약 1m의 일람표 형식으로 관동대지진이 일어난지 3개월 뒤인 1923년12월 관동 계엄사령부가 극비리에 작성한 것이다. 조사표는 모두 20건 281명을 살해한 것과 관련해 집행부대,무기사용자,살해방법 등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당시 자경단과 경찰외에 군인들도 「조선 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허위사실을 퍼뜨리며 조선인들을 학살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무기를 사용한 20건중 12건은 조선인이 희생자로 지진이 일어난 1923년 9월1일 밤중부터 6일 상오 7시까지 도쿄 료코쿠바시(양국교)와 지바(천엽)현 우라야스(포안)면사무소 앞 등에서 저질러진 만행을 기록하고 있는데 조선인 254명과 일본인 27명이 총검이나 곤봉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군은 조선인 살육사실을 기록하면서 비고란에는 「자위를 위해 불가피하게 사살한다」고 이유를 들었으며 시체는 경찰서 부근에 묻거나 강물에 떠내려 보낸 것으로 기술했다.
  • 일제,한국인 학대 그림책 발견/가야하라 하쿠노 1924년작

    ◎남녀 손묶은채 추궁·죽창 찔려 쓰러지고…/관동 대지진때 자경대 만행 입증 희귀자료 【도쿄 연합】 1923년9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뒤 일본인들이 조선사람을 학대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은 그림책이 발견돼 역사적 자료로서 주목되고 있다. 이 그림책은 일본화가 가야하라 하쿠도(본명 다케오·1896∼1951)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4년3월 그린 폭 45cm,길이 12m의 것으로 흰 저고리를 입은 조선인 남녀가 뒤로 손이 묶인 채 칼을 든 경찰과 자경단원에게 조사를 받는모습 등이 들어있다. 특히 노동운동가와 무정부주의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연행돼 많은 자경단원들로부터 대창에 찔려 쓰러져 있는 처참한 광경도 그대로 그려 대지진 후 조선사람들이 받은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림책은 오사카에서 고미술상을 경영하는 다다 도시카쓰씨가 작년 11월 입수한 것으로 관동 대지진 후 도쿄의 초등학교 수업풍경과 밥을 짓는 민중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 강덕상 교수(자하현입대)는 『경찰관이 조선인을 연행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은 있으나 그림책은 처음』이라며 『조선인 희생을 보여주는 자료가 적은 가운데 나온 이번 그림책은 그동안 무시되어온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 북,민족공동 역량만이 돌파구(사설)

    지난 1일 당기관지인 「노동신문」,군보인 「조선인민군」,청년보인 「노동청년」 등 3개 신문 공동사설로 발표된 북한의 신년사는 우리를 또 다시 실망시켰다.대화재개등 남북관계개선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 채 올해가 김일성사후 3년상이 되는 해임을 강조하면서 「우리식 사회주의를 더욱 다그쳐나가자」는 시대역행적인 메시지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북한당국은 신년사에서 식량난해결을 최우선과제로 제시했다.그러나 새로운 정책대안은 내놓지 못한 채 「김일성 유훈 통치」에만 매달리고 있다.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은 50년이상 계속된 공산통치가 실패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낙후된 농업정책의 개선을 모색하는 한편 우리정부와 협력,민족의 공동역량으로 해결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남북관계개선이 가장 빠른 길이다.우리민족의 일을 우리민족끼리 풀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것은 북한당국이 걸핏하면 내세우고 있는 「주체사상」과도 어긋나지 않는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북한당국은 올 신년사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우리정부를 「괴뢰」라고 지칭하면서 원색적인 비방을 서슴지 않았다.그런가 하면 미국에 대해서는 「새로운 평화보장체계」의 수립을 강력히 촉구했다.이것은 우리정부를 배제한 채 핵문제·식량난 등 모든 현안을 미국만을 상대로 협상하고 대화하려는 그들의 집요한 대외정책을 올해도 답습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는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없고 실질적인 남북대화도 기대하기 어렵다.남북한은 이제부터라도 당국간의 대화를 통해 민족끼리의 현안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 우리는 북한당국이 남북기본합의서정신을 되살려 같은 핏줄끼리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에 적극 나서주기를 거듭 촉구한다.우리정부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책을 강구해주기 바란다.
  • 한국 ’97 주요 외교이벤트 부문별 조망

    ◎새해외교 북 개방·개혁 유도에 초점/하순 4자회담 설명회… 3월 본회담 개최 목표/5월 한달 안보리의장국… 국제 중재자역 맡아 새해에도 우리나라 외교의 초점은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유도하는데 맞춰지게 된다.정부는 이를 위해 미국·일본등 우방국과의 긴밀한 공조관계를 유지하고 중국·러시아등 관련국의 협조를 얻는데도 힘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21세기를 3년 앞둔 97년의 중요한 「예상 외교 이벤트」를 살펴본다. ▷4자회담◁ 북한이 96년을 이틀 남긴 12월29일 전격적으로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해 사과하면서 4자 회담 설명회에 참석할 의사도 밝혔다.이에따라 이달 하순 설명회가 열리고,다음달부터 설명회가 곧바로 예비회담으로 이어져,3월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남·북한,미국,중국간의 4자회담이 열리길 정부는 희망하고 있다.4자회담의 성사고비는 일단 설명회가 될 것 같다.북한이 설명회에 이어 우리측이 생각하는 예비회담까지 참석할지는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다.정부는 북한을 4자회담의 장으로 끌어들이는데 외교력을 집중할 방침이다. ○김정일 승계후 정상회담 ▷남북한 정상회담◁ 내년 한햇동안 북한에서는 ▲2월16일 김정일 55세 생일 ▲4월중 최고인민회의 개최 ▲4월25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일 ▲7월8일 김일성 사망 4주기 ▲9월9일 북한정권 창건일등 중요한 행사가 이어진다.그 가운데 어느 시점에 김정일이 국가주석과 노동당 총비서직을 승계할지 주목된다.김정일의 권력승계는 북한내부 문제이지만 우리나라의 통일외교 추진과정에서도 중요한 이벤트가 된다.특히 김정일의 권력승계이후 남북한 정상회담의 재추진이 가장 큰 관심거리다.남북한 정상회담은 4자회담의 마지막 단계이기도 하다. ○3월 신포경수로 착공될 듯 ▷경수로 사업◁ 이달안에 부지 및 서비스 의정서가 서명되고 7차 부지조사단의 방북이 재개되는등 경수로 사업이 본격화된다.오는 3월쯤 신포에 해빙가가 오면 부지정리를 위한 토목공사가 시작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그 과정에서 최고 수천명의 남한 기술자가 북한을 방문하게 돼 그 파급효과가 주목된다.경수로 비용의 확정과 그 분담비용을 미국·일본·유럽연합(EU) 등과 협의해 나가는 것도 경수로 사업의 큰 과제다. ▷유엔안보리 의장국◁ 오는 5월 우리나라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의장국으로 활동하게 된다.박수길 주 유엔대사는 한달동안 안보리 이사회의 모든 공식·비공식 회의를 주재하며,한반도 문제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안보관련 주요 현안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조정자의 역할을 하게된다.의장국은 또 안보리에서 협의된 내용에 따르는 조치를 이행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특정사안에 대한 의장성명 발표,의장서한 발송등을 책임지며 결의안 채택에서도 실질적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OECD 본격 활동◁ 우리나라는 올해부터 선진국들의 모임 성격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의 활동에 참여하게돼 선진국들과의 협력 및 경쟁관계가 본격화 될 것으로 보인다.OECD의 올해 주요 과제는 다자간 투자보장협정(MAI)의 제정,규제개혁의 추진,경쟁정책의 국제적인 협력강화 및 규범화 등이다.정부는 이러한 과제의 추진이 단기적으로 우리경제에 어려움을 야기할 수도 있으나,우리경제를 경쟁적으로 개편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정부는 이러한 정책논의과정에서 우리의 입장을 반영하면서,한편으로는 그 파급효과를 면밀히 분석해 사전에 대책을 마련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아·남유럽지역 외교 강화 ▷정상외교◁ 오는 9일부터 14일까지 캐나다의 크레티앙 총리 방한을 시작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정상외교도 재가동된다.오는 25,26일에는 일본 벳푸에서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랑)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김대통령은 지난해 중남미국 순방에 이어 올해도 그동안 우리나라 정상의 발길이 닫기 어려웠던 아프리카·남유럽 등 지역에 대한 외교노력도 강화할 예정이다. □97년 주요 외교행사 ▷1월◁ ▲크레티앙 캐나다 총리 방한(1.9∼14) ▲KEDO­북 「부지 및 서비스의정서」 서명 ▲KEDO 7차 부지조사단 방북 ▲김영삼 대통령 일본방문(1.25∼26) ▲4자회담 설명회 한·일·중 EEZ경계획정 및 어업협정 협상 ▷2월◁ ▲ASEM 외무장관회의(2.14∼15,싱가포르) ▲4자회담 예비회담(미확정) ▷3월◁ ▲KEDO 이사회 ▲제14차 한·미 경제협의회(3월중,워싱턴) ▷4월◁ ▲’97 유엔 군축위원회(4.21∼5.12,뉴욕) ▲북한 최고인민회의 개최(4월중) ▷5월◁ ▲유엔 한국안보리 의장국 활동 ▲APEC 통상장관회의(5.9∼10,캐나다) ▷7월◁ ▲김일성 사망 4주기(7.8) ▲김정일 권력 승계(가능) ▲ASEAN 확대 외무장관회의(PMC) 및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7.24∼25,콸라룸푸르) ▷9월◁ ▲유엔 제52차 총회(9.16∼12월,뉴욕) ▲ASEAN 경제장관회의(AEM)(9월중,콸라룸푸르) ▲ASEAN 경제장관회의(9월중,일본) ▷11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총회(11월중,로마) ▲APEC 제5차 정상회의(캐나다 밴쿠버)
  • 김정일 권력승계 작업 박차/잇단 충성집회속 대대적 생일 준비

    ◎전문가들 “내년 10월10일 취임” 관측 북한은 김일성 사망 2주년이었던 올해에도 김일성 우상화작업을 계속해온 가운데 최근들어서는 김정일의 공식적인 권력승계를 위한 정지작업을 병행해서 벌이고 있다.북한은 최근 각급 집회를 통해 김정일에 대한 충성과 옹위를 서약하는 한편 내년 2월 김정일의 55회생일(2월16일)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를 계획 아래 안팎으로 준비작업을 시작하는 등 김정일의 권력승계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18일 평양에서 김정일의 군최고사령관 추대 5주(12월24일)를 맞아 중앙연구토론회를 열고 전군·전민이 김정일을 옹호하는 「방패」·「총폭탄」이 될 것을 촉구했다.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토론회에는 김일성군사대학,김일성정치대학,노동신문사,노동당출판사,조선인민군신문사,사회과학원 등 각기관들의 대표자가 나와 「김정일의 군사부문 영도」를 주제로 한 토론을 벌이며 충성분위기를 부추겼다.평양방송은 『김정일을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한 5돌을 맞으며 수많은 각계층 근로자들과 인민군 장병들이 「인민무력부 혁명사적관」을 찾고 있다』고 전하고 지난 5년동안 5천여명의 외국 방문객과 50여만명의 군장병 및 각계각층의 주민들이 방문했다고 선전했다. 이 방송은 인민무력부 혁명사적관을 찾은 군장병등 각계각층의 근로자들이 『김정일의 영도를 받고 있는 한 언제나 백전백승한다는 철의 신념을 간직하고 조국의 방선을 금성철벽으로 지켜나갈 충성의 결의를 굳게 다지고 있다』며 김정일에 대한 북한군의 충성을 강조했다.인민무력부 혁명사적관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지난 기간동안 군부문 현지지도시에 내린 지침·과업 등 각종 「사적」들이 수집,전시되고 있다. 북한은 이달초부터 청소년학생과 근로자·군인들을 동원해 인민무력부 혁명사적관과 같이 김정일의 군부「지도력」을 과시하는 사적관들에 대한 방문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최근에는 기념우표 발행과 함께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우상가요「조선의 장군」을 창작,보급하고 있다.또 올들어 주요 촬영소에서는 김정일의 「은덕」「영도력」「충성배가」등을 주제로한 극영화를 대량 창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북한은 지난달 말 덴마크에서 「김정일동지 탄생 55돌 경축행사준비위원회」를 결성한데 이어 지난 10일에는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주재 북한대사 손성필이 참석한 가운데 「김정일동지 탄생 55돌 경축행사 러시아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내년도 김정일의 생일행사는 북한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5주,10주 등 이른바 「꺾어지는 해」인데다가 공식적인 권력승계절차 등과 맞물려 그 어느때 보다도 더 요란하게 치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최근들어 더욱 빈번해진 김정일의 「현지지도」시찰은 이들 충성모임과 연계돼 이른바 「대를 이은 충성」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지난 11일 평양에서는 「여맹」(여맹·위원장 김성애)중앙위 제5기24차 전원회의를 개최,여맹원들을 김정일에게 충성하는 「충신 효자」로 만들 것을 촉구한데 이어 13일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궐기모임을 열고 전체 교직원·학생들에게 김일성·김정일만을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충신·효자가 될 것을 촉구했다. 이와 관련,최근 북한전문가들 간에는 북한의 김정일은마침내 94년의 김일성사망 이후 공석으로 남아있는 당총비서직에 공식취임,명목상의 권력공백기를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돌고 있다.그러나 김정일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또하나의 최고위직인 국가주석직은 보다 의례적인 자리로 격하시켜 다른 사람에게 넘길 가능성이 있다고 북한문제 분석가들은 전망하고 있다.최근 북한을 다녀온 한 북한문제 전문가는 김정일의 공식 권력승계문제와 관련,▲김정일의 이례적으로 잦은 공석등장 ▲11월 24일의 판문점 방문 ▲매우 빈번하고 공식적인 충성다짐대회 ▲북한 관영매체들의 암시등을 예거하면서 북한은 의미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북한문제 분석가들은 97년 9월9일의 노동당 창당기념일 등이 김정일의 최고위직 공식 승계일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우리 정부의 한 당국자는 김정일의 공식 권력승계문제와 관련,대내외여건이 정비된 시점에서 김정일 자신이 선택할 것 같다고 내다보고 『3년상이 끝나는 97년 하반기 이후 제7차 당대회 및 제10기 최고인민회의의 개최와 더불어 승계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 1898∼1947년 「제국의회 비밀회의」 속기록 공개

    ◎일,조선인 노동자 강제·조직원 동원/다나카 총독부총감 “징병 안된 모든 사람 데려온다”/내무성 적극개입 확인… 소 참전사실 두달전에 인지 일제가 제2차세계대전중 일본 국내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사실상 강제적·조직적으로 동원했던 사실이 6일 공개된 일본 중의원의 1898년(메이지 31년)부터 패전후인 1947년까지의 「제국의회 중의원 비밀회의」 속기록에서 확인됐다. 88건의 속기록중에 포함된 다나카 다케오(전중무웅)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44년 2월 답변에서 다나카는 『(조선인 노동자가 없으면) 내지(일본)의 생산이 중단된다고 말을 듣고 있어 가능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올해는 내무성의 막대한 협력으로 그같은 문제가 해결돼 기쁘다』고 말했다. 다나카는 이어 강제연행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군대에 가지 않은 자는 전부 노동자로 내지에 데려 온다』고 설명,조선인 동원이 징병과 같은 수준에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뒷받침했다.그는 조선인 노동자의 차별과 관련해서는 『내지인의 태도에 모멸이 거듭되고 있다』면서 『원인을 내지인이 만들고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고 말해 일본인들이 차별을 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 44년 무렵 『조선의 독립운동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 소련 중경세력(국민당정권)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운동을 사주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답변,당시 열강과의 협력하에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음을 증언했다. 한편 침략전쟁 막바지 식량확보방안과 관련,시바야마 육군성차관은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나무통에 담아 해류를 이용해 일본에 보내고 있다』고 말해 마지막까지 조선을 착취해 전쟁을 수행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 소련이 소·일 중립조약 불연장방침을 통보받은 직후인 45년 6월의 전시긴급조치법위원회에서는 도고 시게노리 외상이 이와관련,『조약이 지켜지리라는 것을 절대적이라고 믿기 어려운 사태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해 소련의 참전(45년 8월8일)을 두달전에 각오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판단은 일본군부가 패전이 확실했음에도 불구,전쟁을 계속한 사실등은 외면한 채 소련의 일방적인 중립조약 파기와 대일참전을 패전의 주된 요인으로 돌리면서 러시아를 비난해 온 일부 인식과 관련해 주목된다.‘도쿄=강석진 특파원>
  • “북 공비침투 전쟁준비 목적”/생포 이광수 진술

    ◎실전훈련 5차례 실시/오늘 귀중중사와 합동회견 잠수함을 타고 강릉 해안을 통해 침투했다가 지난달 18일 생포된 무장공비 이광수는 『정찰국 해상처장이 잠수함에 탄 것으로 보아 이번 침투의 목적은 전쟁준비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8일 국가안전기획부가 이의 수사 과정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에 따르면 이는 『이번 침투의 목적은 남한의 군사기지를 정찰해서 임의의 순간에 타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또 『내가 속한 북한 조선인민군 인민무력부 정찰국 22전대는 이번 침투를 위해 다섯번에 걸쳐 실전훈련을 실시했고 정찰조는 정찰국 직속 지도원의 참여하에 7월초와 8월초에 두번 실전훈련을 했다』고 진술했다. 이는 『무력부 정찰국은 정찰대대와 육상정찰대대 5개가 있으며 동서 해상기지중 동해는 3기지 22전대로 구성돼 있다』면서 『남측 군사기지 정찰 및 파괴,후방교란,중요 요인 납치,살해 등을 기본 임무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안기부는 29일 상오 10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이광수와 지난 13일휴전선을 통해 귀순한 북한군 곽경일 중사(25) 등 2명에 대한 합동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 길림성 장춘시 음마하 집체농장(송화강 5천리:8)

    ◎조선족­한족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일궈/48년전 황량한 습ㅈ디에 노동자 이주/조선족 60가구 한족도움으로 삶터닦아/두레농사로 기반구축… 32개 한족촌도 귀속/한족에 논농사 가르치며 함께 사는 지혜 터득 오늘의 길림성 장춘시 관할구역은 옛 부여국의 고토다.장춘에서 북쪽으로 100여㎞ 떨어진 농안에는 아직도 부여성 성터가 남아있다.이른바 황룡부 고성이라는 성이 본래 부여성이다.그러니까 황룡부 고성은 부여의 첫 도읍지였다. 장춘시가 지금 관할하는 지역의 인구는 모두 4백57만명에 이르고 있다.이 가운데 조선족은 4.06%인 4만8천42명에 지나지 않았다.쌀에 뉘처럼 섞여 사는 것이다.그런데 장춘시 구대현 음마하진은 사정이 좀 달라 전체인구 2만2천500명 가운데 2만1천명이 조선족이다.특히 음마하진 홍광촌은 316가구 1천675명이 조선족이고,한족은 겨우 10가구 55명에 불과했다. 음마하진은 길림시에서 장춘시로 가는 철길가에 자리잡았다.청나라때 광희아니면 건륭황제로 여겨지는 황제가 동북지역을 돌아보는 동순길에 쉬어서 말에게 물을 먹였대서 음마하가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그 이면에는 아첨을 일삼는 관리가 음마하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황제의 발길이 지나갔다는 음마하는 1948년까지만 해도 황량한 습지였다니,벽해상전이 실감났다. 1947년 토지개혁 당시만 해도 음마하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그러다가 길림성 정부 농업청이 음마하로 노동자들을 이주시키는 천민정책을 펴기 시작했다.해방 이후 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아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을 음마하로 보냈던 것이다.당시 길림성 노동청장 서원천은 천민정책에 심혈을 기울여 일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선족은 1949년 3월1일 우선 44가구가 음마하로 들어왔다.이영조와 임춘국 등 다섯 사람이 주동이 되어 기반가의 조선족 144가구 가운데 우선 44가구가 들어온데 이어 반석현의 조선족 16가구가 뒤따라 와서 자리를 잡았다.모두 60가구가 들어왔기 때문에 이른바 「음마하 60호」라는 조선족마을이 생겼다.오늘의 홍광촌 뿌리는 바로 「음마하 60호」인 것이다. ○장춘시는 부여국의고토 1954년에는 부평초마냥 도처를 유랑하던 조선족 20가구가 음마하로 들어와 합세했다.이들 20가구는 역사의 비극이기도 한 만보산사건의 희생자들이었다.1931년 관개용수로를 두고 조선족과 한족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은 물싸움으로 시작되었다.처음부터 일제침략자들이 조종한 만보산사건은 한반도로까지 번져 당시 조선에 살던 화교들까지 박해를 받았다.이 사건은 8·18사변으로도 불리는 만주사변의 서막이기도 했다. 만보산사건의 피해자는 물론 한족들이었다.일본은 조선인을 대륙침략에 이용하기 위해 조선족을 보호하는 체 술수를 썼다.이 때문에 조선족은 해방이 되면서 만보산촌에 살기가 어려웠다.그런 판국에 1947년 2월 만보산사건에 관련된 한족 학영덕과 조선족 변상인 등이 장춘지방법원 법정에 섰다.이 사건은 이듬해 11월4일 원동국제군사법정으로 올라갔다.그런데 공산당군이 장춘에 주둔한 군민당군을 포위공격했다.이 무렵 조선족은 모두 만보산촌을 떠나고 말았다. 만보산촌은 장춘시에서 동쪽으로 20여㎞ 떨어졌다.오늘의 장춘시 덕해현 삼승향 황가촌육사에 해당한다.벽돌기와집과 토벽돌기와집이 반반씩 들어선 서쪽 넓은 들판으로 이통하가 흘렀다.이통하 둑 안으로는 옥수수와 콩이 자라고 있었다.문제가 되었던 그 물길가 둑에 만보산사건 옛터 「만보산사건구지」라는 시멘트 팻말이 서있다.마을에는 65가구 353명의 한족이 살고있는데,만보산촌에서 태어난 사람은 마만림(80)이라는 노인 한분뿐이었다. 『나는 당시 사건을 보고 겪은 사람입니다』그때에 광휘,삼성포,변계둔,시간유방은 조선족 마을이었습니다.70여호 500여명의 조선족이 살았지요.조선족은 논농사를 짓고 우리는 밭농사를 하면서 살았어요.해방이 날때까지 조선족은 숫자도 늘고,논도 불어났습니다.그러다 해방 이후 모두 빠져나가 지금은 조선족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떻든 음마하진 홍광촌은 기반가와 반석현의 조선족,유랑하던 조선족 등 세 그룹이 모여 마을을 형성했다.이주 초기에는 집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었다.그러니 씨앗은 물론 부릴 마소가 있을리 만무했다.이웃 마을의 한족은 조선족의 딱한 사정을보고 방앗간이나 가축 외양간을 고쳐 와서 살도록 배려했다.길림정부에서도 당시 동북화폐로 5억원을 마을에 대부해 주었다. 그 돈으로 집을 짓고 논을 개간했다.뭉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신념으로 처음부터 두레농사를 지었다.말하자면 집체소유였는데,중국 정부가 구소련의 집체농장제도 콜호스를 공식 수용하기 3년전의 일이었다.그래서 1953년 성정부는 홍광촌 농업기반을 주축으로 음마하 전체를 집체농장으로 묶어 비준했다. ○만보산사건후 20가구 이주 이와 더불어 부근의 한족촌 32개를 음마하집체농장에 귀속시켰다. 음마하집체농장은 논농사 전담 수전대와 밭농사 전담 한전대로 구분한 22개 생산대를 두었다.한족은 논농사를 지을줄 몰라서 조선족 4∼5명씩을 보내어 기술지도에 나섰다.당시 음마하집체농장은 길림성 3대농장의 하나였다.그래서 1957년 2월22일 노동모범대표대회에 나가 모택동,주은래,유소기,등소평의 접견을 받기도 했다.그해에 불가리아 주석이 다녀갔고 소련에서는 이름있는 명마 「돈강의 말」 2필을 농장에 보내왔다. 이제는 조선족이나 한족들은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했다.농업뿐이 아니라 산업체에서도 두 민족이 공존하고 있다.중국에서 첫 손을 꼽는 장춘자동차공장의 경우 수만명 일꾼 가운데 1천명 이상이 조선족이다.퇴직한 노동자와 간부도 300여명이나 되어 공장에서 20만원을 들여 이들을 위한 조선족 노인회관을 지어주었다.
  • “통일만이 살길”… 주민들 통일지상주의(북한은 지금…:7)

    ◎“방법은 고려연방제로”…철저히 사상무장/“보안법 철폐·주한미군철수” 억지 되풀이/“「남북연합」은 북 흡수통일하려는 불순한 의도” 비난 북한은 지금도 김일성시대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통일정책의 금과옥조로 삼고 있다.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역에서 만난 북한 학자나 주민은 한결같이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적 입장에서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이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다. 사업을 위해 북한을 자주 드나드는 용정시 개산둔진에서 만난 조선족 안모씨는 『북한주민은 만날 때마다 남조선의 「남북연합」 통일방안이 우세한 경제력으로 북조선을 흡수통일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담고 있다고 비난하며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북한전문가는 북한당국의 최종목표가 적화통일에 있지만,겉으로는 지난 60년대부터 연방제통일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통일정책의 기조로 삼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고 관측한다. 서울신문과 합동조사에참여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함택영 교수는 『지난 60년 김일성의 8·15경축사에서 처음으로 제의한 연방제통일방안은 73년 「고려연방제」,80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등으로 조금씩 변용,수정돼왔다』고 분석한다.『지난 91년 신년사에서 또다시 수정제의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의 핵심은 정치·외교·군사문제를 총괄하는 연방상설회의를 중심으로 남한과 북한에 지역정부를 두는 「1민족­1국­2체제­2정부」를 구성,남한의 흡수통일을 막아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북한전문가는 그러나 연방제통일방안이 자가당착이라고 진단한다.북한이 고려연방제 통일을 위해 제시한 선결조건과 구성원칙이 서로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선결조건은 인민민주정권으로의 정권교체와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철폐,미국과의 평화협정체결 및 주한미군철수 등이다.남한에 용공정권으로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하지만 구성원칙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원칙에 따라 「남북한의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는 기초」 위에 남북이동등하게 참가,통일정부를 구성하고 그 밑에 남북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는 지역자치를 실시하는 것이다. 합동조사에 참여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신종대 책임연구원은 『구성원칙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하고 정작 중요한 선결조건에서는 용공정권으로 바꾸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라고 지적한다. 북한의 연방제통일방안은 대남정책의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북한전문가는 보고 있다.남조선혁명을 위해 통일전선을 구축하려는 대남위장평화공세라는 것이다.연길에서 만난 북한전문가는 『연방제통일방안은 주로 남한의 정치정세가 혼미하던 때 제의됐음을 상기할 때 고도의 심리전으로 볼 수 있다』며 『북한은 남한보다 유리할 때는 공세적인 통일방안을,불리할 때는 수세적인 통일방안을 제시하는등 강온전략을 구사하고 있지만 중요한 점은 아직도 남조선혁명론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북한주민은 통일에 대해 철저한 사상교육을 받은 탓인지 고려연방제 통일만 되풀이했다.북한당국이 미국과의 평화협상체결을 통해 김정일체제의 안정을 보장받으려는 반면,그 속내를 모르는 북한주민은 「통일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중국 화룡시 노과향에서 만난 북한군 초병은 『통일이 되지 않고는 잘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남조선인민의 통일열기가 식어가는 게 안타깝다』고 연길에서 만난 북한접대원도 덧붙인다. 북한의 통일정책은 앞으로도 큰 변화가 없을 것같다.김정일의 권력승계가 김일성 생전의 소원인 적화통일의 혁명위업을 완수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뤄져,김일성의 통일정책이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한국사회가 일련의 민주화과정을 통해 이념논쟁·한총련사태 등이 벌어지고 있는 점도 북한당국에 자신들의 통일론에 대한 동조세력이 있는 것으로 오판하게 하고 있다.〈연길(중국)=김규환·최병규 특파원〉 ◎참여교수 시각/북한의 통일정책/최완규 경남대 교수·북한정치/정교한 통일논리 개발/체제유지 정당화 북한은 분단이후 오랫동안 남한보다 통일의 당위론을 강조해오면서 통일을 국내 정치게임에 이용해왔다.사실상 그들은 통일의 당위성을 생존과 결부시켰다.따라서 실현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통일을 고집할 수밖에 없고 분단현실을 인정하는 것 차제를 금기시했다. 북한에서 통일은 체제의 정통성 확보와 인민의 동원 및 일체감 조성,경제적 궁핍을 감내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기제로 작용해왔다.북한을 방문한 많은 사람에 따르면 북한의 관료나 학자는 물론 일반인도 입만 열면 민족·양심·주체·통일·미군철수·평화협정체결을 강조한다는 것이다.이것은 일종의 통일의 당위론을 위한 양념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지배집단은 통일을 체제의 존재근거로 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민을 설득할 수 있는 정교한 통일논리를 개발해왔다.그 핵심은 「반제국주의민족해방투쟁론」과 「인민민주주의혁명론」이다.그들은 이같은 통일논리를 바탕으로 정권수립이후 지금까지 통일협상회의,외세배격과 주한미군철수,남조선혁명역량강화,연방제 등의 통일방안과 대남제의를 계속해왔다. 북한의 입장은 김일성 사후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김정일이 권력을 승계받을 수 있었던 정당성의 원천은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라는 데 있다.따라서 대내외 상황의 변화와 상관없이 김정일은 당분간 공식적으로는 김일성의 통일정책을 답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정일 정권이 경제적 어려움과 불리한 국제정세에도 기존의 통일논리와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대남인식과 관련이 있다.북한은 남한내에 혁명주의적 요소가 잠재해 있고 그들의 통일논리에 동조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대남인식변화를 유도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남한에서 모범적인 민주복지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이렇게 되면 남한내의 혁명주의적인 요소는 자연히 없어지고 북한의 통일논리와 정책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 “백배 천배보복” 실제상황 예고/전례로 본 도발전 위협 발언

    ◎판문점 무력시위­하루전 “DMZ 자위조치” 성명/부여 간첩사건­“독수리 훈련 좌시 않겠다” 선언/전문가들 “만반의 안보 대비책 필요” 지적 북한이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훈련중인 잠수함의 표류」라고 주장하며 보복 위협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북한은 여러차례 『우리는 보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보복은 백배 천배도 될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다. 무장공비 남파사건에 대한 북한의 시나리오는 지금까지 발뺌→책임전가→보복위협의 단계를 밟고 있다.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북한 전문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번 무장공비침투사건에 이은 보복위협이 단순한 경고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인 도발을 예고하고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특히 최덕근 주 블라디보스토크 영사 피살사건은 이같은 의혹을 더해 준다. 전현준 박사(민족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는 『90년대 들어 북한의 주요 도발사태를 분석한 결과 사전위협 예고를 실제 행동으로 옮긴 사례가 많다』면서 이번도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 4월5일 판문점 무력시위가 있기 하루전인 4일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변인 성명을 통해 『비무장지대 및 군사분계선을 인정할 수 없으며 자위조치를 취하겠다』고 예고했다.이에 앞서 3월29일 인민무력부 부부장 김광진은 『군사분계선의 지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무력시위를 예고하기도 했었다. 지난해 10월24일 발생한 부여 무장간첩사건에 앞서서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은 22일 『95 독수리훈련을 수수방관 하지 않겠다』고 위협했고 18일 외교부 대변인도 『정전체계를 뿌리째 청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예고했다. 95년 4월19일에는 북한 임업부 대변인의 『시베리아 벌목장노동자의 실종은 남한의 책임으로 즉시 상응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담화가 발표된 2개월 뒤 중국 연길에서 리경춘등 북한인 3명이 안승운목사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 북한 조평통부국장 박영수의 「서울 불바다」발언으로 세계를 경악케 했던 지난 94년 오스트리아 빈 주재 북한 참사관 윤호진이 6월 10일 『앞으로 IAEA를 상대하지않겠다』고 발언한지 사흘 뒤에 북한의 IAEA탈퇴선언이 이뤄졌다. 지난달 18일 발생한 무장공비 사건에 앞서서도 북한측은 남한이 나진·선봉 투자설명회에 고의로 참석하지 않았다면서 『이는 전적으로 남한 당국의 책임』이라고 선전공세를 펼쳤다.또 북한을 무력 제압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이 대규모의 신식무기들을 배치하고 있다면서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따라서 현재 북한의 「백배 천배의 섬멸적 타격」 「침략자에 대한 무자비한 징벌」 「피에는 피로 응답」등의 위협발언은 긴장국면 조성과 어떤 형태로든 제2의 도발을 예고하는 수순일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김경홍 기자〉
  • 노획물 1백여종 1천1백여점 달해/대전차 로켓포 등 큰 관심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관련,우리 군이 노획한 1백여종 1천1백여점 가운데 잠수함에서 발견된 군용 해양도첩과 대 전차로켓인 RPG­7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군용 해양도첩은 조선인민공화국 수호국에서 발행한 것으로 북한군이 비밀로 분류한 것이다.우리 해군으로 치면 해양지도에 해당하는 해양도첩은 북한 해군이 지난 20년 남짓 잠수함 운용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한반도 주변의 해도로 해군이 북한 잠수함 대응전략을 수립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의 한반도 해역의 파악능력은 물론 북한 잠수함의 항해경로 등 북한 잠수함 작전 수준을 상당한 수준까지 분석해 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잠수함은 수중에서 음파를 발사,바다 속 모래·바위 등 지형이나 다른 잠수함을 확인하도록 하고 있어 정확한 해양지도가 없으면 잠수함은 움직일 수 없다.미 해군은 전세계 대양의 상세한 해양지도를 가지고 있으나 우방인 한국군에게조차 이 해도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해양도첩이 비록 북한이 제작한 것이라도 잠수함 실전배치가 90년대초 이뤄진 우리로선 상당한 전술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또 22일 동해항으로 예인된 잠수함에 대한 정밀수색에서 나온 RPG­7(장착용 포탄은 발견못함)은 『상어급 잠수함은 어뢰 4발 말고도 1백7㎜ 방사포 등 지상무기를 싣고 다닌다』는 생포 공비 이광수의 진술을 확인한 것이어서 의미가 있다.
  • 조선족 이주 역사(송화강 5천리:2)

    ◎30년대 일제이민정책에 1만가구 정착/“주택·식량 제공” 감언이설에 속아 집단이주/「만척」서 안전촌 건립… 항일 세력과 연결 차단/부여국­고구려­발해 고대사 무대… 아직도 조선지명 남아 송화강의 큰 원류는 두 갈래가 있다.이도송화강인 이도백하 말고 두도송화강이 그 원류다.두도송화강은 이도송화강을 이도백하라 하는 것처럼 그냥 두도강이라고도 한다.그런데 두도강은 본래 두갈래 물줄기가 합수하여 강을 이루었다.두도강의 한 갈래는 만주어로 어허러인(액혁낙인)이고,다른 한 갈래는 역시 만주어로 사인러인(새인낙인)이라는 이름를 가지고 있다. 어허러인은 백두산 옥설봉에 쌓인 만년설의 눈이 녹아 험준한 바위산을 지나면서 시작되었다.그래서 낙차 57m나 되는 큰 폭포에서 작은 폭포에 이르기까지 폭포군을 이루었다.물이 급하게 흐를 수밖에 없다.일명 긴강이라는 이유가 여기 있다.이에 비해 사인러인은 완만하다는 뜻을 가졌거니와 강의 흐름도 온화했다.일명 만강이라 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부여족 유적 대량 발굴 이들 두 물줄기는 화라자에서 합수했다.바로 두도강인 것이다.두도강은 2백30㎞를 달려서 길림성 화전시 백산진 양강구에서 이도백하를 만나 드디어 합류,장강다운 송화강 물길을 잡아나갔다.송화강유역은 비옥할 뿐 아니라 광활했다.이 풍요로운 땅에 세운 맨 처음의 읍락국가는 해모수를 우두머리로 한 부여국이었다.「자치통감」기록에 나오는 첫 도읍지 녹산지도는 그 어디인가. 오늘날 길림시에는 동단산성과 동단산 평지성,용담산성이 있다.근래 동단산 부근에서는 대량의 부여족의 문물(문화재)이 발굴되었다.금 은 동 철제유물과 도자기 옥석 칠기 등의 유물만 해도 8천여점에 이른다. 또 1978년 동단산 서쪽 서단산 무덤군 돌널무덤에서는 무덤주인공의 머리를 감싼 모직물이 나왔다.양털과 개털을 꼬아 실을 자아내고 이를 천으로 짠 것이다.간단한 직조기를 사용하여 짠 이 모직물은 부여족의 문화가 상당 수준임을 입증했다. 그런데 동단산 일대는 광개토대왕 시기에도 고구려 판도였다.오늘날 길림시내에 남아있는 고구려산성은 용담산성이다.용담산은 산 자체가함지박처럼 중간이 낮고,사방은 높은 산등성이에 둘러싸인 산세를 했다.성은 산세를 이용하여 황토와 자갈로 쌓았다.높낮이는 일정치 않았다.성 서북쪽에 있는 길이 53m,너비 26m에는 용담이라는 못이 있다.이 연못은 1만㎥의 물을 가둘 수 있는 인공 못이라는 것이 고고학자들의 견해다. 용담산성 망루자리에 올라서면 성 아래로 도도히 흘러가는 송화강과 강 양안에 우뚝우뚝 솟은 길림시의 고층건물들이 한 눈에 조망되었다.망루에 올라 문득 역사를 거슬러 뒷걸음질하고 있을때 피맺힌 비명이 들리는 착각에 사로잡혔다.서기 668년 2월 당나라 장군 설인귀의 공격을 받고 울부짖는 고구려군사들의 비명이….고구려는 용담산성에서 패하고 다시 군사 5만을 모아 공략에 나섰으나 실패했다는 것이다. 고구려 이후 한 때는 발해가 용담산성의 주인이 되었다.그러나 역사는 변화하는 것이어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그 역사의 체취가 배인 송화강유역으로 조선족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압록강유역이나 두만강유역에 비해 훨씬 뒤의 일이다.1922년 「동북3성실황」은 이를 뒷받침했다.당시 두만강유역 화룡,연길,왕청 3개현의 조선족은 44만4천4백20명,송화강유역인 안도,돈화,길림,장춘은 4만5천6백명에 불과했던 것이다.그리고 흑룡강성에는 고작 6백61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송화강유역의 조선족 이주민 유형은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두만강과 압류강 이주민들의 재이주,러시아 이주민들의 유입,일제 이민정책에 의한 집단이주 등이 그것이다.이 가운데 절대적인 비중은 일제 이민정책과 맞물린 한반도로 부터의 조선인 집단이주가 차지했다.일제는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세력을 소멸하고 동북에다 중국내지와 동남아를 침략하기 위한 병참기지를 만들 목적으로 이민정책을 서둘러 폈다. ○동남아 침략 병참기지화 그들이 1936년 8월 입안한 이민정책에는 2년내에 일본인 1백만가구 5백만명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 포함되었다.이와함께 일본은 1만가구의 조선인 농민들을 동북지방 23개현으로 집단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1937년 이를 실행에 옮겼다.일본 이주민들도 적지 않게 들어왔으나 큰 성과는거두지 못했다.그러나 한반도에 사는 조선의 가난한 농민들은 일망무제한 북지대륙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가기만 하면 집과 먹을 것을 주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조선총독부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들이다.그래서 조선농민들은 이주증을 받기가 무섭게 남부여대하고 고향을 등졌던 것이다. 그 당시 집단이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러 길림성에 살고있다.장춘시의 정병남(71)노인도 그런 이주민의 한 분이다.전남 함평군 학교면 학교리 태생인데,당시 사정을 소상히 설명했다. 『우리는 1937년 2월에 길림성 유하현에 도착했습니다.함평군 함평면,대동면,광주 송영리에서 각각 열다섯 가구씩 마흔다섯 가구가 집단이주를 한 것이지요.눈보라가 치는 한겨울에 다시차란 데에 떨어지니 집은 커녕 먹을 식량도 없었어요.언땅에 막을 칠 수밖에….만주척식회사(만척)에서 뜬 수수와 좁쌀을 주어 그나마 배불리 먹었습니다.그냥 준 것이 아니라 변리곡이었지요.일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해서 가을에 갚고나면 식량이 없어요.또 만척에서 변리곡을 다시 먹어야 했습니다.빚은해마다 늘고….광복이 나지 않았더라면 일생을 노예로 살았을 겁니다』 유하현 삼원포는 조선독립운동 진원지의 하나였다.1911년에 경학사가 서고 나서 신흥무관학교,1919년에는 대한독립단이 조직되었다.그런데 일제의 수탈기관 만척은 이 일대 땅을 헐값에 사들여 안전촌을 만들었다.경찰을 주둔시키고 무장자위단을 조직했다.마을마다 소총 열자루와 권총 한자루씩을 내주었다.그리고 양민증이 없으면 마을을 드나들지 못했다.항일세력들과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였다. ○양민증 없이 출입못해 집단이주민 무장화 과정에 나타난 유명한 무장자위단은 1944년에 조직한 풍향의용개척단이다.조선에서 보통학교 고등과를 나온 청년 90명을 모집,유하현 대통구촌 신가가에 이주시켰다.이들은 군복을 입고 무기를 휴대한 군사·농업조직이었다.단장을 비롯,군사교관·청치교원 등의 간부는 모두 일본인이 맡았다.조선인 단원 20명은 뒷날 관동군에 편입되었다.일인 간부와 조선인 단원들은 휴가로 고향에 돌아갔다가 식솔들까지 데려와 살았다. 오늘날 송화강유역에는집단이주민마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조선족이 있든 없든 간에 한반도 군명에서 따다 만든 마을 이름들이 그대로 전해 내려왔다.유하현에서는 아직도 창성,벽동,가평이라는 이름이 보였다.또 안도현에는 금화,원주,고성,장수,정읍,김제,익산마을이 있다.이밖에 두군의 이름을 딴 청흥(북청·신흥),안산(진안·익산)이 있는가 하면 조선의 양양이라 한 조양마을이 존재했다.이들 마을 이름에서 집단 이주민들의 진한 노스탤지어를 읽었다.
  • 한인 희생자 2만1천명 야스쿠니신사 일방 합사

    ◎일제 피해국 모독 범죄행위 지적 【도쿄 연합】 일본 우익세력이 「천황제」 유지의 성지로 떠받들고 있는 야스쿠니(정국)신사에 과거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돼 희생된 조선인이 여전히 합사돼 있어 합사대상 제외 등의 조치가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19일 야스쿠니신사측에 따르면 현재 신사에 합사돼 있는 조선인은 모두 2만1천1백81명으로,신사측은 후생성의 사망자명부 및 행방불명자와 사망확인통지 등을 토대로 이들을 비밀리에 합사해왔으며 지금도 합사는 계속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과거 식민지국이던 대만인 희생자도 마찬가지로 합사해왔다. 이같은 일방적인 합사는 야스쿠니신사가 과거 「천황 이데올로기」와 군국주의 발양의 본산이었던 데다,그동안 한국·중국 등이 도조 히데키(동조영기)를 비롯한 A급전범 등을 신으로 받들고 있는 신사에 대한 일본 각료들의 참배를 침략전쟁 정당화등으로 비판해왔다는 점에서 피해국민의 정서와 영혼을 모독한 일종의 범죄적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조선총독/이땅에서 저지른 온갖 만행 고발

    ◎가람기획,광복51주년 맞아 「조선총독 10인」 펴내/의병학살·토지수탈 등 죄목 낱낱이 밝혀/김삼웅·정운현씨 등 친일문제연구가 7인 공동집필 지난 6월 일본 문부성은 역사교과서 검정과정에서 『국가간 전후 보상문제는 완전 해결됐다』고 기술토록 저자들에게 요구했다고 한다.『위안부 문제 등은 그 후에 나온 개인적인 요구』라는 것이다.끝없는 침략전쟁 미화 발언·독도망언 등 일본의 이같은 역사몰각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그 후안무치함의 뿌리는 일단 그들의 극도로 이기적이고 편협한 애국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일본적 애국심(충성심)」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들의 죄상을 낱낱이 들춰낸 연구서 「조선총독 10인」(가람기획)이 최근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조선총독 10인」은 일제하 친일 반민족주의자들의 행적을 연구·조사,그 실태를 공개해온 친일문제연구회(회장 김삼웅)가 「일제잔재 19가지」「친일변절자 33인」「반민특위」「일제침략사 65장면」에 이어 펴낸 역사자료집.특히이 책은 광복 51주년을 맞은 오늘의 시점에서 광복의 의미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냉철하게 짚어보고,일본의 실체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선총독은 일제강점기 일왕의 대리권자로서 조선의 제반 통치행정을 책임졌던 장본인이자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처단 제1호」의 대상이었다.이들은 마치 식민지 이전의 조선국왕과 같은 지위를 누리며 행정·입법·사법·군사통수권까지 장악한채 조선을 포괄적으로 통치했다. 친일문제연구가 김삼웅·정운현,국사학자 조명철씨 등 7명이 공동 집필한 이 연구서는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에서부터 마지막(9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에 이르기까지 일제 조선통치의 최고책임자 10인의 행적을 더듬는다. 1905년 초대 조선통감에 부임해 1909년까지 4년여동안 통치한 이토는 제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며 의병학살·토지수탈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그는 경운궁의 호칭을 덕수궁으로 고쳐 이곳에 고종을 유폐하고,순종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창덕궁에 안치시켰다.또 고종이 귀여워한 왕자 은을 인질로 일본에 끌어가기도 했다.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만행 또한 이토에 못지않다.데라우치는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는 데 중추세력을 이뤘던 조슈 번(장주번) 군벌을 계승한 대표적인 무사였다.1910년 10월 초대총독이 된 데라우치는 무사출신답게 헌병경찰제도와 조선주차군을 도구삼아 무단정치를 강행,조선인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흔들었다.그는 통감부시대의 각종 악법위에 다시 조선민사령,조선형사령,조선보안법,조선태형령,범죄즉결례 등을 제정해 조선인의 민족운동을 압살했다. 1916년 조선에 온 제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의병운동과 3·1운동을 무차별 탄압해 결국 1919년 총독직에서 물러났으며,이어 제3대 총독에 오른 사이토 마코토는 이른바 「문화정치」로 포장된 강압통치로 우리 문화를 말살하고 민족을 분열시켰다.이와 관련,김익한씨(배재대 강사)는 『사이토 총독이야말로 일본사회의 「혼네」(속마음)·「다테마에」(겉으로 나타내는 표현방식)구조를 전형적으로 체현한 인물』이라며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도 현상적 「다테마에」의 측면보다는 「혼네」의 측면이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밖에 이 책은 황민화정책을 통해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 위해 광분한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태평양전쟁 개전이후 조선을 「결전체제」로 끌어올려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한 제8대 고이소 구니아키 등의 만행에 대해서도 소상히 밝힌다. 일제시대사 특히 일제침략사는 조선총독에 대한 연구를 빼놓고는 첫 장을 써나갈 수도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는 거의 「백지상태」인 형편이다.이같은 반성에서부터 비롯된 「조선총독 10인」은 독립운동사연구에만 매달릴 뿐,정작 침략원흉에 대한 인물연구를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 역사학계에 보내는 하나의 경종이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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